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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리:하(서울 6백년 만상:17)

    ◎80년대 유행창조 압구정로시대 개막/고급 의류상가 밀집… 젊은층문화 선도/대학로 문화예술거리­이태원 환락가로 서울의 역사를 거리기준으로 본다면 정도이후 구한말까지가 종로시대였고 해방후 80년대 중반까지는 명동시대,그 이후는 강남의 압구정로시대로 크게 나눌수 있다. 종로는 1894년 갑오경장이후 외국의 값싼 상품이 밀려오면서 구역별로 기능을 떠맡는 거리분화현상이 일어난다.관청가인 육조앞거리(세종로)와 상업가인 종로가 T자로 교차하는 청진동일대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관리들에게 향응을 베풀면서 이른바 요정이 들어서며 고급 환락가가 형성된다.고급 환락가 뒤편 골목길에 있던 목로주점들은 서민들이나 하급관리들이 즐겨 찾으면서 「해장국집」으로 변신,오늘날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씨앗을 싹틔웠다.종각앞에는 근대 백화점의 효시인 화신·신신백화점이 86년까지 자리잡았다.종로 2가의 명물은 역시 1908년 처음 3층높이로 세워진 YMCA건물.6·25때 불에 타 67년 지금의 8층건물로 재건된 YMCA를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많이 몰려 자연스레 학원가가 형성됐고 서점들도 뒤따라 문을 열었다.그러나 종로2가의 학원가 명성은 80년 7월 과외및 재학생학원수강 금지조치가 발표되면서 빛을 잃고 남아 있는 몇몇의 대형서점만이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탑골공원에서 종로3가까지의 뒷골목은 조선시대부터 색주가로 널리 알려졌다.이곳 창기들의 반일 성향이 짙은 탓에 항일운동가들의 단골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이른바 「종삼」은 68년 시행된 종로정비사업으로 5백74년의 오명에 종지부를 찍게됐고 그 이후 종로는 제1의 상권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됐다. 종로시대에 이어 진고개로 통하던 명동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이곳은 구한말까지만해도 권문세도가들이 거주하던 북촌과는 대조적으로 몰락한 양반이나 벼슬길이 막힌 선비들의 삶의 터전이었다.토착민들의 세가 약한 탓에 늘 외세에 시달렸다.임오군란이후 청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공략했고 한일합방이후 일본인들도 그랬다.일본상인들은 명치정이라고 지명까지 바꿔 상권을 형성해갔다.특히 1912년 한국은행자리의 조선은행을 필두로 저축은행(구 제일은행본점),조선신탁은행(구 한일은행본점)이,26년에 조선호텔,34년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삼월백화점등이 잇따라 세워져 명동가가 활기를 띠었다. 시인,소설가,가수,배우등 문화·예술인들이 명동의 충무로일대를 드나들어 훗날 영화의 메카로서 충무로의 명성은 시작됐다.예술·유행의 메카로 그리고 금융가로서 하루 1백50만명이상의 인파가 출렁거렸던 명동도 70년중반이후 강남개발붐에 힘을 잃었다. 강남개발붐이 낳은 대표적인 거리는 압구정로로 부와 유행,소비의 최첨단지대로 부상한다.특히 「오렌지족」이라는 부유층 자녀들이 몰려 다른 지역과는 전혀 이색적인 젊은이 풍속도를 그려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국내 패션유행을 이끌어가는 로데오거리도 눈길을 끈다.갤러리아백화점 사거리에서 강남구청까지 3백m의 가로변으로 미국 베벌리 힐스의 세계적인 패션거리 「로데오 드라이브」를 본떠 붙여진 이름이다.세조때 한명회가 갈매기를 벗삼아 한가롭게 노닐던 땅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것이 고작 75년이고 보면 상전벽해라는 고사성어가 새삼 실감난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동네거리에 이르는 1.1㎞의 대학로는 젊은이들의 무대이다.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단체및 시설들이 대거 들어서자 서울시가 85년 5월 젊음의 거리로 조성했다.무대공연,전시회,연주회가 끊이질 않는 대학로는 옛 정취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문화예술의 메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태원도 6백년 애환이 깃든 거리중 하나다.콜터장군 동상이 서 있던 반포로4거리에서 옛 한남동 면허시험장에 이르는 1.4㎞의 이 거리는 62년 직업군인출신인 황모씨가 「세븐클럽」이라는 미군전용 술집을 열면서 비롯됐다.70년대 미8군 121후송병원이 미8군영내로 옮겨오면서 유흥음식점외에 의류상등 1천2백여곳의 상가가 들어섯으며 88년에는 상가수가 1천8백여곳에 이르는 전성기를 맞는다.압구정일대가 제1의 거리가 될것이라고 아무도 알수 없었듯 압구정이 언제 또 서울의 제1거리 자리에서 물러설지 모를 일이다.
  • “친일파 묻힌 애국자묘역 싫다”/국립묘지 안장 조경한선생 유언

