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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중국관계 1945∼2000(이종석 지음,중심 펴냄)항일시기부터 현재까지 북·중 관계사 전반을 다룬 책.양국간 역사를 국공내전기,한국전쟁시기,냉전시기,탈냉전시기 등 4단계로 나눠 변화의 양상을 밀도있게 다뤘다.특히 베일에 가려졌던 국공내전기,62년 북·중 국경조약 체결과정을 조목조목 규명해간다.책에 따르면 국공내전기 북한의중공지원이 양국 혈맹관계의 기틀이 됐으며,국경조약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중국이 대폭 양보한 조약이란 것.1만5,000원. ◆山海經(산해경·이중재 옮김,아세아문화사 펴냄)‘조선’이란 나라이름을 수록한 가장 오래된 책 ‘산해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완역했다.기원전 27∼23세기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중국 고전은 중국과 주변국가의 지리·민족·풍속·생태계를 두루 다룬 지리박물지다.그러나 ‘날개 달린 사람’‘짐승 몸을 한사람’등 기이한 내용을 많이 담아 신화서로도 취급된다.옮긴이는 한국과 중국의 사서들을 동원해 이 고서를 역사서로서 재해석했다.상·하 두권에 총 1,4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각권 3만원. ◆너희가 홍보를 믿느냐(이옥향 등 지음,YPR 펴냄)30대의 현업 홍보인 27명이 실전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놓은 언론홍보 실무학 개론.악어(기자)와 공생하는 악어새인 홍보맨의 고뇌와 애환,달라지는 위상을 실감나게 보여준다.양문영 세움커뮤니케이션 대리는 백화점 홍보담당 시절 백화점 화장실 몰래카메라 사건의 악몽을 되새기며 공개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한국언론의 현주소와 치열한 미디어 전쟁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조철현 YPR대표는 “초짜나 예비 홍보인들에게 참고서가 되도록 정통파들의 홍보 체험서를 기획했다”고 말한다.9,000원.
  • 정치 뉴스라인

    ■항일 광복군의 직계 후손인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대전 대덕·재선)의원 후원회가 6일 저녁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렸다. 후원회에는 ‘다시 모인 광복군’이란 표어에 걸맞게 김구 선생의손자 김진씨,김좌진 장군의 손녀 김을동씨,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씨,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용씨,이봉창 의사의 조카 이세현씨,박은식 임시정부 주석의 손자 박유철씨,신철휴 의열단장의 아들 신홍우씨,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이석·백정기·이강연 선생의 아들 또는 손자 등 150여명의 생존 독립유공자 및 유족이 참석했다.윤경빈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민족단체 대표와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 시민단체 관계자도 자리를 함께 했다. ■민주당 홍보위원회(위원장 金榮煥 의원)는 7일부터 23일까지 여의도 당사 1층 홍보전시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사진전을 연다. ‘하의도에서 노벨평화상까지’라는 주제의 사진전에는 소년시절부터 정치 입문,민주화 투쟁,15대 대통령 당선,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는 김 대통령의 정치역정이 담긴 사진 100여점이 전시된다.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8)러시아 하바로프스크·이르쿠츠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15시간을 달려 새벽녘에하바로프스크에 내렸다.800㎞를 북상한 까닭으로 기온이 뚝 떨어져입김이 허옇게 퍼져나갔다.어디 따뜻한 수프라도 먹을 곳이 있을까하고 몸을 움츠린 채 두리번거리는데 역전 광장에 동상 하나가 아침햇살을 받으며 우뚝 서 있다.17세기 중반 이곳을 탐험한 하바로프였다.그래서 지명도 그렇게 붙여진 모양이다. 하바로프스크는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의 합류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예스런 건축물들이 훌륭하고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공원의 산책길도아름답기 그지없다.인구가 60만명밖에 안 되지만 러시아의 극동 경영중심지로서 대통령 대리가 상주하고 있다.이 도시 곳곳에 우리의 항일투쟁 자취가 남아 있다. 만주와 러시아를 오가며 투쟁하던 이동휘(李東輝)는 1918년 2월 하바로프스크로 와서 볼셰비키 혁명의 완수를 다짐하는 한인혁명가회의에 참석했다.이 자리에서 볼셰비키 측으로부터,한인들이 러시아 혁명투쟁에 참가한다면 그 대가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그리하여 그는 3월28일 유동열(柳東說)·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등과 더불어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 내 한인 유격대를 통합하고 힘을 집중시켰다.이동휘가 이른바 상해파 공산당의 거두로서 이르쿠츠크파와의 알력을 조정하지못했고 그 결과로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가져왔지만 한인사회당이 항일투쟁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혁명의 완성이 조국 독립의 첩경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열정적인 여성투사였다.1918년 2월 한인혁명가회의를 발기하여 성사시켰고 그것을 발전시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그해 4월 일본이 무장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연해주에출병하자 적위군 편에 서서 무장투쟁에 나섰다. 하바로프스크가 적에게 포위되자 300∼400명의 대원을 이끌고 탈출하다가 러시아 백군에체포당했다.“혁명군의 승리만이 조국 독립을 돕는다는 확신 때문에수많은 조선인이 적위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백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내가 이제 13보 걷는 것은 조선의 13도를 의미한다.곧 조국 13도에 자유와 행복이 깃들일 것이다.” 최후 발언을 하고 열세 걸음을걸은 그녀는 절벽 위에서 총살되어 벼랑 아래 아무르강으로 떨어졌다. 취재팀은 이 곳 주재 한국교육원(원장 양형렬)을 찾아가 컵라면과커피로 아침을 때웠다.그런 다음 처음 찾아간 곳이 한인사회당 창당현장이었다.무라브요바 아무르스크 22번지에 있는 그 건물 외벽에 김알렉산드라의 얼굴 부조가 붙어 있었다.원동('遠東)중앙은행이 들어있었다는데 내부 수리중이었다.차를 몰아 그녀가 처형된 ‘우쩌스(절벽)’로 갔다.시립 문화휴식공원의 한 쪽으로 거무튀튀한 바위 절벽이었는데, 처형 현장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듯한 순백색의 전망대가서 있다.김알렉산드라가 유언을 남기고 떨어진 벼랑 아래는 아무르강의 파도가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다.멀리 강 대안에 중국 땅이 보인다.취재팀이 숙소로 잡은 인투리스트 호텔 앞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김알렉산드라의 유물을 찾으러 갔다.나나이·야쿠트·에벤키 등 시베리아 소수민족 자료와 동식물 표본,러시아 혁명 투쟁에 관한 사료가 충실히 전시된 이 박물관에 사진 몇 점과 일기,편지 등이 있었다.취재팀은 1937년 강제이주 직전 반발을 막기 위해 한인지도자들을 처형해매장한 묘지 자리(칼 마르크스 거리 입구), 정찰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김유경(러시아 표기법 때문에 김유천으로도 읽힌다) 거리,조명희(趙明熙) 시인이 살았던 집을 돌아보았다.하바로프스크에는 그밖에 70㎞ 북쪽 야스코에 마을의 ‘붉은군대 제88저격여단’에 배속되었던 김일성과 만주 항일유격대의 유적이 있다. 취재팀은 이튿날 러시아 국내선 항공기를 타고 마지막 목적지 이르쿠츠크로 떠났다.비행시간이 3시간이 넘는 먼 거리였다.이르쿠츠크는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중간지점이다.제정 러시아 때 데카브리스트의 폭동 주동자들을 실어 보낸이후로 유배지 구실을 했는데, 우리의 항일 운동가들도 유배되거나이 곳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다.그 감옥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르쿠츠크 공산당’을떠올리게 마련인데,이동휘가대표하는 상해파 공산당과 주도권을 다툰 일파를 말한다.이 도시에는 그들과 관련된 현장이 있다.그리고 이르쿠츠크파의 편을 들어,상해파에 동조하는 우리 독립군단을 압살하여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연출하고 동조세력과 투항자들을 이끌고 이 도시로 온 갈란데시베리 장군이 주둔한 5군단 거리도 있다.이르쿠츠크 공항 청사 밖으로 나가자 기온은 빙초산처럼 차가웠다.더구나 공항청사를 촬영하다가 공안요원의 경고를 받아 마음은 더 추웠다.마음씨 좋아 보이는 60대 초반의 택시기사를 골라잡아 취재에 나섰다.처음 찾아간 곳은 고려공산당 1차 대회장소.레닌가(街) 23번지에있는 옛 ‘인민의 집’ 극장은 붉은 벽돌로 된 3층 건물인데 아직도장려한 아름다움을 갖고 서 있었다.이 곳에서 1921년 5월에 오하묵·최고려 등의 주도로 열린 대회는 상해파를 제외하고 이르쿠츠크파가요직을 독점함으로써 한 달 뒤의 자유시 참변을 예비하는 불씨를 만들고 말았다. 늙은 택시 기사는 취재팀을 5∼6㎞쯤 떨어진 도시 외곽 바리깟 거리의 교도소로 데려다 주었다.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이 곳에는 1921년 자유시 참변 때 포로가 된 수이푼지역 유격대장최영(崔英)을 포함해 400여명의 항일투사들이 갇혀 신음했다. 기록을보면 한인 수감자들이 너무 많아 감방이 넘쳤다고 한다. 1910년 한·일합방 강제체결 직후 이상설(李相卨)과 이범윤(李範允)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이 도시로 유배되었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 감옥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건물이 낡고 우중충했지만 망루에경비병이 있고 지상에도 동초(動哨)가 보였다.촬영이 문제였다.감옥정면은 달리는 차 안에서,뒷면은 민가 고샅으로 가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문화휴식공원에 있는 그 원망스러운 갈란데시베리 장군의 기념비를 돌아보고 그의 군대가 주둔했던 5군단 거리로 갔다.1873년에 준공되었다는, 찬란하면서도 우아한 아흐로브고프 극장 사거리 길목이었다.이르쿠츠크파에 동조함으로써 갈란데시베리 장군에게 일찌감치 복속한 우리 독립군 부대원과 투항자들 1,745명이 이 거리로 실려와 한인연대로 재편성되었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洪範圖)는 이 곳에서 러시아 적위군 연대장군복을 입었다. 자유시에서 이르쿠츠크파 편에 섬으로써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결과는 무엇인가.북만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하게 싸운 수많은 투사들, 그들은 도와주겠다는 볼셰비키 측의 약속을 믿고 이동해 왔다가 무수히 죽거나 생포당해 이 도시의 감옥에 갇혔다.복속한 사람들도 러시아 적위군이 되어 버렸다.모두 독립전쟁과는 먼 운명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홍범도의 감정이 어찌했을까 상상하며 쓸쓸히 이 거리를 걷는데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취재팀은 시베리아의 평원으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러시아 지역 답사의 수첩을 덮었다. 이르쿠츠크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7)러시아 우수리스크·수이푼

