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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사라져야 할 체벌

    두 아이를 키우면서 ‘사랑의 매’를 들었다.때린 다음 우는 아이를 꼭 껴안아 주거나 함께 울면서도 체벌의 교육적 효과를 믿었다. 그러나 둘째 아이가 여섯살이 되던 무렵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박종철군 사망사건 때문이었다.“‘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말로 공식적으로 설명된 한 젊음의 죽음이 혹독한 고문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내가 휘두르는 가정내의 작은 폭력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랑의 매’도 폭력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의 폭력문화를 용인하는 기본 터전을 제공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매를 맞고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감수하기 쉽다.꽃다운 젊음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무지막지한 폭력이 더이상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녀 교육을 위한 ‘사랑의 매’도 없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따라서 둘째 아이는 큰 아이에 비해 엄마의 매로부터 일찍 졸업하게 됐다.물론 여섯살 난 개구쟁이 아들은 엄마의 ‘거창한 결단’을 종종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그 결심을 지켜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이야기를 비슷한 시절 한 원로음악평론가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그 음악평론가에게는 미국에서 자란 손자와 한국에서 자란 손자가 있었다.어느날 할아버지 집에 찾아 온 두 손자가 말다툼을 벌였다.한국 손자는 몇마디 말이 오간 다음 바로 손찌검에 들어갔지만 미국 손자는 상대방으로부터계속 맞으면서도 함깨 때릴 생각을 하지 않고 말로 대항했다.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대화보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을어린 손자까지 지니고 있음에 충격을 받았다. 교육부가 ‘교육적 체벌’은 허용하기로 했다 한다.교육상 불가피한 경우의 체벌은 학생·교사·학부모 등의 합의 아래 사회통념상 합당한 범위내에서규정을 만들어 용인한다는 것이다.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의 체벌 전면금지조치 이후 학생들의 “교권에 대한 부당한 저항”이 잇따라 사회문제가 된 탓에나온 대책이다.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체벌 허용이 무한정 이어져서는 안될것이다.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씻어내기 위해서 체벌은 궁극적으로 사라져야한다.비교적 매를 오래 맞았던 큰 아이는 순종적이고 모범생인 데 비해 매를 일찍 졸업했던 작은 아이는 많이 따지고 럭비공처럼 튀는 생각을 한다.21세기를 살아가는 데는 큰 아이보다 작은 아이가 더 유리할 것이라는 점에서도체벌은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 굄돌-이유있는 반란,‘황혼 이혼’

    최근 ‘황혼 이혼’을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뜨겁다.찬반 논리를 떠나 여성들이 뒤늦게 이혼을 감행하는 ‘이유있는’ 반란에 대해 짚어볼 부분이 있다고 본다. 10년전 가족법이 개정되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편이 부당하게대우했다고 해서 이혼을 제기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이혼당할 권리’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혼시 자녀양육권은 무조건 남편 쪽에빼앗겨야 했고 재산분할 청구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잘잘못을 떠나 이혼은 거의 빈손으로 쫓겨나는 것을 의미했다.이혼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심하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아주 어려웠던 상황에서 이혼은 효과적으로 억제되어 왔다. 이혼당할 권리만 있었던 여성들의 인권 상황은 개정 가족법으로 많이 호전된 상태다.이런 법적 도움을 받아 여성들의 자기 권리에 대한 자각과 주장이 급격히 활성화했고 이를 이혼 증가의 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이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세태가 변했다.그러나 여성의 이혼 제기가 늘고 있는 것은 여성의 인권이 부부 사이에 여전히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칠순 넘은 할머니들의 황혼이혼 소송이 이를 잘 말해준다.이 할머니들은 ‘내일 죽더라도 오늘 이혼하고 싶다“고 말한다.이에 대해 법은 “(그래도)해로하시오”라고 답한다.75세의 할머니는 유독 아내인 자신에게만 평생 인색하면서 자신을 절도죄로 고소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의처증까지 보였던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냈었다.1심은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으나 2심 재판부는 이를 뒤집었다. 사법부가 할아버지의 할머니에 대한 부당대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52년전혼인 당시의 가치기준을 들어 이혼하지 말고 그대로 참고 살라고 판결한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여성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들이 존재하는 한 여성의 이혼 제기는 사법부의 기각 판결로도 막을 수 없는 강한 물결이 될 것이다. [박혜숙 '이프' 매니장디렉터]
  • ‘황혼 이혼’ 사회논란 본격화

    “남은 생이나마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25일 한국 여성의 전화 연합(회장 신혜수)주최로 열린 ‘노인여성 인권’공청회에 참석한 이시형(70) 김창자(76)할머니의 한맺힌 절규다.두사람은 고령에도 불구,40여년동안 남편의 폭력과 폭언에 시달려오다 이혼소송을 냈다.그러나 이들은 법원으로부터 ‘해로하시오’라는 판결을 받고 항소를 제기하거나 준비하고 있어 할머니가 할아버지에 대해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이른바‘황혼이혼’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본격화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시형 할머니의 변론을 맡은 하승수변호사는 “젊은층 여성이 만약 이와비슷한 문제로 이혼소송을 냈다면 그 결과는 달랐을지 모른다”며 “여성노인의 이혼청구를 인권회복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노인이 고령의 남성노인에게 이혼을 청구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이번 판결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여성계는 “인간답게 살권리는 젊고 튼튼하고 힘있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소망”이라며 여성 노인의 이혼 청구에 대해보편적 시각 적용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황혼이혼’의 특징을 살펴보면 좀 더 명확히 이해된다.‘황혼이혼’건수의 80%가 여성들에 의해 제기되고 대부분 자식이 출가한 후에 이루어진다.그리고 이혼에 대해 재고할 여지가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평생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참고 살아온 여성 노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인 셈이다.일부종사(一夫從事)를 부녀자가 지켜야 할 덕목으로 여기며 살아온 이들이 자식에 대한 의무를 끝내고 견딜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고 생각한 순간 택한 길로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들에게 새인생은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지 좋은 사람을만나 다시 가정을 꾸려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남은 인생이 길지 않기 때문에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최후의 울부짖음이다. 한국 노인의 전화 서혜경 상임이사는 “노부부 관계에 대한 상담 내용을 보면 배우자의 괴팍한 성격,경제적인 무능력,외도,의처,의부증,성격차이,폭행등으로 인한 갈등이나 이혼을 호소한 경우가 늘고 있다”며 “노후라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욕구가 증가하는 한 ‘황혼이혼’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서이사는 “노부부의 파경은 호적상의 이혼보다 별거 등 파경사실이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 더 큰 문제”라며 “노후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젊을 때부터 부부가 서로 아끼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등 부부관계의기반을 단단히 다져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의 전화연합 백성화 인권사회부장은 “여성노인들의 인권문제에 대한공론화는 더 이상 늦출수 없다”며 “이번 사례를 계기로 피해 노인에 대한법률지원을 하는 한편 이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다각적으로 연구,여론을 환기시키고 정부차원의 노인복지정책 수립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姜宣任 sunnyk@
  • 오늘의 눈-‘통일총리’의 초라한 사무실

