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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충남 논산시 상월에서 공주시로 넘어온 옛길은 계룡면 경천에 다다른다. 이곳에 섰던 5일장은 한때 공주에서 가장 컸다. 저녁 때 도착한 이 시장터는 한가한 분위기에 파리만 날렸다. 이곳에서 20년째 경천철물점을 운영하는 이영수(70)씨는 “옛날에 시장이 섰을 때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면서 “10여년 전 시내버스가 들어온 뒤로 5일장이 죽었다.”고 말했다.1000평은 됨 직한 장터는 차들만 몇대 주차돼 있고 텅 비어 있다. ●마을에 승병 영규대사의 묘 그 전에는 신원사, 갑사는 물론 신도안에서 왔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계룡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한복판인 이 시장으로 모두 몰려들었다. 장이 서면 철물점에 농기구를 사려는 손님이 들끓었다. 국밥집마다 손님이 넘쳐났고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둥그런 시장 주변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이씨는 “그때를 기억해서인지 5일장이 섰던 2일과 7일에 떠돌이 옷장수 2명이 찾아온다.”고 씁쓰레하게 웃는다. 일제 때 경천에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1930년 월암리로 이전했다. 이씨는 “정석모(전 내무부 장관) 아버지가 면장할 때 옮겼어.”라며 아쉬워했다. 옛길은 국도 23호와 갈라져 소로로 내달린다. 계룡초등학교 담을 끼고 바로 좌회전해 농로를 따라가면 유평1리가 나온다. 이 마을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승병을 일으킨 영규대사(?∼1592년) 묘가 있다. 이 마을 출신이다. 영규는 서산대사의 제자다.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옆 마을인 월암리로 피신했다 숨졌다. 묘는 충남도기념물 15호이다.1810년 순조 때 세워진 비석도 있다. 주민 박상희(70·여)씨는 “동네 주민들이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준다.”고 전했다. ●‘정감록´ 흔적이 배인 땅 길은 계룡면 사무소 앞에서 국도 23호와 합쳐진다.3㎞쯤 달리면 널티고개가 나타난다. 경사가 완만하다. 이 고개에 물이 넘치면 ‘정씨 왕조’가 세워진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정감록에 나오는 왕조를 일컫는다. 널처럼 속이 비었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무넘이’라고 불렀다. 고개가 관통하는 동명리 이장 유병상(67)씨는 “정씨 왕조 얘기는 잘 모르지만 우리와 인근 마을에 농수를 대기 위해 기산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관이 고개를 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도로처럼 닦인 국도를 타고 10㎞쯤 내달리면 금강 앞이다.1㎞ 전방에서 빠져 시내쪽으로 가다 보면 소학동이 나온다.‘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가 이 마을에 있다. 향덕은 통일 신라 경덕왕시절인 755년 부모가 가난과 유행병으로 시달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기록에 있는 최초의 효행사적으로 알려졌다. 왕이 향덕의 효행을 알고 벼 300석과 집 등을 하사했다. 이후 ‘효가리(孝家里)’라고도 불려졌다. 비석 앞에는 48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높이 11m, 둘레 3.3m로 매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을 빈다. ●“귀향온 사람 나루터 건너자 목 베어” 금강변을 따라 난 도로로 1㎞쯤 넘어 가면 공주대교 앞 장기대나루가 나타난다. 공주대교 밑에 만든 게이트볼장에 있던 팔순 가까운 할아버지는 “30년 전만 해도 노를 저어 강을 건너주는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양에서 귀양 오는 사람들이 나루터를 건너면 목을 많이 쳤다.”며 “옛날에는 강 옆 산에 시신을 묻은 고린장터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지금은 강에 펌프장이 설치돼 있다. 나루터에는 수백년 된 팽나무가 있었다. 나룻배를 묶어두고 손님들이 쉬어가던 나무다. 교량이 건설되면서 공주대로 옮겨 심었으나 얼마 안가 죽었다. 이곳에서 시내를 지나서 7㎞쯤 떨어진 곳에 우금치가 있다. 이 고개는 전봉준 장군이 1894년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운 동학혁명전투 중 최대 격전지다. 공주대 윤용혁(역사교육과) 교수는 “주력 동학군은 이인쪽을 통해 공주로 올라왔지만 일부는 공주 구간 옛길로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동학혁명은 우금치 전투의 대패로 결국 실패했다. 금강을 건넌 옛길은 공주대와 신관초교를 거치지만 지금은 길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정안천 주변을 따라가던 길이 국도 23호와 만나는 곳은 조선조 숙박시설이 있었던 모란 마을이다. 얼마 안가 국도변에 붙어 있는 ‘석송정’이 나온다. 마을 이름도 정안면 석송리다. 이 정자는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올 때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지방 유림들이 세웠다. 인조가 이곳을 지날 때 지방 유림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세금 감면을 해줬다고 한다. 훼손된 것을 1985년 공주시가 복원했다. 정자 주변에 인조가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생가터에 비석만 잠시 국도와 헤어진 옛길은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1851∼94년)과 만난다. 그가 6세까지 산 정안면 광정리 생가터다.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 것처럼 생가터는 썰렁하다. 유허비와 안내판만 잔디에 서 있을 뿐이다. 10여가구가 있었다던 마을은 사라졌고 ‘감나무골’로 불리듯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 몇 그루만 서있다. 그의 묘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있다. 김옥균 생가터에서 나오면 옛길은 곧바로 국도와 합쳐진다.3∼4분을 달리면 길은 또다시 국도와 갈라져 차령고개로 오른다. 차령산맥의 모태가 되는 지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10조에서 ‘차령고개 이남, 금강 밖은 등배(반역)의 산세이므로 그 지역 인물을 등용하지 마라.’고 한 곳이다. 지금은 국도가 따로 나 차들이 드물다. 울창한 숲만이 옛 위용을 알려준다. 차령고개 밑 정안면 인풍리 주민 조주형(67)씨는 “옛날엔 숲이 더 우거졌었다.”면서 “50년 전만 해도 천안 행정리 5일장에 가려면 고개에 도둑떼가 많아 혼자 소를 끌고 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주변에 ‘도둑골’이라는 마을까지 있었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당초 ‘금북정맥’으로 불렸으나 일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공주와 천안의 경계 지점으로 정상에 오르자 천안시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보인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태조 이성계 금강변 신도안에 도읍 구상 충남을 가로지르는 금강은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에 이어 항상 한 나라의 수도로 떠오른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금강변 공주·연기지역에 행정도시 건설이 추진되지만 수도로 거론된 역사는 백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는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위례성에서 건국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한강유역인 현재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구려에 의해 개로왕이 죽고 밀리면서 백제 문주왕이 475년 다음 수도로 정한 곳이 금강변 웅진, 충남 공주다. 지금은 금강의 ‘금’자가 비단 금(錦)을 사용하지만 웅진의 곰웅(熊)자를 딴 웅수(熊水)에서 ‘곰강’으로 불리다 금강으로 변했다고 한다. 백제 중흥의 기틀을 다져놓은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제26대 성왕이 538년 이전한 수도는 ‘사비’이다. 충남 부여로 역시 금강변에 위치한다. 부여를 통과하는 금강은 별도로 ‘백마강’으로 불린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룡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전설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말로 용을 낚았다고 전해지는 바위인 조룡대(釣龍臺)는 고란사 앞에 있다. 백제는 660년 사비시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만다. 금강변이 다시 수도로 떠오른 건 조선 건국 때.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자락인 신도안을 수도로 정했었다. 금강에서 가까운 곳이다. 한양에 밀려 공사가 1년 만에 중단됐지만 아직도 주춧돌 등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서 ‘정씨 진인이 나타나 새 왕조를 세운다.’는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이다. 선조 때에 발생한 정여립(1546∼89년)난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의 파괴력이 지속되면서 무속인이 신도안으로 몰렸다.1975년에만 해도 상제교, 태을교 등 104개 신흥종교 시설이 있었으나 계룡대를 조성하는 ‘620사업’으로 거의 사라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금강변 공주·연기를 행정 수도로 검토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후 이곳을 행정수도로 정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일부 국민들의 반대로 ‘행정도시’로 격이 낮아졌지만 이 사업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전북 장수군에서 충남 서천 금강하구둑까지 394㎞를 흐르는 금강.2014년까지 대통령 직속기관 4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총 49개 중앙행정기관이 들어서는 행정도시 ‘세종시’가 백제의 옛 영광을 재현할지 기대되고 있다. 공주대 윤용혁 교수는 “한반도 중심인 한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밀리면 다음으로는 천상 금강이 가장 적지다.”며 “대외적으로 교통이 좋은 강을 끼고 있고 넓은 평야지대 등 수도로서는 조건이 무척 좋다.”고 말했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빛의 화가’ 방혜자 재불 여류작가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빛의 화가’ 방혜자 재불 여류작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를 향해 걸어갑니다. 텅빈 가운데, 어무도 없는 어두운 길’ 빛을 좇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것도 태초의 빛이다. 어쩌면 인간은 우주의 깊디깊은 어둠에서 한 줄기의 빛에 의해 태어났을 게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동 터오르는 어느 새벽녘, 누렁이 소의 등에 편안하게 올라타고 그 빛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고암 이응로 선생과의 인연 1958년 어느 날이었다. 고암(顧庵) 이응로 선생이 유럽으로 떠나기 전 미술공부를 하는 여대생에게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려줬다.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채찍을 든, 아주 힘이 넘치는 그림이었다. 고암이 장래가 촉망되는 미술학도에게 소처럼 꾸준하면서도 묵묵히 그림에 정진하라는 뜻을 담았다. 얼마 후 그 여대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국비장학생 1호’라는 명함과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다시 고암을 만났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1989년 고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한 가족처럼 지내며 예술적 스승으로 따랐다. 특별한 인연은 또 있다.‘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유명한 수화(樹話) 김환기(1974년 작고) 선생과도 자주 만나 미술적 영감을 얻곤 했다. 요즘들어 그의 작품세계가 수화의 후기작과 다소 연결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빛의 화가’로 잘 알려진 방혜자(71) 재불화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앞만 보고 무던히 걸어가는 소처럼 생명의 빛을 좇는다. 올해만 해도 파리와 브뤼셀 등에서 4개월 동안 개인전을 가진 데 이어 최근에는 서울 환기미술관(종로구 부암동)에서 ‘방혜자-빛의 숨결’이라는 제목으로 고국의 팬들을 위해 한 달반 동안 개인전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전시는 2년만이다. 이번 전시에는 앞·뒷면을 같이 쓸 수 있는 무직천 위에 석채, 흙 등 천연 안료로 그린 ‘빛의 회화’를 선보여 관람객들을 감동시켰다. 평론가들도 “무직천의 앞과 뒷면에 천연 안료를 스며들도록 하는 기법으로 빛의 효과를 함축적이면서 극대화했다.”고 표현했다. 방 화백은 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파리 국립미술학교와 파리 국립응용미술학교 등에서 벽화와 색유리화 수업을 받았다. 지금까지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무려 110여 차례에 걸쳐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후불탱화 그려 ‘빛의 구도자´로 불려 특히 그는 내면의 세계를 ‘빛’으로 표현해내는 특유의 기법으로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주목되는 현대미술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비평가 질베르 라스코는 “우주를 경탄하는 그 시선은 우리가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도록 도모한다. 그녀는 또 우주의 아름다움, 조화, 다양함을 증언하기 위해 깨어 있다.”라고 평가했다. 시인 샤를 줄리에 등 프랑스 여러 현대 시인들과 시화집을 내며 대중적 인기까지 높였다. 그는 10년 전 빛 그림으로 파리교외의 길상사, 그리고 서울 보각사와 개화사의 후불탱화를 조성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빛의 구도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시차 내한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했다. 약간 바쁜 모양이다. 그래서 전시가 끝난 직후인 지난달 29일 경기도 광주시 영은미술관에서 만났다.10만평 부지에 지난 2000년 개관한 영은미술관은 대유문화재단에서 운영하며 다른 미술관과는 달리 작가들을 위한 창작스튜디오 공간까지 마련했다. 방 화백이 한국체류시에는 주로 여기에 머문다. 일흔 넘은 나이로는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까만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키는 작고 왜소했으며, 목소리는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듯 또렷하고 청아하게 들려왔다. 이런 체격으로 우주의 빛을 빚어내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방 화백은 하루 일과를 명상에서 시작한다. 정신을 집중해 내면의 빛을 찾아내는 일이고 또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또한 자라면서 일제 강점기와 6·25 등 시대적 고통을 견뎌냈던 상흔 또한 ‘여정의 힘’에 큰 보탬을 주고 있을 터이다. 그의 뒤를 따라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을 햇살이 창 너머로 스며들면서 작업의 흔적, 즉 ‘빛의 숨결’로 가득했다. 자리에 앉자 도쿄에서 전시가 있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동안 유럽 전시는 많았지만 일본 전시는 처음이라고 했다. 여러번 전시 요청도 많이 왔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단다. 일제 때 외삼촌과 할아버지가 심한 고문을 받았던 일, 초등학교 시절 우리 말을 썼다가 혼났던 일, 태평양 전쟁을 핑계로 온갖 훈련에 동원됐던 일 등등 당시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가 일생동안 가장 고심해온 것은 어떻게 하면 예술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죠. 세상에 환한 빛을 고루 비추는 것이지요.” ●15일부터 日서 첫 전시회 이러한 예술가적 사명이 그동안 닫혔던 문을 열게 했다. 예술의 경지에서 일본행을 결심했다는 것. 전시는 오는 15일부터 12월1일까지 도쿄시내 긴자(銀座)미술관에서 열리며 40여점이 전시된다. 그는 이어 “인간은 빛으로부터 왔고, 빛에서 살고, 빛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냐.”고 반문한 뒤, 빛은 생명의 원초적인 에너지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빛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게 도와야 한다. 이 또한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빛과의 인연을 묻자 “어릴 적 시냇물 속 조약돌에 비친 햇빛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이후 빛에 감탄하고 빛의 존재를 느끼면서 살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특히 6·25 때 얻은 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을 무렵, 수덕사 노스님에게서 전해들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얘기도 자연스레 ‘빛의 숨결’의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방 화백은 시인인 외사촌 오빠(김돈식·대표시집 석화촌)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엔 그림보다 시를 무척 좋아했다. 학창시절에는 랭보와 보들레르 같은 프랑스 시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던 경기여고 시절 김창억 미술선생의 권유로 미술반에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는 고암과 수화를 만나면서 작품세계의 깊이를 한층 더했다. “김환기 선생과는 대학시절 처음 만났고 뉴욕에서도 여러번 만났지요. 고암은 동양미술학교를 세우는 등 정말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훌륭한 분이지요. 파리에 있을 때는 저를 친딸처럼 아껴주셨지요.” 방 화백의 화실은 파리14구역에 위치해 있다. 인근 자택에서 매일 아침 걸어서 오고간다. 남편은 프랑스 한국학연구소 교수로 있던 알렉상드로 기예모즈. 피레네 인근에 등산을 갔다가 인연이 됐다. 남편은 한국의 무속까지 연구할 만큼 방 화백보다 더 한국을 좋아한다. 슬하에 건축가인 아들과 딸(승마학교 조교)을 두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SBS ‘왕과 나’ 내시 문소운 역 강인형

