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할아버지
    2025-09-05
    검색기록 지우기
  • 방콕
    2025-09-05
    검색기록 지우기
  • 교정기
    2025-09-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926
  • KBS2 ‘일요일은 101%’

    1984년 LA올림픽 레슬링에서 역대 두 번째 금메달을 딴 김원기,금메달 4관왕의 주인공 ‘신궁’김수녕,복싱의 김광선,유도의 안병근,역도의 전병관 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TV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100일도 채 남지 않은 2004 아테네 올림픽의 열기 조성에 나선다. 이들은 16일 방송되는 KBS2‘일요일은 101%’의 신설 코너 ‘슈퍼 챔피언’에서 이지훈,김이지,임혁필 등 연예인으로 구성된 ‘노메달’팀과 다양한 경기를 펼친다.이 경기에서 1등을 한 선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올림픽 꿈나무들에게 순금메달을 전달한다.그밖에 역대 메달리스트들의 노하우와 올림픽에 관한 정보도 전할 예정이다. 한편 ‘일요일은 101%’는 간판 코너였던 취업 프로그램 ‘꿈의 피라미드’를 독립시켜 일요일 오전 10시50분에 편성하는 등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했다. 23일 첫방송되는 휴먼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새 코너 ‘열혈남아’는 개그맨 이혁재가 6명의 남자 신인들과 함께 시골 할아버지를 찾아가 삶의 지혜를 배우고 효를 실천하는 내용으로 꾸며진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카퍼필드, 중국공연 성황 26일부터 내한공연 예정

    ‘그와 함께라면 그 어떤 상상도 현실이 된다.’ 자유의 여신상을 감쪽같이 없애고,공중에 뜬 채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통했던 ‘살아있는 마술의 전설’ 데이비드 카퍼필드(48)가 14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오는 26∼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앞두고 지난 10일 중국 상하이 그랜드 스테이지에서 열린 그의 공연을 엿보았다. “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그들의 꿈과 희망을 듣고 꿈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줄 때 기쁨을 느낍니다.” 카퍼필드는 상하이 관객들에게 그 말을 직접 증명해 보였다.상하이 그랜드 스테이지에 모인 5000여명의 관객은 1시간 30여분 동안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카퍼필드가 무시무시한 대형 선풍기 속으로 사라지고,‘선택받은’ 관객 두명이 소파에 앉은 채 허공에 떴을 때 공연장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특히 돋보였던 점은 이제까지 화려한 무대장치나 장대한 스케일의 마술을 선보였던 것과는 달리,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마술로 감동을 자아낸 것이었다.프로그램마다 관객들을 무작위로 불러내 공감할 수 있는 마술을 선보인 것도 신선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어린 카퍼필드가 가족과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보여주고,할아버지와 함께 즐겼던 추억을 되새기는 ‘카드 매직’은 마술의 신기함과 동시에 가족애라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작년에 개발해 이번 중국 공연에서 특별히 선보인 ‘로또 숫자 맞히기’ 역시 할아버지에 대한 카퍼필드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마술이었다.사람들이 꿈꾸는 로또 대박을 마술로 표현한 대목은 “사람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는 소망이 그대로 묻어났다.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작품은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진 카퍼필드가 관객석에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었다.이는 1990년 한국 공연에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었던 작품으로,무대가 아닌 관중석을 이용한다는 데서 독특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사라졌던 카퍼필드가 5000여명 관중 사이에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13차례에 걸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질 서울 공연은 상하이 그랜드 스테이지보다 공연장의 규모가 작아 더 아기자기한 맛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주최사인 서울예술기획 관계자는 “대규모 공연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밤 10시 심야공연을 열어,여름밤 특별한 데이트를 원하는 연인이나 퇴근시간이 늦은 직장인들에게 보다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02)3472-4480 상하이 하승희기자 kara@˝
  • 롯데家 조용한 결혼식

    신격호 롯데 회장의 외손녀인 장정안(31)씨가 9일 외할아버지인 신 회장을 비롯,외삼촌인 신동빈 부회장도 불참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딸의 결혼식을 개인적으로 치르겠다는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의 의지에 따라 화환이나 축의금도 일절 받지 않았고,계열사 사장단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장씨는 신 회장의 장녀인 신 부사장의 셋째딸이다.신영자 부사장의 둘째딸인 장선윤(34)씨는 롯데백화점 해외명품 1팀장으로 근무중이며,정안씨도 미국 유학 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과장급인 영캐주얼 바이어로 일하고 있다. 정안씨의 남편은 언론인 출신 이종명씨의 아들로 국제변호사 이승환(36)씨로 알려졌으며 결혼식은 롯데호텔 소공점 크리스털볼룸에서 치러졌다. 한편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된 지난해 10월 이후 7개월째 일본에만 머무르던 신격호 회장은 지난 5일 일본에서 중국으로 떠났다.한국과 일본을 격달로 오가던 것을 멈추고 중국으로 떠난 신 회장은 롯데제과의 중국 공장 추가 건설,롯데마트의 중국 진출,일본 세븐일레븐의 중국내 편의점 확대,롯데리아의 매장 확충 등 중국시장을 본격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윤창수기자 geo@˝
  • [11일 TV 하이라이트]

    ●PD수첩(오후 11시5분)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아간다.마산 여양리에서는 55년 전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골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발견된지 2년 만에 발굴작업이 시작되는 사정을 알아보고,현재까지 수습된 40여 구의 유골과 유품을 공개한다.말없는 유골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세계 세계인(오전 10시40분) 금연열풍이 통하지 않는 중국에서 금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장웨’씨를 만나본다.그는 길거리에서 흡연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피고 있는 담배를 강제로 끄게 하는 금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애연가들로부터 반발이 심하지만 계속해서 금연 캠페인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문화센터(오전 11시)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토리와 마시마로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본다.크기가 다른 시트 2개를 3단으로 샌드해 모양을 자른 후 두 시트를 서로 붙여 모양을 만들어 본다.초콜릿을 이용해 모양 만드는 법을 알아보고,다양한 깍지를 이용해 색소를 넣은 생크림 짜는 법도 배운다. ●TV요리천국(오전 9시20분) 지난 시간에 이어 가족을 위해 특별한 요리를 준비하고 싶은 날 특별한 저녁요리가 시작된다.집에서도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요리를 만들어본다.조개 토마토 소스 오레끼에테 파스타 & 파프리카 카포나타,아몬드 돼지 안심구이 & 아스파라거스 치즈그라탕에 도전해본다. ●오픈 스튜디오(오후 4시10분) 먹으면서 뺀다는 웰빙 다이어트.이중에서도 일본의 녹즙으로 알려진 청즙,그리고 각종 한방 차를 이용한 다이어트 비법은 건강을 챙기면서 쉽게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각각의 섭취방법과 효능을 알아보고 더불어 이들 재료를 이용한 다양한 목욕 법도 알아본다. ●인간극장(오후 8시50분) 화창한 봄을 맞아 남원으로 나들이를 떠나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할아버지는 나무를 가꾸러 농장으로 향하고 할머니는 전자오르간 연습에 열중한다.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나무를 심던 할아버지.나무를 키우는 데 다른 생각을 가진 노부부는 언성을 높인다. ●생로병사의 비밀(오후 10시) 성장호르몬 결핍으로 인한 왜소증은 100%치료가 가능하다.문제는 나중에 크겠지 하며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성장호르몬은 부족해도 병이지만 많아도 병이다.거인증과 말단비대증은 성장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인한 병이다.거인증과 말단비대증의 원인을 알아보고 키에 대한 궁금증을 푼다. ˝
  • 서울 중구 뿌리찾기, 토박이 손으로

