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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개 비롯한 한국 시·소설도 번역해 볼래요”

    “날개 비롯한 한국 시·소설도 번역해 볼래요”

    “이란과 한국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같은 아시아 문화권이기도 하고 남녀와 친척관계 등 사회적 풍습이 비슷하지요.” 주한 이란대사관에 근무하는 모르데자 솔탄푸르(49) 참사관이 이란 동화를 한국어로 처음 번역 출간해 화제다. 이란의 유명한 그림책 작가 화리데 칼라트바리의 ‘블루 피플’(큰나 펴냄)로, 샤갈의 그림을 바탕으로 소녀의 외로움과 소통의 중요성을 다룬 작품이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지내면서 외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그 반대로 한국어로 번역출간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21일 오후 서울 한남동 주한 이란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출판사 대표와 우연히 만나 (‘블루피플’을)정하게 됐다.”면서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고 슬퍼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몇가지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란과 한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큰 부담은 없었다고 부연했다. ●북한 유학… 남한서 한국문학 석사학위 모국 이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문화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1986년 한국어 전문가를 육성하려는 이란정부의 지원으로 김일성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졸업 후에는 이란 외무부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의 주한 이란대사관으로 옮겼다. 평소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국의 식민지 소설 등을 틈틈이 접하면서 재미에 흠뻑 빠졌다. 내친김에 연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뒤 2001년 ‘한국사회의 역사적 변동과 한국 근대소설의 흐름’이란 쉽지 않은 논문주제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연세대 최유찬 교수의 권유와 지도역할도 있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란은 물론이고 한국에 머무는 이란인 중에서도 한국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며 웃는다. “20세기 초부터 한국문학의 흐름을 꿰보는 일이지요. 일제 때의 항일문학, 1970년대의 노동운동,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입니다.” ●“박경리 토지·이광수 흙 관심있게 읽어” 그는 이상의 ‘날개’, 박경리의 ‘토지’, 이광수의 ‘흙’을 관심있게 읽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앞으로 ‘날개’를 비롯, 한국의 시와 소설을 번역하는 일에 역점을 두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은 어린이가 커서도 페르시아문학을 이해하듯이 이란동화를 번역하는 일도 틈틈이 해보겠다고 말했다. 슬하에 딸 셋을 두었으며 큰딸(22)은 평양, 둘째는 이란, 셋째(10)는 서울에서 태어나 출생지가 3개국이다. 이들도 한국어를 조금씩 구사할 줄 알며 부인 역시 한국문화를 깊이 이해하려고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김문 부국장 km@seoul.co.kr
  • 통일학교 교사 항소심도 유죄