    ◎25일 효창공원 구정묘역에 이장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안장됐던 임시정부 국무위원 백강 조경한선생의 유택이 오는 25일 임정요인 묘역으로 이장된다. 미망인 최운영여사(79)등 유족들과 국가보훈처가 추진하는 묘지이장은 백강선생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선생은 지난해 1월 타계하기전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혀있는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며『백범 김구선생이 모셔진 효창공원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고인의 유언과 유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의전절차에 따라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안장됐다. 유족들과 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그뒤 각계에 청원을 내 효창공원으로 이장을 추진했으나 관계당국이 난색을 보여오다 지난해 8월 박은식선생등 임정요인의 유해가 봉환되면서 임정요인묘역이 마련되자 국가보훈처가 『선생의 유택을 이곳으로 모시자』고 유족들을 설득해 이장이 성사된 것이다. 1900년 전남 승주에서 태어난 백강선생은 24세때 중국으로 망명,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항일무력투쟁에 참가하다 43년부터 임정 국무위원으로 일했다.
  • 한용운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3·1운동 주도한 저항시인/불교대표로 참여… 선언문 배포 지휘/출옥후 신간회·비밀결사 만당 결성/「님의 침묵」등 시 3백편·소설 「죽음」「흑풍」 남겨 만해 한용운선생(1879∼1944)은 토지·조세·신분문제등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에서 민란의 불길이 일던 봉건왕조말기에 태어났다.선생은 청년시절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동학혁명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24세때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끝에 출가했다. ○동학혁명에 가담 입산한 지 10년만인 1913년 선생은 자유·평등사상에 기초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부패가 만연한 당시의 불교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선생은 이 유신론에서 번잡한 각종 의식을 없애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자는 혁신적 주장을 펼쳤다. 선생은 같은해 10월 친일승들이 모여 한국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을 통합하자 이를 친일매불행위로 규정한 뒤 승광사에서 전국승려궐기대회를 열고 임제종을 창립,큰 호응을 얻어냈다. 선생은 이후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현대적으로 정리,불교대전을 펴냈으며 처음으로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계몽활동에 뛰어들었다.당시 지식인으로 명망이 높던 최린·최남선·현상윤등도 이 잡지발간에 적극참여,암울한 식민무단통치시대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횃불역할을 했다.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부터다. 3·1운동에 초기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선생은 당시 유림과 불교계의 포섭을 맡았다.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 뒤 독립선언 하루전인 2월28일에는 독립선언문 3천장을 인쇄소인 보성사사장 이종일로부터 넘겨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전달,다음날인 3월1일 시내에 배포하도록 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에 대해서는 선생이 지은 독립선언서를 수정해 삽입했다는 설과 최남선이 작성했다는 설이 나누어 있다. ○옥중에서도 태연 1919년 3월1일 하오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해 독립운동의 서막을 열었다.선생은 이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게 돼 책임이 막중하다』며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변호사를 대지 말고 사식과 보석을 요구하지 않는등 당당한 대응을 하자고 행동강령을 제시했다.민족대표들은 모임이 끝나자마자 일경에 모두 체포됐으며 선생은 옥중에서도 수도승답게 태연한 모습을 지켰다. 선생은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논설을 통해 『자유·평등·평화는 민족의 자존과 세계평화로 이어지는 대강령이며 이번의 조선독립선언은 국가를 창설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때 치욕을 겪고 있는 고유의 독립국이 다시 복구되는 것임』을 설명했다. 3년여 옥고를 마치고 가출옥한 선생은 청년교육과 훈련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1924년 불교청년회회장으로 취임,대중불교건설에 앞장섰으며 「유심」등 신문잡지를 통해 『청년들에게 역경은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며 『이 땅의 젊은이들은 나라가 없다고 좌절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선생은 1927년 좌우합작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결성에 참가했으나 2년 뒤 이 단체가 광주학생의거 진상보고민중대회를 가지려다강제해산됨에 따라 1930년 청년불교도들이 결성한 비밀항일독립운동단체인 만당의 당수로 취임,와해되기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학설립 수포로 이와 함께 1926년 이상재·이승훈·조만식선생등 30여명과 조선민립대학설립 기성회를 구성,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일제가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경성제대를 설립하는 바람에 대학설립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국문학사에서 3·1운동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꼽히는 선생은 1926년 발간한 「님의 침묵」에 모두 3백여편의 시를 실었다.또 소설로는 「죽음」「흑풍」「철혈미인」「박명」등을 남겼다. 선생이 시와 소설에서 쓴 「님」은 일제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55세인 1933년 재혼한 선생은 방응모등의 후원으로 성북동에 심오장이란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집을 지을 때 사람들이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했으나 마주보이는 총독부건물이 보기 싫다고 끝내 북향으로 집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변절자 면담거부 선생은 뜻을 끝까지 같이 한 동지에 대해서는 깊은 의리를 간직했으나 변절자에게는 단호히 단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만주에서 대한통의부총장을 역임한 김동삼선생이 일경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시고 5일장을 치르며 눈물을 아끼지 않았으나 3·1운동당시 동지이던 최린이 변절,창씨개명을 하고 믿아오자 끝내 만나지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조선 전국이 감옥이라고 여긴 선생은 추운 겨울에도 심우장 냉방에서 꼿꼿이 앉아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족이 배출한 위대한 시인이자 독립투사이며 여성해방론자이기도 한 선생은 44년6월 입적,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근대사의 여명기에 태어나 선각자적 삶을 통해 민족정신의 새벽을 연 선생에게 정부는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온천욕/“5∼20분씩” 하루 2회정도 바람직

    ◎온양·유성 등 관광겸 유적답사 코스로도 각광/고혈압·당뇨병환자 몸을 덥힌후 입욕/끝나면 물기는 닦지말고 말려야 좋아/공복·음주후는 피하고 현기증·구토땐 탕에서 나와야 학생들의 봄방학이 계속되고 화요일이 3·1절로 공휴일이 된다.모처럼 가족이 함께 쉴수 있는 이런때 따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면 추위는 물론 피로와 일상의 스트레스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 온천 주변에는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유적지등이나 전통민속마을등도 있어 교육의 시간으로 활용할수 있다.온천 요령및 온천을 겸해 가족이 가볼만한 나들이코스를 알아본다. ▷온천요령◁ 온천욕은 먼저 얼굴과 손발을 씻으면서 몸을 따뜻하게 한 다음 탕속에 들어가는게 순서이다. 특히 고혈압이나 당뇨병환자들은 갑자기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충격을 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여유있는 목욕법을 취해야 한다. 탕속에 머무르는 시간은 수온이 체온보다 휠씬 높아 뜨거울 경우는 5∼10분,미지근한 물에서는 15∼20분 정도가 알맞다.목욕 횟수도 보통하루에 1∼2회 정도가 바람직하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횟수를 이보다 늘려도 좋겠지만 그렇더라도 3∼4회를 넘기면 몸의 수분을 지나치게 빼앗기게 되고 피부건강에도 좋지 않다. 또 목욕이 끝난 뒤에는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말끔히 닦아내기보다는 20∼30분 정도 누워 안정을 취하면서 물기가 자연히 마르도록 하는게 온천욕의 요령이다. 공복이나 음주후 입욕은 되도록 피해야하며 목욕중 현기증이나 구토증세를 느낄 때는 즉시 탕에서 나와야한다. ■온양온천=섭씨54∼57도의 약알칼리성 라듐온천으로 유명하다.칼륨·나트륨·칼슘등을 함유,피부병·류머티즘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서울과 불과 1시간여거리인데다 인근에는 현충사·외암리 민속마을·온양민속박물관·독립기념관등이 있다. 온천후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정신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고취시킬수 있는 독립기념관을 역사공부삼아 찾아볼만하다.이 독립기념관에서부터 8㎞거리에 유관순기념 사당이 있어 더욱 뜻깊은 방문이 될수 있다.또 2만5천평규모로 꾸며진 온양민속박물관은 계몽사 김원대회장이 20년을모아온 자료로 만든곳으로 우리선조들의 생활상과 풍습을 알수 있다.외암리 민속마은 격조높은 옛조상들의 체취를 느끼게하는 곳이다. ■유성=알칼리성 라듐온천으로 나트륨·규산등이 풍부,위장과 피부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대전엑스포를 계기로 서울과 유성간 고속도로가 8차선으로 확장된데다 숙박시설이 정비돼 교통과 숙박측면에서 전국 제1의 휴양지로 손색이 없다. 인근에는 계룡산국립공원과 보문산공원등이 있어 산행을 즐길 수있고 1시간거리의 공주·부여등 백제문화 유적지를 모처럼 탐방하며 우리역사를 새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질수 있다. ■수안보=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30분정도가 소요되는등 전국 어느곳에서나 3∼4시간이면 갈수있고 근처에 스키장까지 있어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온천수는 섭씨 51∼53도의 무색·무취하고 매끄러운 유황라듐천으로 위장병·신경통·피부병등 치료에 효능이 있다.부근에 월악산·조령산과 문경새재·송계계곡·수옥정폭포등 수려한 관광지가 있어 산행을 곁들여도 좋겠다.인근에 보물 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 5층석탑등을 볼수 있다. ■덕산=충남 예산군,수덕사 가는 길목 매헌 윤봉길의사의 사당 사이 들판에 자리잡고 있는 덕산온천은 유일하게 충남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윤봉길의사는 19 32년 중국 상해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죽인 인물.윤의사 사당을 참배하고 섭씨52도의 수온에 온천을 하면서 피로를 풀수 있다.칼슘·나트륨·불소등이 고루 함유돼 신경통·류머티즘등 노인성 질병과 위장병·피부병등에 좋다는 소문이 나있다.덕산온천∼아산방조제∼온양온천 드라이브 코스도 좋고 수덕사∼태안해안국립공원∼예당저수지등으로도 연결된다. ■백암=수온 섭씨46도로 라듐이 많이 함유된 국내 유일의 알칼리성 방사성온천.8㎞떨어진 곳에 백암산(해발 1천4㎞)이 있어 겨울 산행도 즐길 수있고 성류굴·망향정·월송정등의 볼거리도 풍성하다. ■부곡=경남 창녕군의 국내최대 유황온천.섭씨 최고78도까지 올라가는 온천욕이 그만이다.유황외에 규소·칼슘·철분등 20여종의 무기질이 포함돼 호흡기및 피부질환에 특히 효험이 높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게다가 부곡하와이 등 주변의 위락시설이 잘 갖춰져 각종 레저를 함께 즐길 수있다.
  • 유출 문화재(외언내언)