    20세기 유럽역사의 획기적 업적인 독일통일을 이룩한 헬무트 콜 전 총리가정계은퇴 100여일만에 연방하원 의원회관 내에 조그만 사무실을 냈다.16년간 장기집권한 최장수 총리였던 콜은 작년 9월 총선에서 패한 후 25년간 유지해오던 당수직도 내놓은채 권력의 뒷무대로 물러났었다. 그동안‘유럽명예시민상’을 받기 위해 빈에서 개최된 EU정상회의 참석과공식적 국회출석 외엔 공개적 외출을 삼가해온 그는 16년간 총리재임기간 중 단 한건의 비리에도 연루되지 않는 청렴도를 자랑해왔으며 또 단 한차례의스캔들에도 휘말림없는 깨끗한 몸가짐의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통일총리’‘유럽의 거인’등 숱한 영예의 호칭들을 역사에 묻고 이제 평범한 한 의원 신분으로 돌아온 그가 지난주 처음으로 초라한(?) 의원사무실을 공개했을 때 초청에 응했던 기자들은 그의 여유스러운 모습을 보며 ‘역시 돈에 깨끗했던 콜 총리답다’는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전직 총리의 의원직 유지에 대해 정적들과 당내 일부 젊은 의원들이 “콜이라는 나무가 너무큰 그늘을 드리운다”며 부담스러워한다는 이야기에 대해그는 “일상생활에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관계는 편안한 법”이라며 오히려젊은 의원들이 거리낌없이 자기를 찾아주고 있다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유럽통합에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던 그가 자크 산터 EU집행위원장의 후임으로 추천받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또 헤어초크 연방대통령의 후임으로도 거론되는 등 여전히 그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하지만 막상 콜 자신은 이 모든 가능성에 완강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유유자적하며 벗들과도 자유롭게 만나는 요즘 생활을 즐기고 있다”며 권력에의 집념을 훌훌 털어버린 홀가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국내외로부터 매일자신에게 쏟아져 오는 우편물을 정리하고 걸려오는 전화들을 받기에만도 바쁘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던 그의 활동영역이 당분간은 의원회관 사무실로 줄어들겠지만 그의 미래가 또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직과 양심을 보여준 최고지도자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은 변함이있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가 보여주고있다는 사실이다.
  • ‘99문화를 여는 사람-국악 소리꾼 김용우씨

    ‘재미없다’‘부르기 힘들다’‘낯설다’‘선택의 폭이 좁다’.국악하면으레 떠올릴 수 있는 지적들이다.그러나 소리꾼 김용우(32)의 우리 노래 소리를 한번만 들어보면 국악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들이 말갛게 사라진다. 듣는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낄수 있도록 편곡했으나 민요의 특징인 시김새(꾸밈음)와 기본가락을 유지,누가 뭐래도 우리 노래다.특히 재즈,클래식,아카펠라와 어우러져 무대에 울려퍼지는 그의 소리를 들으면 우리 노래도 이렇게 재미있게 부를수 있구나하고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또 슬프고 구성진 가락도 그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면 밝고 힘차게 변한다.이는 김씨가 수천수백년 동안 이어져 온 우리 소리들을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끼고 좋아하게할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나온 열매다. “전통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악도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야 합니다.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 역시 다른 장르의 음악을 들으면서는 왜 사람들이그 음악을 좋아하는 지를 분석하고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그래야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경쟁할 수는 것이지요.” 김씨의 우리 소리 경력은 국악과의 인연에 비하면 짧다.피리 부르는 것이좋아서 국악고에 진학했고 대학에서도 피리를 전공했다.소리를 시작한 것은대학교 1학년 때로 선비들이 불렀던 가사(歌詞)를 먼저 시작했다.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 41호 ‘12가사’ 이수자가 됐다.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소리를찾아다닌 것은 91년부터. “민요채집을 하면서 한번 만났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다시 만날수 없는 경우가 많았었요.그분들의 삶과 함께 우리 소리들이 사라져간다는 절박함이 소리찾기에 전념하게 한 것 같습니다” 3년여 동안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300여곡의 민요를 채보(採譜)했다.그러면서 오복녀 박병천 조공례씨 등 인간문화재를 찾아다니며 서도소리,진도씻김굿,남도소리를 사사,음악적 기량을 넓혔다.그가 이처럼 다양하게 소리를 할수 있었던 것은 가사를 부르면서 닦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소화할 수있는 목구성(목이 우리가락을 하기에 맞게 단련된 상태를 말함)을 갖게되었기 때문이다.국악실내악단 ‘슬기둥’에서 활동하다 지난 97년 말독립했다. 오는 3월 김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석사과정에 입학,다른 장르와 활발한 교류를 갖고 새로운 음악세계를 모색하는 한편 상반기 중 우리의현실을 담은 앨범을 낼 계획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젊은 소리꾼 김용우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姜宣任 sunnyk@
  • 노인들 ‘문화재 지킴이’ 위촉

    동작구(구청장 金禹仲)는 노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문화재 관리의 효율성도 높이자는 취지에서 덕망있고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내고장 문화재 지킴이’로 위촉,문화재 관리 및 안내를 맡기기로 했다.이에 따라 서울시 유형문화재 8호인 사육신묘 등 6개 문화재의 관리를 18명의 노인이 맡아 관리하고 안내한다.曺德鉉 hyoun@
  • 대한광장-70대 할머니의 이혼청구

