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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고춧가루 뿌리기

    ‘고추폭탄’이라는 게 있었다.항일 무장투쟁 초기에 유격대원들이 폭약과 고춧가루를 넣어서 만든 원시적인 형태의폭탄이다.터뜨리면 요란한 소리가 나며 눈과 코에 독한 자극을 준다.항일 관련 기록에 “고추폭탄으로 적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갖추었다”라는 대목이 있다.요즈음의 최루탄 비슷한 폭탄이었던 것 같다.예나 지금이나 ‘정신 못차리도록울게 하는’ 수단이지 살상 수단은 아니었던 듯 하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지난 2일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부토 전 총리는 김 전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은퇴한 전직 정상들이서로 초청해 우정을 나누고,한 때 통치했던 국가들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은 보기에 좋다. 그러나 이 전직 정상들의 대화에서 뭔가 찜찜한 대목이 있다.김 전 대통령은 “예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북한에 가있지만 그렇게 해도 북한 김정일은 한국에 절대 못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에 가겠다고 했던 것도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해 “한국에 대혼란의 시대가 왔다” “북의 술수에 말렸다”고 한 적이 있다. 측근이라는 모 국회의원이 전한 것이어서 김 전 대통령이그렇게 말한 뜻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다고 할 지라도 몇가지 의문은 남는다.정상들의 왕래와 교류없이 평화정착과 통일이 가능할까.김 전 대통령도 평양에 가기 직전에 김일성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되지 않았는가.남한이 북한보다 인구가 2배에 가깝고,교육수준도 높고,경제력도 월등한데 우리가북의 술수에 말리겠는가.정부나 국민들의 최대관심사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외국 손님에게 부정적으로 얘기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국정에 관한 전직 대통령의 충고는 ‘북한의 태도와 국제정세,남북 국민의식,현 정권의 역량으로 볼 때 앞으로는 이런식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예단하고,또 그렇게 되기를 주문(?)하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한반도 주변정세에 대한 성찰로서도 옳지 않다. ‘고춧가루 뿌리기’는 눈과 코만 맵게할 뿐이라는 점이그나마 다행이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
  • 국가보훈처, 美 첩보전략국 ‘냅코작전’자료집 출간

    일제말 미 첩보전략국(OSS)의 한반도 침투계획인 ‘냅코작전(Napko Project)’ 관련자료가 집대성돼 출간됐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미국에서 새로 입수된 자료 등을 모아‘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시리즈 제24권으로 발행했다. 대모험을 꾀한다는 ‘nap’과 ‘Korea’를 합쳐 만든 용어로 보이는 ‘냅코작전’은 1944∼45년 당시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가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한반도에 특수요원을 침투시켜 정보수집,거점확보,태업 등의 활동을 벌이려했던 작전이다. 이는 중국에서 광복군과 협동해서 추진했던 ‘독수리작전’과 함께 OSS의 가장 대표적인 대일 특수작전으로 불리고 있다.이 작전은 미국이 태평양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하여 추진한 것으로,재미한인들이 출기차게 요구한 한인 게릴라부대 창설요구와 그에 따른 특수부대 운용경험과 항일운동에 몸바치려는 미주지역의 애국동포들이 존재했기에가능한 것이었다. 재미한인들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직후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과 결합하거나 아니면 재미한인만으로 독립적인 한인부대 또는 게릴라부대를 창설,대일특수전·정규전에 자신들을 투입시켜 달라고 미군당국에 끊임없이 요청했다.당시 미국은 CIA의 전신인 COI(정보조정국,1941년7월 창설)를 통해 중국에서 대일정보를 수집하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李承晩)을 통해한인들과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한편 냅코작전은 1944년 중반 이후 장석윤(張錫潤·97·전 내무장관·경기 일산)이 위스콘신주 맥코이 포로수용소에 들어가 한인공작원의 명단을 확보하고 대강의 계획을수립하면서 본격화됐다.이 작전에는 장석윤·유일한(柳一韓·유한양행 설립자) 등 재미한인 10명,김현일 등 한인포로 6명,박순동(朴順東) 등 학도병 출신 3명 등 총19명의한인요원들이 참가하였다.이번 자료집에는 학도병 출신 3인이 버마에서 일본군을 탈출,이 작전에 참가하는 과정을보여주는 자료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냅코작전에 참가한 한인들을 연령별로 보면 20대 3명,30대 8명,40대 6명,50대 2명 등이며,이들은 안정된 삶을 추구할 수 있음에도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다.특히 재미한인출신 변일서(邊日曙)의 경우 대일전 참전을 위해 합의이혼을 했으며,이근성(李根成)은 공작원으로 침투하기 위해 미간의 사마귀 제거 성형수술을 받기도 했다.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한 섬에서 3∼4개월간 유격훈련·무선훈련·폭파훈련 등은 물론 침투용 잠수정을 제작,가상훈련까지 마친 상태였다.그러나 아깝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이들의한반도침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자료집의 해제를 쓴 정병준(鄭秉峻)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이들이 실제 전쟁에서 미친 영향은 미미했으나,태평양전쟁 말기 재미한인들의 독립운동사에 찬란히 빛날 공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이들의 항일투쟁활동은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 박사의 자료발굴로 90년대 들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이들 가운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일한 등 5명에 불과하다. 정운현기자 jwh59@. * 냅코작전 참여 장석윤은. ‘냅코작전’의 핵심인물로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장석윤(張錫潤·97·경기도 고양시 거주)전내무장관은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반도침투계획이 수포로돌아갔다”고 아직도 아쉬워했다. 1904년 강원도 횡성 출생인 장씨는 1923년 도미,밴더빌트대에서 수학·지질학을 전공한 뒤 LA한인사회 등에서 활동했다. 1942년 5월 미 육군에 입대하여 미군 첩보전략국(OSS) 1기생으로 졸업한 장씨는 1944년 7월까지 중국,버마,인도전구(戰區)에서 이승만 박사와 중경 임시정부,미군 사이의 연락관을 지냈다. 이후 OSS가 추진한 ‘냅코작전’에 참가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각종 특수훈련을 받았으며,나중엔 교관으로 근무했다. 해방후 귀국,미24군단 G2(정보처)에서 3년간 근무한 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내무부 치안국장,내무부장관을 거쳐3·4대 민의원을 역임했다.그와 함께 ‘냅코작전’에 참가했던 인사 가운데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작고)은 지난 95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으나 그는 아직 미포상 상태다. 그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조금 불편한 것 이외에는 건강도 좋은 편이다. 슬하에 딸만 넷을두었는데 심상필 홍익대 총장이 둘째,박태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세째사위다. 정운현기자
  • 5월의 독립운동가 ‘안규홍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전라도 일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벌인머슴 출신 의병장 담산(澹山) 안규홍(安圭洪)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과 공동으로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선생은 1879년 전남 보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0살때부터 20년간 머슴생활을 하다 러·일전쟁 이후 토지약탈등 일제의 침략을 절감,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고 농민을 살리겠다는 결의를 다졌다.이후 전남 순천의 강용언 의병부대에 투신,활동하던 중 의병장이 민폐를 끼치자 그를제거한 뒤 1908년 전남 보성군 동소산에서 토착농민과 해산군인 등을 모아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와 친일세력,탐관오리를 제거하겠다는 기치를 내건 선생의 의병부대는 보성과 순천 등 전남 중동부지역에서 활동하며 세금 징수원을 공격하거나 탐욕스러운 토호의 소작료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1909년 10월까지 1년6개월동안 일본수비대·토벌대·순사대와 26차례 전투를 벌여 파청대첩과 진산대첩 등 숱한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일제가 전남지역 의병을 상대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자 선생은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부대를 해산,고향으로돌아가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됐다.이후 대구감옥으로 옮겨져 1911년 5월5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정부는 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고이즈미의 일본/ (하)경제 회생될까