    일제하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것을 안타까워한 간송 전형필선생(1906∼1962)은 「문화적 항일」의 방법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일본인에게 빼앗겨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재는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구입,전설적인 일화들을 남기기도 했는데 군수 월급이 70원이던 당시 거금 1만4천여원을 던져 일본인에게 경매되기 직전의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보물 241호)을 사들인것이 그 한 예.백석지기만 되어도 부자 소리를 듣던 때 황해도 일대의 방대한 토지와 종로의 상권을 장악했던 선대의 유산 10만석을 그는 고미술품 수집에 고스란히 바쳤다. 그렇게 수집된 우리 문화재가 소장돼 있는 곳이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곳의 소장품중 「훈민정음」원본,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등 20여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소장품에 대한 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아 모두 몇점의 문화재가 이곳에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 질에 있어서 국립박물관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간송의 선각자적인 안목과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많은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됐다.해외 유출문화재의 약 60%가 일본에 있어 세계 15개국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 5만4천6백55건 가운데 일본에 3만1천2백23건이 있는것이다(문화재관리국 집계).그러나 이는 박물관등 공개된 곳에 전시된 것만을 밝힌 공식집계일뿐 개인소장품등까지 합한다면 6만건도 넘을것으로 추정된다. 청와대의 한 당국자가 일본의 대중예술시장 개방과 관련,한국문화재 반환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일본대중예술과 한국문화재의 관계가 어떻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다시 찾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그리스 문화상 멜리나 메르쿠리처럼 문화재 반환을 위한 끈질긴 외교활동을 펴는 한편 민간차원에서도 간송의 대를 잇는 우리 문화재의 역수입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그를 위한 행정지원도 물론 있어야 한다.
  • 식량난 심화로 주민들 대용식품 개발붐(북한 이모저모)

    ◎「민족과 운명」 고박대통령역 김윤홍 인기 ○지게미밥·송기떡 등 ○…북한의 식량난이 갈수록 심각해 짐에 따라 북한주민들은 자구책으로 ▲강냉이쌀겨죽 ▲지게미 밥 ▲송기떡 ▲배죽 등 「대용식품」을 만들어 먹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대용식품은 배급된 강냉이와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모든 재료를 혼합해 만든 것으로 강냉이겨죽은 강냉이 쌀을 만들고 난 껍질(겨)을 볶은 뒤 절구에 찧어 물에 쑨 죽인데 역겨운 냄새가 나 먹기가 고통스러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지게미밥은 옥수수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지게미)에 한두줌 쌀을 넣어 지은 밥으로 기름성분이 많아 대용식품으로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구하기가 무척 힘든 실정이다. ○북 태권도 특집방송 ○…최근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총재 최흥희)이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에 태권도기구 단일화를 제의해 관심을 끌고 있는 가운데 대남전용 평양방송이 23일 북한에서 행해지고 있는 태권도를 상세히 소개. 평양방송은 이날 「조선의 태권도」라는제목의 특집프로에서 태권도가 『고구려 시기부터 전해온 격술인 택견과 수박치기를 바탕으로한 민족문화유산의 귀중한 재부로서 인민의 커다란 자랑과 긍지로 되고있다』면서 북한의 태권도가 경기실천에 응용되는 기본동작(3천2백여가지)을 비롯해 틀·맞서기·위력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소개했다. ○60년 북송된 영화배우 ○…북한이 최근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고 있는 극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고 박정희대통령 역을 맡은 김윤홍이 주연배우 못지않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최근호가 보도. 올해 48세인 김윤홍은 일본에서 고아로 자라났으나 예술에 남다른 호기심을 갖고 있었으며 지난 60년 북송선에 올라 북한에 정착했는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양성반을 졸업하고 69년 처음으로 극영화 「중대의 누나」에 단역(항일유격대원)으로 출연하게 됐다고 이 신문은 소개. ○효모사료개발 성공 ○…북한은 최근 식료품공장에서 나오는 폐설물을 이용,새로운 효모사료를 개발했다고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최근호가 보도. 평양 곡산공장 공업시험소와 경공업과학원 강냉이가공연구소의 과학자·기술자들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효모사료는 비타민·호르몬효소·인칼슘 등과 미량원소들이 들어 있어 가축들의 소화흡수를 도와주며 비육시간도 단축시키고 폐사율을 낮추는 한편 우유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 한미무역통계 서로 “적자”/수출입가격 기준달라 마찰 소지