    얼마전 신문을 펼치니 ‘75세 할머니 이혼청구 기각’ 기사가 눈에 띄었다.기사의 내용인즉,75세 할머니가 80대 할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 때문에 더이상은 못 살겠다며 이혼소송을 냈으나,고등법원이 원심을 깨고 소송을 기각했다는 것이다. 문득 유학시절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한국 유학생이 50달러에 캐딜락을 인수받았다는 만화같은 이야기이다.당시 그 유학생이 중고차를 한 대 사려고 신문광고를 열심히 뒤적이고 있는데 ‘캐딜락 50달러에 팝니다’라는 문구가 있어 눈이 번쩍 뜨이더란다.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광고에 적힌주소로 찾아가보니,할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진짜 50달러만 내고 캐딜락을가져가라더란다. 사연인즉,캐딜락을 몰던 할아버지가 얼마전 눈을 감으며 할머니에게 유언을 남기길 “여보,내게는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가 있다오.그 친구에게캐딜락을 주시오”하더라는 것이다.순간 하늘이 노래졌으나 곧 정신을 가다듬은 할머니가 “당신 여자친구에게 캐딜락을 팔아서 현금으로 줘도 되겠수?”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란다.해서 캐딜락을 50달러에 팔게되었다는 것이다.할머니로서는 남편의 유언을 거스르지 않고도 자신을 배신(?)한 데 대해서는 멋진 복수를 한 셈이다. 이쯤 되니 우리의 할머니 사연도 궁금해진다.“오죽했으면 75세에 이혼소송까지 냈을까” 싶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참고 살아왔는데 75세에 이혼이라니 남부끄럽지 않을까” 싶기도 한 것이 궁금증을 더해간다.한데 할머니의속깊은 사연보다 정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혼청구를 기각한 재판부의 변이다.설혹 남편이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워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했다하더라도 이는 결혼 당시의 혼인에 대한 가치기준과 동떨어지지 않기에 이혼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각의 이유이다. 이혼청구 기각의 변으로는 상당히 옹색하다는 생각이 든다.만일 재판부의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똑같은 이유로 “이혼을 가족해체로 보기보다 불행한 결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는 오늘날의 가치기준을 할머니에게적용할만도 하다.할아버지가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이제라도 가부장적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할머니의 권리 역시 보장해주어야 법의 형평성이 확보되지 않을까? “고령으로 정신장애를 보이는 남편을 돌보아야 한다”는 법원의 충고 역시 이혼청구 기각의 변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75세 할머니는 현실적으로 당신이 보살핌을 받아야 할 고령의 나이이다.더더욱 지금까지 고생한 것만으로도 충분할텐데 이제 병든 남편 수발까지 하라는 것은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왠지 공평치 못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노부부의 백년해로를 권유하는 재판부의 입장은 오늘날과 같이 사회적 위기의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가족만은 보호하겠다는 국가의 의지를 상징적으로보여주는 셈이다.사회가 불안정해지면 실상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가족이다.가족이 흔들리면 가족에 대한 가치나 규범은 보수화되는 것이 상례이다.이 과정에서 가족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인해 더욱 고통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유지되는 가족의 안정성은 더 이상우리의 대안이 아니다.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개인의권리가 가족 공동체의복리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개인의 행복과 가족의 안정,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니 새삼 캐딜락을 50달러에 판 할머니의 기지가 부럽기도 하다.
  • 굄돌-구문회 경기대 호텔경영학 교수

    1999년을 UN은 세계 노인의 해로 정했다고 한다.노인 문제가 세계인이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는 뜻이다.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수십만명의 노인들이 늙고 병든 몸으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다.자식이 병든 부모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가 하면 부모는 자식이 학대하고 때린다고경찰에 고발하는 등의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그때마다 이 나라가 과연동방예의지국인가 아니면 동방패륜지국인가 하는 통탄을 절로 하게 된다. 이러한 노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그러나 우리는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이다.우리는 오랜동안 부모님을 공경하고 어른들을 잘 모시는 효를 인간 행동의 근본으로 삼고 손자 아들 아버지 삼 세대가 한 지붕 아래서 오손도손 살아왔었다. 지난 수십년 사이 나라가 본격적인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문화와사회가 급격히 서구화하면서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가 깨지고 핵가족화하면서 우리도 문제가 심각해졌다.서양의 지나친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가져온 결과다.대부분의 가정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대신 모두가 왕자이고 공주인 자식이 중심이 되어 버렸다. 자식 귀한 줄은 알아도 부모님 귀한 줄은 모르는 세상이 된 것이다.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잃었던 할아버지 할머니 자리를 다시 찾아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세상의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고 효도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오손도손 산다면 노인 문제의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이다.덩달아 심각한 청소년문제도 적지않게 함께 해결될 수 있다. 잘사면 어떻고 못살면 어떤가.있는 대로 형편껏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삼세대가 정답게 어우러져 사는 대가족제도 회복운동이 일어나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 인터뷰-SBS ‘… 좋은세상 만들기’ 이상훈PD

    촌로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통해 웃음과 감동을 유발,노인참여 프로그램도‘성공’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든 SBS ‘서세원의 좋은 세상만들기’.이 프로그램의 이상훈PD(42)가 그동안 방송된 ‘고향에서 온 편지’의 일부 내용과 프로그램 말미에 소개된 자신의 글을 모아 ‘고향생각’이라는 책을 냈다. 공주대 만화과 학생들이 그리는 소박한 애니메이션 화면과 ‘Sealed with the kiss’음악을 배경으로 잔잔히 흐르는 글들은 각박한 현실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고향의 애틋함을 불러일으켜 화제가 되고 있다. “어렸을때부터 일기장에 적어온 평범한 얘기들을 다시 한번 써본 것인데뜻밖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더군요” 방송이 나갈 때마다 시청자들이 일일이 글귀를 받아 적기 힘드니 책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는 얘기에 힘을 얻었다. “2년전 아흔의 연세에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추억이 없었다면 이 글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유난히 할머니를 따랐던 이PD는 프로에 출연하는 모든 할머니,할아버지가 바로 자신의 할머니처럼 느껴진단다.그래서 간혹 ‘노인을웃음거리로 삼는다’는 비난이 들릴때면 섭섭하다.편집과정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시청자들이 지적할 때면 ‘아,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노인들을 이용해 시청률을 올리겠다는 생각은 한번도하지 않았다는 것. “우리나라는 말로만 동방예의지국이지 실상 노인을 너무 무시합니다.변변한 노인대상프로도 드물 뿐더러 변두리시간대에 편성되기 일쑤입니다.2년전미국에서 연수할 때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가 많고 시청률 또한 높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이제는 우리도 노인을 주시청자로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세상만들기’를 1년여 이끌어온 이PD는 앞으로 노인대상 프로가 확산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李順女 coral@
  • 외언내언-황혼이혼