    SBS ‘왕과 나’ 내시 문소운 역 강인형

    “파란만장한 사연을 지녔지만 겉으로는 해맑기 그지없는 수호천사 역을 맡고 있습니다.” 무한가능성이 잠재된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 강인형(28). 그는 SBS 월화드라마 ‘왕과 나’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배역 문소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문소운은 남사당패에서 지내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인물에 의해 내자원에 팔린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화나 처선이 곤경이 빠지면 말없이 나타나 도움을 주는 속깊은 내시다. 어느 영화의 제목을 빌리자면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문내시’라고나 할까. 식당에서 우연히 매니지먼트사의 눈에 띄어 길거리 캐스팅된 그는 2004년 MBC베스트극장 ‘완벽한 룸메이트’로 데뷔한 뒤, 브라운관과 스크린 양쪽을 오가며 활약해왔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숨’에서는 타이완 스타 장첸을 흠모하는 어린 죄수를 연기했고,8일 개봉을 앞둔 ‘판타스틱 자살소동’에서는 게이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삶의 힘을 얻는 필립 역을 맡았다. 그 밖에 ‘버텨라 구창식’‘아파트’등의 영화와 ‘러브홀릭’‘다세포 소녀’등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이미지 때문인지 지금까지 여성적인 남성 역할이 많이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유독 동성애 코드의 역할이 많았다. 이에 대해 그는 “동성애역에 대해 특별히 거부감은 없지만, 이미지가 그 쪽으로 굳어질까봐 걱정”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가 ‘왕의 남자’ 최종 오디션에 올라간 4인방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이준기, 김동욱, 백성현 등이 함께 오디션을 봤던 경쟁자들이었다. 최종적으로 간택된 이준기는 ‘왕의 남자’ 공길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뒤 최근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해 공길의 잔영에서 벗어났다. 혹시 강인형도 이미지 전환을 꿈꾸고 있을까. “꼭 역동적이거나 거친 역할을 맡고 싶다는 게 아니라, 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앞으로 밝고 재미있는 사랑이야기나 딸을 둔 아버지 역할 등을 해보고 싶단다. “배우 정재영을 좋아합니다. 그의 연기에서는 진실됨이 묻어나지요.” 그의 눈빛에선 연기에 대한 갈증이 그대로 묻어난다. 앞으로의 꿈을 묻자 의외로 소박한 답이 돌아왔다.“스타가 되기보다는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해내는 배우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부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美 조종사 티베츠 사망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던 미국인 조종사 폴 티베츠 예비역 준장이 1일(현지시간) 숨졌다.92세. 티베츠의 손녀 키아는 “할아버지가 3개월여 전부터 건강이 나빠져 이날 별세했다.”고 밝혔다. 그는 62년 전인 45년 8월6일 모친의 이름인 ‘에놀라 게이’로 명명한 애기(愛機)에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비밀계획 속에 개발된 우라늄 원자탄을 싣고 히로시마로 날아갔다. 마침내 이날 오전 8시 15분 9.44㎞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일본공군 본부를 겨냥해 원폭을 투하했다.B-29는 당시로서는 4개의 엔진을 단 최신예였다. 그는 자서전 ‘티베츠 이야기’에서 “거대하고 검붉은 버섯구름 띠가 4만 5000피트(13.7㎞) 상공까지 너비 3마일(약 4.9㎞)로 퍼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봤다.”고 회고했다.B-29는 폭격으로 불길이 치솟는 도시 상공을 피해 옆으로 날아갔다고 덧붙였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깔깔깔]

