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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일대 의병 규합 항일무장투쟁/이달의 독립운동가/전수용 선생

    ◎대동창의단 조직… 일군과 70여차례 교전/31세에 붙잡혀 순국하자 부인도 따라 자결 『어차피 한번 죽고 마는 것이니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해산 전수용 선생(1879년10월18일∼1910년7월18일)이 남긴 「진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선생은 이 우국시에 표현된 그대로 31년 짧은 생애를 항일운동의 제단에 기꺼이 불사른 애국지사였다. 전북 임실 출신인 선생은 24세 때인 1903년 면암 최익현등 호남선비들이 개최한 시국강연회에 참석,이들의 우국충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얼마뒤 최익현이 을사조약체결에 반대,조정에 창의토전소를 올리고 호남 유림을 규합해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자 궐기장소인 태인으로 찾아갔으나 진영이 빈약한 데 실망,일단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가 순국한 최익현의 창의는 비록 실패로 끝맺음했지만 항일운동의 선봉으로서 국민 사이에 항일의식을 용솟음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최익현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1908년 전북 임실에서 결성된 창의동맹단에서 참모로 처음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창의동맹당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장수·무주·남원·순창·구례·곡성등 호남 동부지역 9개군을 활동지역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경찰서·헌병분견소·수비대 등을 습격하고 일군 토벌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08년3월 남원 사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데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응전투에서 다시 참패,활동이 위축되자 선생은 다른 의병부대를 찾아나섰다. 선생은 광주에 머물던중 황국시위대 참위 출신인 정원집이 수십명의 병사와 함께 찾아와 의병대장을 맡을 것을 요청함에 따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게 됐다. 『왜노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구대천의 원수다.임진란의 화 또한 그렇거니와 을미 시국모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오.힘써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자』 선생은 이같은 창의문을 통해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공포하고 일군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대한제국군 출신·유생·농민·포수등 5백여명으로 결성된 대동창의단은 1908년8월부터 10여개월동안 맹활약,일본군과 70여차례 교전을 벌였다. 선생은 부대를 1백∼1백50여명으로 쪼개 야간에 이동하면서 투쟁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도입했다. 이들은 일군 헌병분견소나 경찰서·수비대의 움직임을 은밀히 알아낸 뒤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작전으로 여러 차례 성과를 올렸다.이들은 한때 호남 서남부지역을 완전장악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이웃 의병부대와 꾸준히 연락을 취해 서로 위기에 빠질 때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1908년 겨울 호남의병연합체인 호남동의단이 발족하자 대장에 임명됐다.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떠오른 선생은 부대를 10개로 나눠 전남·북일대에서 일본군과 투쟁을 벌이면서 친일파 징계등의 일도 펼쳤다. 한편 일제는 끊이지 않는 의병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전국 시·읍·군·면에 산재한 성벽을 파괴,의병활동의 거점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였다. 또한 1만1천여명의 병력을 동원,대대적인 의병토벌작전을 펼치고 1909년에는 일본본토에서 2개 여단을 파견,의병토벌에 돌입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의병해산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1910년5월 세가 기울었음을 느끼고 부대장에서 물러나 시골로 몸을 숨기고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제는 그러나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탐문에 나섰다. 선생은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열고 어린이를 가르치던중 한 밀고자의 제보를 받고 달려온 일군에 붙잡혔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본래 세운 뜻이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는구나』 일제에 붙잡히면서 이같은 우국시를 남긴 선생은 광주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선생이 순국하자 부인 김해 김씨는 집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결,선생의 절개와 부인의 지조는 충신열사의 사표로 의병활동사에서 길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7월의 문화인물 이육사 선생

    ◎「청포도」 「광야」 등 항일시 30여편 남겨/25년 의열단 가담… 43년 북경서 옥사 문화체육부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본명 원록.1904∼1944)선생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육사선생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예안 보문의숙에서 수학한후 1926년 북경으로 건너갔다.북경사관학교와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노신,호적,서지마등 중국 작가들과 친교를 나눈것으로 알려졌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말』을 발표,문단에 데뷔했다. 1935년『신조선』에 『춘수삼제』『황혼』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대표작『황혼』『청포도』『절정』『광야』『꽃』을 비롯해 30여편의 시를 남겼다.유저로는 『육사시집』『광야에서 부르리라』『이육사선집』등이 있다.선생의 작품경향은 저항주의 실향의식과 비애,초인의지,조국광복에 대한 염원등으로 대별된다. 시작과 함께 항일운동에도 적극가담,1925년 의열단에 가입한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1927년)과 광주학생운동(1929년),대구 격문사건(1930년)에 연루돼 17차례나 옥고를 치렀고 1943년중국에서 귀국직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40세의 나이로 북경감옥에서 숨졌다.〈김성호 기자〉
  • 이진무/만주 일대서 16년간 항일무장투쟁(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독립군 정예요원… 일 기관 습격·친일파 처단/「흑하사변」이후 국내잠입 활동… 35세때 순국 「5월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성상 이진무(1900∼1934년5월18일)선생은 짧은 생애를 조국에 아낌없이 바친 애국자였다. 19세때 만주땅에서 항일투쟁에 처음 나선 이후 일제에 붙잡혀 35세로 순국하기까지 16년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른 투사였던 것이다. 평북 정주 출신의 선생은 체구가 비록 작고 애꾸눈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열화와 같이 격노하는 성격이었다.만주일대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할 때 「일목장군」이라 불렸다.또한 중국의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1백8명 두령 가운데 한사람인 흑선풍 이규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만주의 흑선풍」이란 별명도 있었다. 선생이 독립의식을 확고하게 갖추게 된 것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이었다.3·1운동이후 일제가 심한 감시와 탄압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고 독립의식에 눈을 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선생은 우선 만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총영에 가입,독립군으로 무장활동을 시작했다.광복군총영은 임정이 만주지역의 교민통치와 군사훈련을 위해 설치한 독립군의 정예부대였다. 선생은 광복군총영이 1920년8월 미국 상·하의원으로 구성된 동양시찰단이 서울을 방문하는데 맞춰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침략원흉을 처단키로 하는 계획을 세운데 따라 처음 무장활동에 참가했다.광복군총영은 이 계획에서 서울과 평양·해주·신의주등 5곳을 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삼아 일제기관을 폭파하기로 했었다. 신의주로 잠입한 선생은 신의주역과 호텔에 폭탄을 던지는등 맹활약을 펼쳤다.선생은 이어 동지들과 함께 선천군에서 일경과 일제의 주구 몇사람을 제거한 뒤 신의주감옥을 습격하려다 일제에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만주로 되돌아왔다. 선생을 포함한 독립군들은 그러나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일제를 대거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 이후 1922∼1923년까지 2∼3년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독립군들은 「복수」에 돌입한 일제 관동군의 대대적 공세를 피해 노령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레닌의 정책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고 거의 소멸할 뻔한 처지에까지 몰린 것이다.레닌의 「코민테른」은 당초 독립군을 받아들였다가 일제의 눈치를 보고 방침을 전환,무장해제를 이유로 독립군을 공격했다. 후세에 자유시참변(흑하사변)으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독립군은 수많은 동지를 잃는 아픔을 맛봤다.어쩔 수 없이 만주로 되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새롭게 진열을 정비,1922년 대한통의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같은 사정으로 자연스레 통의부에 가입한 선생은 4개 중대로 편성된 통의부 의용군에 소속됐다. 선생은 통의부가 국내진입작전을 지시한데 따라 통의부 2중대소속으로 1924년 동지 수명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군자금모금활동에 나섰다. 선생은 곧 1925년 통의부가 대한군정서·길림주민회·대한광정단·대한독립단·노동친목단·학우회등 다른 독립단체와 통합,정부성격의 정의부로 확대됨에 따라 정위부 5중대로 소속을 옮기고 국내진입작전을 수차례 펼쳤다. 선생은이어 철산군으로 들어와 일경주재소를 습격,일경 4명을 사살하는등 1927년까지 국내에서 일경과 독립군 밀고자 처단등의 활동을 끊임없이 벌였다. 선생은 이후 정위부와 참의부·신민부등 독립운동단체가 서로 모여 민족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자 예하인 조선혁명군에 가담,잠시 활동을 같이 하다 동료들과 1929년 재만조선인 혁명군을 결성,독자적 독립활동을 벌였다. 선생은 그러던중 1932년 안동에서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마침내 순국했다. 나라를 되믿기 위해 몸을 바친 선생의 염원은 미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근대 사법제도 1백돌… 그 영욕의 세월