    집안 할머니중 한 분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옆에 묻히기를 한사코 거부 한다.지긋지긋한 사람과 죽어서까지 같이 지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그 자 손들로서는 두 분을 한 곳에 모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할 머니의 태도가 워낙 강경한 탓에 할 수 없이 다른 곳에 묘소를 마련했다. 어떤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그런 할머니들이 의외로 많은 것 으로 밝혀졌다.남편과 나란히 묻히지 않는 사후(死後)이혼은 물론이고 이혼 절차만 밟지 않았을 뿐 가족의 틀 안에서 남남처럼 사는 가정내 이혼도 꽤 많다고 한다. 사후이혼이나 가정내 이혼은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할 머니들이 뒤늦게 펴는 자기주장이다.그러나 그 목소리는 사실 자식들로부터 도 잘 이해받지 못한다.지금까지 참고 살아오셨는데 왜 저리 쓸데 없는 고집 을 피우실까 하는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견딜 수 없이 싫은 인간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이고 그 생지옥을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절규인 것이다. 그 절규가이제 가정의 울타리를 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20년 이상 함께 살다가 자녀가 성장한 뒤 이혼하는 황혼(黃昏)이혼이 전체 이혼의 10분의 1 에 육박한다.통계청에 따르면 96년 현재 황혼이혼이 9.6%에 달해 85년의 4.7 %에 비해 두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고 보면 최근 두 할머니의 황혼이혼 신청에 잇따라 패소판결을 내린 재 판부의 결정은 세태의 흐름에 둔감하다는 느낌을 준다.서울고법 민사10부는 4일 75세 할머니가 52년간 함께 살아온 83세 할아버지를 상대로 낸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이에 앞서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는 70 세의 할머니가 90세의 할아버지를 상대로 낸 이혼소송을 기각했다.둘다 지나 치게 가부장적인 남편의 아내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원인이 된 이혼소송이었 다.한 할머니는 아들마저 “어머니의 일생은 감옥이었다”고 밝힌 삶을 살았 고 또 한 할머니는 영어교사란 직업도 포기하고 구두쇠 남편 때문에 평생 쪼 들리며 살다가 결국 남편으로부터 절도혐의로 고소당하기까지 했다. 비록 가부장적인 문화가 우리 사회의 전통이긴 하지만 “내일 죽더라도 오 늘 이혼하고 싶다”는 할머니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질곡일 뿐이다.그 할머 니들에게 백년해로를 강요하는 것은 인권침해가 아닐까.
  • 75세 할머니 이혼소송 기각…순종 강요는 결별사유 안돼

    53년동안 함께 산 남편이 가부장적인 권위를 앞세워 무조건 순종을 강요한다는 이유로 70대 할머니가 낸 이혼 소송을 법원이 기각했다. 서울고법 민사10부(재판장 朴仁鎬부장판사)는 4일 A씨(75·여)가 남편 B씨(83)를 상대로 낸 이혼 등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할아버지가 결혼 초부터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워 할머니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상당한 돈을 벌면서도 식비와 최소한의 생활비만대줘 쪼들린 생활을 하게 한 점은 인정된다”면서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는 혼인 당시의 가치기준을 감안해 볼 때 결혼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최근 들어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고 각종 추태를 부린 점도 인정되지만 이는 고령에 따른 정신장애 탓인 만큼 할머니는 오히려 할아버지를 돌보고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 어느 실직·장애부부의 혈육 초월한 효도

    “새로 얻은 아들 딸 덕분에 이젠 살아갈 용기가 생겼어요” 지난 3월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한 丁仁順 할머니(77·서울 강서구 등촌3동 영구임대 아파트 907동 1115호)는 61년만에 다시 찾은 고국에서 사할린에 남 겨두고 온 두 아들과 딸을 대신할 새 자식을 얻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층 1111호에 사는 李元鶴(55)·權國和씨(54)부부.丁할머 니에게 李씨 부부는 친자식 이상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고 있다. 지난 8월 82세로 별세한 남편 李충삼 할아버지도 李씨 부부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고마워했다. 몸이라도 고국에 묻히겠다는 생각에 영구 귀국했지만 丁할머니 부부의 고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변변한 친척이 없어 외로움이 컸고 고령이라 거동도 불편했다.같이 온 몇몇 사람은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李씨 부부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끼니 때마다 식사를 챙겼고 엘리베이터 타는 법,아파트 열쇠를 꽂는 법,전화 거는 법,은행에서 돈을 찾는 방법도 차근차근 가르쳐주면서 한국생활에 적 응하도록 도왔다.할머니와 權씨는 남들이 친모녀로 오해할 정도로 정다운 사 이가 됐다. 지난 6월에는 할머니 부부를 집으로 모셔 조촐한 음식상을 차려놓고 결혼식 을 올려주었다.혼인신고도 해주었다.노부부는 사할린에서 만나 함께 살아왔 지만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었다. 李씨 부부의 살림도 빠듯하다.李씨는 개인택시 기사를 그만둔 뒤 신문배달 로 한달에 60여만원을 번다.부인 權씨는 소아마비로 양쪽 다리를 못쓰는 2급 장애인.움직일 때는 휠체어를 타야 한다.그러면서도 동네의 외로운 노인들 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자원봉사 활동을 3년동안이나 해왔다. “평생을 타향에서 고생만 하고도 고국을 원망하지 않는 노부부가 존경스러 웠다”는 李씨 부부는 “물질적인 도움은 충분히 못주어도 외로움만은 얼마 든지 나눌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환하게 웃었다. 진해가 고향인 할아버지 李씨는 일본에서 살던 중 사할린으로 징용을 당했 고 통영이 고향인 할머니 丁씨는 16세 때 일본으로 갔다가 20세 때 사할린으 로 옮겨갔다. [金性洙 張澤東 sskim@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67세 학장님이 복지과 새내기로/특차전형 이색합격자들

