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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입양중단 번복 잘했다/임영숙(서울광장)

    애나 킴은 미국 가정에 입양된 한국 아이다.올해 국민학교 3학년인 그 아이에겐 「출생앨범」이 있다.생후 몇개월의 어린아기로 공항에 도착해 양부모 품에 안긴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모은 것이다. 이 앨범속에서 애나 킴의 양부는 친지들에 둘러싸여 자랑스럽게 시거를 피운다.미국에서는 아버지가 된 기쁨을 시거를 피우는 것으로 표현하는 관습이 있다.양모는 애나 킴을 꼬옥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친정 어머니는 미소를 띤채 그 모습을 지켜본다.그곳이 공항 대합실이 아니라 병원의 분만실이었다면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이를 낳은 부모와 그 가족 친지들의 행복한 모습으로 비칠 정경이다. 애나 킴의 양부모는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이다.아버지 라일리씨는 엔지니어고 어머니 캐시여사는 유치원선생님이다.캐시여사는 애나 킴을 입양하면서 직장에 휴직원을 냈다.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서다.애나 킴이 유치원에 들어가자 복직했는데 또다른 한국아이 제이를 4년전 입양하면서 또 휴직했다가 최근 다시 복직했다. 애나 킴과 제이에겐 할머니·할아버지와 고모가 있다.뉴욕과 뉴저지의 대학 등에서 외국학생 자문역을 맡고 있는 고모 캐시(어머니와 이름이 같다)는 한국학생을 만나면 조카 자랑에 시간 가는줄 모른다.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물론 「한국에서 온 조카」의 사진이 놓여 있다.그가 한국유학생에게 특별히 잘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조카의 조국을 위해 한국기업의 주식도 산 그의 꿈은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다.또한 예일대학이 있는 뉴헤이븐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할아버지는 자원봉사자로 한국유학생과 그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5년전 캐시고모의 생일날 우리 가족은 뉴욕과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주에 사는 이 가족이 중간지점의 공원에서 마련한 생일파티에 초대받았고 나중 애나 킴의 집에도 초청받았다.입양수속중인 제이가 아직 미국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라일리 집안의 유일한 어린이였던 애나 킴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아이로서 가족 모두에게서 사랑을 흠뻑 받고 있었다. 이 가족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해외입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한국이 「고아 수출 1위국」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이다.6·25전쟁이 끝난지 몇십년이 지났고 개인소득이 7천달러에 이르는 나라에서 아직도 2천명이 넘는 아이들을 해마다 해외에 입양시킨다는 것은 사실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애나 킴의 가족을 만나고 나서 부끄러운 것은 「고아 수출 1위국」이라는 오명이 아니라 내 자신임을 깨달았다.부모를 잃었거나 버림받은 아이들을 스스로 맡아 기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런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약속해 줄 수도 있는 해외입양의 길을 막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비인도적인 일인가. 애나 킴과 제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따뜻한 가정보다 시설에 수용됐을 가능성이 더 높다.보호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의 3분의 2 정도가 입양가정을 찾지못하고 시설에 수용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지난 58년 이후 지금까지 해외에 입양된 아이는 약 15만명.국내 입양은 5만명도 채 못된다.국내 입양신청자가 적지는 않으나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식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 상태다.입양관계자들은 3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입양에 대한 국민의 의식변화가 거의 없어서 국내입양이 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해외입양이 애나 킴의 경우처럼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해외입양은 『바닷고기를 담수에 옮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만큼 정체성의 위기가 생길 수도 있고 의붓아버지 우디 앨런의 애인이 된 순이 프레빈과 같은 망칙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한 아이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것 보다는 가정을 갖게 해주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에서 96년 이후 해외입양 중단방침을 번복한 당국의 최근 결정은 잘한 것이다.국내입양을 활성화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아이는 우리 손으로 잘 길러야겠지만 아직 요원해 보이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해외입양을 허용하는 한편 입양된 아이들과 그 새 가족들에게도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 원주 주공명륜아파트2단지/우리집에선:9(녹색환경가꾸자:67)

    ◎부녀회 앞장… 재활용품 분리수거/빈병·헌박스 등 팔아 불우이웃 도와/입주 3년째… 이젠 주민 모두 동참 『빈병이나 헌박스등 재활용품은 아파트입구 수거함에 모아주세요.이것들은 환경운동의 첫걸음이자 우리의 소중한 자원이 됩니다』 강원도 원주시 명륜동 주공명륜2단지 아파트주민들은 단지내 7개동 입구마다 재활용품함을 마련하고 다시 쓸수 있는 물건은 종이 한장이라도 알뜰하게 모으는게 생활이자 신앙이다. 3년전 아파트에 처음 입주하면서 시작됐는지라 코흘리개부터 할아버지·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재활용품을 모으는 일이 몸에 배었다.혹 외부인들이 이 동네에서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려 하다가도 깔끔하게 정리된 분리수거함을 보고는 자연스레 쓰레기를 나누어서 버린다. 이곳 아파트주민들이 쓰레기와 재활용품 분리수거운동에 남달리 애쓰고 있는 것은 아파트단지 부녀회(회장 강초자·49)의 헌신적인 환경보호실천운동에서 비롯됐다. 강회장과 주부 몇몇이 지난 92년8월 이곳 아파트에 입주한뒤 아파트주변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빈박스등을 청소하는 자리에서 쓸모있는 것을 모아 자원재생공사에 팔고 몇푼이라도 공동의 몫돈을 모으자고 뜻을 모았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재활용품함과 쓰레기 분리수거함이 마련됐지만 부녀회원들만 열심이었다.「그까짓 쓰레기를 모아팔면 얼마나 돈이 된다고 법석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들이 아직도 지배적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부녀회원들은 쓰레기 분리수거운동을 묵묵히 계속했고 심지어는 각 가정을 찾아다니며 재활용품을 거둬 들이기도 했다.그리고 한달에 2∼3차례씩 원주 자원재생공사에 팔아 매달 40여만원씩 공동재원을 마련해갔다.이렇게 해서 그동안 모은 돈이 무려 7백80여만원. 부녀회원들은 그때그때 모아진 돈으로 주변의 불우한 소년·소녀가장을 도와주고 입원한 이웃을 찾아 문병을 하는등 「이웃하나되기」운동을 펴나갔다.뿐만이 아니었다.단지내 명륜동복지회관에 기거하는 2백여명의 불우노인들에 효도관광여행을 보내고 정월대보름등에는 아파트단지 노래자랑대회를 열어 주민단합을 다졌다. 이같은 부녀회원들의 「주민하나되기」운동은 밀알이 됐다.재활용품 분리수거운동은 이웃들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아파트단지의 신앙이 돼버렸다.이뿐 아니라 각 가정에서는 생활쓰레기를 분리해 버릴 뿐만아니라 세제 한방울,수돗물 한방울도 금싸리기처럼 아끼고 있다. 부녀회를 중심으로 한 명륜2단지 아파트 주민들의 환경실천운동은 올해 대한주택공사에서 전국의 1백97개 주공아파트를 대상으로 선정한 「최우수 환경보호 아파트단지」로 선정돼 지역주민들의 사기를 붇돋워주기도 했다. 강부녀회장은 『가정주부들의 조그마한 힘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며 얻는 부수효과는 엄청난 것』이라며 『환경을 가꾸고 살리는 일이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없는 국민적 과제가 된 만큼 이같은 환경보호실천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 안나에리카 양로원(임춘웅칼럼)

    뉴욕 맨해턴 서남쪽에 스태이튼아일랜드란 섬이 있다.맨해턴에서 페리를 타면 약30분 거리에 있는 뉴욕시의 한 보로(자치구역)이다. 이 섬 한구석에 안나에리카라는 이름의 작은 양로원이 있다.전화번호부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곳은 찾기가 수월치 않다.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뿐아니라 위치가 외져 지도를 보고 찾기도 어렵다. 필자가 물어물어 안나에리카를 찾아간 날은 마침 40도를 넘보는 폭염속이었다.8층짜리 낡고 퇴색한 빨간 벽돌건물이 매미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한적한 숲속에 숨겨져 있었다.무더위와 긴긴 세월에 지쳐 영영 깨어나지 말았으면 싶은 이 작은 섬에 한국인노인 17명이 여생을 의탁하고 있었다. 할머니 다섯분,할아버지 열두분이다.할아버지 수가 더 많은 것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자식들에게 거북한 존재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65세이상의 노인들이 입주할 수 있는 곳이지만 몸이 성치 않으면 65세이전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김씨라고만 밝힌 한국인 한사람도 50세였다.이 곳에 들어오면 숙식비는 물론 병치료비도 모두 미국정부가 지불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겐 아무런 경제적 부담이 없다. 희망하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그래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거나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들,자식들이 모시기 어려운 사정에 있는 노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미국다운 시설이다. 안나에리카에는 현재 약2백50여명이 살고 있다.그중 17명이 한국인인 것이다.양로원측은 언어의 불편때문에 한국인들에겐 5층 한구석으로 방을 몰아주어 한국말을 쓰며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들은 서로가 별로 말이 없이 지낸다.화제가 없어서라고 한다. 음식은 주로 양식에 가끔 중국식이 나오지만 사회단체나 가족이 가끔 면회를 오면 김치를 가져다 주기때문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고 한다.그래도 어떤 할머니는 손가방속에 오이지와 김치를 담은 작은 유리병 둘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또 어떤 할머니는 이 곳 음식이 너무싱겁다며 소금병을 지니고 다녔다. 한국사람들의 경우는 공교롭게도 대부분이 가족이 있었다.딸을 보러 왔다가,아들이 오라고 해서,자식들이 다 미국에 있어서 미국에 왔다가 이 곳으로 옮겨온 사람들이었다. 안나에리카의 한 직원은 가족들이 있는 경우도 처음엔 자주 찾아오나 세월이 지나면 1년에 한두번,아주 발을 끊는 가족이 더 많다고 귀띔해준다.그러나 필자가 만나본 한국노인들은 한결같이 자기자식들은 자주 찾아온다고 말하고 있었다.자신이나 자식들의 체면을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알 길이 없다. 어느집 자식이 면회를 온다고 연락이 오면 한국노인들은 그날을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그러나 못온다는 연락도 없이 안와버리는 경우가 종종있다고 한다.그런 경우 그 노인네는 자기자식이 아주 급한 일이 생겼을 것이라며 열심히 변호를 한다고 한다.83세라고는 하나 아주 정정해뵈는 임성근할아버지는 자기는 아직도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만 자식들에게 폐가 될까봐 들어왔다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더이상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됐을때 찾는 곳,안나에리카의 한국노인들은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여생을 살고 있었다.
  • 서울말씨:상(서울 6백년 만상:48)