    부산지법 형사합의3부(부장 홍성주)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내용을 교재로 만들어 사용한 혐의로 기소된 전교조 부산지부 소속 교사에 대한 항소심에서 한모(47) 피고인 등 교사 3명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양모(33) 피고인에게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각각 선고했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통일학교 교재가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의 선군정치를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등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일성을 노골적으로 찬양한 부분은 삭제했고, 특정 교사를 상대로 한 자료였던 점 등을 고려해 원심보다 형을 낮춘다.”고 덧붙였다. 1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모두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한씨 등은 2005년 10월 18일부터 11월 1일까지 매주 화요일 전교조 부산지부 강당에서 사회와 도덕, 역사과목 교사 등 30여 명을 대상으로 통일학교를 운영하면서 북한의 역사책인 ‘현대조선력사’의 내용을 발췌해 만든 교재로 김일성 중심의 항일투쟁사 등을 교육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일제 이전과 광복 후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동안 경제사가들 사이에는 이른바 ‘근대화론’과 ‘수탈론’이 대립해 왔지만, 이는 경제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먼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을 낙후된 ‘봉건국가’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광복 후의 ‘대한민국 근대화’를 일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따라서 이 견해는 일제시대를 긍정하는 이론인 동시에 일제 이전의 자생적 근대화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이 이론을 따르는 학자는 거의 없다. 18세기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시기에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실적이 충분히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수탈론·근대화론은 경제적 측면만 부각 더욱이 ‘근대화론’은 한국인의 치열한 항일운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극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제시대를 ‘노예상태’로 이해하고 목숨을 던져 투쟁한 것은 ‘근대화’의 고마움을 모르는 무지한 행동이었던가? 또 광복후 대한민국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망국의 수치를 씻으려는 자존심의 폭발이 응집력을 높였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탈론’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일제에 저항한 것은 수탈에 대한 저항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말 의병운동은 경제수탈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국권 박탈에 대한 저항이었고, 일제시대의 항일운동도 마찬가지다. ‘근대화론’이나 ‘수탈론’이나 한국인의 드높은 ‘주권정신’과 ‘문화적 자존심’을 무시한 이론이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은 17세기 중엽부터 찾아온 서양과 직접 교류하면서 경제, 기술, 군사면에서 조선을 앞서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와 인문문화의 수준은 조선보다 낙후되어 있어서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에서 간 통신사(通信使)에 열광하면서 조선문화를 배우려고 애썼다. 조선은 쇄국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양이 찾아오지 않아 경제와 군사에서 뒤지게 된 것이다. 망국의 원인은 ‘붓문화’가 ‘칼문화’에 꺾인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대 일본을 건설한 주역이 한국인이고, 그 후로 수 천년간 선진문화를 건네준 것이 한국인이므로, 정신적으로 일본이 한국인을 압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생긴 일본인의 열등의식이 우리의 민족문화를 압살하는 정책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역으로 일본을 마음 속으로 멸시하는 정서를 낳았던 것이다. ●양복·기차 등은 근대화 아닌 서양화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서양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이 점을 무시하고 서양이론을 끌어다가 한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 시대의 국민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일제시대 한국인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에 표출된 국민여망은 ‘대한국’의 회복이었고, 그들의 손에 쥔 것도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였다. 국외에 세워진 많은 독립단체들도 모두 ‘대한국’ 회복을 저항의 목표로 삼았다. 총독부가 정한 ‘조선’이라는 칭호는 국내에서만 강제로 사용될 뿐이었다. 그 ‘대한국’을 민주공화국 정부로 재건한 것이 ‘상해 임시정부’다. 임정은 태극기를 국기로 삼았고, ‘헌법’에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넣어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광복 후의 ‘대한민국’이 ‘대한제국’과 ‘임정’의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고,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것은 대한민국이 ‘조선총독부’ 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확실하게 계승했음을 말해준다. ‘제헌헌법’에서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1987년의 개정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도 그런 뜻을 함축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바탕을 둔 근대적 주권국가로서 산업화와 근대화의 삽질을 힘차게 시작했다. 정체(政體)는 제국이었으나, 정체의 목표는 민국(民國)이었다. 삼한(三韓), 즉 삼국(三國)의 영토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민족국가 건설의 꿈을 국호에 담았고, 조선시대부터 국기처럼 사용하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와 어기(御旗)로 확정했다. 일제 36년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대한국’의 ‘국권’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집요한 사투를 벌인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면, 일제시대를 경제에만 한정하여 바라보는 것은 역사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기차를 타고, 영화를 보고, 서양문화를 접했다는 것은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화’나 ‘서양화’로 부르는 것이 옳다. 이런 따위의 ‘서양화’는 이미 1876년의 개항 이후로 우리 스스로 모두 시작한 일들이므로 하등 새로울 것도 없다. ●한국은 붓문화 재인식해야 한국의 정치문화가 일본보다 앞섰다는 것은 과거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와 치열한 교육열, 그리고 고도로 세련된 민본정치와 관료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봉건국가가 아니었다. 일본은 막부시대 말기까지 이런 정치문화를 갖지 못했다. 높은 인문문화와 교육열의 전통이 지금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온 원동력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의 발전은 ‘기적’이 아니라, 문화선진국의 전통이 되살아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과 칼이 부딪치면 당장은 붓이 꺾인다. 그러나 길게 보면, 붓의 위력이 칼을 이긴다는 것이 고금의 진리다. 일본은 이제 칼 문화의 한계를 철저히 반성해야 하고, 우리는 붓 문화의 전통을 한탄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역사학 전공)
  • [부고] 애국지사 인순창선생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 인순창 선생이 23일 별세했다. 91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선생은 중국군 군통국(軍統局) 요원으로 근무하다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했다. 이후 제9전구 적지공작원으로 베이징 등지에서 공작 활동을 했다.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백은빈 여사와 아들 영남(목사), 영호(외국거주)씨가 있다. 발인은 26일 오전 7시30분. 빈소는 서울대병원. (02)2072-2011.
  • [한·일 100년 대기획] 민족종교, 항일독립운동 구심점

