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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일제시대 三節士

    역사나 민족문제에 무관심하다가도 3월이면 숙연해지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아직 봄이기에는 바람결 매운 이계절에 우리는 조국해방을 위해 일제와싸우다 가신 선열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의 지도자들을 돌아본다. 참혹했던 일제시대에도 자랑스런 한국인이 많았다. 그들의 희생으로 해방을맞았고 망국사를 독립운동사로 고쳐쓸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는 변혁기나 국난기에 의롭게 희생된 지사들을 묶어 시대정신으로 받드는 전통을 갖고있다. 백제말 성충·흥수·계백의 삼충(三忠), 고려말 정몽주·이색·길재의 삼은(三隱), 청국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다가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붙잡혀가 살해당한 삼학사(三學士), 온몸을 던져 일제와 싸운 삼의사(三義士)가 대표적이다. 이런 전통으로 식민지시대 돈독한 학문적 바탕에서 절개를 지키면서 끝까지일제와 싸운 단재(丹齋)신채호, 만해(萬海)한용운, 심산(心山) 김창숙선생을삼절사(三節士)로 부르면 어떨까. ‘절개가 있는 사람’을 일컫는 ‘절사’가 어찌 이들 뿐이랴만 세분은 출생연도나 옥고·활동·업적에서 유사한 부분이 너무 많고, 생존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단재 탄생 120주년이고 만해와 심산은 119주년이다. 왜 삼절사일까. 본래 ‘삼절(三節)’은 공자가 주역을 너무 여러번 읽어서‘위편(韋編)’이 세차례나 떨어졌다는 ‘위편삼절’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또다른 의미는 “세가지의 뛰어난 일”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사나 사전적의미보다 ‘절개를 지키면서 싸운 선비’의 뜻에서 3절사로 부르고자 한다. 단재는 한말과 일제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언론·역사·독립운동을 한 흔치않은 인물이다.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권업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항일구국의 필봉을 날린, 언론의 한 분야만으로도 독보적 역할을 했다. 조선상고사·독사신론·조선사연구초 등 사학자로서도 독보적 업적을 남기고‘조선혁명선언’집필 등 독립운동과 중국의 일제감옥에서 옥사당한 것만으로도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대접 받는다. 만해는 동학운동에 뛰어들고 불교계 대표로 33인에 선정되어 3·1운동을 주도하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쓰고, 신간회를 지도하고 불교관계항일단체인 만당사건으로 구속되고 시문학과 불교개혁의 기념비적인 ‘님의 침묵’과 ‘불교유신론’을 쓰고 국내에서 끝까지 버티면서 창시개명을 거부하는 등 비타협 노선을 견지했다. 독립운동·시문학·불교재건 등 각분야에서 독보적 역할을 했다. 심산은 매국노의 목을 베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고 파리강화회의 ‘파리장서’를 주도하고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의정원부의장을맡고 북경에서 단재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고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앉은뱅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고 건국동맹남조선 책임을 맡고 ‘자서종요(字書綜要)’‘벽옹70년회상기’등의 저술을 남겼다. 세분은 고결한 인품과 불굴의 독립정신,극심한 고문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신념을 지킨 한국선비의 사표가 되었다. ‘곧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다’는 동양의 전형적 지식인상이다. “아! 과거 수십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는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仁者)로 보면 상심할역사가 될 뿐이다.”(단재‘조선혁명선언’)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못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논개의 이름은 못씻는다.”(만해 ‘출옥 후 연설’)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하던 성인의 뜻에 깨우침이 없으면 이것은 거짓 선비다.”(심산‘벽옹73년회상기’) 단재는 추운 겨울에도 꼿꼿이 서서 세수를 했다. 일본놈 천지에 동서남북어느쪽으로도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오기였다. 만해는 주위에서 성북동에 심우당이란 거처를 마련해주자 동남향 창문을 손수 뜯어 북향으로 고쳤다. 총독부가 보이는 쪽에 창문을 낼 수 없다는 독기였다. 심산은 모진 고문 끝에 앉은뱅이까지 되어 평생을 병 속에 살아왔다하여 누군가 그를 벽옹이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농을 한즉 그는 그후 자기를‘벽옹’으로 불렀다. 앉은뱅이도 자랑스럽다는 결기였다. 김삼웅 주필
  • 주요기업 7월부터 ‘英語공시’의무화

    이르면 오는 7월부터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요 기업들은 영어로도 증자 등중요 사항을 공시(公示)해야 한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6일 “이르면 오는 7월부터 증권거래소에 상장된기업 중 외국인 지분이 많은 기업을 대상으로 영어로 공시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증권거래소는 주식예탁증서(DR) 발행이나 유상증자 및 무상증자 계획,유·무상증자 배정일자,주식 소각 등 중요 사항일 경우 영어로도 공시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 중이다.외국인 지분이 10∼20%를 넘는 상장사부터 우선 적용할방침이다. 지난 4일 현재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중 외국인 지분이 20%를 넘는 기업은 삼성전자 포항제철 한국전력 SK텔레콤 LG화학 등 70개사다.10∼20%인상장사는 LG정보통신 LG전자 등 56개다. 이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주식투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영어로 공시하는 게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특히 국제화 및 개방화 시대를 맞아 바람직할 것”이라고 영어 공시배경을 설명했다. 일본을 비롯한 비(非)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로도 공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곽태헌기자 tiger@
  • [오늘의 눈] ‘3·1절’을 ‘독립절’로 바꾸자