    ◎조선시대 「북촌말」이 대표적 서울말/지역·계층·직업따라 독특한 언어권 형성/해방전까지 통용… 「토박이말」 듣기 힘들어 서울말씨를 두고 「정말 깍쟁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언뜻 부드럽게 들리지만 지나치게 매끄러워 반들거리는 것이나 맺고 끊는 게 분명한게 얌체 같은 서울사람 기질과 꼭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올라와 살다보면 경상도 사내도,제주도 비바리도,충청도 양반도 자연스럽게 입에 배는 것이 서울말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억센 억양 때문에 티가 나는 경우가 많지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이방인들은 1∼2년쯤 지나면 모두 서울사람처럼 서울말을 썩 잘하게 된다. 오늘날의 서울말은 서울토박이들이 쓰던 서울방언이 아니다.서울에서 순 서울말을 듣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팔도강산의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바쁜 세상살이에 맞춰 어법은 적당히 무시되고 존·경칭어는 곧잘 생략됐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서울토박이들의 서울말은 건재(?)했었다.당시 쓰였던 서울말은 지역과 계층·직업등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조선시대 양·상반으로 나눠 거주지를 달리하던 것이 해방 될 무렵까지 이어져 성안 북쪽 「북촌」에서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그들의 품위에 맞는 「북촌말」을 썼고 성안 남쪽 「남촌」에서는 「남촌말」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남촌에는 벼슬하지 못한 양반이나 낮은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았다.또 청계천 언저리 「중촌」에는 장사치들이 많이 살아 그네들의 언어권을 형성했다.언론인 조풍연씨는 그의 저서 「한국의 여로」에서 북촌을 우대,남촌을 아래대라고 하고 우대사람,우대말이 서울사람 서울말을 대표했다고 적고 있다. 한글학자 한갑수씨는 성문을 중심으로 광희문 밖 주변을 「앞대」,독립문 밖 주변을 「뒤대」라고 불렀다고 기억했다.그는 이들 앞·뒤대 사람들은 서로 지역감정이 좋지 않아 자기네만의 독특한 어투를 고집했다고 전했다. 예로 뒤대사람은 매음절 다음에 「ㅂ모음」을 덧붙였다.「가봐야지」라면 「가바봐봐야뱌지비」라고 했던 것이다. 또 이들 앞·뒤대 사람말고도말투에서 티가 났던 사람들은 마포 주변에 모여살던 이들이다. 이들은 「오」로 발음할 것을 모두 「우」로 발음하는 경향이 심했다. 「돈 없어 못해」를 「둔 업수 뭇해」라고 했고 어미는 「­ㅆ수」,「­보우」,「­가우」,「ㅆ다우」등 모두 우로 끝냈다.이처럼 「오」를 「우」로 발음하는 것은 오늘날 서울말의 특성으로 남게 됐다. 말끝을 올리면서 「그리고」를 「그리구」하는 말은 요즘도 자주 듣는다. 계층에 따른 차이는 그들 부류가 쓰는 단어자체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어미나 경칭어등에서 뚜렷이 구별됐다. 말을 시작하기전에 「그러닝깐두루」「가설라무네」「저 거시끼니」「그게 뭐더라」등의 군소리들은 짐짓 점잖은 체 하기 위해 양반들을 흉내내 4대문안 서민들이 흔히 썼던 서울방언이다. 「계십쇼(계십시오)」「그런뎁쇼」(그런데요)등은 서울의 하층계급만 사용하던 말이다. 양반들은 천천하고 느리게 말을 했다.「그게 무엇인가 궁금하던 차에 그가 내려 왔기에 물어봤더니러니 그것이 떡이래야」(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하던차에 그가 내려와서 물어봤더니 떡이더라).이 말에 쓰인 「­ㅆ더니러니」와 「­이래야」등은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 노인네들이 즐겨쓰는 어미였다. 물론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특수 용어는 따로 있었고 명문있는 사대부집안에서도 자신들만의 용어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호칭으로 남자형님을 언니,사위를 「∼랑」,남의 손자를 영포,남의 아들을 영식,딸은 영애,남의 할아버지를 조부장이라고 했다. 이같은 사대부 용어들은 오늘날까지 몇몇 서울 사대부 집안에서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 귀순 강명도·조명철씨 기자회견 일문일답