    아침 일찍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프를 대절했다.130㎞ 북쪽 우수리스크 시내를 취재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선열들의 피어린 격전 현장을더듬기 위해서였다. 포장이 잘 돼 있어 지프는 바람을 가르며 내달렸다.한국의 산세를 닮아 마치 시골 국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색다른것은 커다랗게 쓴 러시아어 광고 간판들과 이따금 눈에 들어왔다가물러나는 주말농장 ‘다차’의 러시아식 바라크들이었다. 우수리스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을 연결하는 철도의 분기점에 있으며 우수리강과 면해 있다.옛날 발해 시대 지명은 쌍성자(雙城子),북경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된 직후에는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라고 불리기도 했다.기사년(己巳年·1869년) 함경도의 대기근으로 유민행렬이 이어질 때 일찌감치 한인 집거촌을 이루었다.국운이 기울자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홍범도(洪範圖) 등 많은 우국지사들이 찾아와 근거지로 삼았다.그리하여 1917년 고려족회를 열었고 그것은 대한국민회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때를 증언하는 흔적은 시내에 없다.군납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한 곳이 우수리스크다.이상설이 숨을 거둔 곳도 이 도시다.취재팀은 두 분의 충혼을 되새기며 거리를 이리저리 달려보고 우수리스크역 앞에 차를 멈추었다.우리 선열들이 무수히드나들었을 3층 역사(驛舍)는 낡았으나 산뜻하게 녹색 페인트로 단장된 채 앉아 있다. 치체리나가(街) 54번지의 사범전문학교도 옛 모습그대로 서 있다.1917년 고려족중앙총회가 4만루불의 기금을 모아 만든 이 학교는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국내에서 카프(KAPF)파로 활동하다가 망명한 시인 조명희(趙明熙)가 강의했던 이 학교는 지금 이과(理科)초급사범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취재팀은 서쪽으로 차를 돌려 시내를 벗어났다.우수리스크에서 중국국경에 이르는 수이푼(秋風) 지역에는 우리의 항일투쟁 현장이 많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박환(朴煥·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취재팀이 이 곳에 갈 것이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꼬르사꼬프까도 가보고 이상설 선생의 유해를 뿌린 수이푼강도 꼭 보십시오.거기 기념비를 세울 겁니다.” 우리 선열들이 재피거우라고 불렀던 꼬르사꼬프까 마을은 유인석(柳麟錫)이 1910년 6월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당시 연해주에는 간도관리사로서 북간도에서 투쟁하다가 온 이범윤(李範允),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갔던 이상설,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용맹을 떨친 의병장 홍범도,그리고 안중근(安重根)등이 현지의 대부호인 최재형과 동포들의 지원으로 병력을 조련하고이따금 국내진공을 감행하고 있었다.위정척사파의 거두로서 국내 의병전쟁을 이끌다가 망명한 유인석은 그들을 이 곳에서 하나로 응집시켰다.그리고 꼬르사꼬프까 마을을 포함해 근처의 수이푼강과 뿌질롭까,솔밭관은 1920년대 러시아 혁명전쟁 때 국제간섭군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그들이 조종하는 마적단에 맞서 우리 항일유격대가 수차 격전을 벌인 곳이다.당시 지휘자는 ‘백마를 탄 김장군’으로 전설처럼회자되었던 김경천(金擎天)과 채영(蔡英)·김규면(金圭冕)·조맹선(趙孟善)·이중집·황운정 등이었다. 출국하기 전 필자는 그들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독립기념관 이동언(李東彦)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자료를 보내주며 말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니 꼭 신문에 써 주십시오.” 취재팀을 태운 지프는 야트막한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곳을 달리고있었다.우수리스크역에서 눌러놓은 운전석의 타코미터가 3.5㎞를 가리킬 때 차를 세웠다.수청(水淸·현 빨치산스크)에서 활약하던 김경천은 1922년 부하들을 이끌고 이 곳으로 이동해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500명 정도의 대원을 교육시켰다.그 장소가‘우수리스크 서방 7리’라는 기록이니 이 근처인 것이다.일본 육사출신으로 대위 군복을 벗어 던지고 항일전선에 뛰어든 그는 사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이 곳에 장교양성소를 세웠던 것이다.이리저리노인들을 붙잡고 물었으나 아쉽게도 그 현장은 찾을 수 없었다. 나침반을 꺼내 들고 다시 한참 차를 달리는데 길가 수풀 속에서 꼬르사꼬프까라는 간판이 불쑥 나타난다.1869년에 마을이 처음 생겼다는 표시도 있고 ‘1917부터 1967년’이라는 표시도 있다.우리 동포들이 황무지를 개척하여 곳,우국지사들이 십삼도의군을 창설한,그리고항일 유격대의 근거지 구실을 한 유서 깊은 마을은 큰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차에서 내려 천천히 마을의 고샅으로 걸어 들어갔다.굴렁쇠를 굴리며 노는 아이들과 체스를 두는 노인들만 보일 뿐이었다.노인들에게 뿌질롭까 마을과 솔밭관 마을,그리고 수이푼강 가는 길을 물어 약도를 그렸다.수이푼강은 이름이 라즈달리니야로 바뀌어 있었다.뿌질롭까는 확인했으나 솔밭관은 알 수가없었다.그리고 홍범도가 수이푼의 다아재골에서 최병준의 집에 무기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진공의 기회를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찾을 수 없었다.1937년 동포들이 강제이주당해지명도 사라지고 우리 노인들도 없고 전설마저 사라진 때문이다.뿌질롭까는 10여분만에 도착했다.마을의 옛 이름은 육성촌(六城村).조명희 시인이 교장을 지낸 ‘육성촌농업학교’가고색창연한 모습으로취재팀을 반겼다.조명희 교장 집에서 하녀로 일한 노파를 만났다.이곳 출신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솔밭관은 북쪽 1∼2㎞.들길을 달려 찾아가니 마을 자리가 남아 있다.강제이주 후 버려져 있는 것이다. 취재팀은 수이푼강을 찾아갔다.폭이 50m쯤 되는 우수리강의 한 지류였는데 포장도로가 나 있는 다리 옆으로 옛 다리가 보였다.이 강을중심으로 벌어진 수많은 혈투를 생각하며 주변의 산야를 휘휘 둘러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팠다.우리 역사의 소중한 일부인데도 지도자들이름조차 묻혀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채영은 중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1919년 ‘혈성단’이라는 항일유격대를 지휘해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이중집은 600명 규모의 ‘솔밭관 유격대’와 ‘우리동무군 유격대’를 지휘해 싸웠다.김규면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국내에서 투쟁하다 연해주로 와서 ‘혈성단’의 단장을 맡았다.조맹선은 국내 의병 지도자로 북간도를 거쳐연해주로 와서 채영과 더불어 항일부대를 지휘해 싸웠다.황운정은 최진동과 함께,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한 뒤 연해주로와서 이중집 부대에 합류했다. 박환 교수가 말해준 이상설의 기념비를 세울 자리는 오른쪽 교두보에서 활처럼 휘어져 뻗은 작은 둑 위였다.그 곳을 밟아본 뒤 시든 잡초와 관목들을 헤치고 강변으로 내려갔다.강은 오염되지 않아 맑고깨끗했다.이상설의 유해가 화장되어 이 곳에 뿌려진 것은 1917년 3월.강물은 그 옛날의 선각자의 한을,그리고 이곳에 무수히 뿌려진 피의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취재팀은 강물 앞에국산 소주팩을 꺼내 한 잔 부어놓고 절을 한 뒤 차에 올랐다. 우수리스크 이원규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을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 jaebu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5)러시아 포시에트·크라스키노

    대한매일은 중국에 이어 러시아에 남아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나선다.100여년전 대기근으로 발생한 한반도의 유민들은 국경지역인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 일대로 하나둘씩 이주해 농사를 지었다.이곳은 국권을 잃은 다음에는 무장독립운동가들의 활동거점이 됐다.독립운동가들은 일제 등을 피해 곧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등 북쪽으로 이동했고,스보보드니를 거쳐 시베리아의 치타와 이르쿠츠크까지 수십만리길을 옮겨다녔다.독립운동가들이 걸은 형극의 길을 4회로나누어 싣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형승합차를 대절해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 쪽으로 달렸다.국경선인 두만강의 하산까지는 270㎞쯤.지리에 밝은 극동국립대의 송지나 교수(러시아 국적 동포)가 동행하는데도 태반이비포장도로인데다 검문이 심해 가는 데만 6시간이 걸렸다. 연해주의 남쪽인 포시에트만 해안가에 자리잡은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격적인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이전 국권회복 운동의 중심지였다.블라디보스토크가 애국계몽운동 위주로 나아간데 비해이곳은 무기를 든 무장투쟁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안중근(安重根)의 투쟁이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취재팀을 태운 자동차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포구 위에 멈추었다.바로 포시에트였다.우리 선열들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던 이 곳을 땀으로 일궈 옥토로 바꿨다.그러나 현재는 그저 황량한 들판일 뿐이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아도 우리 독립군의 발자취는 아무 곳에도 남아있지 않았다.1936년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탓이었다.비록 70여년의 세월에 독립군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취재팀은 선열들이 겪은 어려움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취재팀은 다시 10여㎞쯤 동쪽으로 달려 크라스키노로 갔다.선열들이힘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다.경사 없이 수평을 이루는 드넓은벌판이 누워 있는데 그 아래는 바다였다.“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있는 장소가 있어요.” 송지나 교수가 이끄는 대로 차를 몰고 표고 300m쯤 되는 고지로 올라갔다.십여분 뒤 정상에 오르니 하산 전투기념비가 서 있고 사방은 일망무제로 탁 트였다.정면 남쪽 수평의 벌판에앉은 것이 크라스키노의 중심지역으로 우리 선열들이 ‘상안치혜’라고 부르던 곳이고 그 앞은 포시에트만이었다.서쪽으로 나 있는 길은중국과의 국경지역인 훈춘으로 가는 도로였다.그리고 고지의 왼쪽 등뒤쯤에 부락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이 우리 선열들의 ‘하안치혜’ 마을을 부숴버리고 새로 세웠다는 쭈가노프카촌이었다. 위정척사파의 거두로서 국내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하게 싸웠던 유인석이 이 곳에 온 것은 1908년 8월.그는 이범윤과 최재형을 만나 연해주 의병의 정신적 중추가 되고,블라디보스토크로 진출해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다.전(前) 러시아 공사 이범직의 아우였던 이범윤은 간도관리사로 북간도에 파견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러시아로 망명와서는의병대인 창의회(倡義會)를 조직했다. 최재형은 재정적 후원을 책임진 공로자였다.러시아군의 통역을 거쳐군납업으로 거부가 된 그는 재산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쳤다. 수많은의병이 먹고 입고 훈련할 수 있는 힘은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그는안타깝게도 1919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우수리스크에서 총살당했다. 안중근은 이범윤과 최재형이 만든 크라스키노 의병대를 지휘하여 국내 진공을 감행한 지휘관이었다.1980년 여름 그는 이 곳을 출발해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로 진출해 경흥군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다음 전투에서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해 석방한 일 때문에 참패를 당하고 거의 혈혈단신으로 돌아왔다.격렬한 비판을 받은 안중근은 1909년 3월 김기룡 강두찬 유치현 박봉석강기순 김백춘 등 동지들과 함께 단지혈맹(斷指血盟)을 맺고 몇달뒤하얼빈에서 그를 저격했다. 취재팀은 그런 저런 자료들을 손에 들고크라스키노 중심지를 이곳 저곳 돌아보다가 안중근의 일화를 감추고있는 하안치혜 마을로 향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주정착했다는 쭈가노프가 마을의 강건너 앞쪽울창한 숲속에 전주들이 줄줄이 서 있는 곳이 바로 하안치혜였다.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 들이 관목들과 뒤엉겨 있는 밀밀한 숲 속에 우물자리와 대저택이었음을 알려주는 담장과 벽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안중근이 독립정신을 불태우며 손가락을 끊었던 하안치혜 마을 역시 집터 몇곳만 남아있어 취재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취재팀은 몇시간 동안 그 곳에 머물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을되새긴 뒤 국경지역인 하산으로 향했다. 크라스키노 박재범기자 jaebum@. * 北·러 국경선 ‘하산' 새단장 한창.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선에 위치한 하산은 새단장이 한창이다.옛 역사 앞에 지어진 새 역사의 내부를 대대적으로 보수 중이다.하산은 경의선이 복원될 경우 북한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로 이어지는 관문이된다.러시아는 철의 실크로드가 개통될 것에 대비해 미리부터 준비에나서고 있는 것이다. 하산은 북한에서 가끔 3∼4량 짜리 열차가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동네주민을 위해 하루 한번정도 열차가 운행되는 자그마한 도시이다.북한과 맞닿아 있는 데다 서쪽으로 40여㎞쯤 가면 중국 국경선이어서경계가 삼엄하다.외국인 출입은 물론,사진 촬영도 금지돼 있다. 두어차례 검문을 거쳐 하산에 도착,국경에서 다소 떨어진 언덕 위에서 망원렌즈로 두만강철교를 사진으로 담고 하산역 앞까지 내려와 역사를 찍는 순간 국경수비대 장교가 뛰어나와 필름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들 국경수비대 군인들도 한국에게는 좋은 인상을 지니고있었다.그 장교는 “남북철도가 이어지고 이곳 하산을 통해 각종화물이 시베리아까지 수송되면 남북한·러시아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산 최해국기자
  • [네티즌 이슈] 朴正熙 전대통령 평가

