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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록수’ 작가 심훈 건국훈장 받는다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와 항일저항시 ‘그 날이 오면’의 작가 심훈(沈熏·본명 沈大燮·1901∼1936)이 이번 8·15 광복절에 항일운동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는다. 보훈처가 공개한 공적심사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19년 3·1의거에 참가했다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3개월간옥고를 치른 것으로 나와 있다.이 정도의 항일운동 경력이라면 그는 대통령표창에 해당된다.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포상은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으로다소 파격적이다.이에 대해 보훈처 당국은 “수형기간은 짧지만 선생의 초지일관한 항일문학 활동을 감안,훈격을 상향조정했다”고 밝혔다. 1901년 서울 노량진 흑석동에서 출생한 그는 18세때 경성제일고보 4학년 재학중 3·1의거에 참가했으며 출옥후 중국으로 유학,만주 지강(之江)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을 썼다.귀국후 그는 동아·조선·조선중앙일보 및 경성방송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와 소설을 발표하는 등문필활동에 종사했다.1934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 공모에 ‘상록수’를 심훈이라는 필명으로 응모,당선돼 크게 평가받았다.그의 대표작‘불사조’ ‘상록수’ ‘그 날이 오면’(시) 등은 모두 철두철미한 항일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연재 도중 일제 경찰로부터 곳곳에 가위질을 당하거나 시집 출간이 좌절되기도 했다.특히 1936년 8월9일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10일자 조선중앙일보 호외 뒷면에 ‘오,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 항일시를 쓰기도 했다.그는 1936년 9월16일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지난 93년 충남 당진군은 그의 옛집 필경사(筆耕舍) 옆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했으며 96년 8월 문화체육부(현 문화관광부)는 그를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그의 항일문학 활동을 기린 바 있다.유족으로는 장남 재건(在健·67)씨가 북한에 거주하고 있으며 차남 재광(在光·66)씨와 3남은 미국에 거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운현기자 jwh59@
  • 광복55주년 학술행사

    광복 55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마련한 항일독립운동 관련 학술심포지엄이 눈길을 끈다.문화관광부가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백야 김좌진(金佐鎭)장군의 항일투쟁사를 재조명한 학술회의(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주최)를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와 항일운동사 심포지엄(서대문구청 주최),그리고 개항 이후 ‘한국 민족주의의 변천과 향후 전망’주제의 학술행사(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가 그것.앞의 두 행사는 10일,마지막 행사는 11일 각각 마련됐다.각 학술행사마다 4건 정도의 학술논문 주제발표와 토론이 마련돼 있다.여러 논문 가운데 일부를 발췌,소개한다. 金佐鎭장군의 항일운동 노선과 정치이념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은 대종교(大倧敎)적 민족주의와대종교적 공화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추구하였으며,구체적으로는 단군(檀君)을 정점으로 한 ‘민주적 이상국가 건설’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아울러 김좌진은 대종교인으로 민족주의를 강조하여 국제성을 강조한 사회주의에는 반대했으며,그의 피살은 양대 세력의 분열을 책동한 일본의 계책에 의한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박환(수원대) 교수는 10일 개최된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주최 ‘김좌진 장군의 항일운동’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북만주에서의 김좌진의 항일독립운동-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제하의 논문에서 이같은 주장을 폈다. 박 교수에 따르면,백야는 철저한 대종교주의자였다.1925년 그가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한 북만주지역은 대종교 신자가 많이 사는 곳으로 그는 대종교를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같은 전통은 북로군정서 시절부터 계속 이어져온 것이었다.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1926년 화요회파 중심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북만지역 영안현(寧安縣)에 설치되자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던 대종교 계열은 국제성을 강조한 공산주의 계열과 대결양상을 빚게 되었다. 한편 1925년 중국 군벌과 일본군간에 소위 ‘삼시(三矢)협정’이 체결된 후 대종교에 대한 포교금지령과 함께 대종교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를 틈타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가 우려되자 대비책으로 무정부주의이념을 수용했다. 신민부의 후신으로 1929년 결성된 한족총연합회는 권력의 중앙집중을 부정하고 자주적 조직의 연합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즘 조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했다.백야는 독립운동과 반공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사회를 건설한 것이다.결국 그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에서 대종교적 무정부주의로 이념과 체제를 전환하였다.그의 죽음은 이같은 ‘노선변화’에서 이미에고된 것이었다. 구한말부터 1930년 그가 피살될 때까지 일생을 항일투쟁에 바친 그를 암살한 사람은 조선인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이었다.박 교수는 그의 피살은“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의 한족총연합화의 대종교적 민족주의 세력과 무정부주의 세력간의 분열 및 한족총연합회와 공산주의 세력 간의 분열책”이라고추정했다.즉 일제는 북만주지역 한인독립세력을 전멸시키기 위해 화요파의간부 김봉환(金鳳煥)을 사주,하수인 박상실을 이용해 백야를 살해했다는 것. 이를 두고 박 교수는 “일제는 화요파를 이용,백야를 처단함으로써 화요파와 한족총연합회를 이간시키고 아울러 한족총연합회의 무정부주의자와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의 분열도 촉진시키는 ‘이중효과’를 노린 계책을 꾸몄는데화요파 공산당이 바로 여기에 넘어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국제화시대 한국 민족주의. 국제화·세계화시대에서 자칫 편협한 국수주의 정도로 몰리기 십상인 ‘민족주의’.근대이후 우리역사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변전(變轉)돼 왔고,또앞날은 어떤 모습일까.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11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국제화시대 한국 민족주의의 성찰과 전망’이란 주제로 학술행사를 가진다. 이날 행사에서 첫 주제발표자인 김도형(연세대) 교수는 미리 배포한 논문(‘개항 이후 세계관의 변화와 민족문제’)에서 “우리 근대사에서 민족문제는 봉건체제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유지하는 과정,즉 한국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싹텄다”고 밝혔다.김 교수는 민족문제 인식의 논리를 주로 대외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검토하면서,지배층 내부에서 전개된 근대변혁론을 흔히 척사론(斥邪論),양무론(洋務論),문명개화론,변법론(變法論)으로 구분하였다. 김 교수는 이 가운데서 척사론자·개화론자는 민족문제 인식에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척사론자의 경우 세계화를 거부한 한계,개화론자의 경우 사회진화론의 패배주의에 흘러 외세 의존적인 형태를 띠거나 계몽운동에서 동양주의에 함몰되는 위험성을 가졌다고 지적했다.반면에 변법론적 민족주의는유교를 개혁하고 서양의 신학문을 수용,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점에서 가장바람직한 모델이었다고 주장하고 대표적 인물로 단재 신채호를 들었다. ‘일제 지배하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분화’라는 논문에서 박찬승(목포대) 교수는 “한국 민족주의는 초기 사회진화론·근대주의 등과 결합,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론을 주된 담론으로 시작하였으며 1910년대 들어 민족평등주의 사상이 싹텄고,이는 3·1운동기 민족자결론과 연결돼 확산됐다”고 주장했다.이어 “20년대 자치운동론을 놓고 찬반론이 난무한 가운데 좌우로 분열된 후 결국은 제국주의의 식민주의 논리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채 변질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특히 박교수는 “식민지하의 한국의 근대민족주의는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제대로 결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 속성을강하게 띠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전제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민족주의가 이용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강조했다. 해방후 민족주의와 관련,서중석(성균관대)교수는 ‘냉전체제와 한국 민족주의의 위상’이란 논문에서 “일제하 민족주의의 과제가 반제민족해방이었다면,해방후 민족주의의 주된 과제는 민족국가 형성과 식민체제 청산,즉 탈식민화에 있었다”며 “국가주의라고도 불리는 분단국가 의식이나 냉전이데올로기에 매몰된 것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주장했다.따라서 미국의 군사력에 전적으로 의존한 이승만정권의 반통일적 ‘통일론’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아울러 서 교수는 “민족 고유문화의 강조는 민족주의 현상으로 이해될수 있으나 1970년대 이후 유행된 대단군주의는 민족주의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한편 김영한(서강대) 교수는 ‘국제화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나아갈 진로·방향은 ‘통일지향의 민족주의’가 돼야 한다”며 “통일은 민족과 국가가 하나됨과 동시에 냉전체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내포된 통합과 해방의 논리를 모두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소재 구 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는 한국감옥사의 대명사이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 수난사의 대명사이기도하다.일제 하에는 숱한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으며,해방후에는반독재 민주투사들이 투혼을 삭여야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대문구청(구청장 이정규)은 10일 오후 2시 독립공원내 독립관 지하강당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이번 학술행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 전무한 상황에서 처음 열린 행사로 의미있는 행사였다. 이날행사에서 남도영 동국대 명예교수는 ‘서대문형무소의 민족사적 의의’라는 기조발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우리민족의 수난과 저항이 집약된 곳이자,일제의 잔학상을 세계만방에 고발한현장이며 민족정기를 보여준 성전,민족문화 수호의 생생한 현장”이라고 주장했다.남 교수는 1908년 서대문형무소가 이곳에 설치된 이후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되기까지 80년동안의 역사적 성격을 정리하면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가 차지하는 의미를 재조명하였다.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에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를장기연재한 후 지난해 이를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한 바 있는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은 ‘3·1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라는 논문에서 “3·1항쟁으로구속자만 1만8,000여명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서대문감옥에만 3,000여명이수감됐었다”고 밝혔다.김 주필은 3·1항쟁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거나 이곳에서 순국한 애국선열들을 중심으로 살핀 뒤 “이곳이 일제하 항일운동의 성지”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김 주필은 3·1항쟁 직후 서대문감옥의 간수를 지낸 권영준의 회고록 ‘형정(刑政)반세기’를 비롯하여 손병희 등 수감 애국지사들의 자서전,서대문형무소 전옥(典獄,교도소장)을 지낸 일본인의 회고기 등을 참고로 당시 수형자들의 참담한 감옥생활을 생생히 복원하였다. 이어 성신여대 이현희 교수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의 독립투쟁과 서대문형무소’라는 논문을 통해 임시정부 이후 8·15 해방까지 이곳에 투옥돼 옥고를 치른 애국선열들을 집중 조명하였다.이 교수는 “임정요인을 비롯해 독립군,6·10만세의거 주동자,수원고농학생항일운동 주동자,신간회사건 관련자,수양동우회사건,조선어학회사건,단파방송사건 등 국내외에서 전개된 항일투쟁 관련인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며 “서대문형무소는 비탄의 역사로 얼룩진 현장”이라고 말했다. 애국지사로서 이날 학술행사에 참가한 이규창 선생은 ‘나의 서대문형무소옥중체험기’를 통해 자신의 옥중체험을 생생히 증언하였다.우당 이회영 선생의 자제인 이 선생은 1935년 3월 상해에서 친일파 이용로를 총살,처단한뒤 일경에 피체,본국으로 압송돼 1936년 4월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마포형무소로 이감돼 복역중 8·15해방으로 출옥했다.이 선생은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 복역중 벽을 사이에 두고 옆방의 애국지사와의 통방(通房)통신법 소개를 비롯해 감방내에서의 애국지사와의 교류,재판과정 등 수형생활 전반을 증언했다. 정운현기자
  • 류미영 北단장은 독립투사 딸