    ◎북군부 오진우·오극렬파 암투 치열/김정일,85년부터 외교 제외 모든 권한 행사/전쟁 대비,마카오·스위스·일등에 외자 예치 27일 귀순 기자회견을 가진 강명도씨와 조명철씨는 『북한 김정일의 정치 체제에 회의를 느껴 귀순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귀순동기와 강성산총리에게 알렸는지에 대해 말해 달라. ▲(강씨)89년 인민무력부 실장으로 있을때 군부고위계층의 권력다툼과정에서 18호 관리소에 2년간 수용된 적이 있었다.이때 죄없는 3만여명의 죄수들이 구타당하며 비참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김정일의 정치체제에 불만을 품게 됐다. 부모친척중에 김정일의 측근이 많다.그래서 이들이 석방을 제의해 김의 지시로 석방된뒤 강성산의 도움으로 릉영윤전합영회사 부사장으로 발령받고 작년 12월 강재수출관계로 중국으로 가게됐다. 그러나 강재를 못 팔아 자금회수가 어려워 1주일로 예정했던 체류기간이 한달로 길어졌다.북한에서는 내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김정일에게 보고돼 체포명령이 떨어졌고 이 사실을 친구를 통해 알게돼 탈출을 결심했다.강성산이나 가족들은 탈출사실을 모른다. ­한달간 머문 행적은. ▲(강씨)중국에서는 겨울이 지나야 강재값이 오르므로 팔지 않고 있었다.돈을 돌리기 위해 심양과 북경등지를 왕래했다.김일성 사후에 대해서도 신중히 생각했다.오늘의 귀순기자회견 내용이 보도되면 강성산에 대한 대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군부내 권력다툼이 심각하다는데. ▲(강씨)북한 군부내의 권력다툼은 오진우·오극렬·이봉원파등 3개파로 갈라진다.그 밑으로 1군단과 2군단 출신파로 갈려 있다. 오진우파와 오극렬파가 갈려진 배경은 이렇다.87년에 오진우가 김정일과 함께 만찬에 참석했다가 대형 벤츠 승용차를 직접 몰고 돌아오다 가로수를 받아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오진우는 거의 죽을 상태가 돼 후임을 오극렬이 대행하게 됐다.오는 이후 총참모부에 공군사령부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하는등 파벌을 형성하고 자기가 무력부장이 다 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오진우가 러시아에서 치료를 받고 1년만에 회복돼 복귀해 이봉원한테서 이런얘기를 듣고 분개했다.이봉원은 오극렬과 사이가 안좋았다. 원래 오진우는 혁명1세대이고 오극렬은 만경대학원 출신의 2세대인데 오진우는 오극렬을 키우다시피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김일성에게 교체를 요구해 결국 오극렬은 물러났고 그의 사람도 다 나가게 됐다. ­김정일의 후배로서 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정무원 간부들이 성향은.(강씨에게)김달현의 근황은.강성산이 88년 좌천이후 재발탁된 배경은.강성산과 김정일의 관계는. ▲(조씨)나는 북한에서 풍파를 격은 사람이 아니다.고스란히 자라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남산고등중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고등반 인민반 유치원반으로 나눠져 있고 장차관급이상 자녀들만 따로 교육하는 곳이다.이 곳에서나는 김정일의 동생 김평일,영일과 함께 공부했다. 대학졸업후 김일성대학 교원이 돼 상류생활을 하면서 행복에 빠져 자기만을 위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그러면서 김정일체제와 북한 사회를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김정일은 정치적 경제적인 업적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남쪽의 소식도 들을 기회가 많았다.나의 행동이 북조선 통치자들에게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김평일과 영일은 공부도 잘했다.김평일은 사람을 많이 끌었다.학교에서는 김정일을 치켜 세우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결단코 제거하자는 운동이 미사여구로 미화됐고 정당성으로도 연결됐다.이런일도 있었다.학생들은 김평일과 영일과는 대면하지 못하게 돼 있으나 어느날 축구를 하고 선생들이 평일 영일과 식당에 가 식사를 같이 했다.서로 불문에 부치기로 했으나 어느 선생이 노트를 두고 나와 탄로가 나 많은 선생들이 물러났다. 정무원 각료들은 파벌은 없다.그러나 이들은 개방을 원하고 있다.정무원의 모든 부장들은 개방을 지향하고 있다. ▲(강씨)김달현은 나의 친척이다.할아버지는 강선욱인데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아버지와 6촌형제이며 전부주석 강양욱과 친형제이다.김달현은 강반석의 오빠 강진석의 손녀 사위이다. 김달현은 대외분야를 많이 맡아 92년 12월 강성산이 총리가 되면서 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에서 같이 승진했다.그런데 김은 강성산이 심장쇼크로 입원하면서 처음으로 총리를 대행하면서 경제를 책임지게 됐다.그때 군수공장의 전기를 30% 삭감해 탄광등지로 보냈는데 그 때문에 군수생산계획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김일성이 받게됐다.김일성은 대노해 『정신 있는 사람인가』 하면서 질책을 했고 김달현은 사상검토를 받고 도청도 당했다.김달현은 강성산과 때로 맞서기도 했다.강성산이 내놓는 방안을 놓고 옥신각신 다툼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결국 김은 작년 12월 함남에 지도원으로 내려갔다. 강성산은 경제문제등이 꼬여 집에 들어가지도 못해 당뇨병이 심해졌다. 그래서 김일성이 쉬도록 권고해 88년에 함북으로 휴양을 갔다.91년에 다시 총리가 되었는데 재기는 상상도 못했다.강성산은 어려서부터 김일성이 키운 사람이다.강은 중국 출신이고 아버지 강위련은 빨치산출신으로 김일성의 무릎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강의 삼촌 강위룡은 아직 살아 있다.강위련은 기관총 분대장을 했는데 강이 죽자 김일성이 몹시 울었다고 한다.강은 혁명학원에서 공부하고 이근모 연형묵등과 함께 체코에서 유학도 해 체계적으로 키워져 김일성이 등용했다.강은 김정일과도 가깝다.김정일과 사이가 나쁜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비리를 들춰 낸 것이 계기가 됐다. ­북한의 핵 상황은. ▲(강씨)김정일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핵이라 생각하고 있다.인민생활과 경제가 파탄상태인데도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핵이라고 여기고 있다.북한에는 군수공장이 민간공장보다 더 많다.핵이 개발됨으로써 군수공장의 투자를 민간으로 돌릴 수 있다는 논리이다.동구권국가가 허물어지면서 공격받지 않으려면 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지금 북한은 5개 정도의 핵폭탄생산을 완료했다.핵을 실어나를 로켓 생산은 실험단계이고 94년까지 완전 생산할 것이다.최소한 10개정도 확보한 다음에는 보유사실을 공개해 남북 대미 관계에 이용하려 하고 있다. 핵폭탄은 이미 개발이 완료됐고 다만 갯수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이 이야기는 영변 핵단지에 있는 고위 간부가 아들 결혼식 때문에 나와 술과 담배 식료품등을 취급하던 나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들은 것이다. ­북한내 지식인이나 고위층주변의 김정일에 대한 평판은 어떠한가. ▲(강씨)북한의 지식인들과 일부 고위층 사이에는 김정일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 있다. 이때문에 식량난과 경제난을 타개하지 못할 경우 김정일 체제는 붕괴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이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평소 김정일은 지나치게 즉흥적인 정치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일부 원로들에 대해서까지 너무 편견적인 태도를 보여 왔고 이러한 내막을 알고 있는 지식인이나 고위층들은 그에 대한 신뢰감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조씨)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한 북한 이반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북한사회를 빠져 나올 경우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을 뿐 80년대 중반부터 노골화된 김정일체제를 인정하거나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체제는 얼마나 갈 것 같은가. ▲(강씨)20년전부터 정치를 해와 권력기반은 튼튼해 수명이 길 것으로 본다.75년부터는 정권기반을 닦았으며 85년부터는 김정일이 외교권 행사를 제외하고는 총지휘했다. 당정의 지시를 받아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유일적 지도체제에서 당정은 사실상 김정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기본권력수뇌부인 당정 조직 지도부가 모두 김일성대학 출신의 2세대인만큼 권력기반은 확고하다.총비서,주석을 다 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청진시의 화학석유공장이 91년부터 지금까지 3년동안 가동이 중단됐고 작년 9월 한달동안 김책제철소가 가동되지 못하는등 경제의 70%정도가 파탄지경이어서 김정일 체제 수명은 주민 불만고조로 짧아질 수도 있다.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총정치국장을 겸하고 있는가. ▲정치국과 참모부간의 갈등이 많아 오진우가 겸임하고 있다. ­94년을 잘 넘긴다는 뜻은 무엇이고 핵수출 가능성은. ▲지난해 김정일은 북미회담과 IAEA핵사찰문제와 관련된 미국의 진의,핵사찰에 대한 중국의 입장등을 파악하느라 집에도 가지못하고 청사에서 자면서 북미회담을 지휘했다. 이때문에 김정일은 당시 내년(94)만 잘 넘기면 북미회담및 남북회담에서 유리하다고했다.핵수출여부는 잘 모르겠다. ­외화보유고는 얼마나 되나. ▲대성은행이 전쟁에 대비해 마카오,스위스,일본은행등에 외화유치를 하고 있다. ­북한의 사로청과 한총련과의 관계는. ▲사로청 산하 조선학생위원회는 사로청의 외곽지도를 받고있으나 사실상 대남사업부인 통일전선사업부 6과에서 지도하고 있다.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그럴싸한 이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왜 남조선으로 오는 귀순자들이 있는지 학생들은 심각히 생각해봐야한다. 또 서강대 박홍총장의 얘기는 약과다.대남정보부에서는 공장의 노동자들보다는 흥분하기 쉽고 혈기가 있는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주체사상을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김정일의 성격,지식,지도력,건강,가족관계는.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저돌적이다.특히 측근들을 질책할 때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성질의 기복이 매우 심하다는 뜻의 「패났다」는 소릴 들을 정도다. 피아노를 전문가이상으로 치는등 예술에 매우 조예가 깊다.매우 건강한편이다. 또 초대소(별장)에서 동생 경희가 어머니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면 동생을 나무라다가도 따라서 우는등 눈물도 많다. 김정일이 김평일등 곁가지등과의 식사및 사진촬영등을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피해야한다는등 자신의 입지확보에 장애가 되는 이복형제들의 제거에 신경을 쓰는등 졸렬하다. 김정일은 또 평소 잘 웃지 않는다.83년 할아버지(강양욱 부주석)가 죽었을 때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왔으나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92년 11월 식품을 담당하는 경리부 시찰을 왔을 때는 신제품 음식을 보고는 『잘 됐다』는 의사표시로 미소를 지은 것이 고작일 정도로 거의 웃지않는 편이다. 김정일의 방탕한 사생활은 대남정탐본부인 통일전선사업부 이동호 제1부부장이 김정일이 초대소의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78년 문수초대소로 초대,이때부터 기쁨조에 관심을 보였다. 또 외교부 산하에도 기쁨조를 두고 있으나 정·군을 장악하기 시작한 85년부터는 업무때문에 기쁨조를 축소시켜 현재는 각 도별로 3개씩 모두 72명의 기쁨조가 있다. 김정일은 유일한 동생인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을 제일 신임하며 인민무력부장 오진우·호위총국장 이을설등 항일 빨치산 세대인 이른바 「혁명1세대」는 대부분 존경한다. 가족관계는 본처 김영숙과의 사이에 딸 2명과 아들 1명이 있으며 이들은 55호 관저에 있다. 두번째 처는 무용수출신의 고영희씨(40)이며 고씨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1명씩을 각각 두고 있다. 자식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정남(23·미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배우인 송혜림과의 사이에서 났으며 70년대 당시 결혼한 송씨를 차지하기위해 송씨의 남편을 프랑스의 유네스코 대표로 보냈다. 김군은 그러나 김정일 뒤를 이를 후계계승자도 아니고 김정일을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며 식모등과 함께 문수구역에 거주하고 있다. 김군을 93년 9월 고려호텔에서 만났을 때 김군이 여자랑 노는등 타락한 생활을 해 호텔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남한에 대한 정보는 어떤 방법으로 입수했는가. ▲(조씨)남산고등중학교 시절에는 남한 신문을 볼 수 있었고 아버지가 건설부부장으로 일할 때 장관급 이상 고위직에게 보급되는 국제정세,남조선정세,과학기술정세등에 관한 참고통신을 아버지를 통해 볼 수 있었다.이 통신은 논평없이 있는 그대로 사실만 기록돼 있다.또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같은 정보가 비밀히 나돌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사망으로 집단 통곡하는 현상은 어떻게 생각하나. ▲(조씨)북한의 주체사상은 공산주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현실에 맞게 적용했다고 주민들은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다.주민들은 주체사상이 대중과 민중을 위한 이론으로 알고 있어 이를 만든 김일성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또 주민들이 그토록 슬퍼했던 것은 앞으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불안감도 작용했다. ◎“장인 강총리 숙청될것” 괴로운 표정/“북뉴스 접촉기회” 내외신기자 2백명 몰려/귀순자 기자회견장 이모저모 27일 귀순한 강명도씨와 조명철씨의 기자회견이 열린 프레스센터 20층 회견장에는 두 사람이 북한고위인사의 친인척이어서 폐쇄적인 북한 내부의 고급 뉴스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외신기자 2백여명이 한꺼번에 몰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였다. 특히 일본의 교토통신과 유럽의 로이터통신등 외신기자가 보도진의 절반을 넘었으며 국내 기자들보다 앞서 질문공세를 펼침으로써 최근 북한 내부 정세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반영하기도 했다. ○…강씨등은 시종 진지하고 또렷한 말투로 취재진의 질문에 성의있게 답변했으며 종래 귀순자들과는 달리 고위층 내부의 비밀스런 활동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 이날 회견에서 강씨는 여유있는 태도와 달변에 가까운 말솜씨로 북한 내부사정을 조리있게 설명.반면에 조씨는 구체적인 답변보다는 학자풍의 원칙론적인 대답으로 일관해 대조적. ○…특히 강씨의 경우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지난 87년 음주교통사고를 낸 상황을 설명하면서 오의 대형벤츠 승용차 번호인 216­5555를 정확하게 기억해 내기도 해 기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이날 강씨는 3시간여동안의 기자회견을 마치면서 『나의 귀순과 기자회견으로 단기간내에는 강성산총리의 신변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만간 숙청등 그 대가를 치르고 상당히 곤경에 빠질 것』이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자회견도중 땀을 훔치는 등 다소 힘든 모습을 보인 조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동료들은 북한의 모순된 체제를 내부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달아났다고 비난할 것』이라면서 『다만 우리들의 귀순동기가 북한사회에 알려져 북한사회를 바로 잡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끝을 맺었다. □인적사항 ▷강명도◁ ▲나이·생년월일:36세,58.12.4생 ▲출생지: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동 ▲주소:평양시 만경대구역 광복거리 1동7반 ▲직책:금수산의사당(주석궁)경리부 릉영윤전합영회사 부사장 ▲학·경력 ­70.8∼76.9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졸업 ­76.10∼79.9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졸업 ­79.9∼82.7 중앙사로청 과외교양지도국 외사과 지도원 ­82.7∼85.10 조선인민경비대원,평양시당 39호실 지도원 ­85.10∼86.7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 국제부 지도원 ­85.10∼86.7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 국제부 지도원 ­87.6∼92.2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연구실장 *외국인 무단접촉으로 90.3∼92.2 평남 북창군 「18호관리소」수용 ­92.3∼ 금수산의사당(주석궁)경리부(대외명칭 「릉라888무역회사)산하 「릉영윤전합영회사」부사장 ▷조명철◁ ▲나이·생년월일:35세,59.4.2생 ▲출생지: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 ▲주소:평양시 만경대구역 당상1동 8반 아파트 20층1호 ▲직책: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 *92.8부터 중국 북경언어학원·천진시 「남개」대학 유학 ▲학·경력 ­71.9∼77.8 남산고등중학교 졸 ­77.9∼83.8 김일성종합대학 자동화 학부자동조정학과 졸업 ­83.9∼87.10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졸업 *기업관리 현대화 전공,준박사학위 취득 ­87.10∼92.7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 *경제수학·기업관리 현대화 강의 ­92.8∼93.7 중국 유학,북경 언어학원 중국어 연수 ­93.9∼ 중국 천진시 남개대학관리학부 연수 *경영합분야의 정책결정론 과정
  • 강명도·조명철씨가 밝힌 「후계자의 사생활」