    ‘고이즈미 정권’의 새 경제팀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666조엔에 이르는 국가부채,늘어만 가는 은행들의 불량채권,곤두박질치는 주가와 환율 등 중병에 걸린 일본경제는지난 10년간 경제 대국 일본의 발목을 잡았을 뿐 아니라세계경제 침체의 큰 원인이었다. 재무상 시오카와 마사주로(鹽川正十郞),경제 재정상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금융상 야나기자와 하쿠오(柳澤伯夫) 등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경제각료 면면이 알려진 26일 도쿄 니케이 주식시장은 3개월만의 최고치를 갱신했다.시장은 고이즈미호(號)경제팀의 일본 경제회생에 전망을 낙관하는 분위기다. 고이즈미의 경제정책 기조는 ‘구조개혁 없이는 경기회복도 없다’는 것.‘선(先)개혁,후(後)경기부양’책으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에서 모리 요시로(森喜朗)정권으로이어진 ‘경기 자극형’정책과는 다른 각도다. 그는 금융·산업을 재생하고 구조개혁을 발판으로 경기를 부양하며 규제완화를 통해 새로운 산업과 고용을 창출하겠다고 밝혔다.심지어 “1∼2년 마이너스 성장을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신규 국채 발행은 연간 30조엔이하로 억제하겠다는 방침.고통이 따르더라도 국가의 신뢰도를 근본적으로 회복시켜 놓는 것이 경제회생의 길이며장기적 목표 아래선 대량실업 사태 등 부작용도 최소화만하면 성공이라는 입장이다. 해외 언론들도 고이즈미의 경제팀이 일단은 개혁성을 담보한 진용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유임된 야나기자와 금융상의 경우 부실채권에 허덕이는 일본 은행의 구조개혁을 과감히 추진해온 인물이다.98년부터 금융재건위(FRC)위원장으로 금융 위기를 진두지휘했으며 7개 은행을 국유화시킨 주인공. 다케나가 경제재정 IT담당상은 게이오대 교수출신으로 구조개혁과 규제완화 주창자다.특히 정보 기술업계의 경쟁력을 위해 니폰텔레콤(NTT)해체 등을 강력히 주장해왔다.일본 정부에서 대학교수가 경제각료로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전문가들은 고이즈미정권이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실시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준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원의 이우광 연구원은 “은행부실 채권처리등의 문제는 고이즈미의 대표적인 공약사항일 뿐더러 미국과 IMF 등의 압력도 있어 빠른 시일내 금융재생을 시도할것”보인다며 구조개혁에서 비롯된 대량 실업사태 등 최악의 시나리오만 아니라면 일본 경제의 불확실성은 어느정도 걷힐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당내 기반이 취약한 고이즈미의 추진력 한계,그리고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민에게 당장 고통으로 다가갈 이같은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점에서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않다. 오는 28일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서방선진 7개국(G7)경제장관및 중앙은행장회의에서 시오카와 재무상이 어떤 청사진을 제시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김수정기자 crystal@. * 日각료 “여성파워”…전후 최대규모. 일본 정치권에 ‘여성 파워’바람이 거세다. 일본 사상 첫 여성 외상 자리에 오른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를 비롯,문부과학상,후생상,국토교통상,환경상 등고이즈미 내각 주요 포스트에 여성 5명이 포진했다.전후최대 규모.각료급 및 각료 17자리 중30%를 차지한다. 고이즈미 총리의 파격적 인사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최근 일본사회에서 여성 정치인들의 파워가 급신장한반증이라는 분석이다. 국회와 내각,선출직 지방자치단체 수장 등 일본 정치세계는 남성 지배적인 사회였다.지난 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연립정권 시절 3개 각료직을 여성이 차지했을 때도 ‘여성파워’운운하며 떠들썩했다. 일본 여성계는 지난해 6월 총선에서 여성 후보가 14.4%나 출마,35명이 당선(7.3%)된 것을 계기로 일본 정치권의 실질적인 여성 파워가 형성됐다고 본다.현재 중의원 480명가운데 36명,참의원 252명 가운데 43명이 여성이다.중·참의원 전체 732명의 중 79명.10% 정도를 차지한다. 정당의 경우 특히 여성리더들의 활약이 눈부시다.오기 지카게(扇千景) 국토교통상은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보수당의 당수.사민당 역시 여성인 도이 다카코 의원이 당수를 맡고 있다.사민당의 경우 소속 19명 의원가운데 10명이 여성의원이다. 지난해 2월엔 오사카(大阪)부의 오타 후사에(太田房江)지사가 첫 여성지사로 당선됐고 이어 시오타니 요시코(潮谷義子) 구마모토(熊本)현 지사,도모토 아키코(堂本曉子)지바(千葉)현 지사가 속속 탄생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전 총리의 딸인 다나카 마키코 외상을 비롯,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전 총리의 딸인 유코(優子)등 여성 세습 정치인들도 한몫하고 있다.사상 최연소 의원기록도 지난해 6월 총선에서 당선된 하라 요코(25)가 세웠다. 김수정기자
  • [발언대] 홍구공원 의거 되새기자