    북측 8·15이산가족 서울 방문단 단장인 류미영(柳美英)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은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류동열 장군(1880.3.26∼1950. 10.18)의 외동딸로 알려졌다. 류 위원장의 장남인 최건국씨(58)는 9일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어머니는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류동열 장군의 외동딸”이라고 밝혔다. 류 장군은 평안북도 영변 출생으로 1907년 중국에 가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돼 10년형을 언도받고 수형생활을 했다.출옥후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1939년엔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활동했다.8·15광복 이후 서울로 돌아와 미군정 통위부장(현 국방부장관)을지내며 남한 국방군 창설에 참여했다가 정부수립후 사임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같은 해 10월 병으로 사망했다. 북한은 90년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했으며 현재 묘는 평양 교외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있다. 김상연기자
  • 애국지사 李光雨씨 건국훈장 받는다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할 증거자료 부족으로 건국훈장 포상이 보류돼온 한애국지사가 자신을 체포,조사한 일제 경찰의 증언으로 뒤늦게 훈장을 받게됐다.애국지사 이광우(李光雨·75·부산시 동구 좌천동)씨의 경우다.독립운동 당시 동료들의 증언으로 포상을 받은 사례는 더러 있었으나 일경 출신자의 증언이 증거자료로 인정돼 건국훈장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대한매일1월17일자 참조). 이씨는 1942년 5월 부산에서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친우회’를 결성,모두네 차례에 걸쳐 ‘불온전단’을 살포한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부산지법에서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년,장기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이같은 항일운동 경력을 토대로 이씨는 89년 정부에 독립유공자 서훈신청을 했으나 관련자료 부족으로 심사보류 조치를 받았다.이씨는 자신의 항일운동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관련자료 수집을 위해 정부기록보존소와 자신이 복역한 김천교도소를 뒤졌으나 모두 허사였다. 이에 이씨는 경찰청에 자신의 전과조회를한 결과 자신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형한 사실을 확인,이를 근거자료로 주장했으나 보훈당국은 “수형사실은 인정되나 구체적인 내용(죄명)을 알 수 없어 근거자료로는 부적합하다”는 입장이었다.이씨는 사건 당시 자신을 검거한 일경이 해방후 반민특위에 검거됐을 때 자신이 증인으로 출두한 사실 등을 관련자료로 제출했으나 이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이씨의 항일투쟁 공적을 입증한 것은 관련자료가 아니라 자신을 체포했던 일경의 ‘증언’이었다.1943년 3월 당시 경남경찰국 고등과 외사계 주임으로 근무했던 하판락(河判洛·88·부산 거주)씨는 올해 1월 본지와 단독인터뷰에서 “부하인 김소복(金小福)과 함께 ‘친우회 불온전단사건’ 관련,주동자 이광우씨를 검거,조사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본지 보도후 보훈당국은 “당사자의 증언이라 자료가치가 충분하다”면서이씨의 공적심사 의향을 밝혔고 이씨는 최근 공훈심사위원회의 공적심사에서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 서훈자로 최종 확정됐다. 보훈처 공훈심사과 오기택 과장은 “대한매일의 보도가 이씨의 공적 사실확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이씨는 광복 55주년인 오는 8·15 광복절에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4)북간도 독립투쟁 본거지龍共·明東

    연변 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인 연길시(延吉市)에서 대절한 짚은 단숨에모아산(帽兒山) 고속도로를 달려 올라갔다.산아래 강렬한 여름햇빛을 받으며짙푸른 벌판이 드넓게 누워 있었다.취재팀의 자문역으로 동행한 연변대학 민족 연구소 박창욱 교수는 “초기 유민들이 개척한 땅”이라고 말했다. 차를세워 사진을 찍은 뒤 내리막길을 달렸는데 금새 작은 도시가 앞에 나타났다. 우리 유민들이 세운 도시,일제에 줄기차게 저항했던 용정(龍井)이었다. 어서달려가 손으로 어루만지고 싶을 만큼 정겨웠다. 딸랑딸랑 요령을 울리는 당나귀 달구지들과 섞여 해란강의 룡문교(龍門橋)를 건넜다.다리길이는 80미터쯤.강물은 좁은 골을 타고 실타래처럼 흐르고하상의 6할은 모래펄과 잡초였다.교통량이 많아져서인지 바로 옆에 새 다리를 건설하고 있었다.시내로 들어가 먼저 서전서숙(瑞甸書塾)터에 차를 세웠다.을사조약 강제체결후 국운이 기울자 이상설·여준·이동녕·정순만 등은1906년 이곳에 와서 학교를 세우고 신학문과 조선역사를 가르쳤다.다음해 이상설과 정순만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뒤 일제가 용정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탄압을 가하자 곧 문을 닫았다. 길지않은 기간이었지만 서전서숙이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북간도 전체에 민족혼을 고취하는 수십개의 학교가 세워졌던 것이다.옛 서전서숙 자리에는 용정실험소학교가 들어서 있었다.교문 앞이 저자거리로 변해 버려 조금은 어수선했다.교문을 들어서니 왼쪽에 낡은 건물이 보였다.서전서숙이 문을 닫자일제가 그 자리에 소학교를 세웠는데 그 건물이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그 시절의 흔적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아쉬워하며 육도하거리로 나가 지금은 용정시인민정부 청사로 쓰이는 옛 일본영사관 정문 앞에 섰다. 일제는 1909년 10월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총영사관으로 바꾸고 두 해 뒤에 이 건물을 신축했다.워낙 견고하게 지은 터라 90년이 지난 지금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그것을 바라보며 옛일을 상상하는데 그 옛날 이곳에서 울렸던 만세함성이 환청처럼 들려 왔다. 기미독립선언서가 북간도로 들어온 것은 1919년 3월8일.지도자들은 수백 장을 비밀리에 인쇄 배포하고 13일 정오에 거사할 것임을 알렸다. 일제와의 갈등을 원하지 않았던 군벌 장작림(張作霖)은 군대를 용정으로 급파했다. 그날북간도 곳곳에서 동포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군대가 길목과 다릿목을 차단했으나 산벼랑을 타고 강을 건너 쏟아져오는 군중을 막을 수는 없었다.천주교회의 종을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명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1만명이 넘는 시위대는 홍수처럼 일본인 상부지(商敷地)와 용정역을 휩쓸고 영사관으로 돌진했다.군벌군대와 일본영사관 경찰이 무차별총격을 했고 희생된 사람은 17명.그뒤 만세시위는 만주땅 전체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시위대의 자취를 밟아 옛 천주교회 터와 용정역을 찾아갔다.교회는 일본인들이 헐어버려 흔적도 없고,1930년대에 개축되었다는 용정역도 무심히 외치는 장사치들의 목소리만 땡볕 속에 공허하게 퍼지고 있었다. 취재팀은 육도하(六道河)강을 따라 명동(明東)을 행해 달렸다.옛 유민들의길,망명가들의 길을 거꾸로 밟아 가는셈이었다.함경북도 회령에서 두만강을건너면 만주땅 삼합(三合)에 발을 딛게 된다.멀리 코끼리등 같은 오랑캐령의구릉이 보인다.그것을 넘으면 저절로 육도하라는 작은 강을 따라 걷게 된다. 한나절쯤 가면 명동에 이르고 또 한나절을 걸으면 용정이다.길을 넓히느라도처에서 공사를 벌이고 있어 몇 번이나 육도하 쪽으로 내려가 물에 잠긴 자갈길을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마치 말을 탄 선구자처럼 몸이 껑충 솟구치곤 했다.도중에 차를 세운 곳은 ‘15만원 탈취의거’의 현장 동랑고개였다.1919년 11월,윤준희·임국정·최봉설 등 철혈광복단원들은 일제가 거금을 용정 영사관으로 호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했다. 대담한 기습으로 호송대를 사살한 그들은 돈자루를 메고 북국의 설원을 걸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까지 갔다.그곳 한인회 부회장이던 엄인섭에게 사실을토로하고 무기구입 알선을 부탁했다.엄인섭은 돈에 눈이 멀어 그들을 밀고했고,최봉설을 제외한 네 사람은 체포돼 총살당했다.당시 일본군은 러시아백위군을 돕는다는 명분아래 연해주에 출병해 있었고 결국 돈은 다시 일본군에게 돌아갔다.이 무렵 독립군은 입대 지원자가 십만이 넘었으나 무기가 없어 받아들이지 못했다.마침 백위군을 도우려고 연해주에 출병한 체코 군대가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능좋은 총을 닥치는대로 팔고 있었으므로 그돈이면 소총 5,000정은 살 수 있었다.그것이 홍범도나 김좌진에게 갔다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하며 명동으로 향했다. 1899년 함경북도 회령,종성에 살던 유학자 김약연·김하규·문치정 등은 가산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이주해 중국인 지주의 황무지를 사들였다.비옥한 땅을 일궈 탐관오리가 없는 정직한 신천지를 만들고 조국을 구할 인재를 키우자는 뜻에서였다.횃불을 켜고 육도하 물을 끌어들여 논을 풀어 세 해만에 생존의 고비를 넘어섰다.첫 추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이때부터 1할씩 떼어 학교설립 기금을 모았다.1907년 용정의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학교 설립의 필요는 더 커졌다.그들은 1908년 명동학교를 세우고 다음해는 중학교,그 다음해는 여학교를 세웠다.북간도 동포들은자식들을 이곳으로 보냈고 졸업생과재학생 들은 ‘3·13만세시위’와 항일전쟁에 앞다투어 몸을 던졌다. 명동의 성장과 발전에는 김약연(金躍淵·1868∼1942)의 역할이 가장 컸다. 신문물과 신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재면·황의돈·장지영 등 신문물을 익힌 우수한 젊은 교사들을 초빙했다. 그리하여명동을 민족정기의 성지로 만들어 갔다.그는 항일시인 윤동주(尹東柱)의 외숙이기도 하다.취재팀을 태운 짚은 육도하강을 아슬아슬하게 건너 세 선각자가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장재촌(長財村)으로 접어들었다.‘나의 행동이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김약연은 마을 뒷산 풀밭 묘지에누워 있었다.명동촌은 거기서 200미터쯤 떨어져 있고 두 마을 사이로 새로뚫린 길이 관통하고 있었다.명동촌은 한가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으로취재팀을 맞았다.누렁개와 볏이 빨간 수탉이 달려가고 느릿느릿 황소를 끌고가던 동포 농부는 웃으며 손을 들어 명동학교터를 가리켰다. 학교터는 담배밭이었다.명동교회는 역사 전시실을 겸하고 있는데 예배도 본다고 안내원이말해 주었다.교회 바로 아래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명동출신으로 영화계의 선구자 나운규도 있으나 그는 명동교회 전시실의 사진 몇장으로 남아 있었다.그밖에 문익환(文益煥)목사도 있다. 그는 명동을 세운세선각자 중 하나인 문치정의 손자다.명동에는 안중근의 숨결도 남아 있다.1908년 연해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을 감행해 회령에서 참패한 후홀로 찾아와 절치부심하며 사격연습을 했다는 산골짜기가 바로 명동의 뒷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기미년 만세시위 때 순국한 분들이 묻힌 ‘3·13반일의사릉’에 들렀다.한창 확장공사를 하고 있는 큰길에서 오른쪽으로 100미터쯤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면 된다.깔끔하게 단장된 봉분들 위로 흰 나비들이 하늘하늘 날고 있었다.자동차는 윤동주 묘가 있는 ‘영국데기’언덕을 멀리 바라보며 화룡(華龍)쪽으로 달렸다.화룡시 북쪽 약 3㎞ 국도의 오른쪽 구릉,항일운동의 정신적 바탕이 된 대종교 3종사(倧師) 나철·서일·김교헌의 묘지가깨끗하게단장되어 있었다.국조 단군을 표상을 삼고 항일투쟁에 힘을 집중한것이 대종교였고,청산리 전투의 주역인 북로군정서의 장병은 대부분 대종교신자였다. 항일투쟁의 근거지 북간도.그 옛날 우리 유민들이 개척한 드넓은무논지대에 뉘엿뉘엿 여름해가 지고 있었다.취재팀은 1909년 망명해온 나철이 대종교 본부를 세웠던 청파호(靑波湖) 마을을 멀리 바라보며 차에 올랐다. 용정 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기고] 광복절과 백범