    ◎“정치권력서 독립” 외로운 투쟁사/조봉암 무죄선고 등 권력맞서 소신의 판결/50년대/민주화투쟁 점철… 제2차 사법파동 진통/80년대/국가배상법 위헌·김시훈 사건·생수시판 허용 등 명판결로 25일은 이 땅에 근대사법제도가 도입된지 꼭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우리나라 근대사법의 시원은 법률 제1호인 「재판소구성법」이 시행된 18 95년 4월2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재판소구성법의 시행 이후 그동안 「원님재판」에만 의지해 왔던 봉건적 법률문화의 구각을 벗어나 최초의 판결,최초의 판사,최초의 재판부 등 근대적 의미의 각종 사법제도가 착착 뿌리를 내리게 됐다.그로부터 1백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사법제도의 골격을 바꾸는 법조개혁을 눈앞에 두고 있다.근대사법 1백년을 맞는 우리 사법계의 「영」과 「욕」의 발자취를 주요제도의 변천 및 사건과 판결,그리고 인물을 중심으로 되돌아 본다. ▷영욕의 근대사법 1백년사◁ 근대사법사의 뿌리는 1894년 갑오개혁에 두고 있다.그해 7월 「모든 죄인은 사법관에 의하지 않고는 형벌을 과할수 없다」는 법령의 선언은 재판과 행정의 분리원칙이 처음 이뤄졌다는 의미를 가진다.이어 1895년 4월25일 재판소구성법으로 각급 재판소가 설치되면서 근대사법은 비로소 모습을 갖춘다. ○일제권력 시녀로 전락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사법제도 또한 일본의 근대적 사법제도를 그대로 이식받아 외형상 발전됐으나 내용적으로는 일제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질곡을 겪었다.이때 우리에게 이식된 대부분의 일본식 법률과 제도·관행의 기본틀은 지금까지 잔재로 남아있다. 48년7월17일 대한민국 헌법공포와 함께 사법부도 민주사법으로 재출발한다.이후 자유당 통치시대를 통틀어 정치권력과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는 외로운 싸움이 계속됐다. ○시위대 법원청사 난입 특히 진보당 조봉암의 국가보안법위반사건에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법원을 비난하는가 하면 정권의 사주를 받은 시위대가 법원청사와 판사집에 난입,2심에서 판결이 번복되는 일이 벌어졌다.그러나 이 시기에도 동백림사건·한일회담반대시위자 영장기각등 「소신판결」이 잇따라 사법부의 독립의지도 돋보인 시기로 평가된다. 5·16과 10월유신,10·26사건으로 이어진 60∼70년대는 사법부의 시련기였다.「대법관」이 「대법원판사」로 격하됐고 법관의 임명권과 인사권까지 대통령이 장악했다.그 와중에서도 71년6월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위헌판결로 소신을 보였으나 같은해 7∼8월 2달동안 법관의 구속에 항의한 전국법관들이 일제히 사표로 맞서는 사태가 벌어졌다.이른바 「사법파동」으로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지키기가 시도된 것이다. ○「대법관」 명칭 87년 부활 민주화투쟁으로 상징되는 80년대 초·중반에는 미국 문화원방화사건 법정소란,유태흥 대법원장탄핵소추안 국회발의,김영삼 신민당총재 직무집행가처분신청 인용 등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위협당하는 고난의 시기였다. 87년 25년만에 격하됐던 「대법관」의 명칭이 부활됐으나 88년6월 서울지역 법관 50여명의 개혁요구로 제9대 김용철 대법원장이 조기퇴임하는 「제2차 사법파동」의 진통이 이어졌다. 93년 문민정부출범후 사법부는 진정한 민주사법을 구현하기 위해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지난해 7월 법원조직법 등 사법개혁안이 국회를 통과했다.사법개혁은 지난 2월 김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제2장을 기다리고 있다. ▷명판결들◁ 최근 법관들을 대상으로 「근대사법사상 가장 의미있는 판결」을 물은 여론조사에서 법관들은 ▲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82년 김시훈 사건 무죄판결 ▲94년 생수시판금지 위헌판결 등을 대표적 판결로 꼽았다. ○강압에 의한 진술 방지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은 국고손실을 이유로 군인·군속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제한한 국가배상법 제2조 단서조항은 위헌이라는 대법원전원합의체의 판결로 당시 최고회의의 비상입법에 대한 유일한 위헌판결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했다. 김시훈 사건은 경찰수사단계에서 작성된 자술서를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할 때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강압에 의한 진술을 방지해 피의자의 인권을 지켜준 판결이었다. 생수의 국내시판을 불허한 보사부고시는 헌법에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와행복추구권 및 환경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판결한 대법원의 생수시판금지 위헌판결도 오랜 행정편의주의를 법원이 준엄하게 꾸짖은 대표적 사례였다. ○처 능력제한 무효판결 이밖에 처의 능력제한을 규정한 구 민법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반하므로 무효라는 판결(대법원 47·9·2)은 남녀평등 실현에의 「거보」를 내디딘 판결이었으며 검찰에서의 자백에 임의성이 인정되더라도 객관적 상황과 모순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없다면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판결(대법원 82·2·1)과 거짓말탐지기의 증거능력을 배제한 판결(대법원 83·9·13)도 명판결사의 대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들이 법원을 빛낸 영광의 판결이었던 반면 정치적 격변기에 내려진 일부 판결들은 법원이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한 사례들로 지적되고 있다. ◎법관들의 영원한 사표/가인 김병로/독재 맞서 사법부 독립 추석 마련/일제시대 항일사건 변호 전담 1백건 넘어/관용차 거부 청렴·대쪽법관… 반독재투쟁 일관 후배 법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법관으로는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김홍섭 전서울고법원장,이회창 전대법관 등이 우선 꼽힌다. 특히 가인 김병로는 법관들의 영원한 「사표」로 불린다. 일제때는 항일운동 관련사건의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했고 해방 이후에는 독재에 맞서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법언을 앞서 실천해 우리나라 사법부 독립의 초석을 다져놓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가인은 1888년 1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7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2살때 결혼,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일과 농사일을 돌보면서 「소학」과 「중용」「대학」 등 한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1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경성전수학교 조교수를 거쳐 19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 뒤 그가 맡은 독립운동관련 사건만도 안창호와 수양동우회사건,6·10만세운동사건,광주학생운동사건 등 자그마치 1백여건이 넘는다.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의 회유와 탄압이 거세지자 32년 서울 근교 양주군 노해면 창동(지금의 서울 창동)으로 들어가 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농사를 지으며보냈다. 가인의 진면목은 그가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48년 8월부터 58년 1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9년 남짓 재임기간 동안 더욱 빛을 낸다.50년 2월 골수염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그였지만 의족과 외지팡이에 기댄채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먼저 사단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에서 비롯됐다.52년 봄 자유당정부가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해서 대통령에게 밉보인 사람들을 마구 얽어매자 법원은 그때마다 무죄를 선고했다.이대통령은 법원의 이같은 판결에 크게 진노했지만 가인은 이를 일축했다. 『판사가 내리는 판결은 대법원장인들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다.무죄판결이 불만이라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는 것이지…』,『나는 단언하노니 재판이나 사법운영에 있어 나의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일이 없으며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독립된 사법운영에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일이 없다』 가인은 정년퇴임한 뒤에도 자유당 말기의 반민주적 행태와 부정선거를 규탄했으며 5·16쿠데타 때에도 강력히 반대하는 등 반독재투쟁을 벌이다 64년 1월 77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와 함께 김 전서울고법원장은 고위직 법관에게 제공되는 관용차마저 마다하고 도시락을 싸들고 걸어서 출퇴근하는 「청렴법관」으로,이 전대법관은 소신을 굽히지 않는 「대쪽판사」로 후배법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 76돌 3·1절/전국서 대대적 행사