    ◎劉成鍾씨 현도사회복지대 입학/자동차 판매왕 성대 사회계열에/朴殷植 선생 증손녀 ‘독립유공’ 합격 지난 26일 발표된 99학년도 대입 특차전형 합격자 중에는 특이한 경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현직 주성대(충북 청주시 소재) 학장인 劉成鍾씨(67)는 충북 청원군의 현도사회복지대 사회복지학부에 합격했다. 충북도 교육감,국립교육평가원장 등을 지낸 劉학장은 “내년 2월 학장직에서 물러난 뒤 노인복지에 기여하기 위해 응시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취업자 전형’에서는 10년 연속 ‘자동차 판매왕’으로 한국기네스북에 오른 기아자동차판매(주) 퇴계로지점장 金연중씨(42)가 사회계열학부에 합격했다. 연세대에서는 ‘사회 기여자 및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을 통해 독립기념관장 朴維徹씨의 딸 志宣양(18·동덕여고3)이 인문학부에 합격했다. 지선양의 증조부는 朴殷植 선생이며 외조부는 梁起鐸 선생,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인 朴始昌 선생이다. 朴동혁군(18·통진종고3)은 군 하사관으로서 24년 동안 국토방위에 기여한 아버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계·전자공학부에 합격했다. 경희대에서는 金榮民군(18·진주 대아고3)이 대한민국서예인연합회 주최 대한민국원춘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실력을 인정받아 사학과에 합격했다. 축구감독 車範根씨의 아들 두리군(18·배재고)은 축구 특기자로 고려대 정경학부에,아시안게임 싱크로나이즈드에서 은메달을 따낸 서현고 張윤경양(18)은 이화여대 체육학부에,390.8점으로 예체능계 수석인 한성과학고 朴지은양(18)은 동국대 연극영상학부(이론연출전공)에 각각 합격했다.
  • 칠순에도 씻지못한 ‘손버릇’/할아버지 소매치기단 검거

    서울 성북경찰서는 22일 柳萬玉씨(76·전과13범·경기 광명시 하안동) 등 할아버지 소매치기단 3명에 대해 특수절도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柳씨 등은 상습 소매치기 전과자들로 이날 오전 8시40분쯤 서울 강북구 미아4동 창문여고 앞길 시내버스 안에서 승객 金모씨(22·여)의 핸드백을 미리 준비한 면도칼로 찢고 현금이 든 지갑 등을 훔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柳씨 등은 승객 金모군(18)에게 발각돼 경찰에 붙잡혔다.
  • 함께사는 외할아버지도 소득공제

    ◎외할머니·외손자 함께… 올부터 100만원씩/퇴직전 저리 대출금 이자차액 비과세로 외조부모와 외손자녀도 함께 살면 올해 연말정산부터 소득세 기본공제대상에 포함돼 내년 1월에 1인당 100만원씩을 소득공제 받는다. 시대변화에 따라 공제대상을 모계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국세청은 21일 처음으로 민간인이 포함된 법령심사협의회를 열어 이같은 내용의 예규개선내용을 확정,시행에 들어간다. 근로소득자나 사업소득자의 소득세 기본공제대상에 지금까지는 부모,조부모,증조부모,자녀,손자녀,증손자녀등 직계존비속만 포함시켰으나 앞으로는 생계를 함께 하는 외조부모와 외손자녀까지 인정해 준다. 외조부모가 65세이상이거나 외손자녀가 6세이하인 경우에는 1인당 50만원씩의 추가공제를 받을 수 있다. 또 외조부모나 외손자녀에 대한 의료비,보험료,교육비에 대해서도 공제혜택을 받는다. 기업의 고용조정으로 종업원이 재직당시 무상 또는 저리로 자금을 대여받은뒤 퇴직했을 경우 일반금리와 실제 대여금리 차이 상당액은 기타소득으로 간주된다. 기타소득으로 간주되면 무주택종업원이 2,000만원이하를 대여받았을 경우 이자차액은 비과세되며,기타소득 금액이 연간 300만원이하인 경우에는 분리과세와 종합과세 중 선택할 수 있다. 수출업자가 수출선수금을 받아 수출하기 이전까지의 이자상당액을 물품으로 지급할 경우에는 이를 이자로 보지 않고 매출에누리(할인)로 간주,이자소득세를 매기지 않는다. 또 제조업체가 임가공업체에게 공정개선,첨단설비,노후시설개체 등의 생산성 향상시설을 무상으로 사용하게 한 뒤 생산량을 모두 납품받았을 경우 투자액의 5%를 법인세에서 공제해준다. 국세청은 이번에 법령심사협의회에 공인회계사 강성원,김익래씨와 변호사 최선집씨 등 3명을 추가로 임명해 기존 예규를 바꾸거나 새로운 세무처리기준을 정하도록 했다.
  • ‘국악 애국가’와 전통음악교육/任泰淳 기자·문화생활팀(오늘의눈)

    국립극장에는 각종 공연이 연중 무성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국립극장을 찾는 주 관객층은 장르별로 다르다. 국립극장장을 지낸 문화관광부 李吉隆 종무실장에 따르면 오페라와 발레는 30,40대 주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은 어린 자녀들 손을 잡고 극장을 찾아 고음의 선율과 율동에 매료된다. 반면 판소리가 공연될 때에는 50대 후반부터 60대 노년층이 객석의 대부분을 메운다. 이들이 판소리에 심취하는 것은 30,40대보다 전통가락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온 20대도 적지 않다. 李 실장은 장르별로 주 관객층이 다른 것은 교육의 영향이 크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30,40대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음악 교과서에는 온통 서양음악 일색이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음악의 어머니 헨델,악성(樂聖) 베토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술돼 있었지만 박연,우륵,거문고 등 우리의 전통음악은 뒷전에 처박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의 세례를 받아온 30∼40대가 단소나 피리보다는 피아노에,판소리보다는 오페라,발레에 관심을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화관광부는 최근 국악으로 반주한 애국가를 테이프 및 CD에 담아 교육청 등 일선 기관과 단체에 보냈다. 국악 애국가는 정부 고위층 취임식 행사에 선보였다 의외로 반응이 좋아 국립국악원의 협조를 받아 만든 것이다. 국악 애국가가 나오게 된 것은 국악이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더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이제 사물놀이패는 웬만한 행사에서는 으례 등장할 정도로 단골손님이 됐고 탈춤과 농악에 빠져든 대학생들도 많다. 소리꾼의 애환을 다룬 영화 ‘서편제’가 나와 한국영화 사상 최다관객을 기록하기도 했다. 음악교과서에서 국악이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국립국악원에 따르면 지난 95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서 국악은 25%가량 차지했으나 지난 96년에는 40%로 높아졌다. 이 때문인지 단소 등 전통악기를 배우는 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띄게 늘었다. 아마 국악애국가가 우리들 귀에 익숙해지면 할아버지,할머니 또는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국립극장을 찾는 꼬마손님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구의동 사진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14)

