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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진도씻김굿 박병천 명인 별세

    [부고] 진도씻김굿 박병천 명인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의 굿음악(巫樂) 예능보유자 박병천 씨가 20일 오전 3시35분 별세했다.74세. 세습무로 22대를 이어온 고인은 1932년 전남 진도 신청(神廳)의 악사 박범준과 진도 최고의 무당 김소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박병천의 소리와 장단은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찬사를 받았던 그의 작은 할아버지는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이다. 고인은 1971∼1976년 진도에서 전승되는 ‘남도들노래’와 ‘강강수월래’,‘진도만가’를 전국민속경연대회에 들고 나가 국무총리상과 대통령상,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1977년에는 ‘진도다시래기’,1978년에는 ‘진도씻김굿’을 다시 발표하여 각각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고인은 이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악장 및 예술감독,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전임교수, 대불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하면서 최근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장남 박환영(50) 부산대 교수가 대금연주자로 가업을 잇고 있다. 빈소는 20∼22일 서울 아산병원,23∼24일 전남 진도 한국병원.23일 오후 8시부터 한국병원에서는 고인을 위한 ‘진도씻김굿’이 있다. 발인은 24일 오전 9시, 장지는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선영.(02)3010-2230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어르신 무대 오르시죠”

    “노래에 자신있는 어른신들 오디션 보러 오세요.”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사인 에이콤이 내년 1월 선보일 뮤지컬 ‘러브’에 출연할 할아버지, 할머니 배우들을 공개 모집한다. ‘러브’는 실버타운을 배경으로 황혼기 노인들의 사랑을 코믹하게 다룬 작품. 아이슬란드 뮤지컬로 영·미 뮤지컬이 판치는 국내 공연가에 새 기운을 불어 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아들과 간호사 역을 제외하곤 주·조연급이 모두 노인 배역이라 에이콤측은 ‘강호에 묻혀 있는 끼 많고 참신한’ 어르신들을 찾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응시자격은 ‘55세 이상 노인 연기가 가능한 자’로, 젊은층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으나 일단 ‘경로우대’다. 젊은 배우들의 노역 분장은 적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최악의 경우에만 고려하고 있다는 것.오디션은 새달 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대연습실에서 열린다. 비틀스, 나나 무스쿠리 등이 부른 옛 팝송들로 채워진 ‘주크박스 뮤지컬’인 만큼 오디션 지정곡도 이들의 노래로 구성돼 있다. 특기와 연기를 보며, 안무 심사는 없다. 오디션을 통해 주로 조연과 앙상블을 선발할 계획이다. 주연급에는 현재 몇몇 유명 탤런트들의 이름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28일까지 인터넷(love@iacom.co.kr)또는 방문 접수할 수 있다. 합격자 발표는 새달 6일 홈페이지(www.iacom.co.kr)를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다.(02)575-6606.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강서구 ‘독거노인 무료식사 제공’

    15일 강서구 마곡동 주택가의 한 오리요리전문점. 점심때가 되자 하나둘씩 노인들이 모여들어 식당은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로 변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할머니들은 안쪽 테이블에, 할아버지들은 바깥쪽에 자리를 잡는다.
  • [현장행정] 강서구 ‘독거노인 무료식사 제공’

    [현장행정] 강서구 ‘독거노인 무료식사 제공’

    주인장이 야들야들하게 손질한 오리고기에 소주를 곁들여 내온다. 불판 위에 올라간 고기가 ‘치이익’하는 소리를 내고 소주잔이 서너 순배 돌아갈 쯤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할머니의 웃음소리도 자연스레 높아진다. ●음식이 아닌 사랑을 대접합니다 강서구는 지난 5월부터 ‘독거어르신 무료식사 제공 사업’을 진행 중이다. 홀로 어렵게 생활하는 독거노인 15명은 매달 한 번씩 이 식당에 들러 함께 점심식사를 한다. 김동운(59) 사장은 “지난 5월 구청으로부터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면서 “오히려 내 먹거리로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소박한 기쁨”이라고 말했다. 이 업소처럼 동네 어르신들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둔 곳은 모두 46곳. 매달 무료 식사를 제공받는 어르신만도 500명에 이른다. 6개월 동안 14개 식당이 추가로 동참해줬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누가 동참할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무료식사 사업은 한 모범음식점 업주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동사무소를 통해 기초생활수급자 중 65세 이상 독거 어르신을 추천받아 가까운 음식점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식사를 드리는 방법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노인들을 초청해 한꺼번에 식사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무료 쿠폰을 드리거나 집으로 음식을 배달해 드리기도 한다. 어르신들도 음식점도 서로 부담이 없어야 지속적인 봉사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환경위생과 권용태(44) 주임은 “몇몇 음식점은 매일 음식을 제공하고 싶다고 제의를 했지만 오히려 구청에서 정중히 거절했다.”고 말했다. 자칫 의욕만 앞섰다가 나중에 부담을 느끼는 것보다는 천천히 조금씩 늘려나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에서다. ●못사는 동네 식당이 더 열심 눈칫밥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구청과 식당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친절이다. 이런 덕인지 동사무소 직원에 이끌려 수줍게 식당을 찾던 어르신들도 이제는 인사를 나누며 스스럼없이 식당 문을 들어선다. 자식 없이 부인과 단둘이 사는 김한수(70) 할아버지는 “음식이 맛있을 뿐 아니라 종업원들이 부모 대하듯 해줘서 항상 고맙다.”면서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옛말에 ‘쌀독에서 인심난다.’고 했지만 고맙게도 비교적 형편이 좋지 않은 동네의 음식점들이 더 자발적으로 참여해 줬다. 하지만 과제도 산더미다. 강서구 전체 기초생활수급자 중 65세 이상 독거노인의 수는 2105명, 여기에 차상위층 노인까지 합치면 3635명이다. 강서구 전체 음식점수가 5323곳인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그래서 월 1∼2차례인 식사대접 횟수를 음식점 스스로 조정해 식사기회를 조금씩 늘리도록 할 방침이다. 또 추가로 봉사에 참여할 식당을 찾고 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깔깔깔]

    ●신혼의 추억 할아버지가 막 잠이 들려는데, 신혼시절을 생각하던 할머니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을 꺼냈다. “함께 잠자리에 들 때면 내 손을 꼬옥 잡아줬었는데….” 썩 내키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손을 뻗어 잠시 할머니 손을 잡아주고는 곧바로 잠을 청했다. 얼마 뒤 할머니가 또 말을 걸었다. “그런 다음 입을 맞춰주곤 했죠.” 할아버지는 못이기는 체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살짝 입을 맞추고는 다시 누웠다. 또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그러다 내 귀를 가볍게 깨물어 주기도 했었는데….” 번번이 잠이 깨 화가 난 할아버지가 이불을 내던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할머니가 어딜 가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약간 새는 듯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빨 가지러!”
  • 사내가 사람을 치어가며 얻으려는 한 것은?

    “쯧쯧,불쌍하기도 하지.얼마나 개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남의 목숨까지 아랑곳 하지 않았을까?” 중국 대륙에 한 사내가 공짜로 개고기를 먹으려고 흑심을 품었다가 그만 자동차로 사람을 밀어버리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다. ‘사건의 장본인’은 중국 동남부 푸젠(福建)성 취안저우(泉州)시 취안강(泉港)구에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남성.그는 지난 5일밤 집 근처에서 지나가던 포실포실한 황구(黃狗)를 보고 개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 봉고차로 그 황구를 치어 죽여 집에서 요리해먹으려다가 오히려 교통사고를 내는 통에 사람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고 동남쾌보(東南快報)가 7일 보도했다. 동남쾌보에 따르면 이 사내는 지난 5일밤 7시쯤 일을 마치고 회사의 봉고차에 동료 좡(庄)모씨를 옆에 태우고 집으로 귀가하던 중이었다.그는 생각보다 일찍 집 근처에 도착해 속도를 줄여 천천히 가고 있는데 갑자기 고샅에서 흐벅지게 살이 찐 황구 두마리가 튀어나왔다. 황구를 본 순간 옆에 타고 있던 좡씨 “어유,맛있는 거”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이 말을 들은 사내도 잡아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이 생각이 떠오른 순간 그는 눈을 꼭 감고 몰고 가던 봉고차의 액셀레이터를 꾹 눌러밟아버렸다.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치어 죽이려고 한 황구 두마리는 어느새 멀리 도망가버리고 난데없이 한 할아버지가 나타나 차에 치여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눈앞이 캄캄해진 사내는 곧바로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다. 사내가 다행히 재빨리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긴터라 목숨을 건졌으나 큰 부상을 입은 탓에 많은 의료비를 부담해야 했다.어디 그뿐인가 몰고가던 차가 완전히 망가져 수리비도 적지 않게 물어야 할 판국이다.개고기 한번 공짜로 먹으려다가 오히려 개 수십마리 값만 물게 생겼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5) 경남 함양군 마천면 도마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5) 경남 함양군 마천면 도마마을