    ◎서울 등 14개 시·도에서 7만여명 참가/항이·만세 운동지 68곳 추모행사·노제 올해로 76주년이 되는 3·1절 기념행사가 사상 최대규모로 펼쳐진다. 내무부는 26일 서울을 비롯,전국 14개 시·도와 2백31곳 시·군·구에서 모두 7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제히 기념행사가 각각 벌어진다고 밝혔다. 또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광장을 비롯,전국의 47개 항일운동 사적지에서는 2만8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추모행사와 함께 백일장 등이 마련된다. 대전장터,충남 아우내장터 등 전국 21곳의 3·1운동 만세운동지에서는 1만8천여명이 모여 만세사건 재연,시가행진,노제 등 문화행사를 갖는다. 올해의 이같은 3·1절 기념행사는 사상 최대규모로 정부가 개항 1백주년,광복 50돌을 맞아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켜 결집된 국민적 역량을 세계화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기로 한데 따른 것이다. 이에따라 경남도 23개 전 시·군에서는 5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태극기를 들고 2∼4㎞를 달리며 독립정신을 되새긴다.제주에서도 조천만세동산두곳에서 1천4백여명이 기념식과 함께 2·4㎞구간에서 태극기 마라톤을 벌이며 민족적 자존심 회복을 다짐한다. 강원도는 3월1일부터 5일까지 춘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 2백여장의 항일운동 사진 전시회을 마련한다.이번 사진전에는 면암 최익현선생이 대마도로 끌려가는 장면 등 신미양요(1871년)부터 광복후 정부수립때까지 일제의 학정을 생생하게 보여줘 시민들의 애국심을 크게 일깨우게 된다. 이에앞서 28일에는 유관순열사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충남 천안 병천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광장에서는 지난해보다 두배나 많은 2천여명의 주민들이 흰저고리,검은치마 차림으로 봉화제와 횃불행진 등을 벌여 올 3·1운동 기념행사의 「봉화」를 올린다. 한편 정부는 이번 3·1절을 계기로 광주시 북구 광주제일고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과 제주 조천만세동산주변을 각각 기념공원으로 조성해 성역화하기로 했다.
  • 해방정국의 혼란(새로쓰는 한국현대사:6)

    ◎송진우,「건준」 맞서 「국민대회준비위」결성/여운형 내세운 우익의 「합작」노선 반대/“「임정」지지”표방… 고하 피살로 좌익 타격/하지, “「인공」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 활동 중지”명령 1945년 해방정국은 아주 혼란스럽게 저물어갔다.당시 사회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미 국무성이 J R 하지 중장에게 파견한 정치고문 H M 베닝호프의 보고서일 것이다.미군이 진주한 이후 9월15일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그것이 남한의 상황」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과연 화약통이었을까.어쨌든 1945년이 세밑에 다가선 12월30일 상오6시 송진우를 저격한 서울 원서동 76의 총성을 시발로 정치테러가 잇따랐다.뒷날 여운형·장덕수·김구로 이어진 암살사건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이에 맞섰다.그래서 건준이 인공을 선포한 다음날인 9월7일 우익지도자 3백80명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아직 중국 중칭(중경)에서 돌아오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지지하고,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다.송진우의 죽음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다만 건국대회준비위원회는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해방정국의 판도를 선점한 인공의 실체를 먼저 딛고 넘어가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는 수순이 될 것이다.인공이 병아리라면 달걀 격이기도 한 건준은 194508월15일 발족되었다.여운형은 8월1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으로부터 일본 패전소식을 들은데 이어 다음날 15일 아침에는 정무총감 엔도(원등륭작)의 방문을 받는다.행정권을 이양할 테니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이를 수락한 여운형은 그날밤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이와 더불어 5개의 부서를 두고 2천여명의 청년·학생으로 건국치안대도 조직되었다. 건준에 송진우·장덕수등은 불참했으나 안재홍·김병로·이인등 우익및 중간노선의 인물과 박헌영계열의 좌익세력,정백 중심의 장안파 공산당계열이 들어왔다.말하자면 좌우합작성격을 띤 건준은 지방조직도 확대,8월말까지 1백45개의 지부조직이 이루어질 정도였다.그러나 건준은 건국에 실패하고 말았다.좌익계열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건준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전인 9월20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후 9월12일 하지장군이 시공관에서 정치인들과의 대화를 모색할 때 33개 정당대표가 등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렇듯 복잡다단한 정치상황은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9월15일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나타난다.그는 9월말에 가서 이들 정당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는데,민주적 보수집단과 급진 또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특히 미군정은 급진주의 주요세력으로 인민공화국을 주목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도전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이는 공식명칭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유일한 정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인공은 1946년3월1일 총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는 특별조치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다.이에 대해 군정장관 아놀드는 10월10일 한국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못박고 『군정은 다른 형태의 모든 정부를 통제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인공은 이에 맞서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도 공화국명칭을 여전히 사용했다.하지는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미 외교문서시리즈 제6·1945년)에서 「인공은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지지세력이고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그리고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닌 상당수의 좌익세력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인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한 하지는 맥아더에게 이 대목에 대한 평가도 구했다. 맥아더로부터 「어떠한 결졍을 내려도 지지할 것」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하지는 마침내 인공에 대한 활동중지명령을 내린다.이에따라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간판을 떼어버렸다.이렇듯 인공은 미군정 아래서 좌익세력규합 이외에 다른 의미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인공중앙인민위간판이 내려지기 얼마 전에 귀국했다.이승만은 10월16일,김구는 11월23일에 각각 돌아왔다.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귀환문제,특히 이승만문제는 워싱턴·토쿄(맥아더사령부)·서울(미군정) 사이에 사전조율되었다(미 육군작전국문서 한국편 1945년10월).하지는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이승만·김구·김규식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 국무성은 중국 중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망명지로부터 귀환이 허가되었음을 통보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자격 귀환임을 강조했다.여기에는 이승만도 포함되었다.미 국무성은 귀환자들에게 「38도선 이남지역에 머무는 동안 군정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한다」는 서약서를 받도록 하는 조치도 잊지 않았다.이승만은 귀국 2주만에 반소(반소)논쟁을 벌였다.이에 국무성은 서약을 유의토록 환기시키면서 곧 소련과 가질 교섭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반응을 즉각 보였다. 국제간에 이해가 엇갈린 정치전략은 변화무상한 것인가.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항일운동가라는 점을 들어 서둘러 귀국시킨 미국이 이승만에게첫 제동을 건 것이다.김구 역시 이승만과 같은 이유로 여의도 군용비행장을 거쳐 조국땅을 밟았으나 그다음 12월2일 군산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은 고국의 산하조차 바라보지 못하는 미군 장갑차에 실려 서울에 왔다.이승만과 김구의 환국은 다른 정치판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하지로 하여금 각양각색의 정치단체통합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당시 이승만의 명성은 대단해서 모든 정당이 거의 다 의장직 수락을 제의해올 정도였으니까….이승만은 귀국한 지 1주일도 안되는 10월23일까지 50여개 단체대표를 만났다.그 결과는 독립촉성중앙회 결성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인공과 공산주의자들이 등을 돌려 좌우익 골은 더욱 깊어갔다. 한편 38도선 이북 소련군 점령지역 평양에서는 9월3일 국내파 공산주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현준혁이 암살되는 것으로 정치투쟁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그의 죽음은 한반도 해방정국의 암살1호로 기록된다. 이에 앞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명령에 의해 10월8∼10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대회가 열린데 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10월13일)되었다.그리고 김일성이 모습을 드러낸 평양시민대회(10월14일)가 열렸고,들러리정당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는등 소련의 의도대로 착착 돌아갔다. 역사에는 결코 가정이 없다고 한다.하지만 이런 명제를 무시하고 남북한의 많은 세력이 구심점을 갖추었거나 연합전선을 폈더라면 외세에 의한 분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해방정국은 건국의 옷을 입기는커녕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뒤 「첫 정치희생자」는 현준혁/「사회장사진」국내 첫 발굴/「송진우 저격」 3개월여전 평양서 적위대에 피살/「9월3일 암살」 묘비서 확인… 「소관련」시사 논문도 우리는 해방정국에서 암살1호하면 45년 12월30일에 숨진 송진우를 흔히 떠올린다.그러나 사실상의 첫 희생자가 이보다 3개월이나 앞서 9월3일 평양에서 소련 민정당국과 결탁한 반대파에 암살된 공산주의자 현준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흔치않다. 그는 1906년 평남 개천의 소지주 집안출신으로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8·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아 장안파공산당의 평안남도 책임자로 임명됐다.그달 18일 평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적위대를 조직했다.소련군이 진주한 무렵 다른 공산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8월27일 조직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될 정도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파·화요파·적색노조파등이 복잡하게 얽힌 형국.소련에 대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그는 소군정과 관계가 좋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반현준혁파들은 그를 반소분자나 부르주아로 몰아세웠다. 그가 심하게 마찰을 빚었던 상대는 평양 보안서장을 거쳐 평양시 적위대장에 임명된 송창겸과 일제때 포목조합 이사장을 지낸 장시우등 소련파.김일성 영입 계획을 추진하던 소련 민정당국은 결국 송창겸과 장시우등 친소적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현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월3일하오1시 소련 민정사령부서 회의를 마치고 소련제 스리쿼터를 타고 돌아가다 적위대 복장의 괴한에게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화전춘수)교수는 자신의 논문 「소련의 대북한 정책」에서 「암살범이 누구이든 현준혁의 죽음은 소련측으로는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고 기술했다. 현준혁의 암살날짜가 지금까지는 9월28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하와이대 서대숙교수가 평양에서 촬영한 묘비 기록을 통해 9월3일로 확인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소련당국이 의도적으로 현준혁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준 당시의 사진도 긴급 입수했다. 이날 암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인 조만식 휘하의 반공주의자들의 거사란 주장도 있다.그러나 현준혁은 당시 조만식을 신뢰하는 사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는 반론이다.
  • 독립유공자 명예 20년만에 되찾아/화남 박장호선생 장손 박정훈씨