    독립기념관에서 광복절을 맞는 나는 자연히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신 선열들을 생각하게 된다.그 중에도 백범에 대한 생각이 더 떠오른다.아마도 그분이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이고,통일을 염원했던 투쟁과 나의 집안과 맺었던 인간관계 때문일 것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소원은 대한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그 다음 네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라고 할 것이다.또 “그 다음 소원은무엇이냐?”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백범은 해방후에도 통일조국을 보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면서 통일을 위하여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고 말하였다.이는 백범의 간절한 소망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항일운동가나 노애국자로서의 백범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다만 할아버지와 같은 인간 백범의 면모를 소개하고자 한다.백범은 나의 할아버지(백암 박은식),내 처의 할아버지(우강 양기탁)와는 항일투쟁의 동지이며 후배였고 상해 임정에서 고락을 같이 한 분이었다. 또 나의 외할아버지(최충호)와는 고향(황해도 신천) 선배이고 막역한 동지였으므로 나는 어릴 때 백범으로부터 손자와 같은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는말을 들었다.이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나의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이신 외할아버지를 따라 어려서 상해에 가서 한인보통학교(인성학교)를 다녔다.졸업 3일 전에 백범이 우연히 외할아버님 댁에 놀러왔다. 이때 어머니(윤신)는 울고 있었다.졸업식에 입고 갈 옷,신발과 양말이 없었던 것이다.백범이 그 모습을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지? 다 우리들의 잘못인데…”라면서 “윤신아,오늘 밤에 꿈을 잘 꾸면,내일 백발 할아버지가 좋은 선물을 갖다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백범은 1원을 보내,나의 어머니는 즐겁게 졸업을 하였다.당시 1원이 큰 돈이었고,가난한 독립운동가에게는 더더욱 큰 돈이었다.후에 안 일이지만 백범이 전당포에 당신의 외투를 맡기고 빌린 돈이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해 백범이 귀국하면서 나의 장인어른께 종이 한 장을 갖다주셨다.그것은 우강 양기탁 묘소의 위치와 그 지방의 이름이었다.처가에서 그 종이를 반세기 동안이나 간직하다가 중국과 국교수립후 지형과 주소가다 변한 곳을 여러해 수소문한 끝에 유골을 찾아 1998년에 고국으로 봉환하였다. 나는 묘소를 수소문하면서 백범에 대한 존경심을 다시한번 더 갖게 되었다. 우강은 1920년말 임시정부가 매우 혼란할 때 마치 세상을 포기한 사람처럼홀로 한국인이 없는 중국의 오지 중의 오지에 가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뜨셨다. 백범은 해방을 맞아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귀국준비에 여념이 없었을텐데사망한 지 오래된 옛 선배동지의 묘소를 수소문해 귀국 전에 챙겼다는 것은보통사람이면 못했을텐데,하는 감동을 나는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백범은 나라와 정의를 위하여는 추상과 같았고 무서운 의혈투쟁을 서슴지않았던 분이다.그러나 어린이를 사랑하고 동지를 아끼는 아름다운 인간미도많았던 분이다.그러기에 아마도 우리는 그분을 민족의 지도자라고 존경하는것이 아닐까. 박유철 독립기념관 관장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1)안중근의사 의거현장 하얼빈역

