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코리아타운(세계속 한인촌 탐방:1)
◎67년 10여명서 출발… 40만명의 「나성구」로.1만5천업소 성업… 한때 한·흑 갈등도 극복
90여년의 길지 않은 한국 이민사지만 이제 한국인은 지구촌 구석구석에 널리 퍼져 살고 있다.세계 곳곳의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한인촌을 몇회에 나누어 소개한다.
「함흥냉면」「숯불구이」「흑염소탕」「만물상」「방아간」「기미 주근깨 없앱니다」….서울거리의 간판이 아니다.로스앤젤레스(LA)코리아타운에서 만날 수 있는 낯익은 한글 간판들이다.
코리아타운에 들어서면 이때문에 누구나 마치 서울 동대문부근 어느 한 곳에 들어선 느낌을 받는다.이 곳에서는 보신탕만 빼고 뭐든지 서울에서와 똑같이 먹고 사며 지낼 수 있다.1년 365일 영어한마디 사용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도 있다.
흔히 일컫는 LA는 행정구역상으로 하나의 카운티안에 인구 360만명의 LA시를 비롯,고작 152명의 주민뿐인 버넌시티에 이르기까지 모두 88개의 시티(City)로 구성돼 있다.인근 오렌지카운티를 포함할때 대략 40만명의 한국인이 넓은 의미의 LA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그러나 불법체류자를 합하면 50만명이 넘는 것으로 LA총영사관측은 추정하고 있다.
○곳곳에 한글 간판
미국 이민국 연감에 따르면 93∼94회계연도에 미국에 들어온 비이민 한국인방문객의 수가 39만9천명.이 가운데 27.9%인 12만4천9백44명이 LA를 통해 미국에 들어온 것으로 나타났다.결국 한해 평균 60만명이상의 한국인이 LA지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니 「서울시 나성구」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미주지역 한인사회에서 필수책자인 「한인업소 주소록」을 토대로 한 자료는 LA지역이 얼마나 한국화돼 있는가를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하와이와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 서부지역의 한국인업소 1만8천4백72개가운데 무려 82.7%인 1만5천1백60개 업소가 LA인근지역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이민가정과 유학생,상사주재원 할 것없이 LA지역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서울」이 바로 「코리아타운」이다.한인주민만 10여만명,업소가 2천5백개나 몰려 있는 곳이다.
LA국제공항에서 북동쪽으로 20여㎞거리에 위치한 「코리아타운」은 서울로 치면 종로거리처럼 LA의 각급 행정기관과 비즈니스센터가 몰려 있는 다운타운에 바짝 붙어 있다.세계영화산업의 중심지인 할리우드는 코리아타운에서 승용차로 10분남짓 거리다.미국 서부 최대의 도시라는 LA에서도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67년 LA에 정착,교민1세의 원조로서 「김방아 할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김명한옹(91)은 『내가 지금의 코리아타운에서 남쪽으로 10블록 떨어진 제퍼슨가에 처음 방앗간을 차렸을 때만해도 한국사람은 10명정도 밖에 살지 않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그럴진대 이민사가 길지 않은 한인들이 어떻게 이 노른자위 땅에 「작은 한국」을 세우게 됐을까.
60년대말부터 LA다운타운 인근지역은 사실상 슬럼화돼가고 있었다.남부지역에서 올라온 흑인들과 국경을 넘어온 히스패닉(라틴계 중남미인)들이 LA남부지역부터 자리잡기 시작,서서히 다운타운쪽으로 인구이동을 했다고 한다.결국 기존의 백인들이 하나둘 중심가를 떠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갓 이민길에 오른 한인들은 고국에서 가져온돈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다.외환관리법이 엄하던 시절이라 많이 가져올 수도 없었다.그러다보니 생활기반을 잡기에는 백인들이 나가버려 땅값이 곤두박질치고 있던 다운타운 인근지역이 안성맞춤이었다.70년무렵부터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찾아들기 시작,당시 1스퀘어피트(약 0.1㎡)당 4달러씩 하던 지금의 올림픽대로를 중심으로 하나둘 한인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버몬트」,서쪽으로 「웨스턴애브뉴」,남쪽으로 「올림픽대로」,북쪽으로 「8가(가)」에 이르는 반경 5㎞정도의 구획을 대략적인 경계로 코리아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72년12월.9명의 한인상인들이 「코리아타운번영회」(현 코리아타운교민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이 지역의 상가에 한글간판달기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다.그러나 당시만해도 한인상점의 수가 20개도 채 되지 않아 한인들을 상대로 한 한글간판달기작업은 금세 끝나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미국인들이 주인인 업소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로 간판을 달아야 한국사람들이 당신네 가게가 뭘 파는지 알고 돈을 쓸 것아니냐고 설득,두달동안 61개 업소에 한글간판을 달아주었다』고 초대 번영회장 김진형씨(63·코리아타운한인회 명예회장)는 회고한다.