    19세기 후반 이 땅에는 대종교·동학·천도교 등 새로운 민족종교들이 발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력이 급감했다. 일본 정부가 1915년 10월 종교 통제안을 공포, 민족성을 일깨우는 민족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한 결과였다. 당시 민족종교는 단순히 종교 차원을 떠나 민족을 지탱한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20년을 전후한 4년은 민족종교의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절정기에 속한다. 대종교의 경우 1대 교주 나철이 비밀결사조직인 유신회를 조직, 기울어지는 국권을 일으키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청 3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를 부조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정계에 전달했다. 이어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투쟁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 이완용·권중현 등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8년에는 대종교 신도 및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만주 동삼성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해 북로군정서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다. 특히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신 대토벌작전을 전개, 대종교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1919년에는 천도교가 주축이 돼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특별 성미’로 교인 1명당 3~10원씩 모두 30만원을 모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조달했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명에 불과했던 1920년에 300만명의 신도를 거느릴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 요인들을 포섭해 천도교를 분열시켰다. 또한 혁신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종교로서의 권위를 잃도록 했다. 동학과 단군신앙을 결합한 민족종교인 청림교는 1920년대 무장조직 ‘야단’을 조직, 직접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와 합병해 북간도 지역의 반일무장투쟁단체들의 연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림교도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승리를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군수품을 제공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청림교를 ‘가장 극심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1944년 청림교 사건을 조작, 120여명의 교인들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50~60명을 살해했다. 일본의 강도 높은 탄압에 결국 청림교는 소멸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원대성 목사 별세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원대성 선생이 6일 별세했다. 94세.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선생은 1933년 2월 전남 순천중 시절 농촌계몽활동과 항일의식 고취활동을 주도하다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자 학업을 중단하고 평양으로 갔다. 1934년 5월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평양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해 평양지역 학생연합운동에 참여했다. 1936년 3월 일본경찰의 사찰강화로 이 학교를 2년 만에 중퇴했다. 이후 평양지역에서 도시 빈민 및 농촌계몽 운동을 전개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4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봉대씨와 2남2녀. 발인 9일 오전 10시. 빈소 미국(애틀랜타) 1-678-714-8952.
  • [지방시대] 전북도립국악원의 거듭남을 위하여/이종민 전북대 영문과 교수

