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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뽕나무가 방귀 뽕뽕 참나무가 참으시오

    전통명절을 앞두어서 그럴까.이번주 어린이 도서는 ‘옛날얘기’를 다룬게많은 편이다.그림책인 ‘우리 할아버지가 꼭 나만했을 때’(보림)와 만화 ‘우리 아빠가 어렸을 때’(지경사)는 지난 시절을 어린이에게 들려준다. ‘우리 할아버지가…’는 ‘앞니빠진 덜걱이 뒷니빠진 덜걱이/우물가에 가지마라 붕어새끼 놀란다∼’를 비롯해 ‘방아야 방아야 퉁덩퉁덩 찧어라/아침먹이 찧어라∼’ ‘참나무하고 뽕나무하고 대나무가 살았는데/뽕나무가 방귀를 뽕뽕 뀌니까/참나무가 참으시오 참으시오 하니까∼’ 등 잊혀진 전래동요를 재생시킨다.노래 마다 인형과 함께 초가집과 마을,풀과 나무 등을 배경그림으로 붙였다.인형작가 주경호씨가 점토로 빚은 인형에 직접 염료로 물을들인 헝겊으로 옷을 지어입혀 사실감을 살리고 있다.8,500원. ‘만화속으로 떠나는 추억여행’이란 부제가 붙은 ‘우리 아빠가 어렸을 때’는 컴퓨터 오락도 없고,아이스크림이나 놀이공원도 없던,가난했지만 따뜻했던‘아빠의 어린시절’을 보여준다. 밤에‘변소’에 갈 때 무서움에 밖에서‘보초’를 서로 서주던 시절,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고싶던 50∼60년대의 모습을 보여준다.서영수 글·그림.5,000원. [허남주기자]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徐廷旭 과학기술부장관

    세상이 물질적으론 풍요해졌지만,가족이 핵화(核化)되어 조부모의 사랑을모르고 자라는 어린이들이 많아졌다.고학력 부모들이라 영리하게 가르치긴하겠지만,어쩐지 불안하다.내가 어릴 때 할머니·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요즘 아이들이 불쌍한 생각마저 들곤 한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응석도 부리고,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듣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옛날 얘기로 덕을 키우며,할머니 솜씨로 빚은 우리 음식을 먹고 자라야 심신이 바르게 자란다. 손주자랑을 하는 친구들을 은근히 부러워 해 온 터에 최근 나도 기다리던외손녀를 보게 됐다. 자주 보지 못해 아쉽고,낯을 가리다 나를 알아보는 모습이 귀여워서 해외출장을 가도 예쁜 장난감을 보면 선물로 꼬박꼬박 챙겨온다.해외에 나가봐야사올 것이 없다는 핑계로 서류뭉치나 빨래감만 가득하던 가방 속에 최근에는 손녀에게 줄 선물이 꼭 들어있다.손녀밖에 모르는 나를 보고 아내가 내심섭섭해하지는 않을까 눈치가 보인다. 자식에겐 엄하던 사람들도 손주에겐 약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친구들 모임에 가면,손주 자랑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주말마다 맡겨 놓는 개구쟁이 손주들을 봐주느라 몸살이 날 지경이라는 즐거운 비명도 가끔 들린다.이를 듣고,한 친구가 묘안을 일러주었다.며느리나 딸이 보는데서 방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 먹이거나,과일을 한입 먹고 주어보라는것이다.깔끔한 요즘 며느리들이 다시는 맡기려 들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자다운 확신에서다. 후에 그 친구를 만나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그랬다가 정말 손주들을 영영 안 데려올까 겁이 나서 못했다는 얘기다.이것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심정이다. 핵화된 가정에서 부모만 보고 자란 어린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안을모르는 정신적 영양실조에 걸리기 쉽다.부모들의 이성(理性)교육 못지 않게조부모들의 감성(感性)교육 역시 중요하다.인간의 뇌가 좌우로 갈라져 있듯이,이성과 감성이 조화된 가정교육을 받아야 경쟁을 하면서도 게임의 룰(Rule)을 지킬 줄 아는 도덕심의 샘이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정욱 과학기술부장관
  • 사회문제화 고령고시생(上)-’고시병’ 10년 갈곳이 없다

    40대 초반의 Y씨는 요즘 걱정이 태산같다.10년 넘게 둥지를 틀었던 신림동고시촌을 ‘타의에 의해’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6년에 개정된 사법시험 시행령은 1차시험 응시 횟수를 네번으로 제한하고 있다.Y씨는 이 시행령이 첫적용되기 시작한 97년부터 잇따라 세번 1차시험에 응시했다.내년에도 1차 시험에서 떨어지면 고시계에서 일단 퇴출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몇개월전 50대 후반의 한 ‘할아버지급 고시생’이 갑자기 사라져 고시촌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그가 ‘마침내’ 고시계 은퇴를 결심한 배경은 아무도 모른다.이런저런 소문만 떠돌 뿐이다.신림동의 한 40대 고시생의 죽음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그 하나였다.그는 지난 3월 우울증 치료제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문제는 ‘고시병’에 걸린 노령 고시생들이 적지 않다는데 있다.신림동 일대에 산재한 고시학원 수강생의 약 25% 정도는 30대 후반 이후의 고령 고시생들이다.서울법학원 김용주(金容周) 총무부장의 귀띔이다. 고시병의 실상은 사실 단순하다.“올해만,올해만…”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버티다 보면 어느새 10년을 넘기기 일쑤(한 고시생)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시병은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준다. 약물과용으로 인한 부동맥경화증으로 목숨을 잃은 고시생의 경우는 극단적사례일 것이다.이보다 강도는 덜하지만 신림동 고시촌 주변에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한 고시학원 관계자는 수강신청 때마다 30대 후반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미혼여성 고시생이 나타난다고 증언했다.그리곤 학원비를 냈는데 왜 수강증을 주지 않느냐고 따지다가 제 정신이 들면 그냥 돌아간다고 한다. 올해 사시는 2만3,000여명이 응시,사상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하지만 최종 합격의 영광을 누릴 사람은 700명에 불과하다. 이처럼 사시 정원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아직은 바늘구멍이다.고령 고시생들이 양산하기 쉬운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출세지상주의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다.한양대 김상규(金相圭)교수는 “고시가 신분상승과 경제적 여유를 얻는 최선의길이라는 생각이 고연령층의 고시병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노동시장의 진입 경직성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기업이나 단체들이 신입사원채용시 연령을 제한,나이든 고시생들에게 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고령 고시생의 누적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인력낭비다.개인과 가족의 불행이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추세다. 가족의 생계를 돌보지 않고 오랫동안 고시에만 매달리는 것도 이혼사유로성립한다는 최근 판례가 이를 말해준다.고령 고시생들의 명예로운 진로전환에 온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구본영기자 kby7@
  • 안수환 8번째 시집 ‘풍속’