    ●말하는 개구리 늙은 나무꾼이 나무를 베고 있었다. 개구리:“할아버지!” 나무꾼:“거, 거기…. 누구요?” 개구리:“저는 마법에 걸린 개구리예요.” 나무꾼:“엇! 개구리가 말을?” 개구리:“전 원래 선녀였어요. 저에게 입을 맞춰 주시면 사람으로 변해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어요.” 한데 할아버지는 개구리를 집어 나무에 걸린 옷에 넣고는 다시 나무를 베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개구리:“이봐요, 할아버지! 나와 입을 맞추면 사람이 돼서 함께 살아드린다니까욧!” 할아버지는 개구리 말을 못들은 체하며 계속 도끼질만 했다. 개구리:“왜 내 말을 안 믿어요? 나는 진짜로 예쁜 선녀라고요!” 나무꾼:“믿어.” 개구리:“그런데 왜 입을 맞추지 않고 주머니 속에만 넣어두는 거죠?” 나무꾼:“나는 예쁜 여자 필요없어. 너도 내 나이 돼 봐. 개구리와 얘기하는 게 더 재밌지.”
  •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조선도공 후예 도고 서울대 초빙교수 “아직도 핏줄이 당긴다”

    임진왜란 때인 1598년 전북 남원에서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400년 이상 흘렀다. 그 핏줄을 이어받은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62)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뿌리찾기에 나섰다. 그는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 마을에 정착, 지금도 14개 가마에서 그릇을 굽고 있는 조선도공들 가운데 박씨의 후손이다. 한·일관계는 물론 뒤엉킨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도고 교수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할아버지 시게노리 2차대전 때 외무대신 역임 도고 교수의 할아버지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과 패전시 외무대신을 역임한 도고 시게노리다. 아버지도, 그도 고위외교관 출신으로 3대 외교관 집안이다. 도자기노예인 조선도공 박씨 집안 3대가 일본의 고위 외교직을 차례로 역임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시게노리는 원래 박무덕이었다. 부친 박수승 대까지 도자기노예 후예로서 모진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으로 차별이 심화됐다. 수승은 박씨란 성을 자신의 대에서 끊고 귀화했다.1882년생 시게노리가 5살 때이다. 수재 시게노리는 고향에서 중고교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에 들어가 독일문학을 공부했다. 그 뒤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 독일 외교관시절 만난 그의 아내는 독일여자였다. 아이가 다섯 있던 그녀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기본 설계한 건축기사다. 시게노리는 독일과 소련 대사를 역임한 뒤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인 1941년 외무상에 발탁되었다. 군부에 맞서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외무상을 그만뒀으나 종전 직전인 45년 4월 외무상에 재기용됐다. 그때 일왕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라고 강력 주장, 조기종전으로 일본사람의 전멸을 피하게 했다는 칭송도 받았다. 시게노리는 A급 전범으로 20년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개전 반대 노력 등을 전범재판소가 평가, 사형은 피했다. 도고 교수는 “다섯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막연한 기억밖에 없다. 어머니, 형과 함께 가끔 스가모형무소로 면회갔을 때 낭하에서 검붉은 환자복을 입고 걸어나오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시게노리는 미군병원에서 1950년 7월 숨졌다. 시게노리는 겉으로는 도공 박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숨겼지만 가보지 못한 조선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국장 시절 조선에서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 일본 외무성 과장으로 부임했던 직원에게 자신도 조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토로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고, 무덤은 도쿄시내 아오야마묘지에 있다. ●DJ납치, 주한미군철수와 아버지 시게노리는 외동딸만을 두었다. 딸과 결혼한 자신의 비서관 출신 사위를 호적에 양자로 입적시켜 도고 후미히코라고 하게 된다. 후미히코의 한국사랑은 유별났다.1973년 한일 각료회의 때 외무성 심의관으로 한국을 방문, 김대중납치사건을 처리했다. 문세광의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뒤 한국을 재방문, 사건수습에 진력했다고 한다. 외무성 차관 때도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며 차관 사임 뒤 부부가 한국을 다시 방문해 판문점과 휴전선 부근의 남침용 땅굴을 보고, 한국의 안보 상황을 체험했다.77년 카터 전 미 대통령 시절에는 주미 일본대사로 카터가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자 워싱턴 조야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안보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설득, 한·일 공동외교를 폈다. 부친이 한국과 공동외교전을 폈다는 사실에 대해 도고 교수는 “거의 모르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본다. 아버지는 사무차관 때 중국 및 한국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으셨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참 오래 전부터(400여년전) 한국과 연결됐다.”고 독백처럼 말했다. 후미히코는 20여년 전, 부인은 10여년 전 숨졌다. ●남원의 박씨 집안 후손… 뿌리를 찾아나섰다 후미히코는 태평양전쟁 말기 노약자 소개정책에 따라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을 뒀다. 형 시게히코는 워싱턴포스트지 도쿄특파원을 하다 최근 퇴직했다. 특파원 시절에는 한국도 여러번 방문, 따뜻한 가슴으로 여러편의 기사를 작성해 신문에 실었다.“현재 퇴직후 공부중”이라고 한다. 도고 교수는 도쿄대학 출신 엘리트외교관이었다.17년간 러시아관계 일을 맡아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한국어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두마디만 할 수 있다. 두 아들(각각 34·30세)은 현재 일본의 회사에 재직중이다. 형도 아들만 둘이다. 도고 교수는 “내 핏속에는 독일인 피도 4분의1이 흐른다. 일부 조선인의 피도 흐른다.”며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도 많이 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일본이 나의 유일한 조국”이라며 단호했다. 그러나 핏줄찾기 열의는 대단하다. 최근의 일본인들에게 핏줄의식은 없지만 자신에게는 “조금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가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하기 전 고향 미야마 마을을 찾았다고 밝힐 때는 고향·핏줄을 중시하는 조선도공의 영향이 느껴졌다. 그의 조상들이 남원서 왔다는 것은 형의 ‘조부 시게노리’라는 책에 실려 있다.“한국에 있는 4개월 동안 반드시 가보고 싶다.”면서 남원과 ‘춘향전’,‘광한루’ 등이라고 적은, 소중하게 갖고 온 메모지를 보여주었다. 형 시게히코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조선시대 도자기 사발을 가보로 모신다. 자신도 미야마의 조선도공 출신 심수관씨로부터 받은 몇 개의 도자기를 도쿄 미나토구 한국대사관 근처 자택에 “소중히 보관중”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과 연결된 끈들이다. ●현대사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도고 교수는 2002년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촉망받던 고위 외교관리였다.1997년 유럽아시아 국장이었다.98년 11월 조선도공들의 가고시마 정착 400주년 기념식장에 당시의 한·일 각료회의에 참석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김종필 한국 총리 등과 동석하는 큰 영광도 누렸다. 그 해에 ‘시게노리 기념관’이 생겨나는 등 고향 미야마 마을은 온통 조선도공의 열기였다고 회상한다. 특히 양국 총리와 외무장관 등이 시게노리의 동상 등을 방문했을 때는 마을의 지도자와 한국측 참석자들이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를 “아주 독특하고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일본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측근인 외무성의 사토 마사루가 2차대전 뒤 일·러간 현안인 북방4개 섬 일본 반환문제를 대화로 풀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다가 2002년 구속되면서다. 그도 네덜란드대사 부임 8개월 만에 해임돼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지난해 6월 사토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까지 4년 이상 일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조국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4개 섬 일괄반환론 틀 안에서 4개 섬의 귀속을 인정해주면 러시아가 언제까지 보유해도 무방하다는 ‘가나와 제안’을 추진한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안 되면 우선 2개 섬 반환을 확실히 하고,2개 섬은 다음에 교섭하는 단계론을 펴다 우익 학자와 시민단체들의 맹렬한 공격에 사토가 구속되고 실무 추진 당시 상사였던 그는 해임됐다. 도고 교수는 “북방영토가 일본의 영토라는 원칙은 전후에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교섭 방법론이 문제였다.”며 당시에는 자신도 네덜란드에서 귀국하면 구속될 수 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일본행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에 눌러앉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망명은 저널리즘적인 표현이다. 그저 일본이 싫어서 귀국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외무성을 퇴임한 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에서 2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2년, 타이완 단코대 4개월,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학 6개월 등의 교수를 거쳤다. 지난 7월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함께 일본 도쿄에 주민등록을 해 영주키로 했다. ●“한국학생들 매우 논리적” 그는 미국에서 맺은 인연으로 이번 학기 초빙교수 자격으로 서울대에서 일주일에 3시간짜리 한 강좌를 맡고 있다. 한국 학생 20명과 외국학생 10명에게 한·일관계 등 동북아 외교 현안을 정면으로 가르친다. 도고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감성적이지 않다. 매우 논리적이다. 이들이 한국지도부에 들어가는 날 한·일 양국관계는 매우 밝다고 본다.”고 자신했다. 학자, 시민단체 등 새로운 형태의 한·일 교류가 활발한 것도 반기고 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 정권이 한·일 관계를 잘 해갈 것이라며 급한 국내과제를 해결, 일본 내부 반발을 해소해 정권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최근 정치·경제적으로 ‘자신감’을 가진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자신감이 북한·일본과의 관계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봤다. 대통령선거 뒤 한·일 양국이 정상간 셔틀외교를 재개하길 바랐다. 아울러 ‘일본은 없다’,‘혐한류’ 등 책이 출판돼 양국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도고 교수는 일본이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 동북아시아 평화시대를 열어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사회가 우경화됐다지만 우경화되거나 반한사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건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상으로 한반도는 통일될 시기를 맞았다.”고 분석했다. 이춘규기자 taein@seoul.co.kr ■도고 가즈히코 교수 ▲1945년 나가노현 출생(태평양전쟁말기 노약자의 소개정책으로 인해 모친이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거주중) ▲68년 도쿄대학 교양학과 졸업 ▲68년 4월 외무성 입성 ▲72년 모스크바 일본대사관 근무(모두 3차례 대사관 근무를 포함 소련과장과 유럽아시아국장 등으로 17년간이나 러시아관계 일을 맡음) ▲91년 워싱턴 일본대사관 총괄공사 ▲98년 외무성 조약국장 ▲99년 유럽아시아 국장 ▲2001년 네덜란드대사 부임 ▲02년4월 네덜란드대사 해임 ▲02년5월 일본을 떠나 유랑 ▲07년7일 5년 만에 일본 귀국 ●최근의 저서 ‘북방영토 교섭비록’(일어) ‘일본외교 1945∼2003’(영어)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4)전남 구례군 산동면 현천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4)전남 구례군 산동면 현천마을