    [지방시대] 전북도립국악원의 거듭남을 위하여/이종민 전북대 영문과 교수

    한때 폐지론까지 내몰렸던 전북도립국악원이 차분하게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 반갑다.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장에서도 축하보다는 염려와 각성을 촉구하는 소리가 더 높았는데, 송년음악회까지 다양하고 알차게 꾸려내는 모습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난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동안 꾸준한 한국음악 교육활동과 탁월한 역량을 갖춘 관현악단의 열정적인 연주회 등을 통해 한국음악의 저변확대에 큰 기여를 해왔는데 왜 이런 위기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 사실 위기론은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다. 도의회의 갑작스러운 예산삭감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불거진 입소문이 계기가 되었다. 예산으로 문화예술인들을 길들이려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관행이 빚어낸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도립국악원 자체가 도의회에 그 빌미를 제공해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이 너무 지나쳐 이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되면서 예산삭감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것이 위기론으로 확산된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조금은 조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위기론이 여전히 언제라도 다시 세를 얻을 수 있으며, 이것이 국악원 위상은 물론 그 구체적인 활동에 상당히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심기일전의 자구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지속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공립예술기관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민간전문가 운영체계는 반드시 담보해야 할 요건이다. 전라북도의 입장에서야 인사적체 문제 해결과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양보하고 싶지 않은 사항일 것이니 내부 구성원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어야만 관철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관련, 노동조합에서 민간전문가 운영체제를 반대하고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전문성이 부족하고 분규 없이 금방 떠나고 싶어하는 공무원이 수장으로 있어야 자기들 요구사항 관철이 좀 더 용이하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노동조합의 도를 넘어선 요구조건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관행화한 데에는 공무원 원장의 이런 ‘무사안일주의’가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또 하나, 한국음악전문예술인들의 수급문제에 전략적으로 대처하라는 주문도 하고 싶다. 이번 위기론이 세를 더한 데에는 국악원에 대한 전문 예술인 집단의 시기심이 상당부분 작용을 했다. ‘철밥통’ 직장에 대한 부러움이 질투를 넘어 분노로 이어진 것이다. 예술영역에서 신진 전문가의 충원이 없으면 조직의 활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영역 전체의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일정한 역량을 갖춘 선배들이 치열한 준비를 통해 프리랜서로 독립하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어 수급의 숨통이 트여야만 한국음악 전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류와 연대를 확대해 나가는 것 또한 긴박한 일이다. 해외교류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지역 내 문화예술단체 및 기업체 등과의 연대, 그리고 서울 및 각 지역 연주단과 예술단체와의 교류 연주 등을 강조하고 싶다. 이를 통해 국악원 위상을 확실하게 다지고 예산 절감의 효과도 더불어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축한 우호적 네트워크가 다시 찾아올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서 우군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명심했으면 좋겠다. 위기는 슬기롭게 대처하면 기회가 될 수 있다. 아무쪼록 한 해를 마감하며 도립국악원이 진지한 자기반성과 전향적 태도변화를 통해 한국음악의 진정한 중심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애국지사 박효근선생 별세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박효근 선생이 27일 별세했다. 8 6세. 광복군 활동 시 제1지대 제3구대에서 부대원 교육훈련과 대적방송, 적·포로 심문, 문서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월선씨와 2남3녀. 발인은 30일 오전 7시. 빈소는 국립의료원. (02)2262-4821.
  • “목포 남항일대에 세계적 습지공원을”

    서해 생태권역의 조류와 서식지 보전에 앞장서고 있는 단체인 ‘새와 생명의 터’가 최근 전남 목포시에 세계적인 습지공원 조성사업을 제안해 눈길을 끌고 있다. 25일 목포시에 따르면 이 단체는 2006년부터 최근까지 영산강 하구인 목포 남항 일대 습지를 목포자연사박물관과 공동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이같은 제안을 하면서 습지공원 설계안까지 첨부했다. 설계안은 이미 기록된 조류종 보전은 물론 더욱 많은 조류종 도래에 대비해 배출수 천연장치 등 수질 향상 시설과 탐조 은신 막, 낚시터, 초지 숲, 산책로 조성 등 모두 5구역으로 나눠 개발할 것을 제시했다. 또 시로부터 세계적인 습지 전문가 자문 등 요구사항이 있으면 적극 돕겠다는 의사도 피력했다. 새와 생명의 터가 습지공원 조성을 제안한 것은 남항 일대 생태계를 장기간 조사한 결과 영산강 하구, 갈대밭, 둑으로 둘러싸인 50㏊의 남항 갯벌습지는 생태교육과 생태관광이라는 대단한 장래성을 지녔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습지에는 흰물떼새, 꼬마물떼새 등 37종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일본, 타이완에서 날아온 밴딩 도요 물떼새까지 66종의 조류가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노랑부리백로와 검은머리갈매기 등 국제멸종위기종 2종과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황조롱이 등 천연기념물도 다수 관찰됐다. 박미나 새와 생명의 터 국내 코디네이터는 “도심 인근에 이런 양질의 습지를 지닌 곳은 세계적으로 몇 군데에 불과하다.”며 “제대로 설계하고 관리했을 때 남항 습지공원은 세계적인 공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며, 국제적 환경 선두도시로 목포시를 인식할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목포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권쾌복 전 광복회장 별세