    90여년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국내외에서 피끓는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때로는 일제의 합방원흉들에게 단신으로폭탄을 던졌고 때론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며 독립의지를 해외만방에떨쳤다.대한매일은 이같은 애국선열의 고귀한 희생과 드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연말까지 매주 1회씩 미·소·중·일 등 4개국에 흩어져 있는 항일유적지를 탐방한다. 중국에서는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현장을 비롯한 24곳을돌아보고 임정요인 및 독립군이 걸은 가시밭길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또 옛소련에서는 하바로프스크 독립군 전적지 등 5곳을 살펴본다.미국에서는 전명운의사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 저격현장인 샌프란시스코 등 5곳을,일본에서는 저항시인 윤동주 등이 숨진 후쿠오카형무소 등을 찾아본다.대한매일은 현장의 모습과 관련문서,생존자 증언 등을 통해 민족의 제단에 몸바친 애국선열의 불굴의 독립정신을 새롭게 정리한다. 중국의 동북3성(省)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성도(省都) 하얼빈.하얼빈은 우리 항일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의열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으로 우리에겐 낯익은 곳이다.일제당시 이곳은 만주와 러시아일대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으로 숱한 항일 애국지사들의피와 땀이 서린 곳이다.이곳은 또 아직도 일제의 가혹한 통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 곳곳에는 일제때 세워진 러시아풍의 관공서 건물들이 여전히 옛 영화를 자랑하듯 버티고 서 있다.안 의사 의거로부터 90년이 지났지만 안 의사의의거관련 유적 역시 고스란히 남아 그 날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시내 외곽에는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았던 일본 관동군 예하 731부대의 잔흔이참혹했던 과거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하얼빈은 근대 동북아시아의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재팀이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을 찾은 것은 지난 7월 8일 오후 1시.취재팀은 안 의사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이토가 91년전 이곳을 향해 출발한 열차의 출발점이자 만주국의 옛 수도였던 창춘(長春)을 출발,세시간 반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취재팀을 맞은 것은 30도를 오르내리는 하얼빈의 무더위였다.열차는 3번 플랫폼에 정차했다.승객들을 따라 지하통로를 지나 취재팀이 나온 곳은 1번 플랫폼이었다.바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 근처였다. 관련자료에 의하면 안 의사는 출구쪽의 역사(驛舍)와 인접한 1번 플랫폼에서 이토를 처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의거현장에는 이곳이 안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의거현장을 정확하게 알고있는 역무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취재팀은 전문가의 고증을 받기로했다.숙소로 돌아와 이 지역 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헤이룽장성 당사(黨史)연구소 김우종소장(71)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김 소장은 “1번 플랫폼 지하통로 옆,즉 2등 대합실 출구 앞”이라며 “당시 일제가 이토의 흉상을 세웠으나 8·15후 소련군이 철거했다”고 증언했다.현재 그 자리에는 작은 화단이조성돼 있다.구내에서 안 의사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은 철마가 잠시 쉬었다 가는 1번 플랫폼 뿐이었다. 하얼빈 시내에는 안 의사 관련 유적이 이밖에도 몇 군데 더 있다.보존상태는 대부분 양호한 것으로 취재과정에서 확인됐다.우선 안 의사 의거와 인연을 맺고 있는 역으로 하얼빈역에서 15㎞ 떨어진 채가구역이 있다.이 역은 안의사의 동지인 우덕순 의사가 이토가 탄 기차가 이곳에 정차할 것에 대비,이토를 기다렸던 곳이다.하얼빈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채가구역은 러시아풍의 단층 건물 옛 모습을 그대로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안 의사가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러시아 군헌(軍憲)에게 처음 신문을 받은 곳은 동청(東淸)철로국 공안국 건물이었다.하얼빈 역에서 500m 가량 떨어진 대로변에서 위치한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현재는 하얼빈 철로국 공안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한편 안 의사가 이곳에서 간이신문을 마치고 이송된 곳은 하얼빈주재 일본영사관이었다.안 의사가 체포된 후 두 손이 뒤로 묶인채 쇠사슬을 두르고 찍은 사진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 일본영사관 지하감방에서 일제 관헌으로부터 가혹한 신문을 당한 항일투사가운데 남자현(南慈賢) 의사가 있다.1872년 경북 영양 출신인 남 의사는 남편이 의병전투에서 전사하자 1919년 만주로 망명,서로군정서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1925년 국내로 들어와 동지들과 사이토 총독 암살계획이 미수에 그치자 만주로 다시 돌아가 재만(在滿)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참여하였다.1931년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자 온갖 탈출노력을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후 만주주재 일본대사를 처단하기 위해 걸인 노파차림으로 무기를 운반하다가 하얼빈시내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 체포돼 이곳 영사관 지하감방으로 옮겨져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남 의사는 감옥에서 6개월동안 단식투쟁끝에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33년 8월 22일 이곳 이국땅 하얼빈에서 순국했다.남 의사의 유해는 하얼빈 시내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그후 문화공원으로 불려온 이곳은 현재 하얼빈 유락원(遊樂園)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취재팀이 방문한 현장은 각종 놀이기구와수영장 등이 들어선 놀이공원으로 바뀌어 있어 어디에서도 남 의사의 흔적은찾을수 없었다. 보훈처의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 답사팀과 함께 하얼빈을 찾은 박환 수원대교수(사학과)는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는 선열들의 업적을 현창하는 일 가운데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업”이라며 “그동안 현지 촌로들의 증언에만의존하는 학술차원의 조사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현지 연구자로 답사팀에합류한 유병호교수(옌볜대학 민족연구소)는 “93년 엔벤대학에서 조선사 공개강좌를 개설했을 당시 단군을 아는 조선족 학생이 5∼6명에 불과한 것을보고 놀랐다”며 “한중우호 차원에서라도 항일독립투쟁사를 제대로 교육할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하얼빈은 안 의사의 의거관련 유적은 물론 시내 외곽에는 일본 관동군예하 731부대의 구지(舊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시내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평방구(平房區)에는 지난 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중국 당국이 건립한 ‘731부대 죄증(罪證)진열관’이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진열관 앞 100m 지점,즉 731부대 북쪽 끝에는 당시 731부대에서 필요한 전기·에너지 등을 공급한 ‘동력반(動力班)’의 대형 굴뚝이 철거되다만채 흉한 모습으로 잡초 속에 방치돼 있었다.이 앞쪽에 위치한 부대 터에는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현재 철거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이곳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중국 당국에서 이곳을 역사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민가를철거중이라고 했다. 한편 그동안 731부대의 흔적은 동력반의 굴뚝 정도만 상징적으로 남아있고나머지는 대개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취재과정에서 아직도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 출신의 한 주민은 취재팀에게 “한국인과 중국인은 모두 같은 피해자”라며 “731부대의 지하통로가 하얼빈 시내까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증언했다. 하얼빈 정운현기자 jwh59@
  • 구국의 뜻 되새기자/ 대한매일 어제와 오늘

    ◆민족 정론의 기수 96년. 이땅에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린 지 아흔여섯 돌,민족정론의 기수로 거듭난 지 두 해.대한매일이 오늘 또 한번의 생일을 맞았다.지난 98년 11월11일새로운 제호로 재탄생한 ‘대한매일’은 그동안 90년을 넘긴 경륜에 새내기의 열정을 뒤섞어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온힘을 기울였다.대한매일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는다. 지난달 14일 남북정상이 만나 제2차 단독회담을 하다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남쪽의 신문더미 속에서 대한매일을 집어들었다. 김위원장은 “옛 ‘서울신문’이 제호가 바뀌었다면서요”라고 물었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곧 “대한매일로 바뀌었다”고 답했다.김정일위원장이서울신문과 대한매일을 줄곧 애독했음을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항간에 화제가 됐다.하지만 이 ‘실화’는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는지도 모른다.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기 전,아직도 냉전논리에 젖은 사람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지난 5월19일 대한매일은‘내가본 김정일 총비서’란 제목으로 특집을 내 4·5면을 펼쳐 그를 소개했다. 필자는 재미언론인 문명자(文明子·71)씨와 북한문제 전문가인 서대숙(徐大肅·69)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이들은 김위원장을 “전혀 건강에 이상이 없으며 통이 크고 사나이답다”“박력 있고 한번 한다면 하는 성격”(문명자)이라거나 “정치지도자로서 아버지보다 더 배짱이 있다”(서대숙)고 평가했다.이같은 보도가 나가자 대한매일 편집국에는 그를 의도적으로 미화했다는 비난전화가 빗발쳤다.서방 관측통이 김위원장을 “내성적이며 대인관계를 기피하는”“성격이 괴팍한 영화광”쯤으로나 묘사해 온 탓이었다. 그러나 보름여 지나 김위원장이 TV에 등장했을 때 그 모습은 대한매일이 특집에서 보여준 그대로였다.북한,그리고 북의 지도자와 주민의 삶을 제대로이해한다는 것은 통일을 향한 길목에서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다.대한매일은이 시대가 안은 최대의 과제인 민족통일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이제그 결실을 하나씩 맺어가고 있다. 아울러 대한매일은 재창간후 ‘역사 재정립’과 ‘사회 개혁’에도 힘을 기울였다.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근현대사에서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고 가려진 사실을 발굴했다. 98년부터 2년여동안 ‘친일의 군상’ ‘민주열사 열전’ ‘제2공화국과 장면’ ‘의열 독립투쟁’ ‘문명자 회고록’ 등 잇따라 지면을 장식한 ‘정직한 역사 되찾기’시리즈는 국민에게 오늘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고 내일의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 구실을 했다. 또 지면에서의 노력말고도 지난해 창간 95주년 역점사업으로 ‘백범 김구전집’(전12권)을 간행했다든지,북한 지도층에 관한 유일한 인물정보사전인 ‘북한인명 사전’을 거듭 개정해 출간한 일들은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할 일을 더욱 확대한 기념비적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다.이밖에도 대한매일이 다른매체와 구별해 독자에게 전하는 정보서비스는 적지 않다.신문사상 최초로 신 문의 첫 면과 마지막 면을 동시에 1면처럼 활용해 마지막 면은 행정뉴스로 특화했다.정부 정책과 이를 수립·집행하는 공무원 사회의 움직임을 빠르게,정확하게,깊이 있게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다른 매체에서는 접할 수 없는귀중한 뉴스를 제공했다. 동시에 정책을 국민에게 올바르게 이해시키는 반면 잘못된 정책은 즉각 고치게끔 하는,국민과 정부 사이의 가교 노릇도 톡톡히 했다. 강만길(姜萬吉)고려대교수 조동걸(趙東杰)국민대명예교수 고은(高銀)시인 등당대의 지성이 번갈아 지면을 장식하는 오피니언 페이지,언론의 자기 성찰과반성을 담은 매체비평,어느 신문보다 애정과 정보가 가득 담긴 지역뉴스면도 대한매일의 자랑거리다. ◆항일운동의 구심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는 1904년 7월18일 창간됐다. 발행인은 영국인 배설(裴說·Ernest Thomas Bethell),총무는 양기탁(梁起鐸)이었다.일간으로 영문판 4면,국문판 2면을 발행했다. 당시는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때였다.그해 2월8일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이어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얻었다.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되면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했다. 한마디로 병탄을 앞두고 언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착착 옥죄어나가는 시절이었다.이같은 상황에서 창간한 대한매일은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서서 일제침략에 맞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해 민족에게 한줄기 빛처럼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이 외국인이라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이점을 십분활용,대한매일은 ‘배일호국’(排日護國)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다.이는 양기탁을 비롯해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도빈(張道斌)같은 독립운동의거목들이 직접 신문제작에 참여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양기탁은 배설이라는 보호막을 둘러친 채 실제로는 신문제작과 경영을 도맡다시피했다. 민족주의 사학자로 우뚝한 이름을 남긴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3인은 잇따라 주필 직에 올라 예리하고 품격 높은 논설과 선조의 위업을 찬양하는 소설을 실어 민족정기를 벼리어 나갔다. 이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대한매일이 이루어놓은 성과는 거대했다. 1907년 11월18일자에는 전날 체결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만천하에 밝혔다.고종황제가 끝까지 조약체결에 반대했으며 따라서 이 조약은 강제로 맺어진 늑약(勒約)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후에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전국적인 의병항일투쟁기에는 ‘처처의병’이란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보도했다.산업진흥과 자주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민족기업·사립학교 설립을 적극 유도했다. 이같은 대한매일의 업적은 민족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대한매일을 누르고자 일제는 갖은 간계를 부렸지만 당시 발행하는 신문 부수를 전부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의 제반 악정(惡政)을 반대하여 선동함이 끊이질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한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국운이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대한매일도 위기를 맞는다.1908년 4월신문지법이 개정돼 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금지 및 압수가 가능해졌다.다음달에는 발행인이 배설에서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바뀌었고 7월에는 양기탁이 누명을 쓰고 구속됐다. 배설이 1909년 5월1일 타계하자 영문판 발행이 중단됐다.1910년 5월21일 일제는 만함에게서 대한매일신보사를 사들였다.그리고 국권을 빼앗긴 8월29일대한매일은 종간했다.지령(紙齡)은 1,651호였다. 대한매일은 일제강점기에 ‘매일신보’로,해방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명맥을 유지했다.1998년 새 시대가 전개되면서 민족정론지의 뿌리를 되찾고자 신문 이름을 ‘대한매일’,회사명을 ‘대한매일신보사’로 해 재탄생했다. 새로 태어난 대한매일은 이제 ▲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이라는 네가지 다짐을 묵묵히 실천하며 민족통일과 국가사회 개혁이라는,21세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용원논설위원 ywyi@
  • 구국의 뜻 되새기자/ 해외 항일유적 현황·실태