    ‘풍속’.젊은 세대의 도회풍 문학만이 세도하는 시대에 이런 제목의 시집이 서점에 꽂혀 있다면 얼마나 손길을 탈 수 있을까.그렇지만 한편한편 읽어 나가노라면 풍속이라는 낱말이 지닌 조금 전의 ‘촌스러움’이 어느새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바뀌어간다. 그렇다고 안수환(安洙環)의 여덟번째 시집 ‘풍속’(동학시인선)에 실려 있는 시편들의 분위기가 제목보다 덜 촌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전략)엿 주셔유 이건 쓸만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엿가래 길게 떼어 줄 테니/놋대야 말고철사 구부러진 것/숟가락 깨진 것을 들고 오너라/구레나룻 아저씨 철크닥 철 가위를 흔들었다 정 아무것도 없으면/얘들아 이리 오너라/너희들 팔씨름 해 가지고 이기는쪽에/여기 남은 콩엿 다 집어 줄테니(풍속 32) 시인으로서 안수환의 본령은 관념적 형이상학적 세계다.첫시집 ‘신들의 옷(1982)’과 두번째 ‘가야할 곳’ 등이 그렇다.한때는 직선적으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검불꽃 길을 붙들고(1988)’를 내기도 했다.그가 어떻게 ‘풍속’을 쓸 수 있었고,또 이 시는 어떻게 오늘의 현실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안수환이 생각하는 1999년은 기술과 소유욕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이같은가치관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길은 선인들의 시대에 가졌던 포용의 정신을 되살리는 방법말고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그러니 촌스러움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서양의 미덕이 상호존중이라면,한국은 포용이다.길흉이나 선악·명암·고저·상하처럼 오늘날 가치관의 위기를 불러온 이분법적 사고를 할아버지·할머니들이 가졌던 포용의 정신으로 감싸안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풍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집착이나 욕심에서 초월해있다.때로는 토담이나 토끼풀같은 미물도 이런 인물들의 심성과 교감한다.그런 인물들이 불행을 맞이하는 자세에 이르면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전략)작두를 밟고/여물 썰던 날 마른 칡 쓴너삼 건초 무더기 속에/억,작은 할아버지/왼손 검지 중지 손가락을 잃어버렸다 이젠 괜찮다/생전에 다 쓴 손가락이다(풍속 47) 때로는 가슴저리게,때로는 미소짓게하는 이런정서는 그러나 전혀 작위적이지 않게 다가온다.생각해 보면 시인의 말처럼 할아버지·할머니로 부터 느꼈던 바로 그것임을 깨닫게 된다. 안수환은 194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시에 등장하는 지명이나 인물은모두가 그의 고향산천이고,고향아저씨·조카·이웃이다.그는 지금도 천안에살면서,천안에 있는 연암축산원예대학에서 농업철학과 한문을 가르친다. 그는 이 시들을 쓰면서 제자들을 생각했다고 한다.그의 제자들은 학업을 마친 뒤 대부분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그는 이 시들을 통해 그들에게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義烈 독립투쟁] 金祉燮 의사(3)

    ‘동지 여러분 앞.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제(弟)는 288시간만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참말 지저(地底)의 생활이었습니다.그 속에서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 비애,적막,번민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이 사람의 흉중으로 총집되어 경도광랑(驚濤狂浪)의 소리만 들릴 적에 할 일없이 어서 나와 어복(魚腹)으로 들어가라고 유인하고 최촉하는 공포를 주던 것이 마치 왕생(往生)의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은 1924년 1월 5일 도쿄 소재 일왕(日王)의 궁성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투척,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친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일본에 도착한 후 상하이(上海)의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모두 부분이다.무려 12일간을 석탄 운반 화물선의 창고에 몸을 숨긴채 일본에 도착한 김의사는 당시의 고통스런 상황을 마치 죽었다 살아 나온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김 의사는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20대 청년시절 한때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귀향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아 국권회복의길을 강구하였다.이후 김 의사는 만주·연해주·상하이 등을 다니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1922년 4월에는 고려공산당에,그 해 여름에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이중교 의거’에 앞서 김 의사는 1923년 3월 같은 단원인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과 함께 국내에 있는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기로 하고 대량의 폭탄을 중국으로부터 국내로 반입하려 했다.그러나 이 계획은 동지로 위장침투한 경기도 경찰부 소속 조선인 경찰 황옥(黃鈺)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김 의사는 다행히 사전에 피하였으나 김시현·유석현 등은 일경(日警)에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그 해 12월 김 의사는 거사 자금을 마련키 위해 조선인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에게 5만원을 요구하였다.그러나 백은 요구를 들어줄 듯하다가 결국에는 배신,동지 윤병구(尹炳球)만 체포되고 말았다.백방으로 거사자금 마련을 하던 중 1924년 초 도쿄에서 일본 총리를 비롯하여 조선총독 등이 대거참석하는 ‘제국의회(帝國議會)’가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김 의사는 일제 침략주의자들을 처단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동지 최윤동(崔允東)에게서 입수한 폭탄 3개와 여비 100원을 준비하여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도쿄로 향했다.당시 김 의사는 일본인 소유 석탄운반선 천성산환(天城山丸)의 창고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이 과정에는 일본인 공산주의자 히데시마 히데지(秀島廣次)와 선원 고바야시 간이치(小林幹一)·구로시마 리게이(黑島里經)의 도움이 있었다. 1923년 12월 31일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에 도착하여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彦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여관에 투숙한 김 의사는 여기서 3일을 보낸후 모포·외투·시계 등을 전당포에 맡겨 여비를 마련한 다음 도쿄로 향했다.기차 안에서 제국의회가 휴회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 의사는 거사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日王)의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 1월 5일 도쿄에 도착한 김 의사는 우선 궁성의 규모·구조를 사전답사한 후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오후 7시경 일본인 관광객과 뒤섞여 이중교 앞으로 접근하자 감시 경찰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더 이상 궁성 쪽으로 접근하지 말 것을 종용하자 김 의사는 일경을 향해 폭탄 한 발을 던지고 재빨리 이중교를 건너 궁성 정문쪽으로 향하였다.이에 궁성 보초병 2명이 달려들며 김 의사에게 총을 겨누자 김 의사는 나머지 폭탄 2발을 일경들이 달려드는 궁성쪽을 향해 연속적으로 던졌다.그러나 김 의사가 던진 폭탄 3발은 모두가 불발이었다.김 의사가 타고온 배는 습기가 많은 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폭탄의 화약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 의사의 의거로 일본전역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자신들이 ‘신(神)’으로 받드는 일왕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내무차관의 견책에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궁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파면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히비야(日比谷)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김 의사는 1924년 9월 9일 열린 공판에서 직업을 묻는 판사에게 “조선 독립당원과 혁명사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또 10월 11일 공판에서는 장문의 ‘진술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박한 다음 “이번에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도취된 왜국(倭國)관민을 각성시키고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밝혔다. 재판정에서 김 의사는 자신에게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줄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제는 무기징역을 언도하였다.1927년 20년으로 감형된 김 의사는 옥중에서도 의거 당시의 의기를 굽히지 않았으나 고문 후유증이 악화돼 이듬해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 때 김 의사의 나이는 44세였다.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金祉燮 의사 후손 근황 김지섭 의사의 직계 유족으로는 며느리 최수희(崔秀禧·75·대구 거주) 여사와 손자 3형제가 있다.김 의사의 외아들 재휴(在烋)씨는 생전에 회사원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94년 78세로 노환으로 작고했다. 김 의사의 손자 3형제는 모두 각자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장손 두현(斗鉉·47)씨는 경북고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수재로 현재 전남 여수에거주하고 있는데 독일계 외국인회사인 한국바스프(주)생산부장으로 재직중이다.슬하에 1남1녀. 둘째 손자 광현(洸賢·44)씨는 대학졸업 후 롯데건설에 근무중이며 경기도부천에 거주하고 있다.셋째 손자 기현(己鉉·39)씨는 모친 최 여사를 모시고 대구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장손 두현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님으로부터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며 “할아버님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열심히 살고 있다”면서 “현재 선산에 안장돼 있는 할아버지를 국립묘지로 이장하고싶다”고 말했다. 김 의사의 묘소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대지동에 자리잡고 있다.김의사를 기리는 기념물로는 경북 안동 영호루에 있는 기념비와 독립기념관 경내 시비(詩碑)가 있다.매년 2월 20일 김 의사 순국일에 추모행사가 거행되고 있으나 별다른 기념사업회는 없는 상태.1962년 김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됐다.정운현기자 jwh59@*日 궁성 어떤 곳인가 일본인들은 그들의 왕이 거주하는 궁성을 ‘황거(皇居)’라고 부른다.수도도쿄(東京)시내 치요다구(千代田區)에 위치한 일본의 왕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고 막번체제(幕藩體制·1603∼1867)를 이끌 시기에는 에도성(江戶城)으로,제122대 왕인 메이지(明治·1868∼1912)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이후에는 도쿄성(東京城)으로 불렸다.막번시기에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쇼군(將軍)이 궁성의 주인이었으며 메이지 이후부터는 왕의 거주지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이에야스는 자신의위엄을 살리기 위해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大阪城)보다 훨씬 더 큰 궁성을 만들 것을 명령하였다.따라서 이 궁성은 그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이같이 오랜 기간 대규모로 축조된 궁성의외부에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해자(垓字·궁성 밖으로 둘러서 판 연못)가 이중으로 설치돼 있다.해자는 간다천(神田川)에서 북서방향으로 우시고미·이치가야·요쓰야·아카사카 등을 띠를 두르듯 감싸고 있다.그리고 궁성에는 아카마쓰 성문(파수꾼이 망을 보는 바깥쪽 성문) 등 36개의 성문이설치돼 있다.현재는 안쪽 해자로 둘러 싸인 약 30만평의 땅에 궁성이 조성돼 있고,현 일왕 아키히토(明仁)가 이 곳에 살고 있다. 일본의 이같은 왕궁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부터는 한국 의·열사들이 폭파대상으로 삼은 주요 목표물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그곳에 거주하는 일왕 역시 처단대상이었다. 김지섭(金祉燮) 의사의 ‘이중교의거’ 이외에도 1932년 1월 8일에는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왕궁의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김 의사가 폭탄을 던진 이중교는 궁성 정문 앞에 있는 다리.이중으로구성돼 있다고 해서 이중교(二重橋)라고 부른다.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다. 채영국 연구원
  • MBC‘안녕! 노디’주인공 동화책서도 인기