    경남 함양군 마천면 도마마을은 ‘복숭아꽃이 만발하다’는 뜻인데, 행정구역 개편때 마천에서 으뜸가는 수도마을이라 하여 ‘도마천’이라고 했다가 그 후엔 그냥 줄여서 ‘도마’라고 부른다. 청주 한씨의 정착촌으로 마을 입구 경치 좋은 천변에 ‘도원정’이라고 쓰인 아담한 정자가 있다. 여름철엔 피서객들 차지지만 원래는 청주 한씨의 누각이다. 한때는 가구 수가 60여호에 달하던 것이 지금은 40 호가 좀 못 된다. 도마는 지리산꾼들에게 소위 ‘칠암자 코스’로 불리는 산행 기점이기도 하다. 실상사에서 시작해 약수암∼삼불사∼문수암∼상무주암∼영원사∼도솔암, 이렇게 일곱 개의 암자를 거쳐 주능선 삼각고지와 연하천대피소 사잇길로 붙게 되는데, 준족이라도 배낭이 가볍지 않다면 꼬박 하루를 쏟아 부어야 닿을 수 있는 먼 거리다. 따라서 당일산행으로 부담없이 즐기려는 이들에겐 영원사부터 역순으로 시작해 이곳 도마마을에서 끝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붉은 단풍 듬성듬성 흐드러진 마을엔 지붕을 새로 얹는 공사 소음만 간간이 들려올 뿐 대체로 적막하다. 남원 산내면이 고향인 양향순(69) 할머니는 50년 가까운 마천 생활 덕에 경상도 사투리가 더 입에 붙는다. 산내와 마천은 행정구역으로 나뉜 도경계일 뿐, 이곳에선 전라도 경상도를 나누는 일조차 무의미하다. 코앞 마천에서 시집온 곽기선(73) 할머니는 큰아들이 쉰을 넘겼으니 결혼한 지 족히 반백 년이 넘고도 남는다.“나는 말주변도 없고, 할 말도 없소.” 손사래를 치지만 불쑥 찾아온 손님을 매정히 몰아내진 않는다. 볕 좋은 툇마루에선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1915m)의 위용이 우뚝하다. 이 마당을 놀이터 삼아 삼형제가 자랐다. 다른 집들이 그렇듯 지금은 죄다 객지에 나가 있지만 할머니의 아들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천왕봉이 올려다보이는, 혹은 천왕봉이 내려다보는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무수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젊어서 상봉(천왕봉)엘 딱 한 번 올라가봤다는 곽기선 할머니. 손에 잡힐 듯 저렇게 가까운데도 이제는 평생을 두고 다시는 올라서지 못할 머나먼 산이 되었다. 여든다섯의 신봉옥 할아버지는 4년 전쯤 이 일대를 휩쓸고 간 수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태풍 루사는 마천면 일대의 지리산기슭을 흉칙하게 긁어 놓았다. 견성골에 물이 넘치면서 애꿎은 집이 쓸려 나가고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사람이 죽기도 했다. 어디 수마의 기억뿐일까. 낮에는 군인의 편에서, 밤에는 빨치산의 편에서 살며 생명을 부지했던 한국전쟁의 몸서리치는 악몽 속에는 “죄 없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사실만이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8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이 댁도 예외는 아니어서 객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몸져누운 아내와 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구의 몸만 남았을 뿐이다. “군수에게도 도지사에게도 얘기를 해봤지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곤 노인들뿐인데 버스가 다니는 마천까지는 한참이거든. 하루 두어 번씩이라도 마을버스를 놓아달라고 건의를 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말을 마친 신 할아버지는 낮은 지팡이에 의지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노거수 그늘로 흔들리듯 사라지신다. 지붕 공사를 끝냈는지 마을은 다시 고요와 적막 속으로 무겁게 젖어 들었다. ● 교통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 함양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행을 탔다면 마천에서 내려 도마마을까지 택시를 이용한다. 면소재지 마천에서 마을까진 약 2㎞로 두 곳을 오가는 버스는 없다. 택시요금은 4000원 안쪽. 그 외 부산, 대구, 전주 등에서도 함양행 버스를 탈 수 있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88고속도로 지리산IC에서 백무동 방면으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는 함양과 생초IC를 각각 이용한다. 글·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www.emountain.co.kr)
  • 파평 윤씨 문중 ‘병적 기록부’ 한바탕 홍역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최근 공개한 조선 숙종시대의 보물급 군적(軍籍) 자료의 출처를 놓고 파평 윤씨 문중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 자료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 집안의 소장품이었다고 알려지자, 혹시 명재의 종손이 집안 몰래 거액을 챙기고 이 자료를 박물관에 팔아 넘긴 것이 아닌가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명재의 종손 윤완식(51)씨는 6일 “토지박물관이 입수했다는 군적은 우리가 아니라, 할아버지(명재)의 이름을 내건 연구소를 운영하는 사람에게서 나온 문건”이라면서 “그럼에도 보도 이후 친지들에게 걸려 오는 각종 전화가 하루 100통이 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했다. 윤씨는 명재 이후 종가에 축적된 각종 희귀문서 9000점을 2002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일괄적으로 관리를 위탁했으며, 이 가운데 윤증의 초상화와 집안의 인장은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그럼에도 최근 걸려온 전화는 ‘종손이 말로는 문중자료를 국가기관에 관리를 위탁했다고 해 놓고 좋은 자료는 뒤로 빼돌리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윤증 고택’으로 잘 알려진 충남 논산의 명재 종가는 희귀 문서가 많다는 소문이 돌아 국사편찬위원회 위탁 이전에 세 차례나 도둑이 들었으며 일가족이 흉기로 협박받은 일도 있었다.윤씨는 “공공성 있는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국사편찬위에 위탁한 것인데 엉뚱한 오해를 사다니 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中 예식진과 백제의 예식은 동일인물”

    “中 예식진과 백제의 예식은 동일인물”

    지난해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묘지명의 주인인 예식진( 寔進)은 60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정벌 때 의자왕을 협박해 항복토록 한 예식( 植)과 동일인물이라는 연구 결과가 한·중 학자에 의해 동시에 제기됐다. 바이건싱(拜根興) 중국 산시(陝西)사범대 역사문화학원 교수는 충남대 백제연구소 주최로 8일 열리는 ‘제13회 백제연구국제학술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당과 백제의 국제관계에 관한 두 가지 문제’를 발표한다. 앞서 김영관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장은 최근 발간된 ‘신라사학보’ 10호에 실린 ‘백제 유민 예식진 묘지 소개’에서 “예식진은 ‘구당서(舊唐書)’ 소정방 열전에 보이는 백제대장군 예식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예식진 묘지명은 지난해 뤄양(洛陽)의 골동품가게에 나타난 뒤 중국 지린성(吉林省) 사회과학원이 발간하는 ‘동북사지(東北史地)’에 ‘시안 출토 당대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논문에 내용이 소개됐다. 묘지명에는 예식진이 백제 웅천(공주)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을 역임했으며, 할아버지는 좌평까지 오른 예다(藝多), 아버지는 역시 좌평을 역임한 사선(思善)이라고 적혀있다. 예식진이 당 고종 함형 3년(672) 5월25일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사망하자, 당의 수도인 시안으로 운구되어 고양원(高陽原)에 묻혔다고 적혀 있다. 바이건싱 교수는 “당시 웅진으로 피신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투항하는 것은 장수들의 쿠데타적 협박에 인한 것이었으며, 그 주역은 당연히 웅진성 방어를 총지휘한 웅진방령 예식”이라면서 “의심할 필요도 없이 예식은 당나라에서 특별한 대우와 큰 작위를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예식진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산둥반도 동북부에 있는 황현에서 죽은 것도 신라가 옛 백제지역을 공략하고 있는 상황에서 웅진도독 세력을 지원하는 역할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김영관 박사는 “묘지명에서 예식진을 두고 ‘창해에서 명성을 드날리고, 청구에서 기개를 떨쳤다.’거나 ‘아득한 바다 동쪽에서 황제의 가르침을 펼치고, 보검을 휘두르며 활 시위를 보름달처럼 당겼다.’고 묘사한 것으로 볼 때도 그가 백제의 고위 무장이었음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예식진 묘지명은 기존 백제사에서 알려진 이른바 대성팔족(大姓八族)말고도, 예식진이 대표하는 예씨 집단이 웅진을 거점으로 대대로 좌평직을 세습하면서 백제 지배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케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순모 충남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존의 ‘예식진묘지명’에 대한 고증을 심화시켜 당과 백제 관계 연구를 진일보시킬 수 있는 기초적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하지만 7세기 한자발음에서 식(植)과 식(寔)을 같은 발음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진(進)이라는 글자가 추가된 원인은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사죄의 마음뿐” 왕비의 노래 들으며 눈물