    어제는 새 천년 들어 처음 맞는 ‘3·1절’이었다.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대통령 내외와 3부 요인,그리고 독립유공자·시민·학생 등이 ‘3·1운동’ 81주년 기념식을 갖고 그날의 독립·자주정신을 기렸다. ‘3·1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지 9년째인 1919년 3월1일 거족적으로 전개한 항일 만세시위의거이다.위로는 민족대표에서부터 아래로는 초동급부,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지역적으로도 국내는 물론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이에 동참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말까지 만 두달 동안 전국 212개 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약 110만명이참가했으며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피검자는 46,948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우리는 이날의 ‘만세시위의거’를 ‘3·1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그러나과연 ‘운동’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3·1만세의거는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이 일제의 폭압 통치에 항거해 비폭력적 방법으로전개한 항일 투쟁임이 분명하다.그런데도 이를 마치 ‘새마을운동’ ‘ 의식개혁운동’과 같이 ‘운동’이란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마땅히 ‘3·1만세의거’ 또는 의거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3·1만세시위의거’로 고쳐 불러야 한다.1926년의 ‘6·10만세운동’ 역시 같은차원에서 ‘6·10만세의거’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만세시위의거’를 ‘운동’으로 불러온 것은 해방 후 학계의 식민사관과 독립운동가 진영의 몰역사적인 역사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지금까지 나온 역사 서적은 전문서나 대중서 할 것 없이 거의 ‘운동’으로표기돼 있다.심지어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3·1운동’ 일명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3·1절’ 역시 명칭 개정을 재고해야 한다.현 ‘3·1절’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생겨난 것인데 다른 국경일,즉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은 모두 그날의 의미를 명칭에 담고 있는 반면 유독 ‘3·1절’만 날짜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3·1만세의거는 조국 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만세시위를 벌인 날이니 ‘독립절’ 또는 ‘만세절’로 고쳐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부산 신선대등 분규 장기화 수출업체들 피해 확산

    부산 신선대와 우암부두의 분규가 장기화되면서 수출 물량 선적이 차질을빚고 있으나 타결 방안은 가닥이 잡히지 않고 있다. 29일 신선대 컨테이너터미널㈜에 따르면 하팍로이드 소속 하노버 익스프레스호(5만t급)는 당초 출항일자를 이틀이나 늦추고도 수출용 컨테이너 710개를 싣지 못한 채 28일 오전 8시 출항했다. 출항일을 하루 정도 미뤄 3일 떠나기로 한 하팍로이드 소속 스튜트가르트익스프레스호도 지금의 작업 속도라면 수출용 컨테이너 1,300여개 중 400여개를 싣지 못한 채 출항할 수밖에 없어 수출 업체들의 피해는 꼬리를 물게될 전망이다. 한편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운송하역노조는 항의 집회를 계속하고 있고 부두 운영사측은 타결방안 마련이 어렵다고 보고 일정기간 부두를 폐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부산 신선대·우암부두 분규…항만 하역작업 악화일로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우암부두 분규가 4일째를 맞으면서 부두운영 차질이심화되고 노·노간 갈등도 첨예화하고 있다. 신선대부두는 태업 직후인 지난 26일 오전부터 비노조원과 항운노조원 중심으로 대체인력을 편성해 항만기중기 11기 가운데 8기를 운영했으나 작업 피로도가 겹쳐 28일부터는 낮시간대 5기,밤시간대 4기로 줄여 운영하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이에 따라 신선대부두의 경우 25일 태업부터 29일까지의 입항일정을 조정,모두 16척의 대형 컨테이너 선박중 현대듀크호(5만1,000t급)등 7척의 입항지를 옮겼거나 옮길 예정이다. 우암부두도 흥아 마닐라호(8,300t급)등 태업이후 29일까지 입항예정 선박 7척의 입항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이들 선박을 인근 부두로 옮겼다. 이처럼 신선대와 우암부두의 선박들이 잇따라 입항지를 인근 자성대와 감만부두로 옮기면서 이들 부두도 선석부족 현상을 빚어 3,4부두 등 부산항 재래부두까지 선석압박을 받고 있다. 또 신선대부두를 이용하고 있는 일부 외국선사들도 부산항 부두 분규에 따라 자체적으로 대책마련에 들어갔으며 신선대부두 기항을 포기하는 방안도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KBS·MBC 3·1절 특집프로

    KBS와 MBC가 3·1절을 맞아 우리에게 낯선 두명을 소개한다. KBS-1TV는 29일 ‘강용권의 4만리 장정(밤10시)’에서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 사회과학원 사학자였던 강씨의 자전거 여행을 소개한다.그는 91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자전거를 타고 1만4,000㎞,4만리를 여행하며서 항일운동의 유적지를 답사했다.수백명의 증언자들을 만나 이들의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만 해도 700여개.3차 답사에서 목숨을 잃은 그가 새롭게 밝힌 독립운동의 역사를알아본다. MBC는 ‘PD수첩(밤10시55분)’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를 다룬다.메이지(明治)법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의 주역인 ‘조선청소년독립단’에 대한 자진변호를 요청하면서 우리와 인연을 맺었다.3·1운동 당시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논문을 발표해 일본 검찰에 불기소되기도 했다.또 일본 천황 암살기도로 기소된 박열선생과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의 변론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전경하기자
  • [데스크 시각] 공무원들의 ‘무심함’