    아직은 뭐니뭐니 해도 엄마 젖가슴을 가장 그리워할,겨우 일곱살배기가 600년 도읍지의 ‘토박이’라고? 한때 국가발전에 최중심 역할을 했지만 새 도심부의 도약과 함께 날로 쇠약해지는 서울 중구의 토박이들이 지역의 자존심을 걸고 똘똘 뭉친다. 서울 중구 토박이회(회장 김성완·신당5동)는 오는 12월 출범 5돌을 앞두고 주민,특히 청소년들의 고장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지역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중구 뿌리찾기 및 유물 발굴작업 등 다양한 사업을 시행한다고 9일 밝혔다. 토박이회는 중구의 뿌리찾기와 관련된 유적·유물을 발굴하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해 길이 보존토록 할 방침이다.이를 위해 각종 워크숍,세미나를 열고 향토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또 한문교실 운영,남산 가꾸기·기초질서 지키기 캠페인 등 지역 유지로서 사회선도에 앞장서는 운동도 활발하게 벌일 계획이다. 지난 1999년 발족한 중구 토박이회에는 현재 71명이 가입해 있다.중구 관내에 대물림해 70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주민이 그 대상이다.재미있는 점은 회원 가운데 최연소자가 이제 7세인 반면,가장 오래 중구에 거주한 세대가 무려 209년째를 기록한 것.서영우(1997년생) 회원은 아버지가 “3대째 중구에서 살고 있는데 쌍림동,그것도 1번지라는 자부심을 아들을 통해 새겨놓겠다.”며 지난해 이름을 올렸다. 서씨는 집안 사정으로 잠시 다른 곳에서 살아 회원 자격이 없는데,아들 영우군은 할아버지와 그 기간에도 계속 쌍림동에 살아 가입이 받아들여진 것도 이채롭다. 또 다른 회원 최동원(65·황학동)씨는 조선시대인 1795년 이후 현재의 중구 관내에서 선조들에 이어 거주했다는 사실이 족보 등으로 알려져 최고(最古) 토박이로 인증됐다. 송한수기자˝
  • [토요명화]

    ●존큐(KBS2 오후 11시10분) 철강노동자인 존 큐에겐 슈퍼마켓 시간제 점원인 아내와 야구광이자 보디빌딩팬인 열살짜리 개구쟁이 아들 마이크가 있다.한마디로 ‘가난하지만 행복한’가정.하지만 마이크가 야구 게임 도중 쓰러지면서 그들이 그려온 행복의 그림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하루 빨리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야하지만,짓누르는 가난과 엉망진창인 의료보험제도는 아들의 목숨을 더 빨리 조여간다.돈이 없어서 아들을 살릴 수 없는 존 큐는 결국 인질극이라는 극단을 선택하고 만다. 닉 카사베츠 감독은 아들을 살려내려는 눈물겨운 부정(父情)에다가 작정하고 사회비판의 메시지를 담았다.의료계의 비리와 허술한 사회보장제도 등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낱낱이 고발하는 것.하지만 너무 작위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구성 때문에 감독의 의도가 깊은 공감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눈물을 쏙 빼는 덴젤 워싱턴의 연기만큼은 인상적.2002년 작품.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아주로(EBS 오후 11시10분) 이탈리아 출신 데니스 라발리아 감독의 작품.2001년 스위스 영화제 작품상을 받았다.75세의 노인 주세페에게는 7살짜리 맹인 손녀 카를라가 가장 소중한 존재.안구를 기증해 줄 사람을 찾지만 쉽지 않고,설상가상으로 의사는 6000리라를 요구한다.잦은 심근 경색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할아버지는,어느날 아들 내외에게는 말하지 않고 무작정 카를라를 데리고 집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노인은 복잡한 과거의 문제들과 직면하게 된다.하지만 결국은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따뜻한 영화. ˝
  • 盧대통령 태몽등 미화 김해 관광안내서 ‘물의’

    경남 김해시가 발간한 관광안내 책자에 노무현 대통령을 지나치게 미화한 대목이 있어 물의를 빚고 있다. 7일 김해시에 따르면 가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알기쉽게 소개하기 위해 6000여만원의 예산으로 ‘잃어버린 왕국 가락국의 타임캡슐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만화책 5000여권을 발간했다.시는 최근 관내 초·중학교와 희망자에게 2000여권을 배포했다. 이 책은 김해지역의 문화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설명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97쪽에서 101쪽까지 5쪽을 할애,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노 대통령 생가를 소개하면서 태몽과 생가의 풍수지리를 자세히 기술했다. 태몽을 소개하는 부분은 노 대통령의 어머니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내 이 고삐를 줄테니 말뚝에 매어있는 저 말을 타고 가라.”고 말하자 어마어마하게 큰 말이 우렁차게 말굽을 내딛는 소리를 듣고 잠을 깼다고 소개했다.꿈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녀석 이담에 큰 인물이 되겠구만”이라고 말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생가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한 ‘감여가(풍수인)’들이 “좌청룡 우백호라.봉화산 중심 반경 4㎞안의 봉화산 정기가 보인다.”고 설명하는 광경을 그렸다. 이어 성장과정에 대해서도 여섯살에 천자문을 다 외웠으며,어릴때부터 고집세고,자존심 강하고 배짱이 두둑한 ‘노천재’라고 소개하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김해 이정규기자 jeong@˝
  • [길섶에서] 제삿날/오풍연 논설위원

    제삿날이 다가오면 온 가족이 바빠진다.할아버지는 큰며느리를 데리고 5일장을 두어 차례 다녀온다.읍내 시장으로 원정도 마다하지 않는다.조기,명태포,한과 등 쉬 상하지 않는 제수 용품부터 하나 둘씩 마련한다.손이 타지 않도록 다락방이나 선반에 올려놓는다.할머니와 어머니는 제기를 꺼내 정성껏 닦아 둔다.누룩을 빚어 술을 담그고,식혜도 뜬다. 마침내 제삿날이다.집안의 어른부터 차례로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한다.집안은 두부·산적·전 부치는 냄새 등으로 진동한다.친척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술상과 밥상을 내간다.오랜만에 만난 4촌,6촌 형제들은 서로 뒤엉켜 뛰어논다.제사는 자정쯤 지낸다.아이들은 자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한다.그러나 대부분 곯아떨어져 일어나지 못한다.새벽 두세 시쯤 돼야 뒷정리가 끝난다.할머니는 손자·손녀들에게 줄 오징어,사탕,과자 등을 챙겨 놓는다.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요즘은 어떤가.보통 저녁에 제사를 지낸다.식구도 단출하다.인터넷을 통한 맞춤 제물이 등장할 정도다.미풍양속은 점점 사라져 간다.그래도 식구들을 볼 수 있는 제삿날이 기다려진다. 오풍연 논설위원˝
  • 소치는 ‘똥장군’ 강기갑 국회의원 당선자