    *”혹평은 지나친 편견이다”. 역사의 전개는 결코 논리적이거나 인과적이지 못하다는 예를 본다.만주군관학교 출신·친일파라는 식으로 비판하며 박정희 흉상에 일장기를 씌우는 것은 국수주의 짓이고 철없는 행동에 불과하다.국수주의적인 관점과 민족주의적 관점의 싸움에서 어느 한쪽이 승리한다고 해서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상반된 관념이 싸우면 어느 한쪽이 이기기보다 엉뚱한 제3자가 득을 보기도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박정희 출현은 단연 혁명에 가깝고,항일과 친일의이전투구 판을 종식시킬 수 없던 역량부재의 시대에 등장한 한국현대사의 ‘개척자’라는 점이다.그런데 먹고 살만해져서 인지 물질과 정신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까지 들이밀면서 그를 혹평한다.일본제국주의니 미국제국주의니 하는 류는 식민주의사관의 연장에서 한치도벗어나지 못한 딸깍발이들에 다름아니다. 이런 목소리들은 엄청난 손해를 입히는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한국전쟁을 일으킨 북쪽 책임자의 거대한 동상들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된다.그가 항일운동을 했다고 해서 그런가?역사적으로 기억하고 추억할만한 인물이라면 기념관이 무에 대수인가.국민 상당수 심지어 대학생들까지 손에 꼽는 지도자로 박정희가빠지지 않는다.반대 여론은 그야말로 소수의 운동권적 시각이라고 본다. 혁명은 그 자체로 한 시대를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인 것이다.분단의 상처와 그로 인해 만연한 이데올로기 싸움도 박정희가 종지부를찍었다.그뿐인가.모두가 가난에 허덕일 때,뭔가 총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시대에 그가 등장한 것이다. 사실 경제개발이다 뭐다 하는 건 박정희시대가 이룬 이념에 비춘다면 각론에 불과한 것이다.특히 유감인 것은 특정정파나 지역색마저 가미된 듯한 점이다.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일단의 시류에 휩쓸려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보이지 않는 국가의 손실이다.이런 일들은 이제 멈춰야 할 것이다. 박종환 GTVnet이사. * “청산위한 행동 정당하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훌륭한 지도자였는가?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1970년대에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260여명,긴급조치9호위반으로만580명을 구속했다.‘인혁당 재건 주동자’라는 덫을 씌워 사형선고받은 양심수들을 다음날 바로 사형시켜 ‘(국제)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오명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테러·납치도 서슴지 않았다.김대중대통령도 당시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중앙정보부로 대변되는 고문·공작 정치는 바로 그의 유산이다. 경제성장만큼은 이뤘지 않느냐며 칭송하는 사람이 있다.경제성장은가난한 노동자·빈민·농민의 뼈빠지는 노력이 이뤄낸 것이다.그럼에도 박정희는 성장의 과실을 국민에게 주지 않고 소수 자본가에게 나눠주었다.당시 100대 기업에는 세금으로 세운 공기업이 많았는데 이것이 몇사람에게 헐값으로 넘어가 오늘날 재벌이 성장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정권 말기 빈부격차는 사상최대에 이르렀다.이에 따라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된 노동자의 생존권 저항은 점점 커져 79년저 유명한 YH사건으로 이어지며 박정희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경제성장에 성과가 있다 해도 권력유지를 위한 인권유린이 용서받을 수는없다. 70∼80년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도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처벌을 요구받지 않은가. 우리는 단 한번 박정희의 인권유린을 평가하지 못했고 오히려 현정부는 박정희기념관을 지원하겠다고 한다.세금으로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기념관'을 지원하겠다니 당연히 항의해야 하는 것이다.이번 철거는 지역감정을 무마하려고 독재자 미화에 앞장서는 현정부를 규탄하는 성격도 매우 크다.더구나 흉상은 5·16쿠데타,즉 불법적 역사를찬양하는 기념물이다.이런 기념물을 철거하지 않는 것은 ‘쿠데타를하더라도 그 뒤 잘하면 그만'이라는 역사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다. 흉상철거를 계기로 박정희시대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 오늘날겪는 고통을 극복하는 데 교훈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종철 민주노동당 부대변인.
  • ‘司試 복수정답’ 메가톤급 파장

    최근 행정심판위원회가 제42회 사법시험 1차시험 문제가 복수정답임을 인정하자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42회 사시 1차시험에서 단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 처분을 받게 된한 수험생이 행정심판위에 ‘출제오류’를 문제삼아 행정심판 청구를냈고, 행정심판위는 이 수험생의 손을 들어준 것.하지만 주목할 점은이 결정이 당사자 한명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의 발단] 이번 42회 사시의 합격점수는 84.44점이었고,김모씨의점수는 84.07점이었다. 딱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된 것이다.이후 지난 6월 김씨는 “헌법 1책형 34번 문제가 복수정답”이라고 주장하며행정심판위에 불합격처분 취소 행정심판 청구를 했다. 이에 대해 행정심판위는 ▲문제에 정부형태를 묻는다는 명시적인 기술이 없고 ▲문제는 수험생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하며 ▲확실한 정답이 있다고해서 다른 문항의 정답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김씨의 불합격을 취소하도록 했다. [행자부 입장] 행자부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모든 전문가들이 판단을토대로 결정한 것을 뒤엎는 일이 벌어져 곤혹스럽다는 것이다.출제위원,외부전문가 등 5명으로 구성된 정답심사위원회의심의를 거쳐 ‘정답은 단 하나’로 결론 내렸었다. 행자부는 “약간 헷갈리기는 했지만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하면 충분히 정답을 골라낼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이 행자부의 입장이 확고하더라도 행정심판위의 의결은법적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다. [수험생 반응] 일부 수험생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행정심판위의결정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복수정답 가능성이 짙은 다른 문제에 비하면 이번 헌법문제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으로 현재 시험문제 출제 오류와 관련,행정소송 등을 낸수험생들은 큰 힘을 얻은 것만은 확실하다. [행정심판위의 결정이 미칠 파장] 행자부는 김씨에게 합격처분을 내려야 하지만 김씨처럼 단 한문제 차이로 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수험생 6∼7명(추정)에게도 같은 처분을 내릴지는 미지수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법시험위원회를 열어 결정할 방침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지난 98년 치러진 제40회 사시부터 매해 문제 정답과 관련된 소송이 줄을 이어 현재 40회(3문제) 41회(5문제),42회(4문제)가 대법원 최종판결을 기다리고 있거나 행정소송 중에 있다.이 문제들은 행정심판위에서 거론된 이번 문제보다복수정답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 심판위의 결정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송 당사자가 100여명에 이르고,소송 결과에 영향을 받게 될 수험생은1,000여명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의결이 미칠 파장을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최여경기자 kid@. *출제오류 시비 문제. 무엇이 ‘옳지 않은’ 답항일까? ‘③1948년 헌법과 1954년 헌법에서는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을 두었으나 1962년 헌법부터 대통령을 두면서도 부통령을 두지 아니하는 형태를 취한 후 지금까지 부통령을 둔 적이 없다’ ‘⑤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시에 매우 긴요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대통령령으로 국방부장관을 겸할 수 있다’ 행정자치부는 ⑤번을 정답으로 발표했다.하지만 지난달 27일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회에서는 둘다 ‘옳지 않아’ 답이 될 수 있다고의결했다. 행정심판위에서 ③번 역시 정답이 될 수 있는 근거로 삼은 것은 ▲행자부 주장과 달리 답항에 대통령중심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는 상태에서 단순히 부통령제를 두지 않은 헌법개정연도를 묻는 질문으로 볼 수 있고 ▲인도 등에서는 실제로 내각제를 취하면서 부통령을 두고 있는 경우도 있어 청구인의 청구를 인정했다.우리나라가 실제로 부통령을 두지 않는 헌법 개정은 내각책임제 상태이던 60년에이뤄졌다. 이에 대해 행자부는 “대통령중심제에서 부통령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나라는 부통령이 없는 변형된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어 이에대한 종합적 이해를 묻는 문제”라며 ⑤번이 ‘명백하게 옳지 않으므로’ ⑤번이 정답’이라는 입장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4)항일운동 총본거지 上海·嘉興