    얼마전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일명 ‘슬픔의 노래(Symphony of Sorrowful Songs)’를 들은 적이 있다.나지막하게 시작하는 도입부에 이어 비장하면서도 격정적인 중간부와 곡 중에 나오는 소프라노,그리고 다시 나지막이 들릴듯 말듯 끝을 맺는,마치 거대한 산을힘들게 올랐다가내려오는 듯한 선율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음악을 들은 후 고레츠키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하였다.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어주한 폴란드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자기 나라 사람으로 현재 살아있는 작곡가니까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사관측의 대답은 그런 사람이 있느냐,혹시 펜데레츠키(Penderecki:폴란드 작곡가로 그의 교향곡 제5번은 ‘코리아’이다)를 잘못 알고 얘기한 것이 아니냐는 등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결국 이름 철자까지 알려주는 등 우여곡절 끝에 며칠 후에야 그에 대한 아주(?) 간단한자료-그것도 폴란드어사전을 복사한 것이라 읽어볼 수도 없었지만-를 받고‘공무원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저렇게 다 무심한가’하는 생각을 했다. 무심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지난해말 일본 시마네(島根)현 주민 몇 가구가 우리나라 독도로 호적을 옮겨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을 무렵이었다.철도청은 우리의 ‘동해’가 영어로 ‘Sea of Japan(일본해)’으로 쓰인 ‘철도화물운송’ 책자를 제작,전국의 주요 역과 관련업계에 배포했다. 그러나 철도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를 비난하는 글이 실리자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철도청은 뒤늦게 책자를 회수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철도청은 그 책임을 디자인회사측의 부주의로 돌렸지만 실은 철도청 관계자의 ‘무심함’이 빚어낸 것이었다. 국가보훈처가 최근 제작,전국의 학교와 도서관 지자체,관광업계 등에 배포한 ‘길따라 역사탐방’이란 책도 ‘무심함’으로만 돌려버리기에는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상식 차원의 지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내용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이 책은 최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문화유적답사와테마여행프로그램이 활발히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애국선열들의 항일 위업을 현창하고 그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일반 관광명소와 여행안내용 책자로는 별 문제될 것이 없다.그런데 정작 책의 제작목적에 따른 대상유적지와 인물선정에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특히 ‘서울시편’을 보면 대표적인 애국선열들은 제쳐두고 친일행적 논란을 빚고 있는 인사들을 마치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들인 것처럼 소개해 놓고 있다.또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을 비롯해 효창공원,장충공원,탑골공원,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 등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로 언급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남산에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등이 있다.그리고 효창공원에는 백범,윤봉길·이봉창 의사 등 독립운동가 7인의 묘소,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또 탑골공원은 3·1 의거의 성지이며 서대문형무소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사형장과 ‘유관순 굴’이 복원되어 있는,항일유적지 순례코스로는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아무리 관광여행관련 안내책자라고 해도 전문가의 감수는 받았어야 했다.그렇지 않고 외부 필자의 집필대로만 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담당공무원의 ‘무심함’으로만 돌려버릴 수가 없다.적어도 해당 부처의 담당공무원이면 상식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할 사항들이기 때문이다.이 일은 사소한 것 같지만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그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박찬 특집기획팀장
  • 청와대 조찬회동 의미

    “앞으로도 흔들림없이 정부의 중심에 서서 국정 전반을 착실하고 원활하게운영해 나가기로 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취임 2주년인 25일 청와대에서 박태준(朴泰俊)국무총리와 조찬을 함께하며 의견을 모은 내용이다. 평소 같으면 총리 주례보고 때의 당부사항일 수 있으나 자민련이 전날 ‘공조파기’ 선언을 한 까닭에 의미가 깊다.박총리는 얼마 전까지 자민련 총재였다.현재도 자민련 당적을 갖고 있는 ‘DJT’의 한 축으로 공동정권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그가 김대통령과 정부의 중심에 선다는 얘기는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겠다는 뜻이다.달리 표현하면 자민련과의 의정공조와 선거공조는 이제 깨졌지만 국정공조의 정신은 지속해 나가겠다는 함의(含意)다. 평소 박총리는 선거로 국정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청와대의 한 관계자도 “박총리는 이러한 자세가 옳고국민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총리의 잔류결정은 또 총선후 양당간 공조재개의 불씨를 살려둔 셈이다. 현 선거판세로 보면 총선후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이 또 한차례 요동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자민련도 내각제를 관철하려면 다른 정당과의 공조가 필수적이다. 박총리가 그 연결고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이날 조찬의 다른 의미는 김대통령의 제안으로 이뤄진 데서 찾을 수 있다. 박총리에게 최대한 예우를 갖춤으로써 잔류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김대통령이 대화에서 박총리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포철신화’를 거론한 것도,일류국가 건설을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양승현기자 yangbak@
  • [대한광장] 남북정상회담의 꿈

    남북정상회담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그리고남북관계에서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운 정치적 유혹이다.그러나 그럴수록 남한의정책결정자는 신중하게 정상회담을 추진하여야 한다.무엇보다도 현실적 성사가능성,회담의 실익,정상회담 추진의 전략적 구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정상회담의 성사가능성과 관련하여 현재 당면하고 있는 모든 상황에비추어 볼 때,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을 가지고있느냐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북한이 만약 중국에서 남한의 정상과 단독으로 만난다면,이는 이후 남북관계에서 정상적인 물꼬를 트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것이다. 정권유지 차원의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절박함을 예견하면서까지 북한지도부가 한낱 쇼를 위해 남북정상회담에 합류할 리는 없다.따라서 상대방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가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그것은일방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둘째,북한이 정치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려면,북한의 경제난 극복에 획기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인책이 구체적이면서도 막대한 규모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김정일의중국방문과 관련해서도 장쩌민 주석에게 파격적 대우를 요구함과 동시에 확실한 물질적인 선물을 주문하는 것이 중국과 북한간 협상과정의 가장 큰 걸림돌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의 방중에 편승하려는 남한에 대해 북한은 형식적인 만남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경제적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이제 막재도약의 단계에 들어선 남한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얻게 될 성과가 과연 무엇인지 엄밀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셋째,중국을 중재자로 하는 남북정상회담이 전략적으로 추진할 만한 구도인가하는 문제이다.현재 대 한반도 영향력 행사에서 미국이나 일본에 뒤져 있다고 중국이 판단한다면 남북한을 중재하는 것이 중국의 입장에서는 상당히매력적이다.중국은 남북정상회담 중재를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의 무게중심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반면 미국은 이를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길 것이다.물론 4자회담이 추진되고있는 상황에서,미국은 겉으로 크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중대함에 비추어 사전에 미국의 충분한 양해없이 중국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될 경우,한국은 오히려 외교적 손실을 입게될 수도 있다.북·미관계 개선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도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은 남한과 북한에게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을지우게 될 뿐이라는 점을 중국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절호의 기회일지라도,중국은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실리 측면의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 비합리적인 수준의 경제적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대변인이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해야만 했던 이번의 남북정상회담설은 일과성으로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매우 상징적인의미를 지닌다.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식견있는 지도자’라고 칭한 것을 두고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외교적 언사라는 지적과 함께 대통령으로서과연 적절한 표현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던 것을 상기하게 된다. 현실에 대해 냉철한 정책판단을 하기보다는 남북정상회담 자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남북한의 정상이 만남으로써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그 꿈이 이루어지기에는 선결과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安仁海 고려대 국제대학원교수·국제정치학
  • 애국지사 유적지 홍보책자 파문