    ◎“김정일성격은 급하고 저돌적”/「곁가지」 제거에 신경… 도마다 「기쁨조」 운영/세여인 사이 3남3녀… 23살 장남도 방탕 김정일의 성격은 대단히 급하고 저돌적인 편이며 건강도 아주 좋다고 귀순자들은 밝히고 있다. 북한 정무원 총리 강성산의 사위 강명도씨(36)는 27일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의 성격과 관련,『대단히 급하고 저돌적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특히 측근들을 질책할 때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할 정도며,시시때때로 성질이 왔다갔다해 북한에서는 김정일을 「패났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초대소(별장)에서 동생 경희가 어머니(김정숙)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면 동생을 나무라다가도 따라 우는등 눈물도 많다고 했다. 전건설부장 조철준의 차남이자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인 조명철씨는 김정일이 이복동생 김평일등 「곁가지」등과의 식사및 사진촬영등을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피해야한다는등 자신의 입지확보에 장애가 되는 이복형제들의 제거에 신경을 쓰는 졸렬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일은 또 평소 잘 웃지를 않는다고 강씨는 밝혔다. 83년 강씨의 할아버지(강양욱 부주석)가 죽었을 때는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왔으나 거의 말을 하지않았으며 92년 11월 식품을 담당하는 경리부 시찰을 왔을 때 신제품 음식을 보고는 『잘 됐다』는 의사표시로 미소를 지은 것이 고작일 정도로 거의 웃지않는 편이라고 전했다. 김정일의 방탕한 사생활은 대남정탐본부인 통일전선사업부 이동호 제1부부장이 김정일이 초대소의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78년 문수초대소로 초대,이때부터 기쁨조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밝혔다. 또 허답의 외교부 산하에도 기쁨조를 두고 있으나 정·군을 장악하기 시작한 85년부터는 업무때문에 기쁨조를 축소시켜 현재는 각 도별로 3개씩 모두 72명의 기쁨조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졸업뒤 선전선동부에 근무했으며 전문가 이상으로 피아노를 잘치는등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밝혔다. 한편 김정일은 유일한 동생인 김경희와 그녀의 남편 장성택을 제일 신임한다고 전했다. 김정일은 또 권력서열 2위인 인민무력부장 오진우,호위총국장 이을설등 항일 빨치산 세대인 이른바 「혁명1세대」는 대부분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가족관계는 본처 김영숙과의 사이에 딸 2명과 아들 1명이 있으며 이들은 55호 관저에 있다고 밝혔다. 두번째 처는 무용수 출신의 고영희(40)이며 고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1명씩을 각각 두고 있다. 자식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정남(23·미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배우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났으며 70년대 당시 결혼한 송씨를 차지하기위해 송씨의 남편을 프랑스의 유네스코 대표로 보냈다고 전했다. 김정남은 그러나 지금까지 언론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정일 후계 승계자도 아니고 김정일을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며 식모등과 함께 문수구역에 거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를 93년 9월 고려호텔에서 만났다는 강씨는 당시 김이 여자랑 노는등 타락한 생활을 해 호텔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특히 전쟁시 사용하기위해 홍콩의 마카오를 비롯,스위스·오스트리아·일본은행등에 외화를 넣어두고 있다고밝혔다. 강씨는 김정일 체제의 수명과 관련,『20년전부터 정치를 시작,85년부터는 사실상 정권을 총지휘해 온데다 당정의 조직지도부가 모두 김일성대학출신의 2세대인만큼 권력기반은 확고하다』면서 『사실상 김정일은 총비서와 주석직을 다 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강씨는 그러나 경제의 70%가 파탄에 이르러 경제및 식량난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주민들의 불만고조로 어려운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일성의 이종… 북 대표적 개방파/「사위 귀순」 강성산은 누구 귀순자 강명도씨(36)의 장인인 강성산정무원총리는 현재 북한 권력서열 3위에 올라있는 실세인데다 두번째 총리를 역임하고있는,김정일의 핵심측근.지난 8일 사망한 김일성의 모친인 강반석의 큰 언니 아들이어서 김일성과는 이종사촌관계. 올해 63세인 그는 북한 경제 테크노크라트의 대표주자이며 김달현등과 함께 북한내 몇 안되는 개방파 인물.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으로 만경대 혁명학원과 김일성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뒤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체코의 프라하공대에 유학하는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67년 자강도 당책임비서로 임명된데 이어 70년 39세에 평양시당 책임비서로 발탁돼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김일성부자의 각별한 신임으로 77년 정무원 부총리에 전격 임명된 이후 84년 최고인민회의 7기 3차회의에서 제1부총리자격으로 「남남협력과 대외경제활동을 강화하고 무역활동을 더욱 발전시키는데 대하여」라는 주요보고를 한뒤 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이해 9월 합영법과 외국인소득세법등 개방정책관련법들을 마련하는등 광범위하고 파격적인 개방준비에 박차를 가했다.그러나 경제개혁이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86년12월 총리직에서 해임돼 당비서로 자리를 옮긴뒤 88년3월 전직총리로서는 이례적으로 함북도당 책임비서로 일했다. 그는 여기서도 두만강개발계획을 창안하는등 개방을 계속 추진해왔으며 그의 이같은 경제개혁추진능력은 김일성으로부터 공개적인 칭찬을 받았고 92년 12월 총리로 재기용됐다. 사위의 귀순이 그의 정치적 입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되고 있다.
  • 예전과 다른 피서/박영(굄돌)