    노고단에서 성삼재∼고리봉∼만복대로 내려선 지리산 서쪽 능선은 정령치 가기 전 왼쪽으로 가지를 치며 구례를 향해 급선회한다. 백두대간과 작별한 이 산마루는 다름재를 떠나 견두산(774.7m)을 세우게 되는데, 소위 ‘아는 사람만 아는’ 산수유마을 ‘현천’이 그 산 아래 꽃잎처럼 포개져 있다. 현천의 늦가을은 색 붉은 풍경화다. 돌담 옆 나무마다 잘 익은 산수유열매와 주황색 단감이 촘촘하다. 구례군 자료에는 “마을 뒷산인 견두산이 현(玄)자 형으로 되어 있고 뒷내에는 옥녀봉의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를 하고 선비가 고기를 낚는 어옹수조(魚翁水釣)가 있어 그 아름다움을 형용하여 현천이라 하였다.”고 서술돼 있다. 꽃이 피는 3월을 제외하곤 대체로 조용한 현천엔 민박 간판을 내건 집도, 음료를 파는 구멍가게도 없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지 굴뚝마다 장작 타는 냄새만 송글송글 푸근하다. 최영남(72세) 할머니와 아들 형욱만(48세)씨는 약초 캐는 일을 한다. 족히 30년도 넘는 경력이다.“겨우사리, 더덕, 산도라지, 산수유, 머루, 석장포 등 산에서 나는 건 다 채취하지요.” 약초와 더불어 생활한 덕인지 욱만씨는 슬하에 무려 5남매나 두었다. 요즘의 중년치고는 시골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자녀수다.“예전에는 겁나게 많았지요.100여 호는 됐응께.” 최영남 할머니의 말에 아들 욱만씨도 다시 한마디 거둔다.“면소재지에 장이 설 때 이곳 현천마을 사람들이 안 나가면 장사를 못할 정도”였다고. 지금이야 절반도 안되는 가구가 남았을 뿐이지만 예전 이 마을의 번성함은 길 건너 지리산 온천지구와 견줄 바가 못 되었나 보다. 돌담길을 따라 나서니 마을 골목 반사경 옆에 나란히 선 다섯 분의 할아버지가 보인다. 이 동네 남자 어르신 중에서 가장 연장자는 최석만(80세) 할아버지와 동갑내기 최기태 할아버지다. 그러고 보니 현천은 ‘화순 최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주민의 60%가 같은 성씨라고. 이들은 “견두산은 원래 호두산이었소.‘호랑이 머리’란 뜻이지. 저 견두산에 서면 남원시가 잘 보이는데, 거기서 1년에 한 번씩은 꼭 호환을 당한기라. 그렇게 호랑이헌티 잡혀 먹히니 결국 산 이름을 개견(犬)자로 바꿨고 그 다음부턴 그런 일이 없었다허요.”라고 말한다. 이 마을 역시 1948년도에 일어난 여수·순천사건에선 자유롭지 못하다.100여호에 달하던 민가가 그 사건으로 거의 다 전소됐다. 당시 40여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이 죽었다. 아직도 군인과 빨치산이라면 신경이 곤두서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전히 조심스럽다. 당시 살벌한 이념 대립의 아픈 기억은 노년에 이른 지금까지도 강한 두려움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그렇게 집들이 모두 타고 겨우 두세 채 남았어요. 요즘의 집들은 이듬해(1949년) 봄에 지었으니 50년이 조금 넘은 셈이지.1979년에 78호쯤 되었고 그 후에 도시로 나간 사람이 많아요.” 단순히 소일거리가 없어 농사를 짓는다고 너스레지만 이들에게 농사는 결국 ‘죽으나 사나 꼼짝없이 해야 할 일’이자 ‘못 걸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할 인생의 몫’이기도 하다.“할 수 없어 한다.”는 현천마을의 ‘독수리 5형제’ 할아버지들은 70이 넘고 80이 되도록 여전히 농사일로 정신없다. 다섯 할아버지의 깊은 주름살 위로 산수유 빛을 닮은 붉은 석양이 가지런히 내려앉는다. #교통 전남 구례까지는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용산역을 이용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IC나,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장수IC,88고속도로 지리산IC 등에서 남원으로 간 다음 19번 국도로 들어선다. 서울을 기준으로 했을 때 현천은 구례읍내로 들어서기 전에 있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기자(www.emountain.co.kr)
  • 103살노인이 홀로 산속에서 살아가는 사연