    캐릭터가 동화책시장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MBC TV ‘안녕! 노디’와 함께 캐릭터가 알려지면서 출간된 ‘노디’ 책들이 국내서도 붐을 일으키고있는 것이다.‘노디’는 영국여왕만큼 유명하다는 영국의 대표적 캐릭터.1차분 4권의 인기에 힘입어 2차분 시리즈 4권이 예상보다 빨리 출간됐다. 1권 도깨비와 착한 일,2권 우쭐대는 삐뽀아저씨,3권 큰귀 할아버지는 구조대장,4권 콩콩이는 착한 일을 하고 싶어요 등 어린이에게 지켜야할 예의,우정과 동심의 꿈을 ‘노디’를 통해 보여준다. ‘노디’는 영국의 아동문학가 애니드 블리튼(1897∼1968)이 쓴 동화의 주인공으로 1946년에 탄생했다.작가는 1만여편의 동화를 집필,40여개 언어로전세계 60여개국의 어린이들에게 읽혀졌는데 그중 ‘노디’시리즈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번 시리즈는 ‘노디’의 퍼즐과 스티커가 덧붙여졌고 표지의 뒷부분에 장난감나라 지도가 실려있어 또다른 재미를 준다.앞으로 ‘노디가 잠들 때 들려주는 이야기’,‘노디 시계책’등 노디와 관련된 책이 계속 출간될 예정이다.중앙출판사 각권 5,000원. [허남주기자]
  • 소프트뱅크 손정의사장 다룬 책 2권 출간