    제13대 광복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권쾌복 선생이 19일 오후 2시30분 별세했다. 88세.1921년 경북 칠곡에서 출생한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1941년 항일결사 단체인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했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넘어가 다혁당의 실체가 드러났다. 2년여간 미결수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선생은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광복과 함께 출옥했다. 1956년 5월 신한통운 상무를 지낸 뒤 1964년 5월 광복회 이사로 선임됐다. 1996년 8월 광복회 제13대 회장에 당선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유족으로는 조영기(84) 여사와 권오인 건국대 교수 등 2남2녀. 발인은 22일 오전 8시. 오전 10시30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광복회장으로 영결식이 진행된다. 빈소는 서울보훈병원. (02)483-3320.
  • 군산항일대 역사문화벨트 만든다

    군산항일대 역사문화벨트 만든다

    일제 강점기 전북 군산항 일대의 건축물을 역사문화 체험공간으로 복원하기 위한 사업이 내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17일 군산시가 마련한 ‘군산 근대역사문화 벨트화 사업’에 따르면 군산항 일대 건축물을 ‘문화벨트 사업지구’와 ‘역사경관 사업지구’로 나눠 복원할 방침이다. 문화벨트 지구는 옛 조선은행과 나가사키 18은행, 옛 미즈상사, 대한통운 창고부지 등 근대 문화의 상징 건축물을 예술공간으로 증개축하는 작업이다. 조선은행 1층에는 당시의 항만과 철도, 물류 등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근대박물관이, 2층에는 당시의 해양과학을 체험할 수 있는 근대 기초과학 체험 시설이 들어선다. 옛 나가사키 18은행은 군산관광정보를 제공하는 방문자 센터로, 미즈상사는 카페 등의 상업시설로, 대한통운 창고부지는 옛 건물의 외형을 되살려 복합 미니 소극장으로 조성된다. 역사경관 지구는 군산항의 역사성과 현대적 감각이 어울린 문화의 거리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가옥과 문화재 170여채가 산재한 월명동과 영화동, 장미동 일대를 재조성해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관광객이 걸으면서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인근 내항(內港) 일대에도 놀거리와 먹을거리, 즐길 거리가 있는 테마 거리가 조성된다. 시는 “근대문화 유산을 관광산업으로 활용함으로써 군산시의 이미지 제고는 물론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라면서 “1단계 사업이 모두 끝나는 2013년에는 연간 500여억원의 생산유발 효과와 600여명의 고용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한편 군산시는 1단계 사업의 진행과정과 성과를 지켜본 후 세부계획과 예산안 등을 새롭게 편성해 2단계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한양→경성→대경성’ 역동성을 파헤치다

    얼마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으로 한국 사회가 진통을 겪었다.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형국이지만 언제든 다시 터져 나올 수 있는 ‘휘발성’을 가진 화두다. 근 100년 전의 망령이 여전히 한국 사회를 관통하며 다양한 시각과 의견의 충돌을 야기하고 있는 셈. 그런 점에서 ‘문학과 지성사’가 사회사 연구총서 시리즈 중 9번째로 펴낸 ‘지배와 공간’은 일제 강점기를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하고 있어 반갑다. 저자인 김백영 광운대 교수는 책을 통해 그 시대를 보다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현대 국민국가와의 시간적 연속성에서 접근하기 보다 과거 실존했던 ‘식민지의 지리적 판도’라는 공간적 연속성에 우선 순위를 두고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왕조의 수도였던 ‘한양’이 식민지 도시 ‘경성’으로, 다시 ‘대경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역동성을 당시 기층 민중을 포함한 여러 계층들의 관점에서 추적하고 해부해 보자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민족사적 트라우마가 분단과 냉전시대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면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지나친 신성화(神性化)를 초래했다.”며 “일제 식민통치와 그에 맞선 항일 독립영웅들의 굵직한 실천들만이 민족사적 사실로 공식화되는 과정에서 당시 암흑같던 사회의 밑바닥에서 설익은 근대문명을 체화하고 있던 사회 주체들의 다양성은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유관순과 윤봉길의 투쟁사이자, 이광수와 염상섭의 번민의 시기로만 서술됐을 뿐, 대다수 민중들의 삶은 무채색 화면으로 처리됐다는 것. 따라서 친일과 항일이라는 흑백논리로는 포착되지 않는 식민지 주체들의 광범위한 삶의 공간을 정확히 이해해야 일제강점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틀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다만 “‘풍수단맥설’이 한국의 전통적 공간질서를 부정하고 말살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거나, 우리의 전통 문화 유산을 침탈하고 훼손한 것이 일제의 일관된 계획과 의도라고 단언하기는 곤란하다.”는 등의 접근 방식은 다소 껄끄럽게 받아들여 질 수도 있겠다. 3만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열린세상]가곡은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싶다/최창일 시인