    오는 29일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일본인들의 천장절 겸 중국과의 전쟁승리 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한 장거가 있은 지 69주년이 되는날이다.일본군 현지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다 일본거류민단장 등이 현장에서 폭사하고 일본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제9사단장 우에다,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을 비롯한 많은 일제의 주구들에게 중상을 입힌 쾌거였다.윤 의사는 우리 민족의 혼백을 지키고자 약관의 나이로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과 농촌부흥운동에 뛰어들었으며,일경의 감시로 더이상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불가능하자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긴 채단신으로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 선생이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국제사회에 이같이 독립의지를 알렸던 것이다.윤 의사의 의열투쟁은 당시 국제도시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의 침략을 주시하고 있던 전 세계에한민족의 불굴의 독립정신을 알리고,국내외 항일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윤 의사의장거에대해 당시 중국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백만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 용사가 단행했다”고 평가했고,이에 따라 중국에서 한국 민족이 독립운동을 활발히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윤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70년가까이 흘렀지만 윤 의사의 애국애족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민족정신의 귀감으로 남아 있다. 일본은 최근 역사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는 행동을 자행하고 있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우리 국민들은 이런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감정폭발에 그치지 말고, 범국민적인 민족정기 선양 운동에 나서야 한다.이를 위해 2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가르치는 역사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또 민족의 수난과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고 선열의 애국혼을 느낄 수 있는 학습 프로그램의 개발도 시급하다. 주영원 [부산지방보훈청]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고귀한 희생, 자랑스런 유산

    지난 22일 경기도 파주에서 있었던 영국 6·25 참전 50주년 기념식에 우리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참전 기념식이 치러진 파주군 설마리 일대는 영국군 글로스터셔 부대 650여명이 중공군 2개 사단에 포위된 상태에서 3일간 맞서면서아군의 주력부대가 안전하게 철수해 수도 서울 방어에 대비토록 했던 곳이다. 필자는 설마리 인근 고랑포에서 태어나 10대 초반의 소년기에 전쟁을 직접 겪으면서 성장했고 군생활의 중요한 시기를 그곳에서 보낸 관계로,이번 행사 참석에 개인적인 감회가 남달랐다.게다가 1시간30여분간의 짧은 행사였지만몇가지 인상적인 모습 때문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가 직접 참석,떨리는 목소리로 “참전용사의 자유수호정신을 계승해 군인으로서의 길을 성실히 걷겠다”며 전몰자에게 애도를 표하고 여왕의 메시지를 낭독하는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앤드루 왕자는 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전쟁당시 헬기조종사로 직접 전쟁에 참여한 인물이다.이것이바로 사회지도층이 누리는 명예와 지위에 수반되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참 모습이다. 또한 어린 자녀들의 손을 잡고 행사에 참석한 주한 영국인들의 모습에서 어린 세대에게 애국심과 공동체의식을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진지하게 행사진행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에는먼 이국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참전용사할아버지들의 모습이 존경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솔선수범하여 헌신하는 정신은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우리 역사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자기의 이익보다 의로움과 민족이라는 대아를 취한 선비정신,의병정신,그리고 일제하 독립정신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족정기가 그것이다.우리는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투사,6·25전쟁이 일어나자중동전 당시 이스라엘 유학생들의 참전보다 무려 17년이나 앞서서 자진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등 자랑스러운 전통과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다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선양하고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하는 데 소홀함은 없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주말에는 자녀들과 함께 서대문 독립공원이나 인천수봉공원에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탑을 다녀오는것이 어떨까.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선열들의 애국심을느끼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재달 국가보훈처장
  • 서울 중앙고생‘항일 현장’봄소풍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보다 훨씬 뜻깊은 하루를 보냈어요.” 18일 서울 중앙고 1학년 4개반 학생 200여명은 봄 소풍으로 서울 독립공원에 있는 옛 서대문형무소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 현장,3·1운동의 발원지인 탑골공원 등을 둘러봤다.다른 8개반 친구들은 서울대공원과 덕수궁으로 소풍을 갔다. 소풍의 주제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탑골공원까지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가다’.학생들은 오전 9시 서대문형무소를방문,국사 담당 최현삼(崔鉉三·35)교사의 설명을 들으며수많은 항일 독립투사들의 고초를 간접 체험했다.낮 12시에는 일본대사관이 있는 교보빌딩 앞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최로 열린 ‘456차 수요 집회’에 참석,위안부할머니들의 한맺힌 사연을 직접 들었다. 일본군 위안부 출신 황금주 할머니(82)가 “너희들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며 절규를 토해내자 학생들은 이내 숙연해졌다. 1학년3반 정창혜(鄭敞兮·16)군은 “일본의 잔학성과 역사 왜곡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한 기억에 남는 소풍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1학년9반 이기범(李基範·16)군은 “일본이 진정한 이웃이 되려면 우리 또래의 아이들에게도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편지 1,000여통을 일본대사관에 직접 전달한 뒤 3ㆍ1운동의 현장인 탑골공원에 들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당시 시위 모습을 재현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발언대] 日 왜곡된 역사인식 바로잡는 달 됐으면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정사(正史)를 벗어나 비뚤어지고 왜곡된 채 검정을 통과하였다.3·1절을 통해 선열의 숭고한뜻을 기리고 민족의식이 팽배했던 3월을 바로 이은 4월에벌어진 일이다. 이를 지켜보면서 힘과 경쟁의 논리가 우선하는 세계질서속에 올바른 역사를 고집하는 우리의 의지가 아직 미력하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1919년 4월13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지역과 종교와 이념의 대립을 극복하고 일제의 압제와 사슬 속에서도 한민족이 건재함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다투어 이권을 챙기고,강자를 위한 자유와 평화만이 존재하던 당시의 현실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은 구심점 없이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한민족 항일 독립투쟁을 조직적이고 체계화하여준 민족적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 역설했고,토인비는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원리”라 했다.그 말처럼 수동적 견지에서 다가오는 미래를맞기보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 견지에서 민족의 미래를만들어나간 선열의 의지가 경제위기와 일본의 그릇된 야욕으로 비뚤어지는 세계사를 바로잡는 실마리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는 조국광복을 찾기까지 27년여의 세월을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이사위한(以死爲限)하시고 무덤에서조차 나라 위한 숭고한 뜻을 전하고자 우리의 가슴속에 애국혼으로 자리하시는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이어받아 민족공동체의 하나된 힘을 길러나가야 할것이다. 그것만이 오늘의 자유대한을 물려주신 애국선열들의 공훈에 보답하는 참다운 보훈의 길이요,개개인의 힘이 국민적역량으로 결집되어 국가 전반에 걸쳐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2주년을 맞아 반세기 넘게 지지부진한 한·일관계에 대해 선열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느끼며,3월의 여세를 몰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있는 4월은 기필코 일본의 그릇된 망령을 영원히 잠재울수 있는 달이 되었으면 한다. 정 영 웅 청주보훈지청장
  • 북한이 자랑하는 3대 가극