    몇년래 보기 드문 더위이다.그래 그런지 해결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더위로부터 도망갈 궁리만 하게 된다.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만 꿈꾸고 있다.공항도 버스터미널도 그래서 만원 아닐까.어디론가 멀리 달아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 아닐까.하긴 찾아간 그곳도 덥기는 마찬가지일지 모르는데. 냉방시설이 잘 돼 있는 음식점,카페,사무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어쩌면 실내에서는 그다지 더위를 못느낄지도 모른다.그러나 대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무더위를 푸념하면서 매미울음소리 들리는 시골 들판과 느릅나무아래의 그늘을 떠올린다.방학이면 시골의 친척집에 가 커다란 나무아래서 뛰놀던 추억.동네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삼베옷 입고 부채를 살랑거리며 땀띠난 손자의 등을 쓸어주던 모습들이 떠오른다.발가벗고 냇가에서 미역감고 송사리를 잡으며 뛰어다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아니 요즘 사람들은 괌이나 사이판,하와이 등지로 피서여행을 간다고 한다.아이들도 방학을 기다려 잡지나 TV에서 보았던 외국의 풍물을 고대하면서 부모의 휴가철에 맞춰 외국여행을 기다린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이 핫뉴스로 다가온 이 여름.김포공항에 아이,어른 할 것없이 피서여행의 줄을 이을 광경을 상상하면서 되새겨본다.이제는 시골집에서 서늘한 고목나무 그늘과 노인들의 부채바람,시냇물 등으로 여름방학의 추억을 만들던 시대는 사라졌는가고. 하루종일 냉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에어컨병에 시달린다고도 한다.나 역시 마찬가지다.예의범절 때문이 아니고 냉방에서의 찬 공기가 닿으면 시려서 난 꼭 스타킹을 싣는다.실내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풍경,형태속에서 더위를 찾고 있다.
  • 가족신문 이렇게 만들어요

    ◎지면수 처음엔 무리하게 잡지말고/월간·계간이 알맞아… 기간 지키도록/자녀들 작품·친척소식 등 모두 게재 『엄마,가족신문은 컴퓨터로 하면 정겹지가 않데요.보기에 조금 촌스러운것 같아도 우리 가족 각자의 글씨를 넣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좋겠구나.그리고 엄마 생각에 이번호에는 할아버지가 네게 보내오신 편지와 이모댁의 새아기 탄생소식을 주요기사로 실으면 좋겠는데 너는 어떻니』 자신들의 삶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요사이 가족신문 만들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족신문을 만듭시다」­.가정의 해를 맞아 가족신문 만들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어린이도서연구회 곽정란회장은 한 가족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또 잘 만나지 못하는 친척들에게 우리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가족신문을 만들어 보자고 권한다.현재 가족신문을 만드는 가족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약 1백50 가족 정도. 5일 서울 서초쇼핑 사무실에서 국민학생 이하의 자녀를 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가족신문 만들기 전시 및 강연회를 개최한 곽회장은 『가족신문 만들기에 관심은 있으나 만드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족신문의 구성은 모범답안이 없다』고 말한다.즉 가족들끼리 모여앉아 어떤 내용을 담을까,어떤 사진을 실을까 또 기사는 누가 쓸까 등을 서로 의논,그 결과에따라 가족문집 형식으로 그냥 가족의 체취가 묻어나게 만들면 된다는것. 가족신문을 만들땐 우선 신문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첫 순서로 신문의 이름은 「너구리」·「상록수」 등 아이가 좋아하는 동식물이나 만화주인공의 이름도 좋고 「박가와 이가」처럼 가족들의 성씨나 별명 어느것이라도 좋다. 다음은 지면 정하기.8절지 도화지를 절반으로 접어 만든다고 했을때 8절지가 한장이면 4쪽,2장이면 8쪽,3장이면 12쪽이 된다.따라서 가족의 숫자와 게재할 양을 가늠해서 페이지를 정하되 처음 만드는 경우엔 무리하게 지면을 잡지말고 횟수를 거듭해가면서 늘려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발행기간은 월간·격월간·계간 등 가족사정에 맞게 하되 주변의 친척이나 이웃들에게도 나눠주는 신문인만큼가능한 발행기간은 맞추도록 할것.또 발행부수는 이웃과 친지들,자녀들의 선생님께도 보낼것을 계산해 정하고 발행비용은 복사비 정도만 들기 때문에 부담을 갖지않아도 된다. 이밖에 지면은 자녀들이 그린 그림이나 요즘에 찍은 가족사진 혹은 다시 보고싶은 추억의 사진을 붙여 표지를 꾸미고 다음은 아버지 페이지·어머니 페이지·자녀들 페이지로 정해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고싶은 말이나 아이들의 어린시절 이야기,자녀들의 문예작품 등을 담는다.또 가족과 친척들의 근황과 행사 등을 정리하는 가족 및 친척소식,우리동네 소식,미담소개,외부 초대석,학교소식,우리집 환경보호,추억의 페이지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그림을 곁들여 꾸미면 재미있다. 5년전부터 계간으로 가족신문 「민들레」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한 주부는 당시 유치원생으로 삐뚤삐뚤한 글씨·볼품없는 그림으로 신문 만들기에 참여했던 딸 아이가 이젠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 편집회의를 이끌고 있다며 가족신문을 계속 만들다보니 ▲가족간의 대화가 풍부해짐은 물론 ▲가족사의 산기록을남길 수 있고 ▲자녀의 글쓰기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그 장점을 설명했다.또 「탈렌트」란 가족신문을 발행중인 한 주부는 시어머니의 생신을 잊었다가 가족신문에 사죄의 글을 실어 부모님의 노여움을 풀기도 했다며 『가족신문이 정 어렵다고 생각되면 서너가족이 공동으로라도 만들어 보라』고 말했다.
  • 실향민마을/“분단원흉 사라졌다” 막걸리파티

    ◎속초 아바이마을·철원 대마리 르포/“「일부국민 실망」 보도 도저히 이해안가”/“이제 멀잖아 고향방문길 열릴것” 기대 「내 잠시 다녀오지요」라는 한마디만을 남긴채 어스름 달빛을 밟고 고향땅을 떠난지 어언 반세기­한치라도 고향가까이에 머물고 싶은 비원을 안고 휴전선을 따라 만들어진 실향민촌 주민들의 얼굴마다에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에 한평생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는듯 감회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속초아바이촌◁ 1·4후퇴때 원산과 함흥항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가 끝내 고향가는 길을 잃어버린 함경도 실향민들이 대거 몰려 살고 있는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속칭 「아바이」마을의 실향민들은 전날에 이어 10일에도 노인정에 모여 「김일성 사망」을 축하하는 막걸리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으로 1·4후퇴때 부모님,아내와 4남매를 고스란히 두고 부산으로 왔다가 아바이촌에 정착했다는 조일랑할아버지(78)는 『김일성이 죽었다가 고향에 두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솟구친다』며 멀리북쪽하늘로 시선을 모았다. 함경도 영흥이 고향이라는 아바이마을의 최연장 이춘섭할아버지(92)는 『하루에도 몇번씩 김일성을 저주해왔는데 하느님이 이제야 소원을 들어 주었다』며 『10살이나 아래인 김일성이 먼저 죽은 것은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돌파구가 마련될지도 모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또 고향가는 길이 물거품이 되는게 아니냐」는 탄식도 적지 않았다. 전날 정오뉴스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을 처음듣고 고향사람들과 모여 만년한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통곡을 했다는 함경도 북청출신의 박춘심할머니(66)는 『김일성이가 죽어 혹시나 했던 이산가족의 고향방문길이 또 막히는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할아버지를 아바이라고 부른다해서 흔히 「아바이」로 통하는 이들 함경도출신 실향민 대부분은 『그래도 민족분단의 원흉이 죽었으니 고향에 돌아갈 날도 시간문제 아니겠느냐』며 이구동성으로 한결 마음은 가볍다고 말했다. 갈대만이 아무렇게 자라던 바닷가를 억척스레 보금자리로 탈바꿈시켜놓은 함경도 실향민들은 파도소리에 고향소식이 실려올까 해서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창문을 북쪽 바닷가쪽으로 내놓고 살고 있다고 했다. ▷철원 대마리◁ 『진작 죽었어야할 위인이…』 혀를 끌끌차는 70대 촌로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이 분단반세기 인고의 아픔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김일성주석 사망」소식 이틀째인 10일 낮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2리. 민통선 바로 남쪽 널따란 철원평야 한쪽에 자리잡은 아담한 이곳 마을주민들의 감회는 사뭇 남달랐다. 모두 2백여가구 1천여주민들 가운데 휴전선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60여가구 4백여명.일부는 지금도 눈에 잡히는 철책선 바로 너머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피란을 내려와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데 자리를 잡았다가 못돌아간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내 살아생전 김일성이 죽는 것을 보고 싶었다』는 이동윤옹(75)은 고향 함경남도 고산이 불과 40여리 지척이지만피란때 못모시고 내려온 어머니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휴전과 함께 빤히 바라보면서 못가는 고향에 더욱 속을 태운 김동래씨(50)는 『수년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가르쳐준 조상님의 산소 위치가 이젠 가물가물할 뿐』이라고 말한다. 『어렵사리 합의한 남북정상회담이 불투명하고 김일성사망에 일부 국민들이 실망한다는 보도를 우리는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장마비를 맞으며 논물을 보러 나가던 실향민 이인성씨(64)는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이 죽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 오두산 전망대에 실향민 1만 몰려