    100살이 넘은 노인이 문명과 담을 쌓고 심산 유곡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중국 대륙에 100살이 넘은 한 할아버지가 세상을 등지고 홀로 깊은 산속에서 은둔해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허위안(河源)시 동위안(東源)현 쩡톈(曾田)진 위후(玉湖)촌에 살고 있는 장둥라이(張東來·103) 할아버지.103살 생일을 맞은 지난달 30일 장 할아버지는 27년째 문명과는 담을 쌓아 아무런 걱정과 병이 없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상향)에서 생활하고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 있다고 대양(大洋)망이 31일 보도했다. 대양망에 따르면 장 할아버지가 27년동안 도시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사연은 이렇다.지난 1954년 10월29일,장 할아버지는 허위안시 둥위안현 쩡톈진 위후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사실 그의 원래 고향은 광둥성 자오칭(肇慶)시 위난(郁南)이고 본명은 후둥라이(胡東來)이다.젊었을 때 국민당군에 입대해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도 세웠다.하지만 일본군과 전쟁중 포로가 돼 구메밥도 먹어야 하는 간난신고를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장 할아버지는 야음을 틈타 몰래 일본군 감옥을 탈출,동장허(東江河)를 따라 오다 심산유곡에 있는 둥위안현 쩡톈진 위후촌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당시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오다 기절을 해 마을 사람들이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장 할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동네 주민들이 너무나 고마워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이때 원래의 이름을 ‘후둥라이’에서 자신을 구해준 마을 사람의 성을 따 ‘장둥라이’로 고쳤다. 위후촌에 살면서 그는 두차례에 걸쳐 결혼을 했다.첫번째는 40살 되던 해 같은 동네 처녀와 결혼을 했다.그러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해 결국 헤어지게 됐다.두번째는 60살이 넘어 아이를 한명 데리고 온 과부와 다시 결혼했다.하지만 워낙 애옥살이 살림이라 두 사람을 부양하기 어려워 또다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에 장 할아버지는 혼자 살기로 작정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홀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무릉도원’의 생활을 하게 됐다.그는 화전(火田)을 일구어 백그루 이상의 과일나무를 심고 집앞에 조그마한 호수를 만들어 각종 물고기도 길렀다. 이렇게 일하기를 20여년.장 할아버지의 집은 편안한 ‘낙원’으로 변모했고 개와 고양이,벌 닭 등도 키우며 아무런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이 덕분에 100살이 넘은 나이이지만 그의 건강은 60대의 ‘젊은(?)’ 몸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그러나 장 할아버지의 ‘무릉도원’생활도 이제 청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최근들어 산속에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이 출몰이 잦아져 다칠 위험이 있는 데다 지난 여름 대홍수로 집이 완전히 붕괴되는 바람에 거처할 곳도 마뜩치 않은 것을 본 동네 주민들이 마을로 내려와 같이 살자고 강력히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장 할아버지의 27년째 ‘산중 은거생활’도 곧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31) 에티오피아의 문화발상지 악숨 기행

    (31) 에티오피아의 문화발상지 악숨 기행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로맨스 전설에 따르면 BC 10세기 아라비아 남서부에서 활동하던 시바 왕국의 지배자가 솔로몬이 재위할 때 금, 은, 보석, 향료 등을 실은 낙타 대상을 앞세우고 솔로몬의 궁전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이야기를 두고 당시 고대 이스라엘과 아라비아 사이에 중요한 상업적 관계가 있었다고 파악하기도 하는데, 에티오피아에서는 그 해석이 다르다. 당시 솔로몬과 시바여왕 사이에 로맨스가 있었고, 한 아이가 태어났으며, 그 아이가 에티오피아의 단군 할아버지인 메넬리크 1세라는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역사서에도 이 내용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메넬리크 1세를 시작으로 1974년 군부 쿠테타로 물러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까지 에티오피아에서는 3,000년간 이 왕통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악숨에는 시바여왕의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로 여겨지는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오벨리스크가 모여 있는 곳을 등지고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수지가 하나 나타난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호수라고 생각했는데 시바여왕의 목욕탕이었단다. 폭 30m에 길이만도 100m에 이르니 수영장이라고 해도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닌데 욕조였다니 시바여왕은 대단한 권력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생활용수 저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시내에서 자전거를 빌려 30분쯤 달리면 시바여왕의 왕궁 터에 갈 수 있다. 왕궁은 기원전 4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지금은 규모만 가늠할 뿐 궁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견고하게 쌓은 돌무더기들은 제주도의 돌담을 연상케 한다. 자기들도 신기한지 현지인들이 설명을 해주는데, 무너져서 현대에 와 다시 쌓아 올린 돌 자리는 과거에 있었던 자리와 차이가 난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봤더니 정말 그랬다. 돌도 있고 기술도 있는데 궁성의 돌담을 지금은 그 옛날처럼 쌓을 수 없다는 혜곡 최순우 선생 이야기가 생각난다. 옛날에는 뭘 하나 만들어도 다 장인정신으로 만들었는데 요즘은 에티오피아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왜 그렇게 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St. Mary of Zion) 악숨에는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올드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Old Church of St. Mary of Zion), 또 하나는 뉴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New Church of St. Mary of Zion)이다. 전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17세기에 파실라다스 황제가 건립했으며 현재도 예배를 본다. 양식은 곤다르 성의 축조양식을 따랐다. 뉴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는 1960년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지었다. 영국을 방문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교회에 여성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남녀차별이지 않느냐고 충고해 같은 이름의 새 교회를 바로 옆에 짓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여성의 출입이 자유롭다. 외관은 17세기 라스 미카엘의 왕관을 본뜬 돔형으로 지어졌고, 실내가 넓은 편이다. 내부의 스탠드 글라스가 유명하며, 관리인에게 부탁하면 식물, 계란 등을 잉크로 사용해 양피지에 쓴 1,000년 전의 성서를 볼 수 있다. 문자는 전부 Geez로 되어있는데 기에즈는 현재 에티오피아 공용어인 암하릭의 모체가 되는 언어이다. 옛 교회와 새로운 교회 사이에는 ‘계약의 상자’를 보관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이를 지키는 군사와 건물지기도 따로 있다. 무리해서 들어가려고 하면 실탄이 장전된 총기로 제지를 당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 상자가 보관된 곳에 들어가면 죽기 전에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윤오순>
  • 비행기 추락에서 살아난 ‘기적의 3살 소녀’

    비행기 추락에서 살아난 ‘기적의 3살 소녀’

    캐나다의 한 여자아이가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현지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기적의 여아는 올해 3살인 케이트 윌리암스(Kate Williams). 골든시 인근 숲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구조된 케이트는 지난 28일 할아버지와 함께 소형비행기를 탔다가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비행기를 운전하던 할아버지 알렌 윌리암스(65)와 다른 동승자 한명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골든시 구조국의 마르코 셰호백(Marko Shehovac)은 “발견 당시 케이트는 곰인형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며 “아이가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으며 안고 있던 곰 인형이 충격을 줄여주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그렇다고 해도 기체의 손상 정도로 볼 때 생존 자체가 기적”이라고 덧붙였다. 케이트가 치료를 받고있는 병원측은 “아이가 꽤 깊은 머리 부상을 잘 이겨냈으며 부모님과 만나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현재 상태를 전했다. 한편 골든시 구조국 조사대는 이번 사고의 원인을 궂은 날씨로 인한 실수로 추측하며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 캐나다 CTV 보도화면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美대선 70대 이색 후보 눈길

    美대선 70대 이색 후보 눈길

    “힐러리나 줄리아니만 후보냐?우리도 좀 봐달라.” 민주당 마이크 그레이블(77·알래스카)전 상원의원과 공화당 론 폴(72·텍사스) 하원의원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도 유력주자는 아니지만 당당한 대선 예비후보다. 당내에서는 둘다 ‘괴짜’취급을 받는다. 기상천외한 공약으로 표심을 다진다. 둘다 70대 할아버지.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손주뻘인 20대들에게 오히려 인기가 많다. 그레이블 전 의원은 퉁명스럽고 직선적인 말투가 트레이드 마크. 지난달 말 열린 토론회에서는 유력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향해 폭발했다. 그는 힐러리가 이란 혁명수비대를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법안에 찬성했던 것을 놓고 “힐러리, 나는 당신이 정말 부끄럽소”라며 면전에서 일침을 가했다. 마리화나를 합법화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발전(發電)을 위해 미국 전역에 500만개의 풍차를 짓자는 엉뚱한 공약도 내놓고 있다. 유투브를 통해 알려진 선거동영상 광고는 그의 괴팍함을 그대로 드러낸다.2분 50초짜리 광고에서 그는 호수앞에서 1분여를 아무말 없이 뚱한 표정으로 그냥 서있기만 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뒤돌아서서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 호수에 집어 던지고는 천천히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이어 ‘gravel 2008 us(2008년엔 그레이블을)’라는 자막이 올라간다.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아리송하기만 할 뿐. 하지만 젊은 블로거들은 “절묘하다.”,“허무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1%도 안 되는 지지도로 민주당 예비후보 중 꼴찌를 면치 못하는 게 여전히 그의 고민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공화당 폴 의원도 특이한 성향의 후보다. 공화당원이지만 이라크 전에 반대한다. 그는 자유주의자로, 연방정부의 과도한 역할에도 반대한다. 미국이 유엔이나 나토, 세계무역기구 같은 국제기구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폴 의원 역시 지지율은 2%대. 하지만 대학가나 젊은 네티즌들의 지지는 탄탄하다. 정치기부금으로 무려 800만달러(약 72억원)를 쓸어담았을 정도다. 특별한 이슈가 없는 미 대선에서 이들 별난 70대 두 군소 후보가 막판까지 선전을 펼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구로구 실버환경순찰대 운영