    ◎이웃주민이 서류조작 연금 받아와/법정투쟁끝 마침내 「조상찾기」 성공 구한말 독립운동가의 직계 후손이 20년동안 다른 사람에게 할아버지의 이름을 빼앗겼다가 26일 법원의 판결로 「조상찾기」에 성공했다.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화남 박장호(1850∼1922)선생의 장손인 박정훈(78·경기 파주군 적성면)씨는 이날 『국가가 62년 화남선생에게 추서한 건국공로훈장의 수령권자는 박씨임을 확인한다』는 서울고법의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화남선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들을 이끌고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을 결성,항일운동을 전개하다 22년 일본에게 매수된 한국인에게 피살된 독립운동의 「거봉」으로 정부는 62년 3·1절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었다. 박씨가 엉뚱한 사람에게 빼앗긴 화남선생의 친손자 자격을 밝히기 위해 투쟁을 시작한 것은 75년부터. 해방직후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귀국,58년부터 파주에서 생활해온 박씨는 정부가 화남선생에게 훈장을 추서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당시 이웃에 살던 P씨(72년 사망)가 6·25로 호적 등 자료가 없어진 것을 이용,박씨로부터 화남선생의 사진과 관련서류를 건네받아 69년 자기이름으로 신고하는 바람에 박씨는 유족 자격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박씨는 곧 할아버지를 되찾는 작업에 착수,관계 당국에 수십차례 진정을 했으나 『양쪽이 모두 유족임이 틀림없다』 『ⓟ씨가 이미 유족으로 결정돼 기득권이 있다』는 말만 들었다. 박씨는 92년 11월 만주에 묻힌 화남선생의 유해를 경기 가평군 선영으로 이장하면서 소송을 통해 자격을 회복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93년 4월 소송을 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법 특별7부(재판장 임대화부장판사)는 이날 『족보와 호적·사진등 관련기록을 볼때 원고가 화남선생의 친손자임이 확실하다』며 『실제 손자가 아닌 P씨를 유족으로 지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박씨는 해방 50주년을 맞아 마침내 애국지사의 유족으로 떳떳이 설 수 있게 됐다.
  • 광복 50/「부민관사건」 주역 조문기옹은 말한다

    ◎“일본은 진심으로 사죄 한 적 없다”/속죄는 한풀이 아닌 선린우호 위한 “첫발”/일부 젊은이 왜색 심각… 「한국혼」 회복 절실/45년 친일파대회 폭탄투척… 건국포장 받아 『우리나라와 일본은 서로 가장 가까운 나라가 돼야 한다.그러기 위해 일본은 진심으로 과거사를 사죄해야 합니다』 일제때 국내 마지막 무장항일운동인 부민관사건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조문기씨(68·광복회 경기지부장·경기도 수원시 천천동 주공아파트)는 광복 50주년인 새해를 맞아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일본」의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애국청년단」 결성 부민관사건은 해방직전인 45년 7월24일 서울 부민관에서 친일민족반역자 박춘금의 주최로 열린 「아세아민족분격대회」라는 친일어용대회장에 조씨,유만수(작고)등 애국지사들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이들은 같은해 5월 서울 종로구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 모여 「대한애국청년단」을 조직하고 일제를 단죄하면서 조국의 독립정신을 떨칠 기회를 믿고 있던 중이었다. 조씨등은 부민관사건으로 당시 5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는등 일제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고향인 경기도 화성으로 내려가 야학운동을 펼치다 광복을 맞았다. ○약탈문화재 반환을 조씨의 경우 광복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어왔으며 지난 82년 건국포장을 정부로부터 수여받았다.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의 관계에서 벗어나 선린우호에 바탕을 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바로 일본이 과거를 사죄하는 것입니다』 조씨는 일본의 사죄요구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으로서의 한풀이가 절대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사죄가 첫번째』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는 지의 여부는 일제 강점동안 한국으로부터 「도둑질」해가고 약탈해간 것을 모두 돌려주고 피해를 갚을 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즉,한­일간에 문제로 지적돼온 문화재반환·재일한국인 처우향상·역사왜곡 시정·정신대 문제등 각종 현안에 대해 성의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재일한국인의 경우 그들 대부분이 자의가 아닌 일제의 징용등으로 일본땅에 끌려간 만큼 일본은 그들을 내국인 보다 더 우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한국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본 스스로 더 잘 알것』이라면서 『일제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망언이 되풀이 된다는 것은 일본이 과거사를 사죄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개했다. 그는 2000년대의 새로운 한­일관계 형성을 위해 일본의 사죄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국내의 「한국혼」되살리기가 더 시급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요즘 일부 젊은이들을 보면 여기가 일본땅인지 한국땅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고 온나라가 질서를 잃고 있는데 이 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혼」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일본 동경대 역사교수로부터 「한국사람은 겉으로 반일을 외치지만 오늘 이 시간 일본이 한국을 재침할 경우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국기를 만들어 거리로 나와 일본군을 환영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부터라도 국가적으로 한국혼 되살리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교육 바로서야 그는 『대화혼을 숭상하는 일본과 한국혼을 잃은 한국이 충돌했을 때 누가 이길지는 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우리나라가 지난 5000년간 변변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어도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조들이 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라고 했다. 그는 이와 관련,앞으로 정부에서 민족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혼 살리기 교육」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이번 광복 50주년 행사는 지난 50년간 되풀이 돼온 일회성 행사 차원에서 한단계 높은 행사로 승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광복절 행사의 참석자들은 모두 동원된 공무원으로 자리에서 몸을 비비꼬며 한시바삐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역력했다』면서 『물론 행사도 있어야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후세에 민족정신교육자료로 활용될 문화유산을 만드는 일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노 독립운동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관계의 정립과 한국내부의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을 끝냈다. 조씨는 10여년 전 외동딸을 출가시키고 부인 장영심씨(66)와 8년전 입주한 16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광복회일에 열중하고 있다.
  • 아동문학/최인학(연변조선족 1백년:8)