    ◎휴일 빗속에 혈육상봉 날짜 손꼽아/“남북 정상회담 꼭 열어 아픔 덜어주길”/북녘땅 가리키며 눈시울 붉혀 김일성의 사망으로 한반도 정세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10일 경기도 파주군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는 북녘땅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는 실향민 등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린데다 짙은 안개로 북측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이곳을 찾은 1만여명의 관람객들은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 느끼며 통일에의 염원을 달래고 있었다. 관람객들가운데에는 실향민들은 물론이고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등 가족단위 관람객들도 많았다. 이들은 2·3층 전망대에서 폭 3㎞정도의 임진강 너머 짙은 안개로 가려져 있는 북녘땅을 쳐다보며 김일성의 사망에 따른 앞으로의 남북관계전망 및 이산가족문제등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또 일부 관람객들은 준비해온 손망원경으로 북녘땅을 관측하는가 하면 2∼3곳의 북측 확성기에서 나오는 대남방송을 듣느라 손을 귀에 가까이 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날 낮12시쯤 2층 전망대에서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송원순(74·인천구 남구 학익1동)·임이순(68·여)부부는 개성직할시가 있는 북녘땅 관산반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고향 평양에서 9살때 월남했다는 권세정씨(57·여·서울 성동구 용답동)도 『어릴 때 평양시내 거리 곳곳에 걸린 김일성 얼굴사진을 보면 무조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곤 했다』면서 『주체사상을 고집하며 외부와의 단절을 고수해온 김주석이 사망한 만큼 북한도 이제는 개방화 정책으로 주민들의 생활을 좀더 나아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준비해온 망원경으로 북측을 바라봤다.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에도 여느때의 1천5백여명보다 5백여명이 많은 2천여명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에서 새벽차로 통일전망대까지 왔다는 심우규할아버지(82·서울 은평구 녹번동)는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 어머니를 남겨놓고 전쟁통에 피난온뒤 지금까지 망향의 한을 안고 살아왔다』며 『김일성이가 죽었다니 어머니께 불효했다는 죄책감이 솟구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같아 분통함을 가눌 길이 없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에 한평생을 고향을 그리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이곳을 찾았다는 이조원씨(36·상업·경기도 화성군 태안읍)는 『김일성이 몇년만 빨리 죽었으면 어머니가 그렇게 그리던 고향을 한번은 가볼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며 『김일성사망이 남북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 「김일성 사망」 예언한 육관도사 손석우씨

    ◎김정일 가을에 실각… 99년쯤 통일/김사망은 시조묘 정기 끝났기때문/자열사 아닌 김정일 음모로 죽은듯 김일성주석이 올해 사망할 것이라고 말한 한 풍수지리가의 예언이 맞아 떨어져 화제가 되고있다. 전국종친회연합회 회장과 한국족보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육관도사로 불리는 손석우씨(65)는 지난해 7월 펴낸 풍수지리서 「터」에서 『김일성의 운명은 이미 시조인 김대서의 묘에 의해 정해져 있다.김일성은 이 묘역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는데 묘자리가 천문을 열고 지축을 깬다는 미좌축향으로 만49년동안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되어있다.따라서 1945년부터 시작된 김일성의 통치기간은 49년이 되는 94년 음력 9월14일 인시(새벽 3∼5시)에 묘의 정기가 사라진다』고 예언했었다. 손씨의 예언은 1백일가량 틀리기는 했으나 약간의 오차를 예상한듯 『김대서의 묘가 고려 고종 44년에 들어서 너무나 오랜 발복이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손씨는 김일성말고도 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운명을 상징하는박대통령 할아버지의 묘의 지기가 79년 10월 24일 밤에 끝난다고 예언해 실제 사망일인 26일과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않아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었다. 9일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들은 손씨는 『김일성은 자연사가 아닌 위해에 의해 사망했을 것이며 김정일의 음모일 것같다는 육감을 받는다』면서 김정일은 아버지의 덕으로 올가을까지만 집권하고 그이후는 군부에서 후계자가 나오며 그 후계자는 화해주의자로 민주주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또 『내년부터는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99년쯤 통일될 것』이라고 말했다.손씨는 이 논리의 근거로 풍수지리사상에서의 천통일원 원리를 들고 『2001년에는 남북한 통일 대통령이 나오는데 그는 현재 나이가 51세쯤 된 부드럽고 복을 타고난 남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구한말∼일제 농촌 변화과정 생생”

    ◎구례 지주 유씨가의 일기 농촌경제연서 분석/할아버지와 손자가 85년간 쓴 농업일기/당시 작목구조·농사방식 연구에 큰 도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는 기간 우리 농촌경제의 변동과정이 할아버지와 손자에 걸쳐 쓰여진 85년 동안의 일기를 통해 연구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두순 부연구위원과 박석두 책임연구원은 「한말·일제하 양반 소지주가의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의 지주인 유씨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일기와 각종 문서를 이용해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연구에 이용된 일기는 유제양(1846∼1922년)이 1851년부터 1922년까지 모두 72년 동안 쓴 「시언」과 그의 손자인 유형업(1886∼1944년)이 할아버지의 권유로 13살 때부터 1936년까지 쓴 「기어」.또 금전출납부인 「당용록」과 연도별 소작료 수취부인 「추수책」,노동력 사역부인 「전가일기」 및 「농가일기」,식량소비를 기재한 「양미책」 등 농가경영요소가 망라된 가전문서들이 분석됐다. 연구에 따르면 유씨가는 17 93년쯤 논·밭을 합쳐 8백83두락(22만3천4백여평)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1백년뒤에는 분할상속과 매각 등으로 1백62두락(2만5천평) 정도로 줄어들었다.이후 19 00년에는 1백두 미만으로 축소됐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친족의 방탕이나 횡령 질병등으로 인한 매각 때문이었다. 당시는 조선이 일제의 강제농정에 휩쓸린 시기였다.일제는 조선을 일본이 필요로 하는 식량 및 원료농산물의 생산기지로 만들려 농업 방식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이에따라 유씨가의 작목구조와 농사방식도 크게 바뀌었다.「군청에서 양뽕나무 150그루를 보내 1백10그루를 뒷 채소밭에 심었다」(1911년 3월25일)는 일기에서 보듯 일본산 뽕나무로 종자를 개량했고 이어 재래면의 재배를 금지함에 따라 면화재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조선총독부는 일본 쌀시장에서 인기높은 품종을 강압적으로 보급했다.미곡증산사업의 목표가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신품종이라는 미모의 종자가 여러 군데에서 얼어 죽었다」(1931년)는 기록처럼 일본품종은병해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재래종보다 휠씬 심했다. 농사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씨가가 화학비료를 처음 구입한 것은 1930년이다.일본 괭이와 왜낫을 산 것은 1912년이었으며 1916년에는 탈곡기구를 샀다.또 1937년부터 벼를 도정할 때는 물레방아 대신 동력 정미기를 썼다. 유씨가는 한해 2백∼4백50명의 노동력을 외부에서 조달했다.노동력 조달 방법은 호역와 매고·머슴의 세가지로 크게 구분됐다.호역은 농토를 빌려주고 지대로 춘추 각 4일의 노동을 제공받는 것이며 매고는 호역으로 충당되지 못한 노동력을 현금 또는 현물을 주고 쓰는 것이다.유씨가는 1900년대 초에는 호역으로 대부분의 농사일을 하고 부족노동력을 매고로 보충했으나 1920년쯤에는 소작으로 전환했다. 농촌경제연구원은 이 연구에 쓰여진 유씨가의 문서를 이용해 앞으로 「류씨가의 수입지출구조 및 생활실태」「토지소유 및 지세의 변화에 관한 연구」「오미동의 사회구조와 사회조직」 등을 연차적으로 연구해 갈 계획이다.
  • 존 그리샴/사형수이야기 「가스실」 “화제”