    북한의 대표적인 공연물인 혁명가극 ‘피바다’가 지난 71년 초연 이래 3월 말까지 만30년동안 1,500회 공연 기록을세웠다.이는 일년에 50회씩 공연한 셈으로 세계공연사에서도 진기록에 속한다. 조선중앙방송은 지난달 31일자 보도에서 ‘피바다’의 1,500회 기념공연이 평양대극장에서 진행됐다고 이례적으로 동정을 보도했다.이날 강능수 문화상과 중앙예술단체의 책임자 및 문화 예술인들이 대거 극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피바다’는 혁명가극의 효시로 일컬어지며 ‘꽃파는 처녀’‘당의 참된 딸’과 함께 3대 혁명가극이다.북한에서는 ‘밀림아 이야기하라’‘금강산의 노래’를 묶어 5대 혁명가극이라고도 하지만 3대 가극에 비해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진다.북한이 자랑하는 3대 가극에 대해 알아본다. [피바다] 원제는 혈해(血海)이며 7장4막으로 구성돼 있다.3대 혁명가극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힌다.북한내부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주체적인 문예사상과 혁명가극 건설에 관한 방침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내린다.북한의 공연사에는 ‘혁명투쟁의 위대한 진리를 밝혀주는 불후의 고전명작’이라고소개하고 있다. ‘국악과 서양악기의 조화로 신비한 음악적 효과를 창출했다’고 북한언론이 극찬하는 배경음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김위원장은 60여곡의 노래를선정하기 위해 무려 1,200여곡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줄거리는 일제에 의해 남편을 잃은 주인공 을남어머니가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대열에 합류,혁명의 진리를 깨닫고 맏아들을 해방전투에 참여케 한다는 상투적인 내용이다. [꽃파는 처녀] 악독한 지주와 일제 순사에게 억눌려 살던꽃분이 일가의 생활상을 통해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김일성 주석에 의해 3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 첫 공연은 71년 12월에 있었다.지난 89년 제2차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단 교환방문을 위한 접촉과정에서 서울공연이 추진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당의 참된 딸] 71년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 아래 북한인민군협주단에 의해 창작됐고 공연됐다.‘인민상 계관작품’칭호를 받았다.6·25전쟁때 나이어린 인민군 간호원 강연옥이 갖은 고난과 시련을 뚫고 임무를 수행하다 장렬하게최후를 맞는다는 줄거리로 “공산주의자의 전형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인천공항 개항1주일 강동석 사장 인터뷰