    ◎92년 양국 수지통계 22억불 격차 한미양국의 서로 다른 무역통계가 통상마찰의 불씨가 돼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우리가 대미교역에서 적자를 보는데도 미국은 오히려 자기네가 적자라며 시장개방 등 수입을 늘릴 것을 요구하기 일쑤였다.92년만해도 우리 통계로는 대미교역에서 1억9천만달러의 적자를 냈지만 미통계로는 자신들이 20억6천만달러의 적자이다.양국간 수출입액을 각자가 따로 계산한 결과 22억5천만달러의 착오가 생긴 셈이다.지난해(1∼10월)에도 우리 통계론 대미흑자가 3억5천만달러이나 미국은 대한교역 적자가 21억달러나 된다고 발표했다. 양국간의 이러한 통계차는 해마다 발생한다.수출입실적을 계산하는 시기와 수출입가격기준,통계지역,계상범위의 차이때문이다. 우리는 수출입이 모두 승인시점인 면허일 기준이다.미국의 경우 수출은 출항일,수입은 면허일 기준으로 달리 집계한다.우리는 수출가격을 본선인도가격(FOB)으로,수입가격을 FOB에 운임과 보험료를 포함한 CIF(운임보험료 포함가격)로 계산하지만 미국은 FOB에서 선적비용을 뺀 선측인도가격(FAS)을 수출 및 수입가격으로 잡는다. 빈(공)컨테이너수출도 우리는 계산하지만 미국은 물건이 담겨져 다시 수출된다는 이유로 계산하지 않는다.수리를 위한 수·출입이나 재수출도 우리는 실적으로 집계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수출·수입에서 우리 통계치가 항상 미국보다 높게 나타난다.운임·보험료가 수입액에 포함됨으로써 수입통계는 사실보다 훨씬 더 커진다. 미국을 제외한 일본·영국·프랑스나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모두 수출은 FOB,수입은 CIF로 기준을 삼는다. 관세청은 한때 미세관과 통계차이의 조정을 시도했지만 양국의 통계가 독특한 제도아래 오랫동안 관행화된데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맞추기 어려워 묘안을 찾지 못했다.
  • 육사 이원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하 17차례 옥고치른 저항시인/의열단 가입,조선은행 폭탄투척 등 주동/32세에 첫시 발표… 민족의식 고취 앞장/첫 수감번호 64를 호로… 40세 옥사 「어데다 무릎을 꾸려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절정에서) 육사 이원록선생은 절정·광야등 저항시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민족시인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이다. 최초 일제에 체포됐을 당시 수감번호 64의 음을 따 아호를 지음으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채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일생을 바쳤다. 육사는 1904년4월4일 5형제중 2남으로 태어나 41세인 1944년1월16일 북경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무려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손인 육사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에서 아버지 이가호씨와 어머니 허길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다. 그는 1921년 18세때 경북 영천의 안일양씨와 결혼,영천의 백학서원에서 공부하다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2년뒤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도쿄 소재 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1925년 귀국했다. 선생은 이어 형 원기,동생 원유씨와 함께 항일 무장투쟁 결사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은 1927년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장 앞으로 벌꿀을 위장한 폭탄 상자를 보내 일경 5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을 일으켰다. 선생은 이 사건 발생 직후 형제와 함께 일경에 주동자로 지목돼 체포돼 쇠꼬챙이로 지지기,대꼬챙이로 손가락 사이 훑기,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붓기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겪은 뒤 대구지방법원에 기소됐으며 수감번호는 64였다. 2년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선생은 출옥후 의열단원 윤세주씨가 운영하고 있던 중외일보 기자로 일하며 청년지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중 1929년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또 다시 예비검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1931년1월21일 동생과 대구경찰서에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는 대구에서 반제 배일 격문이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으며 선생은 격문 작성자 또는 비밀결사 혐의를 받은 것이다. 선생은 3개월만에 출소하자 중국 북경으로 탈출,심양에서 김두봉의열단장을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고 귀국했다. 육사는 1932년6월 북경으로 가 중국의 대문호 노신과 교유,나중에 노신의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뛰어 들기로 하고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에 입학했다. 이 훈련반은 김두봉단장이 황포군관학교 재학 당시 장개석총통에게 부탁해 한국청년의 군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남경에 설립된 군관학교이다. 선생은 이 학교 정치조에 소속돼 6개월 동안 비밀통신·선전방법·폭동공작·폭파방법등 게릴라훈련을 받고 1933년5월15일 귀국했다. 선생은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국내 민족의식 환기,혁명사상 조성과 국내정세 파악등의 비밀 임무를 띠고 상해·안동·신의주를 거쳐 입국한 것이다. 선생은 이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던중 1934년5월22일 서울에서 경기경찰에 피체돼 한달만에 기소유예조치로 석방됐으나 이미 건강이 매우 상한 상황이었다. 선생은 그래서 당시 진로를 놓고 크게 인간적 고뇌와 갈등에 휩싸이게 됐다. 과연 의열단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대열에서 벗어나 은둔할 것인가. 선생은 결국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글과 시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같이 결정한 선생은 바로 북경으로 가 문인으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이후 선생은 정치·사회분야에서 폭넓은 작품활동을 전개,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중국 청방비사 소고」등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는 시를 발표,시인으로 등장했다. 또 해조사·노정기·질투의 반군성·무희의 봄을 믿아서등 산문을 내기도 했으며 꾸준히 평론과 수필을 발표했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남한산성·청포도등 주옥같은 시를 썼으며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시나리오 문학의 특징등의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문장 냉광등 잡지에 선보였다. 1941년 선생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으나 파초·독백·자야곡등의 시를 지었으며 연인기·산사기·중국현대시의 일단면등 수필도 짬짬이 썼다. 1942년에는 사실상 유고인 광야를 발표했다. 그러던 선생은 귀국한지 두달만인 1943년7월 갑자기 서울동대문경찰서에 연행돼 북경으로 이송됐다. 그가 무슨 영문으로 체포됐는지 조차 몰랐던 가족들은 돌연 1944년1월6일 「북경감옥에서 사망했으니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보를 받고 깜짝놀라 북경으로 달려갔다. 북경주재 일제영사관은 선생의 유해를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담은 조그만 상자를 내줄 뿐이었다. 선생은 병마와 싸우며 죽는 순간까지도 많은 작품을 써내 이 민족에게 빛을 던져준 민족시인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83년 문화훈장 금관장을 추서했다.
  • 재미독립유공 7인묘소 확인/정한경선생 유해 연내 봉환추진

    국가보훈처는 5일 임정 구미위원부 위원을 지내는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정한경선생의 유해안치 장소가 새로 확인됨에 따라 올해안으로 국내봉환을 추진키로 했다. 보훈처의 해외독립운동사료 수집반은 정한경선생의 유해를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시에 거주하는 미국인 부인인 조나여사가 모시고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이와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된 신한민보의 주필을 역임한 백일규선생과 홍언 한시대 송종익 김혜원, 시주 선생등에 대한 독립운동기록과 이들이 앤젤루스 로스달 공원묘지에 안치돼 있다는 사실도 새로 확인했다. 또 미주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최정익 이대위 문량목선생등 30여명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도 새로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보훈처는 이번에 확인된 독립운동가들을 서훈심사 대상에 포함시키는 한편 유해봉환도 추진하기로 했다.
  • 청봉체/글자체의 한 형태… 1호∼4호체 4종류(북한백과)

    ◎김일성 빨치산활동한곳 이름 따 명명 북한의 출판분야에서 사용하는 글자체의 한 형태.「청봉」이라는 말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활동을 선전하기 위해 양강도 삼지연군 이명수 노동자구에 조성해 놓은 「청봉밀영(숙영)지」에서 따왔다. 1호체부터 4호체까지 4종류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청봉체」라고 하면 「청봉1호체」를 지칭한다. 청봉1호체는 붓글씨를 원형으로 한 고전적인 바른글씨체로 제목이나 본문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2호체는 붓글씨를 원형으로 하되 이를 우아하게 다듬은 글씨체로 주로 문예물이나 교양기사의 제목에 사용되고 있다. 청봉3호체는 바른글씨체를 약간 흘려 쓴 반흘림체로 힘있고 깨끗한 느낌을 주며 주로 정론·문예물 등의 제목에 사용되고 있다.4호체는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가 같으며 형태는 장방형이다.획의 시작과 끝이 예리하며 구김새없는 느낌을 주는데 부제목이나 토막기사 제목에 사용되고 있다.
  • 광복군 대일 심리전 전단 발굴