    필자가 상해를 찾기는 이번이 네번째이다.홍교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를 향해 달리는 동안 눈길을 끈 것은 30∼40층짜리 신축빌딩들이었다.거의 수직으로 치솟고 있는 중국경제를 상징하는듯 했다.이도시에 숱하게 많은 우리의 항일유적들이 또 몇개 사라졌겠구나 생각하며 곧장 옛 프랑스 조계(租界)인 회해중로(淮海中路)를 향해 달렸다.우리의 항일운동 유적들이 그 거리와 근방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상해는 국제교통의 요충지이며 각 국의 조계가 설정돼 국제정세 파악이 쉬워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우리 항일투사들은 최우선의 활동근거지로 삼았다.취재팀은 마당로(馬當路) 보경리(寶慶里)의 임정청사부터 찾아갔다.전체면적 16평.공간은 비좁지만 당시 집무실이 복원되어 있다.주중(駐中) 한국대사관 인터넷 홈페이지 ‘중국내 독립운동사적 안내’를 보면 98년 한해동안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무려 8만여명이라고 한다.대부분 이곳이 첫 임정청사라고 생각하고독립운동의 성지(聖地)처럼 여기는 듯하다.그러나 이곳은 임정이 여덟번째로 자리잡아,1926년부터 1932년까지 머문 장소이다. 임정청사에서 5분쯤 걸어 옛 흥륭다원(興隆茶園)을 찾아갔다.윤봉길 의사가 김구 주석과 의거를 밀의한 장소였다.건물은 그대로인 듯하고 ‘상청(常靑)식품’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헐리지 않고 70년이지나도록 남아 있는 게 고마워 취재팀은 그 집에서 생수를 사 마셨다. 차를 타고 윤봉길 의사의 열혈이 서린 홍구공원(현재의 노신공원)을 항해 달렸다.임정은 1919년 4월 13일 조직된 이후 모든 항일세력을결집하지 못했다.김구 주석은 임정의 침체를 극복하고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암살과 폭파 전문의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이 조직의 첫 성공이 이봉창 의사의 동경 사쿠라다몬(瓔田門) 의거였다.일왕의 마차에 폭탄이 미치지 못해 근위병들만 죽고 말았지만 적에게준 충격은 컸다. 다음 의거의 주인공이 윤봉길 의사였다.고향의 아내에게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상해로 망명한 윤의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일제가 전승기념행사겸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를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 주석의 명을 받고 의거를 결심하였다.1932년 4월 29일 11시40분,행사장의 전원 묵도시간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상해 점령 일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 등 침략의 원흉들을 폭살했다. 1개 군단이 한달동안 저항하고도 상해를 일본군에 빼앗겨 치욕감에빠져있던 중국인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중국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고 극찬했다.중국인들은 때로 일제의 눈치를 보며 비협조적이었고 만보산사건 이후 한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 때부터 한인 애국지사들을 동지의 정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정은 침체국면을벗어나 강력한 투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교통체증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한 뒤에 노신공원에 도착했다.윤 의사의 의거현장에는 중국 근대사상가인 노신의 동상이 드넓은 잔디광장을 바라보며 앉아있다.기록을 보면 동상자리가 단상,그리고 그 앞잔디밭이 시작되는 곳이 윤 의사가 물병폭탄을 던진 곳이다.의거현장에서 가까운 언덕에는 윤 의사의 충혼을 기려 1994년에 세운 ‘매정(梅亭)’이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그곳에서 묵념하고 있는 한국관광객들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경남 창원에서 온 교사들이었다.진영고교 성정수 교사(40)는 “자랑스런 항일전쟁의 역사가 잊혀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며화단에 핀 상사화(想思花)를 바라보았다.윤의사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걸까.석양을 받아 상사화는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윤의사의거 이후 악에 바친 일제는 광란하듯 임정인사들을 쫓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은 60만원의 현상금이 붙은채 아슬아슬하게 피신했고,임정은 이후 여러 곳을 이동해야 했다. 취재팀은 상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김구 선생의 피신처였던 가흥으로 향했다.중국이 독일 폭스바겐사(社)와 합작생산한 산타나 승용차는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를 질풍처럼 내달렸다.장강(長江)으로 통하는 운하의 수로가 띠를 두르듯 뻗어있고 이따금 물소들이보이는 비옥한 평야가 스쳐 지나갔다.가흥이 호수를 낀 조용한 농촌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6차선이 넘는 큰길이 뻗어가고 깨끗한 신축건물이 임립하고 있었다. 김 주석은 전 강소성장(江蘇省長) 저보성의 목숨을 건 비호 아래 그의 양아들 진동생(陳桐生)이 반 양식으로 지은 호반별장에 은신했다. 낮에는 뒷문으로 나가 여자 뱃사공 주애보(周愛寶)가 젓는 거룻배를타고 남호(南湖)로 나가 거미줄같은 운하망을 타고 오르내리며 피해다녔고 밤이면 별장에 빨래가 널린 안전신호를 보고 들어가 잠을 잤다.배를 타고 남경까지 간 적도 있었다.김 주석이 은신했던 매만가(梅灣街) 76호 별장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남호를 동남쪽에 등지고 앉았는데 호수 쪽으로 큰 들창이 나있고 뒷문이 만들어져 있다. 차를 돌려 남호 선착장 유원지로 가보았다.1935년 10월,15명의 임정 지도자들이 유람선을 타고 비밀의정원 회의를 열었던 남호는 그리깨끗하지는 않았지만 풍광은 아름다웠다.바람에 밀려오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캔맥주를 사 마시는데 ‘중국혁명의 요람’이라 쓴 안내판이 보였다.1921년 모택동이상해에서 공산당 창당대회를 열려다가 정보가 새 나가자 이곳 남호에서 유람선을 빌어 대회를 마쳤다는 기록이다. 상해로 돌아온 취재팀은 황포탄(黃浦灘) 의거현장을 찾아갔다.황포탄은 수천리를 흘러온 양자강이 황해로 빠져나가는 하류로 바다나 다름이 없다.1922년 3월,의열단원들은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였다.필리핀에서 오는 기선에서 내리는 순간을 노렸다.명사수인 오성륜(吳成崙)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그 자가 갑자기몸을 숙이는 바람에 뒤따라 내리던 영국인 여자가 맞았다.이어 김익상(金益相)이 또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이종암(李鐘岩)도 폭탄을던졌지만 다나카는 마차를 타고 피신했다.이종암은 현장탈출에 성공했으나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당했다.김익상은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의 주인공.의거에 성공하고 수십 개의 포위망을 뚫어 중국으로 탈출해온지 반 년만에 다시 나섰으나 이번엔 탈출하지 못하고 붙잡혀 20년을 복역했다. 의열단원들이 수천 명의 일본군과 인파들 속을 달리며 용맹을 떨친의거현장은 지금의외탄(外灘)공원의 북단이다.상해에서 황포탄 풍광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중국이 자랑하는 포동(浦洞)개발지구가 건너다보인다.거기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육삼정(六三亭) 의거현장으로 갔다.무정부주의 계열의 비밀결사 남화(南華) 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규창 등은 여기서 아리요시(有吉) 주중 일본공사를 폭살하려다가 사전 누설되어 모두 옥에 갇혔다.당시 유명했던 육삼정은 헐리고 그 자리에 방향(芳香)·영안(永安)·부옹(富翁)등주점들이 들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상해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국무회의/ “변협은 사업자단체”“인권단체”공방

    대한변호사협회는 사업자단체일까,인권단체일까. 31일 청와대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이 문제가 논란이 됐다. 논의의 발단은 전윤철(田允喆)기획예산처장관.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마련한 법안이 약간의 수정을 거쳐 통과됐지만 전장관은 이 과정에서 불만을 드러냈다. 전장관은 “사법시험 선발인원이 정원제로 돼 있지만 외국은 자격제로 운용하고 있지 않느냐”며 우리나라 사시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다.이어 “정원 조정과정에서 대법원과 대한변협의 의견을 듣도록 했는데,법조인 수가 늘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변호사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강조했다.당초입법예고 단계에서 기획예산처가 제시한 반론이 반영되지 않은 데 대한 ‘항의’이기도 했다. 김정길(金正吉)법무장관은 “변협은 사업자단체가 아닌 인권단체”라고 규정한 뒤 “법조계·학계 등 여러 의견을 수렴했고,선발정원은 다각적인 연구를 통해서 확정될 것”이라고 답했다. 전장관은 이에 대해 ‘개업자들로 구성된 단체가 사업자단체임은 당연하다’는 반론을 폈다.“사업자들은 동종 사업자가 늘어나는 것을싫어하기 때문에 정원에 대한 의견은 제3의 단체로부터 구하는 것이옳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김장관도 “인권단체이며 공익단체인 변협을 영리단체로 규정하는것은 문제가 있다”고 맞섰다.이어 “(정원확정에 있어)변협의 의견은 사개위의 결정에 참고사항일 뿐”이라고 예봉을 피해갔다. 이어지던 논란은 이한동(李漢東)총리의 중재로 마무리됐다.이총리는 “변협이 정원을 정하는 권한을 갖는 것도 아니고 의견을 제시하는것뿐인 만큼 크게 문제삼을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정리했다. 한편 이총리는 이날 의결된 공무원연금법 개정안과 관련,“국무위원들이 개정안을 의결한 것은 이를 공공부문개혁의 한 방편으로 이해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합리적인 시행안을 마련해야 할것이며 국민과 소속 공무원들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원만히 시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대통령도 “행정자치부가 공무원들에 대한 대화와설득을 해 왔지만 그동안의 노력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애써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지운기자 jj@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3)의열단 자취 남은 南京·廣州