    ‘수염은 아무나 기르나.’ 토종 농민 강기갑(50·전국농민회총연맹부의장) 국회의원 당선자.그는 수염과 개량한복으로 늘 이목을 끄는 인물이다.국회 진출의 원동력을 ‘한많은 수염의 힘’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현재 젖소 100마리를 키우는 전형적인 축산농군이다.그러면서 30년 가까이 농민운동과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그의 수염에는 ‘울고넘는 사연’도 많다. 지난 주,진주공항에 내려 택시를 탔다.사천읍내를 지나 시골길로 10여분 달렸더니 야트막한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장전2리 마을이 나타났다.한 50가구쯤 돼보이는 깡촌 그대로였다.마을 입구에는 ‘축,당선.국회의원 강기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때마침 지나는 아주머니한테 “강기갑씨 집이 어디요?”하고 물었더니 “국회의원?”하면서 되물었다.아주머니는 “저기,저 언덕쪽에 건물 하나 보이죠,높은 거”라며 손짓했다. ●아버지보며 ‘진짜 농군’ 되겠다 결심 밭두렁 길로 5분정도 걸었다.감나무가 심어져 있는 언덕 아래로 1000여평쯤 되는 대지위에 축사(畜舍)가 높게 들어서 있었다.바로 옆에는 2층 가옥이 있었다.축사 가까이 들어서자 황구 3마리가 튀어나와 낯선 사람을 몰아낼 기세로 마구 짖어댔다.축사내 젖소들도 물끄러미 쳐다봤다.젖소 분비물로 냄새가 진동했다. 개짖는 소리에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40대의 아주머니가 집밖으로 나와 누구냐고 물었다.강 당선자의 집이 맞느냐고 하자 그는 “집사람입니다.”하면서 안으로 들어오란다.늦둥이냐고 했더니 그는 “4월7일이 첫 돌인데 아빠가 워낙 바빠 돌잔치도 못했다.”며 웃었다. 안방으로 들어서자 강 당선자는 누군가와 열심히 전화를 하고 있었다.잠시후 그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농장으로 나섰다.해질무렵이었지만 경운기에 실려 있는 소먹이용 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때가 잔뜩 묻은 긴 장화와 장갑,구겨진 모자,그리고 삽을 든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젖소 100마리의 먹이를 매일같이 실어날라야 합니다.저놈들은 먹성도 좋아요.” 이 정도 규모면 부자가 아니냐고 묻자 그는 “기자분들이 농촌현실을 잘 몰라서 되느냐.”고 나무랐다. “7,8년전인가,정부에서 우루과이라운드(UR)에 대비해 농사를 기업화해야 한다고 권유를 했지요.그래서 3억여원을 빌려 농장규모를 늘렸더니 IMF를 얻어맞았습니다.원금은커녕 이자갚기에도 급급한 지경입니다.요즘 농촌의 실정이 다들 그래요.” 특히 우유 가격은 뻔한데 사료가격은 올라가니 답답한 노릇이 아니냐고 했다.그는 한달에 젖소 100마리로부터 약 870㎏의 우유를 뽑아내면 1200만원정도 수입이 생긴다고 했다.그러나 축사 유지비와 사료값으로 800만원정도 지출되고 또 은행이자를 갚고 나면 장인·장모와 처자식 등 일곱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前 대통령 사망소식에 ‘만세’ 불러 태어나고 자란 곳이 여기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 하늘을 잠시 쳐다봤다.그는 1953년 지금의 장전2리에서 태어났다.부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다. 슬하에 4남4녀를 둔 강 당선자의 부친은 5세때 할머니가 자살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할아버지가 워낙 놀기 좋아해 밖으로만 돌아다니며 가산을 탕진하자 이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일찍 삶을 포기했던 것이다.때문에 그의 부친은 11세때부터 장전리와 이웃 마을 등 여기저기에서 머슴살이로 전전긍긍했다. 아버지가 결혼한 후에도 머슴같은 삶은 계속됐다.어린 강씨를 지게로 업고 다니며 이웃의 가마니를 짜고 보리타작을 계속 했다.틈틈이 야산을 개간하며 밭을 일구기도 했다.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정미소를 차리면서 가세가 조금씩 나아졌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우리 식구 8남매는 뿔뿔이 흩어졌을 겁니다.그런 아버지 때문에 농촌을 벗어날 수 없었지요.” 71년 사천농고를 졸업한 그는 농과대학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으나 예비고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포기했다.아버지는 또 농촌에서 살기 힘드니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그때마다 그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농부가 될랍니다.”고 우겼다. 그는 장전리 인근의 야산을 싸게 구입,밭을 일구기 시작했다.바로 옆에 기거할 집도 지었다.우선 밤나무,유실수 등의 묘목을 심었다.퇴비가 마땅하지 않아 사천비행장에 가서 공군장병들이 먹다버린 ‘잔밥’을 얻어왔다.또 남의 집 화장실에서 인분을 실어날랐다.마을 사람들은 그를 ‘똥장군’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1975년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돌아가시자 큰 좌절을 겪는다.이 무렵 밤나무 농사를 해봐야 별로 경제적인 도움이나 발전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축산업에 뛰어들었다.처음에는 젖소 5∼6마리로 시작하다가 조금씩 규모를 늘려나갔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때 수염길러 그는 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섰다.군부독재에 대한 환멸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79년 밥을 먹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숟가락을 던지며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 82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인천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 두문불출 신학공부에 빠졌다.수녀인 누나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이후 5년동안 수도원에서 농사짓고 신학공부에만 전념했다.87년 세상에 나온 그는 91년까지 경남연합회 회장을 맡아 지역 가톨릭농민회를 이끌었다.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만으로 40이 넘도록 장가못간 총각이 넘쳐나 사회가 개탄스러웠다.전국 농촌총각 결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농민 총각들을 짝지어주는 일에 앞장섰다.첫 쌍이 생길 때까지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90년 6월 드디어 첫 쌍이 탄생했다.경남 거창에 사는 정모씨가 주인공이었다.서울 합정동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다들 울었을 정도로 감회가 깊었다.노무현 대통령(당시 평민당 국회의원)도 이 행사에 참석,축사를 했다.그는 1년 뒤인 91년 5월 사천성당에서 지금의 부인(영세명 엘리사벳)과 결혼했다.‘결혼대책위’가 생긴 이후 21번째였다.‘전농’에 우연히 놀러 왔던 아가씨를 설득해 ‘결혼대책위’의 간사를 맡겼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하지만 약속과 달리 그는 수염을 깎지 않았다.그의 수염은 농촌총각 결혼추진과 농민운동을 대변하는 ‘공공의 상징’이라고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주말엔 농사 짓고 치매 아버지 돌볼 것” 원래 결혼하면 대책위 위원장직을 그만둔다는 규칙에 따라 그는 이후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에 몰두했다.한편으로는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과 경남도연맹 의장을 비롯해 전농 농가부채대책위원장 등을 맡아 언제나 가장 앞줄에서 농민운동을 펼쳐왔다. “걱정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농민운동도 계속해야 되겠지만 젖소농사를 대신해줄 사람이 없습니다.우선 주말에는 집에 내려와 농사 지을 작정입니다.치매로 투병중인 아버지도 보살펴야 하고요.” 농업은 생명산업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국민의 어머니인 농업과 농민을 살리고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고 살 수 있는 정치를 실현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사천 김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3년 경남 사천 출생 ▲19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 입회. ▲1987∼1991년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장 ▲1989∼1991년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장 ▲1996년 사천농민회 회장 ▲1998∼1999년 전농 경남도연맹 부의장 ▲1999∼2000년 전농 부의장,농가부채대책위원장 ▲2000∼2003년 전농 경남도연맹 의장 ▲2001∼2003년 사천읍농업협동조합 이,감사 ▲2004년 전농 부의장,17대 국회의원 당선(민노당 비례대표). ˝
  • 儒林(8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8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어느덧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능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한양에서부터 능성까지의 거리는 758리. 능성현의 원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백제의 옛 이름으로는 죽수부리(竹樹夫里),혹은 인부리(仁夫里)라 하였다.훗날 선조 때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죽수서원은 백제 때의 옛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곳은 예부터 궁벽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라앉는 배. 머나먼 유배 길에서 줄곧 자신의 지난 행적을 떠올려 보던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떠오른 목소리는 수수께끼의 말을 던지고 사라진 최수성의 할(喝)이었다.옛 선승들이 수행자의 망상이나 삿된 사견(邪見)을 꾸짖어 단숨에 정신을 차리도록 외치는 소리처럼 조광조를 향해 ‘가라앉는 배’라고 외친 최수성의 목소리는 줄곧 조광조의 뇌리를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앉는 배. 결과적으로 조광조는 최수성의 말대로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바로 자신이 단행한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삭훈된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조광조의 배는 가라앉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조광조는 하늘을 우러러 붉은 해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과격하긴 하였지만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전혀 없지 않았던가.저 하늘의 밝은 해는 거짓 없는 내 충정을 낱낱이 비추고 있지 않은가. 수레는 연주산(連珠山) 밑을 지나고 있었다. 구슬이 연하여 있는 모양이라 하여서 연주산이라 불리는 산 밑에는 영벽정(映碧亭)이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일찍이 김굉필의 스승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연주산 위에 뜬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간 곳 없고 이슬 기운만 가득 차네. 천뭉치의 솜구름 모두 흩어지고 한 덩이 공문서(公文書) 보잘 것 없도다. 시절은 다시 깊은 가을이라 아름답긴 하지만 나그네의 회포를 오늘 밤 누가 달래줄 것인가.” 스승 한훤당의 스승이었던 김종직.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던 조선조의 뛰어난 성리학자.학문적으로는 조광조의 할아버지뻘 되는 김종직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조광조가 이끄는 신진 사림파의 시조였던 것이다.이로 인해 죽은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덤이 파헤쳐져 참시를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보면 조광조의 유배는 신진 사림파들이 반드시 겪어야 되는 운명의 대물림인 것인가. 정몽주는 격살 당하였고,그의 제자인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또 그의 제자인 한훤당은 유배 중에 사사 당하였고,막내격인 조광조 자신은 가라앉는 배를 타고 이처럼 유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김종직이 지은 시처럼 연주산은 깊은 가을이라 핏물을 뚝뚝 듣는 듯한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아름답지만 나그네의 깊은 회포는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마침내 유배지인 능성에 도착한 조광조는 그 즉시 그곳 현감에게 인계되었다.현감은 비봉산(飛鳳山) 아래 작은 민가를 구해 놓고 시중을 들 관동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다행인 것은 제자 장잠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일을 도와줄 하인들이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질 무렵 자신을 이곳까지 무사히 호송하고 온 나장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가 11월 26일. 조광조가 한양에서 유배 길을 떠난 것이 11월 17일이었으니,정확히 열흘 만에 최종 목적지인 능성에 도착한 것이다.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고령 노동력인구 500만육박 ‘실버 대국’ 일본