    ◎한컷 한컷에 깃든 추억… 인생… 역사/1826년 세계 첫 작품부터 첨단 홀로그래피까지 한눈에/한말 풍물 등 희귀자료 즐비 각양각색 카메라도 볼만/내년 새 전시관으로 이전 영상정보산업 메카 기대 신촌과 대학로·압구정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젊은이의 거리’다.신세대들의 다양한 젊음의 문화가 거리의 풍속도를 바꾸어가고 있다.신세대 문화의 급속한 변화 속에 새로운 젊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그중의 하나가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테크노마트다.지상 38층의 이 건물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모아놓은 새로운 ‘젊은이의 광장’이 됐다.활력 넘치는 ‘젊은이의 광장’으로 등장한 테크노마트 안에 한국 최초의 사진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지난 9월10일 문을 연 300여평의 아담한 박물관은 연인들의 새로운 데이트장소로 옛일을 회상해 보는 추억의 장소로 이미 화제의 공간이 됐다.사진이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처럼 사진박물관은 여느 박물관보다 더욱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너무 친근한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기에 관람객들은 사진이 과연박물관에 전시될 유물이냐는 가벼운 의문부호 하나쯤은 가지고 박물관 문턱을 넘어선다.그러나 오밀조밀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박물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끼고 체험하다 보면 1시간 남짓의 관람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만큼 가치있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음을 알게 된다. 사진박물관에서 우선 눈여겨 봐야할 것은 세계 최초의 사진으로 1826년 프랑스의 발명가 니엡스가 8시간이나 걸려 찍었다는 희미한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염화은을 코팅해서 사진의 효과를 낸 초기 사진인 은판사진(다게레오 사진)과 그후 등장한 유리판 사진,최첨단 사진 홀로그래피 등 사진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다양한 사진이 전시돼 있다.국내 사진으로는 처음 사진이 소개된 120년 전의 풍물과 사람들의 모습,정부수립 50년을 총망라한 역사의 현장 등이 전시돼 있다. 가슴을 드러낸 조선시대 서민들 모습과 풍물을 비롯 일본 공사관에 초대된 외교사절들의 모습이 담긴 귀한 자료사진들도 공개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사 김규진 코너도 만들어져 있다.1907년 소공동에 문을 연 천연당사진관의 광고가 8월16일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에 실렸던 자료도 눈에 띈다. 사진박물관에서는 카메라의 역사도 배울 수 있다.주름상자를 조절해서 피사체의 각도를 수정할 수 있는 뷰 카메라와 옛 소련에서 만든 초기의 주름카메라,국내 한 대뿐인 로라이 마린 수중카메라,자연 풍경사진으로 유명한 앤젤 아담스가 사용했던 디오도르프 카메라와 같은 종류의 카메라,특수카메라,소형카메라 등 여러가지 사진기가 골고루 갖춰져 있다. 필름이 필요없는 디지털 카메라로는 직접 촬영,프린트까지 해 볼 수 있도록 해서 관심을 끌고 있다.일명 바늘구멍사진기로 불리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통해 빛이 바늘구멍을 통하면 벽면에 화상이 거꾸로 맺히는 원리를 관찰할 수도 있다. 사진박물관은 현재 3만여장의 사진과 자료를 보유하고 있지만 전시공간만이 아니라 자료를 발굴하고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역할까지 할 예정이다.사진은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진박물관은 특히 한국의 근세사를 정리하기 위해사진자료를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대한매일이 주관하는 ‘전국민 사진자료찾기운동’으로 이름한 이 행사는 각 가정에 보관중인 사진 중에 가치있는 자료를 찾기위한 것이다.이렇게 발굴된 사진은 전직 사진기자들의 분류,정리과정을 거쳐 박물관에 있는 다른 사진과 함께 ‘한국사진자료백서’도 구축된다. 희귀하고 가치있는 대한매일에 보도된다. “사진찾기 행사로 현대사의 한 페이지는 새로 써야할 지도 모른다”며 귀중한 자료 사진 찾기에 기대를 거는 吳岡錫 관장(49)의 말에는 자신감이 배어나온다.그도 그럴 것이 일본 외무성과 협조,일본 NHK에서 한국관련 옛 사진찾기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게 됐기 때문이다. 사진박물관의 소식만 듣고도 벌써 자료들이 모여들고 있다.대한제국 말기 관료들의 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뉴질랜드 교민이 보내왔는가 하면,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 일본섹션에서 한국의 경치를 담은 사진첩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을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발견,슬라이드에 담아 왔다.‘조선국진경’의 사진들은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은 귀한 자료다.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조선주재 일본 공사관원이던 하야시 타케이치(林武一)로 일본인의 눈을 통해본 청일전쟁 직전의 조선 풍광과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한국 사진기자와 작가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이 사진박물관은 내년 말이면 서대문구 연희3동 53의 1,공원부지에 1,300평의 독립건물로 옮겨간다.카메라를 닮았고 최첨단 스틸하우스로 외관만으로도 화제가 될 사진박물관은 역사기록의 현장이자 영상정보산업의 메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스티커 사진이 신세대들에게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떠올랐듯 사진은 역사의 기록만은 아니다.사진박물관을 둘러보면 21세기는 사진으로 말하는 영상이미지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미래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사진과 친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될 것이란 吳관장의 귀띔은 사진박물관을 다시 한 번 둘러보게 한다. 미래의 사진은 어떻든 사진은 개인에겐 소중한 추억이다.까까머리 고교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고,이젠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랜 할아버지도 찾을 수도있다.한 가정의 기록이며 또 역사의 기록이다.사진은 한 치의 거짓도 인정되지않는 투명한 역사이다.역사의 귀중함과 과학의 경이로움도 느낄 수 있다. 역사가 존재하고 미래의 영상을 예상할 수 있는 곳이 국내 유일의 사진박물관이다. ◎대한매일 주관 사진찾기운동 참여/사진박물관 주인 되어보세요 ①전국민 사진자료 찾기운동에 참여한다. 집안 구석구석에 숨겨진 사진을 찾아 사진박물관에 기증하면 박물관에 기증자로 남는다.엄청난 역사적 사료가 아니래도 좋다.시골집 창고 속의 낡은 사진도 귀중한 자료가 될 수도 있으니 이 기회에 한 번 뒤져 보자.이렇게 모여진 사진은 전직 사진기자들의 분석과 고증을 거쳐 대한매일에 소개되고 내년 4월,사진전시회에 출품된다.그리고 사진박물관에 영구 전시된다. ②서대문구 연희동에 설립될 사진박물관에 건축기금을 낸다. 10만원 이상의 건축기금을 내면 1층 벽면에 얼굴 사진이 영구히 보존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얼굴 사진은 12㎝×9㎝ 크기의 특수세라믹으로 제작된다.유명인들과 나란히 얼굴이 전시될 흔치 않은 기회.단 1만명으로 제한되어 있으니 서두르는 편이 좋다. 사진박물관 사무국 전화 02­3424­1291 ◎이렇게 가세요 서울 광진구 구의동 631의 1.테크노마트 9층에 있다.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 내리면 39층의 최첨단 테크노마트 건물이 보인다. 지하철 역에서 걸어 3분거리.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매월 1,3주 화요일은 쉰다.관람료는 성인 1,000원.어린이는 700원.단체관람료는 30% 할인된다.
  • 비로봉(시조시인 李根培씨 답사기:5·끝)