    광복군 제3지대가 있던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강소성 성도 남경에 내렸다.중경·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찜통’이라 부른다더니 아침부터 사우나실처럼 후꾼후꾼했다.양자강이 가까워 고온다습하기 때문이었다.남경은 수운의 이점이 있어 예로부터 강남의 중심 구실을 했고 삼국시대에 손권이 오나라를 세운이래 10개의 왕조가 왕도로 삼은 곳이다.근대에 와서도 태평천국의봉기군이 청나라 정규군과 서구열강에 대항해 싸울 때 거점으로 삼았으며 신해혁명 이후 손문도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 삼았다.중일전쟁때도 임시수도였으며 일본군에 의해 양민 30만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시절,우리 선열들의 항일운동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남경대학.그곳에 항일전쟁사의 걸출한 인물 여운형(呂運亨)과 김원봉(金元鳳)이 다닌 금릉(金陵)대학 캠퍼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조국에서 3·1운동이 실패하자 무력항쟁 밖에 없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금릉대학을 중퇴하고 서간도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그러나 그곳의 교육은 중국 명문대학을 다닌 그를충족시키지 못했다.그는 길림으로 가서 저 유명한 암살 폭파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만들고 수많은 테러공작을 감행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1세였다. 30대 장년이 되자 김원봉은 의열단의 테러공작을 지양하고 군대조직을 계획했다.뒷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였다.그는 스스로 광동성 광주(廣州)로 가서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었다.이 학교출신으로 유명한 이는 뒷날 태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와 진광화,그리고 민족시인 이육사이다.김원봉의그런 활동은 거의 남경에서 이루어졌다.황포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중국의 첩보기관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대표였던 등걸(騰傑)이 그를 도왔다. 남경대학은 우리 대학들과 달리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이 넓고 녹지가 많아 여유로워 보였다.플라타너스·팽나무가 지천이었다.시 인민정부가 발행한 백서를 보면 가로수가 40만 그루라던가.금릉대학 캠퍼스는 예스러운 품격을 지닌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푹신한 네모꼴의 잔디밭을 두고 3동의 건물이 둘러앉아 있었다.그 앞쪽에 뚝 떨어져서 대례당(大禮堂)이란 간판이 붙은 회당 건물이 있었다.민족혁명당을 창당한 곳이 이 대학의 강당이라 했으니 이것이 틀림없을 듯싶은데 전면이 일부 개축되어 있다. 남경대학을 나온 취재팀은 얼음이 섞인 생수병을 들이키며 의열단원들이 묵었던 명양가(鳴羊街)와 화로강(花露崗)을 찾아나섰다.한상도교수의 논문 ‘재중한인군관학교연구’를 보면 조선혁명간부학교는 1932년 10월20일 남경교외 탕산(湯山)의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원에서 개교했고,교관들은 남경성내 명양가 호가화원(胡家花園)에서 묵었다.골목을 더듬어 찾아가보니 명양가와 화로강은 이어진 골목이었다.김원봉에게 호의적이었던 부호 호대해(胡大海)는 자신의 장원 호가화원에 김원봉을 식객으로 묵게 했고,김원봉은 자신의 의열단 동지들을위해 근처 화로강에 머물게 하면서 혁명간부학교 교관들의 숙소도 마련했을 것이다. 어림짐작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컸을 듯한 호가화원은 퇴락된 채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그 옛날 주인이 손님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음직한연못가의 팽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문득 ‘지절시인’ 이육사가 떠올랐다.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 명단 26명 가운데 육사(陸史)라는 가명으로 실려있다.그가 이 연못에서 올곧은 의지로 시를 썼을 것 같은 생각에 이곳저곳 두리번거렸다.연못가에서는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한 노인이 낚시질을 하고,해오라기 한 마리가 긴 부리로우렁이를 찍어올리고 있었다. 남경에는 백범 김구가 만든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도 와 있었다.‘김구구락부’로 더 알려진 테러공격 비밀결사였는데 목장영 고안리(木匠營 高安里)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호가화원의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노인이 목장영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일러주기에 찾아갔으나 새 아파트단지 입구에 붙은 ‘목장영’이라는 간판을 본 것만으로만족해야 했다. 취재팀은 저녁 비행기로 광동성 광주로 날아갔다.우리 항일투쟁사에 큰 몫을 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광주 백운(白雲)공항에서택시를타고 달리는 동안 필자는 중국의 도시라기보다는 유럽에 온 느낌이었다.네온사인이 현란하고 거리를 질주하는 깨끗한 중형차들이 질서있게 차선을 지키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세련되어 보였다.건물의 외형까지도 첨단화된 미를 뽐내고 있었다.하기야 북경,상해에 이어 중국 3대도시이며 1인 평균 생산액이 전국 1위인데다 백년전부터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지였고 홍콩과 가깝다보니 그럴 것이었다. 광주는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손문이 혁명을일으켜 ‘호법(護法)정부’를 세웠고 공산주의자들은 광주봉기를 일으켰다.광주봉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앙드레 말로의 소설이 ‘정복자’이다.우리의 항일투사들도 이곳에 와서 크고 작은 자취를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포군관학교(본래의 이름은 육군군관학교)이다.수많은 우리 항일투사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손문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한 결과탄생했다.국민당측의 장개석이 교장을,공산당 측의 주은래가 정치주임을 맡았는데 그로 인해 학생들도 양분되었고 그곳에 재학중이던 한인청년들도 뒷날 임시정부와 광복군,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갈라서는 결과가 되었다.그들의 입학은 1924년의 3기생들로 부터 시작되는데 유명한 이는 박효삼(朴孝三)·왕자량(王子良)·김원봉 등이다.그밖에 남경과 무한에 있던 분교를 졸업한 이도 많다.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 교관요원들도 있었다.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가 러시아 유학을 하고 돌아온 양림(楊林.본명 金勳),1922년 의열단원으로 상해 황포탄 의거를 일으켰던 오성륜(吳聲輪),뒷날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한 최용건(崔庸健),의열단원이었다가 조선의용대 간부로 활동한 박효삼,이빈(李彬),양달부(梁達夫),김원봉,채원개(蔡元凱)등이다.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 본명은 張志樂)도 교관이었다고 하나 연구가들의 실증은 없다. 취재팀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군관학교를 찾아갔다.광주시를 관통해 흐르는 주강(珠江)의 제방을 따라 보리수가 싱그럽게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대절한 자동차를 페리에 싣고 20분쯤 걸려 도시의 동남쪽에 있는 장주도(長州島)로 건너갔다.섬 거의 전체가 해군부대 주둔지였는데 황포군관학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보존,복원되어 있었다.우리나라의 중고생들이 극기훈련,야영훈련을 가듯 남녀 학생들이 입영훈련을 받고 있다.김원봉이 생도시절 중국인 생도 등걸과 우정을 쌓으며 토론을 한 곳은 어디일까.필자는 그런 상상을 하며 강의실,생도 숙사,강당,연병장 등을 돌아보았다.발길을 돌려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김성숙(金星淑)과 김산이 졸업한 중산대학은 필자가 돌아본 십여개의 전통있는 중국의 대학들 가운데 건축미가 가장 돋보였다.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 것들인데 깨끗하게 보존되어고상하면서도 웅장한 품격을 뽐내고 있었다. □광주(중국 광동성)■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안중근의사 거사 91주년 기념

    남북 가톨릭단체가 오는 24일부터 2박3일동안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거사 91주년 기념 공동행사를 갖는다. 남측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과 북측 조선가톨릭교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이번 행사에선 안중근 의사의 민족애와 통일을 위한종교인의 역할을 주제로한 비공개 세미나와 하얼빈역 공동기념행사등이 열린다. 남측에선 조성제 사제단 공동대표를 비롯한 15명이,북측에서는 장재언 가톨릭협회 중앙위원장 등 6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사제단 관계자는 “안 의사는 남북 양측에서 평화사상가,애국자,항일투쟁가로 존경받는 인물”이라면서 “남북 종교인들이 모여 그의평화정신을 재조명함으로써 남북공동선언으로 가시화된 평화통일의분위기를 성숙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제단은 지난 9월말 통일부에 북한주민접촉신청서를 제출,승인을기다리고 있다.통일부 관계자는 “정부도 행사 취지를 이해,신청자들의 북한주민접촉을 승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석우기자 swlee@
  • 대한매일신보 주필 장도빈선생등 합동안장식

    순국선열·애국지사 합동안장식이 19일 오후 2시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서 윤경빈 광복회장,박유철 독립기념관장,명재현 대전지방보훈청장 등 관계자를 비롯해 유가족·조객 등 300여명이 참석한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됐다. 이날 안장식에는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지낸 장도빈 선생(건국훈장 독립장·3등급)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20위(배위18위)가 이장됐는데 18일 이장된 17위(배위 10위)를 포함해 모두 37위가 이장됐다. 보훈처는 현재 대전 국립묘지내 애국지사묘역 확장공사를 진행중인데 제3묘역 조성공사가 완료되는 2003년 이후에는 순국선열·애국지사들의 이장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전 최용규기자 ykchoi@
  • [대한광장]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여운

    이달초 학술회의 참석차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초행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아름다운 산야는 한국의 어느 지역을 방문하는 것 같아 친근감을 더하여 주었다.공항을 나와 블라디보스토크로향하는 길의 나무들은 가을의 선선함 때문인지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다.공항에서 1시간 정도 차를 달리니 ‘금각만’이라고 불리는항구와 군함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블라디보스토크구나, 하는 함성이 절로 튀어 나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점령한다’는 뜻의 러시아말로 러시아극동함대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또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시발역이자 종착역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최근에는 남북정세의 변동으로 새로운 물류기지의 출발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이곳은 한국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그래서인지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는 며칠동안 여러 언론사 기자들을 만날 수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21세기 경제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과거의역사를 통하여 보면 한인들의 애환과 투혼이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특히 1900년대 이전부터 한인들이 살던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안가 개척리 마을,을사조약의 체결소식을 듣고 ‘시일야 방성대곡’을 목놓아 외치던 장지연 선생이 주필로 활동한 해조신문사가 있던 뽀그라니치나야 거리,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포살하기 위하여 출발했던 블라디보스토크 역사 등 우리 역사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과 명칭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뿌듯하고 친근하게 만들었다. 혁명광장을 지나니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취조하던 일본 총영사관 건물이 아직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그리고 1910년대 한인독립운동의 대표적 기지인 ‘신한촌’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항일독립운동 시절 수많은 한인들이 모여 살던 혁명의 근거지,이곳에서 이상설,신채호,장도빈 선생 등이 권업신문을 간행하였고,민족학교인 한민학교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던 것이다.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있는 여러 항일유적들을 바라보며 멀리 이역땅에까지 와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독립지사들의 애환과 고통을 느끼는 듯 하였다.작년 8월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세운 신한촌 한인독립운동 기념탑이 후손된 도리를 조금이나마 한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준 러시아인들의 유적들도 많이 남아있다.뽀드스다빈 극동대학 교수가 일했던 극동대학건물,곤다찌 연해주 총독관저,혁명가 라조의 동상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바로 이들 러시아인들의 후원과 묵인이 없었다면 외국땅인 이곳에서의 항일투쟁은 결코 이뤄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홍범도,최재형,김경천,한창걸,이상설 등 수많은 한인 애국지사들이러시아의 도움으로 또한 러시아인들과 함께 일본에 대항해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한국독립운동의 주요한 무대이자 ‘우군’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한러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역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이를 테면 1937년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한인강제이주 등은 우리마음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신한촌의 경우 그 역사의 현장인첫번째 강역이 아직도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애절하게 한다.하지만 어려운 여건속에서 독립운동을 해야했던 우리에게 러시아는 주요한 지원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21세를 맞아 세계질서 내지 동북아질서의 재편은 급류를 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때에 한러관계의 올바른 정립은 어느때보다 중요하다. 올해로서 한러수교 10주년을 맞은 한국과 러시아는 단기적인 안목이아닌,장기적인 전망속에서 새로운 한러관계를 모색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식민지시대 우리의 ‘우군’이었던 러시아를 상기하면서,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내다보면서,지속적이면서도 협력적인 방향으로 한러관계를 정립해야할 것이다. ◆ 박환 수원대 교수·사학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2)臨政·광복군 거점 重慶·阜陽