    인천국제공항공사 강동석(姜東錫) 사장은 4일 “이르면이달 말부터 조기 체크인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라면서“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은 출국 하루 전에 미리 수속을밟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강 사장은 조기 체크인 제도가 도입되면 공항까지 걸리는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해 출발시간 4∼6시간 전부터 서둘러야 하는 여행객들의 불편을 덜 수 있을 것으로기대했다. 예를 들면 새벽 이른 시간에 출국하는 승객은 전날 밤 공항에 나와 모든 출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보세구역(CIQ)에있는 환승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출국 20분전쯤 탑승구로 나가 항공기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지난달 29일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항공기 운항일정 첫사이클인 지난 1주일 동안 별다른 사고없이 순항을 계속해안정 궤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천공항은 개항 직전까지만 해도 수하물처리시스템(BHS)의 오류가 잇달아 발생해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으나 항공기 이·착륙과 수하물 처리에 큰 문제는 없었다. 8년4개월여에 걸친 대역사(大役事)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강 사장을 만나 그동안 겪은 마음고생과 앞으로의 계획등을 들었다. ■‘순항’이라고 하지만 숱한 고비도 있었다.일단 합격점을 받은데 대한 소회가 있다면. 개항 전날만 해도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이었는데 시스템이 안정됐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심리적으로도조금씩 안정되는 것 같다.그러나 최소한 100일,성수기인 7,8월은 겪어봐야 결론이 나올 것으로 본다. ■지난달 29일 일정에 맞춰 성공적으로 개항한 뒤 어떤 말이 있었는지.또 나름대로 파악한 문제점은 무엇인지. 당일 오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으로부터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무사히 개항하게 돼 축하한다’는 전화를받았다. 정부 관계자 등 여러분의 격려가 있었지만 ‘조금이나마 기대에 보답한 것 같아 감사하다’는 대답만 드렸다.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막상 개항하고 나니 담담한심정이었다. 개항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예상치 못한문제점도 곳곳에서 돌출했다.공항이용 안내판의 경우 직접돌아보고 설치 위치, 내용,행선지소개방법 등에 대해 3차례나 보완지시를 내렸으나 이용자의 편에서 보는 것과는역시 차이가 났다.음식점도 숫자는 적지 않으나 이용객이몰리는 식사 시간대에는 1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등 불편이크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직원 5명으로 특별당직팀을 만들고 여객터미널 중앙홀에 당직사령을 배치,순찰팀과별도로 24시간 순찰을 통해 승객들의 불만과 사건·사고예방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개항 전후로 가장 긴장됐던 순간은 언제였으며 그 고비를 어떻게 넘겼나. 개항 전야인 28일 밤이 가장 긴장됐던 것 같다.개항을 불과 몇시간 앞둔 상태에서 입주할 업체,기관 등에서 이삿짐을 다 정리하지 못해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함께 걱정하다 29일 새벽 4시 잠깐 눈을 붙이려고 숙소로 가는데엎친데 덮친격으로 함박눈까지 내렸다.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러나 4∼5분만에 눈이 그치자 주변이 일부러 청소한 것처럼 깨끗해진 것을 보고 ‘하늘이 도우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30여분 뒤 방콕발 아시아나 여객기의 첫 착륙때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신에게 감사했다. ■8년4개월에 걸친 공항 건설과정에서 잊지 못할 추억이나보람이 있었다면. 언론에서 여객터미널 공사현장 지하실에 누수가 있다느니,입찰비리 의혹이 있다느니 하는 등의 질책을 받았을 때는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동갑내기인 아내로부터도 ‘국가의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의심을 받아서야 되느냐.어느쪽으로도 기울지 않도록 일처리는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는당부를 들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국민들의 걱정을 사고 있다는 점에서 송구스러웠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질타가오늘날 더욱 탄탄한 공항을 건설하는데 채찍질로 작용한것 같다.공항공사 임직원들은 물론,시공에 참여한 업체들도 ‘한점의 부끄럼도 없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며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 ■공직에 오래 근무하다 낯선 일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새로운 경험담이 있다면. 독일 뮌헨,일본 간사이,말레이시아 세팍,홍콩 첵랍콕공항등 웬만한 공항은 빼놓지 않고 둘러봤다.중국 푸둥공항등 인천공항과 같은 신공항,특히 동북아 중추공항을 꿈꾸는 ‘경쟁 공항’은 3∼4차례 다녀왔다.미국 콜로라도주의덴버공항은 완공 뒤에도 첨단시설의 오류가 잦아 2년씩이나 개항을 늦췄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덴버공항을보고 나서 서두를 필요 없이 ‘배우면서 건설하자’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게 됐다. ■수하물처리 등 반자동시스템에 대해 걱정이 많다.부실공사 의혹도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데. 개항 이후 실제로 나타났듯 반자동화시스템이 승객들에게큰 불편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환승객들의 입장에서보면 보세구역까지 수하물을 직접 옮겨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시공 부실은 ‘제로’라고 장담한다.단지 화장실 타일 등 마감처리가 매끄럽지 못한 점이 발견돼 보완중이다. ■제2의 도약을 위한 청사진이 있다면.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은 새로운 세기에 첫번째 개방정책이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해 이뤄졌다는 측면에서한국이 아시아는 물론,세계를 주도해나갈 수 있다는 민족사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강 사장은 지난 달 29일 ‘작은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6년여 동안 기거해온 컨테이너 막사에서 아내와 설렁탕으로 저녁식사를 하며프랑스산 포도주 2잔을 들이켰다고 전했다. 영종도 송한수기자 onekor@
  • 4월의 독립운동가 유림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는 2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단주(旦洲)유림(柳林)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과 공동으로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189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1년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한편으로는 계몽운동을,다른 한편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항일운동을 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안동 임동면 장터에서 협동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신채호 선생을 도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이 때 선생은 무정부주의를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수용했다.1931년 ‘원산 흑색사건’으로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10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대표로 참여했고 임시 의정원의원,외교위원회 연구위원,선전위원회 선전위원,무임소 국무위원 등을 지냈다.1945년귀국한 선생은 ‘독립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신문’을창간,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보호에 힘쓰다 1961년 4월1일68세를 일기로세상을 떠났다.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심규철 의원의 해명 “”처첩발언은 평소의 언론개혁 소신””

    ‘처첩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한나라당 심규철(沈揆喆)의원이 개인 홈페이지(www.shim114.co.kr) 자유게시판을통해 “표현상 약간 부적절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평소 언론개혁 소신과 동일하다”고 해명했다.‘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지난달 21일 발언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발언 경위를 묻는 서한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A4용지 3장 분량인 그의 해명은 언론개혁의 당위성과 공인으로서의 책임의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자기변명과 정파적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편견과 이중 잣대 심 의원은 “정부 대변지 역할을 해온 대한매일이 특정 신문 죽이기에 앞장선 것은 정부가 언론탄압 차원에서 특정 신문 죽이기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 의원은 그러나 대한매일이 지난 98년 제호를 바꾸면서부끄러운 과거와 단절할 것을 선언하고,독립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있다.심 의원의 발언 당일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이 대한매일 민영화 방침을 천명한 것도 대한매일 구성원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심 의원으로서는 현실인식을 결여한채 독선과 선입견에 얽매여 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특히 심 의원은 최근 조선·동아일보의 일제 당시 친일행각을 다룬 언론보도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반면 문제의발언을 할 당시 항일언론으로 첫발을 내디딘 대한매일을거론하며 “일제때 총독부 기관지가 친일문제를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고 따졌다. 조선일보 등이 그 동안 현 정권을 강도높게 비판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심 의원이 내세운 언론개혁의 잣대가 특정 정파나 족벌언론쪽으로 편향,왜곡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관된 자기변명 심 의원은 공개 답변에서 “자사의 이익을 위해 본 의원을 비난하는 데 지면을 활용한 대한매일이 언론개혁의 대상이 아니고 주체라고 생각하는가”라고민변에 되물었다.하지만 심 의원의 반문은 본인의 망언을합리화하고 문제의 초점을 흐리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다. 면책특권을 악용,경박한 낭설을 내뱉고는 “항간에 회자되는 의견을 전했을 뿐”이라고 발뺌하는 국회의원이야말로 진정한 개혁대상이라고 시민단체와 네티즌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또 대한매일은 ‘자사의 이익 추구’가 아니라 ‘명예 회복과 진실 규명’ 차원에서 시비를 가렸다는 점을 심 의원은 간과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 의원은 이번 공개 답변에서 족벌언론과 권언유착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대한매일의 언론개혁 관련보도를 객관적 검증 절차없이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박찬구기자 ckpark@
  • 안성 4·1항일정신‘우뚝’