    ◎사형제도 지지자… 스스로 의문 던져 「법률회사(The Firm)」,「펠리칸 브리프」,「의뢰인」 등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변호사겸 소설가 존 그리샴이 사형수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더 체임버(가스실)」를 내놓아 관심을 끌고 있다. 평소 사형제도의 지지자로 알려진 그리샴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깊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그는 새 작품에서 복수는 때로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살인은 역시 부끄러운 일이며 악에 대한 비열한 대응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체임버」 역시 기본적으로는 스릴러물의 흐름과 요소를 갖추고 있다.그러나 이전의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멜로드라마적 성격은 보이지 않는다.그리샴의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에 익숙해 있는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포멧을 시도한 이 작품이 흥미와 긴박감이 떨어지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그러나 독자들은 곧 미시시피의 사형수 감방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한 인종주의자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백인우월주의자 테러집단 KKK의 단원으로 유태인 인권변호사의 사무실을 폭파하고 그의 어린 두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은 샘 케이홀이란 60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에서 작가 그리샴은 형집행일이 다가오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시작하면서도 KKK를 지지하는 가정에서 자라나 여러차례 테러에도 가담,여전히 흑인과 유태인은 경멸받아야 한다는 믿음만은 바꾸려 들지 않는 샘을 통해 인간의 인종차별이란 어려운 주제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인 샘의 손자 아담은 인종차별주의자인 할아버지 샘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샘의 변호를 맡아 이 사건이 왜곡된 가족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증명,집행만은 막아보려 애쓴다. 그리샴은 아담이 형집행정지를 위해 싸우는 이유에 대해 독자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하고 있다.작품은 또 샘과 같은 테러리스트를 만든 배후세력에 주목함으로써 반전효과를 노리고 있다.그리샴은 배타적인 인종주의로 야기되는 폭력과 파괴가 희생자들 뿐 아니라 가해자까지도 무너뜨린다고 말한다. 이와함께 그리샴은 작품속에서 용서는 고귀한 것이며 사회부적응자를 아무런 용서의 절차없이 가스실로 보낸다는 것은 법의 숭고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샴이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기존의 가치관을 바꿔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그는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진정 당신들이 원하는 것인가?』라고 물어 독자들 스스로 중요한 판단의 기로에 직면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체임버」는 흥미위주의 이전 작품들처럼 해변가에 누워 쉽게 읽을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쉽게 다루기 힘든 소재를 극적으로 풀어 독자에게 판단을 유보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어른 공경/서경보(굄돌)

    명분 S대학의 젊은 교수가 이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을 왕래하는 시내버스에도 「노인석」이라는 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버스가 서자마자 학생들이 뒷좌석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목격할때마다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러나 그 교수가 이왕 앉으려면 앞에서부터 차례로 앉았다가 노약자가 차에 오르면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야 함에도 뒷자리에 앉으면 자리를 양보치 않아도 된다는 얄팍하고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버스에 오르자마자 뒷자리로 우르르 달려가는 것이라는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교수뿐만 아니라 나를 찾는 나이 많은 신도들 상당수도 요즘 젊은세대들의 어른 공경할줄 모르는 세태를 걱정스러워 한다.어떤 50대 신도는 자신들이 자랄 때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께서 부르시면 무조건 「예」하고 달려갔었는데 요즘에는 심지어 우리아이까지도 이름을 부르면 냉큼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왜요?」하고 반문부터 해 분통이 터진다는 푸념이다. 그러나 하나같이 「그러면 안된다」고 일깨워준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대답이 없다.모두가 행여 어떤 봉변이라도 당할지 몰라 못본체 했다는 표정이다. 나는 젊은세대들에게 주문하고 싶다.기성세대들이 젊은세대에 대하여 어른대접을 하려하지 않는다는 지적과,너무 이기적이고 약삭빠르다는 지적,그리고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젊은세대에 대한 불신감 등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젊은세대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고 기성세대들의 불신감을 스스로 불식하도록 언행이나 몸가짐을 좀더 지성인답게 바로잡아가야 하겠기에 말이다.어른 공경,즉 효는 인간됨의 지름길이다.불경에 「무릇 인간이 신을 섬긴다 해도 부모에 효도함만 못하고 부모야말로 최고의 신」이라는 가르침이 있다.어른공경은 인간다움을 향한 엄숙한 의식의 하나이다.
  • 탁로소(외언내언)

    아침 9시 지나 간호조무사를 태운 봉고차가 동네를 돈다. 집앞에는 벌써부터 옷갈아 입고 부축해나선 노인들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한참 있어야 겨우겨우 대답하는 노인을 안에 들어가 부축해 나오기도 한다. 2개동을 돌아 10여명 노인을 모시고 시설에 들어서면 11시가 된다. 시설에는 할머니가 데려다 준 할아버지,며느리가 모셔온 노인들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모두 함께 몸풀고 맨손체조부터 한다. 물리치료를 받고 좀 앉았다 보면 12시 점심시간이다. 노인들이 가장 즐거워하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점심은 밥 국 생선이나 쇠고기 나물 김치등 1식3찬. 식후는 낮잠시간이다. 2시부터는 요일별로 짜여진 계획표에 따라 놀이를 하거나 무엇을 만들기도 하고 노래도 배우고 흘러간 영화도 본다. 이발 목욕 치아치료 수지침도 맞고 내과 관절염진료 받을 때도 있다. 3,4시쯤 과일 떡 빵같은 간식 들고 잠시 쉬며 이야기 하다보면 하루가 간다. 다시 집에 모시느라 봉고차가 집집을 돈다. 서울에 세곳, 부산 대구 광주에 한곳씩 전국에 6개소 뿐인 탁로소 또는데이케어센터로 부르고 있는 노인들 낮보호시설의 하루다. 탁로소 수요는 어린이집으로 불리는 탁아소 못지않다. 30,40대 취업주부들은 노인들 맡길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행정당국에 호소한 지 오래다. 건강한 노인들은 경로당이나 노인학교도 다니고 동네노인과 함께 나들이할 수있어 자손들이 돈만 대주면 되지만 허약하고 신체 정신 장애가 있는 노인들은 집에 홀로 있게 할수 없다. 지금 시범사업 하는 곳은 저소득 노인들을 대상으로 약간의 시비 지원과 후원자들이 모아주는 돈,자원봉사자들의 협조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는 노인복지법 개정으로 28일이후 민간단체나 개인도 이런 사업 할 수 있게 길을 열어 놓았다.문제는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업이라는 데 있다.정부가 최소한의 운영비 지원하고 연금기금에서 장기 저리 융자하는 대대적인 유인 지원시책이 뒤따라야 겠다.
  • 김성순 서울송파구청장(저자와의 대화)

    ◎노인문제 4번째 책 「생활 노년학」 출간/“노년을 아름답게 보내는 방법 담았어요”/여생·노후등 부정적인 인식부터 버릴때/노년복지위한 예산증액·제도수립 절실/근린공원 관리 노인정에 맡겨 큰 성과 거두기도 김성순 서울 송파구청장이 최근 노인문제를 다룬 책「생활 노년학」을 냈다(운산문화 간). 이 책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김구청장이 노인문제에 대해 이번에 4번째 책을 낼 만큼 전문가인데다,자신의 이론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노인」과 「노연」이라는 용어의 차이점부터 설명했다. 『「노인」은 사람이 늙어진 상태를 뜻하는 정태적 개념인데 비해「노년」은 늙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보는 동태적 개념입니다.외국에서는 「제 3세대층」 혹은 「선배시민」등의 표현을 씁니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노년문제를 적극 해결하려면 덤으로 산다는 식의「여생」「노후」등 부정적인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고 김구청장은 강조했다. 『노년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이제는국가와 사회,그리고 노년층 스스로가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국가는 노년복지를 위한 예산증액및 제도수립에 힘써야 하며,청 장년층은 「자신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노년층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노년층도 대접받기만을 원할 것이 아니라 사회변화에 적응하는 노력과 함께 생활에 모범을 보임으로써 「존경받는 세대」 「필요한 세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주장은 막상 행정일선에서 어떻게 구체화하고 있을까. 김구청장은 지난해 부임하자 곧 송파구내 근린공원 69곳의 관리비를 인근 노인정에 주고 관리를 맡겼다.이후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새벽부터 청소를 하고 공원에 온 어린이들을 돌봐주는 등 애정어린 손길을 뻗치자 시민들의 호응도 뒤따라 공원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다는 것. 60세이상으로 구성된 「실버악단」 「실버합창단」을 운영하거나,할머니들에게 가곡을 가르치는 「할머니가곡반」을 연 것도 그의 작품이다. 올해 55세인 김구청장은 『지금까지 노년복지는「노인보호」차원이었지만 앞으로는 「노년계발」이 돼야 한다』면서 『사회가 노년층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진정한 노년복지』라고 역설했다. 행정고시 출신인 김구청장은 70년대 중반 서울시 사회과장으로 있을 때 노년문제에 관심을 갖게돼 공부를 계속했으며 당시로선 드물게 「노인복지 연구」로 박사학위를 땄다.이후 79년 노년학회 설립에 앞장선 것을 비롯,81년부터 4∼5년 간격으로 「노인복지론」 「고령화사회와 노동」 「고령화사회와 복지행정」등 3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그는 『그동안 낸 책들이 학술적인 내용이어서 이번에는 비교적 쉽게 쓰려고 애썼다』고 밝히고 노년층과,노인대학등의 지도자,50대의 「예비노년층」이 읽어주기를 바랐다. 「생활 노년학」은 ▲고령화사회를 살아가는 지혜 ▲노년을 아름답게 보내는 방법 ▲건강한 노년을 지키는 생활 ▲바람직한 노인상과 생활환경등을 주로 다뤘으며 노년층을 위한 금융상품·취업알선기관 소개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보도 실었다.
  • 이매방 춤인생 60년 결산무대/13∼18일 서울·부산·마산서 공연