    ◎“어린이가 희망” 일제때 창작 활발/탄압 피해 최서해·윤동주·윤극영 등 간도서 활약/해방후 「어린이신문」 발간… 80년대 중편 소년소설 등장 창작활동이 한반도보다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1930년대의 간도는 작가들의 활동무대였고 은신처였다.아동문학도 예외는 아니다.암흑기를 방불케 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아동문학가들은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러한 절박한 심정으로 동화 동시를 써 왔다.30년대 초창기 문학가중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작가들이 간도에서 아동문학으로 활동해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농사짓다 문학생활 최서해는 1915년에 북간도 백하지구에 건너와서 농사를 짓다가 쪼들린 생활을 이기지 못해 7년간이나 유랑생활을 했다.그러다 1924년에 서울로 향했다.윤극영은 1926년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 음악교사로 있었다.그 후 일본,하얼빈 등지로 다니며 음악을 전공하며 가무단을 이끌기도 하다가 용정에서 광복을 맞이했다.김예삼은 1935년 흑룡강성 목릉현 흥원에 이주하여 교편을 잡았으며,채택룡은 1938년연길현 명륜학교로 와서 교편을 잡다가 광복을 맞았다.그리고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출생하여 평양숭실학교를 다니다가 36년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에 편입했다. 이 밖에도 간도에서 이 무렵 활동하던 아동문학가로서 윤해영 안수길 함형수 이호남 천청송 염호열 김연호 박화목 한해수 등을 꼽을 수 있다.중국 조선족의 아동문학은 이들 작가군에 의해 형성되었고 1936년 창간된 「가톨릭 소년」은 작품의 발표원이 되었다.당시의 상황은 조국을 빼앗긴 설움은 문학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그리고 항일운동과 독립전쟁을 몸소 경험하는 현장이었기에 아동문학의 저변도 이러한 경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의 생활상 표현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이곳까지 물밀듯 엄습했다.작가들은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이 무렵 윤동주는 참혹한 당시의 생활상을 동시로 표현했다.그의 초기 작품중 한편을 감상해보자.「굴뚝」이라는 동시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게지 총각애들이/깜박깜박 검은눈이 모여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1940년대에 와서는 윤동주에 이어 이호남 천청송 함형수 등이 계속 동요와 동시를 썼다.그러나 검열제도가 심해지자 전처럼 노골적인 항일의지 표현의 길은 막혀버렸다.다만 상징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써가며 새경지를 개척해 갈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와중에서도 항일유격대 안에서는 전투성이 강하고 선동성이 짙은 아동문학이 생성되었다.항일가요로는 「혁명군이 왔고나」「아동단가」「어디까지 왔나」등이 있으며 아동극으로는 「유언을 받들고」「아버지는 이겼다」등이 있다.이들 선동성이 강한 작품을 통해서 미래의 혁명투사를 만들고자 했던 의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끈질겼으나 작가들이 붓을 꺾지 아니한 보람이 있어서 중국조선족 아동문학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1945년 광복을 맞아 아동문학은 활기를 찾게 된다.연변에서는 주로 채택룡 염호열 이호남 김순기 최형동 등이 활동을 했으며 「연변일보」「길동일보」「동북조선족인민보」「불꽃」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를 했다.목단강 일대에서는 주로 김예산이 발표를 많이 했는데 1949년에는 「건설」이라는 잡지를 편집하여 작품을 게재도 했다.하얼빈일대에서는 김태희 임효원 등이 「인민신보」를 내면서 작품을 게재했다.특히 임효원은 1947년 「어린이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70년대 30여명 활동 그 후 문화대혁명의 혼란기를 거쳐 1970년대부터는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목표아래 중국조선족도 새로운 문단조직으로 가다듬었다.그 결과 아동 문학작가는 거의 30여명에 달했다.발표지도 늘어나 「소년아동」「중국조선족소년보」「별나라」「꽃동산」등이 속속 발행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이처럼 많은 작가와 발표지를 가지면서도 아동문학의 문학성 부진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자아확립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까닭이다.그러므로 1980년대는 모두가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이 무엇인가 깊이 반성하기에 이른다.즉 과거처럼 틀에 박힌 작품활동,교시적이고 피상적인 주제보다는현실적이고 자아개발이라는 나를 발견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하여 재고해 가는 과정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난날의 계급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인위적인 갈등을 설정하여 정치적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하던 창작정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이러한 반성문학운동을 업고 궤도수정을 한 것이 다름아닌 중편 소년소설의 등장이다.과거 동시나 동요 위주였던 아동문학이 중편소설의 등장으로 새국면을 맞는다.이처럼 중편소년소설이 등장하자 최소한 아이들의 성격 묘사가 가능해졌다.진정한 의미의 문학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통민속놀이/최인학(연변 조선족 1백년:7)

    ◎씨름·그네·널뛰기/단결­항일 의식화 놀이로 발전/전국운동대회 인기 종목… 과학적 연구도 병행 만주벌에 사는 중국의 조선족은 전통민속놀이를 계승 발전시킨 주역들이다.그러나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연변에서는 민속놀이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촉매로서 활용할 뿐 아니라 민족운동이라는 차원으로 육성 발전시켰다는 점이다.예컨대 씨름은 원래 단오놀이였고 생산증식의 주술적 의례로서 출발한 민속놀이였지만 이곳 연변에서는 씨름판이 항일의 의분을 폭발케 해 주는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씨름판에 모인 민중을 항일대열로 참여시키는 의식화 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씨름의 주역이 남자이면 그네의 주역은 여자였다.그네도 단오놀이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수시로 개최되었는데 그때 마다 모인 민중들의 단결과 항일의식으로 연대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이와 비슷한 놀이로서 널뛰기가 있다.널뛰기는 정초에 여성들의 전통놀이였다.그러나 연변 여성들은 널뛰기의 단순한 의미를 벗어나 일본의 압제로부터 일탈하여 항일로 무장한다는 의식화 놀이로 발전했다.그러므로 씨름·그네·널뛰기는 명절 뿐 아니라 수시 개최되었으며 개최될 때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집단의식으로 무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오히려 전통놀이라기 보다는 사회운동이라는 인상이 짙다. ○민속운동으로 승화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항일의 기능은 사라졌다.그렇지만 고국이 아닌 이국 땅에 사는 조선족은 단결은 필요했고 연대의식의 강조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무리가 아니었다.따라서 씨름·그네·널뛰기는 조선족을 대표하는 「민속운동」으로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이러한 민속놀이의 사회화는 씨름을 비롯한 민속놀이의 과학적 연구를 가져왔다.그리고 운동으로서 체계화 하게 되었다.조선족의 씨름연구는 지대한 것으로 그 일부만을 조감해 보면 우선 크게 공격과 방어로 나눌 수 있다. 공격기술은 물론 메치기를 말한다.그래서 엉덩이지기 등의 들어치기 기술과 호미걸이와 같은 다리기술,무릎 덜미 등을 후려치는 손기술이 뒤따르게 마련이다.조선족 씨름을 연구자들은 들어치기,다리기술,손기술 등의 3가지 기본기술을 다시 13가지나 되는 잔 기술로 나누었다.방어기술은 되치기인데 여기에는 배지기,안다리걸기,모두걸이,맞배지기가 포함되었다. 씨름을 민속운동으로서 발전시키려면 씨름이 인체에 미치는 특징을 추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이 점에 대해서 씨름이 인체에 주는 장점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첫째 전체 근육 운동이므로 신체를 조화롭게 발전시키며,둘째 여러 기술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운동기능을 발전시키며,셋째 민첩하게 움직이는 기능,넷째 힘과 정신운동으로서 전투적인 기질과 투지를 키운다.다섯째 관절과 신체의 유연성,심장과 폐의 기능을 높이는 것 등이다. ○널뛰기 민요 이어져 한편 중국의 전국 운동대회에서 조선족여성을 대표하는 그네타기와 널뛰기는 중요하고도 유명한 종목이 되었다.이 종목을 통해 조선족 여성들의 명랑하고 씩씩하며 근면한 성품을 충분하게 과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많은 관중의 열렬한 찬사와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소수민족들의 운동대회에서도 그네타기와널뛰기는 인기 있는 종목이 되었다. 지금도 연변에서는 불려지고 있는 널뛰기 민요가 한국에서는 이미 단절된지 오래다.연변에서 아직도 불려지고 있다. 「묵은 해는 지나가고/새해 신원을 맞이했네 (후렴)널뛰자 널뛰자/새해맞이 널 뛰자/ 앞집의 수캐야 너 왔느냐/뒷집의 순희야 너도 왔니 (후렴)/서제도령 공치기가/널뛰기만 못하리라 (후렴)/규중생장 우리 몸은/설놀음이 널뛰기라 (후렴)/널뛰기를 마친 후에/떡국노래를 가자세라」 고국에 대한 향수의 응어리임에 틀림이 없다.다른 어느 나라 한민족 사회보다도 전통문화를 가장 유지 발전시킨 지역은 중국조선족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그것은 연변이 항일운동의 씨밭이었고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처였기에 모든 전통문화를 항일의식으로 미화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변 노인절이 명절 단지 광복후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 영향을 받은 점은 인정이 된다. 이를테면 놀이의 의미부여에 있어서 지나치게 집체성과 전투성을 강조한다거나 이데올로기적 의미부여를 하는 것 등이다.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명절속애 「자치주 창건 기념일」(9월3일),「연변노인절」(8월15일),「아동절」(6월1일)과 같은 새로운 명절이 포함된 것은 박수를 보낼만하다.특히 연변노인절은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는 볼 수 없는 특유의 명절로서 차세대들에게 「효」를 잇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의미 있는 명절이다.아동절은 정신적으로 해이해 가는 젊은 세대들에 바른 길을 보이는 미래지향적 명절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노인문제와 갈수록 늘어가는 범죄 집단을 사전에 예방하는 사회적 문화적 장치로서 노인절이나 아동절은 크게 기능하리라 믿는다.우리를 되돌아 볼 과제의 열쇠가 연변조선족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 서울시장:중(서울 6백년 만상:66)