    이른바 ‘실버산업 대국’ 일본의 노인들은 지금 정력적으로 열도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다.출근시간 도쿄시내 전철에선 정장의 노인들이 직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종신고용제에서 구조조정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새하얀 원로급들이 회사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다.삼팔선,사오정,오륙도란 유행어가 난무하는 한국상황과 판이하다.특히 노인들 중에서도 65세이상 인구만 2400여만명이나 되고,이들 중 20% 가깝게 산업역군이나 농어민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노인들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현지에서 만나는 대부분 노년층들의 표정은 밝고 의욕이 넘친다.올초 한 일본신문이 60대로 한정한 ‘실버’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90% 가깝게 ‘마음은 젊은이’라며 청춘을 자처했다.상당한 경제력도 있었고,노인이란 호칭에는 거부감을 드러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노인 취급받는 것도 싫어했다.그래서인지 일본 지하철·전철 등 대중교통에는 경로석을 설치한 예가 드물다. 노인문화의 선진국 일본에서는 ‘신(新)노인’이 뛰고 있다.신노인은 젊은세대들에게 짐으로 인식되는 구식노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회에 적극 기여하는 진취적인 노인들을 지칭한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대다수 기업들이 60세가 정년이고,이후엔 65세까지 계약직으로 채용한다.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각자 능력에 따라 맹렬하게 산업현장을 누빈다. 소규모 업체서도 마찬가지다.우리나이로 69세인 오가와 미키오는 전형적인 맹렬노인이다.지바(이승엽 선수의 프로약구 롯데마린스 본거지)에 사는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전차로 약 40분 걸리는 도쿄시내 니혼바시의 포목점 ‘마루토미’로 간다.8년 전에 회사를 그만뒀다가 사장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총지배인격으로 일하는 그는 젊은 점원들을 다그치며 해질 녘까지 판매,청소,점검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다.내일 일을 생각하며 오후 9시30분에야 집에 도착하는 생활이 50년째다. 남부 구마모토현의 기쿠치시 공보담당관인 쓰루 게사토시(61)도 현해탄을 흰머리 휘날리며 넘나든다.그는 무비자가 된 한국의 수학여행단 유치를 위해 유창한 영어로 활동하는,노인축에끼는 것을 거부하는 맹렬 초년 노인이다. 이른바 구식 노인들도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생산적인 노년’을 보낸다.도쿄 도시마구 JR스가모역 인근에 있는 노인천국 스가모.스가모지역 시장통인 지조도오리는 ‘노인에 의한,노인을 위한,노인의 거리’다.190여개 각종 상점들이 800여m 길 양쪽에 빼곡히 늘어서 있다.서울 탑골공원과는 무언가가 다른 분위기다. 토요일이자 한국식으로 장날인 24일오후(4,14,24일이 장날) 스가모지역은 전국에서 밀려든 노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비가 내린 지난 14일에도 마찬가지였다.젊은이도,서양사람도 눈에 띄지만 붕어빵집 등 가게 주인과 손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상가진흥조합과 도시마구청측의 노력으로 이 곳은 5년여 전부터 일본은 물론 세계적인 노인문제 해결의 명소가 됐다.소비·판매·친교의 장이다.한국서도 노인문제시찰단이 종종 이곳을 찾는다. 노인취급을 안 받으면서 ‘복고풍’의 추억에 젖고 싶은 고바야시(75·여·사이타마현) 등 할머니들이 주로 찾는 이 곳은 연간 9백만명의 실버들이 찾는다.장날에 날씨까지 좋으면 시골 노인들이 단체로 원정도 온다.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퇴직 노인의 재교육과 이른바 취로사업 확충노력에 발벗고 나선다.인구 126만명의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는 퇴직 남성 고령자들을 위한 시민아카데미를 개설했다.여성들은 문화센터나 자치회 등 활동공간이 많지만,고령 남성들을 위한 문화와 재교육 공간이 부족해서다. 지금은 남성은 물론 여성노인,젊은이들까지도 시민아카데미를 찾는다.거의 대학과 유사하게 운영되는 아카데미의 나카무라 다카아키 주임은 “수강생이 모두 1600여명인데 그 중에 대다수가 엘리트 할아버지들”이라면서 “이들은 2∼5년 수준 높은 역사·철학·환경·경제 공부를 하며 학점을 이수,졸업하고 재학중,졸업후 함께 지역활동을 하면서 보낸다.”고 소개했다. 도쿄 시내에서도 공원청소,화단정리,도서관 서고 정리,주차관리 요원들 중에는 70∼80대 노인들을 친근하게 만나 볼 수 있다.취로사업 형식이다.등·하교시간 통학로 교통정리 등 자원봉사 활동은 특히 노인들이 주류다.섬세한 지혜가 필요한 정밀가공 산업현장도 노인들의 주 활동무대다. 노인들의 재취업과 교육,자원봉사 활동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도 매우 왕성하다.의외로 벤처기업 관리직도 경험 많은 노인들의 활발한 활동무대라는 게 호사카(68)의 귀띔이다. 하지만 실버 대국 일본에서도 극심한 자산 거품붕괴의 고통을 안겨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노인들의 삶도 과거보다는 힘들어지고 있는 것도 냉엄한 현실이긴 하다. taein@seoul.co.kr˝
  • 美 ‘에로이카 트리오’ 새달 내한