    중국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필수 방문코스 가운데 하나는 홍구공원이다.이는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있은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공사와 일본군 수뇌 수명을 폭살시킨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을느껴보고자 함이리라.윤의사 의거는 단순히 일제의 고관 수 명을 살상한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당시 임시정부에 대해 미온적이던 장개석 정부의 마음을 돌려놓아 물심 양면의 지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항일세력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러시아·미국 등지에본거지를 잡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이 활동근거지로 삼은 항일유적지는생생한 ‘민족혼의 현장’이라고 할수 있다.낯선 이국땅에서 접한 선열의 이 름이나 묘소,항일전적지는 후대들에게 애국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정부차원에서 이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수십권의 항일운동 관련 홍보책자보다 선열의 얼이 서린 ‘흔적’ 하나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항일세력들은 국내·외에서 국권회복투쟁을 전개하였다.이들은 1919년 전 민족이 궐기한 ‘3·1의거’와 같은 비 폭력 투쟁은 물론 안중근·윤봉길 의사로 상징되는 의열투쟁,그리고 청산리·봉오동전투와 같은 대규모 무력항쟁도 전개했다.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항일투쟁은 곳곳에 그 애국혼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그 가운데 임시정부 청사 등 일부는 정부의 복원·보존 노력으로 상태가 양호한 것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최근 보훈처가 전문가들의 조언과 자체 현장조사를 통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해외독립운동 관련사적(시설물 포함)은 모두 317개소로 파악됐다.이들중 244개소는 중국지역에 소재하고 있으며,흔히 ‘만주’로 불리는 동북3성일대에 163개소가 밀집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36,일본 4,카자흐스탄 4,대만 2곳 등 총46개소이며,그밖에 미주지역 24개소(미국 22,멕시코 2),유럽지역 3개소(프랑스 1,네덜란드 2)등이다. 중국내 항일전적지는 동북3성 가운데 하나인 길림성에집중돼 있으며 그 가운데서는 용정(龍井)일대가 단연 으뜸이다.90년대 들어 중국관광이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정이다.이곳은 우리귀에 낯익은 가곡 ‘선구자’의 고향으로 비암산,일송정을 비롯해 민족시인윤동주의 생가와 묘소가 있어 더욱 한국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이밖에도인근 교외에 위치한 ‘3·13반일의사릉’을 비롯해 서전서숙·명동촌교회와‘봉오동전투’ 전적지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근 화룡현에는 3·1의거 이듬해인 1920년 10월 독립군이 일본군 3,000여명을 궤멸시킨 ‘청산리전투’ 현장과 대종교 3종사의 묘소가 남아 있다.흑룡강성 하얼빈에는 안중근의사의 의거현장을 비롯,경박호·사도하자 전투지가 남아있고,영안(寧安)에는 김좌진장군의 묘소와 김 장군이 운영했던 정미소,그리고 신민부 군정파본부,고려공산당 북만지부 건물 등이 남아있다.또요령성 봉천에는 편강렬의사의 전투현장,신빈현에는 양세봉장군 순국지·서로군정서 본부,단동에는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이륭양행은 당시 영국식민지인 아일랜드출신 무역상 윌쇼가 경영하던 건물로 임시정부는 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교통국을 두고 국내와 연락거점으로 활용했었다.집안현,장백현 일대에는 독립군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돼 10여년을 머문 상해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임정기관지 독립신문사 터,윤봉길의사의 의거현장인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애국지사 다수가 묻혀 있는 만국공묘(외국인 묘지),인성학교 등이 남아있다.북경에는 단재 신채호,우당 이회영 선생이 활동했던 흔적과 신한혁명단본부 자리가 남아있고,1932년 윤의사의거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머물다간 진강,가흥,기강,장사,항주 등지에도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비롯해 임정청사 이전지가 더러 남아있다.강소성 남경에는 의열단원들의 합숙지이자 민족혁명단의 본부였던 호가화원이 있다.서안에는 OSS훈련지와 광복군 2지대주둔지가,임정 마지막 정착지인 중경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광복군사령부본부건물(현 미원식당 건물) 등이 남아있다.국토 전역에 걸쳐서 항일투사들의 피와 혼이 서려있는 중국은 ‘항일전적지의 진열장’이라고 할만하다. 중국 다음은 러시아로 모두 36개소의 항일독립 유적지가 있다.일제 당시 연해주로 불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초의 한인거주지를 비롯해 신한촌,해조신문사 터 등이 남아있고,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은 커리마을이 있다.하바로프스크에는 한인사회당 창당지와 지금은시민휴식공원으로 변한 독립군 전투지,그리고 1937년에 사망한 한인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또 리르쿠츠크에는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지(현 레닌거리 23번지 인민의 집)와 이범윤 유배지 등이 남아있다.89년 소련붕괴후 러시아에서 분리된 카자흐스탄에는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옛집과 동상,묘소(크질오르다시 공원묘지)가 있으며,계봉우 선생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미국에는 한인 이민들이 처음 정착한 하와이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뉴욕 등에 민족세력들의 활동무대가 남아있다.하와이에는 당시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을 비롯해 조선국민단 사관학교,하와이국민회관 등이 남아있다.샌프란시스코에는 전명운·장인환 두 의사가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현장인 페어부두,스티븐스가 투숙했던 페어호텔이 90년이 넘는 세월속에서도 여전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이곳엔 대한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발간지(페리스트리트 232)도 여전히 남아있다.로스앤젤레스에는 애국지사이자 대표적 재미한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가(남가주대 구내소재)와 흥사단중앙회관이 남아있다.이밖에도 캘리포니아 클로세트 윌로스에는 계원 노백린 장군의 한국비행단 설립지가,네브래스카주에는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지(현 헤이스팅스 네브래스터니 농장)가 남아있다.구미위원회 관련 유적은 뉴욕에 있다. 그밖에 프랑스 파리에는 평화회의 대표관과 임시정부 파리통신국,네덜란드에는 ‘헤이그밀사’ 가운데 한사람인 이준 열사의 묘역과 데용호텔이 항일관련 유적지로 기록할 만하다.일본에는 2·8독립선언의 현장인 도쿄기독교청년회관과 김지섭·이봉창의사의 의거현장인 도쿄 궁성의 앵전문과 이중교 일대,즉 일본의 최심장부가 바로 항일유적지인 셈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26일 추모제전 갖는 김우전 광복군동지회장

    “이곳에 잠들어 계시는 18위 동지들은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조국광복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하신 분들입니다.그러나 살아남은 우리들은 이 동지들을 평소 제대로 찾아보지 못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할 때 가장 가슴저미는 대목은안중근 의사처럼 유해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이다.그 다음은 후손이 없어 돌보는 이가 없는 독립운동가의 묘소를 볼 때이다.항일운동의 상징인 유관순열사는 묘소도,후손도 없다.유 열사가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의 무후(無後)선열제단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4·19혁명의 주역들과 한국근현대사의 역사적 인물 다수가 잠들어 있는 수유리에는 후손 없이 숨진 광복군 18위의 묘소가 있다.올해로 광복군 창설 60돌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김우전)는 26일 오전 11시 이곳 묘소에서앞서간 동지들의 추모제전을 갖는다. 이날 행사에는 생존 광복군 출신 180여명과 국가보훈처·광복회 관계자들이참석할 예정이다.김 회장은 “18위 동지들은 일찌기 가신 탓으로 생전에 짝도 지어보지 못했다”면서 “살아남은 동지들은 늘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수유리 광복군묘역은 지난 85년 국가보훈처가 광복40주년을 맞아 단장했다. 당시 이곳에는 김천성·김찬원·문학준·이해순·김성률·한성수·현이평·김유신·백정현·김백운·한 휘·전일묵·이도순·동방석·정상섭·이한기·안일남·김순근 등 18위의 묘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한성수·이도순 두 분이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이장,현재 16위가 모셔져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새 영화/ 아나키스트