    “나의 목표는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다”.인터넷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재일교포3세 기업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42)의 미래의 꿈이다.그의 꿈은 허황된 환상이 아니다.그는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가는 인터넷 고속도로를 가장 앞서서 달리고 있다.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 7월호는 ‘인터넷의 지배자’,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사이버 엘리트’,뉴욕타임스는 ‘인터넷 제국을 일군 황제’라는 헌사를 그에게 보냈다. 동양의 빌 게이츠라는 별명이 이제는 오히려 어색한 손정의에 관한 책이 두권 번역·출간됐다.‘손정의의 21세기 경영전략’(이시카와 요시미 지음 이정환 옮김,소담출판사 8,000원)과 ‘손정의:인터넷 제국의 지배자’(다키다세이치로 지음 양억관 옮김,황금가지 7,500원) 등이다. 이 책들은 다같이 벤처기업에서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가로 성장한 손정의사장의 삶과 기업경영을 다루고 있다.다만 ‘손정의 21세기 경영전략’은 기업경영에,‘손정의:인터넷 제국의 지배자’는 손정의 개인의 감동적인 휴먼스토리에 약간의 무게를 더 두고 있다. 손정의는 인터넷 혁명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예측한다.그가 말하는 정보혁명의 네가지 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의 핵심도 인터넷이다.정보혁명의 첫번째 단계는 아날로그 정보 테크놀로지,두번째는 아날로그 정보 서비스,세번째는 디지털 정보 테크놀로지,네번째는 디지털 정보 서비스다. 그는 2단계에서 3단계로 힘의 중심이 이동한데 이어 이제는 4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한다.“미국의 경우 3단계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인텔·시스코·오라클 같은 회사들의 주식 총액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2단계 회사인 타임워너·디즈니·뉴스 코퍼레이션 같은 회사들을 압도하고 있다.그러나역사의 수레바퀴는 빠르게 돌아 이제는 4단계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4단계 회사의 시가 총액은 1단계·2단계·3단계를 모두 합한 규모를 초월할 정도로거대해질 것이다”. 그는 특히 기업경영에서 시대의 흐름을 단순하게 읽어내라고 권고한다.“텔레비전이 편리하기 때문에 널리 보급됐듯이 컴퓨터나 인터넷의 흐름에 대해서도 망설이지 말고 사람들에게 편리하니까 확산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해야한다”.그는 야후에 투자할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정보를 공짜로 제공하고 광고로 수익을 얻는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이것이다’라고 생각했다.정보를 공짜로 제공하니까 급속도로 확산될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수있다고 확신했다.인터넷 광고수입은 TV·라디오·신문의 광고규모를 넘어설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만약 내가 국가의 리더라면 인터넷 고속도로를 10년동안 무료로 사용하도록 하겠다.인터넷이 10년동안 공짜라면 일본의 뒤처진 정보산업을 단숨에 만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컴퓨터가 인간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예측한다.“30년후에는 컴퓨터의 뇌세포라 할 수 있는 컴퓨터 소자의 수가 6조개가 될 것이다.그러나 인간의 뇌세포는 300억개이다.‘뇌세포’의 수가 200배 이상 차이나 남으로 당연히 컴퓨터가 더 현명해질 것이다.나는 그런 세계를 구상하고 있다”. ◆손정의 사장 프로필?1957년 일본 규슈에서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났다.할아버지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간 광원이었다. ?74년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클리 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 ?82년 일본으로 돌아와 소프트뱅크 설립.소프트뱅크는 국내외 7,000여명의직원을 가진 거대 그룹으로 성장. ?98년 온라인 증권회사 E트레이드 설립.98년 ‘포브스’선정 세계 9위 갑부 (자산 22억달러)?현재 ‘야후 Japan’ 등 120여개의 인터넷 관련 기업 장악. 이창순기자cslee@
  • 金대통령 ‘여름휴가 구상’ 뭘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앞으로 풀게 될 휴가 구상은 뭘까.김대통령은 1일오전 1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와 중부지역 집중호우로 인한 재해대책을 관계부처에 지시하는 등 정상업무에 복귀했다.지난달 25일 오후 경남 진해 휴양시설로 내려갔다가 태풍의 북상으로 하루 동안 머문 뒤 청남대로 옮겨 나머지 일정을 보낸 지 꼭 1주일 만이다. 김대통령은 청남대에 머물면서 무엇보다 낚시와 산책,독서 등으로 충분한휴식을 취했다고 박준영(朴晙瑩) 청와대대변인이 전했다.피터 드러커와 브라이언 아서 등의 공저인 ‘지식자본주의 혁명’ 등 가져간 책은 거의 완독을했다고 한다.29일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과 면담한 김대통령은 30일에는세 아들 부부와 손자·손녀를 불러 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로 돌아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휴가기간중 청남대를 다녀간 인사는 청와대 황원탁(黃源卓) 외교안보수석과 박대변인,국민회의 의원 등 3명으로 확인되고 있다.황수석과 박대변인은 코언 미 국방장관과의 면담 때문이었고,국민회의 의원은극히 개인적인 일로방문했다고 한다. 김대통령은 이번 휴가에서 8·15 경축사뿐 아니라 보다 큰 구상,즉 동북아안보와 신(新)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 등을 숙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는 세세한 정책이나 조치를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박대변인도 “코언 미 국방장관 면담에 따른 대(對)언론 브리핑후 김대통령과 30∼40분 동안 얘기를 나눴다”며 “당시 김대통령은 북한 미사일과 관련된 동북아 안보질서의 변화와 21세기 무한 자유경쟁시대 속에 지역갈등으로인한 국가에너지의 낭비 및 지역·집단 이기주의의 폐해 등을 크게 고민했다”고 전했다.김대통령은 또 “작은 나라일수록 외교가 강해야 하는데…”라며 보불전쟁 등 세계사의 격변상황을 언급했다고 한다. 박대변인은 “김대통령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앞으로 이와 관련한 좀더 발전된 큰 구상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이 사람…송파구보건소 기능직8급·서예가 김재신씨

    “생이 다하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을 겁니다” 서울 송파구 보건소 보건행정과에는 이순(耳順)을 앞두고도 두마리 토끼를잡기위해 열정을 아끼지 않는 이가 있다.20여년을 공직에 몸담아온 공무원이지만 서예가로 더 잘 알려진 김재신(金在信·57·기능8급)씨. 그는 지난 20∼23일 세종문화회관 1·2·3전시실에서 서예전시회를 가졌다. 일반인이 세종문화회관 3개의 전시실을 모두 대관,개인전시회를 갖는 것은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전시회에는 단군의 천부경과 천부인,애국지사들의 우국시편,불경의 금강경,팔만대장경의 경문목록 등 김씨가 지난 12년동안 써온 작품 109점이 전시됐다.근무를 해야 하는 낮시간을 피해 밤과 공휴일을 이용,틈틈히 작품활동을한 결실이다. 김씨는 80년대 초반부터 병마와의 싸움을 계속해오고 있다.이런 그가 몸 구석구석을 떼내고 잘라내면서도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서예다.어린시절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배웠던 한학을 기초로 차근차근 서법을 연마하며 병마를 이겨냈다. 서도(書道)를 향한그의 굳은 의지는 결국 92·93년 대한민국종합미술대전특선을 시작으로 92∼95년 4차례에 걸친 한국서화예술대전 특선,99년 예술대전 우수작품상 수상 등으로 이어졌다.김씨는 “아픈 몸에 때로는 절필(絶筆)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준 서예를 버릴 수는 없었다”면서 “이제는 일과 작품에 다 열중할수 있어 붓을 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졌다. 최여경기자 kid@
  • 달라진 위상 어디까지 왔나