    뛰어난 연주실력 못지않게 화려한 외모와 세련된 무대 매너로 주목받는 미국 여성 피아노3중주단 ‘에로이카 트리오’가 새달 9일 오후 4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사라 산암브로지오(첼로),에리카 니크렌즈(피아노),아델라 페냐(바이올린)로 구성된 에로이카 트리오는 줄리아드음대 동창이면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음악을 공부해온 오랜 친구사이.에리카와 아델라는 아홉 살때부터 같이 연주했고,3년후 에리카와 사라는 사라의 할아버지에게 피아노와 실내악을 배웠다.이들은 솔로이스트로도 화려한 수상 경력과 연주 경험을 자랑한다. 한국의 안트리오처럼 클래식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깨고 고상한 연주복 대신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원피스나 빨간 가죽 바지 차림으로 사진을 찍는가 하면 여러 패션잡지에 표지모델로 등장해 화제를 뿌렸다.베토벤,브람스 등 고전적인 작품에서부터 피아졸라의 탱고,재즈 등 현대 음악까지 이들이 연주하는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에로이카 트리오는 1991년 나움버그 국제실내악 콩쿠르상 수상을 계기로 링컨센터에서 첫 연주를 시작하면서 명성을 얻게 됐다.이후 1997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치른 이들은 EMI에서 5장의 음반을 연달아 출시해 그래미상 후보에 여러차례 올랐고,현재 미국과 유럽,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쇤필드의 ‘카페 음악’,거슈윈의 ‘세개의 전주곡’,피아졸라의 ‘망각’‘항구의 봄’등을 연주한다.서울에 앞서 7일 대구 학생문화센터 무대에 서며, 11일에는 대전 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갖는다.(02)2187-6222. 이순녀기자˝
  • 儒林(8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어느덧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능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한양에서부터 능성까지의 거리는 758리. 능성현의 원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백제의 옛 이름으로는 죽수부리(竹樹夫里),혹은 인부리(仁夫里)라 하였다.훗날 선조 때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죽수서원은 백제 때의 옛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곳은 예부터 궁벽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라앉는 배. 머나먼 유배 길에서 줄곧 자신의 지난 행적을 떠올려 보던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떠오른 목소리는 수수께끼의 말을 던지고 사라진 최수성의 할(喝)이었다.옛 선승들이 수행자의 망상이나 삿된 사견(邪見)을 꾸짖어 단숨에 정신을 차리도록 외치는 소리처럼 조광조를 향해 ‘가라앉는 배’라고 외친 최수성의 목소리는 줄곧 조광조의 뇌리를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앉는 배. 결과적으로 조광조는 최수성의 말대로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바로 자신이 단행한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삭훈된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조광조의 배는 가라앉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조광조는 하늘을 우러러 붉은 해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과격하긴 하였지만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전혀 없지 않았던가.저 하늘의 밝은 해는 거짓 없는 내 충정을 낱낱이 비추고 있지 않은가. 수레는 연주산(連珠山) 밑을 지나고 있었다. 구슬이 연하여 있는 모양이라 하여서 연주산이라 불리는 산 밑에는 영벽정(映碧亭)이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일찍이 김굉필의 스승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연주산 위에 뜬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간 곳 없고 이슬 기운만 가득 차네. 천뭉치의 솜구름 모두 흩어지고 한 덩이 공문서(公文書) 보잘 것 없도다. 시절은 다시 깊은 가을이라 아름답긴 하지만 나그네의 회포를 오늘 밤 누가 달래줄 것인가.” 스승 한훤당의 스승이었던 김종직.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던 조선조의 뛰어난 성리학자.학문적으로는 조광조의 할아버지뻘 되는 김종직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조광조가 이끄는 신진 사림파의 시조였던 것이다.이로 인해 죽은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덤이 파헤쳐져 참시를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보면 조광조의 유배는 신진 사림파들이 반드시 겪어야 되는 운명의 대물림인 것인가. 정몽주는 격살 당하였고,그의 제자인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또 그의 제자인 한훤당은 유배 중에 사사 당하였고,막내격인 조광조 자신은 가라앉는 배를 타고 이처럼 유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김종직이 지은 시처럼 연주산은 깊은 가을이라 핏물을 뚝뚝 듣는 듯한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아름답지만 나그네의 깊은 회포는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마침내 유배지인 능성에 도착한 조광조는 그 즉시 그곳 현감에게 인계되었다.현감은 비봉산(飛鳳山) 아래 작은 민가를 구해 놓고 시중을 들 관동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다행인 것은 제자 장잠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일을 도와줄 하인들이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질 무렵 자신을 이곳까지 무사히 호송하고 온 나장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가 11월 26일. 조광조가 한양에서 유배 길을 떠난 것이 11월 17일이었으니,정확히 열흘 만에 최종 목적지인 능성에 도착한 것이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4)내 마음의 등잔불빛(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4)내 마음의 등잔불빛(上)

    그리움이 그리워 등잔을 닦습니다 불을 켜면 고요히 무릎 꿇는 시간들 영혼의 하얀 심지를 가만 가만 돋웁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음이 먼저 글썽이던 기다림을 먹고 크는 불꽃의 동그란 집 잊었던 사유의 뜰이 다시 환히 빛납니다. 그 위로 한 우주가 나직히 둘리는 밤 여린 몸짓으로 바람을 타이르며 등잔은 지친 가슴마다 별을 내어 겁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외도 ‘등잔박물관’ 한국등잔박물관에서 펴낸 ‘등잔’이란 도록에 실려 있는 정수자의 시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258의 9번지에 있는 ‘한국등잔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지난 15일이었다.며칠 전 약속한 오전 10시에 맞추기 위해 문 밖에서 5분 정도를 기다렸다.등잔박물관 뜰에는 한 노인이 나무와 꽃들에게 물을 뿌리고 있었다. 한 달 넘게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한 날씨여서 새순이 돋는 나무들이나 봄꽃들의 색깔이 갈증을 머금고 있었다.노인은 천천히 물을 뿌리면서 울타리 너머 방문객을 두어 번 바라보았다. 잠시 뒤 할머니 한 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집 뒤쪽에서 마당으로 걸어왔다.필자가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며 관장님을 뵈러 왔다고 알렸다.할머니가 물을 뿌리고 있는 노인 곁으로 다가서서 필자의 방문을 말씀드리는 것 같았다.마침 물 뿌리는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할머니께서 문을 열어 주신다.물 뿌리던 그 할아버지가 뵙기로 약속한 한국등잔박물관 김동휘 관장이었다. 10시 조금 지나서부터 등잔에 관한 말씀을 듣고,박물관에 진열된 등잔들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서 두 시간 가량의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선생께서는 1940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마친 뒤 1981년 은퇴하신 산부인과 전문의 면허 5번의 의사였다. 문: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셨는지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金:우리 내외 나이를 합치면 169년을 살아온 셈입니다.우리는 늘 함께 해왔기 때문에 나이도 합쳐서 먹는 셈이지요.그러는 것이 좋더군요. 문:저도 심심유곡 빈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1950년대 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등잔 불빛의 아득한 정취를 먹고 오늘에까지 다다랐습니다.관장님께서 수많은 민속품들 가운데서 유달리 등잔에 애정을 품게 되었고,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한국등잔박물관을 세우시기까지의 내력을 듣고 싶습니다. 金:전기라는 괴물이 우리 생활을 점령하게 되었지요.그러자 수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누려온 온유하고 유구한 삶의 역사가 하루 아침에 돌변하는 변화를 겪었지요.말이 변화이지 사실은 참담한 추방이고,소외이며,회복하기 불가능한 상실이자 파괴였단 말입니다.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조급하고 나쁜 버릇이 또 재발한 때문이지요.어제까지 그토록 소중하게 우리 삶을 지켜주던 등잔을 아궁이 속에 던져 넣어버리거나 고물장수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이게 무슨 문화를 지닌 민족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까.실은 그런 이유보다는 내 어머니의 모습과 마음을 내 안에 영원히 모셔두기 위해서 등잔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등잔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 모습 문:등잔불과 어머니는 한국인의 마음 속에 아로새겨진 그리움의 공통분모이기도 합니다만 관장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마음의 등잔불빛은 어떻게 빛났을지 궁금합니다. 金:등잔을 모으다 보니 우리 어머니 생각이 점점 간절해지더군요.대여섯 살 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지요.그때는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지요.언제나 어머니 곁에서 잠이 들었어요.한참 자다 깨어보면 어머니는 등잔불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어요.아,어머니가 곁에 계시는구나 싶어지면 한없이 편안해지고 행복감에 휩싸여서 다시 단잠에 빠질 수 있었어요.그러다가 또 깨어보면 어머니는 아직도 바느질을 하고 계셨어요.가만히 어머니를 쳐다보면 등잔불이 가물거립니다.등잔불이 흔들리기도 합니다.희미한 불빛이 어두워서 어머니는 등잔불 바짝 가까이 다가 앉아서 촘촘히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어머니 콧김에 등잔불이 흔들리는 것이지요.그러나 결코 등잔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어머니는 그냥 옷을 만드는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뭐랄까요,오랜 수도생활을 한 수도승의 참선과도 흡사한 침선(針禪)이라고나 할까.그런 깊은 경지에까지 몰입해 있어서 산 사람의 일반적인 숨쉬기와는 어딘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어린 나는 어머니께 그만 주무시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어머니,이젠 좀 주무세요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습니다.등잔불빛에 비친 어머니 얼굴이 너무나 예뻤기 때문에 그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등잔불을 마주하고 앉아 계신 어머니 얼굴의 절반은 참으로 은은하고 감동적인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나머지 절반은 등잔불빛을 받아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곱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니까 더욱 예뻤겠지요.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머니가 떠오릅니다.등잔불 하나하나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십니다.내 마음의 등잔불은 꺼지지 않습니다.거기엔 어머니가 계십니다. ●케케묵은 옛것 아닌 새로운 문화의 바탕 문:등잔불이 곧 어머니라는 말씀은 불이(不二)라는 말과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어머니라는 말이 지닌 불멸성,상징성이 등잔불의 역사성과 하나가 되어 전깃불 아래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하고 지워지지 않는 문화의 새벽빛을 보게 해줄 것 같습니다. 金:등잔에는 조상들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등잔이 만들어져서 쓰여지고 사람들과 숨쉬어온 생활 가치가 깃들어 있다는 얘기지요.문화에는 그 나라의 총체적인 힘과 역사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데 등잔은 전깃불이 들어오기 이전 수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힘과 역사를 길러주고 지켜온 문화의 모체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불을 켜는 도구라는 의미보다 더 인간적인 상징성이 큽니다.등잔불은 그냥 빛나는 것이 아니예요.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을 불빛 속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불빛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립고 아름다운 세계가 보입니다.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등잔은 결코 케케묵은 옛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만큼 새로워지게 하는 문화의 바탕입니다. 문:등잔불빛과 느림의 관계를 말씀하시려고 하는군요. 金:맞습니다.요즘 사람들은 새 것을 너무 좋아해요.신(新),뉴(New),새로움 등을 강조하다보니 전통과 정체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단 말입니다.새로운 것을 좇는 삶은 자칫 심성이 천박해지고,생활이 낭비와 방탕으로 흘러 세상에 큰 부담을 끼치고 독소가 될 수도 있겠지요. 옛 것의 값어치는 시간의 값어치라기보다 역사를 진지하게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자 만족입니다.빨리 변화하는 삶을 추종하다 보면 자신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남은 것은 껍데기 뿐일것입니다. 무엇보다 등잔불은 평등합니다.동서남북 사방을 힘 자라는 데까지 평등하게 비추지요.밝다는 것보다는 빛이라는 것,어둠을 밀어내거나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공존하려는 평등성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등잔박물관 안내 문의:(031) 334-0797, 인터넷주소 : http://www.deungjan.or.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34)내 마음의 등잔불빛(上)