    “사죄의 마음뿐” 왕비의 노래 들으며 눈물

    112년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서울 경복궁 건청궁에 뮤지컬 ‘명성황후’의 아리아가 울려퍼졌다. 자신의 비운을 예감한 왕비의 노래가 빈 고궁을 채우자 가와노 다스미(86)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특별부대원’으로 가담했던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다. 7일 오전 건청궁 복원을 기념하는 기행 행사에 가와노 다스미를 비롯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 7명이 참석했다. 건청궁은 지난 10월 100여년 만에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문화재청과 한국관광공사, 에이콤인터내셔널이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문화계 인사와 일반 관람객 등 100여명이 참석해 건청궁을 둘러보고 뮤지컬 ‘명성황후’를 감상했다. 두 곡의 노래를 듣는 동안 내내 눈시울을 붉히며 기도하는 자세로 공연을 지켜보던 가와노는 “2년 전 용서를 빌러 여기에 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노환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그는 “할아버지는 한국과 일본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건 잘못된 일이었다.”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얘기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며 끝내 말을 아꼈다. 이번에 세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가이 도시오(78) 대표는 공연이 끝난 뒤 일본에서 직접 써온 편지를 낭독했다. 먼저 건청궁 복원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건넨 가이 대표는 “일본과 한국 양국의 역사 인식 공유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평화의 의지를 담은 등불탑을 직접 깎아와 한국관광공사 관계자와 배우들에게 건네기도 했다. 회원 오카자키 와조(80)는 “자신의 맘을 어두운 밤으로 표현하는 왕비의 노래를 들으니 사죄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몇번을 와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관람객으로 따라나선 나홍주(74)씨는 “건청궁이 복원되고 그 안에서 명성황후 공연까지 봤다는 건 기쁘지만 일본에서 사죄하거나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아 슬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복궁을 돌아본 일행은 뒤이어 오후 명성황후의 묘가 자리한 경기 남양주시 홍릉을 찾아 추모행사를 가졌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4)강화 연등국제선원 지도법사 일조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4)강화 연등국제선원 지도법사 일조 스님

    강화의 연등국제선원(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85-1)은 한국불교에 귀의한 외국인 스님들이 모여 사는 특이한 곳이다. 지금은 대부분 다른 선방과 고향을 찾아 잠시 떠나 두 명만이 선원을 지키고 있지만 평소엔 10여명의 외국인 스님이 각자 소임을 맡아 절집 살림을 꾸리고 수행에 매진하는 이색공간. 이곳에 가면 외국인 템플스테이며 일반인 참선을 지도하느라 늘상 분주하게 움직이는 눈 푸른 스님이 단연 눈에 띈다. 한국 불교계의 웬만한 스님들이 다 이름을 알 정도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러시아 출신 지도법사 일조(日照·34·본명 표트르 가브릴렌코) 스님. 한국에 출가한 외국인 스님 가운데 ‘어렵다 못해 혹독하다.’는 서슬 퍼런 강원과 율원 과정을 가장 먼저 마치고 비구계를 받은 푸른 눈의 납자(衲子)이다. “한국불교를 제대로 배우자.”며 한국으로 출가해 이젠 여느 한국인 스님과 다를 바 없이 ‘한국 스님’이 다 된 일조 스님. 그에게 한국은 배움의 땅이자 소신의 실천처이다. 일조 스님은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이 통과하는 러시아 중남부 도시 케메로보에서 태어난 옛소련 출신. 직장을 옮기게 된 아버지를 따라 중앙아시아 북부 키르기스스탄으로 4살 때 이주해 살아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의 이중국적자 신원이다. 비록 국적은 한국이 아니지만 1998년 한국불교에 귀의한 뒤 9년간 줄곧 한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 살아온 자칭 타칭 ‘한국인’이다. 한국에 사는 뭇 외국인들처럼 일조 스님, 아니 표트르도 한국과는 참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불제자의 길을 걷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16살 때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종교서적이 한국과 맺은 인연의 시작이다. 러시아인이 쓴 ‘무신론자’란 제목의 일종의 종교 사전이자 종교 비방서. 옛소련 종교를 탄압하던 시절 발간되어 기독교를 비롯해 불교, 도교, 유교 등 모든 종교를 짤막짤막하게 개괄한 책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스님은 책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 부분을 읽고 ‘큰 발견’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독실한 정교회 신자이며 자신 역시 정교회의 의식을 따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침수세례를 받았다는 일조 스님. 그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는 중생의 성격과 신분 차를 짓는 근본 원인이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책 ‘무신론자’중 ‘과거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난다.’는 구절에 마치 큰 숙제를 푼 것만 같아 말할 수 없이 기뻤단다. 세상의 어느 가르침과 교훈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나름의 답을 찾았다고나 할까. 일반인이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이른바 윤회의 ‘업(業)’에 신경을 이었으니 분명 예사 사람은 아니다. 그 이후로 늘상 불교와 ‘업’을 머릿속에 넣고 살다가 일종의 예비대학을 졸업하고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지역 군(軍)에 입대해 소위로 군 생활을 하던 중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지역 신문에서 비슈케크에 한국 사찰 ‘보리사’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마치 오래 기다렸던 그 누군가를 만난 듯 설다고 한다.1992년의 일이다. 당시 보리사 개원식에 참석한 은사 원명(2003년 입적) 스님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학력을 인정받아 장교로 근무한 때문에 병영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6년간 보리사를 다니며 일요일 법회에 꼬박꼬박 참석한 것은 물론 평일에도 가끔씩 찾아 법문을 듣고 절집 일도 돕고 참선을 이어갔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보리사는 고려인과 현지인 30명 정도가 법회에 참석할 만큼 보잘것없는 포교원.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언어 소통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조금이나마 한국불교에 더 다가가기 위해 비슈케크 인문대학에 입학해 아시아역사와 한국어, 한문을 파고들었다.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쳤는데 한국의 원명 스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머물 곳이 있으니 강화 연등선원으로 오라는 전갈이었지요.” 모든 것을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연등선원으로 들어왔다.1998년 연등국제선원이 막 개원했을 때의 일이다. 연등국제선원은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인 원명 스님이 서울 안국동에서 외국인 대상의 포교원격으로 운영하던 국제불교회관 개원 10주년을 기념해 세운 선원. 현 선원장 겸 주지 원유 스님은 원명 스님의 맏상좌이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한국인 스님이다. “처음 연등선원에 왔을 때 체코 스님과 한국인 스님 한분을 빼곤 도무지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었어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서울 만큼 갇힌 상태에서 행자생활을 했지요. 그러던 중 선원을 찾은 한 스님의 ‘공부 제대로 하려면 송광사로 가라.’는 말에 솔깃한 것이지요.” 행자생활 1년을 마치고 절집 살림을 꾸리는 원주 소임 1년째였다.“한국 스님들과 몸을 부대끼며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란 생각에 송광사 강원으로 가기 위해 봇짐을 쌌다. 함께 수행하던 스님들이 “틀림없이 중도에 포기할 것”이라며 “못 견디면 언제든지 연등선원으로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봇짐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강원 공부는 한국인 스님들도 절반가량이 도중에 포기할 만큼 어려운 과정. 일조 스님과 함께 공부를 시작한 한국인 동기 스님 37명 가운데 16명만 졸업을 했다고 한다. 이를 악물고 치문, 사집, 사교, 대교의 4년과정을 견뎌냈다. 한국어가 서툰 데다 생활방식도 다르고 선배들이 너무 무서워 눈칫밥을 먹고 잠 자는 것은 물론 숨쉬는 것도 수행의 연속이었다. 하루 다섯 시간 잠을 자지만 선배들에게 불려가 밤새도록 엄한 참회(일종의 단체기합)를 받거나 절을 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 날도 부지기수. 가장 낮은 과정인 치문 때는 화장실 청소며 밥짓기 같은 힘든 소임도 도맡아야 했다. 강원을 졸업한 2004년 마침내 원명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됐지만 내쳐 송광사 율원에 들어 2년간의 힘든 과정을 마치고 ‘제2의 고향’인 이곳 연등선원에서 뜻을 펴고 있다. “나는 대수롭게 인터뷰할 사람이 못된다.”며 묵묵히 차를 따르던 스님이 은사 스님의 유언을 불쑥 꺼낸다.“세상 만사 모두 헛되니 오직 수행에만 정진하라.” 한참 공부에 빠져 있던 송광사 강원 학승시절, 병중의 원명 스님이 마지막 대면에서 남긴 한마디는 거역할 수 없는 생활의 처음이자 끝이 되어 있는 듯했다.“인생에서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만 해도 큰 행운인데 나는 큰 스승을 만났으니 선택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많은 불교 가운데 한국불교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중국불교는 원 속성을 잃은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일본불교는 정통의 수행방식에서 비켜났지요. 티베트 불교가 밀교성격의 복잡한 의식에 치우쳤다면 남방의 소승불교는 보살사상이 빠졌습니다.” 오랜 공부 때문일까 스님의 입에선 온갖 불교의 속성들이 술술 풀어진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존중하는 ‘중생’개념과 내가 아닌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산다는 ‘보살사상’이야말로 대승 한국불교의 핵을 이루는 백미가 아니냐고 묻는다. 무릇 불가에 귀의한 모든 중생들의 귀착점은 ‘아누다라 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일 터.‘더 이상 갈 곳 없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를 향한 수행이야말로 일조 스님에게도 예외없이 가장 큰 목표일 것이다. 그런 스님에게 지금 할 일이 너무 많다. “‘보살행’의 큰 가르침을 오롯이 담은 한국불교의 제 가치를 만방에 알리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큰 업(業)입니다.” 그래서 안거(案居)가 아닌 산철엔 틈날 때마다 러시아며 우크라이나 등지의 한국 사찰을 돌며 참선지도와 법회를 이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불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틈틈이 전통의 한국불교 수업기관인 강원·율원 등의 교육시스템 안내 책자 짓기와 번역작업에도 매달린다. “죽을 날을 생각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생일수록 속된 것들과의 반연(攀緣·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는 일조 스님.“부처님이 되는 성불(成佛)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모두 버려가는 과정인데 아직도 이렇게 버릴 것이 많으니 부처님 되기엔 아직 멀었다.”며 선원 문을 나서는 기자에게 두 손을 모았다. 강화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일조 스님은 ●1973년 옛소련 케메로보 출생. ●1977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이주. ●1992∼1997년 비슈케크 한국사찰 보리사 신도로 활동. ●1998년 한국행, 강화 연등국제선원서 출가. ●2000년부터 4년간 송광사 강원생활. ●2004년 원명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수지. ●2004년부터 2년간 송광사 율원생활. ●2006년 송광사 율원 졸업 및 러시아 등지 만행. ●현재 강화 연등국제선원서 선원장 원유 스님을 도와 내외국인 상대로 참선지도 중.
  • [길섶에서] 너는 누구인가/최태환 수석논설위원