    만화에 대한 사회의 대접이 달라졌다.청소년 유해매체물로 낙인찍혀 걸핏하면 여론의 뭇매를 맞던 ‘천덕꾸러기’에서 ‘21세기 문화산업의 총아’로떠오르고 있다. 단속만을 일삼던 정부는 지난 3월부터 한달에 한번씩 좋은 만화를 선정해공공도서관에 비치하는 ‘전향적인’태도를 취하고 있다.만화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채택한 부천시는 지난 4월 ‘만화정보센터’를 세우고,만화산업주식회사 (주)PCN에 대주주로 참여했다.그런가하면 경희대 수원캠퍼스는 도서관에 만화방을 개설했다. 10년 넘게 양자대결 구도를 유지해 온 출판만화시장은 올들어 일대 격변을맞고 있다.서울문화사와 대원이 팽팽하게 맞서온 시장에 시공사가 뛰어들면서 삼파전을 벌이게 된 것.지난해부터 월 평균 15권 안팎의 단행본을 내놓으며 기회를 노려온 시공사는 지난 10일 격주간 순정만화잡지 ‘케이크’창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시장진입을 선언했다.만화잡지도 우후준숙격으로 늘어나면서 1,000원짜리 상품도 선보였다. 만화에 관한 책들 역시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다.유럽 8개국의 만화문화를짚은 ‘유럽만화를 보러 갔다’(이동훈)나 일본 만화를 집중 분석한 ‘아니메가 보고 싶다’(박인하 외)‘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이명석)등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만화평론가란 직업도 이제 낯설지않다. 만화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90년 국내 처음으로 공주문화대학에 만화예술과가 개설된 이래 지금까지 30여개 대학에 만화관련학과가생겼다. 그는 “선진국에 비해 늦긴 했지만 만화에 대한 인식이 점차 개선되고 있는점은 다행”이라면서도 ‘만화진흥법’이나 ‘만화진흥공사’등과 같은 정부의 획기적인 지원책이 미흡한 점을 아쉬워했다. 이순녀기자 * 공공박물관 교육강좌 수강생 북적 공공 박물관,문화재청 등 문화재 관련 기관의 문화교육강좌가 인기를 끌고있다.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일반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과 충족욕구가 높아지기 때문이다.문화재기관의 사회교육기능이 강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국립 중앙박물관은 지난 5일 ‘어린이박물관교실’에 참여할 수강생을 모집했다.당초 아침 9시부터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초등학생들은 새벽 5시부터 부모들 손을 잡고 몰려 들었다.이 때문에 접수도 받기전에 모집인원이 넘어 버려 뒤늦게 온 사람들을 돌려 보내느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중앙박물관은 또 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실시하는 노인문화강좌와 주부문화강좌의 수강생도 지난해 174명,153명에서 올해는 217명,214명으로 늘렸다.박물관은 이와 함께 ‘오늘은 박물관에’와 ‘대학·대학원생박물관실습’코너를 신설하는 등 프로그램도 다양화했다. 국립 민속박물관도 지난해 여름방학 인기를 끈 ‘청소년 민속문화탐방’프로그램을 올해 더욱 확대했다.400명이던 수강인원을 600명으로 200명 늘렸고 초등학생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누어 고학년생에게는 짚·풀 공예교실로,저학년생에게는 종이로 거북선 등을 만드는 페이퍼 매직으로 세분화했다.또초등학생과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허수아비 만들기,할머니·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할머니·손녀 공예교실 등도 준비돼있다. 민속박물관은 앞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우리문화체험,공예교실 등을 새로 선보일 방침이다. 지난 19일 창경궁에서 처음으로 열린 문화재청의 ‘고궁 청소년 문화학교‘에도 300여명이 참석했다.고궁 청소년 문화학교는 서울시내 5대궁을 둘러보며 고궁의 연혁과 전통건축,조경 등에 대해 배우는 것으로 지난해 여름에는모두 30회 열려 1만638명이 교육을 받았다. 중앙박물관 최무홍 섭외교육과장은 “유물전시는 박물관에 한번 오게 하는데 그치지만 문화강좌를 통해 일반인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박물관 찾기가 생활화된다”며 “박물관도 사회교육을 통해 서비스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태순기자 stslim@ * 만화의 상상력 세상을 사로잡다 만화가 문화의 지형도를 바꾼다.90년대 중반이후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졌을 뿐더러 영화,드라마,연극,미술 등 전방위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애들 장난’쯤으로 치부해온 만화 기법이 할리우드 첨단 SF영화에 즐겨 차용되는가 하면,‘유치하고,황당하다’고 폄하되던 순정만화스토리가 드라마와 연극의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 개봉된 ‘와일드와일드웨스트’를 비롯해 ‘매트릭스’‘맨 인 블랙’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SF물들은 만화적 상상력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만화에서나 볼 법한 기발한 장면들을 현란한 컴퓨터그래픽으로 현실화시켜 관객을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이런 영화에 발을 구르며 열광하는 관객층은 대부분 만화를 보며 자란 만화세대들.그렇지 않은 이들은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아니면 ‘말도 안되는 얘기’라며 비웃는다. 지상 최대의 영화공장 할리우드가 만화에 눈돌리는 이유는 뭘까.만화평론가 이명석씨는 “과학의 발달로 영화의 표현영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풍부한 상상력과 실험적인 형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분석한다.영화가 기술적인 제약에 묶여있는 동안 저예산 실험장르인 만화는 끊임없이 소재와 형식을 개발해 왔고,수십년간 축적해온 아이디어를 이제 영화에 수혈할 때라는얘기다.만화적 상상력을 첨단 기술력으로 스크린에 형상화하는 할리우드 SF영화의 경향은 앞으로 더욱 심화된다는 게 그의 설명. 국내에서는 TV드라마가 ‘만화 따라하기’에 앞장서고 있다.얼마전 SBS에서 방영된 ‘토마토’는 일본 만화 ‘해피’를 베꼈다는 의혹에 시달릴 만큼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구성이 ‘만화적’이었다.단순함을 넘어 유치하기까지한 이 드라마는,그러나 50%에 가까운 시청률을 올리는 이변을 낳았다.비슷한 시기에 KBS는 황미나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우리는 길잃은 작은새를 보았다’를 방영했다.지난해에는 허영만의 만화를 기본 뼈대로 삼은 SBS ‘미스터Q’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드라마뿐만 아니다.지난달 말부터 대학로 은행나무소극장에서 장기공연중인 연극 ‘유리가면’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동명의 일본 순정만화가 원작.단순히 스토리만 빌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만화적 판타지를 무대위에 재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화가 박관욱씨는 이달 초 경복궁옆 현대화랑에서 연 개인전에서 추상화속에 만화주인공 미키마우스를 그려넣은 독특한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이질적이고 낯설지만,고정관념을 가볍게 뒤엎는 기발함이 신선하다는 평이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영화로 만들어져 반응이 신통치 않았던 80년대와지금은 사회환경이 엄청나게 달라졌다.만화방에서 어른들 몰래 만화를 본 이전 세대와 달리 당당하게 만화책을 사서 보며 자란 지금의 20∼30대는 모든문화에서 만화적 요소를 즐기길 원한다”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만화에 익숙한 세대가 기성세대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이같은 배경에는 일본 만화문화의 영향이 크다.익히 알려졌다시피 70년대이후 일본 만화는 애니메이션,캐릭터,영화,드라마,소설 등으로 확대 재생산되며 일찌감치 문화산업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일본이 이미 20년전 개척한 황금산업에 우리는 이제 겨우 손댄 셈이다. 만화 기법 혹은 만화 코드가 장르를 초월해서 확산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영화나 드라마,소설 등 타장르가 히트한 만화를 노리는 가장 큰이유는 그만큼 위험부담이 줄어드기 때문이다.김지룡씨는 “남의 인기에 편승하다보면 기초체력이 부실해 질 수 있다”면서 “한쪽에서는 돈을 벌고,다른 쪽에서는 실패할 각오를 하고 다양한 실험에 재투자하는 일본의 문화정책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어찌됐든 만화가 세상을 움직일날도 그리 먼 미래의 얘기만은 아닌 듯하다. 이순녀기자 coral@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언더우드목사 白骨되어 한국에