    1920년대 중국 상하이는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었다.민족주의 제국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온갖 사상이 숨가쁘게 소용돌이친 질풍노도의공간이자 수많은 혁명가와 창녀가 한데 모여든 모험과 환락의 땅이었다.여권이나 비자 없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그 화려한 땅은 조국을등진 인간들을 감싸주는 ‘망명자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유영식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나키스트’(29일 개봉)는 바로 이 상하이를배경으로 한 액션 느와르다.허무주의 인텔리겐차 세르게이(장동건),낭만적휴머니스트 이근(정준호),냉철한 사상가 한명곤(김상중),과격한 행동주의자돌석(이범수),소년 테러리스트 상구(김인권)등 5명의 조선인 무정부주의자가이야기를 끌어간다. 아나키스트는 ‘선장 없는 선원의 무리’란 어원의 그리스어 아나키야에서나온 말로 무정부주의자를 뜻한다.노동조합운동, 이상촌건설운동 등도 벌였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테러활동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항일 테러활동의 본산인 의열단에 속해 있다.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김원봉이 중국 베이징에서 조직했다.그 사상적 지주는 단재 신채호였다.이들의공통된 적은 아시아 전체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은 실제로 항일운동에서 한몫을 담당했다.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잘알려져 있지 않다.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에게서 모두 버림받은 아나키스트들의 삶,그 역사의 사각지대를 복원하고자 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뒷받침되지 못해아쉬움을 남긴다. 진중한 주제의식을 전하기에 시나리오는 밀도가 떨어지고,배우들의 연기엔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던진 열혈남아의 초상을 그려낼 만한 카리스마가 없다.댄디즘에라도 빠진 것일까.저마다 멋과 감상으로만 치달아 연기가 겉돈다.특히 비속어로 범벅이 된 이범수의 튀는 연기는 극의 원활한 흐름을 번번이 끊어놓는다.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1920년대 격랑의 역사에휩싸인 조선인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을 표현한 이 말은 영화 ‘아나키스트’에선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김종면기자
  • ‘韓·中 항일운동’ 학술세미나 단행본 출간

    지난해 11월 26일 한중수교 7주년 및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기념하여 주중 한국대사관(대사 권병현)에서 개최된 학술세미나 발표내용이 ‘중국에서의 항일독립운동’(도서출판 고려원)이란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주중 대사관내 한중교류연구중심이 주최한 이 세미나에서 한중 양국의 학자들은 3·1 의거와 중국 5·4 운동과의 관계,북경지역에서의 독립운동,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기타 독립운동과 중국 측의 지원 등에 관해 발표했다.한국에서는 최창규 성균관장,윤병석(인하대)·이만열(숙명여대)·한시준(단국대)·김희곤(안동대) 교수가 참가했고,중국에서는 최용수(중국공산당 중앙당교)·석원화(복단대)·최봉춘(연변대) 교수,마장림 상하이시 당안관 연구원,그리고 김우종 흑룡강성 당사연구소 소장 등이 나왔다.값 1만원. 정운현기자
  • [오늘의 눈]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정부가 지원해야

    서울 효창공원 오른쪽 입구 언덕에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의사묘역’이 있다.묘역 한가운데는 태극기를 새긴 비석이 있고,제단 좌우로는‘고귀한 이름을 오래 후세에 전한다’는 의미의 ‘유방백세(遺芳百世)’ 네글자가 묘소 앞에 한자씩 새겨져 있다.그런데 제일 왼쪽 끝,‘世’자 뒤에있는 묘는 다른 묘소와 달리 비석도,묘비명도 없다.아직 묘소 주인의 유해을찾지 못해 임시로 마련해둔,이를테면 가묘(假墓)인 셈이다.최근 유해발굴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안중근 의사가 바로 이 가묘의 주인공임을 아는사람은 많지 않다. 해방후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순국한 동지들의유해 봉환사업이었다.1946년 5월 일본에서 3의사의 유해를 봉환,이곳에 유택을 마련한 백범은 미처 유해를 찾지 못한 안 의사의 유택을 이곳에 마련해둔것이다.항일운동의 화신이자 사사롭게는 사돈 간인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못해 이곳에 가묘를 만든 백범의 당시 심정이 어떠했을까.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안 의사의 흔적을 남한땅에서 찾기란 쉽지않다.다만남산중턱에 있는,일제하 구 조선신궁(朝鮮神宮)터에 마련된 안의사기념관에서 안 의사의 ‘애국혼’의 한 자락을 겨우 느낄수 있을 뿐이다.한국인보다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더 즐겨찾는다는 이 기념관은 안 의사 의거일(10월26일)과 같은날 최후를 마친 박정희 전대통령이 재임시 세운 것이다. 기념관 왼편에는 안 의사가 태극기를 들고 서있는 동상이 있고 뒤로는 안 의사의 행적 등을 새긴 석판이 둘러져있다.그 가운데 안 의사의 ‘최후의 유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나는 천국에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항일투쟁을 하다가 이국땅에서 순국한 애국지사 가운데 드물게 안 의사는조국이 독립되면 자신의 유해를 고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그러나 우리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그 유언 하나를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 지금 국내외 민간단체에서는 안 의사의 유해발굴 및 봉환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정부는 이들 민간단체의 활동을 적극 지원,안 의사의 유해가 국내에 봉환될 수 있도록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 KBS·MBC 3·1절 특집프로

    KBS와 MBC가 3·1절을 맞아 우리에게 낯선 두명을 소개한다. KBS-1TV는 29일 ‘강용권의 4만리 장정(밤10시)’에서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 사회과학원 사학자였던 강씨의 자전거 여행을 소개한다.그는 91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자전거를 타고 1만4,000㎞,4만리를 여행하며서 항일운동의 유적지를 답사했다.수백명의 증언자들을 만나 이들의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만 해도 700여개.3차 답사에서 목숨을 잃은 그가 새롭게 밝힌 독립운동의 역사를알아본다. MBC는 ‘PD수첩(밤10시55분)’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를 다룬다.메이지(明治)법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의 주역인 ‘조선청소년독립단’에 대한 자진변호를 요청하면서 우리와 인연을 맺었다.3·1운동 당시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논문을 발표해 일본 검찰에 불기소되기도 했다.또 일본 천황 암살기도로 기소된 박열선생과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의 변론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전경하기자
  • 애국지사 유적지 홍보책자 파문

    국가보훈처가 애국선열들의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제작,배포한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필자의 전문지식 부족과 당국의 감독부실로 오히려 선열들을 모독하고 항일투쟁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는 국내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찾는 일반인들에게 애국정신을현창한다는 목적으로 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길따라 역사탐방’ 3,000부를 제작,지난해말 전국의 학교·도서관·지자체·관광관련업계 등에 배포했다.이 책은 최근 들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유적 답사와 테마여행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국내 567개 독립운동·전쟁 관련 사적지를 124개 권역별로 나눠 주변의 관광명소와 함께 여행안내용으로 제작한 것. 그러나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서울편’은 대상 유적지는 물론 항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있는 인물을 부각시켜 선정배경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동부편 첫장에는 어린이대공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고하 송진우 동상 사진을싣고 있다.이는 옆 페이지에 실린 남강 이승훈·유관순 동상 사진의 두 배가 넘는다. 또 북부편에는 망우산에 있는 13도창의군탑과 고려대 교정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대형사진이 실려 있다.인촌의 경우 ‘전라북도편’에서도 생가 사진과 함께 생가내의 동상사진을 중복게재하고 있는데 대형 동상 사진을 실은경우는 두 사람뿐이다. 이에 대해 한 독립운동가는 “송진우와 김성수는 친일행적 때문에 그들이받은 건국훈장 박탈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됐던 인물”이라며 “이들을 마치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것처럼 편집한 것은 항일로 일관한 선열들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대표적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과 효창공원·탑골공원·장충공원·국립묘지·구서대문형무소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남산에는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안중근의사기념관이,효창공원에는 백범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 등 독립운동가 7위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또 탑골공원은 ‘3·1의거의 성지’이며,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국립묘지에는 국내 외에서 항일운동을 한 선열의 유해를 안장한 묘역이 있고 구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에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 사형장을 비롯해 ‘유관순굴’이 복원돼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같은 유적지에 대해 서울편 말미의 ‘그밖에’ 항목에서 단 한줄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필자 선정과 책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울시편은 추가로 수정제작해 재배포하겠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日警이 독립운동가 공적 증언