    ‘너는 누구인가’ 영안실 입구의 글귀가 걸음을 막는다. 종교단체에서 붙인 것일까. 죽음을 배웅하는 문상객들에게, 아니 우리 모두를 향해 묻고 있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철학자를 떠올린다. 소크라테스도 독배를 받는 순간 죽음은 삶으로 향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죽음과의 화해다. 가톨릭에선 삶의 마감을 ‘선종’(善終)이라 한다.‘착하게 살다 복되게 죽었다.’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하지만 죽음을 자주 목도하는 신부들은 선종 의미에 걸맞은 죽음을 만나긴 쉽지 않다고 했다. 삶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 어쩌면 필부의 본능이고 당연한 집착인지 모른다. 화가 미켈란젤로는 임종 때 “그토록 기다렸으나, 이렇게도 늦게 찾아왔다.”며 담담해했다.“할아버지, 죽음이 뭐예요.”동네 꼬마가 묻자 아인슈타인은 “더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는 것이란다.”라고 했다.‘걸레 스님’ 중광은 “괜히 왔다 간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 느낌과 모습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인간의 가족입니까? 짐승의 가족입니까?”

    “하늘 아래 이렇게 막나가는 가족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중국 타이완(臺灣)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삼촌,형제가 모두 한패를 이뤄 손녀,딸,누나·동생을 무자비하게 성폭행·성추행하는,인간이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나가는 사건이 발생,충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타이완 북동부 이란(宜蘭)현에 살고 있는 한 자매는 지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오빠와 남동생,그리고 삼촌 등 가족 3대(三代)로부터 끊임없이 성폭행과 성추행 당해온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고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인터넷신문인 인민망(人民網)이 1일 보도했다. 인민망에 따르면 천인공노할 짐승같은 가족들로부터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해온 이들 자매중 언니는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고 동생은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데,이같은 끔찍한 사건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19살인 언니는 지난 1995년 아버지로부터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하면서 ‘악몽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7살이라는 어린 그녀가 꽃잠을 자고 있는데,짐승같은 아버지(49)가 그녀의 하체를 더듬으며 성폭행을 자행했다. 올해 16살인 동생은 9살 나던 지난 2000년 4월부터 할아버지(76)와 삼촌(47)으로부터 잇따라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이어 아버지도 어린 막내 딸이 잠에 들기만 하면 짐승처럼 달려들어 배를 쓰다듬거나 하체를 더듬으며 성폭행과 성추행을 자행했다. 이같은 천인공노할 짐승같은 행위는 2002년 8월까지 계속됐다.그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두명의 오빠로부터 연달아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할아버지는 지난 1998년부터 2001년 사이에 이들 자매가 TV를 시청할 때 가슴을 만지거나 하체를 더듬었다.삼촌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고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성폭행을 자행했다고 한다. 경찰 조사결과 이 난륜(亂倫)사건의 중심인 아버지는 자동차 수리공으로 그 어떤 전과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그는 부부생활도 아주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당국은 “아마도 어머니는 두 딸이 가족들로부터 성폭행 등을 당하고 있는 것을 미리 알았을 것”이라며 “그러나 타이완 사회가 부권사회인 만큼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뤄둥보(羅東博) 정신과병원 라차오슝(李朝雄) 주임은 “이번 사건으로 볼 때 이들 가족은 유전성 정신병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가족들이 모두 성폭행 공범이 된 사례는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충남 논산시 상월에서 공주시로 넘어온 옛길은 계룡면 경천에 다다른다. 이곳에 섰던 5일장은 한때 공주에서 가장 컸다. 저녁 때 도착한 이 시장터는 한가한 분위기에 파리만 날렸다. 이곳에서 20년째 경천철물점을 운영하는 이영수(70)씨는 “옛날에 시장이 섰을 때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면서 “10여년 전 시내버스가 들어온 뒤로 5일장이 죽었다.”고 말했다.1000평은 됨 직한 장터는 차들만 몇대 주차돼 있고 텅 비어 있다. ●마을에 승병 영규대사의 묘 그 전에는 신원사, 갑사는 물론 신도안에서 왔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계룡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한복판인 이 시장으로 모두 몰려들었다. 장이 서면 철물점에 농기구를 사려는 손님이 들끓었다. 국밥집마다 손님이 넘쳐났고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둥그런 시장 주변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이씨는 “그때를 기억해서인지 5일장이 섰던 2일과 7일에 떠돌이 옷장수 2명이 찾아온다.”고 씁쓰레하게 웃는다. 일제 때 경천에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1930년 월암리로 이전했다. 이씨는 “정석모(전 내무부 장관) 아버지가 면장할 때 옮겼어.”라며 아쉬워했다. 옛길은 국도 23호와 갈라져 소로로 내달린다. 계룡초등학교 담을 끼고 바로 좌회전해 농로를 따라가면 유평1리가 나온다. 이 마을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승병을 일으킨 영규대사(?∼1592년) 묘가 있다. 이 마을 출신이다. 영규는 서산대사의 제자다.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옆 마을인 월암리로 피신했다 숨졌다. 묘는 충남도기념물 15호이다.1810년 순조 때 세워진 비석도 있다. 주민 박상희(70·여)씨는 “동네 주민들이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준다.”고 전했다. ●‘정감록´ 흔적이 배인 땅 길은 계룡면 사무소 앞에서 국도 23호와 합쳐진다.3㎞쯤 달리면 널티고개가 나타난다. 경사가 완만하다. 이 고개에 물이 넘치면 ‘정씨 왕조’가 세워진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정감록에 나오는 왕조를 일컫는다. 널처럼 속이 비었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무넘이’라고 불렀다. 고개가 관통하는 동명리 이장 유병상(67)씨는 “정씨 왕조 얘기는 잘 모르지만 우리와 인근 마을에 농수를 대기 위해 기산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관이 고개를 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도로처럼 닦인 국도를 타고 10㎞쯤 내달리면 금강 앞이다.1㎞ 전방에서 빠져 시내쪽으로 가다 보면 소학동이 나온다.‘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가 이 마을에 있다. 