    ◎내금강에 우뚝 솟은 봉우리 내년 봄 오를 날 왔으면… ●왜 터져나오는 울음인가 정말 금강산을 본 것일까.내금강은 처음부터 예정에 없었으니 먼 눈으로 비로봉의 눈덮인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끝내야 했지만 외금강도 사흘가지고는 주마간산이 아니었던가.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리자마자 첫 산행에 나선 이들은 금강산의 장엄과 신비를 발로 딛고 눈으로 받아들이는 일보다는 반세기 넘게 바라만 보고 살아온 그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데에 더 큰 의미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금강산이라는 병풍 속에 담긴 단 하나의 그림 국토,민족,역사,동족상쟁,부모형제,이산가족,고향의 낱말이 그것이다.고향이 해주인 원창성씨(70·남)는 산길에서 만난 북측의 젊은 미화원이 꼭 조카만 같아 껴안고 눈물을 흘리자 그 젊은이도 따라서 눈물을 흘리더라며 무언가 손에 쥐어주고 싶었지만 젊은이가 한사코 뿌리쳐서 그냥 돌아왔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뜻을 알겠노라고 했다. 장전항이 고향인 한일환씨(63·남)에게 “이제 고향땅을 밟으셨으니 통일을 만난거나 다름없네요”했더니 “그렇지요.내게는 통일이 반은 된 셈이지요”한다.금강산 관광 안내에서 이미 북한 주민과의 접촉을 삼가달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산행에서 겨우 한 두번쯤 만나게 되는 북측 미화원(신분과 직함을 확인할 수 없지만 손에 대로 만든 빗자루를 들고 있었으므로)을 붙잡고 피란 오기 전의 주소와 가족 이름들이 적힌 종이를 손에 쥐어주며 “내년 봄에 꼭 올 테니 그때까지 안부를 알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행들은 손수건을 꺼내야 했다. 만물상에서,구룡폭포에서 과일 몇개에 술잔을 올리거나 아니면 얼음 박힌 땅에 엎드려 통곡하는 이들에게 저렇게 울 수 있는 자리라도 마련해준 세월이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원창성씨는 “내가 금강산을 본 것이 아니지요.꿈을 꾼 것이지요”했고 97세의 심재린 할아버지는 “피눈물로 금강산을 올랐다”고 했다. ●비로봉 오를 날을 기약하며 밀리고 밀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곧 다시 돌아올거라고,전쟁은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이웃집 마실이라도 가듯 어머니와아들,아버지와 딸,아내와 남편,형과 아우가 그렇게 헤어졌다가 반세기를 넘긴 사람들.사람이 백발이나 200살쯤 살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생사를 확인할 것도 없이 이미 수명을 다했을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심경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겨울 개골산(皆骨山)에 왔던 이들은 다시 봄에 오겠다는 말을 한다.적어도 봄,여름,가을,겨울 산의 이름이 바뀌듯이 그 다른 산을 보겠다는 욕심도 들어있지만 더욱 고향이 금강산 가까운 곳이거나 북녘인 사람들은 이제 내디딘 발걸음이니 한 번이라도 더 그리던 땅을 밟아보겠다는 생각에서이리라. 내금강 비로봉구역은 비로봉 정상에 올라 구름의 바다,돌의 바다,물의 바다를 굽어보며 동해 일출을 보는 일말고도 월출봉 일출봉 영랑봉들의 절경을 놓칠 수 없고,만폭동구역에서는 청록감 백록담 흑록담 비파담 진주담 등 폭포와 팬 돌에 솟구치는 물보라와 바위들을 봐야겠고,백운대구역 명경대구역 구성동구역의 장관인들 어찌 빼놓을 것이냐. 내 봄이 오면 다시 가서 비로봉에 오르리라.돌 하나물 하나,나무 하나,흙하나 다시 와서 그 낱낱의 얼굴에 볼 부비고 감추고 있는 말들을 꺼내서 시로 쓰리라.노래부르리라.
  • 司試 합격 700명 발표… 여성이 13.3% 사상 최고

