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엄마 마중/조대현
서울신문은 대표적인 동화작가들이 참여하는 ‘엄마와 읽는 동화’를 매주 한 차례 싣습니다. 우울하거나 충격적인 소식이 넘쳐나는 요즘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발표지면이 부족한 동화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울 것입니다. 나아가 시대정신을 갖춘 어린이용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함으로써 문화산업 발전에도 작은 몫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아빠 엄마는 요즘 늘 찌푸린 얼굴입니다. 엄마는 아빠가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들어앉아 있는 게 싫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꾸 짜증을 냅니다.
그러면 아빠도 얼굴이 벌게져서, “내가 무슨 돈 벌어 오는 기계냐.”고 화를 내면서 책이나 옷 같은 물건을 마구 내던집니다. 그래서 큰 싸움이 벌어지곤 합니다.
오늘도 건우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마루에 책과 방석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가 또 싸우신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엄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건우가 흐트러진 물건을 치우며 엄마 어디 가셨느냐고 물었지만 아빠는 아무 대꾸도 않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만 퍽퍽 피워댔습니다.
한참 뒤, 건우가 방에 들어가 숙제를 하고 있는데 아빠가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왔습니다.
“건우 뭐하니?”
아까보다 화가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입니다.
“숙제하는데요.”
“나하고 얘기 좀 할까?”
아빠는 건우 보기가 멋쩍은지 뒤통수를 긁으며 옆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건우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아빠가 너한테 늘 화내는 꼴을 보여서 미안하다.”
가만히 보니 아빠의 눈가에는 울고 난 사람같이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건우는 어쩐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아빠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습니다.
“아빠, 엄마하고 자꾸 싸우지 마세요. 엄마가 뭐라고 해도 아빠가 참으세요.”
“글쎄, 나도 참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게 잘 안되는구나. 나도 속이 상해 죽겠는데 엄마가 자꾸 나를 몰아세우기만 하니…….”
“그래도 아빠가 참으세요. 아빠가 다시 직장에 나가시게 되면 엄마도 안 그러실 거예요.”
“그래. 알았다. 너도 아빠를 이해해 다오.”
아빠는 그러면서 건우의 손을 꼭 쥐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빠와 전보다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정말로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아빠도 당황했는지 아파트 창밖 한번 내다보고 시계 한번 쳐다보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입니다. 건우가 외가댁에 전화를 걸어본다고 해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띠리리릭…….’
외할머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구, 건우야. 왜들 그러는지……. 저녁은 먹었느냐?”
“아니요. 그런데 우리 엄마 거기 계셔요?”
“오냐. 바꿔 주마.”
조금 있다가 엄마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왜 전화 걸었니?”
“엄마, 왜 안 오세요? 빨리 오세요.”
그러나 엄마는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엄마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밥통에 밥 남은 것 있고, 냉장고에 반찬과 국 끓여 놓은 것 있으니 찾아 먹어.”
그날 밤 건우와 아빠는 처음으로 국도 데우고 상도 차려 저녁밥을 먹었습니다. 설거지도 아빠가 했습니다. 평소에 먹던 것과 같은 밥이고 반찬인데도 엄마의 손길이 가지 않은 밥상은 무엇이 빠진 듯 허전하고, 그래서 같은 음식인데도 맛이 없었습니다.
이튿날 아침도 건우와 아빠 단 둘이 남은 밥을 데워 먹고 아빠는 집에, 건우는 학교로 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까지 다녀왔는데 그때까지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아빠 혼자 베란다에서 마른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엄마 아직도 안 오셨어요?”
건우가 물었지만 아빠는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곧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빠가 대신 저녁밥을 지으려는 모양이었습니다. 두 팔을 걷고 싱크대 앞에서 서투르게 쌀을 씻는 아빠의 뒷모습이 퍽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건우도 주방으로 들어가 아빠를 도왔습니다.
건우와 아빠가 이렇게 저녁 준비를 하느라고 부산을 떨고 있는데 현관문이 딸가닥 열리더니 마침내 엄마가 돌아왔습니다. 건우는 너무나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엄마 치마폭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건우를 따듯이 안아주기보다 아빠에게 먼저 차갑게 쏘아붙였습니다.
“나 당신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에요. 애 밥 굶길까봐 온 거지.”
아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곧 옷을 갈아입고 주방에 들어가 아빠를 밀쳐내고 저녁밥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따로 차린 것 없이 늘 먹던 밥과 반찬인데도 엄마가 차려낸 밥상은 아빠와 단 둘이 먹던 밥상과 맛과 느낌이 달랐습니다. 어딘지 정갈하고 따뜻하게 잡아끄는 맛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건우는 이때 처음으로 엄마의 손길에는 음식을 맛있게 하는 마술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건우나 아빠와 밥상을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건우와 아빠가 밥을 먹는 동안 엄마는 거실에 나가 TV를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 다시 식탁 앞으로 와 아빠에게 선언하듯이 말했습니다.
“나 내일부터 친정 부근에 있는 식당에 나가 일하기로 했으니 그런 줄 알아요.”
아빠가 무슨 소리냐는 듯 뻔히 쳐다보았지만 엄마는 앞뒤 설명도 없이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당신이 놀고 있으니 나라도 나가 애 학원비라도 벌어야지, 통장만 까먹고 있을 순 없잖아요.”