    구로구가 어르신들로 이뤄진 ‘실버 환경순찰 디카모니터’ 제도를 운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구로구는 29일 어르신 23명으로 이뤄진 ‘실버 환경순찰 디카모니터’를 출범시켰다고 밝혔다. 할아버지 18명, 할머니 5명이며 최고령자가 81세, 최연소자가 61세다. ‘환경순찰 디카모니터’ 제도란 모니터 요원들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구로구 곳곳을 누비며 구정의 잘된 점, 잘못된 점 등을 구 홈페이지에 올려 구정에 반영하는 제도다. 지난 2년간 목감천 양방통행로 개설, 안양천 인공산란장 설치, 인라인스케이트장 조명 설치 등은 환경순찰 디카모니터들의 공이다. 기존 환경순찰 모니터 제도에 실버 요원을 추가한 것은 연륜이 풍부한 어르신들의 지혜와 경험을 구정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실버 환경순찰 디카모니터 출범에는 구에서 실시한 ‘디카사진반’ 교양수업이 큰 역할을 했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할아버지 조정래의 위인이야기

    할아버지 조정래의 위인이야기

    소설가 조정래(64)가 손자 손녀들이 읽을 수 있는 인물이야기를 펴냈다. 시리즈 제목이‘큰 작가 조정래의 인물이야기’(문학동네)다.‘소설가 조정래’가 추구해온 치열한 작가적 고민을 ‘할아버지 조정래’의 입을 빌려 진솔한 마음을 담아 풀어냈다. 작가는 “글 쓰는 할아버지로서 위인전과 전래동화를 손수 써서 손자에게 읽히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고 집필동기를 설명했다. 민족이 겪어온 처절한 역사 속에서 민족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를 놓고 동시대 독자들에게 호소했던 것을 이젠 손자 세대에게도 말해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10권을 훌쩍 넘는 대하장편소설을 써온 작가는 자신의 글힘을 과시하듯, 국내외 인물 30명의 삶을 30권에 담는 방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다시 ‘글감옥’에 갇혔다. 지난해 12월부터 올 7월까지 소설 작업을 중단하고 한 달 반만에 한 권씩을 마무리했다. ‘민족주의자’ 조정래가 인물을 고른 기준 또한 민족주의다. 신채호·안중근·한용운·김구·박태준을 주인공으로 해서 5권이 먼저 나왔다. 유일한 생존인물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꼽은 데 대해 작가는 “‘단군 이래의 최대 기적’이라 부르는 한국의 경제발전 중심엔 박태준씨가 있었다.”면서 “그는 식민지시대 항일열사들만큼이나 한국 현대사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 인물로 이순신, 세종대왕, 허준, 김정호, 전봉준, 홍범도, 신돌석, 김원봉, 유일한, 장기려 등을 추후 집필 대상으로 꼽고 있다. 국내 인물을 마치면 곧 해외 인물 집필을 시작할 계획이다. 조정래의 인물이야기가 기존 위인전과 다른 점은 작가가 한평생 견지해온 문제의식을 그대로 투사했다는 점이다.‘안중근편’에서는 외국 신부의 입을 통해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고발했고,‘신채호편’에선 작가 자신이 사표로 삼아온 선생에 대한 존경의 뜻을 한껏 담았다. 조정래는 “글을 쓰면서 선생들이 느꼈을 고통과 괴로움을 내가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늘 두려웠다.”면서 “한 권의 글을 마칠 때마다 그분들의 삶이 너무 숭고해 가슴이 먹먹했다.”고 회고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할아버지가 지킨 조국 발전한 걸 보니 기뻐”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러시아의 고려인 강제 이주 70주년을 맞아 고려인 독립운동가 후손 및 강제 이주 1∼2세대 109명 등 고려인 모국 방문단이 25일 강원 속초항을 통해 5일간 일정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방문단 가운데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 등에서 독립군을 지휘한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67·러시아 연해주 스파스코시)씨는 강릉 오죽헌을 방문한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지킨 조국이 이렇게 발전한 걸 보니 기쁘고 감사할 뿐이다.”고 말했다. 김씨의 한 손에는 할아버지 홍범도 장군이 일제를 물리친 공으로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선물받고 전쟁 영웅 칭호를 받은 뒤 찍었던 젊었을 때의 흑백사진 1장이 들려 있었다. 김씨는 “할아버지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은 지금 없지만 권총 케이스는 보관하고 있다.”며 “늦게나마 할아버지가 지킨 조국 땅을 밟게 돼 꿈만 같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박노순 장군의 아들 박필립(68)씨도 “아버지가 싸워 지킨 나라가 발전한 것을 보니 가슴이 뜨겁다.”며 “아버지가 독립 운동을 해서 후손들의 삶이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조국이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좋다.”고 말했다. 옛 소련 시절에 경제학 박사를 받은 강릉 출신인 전인수(84)씨는 “두살 때 강릉을 떠나 82년 만에 찾아왔다.”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매우 즐겁고 반갑다, 한국말 잘 못하지만 감사하고 기분이 최곱니다.”라고 입국 소감을 밝혔다. 이들은 강제 이주 이후 연해주 고려인촌에서 생활하던 1세대와 그 후손들로, 횡성 성우리조트에서 고국 방문 첫날밤을 보낸 뒤 속초와 춘천, 강릉, 삼척, 서울 등의 고향을 찾을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사)고려인돕기운동본부 등이 주관했으며 강원도는 2005년 연해주와 교류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추석 명절 송편빚기와 물품기증 등 연해주 고려인 조국문화 전파사업을 펼치고 있다. 강릉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속박보다 자유”…중·노년층 이혼상담 급증

    “속박보다 자유”…중·노년층 이혼상담 급증

    중년층 인기 연예인들의 이혼이 잇따르면서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이혼 신드롬’이 40대 이후의 중년층과 노년층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80대 노년층의 경우 여성이 아닌 남성들이 전문기관에서 이혼 상담을 받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 20∼30대의 이혼 상담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법률구조법인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이하 상담원)은 23일 “이혼 상담 연령층이 30대에서 40대 이상으로 급격하게 옮겨가고 있으며,1999년 개원 이래 처음으로 80대 남성 4명이 방문, 이혼 상담을 받았다.”고 밝혔다. ●80대 할아버지도 이혼 상담 행렬에 상담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올 8월까지 상담원에 접수된 가사·민사·형사 상담 1만 8553건 가운데 전화·온라인·출장상담 등을 제외한 면접 상담 863건 중 이혼·부부 상담 사례 331건을 분석한 결과,20∼30대의 이혼 상담은 줄어든 반면 40대 이상 이혼 상담은 크게 늘었다.20∼30대는 전년도 같은 기간(2005년 9월∼2006년 8월)과 비교해 49%에서 40.1%로 크게 줄어든 반면 40∼50대는 44.7%에서 46.8%로 증가했다.60대와 70대 상담자 비율도 각각 7.85%(26명)와 3.02%(10명)로 전년도 3.54%와 1.40%보다 늘었다.80대는 1.2%(4명)에 불과했지만 개원 이래 처음이다. 성별로는 남성의 경우 30대(20.9%),40대(19.7%),70대(17.4%)의 순이었고, 여성은 30대(27.5%),40대(26%),50대(18.4%)의 순이었다. ●‘부당한 대우’가 ‘부정한 행위’ 앞질러 이혼 상담 사유도 ‘배우자 등의 부당한 대우’가 ‘배우자의 부정행위’를 앞질렀다. 이혼 고려 사유(중복 응답)에 대해 남성 상담자의 16.7%가 ‘아내나 처가 식구들한테서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를 꼽아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55.3%)’에 이어 두번째로 높았다. 아내의 부당한 대우는 2005년 4.6%,2006년 10.1%에 비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이다. 반면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는 2005년 13.9%,2006년 13.5%에 이어 올해 9.41%로 감소 추세다. 가정불화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고만 하던 남성의 이혼 상담도 눈에 띄게 늘어 남성 상담자 비율은 25.08%(83명)로 2005년 12.6%,2006년 18.87% 등 해마다 6% 포인트씩 증가했다. ●전문가들 “속박보다는 자유, 달라진 사회상황 반영”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이혼은 부부가 모두 직장과 육아 문제로 가장 바쁜 결혼 10년차 이후가 가장 위험한 시기다.”면서 “이는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여성 위에 군림하려는 남성들의 태도를 여성이 참지 못해 파경에 이르게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양정자 원장은 “신드롬처럼 번지는 이혼을 막기 위해서는 남성은 아내를 대신해 가족을 위해 요리도 하고 아내가 아프면 하루 정도 회사를 쉬더라도 옆에서 지켜주는 새로운 남편 모델에 적응해야 하며, 여성도 가정의 어려움을 회피하지 말고 직접 책임지려 하는 새로운 아내 모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국진 류지영기자 betulo@seoul.co.kr
  • 영화배우-NBA스타 닮은꼴을 찾으면?