    그리움이 그리워 등잔을 닦습니다 불을 켜면 고요히 무릎 꿇는 시간들 영혼의 하얀 심지를 가만 가만 돋웁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음이 먼저 글썽이던 기다림을 먹고 크는 불꽃의 동그란 집 잊었던 사유의 뜰이 다시 환히 빛납니다. 그 위로 한 우주가 나직히 둘리는 밤 여린 몸짓으로 바람을 타이르며 등잔은 지친 가슴마다 별을 내어 겁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외도 ‘등잔박물관’ 한국등잔박물관에서 펴낸 ‘등잔’이란 도록에 실려 있는 정수자의 시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258의 9번지에 있는 ‘한국등잔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지난 15일이었다.며칠 전 약속한 오전 10시에 맞추기 위해 문 밖에서 5분 정도를 기다렸다.등잔박물관 뜰에는 한 노인이 나무와 꽃들에게 물을 뿌리고 있었다. 한 달 넘게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한 날씨여서 새순이 돋는 나무들이나 봄꽃들의 색깔이 갈증을 머금고 있었다.노인은 천천히 물을 뿌리면서 울타리 너머 방문객을 두어 번 바라보았다. 잠시 뒤 할머니 한 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집 뒤쪽에서 마당으로 걸어왔다.필자가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며 관장님을 뵈러 왔다고 알렸다.할머니가 물을 뿌리고 있는 노인 곁으로 다가서서 필자의 방문을 말씀드리는 것 같았다.마침 물 뿌리는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할머니께서 문을 열어 주신다.물 뿌리던 그 할아버지가 뵙기로 약속한 한국등잔박물관 김동휘 관장이었다. 10시 조금 지나서부터 등잔에 관한 말씀을 듣고,박물관에 진열된 등잔들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서 두 시간 가량의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선생께서는 1940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마친 뒤 1981년 은퇴하신 산부인과 전문의 면허 5번의 의사였다. 문: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셨는지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金:우리 내외 나이를 합치면 169년을 살아온 셈입니다.우리는 늘 함께 해왔기 때문에 나이도 합쳐서 먹는 셈이지요.그러는 것이 좋더군요. 문:저도 심심유곡 빈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1950년대 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등잔 불빛의 아득한 정취를 먹고 오늘에까지 다다랐습니다.관장님께서 수많은 민속품들 가운데서 유달리 등잔에 애정을 품게 되었고,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한국등잔박물관을 세우시기까지의 내력을 듣고 싶습니다. 金:전기라는 괴물이 우리 생활을 점령하게 되었지요.그러자 수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누려온 온유하고 유구한 삶의 역사가 하루 아침에 돌변하는 변화를 겪었지요.말이 변화이지 사실은 참담한 추방이고,소외이며,회복하기 불가능한 상실이자 파괴였단 말입니다.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조급하고 나쁜 버릇이 또 재발한 때문이지요.어제까지 그토록 소중하게 우리 삶을 지켜주던 등잔을 아궁이 속에 던져 넣어버리거나 고물장수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이게 무슨 문화를 지닌 민족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까.실은 그런 이유보다는 내 어머니의 모습과 마음을 내 안에 영원히 모셔두기 위해서 등잔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등잔불에 어른거리는 어머니 모습 문:등잔불과 어머니는 한국인의 마음 속에 아로새겨진 그리움의 공통분모이기도 합니다만 관장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마음의 등잔불빛은 어떻게 빛났을지 궁금합니다. 金:등잔을 모으다 보니 우리 어머니 생각이 점점 간절해지더군요.대여섯 살 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지요.그때는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지요.언제나 어머니 곁에서 잠이 들었어요.한참 자다 깨어보면 어머니는 등잔불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어요.아,어머니가 곁에 계시는구나 싶어지면 한없이 편안해지고 행복감에 휩싸여서 다시 단잠에 빠질 수 있었어요.그러다가 또 깨어보면 어머니는 아직도 바느질을 하고 계셨어요.가만히 어머니를 쳐다보면 등잔불이 가물거립니다.등잔불이 흔들리기도 합니다.희미한 불빛이 어두워서 어머니는 등잔불 바짝 가까이 다가 앉아서 촘촘히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어머니 콧김에 등잔불이 흔들리는 것이지요.그러나 결코 등잔불은 꺼지지 않습니다.어머니는 그냥 옷을 만드는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뭐랄까요,오랜 수도생활을 한 수도승의 참선과도 흡사한 침선(針禪)이라고나 할까.그런 깊은 경지에까지 몰입해 있어서 산 사람의 일반적인 숨쉬기와는 어딘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어린 나는 어머니께 그만 주무시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어머니,이젠 좀 주무세요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습니다.등잔불빛에 비친 어머니 얼굴이 너무나 예뻤기 때문에 그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등잔불을 마주하고 앉아 계신 어머니 얼굴의 절반은 참으로 은은하고 감동적인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나머지 절반은 등잔불빛을 받아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곱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니까 더욱 예뻤겠지요.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머니가 떠오릅니다.등잔불 하나하나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십니다.내 마음의 등잔불은 꺼지지 않습니다.거기엔 어머니가 계십니다. ●케케묵은 옛것 아닌 새로운 문화의 바탕 문:등잔불이 곧 어머니라는 말씀은 불이(不二)라는 말과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어머니라는 말이 지닌 불멸성,상징성이 등잔불의 역사성과 하나가 되어 전깃불 아래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하고 지워지지 않는 문화의 새벽빛을 보게 해줄 것 같습니다. 金:등잔에는 조상들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등잔이 만들어져서 쓰여지고 사람들과 숨쉬어온 생활 가치가 깃들어 있다는 얘기지요.문화에는 그 나라의 총체적인 힘과 역사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데 등잔은 전깃불이 들어오기 이전 수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힘과 역사를 길러주고 지켜온 문화의 모체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불을 켜는 도구라는 의미보다 더 인간적인 상징성이 큽니다.등잔불은 그냥 빛나는 것이 아니예요.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을 불빛 속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불빛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립고 아름다운 세계가 보입니다.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등잔은 결코 케케묵은 옛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만큼 새로워지게 하는 문화의 바탕입니다. 문:등잔불빛과 느림의 관계를 말씀하시려고 하는군요. 金:맞습니다.요즘 사람들은 새 것을 너무 좋아해요.신(新),뉴(New),새로움 등을 강조하다보니 전통과 정체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단 말입니다.새로운 것을 좇는 삶은 자칫 심성이 천박해지고,생활이 낭비와 방탕으로 흘러 세상에 큰 부담을 끼치고 독소가 될 수도 있겠지요. 옛 것의 값어치는 시간의 값어치라기보다 역사를 진지하게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자 만족입니다.빨리 변화하는 삶을 추종하다 보면 자신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남은 것은 껍데기 뿐일것입니다. 무엇보다 등잔불은 평등합니다.동서남북 사방을 힘 자라는 데까지 평등하게 비추지요.밝다는 것보다는 빛이라는 것,어둠을 밀어내거나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공존하려는 평등성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등잔박물관 안내 문의:(031) 334-0797, 인터넷주소 : http://www.deungjan.or.kr˝
  • [길섶에서] 요강과 비데/오풍연 논설위원