    국가보훈처가 애국선열들의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제작,배포한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필자의 전문지식 부족과 당국의 감독부실로 오히려 선열들을 모독하고 항일투쟁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는 국내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찾는 일반인들에게 애국정신을현창한다는 목적으로 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길따라 역사탐방’ 3,000부를 제작,지난해말 전국의 학교·도서관·지자체·관광관련업계 등에 배포했다.이 책은 최근 들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유적 답사와 테마여행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국내 567개 독립운동·전쟁 관련 사적지를 124개 권역별로 나눠 주변의 관광명소와 함께 여행안내용으로 제작한 것. 그러나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서울편’은 대상 유적지는 물론 항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있는 인물을 부각시켜 선정배경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동부편 첫장에는 어린이대공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고하 송진우 동상 사진을싣고 있다.이는 옆 페이지에 실린 남강 이승훈·유관순 동상 사진의 두 배가 넘는다. 또 북부편에는 망우산에 있는 13도창의군탑과 고려대 교정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대형사진이 실려 있다.인촌의 경우 ‘전라북도편’에서도 생가 사진과 함께 생가내의 동상사진을 중복게재하고 있는데 대형 동상 사진을 실은경우는 두 사람뿐이다. 이에 대해 한 독립운동가는 “송진우와 김성수는 친일행적 때문에 그들이받은 건국훈장 박탈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됐던 인물”이라며 “이들을 마치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것처럼 편집한 것은 항일로 일관한 선열들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대표적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과 효창공원·탑골공원·장충공원·국립묘지·구서대문형무소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남산에는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안중근의사기념관이,효창공원에는 백범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 등 독립운동가 7위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또 탑골공원은 ‘3·1의거의 성지’이며,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국립묘지에는 국내 외에서 항일운동을 한 선열의 유해를 안장한 묘역이 있고 구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에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 사형장을 비롯해 ‘유관순굴’이 복원돼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같은 유적지에 대해 서울편 말미의 ‘그밖에’ 항목에서 단 한줄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필자 선정과 책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울시편은 추가로 수정제작해 재배포하겠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총선연대 ‘15問15答

    총선연대는 2일 공천반대 인사 2차 명단을 발표하면서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제기되는 궁금증을 문답 형식(15문 15답)으로 풀었다.내용을 간추린다. ◆낙선운동으로 왜 선거판에 개입하는가. 정치참여는 국민의 기본권이며,정치개혁을 위해 낙선운동이 필요하다.◆정치구조 개혁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개혁을 외면하는 부패·무능 정치인을 퇴출시켜야 정치개혁이 가능하다. ◆시민단체가 선거법을 어기면서까지 해도 되나. 시민단체의 선거활동을 금지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소 조항이다.◆시민단체가 유권자의권한을 침해하는 것 아닌가. 시민단체들은 종합적인 의견을 제시할 뿐 최종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다.◆정치권 냉소에 편승,정치권 전체를 매도해도 되나. 총선연대의 활동은 성실한 의원에게 도움을 주고 유권자의 냉소주의를 줄인다.◆시민단체가 권력화하는 것 아닌가. 참정권을 찾으려는 시민단체의 연합은 자구적 저항일지 몰라도 권력남용은 아니다.◆수백개의 단체가 모여서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나. 단체의 성격은 다르지만 정치개혁이라는 목적은같다.◆명단 선정기준은. 1차는 7가지,2차는 5가지였다.부패,선거법 위반,헌정질서 파괴는 1·2차에 모두 포함돼 있다.◆선정기준에 해당하는 주요 정치인들이 제외된 이유는. 선정기준에 따라 선정했을 뿐 고의적인 누락은 없다. ◆국회의원의 정책과 소신을 판단해도 되나. 원칙적으로 소신도 판단 대상이지만 자료가 부족해 적용하지 않았다.◆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명단에 포함한 이유는. 음성적 정치자금 수수관행을 차단하지 않고는 깨끗한 정치를기대할 수 없다는 국민적 요구를 수용했다.◆한보관련 인사 가운데 일부만포함된 이유는. 한보관련 15대 의원 24명 가운데 20명은 명단에 넣고 4명은혐의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급진보적 시각으로 보수근대화 세력을 말살하려는 것인가. 5·16,12·12,국보위,5·18사건은 명백히 의회제도를 파괴하는행위다. ◆특정 정치세력을 궁지에 몰려는 것 아닌가. 음모론은 지역주의를이용하려는 정당의 정략적 주장일 뿐이다.◆총선연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패·무능 정치인의 낙선,유권자 참여 확대,깨끗한 정치,일하는 국회를 만드는 것이다. 장택동기자 taecks@
  • 골프장선 ‘쇠귀에 경읽기’