    [열린세상]가곡은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싶다/최창일 시인

    가을비가 지나간 화창한 날에 산들바람과 함께 귓가에서 한 편의 가곡이 살랑거리는 것을 듣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몸이나 마음이 치유될 것이다. 가곡은 사람의 심장을 조용하고 깊게 박동시키면서 평온의 잔향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곡이 대중에 다가설 기회가 되는 공중파 방송이나 무대는 좁기만 하다. 독일 슈베르트에 의해 시작된 가곡(리트)은 낭만파 음악으로 피아노 반주가 붙는 성악이다. 시에 선율을 붙인, 문학과 음악이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곡은 19세기 말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서 한국에서 일본의 역할이 커져가는 시기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약 100년을 지나는 동안 한국의 정치변화와 함께 가곡분야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가곡은 19세기 말 시작된 ‘창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음악이론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창가는 악보화되기보다는 민속 음악처럼 구전되는 경우가 많았다. 작시자도 시인이 아닌 일반 지식인이나 민중의 지도자들이었다. 창가의 선율은 대체로 기독교 배경음악인 찬송가의 선율을 차용해 만든 경우가 많았다. 이 찬송가 선율들은 창가뿐 아니라 애국가, 독립투쟁가, 항일 투쟁가에 차용돼 불려지기도 했다. 한국의 가곡은 1920년 홍난파, 박태준, 안기영, 현제명의 작품들로 시작된다. 초기에 작곡된 주요 작품들로는 홍난파의 ‘봉선화’, 박태준의 ‘동무생각’ ‘님과 함께’ ‘미풍’ ‘소낙비’ 등이 있다. 안기영은 ‘그리운 강남’ ‘마의 태자’를, 현제명은 ‘조선의 노래’ ‘니나’ ‘오라’ ‘나물 캐는 처녀’ 등을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가곡은 43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홍난파의 ‘봉선화’로 알려져 있다. 이 가곡은 1920년 기악곡으로 발표된 뒤에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다시 태어났다. 1925년 발행된 ‘세계명작곡집’에 수록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초기의 가곡은 서구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가사에서 풍겨지는 내용은 민족주의적이며 계몽주의적인 것이 많았다. 요즘 신작 가곡은 부드럽고 서정적인 풍을 가지고 사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이런 변모가 있기까지 1932년 이흥렬의 공이 컸다. 그의 가곡 ‘바위고개’ ‘자장가’ ‘코스모스를 노래함’ ‘부끄러움’ ‘봄이 오면’ ‘고향 그리워’ 등이 우리 가곡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흥렬은 서양 음악을 답습하는 수준이었던 초기의 가곡을 우리 정서에 바탕을 둔 명랑하고 아름다운 가곡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 타계한 김동진은 ‘뱃노래’ ‘가고파’ ‘파초’ 등을 작곡, 오늘의 가곡이 발전하기까지의 자유분방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중심이 되는 데에 보탬이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가곡은 일종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한국가곡사랑회, 한국예술가곡사랑회, 한국예술가곡진흥회, 작곡21, 한국가곡학회, 작곡신세대, 한국가곡작사가협회, 우리시우리포럼, 한겨레작곡가협회 등이 모임을 갖게 된다. 이 모임들은 전문적인 연구형태를 갖추고 꾸준하게 신작을 발표하고 있다. 이미 100곡이 넘는 작시와 작곡을 내놓았다. 임승천, 박수진, 이순희, 이소연 작시가나 김진우, 한성훈, 정덕기, 박이제, 김광자 등 수많은 작곡가는 매년 한두 번의 단독 발표회를 갖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늘어나고 있는 채널과 달리 방송의 관심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KBS FM이 유일하게 ‘신작가곡’을 위촉 연주하고 있고, ‘정다운 가곡’을 편성해 놓은 정도다. 몇 해 전만 해도 MBC가 콩쿠르를 통해 창작 가곡을 활성화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지금은 멈춘 상태다. 작곡, 작시가는 이런 국내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내 마음의 노래’ ‘가곡 사랑’ 등의 인터넷사이트를 통해 대중 속으로 다가서고 있다. 가곡을 통해 국민들은 정서순화와 우리글과 말을 사랑하게 된다. 가곡은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고요하게 치유하고 아름다움을 주고자 다가서려 한다. 최창일 시인
  • [부고]애국지사 김병환선생