    연세대 설립자인 고(故) 언더우드(원두우·元杜尤) 목사가 83년만에 제2의고국인 한국에 돌아왔다. 오는 19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서울 외국인묘지공원에서는 각계 인사들이참석한 가운데 박사의 탄생 140주년과 이장(移葬)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박사의 유해는 지난 5월20일 이미 이장됐다. 1916년 발진티프스병이 악화돼 요양차 미국으로 떠났던 박사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 해 10월12일 57세로 별세,뉴저지주의 작은 교회에 묻혔다.당시 박사의 시신을 한국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부인인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뜻에 따라 이장을 위해 준비해둔 비용을 유치원 건립비로 썼다. 이장보다는 한국의 교육시설 확충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96년 박사의 80주기 기념예배에서 후손들은 박사의 부인과 외아들원한경(元韓慶)박사 부부,그리고 장손인 원일한(元一韓·82)박사의 부인이묻힌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이로써 언더우드가의 ‘가족묘’가 한국에 완성된 셈이다. 4세 때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박사는뉴욕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인도로 가기를 희망했다.그러나 뉴브런스윅 신학교를 졸업한 1884년 주미대사였던 명성황후의 오빠 민영익(閔泳翊)을 통해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1885년 4월 인천에 도착한 박사는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을 만들었다.1889년에는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간행했다.1897년에는 순 한글신문인 ‘주간 그리스도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887년에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모체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일제 초기인 1912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형으로부터 5만2,000달러라는 거금을 받아 세상을 뜨기 한해 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언론에도 관심이 많았다.선교와 교육 활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했다.장손인 원일한 연세대 상임이사는 “할아버지는 특히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과 가깝게 지냈고 교육과 언론의 사명에대해 자주 의논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사는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동상에 새겨진 글귀대로진정 ‘하나님의 사자(Messenger of God)’로 이 땅에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Follower of Christ)’로 살다가 ‘한국인의 친구가 된 사람(Friend of Korea)’이었다. 이지운 김미경기자 jj@ - 언더우드家 3代 안장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소장 李康泌)은 마포구 합정동 145 당산철교 근처에있다. 지난 1890년 고종황제가 장로교 선교회 소속 미국 의료선교사 존 해론박사의 장지로 이 땅을 기증한 것이 시초가 됐다.이때부터 미국을 비롯해 호주,벨기에,캐나다,프랑스,백러시아,독일 등 11개국 외국인 500여명이 묻혔다.선교사 뿐만 아니라 백러시아에서 온 피난민들,외교관 및 군 관련 외국인들도포함되어 있다. 공원 뒤쪽에 바로 언더우드 일가의 묘지가 있다.최근 이장한 언더우드 박사를 비롯해 부인 릴리아스,아들 원한경(元漢慶),며느리 와그너,손자 일한(一漢)씨의 부인 원성희씨가 묻혀 있다. 이외에도 지난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최초의 미국감리교선교사로서 배재학당 창시자인 아펜젤러,고종의 밀사로 1907년 이준 열사와 함께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헐버트,이화학당 창시자스크랜튼,세브란스 병원설립에 참여한 애비슨 등이 안장돼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박찬호 현지 반응…다저스 ‘전폭 지원’-매스컴 ‘비신사 행위’

    애너하임 팀 벨처와의 싸움으로 퇴장당한 박찬호에 대해 반응이 엇갈리고있다.박찬호가 소속된 LA 다저스의 관계자 및 팀 동료들로부터는 침체된 분위기를 북돋운 선봉장으로 부각된 반면 현지 언론들은 박찬호의 행동을 꼬집고 있다.특히 박찬호의 옆 라커를 쓰고 있는 2루수 에릭 영은 박찬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그는 전날도 박찬호를 감싸는 발언으로 주목을 끌었다. 박찬호는 7일 다저스타디움 연습장에서 러닝머신으로 땀을 빼고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는 등 정상적인 훈련을 했다.박찬호는 “잠도 푹 자고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며 컨디션은 정상이라고 밝혔다.가족들이 험악한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았냐는 질문에 “앞으로는 싸움도 잘 해야 될 것 같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소개.박찬호는 이날 경기전 다저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포토데이’행사에 참가,팬들과의 사진촬영에 응하며 전날 사건과는 아랑곳 없이 ‘인기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현지 언론들은 박찬호가 전날의 행위에 대해 3∼5경기 정도의 출장정지가내려질 것으로 전망.지난92년 클리블랜드의 샌디 알로마 주니어는 디트로이트의 투수 존 돈허티를 발로 가격하고 3게임 출장정지를 당한 바 있다.한편현지 매스컴은 스포츠칼럼란을 통해 박찬호가 발로 걷어찬 일은 비신사적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송한수기자
  • 양승희씨,김창조-김죽파류 가야금 산조 7일 연주

    80년전 타계한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1856∼1919)와 10년전 돌아간가야금의 명인 김죽파(1911∼1989) 산조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죽파류 가야금 산조의 맥을 이어온 양승희(51·가야금산조 준인간문화재)는 오는 7일 오후 7시 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김창조와 김죽파 가야금 산조를 차례로 연주한다. 양씨는 죽파 선생으로부터 “김창조는 죽파 선생의 친할아버지였으며 8살때까지 할아버지 밑에서 가야금을 듣고 익혔고 이후에는 제자 중 한사람인 한성기에게 가야금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김창조 악보를 연주하면서 죽파 선생의 산조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양씨가 지난 90년 중국공연때 연변대 김진교수로부터 입수한김창조의 가야금산조 악보와 북한의 연구자료를 토대로 한 것으로 가야금 산조 원형이 연주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02)518-7343. 강선임기자 sunnyk@
  • 제3회 참전수기 호국문예작품공모 /최우수작

    대한매일신보사와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주관한 제3회 참전수기 및 호국문예작품 공모에서 구일모(안산 석수초등학교 3년)군이 출품한 ‘현충일’이 초등부 시부문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초등부 수필부문 최우수작은 변유영(대구 불로초등학교 6년)양의 ‘할아버지의 눈물’이 선정됐다. 중·고등부 시부문 최우수상은 이한주(경북 청송여중 2년)양,수필부문 최우수상은 김보경(부천 시온고 3년)양에게 돌아갔다. 일반부 시부문 최우수상은 곽홍란(여·대구 수성구 시지동 135-14)씨,수필부문은 강정(여·대구시 수성 수성4가 보성아파트 101동 1906호)씨가 선정됐다. 참전수기 부문에서는 최종태(경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112 주공하얀마을6단지 608동 402호)씨의 ‘국군이 된 인민군분대장’이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응모 작품은 모두 3,500편이었으며 당선작은 모두 35편이다. 입상자에게는 상패와 10만∼1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오는 6월3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 호국문예 詩 최우수작 현충일 구일모(초등부) 난 현충일에 생각했어요 동작동 국립묘지 언덕에 앉아서 수많은 비석이 보였어요 너른 언덕에 가지런히 서 있는 비석의 날짜와 이름이 선명했어요 목숨 바쳐 가신 분들 한사람 한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이런 것이 애국심이구나 혼자 생각했어요 이젠 나도 더욱 바르고 씩씩하게 생활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소나무 가지에 지저귀는 새 한마리 푸드득 날아가는 언덕에서 난 물끄러미 하늘을 보며 현충일날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기에 적어 볼래요나의 꿈 이한주(중고등부) 나는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분단된 우리 땅 휴전선 싸악 지우고 평화를 그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고 싶습니다 하얀 꿈을 싣고 평화의 날개로 떠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줄기 강물이 되고 싶습니다 한움큼 햇살이 뿌려둔 행복의 씨앗을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전해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작은 눈물이 되고 싶습니다 가슴속 깊숙히 새겨둔 아픔과 슬픔을 싸악 지우고 자유를 싹틔우고 평화를 피워서 행복이란 열매를 맺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작은 행복이 통일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다부원에 피는 꽃 곽홍란(일반부) 아버지 다부원에는 풀꽃이 느낌표로 핍니다 초록보다 더 푸르른 청춘을 내어 걸고 산허리 솟은 혈맥을 골골이 넘습니다 한 마리 풀벌레조차 못 죽이던 사람들이 제주에서 평양으로 뜻 다른 이 찾아 총부리 겨누던 한숨이 저리 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부원에는 뭇별들도 꽃이 됩니다 이름을 가진 장미나 백일홍,목련꽃보다 제 이름 알 수 없는 꽃이 여기선 더욱 곱습니다 주리고 비틀어진 낙강의 허리채 안고 끝끝내 깍지 끼어 목숨으로 바꾼 이들, 오늘은,그 넋들이 내려 꽃으로 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부원에는 풀꽃들도 꿈을 꿉니다 흩어진 전우들의 깊은 잠,잠시 깨워 생채기진 군복일랑 벗어 색동으로 갈아입고 차마 못다 푼 한은 두견에게 맡겨 두고 피어린 능선을 넘고 넘어 그리운 이름들과 백두대간 오고 가는 저 환한 웃음에 오늘은,내가 잔을 올립니다
  • 日 지식인·재일동포 학자 18인 ‘국가주의를 넘어서’