    정부가 국내 주니어 선수들과 프로선수들의 골프장 이용부담을 덜어 주기위해 올해부터 시행토록 한 특별소비세 할인혜택을 둘러싸고 선수들과 골프장측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가 정한 특별소비세 면세규정에 따르면 주니어 선수의 경우 골프장 이용시 전년도 공식 선수권대회 등에서 상위권에 든 345명(2,000년)에 한해 특별소비세(2만1,120원)를 전액 면제토록 했다.이는 협회에 등록된 일반 프로골퍼(614명)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같이 정부가 면세규정을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대다수의 골프장들이 종전 요금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어 특소세 할인혜택이 선수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K골프장과 이천의 P골프장은 새해 들어서도선수들에게 특소세 감면을 적용하지 않고 종전 요금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 골프장측은 “사업자협회의 내부의결에 따라 선수들에게 주중에 한해일반회원대우(5만∼6만원선)로 일정액의 할인혜택을 주어 왔다”면서 “종전의 할인액을 줄였을 뿐 정부의 세금감면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할인혜택은 골프장협회가 자체 의결을 통해 선수들에게 주는 특혜사항일 뿐법적인 강제사항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한국 중·고골프협회와 프로협회 등 선수단체들은 “골프장들이결국 정부의 특소세 면세를 빌미로 이용료만 더 올려 받는 꼴이 아니냐”고반박하고 “그동안 시행해온 할인혜택을 하필이면 정부의 세금감면 시점에맞춰 없애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비난했다. 골프 관계자들은 “결국 이같은 문제는 골프장들이 92년부터 시행해온 선수들의 골프장 이용료 할인기준이 모호해 생긴 문제”라고 지적하고 “골프관련단체들이 만나이용료 할인혜택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마련해 이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성수기자 ssp@
  • [올해 국정 어떻게] 김윤기 건설교통

    대한매일은 새 천년을 맞아 행정 각부를 차례로 방문,장관들로부터 새해설계와 밀레니엄 비전을 듣는 기획특집을 시작한다. “업무보고를 받아보니 한번씩은 다 들어본 얘기라 그리 생소하지 않습니다.그러나 개발제한구역 해제,판교 택지개발,인천국제공항 건설 등 현안이 산적해 있어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지난 14일 한국토지공사 사장에서 전격 발탁된 김윤기(金允起)건설교통부장관은 21일 대한매일 정종석(鄭鍾錫)경제과학팀장과의 특별인터뷰를 통해 우리나라 건설교통 행정의 책임을 맡은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후유증으로 주택가격이 상승하고 전세대란이 불가피하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는데 대책이 있습니까. 주택의 규모별·지역별로 시장 양극화현상이 지속되고,전셋값 불안요인도잠재해 있어 지난 10일 ‘주택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주된내용은 주택 50만가구 건설과 무주택근로자와 서민들의 주택구입과 전세자금지원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전셋값 안정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단기적인 대책보다는 중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건설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이며 외화획득의 효자역할을 해왔습니다.건설업에 대한 지원책은 있는지요. 건설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전체 취업자의 9% 이상을 고용하는 등 경제기여도가 높은데도 불구하고,금융권 등에서 다른 산업에비해 상대적 불이익을 받아 왔습니다. 앞으로 건설업의 부채비율 기준을 현실화해 건설업체들이 금융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고 저가낙찰로 인한 부실경영 등을 방지하기 위해 입찰제도를 개선하겠습니다. ■지난해부터 해외건설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는데 올해 전망과 시장 활성화에 대한 전략은 무엇인지요. 지난해 해외건설 수주실적은 98년 41억달러에서 크게 증가,92억달러를 기록했으며 올해도 이같은 상승세는 이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역외보증기관,해외인프라펀드 설립 등을 통해 업계의 금융능력 강화를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최근 항공기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사고 방지를 위한 대책은. 계속되는 항공기 사고예방을 위해 항공안전 감독관제도 도입 등 선진국 수준의 항공안전확보를 위한 제도개선과 법령개정 등을 마무리하겠습니다.대한항공에 대해서는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 발표 이후 진척상황과 앞으로의 일정은. 지난해 7월 발표된 개발제한구역 해제조정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조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7개 대도시권은 원칙적으로 광역도시계획을 수립한 후이에 따라 개발제한구역을 조정할 계획이므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해 바랍니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시화산업단지는 1월초 해제됐으며 창원공단은 3월까지 해제될 예정입니다.대규모 취락과 구역 경계선 관통 취락 115개 지역도 5월부터 12월까지 순차적으로 해제할 계획입니다. ■지난 8일 발표한 4차 국토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필요한 378조원의 재원조달 방안은 무엇입니까.또 이 계획이 선거용이라는 시각도 있는데요. 국토계획은 국토의 이용·개발·보전에 관한 장기적·종합적인 정책방향을설정하는 국가의 최상위 종합계획입니다.이 계획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약378조원의 투자재원이 소요되는데 이 금액은 GDP 대비 2.6% 수준입니다. 올해 우리부 SOC예산이 14조원이고 향후 연4% 내외의 경제규모 확대를 감안하면 재원조달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국가기간 교통망을 2019년까지 대폭 확충하겠다는 계획이 지난 연말 확정됐는데 이 역시 예산확보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이 계획의 골자는 도로·철도·항공 등 수단별 특성과 기능을 감안해 합리적인 수송분담체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국가 기간교통망 계획 시행에 소요되는 재원은 약 335조원으로 향후 20년간 GDP 대비 2.4%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이는 지난해 교통시설 투자액이 17조원임을 감안하면 역시 재원조달이가능한 수준입니다. ■국토계획과 같은 장기계획 수립도 중요하지만 경부고속철도나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대규모 국책 건설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여부도 중요합니다.계획대로 진행이 잘 되는지요. 경부고속철도는 지난해말 현재 약 5조원을 투입,45%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습니다.지난해 12월16일 시험선구간34.3㎞에 대한 시험운행을 성공적으로마쳤는데 그때 시속 200㎞를 돌파했습니다.그동안 공사 장애요인이 완전 해소돼 향후 3년간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며 2004년 4월에는서울∼부산 전구간 개통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천국제공항은 지난해말 현재 90%의 공정을 보이고 있으며,2001년 개항을목표로 올해 안으로 모든 준비를 완료할 계획입니다.최근 공항종합운영시스템(IICS) 구축이 늦어 개항일정이 3∼4개월 늦춰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데개항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안전성과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개항하느냐가 중요합니다.따라서 개항시기를 2001년 상반기로 잡고 국제적으로홍보가 가장 극대화될 수 있을 때 개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장관 취임을 계기로 판교 택지개발이나 용인죽전 등 수도권 택지개발사업이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됩니다. 판교지역은 경부축상 교통의 요충지이며,수도권정비계획법상 과밀억제권역으로 개발사업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지역입니다.따라서 판교지역 개발은수도권 전체의 공간구조에미치는 영향과 경부고속도로 주변의 완벽한 교통처리계획이 수립된 후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주택수요가 많은 용인죽전,동백,남양주 호평평내 등의 택지를 1·4분기 중 조기 공급할 예정입니다. 대담 정종석 경제과학팀장/정리 박성태기자
  • 중국 국방부장 방한 안팎