    일제 강점기 광복군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 김병환 선생이 24일 별세했다. 94세. 선생은 광복군 제3지대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고 중국 허난(河南)성 귀덕 지역에서 공작활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을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사위 정해용(외국거주)씨 등이 있다. 발인은 30일 오전 8시. 빈소는 수원 성빈센트병원. (031)249-8444.
  • 애국지사 윤우현선생 별세

    일제시대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윤우현 선생이 25일 별세했다. 87세.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선생은 1944년 일본군 간부후보생으로 징집됐으나 탈출한 뒤 광복군에 입대했다.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에서 항일활동을 하다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서울법대를 졸업했으며 전주여중, 전주서중, 전주여고 교장 등을 지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동한(채널21 상임고문)씨 등 4남. 발인은 27일 오전 9시. 빈소는 서울의료원. (02)3430-0297.
  • [부고] 애국지사 고광돈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비밀결사 조직에 가입해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 고광돈 선생이 23일 별세했다. 90세. 고인은 1938년 춘천농업학교에다니면서 조국 독립을 실현할 목적으로 교내에 조직된 비밀결사 독서회에 가입, 농촌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했다. 졸업한 뒤 무산영림서에 임업수로 취직해 근무하면서도 독서회 활동을 계속하다 1940년 12월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선생은 1942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함정옥 여사와 승균(예술가)씨 등 3남. 발인 25일 오전 8시. 빈소는 서울보훈병원. (02)870-2977.
  • 강릉통일공원에 항일기념공원 내년 의병항쟁기념탑등 조성

    강원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에 있는 강릉통일공원에 ‘항일기념공원’이 조성된다. 강릉시는 15일 강릉지역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항일기념공원을 내년에 조성, 호국보훈 정신을 계승하고 나라 사랑에 대한 참뜻을 되새겨 자라나는 세대의 안보교육장 및 시민 쉼터로 활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6억여원을 들여 높이 5m 이상 되는 의병항쟁기념탑과 을미의병 관동구군도창의대장을 지낸 민용호, 정미의병 관동창의대장을 지낸 민긍호 등 지역의 항일 운동가 5명의 흉상이 세워진다. 민용호 등 3명의 항일 운동가 어록과 휘호, 강릉지방 의병 항쟁사, 분향대 등을 설치키로 했다. 시는 강릉 항일기념공원 조형물 제작 및 설치에 관한 입찰을 최근 공고했다.강릉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강릉통일공원에 항일기념공원