    ◎박기성교수 미고문서관서… 「한국학보」서 게재/한국어·일군 휘유위한 일어 격문/중국과 인도·동남아 전선에 살포 2차대전 당시 한국광복군의 일본군에 대한 적극적 항전을 입증해주는 심이전 전단이 발굴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계간학술지「한국학보」 1993년 겨울호에 서울대 신용하교수의 해제와 함께 실린 이 전단은 경북대 박기성교수가 미국 위싱턴의 고문서관에 수장되어 있는 것을 최근 찾아낸 것.총사령부가 중국전선에서 살포한 것과 한국심리전 공작대가 인도·동남아전선에서 영국군과 합작하여 살포한 것등 두가지이다. 중국전선에 살포한 전단은 조선청년들에게 호소하는 한국어격문과 일본군병사들을 회유하기 위한 일본어격문등 2개국어로 씌어있다.또 미얀마·안남전선에 뿌린 것은 한국어와 일본어,미얀마어,안남어등 4개국어로 되어 있다. 중국전선의 전단은 학병등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에게는 「조선동포들에게」라는 제목 아래 「…왜적의 강압하에서 사선으로 나온 조선청년들이여.제군은 야만적 강도 왜적을 위하여 가치없는 육탄이 되어서는 안된다.조선독립의 기회는 왔다.…반전 태업 파괴 암살 등으로 왜적을 타도하자.조선의 청년아.3·1혁명정신을 부활하자.전조선에서 조직적 대혁명을 일으키자」고 격려하고 있다.또 일본병사들에게는 「제군은 일본군벌의 침략전쟁의 육탄이 되어서 무엇을 위하여 또는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 것인가.제군의 부모 형제 처자는 기한 속에서 울면서 제군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제군이 우물쭈물하고 있으면…일본군벌은 제군의 몸을 유골재상자에 넣어 고향에 보낼 것이다.…일본의 병사여.제군은 단결하여 일본군벌을 타도하여 일본민중을 구하는 것이 실로 일본을 사랑하는 것이다.군벌의 명령을 지키지 말라.반전투사를 지지하라.일본군벌의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군벌을 타도하라.혁명을 일으키라」고 부추기고 있다. 이 전단의 한편에는 삽화를 담아 「제십삼화장장」이라는 표시 아래 일본군의 시체와 대판행·동경행이라는 표시와 함께 열차에 넘치게 실려가는 유골재상자 더미위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본의 병사」라는 글자를적어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 미얀마·안남전선에 뿌려진 전단도 조선인들에게 「왜적은 이 침략전쟁에서 반드시 망한다」며 「용감하고 기묘한 방법으로 동맹군 우군과 합작하여 총부리를 왜적들에게 돌려 혁명전을 개시하자」고 적었다.또 일본군에게도 「제군의 적은 우리 동맹국이 아니라 일본군벌」이라며 「일본군벌을 타도하라」고 호소하는등 중국전선의 전단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교수에 따르면 1940년9월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무장력으로 창설된 광복군은 항일전선에서의 맹렬한 선전전·심리전 활동이 연합국 참모들에게 높이 평가된 결과 심리전 공작대를 19 43년8월 인도·안남전선에 파견했다.광복군은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전구사령부와의 협정에 따라 인도 최전선인 임팔에서 대적방송과 적문서번역,심리전 전단 작성,포로신문등의 활동을 전개해 큰 성과를 냈고 이에 주목한 주중국 미군 전략정보처도 합작을 추진,이같은 전단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신교수는 『광복군의 심리전 전단이 남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면서 『독립운동사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이 전단의 발굴을 반가워했다.
  • 후앙,파리근교 아파트서 목격/수사당국 소재파악에 초점

    ◎“동거녀도” 주민들 진술… 프랑스귀국 확인/주광용씨 홍콩·불등 거론속 미국행 유력 국방부 무기사기사건의 핵심인물인 주광용씨와 프랑스인 장 르네 후앙씨는 어디 있을까. 현재 수사당국과 세간의 관심은 이번 사건의 전모와 배후를 파헤칠 핵심열쇠인 이들의 행방에 온통 쏠려 있다. 주씨는 일단 출국 당시 최종목적지로 신고한 미국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큰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씨가 해외로 도주하기 얼마전 미국 뉴욕으로 수차례에 걸쳐 장시간 국제전화를 통화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주씨는 무기사기사건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지난 15일 하오 일본항공 952편으로 출국한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 출입국 관리카드에 기재된 주씨의 최종 목적지는 미국.그러나 주씨의 과거 행적으로 미루어 문제의 프랑스인 무기상 후앙씨가 살고있는 프랑스 파리나,거래회사 에피코사의 지시가 있는 홍콩 등으로의 제3국 도피 가능성이 유력시돼왔다.특히 주씨가 최근까지 홍콩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홍콩을 도피처로 잡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가장 우세했다. 여기에는 주씨가 미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다는 점과 범인인도협정이 체결돼 있어 수사망이 뻗쳐질 미국을 도피처로 택할리 없다는 분석이 작용했다. 그러나 주씨가 일찍부터 행방 감추기에 급급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빗나간 예상일수도 있다.주씨는 18년째 별거해온 것으로 알려진 부인 김모씨(50)와 77년 8월 합의이혼한후 같은해 9월 다시 혼인신고했다.김씨의 거처를 자신의 주민등록지로 사용한 주씨는 80년대이후 꽤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가족들을 강남일대에 사글세로 1년에도 1∼2차례씩 옮겨다니게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또 주씨와 친하게 지낸 무기중개상들 역시 주씨의 학력·가족사항 등 사생활 등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이런 점들로 미뤄 주씨는 평소 자신이 자주 다니던 곳을 피해 남들이 연고가 없는 곳으로 알고있는 미국을 도피처로 택했을 것이란 예측이다. 주씨와 함께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고있는 프랑스의 무기중개상 장 르네 후앙씨는 최근 프랑스로 귀국,파리 근교의 한 아파트에 머물고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후앙씨는 파리의 서쪽인 불로뉴 비앙쿠르 지역 플라스 코르네이유1에 있는 아파트에서 동거녀로 알려진 30대 초반의 고메스 여인과 함께 지내고 있음이 목격됐다. 이웃 주민들에 따르면 2년전부터 고메스여인의 명의인 이 아파트에서 살아온 후앙씨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최근 여자와 같이 승용차를 타고 외출을 하는 등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한편 후앙씨는 재불항일독립운동가였던 고 홍재하씨의 아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배재학당에 다녔던 홍씨는 의용대에 투신했다가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한뒤 21년 프랑스로 가 동료 10여명과 항일투쟁을 벌이다 해방후 귀국하지 않고 60년 파리 근교에서 사망했다. 홍씨는 63년 사망한 프랑스 여인 마리 루이스 듀가와 26년 결혼,2남3녀를 두었으며 후앙씨는 그중 넷째이며 장남인 것으로 알려졌다.
  • 새 내각의 초점은 「경제팀」(사설)