    츠하오톈(遲浩田) 중국 국방부장의 방한은 지난해 8월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의 방중에 대한 답방형식으로 이뤄졌지만 한국전쟁이후 지난 반세기동안 서로 총부리를 겨눈 교전 상대국의 군 최고 책임자가 처음으로 우리나라를찾았다는 점에서 군사·정치적 의미가 깊다. 츠 부장은 지금까지 북한을 3번 방문했지만 국방부장 자격으로 방북한 적은없었다. ◆방한 안팎=츠 부장은 예정보다 2시간25분 늦은 오후 1시45분 도착했다.국방부는 환영의장행사를 20일로 연기하는 등 방한 첫째날 일정을 긴급 조정했다. 일행은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잠시 여장을 푼 뒤 오후 4시 청와대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방문했다. ◆방한단의 면면=방한단에는 츠 부장의 부인 지앙칭핑(姜靑萍) 여사를 비롯수에이밍타이(隋明太·중장)제2포병 정치위원,쩡션시아(鄭申俠·중장) 공군참모장,짱원칭(臧文淸·중장) 북경군구 부사령원,왕지엔민(王建民·소장) 심양군구 참모장,루오빈(羅斌·소장) 국방부 외사주임,왕위청(王玉成·소장)해군 부참모장 등 중국군 핵심 장성 15명이 포함돼있다. 특히 루오빈 국방부 외사주임은 이번 방한을 성사시킨 지한파로 중국 군부의 실세로 알려져있다.중국의 최정예부대인 북경군구 및 심양군구의 제2인자인 부사령원과 참모장이 방한단에 참가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츠하오텐은 누구=정치,군사부문에 능통한 인민해방군 공식서열 2위의 실력자.신중한 성격에 뛰어난 실무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있다.7년째 국방부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공식직함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국무위원 겸국방부장. 산둥(山東)성 자오위안(招遠) 출신으로 15살때인 1944년 팔로군의 소년 통신병으로 입대,항일전쟁에 참가했다.6·25전쟁 당시 하급장교로서 3년간 참전했다.덩샤오핑(鄧小平)의 총애를 받아 92년 국방부장,95년 당 중앙군사위부주석을 맡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노주석기자 joo@
  • 日警이 독립운동가 공적 증언

    항일운동을 펼치고도 관련자료가 없어 독립유공 포상에서 제외된 독립운동가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일제 형사의 ‘증언’을 받아내,뒤늦게 훈장을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 당시 동료들의 증언으로 포상받은 사례는 더러 있었으나 일경이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확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제 말기인 1942년 5월 비밀결사조직 ‘친우회’를 결성,네차례에 걸쳐 부산시내에 반일전단을 살포한 이광우(李光雨·75·부산시 동구 좌천동)씨는 44년 6월 부산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단기 1년,장기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이씨는 이에 따라 지난 89년 정부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으나 관련판결문이 첨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사보류 조치를 받았다. 이후 이씨는 김천형무소와 정부기록보존소 등에서 자료를 수소문했으나 한국전쟁 등으로 자료가 소실됐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이씨는 이어 당시 자신을 검거한 일경 하판락(河判洛·88·부산거주)씨가해방 후 반민특위에 검거됐을 때 자신과 관련된 언급을 했었고 자신 역시 하씨의 죄상을 밝히는 증언을 했던 기록 등을 근거자료로 제출하기로 했으나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하씨는 일제 때 경남도경 고등과 외사주임으로 독립운동가를 조사했었다. 한편 지난 11일 하씨는 기자와 단독인터뷰에서 “일경으로 있을 때 이광우씨 건을 취급했었다”면서 “필요하면 추가로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국가보훈처측은 “당사자의 증언인데다 관련 문건이 뒷받침돼 자료가치가 충분하다”며 이씨의 공적을 새로 심사할 뜻을 밝혔다. 하씨는 해방 후 목재수입상 등을 경영하면서 비교적 여유있게 살아왔다. 정운현기자 jwh59@ *친일경찰 하판락씨 인터뷰 일제 때 경남도경 고등과 외사주임으로 독립운동가를 뒤┌榕年? 하판락씨는 “일제 경찰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그동안 숨겨온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언제 경찰에 들어갔나. 진주고보(3회)를 마치고 진양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하던중 1936년 경찰에 투신했다. ◆일경 시절 주요 담당업무는. 경남도경 소속 수상경찰서,고등과 외사계에서 적색분자·외사범 검거를 담당하며 해방때까지 근무했으며 최종계급은 경부보였다. ◆1943년 ‘친우회 불온전단사건’과 관련,주동자 이광우씨를 검거한 것을기억하는가. 부하인 김소복과 함께 그 사건을 다뤘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경위와 재판결과는. 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됐다.서울에서 3회,부산에서 1회 등 모두 4차 공판을 거쳐 최종 무혐의로 풀려났다. 부산 정운현기자
  • [외언내언] 김일성의 抗日기록