    1919년 3·1의거 당시 남한에서 가장 격렬하게 독립항쟁을 벌인 경기도 안성에 이를 기념하는 ‘안성 3·1의거 기념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다.안성시는 지난 99년부터 국비 7억여원 등 총공사비 43억원을 투입,의거 현장인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186일대 1만평에 기념관·사당·전시관·기념탑 등을 갖춘 성역을 조성해 왔다.공사는 마무리단계여서 5월중 정식으로 문을 열 예정이다. 1919년 4월1일 원곡·양성 두 면의 주민 2,000여명은 일제 식민통치기관인 경찰관주재소 등을 불태우고 일본인들을 몰아내 이틀간 이 지역 4개면을 해방시켰다.그러나 이틀뒤 일본 군·경이 투입돼 투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일제는 이 시위를 포함해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평북 의주군 옥상면 등 3곳에서 발생한 만세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했다. 이 일로 무자비한 고문 등을 겪어 주민 24명이 목숨을 잃었고(옥중 순국자 9명 포함),127명이 기소돼 최고 12년(2명)까지 징역형을 받았다.민족대표 33인의 형량이 대개 3년 이하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중형이 아닐 수 없다.지난 96년 3월까지 100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일부도(道)의 전체 서훈자보다 많은 수치다. 독립기념관 이정은 연구원은 “안성지역 만세의거는 전주민이 조직적으로 투쟁을 전개한 데다 공격적으로 일제축출을 시도한 점이 특징”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인천국제공항 개항/ 첫 착륙 순간

    ‘여기는 아시아나 OZ 3423,착륙을 허가해 달라…’ 아시아나항공 방콕발 B767-300 3423편 노은상(盧銀相·42)기장은 29일 새벽 4시40분 영종도 남쪽 10마일 상공에서 다소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인천국제공항 관제탑에 착륙허가를 요청했다. ‘인천 신공항의 첫 입항을 축하드립니다…’착륙을 허가하는 오장섭(吳長燮) 건설교통부 장관의 목소리에도 긴장과설레임이 담겨있었다. 인천공항 하후호(河侯鎬·30) 관제사와 첫 교신이 이뤄진지 5분만인 새벽 4시45분 아시아나 항공기는 33번 활주로에개항을 경축하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안착하는 순간 오 장관과 공항공사 강동석(姜東錫)사장,관제탑에 근무중이던 8명의 관제사들은 일제히 두 손을 치켜들며 환호했다.승객 245명과 조종사,승무원들도 샴페인을터트리며 자축했다. 노기장은 새벽 4시15분쯤 천안 상공으로 들어서자 대구공항 관제탑으로부터 “도착 시간을 조절해달라”는 무선을받았다. 역사적인 개항일이니만큼 운항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천안 상공에서 10분 동안 선회비행을하며‘시간 죽이기(kill-time)’를 해야 했다. 이어 대한항공 소속 홍콩발 608편도 7분 뒤인 새벽 4시52분 신공항 활주로에 도착했다. 영종도 송한수기자 onekor@
  • “조선조 호국사찰 가산사 성역화해야”

    임진왜란 당시 승군(僧軍)·의병의 훈련장이었고 승병장·의병장의 영정을 봉안,조선조 당시 호국사찰로 불린 충북 옥천의 가산사.일제강점기 ‘불온사찰’로 낙인찍힌 뒤 쇠퇴의 길을 걸어온 이 사찰을 이제라도 국가에서 사적으로 지정,성역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영호 한국교원대 교수(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장)는최근 나온 자료집 ‘호국도량(道場)옥천 가산사’에서 가산사(주지 지승스님)의 내력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같은주장을 폈다.정교수에 따르면,가산사는 신라시대 창건한고찰로 임진왜란 초기 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혁혁한 공을 세운 중봉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셔 구한말까지 해마다 제사를 지내온 유서깊은 호국사찰이라는 것.무명사찰이던 가산사는 임란 발발 직후 인근 율티에 우거중인 조헌이 의병을 모집,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였고,공주에서 기의(起義)한 영규대사가 연합작전을 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임란후인 숙종 원년(1675년)에는 조정에서영규대사의 공을 높이 사 호국사찰로 지정하는 동시에 두분의영정을 봉안하고 사찰을 중수하였다. 가산사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 때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일제는 이곳이 항일운동의 기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불온사찰로 지목하고는 영규대사와 조헌의 영정을 강탈하고법주사의 말사로 지정하는 등 위상을 격하시켰다.두 분의영정을 모신 영정각에는 현재 위패만 남아 있는데 지난해충청북도가 ‘기념물’로 지정한 바 있다. 정영호교수는 “일제시대 이후 퇴락하여 명맥만 유지해온 가산사에 영규대사·조헌선생 두 분의 영정을 새로 봉안,호국 성지(聖地)로 새롭게 일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가산사 내 영정각·산신각은 조선후기 건립된 건축물로 국가 차원의 지정문화재로 지정,보호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가산사 주지 지승스님은 “가산사 인근에는 임진왜란 관련 사적이 많이 남아 있어 상호 연계할 경우 국민적 정신교육의 장으로 할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신공항 개항 D-1/막바지 이사 대작전