    ◎46년 서울시로 개칭후 26명 거쳐가/7조 예산·산하직원 5만여명 지휘/봉급 2백74만원… 장관급 대우받아 광복후 1946년 9월 경성부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바뀐 이래 초대 김형민씨에서 현 우명규시장에 이르기까지 26명이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5년까지 서울시장 자리를 거쳐 갔다. 역대 시장들의 출신을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시회적 상황을 반영하듯 초창기 정치인에서 군·경찰을 거쳐 정통행정가의 순으로 이어져 왔다. 40∼50년대에는 윤보선·이기붕·허정씨 등 정치인들이 자리에 올랐으나 5·16쿠데타 이후 윤태일·김현옥·구자춘·박영수·박세직씨 등 5명의 군인 출신과 정상천·염보현씨 등 3명의 경찰 출신이 재임했다. 이어 70년대 이후 고시출신 시장 시대가 활짝 열린다.서울시 행정이 방대해지고 다원화되면서 정통 행정관료의 입성이 간절히 요구된 것이다.양택식·김성배·김용래·고건·이상배·이원종씨가 그 주인공들이다. 서울시장은 매월 장관과 같은 2백74만원의 봉급과 수당을 받지만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는 파격적인 연 3억원의판공비를 쓸 수 있다. 또 7조가 넘는 예산을 주무르며 본청·구청·사업소의 5만6천여명과 지하철공사 등 산하 5개 공사의 1만1천여명 등 자그마치 7만여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있다. 가장 탁월한 행정가로는 22대 고건씨가 꼽힌다.반면 오점을 남긴 인물로는 5공 비리와 관련,구속됐던 20대 염보현,부임 일주일만에 중도하차한 26대 김상철씨,이번 성수대교 붕괴와 관련,물러난 이원종씨 등이 거론된다. 전남지사와 12대 의원,교통·농림수산·내무장관을 두루 거치며 행정의 달인이라는 정평을 들어온 고건씨는 복마전의 오명을 벗기 위해 「유리알 행정」을 외치며 분투노력했다.그는 재임 2년동안 택지개발사업·지하철 2기건설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무리없이 추진,직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시정을 한 단계 끌어올려 지금도 시청 공무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반면 「염보살」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한 염보현씨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전두환 전대통령의 총애 아래 권력과 너무 밀착했다가 5공 몰락 이후 철창 신세를 지는수모를 겪어야 했다.또 두주불사로 간부들에게 「술 사역」을 시키고 언론보도에 지나치게 민감,아랫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는 등 역대 시장중 가장 개성있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경찰 출신의 강성 이미지와는 달리 부하 직원의 건의에 귀를 기울이고 매사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강점도 지녔다. 항일운동과 미국 유학 경력을 가진 초대 시장 김형민씨는 당시 정(정)으로 되어있던 2백80여개의 행정구역을 모두 동으로 바꿔 현대식 행정의 기초를 닦았다.그는 지난 80년까지 주유소를 경영하다 손을 뗀뒤 기독교 선교활동에 여생을 보내고 있다. 5·6대 김태선씨는 전쟁 복구의 중책을 맡아 건설제일주의와 국산품장려를 외치며 상수도 및 도심구획정리사업,남·동대문시장 현대화 등의 업적을 이뤄 놓았다. 청렴·강직한 인물로 평가되는 허정씨는 당시 「뒷줄」을 믿고 세금을 내지 않던 힘있는 자들에게 과감한 징세와 재산압류조치를 가해 직원 봉급조차 제대로 못주던 시정을 흑자로 돌려놓는데 큰 몫을 했다.
  • 백범묘소 찾은 일 국회의원/주병철 사회부기자(현장)

    ◎“「백범일지」에 감명… 참배 결심” 단풍을 시샘하듯 밤새 내린 가을비가 그치고 맑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16일 하오 3시 서울 용산구 효창원내 백범 김구선생 묘소. 『백범의 뜻을 기리기 위해 꼭 한번 참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머리가 희끗희끗한 일본 자민당 중의원 8선의원인 시가 세스씨가 이곳을 찾은 동기를 말하고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올해 57세인 시가의원은 일본 현역 의원으로는 처음으로 항일 민족지도자 백범선생의 묘소를 찾은 것이다. 『얼마전 일본에서 활동중인 한일관계연구가 최서면씨로부터 받은 백범일지를 읽고 감명해 참배하게 됐습니다』 시가의원은 합장을 마친뒤 함께 온 한국인 일행이 비석을 가리키며 선생의 항일운동과 정신을 설명하자 숙연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있던 백범선생의 손자 김양씨(41)를 보고는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참배를 마친 시가의원은 백범선생에 대해 자기가 갖고있는 존경심과 느낌을 담담한 어조로 털어 놓았다.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처럼 역사를 평가하는 포착법을 가르쳐 준 책은 없었습니다.바로 자신의 위치와 할 일을 깨우쳐 주고 있는 책이지요』마치 내년이면 패전 50주년을 맞는 일본인들에게 이 책 만큼 의미있는 가르침과 반성을 줄 책은 없는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가의원의 참배를 지켜보는 우리측 일행 역시 그의 행동이나 말을 단순한 겉치레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백범선생의 손자 김씨는 『일본 현역국회의원이 백범묘소를 찾은 것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일본에서 같이온 최씨도 『이번 일본 현역의원의 백범선생 묘소참배를 계기로 하나하나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려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가의원은 현재 부친의 상중이라고 한다.다시 안중근의사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야한다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잊을만 하면 「망언」을 되풀이 하는 일부 일본 지도층과는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 한양대교수들,주사파 비판 대자보/“북선전 무비판적 맹종”