    지난 94년 사망한 북한 김일성(金日成)주석의 항일투쟁 경력이 처음으로 인정돼 주목을 끌고 있다.통일부가 지난 11일 펴낸‘북한 주요 인물 자료집’은 북한의 전·현직 주요 인사 230여명에 대한 현직,출생,인물 특징,가족관계,학·경력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한 가운데 김 주석의 무장 항일투쟁경력을 명기했다.김 주석의 항일투쟁 기록내용을 보면 그동안 조작 여부로논란이 됐던 몇가지 행적들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일제때인 1936년 결성된‘조국광복회’는 김일성에 의해 결성된 첫반일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 밝혀졌다.김일성의 최대 항일전적으로 일컬어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리(현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에 있던 일본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 습격사건에 대한 언급도 있다.북한은 당시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이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죄 없이 갇혀 있던 주민들을 구하고 경기관총,소총,권총 등 무기와 많은 탄약을 노획했으며 면사무소와 우편국 등을 불지르고 거리마다 격문과 전단을 뿌리며“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말하고있다. 1932년부터 동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항일 유격대원이었고 중국인들과혼성 편성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일명 소련 극동군) 제88특별여단에서 제1영(營) 영장(대대장)을 맡아 활약한 것도 나와 있다.김일성의 항일 경력은 지난 87년 정보당국이 펴낸‘북한 인물론’과 94년 내외통신사 부설 북한문제연구소가 발행한‘북한조감’부록에도 기재됐다가 취소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김일성이 30년대 후반 항일투쟁을 했다는 데는 이미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당시 그에 관한 일본측 문서도 보존되고 있는 실정이다.다만 통일부가 북한 김일성의 무장 항일투쟁 경력을최초로 인정하고 내외에 공개했다는 것이 주목되는 점이다.그동안 묻혔던 김일성 항일 경력이 인정됐다고 해서 그의 행적이 모두 투명하고 정당화되는것은 결코 아니다. 김일성 선대 모두를 민족지도자 반열에 세우고,그 자신을 불세출의 위인으로 승화시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개인 우상화 경력은 영원히 허구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이번 김일성 항일 경력 인정으로 보수적 인사들의 감성적 불만도 예견된다.그러나 통일부가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에 입각해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지난 반세기에 걸쳐반목과 대결로 얼룩졌던 불신을 제거하고 남북관계의 신뢰를 조성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이번 김일성 항일 경력 재평가를 계기로 남북한 상호의 실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바탕이 마련돼야 하겠으며 바로선 통일역사를 창조하는 민족적 과제가 중요함을 인식해야 하겠다. 장청수 논설위원 csj@
  • 金日成 항일투쟁 첫 인정

    통일부는 11일 발간·배포한 ‘북한 주요인물 자료집’에 북한 김일성(金日成)주석의 항일투쟁 경력을 수록했다. 자료집은 김일성의 학력·경력을 소개하면서 조선광복회 조직(1936년 5월),함남 보천보 및 중평리 습격(1936년 6월),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 제1교도영영장직으로 활동(1942년 8월) 등을 명기했다. 정부가 대외 공개 책자에서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 경력을 수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통일부는 또 이날 대외 배포한 북한 개설서 ‘북한개요 2000’의 자료편에서도 ‘북한 주요인물록’으로 지난 95년에 발행한 ‘95 북한개요’에 싣지 않았던 같은 내용의 김주석의 이력을 게재했다. 자료집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인물특징을 “대담하고 통이 크며 결단력과 추진력은 있으나 성격이 급하고 자기과시형이며 신중성이 결여돼 있다”고 평했다.또 영화·연극 등 문화예술분야에 관심이 많다고 묘사했다. 김정일의 가족으로 첫번째 부인 김영숙(정식부인·47년생)과 딸 설송(74년생),두번째 부인 성혜림(37년생)과 아들 정남(71년생),세번째 부인 고영희(미상)와 아들 정철(81년생),네번째 부인 김경진(52년생)과 아들 충남(81년생) 등을 소개했다.자료집은 또 김정일의 동생인 김평일은 현 폴란드대사,김영일은 1998년 9월 이후 장관급인 육해운상으로 재직중이라고 밝혔다. 자료집은 북한의 전·현직 주요인사 230여명에 대한 현직,출생,인물특징,가족관계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
  • [화제의 책]