    “여기는 ××××호.인천공항 기점 20.5㎞까지 이상 없다.오버.” 인천국제공항 개항을 이틀 앞둔 27일 신공항고속도로에들어선 대형 트럭들은 선두차와 이같은 교신을 주고받으며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항공사,세관 등 김포공항의 상주기관과 운송업체,음식업소 등 입주업체들의 이삿짐을 실어나르는 대형트럭 500여대는 오색 깃발까지 내걸어 장관을 연출했다. 김포공항 계류장에는 무게 40∼60t에 이르는 토잉트랙터가 실린 대형 트레일러와 ‘공항 이전 물류 운송차량’이라고 적힌 깃발을 단 트럭들이 시동을 걸고 대기하는 등최대의 ‘이사작전’이 시작됐음을 실감케 했다. 항공사들은 물류운송 차량에 대해 최고 10억원의 대물보험과 운전 및 통제요원 1인당 1억원의 손해보험까지 들어사고에 대비했다.또 김포공항과 신공항고속도로 중간지점,인천공항 등 곳곳에 이전상황실을 설치해 중간상황을 체크했다.5∼11t 트럭 3,322대분의 총 이전물량 가운데 45% 정도인 1,520여대분이 28일부터 개항일인 29일 오전 5시까지인천공항으로 옮겨진다. 한치의 차질도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수송 직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운송비만 35억원,10t트럭의 고속도로 왕복 통행료만도 7,500만원에 이른다.특히 항공기34대가 인천공항으로 차례로 날아가는 28일 밤에는 이번이전작업의 최대 ‘에어쇼’가 연출될 전망이다. 인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단도 이전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철야로 2교대 근무하는 ‘종합상황반’과 ‘관리지원단’을 각각 200여명으로 확대 운영키로 했다.공항공사측은 원활한 이전을 위해 경찰의 협조로 트럭 1,015대분의이전물량과 1,200여명의 운영요원이 투입되는 28일 낮 12시부터 29일 오전 4시까지 신공항고속도로의 일반차량 진입을 금지한다. 영종도 송한수기자 onekor@
  • 인천공항 운영시스템 아직도 불안

    개항식까지 마친 인천국제공항이 막바지 개항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건설교통부 당국자는 23일 “오는 29일 개항일까지는 수하물처리시스템( BHS)등 각종 첨단 운영시스템의 안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BHS 등 운영시스템은 개항을 6일 앞둔 이날까지도 완벽하지는 않은 상태.건교부와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일단 ‘결정적인’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하지만 개항을 엿새 남겨놓은 인천국제공항에 또다시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다.23일 오후 2시 인천공항 여객터미널 3층 출발선E,F 체크인카운터 라인에서 실시된 대한항공자체 리허설 중 수하물처리시스템(BHS)이 15분만에 갑작스럽게 멈춰섰다.BHS는 사고 20분만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항공사 공용시스템(CUS)과 연결된 체크인카운터 24개에 설치된 단말기 가운데 4대가 다운됐다. 개항 전후에 시스템 불안으로 인한 작은 오류는 한두번씩계속 발생할 가능성이 크지만 수동 백업시스템을 모두 갖춰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판단이다. 개항일이 다가오면서 인천공항의 관제권 행사와 비행로설정,항공운항 스케줄 등도 하나하나 확정되고 있다. 건교부는 국방부와 주한미군사령부가 서해안 공중전투훈련장(ACMI)의 동북편(397㎢) 등의 공역을 1만4,000피트에서 1만1,000피트로 축소해 서울접근관제소 관할 공역으로편입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인천공항에 입·출항하는 민간 항공기가 운항하는 폭 18km의 비행로가 서해안 군산∼인천 구간에 설정됐다.공사측은 공항 주변의 비행로를 김포공항 18개보다 2배가 많은 37개로 확정했다.개항시점의 비행로는 계기비행 이·착륙 비행로 20종,공항 출발 또는 접근 비행로 17종등이다. 김포에서 영종도로 옮겨온 서울접근관제소는 이날부터 인천국제공항에 EUROCAT2000 시스템을 이용한 첨단 관제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서울접근관제소에는 120명의 관제사가 24시간 근무하며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에서 하루에이·착륙하는 항공기의 최저 안전고도,충돌 가능성,위험지역 침범 등의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이도운기자 dawn@
  • [사설] 심규철의원의 망언

    민의의 전당(殿堂)인 국회에서 ‘처첩(妻妾)의 사랑싸움’이라는 저질 발언이 나왔다.그것도 현역 의원의 입에서다.한나라당 심규철(沈揆喆)의원은 16일 국회 문광위에서“대한매일과 또 다른 어떤 신문이 특정 신문을 공격하는것은 정부에 잘보이려는 처첩간의 사랑싸움 같다”고 ‘막말’을 해,파문을 일으켰다.그는 별도로 배포한 자료에서“항간에서는 50여년 동안 함께 산 처(대한매일)가 서방(정부)에게 잘 보이려고 아무리 분을 바르고 단장을 해도 10여년밖에 되지 않은 젊고 세련된 첩(H신문)을 이길 수 있느냐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명색이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내뱉은 이같은 ‘망언’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그런 수준의 인사가 국회의원으로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국민과 국회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기 때문이다.심씨는 자신의 주장을 떳떳이 내세우지않고 ‘항간에 떠도는 말’이라며 대한매일을 음해했다.‘아니면 말고’식의 치고 빠지는 비겁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그는 또 “대한매일은 일제 때 총독부 기관지인데,그런신문이 일부친일 행태를 비판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그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옳다.그러나 그는 대한매일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그리고 서울신문과 대한매일의 차이점을 모르는 것 같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언론을 다루는 국회 문광위원인지 기가 막히지만,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겠다. 대한매일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는 구한말 항일구국운동의 구심점으로 대표적 민족지였다.그러나 1910년 한일 병합과 함께 일제는 신문사를 탈취하여 매일신보로 제호를바꿔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해방 뒤에는 매일신보가일본인 적산(敵産)으로 처리돼 정부에 귀속됐고 서울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역대 정권의 대변지 구실을 해왔다.그러다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1998년 11월 대한매일의 제호를 되찾고 ‘공익정론지’로 거듭날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대한매일 구성원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거울 삼아 ‘공익정론지’로 거듭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정부가 대주주인 현재의 소유구조로는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소유구조개편에거사적인 노력을기울였고,마침내 정부의 민영화 천명을 받아내기에 이른것이다.적어도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사실이 이러함에도 심씨의 망언은 대한매일 구성원들과독자들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심씨의 망언을보며 지역구 주민들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심씨 스스로 대한매일 구성원과 독자,그리고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국회를 떠나는게 유권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본다.
  • [기고] “공적소유 모델지향 언론발전의 분수령”