    오는 20일로 예고된 대폭적인 당정개편내용 가운데 특히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새 경제팀에 관한 사항일 것이다.더욱이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타결의 후속대책으로 청와대에 경제수석비서관과는 별도로 농수산담당 수석비서관을 신설키로 한 방침은 농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들에게 큰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새 경제팀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은 까닭은 앞으로 우리의 살길이 개방화·국제화를 어떻게 추진해 나가느냐에 달려있으며 이는 대부분 경제팀의 몫이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이 등장할 경제팀은 그 어느때보다 막중한 책무를 지게 될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자질과 경륜을 겸비해야 할 것이다. 경쟁력을 갖춘 국가만이 살아 남아서 국부증대를 꾀할 수 있는 냉혹한 무한경쟁시대에 걸맞는 인사들로 팀이 짜여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과거처럼 우물안 개구리식 또는 냄비식 발상에 따라 하면된다는 강성논리만으로 무턱대고 밀어붙이던 대외지향의 발전전략으론 더이상 국제경제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이제 새 경제팀은 개도국들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국제무역환경이 오직 적자만 생존할 수 있는 정글로 빠르게 바뀌고 있음을 거듭 인식해서 치밀한 전략 전술의 운용으로 국가경제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것이다.급변하는 국제경제사회의 큰 흐름을 제대로 정확히 파악하고 순발력있게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는 제2의 경제도약을 성공적으로 이뤄갈수 없는 것이다. 또 새 팀은 개방화의 거센 물결을 헤쳐나가는 국제감각의 바탕에서 우리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행정규제를 완화해야 할 것이다.과거의 예에서 수없이 보아왔듯 무리한 관주도는 신축성을 갖고 실기함 없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적응해야 할 경제를 경직되게 할 뿐이다.새 경제팀은 이러한 업무수행능력 이외에 정책결정에 관한한 합리적인 소신을 갖고 개혁의지를 발휘함으로써 개방·개혁·경제활성화의 개념이 동질의 것임을 입증하는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어떠한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경제구조에서 부정·부패나 비능률·비합리적 요소들을 척결하는 개혁이 이뤄짐 없이는 합리적 사고와 창의력이 존중되는 선진국 경제와의 싸움에서 이길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함께 농수산수석이 실의와 좌절을 겪고 있는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어 선진농업국의 꿈을 실현시키는 사령탑이 되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또 김영삼대통령이 당초 UR에 대비,농수산특보를 두겠다던 대선공약에서 한단계 높여 수석비서관을 신설하는 데서 그의 농업립국 의지를 확실히 읽을 수 있음도 강조하고 싶다.
  • 대마도의 수선사(일본속의 한국문화:10)

    ◎“항일의병의 거유” 최익현선생 순국지/영정 지금도 모셔 한국인관광객 잦은 발길/만관운하 개설… 대륙침략의 전진기지 삼아 임진왜란은 대마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나 일제침략은 대마도와 무관하지 않다.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국교정상화에도 대마도가 깊이 개입하여 2백년간에 걸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기술한바 있다.도대체 대마도주가 만든 가짜 침략사죄문서를 가지고 만족해 버린 당시의 조선정부가 잘못이었다.겉으로는 성신교련을 내세웠으나 속으로는 제각기 다른 뜻을 품고 있었으니 결국은 일제재침으로 이어질수밖에 없었다. 대마도에는 일제침략사의 생생한 자리 방캉세토(만관뢰호)라는 인공운하와 이에 항거한 최익현선생의 순국지 수선사가 남아 있다.대마도는 19세기말 20세기초의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기에 대한침략의 전진기지로 둔갑하게 되는데 특히 일본해군의 전초기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그래서 아사마(천이)만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는데 지금도 해상자위대가 자리잡고 있는 죽부(다케후키)라는 항구가 그것이다.이 항구는 한가지 큰 흠을 갖고 있었으니 한국쪽으로만 바다가 열려있고 일본쪽으로는 육지로 가려있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인공운하를 파기로 했다.이곳이 바로 대마도가 자랑하는 만관뢰호요 그 위에 걸린 다리가 만관교다.보기에는 매우 아름답다.그러나 그 어두운 과거때문에 우리 눈에는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이 운하는 1900년에 개통되고 1905년 일본함대가 러시아극동함대를 격파할때 큰 공을 세웠다. ○1904년에 개통 또 이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일본 구주의 나가사키(장기)와 우리나라 진해를 우회하지 않고 직선으로 잇는 항로가 개설되었다.그러니 이 운하에 얽힌 모든 과거사가 불쾌하기만 하다. 이 운하가 개통된 해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약된 바로 그해였다.을사조약이 늑약되자 많은 유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면암 최익현이었다. 최익현은 호남에서 거사하였는데 관군토벌대가 들이닥치자 동주끼리 싸울수 없다 하여 자진 해산하고 체포되었다.최익현은 그의 한마디로 대원군까지 실각시킨 당대 제일의 거유였기 때문에 일제는 간교하게도 유배지를 대마도로 정하고 이곳 이즈하라(엄원)에 유패시켰다. 최익현이 이곳에서 식음을 전폐한뒤 순국하게 되는데 그가 마시던 우물이 남아 있을뿐 유폐되었던 건물은 철거되어 없다.그대신 그의 시신이 잠깐 머물다가 떠난 수선사라는 작은 절이 남아있고 최근 경내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가 있어 이곳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필자는 이 수선사를 두번 가보았다.몇년전 처음 찾아갔을때 이 절의 주지(주지라고 해야 자기 혼자서 지키는 절이다.물론 대처승이다)가 공손히 인사하면서 이 절에 귀중한 보물이 있다고 말했다.보니 아주 작은 청동불상이었다.신라불이라는 것이다.금년 여름에 두번째로 방문했을때에도 역시 그 보물을 내보였다.그래서 그가 필자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모든 한국방문객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바닥에 들 정도로 아주 작은 부처님.확실히 우리나라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 수선사 주지손에 넘어왔는지 아무도 모르며 또 그것을 보여주면서 이 절이 한국과 수천년의 관계를 맺어온것처럼 내색하는 저의 또한 아리송했다.그러나 얼마뒤 그 저의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번의 수선사 방문은 근 50명에 이르는 적지 않은 규모여서 비좁은 수선사 경내가 가득찼다.사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일본땅에 순국비를 세우도록 허락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모두 법당에 들어가서 절을 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언제 갖다 놓았는지 최익현선생 영정이 놓여져 있었다.예전에는 미처 못보던 것이다.일행은 한층 더 감동해서 영정앞에 절을 하고 성금을 거두어 바쳤다.그리고 모두가 이 절을 두고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였다.그날은 마침 배를 타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겉과 속다른 일본인 3박4일의 짧은 여정이었으나 대마도의 이모저모를 보고 떠나는 기분이 상쾌하였다.그렇게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대마도의 베일을 벗긴 기분.거기다 우리의 순국선열을 고이모시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듯한 대마도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떠나는 우리를 더없이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데 배를 타기직전 일행중의 한 학생이 수선사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해서 급히 달려갔다가 헐떡거리면서 돌아왔다.그러면서 들려주는 말은 갑자기 우리의 들뜬 가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수선사 법당에 내어 놓았던 최익현선생의 영정이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역시 그랬구나!』고 탄식하였다. 『겉과 속이 달라야 훌륭한 일본인』이라는 말의 참뜻을 배운 셈이 된 것이다. 필자는 젊은 학생들이 대마도에서 본 다른 모든 것을 합쳐도 이보다 더 귀한 교훈은 없었다고 생각했다.착잡한 생각과 그동안 정성을 갖고 안내에 힘써주신 영창구혜선생,그리고 아비창덕생씨에게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뒤엉키는 것을 느끼며 대마도를 떠났다.대마도는 다시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이 시점에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일은 아니나 깊이 새겨서 밝고 명랑한 미래사에 비출 필요는 있을 것이다.
  • 오동진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만주 15개독립단체 규합… 대일 항전/정의부 결성 주도… 독립운동 구심체로/미의원단 내한에 맞춰 일인요인 암살/체포된뒤 재판거부 33일간 단식… 44년 옥에서 숨져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에서 출생한 오동진선생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16일 고향인 광평면 시위에 참가,맹렬한 활동을 전개한 뒤 일경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3월18일 중국 관전현 안자구로 망명했다. ○평북 의주서 출생 선생은 이곳에서 윤하진 장덕진 박태렬등을 규합,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했으며 의용대를 편성 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같은해 5월 중국 안동(현 단동시)에 있는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기관을 설치하고 안동교통사무국을 두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관할했다. 1919년 12월 선생은 대한의용군사의회·한족회·기원독립단·민국독립단·대한청년단연합회등을 통합,서북간도지방의 교민 통치기관으로 임시정부 내무부 직속의 광복군 참리부와 군무부 직속의 군사기관으로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했으며 각 지방에는 군영을 두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6월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 탁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질적 군대로 광복군총영이 조직돼 사령관에 조맹선,참모부장에 이 탁,경리부장에 조병준이 임명되고 선생은 총영장이 되었다.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장총 2백40여정과 많은 탄약을 이륭양행을 통해 입수하고 항쟁준비를 위한 무장을 강화하고 있을 때 미국의회 동양시찰단인 모리스의원 등 상원의원 일행과 가족 70여명이 1920년 8월14일 서울에 입경 예정이라는 정보를 얻게 된다.광복군 총영에서는 이 호기를 이용,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국내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하며 침략원흉과 일제관리등을 처단하기로 했다.1920년 7월 결사대원을 엄선,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 미 의원단 일행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일제관청을 파괴하고 일제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이 제안하는 동삼성내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적극 찬성하고 양기탁김동삼 현정경 이상용 이 탁등과 광복군총영·서로군정서·한교민단·광복단·독립단·대한청년연합회를 통합,통군부를 조직했으며 2개월후에는 다시 대한통의부로 확대 발족시켰다. ○7백여 병력 편성 이후 군사위원장이 된 선생은 이듬해 6월 신팔균사령장이 전사함에 따라 사령장을 겸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총지휘,항일전을 전개한다. 1925년 1월25일경 선생은 통의부의 고문인 양기탁등과 통의부를 중심으로 길림주민회·의성단·대한독립단·광정단·노동친목회·변론자치회·고본계·대한독립군단·학우회등 지방자치단체를 총망라,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를 조직했다.통의부와 마찬가지로 입법·행정·사법기관을 두었으며 중앙집행위원장밑에 내무·군사·학무·생계·재무·외무등 6부를 두었다.군사부에는 정의부의용군을 두고 군사위원장에 이청천(후임으로 선생이 취임),사령장에 선생이 겸무했으며 8개중대에 무장한 7백여명의 병력이 각종 군사활동을 전개,적지않은 전과를 올렸다. 1926년 3월3일 길림성내 양기탁의 집에서 각계 인사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고려혁명당을 조직,좌우익이 합작으로 새롭게 통일된 독립운동을 추진하개 된다.당원수는 1천5백여명에 이르렀으며 선생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총사령을 겸임했다. 이무렵 선생과 가까웠던 옛 동지 김종원이 선생에게 『삼성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하자 1926년 12월16일 장춘시내 구시가지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잠복중인 일경에게 잡혔다. 선생은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고 1929년 11월11일부터 33일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1932년 3월5일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선생은 광기가 발작했다는 이유로 퇴장당한채 검사로부터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며 3월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선고됐다. ○18년간 옥고치러 공소를 제기한 선생은 그해 6월 평양에서 1심과 똑 같은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더이상 일인의 재판이 필요없음을 깨닫고 상고를 포기했다.7월 장기수를 수용하던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선생은 1934년 6월11일부터 48일간의 제2차 단식을 벌인다. 7년간의 형무소생활로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 진선생이 2차 단식에 들어가자 모두들 선생의 정신력에 경이로움을 표시했으며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선생과 면담을 할 때에는 경례하고 예를 갖추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가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이는 바람에 선생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돼 그해 5월20일경 옥중에서 순국한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서울신문 48년(외언내언)