향덕은 통일 신라 경덕왕시절인 755년 부모가 가난과 유행병으로 시달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기록에 있는 최초의 효행사적으로 알려졌다. 왕이 향덕의 효행을 알고 벼 300석과 집 등을 하사했다. 이후 ‘효가리(孝家里)’라고도 불려졌다. 비석 앞에는 48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높이 11m, 둘레 3.3m로 매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을 빈다. ●“귀향온 사람 나루터 건너자 목 베어” 금강변을 따라 난 도로로 1㎞쯤 넘어 가면 공주대교 앞 장기대나루가 나타난다. 공주대교 밑에 만든 게이트볼장에 있던 팔순 가까운 할아버지는 “30년 전만 해도 노를 저어 강을 건너주는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양에서 귀양 오는 사람들이 나루터를 건너면 목을 많이 쳤다.”며 “옛날에는 강 옆 산에 시신을 묻은 고린장터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지금은 강에 펌프장이 설치돼 있다. 나루터에는 수백년 된 팽나무가 있었다. 나룻배를 묶어두고 손님들이 쉬어가던 나무다. 교량이 건설되면서 공주대로 옮겨 심었으나 얼마 안가 죽었다. 이곳에서 시내를 지나서 7㎞쯤 떨어진 곳에 우금치가 있다. 이 고개는 전봉준 장군이 1894년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운 동학혁명전투 중 최대 격전지다. 공주대 윤용혁(역사교육과) 교수는 “주력 동학군은 이인쪽을 통해 공주로 올라왔지만 일부는 공주 구간 옛길로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동학혁명은 우금치 전투의 대패로 결국 실패했다. 금강을 건넌 옛길은 공주대와 신관초교를 거치지만 지금은 길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정안천 주변을 따라가던 길이 국도 23호와 만나는 곳은 조선조 숙박시설이 있었던 모란 마을이다. 얼마 안가 국도변에 붙어 있는 ‘석송정’이 나온다. 마을 이름도 정안면 석송리다. 이 정자는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올 때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지방 유림들이 세웠다. 인조가 이곳을 지날 때 지방 유림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세금 감면을 해줬다고 한다. 훼손된 것을 1985년 공주시가 복원했다. 정자 주변에 인조가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생가터에 비석만 잠시 국도와 헤어진 옛길은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1851∼94년)과 만난다. 그가 6세까지 산 정안면 광정리 생가터다.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 것처럼 생가터는 썰렁하다. 유허비와 안내판만 잔디에 서 있을 뿐이다. 10여가구가 있었다던 마을은 사라졌고 ‘감나무골’로 불리듯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 몇 그루만 서있다. 그의 묘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있다. 김옥균 생가터에서 나오면 옛길은 곧바로 국도와 합쳐진다.3∼4분을 달리면 길은 또다시 국도와 갈라져 차령고개로 오른다. 차령산맥의 모태가 되는 지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10조에서 ‘차령고개 이남, 금강 밖은 등배(반역)의 산세이므로 그 지역 인물을 등용하지 마라.’고 한 곳이다. 지금은 국도가 따로 나 차들이 드물다. 울창한 숲만이 옛 위용을 알려준다. 차령고개 밑 정안면 인풍리 주민 조주형(67)씨는 “옛날엔 숲이 더 우거졌었다.”면서 “50년 전만 해도 천안 행정리 5일장에 가려면 고개에 도둑떼가 많아 혼자 소를 끌고 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주변에 ‘도둑골’이라는 마을까지 있었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당초 ‘금북정맥’으로 불렸으나 일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공주와 천안의 경계 지점으로 정상에 오르자 천안시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보인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태조 이성계 금강변 신도안에 도읍 구상 충남을 가로지르는 금강은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에 이어 항상 한 나라의 수도로 떠오른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금강변 공주·연기지역에 행정도시 건설이 추진되지만 수도로 거론된 역사는 백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는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위례성에서 건국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한강유역인 현재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구려에 의해 개로왕이 죽고 밀리면서 백제 문주왕이 475년 다음 수도로 정한 곳이 금강변 웅진, 충남 공주다. 지금은 금강의 ‘금’자가 비단 금(錦)을 사용하지만 웅진의 곰웅(熊)자를 딴 웅수(熊水)에서 ‘곰강’으로 불리다 금강으로 변했다고 한다. 백제 중흥의 기틀을 다져놓은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제26대 성왕이 538년 이전한 수도는 ‘사비’이다. 충남 부여로 역시 금강변에 위치한다. 부여를 통과하는 금강은 별도로 ‘백마강’으로 불린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룡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전설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말로 용을 낚았다고 전해지는 바위인 조룡대(釣龍臺)는 고란사 앞에 있다. 백제는 660년 사비시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만다. 금강변이 다시 수도로 떠오른 건 조선 건국 때.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자락인 신도안을 수도로 정했었다. 금강에서 가까운 곳이다. 한양에 밀려 공사가 1년 만에 중단됐지만 아직도 주춧돌 등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서 ‘정씨 진인이 나타나 새 왕조를 세운다.’는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이다. 선조 때에 발생한 정여립(1546∼89년)난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의 파괴력이 지속되면서 무속인이 신도안으로 몰렸다.1975년에만 해도 상제교, 태을교 등 104개 신흥종교 시설이 있었으나 계룡대를 조성하는 ‘620사업’으로 거의 사라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금강변 공주·연기를 행정 수도로 검토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후 이곳을 행정수도로 정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일부 국민들의 반대로 ‘행정도시’로 격이 낮아졌지만 이 사업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전북 장수군에서 충남 서천 금강하구둑까지 394㎞를 흐르는 금강.2014년까지 대통령 직속기관 4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총 49개 중앙행정기관이 들어서는 행정도시 ‘세종시’가 백제의 옛 영광을 재현할지 기대되고 있다. 공주대 윤용혁 교수는 “한반도 중심인 한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밀리면 다음으로는 천상 금강이 가장 적지다.”며 “대외적으로 교통이 좋은 강을 끼고 있고 넓은 평야지대 등 수도로서는 조건이 무척 좋다.”고 말했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SBS ‘왕과 나’ 내시 문소운 역 강인형