“엄마가 식당에 나가 무슨 일을 하는데요?”
이번에는 건우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긴. 아무 재주도 없는 내가 나물 다듬고 설거지하고, 그런 일밖에 더 하겠니.”
엄마는 그러면서 서둘러 상을 치우고 안방에 들어가 손잡이 문을 딸가닥 채웠습니다. 안방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아빠는 그날 밤 건우의 방에서 건우와 한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아빠는 잠이 안 오는지 자꾸 몸을 뒤치락거렸습니다. 건우도 잠이 오지 않아 아빠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아빠. 엄마가 정말 음식점에 나가실 건가요?”
“글쎄, 모르겠다. 두고 봐야지.”
“엄마가 그런 데 나가 어떻게 일하시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건우의 걱정스러운 말에 아빠는 한참 있다가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모두 내 탓이다. 내가 제 구실을 못해서 엄마와 너까지 고생을 시키는구나.”
“아빠. 힘내세요. 회사가 잘되면 다시 아빠를 부른다고 했다면서요?”
“그래. 조금 더 기다려 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아빠도 나가서 새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너는 열심히 공부나 해. 알았지?”
“예.”
“자, 그만 자자.”
“예. 아빠도 주무세요.”
그러나 건우가 잠들 때까지도 아빠는 계속 뒤치락거렸습니다.
이튿날부터 엄마는 정말 식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식당은 집에서 버스로 열 정거장도 넘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나가서 점심, 저녁 찬거리 준비하자면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건우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첫날,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엄마는 오자마자 소파에 쓰러져 코를 골며 잠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니까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그런 엄마의 몸 위에 아빠가 담요를 덮어드렸습니다.
이튿날, 또 그 이튿날도 엄마는 아침에 나갔다 자정 가까이 돼서야 돌아왔습니다. 저녁 손님들 보내고 식당 청소까지 마치면 늘 그 시간이나 돼야 집에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간간이 눈발이 날렸습니다. 그러다가 낮부터는 함박눈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습니다. 밤이 되자 TV에는 눈길에 미끄러져 다치는 사람과 자동차 사고가 연달이 나왔습니다. 엄마가 돌아올 시간까지도 눈은 계속 내렸습니다. TV를 지켜보던 아빠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가 봐야 할 것 같구나.”
“제가 나갈게요.”
건우는 비올 때 쓰는 큰 우산을 펼쳐들고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눈길을 터벅터벅 걸어 큰길 건너 개천 다리 위에 가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엄마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자면 꼭 건너야 하는 길목입니다.
우산 위에 쌓이는 눈을 몇번이나 털어냈을 때에야 엄마가 저쪽 다리 끝에 나타났습니다. 엄마는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목을 잔뜩 웅크린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엄마!”
건우가 우산을 들고 뛰어가자 엄마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습니다.
“아니, 왜 나왔니? 감기 들면 어떡하려고.”
“괜찮아요. 엄마가 우리를 위해 고생하시는데 이런 날 마중 나오는 건 당연하죠.”
건우의 능청스러운 농담에 엄마는 오랜만에 빙긋 웃으며 우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에그, 우리 아들 이제 다 컸네.”
건우와 엄마가 집 앞에 와 보니 아빠도 걱정이 되셨는지 아파트 입구에 나와 서 있었습니다. 아빠를 본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건우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습니다.
“건우야. 우리 개천가에 나가 산책하다 들어오지 않을래? 눈도 오는데.”
건우는 아빠에게 미안했지만 모처럼 좋아진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지요, 뭐.”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발목까지 쌓인 개천가 눈길은 건우와 엄마가 밟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습니다.
한참 말없이 걷는 엄마에게 건우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아직도 아빠를 미워하세요?”
엄마는 웬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말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얜, 미워하긴 뭘 미워한다고 그러니.”
“아빠 미워하지 마세요. 아빠도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새 일자리도 알아본다고 하셨어요. 엄마도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어휴, 그래 알았네, 알았어. 아들.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아빠 역성들기는.”
엄마는 그러면서도 건우가 밉지 않은 듯 어깨를 폭 감싸 안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걷다 보니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아빠가 저만치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 구부정한 모습이 틀림없는 아빠였습니다.
엄마도 아빠를 발견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어유, 옷 버리는데 우산도 안 쓰고 무슨 청승이람. 빨리 와 같이 우산을 쓰든지.”
그 말에 힘을 얻어 건우가 소리쳤습니다.
“아빠, 이리 와 우산 쓰세요.”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대답하며 뛰어왔습니다.
“어, 그래.”
하얀 우산 밑에 나란히 찍혀 나가는 세 사람의 발자국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의 말
한겨울에 몰아닥친 경제한파는 이 땅의 수많은 가장을 거리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그보다 더 많은 가정과 가족들에게 불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짐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가족 간에 서로를 배려하고 아픔을 보듬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고난을 이기고 웃음꽃 피는 내일을 기약하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약력
▲강원도 횡성에서 남
▲서라벌예술대와 단국대서 문학을 공부함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영이의 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소리를 먹는 나팔’, ‘할머니의 손바닥 주소’, ‘자물쇠가 많은 집 아저씨’ 등 40여권 동화집을 냄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을 받음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회장을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