    ◎합격자로 본 특징/최고령 43세 金成奎씨/군법무관 24명도 발표/서울대 297명·고대 147명/대학 재학생 21%나 차지/지방대 출신 합격자 늘어 행정자치부는 27일 제40회 사법시험 및 제13회 군법무관 임용시험 최종합격자 명단을 확정,발표했다. 올해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는 지난해에 비해 96명이 늘어난 700명이고 군법무관 임용시험 최종합격자는 24명이다. 2만755명이 응시한 올해 사법시험 최고득점은 2차시험 평균 63.71점을 얻은 丁진아씨(26·여·서울대 사회학과졸)가 차지했다. 사법시험에서 여성 수석합격자는 이번이 6번째다. 최고령자는 金成奎씨(43·성균관대 법대졸),최연소자는 朴南俊씨(21·서울대 사법학과4)다. 여성 합격자는 전체 수석의 영광을 차지한 丁씨를 비롯해 93명(13.3%)으로 지난해 8.1%(49명)보다 늘었다. 군법무관 임용시험에서 최고득점자는 제2차 시험 평균득점 56.07점을 얻은 尹大海씨(30·영남대 법학과졸),최고령자는 金英洙씨(30·한양대 법학과졸),최연소자는 李東原씨(24·고려대 법학과졸)다. 올 사법시험의 가장 큰특징은 여성 합격자의 급증,지방대학생의 약진 등을 들 수 있다. 올 합격자는 지난해에 비해 100명이 늘어난 700명. 95년 308명에서 해마다 100명 안팎으로 증가한 셈이다. 이처럼 합격자의 절대수가 늘면서 여성합격자도 급증했다. 올 여성합격자는 전체 합격자 700명의 13.3%를 차지해 사법시험 사상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여성합격자 비율은 95년 8.8%,96년 7.2%,97년 8.1%로 저조했다. 한편 재학생들의 합격비율도 눈에 띄게 늘었다. 올 재학생 합격비율은 21.1%로 10%대에 머물던 과거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이처럼 올해 여성 및 재학생들이 많이 합격한 것은 선발인원이 증가하면서 합격선이 낮아졌다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올해 커트라인 50.71점은 최근 4년간 최저다. 물론 해마다 시험의 난이도가 다르고 2차 시험이 주관식으로 치러진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비교는 할 수 없으나 선발인원 증가에 따른 하향화로 풀이할 수 있다. 36세 이상 ‘고령’ 합격자와 20∼23세의 ‘소년’합격자가 크게 늘어난 것도 이채롭다. 96년의 경우 36세이상 합격자는 19명이었으나 97년과 올해 들어 각각 34명과 35명으로 대폭 늘었다. 또 20∼23세 합격자도 96년 39명에서 97년과 올해에는 각각 57명과 56명으로 눈에 띄게 늘었다. 이번 시험의 또다른 특징은 지방대학생들의 합격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충남대가 서울시립대·단국대·경찰대와 함께 4명을 배출했으며 영남대가 3명,충북·관동·대구·강원·동아대는 각각 1명씩 배출했다. 한편 과거 합격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서울대는 이번에도 전체 합격생의 42.4%인 297명으로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어 고려대가 147명,연세대 56명,성균관대 46명,한양대 39명,중앙대 14명,외대·경북대 13명,이화여대 11명,전남대 및 부산대 9명,경희대 8명 등이다. ◎수석합격 丁진아씨/경찰대 중퇴·서울대 졸업… “통상전문 판사 희망” “꼴찌로 붙은 줄 알았는데 수석이라니요?” 올해 사법시험에 평균 63.71점으로 수석합격한 丁진아씨(26·여·서울대 사회학과 졸업)는 시험을 흡족하게 못봐 ‘수석’은 기대도안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丁씨는 사법시험 사상 여섯번째 여성 수석합격자다. 게다가 ‘경찰대 중퇴,사회학과 졸업생’이라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지난 91년 서울 당곡고교를 전체 2등으로 졸업하고 경찰대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고 다시 서울대 사회학과에 94학번으로 입학했다. 주변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싶어서였다’고 농담처럼 얘기했다.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학부때 부전공으로 법학을 들으면서 95년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시준비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지난해 7학기 만에 조기졸업을 했다. 학점도 4.3만점에 3.63으로 우수한 편이다. 96년 사시에 연습삼아 처음 도전했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지난해 1차 시험에 붙었고 곧바로 올해는 최종합격했다. “공부할 때는 공부만 하는 것이 비결이라고 할까요. 일요일은 푹 쉬고 하루 11∼12시간은 꾸준히 공부했어요.” 丁씨는 지난해 1차 시험에 붙은 뒤 9월부터 석달간 학원을 다닌 것을 빼고는 매일 학교와 신림동 근처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2차 시험을 앞두고는 매일 아침 8시에 독서실에 가서 밤 11시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丁씨는 “통상분야를 비롯해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판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며 “두 번이나 진로를 바꿔 선택한 길인 만큼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대림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丁乙聲씨(56)와 어머니 王正子씨(56) 사이의 4녀중 둘째. ◎이색합격자/의사 출신 2명·行試출신 5명/韓大鉉 憲裁재판관 두아들 합격 전체 합격자가 늘면서 이색합격자도 많았다. 의사 출신 합격자가 두 명이나 됐다. 張宴華씨(29·여)는 93년 연세대 치과대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법대에 편입,4년의 도전 끝에 합격했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가정의학 전문의 盧泰憲씨(31)도 의료분쟁 등을 전공하겠다며 법조계의 길을 택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했다가 합격한 사람이 5명이나 됐고 입법고시 출신도 3명이다. 명문집안 자제들의 합격도 적지않다. 吳有邦 전 의원의 아들 政翰씨(28)와 愼久範 전 제주지사의 큰아들 鏞仁씨(32)가 합격했다.특히 鏞仁씨의 합격으로 愼전제주지사 집안은 ‘3부자 3시’를 기록했다. 愼전제주지사는 67년에 행시 5회에 합격했으며 차남인 鏞圭씨(30)가 92년 외시에 합격,현재 외교통상본부 사무관으로 재직중이다. 또 헌법재판소 韓大鉉 재판관의 장남 政洙씨(29)와 知洙씨(27)가 나란히 합격,할아버지 韓聖壽씨(작고·전 대법관)를 포함,3대 법조인 가족이 됐다. 한편 최고령 합격자인 金成奎씨(43)는 2차 시험만 9차례 치른 ‘팔전구기’의 저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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