    SBS ‘왕과 나’ 내시 문소운 역 강인형

    “파란만장한 사연을 지녔지만 겉으로는 해맑기 그지없는 수호천사 역을 맡고 있습니다.” 무한가능성이 잠재된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 강인형(28). 그는 SBS 월화드라마 ‘왕과 나’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배역 문소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문소운은 남사당패에서 지내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인물에 의해 내자원에 팔린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화나 처선이 곤경이 빠지면 말없이 나타나 도움을 주는 속깊은 내시다. 어느 영화의 제목을 빌리자면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문내시’라고나 할까. 식당에서 우연히 매니지먼트사의 눈에 띄어 길거리 캐스팅된 그는 2004년 MBC베스트극장 ‘완벽한 룸메이트’로 데뷔한 뒤, 브라운관과 스크린 양쪽을 오가며 활약해왔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숨’에서는 타이완 스타 장첸을 흠모하는 어린 죄수를 연기했고,8일 개봉을 앞둔 ‘판타스틱 자살소동’에서는 게이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삶의 힘을 얻는 필립 역을 맡았다. 그 밖에 ‘버텨라 구창식’‘아파트’등의 영화와 ‘러브홀릭’‘다세포 소녀’등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이미지 때문인지 지금까지 여성적인 남성 역할이 많이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유독 동성애 코드의 역할이 많았다. 이에 대해 그는 “동성애역에 대해 특별히 거부감은 없지만, 이미지가 그 쪽으로 굳어질까봐 걱정”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가 ‘왕의 남자’ 최종 오디션에 올라간 4인방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이준기, 김동욱, 백성현 등이 함께 오디션을 봤던 경쟁자들이었다. 최종적으로 간택된 이준기는 ‘왕의 남자’ 공길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뒤 최근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해 공길의 잔영에서 벗어났다. 혹시 강인형도 이미지 전환을 꿈꾸고 있을까. “꼭 역동적이거나 거친 역할을 맡고 싶다는 게 아니라, 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앞으로 밝고 재미있는 사랑이야기나 딸을 둔 아버지 역할 등을 해보고 싶단다. “배우 정재영을 좋아합니다. 그의 연기에서는 진실됨이 묻어나지요.” 그의 눈빛에선 연기에 대한 갈증이 그대로 묻어난다. 앞으로의 꿈을 묻자 의외로 소박한 답이 돌아왔다.“스타가 되기보다는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해내는 배우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빛의 화가’ 방혜자 재불 여류작가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빛의 화가’ 방혜자 재불 여류작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를 향해 걸어갑니다. 텅빈 가운데, 어무도 없는 어두운 길’ 빛을 좇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것도 태초의 빛이다. 어쩌면 인간은 우주의 깊디깊은 어둠에서 한 줄기의 빛에 의해 태어났을 게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동 터오르는 어느 새벽녘, 누렁이 소의 등에 편안하게 올라타고 그 빛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고암 이응로 선생과의 인연 1958년 어느 날이었다. 고암(顧庵) 이응로 선생이 유럽으로 떠나기 전 미술공부를 하는 여대생에게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려줬다.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채찍을 든, 아주 힘이 넘치는 그림이었다. 고암이 장래가 촉망되는 미술학도에게 소처럼 꾸준하면서도 묵묵히 그림에 정진하라는 뜻을 담았다. 얼마 후 그 여대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국비장학생 1호’라는 명함과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다시 고암을 만났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1989년 고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한 가족처럼 지내며 예술적 스승으로 따랐다. 특별한 인연은 또 있다.‘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유명한 수화(樹話) 김환기(1974년 작고) 선생과도 자주 만나 미술적 영감을 얻곤 했다. 요즘들어 그의 작품세계가 수화의 후기작과 다소 연결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빛의 화가’로 잘 알려진 방혜자(71) 재불화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앞만 보고 무던히 걸어가는 소처럼 생명의 빛을 좇는다. 올해만 해도 파리와 브뤼셀 등에서 4개월 동안 개인전을 가진 데 이어 최근에는 서울 환기미술관(종로구 부암동)에서 ‘방혜자-빛의 숨결’이라는 제목으로 고국의 팬들을 위해 한 달반 동안 개인전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전시는 2년만이다. 이번 전시에는 앞·뒷면을 같이 쓸 수 있는 무직천 위에 석채, 흙 등 천연 안료로 그린 ‘빛의 회화’를 선보여 관람객들을 감동시켰다. 평론가들도 “무직천의 앞과 뒷면에 천연 안료를 스며들도록 하는 기법으로 빛의 효과를 함축적이면서 극대화했다.”고 표현했다. 방 화백은 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파리 국립미술학교와 파리 국립응용미술학교 등에서 벽화와 색유리화 수업을 받았다. 지금까지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무려 110여 차례에 걸쳐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후불탱화 그려 ‘빛의 구도자´로 불려 특히 그는 내면의 세계를 ‘빛’으로 표현해내는 특유의 기법으로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주목되는 현대미술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비평가 질베르 라스코는 “우주를 경탄하는 그 시선은 우리가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도록 도모한다. 그녀는 또 우주의 아름다움, 조화, 다양함을 증언하기 위해 깨어 있다.”라고 평가했다. 시인 샤를 줄리에 등 프랑스 여러 현대 시인들과 시화집을 내며 대중적 인기까지 높였다. 그는 10년 전 빛 그림으로 파리교외의 길상사, 그리고 서울 보각사와 개화사의 후불탱화를 조성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빛의 구도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시차 내한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했다. 약간 바쁜 모양이다. 그래서 전시가 끝난 직후인 지난달 29일 경기도 광주시 영은미술관에서 만났다.10만평 부지에 지난 2000년 개관한 영은미술관은 대유문화재단에서 운영하며 다른 미술관과는 달리 작가들을 위한 창작스튜디오 공간까지 마련했다. 방 화백이 한국체류시에는 주로 여기에 머문다. 일흔 넘은 나이로는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까만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키는 작고 왜소했으며, 목소리는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듯 또렷하고 청아하게 들려왔다. 이런 체격으로 우주의 빛을 빚어내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방 화백은 하루 일과를 명상에서 시작한다. 정신을 집중해 내면의 빛을 찾아내는 일이고 또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또한 자라면서 일제 강점기와 6·25 등 시대적 고통을 견뎌냈던 상흔 또한 ‘여정의 힘’에 큰 보탬을 주고 있을 터이다. 그의 뒤를 따라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을 햇살이 창 너머로 스며들면서 작업의 흔적, 즉 ‘빛의 숨결’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자 도쿄에서 전시가 있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동안 유럽 전시는 많았지만 일본 전시는 처음이라고 했다. 여러번 전시 요청도 많이 왔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단다. 일제 때 외삼촌과 할아버지가 심한 고문을 받았던 일, 초등학교 시절 우리 말을 썼다가 혼났던 일, 태평양 전쟁을 핑계로 온갖 훈련에 동원됐던 일 등등 당시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가 일생동안 가장 고심해온 것은 어떻게 하면 예술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죠. 세상에 환한 빛을 고루 비추는 것이지요.” ●15일부터 日서 첫 전시회 이러한 예술가적 사명이 그동안 닫혔던 문을 열게 했다. 예술의 경지에서 일본행을 결심했다는 것. 전시는 오는 15일부터 12월1일까지 도쿄시내 긴자(銀座)미술관에서 열리며 40여점이 전시된다. 그는 이어 “인간은 빛으로부터 왔고, 빛에서 살고, 빛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냐.”고 반문한 뒤, 빛은 생명의 원초적인 에너지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빛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게 도와야 한다. 이 또한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빛과의 인연을 묻자 “어릴 적 시냇물 속 조약돌에 비친 햇빛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이후 빛에 감탄하고 빛의 존재를 느끼면서 살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특히 6·25 때 얻은 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을 무렵, 수덕사 노스님에게서 전해들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얘기도 자연스레 ‘빛의 숨결’의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방 화백은 시인인 외사촌 오빠(김돈식·대표시집 석화촌)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엔 그림보다 시를 무척 좋아했다. 학창시절에는 랭보와 보들레르 같은 프랑스 시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던 경기여고 시절 김창억 미술선생의 권유로 미술반에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는 고암과 수화를 만나면서 작품세계의 깊이를 한층 더했다. “김환기 선생과는 대학시절 처음 만났고 뉴욕에서도 여러번 만났지요. 고암은 동양미술학교를 세우는 등 정말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훌륭한 분이지요. 파리에 있을 때는 저를 친딸처럼 아껴주셨지요.” 방 화백의 화실은 파리14구역에 위치해 있다. 인근 자택에서 매일 아침 걸어서 오고간다. 남편은 프랑스 한국학연구소 교수로 있던 알렉상드로 기예모즈. 피레네 인근에 등산을 갔다가 인연이 됐다. 남편은 한국의 무속까지 연구할 만큼 방 화백보다 더 한국을 좋아한다. 슬하에 건축가인 아들과 딸(승마학교 조교)을 두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부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美 조종사 티베츠 사망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던 미국인 조종사 폴 티베츠 예비역 준장이 1일(현지시간) 숨졌다.92세. 티베츠의 손녀 키아는 “할아버지가 3개월여 전부터 건강이 나빠져 이날 별세했다.”고 밝혔다. 그는 62년 전인 45년 8월6일 모친의 이름인 ‘에놀라 게이’로 명명한 애기(愛機)에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비밀계획 속에 개발된 우라늄 원자탄을 싣고 히로시마로 날아갔다. 마침내 이날 오전 8시 15분 9.44㎞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일본공군 본부를 겨냥해 원폭을 투하했다.B-29는 당시로서는 4개의 엔진을 단 최신예였다. 그는 자서전 ‘티베츠 이야기’에서 “거대하고 검붉은 버섯구름 띠가 4만 5000피트(13.7㎞) 상공까지 너비 3마일(약 4.9㎞)로 퍼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봤다.”고 회고했다.B-29는 폭격으로 불길이 치솟는 도시 상공을 피해 옆으로 날아갔다고 덧붙였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깔깔깔]