    강원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에 있는 강릉통일공원에 ‘항일기념공원’이 조성된다. 강릉시는 15일 강릉지역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항일기념공원을 내년에 조성, 호국보훈 정신을 계승하고 나라 사랑에 대한 참뜻을 되새겨 자라나는 세대의 안보교육장 및 시민 쉼터로 활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6억여원을 들여 높이 5m 이상 되는 의병항쟁기념탑과 을미의병 관동구군도창의대장을 지낸 민용호, 정미의병 관동창의대장을 지낸 민긍호 등 지역의 항일 운동가 5명의 흉상이 세워진다. 민용호 등 3명의 항일 운동가 어록과 휘호, 강릉지방 의병 항쟁사, 분향대 등을 설치키로 했다. 시는 강릉 항일기념공원 조형물 제작 및 설치에 관한 입찰을 최근 공고했다. 강릉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신해혁명 100주년 ‘하나의 중국’ 재건하나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신해혁명 100주년째인 2011년이 중국과 타이완 간 관계변화의 중대한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중국이 신해혁명 100주년에 타이완과 평화협의 비망록을 체결하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 가운데 이번엔 신해혁명 100주년을 시작으로 중국 근대사의 주요사건 기념식을 양안이 공동으로 거행하자는 제안이 학계에서 나왔다. 제1혁명으로도 불리는 신해혁명은 1911년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을 탄생시킨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장하이펑(張海鵬) 연구원은 14일 타이베이에서 폐막한 ‘양안 60년’ 학술토론회에서 “신해혁명 100주년과 항일전쟁 승리 70주년(2015년) 기념식을 양안이 공동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장 연구원은 “중국 근대사의 진행과정은 양안 모두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하나의 중국’에 대한 이론과 실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인식 문제이기 때문에 공동개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년 초 공산당과 국민당이 학계를 비롯한 각 정당, 사회단체까지 망라하는 준비위원회를 구성, 2011년 10월10일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활동을 총괄토록 하자고 제안했다. 기념활동은 양안화해, 국공화해, 민족단결,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공동선언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장 연구원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쑨원 탄생 150주년(2016년), 5·4운동 100주년(2019년), 아편전쟁 180주년(2020년) 등은 물론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100주년(2021년)과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100주년(2024년) 기념활동도 공동개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한편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14일 싱가포르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마잉주(馬英九) 총통 특사 자격으로 참석한 롄잔(連戰) 국민당 명예주석과 만나 “양안 정치난제 타개에 힘을 쏟자.”고 제안했다고 15일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stinger@seoul.co.kr
  • [국회 대정부질문] 野 “ 6자회담 사실상 휴업” 政 “금강산관광 재개 검토”

    [국회 대정부질문] 野 “ 6자회담 사실상 휴업” 政 “금강산관광 재개 검토”

    6일 국회 외교·통일·안보분야 대정부질문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초점이 맞춰졌다. 민주당 김충조 의원은 “6자회담이 사실상 휴업 상태”라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취한 조치 등을 물었다. 이에 정운찬 국무총리는 “정부는 6자회담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관련국들과의 정상 및 외교장관 등 다양한 수준에서 긴밀한 협의를 지속, 공조체제를 강화하고 있다.”면서 “북한에 대해 언제든지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고 답했다. ●남북대화엔 “북핵논의 우선” 다만 정 총리는 “북핵문제 진전없이는 남북관계의 진정한 발전은 어렵다. 북핵 논의를 우선해서 하려고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남북의 ‘싱가포르 비밀접촉설’에 대해서도 여야 의원들의 추궁이 잇따랐다. 정 총리는 “아는 바가 없다.”고만 되풀이했다.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이 “국가정보원의 북한 담당이 3차장에서 1차장으로 바뀌었고, 지난달 셋째주 주말 국정원의 모 차장이 싱가포르를 찾았다.”고 다그쳤지만 정 총리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정 총리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본회의장에 앉아있던 여야 의원들은 “총리가 아는 게 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따랐다. 정 총리는 “아주 유연한 자세로 어디에서든, 어떤 조건이든 우리의 원칙만 가지면 남북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는 원칙론을 고수했다. 그러자 민주당 문학진 의원은 “남북정상회담은 비선라인이 아닌 공식라인으로 당당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북 쌀 지원엔 “긍정 입장” 대북 인도적 지원 및 금강산 관광 재개와 관련해 정 총리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 풍부한 광물자원과 천혜의 관광자원 등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북한 경제를 지금 중국이 독차지하고 있다.”며 정 총리에게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정 총리는 “북한 경제가 중국에 더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북 쌀 지원에 대해서는 “북한 식량사정과 남북관계, 국민여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검토하되, 기본적으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정 총리 “731부대, 독립군이냐” 한편 정 총리는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국군포로 문제를 거론하면서 (일제의 인체실험 부대인) ‘731부대’를 아느냐고 묻자, “항일 독립군이냐?”고 되물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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