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진짜’ 할머니의 손
외화를 볼 때마다 부러운 것이 있다.엄청난 물량이나 혀를 내두르게 하는 특수효과가 아니다.사람,사람이 부럽다.8등신의 늘씬한 남녀배우가 아니라,결코 나이를 속일 수없다는 목주름에 저승점마저 가득한,‘정말’ 나이 든 배우들.나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생각해 본다.영화 ‘집으로…’에서 할머니 역할을 유명배우가 연기했다면,정말 그럴 듯하게 분장을 하고,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걸으며,용케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면 어땠을까.물론 연기는 훨씬 더 잘 했을 것이다.어쩌면 할머니보다 더 할머니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그리고,바로 그래서,보는 우리 마음은 한결 덜 흔들렸을 것이다.돌아가시던 날까지 머리를 빗어올려 쪽을 지셨던 나의외할머니는,초등학생만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참 큰손을 갖고 계셨다.일제치하에 조실부모하고 6·25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뒤 여든을 훨씬 넘기실 때까지 홀로 사남매를 키운 손이었다.그 손을 잡고 있노라면,100년 된 소나무를 안고 있는 듯,참으로 격정적이고 감동적이었다.내게할머니의 손이란,그런 것이다.‘진짜’할머니의 손.
이제 눈을 크게 만들고 코를 높이는 것쯤은 고장난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것 만큼이나 쉽고도 당연한 일이 돼버렸고,‘늙는 건 어쩔 수 없다.’던 어르신들의 푸념이 무색하게도 주사 한방이면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감쪽같이지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그래서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도록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는 배우들이 넘쳐난다.“도대체 저 배우 데뷔한 게 언제야.”하며 세월을 헤아려 보지만,막 데뷔한 신인 배우들과 나란히 있어도 자꾸만 나이를 잊게 만든다.엄마와 딸이라는데 자매 같고 친구 같기만 하다.나는 배우가 성형을 하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안타깝게도,연기력보다는 일단 예뻐야 기회를 갖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나이 먹은 배우가 자꾸만 사라지는 것은 안타깝다.아니,나이는 많은데 늙지 않는 배우들이 자꾸 많아져서정말 속상하다.지금 예쁘고 근사한 남녀 배우들이,앞으로20년,30년 후에도 변함없이 참 예쁘고근사한 ‘할머니’‘할아버지’ 배우로 늙었으면 좋겠다.그리하여 언젠가,나의 영화에,그렇게 멋진 노인들이 헝클어진 반백의 눈썹을가만히 찌푸리며 근사하게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고은님 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