    ●말하는 개구리 늙은 나무꾼이 나무를 베고 있었다. 개구리:“할아버지!” 나무꾼:“거, 거기…. 누구요?” 개구리:“저는 마법에 걸린 개구리예요.” 나무꾼:“엇! 개구리가 말을?” 개구리:“전 원래 선녀였어요. 저에게 입을 맞춰 주시면 사람으로 변해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어요.” 한데 할아버지는 개구리를 집어 나무에 걸린 옷에 넣고는 다시 나무를 베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개구리:“이봐요, 할아버지! 나와 입을 맞추면 사람이 돼서 함께 살아드린다니까욧!” 할아버지는 개구리 말을 못들은 체하며 계속 도끼질만 했다. 개구리:“왜 내 말을 안 믿어요? 나는 진짜로 예쁜 선녀라고요!” 나무꾼:“믿어.” 개구리:“그런데 왜 입을 맞추지 않고 주머니 속에만 넣어두는 거죠?” 나무꾼:“나는 예쁜 여자 필요없어. 너도 내 나이 돼 봐. 개구리와 얘기하는 게 더 재밌지.”
  •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임진왜란 때인 1598년 전북 남원에서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400년 이상 흘렀다. 그 핏줄을 이어받은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62)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뿌리찾기에 나섰다. 그는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 마을에 정착, 지금도 14개 가마에서 그릇을 굽고 있는 조선도공들 가운데 박씨의 후손이다. 한·일관계는 물론 뒤엉킨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도고 교수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할아버지 시게노리 2차대전 때 외무대신 역임 도고 교수의 할아버지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과 패전시 외무대신을 역임한 도고 시게노리다. 아버지도, 그도 고위외교관 출신으로 3대 외교관 집안이다. 도자기노예인 조선도공 박씨 집안 3대가 일본의 고위 외교직을 차례로 역임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시게노리는 원래 박무덕이었다. 부친 박수승 대까지 도자기노예 후예로서 모진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으로 차별이 심화됐다. 수승은 박씨란 성을 자신의 대에서 끊고 귀화했다.1882년생 시게노리가 5살 때이다. 수재 시게노리는 고향에서 중고교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에 들어가 독일문학을 공부했다. 그 뒤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 독일 외교관시절 만난 그의 아내는 독일여자였다. 아이가 다섯 있던 그녀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기본 설계한 건축기사다. 시게노리는 독일과 소련 대사를 역임한 뒤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인 1941년 외무상에 발탁되었다. 군부에 맞서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외무상을 그만뒀으나 종전 직전인 45년 4월 외무상에 재기용됐다. 그때 일왕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라고 강력 주장, 조기종전으로 일본사람의 전멸을 피하게 했다는 칭송도 받았다. 시게노리는 A급 전범으로 20년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개전 반대 노력 등을 전범재판소가 평가, 사형은 피했다. 도고 교수는 “다섯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막연한 기억밖에 없다. 어머니, 형과 함께 가끔 스가모형무소로 면회갔을 때 낭하에서 검붉은 환자복을 입고 걸어나오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시게노리는 미군병원에서 1950년 7월 숨졌다. 시게노리는 겉으로는 도공 박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숨겼지만 가보지 못한 조선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국장 시절 조선에서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 일본 외무성 과장으로 부임했던 직원에게 자신도 조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토로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고, 무덤은 도쿄시내 아오야마묘지에 있다. ●DJ납치, 주한미군철수와 아버지 시게노리는 외동딸만을 두었다. 딸과 결혼한 자신의 비서관 출신 사위를 호적에 양자로 입적시켜 도고 후미히코라고 하게 된다. 후미히코의 한국사랑은 유별났다.1973년 한일 각료회의 때 외무성 심의관으로 한국을 방문, 김대중납치사건을 처리했다. 문세광의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뒤 한국을 재방문, 사건수습에 진력했다고 한다. 외무성 차관 때도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며 차관 사임 뒤 부부가 한국을 다시 방문해 판문점과 휴전선 부근의 남침용 땅굴을 보고, 한국의 안보 상황을 체험했다.77년 카터 전 미 대통령 시절에는 주미 일본대사로 카터가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자 워싱턴 조야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안보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설득, 한·일 공동외교를 폈다. 부친이 한국과 공동외교전을 폈다는 사실에 대해 도고 교수는 “거의 모르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본다. 아버지는 사무차관 때 중국 및 한국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으셨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참 오래 전부터(400여년전) 한국과 연결됐다.”고 독백처럼 말했다. 후미히코는 20여년 전, 부인은 10여년 전 숨졌다. ●남원의 박씨 집안 후손… 뿌리를 찾아나섰다 후미히코는 태평양전쟁 말기 노약자 소개정책에 따라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을 뒀다. 형 시게히코는 워싱턴포스트지 도쿄특파원을 하다 최근 퇴직했다. 특파원 시절에는 한국도 여러번 방문, 따뜻한 가슴으로 여러편의 기사를 작성해 신문에 실었다.“현재 퇴직후 공부중”이라고 한다. 도고 교수는 도쿄대학 출신 엘리트외교관이었다.17년간 러시아관계 일을 맡아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한국어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두마디만 할 수 있다. 두 아들(각각 34·30세)은 현재 일본의 회사에 재직중이다. 형도 아들만 둘이다. 도고 교수는 “내 핏속에는 독일인 피도 4분의1이 흐른다. 일부 조선인의 피도 흐른다.”며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도 많이 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일본이 나의 유일한 조국”이라며 단호했다. 그러나 핏줄찾기 열의는 대단하다. 최근의 일본인들에게 핏줄의식은 없지만 자신에게는 “조금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가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하기 전 고향 미야마 마을을 찾았다고 밝힐 때는 고향·핏줄을 중시하는 조선도공의 영향이 느껴졌다. 그의 조상들이 남원서 왔다는 것은 형의 ‘조부 시게노리’라는 책에 실려 있다.“한국에 있는 4개월 동안 반드시 가보고 싶다.”면서 남원과 ‘춘향전’,‘광한루’ 등이라고 적은, 소중하게 갖고 온 메모지를 보여주었다. 형 시게히코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조선시대 도자기 사발을 가보로 모신다. 자신도 미야마의 조선도공 출신 심수관씨로부터 받은 몇 개의 도자기를 도쿄 미나토구 한국대사관 근처 자택에 “소중히 보관중”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과 연결된 끈들이다. ●현대사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도고 교수는 2002년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촉망받던 고위 외교관리였다.1997년 유럽아시아 국장이었다.98년 11월 조선도공들의 가고시마 정착 400주년 기념식장에 당시의 한·일 각료회의에 참석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김종필 한국 총리 등과 동석하는 큰 영광도 누렸다. 그 해에 ‘시게노리 기념관’이 생겨나는 등 고향 미야마 마을은 온통 조선도공의 열기였다고 회상한다. 특히 양국 총리와 외무장관 등이 시게노리의 동상 등을 방문했을 때는 마을의 지도자와 한국측 참석자들이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를 “아주 독특하고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일본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측근인 외무성의 사토 마사루가 2차대전 뒤 일·러간 현안인 북방4개 섬 일본 반환문제를 대화로 풀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다가 2002년 구속되면서다. 그도 네덜란드대사 부임 8개월 만에 해임돼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지난해 6월 사토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까지 4년 이상 일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조국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4개 섬 일괄반환론 틀 안에서 4개 섬의 귀속을 인정해주면 러시아가 언제까지 보유해도 무방하다는 ‘가나와 제안’을 추진한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안 되면 우선 2개 섬 반환을 확실히 하고,2개 섬은 다음에 교섭하는 단계론을 펴다 우익 학자와 시민단체들의 맹렬한 공격에 사토가 구속되고 실무 추진 당시 상사였던 그는 해임됐다. 도고 교수는 “북방영토가 일본의 영토라는 원칙은 전후에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교섭 방법론이 문제였다.”며 당시에는 자신도 네덜란드에서 귀국하면 구속될 수 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일본행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에 눌러앉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망명은 저널리즘적인 표현이다. 그저 일본이 싫어서 귀국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외무성을 퇴임한 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에서 2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2년, 타이완 단코대 4개월,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학 6개월 등의 교수를 거쳤다. 지난 7월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함께 일본 도쿄에 주민등록을 해 영주키로 했다. ●“한국학생들 매우 논리적” 그는 미국에서 맺은 인연으로 이번 학기 초빙교수 자격으로 서울대에서 일주일에 3시간짜리 한 강좌를 맡고 있다. 한국 학생 20명과 외국학생 10명에게 한·일관계 등 동북아 외교 현안을 정면으로 가르친다. 도고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감성적이지 않다. 매우 논리적이다. 이들이 한국지도부에 들어가는 날 한·일 양국관계는 매우 밝다고 본다.”고 자신했다. 학자, 시민단체 등 새로운 형태의 한·일 교류가 활발한 것도 반기고 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 정권이 한·일 관계를 잘 해갈 것이라며 급한 국내과제를 해결, 일본 내부 반발을 해소해 정권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최근 정치·경제적으로 ‘자신감’을 가진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자신감이 북한·일본과의 관계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봤다. 대통령선거 뒤 한·일 양국이 정상간 셔틀외교를 재개하길 바랐다. 아울러 ‘일본은 없다’,‘혐한류’ 등 책이 출판돼 양국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도고 교수는 일본이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 동북아시아 평화시대를 열어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사회가 우경화됐다지만 우경화되거나 반한사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건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상으로 한반도는 통일될 시기를 맞았다.”고 분석했다. 이춘규기자 taein@seoul.co.kr ■도고 가즈히코 교수 ▲1945년 나가노현 출생(태평양전쟁말기 노약자의 소개정책으로 인해 모친이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거주중) ▲68년 도쿄대학 교양학과 졸업 ▲68년 4월 외무성 입성 ▲72년 모스크바 일본대사관 근무(모두 3차례 대사관 근무를 포함 소련과장과 유럽아시아국장 등으로 17년간이나 러시아관계 일을 맡음) ▲91년 워싱턴 일본대사관 총괄공사 ▲98년 외무성 조약국장 ▲99년 유럽아시아 국장 ▲2001년 네덜란드대사 부임 ▲02년4월 네덜란드대사 해임 ▲02년5월 일본을 떠나 유랑 ▲07년7일 5년 만에 일본 귀국 ●최근의 저서 ‘북방영토 교섭비록’(일어) ‘일본외교 1945∼2003’(영어)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4)전남 구례군 산동면 현천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4)전남 구례군 산동면 현천마을