    영화배우-NBA스타 닮은꼴을 찾으면?

    혹시 친형제일까? 최근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미국 NBA 농구스타와 인기 영화배우의 닮은꼴을 찾아 모은 사진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중 인기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 출연한 배우들의 사진들이 많다. 국내에서도 잉글랜드 프리미어 축구스타들과 프리즌 브레이크 출연 배우들의 닮은 꼴을 비교한 사진이 네티즌 사이에 인기를 얻은바 있다. 먼저 첫번째 사진(사진 맨 위부터)은 마이애미 히트(Miami Heat) 농구팀 감독 팻 라일리 (Pat Riley)와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1에 출연한 피터 스토메어(Peter Stormare)와의 비교 사진이다. 살짝 벗겨진 이마와 깊게 패인 눈가의 주름이 매우 닮았다. 두 번째 사진은 LA 클리퍼스(LA clippers) 감독 마이크 던리비(Michael Joseph Dunleavy)와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악덕 교도관으로 출연한 웨이드 윌리암스(Wade Williams)다. 넓게 벗겨진 이마와 얼굴형 뿐 아니라 몸매 까지도 매우 닮아있어 마치 친형제를 연상케 한다. 세 번째 사진은 클리블랜드(Cleveland Cavaliers)농구팀 선수 알렉산더 파블로비츠 (Aleksandar Sasha Pavlovic)와 프리즌브레이크에서 극중 마이클 스코필드의 형으로 출연한 도미닉 퍼셀(Dominic Purcell)이다. 깊은 눈매와 굵직한 얼굴라인, 짧은 머리 스타일이 매우 비슷하다. 이밖에 중국 네티즌들이 언급한 닮은꼴 스타들은 다음과 같다. ▲미국 덴버 너기츠(Denver Nuggets) 농구팀 감독 조지 칼(George Karl)과 영화 ‘클리프 행어’(Cliffhanger·1993)에서 인상깊은 악역을 연기한 배우 존 리스고(John Arthur Lithgow). ▲세르비아의 前농구선수 블라디 디박 (Vlade Divac)과 영화배우 장 르노(Jean Reno). ▲미국 前 LA 레이커스(LA lakers) 농구팀 감독 필 잭슨 (Philip D. Jackson) 과 ‘KFC 할아버지’로 유명한 커넬 할랜드 샌더스(Colonel Harland Sanders). 사진=163.com(사진 맨위 부터 순서대로 팻 라일리·피터 스토메어, 마이크 던리비·웨이드 윌리암스, 알렉산더 파블로비츠·도미닉 퍼셀, 조지 칼·존 리스고, 블라디 디박·장 르노, 커넬 할랜드 샌더스 ·필 잭슨)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깔깔깔]

    ●보험 바닷가 리조트에 놀러온 한 꼬마가 엄마에게 물었다. 꼬마:“엄마, 바다에서 수영해도 돼요?” 엄마:“물이 너무 깊어서 수영하면 안돼.” 꼬마:“아빠는 저기서 수영하고 있잖아요?” 엄마:“아빠는 보험을 들었잖니.”●서울 구경 시골에서 서울 구경을 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초미니 스커트 차림의 처녀를 보고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할머니가 놀라면서 한마디 했다. “나 같으면 저런 꼴 하고는 밖에 나오지 않겠구먼….”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임자가 저 정도면 나 역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겠구먼….”
  • 주택연금 신청 평균 74세 월 수령금액은 108만원꼴

    주택연금 신청 평균 74세 월 수령금액은 108만원꼴

    주택연금 신청자의 평균 연령은 74세(부부의 경우 낮은 연령 기준)로 나타났다. 한국주택금융공사는 21일 출시 100일 맞은 주택연금 신청자의 특성을 분석한 결과, 신청자의 평균 연령이 가입 기준 연령(65세)보다 9세나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또 이날 현재 주택연금 신청자는 470명으로, 하루 평균 6.3명꼴로 주택연금 가입을 신청했다. 이 가운데 보증심사를 거쳐 주택연금을 받는 사람은 314명이었다. ‘부부 종신보장’ 원칙에 따라 가입자가 숨진 뒤 배우자에게 주택연금이 승계되는 첫 사례도 나왔다. 이달 초부터 주택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한 남모(대전 서구) 할아버지는 11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배우자인 온모(78) 할머니 앞으로 담보주택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등 주택연금 승계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관련 절차가 마무리되면 온 할머니는 남편이 주택연금에 가입할 때와 동일한 조건으로 평생 동안 월지급금을 받게 된다. 신청자들이 담보로 내놓은 주택의 평균 가격은 2억 5300만원이었다. 집값은 1억∼2억원이 29.2%(137건)로 가장 많았고 2억∼3억원 23.6%(111건),3억∼4억원 15.3%(72건),1억원 미만 13.2%(62건),5억∼6억원 8.7%(41건) 순이었다. 주택 유형별로는 아파트가 397건으로 전체 신청건수의 84.5%를 차지했으며 담보 주택의 소재지는 서울과 인천, 수원 등 수도권이 77%였다. 서울의 경우 노원구(34건)와 동대문구(13건), 강동구·강서구(각 10건) 등지에서 신청자가 많이 나온 반면 강남구(2건), 서초구(1건), 송파구(3건) 등 6억원 이상 고가 주택이 많은 강남 지역은 상대적으로 신청건수가 저조했다. 주택연금을 수령하고 있는 314명의 평균 월지급금은 108만 2000원이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HAPPY KOREA] (25) 남원시 대산면 ‘구름다리 마을’

    [HAPPY KOREA] (25) 남원시 대산면 ‘구름다리 마을’