    항일운동을 펼치고도 관련자료가 없어 독립유공 포상에서 제외된 독립운동가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일제 형사의 ‘증언’을 받아내,뒤늦게 훈장을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 당시 동료들의 증언으로 포상받은 사례는 더러 있었으나 일경이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확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제 말기인 1942년 5월 비밀결사조직 ‘친우회’를 결성,네차례에 걸쳐 부산시내에 반일전단을 살포한 이광우(李光雨·75·부산시 동구 좌천동)씨는 44년 6월 부산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단기 1년,장기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이씨는 이에 따라 지난 89년 정부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으나 관련판결문이 첨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사보류 조치를 받았다. 이후 이씨는 김천형무소와 정부기록보존소 등에서 자료를 수소문했으나 한국전쟁 등으로 자료가 소실됐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이씨는 이어 당시 자신을 검거한 일경 하판락(河判洛·88·부산거주)씨가해방 후 반민특위에 검거됐을 때 자신과 관련된 언급을 했었고 자신 역시 하씨의 죄상을 밝히는 증언을 했던 기록 등을 근거자료로 제출하기로 했으나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하씨는 일제 때 경남도경 고등과 외사주임으로 독립운동가를 조사했었다. 한편 지난 11일 하씨는 기자와 단독인터뷰에서 “일경으로 있을 때 이광우씨 건을 취급했었다”면서 “필요하면 추가로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국가보훈처측은 “당사자의 증언인데다 관련 문건이 뒷받침돼 자료가치가 충분하다”며 이씨의 공적을 새로 심사할 뜻을 밝혔다. 하씨는 해방 후 목재수입상 등을 경영하면서 비교적 여유있게 살아왔다. 정운현기자 jwh59@ *친일경찰 하판락씨 인터뷰 일제 때 경남도경 고등과 외사주임으로 독립운동가를 뒤┌榕年? 하판락씨는 “일제 경찰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그동안 숨겨온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언제 경찰에 들어갔나. 진주고보(3회)를 마치고 진양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하던중 1936년 경찰에 투신했다. ◆일경 시절 주요 담당업무는. 경남도경 소속 수상경찰서,고등과 외사계에서 적색분자·외사범 검거를 담당하며 해방때까지 근무했으며 최종계급은 경부보였다. ◆1943년 ‘친우회 불온전단사건’과 관련,주동자 이광우씨를 검거한 것을기억하는가. 부하인 김소복과 함께 그 사건을 다뤘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경위와 재판결과는. 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됐다.서울에서 3회,부산에서 1회 등 모두 4차 공판을 거쳐 최종 무혐의로 풀려났다. 부산 정운현기자
  • [의열 독립투쟁] (13)곽재기 의사

    곽재기(郭在驥·1893∼1952)의사는 1920년대 항일 독립투쟁사의 전설적 존재인 의열단(義烈團)의 초대 부단장으로서 창단 직후 추진된‘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의 실행을 국내에서 지휘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7년 가까이 옥고를겪었다.흔히‘밀양폭탄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이 거사 계획은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도 남을 만큼 대담무쌍했으며,일제의‘문화정치’틀속에 안주하려던 각계 유지층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1893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곽 의사는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청남학교(淸南學校) 교사로 다년간 봉직했다.곽 의사의 항일운동 이력은 1909년에 창립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3.1의거가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곽 의사는 1919년 7월 부인 윤씨와 두 아들(大鉉·壽鉉)을 남겨둔 채 중국 동북지방 지린(吉林)으로 망명했다.서너달 후 곽 의사는 투탄·암살 등 의열투쟁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달성코자 결성된 소년단의 지린 지부장으로 등장한다. 이 해 10월 중순곽 의사는 신흥무관학교 생도인 김원봉(金元鳳·의열단장) 등과 알게 되었는데 그 무렵 이들은 ‘의열단’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조직하고자 동지를 규합하고 있는 중이었다.소수 정예의 결사적‘직접 행동’으로 일제 침략세력을 타격하며 독립운동의 전투적 기운을 드높이려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곽 의사는 곧 그들의 동지가 되기로 맹약했다.이들은 11월9일 밤 지린성 밖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창단 회합을 갖고 10개조의 공약을 정했다.단장에는 김원봉,부단장에는 곽 의사가 추대됐다.서상락(徐相洛)·배중세(裵重世)와 함께 27세의 최연장자라는 점 이외에 교사 경력과 그동안의 항일 경력,그리고 식견과 지도력이 두루 참작된 결정이었다. 의열 단원들은 처음부터 고강도의‘암살파괴운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표적은 총독부 일본인 고관과 친일 반역자,그리고 식민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와 부속 시설물들이었다.이 계획은 테러리즘의 소치가 아니라 민족독립 투쟁의 일환으로 행해질 기습 특공작전이요,그 원초적 범례가될 것이었다. 단원들은 지체없이 국내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경성(서울)의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사 폭파와 사이토(齋藤)를 비롯한 총독부 수뇌·요인들을 저격,포살키로 목표를 정했다.김원봉은 중국에서의 제반 준비와지원을 책임지고 국내 현지에서의 거사 추진 및 실행은 곽 의사가 전담,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창단 직후부터 추진한 무기 구입 노력은 이듬해 3월에 가서야 성과를 보았다.상하이(上海)에서 구입한 탄피 3개와 폭약을 이용하여화약 투입식,도화선 점화식,투척 즉발식 폭탄 1개씩을 각각 제조했다.4월 하순 김원봉과 이성우가 폭탄 13개(점화식 7개,투척식 6개),제조용 폭약과 탄피,권총 두 자루,탄환 100발을 중국인으로부터 추가로 구입했다. 무기를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4월 초와 5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이어달리기식으로 수행되었다.1차분 폭탄 3개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의이름을 빌려 안뚱현(安東縣)의 영국인 세관원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부친 후 곽 의사가 따렌(大連)을 거쳐 안뚱으로 가 소포를 찾아그 곳의 상주연락원 이병철(李炳喆)에게 넘겨주었다.이병철은 옥수수 스무 가마 속에 폭탄을 숨겨 포장해서 경남 밀양의 화물운송점으로 부친 후 기차편으로 밀양으로 가서 화물을 찾아 폭탄만 따로 빼내 청년회장 김환(金煥)의 집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 2차분 무기 묶음은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성우가 의류상자로 위장해서 휴대하고 선편으로 안뚱까지 가서 이병철에게 건네주었다.이병철은 지난번처럼옥수수 다섯 포대 속에 무기를 넣어 포장하고 다른 열다섯 포대와 뒤섞어 화물로 위장해 부산진역의 한 운송점으로 보냈다.이것을 배중세가 수령해서 비밀표식이 된 다섯 포대만 따로 추려 창원 강산진(姜祥振)의 집 창고에 숨겨두었다.무기 반입이 완료되자 지도부는 인원 배치와 임무 분담,자금 조달 등의 후속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4월 중순 국내로 잠입한 곽 의사는 밀양으로 내려가 1차분 폭탄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먼저 귀국한 단원들을 만나 임무를 부여하고 격려하였다.그리고는 상하이로 돌아가 김원봉에게 제반 준비작업의 진척도를 보고한뒤 이성우와 함께 다시 국내로 잠입했다.서울 공평동의 전동여관(典東旅館)에 지휘소를 두고 단원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해 가며 거사날짜만을 기다렸다.거사는원래 6월 초 이내에 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태로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밀양에 숨겨둔 폭탄 3개가 밀정의 제보로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돼 가택수색 끝에 적발,압수되어버린 것이다.이 때문에 경성부 관내에는 경찰의 특별경계령이 내려지고 엄중한감시망이 가동되었다.게다가 이수택은 거사때 뿌릴 격문의 인쇄비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 반입무기의 서울 이송을 누차 미루었다.자금마련을 위해 곽 의사가 대구와 청주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그래서 거사날짜는 7월8일로 잠정 연기되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잠행하며 대기중이던 단원 5명이 6월20일경 조선인경부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고 말았다.곽 의사는 무기 보관 상태 점검차 부산에 잠시 내려갔다가 김기득과 함께 부산서 체포되었다.다른 단원들과협력자들도 속속 검거되고 창원에 은닉해뒀던 무기도 모두 압수되었다. 1921년 6월21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곽 의사는 상고를 포기한 채 마포형무소 독방에서 복역 중 1927년 1월 특사조치로 1년10개월 감형돼 이 해 1월22일 만기출옥했다.출옥 후 3년 뒤 곽 의사는 다시 만주·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재투신한 것으로 전해진다.광복 후 1945년 11월 귀국한 곽 의사는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이끄는 등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에 타계했다.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곽재기 의사 후손들 근황 곽재기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애국지사에 속한다.동작동 국립묘지에 묘소가 마련된 것 외에는 기념사업회는 물론 변변한 기념물 하나 세워진 것이 없다.‘못 배우고 못 사는’ 후손 덕분(?)에 독립운동 관련 자료하나 제대로 전해오는 것이 없다.후손들 역시 곽 의사의 이름 석 자를 겨우기억하고 있을 뿐 곽 의사가 해방 후에 타계한 탓으로 연금 한 푼 주어지는것이 없다. 곽 의사의 부인 윤씨는 곽 의사보다 먼저 작고했다.두 아들 가운데 장남 대현(大鉉)씨는 일제때 작고했으며,차남 수현(壽鉉)씨는 80년대 중반 작고했다.장손 기수(琦洙·65)씨는 함북 청진 태생으로 일제때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며 일제가 국민학교 입학시험을 못 치르게 해 입학이 늦어졌다.해방 후 고아원을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기수씨는 62년부터 10여년 동안 교통부에서 역무원으로 종사한 바 있는데 지난 95년 부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떠 현재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슬하에 2남2녀.최근 해방 후 작고한 독립운동가들의 손자들이 자신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과 관련,조상들의 건국훈장을 반납,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기수씨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조상을 팔아 잘 먹고 잘 살 생각은 없습니다.그러나 단지조부님께서 해방 후에 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손자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정운현기자 jwh59@
  • 서대문구,애국지사 발자취 역사관에 보존