    노고단에서 성삼재∼고리봉∼만복대로 내려선 지리산 서쪽 능선은 정령치 가기 전 왼쪽으로 가지를 치며 구례를 향해 급선회한다. 백두대간과 작별한 이 산마루는 다름재를 떠나 견두산(774.7m)을 세우게 되는데, 소위 ‘아는 사람만 아는’ 산수유마을 ‘현천’이 그 산 아래 꽃잎처럼 포개져 있다. 현천의 늦가을은 색 붉은 풍경화다. 돌담 옆 나무마다 잘 익은 산수유열매와 주황색 단감이 촘촘하다. 구례군 자료에는 “마을 뒷산인 견두산이 현(玄)자 형으로 되어 있고 뒷내에는 옥녀봉의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를 하고 선비가 고기를 낚는 어옹수조(魚翁水釣)가 있어 그 아름다움을 형용하여 현천이라 하였다.”고 서술돼 있다. 꽃이 피는 3월을 제외하곤 대체로 조용한 현천엔 민박 간판을 내건 집도, 음료를 파는 구멍가게도 없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지 굴뚝마다 장작 타는 냄새만 송글송글 푸근하다. 최영남(72세) 할머니와 아들 형욱만(48세)씨는 약초 캐는 일을 한다. 족히 30년도 넘는 경력이다.“겨우사리, 더덕, 산도라지, 산수유, 머루, 석장포 등 산에서 나는 건 다 채취하지요.” 약초와 더불어 생활한 덕인지 욱만씨는 슬하에 무려 5남매나 두었다. 요즘의 중년치고는 시골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자녀수다.“예전에는 겁나게 많았지요.100여 호는 됐응께.” 최영남 할머니의 말에 아들 욱만씨도 다시 한마디 거둔다.“면소재지에 장이 설 때 이곳 현천마을 사람들이 안 나가면 장사를 못할 정도”였다고. 지금이야 절반도 안되는 가구가 남았을 뿐이지만 예전 이 마을의 번성함은 길 건너 지리산 온천지구와 견줄 바가 못 되었나 보다. 돌담길을 따라 나서니 마을 골목 반사경 옆에 나란히 선 다섯 분의 할아버지가 보인다. 이 동네 남자 어르신 중에서 가장 연장자는 최석만(80세) 할아버지와 동갑내기 최기태 할아버지다. 그러고 보니 현천은 ‘화순 최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주민의 60%가 같은 성씨라고. 이들은 “견두산은 원래 호두산이었소.‘호랑이 머리’란 뜻이지. 저 견두산에 서면 남원시가 잘 보이는데, 거기서 1년에 한 번씩은 꼭 호환을 당한기라. 그렇게 호랑이헌티 잡혀 먹히니 결국 산 이름을 개견(犬)자로 바꿨고 그 다음부턴 그런 일이 없었다허요.”라고 말한다. 이 마을 역시 1948년도에 일어난 여수·순천사건에선 자유롭지 못하다.100여호에 달하던 민가가 그 사건으로 거의 다 전소됐다. 당시 40여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이 죽었다. 아직도 군인과 빨치산이라면 신경이 곤두서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전히 조심스럽다. 당시 살벌한 이념 대립의 아픈 기억은 노년에 이른 지금까지도 강한 두려움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그렇게 집들이 모두 타고 겨우 두세 채 남았어요. 요즘의 집들은 이듬해(1949년) 봄에 지었으니 50년이 조금 넘은 셈이지.1979년에 78호쯤 되었고 그 후에 도시로 나간 사람이 많아요.” 단순히 소일거리가 없어 농사를 짓는다고 너스레지만 이들에게 농사는 결국 ‘죽으나 사나 꼼짝없이 해야 할 일’이자 ‘못 걸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할 인생의 몫’이기도 하다.“할 수 없어 한다.”는 현천마을의 ‘독수리 5형제’ 할아버지들은 70이 넘고 80이 되도록 여전히 농사일로 정신없다. 다섯 할아버지의 깊은 주름살 위로 산수유 빛을 닮은 붉은 석양이 가지런히 내려앉는다. #교통 전남 구례까지는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용산역을 이용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IC나,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장수IC,88고속도로 지리산IC 등에서 남원으로 간 다음 19번 국도로 들어선다. 서울을 기준으로 했을 때 현천은 구례읍내로 들어서기 전에 있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기자(www.emount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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