    『해방벽두의 건국대업이 바야흐로 바쁜 이때에 누십년간 압축된 세력을 내뿜어 자유로운 언론인으로서의 진실한 임무를 다할 날이 시작되었다.여기서 우리는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 않고 언론보도에 공정하고 적확할것은 물론이려니와 한걸음 나아가 민주총력의 집결 통일과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에 맞추어 단호히 매진하는 동시에…』 1945년 11월22일자 서울신문 창간사설의 한 구절이다. 그로부터 48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다시 읽어봐도 그대로 통하는 언론의 사명과 본분이다.언론의 중립성·공정성·정확성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다만 통일과 독립의 완성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미완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 안타깝고 한스럽다. 해방직후의 혼란기,좌우의 치열한 대립속에서 「해방조선의 대변지」로서 중립성을 표방하고 나선 서울신문은 나오자마자 10만부가 매진되면서 국내 최대일간지로 군림했다.당시 전국의 신문부수는 50만부가 안될 정도였다. 초대사장은 3·1운동때 33인의 한분인 위창 오세창.23세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의 기자를 지냈고 만세보·대한민보등 항일민족지를 창간·경영했던 언론계의 선구자다.창간의 주역을 맡았던 두 사람은 하버드대출신의 연전교수 하경덕박사와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도 관여했던 당대의 논객 이관구.제제다사의 진용을 갖추었으니 어찌 좋은 신문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서울신문」이란 제호도 워싱턴 포스트나 런던 타임스처럼 수도이름을 따서 국가를 대표하는 신문을 만들자는 의도에서 였다고 한다.창간이후 서울신문은 겨레와 더불어 현대사의 증인으로서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제는 거목으로 우뚝 자랐다.6·25전쟁중 51년4월 포성이 지척에서 울리는 서울에서 19일간 「진중신문」을 낸 기록은 서울신문의 자랑이자 한국언론의 신화로 남아있다.오늘 서울신문창간 48돌.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정인보선생/해방전후 국학부흥­교육에 진력(다시 새기는 그 충절)