    일본의 양식있는 지식인들이 국가주의 극복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다.그들은 ‘국가주의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배타적 국가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일본의 이러한 ‘양심의 소리’을 담고 있는 책의 저자는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46) 도쿄대 교수(문학),다카하시 데츠야(高橋哲哉·43) 도쿄대 교수(철학)를 비롯한 14명의 일본 지식인과 서경식·이연숙·이효덕·강상중 등4명의 재일동포 학자들이다.(삼인출판사 이규수 옮김 1만2,000원). 그들은 왜 지금 국가주의 극복을 외치는가.그들의 외침은 과거 침략행위의사죄를 거부하는 ‘광기의 국가주의’가 일본사회에 팽배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일본의 국가주의는 90년대 중반부터 ‘자유주의 사관’‘수정주의 역사관’ ‘건전한 네오 내셔널리즘’ 등의 현란한 수사 속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자유주의 사관 선도자들은 후지오카 노부가츠(藤岡信勝) 도쿄대 교수(역사학),사회운동가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만화가인 고바야시(小林)요시노리를비롯한 보수·우익 지식인과 정치인들이다.그들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다카하시 교수는 그들의 역사인식은 고바야시의 만화에 상징적으로 나타나있다고 말한다.고바야시는 ‘전쟁론’이라는 만화에서 “대동아전쟁은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아름답고 잔혹한 그리고 숭고한 싸움이었다”고 말한다.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전쟁론’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며 수백만부가 팔려나가고 있다.오늘의 일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섬뜩한 지표다. 일본판 ‘네오 내셔널리스트’들은 현재 일본 교과서의 역사관을 일본인 자신을 비하하는 ‘자학(自虐)사관’이라고 비판한다.그들은 자학사관의 극복을 위한 명분으로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를 내세우고 이를 ‘새로운 역사교과서’ ‘일본 정사(正史)’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요시에 아키오(義江彰夫) 도쿄대 교수(역사)는 “일본 교과서가 자학사관으로 서술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고말한다.“자유주의 사관은 과거의 잘못을 고치는 일을 ‘자학’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뿐만아니라 배외적·국수주의적 가치체계를 수립하려는 단편적이고 위험한 사상”이라고 경고한다. 자유주의 사관의 발원지는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96년 사망)의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그는 68년 4월부터 72년 8월까지 연재한 ‘언덕 위의 구름’에서 청일·러일 전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70년대 초 경제대국으로의 전환기를 살아가던 일본인들에게 긍정적인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후지오카 교수 등은 시바의 역사인식을 배경음악으로 자유주의 사관의 나팔을 불고 있다.그들의 화음이 ‘침략전쟁은 할아버지들의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일본이다. 일본의 양식있는 지식인들은 자유주의 사관을 비판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그러나 그들의 경고는 ‘소리없는 아우성’일 뿐이다.일본사회는 언제나양심의 소리가 있어왔다.그러나 그들은 주류가 아니라 일본사회 변방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창순기자
  • 칭찬해요-보험설계사 韓鍾喆씨

    19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종합사회복지관 지하 1층 경로식당에 임시 사진관이 차려졌다. 5년째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무료로 영정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한종철(韓鍾喆·49)씨가 40여명의 무의탁 노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어색한 듯 카메라 앞에 앉은 노인들이 “쭈글쭈글한 얼굴,대충 찍으라”고타박하자 한씨는 “예뻐요,웃어보세요”라고 받아넘긴다.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차례를 기다리던 노인들은 생을 마감했을 때 쓸 사진을 찍으면서도 웃음꽃을 피웠다. 한씨는 “생전에 수의를 마련해 두고 싶어하듯 영정사진을 갖고 싶어 하지만 4만∼5만원하는 비용 때문에 고민하는 노인들을 보고 봉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가 카메라와 조명기구를 메고 영정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95년.우연히탑골공원에 갔다가 고희를 넘긴 한 할아버지로부터 “영정사진에 쓰게 크게뽑아달라”는 부탁을 듣고서였다. 사진찍기는 배문중·고교를 졸업한 뒤 80년 YMCA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배웠다.그 뒤 장애자 및 비행청소년 등 불우 청소년들에게사진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광주 금호·빛고을 복지관과 부산 연제·어진샘 복지관을 찾아가 300여명의 사진을 찍었다.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한씨가 찍은 영정사진은 1,500여장이나 된다. 한씨도 형편은 어렵다.자신이 경영하던 판촉물 회사가 지난해 부도나는 등고초를 겪었다.현상비가 없어 지난해 12월부터 보험설계사로 취직해 비용을대고 있다.영정사진 1장에 드는 재료비는 필름값과 인화비,액자비 등을 합쳐 5,000원 정도.요즘은 사진을 원하는 노인이 많아 박봉을 쪼개기조차 힘들다.지난 3월 이후 찍은 600여명의 사진을 주인공들에게 돌려주지 못해 못내 안타깝다. 그래도 봉사를 멈출 생각은 없다.한씨는 “뜻을 같이 할 후원자가 나타나면장애인 시설과 양로원도 방문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장애인 양부모 11년간 봉양 오뚜기부대 金龍植상사