    ◎인문대 20여명/“계속땐 일적군파처럼 종말” 한양대 인문대교수들이 2일 대자보를 통해 주사파 운동권 학생들의 비현실적이고 주체성없는 행동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교수들은 「일부 극렬운동권에 대한 우리의 다짐」이란 제목의 이 대자보에서 『일부운동권이 국내외 현실을 무시한채 북한의 선전선동만을 무비판적으로 맹종·복창하고 있다』면서 『이들이 김일성부자의 권력세습에 대해 일언반구의 비판도 없이 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교수들은 또 『경찰서를 습격하고 달리는 열차를 탈취하는 학생들의 행동은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했던 60∼70년대 학생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폭거』라면서 『독존적이며 배타적인 주사파추종은 60년대 후반 일본 적군파가 당했던 처참한 종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며 운동권의 전면적인 체제정비를 주장했다. 교수들은 이와 함께 『한총련이 일부 주사파학생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무작정 이용만 당하고 있다』면서 이는 학생들의 교육과 지도를 맡은 자신들의 책임이 크다고 밝혔다. 교수들은 또 좌경세력 비판을 보수반동으로 등식화하는 사회의 잘못된 경향에 대해 개탄하면서 김일성의 6·25전쟁 도발 사실을 간과한채 그의 조작된 항일운동을 근거로 북한의 정통성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면서 학생운동이 다양하고 지성있는 내용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인문대학생들은 이날 「교수님들의 글에 대한 인문대학생들의 입장」이란 반박 대자보를 통해 『학생운동의 일부 폭력성은 학생운동에 대해 전면적인 탄압을 하고 있는 정부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면서 『공안정국에 편승한 교수님들의 객관성없는 주장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고 밝혔다.
  • 중국교포 근로자 데려다 쓰자/최필립(기고)

    ◎일이 남미교포 쓰듯 외국인보다 동포를 최근 일부 기업들이 추진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 수입에 대해 일각에서 반대여론이 비등하고 있다.이같은 반대시각은 우리가 중국에서 어렵게 살고있는 동포들의 국내 취업보다 외국인 근로자 수입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고 보는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근로자 수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국교포들로 국내 근로시장의 수요를 채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국교포들은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했던 동포의 후손 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해 해외로 나간 우리동포들이다.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국내 활동을 크게 제한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한 국내실정법을 철저히 적용,조국에 머물려는 동포들을 불법체류자로 만들고 있다. 가까운 일본의 예를 보자.일본은 브라질 교포3세,4세들에게 무제한 체류비자를 내주고 있다.즉 아무때나 일본에 와서 취업해 돈을 벌고 아무때나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상파울루­서울간 대한항공 좌석은 대부분 이들 일시귀국 일본인 교포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우리도 일본처럼 한국 성을 갖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을 교포로 인정해 입국심사장에서 확인만 한 뒤 입국시키면 되지 않을까.최소한 국내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에게는 입국을 무제한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부 관계자들은 중국교포들에게 일본처럼 국내취업길을 열어주게 되면 중국정부로부터 인종차별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중국여권을 가진 다른 중국인들에게도 같은 취업허용등의 조치를 취해주도록 요구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중국의 인종차별 비난을 우려해 동포들의 취업을 허용치 못한다는 것은 「구더기무서워 장 못담근다」는 소리가 아닐까.우리 한핏줄에게 모국의 입국을 자유롭게 하도록 한다는데,누가 뭐라 한들 우리의 일관된 입장만 견지하면 그만 아닌가. 중국교포 누구든 입국을 할수 있게 허용한다면 제3국 근로자는 들여올 필요가 없게된다.또 제3국 근로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각종 사회적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독일의 경우 지난 60년대 터키근로자 1백만명을 수입해와 아직까지 이들의 처리로 고심하고 있다.이들 근로자들 때문에 독일 산업이 발전했다고도 하나 이들때문에 지출되는 각종 사회보장 비용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독일은 최근 터키인들에게 터키로 돌아갈 경우 정착비로 5만마르크씩 주겠다고 발표했으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이들 터키인들 때문에 학교를 따로 지어야하고 혼혈아문제가 생기고 의료보험비용을 따로 내야하는등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해 독일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의 경우 산업발전을 위한 인력수입선을 동남아인에서 중국교포로 대체한다면 이민족간 문제가 발생치 않게된다.중국교포가 한국 여성과 결혼해도 혼혈아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또 중국교포가 돈을 벌어 중국으로 되돌아갈 경우 그는 한국기업의 중국진출 교두보 역할을 하게된다. 기업들은 외국인 근로자들의 저임금 덕택에 중국등 동남아국가에 비해 우리의 수출경쟁력이 강할수 있다고 주장한다.또 세계화 추세속에 이들 외국인근로자들을 일정기간 국내에서 취업시킨 뒤 귀국시켜 친한파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업들은 외국인근로자수입에만 신경을 쓰지 각종 사회적 문제에 대비하는데는 관심이 없다.따라서 정부는 민족생존권 차원에서 이미 선진국들이 겪었던 외국인 근로자문제를 직시하고 철저한 사전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한국교포가 우선이다.이는 세계화 추세와는 전혀 무관한 사항이다.중국교포들은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 마지못해 그곳에서 살게된 우리의 형제들이다. 해방후 그리고 우리가 독립한 후 해외로 나가 살고있는 교포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그러나 우리조상들이 제 구실을 못해 나라와 국민을 지키지 못해 떠났던 그들,그리고 그 후손들,또 해방후 분단없는 조국이 되었더라면 모두들 고향을 찾아왔을 동포들이다. 우리가 과연 그들을 타국인으로 대해야만 하는 것일까.답은 하나밖에 없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80여년만에 건국훈장 추서 민효식의병장

    ◎황해도일대서 돌격대장으로 맹활약/“의병궐기” 고종 밀지 전해듣고 거병/6백만명 이끌고 일제 토벌군과 혈전 『뒤늦게 나마 4대 80여년만에 고조할아버지의 항일 의병활동을 발굴,명예를 살리게 돼 후손으로서 감개무량합니다』 15일 제49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는 민효식의병장(1854∼1910)을 대신해 훈장을 친수받는 민의병장의 4대손 민형원덕성여대교수(43·서울 도봉구 방학동 신동아아파트)는 『아버지의 평생소원을 풀어드려 효도를 하게 됐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민교수는 그러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 10여년동안 유학을 하느라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던중 92년 7월 아버지 경남씨가 중풍으로 자리에 누으면서 『효자,식자 할아버지의 독립운동활약상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는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국회도서관등을 돌아다니며 사료를 모은 끝에 이번에 국가보훈처에 민효식의병장의 서훈을 신청한 것. 민의병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우선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의병항쟁사」는 『경의선 철도 서쪽의 장연·송화·은율 등지에서 민효식부대가 새로이 기반을 다지게 됐다』고 적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는 수십여곳에서 민의병장의 활동상을 밝히고 있다.또 국립도서관에 보존중인 일제의 조선폭도토벌지에도 『황해도 지역에 있는 괴수 민효식을 토벌하기 위해 토벌대를 보낸 결과 약간의 손상은 주었으나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했다』고 본국에 보고한 기록이 적혀 있다. 민의병장은 이런 기록에 근거,한말 일제의 강점에 대항해 일어난 제1차 을미의병 전쟁당시 크게 활약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말 마지막 진사인 민영태의 장남인 민의병장은 39세 때인 1895년까지는 고향인 황해도 벽성군 일대에서 명망높은 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명성황후시해·단발령·군대해산 등의 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구한말 군부대신 신기선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궐기토록 하라』는 고종의 밀지를 전하자 본격적으로 거병하게 됐다. 민의병장은 이 과정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초병의 역할을 맡았다. 민의병장은 이후 1908년 황해도 일대에서 많게는 수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토벌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 마침내 혈전 끝에 전사했다. 황해도 지편찬위원회가 펴낸 황해도지에 따르면 민의병장은 의병지휘 돌격대장으로 6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1910년 해주·옹진·송화로 일군을 도륙하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민교수의 아버지 경남씨는 병석에 누워 민의병장에 대한 서훈소식을 듣고는 눈시울을 적셨다. 민교수는 『고조할아버지는 순국후 시신마저 찾지 못해 평소 사용하던 물건을 선영에 모셨다고 들었다』면서 민의병장의 유일한 유품인 초상화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 북간도서 일 철도자금 탈취/최봉설선생 수기 발견