    어릴 적 집안 여자들은 눈을 뜨자마자 요강부터 비웠다.행여 그대로 두었다간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대가족인 경우 서너개의 요강을 비워야 한다.놋쇠·양은·사기 요강은 가세(家勢)를 가늠케 했다.때를 빼고,윤을 내는 것도 아낙들의 몫이었다.추운 겨울이면 특히 애를 먹었다.오줌이 얼어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물을 데워 비우곤 했다. 그래도 소변은 요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변은 그럴 수 없었다.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시골집은 화장실이 멀리 떨어져 있다.귀신 얘기를 많이 들은 아이들은 밤에 혼자 못 갔다.자는 엄마,누이,형제를 깨워 보초를 세웠다.전기도 없다 보니 플래시와 양초는 비상 도구.참지 못해 옷에다 싸버린 날이면 체를 머리에 쓰고 소금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어떤가.요강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화장실 문화 개선과 함께 요강도 고물(古物)이 돼가고 있다.고속도로 휴게소 등의 공중화장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청결을 자랑한다.오랜만에 찾은 생가에도 비데가 있었다. 오풍연 논설위원˝
  • [길섶에서] 堀塚 이후/심재억 생활레저부 차장

    못자리 손보던 할아버지,지게작대기로 물을 튀기며 지나가는 동무에게 웃으며 “에라이,급살맞을 놈”합니다.급살(急煞)이라지만 ‘예끼 놈’하는 뜻이니,욕치고는 정감있습니다.그러나 웃음기를 싹 걷고 하는 욕도 있습니다.한 날은 “이런 육시를 할 놈이…”라며 노모에게 패악질한 파락호를 나무라기도 했습니다.죽은 사람에게 참형을 가하는 육시(戮屍)가 급살보다는 한 급 높지만,그래도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대상이라는 점에서 조상을 모욕하는 ‘굴총 할 놈’에는 못 미칩니다. 굴총(堀塚)이 뭡니까?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뜻이니,부관참시(剖棺斬屍)에 견줄 만합니다.왜놈 순사 얘기를 할 때면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굴총’을 들췄습니다.육시나 굴총이 다 험한 욕이지만,준열함에 비해 그다지 천박하지는 않았습니다.경각심을 촉구한 표의적(表意的) 경고였지만,배려와 해학이 배어있는 까닭이겠지요. 그러면 요새 욕은 어떻습니까? ‘×새끼’나 ‘씨팔×’처럼 경음(硬音)과 격음(激音)이 뒤섞여 경박할 뿐더러 살벌한 표음적(表音的) 배설이라 입에 담기 참 민망합니다.욕 나오는 세상,질펀하되 천박하지 않은 욕 좀 어디 없을까요? 심재억 생활레저부 차장˝
  • [강형숙의 뷰티살롱]‘아저씨’ 대신 ‘선생님’으로

    좋은 매너를 가진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잘 보살피고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는 경향이 있다.호칭에서도 마찬가지다.더구나 ‘세계화’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이 호칭문제는 예전의 습성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이 일정한 직책이 있어서 ‘○○님’과 같이 그 호칭이 뚜렷한 경우엔 상관없지만 보통의 경우는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저씨’ ‘아가씨’ ‘아줌마’ ‘오빠’ ‘언니’등으로 너무 쉽게 호칭한다.뿐만 아니라 조금만 나이가 드신 분들께는 무조건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불러서 사람의 기분과 사기를 꺾어놓는 경우도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아줌마로 불려 그 날부터 우울증에 빠져 버린 경우도 있고,또 중년여성임에도 누군가 아가씨로 불러주어 하늘을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여성도 있다. 가끔 TV프로그램에서 미국이나 유럽 같으면 한창 완숙한 매력을 풍기는 나이가 될 것 같은 출연자를 사회자가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이러나?’하며 안타까울 때가 있다. 아무리 손자·손녀들이 있어 집안에서는 할아버지·할머니로 불릴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호칭이지 공적인 호칭은 아니지 않은가. 남성에게 공손히 ‘선생님’이나 ‘어르신’이라고 부르며,또 여성에겐 진짜 ‘어르신’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적으로 ‘선생님’이나 ‘여사님’이라고 부르면 여성의 자존심도 한층 세워주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할머니,할아버지,아줌마,아저씨 등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더구나 ‘노인(old people)’이라는 단어는 아주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켜 특히 여성들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노인들을 시니어(Senior·손윗사람)라고 부르지 않는가.하물며 연세 드신 어르신도 이름을 모르는 대 여섯 살 여자아이를 어린 숙녀(young lady)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제는 남의 사기를 깎아 내리는 호칭보다는 의욕을 주고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도 필요할 것 같다. 국민대 미용예술아카데미 학과장˝
  • [김영희 이혼클리닉] 손자·며느리 앞에서 손찌검하는 남편…