    육군 상사가 11년째 장애인 노인부부를 친부모처럼 돌보고 있다. 육군 오뚜기부대 본부대 행정보급관 김용식(金龍植·38)상사.시각·언어장애인 김진호(65)할아버지와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부인 양순이(66)할머니와의 인연은 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격대 교관으로 근무하던 김상사는 동계훈련중 우연히 가난하게 살던 김씨 부부 집에 들렀다.딱한 처지를 본 김상사는 그 때부터 쌀과 고기,옷가지를갖다주고 말상대도 해주며 부모처럼 모셔왔다.노인 부부의 생활비도 모두 김상사 부부 몫이다. 부인 한영자(韓英子·35)씨도 시부모 이상으로 모신다.한씨는 갈비식당 설거지를 해주고 하루에 2만원을 벌어 모두 할아버지 부부의 생활비로 보탠다. 김상사는 “아버님은 비록 앞도 못보시고 말도 못하시지만 제 손을 잡으면알아보신다”면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정말 부모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양부모를 모셔온 김상사 부부의 선행이 남들에게 알려진 것은 지난해 6월.김할아버지가 한영자씨에게서 용돈으로 받은 10만원짜리 수표를 쓰는 것을 주민들이 봐 소문이 났다. 김상사 내외는 주말이면 딸 미혜(13)양과 아들 재광(11)군을 데리고 할아버지댁에서 하루를 보내며 경로효친(敬老孝親) 정신을 가르친다.앞을 못보는김할아버지는 김상사가 오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김상사는 마을노인들을 위해 명절때면 경로잔치를 여는 등 선행도 베풀고 있다.8남매중 막내인 김상사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때 별세했고 어머니는 큰형 가족과 함께 산다.김상사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배운다”면서 “효도는또다른 효도를 낳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현진기자 jhj@
  • 폐쇄 파출소 주민공간으로 새 단장

    주택가와 빌딩 사이에 방치된채 도시미관을 해쳐오던 폐쇄된 파출소들이 지역주민들의 복지 및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산뜻하게 새단장한 모습으로 속속선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구조조정 과정에서 서울시가 인수한 통·폐합 파출소는 모두 35곳. 시는 이들을 매각이나 자치구 위임 등을 통해 독서실이나 지역 마을금고,공중휴게화장실로 개조하는 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이에 따라 종로구의 대묘파출소는 지체장애인 보호작업장으로,안국파출소는 종로의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공보전시장과 강의실로 환골탈태했다.또 은평구의 대광파출소는 공공근로 사무실과 환경미화원의 휴게실로,관악구의 봉천5파출소는 봉천5동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유일한 휴게소인 경로당으로 재탄생했다. 아직 용도가 결정되지 않는 폐지 파출소 24곳 가운데 14곳도 주민복지향상을 위한 곳으로 거듭날 채비를 하고 있다. 광진구의 신노유파출소와 마포구의 공덕1파출소는 청소년들을 위한 독서실로 활용하고 서대문구의 연희1파출소는 실직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중소기업에는 일손을제공하는 공동작업장으로 사용할 예정이다.특히 신노유파출소는 1층을 마을금고로 활용해 폐지파출소의 활용도를 극대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중구 을지로7가파출소는 시에서는 종합관광안내센터로 활용할 구상이나 대한적십자사와 장애인단체는 각각 적십자혈액원과 구두판매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해놓고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시는 주요지점이나 재개발구역,사유지에 위치한 폐지 파출소 8곳은 매각하고 종로 한복판에 위치한 종로1가파출소와 마포구 신공덕파출소는 철거할 방침이다. 시 재산관리과 이상설(李相卨) 과장은 “파출소의 용도는 소유권,노후정도,사용희망 등을 적절하게 고려해 재활용도를 정했다”면서 “가능하면 관내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활용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 [역경을 딛고…]고대에 10억기증 崔丙順할머니 육필수기(1)

    평생 모은 재산 10억원을 고려대에 장학금으로 내놓은 최병순(崔丙順·84)할머니(대한매일 3일자 23면 보도).장학금 기증으로 ‘희망의 닻’을 내린감동 못지 않게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한다.할머니는 일제시대,광복 이후의 혼란기,한국전쟁,5·16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을 홀몸으로 견뎌냈다.부역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가난과 병마,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인내와 용기로 꿋꿋이 이겨낸 최할머니의 육필 원고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별안간 다리가 부러진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지난 세월이 떠올라 설움이 북받친다. 언제 뜰 지 모르는 세상,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이 몸에 소망이 무언가…,소망의 닻을 주리라’.즐겨 부르던 찬송가를 불러봤다.이제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유언 공증을 해야겠다.은행에 있는 돈과 집까지 모두 고려대학교에 내놓으려 한다. 가난과 병마,고통,불행으로 점철된 내 삶의 이야기도 함께 적는다. 지나온 날들은 밤과 같은 세월이었다.하루하루가 생존과의전쟁이었다. 어려서부터 찾아온 병마,손을 쓸 수 없었던 가난,젊은 세월을 옥죄던 봉건적 가족제,전쟁과 이념에 희생돼 치렀던 10년간의 옥살이….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병으로 죽어갈 때도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버텨냈다.‘빨갱이’라는 낙인에 등을 돌린 세상.이를 악물고 버텨왔다.식모살이,품팔이,행상,창녀촌 빨랫일,보모,극장 암표상 등 안해본 일이 없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운명이 또 있을까.인생의 행복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살아온 한 생.이제는 자식없는 설움과 고독만이 남았다. 나는 1915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에서 났다.할아버지와 아버지,어머니,삼촌,오빠,그리고 나 6식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5살 때였다.갑자기 목에 조그만 혹이 생기기 시작했다.불행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이른바 ‘연주창’이라는 것이었다.혹은 계속 커져만 갔다.고개를 가눌 수가 없었다.여름이 되니 열이 나고 곪아터져 고름이 나왔다.촌구석에 살다보니 고칠 수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혹은 눈으로,가슴으로,겨드랑이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병은 깊어지고 있는데 7살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가눌 시간도 없었다.곧바로 부뚜막 일을 시작했다.농사일도 거들어야 했다.학교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 때는 15∼17세면 결혼을 했다.그러나 나는 시집을 갈 수도 없었다. 병마에 시달린 지 14년.하늘의 은혜가 내렸다.18세되던 해 마을을 지나던한 노인이 집에 찾아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했다.자신을 ‘돌팔이 의원’이라고 소개한 이 노인은 맥을 짚어보더니 치유를 장담했다.하얀 가루를 솜에 뿌려 환부에 대고 불을 붙이니 고름이 쏟아졌다.몸에서 불이 나는 듯 했다.환부 이곳저곳에 여러차례 하니 고름이 모두 빠지면서 혹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내가 낫기를 기다렸다는 듯 19세 나던 해 근처의 마을로 나를 시집보냈다.고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엄청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남편은 노름과 술에 찌들어있던 사람이었다.집안 일을 돌보지 않고 나가서만 살았다.시댁에서는 남편이 해야할일을 나에게 강요했다.시댁은 많지 않은 논과 주변의 텃밭으로 근근이 생활했다.농사일과 막내 며느리로서의 집안일은 모두 내가 해야 했다. 시댁에서는 동짓달에도 방에 불을 때주지도 않아 늘 냉방에서 자야 했다.텃밭을 일구고 거름을 져 나르고,식사준비에서부터 설거지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잠시도 쉴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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