○영어학원도 등장
「문방구」「이발소」「식품점」같은 한글간판들이 거리에 나붙자 자연스럽게 한인타운이 이뤄지기 시작한 셈이다.교포라면 너도나도 코리아타운에 상점을 빌렸다.웃돈을 얹어주면서 세를 얻어내는 한인들에 밀려 백인들의 상가는 순식간에 빠져나갔다.교민수가 3만명을 넘어서면서 한국종합의료원이 들어섰고,영어학원까지 생겨 74년9월10일에는 첫 코리안퍼레이드행사까지 펼치게 됐다.
70년대 초에 이어 다시 붐을 이룬 79∼81년 무렵의 이민인구를 흡수하면서 한인상가가 급격히 팽창,81년8월 캘리포니아주정부가 「코리아타운」경계구역을 지정하고 그 명칭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82년2월에는 이 지역을 지나는 산타모니카 프리웨이 상에 「코리아타운」 안내표지판이 부착됐다.행정구역상의 명칭은 아니지만 미국 땅위에서 공식적으로는 유일한 한국인 밀집지역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그러나 「코리아타운」은 90년대들어 불어닥친 캘리포니아지역의 불경기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최근 수년간 최악의 분위기에 빠져있는 모습이다.특히 92년 4.29 흑인폭동으로 2천여개의 한인업소가 피해를 당한데다 지난해 노스리지 지진으로 외래관광객마저 격감,만나는 한인들마다 『장사가 안된다』고 울상이다.
잇따라 폭동과 지진이후 한인들마저 「코리아타운」에서 주거지를 옮겨 남쪽의 오렌지카운티나 학군과 주거환경이 좋은 LA동부의 외곽지역으로 이동,새로운 한인촌을 형성하기 시작함으로써 「코리아타운」의 경제력은 크게 위축되고 있다.
○80년대 최대 호황
대로변의 상가 뒤안에 밀집된 낡은 싸구려 임대아파트들은 구매력이 약한 노인층과 흑인 빈민층,히스패닉들의 거처로 변해 어느덧 LA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가운데 하나로 소문나있을 정도다.최근에는 한국에서 건너온 조직폭력배들이 기존의 갱들과 세력다툼을 벌이느라 총질을 해대기 일쑤이고 돈많은 조기유학생들이 흥청망청거리는 유흥행각을 펼쳐 한인사회의 골칫거리가 된지 오래다.
주류잡화상인 리커스토어상인들의 모임인 가주한미식품상협회 윤희륜회장(53·LA한인회이사)은 『코리아타운이 너무 넓어져 관리하기가 어려워졌다』며 『상징적인 건물양식을 만들어 코리아타운의 역사는 지키되 한인들도 보다 폭넓게 각지로 분산,발전해나갈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LA코리아타운은 4반세기의 역사를 쌓는 시점에서 변신의 새 단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김진형 코리아타운한인회 명예회장/한인동포사회 정신적 고향/“22년째 코리안 페스티벌에 보람”
『코리아타운은 미국이민사회의 정신적인 고향입니다』
코리아타운 형성을 처음 제안했던 코리아타운한인회 김진형 명예회장(63)은 「코리아타운」의 산 증인이다.관광공사 일본지사에 근무를 마치고 71년 유학생비자로 LA에 발을 디뎠다가 그대로 눌러앉게 됐다는 김회장은 이듬해 한인상인 8명을 발기인으로 규합,「코리아타운 번영회」란 단체를 만들고 현재의 코리아타운 조성작업을 벌인 산파역.
탁월한 서예솜씨를 지닌 김회장은 한글간판달기 운동으로 코리아타운 형성작업에 착수하면서 직접 간판글씨를 써주는등 초기 LA한인타운 건립에 주도적인 몫을 맡았었다.
『LA를 비롯한 남가주 경기는 코리아타운에서 맨먼저 느낄수 있지요.한인봉제업체들을 거친 의류가 백인을 비롯한 미국인들에게 팔리고 그렇게 해서 들어온 달러는 바로 코리아타운에서 쓰여지니까요』
지난 10월까지 22회째 이어져 내려온 LA코리안페스티벌의 창시자이기도한 김회장은 『코리아타운이 제 모습을 갖추면서 미국 주류사회에서 한인들의 위상도 높아진 셈』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LA시정부의 경찰청이 관할하는 인허가심사커미셔너를 맡고 있기도한 김회장은 코리아타운이 최근 침체돼 있는게 사실이라며 안타까워한다.그는 『범죄퇴치와 난립해 있는 한인단체들의 단합,그리고 차이나타운이나 리틀도쿄처럼 재개발을 거쳐 보다 현대적인 상가건물을 새로 지어야한다』고 코리아타운의 방향을 제시했다.
『고국의 동포들이 코리아타운을 이민자들의 거리라고만 여기지 말고 이웃동네처럼 성원과 관심을 보내주셔야 이곳 LA이민사회가 함께 성장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