    서대문구(구청장 李政奎)는 일제때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던 애국지사 가운데 생존해있는 이규창(李圭昌·86),이병희(李丙禧·85)옹의 항일운동 과정과 옥중체험담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영구보존하기 위해 18일 인터뷰를 실시했다. 이규창옹은 33년 중국 상해에서 남화한인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을조직,군자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35년 친일파 이용노를 처단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5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병희옹은 36년 공장노동운동을 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4개월의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의열단의 연락원으로 활동했으며 이육사와 함께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한 뒤 이육사가 옥사하자 시신과 유품을 유족에게전달하기도 했다. 서대문구는 이들 애국지사의 인터뷰 내용을 영상자료로 담아 보관할 계획이다. 김재순기자
  • [의열 독립투쟁] (11)박열 의사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들의 최대 목표는 국적 일왕(日王)을 처단하는 일이었으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일왕을 처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항일투사들은 틈을 노렸다.그 중 한 분이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 의사이며,이보다 앞선 의거는 박열(朴烈·1902∼1974) 의사가 일왕 부자(父子)의 처단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거사이다. 박의사는 1923년 9월 일본 왕세자 결혼식 날에 일왕 부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고 폭탄입수를 계획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검거되었다.일왕 부자 폭살기도사건으로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도 함께 구속된다.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 가네코 여사는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박의사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년을 일제 감옥에서 보냈다. 박의사의 옥중생활을 날수로 따지면 8,091일,햇수로는 22년 2개월 1일이 된다.세계감옥사에 전과범의 옥중 생환자 중에 일수를 따져 22년의 생환기록은 있으나 ‘대역사건’이라는 일죄일범(一罪一犯)으로 햇수로 23년이란 감옥생활을 일관한 혁명가가 살아서 나온 기록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없는 일이다. 흔히 박의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른다.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처단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으로 만민평등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의사의 생각이자 사상이었다.박의사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한(金翰)을 통해 상해 의열단측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다.다시 일본인 선원 스기모토에게 부탁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추종자이며 같은 ‘불령사(不逞社)’회원인 김중한(金重漢)에게 부탁했는데 이것이 사전 발각의 빌미가 되었다. 김중한의 일본인 처가 경찰에 밀고하여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박의사와 가네코를 비롯,불령사 동지들이 체포돼버린 것이다.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항일투사가 일제의 법정에 섰지만 박의사 부부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신,즉 일제타도의 당위성을 피력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그것도 적도(敵都) 도쿄법정에서. 박의사 부부는 1925년 9월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일본 대심원 특정법원에 섰다.박의사는 공판에 앞서 4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첫째,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왕의를 착용토록 할 것.둘째,법정에 서는 취지를 선언토록 해줄 것.셋째,조선어를 사용토록 통역을 준비할 것.넷째,피고의 좌석을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 것 등이었다.박의사가 제시한 4가지 조건 중 일제는 첫째,둘째 조건은 들어주고 셋째는 거부,넷째는 재판장의 간청으로 철회했다. 이렇게 하여 박의사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관을 갖추고 법정에 서서일왕 부자 폭살의 이유를 진술하여 일본열도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긴 재판 끝에 박의사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이어 무기로 감형되었다.옥중의‘괴사진’사건으로 일본내각이 붕괴되는 등의 파란을 겪으면서 가네코는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박의사는 일본에서도 가장 심하다는 아키다형무소 등에서 복역하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맥아더사령관의 정치범 석방조치로1945년 10월27일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본에서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 등 민단 건설에 노력하던 박의사는 48년 8월 정부수립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했다가 6·25 때 서울 장충동에서 인민군에 납북되었다.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4년 1월18일 74세로 타계,평양 근처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막노동꾼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이 무렵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키,이와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인생관과 사회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에는 한국인 노동자·유학생이 4만여명에 달했다. 유학생은 매국노 자제를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노동하면서 공부하는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박의사도 고학을 하면서 정태성·조봉암 등과 진보적 사회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재일한국인의 권익옹호와 조국해방운동에 나섰다.조직을 ‘흑로회(黑勞會)’‘흑우회(黑友會)’로 바꿔가면서 항일운동을 벌인 박의사는 부인과 ‘현사회’와 ‘불령선인’ 등 기관지를발간했지만 일본경찰은 닥치는 대로 압수·소각했다. 박의사의 ‘대역사건’이 발표되자 일본의 언론은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도쿄의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총궐기 태세로 수감중인 박의사를 지원하고나섰다.그러나 국내언론은 검열과 통제로 사건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지못했다.박의사의 일왕 부자 폭살계획은 폭탄의 입수과정에서 차질과 정보누설로 좌절되었다.또한 이것이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대역사건’으로 포장되고,조선인 대량학살을 호도하는 데 악용되었다.남쪽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쪽에서 사망한 박의사는 20세기 민족사의 비극을 상징한다.89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독립투쟁과 아나키즘사상에는 ‘흑도(검은 파도)’가 덮여있는 실정이다.생가나 향리 어디에도 박의사의 추모비 하나가 세워져 있지 않다.비운의 애국투사이다.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박열 평전’저자 kimsu@*박열 의사 부인·후손들 박열 의사의 첫 부인이자 아나키즘운동의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는 박의사와 함께 대역죄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열흘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 후인 7월 가네코 여사는 형무소에서 의문사하였는데 유해는 경북 문경 박의사의 선산에 안장됐다.지난 73년 일본측에서 가네코 여사의 유해를 옮겨가려고 했으나 정화암·양일동 선생 등 아나키스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박의사와 가네코 여사는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박의사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인은 지난 76년 타계한 박의숙(朴義淑·본명 張義淑)여사이다.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47년.당시 박여사는 도쿄여대 일어과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일본 국제신문 기자로 근무했는데 출옥 1주년 맞아 박의사의 인터뷰를 갔다가 인연이 돼 결혼하게 됐다.박의사는 47세,박여사는 29세였다.박여사는 결혼 1년 만에 장남 영일(榮一·51·육군 준장)씨를,이듬해에장녀 경희(慶姬·현재 일본거주)씨를 낳았다.그러나 행복도 잠시,6·25 와중에 박의사는 납북됐고 가족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이때 박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른다는 뜻에서 성을 장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북한에 있던 박의사로부터 장남을 한국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라는 편지를 받고 박여사는 장남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67년)시켰다.박의사의 장남 영일씨는 현재 군 정보계통에 근무중이며 97년 장성으로 진급했다.현재 영일씨의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매일 題號 변경 1년] 각계 의견 및 평가

    대한매일이 서울신문에서 제호를 바꾼지 꼭 1년이 됐다.지난 1년동안 대한매일은 구한말의 대표적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려민족문제 등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특히 공익정론지로 거듭나기 위해 지면개선 등 자기혁신을 마다하지 않았다.제호변경 1주년을 맞아 각계의의견을 통해 대한매일의 현주소와 나아갈 바를 점검해 본다. ■정동영(鄭東泳·46·국민회의 의원) 자유언론 정신으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정신과 이념을 이어받은 대한매일이 지난 1년간 ‘개혁언론’의 역할을 해온 점을 평가한다.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중요하다.21세기 디지털·지식정보화시대에 걸맞는 창조적 비전과 전략수립을 통해 한국 언론을 선도하는 일류 신문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이사철(李思哲·47·한나라당 대변인) 대한매일이 구한말 민족혼을 일깨웠던 자랑스런 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대해 경의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언론 문건 파동으로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이때 언론의 자리매김은 더욱 중요하다. 진실을 알리고 국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하는 기능이 우선될 때 국민의 지지를 받으리라 확신한다. ■김우전(金祐銓·77·독립유공자협회장)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제호를바꾼 것은 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뿌리를 되찾은 것으로 잘한 일이다. 제호를 바꾼 이후 지면에서는 민족적 면모가 강하게 풍겨나오는 것을 느낀다. 과거 정부기관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과감한 지면개혁을 통해 공익언론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성유보(成裕普·56·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제호변경은 과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변화하려는 내부적 의지로 해석,긍정적으로 생각한다.이전에 비해 ‘공익언론’으로서 공정한 시각을 담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보다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취재 및 편집이 이뤄지는 느낌이 든다.다양한 의견이 실리는 오피니언 면과 시민운동과 관련된 보도 등은 대한매일의 폭을 더욱넓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민영(金旻盈·33·참여연대 사무국장) 제호를 바꾼 뒤 과거의부정적 이미지를 모두 벗었다.질적인 면에서도 비정부기구(NGO) 기사와 정부관련 고급 정보가 많아졌다.대한매일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개혁적이고 합리적이며 공정한 이미지를 정립하는 것이다.대한매일은 친 정부적이지도 않고 기득권에 귀속되지 않으면서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담아내 주길 바란다. ■조인자(曺仁子·46·주부·플라워 아티스트) 지난 1년동안 지면이 크게 달라졌다.우선 제호를 바꾸기 전에는 딱딱한 느낌이었으나 요즘은 지면 전체가 부드럽고 깨끗해졌다.또 제호 그대로 민족정신을 되살리는 데 많은 노력을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생활에 필요한 기사도 예전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앞으로 고른 보도와 다양한 기사로 생활에 활력을 주는 신문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김효성(金孝成·58·대한상공회의소 상근 부회장) 지난해 어려운 경제여건 하에서 제2의 창간이나 다름없는 제호변경을 한 것은 용단이었다고 평가한다.지난 1년동안 지면개선에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즉 차별화를 꾀한 것이 대중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급변하는 경제질서 흐름에 맞는 새로운 각도의 기업정보와 소비자정보를 강화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서현(朴瑞賢·22·여·연세대 국제대학원 국제협력전문 석사과정 1년 )신문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대한매일신보가 우리나라 언론발전에 많은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제호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계승해 나간다는 의도는 높이 살만하다.대한매일이 공익 정론지로 자리매김하려면 제호를 바꿀 당시의 각오와 개혁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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