    63세 된 여성으로 아들 셋에 딸 둘,손자·손녀를 두고 있습니다.성질 급하고 고약한 남편은 툭하면 밥상을 엎고,며느리·손자들 앞에서도 욕하고 손찌검을 합니다.생활비만 겨우 줘 용돈 한푼 없이 지냅니다.이제라도 마음 편히 살고 싶어 이혼하렵니다.-한정숙 한정숙씨.199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73세 할머니가 이혼소송에서 승소한 사건이 있었는데,평생을 남편의 외도와 손찌검에 시달려온 할머니는 ‘위자료와 재산분할’로 자신의 몫을 받고 이혼을 했습니다.몇년 전 90세 할아버지와 70대 할머니가 이혼을 해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었지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커지면서 여성인권 신장운동이 활발해져 노령 여성들도 더 이상 남편의 외도와 폭력을 참고 살 수만 없다며 마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황혼이혼’의 경우 대부분 여자 쪽에서 요구하는데,남편의 지나친 가부장적인 의식과 태도가 문제가 되고 있고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한 남편 가운데 가장으로서 경제능력이 없어져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소외당하면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동안 일본에서는 ‘나리타의 이별’이 사회문제가 됐지요.막내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보내면서 부부가 공항에서 남남으로 뒤돌아서 간다고 해서 생긴 유행어인 것 같습니다.정숙씨 경우 며느리,손자,손녀,자식들 앞에서 툭하면 밥상을 뒤엎고 손찌검을 하고 큰소리치는 남편 때문에 심장병으로 졸도까지 한 적이 있다는데 예사롭지 않네요. 당신이 보낸 인터넷 상담 글을 읽고,독자 두 분이 흥미롭고 대조적인 글을 보내와 여기에 실어봅니다. 여자 분은 “아주머니,당장 이혼하세요.저희 엄마는 정신적 고통으로 입원까지 했는데 아버지와 결국 이혼하고 위자료와 재산분할로 받은 돈으로 지금은 아주 마음 편히 살고 계십니다.나이 많은 사람은 이혼하면 안 되고,젊은 사람들만 이혼하나요? 헤어져서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했습니다.남자 분은 “왜 이혼을 합니까? 바보스럽지 않습니까? 이제껏 힘들게 살았는데 당신이 지금 이혼하면 남편은 젊은 여자와 헤헤거리며 살 겁니다.아들,며느리,손자 모두 당신 편으로 만들어서 중뿔나게 몽둥이 찜질을 하고 통장도,도장도 빼앗아 버리고 강원도로 데리고 가서 돈 한푼 없이 내 버리세요.그렇게 다잡아 놓고 사세요.젊은 시절부터 너무 고분고분했으니까 그리 된 거지요.오빠·남동생들의 지원을 받으십시오.사실 나도 예전엔 마누라 많이 때려주고 싶었는데 처남들 무서워서 못했습니다만,가끔은 손을 좀 봐주긴 했지요.아주 가끔요.이제 나이 50이 지나고 나니 그때 한 일이 후회가 돼서 지금은 아주 잘 해주고 있습니다.아내가 못난이 뚱보지만 매일 업어줘서 아들,딸들이 ‘아빠,짓궂어! 엄마 내려놔요.’라고 한답니다.이제는 집안이 화목하여 웃음이 그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두 분 의견이 상반된 것 같지만 뜻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순씨.일부 나이든 남편 중엔 배우자를 동등한 인격자로,인생의 동반자로 대하지 않고 마치 시녀 부리듯 군림하며 아내·어머니로서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황혼이혼’이 젊은 부부의 ‘충동이혼’과 다른 것은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의무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으로 ‘구구절절’이 수십년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서 한다고 합니다.하지만 많은 노부부는 젊어서 못 느꼈던 절실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서로를 챙기고 의지하며 사는데 긴 세월 동안에 ‘미운정 고운정’이 쌓여 그렇답니다. 산책길에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며 서로를 보살피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따뜻해져 오지요.정숙씨.이제라도 가족회의를 해서 남편의 횡포를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그런 후에도 남편이 개선되지 않으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살아온 인생보다 남은 인생’이 더 소중하며,새 삶을 사는 데 나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 [김영희 이혼클리닉] 손자·며느리 앞에서 손찌검하는 남편…

    63세 된 여성으로 아들 셋에 딸 둘,손자·손녀를 두고 있습니다.성질 급하고 고약한 남편은 툭하면 밥상을 엎고,며느리·손자들 앞에서도 욕하고 손찌검을 합니다.생활비만 겨우 줘 용돈 한푼 없이 지냅니다.이제라도 마음 편히 살고 싶어 이혼하렵니다.-한정숙 한정숙씨.199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73세 할머니가 이혼소송에서 승소한 사건이 있었는데,평생을 남편의 외도와 손찌검에 시달려온 할머니는 ‘위자료와 재산분할’로 자신의 몫을 받고 이혼을 했습니다.몇년 전 90세 할아버지와 70대 할머니가 이혼을 해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었지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커지면서 여성인권 신장운동이 활발해져 노령 여성들도 더 이상 남편의 외도와 폭력을 참고 살 수만 없다며 마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황혼이혼’의 경우 대부분 여자 쪽에서 요구하는데,남편의 지나친 가부장적인 의식과 태도가 문제가 되고 있고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한 남편 가운데 가장으로서 경제능력이 없어져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소외당하면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동안 일본에서는 ‘나리타의 이별’이 사회문제가 됐지요.막내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보내면서 부부가 공항에서 남남으로 뒤돌아서 간다고 해서 생긴 유행어인 것 같습니다.정숙씨 경우 며느리,손자,손녀,자식들 앞에서 툭하면 밥상을 뒤엎고 손찌검을 하고 큰소리치는 남편 때문에 심장병으로 졸도까지 한 적이 있다는데 예사롭지 않네요. 당신이 보낸 인터넷 상담 글을 읽고,독자 두 분이 흥미롭고 대조적인 글을 보내와 여기에 실어봅니다. 여자 분은 “아주머니,당장 이혼하세요.저희 엄마는 정신적 고통으로 입원까지 했는데 아버지와 결국 이혼하고 위자료와 재산분할로 받은 돈으로 지금은 아주 마음 편히 살고 계십니다.나이 많은 사람은 이혼하면 안 되고,젊은 사람들만 이혼하나요? 헤어져서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했습니다.남자 분은 “왜 이혼을 합니까? 바보스럽지 않습니까? 이제껏 힘들게 살았는데 당신이 지금 이혼하면 남편은 젊은 여자와 헤헤거리며 살 겁니다.아들,며느리,손자 모두 당신 편으로 만들어서 중뿔나게 몽둥이 찜질을 하고 통장도,도장도 빼앗아 버리고 강원도로 데리고 가서 돈 한푼 없이 내 버리세요.그렇게 다잡아 놓고 사세요.젊은 시절부터 너무 고분고분했으니까 그리 된 거지요.오빠·남동생들의 지원을 받으십시오.사실 나도 예전엔 마누라 많이 때려주고 싶었는데 처남들 무서워서 못했습니다만,가끔은 손을 좀 봐주긴 했지요.아주 가끔요.이제 나이 50이 지나고 나니 그때 한 일이 후회가 돼서 지금은 아주 잘 해주고 있습니다.아내가 못난이 뚱보지만 매일 업어줘서 아들,딸들이 ‘아빠,짓궂어! 엄마 내려놔요.’라고 한답니다.이제는 집안이 화목하여 웃음이 그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두 분 의견이 상반된 것 같지만 뜻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순씨.일부 나이든 남편 중엔 배우자를 동등한 인격자로,인생의 동반자로 대하지 않고 마치 시녀 부리듯 군림하며 아내·어머니로서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황혼이혼’이 젊은 부부의 ‘충동이혼’과 다른 것은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의무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으로 ‘구구절절’이 수십년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서 한다고 합니다.하지만 많은 노부부는 젊어서 못 느꼈던 절실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서로를 챙기고 의지하며 사는데 긴 세월 동안에 ‘미운정 고운정’이 쌓여 그렇답니다. 산책길에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며 서로를 보살피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따뜻해져 오지요.정숙씨.이제라도 가족회의를 해서 남편의 횡포를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그런 후에도 남편이 개선되지 않으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살아온 인생보다 남은 인생’이 더 소중하며,새 삶을 사는 데 나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