    ◎고려학술문화재단 입수 공개/15만원 뺏어 독립자금으로 사용/20년대 만주 항일운동 규명 전기 3·1운동직후 독립운동단체인 철혈광복단이 일제의 침략철도 부설자금을 빼앗은 「북간도 15만원사건」의 주역 최봉설(일명 최계립)이 쓴 친필수기가 발견됐다. 고려학술문화재단(이사장 김윤경)은 최봉설이 1959년 쓴 친필수기 「북간도 15만원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를 최근 그의 5남 최다니엘(55)로부터 입수해 13일 공개했다. 수기는 「15만원사건」의 전모뿐아니라 철혈광복단의 조직과 활동,15만원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을 위한 사관학교설립계획 등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어 1920년대 만주·노령지역 항일독립운동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5만원사건」은 1920년1월4일 북간도 철혈광복단의 일원인 최봉설과 임국정·윤준희·한상호가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길회선철도부설을 위해 북간도 용정으로 수송하던 15만원을 용성 부채골 어귀에서 일본순사 1명을 사살하고 압수한 사건이다.이 사건으로 최봉설을 제외한 3명은 1921년8월 서울 서대문교도소에서 사형당했다. 김창수동국대교수는 『이 사건은 국내에는 잘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변·연해주지역의 교포사회에서는 거의 신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건』이라며 『지난 64년에는 김준이라는 작가가 쓴 「15만원사건」이라는 실록소설이 카자흐공화국에서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재단은 김교수를 단장으로 박영석전국사편찬위원장 등 6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지난달 13일부터 27일까지 연해주지역에 보내 항일독립운동전적지와 독립운동가 유가족확인작업을 벌였다. 최봉설은 사건이후 최계립으로 이름을 바꾸고 러시아혁명에 참여하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뒤 사망해 현재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짐켄트시에 묻혀있다는 사실도 이번 조사에서 확인됐다.
  • “김정일정권 2년 넘기기 어렵다”/귀순자들이 보는 북한의 내일

    그동안 북한을 탈출,귀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변화 가능성 여부와 남북관게 전망등을 알아본다. ◎남북정상회담 시일 걸려도 성사될것/급격한 내정변화·주민동요는 없을것/경제난 악화로 완전고립 추구 어려워 ◇김만철씨(54·교회집사·87년 2월 가족과 함께 귀순)=김일성이 사망한 뒤 북한정권은 김정일로의 승계가 거의 확실하지만 길어도 2년이상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김정일이 현재 실권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위에 보이지 않게 많은 반대파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 사망뒤 빠른 시간안에 이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경우 김정일정권은 의외로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보다도 현재의 북한 실정이 더 악화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김일성이 죽은 공백을 메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경제난 타결을 위해서라도 남북관계에 유연하게 대처,예정돼 있는 남북정상회담은 시일이 다소 걸리더라도 성사될 것으로 본다. 앞으로 북한정세를 예의 주시해 국제관계에서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등을 잘 이용하면 앞으로 김정일정권도 우리에게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김영성씨(60·건축설계사·92년 6월 독일서 귀순)=김정일이 모든 내정을 전적으로 맡아왔기 때문에 김일성이 죽었다고 해서 북한의 내부사정이 근본적으로 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특히 김부자의 권력세습을 위한 세뇌작업이 20여년 이상 진행돼온데다 최근들어서는 외교정책에만 김일성을 내세웠을 뿐 실질적인 권한을 김정일이 행사해 북한이 갑자기 변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지금의 북한권력 서열이 김정일의 측근으로 구성돼 있어 김일성사후에도 다른 세력이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에 의해 억지로 김정일 세력으로 묶여졌던 측근들 속에서 경제난등으로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내심으로 따르지 않는 세력이 늘어날 경우 이를 차단하기 위해 핵개발을 더욱 가속화하고 대남도발을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북미회담·남북정상회담등의 대남유화책은 김정일의 실정에서 비롯된위기상황을 모면하기위해 김일성이 추진해 온 것이어서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상황에서 정상회담은 없었던 일로 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은 우리말의 존경어를 제대로 쓸 줄 몰라 공식석상에서의 화술이 형편없다.따라서 그는 김영삼대통령과 마주앉을 자신이 없을 것이다. 다만 정상회담과 대남 유화정책등 최근의 정책전환이 김정일의 구상이라면 기존 방침대로 계속 추진될 것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남북관계는 더 경직되고 다시 극도의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남명철씨(29·외국어대 노어과 4년·90년 4월 러시아 레닌그라드 전기대학 유학중 귀순)=김정일이 권력을 잡으면 북한사회와 남북관계가 변화될 것임은 틀림없다.그러나 당장 엄청난 변화가 오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다.당분간은 김정일도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급급할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남북관계등 대외관계도 북한측에서 적극성을 띠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김정일도 대외협력관계를 끊고 북한사회를 완전히 고립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북한의 경제사정이 너무 어려운 상황에 와 있고 완전고립한다면 분명 내부적 반발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주민생활이 더 나빠진다는 것은 결국 사회혼란을 초래해 체제위협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북한 내부에서는 김일성에 대해서는 과거 항일운동을 했다는 등의 이유로 대범한 지도자로 생각하거나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다.하지만 김정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생도 않고 어려서부터 「왕 대우」를 받아왔을 뿐 직접 이룬 업적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그때문에 김정일에 대한 불만세력도 많다.
  • 이준열사/“을사조약 무효”외친 헤이그밀사(이달의 독립운동가)

    ◎만민공동회·신민회서 항일운동/고종친서 갖고 네덜란드로… 병사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으면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면 모두 다 아는 일성 이준열사(1859년12월18∼1907년7월4일)가 남긴 어록이다. 이준열사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위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말대로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든 애국선열이다. 함남 북청출신으로 소년기 최익현등 거유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은 열사는 30세때인 1888년 고향에서 가산을 털어 경학원을 설립,인재양성에 나서는 것으로 애국운동을 시작했다. 일본 조도전대에서 신식학문을 배운 열사는 이승만·이동령·민영환·이상재·이상설·이동휘·양기탁·남궁억·노백린·장지연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만민공동회 활동을 폈으며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당시 선생은 안창호·이상재와 함께 웅변의 대가로 장안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열사는 이후 안병준등 친일파 반대운동과 신민회조직 참여,국채보상운동전개등에 나섰다. 이처럼 쉴틈없이 구국운동에 헌신하던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밀리에 광무황제를 접견,「을사조약은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됐으므로 무효」라는 내용의 황제친서를 건네받고 1907년 4월 밀사의 길을 떠났다. 2개월여만에 헤이그에 도착한 선생은 현지에서 일제의 폭압성을 알리기 위해 각국대표들을 만나려 했으나 이들이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자 연일 통곡하다 마침내 병을 얻어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의 유해는 헤이그 에이켄무이넬묘지에 매장됐다가 순국 55년만인 지난 63년 조국의 품안으로 돌아와 국민장으로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64년 서울 장충단공원에 열사의 동상을,72년 헤이그묘소에 흉상과 기념비를 건립했었다.
  • “항일필봉” 양기탁선생 묘소 찾았다

    ◎유족들,중국 강소성 율양현서/“유해봉환 곧 보훈처와 협의” 중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우강 양기탁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민족적 자각을 일깨운 언론인으로 또 일제 강점기 무장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우강선생의 묘소가 최근 중국 강소성 율양현 현지를 방문한 유족들에 의해 확인됐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부가 유해봉환을 추진중인 해외안장 독립유공자 87위 가운데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66위중의 하나로 분류돼 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유족들을 안타깝게 해왔다. 중국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와 손녀사위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등 가족들은 26일 『그동안 강소성 담양현 길당암 부근에 안치됐을 것으로만 추정해오던 우강선생의 묘소 위치를 해방직후 김구선생이 그려주신 약도와 현지에 생존해 있는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고 밝히고 『유골수습및 봉환등 구체적인 절차는 국가보훈처와 협의해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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