    ◎살풀이·입춤·보렴승무 진수 선보여/김진홍·국수호·송수남씨 우정출연 전통무용가 우봉 이매방씨(69)가 자신의 춤인생 60년을 총결산하는 기념 특별공연을 갖는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97호 살풀이춤 기능보유자인 이씨는 13∼14일 하오7시30분 국립극장 대극장,16일 하오7시 부산문화회관 대강당,18일 하오7시 마산실내체육관에서 남도예술과 전통민속무용의 진수를 선보인다.특히 이번 무대는 우봉 무용의 이수·전수자등 50여명이 출연하는 기념비적인 규모로 꾸며져 우리 전통춤의 맥락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공연에서 이씨는 승무 입춤 살풀이춤 보령승무등을 직접 추어보이며 김진홍 송수남 채상묵 국수호 임이조 진유림 오은희 이노연씨등 이매방 승무 전·이수자 22명과 강선영 태평무이수자들이 우정출연해 장고춤 흥춤 검무 태평무등을 펼친다. 세살때부터 경대앞에서 누님치마를 걸치고 춤을 췄다는 이씨는 일곱살때 고향인 목포 권번에서 입춤(일명 허튼춤)을 배웠고 집안 할아버지뻘인 명인이대조씨로부터 승무를,이창조씨에게서는 검무를 익힌 타고난 춤꾼.특히 그의 승무는 이대조씨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능주 화순의 박영구씨에게 배운 북(법고:천수북)가락이 녹아들어 있어 이매방 승무만의 독특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이씨는 승무의 또다른 거봉이었던 인간문화재 한영숙씨가 세상을 뜬뒤 외롭게 승무의 맥을 잇고있다.한영숙류의 경기승무가 궁중무용의 영향을 받아 우아하고 세련돼 있다면 이매방류의 호남승무는 향토적이면서도 질박한 멋이 특징이다. 이번 공연의 또하나의 하이라이트는 살풀이춤.살은 생명을 위협하는 독하고 모진 기운으로 이러한 요기를 풀어 없애주는 것이 살풀이춤이다.호남기방 계열의 검무에도 능한 이매방 선생의 살풀이춤은 무엇보다 한과 신명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단아한 멋이 돋보인다.선생은 『살풀이는 연륜과 숙달이 필요하지…,추면 출수록 맛이나고 곰삭아야 제격인 법이야』라고 말한다.
  • 한국인의 대표적얼굴 어떤 모습일까

    ◎국립민속박물관,탈·장승 등 2백여점 28일부터 전시/양반·탐관오리·머슴 등 모습 한자리에/현재 우리 얼굴 컴퓨터그래픽 합성도 계획 한국인의 대표적인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단군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등 역사적인 인물과 풍속화 민화 도기와 자기 혹은 목각에 등장하는 갖가지 표정의 얼굴들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전시된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이종철)은 서울 정도 6백년과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탈 장승 민화 석상등의 얼굴 2백여점을 모아 오는 28일 부터 8월 29일까지 두 달 동안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장에 전시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온양·제주·광주·대구·부여박물관과 대학및 개인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과 개인소장품등을 모아 ▲흙으로 빚은 얼굴 ▲불심으로 빚은 얼굴 ▲회화속의 얼굴 ▲탈과 장승 동자의 얼굴등으로 분류 작업을 하고있다. ▲흙으로 빚은 얼굴에는 토우와 토용또는 명기에 그려진 얼굴과 기와 속의 얼굴들이 전시되고 ▲불심으로 빚은 얼굴은 불상과 사천왕의 모습 탱화속의 얼굴등이 모아진다. 또 ▲회화속의 얼굴에는 모자상·형제상·부부상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때 일본의 화백들이 그린 우리 외교사절의 표정과 모습등이 종합적으로 공개된다. 또 양반과 탐관오리의 탐욕스러운 얼굴과 머슴과 대장장이의 고달픈 얼굴 기생과 주모의 요염한 얼굴과 우물가에서 젖을 물리는 시골 아낙네의 순박한 얼굴 등도 한자리에 모인다. 탈과 장승 동자의 얼굴에서는 마을 입구나 길가 혹은 사찰 입구등에 세워져있는 도깨비나 귀신 같은 험상궂은 얼굴과 선비나 장군의 모습과 천진 난만한 어린이들의 모습등 우리 민중과 친숙한 얼굴들이 선보인다. 전시회장 입구에는 단군 할아버지가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며 출구에는 이조 시대의 모자상에서 어린이를 안고있는 어머니가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도록 꾸몄다. 국립민속박물관측은 이곳을 찾는 각급학교 학생들에게 문학작품속에 묘사된 성춘향과 이몽룡 변사또 또 흥부와 놀부등의 얼굴을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대로 그려 국민의 의식속에그들의 모습이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가도 연구할 방침이다. 박물관축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현대 우리나라 남녀 인물의 평균 얼굴을 10대에서 70대까지 합성해서 영상 처리할 계획도 갖고 있다.
  • 정 부총리/지역경제에 훈풍 불어넣기/3박4일 지방나들이 이모저모

    ◎공단 등 돌며 산업현장 실태파악/농어촌 방문 진지한 「UR대화」/“후속조치 기대하라” 의욕 고취 지난 11일부터 시작된 정재석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지방 나들이가 14일 끝났다.3박4일씩이나 걸린 경제 부총리의 지방방문은 처음이다.광양,승주,창원,부산 등 영·호남의 남해안 일대 산업체와 농·어촌을 둘러보며 여러 차례 대화를 가졌다.취임 초 『경제에 훈풍을 지피겠다』는 의욕을 보인 경제총수의 현장시찰은 지역경제에도 따뜻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과거 부흥부 시절부터 경제정책의 입안에 참여한 정부총리는 「산업의 쌀」인 철강을 생산하는 포철의 광양제철소를 둘러보며 감회에 젖는 듯 했다.포항의 개펄에서 맨 손으로 출범한 포철이 광양제철소까지 짓고 세계 2위의 철강회사로 부상,우리나라가 세계 6위의 철강대국이 된 사실에 60년대 개발경제를 주도했던 그는 남다른 감회를 감추지 않았다. 호남과 영남을 관장하는 서남 및 동남관리공단을 차례로 방문,석유화학과 중소 제조업체의 현장의 소리를 듣고 서울에서는 알기 어려운 업종별 동향을 파악했다.구조개선 대상사업은 무엇이며,노사문제나 자동화 실태는 어느 정도인지를 꼼꼼히 챙겼다.그는 『경기회복의 기운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와 닿는다』고 설명했다. 가장 큰 수확은 농어촌의 여론청취로 보인다.6월 말까지 확정할 농어촌 발전대책 수립을 앞두고 우루과이 라운드(UR) 타결에 따른 농어민의 소리를 생생하게 들은 것이다.그러나 농촌 출신인 그는 어촌의 현안에 무지를 시인했다.너무 전문적이라 쉽사리 답변하지 못함을 사과했다. UR에 대한 농어민들의 반발을 생각하면 경제총수한테 과격한 행동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그런데 시골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정부총리와 진솔한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농어민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그러나 부산의 분위기는 달랐다.이 곳의 경제가 활기를 잃은 데다,부산에 승용차 공장을 세우려는 삼성의 사업계획을 불허하려는 정부의 방침이 맞물렸기 때문이다.14일의 부산 상공인과의 대화는 온통 「삼성차」에 집중됐다.가는 곳마다 쏟아지는 예산지원 요청에 혼이 났지만 부산에서는 산업정책의 최대 현안인 삼성의 승용차 허용문제로 난처한 처지가 됐다. 그래서 삼성차 문제를 포함해 부산경제 활성화를 위한 종합대책을 세우겠다고 밝혔다.이를 위해 기획원 과장을 부산시청에 파견,정책조정 업무를 맡기겠다고 덧붙였다.부산지역에 대한 특별배려 방침인 셈이다. 부산은 김영삼대통령의 정치기반이라고 해서 영남권에서도 유신 이래 소외당한 면이 없지 않다.더욱이 호황을 누렸던 목재산업(70년대)과 신발산업(80년대)이 퇴조하며 부산경제는 지역적으로 전국에서 최악의 상태이다. 정부총리가 부산 종합대책을 세우겠다고 한 것은 이런 문제로 행동반경에 제약을 받을 수 있는 청와대의 입지를 넓혀주고 민감한 삼성승용차 문제를 피해가려는 노련함으로 보인다.한 관계자는 『정부총리가 현장방문에서 자신감을 더욱 얻은 것 같다』며 후속조치를 지켜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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