    서안·연안 답사를 마친 취재팀은 25인승 쌍발 프로펠러기를 타고중경(重慶) 강북(江北)공항으로 날아갔다.굽이굽이 꿈틀거리며 중원(中原)을 흐르는 양자강을 보고 있노라니 벌써 중경에 도착한다.중경은 중국의 내륙 사천성 동쪽 끝에 있는 인구 1,300만의 대도시이다. 북경 상해 천진과 함께 4대 직할시이다.양자강과 가릉강(嘉陵江)이합류하는 곳에 자리잡은 중경은 도시 대부분이 가파른 산과 구릉으로 되어있어 중국인들은 ‘산청(山城,산의 도시)’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경은 일본군에게 밀린 중국 국민당정부가 1937년 임시수도로 삼은 곳으로 그 무렵,우리 독립투사들도 이곳을 중심근거지로 삼았다.임시정부가 광복전까지 머물렀고 여기서 광복군이 창설되고 조선의용대 본부도 이곳에 있었다.지금 확인할 수 있는 우리의 항일유적도 많다.1940년 중경으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고 전쟁수행과광복후 조국재건을 위한 체제정비를 하였다.그리고 이 해 9월 17일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했으며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일선전포고를 하고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전했다. 취재진이 여장을 풀기도 전 먼저 찾아간 곳은 칠성강(七星崗) 연화지(蓮花池)마을의 마지막 임정청사였다.5년전 광복 50주년을 맞아 복원 개축했던 청사는 전체를 다시 뜯어내고 있었다.중경시가 관리하고 있는 임정청사(관장:賈慶海·47)는 지난 7월초 공사를 시작,9월17일 한국 광복군 창군기념일에 재개관했다.아래쪽 1호 청사 2층에 임시정부의 군사활동 전시관을 개설하는 등 청사 내·외부를 전반적으로개축했는데 공사비 22만 달러의 대부분은 우리정부가 부담했다. 임정청사를 나온 취재진은 가경해관장이 표시해준 지도를 들고 추용로(鄒容路)에 있는 광복군총사령부가 있던 건물을 찾았다.그곳은 ‘미원(未苑)’이라는 고급식당이 되어 있었다.마침 저녁시간이라 취재팀은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실내는 밖에서 본 것보다 넓었는데 주인이 장사수완이 좋은지 테이블마다 손님이 가득했다. 광복군은 처음에는 단위부대로 제1,2,3,5지대 등 4개의 지대를 편성하였다.그뒤 9개 준승(準繩)을 계기로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와 간섭을 받다가 제5지대에서 일어난 지대장 나월환의 암살사건과 조선의용대 잔류대원들의 광복군으로의 편입 등으로 1942년 전면적인 개편과조정이 있었다.기존 4개 지대를 해체하고 제1,2,3지대로 개편한 것이다. 광복군은 1943년에 가서 본격적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기회를 얻는다.영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병력을 인도 버마 전선에 파견하여 특수업무를 수행하게 했던 것이다.그리고 1944년 5월,미군전략정보처(OSS)과 합작,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그러나 알려진 대로 작전 직전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실행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비가 내리는 가운데 호텔에서 나온 취재진은 차를 대절해 광복군 창설기념식이 열렸던 가릉빈관(嘉陵賓館) 옛터를 찾아갔다.기록에 따르면 기념식은 1940년 9월17일 아침 7시에 열렸는데 그건일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차를 내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가릉신로(嘉陵新路) 18번지 현장을 더듬어 찾으니 5층 짜리아파트였다.마침 웬일인가 하는 표정을 하고 노인들이 다가왔다.그곳에서 소년시절부터 살아 왔다는 이굉운(李宏雲·66)씨는 가릉빈관은오랜 동안 낡은 건물로 남아 있었는데 지난 1991년 철도국에서 건물을 헐고 그곳에 아파트를 지었다고 들려준다. 거기서 차를 달려,임정요인들의 가족이 머물고 광복군에 입대하려는 청년들을 수용했던 토교촌(土橋村)으로 향했다.장강대교를 건너 26㎞나 시외곽으로 나가야 하는 곳이었다.일본군을 탈출,6,000리를 걸어 임시정부의 품에 안긴 김준엽 박사의 자서전 ‘장정’을 보면 학병 탈출자들이 중경에 오자마자 토교로 갔다는 말이 씌여져 있다.또다른 기록에는 교회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토교는 빈민촌 지역이었다.잡초가 무성한 둔덕과 절벽과 탁한 시냇물,질척거리는 골목길,땟국이 흐르는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며 노인들에게 물어 찾은 집은 검정색 기와를 얹은 낡은 단층집이었다.당시사용되던 건물이 아직까지가 한 채가 남아 있었다.차를 타고 근처를돌아다니며 학병탈출자를 수용했다는 교회 자리가 어디 있는지 물었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결국 학병탈출자들이 머물렀던 장소는 찾지 못했다. 다시 차를 돌려 조선의용대가 머물렀던 탄자석(彈子石) 마을을 찾았다.탄자석 마을 역시 개발되지 않은채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그러나 김원봉이 조선혁명당 본부를 뒀던 ‘손가화원(孫家花園)’이라는 거대한 장원은 군수물자 저장시설이 들어앉아 더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토교촌과 탄자석마을을 둘러본 취재진은 차를 돌려 학병탈출자나 임정요인들이 양자강 연락선을 타고 내렸다던,그리고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김원봉의 만류를 물리치고 화북(華北)으로 진출하기 위해 떠났던 조천문(朝天門) 나루터를 찾았다.조천문 나루터는 듣던 것과는 달리 크고 시설도 꽤 정돈돼 있었다.양자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장강삼협(長江三峽) 탐승관광선을 비롯,양자강 물길을 따라 형성된 각 도시를 오고가는 배들로 꽉 찬 조천문나루는 마침 내린 비로 시뻘건 황토 흙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중경취재를 마친 취재팀은 광복군 제3지대 주둔지를 찾아보기 위해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중국 국내선항공편으로 안휘성(安徽省)의합비(合肥)까지 간 뒤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고 부양(阜陽)으로 향했다.합비에서 부양까지는 기차로 9시간 정도.부양가는 길은 남쪽지방이라서인지 논농사가 대부분이었다.그림에서나 본 무소를 탄 아이들이 한가롭게 논길을 걷고 있었다. 부양에 있던 광복군 제3지대는 남만주의 항일영웅 양세봉(梁世鳳)의 조선혁명군의 참모로서 싸웠던 김학규(金學奎) 장군이 지휘한 부대이다.한성수(韓聖洙)·김우전(金祐銓)·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등 학병 탈출자들이 찾아오자 김학규 장군은 그들을 근처 임천(臨泉)에 있는 중국군 장교양성과정의 한국광복군특별반(약칭 한광반)에 입교시켜 교육시킨 뒤 부양 지대에 배속시키거나 중경 광복군본부로 보냈다.이렇게 하여 부양의 광복군이 명실공히 군대 모습을 갖추고창설된 것은 1945년 6월이었다. 광복군 제3지대 창설식이 열렸던 부양 인민극장은 시내중심가에 있었다.건물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곳에는 ‘만하탄(曼合頓)’이라는 디스코테크가 들어서 있었다. 취재진은 잠시그곳을 둘러본 뒤 비가 내리는 길을 달려 부양에서 75㎞ 정도 떨어진 임천으로 향했다.빗길을 1시간 반정도 달려간 임천은 여느 중국 소도시의 풍경처럼 붐비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다.몇차례길을 물어 찾아간 임천 제1중학이 한광반이 훈련을 받던 곳이다. 1939년 개교했다는 임천 제1중학은 원래는 항일전쟁 당시 부근에 주둔해 있던 국민당 군대의 연병장으로 사용되다가 국공합작후 다시 항일간부양성학원 연병장으로 사용됐다.임천 제1중학은 방학중이라 학생들은 없고 전(前) 교장이며 현재 학교의 공산당 서기인 장병(張兵·58)씨가 취재팀을 반갑게 맞아주었다.그는 당시 병영과 생도들의숙사(宿舍)자리를 안내했다.그러나 장방형 단층건물이었다는 당시 숙사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새로 지어진 3층짜리 교사(校舍) 3동이 들어서 있었다. 중경 박찬 기자 parkchan@
  • [중국 명승지를 가다](1)스촨성 충칭