    * 한국의 문화유산 석기시대의 돌촉 하나,깨진 옹기그릇 등….무심코 보면 하찮은 돌조각이지만역사적 시각으로 접근하면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며, 나아가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박물관 전시 업체인 ‘시공테크’가 펴낸 ‘그림과 명칭으로 보는 한국의 문화유산’(엄기표 등 4명 지음)은 일반인들이 우리의 문화유산을 쉽게 이해할수 있게 돕는 책이다. 사학계의 권위자인 교원대 정영호교수가 감수했다.책은 고분 건축 공예 민속 복식 서화 등 11개 분야로 나눠 사전식으로 분류한 뒤 이에 대한 명칭과 해설을 달았다.600여쪽에 걸쳐 그림과 사진을 곁들어 선조들의 삶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고 있다.전 2권,권당 2만원. **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뤼순 감옥에 이르기까지 안중근의사에 관한 항일자료를 정리한 ‘안중근 전쟁,끝나지 않았다’(열화당)를펴냈다.값 8,000원. 이 책은 연대기로 보는 안중근과 그의 시대,뤼순감옥에서의 검찰관 신문조서,뤼순 법원에서의 공판시말서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안의사의 재판기록과 신문조서의 전문을 실어 정확성을 기했고 편집과 디자인을 참신하고도실용적으로 꾸며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사장은 서문에서 “일본제국 법원의 공판기록을 70년대 처음 접했을때의 느낌은 한편의 장엄한 교양시였다”면서 “일반독자를 위해 쉽게 쓴 글인만큼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혀 자신의 삶의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내 棺도 준비되어 있다13억 중국인에게 ‘상해 포청천’으로 사랑을 받는 주룽지(朱鎔基) 중국총리의 일대기가 발간됐다. 연합뉴스(YTN) 김승환 경제부기자가 쓴 이 책은 중국의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주 총리를 통해 근대 중국의 정치와 경제 현실을 분석한다. 주 총리는 지난 4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뒤,78년 등샤오핑(鄧小平)으로부터 탁월한 경제이론과 식견을 인정받아 상해 시장,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다.특히 부총리 시절인 90년대 초 중국경제의 거품을 성공적으로 빼내는 성과를 거뒀다.이 과정에서 그는 10여차례나 암살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저자는 “주 총리 일대기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개혁정책이 어떻게진행되고 완결돼야 하는가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고 말한다.값 8,000원. 정기홍기자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17)박재혁 의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해와 남·북만주,노령(露領)의 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이주 혹은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독립투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들은 자신들이 근거한 지역의 특성과 평소 신조에 따라 외교·의열투쟁·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방략을모색,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기관이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혹은 친일파에 대해 폭탄·총기 등으로 파괴와 암살을 통해 응징한 것으로 의열투쟁은 그 규모나 성패 여부를 떠나 독립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이는 의열투쟁을 통해 잔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체 한민족의 항일의지의 표출임과 동시에 일제 관리 및 친일 주구배 등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일본인 요인·친일주구배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착수하였다.1920년 4월중순부터 진행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그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돼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하순 관련자 20여명이검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이로부터 3개월 뒤에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는 의열단에서 추진한 거사 가운데 최초로 성공한 거사였다. 박재혁(朴載赫·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났다.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부산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종업원을 거쳐 한때 경상북도 왜관 소재 무역상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17년 6월에는 무역상 주인에게 부탁하여 700여원을 얻어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돈을 벌지 못한 채 1918년 6월 귀국한 박 의사는 3·1의거 직후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박 의사는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다.1920년 3월 일시 귀국한 박 의사는 7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그러나 당시 박 의사는 가정형편과 외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노년을지내고 있던 노모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김원봉의 권유를 거절하였다.그러나 8월 김원봉으로부터 재차 입단권유를 받자 박 의사는 결국 입단을 수락하였다. 1920년 8월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파괴하라는 밀명과 함께 거사자금 300원,폭탄 1개를 전달받았다.박 의사는 폭탄과거사자금을 중국 고서적으로 위장한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6일 부산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 박 의사가 상해의 동지들에게 보낸 엽서(1920년 9월 4일자)에는 상황(商況),상로(商路),수익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암호였다.그리고 ‘다른 길이 있는데,이익이 전에 비해 좋다’는 글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용을 알린 것이다.그러나 이 엽서에서 ‘많은 이익을 볼 수있으나 다시는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은 박 의사가부산경찰서 폭파의거를결행하면서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박 의사는 먼저 부산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부산진상업학교,25세),오재영(吳載泳·부산상업학교 중퇴,25세)등을 만나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최천택 등의 도움을 받아 박 의사는 곧 거사를 준비하였다.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경 중국인 고서적상인으로 변장한 박 의사는 고서적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시모토에게 고서적을 구경시켜 주고 있던 박 의사는 고서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시모토에게 의열단의 전단,즉 하시모토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적은 전단을 내보임과 동시에고서적 보따리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다.순간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와 그의옆에 서있던 일경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 졌다.하시모토는 중상을 입고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었으나 이송중 절명하였다.인명피해는 물론 경찰서건물 역시 대파되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터뜨린 직후 혼란을 틈타 탈출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박 의사는 응급치료만 받은 채 구금돼 온갖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다.부산지방법원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및 살인미수 등의 죄목을 들어 박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21년 2월 박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그러나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채 일제의 계속된 잔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박 의사는의거 당시의 부상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겹치게 되자,‘왜놈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심하고는 단식을 계속하였다.일제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단식을 계속하던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 11일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때 박 의사의 나이 27세였다. 1962년 정부는 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연구원] ** 박재혁 의사, 유족 근황과 기념사업 27세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두 자녀 역시 모두 작고했다.장남 기동(基東·76년 작고)씨는 부산 부평동에서 상업을 하다가 30여년전 상경,말년에는 서울서 거주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기동씨의 장남 정평(正平·52)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재 서울 미아3동 소재 신일중학교 경비원으로 21년째 근무하고 있다.정평씨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무석(務石·32)씨는 상업을 하고 있다. 박 의사의 기념사업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박 의사 장녀의 후손들이 중심이 돼 의거현장인 부산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박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롯데그룹과 3·1운동동지회측의 지원을 받아 부산 연지동 소재 성지곡수원지 내에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박 의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78번)에 있다. 장손 정평씨에 따르면 박 의사의 유품은 별로 전해오는 것은 없고 사진 한두장이 전부라고 한다.이는 박 의사가 독립투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돼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시작했고 또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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