    가을걷이가 한창인 황금 들판에는 풍요로움이 넘친다. 공기가 유난히 맑아 자꾸만 들이마시고 싶다. 코스모스가 하늘 거리는 마을 안길은 눈이 시리도록 정겹다. 마을 앞 운교천은 생수처럼 깨끗하다. 전북 남원시 대산면 ‘구름다리’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 하지만 이 마을은 여느 농촌과는 달리 활기가 넘친다. 교룡산과 풍악산 품에 안기듯 자리잡은 이 마을에는 지난해부터 ‘제2의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로 뭉쳐 일어선다. 구름다리 마을은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전통적으로 강한 곳이다. 우리나라 농협운동의 발상지가 바로 이곳이다.1972년에는 새마을운동에 모범을 보여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다른 지역은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슬레이트로 지붕개량을 할 때 구름다리 마을은 주민들이 스스로 기와공장을 건립해 집을 지었을 정도다. 평생을 고향에서 뿌리를 박고 살아가기 때문에 품앗이 등 아름다운 미풍양속도 잘 보존돼 있다. 지난 70년대에 비해 변한 게 있다면 주민들의 나이다. 당시 30∼40대였던 새마을운동의 주역들이 이제는 60∼80대가 됐다. 151가구,303명의 주민 가운데 115명이 65세 이상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젊은이 못지 않게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하다. 살기좋은 지역만들기에 나선 주민들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되살리기로 했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친 것이다. 잠시 시들해졌던 공동체 의식을 되살려 새로운 소득원을 개발하고 이를 상품화해 삶의 질을 높이기로 결의했다. 우선 자체적으로 내집 가꾸기에 나서 생활공간에 개혁을 시도 하고 있다. 도회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집 단장을 잘 해야 농촌체험을 하려는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지역 특산품도 잘 팔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양해주(65) 추진위원장은 “제2의 마을 발전을 이룩하자는 의식이 되살아나면서 그동안 잠재돼 있던 공동체 의식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며 살기 좋은 마을 청사진을 펼쳐보였다. ●유·무형 자산을 상품화 이 마을 주민들은 매일 저녁 마을회관에 모여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살기좋은 지역 추진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발전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자산인 청정 자연환경을 상품화하기로 했다. 주민들이 모두 장수하는 비결인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공해에 찌든 도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마을 앞에 있는 산림청 지정 아름다운 숲인 ‘왈길숲’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울 계획이다. 왈길숲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장관을 이루고있다. 이장 진상호(70)씨는 “교룡산과 풍악산 소나무숲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최고의 보약”이라면서 “도시 사람들에게 내집처럼 편안하게 쉴곳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 살거리,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마을 모두가 하나로 뭉쳤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친환경 고품질 쌀인 스테비아 허브미 생산단지 33㏊와 아스파라거스 재배단지를 조성했다. 노인회는 웰빙식품인 검은 콩과 고사리를 재배해 힘을 보태고 있다. 부녀회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향토음식을 개발할 계획이다. 흑염소와 토종 미꾸라지를 양식해 건강식단에 올리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앞으로 전주∼광양간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마을 주변에 2개의 골프장이 들어서면 접근성이 좋아져 향토음식점이 각광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고 살기좋은 만들기 과정에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인층은 폐쇄된 마을 도정공장을 정비해 소득사업으로 연계하자고 주장하는 반면 젊은층은 이를 반대한다. 하지만 이는 마을 발전을 위한 건강한 의견 제시일 뿐 결코 갈등은 아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양해주 추진위원장은 “소득을 높이고 삶의 질을 향상 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면서 “정부와 자치단체에서 자금지원을 확대하고 자율성을 준다면 주민들의 사기가 더욱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남원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강춘성 남원 부시장 “지리산 연계 문화관광도시 목표” “남원은 청정 자연환경과 유무형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관광도시입니다.” 강춘성 남원 부시장은 “지리산을 끼고 있는 청정 환경이 최고의 자산”이라며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를 만드는 것이 지역발전의 목표”라고 소개했다. 청정지역에서 생산된 농특산물을 수출하고 식품산업을 육성하며 건강·휴양과 문화·예술이 연계된, 돌아와 살고 싶은 ‘귀향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이다. 이를 위해 차별화된 식품산업으로 미꾸라지를 소재로 한 추어산업 클러스터, 오리 브랜드 개발, 멜론 명품화, 오디 기능성 식품, 허브식품 연구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지리산 청정연수 레저 관광도시’를 육성해 내실 있는 관광산업을 육성하기로 했다. 지리적 특성을 살려 공공기관과 대기업의 연수시설을 유치하고 전문체육강화 훈련장의 메카로 발돋움한다는 전략이다. 그는 “3개 고속도로와 전라선이 교차하는 서남권 내륙의 교통 요충지이고 지리산, 광한루, 혼불문학관 등 풍부한 관광자원이 있기 때문에 사계절 관광지, 기업형 레포츠단지, 전문 연수도시로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기 위해 지역을 재디자인 해 아름답고 쾌적하고 특색있는 마을 환경을 조성할 방침입니다.” 강 부시장은 “구름다리마을을 모델로 남원시 전역을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자연친화형 귀향도시로 구축하는 체계적인 방안을 견실하게 추진하겠다. 고 말했다. 남원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구름다리 마을은‘구름다리 마을’은 동네 형상이 마을 북쪽과 남쪽에 있는 풍악산과 교룡산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법 멀리 떨어진 두 산을 이어주는 마을 이름처럼 이곳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은 끈끈하기로 유명하다. 1960년대에는 마을 어른이신 복태봉(83)할아버지가 중심이 돼 농협운동을 이끌었다. 주민들이 출자해 조합원이 됐고 공동창고를 지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 새마을운동 역시 이 마을이 전국적인 모범이 됐다. 주택개량, 마을길 넓히기, 청소, 새로운 영농기술 도입 등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갔다. 주민들이 함께 모은 재산도 적지 않다. 임야 135㏊, 논 2만㎡, 현금 1억 1000만원을 공동 운영한다. 수익금으로는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70세 이상 노인에게 매월 5만원씩 용돈을 준다. 애경사에는 쌀 2∼3가마씩을 전달한다. 매년 5월1일 개최되는 리민의 날에는 효부상, 근로상을 주고 어려운 이웃에게는 땔감도 지원한다. 리민의 날은 38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농사도 대행해준다. 농번기에는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 공동배식제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삶의 질이 높은 부자 마을을 만들기 위해 또 다시 일어서고 있다. 남원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요리전문가 김수진의 계절별미 오감만족]가을의 맛 ‘추어탕’

    [요리전문가 김수진의 계절별미 오감만족]가을의 맛 ‘추어탕’

    가을을 대표하는 물고기 중 하나가 추어(鰍魚), 즉 미꾸라지이다. 미꾸라지는 미꾸리, 미꾸락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좀 징그러운 탓에 평안도에서는 징구레기, 또는 징구막지라고 불리기도 했다. 얼마나 가을에 잘 어울렸으면 물고기어(魚)에 가을 추(秋)를 붙여서 추어(鰍魚)라고 했을까. 미꾸라지는 논, 개천, 못 따위의 흙 속에 사는데 가끔 수면에 떠 올라 공기호흡을 한다. 한국, 중국, 타이완 등지에 분포하며 몸길이는 약 10∼20㎝이고 등은 푸른빛을 띤 검은색이며 배는 흰색이고 검은점이 많다. 요즘에는 양식 미꾸라지가 많아 제철이 따로 없지만 가을에 논이나 도랑에서 잡히던 미꾸라지는 끈적한 점액질이 강장효과가 뛰어나 대표적인 가을 보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단백질 식품이 부족하던 옛 시절 농민들에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훌륭한 동물성 단백질 식품이었다. 특히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성인병 예방에 좋으며, 단백질 중 필수아미노산인 라이신이 풍부하여 성장기 어린이나 노인에게도 좋은 식품이다. 보통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끓이면 추탕이라 하고 미꾸라지를 갈아서 끓이면 추어탕이라 부르는데 요사이는 특별히 구분하지 아니하고 추어탕이라고 통칭하여 쓰는 경향이 있다. 조선 선조 때(1850년 경)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추두부탕(鰍豆腐湯)에 대한 글이 나온다. 산 미꾸라지를 가마솥에 넣고 가운데 순두부를 넣은 후 서서히 불을 때면 미꾸라지들이 뜨거워 순두부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이렇게 추두부(鰍豆腐)를 만든 후 양념장에 양념을 해 먹거나 탕을 끓인다. 필자가 갓 시집 왔을 때 시어머니가 시장에서 미꾸라지를 직접 사다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추어탕을 끓여 주셨는데 새댁으로서는 참으로 먹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추어탕은 지방마다 끓이는 방법이 약간씩 다르다. 경상도식은 미꾸라지를 가마솥에 푹 삶아 으깨어 배추, 토란대, 우거지, 부추 등을 넣고 끓이다가 파, 마늘, 고추, 방앗잎, 산초를 넣으며, 전라도식은 경상도와 같이 가마솥에 푹 고아 끓이는데 된장, 파, 들깨즙을 넣어 끓이다가 산초를 넣어 매운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사골과 소의 내장 등을 푹 고아 끓인 고깃국물에 두부와 여러 가지 버섯 등을 넣고 삶는다. ‘본초강목’에는 ‘양기(陽氣)에 좋고, 백발을 흑발로 변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을에 추어탕을 한 솥 끓여 놓고 한달 동안 먹으면 혹시 흰머리가 까만머리로 변(?)할까. 푸드앤컬쳐코리아 원장 ■ 추어탕 맛있게 만드는 법 재료 및 분량 미꾸라지 250g, 배추 20g, 부추 20g, 쑥갓 20g, 미나리 20g, 홍고추 1개, 청고추 1개, 된장 2큰술, 간장 1큰술, 다진마늘 1큰술, 생강즙 1작은술, 멸치 15g, 파 10g, 참기름 1/2작은술, 들깨가루 3큰술 만드는 방법 1. 뚜껑이 있는 그릇에 산 미꾸라지를 넣어 소금을 뿌려 뚜껑을 덮어, 미꾸라지끼리 부딪쳐 해감이 되게 한다. 2. 해감된 미꾸라지는 소쿠리에 담아 거품이 나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헹구어 소쿠리에 밭친다. 3. 냄비에 물 5컵을 넣어 미꾸라지가 완전히 삶아져 육수가 우러날 때까지 끓인 후, 미꾸라지를 건져 체에 밭쳐 주걱으로 살이 걸러져 내리도록 한다. 4. 육수에 멸치와 된장, 다진마늘, 생강즙을 넣어 끓인다. 5. 배추는 깨끗이 씻어 잘라놓는다. 6. 미나리, 부추, 쑥갓은 깨끗이 씻어 다듬어 놓는다. 7. 청·홍 고추는 송송 썰고, 파는 어슷하게 썰어 둔다. 8.4의 육수에 배추를 넣어 끓인다.9. 푹 어우러지게 끓여지면 미나리, 쑥갓, 부추, 청·홍고추, 파를 넣고 고춧가루, 간장, 들깨가루를 넣어 간을 맞춘다.10. 그릇에 담아낸다.* 수제비 반죽을 넣어 먹어도 맛이 좋다. 푸드스타일링 김경화, 정다희, 촬영 박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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