    중국 대륙의 면적은 960만㎢.한반도보다 44배나 크다.나라가 광활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뛰어난 명승지도 많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이 더 많다.중국 4대 자연경관중의 하나로 ‘창장싼샤(長江三峽)’의 기점이자 종착지인 충칭(重慶),도고의 발상지 스촨(四川)성,‘무릉도원(武陵桃源)’의 본향인 후난(湖南)성의 장자제(張家界)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충칭 김규환특파원] 중국 대륙 13억 인구의 ‘젖줄’이자 땀과 눈물이 섞인 창장(長江·양쯔강).티베트고원에서 6,000여㎞를 흘러 동중국해에 이른다.중국 서북쪽의 스촨(四川)분지에서 대하(大河)로서의 첫 면모를 드러낸 창장은 충칭에서 자링(嘉陵)강을 품에 안으면서거대한 물결을 이룬다.거대한 물결은 깎아지른 절벽과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추당샤(瞿塘峽)과 우샤(巫峽),시링샤(西陵峽)의 협곡을지나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으로 빠져나간다. 창장이 힘차게 굽이치는 선경(仙境)속의 추당샤·우샤·시링샤 세협곡을 ‘창장싼샤(長江三峽)’라고 부른다.유비(劉備)·조조(曹操)·손권(孫權)이 천하를 놓고 각축을 벌인 ‘삼국지(三國志)’의 역사적 현장이며,이백(李白)·두보(杜甫)·소동파(蘇東坡) 등 중국 최고의 시인들이 시작(詩作)활동을 한 주무대이기도 하다. 190여㎞에 이르는 이 창장싼샤는 충칭의 추당샤부터 시작된다.풍광이 웅대하고 산세가 험난하면서도 주위의 기암괴석들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추당샤는 길이가 33㎞이며.강폭은 150m쯤 된다.하지만 강폭이 30m로 좁아지는 우샤에 이르면 창장의 물결치는 소리가 십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물살이 세다.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산높고 골 깊어 생긴 구름 안개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암초가 많은 시링샤에서는 내려가는 유람선은 쏜살같이 달리지만,올라오는 유람선은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힘이 들어 연신 가쁜 숨을 내쉰다. ‘황토물과 기암절벽이 묘한 대조를 이뤄 빚어낸 천하제일의 비경,도도하게 흐르는 물살 위에서의 여유,갑자기 눈앞에 다가오는 천인단애(千인斷崖)의 절벽….감동과 스릴,인간 감정의 극심한 굴곡을 두루맛볼 수 있는 곳이 중국 서부의 관문 충칭이다.창장산샤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기도 하다. ‘창장산샤’의 고조된 감정을 조금 가라앉히고 충칭 시내에 들어서면 한국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는 곳이 항일 독립운동가의 피와 한이서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해방되던 해인 1945년 1월부터 9월까지중국에서 27년 동안 처절한 독립운동을 벌였던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뜻깊은 장소이다.지난달 새단장을 했으나,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는 충칭의 현대식 건물과 대비돼 지난날 독립운동가들의 신고(辛苦)의 삶을 되새겨 준다. 해외를 관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점은 자국에서 느끼지못하는 ‘이국(異國)정취’일 것이다.이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거대한회교 사원풍의 런민다리당(人民大禮堂)이다.베이징(北京)의 런민다후이당(人民大會堂)보다 규모가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하다.그러나 다리당을 설계한 설계사는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충칭에 런민다후이당보다 더 크고 화려한 런민다리당이 들어서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마오쩌둥 (毛澤東) 주석이 노발대발하며 공사를 막으라고 지시했다고한다. 중국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주(大足)로 가면 된다.충칭시에서 160㎞쯤 떨어진 다주에서는 둔황(敦煌)·룽먼(龍門)석굴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석각(石刻)이 많아 중국 불교미술의 정수를 맛볼수 있다. 다주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40여곳의 석굴과 암벽에 50,000여개의 석각이 새겨져 있다.이곳의 석각을 모두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일반인들은 석각기술이 뛰어난 바오딩산(寶頂山)이나베이산(北山)의 석각만 보면 충분하다. 다주에서 10㎞쯤 떨어진 바오딩산의 대표적인 석각은 누운 자세로조각된 석가열반상과 송대(宋代)에 새겨진 천수관음보살상이다.석가열반상의 높이는 5m,길이는 무려 31m나 된다.여기서 2㎞쯤 떨어진 베이산의 석각은 처음에는 10,000개 이상이었으나 세월이 흘러 많이 파손돼 그리 많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충칭 시내의 기온보다 5∼7도가 낮아 피서의 명승지로 불리는 진윈산(縉雲山)은 ‘아열대 식물의 보고’로 통한다.아열대 식물이 1,700여종에 이르고 페이아수(飛蛾樹) 등 수많은 희귀족 수목이 자라고있다.산 초입에는 석회질을 함유한 베이(北)온천이 자리잡고 있어,진윈산에 올라 아열대 식물들을 둘러보고 굽이굽이 흐르는 시내와 계곡을거쳐 내려와 온천욕을 하면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가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 되는 기분이다. 서울∼충칭간에는 주 1회의 직항노선이 개설돼 있고,서울∼상하이∼충칭 코스도 마련돼 있다. khkim@. *옛 대한민국 임정청사. [충칭 김규환특파원] 충칭(重慶)직할시 쉬중취(市中區) 롄화츠(蓮花池) 38호에 자리잡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재복원공사를 끝내고 한국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지난달 한국의 독립기념관측과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진열관(舊地陳列館)측이 청사 5개동 전체의 낡고 헌 부분을 전면 개·보수하고 1호 청사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활동 전시실’까지새로 조성하는 등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는 대표적인 해외 항일유적지로 떠올랐다.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4월29일 농촌계몽 운동을 하다 망명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구 공원 의거로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심해지자 항저우(杭州)·창사(長沙)·류저우(柳州) 등지로 피해다니다 40년 충칭으로 옮겨왔다.그해 9월 이곳에서 대한민국의 정식 군대인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도·미얀마 등지에 참전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눈부신활약을 펼쳤다. 임시정부 청사는 대지 300여평(연건평 400여평)에 2∼3층짜리 건물5개동으로 돼 있다.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약 48평)보다 규모면에서는훨씬 크다. 1호 청사 1∼2층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시실이 마련돼있다.이곳에서는 광복군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기록영화도 상영하고 있어 당시 광복군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2호청사 1층은 임시의정원 회의실과 휴게실,2층은 외무부·외무부장실·외무차장실로 사용됐다.3호 청사 1층에는 내무부,2층에는 재무부,3층에는 김구(金九) 주석 사무실과 국무위원 회의실로 이용됐던 곳이다. 4호 청사 1층에는 외빈 숙소 및 주석 비서실이,2층에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숙소로 사용돼왔다.마지막 5호 청사는 외빈 접대소와 관리사무소 등이 설치돼 있다.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1)西安-延安

    *광복군-조선 의용군 마지막 활동지 西安-延安. 서안은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1천여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서주(西周) 서한(西漢) 당(唐)등 12개 나라의 왕도로 영광을 누렸던 도시다.따라서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적이 많다.우리의 항일유적지도 상당히 많다.조선청년전지공작대 주둔지,한청반 훈련장,광복군 전선사령부,그리고 미국 OSS(전략첩보국)과 합작해 국내진공을 준비했던 광복군의 흔적도 있다. 취재팀이 아시아나항공 직항편을 이용해 바로 서울에서 서안으로 날아간 것은 서안 교외에 있는 광복군 OSS훈련장을 먼저 찾아보기 위해서 였다.공항에서 차를 대절해 서안시 남쪽 25㎞ 지점에 위치한 광복군 제2지대 기지와 OSS 훈련장이 있던 두곡진(杜曲鎭)으로 향하는 길은 끝이 없어 보이는 짙푸른 옥수수밭이 이어진다.산이라곤 거의없는 황토고원지대인 이 지역의 주 생산물이다.안내인은 몇년전 한국에서 상영된 중국영화 ‘붉은 수수밭’도 이 지역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그동안 기자는 실크로드 답사를 위해 몇차례 서안을 지나간 적이 있다.그때마다 서안의 변화모습에 놀랐는데 이번에는 정말 몰라볼만큼달라져 있었다.새로 뚫린 서안시내 우회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창옆으로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있다.이따금 거대한 왕릉이 보였다.서안 외곽의 작은 시가지를 스쳐가고,참외·수박을 파는 저자거리를 지나고다시 평원이 나타난다.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리자 멀리 제법 높아 보이는 산이 나타났다.광복군 대원들이 OSS훈련을 받은 종남산(宗南山)이었다. 1945년 3월 15일 한국 광복군과 미군은 한미 군사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공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것.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해 연합군작전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한다는 것 등이었다.그리하여 서안 근교에 주둔한,‘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이 이끄는 제2지대가,안휘성 부양(阜陽)에서는 조선혁명군 참모장 출신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가 낙하산 강하 폭파,암호 무전통신 등 특수전훈련을 받았다.그리고 8월 11일을 국내진공일로잡고 작전계획을 세웠다.그러나 8월 9일,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은 연합국측에 무조건 항복을 통고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 잠입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취재진은 당시 제2지대 본부 겸 훈련소가 있던 곳을 찾았다.그곳은지금은 두곡 양참(糧站)이라 불리는 곳으로 서안시 양식국의 창고로변해 있었다.당시의 자취는 없고 창고건물에 둘러싸인 1,000여평의마당이 옛 모습을 암시할 뿐이었다.사무실로 들어가서 책임자인 진강정(陳康正) 참장(43세)을 만났다. “한국손님들이 더러 찾아옵니다.지난해에는 원로 몇 분을 모시고온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구보도 했지요” 문화혁명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노예묘’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도교사원이 있었는데 문화혁명때 완전히 없어지고 양참이 들어섰다고 한다.그는 측백나무 소나무 등 나무들이 우거져 거주지로 삼았던 것같다며 멀리 건너다보이는 종남산 아래에도 절이 있었다고 말한다.광복군 OSS 훈련대원들은 이곳에 본부를 두고 종남산 아래 종남사라는불교 사찰에서 훈련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두곡 양참을 둘러본 취재팀은 그곳에서 2㎞ 떨어진 인근의 흥교사(興敎寺)를 찾아갔다.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났던 고승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사리를 모신곳인데 신라유학승 원측(圓側)탑이 현장법사의 탑 옆에 천년의 세월은 안은 채 서있다. 그곳에서 차를 돌려 시내로 들어가는데 진 참장이 두곡에 있던 옛날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들려준 가슴아픈 얘기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예전에 한 한국인이 아이를 데리고 와 훈련받다가 그곳을 떠날 때 남겨두고 갔는데 아이는 그후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광복군 아버지가 남겨둔 그 어린 아이는 그 후 어찌 됐을까.지금 살았으면 아마 50살도 넘었을 텐데….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취재진은 서안 시내로 들어갔다.전지공작대와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를 찾기 위해서 였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경에서 나월한·김동수·김인 등 청년투사들이 조직한 아나키스트성격이 강한 단체였다.그들은 일본군 점령지 교란작전을 위해 전선에서 가까운 서안으로 이동,중국군 전시간부훈련단 안에 한국청년특별반(약칭 한청반)을 만들었다.수료생들은소위로 임관되고 뒷날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서 큰 역할을 했다. 서안 성내 이부가(二府街)29호,전지공작대가 주둔했던 자리는 중급인민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같은 골목의 4호,옛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장소는 유명한 당대(唐代)의 유물인 종루(鐘樓)로 향하는 길을 넓히면서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전지공작대원들이 장교교육을 받은 ‘한청반’ 자리는 지금의 서북대학 안에 있었다.백양나무 그늘이 시원한 현장을 찾으니 연병장은 잔디가 깔려 있고 일부는 도서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당시의 사열대는 국기게양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서안시내의 유적을 찾아본 뒤 취재팀은 한밤중에 침대열차를 타고중국 공산당 혁명성지인 연안으로 떠났다.연안은 서안 정북 방향,깊숙한 분지에 있다.중국 공산당의 장정(長征)과 관련깊은 곳이다.1934년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홍군 30만명은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화남(華南)의 비옥한 근거지를 버리고 행군을 거듭,최후의 근거지인 연안에 도착했다.남은 병력은 3만.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기반으로 국민당 군대에 저항하고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1930년대 후반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발전적으로 해체,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우리동포들이 많이 이주한 화북에 진출해서 투쟁한 대원들을 화북지대라 불렀다.그들은 김원봉이 이끄는 대본부가 광복군으로 통합되자 화북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의 지원을 받으며 인근의 태항산에서 싸우다가 연안으로 들어가서 해방을 맞았다.독립동맹의 대표는 유명한 국학자인김두봉,조선의용군 사령관은 김무정이었다. 침대열차는 에어컨이 잘 들어왔고 시설도 좋은 편이었다.이따금 터널을 달리는 듯 소리가 커져 잠을 깨곤 했는데 둔중한 느낌을 주며용을 쓰듯 달리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경사진 고원을 오르는 듯 했다.차창으로 새벽빛이 스며들어 창문을 여니 보이는 것이라곤 황토뿐이었다.벼랑에 뚫린 구멍이 있어 눈여겨 보니 그게 유명한 토굴집인 요동(寮洞)이었다.연안역 앞에서 만두로 아침을 때운우리는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이 있던 라가평(羅家坪)마을을 찾아갔다. 라가평 마을은 연하(延河) 위에 놓인 다리 건너에 있었다.마을어구비탈에 기념표시판이 있어 다가가 보니 조선혁명군정학교 자리 표지석이었다.먼지가 일어나는 비탈길을 올라 노인을 찾아 물었다.83세의 고영유(高零有)노인은 벼랑에서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모두 8개의 요동이 보였다.그곳에는 8개의 요동을 포함 모두 20여개의 요동이 있었는데 군정학교와 독립동맹,조선의용군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요동은 아무 보존조치를 취하지 않아 무너질듯 위태해 보였다. 다시 연하를 건너 동북쪽으로 달려가면 교얼구로 갔다.길가 버스정거장 장려한 천주교회당이 보였다.그것이 유명한 노신기념관으로 옛날에 노신예술학원으로 사용한 건물이었다.최근 다시 예술학원이 개교해 교사로 사용되고 있는데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가 김산(金山)을 처음 만난 도서관은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돼 있었다. 취재팀은 밤 기차를 탈 때까지 시간이 넉넉해 연안 서북쪽에 위치한 중국공산당의 여러 근거지중 모택동이 교시한 ‘문예강화(文藝講話)’ 현장이 그대로 보존돼있는 양가령(楊家嶺)을 돌아봤다.이밖에 연안시내 중심가에는 항일군정대학의 옛터가 보존돼있는데 이곳은 김산이 일본의 첩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숙청될 때까지 ‘일본경제사’를 강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안(중국) 박찬기자 parkchan@
  • ‘한·러관계의 미래’ 열띤 토론