    ◎18세 상해 망명… 신채호 등과 항일투쟁/국학대학 설립… 민족사관 정립에 큰공 의에 철저한 인생을 살았던 위당 정인보선생은 말을 타고 총칼로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붓과 펜으로 싸운 정신적 독립운동가였다. ○서울 종현서 출생 선생은 1893년 5월6일 서울 종현(지금의 명동성당부근)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정은조씨와 어머니 달성 서씨의 독자로 태워나 후손이 없는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다.1910년 17세때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난곡 이건방선생으로부터 한국화한 양명학을 배워 학문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11년과 1912년 두차례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성 회인현 흥도촌과 유하현 삼원보등지에서 활동하는데 이곳에서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이회영형제를 만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평땅 4백∼5백섬거리 전답을 팔아 신흥강습소등 이회영형제의 독립군양성소를 위한 군자금으로 지원한다.선생은 1913년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일제와의 투쟁을 다짐하는 박은식·신규식·신채호·김규식등많은 청년애국지사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들과 비밀결사인 동제사를 조직했다. 선생은 1922년 4월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초빙을 받아 조선문학론과 한문을 강의한다.그후 중앙불교전문학교·협성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국학및 동양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켰다.또한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민족사관 정립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선생은 일본인들의 왜곡된 학설에 철저히 반론을 전개해 주목을 끌었는데 우리 고대사의 심층연구를 위해 안재홍·신채호·문일평·손진태선생등과도 힘을 합쳤다. ○일경에 검거·고초 선생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을 지원했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현충사를 중건했으며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실었다.이후 같은 신문에 「단군 개천」「5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했으며 실학연구를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했다.1937년 「경훈훈민정음서」「훈민정음운해해제」등을 저술,국어보존에도 기여했다. 그해 7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일어교육만을 강요,연희전문학교에서 선생이 강의하던 조선문학과목은 폐지됐다.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1940년 10월 중동학교안에 소위 「5인 독서회」가 조직된다.노국환·조성훈·황종갑·이기을·유영하등은 역사연구를 명분으로 선생을 비롯,김성수·송진우등으로부터 국제정세등을 들기를 요청해와 이들과 접촉을 갖는다.독서회 운동이 한창 추진되고 있을 때 황종갑의 편지가 일제의 검열에 발각되면서 선생도 적지않은 고초를 당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기에 이르자 선생은 병을 핑계로 휴직을 한뒤 1943년 가족을 이끌고 전북 익산군 황화산으로 들어가 산중생활을 한다. 2년후인 1945년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게되자 선생은 서울로 귀환,일제하의 식민정책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연면하게 이어온 국학을 부흥·발전시키기 위해선 일제로 인해 단절된 우리 얼을 선양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국학대학을 설립한다. ○1950년 납북 국학발전에 몸바치고 있던중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돼 감찰위원회가 구성되자 선생은 여러 인사의 천거와 이승만초대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새 정부의 감찰위원장에 취임,관기확립및 부정부패 일소에 나섰다.그러나 선생은 취임 1년이 지날즈음 자신의 의지가 이루어 질 수없음을 깨닫고 감찰위원장 자리를 떠났다. 다시 국학대학장에 돌아온 선생은 더욱 우리 얼을 밝혀 내는데 정진했으며 국학대학장을 그만 둔 뒤 서울 회현동에서 역사연구와 집필생활을 하다 6·25전쟁을 맞았다.미처 피란가지 못한 선생은 1950년 7월 북한으로 납치돼 한동안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그해 11월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정부는 1990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영원한 독도(외언내언)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이렇게 시작되는 가요 「독도는 우리땅」이 발표된 것은 지난 19 82년.독도의 역사와 지이지적 지식을 뭉뚱그려 놓은 가사의 재미와 쉬운 곡조때문에 금방 화제가 됐다.그러나 『반일감정을 부추긴다』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방송금지의 우여곡절을 거친끝에 대중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 갔다. 이 노래가 유행하던 당시 작사자는 색다른 항의를 받았다.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 주장해 온 일본측의 항의가 아니라 항일유족회측의 항의였다.『…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가사내용에 『대마도도 우리땅인데 왜 일본땅이라고 했느냐』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 신촌과 안암동등 대학가엔 「독도는 우리땅」「만주땅은 우리것」이라는 상호를 내건 경양식집과 카페가 문을 열어 대학생들의 발길을 끌었다.「만주땅은 우리것」이라는 카페이름에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제가 청국과의 불법적인 「간도협정」을 통해 오랫동안 우리 선조들의 생활터전이었던 곳을 남의 나라에 넘겨준 역사가 상기되었다. 독도가 영원한 우리땅임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18세기의 옛지도 3점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국내외의 많은 역사적 문헌들에 독도는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표기되어 있고 심지어는 일본의 과거 역사서와 공문서도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는 터다. 그럼에도 일본은 걸핏하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최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때도 일본의 산케이(산경)신문은 한면 전체를 할애,독도문제를 제기하고 『종전후 한국이 독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억지논리를 폈다. 그런 일본인들에겐 「독도는 우리땅」 보다는 「대마도는 우리땅」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더 나을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서해훼리 상무 구속/검찰/선주 사법처리는 검토안해

    【군산=박상렬기자】 전주지검 군산지청 김희수검사는 15일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와 관련,(주)군산서해훼리 상무 유희정씨(48·군산시 장미동 25의2)를 선박안전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서해훼리 유동식사장의 아들인 유씨는 실질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면서 지난 10일 상오9시45분쯤 전북 부안군 위도면 진리 파장금에서 서해훼리(1백10t급 여객선)의 정원이 2백21명인데도 정원을 초과,승선시켜 부안군 격포항으로 운항한 것을 비롯,금년 7월1일부터 8월말까지 서해훼리호 총 83회,뉴페리호 36회,새마을13호는 총 37회에 걸쳐 정원을 초과,여객선을 운항하게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유상무가 운항일지를 비롯 영업일보등에 전결 결재하는등 실질적인 경영자로 밝혀져 구속했다고 말하고 회사대표인 유사장에 대해서는 현재 사법처리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한 서해훼리호 침몰과 관련,업무상 과실치사상등 부분에 대해서는 선박및 사체인양과 선박감정등의 조사를 마친후 수사를 펴기로 했다. 또 정원초과 등의 감독기관인 항만청에 대해서도 형식적으로 감독했는지 여부를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 정원 초과에 항해사 없이 운항/서해훼리호 수사

    ◎운항일지 압수·선박사관계자 소환 【부안=특별취재반】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원인 수사에 나선 검·경합동수사본부(반장 이동기·전주지검 정주지청 부장검사)는 11일 이번 사고의 원인을 ▲회사측의 무리한 출항 ▲선장 등 승무원의 미숙한 운항 ▲안전조치 미흡 ▲정원 초과 등으로 보고 군산서해훼리(대표 유동식·70)의 운항일지를 압수하는 한편 관계자들을 불러 운항과 관련한 직무유기 및 직무태만 등에 대해 집중 조사에 나섰다. 합동수사반은 특히 사고 선박의 경우 ▲선장과 기관장을 포함해 14명의 승무원이 승선토록 돼있는데도 항해사도 없이 9명만이 승선한 점 ▲해운조합과 해운항만청에 출항신고를 하지 않은 점 ▲정원초과 등이 생존자 증언에 의해 밝혀짐에 따라 회사측의 불법 운항에 대해 추궁했다. 수사반은 또 당시 사고해역의 기상이 당국의 기상관측과는 달리 상당히 악화돼 있었는데도 해운조합이나 항만청으로부터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는 군산서해훼리측의 주장에 따라 이들 기관의 업무태만 여부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수사반은 이날 조사에서 서해훼리호가 설계 잘못으로 배의 선체 윗부분에 결함이 있어 평소 운항때는 갑판 위로 승객들이 나오는 것을 막았으나 이날은 많은 승객들이 갑판위에 있어 사고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선박전문가들의 주장에 따라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수사반은 이와함께 정확한 승선자 수를 파악하기 위해 격포항 주변에 주차돼있는 차량의 차적조회를 실시,차주의 실종 여부를 조사키로 했으며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실종자 신원파악에 주력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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