    대한매일이 정부소유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예고는 한국언론의 발전에 하나의 분수령이 될 뿐 아니라 특히 올해의 화두인 언론개혁의 흐름을 촉진하는 촉매 구실을 할 것으로 평가된다.그동안 대한매일신보사 내부에서는 정부 소유지분을줄여나가고 사원들이 대주주가 되는,즉 독립한 공적 소유 모델을 지향해 왔다.따라서 정부가 16일 대한매일 소유를 포기할 것이라는 의사를 내비친 것은 의미가 크다. 대한매일의 소유구조 개편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명실상부한 독립신문으로 다시 나고자 하는 데에 있으며,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그런 당위성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무엇보다 언론으로서 제자리를 찾기 위한 역사적노력이라 할 수 있다.대한매일은 구한말 구국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대표적인 민족지였다.그래서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오히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는 굴욕을 겪었다.해방후에는 일본인의 적산으로 취급되어 정부에 귀속됐고 제호도 서울신문으로 바뀌었다.그 뒤로는 역대 정권의 지배하에서 항상 권력의 대변지 노릇을 해왔다. 지난 98년 11월 대한매일이란 제호를 되살려 재창간을 선언한 것도 이런 과거를 접고 새로 태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고할 수 있다.그렇지만 제호를 바꾼다고 해서 정론의 정신이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 소유의국영신문이란 껍질을 벗는 일이다.그래서 대한매일로 하여금 진정한 언론의 면모를 갖추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대한매일의 소유구조 개편은 언론개혁의 시발점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대한매일은 재경부가 49%,포항제철 36.7%,한국방송공사 13.3% 등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99%의 지분을 갖고 있다.이런 소유구조는 재벌·족벌·종단이 소유권을 장악한 다른 신문과 별반 다를 게 없다.대한매일의 경우 지난해 11월 편집국장직선제 도입으로 편집권의 독립은 어느정도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언론사 대주주가 인사와편집까지 장악할 수있는 전일적인 소유지배 관계에서,사원과 노조는 자사이기주의에 함몰돼 자율적으로 언론개혁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언론계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이다.지금 언론개혁의 목표인 대주주의 편집 간섭을 막고 편집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소유지분 분산을 내세우는 마당에 대한매일도 결코 예외일 수가 없다.이런 점에서 대한매일의 대주주인 정부가 과연 족벌신문의 문제점을 비난할 자격이 있겠는가? 지금 정부가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면우선 대한매일의 소유구조 개편을 통한 위상 재정립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정부는 대한매일 장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예컨대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신문인데 굳이 민영화해 봐야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라고 정부가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대한매일을 장악해 여론조성 효과를 노리는 것도 잘못된 판단이다.현정부가 대한매일을 권력의 대변지로간주한다면 그것 또한 과거 역대 독재정권의 자세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언론 문제에 대해선 현정부가 과거의어떤 정부와도 다르다는 것을 국민 앞에 분명히 보여주는 잣대가 바로 대한매일의 소유구조 개편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동황 광운대교수·언론학
  • 김한길장관 대한매일 소유구조개편 방침 천명 의미

    정부가 대한매일과 연합뉴스 등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의 16일 국회 발언은 국영 매체의 소유구조를 개편하겠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이로써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이 언론사들이 독립·공익언론으로 거듭나는 문제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이제 남은 것은 시간 문제다. 국영 매체의 민영화 문제는 지난 대선때 김대중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건 사항이어서 현정권 출범후 학계는 물론 시민단체·정치권에서도 꾸준히 논의해 왔다.대한매일은 지난해부터 사내에 노사 공동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이같은 논의에 대비,다양한 의견을 이미 수렴한 상태다.연합뉴스도 지난해 9월 신임사장 취임을 계기로 이 문제를 본격 논의해 나름대로 방안을 모색중이다. 그러나 정작 관련부처에서는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이 없던것이 사실이다.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현정권의 국영매체 민영화 의지가 퇴색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그러다가 최근 김대통령의 언론개혁 발언을 계기로,국영매체의민영화 문제는핫이슈로 부각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시작했다.급기야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 장관이 국회에서 대한매일의 민영화 방침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정부당국의 이번 대한매일 민영화 방침 천명은, 대한매일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가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권력집단의 홍보지로 전락한 뒤 90여년만에 ‘권력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꿔 총독부 기관지가 되었으며,해방후에는 다시 서울신문으로서 역대 정권의 대변지 구실을 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성향의 보도태도를 유지했고,해방후에는 친 정부·여당의 논조를 보여온 사실을 부인할 수없다. 대주주인 정부가 친정부성향의 인사를 임원으로 파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이같은 연유로 민중에게서 철저히 배척받아 왔다.1960년 4·19혁명 당시 서울신문 사옥은 성난 민중에의해 불탔으며,80년대 민주화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된 시절에는 민주화운동 진영으로부터 취재 거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번 정부당국의 민영화 방침 천명으로 대한매일은 환골탈태의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98년 11월 서울신문에서대한매일로 제호를 되찾으면서 고급정론지,즉 공익언론으로거듭날 것을 천명한 바 있다. 이같은 의사 표명은 그동안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사에 대한진정한 반성이자 시대적 요청이라고 판단한 결과라 할 수 있다.특히 거대 민간상업지가 족벌·종교 소유 아래서 막강한자본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경영과 함께 여론시장을 독점하는 현실에서 공익언론의 출현은 시대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이는 언론개혁의 본질적 사안이기도 하다.대한매일의 소유구조 개편 추진을 두고 일각에서 이를 언론개혁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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