    한·러 수교 10주년을 맞아 5일 오전(이하 한국 시각)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국립대 경영학대학 대회의실에서 대한매일과 한국언론재단의 공동 주최로 ‘새 천년의 한·러관계:한·러 수교 10주년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러시아 극동국립대 한국학대학이 공동 주관한 이 학술회의에는 서대숙 극동문제연구소장과 김삼웅 대한매일주필,이경일 한국언론재단 이사,발레리 디코제프 극동주립대 부총장을 비롯한 양국 관계자와 학자,학생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하루 동안 열린 학술회의는 눈문 발표에 이어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학술회의에서는 서대숙 소장이 ‘새 천년의 한·러관계:과거현재 미래’를 기조연설하는 등 양국의 학자 등 8명이 주제 논문을발표했다. 김상웅 주필은 인사말에서 “한·러관계의 태동 및 전개 과정,90년수교 이후 한·러관계의 쟁점과 과제를 진단함으로써 21세기의 새로운 한·러관계 수립에 기여코자 한다”고 말했다. 디코레프 부총장은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한국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면서 “학술회의가 한·러간 협력 확대와 교류 증진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 박재범특파원 jaebum@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0)美洲 거점 워싱턴DC·미디아市

    [필라델피아·워싱턴DC 김삼웅주필] 8월초 필라델피아시는 공화당전당대회 관계로 온 시가지가 시끌벅적하고 호텔방의 예약도 어려웠다.변두리 초라한 모텔에서 자고 오전 일찍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아시에 위치한 서재필박사 기념관을 찾았다. 대지 1.5에이커, 건물 4,000평방피트의 이 건물은 서박사가 1925년에 입주하여 1951년 서거할 때까지 25년동안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염원하며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기거했던 곳이다.이 유택은 1987년서박사기념재단이 구입하여 기념관 뿐만 아니라 한국이민 역사에 관한 도서실과 연구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박사가 쓰던 유물 가운데 역사적 유품은 이미 한국독립기념관으로이관되었으며 그밖의 유품들은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이지영사무총장의 설명이다.유물중에는 서박사의 손떼묻은 성경책과 일기장이 전시돼 있고 192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선생과 찍은 사진도걸려있다. 정원이 한국식으로 꾸며진 것이나 한국산 대나무를 심은것 등은 서박사의 조국사랑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 한다. 서박사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 나이로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세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미국과 인연을 맺었다.서박사는 1894년 갑오경장때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창립하고,1896년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해 국민의 독립정신을 드높이는한편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3·1운동 후에는 한국문제를 세계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구회(Friends of Korean)’를 조직,재미교포들을 결속해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두고 활약했다. 1922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돌렸고 1925년에는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했다.독립운동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러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강의하고 광복후 80세의 노령으로 미군정 고문으로 초빙되어귀국,노혁명가로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시국의 혼잡함속에서 세번째로 미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마쳤다. 서박사의 미국내 독립운동 사적지로는 1914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개최한 ‘한인자유인대회’의 장소와 1919년에 창설한 ‘한국통신부’건물을 들수 있다.한국통신부는 상해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산하인데도 불구하고 서박사의 노력으로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두고 독자적인 조직으로 활발하게 대미선전 활동을 벌였다.1919년 한국통신부는 필라델피아 체스넛 1524번지 웨이트맨 빌딩 825호에서 ‘한국평론(Korea Review)’을 발행하면서 국제사회에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했다. 서박사는 1920년 9월부터 한국통신부 바로 옆 체스넛 1537번지에 Philip Jaisohn Company라는 인쇄소와 문방구점을 운영하면서 ‘한국평론’을 발행하였다.8층 건물이었던 한국통신부 건물이 현재는 3층 건물만 남아 GAP outlet라는 의류체인점이 들어있다.인쇄소와 문방구가있던 건물도 신축되어 약품상이 입주해 있다.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등 유학생과 임병직 선교사 등 150여명이 모여 ‘한인자유인대회’를 열었던 필라델피아 17가 리틀극장은 지금도여전히 연극 전용극장으로 이용되어 고색창연함을 보여준다.필라델피아 역사보존회가 승인한 역사보존물(제391호)로 지정돼 있다.서박사 일행은 한인자유인대회에서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독립을 천명하고결의안을 채택한 다음 미국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 퍼레이드를 벌이고 한국통신부 설치를 결의했었다.서박사는 이 대회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필라델피아 미디아시 로즈 트리공원에는 서박사의 광복운동과 생애를 기리는 서재필박사 기념비가 세워져 이웃주민들의 발길을 멈추게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1880년대부터 대미외교를 중시하여 워싱턴시에 주미외교의 본산인 주미공사관을 설치했다.처음에는 박정양 공사가 워싱턴시의 스트리트 1513번지 3층 건물을 임대해 쓰다가 1891년 시 중심지인 15가 1500번지의 독립빌딩을 당시로는 거금인 2만5,000불을주고 매입,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현재 백악관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뻗은 버먼트 에버뉴가 13 번가와교차하는 노건로타리에 위치한다.주소가 로건 15번지다.이 공사관은대한제국이 국권을 일제에 빼앗길 때까지 공관으로 사용하다가 강제합병과 함께 주미일본대사에게 넘어갔다. 대한제국 황제 이희의 명의로 등기되었던 이 건물이 1910년8월29일주미일본대사 우찌다에게 공사관 건물과 토지일체가 어떠한과정을 거쳐 넘겨졌는지는 미궁으로 남아있다. 소유권이 넘어가고 곧미국인 홀트에게 매각되어 현재는 개인소유 주택으로 사용중이다. 워싱턴 한인연합회에서는 1998년 이 건물의 매입을 시도했으나 예산부족으로 중단했다.한말 풍운과 함께 조국의 비극을 상징하는 유서깊은 이 건물을 현지 교민의 성금과 본국정부 지원으로 매입하여 사료관 등으로 사용했으면 한다.붉은 벽돌조 콘크리트건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영사관의 한미외교사료실장을 맡아 근현대 한미관계사의 사료를 수집·정리하고 있는 노령의 양기백 박사는 직접 현장을 안내하면서 이 건물의 역사를 증언한다. 워싱턴구미위원회는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임되면서 이승만이 프랑스 파리의 주 파리위원회와 필라델피아 대한민국 통신부를 통합, 워싱턴구미위원회(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김규식·이대위·임병직 등이 업무를 수행케하였다 워싱턴 구미위원회는 창설때부터 1922년까지 노스웨스트 H스트리트1314번지 콘티넬탈 드르스트 빌딩에 본부를 두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워싱턴시 중심가에 있는 이 빌딩은 그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1951년에 신축한 뉴욕 에버뉴 장로교회가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지면서 옛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구미위원부는 1922년에 개최된 워싱턴 국제회의를 겨냥한 외교활동에서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뒤로는 활동이 현저하게 위축되었으며본부도 몇차례 옮겨 다녔다.1927∼1931년 구미위원회 본부였던 파크로드 1310번지의 붉은 2층 양옥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kimsu@
  • 극단 목화 ‘잃어버린 강’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과 극단 목화가 1년만에 신작을 내놨다. 서울연극제 초청작으로 5∼11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잃어버린 강’은 남북화합의 분위기에 때맞춰 일제치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작품.항일투쟁을 위해 토문강변 간도로 간 안중근이 한·청간의 국경문제로 설움을 받는 조선족을 보고,만주 북진을 위해 간도를 청국에 넘긴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뒤살인범으로 처형당하기까지의 과정이 속도감있게 펼쳐진다.극중에는일본군이 백두산 정계비의 흔적을 지우려하자 대한제국과 청의 두 관리가 후세를 위해 정계비를 빼돌리려 애쓰는 모습도 그려진다. 오태석은 “식민지에서 벗어나자마자 국토가 반동강이 나는 등 지난50년간 참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며 “우리가 잃은 것들중에 장차찾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자리로 무대를 꾸몄다”고 밝혔다.‘오태석 스타일’은 이 작품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우리말의 찰진 맛을 제대로 살린 독특한 어법,토속 내음 물씬한 몸짓과 소리,그리고 고무공처럼 튀는 비약과 생략 등 누가 보더라도 단박에 구별해낼 수 있는 그만의 연극작법이 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살아있다. 조상건 김병옥 김세동 등 ‘천년의 수인’이후 근 2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목화 고참’들과 박희순 황정민 등 ‘목화 386’들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무대라서 더욱 기대를 모은다.(02)745-3967이순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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