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장승을 찾아서/박상재
승희는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장승을 보면 울음보를 터뜨리기 일쑤였습니다.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장승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5학년이 되면서 판소리와 사물놀이를 알게 되고, 탈춤도 배우고, 우리 문화재에 대해 배우면서 장승에 대해서도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승희 외할아버지는 속리산이 가까운 외딴 산골에서 장승을 만들고 있습니다. 벌써 30년 가까이 장승과 더불어 살아온 장승장이입니다. 외할아버지는 그곳에 장승을 100개도 넘게 만들어 장승공원을 꾸며 놓았습니다.
장승공원에 가면 갖가지 장승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도깨비처럼 험상궂게 생긴 장승도 있지만 저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재미있게 생긴 장승들도 많습니다. 우락부락한 인상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장승이 있는가 하면 시골 할아버지처럼 순하고 어눌해 보이는 장승도 있습니다. 이름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진서대장군, 북장군, 당장군 등 여러 가지로 불리지만 승희에게는 어느 것 하나 정이 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승희 외할아버지에게는 장승이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산길을 가다 폭풍우에 쓰러진 나무나 병충해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나무들을 보면 할아버지의 눈에 생기가 돕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는 게야. 내가 그것을 증명해주지.”
할아버지는 죽은 나무들을 알맞게 잘라 보물처럼 조심조심 옮겨옵니다. 그러고는 톱과 대패, 망치와 끌을 들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합니다. 쓱싹쓱싹 대패질 소리가 나고, 뚝딱뚝딱 망치 소리가 들리고, 쩌억쩌억 끌 소리가 들리면 죽은 고목나무는 살아 있는 장승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엄마는 승희를 데리고 국립 민속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마당에는 꼴도 보기 싫은 장승 부부가 우두커니 서서 헤벌쭉 웃고 있었습니다.
“승희야, 저 장승할아버지 앞에 가서 서 봐. 사진 한 장 찍어 줄게.”
“싫어. 내가 사진 찍기 싫어하는 것 엄마도 알잖아요.”
승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엄마는 승희에게 사진기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그럼 엄마라도 한 장 찍어주렴!”
엄마의 두 눈에는 늦가을 바람결 같은 쓸쓸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승희는 높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장승과 함께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주었습니다.
엄마가 승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승희야, 지금도 외할아버지가 싫니?”
승희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승희가 입을 열었습니다.
“난 그냥 외할아버지는 좋은데, 장승 만드는 외할아버지는 싫었어. 외할아버지는 산신령이야. 긴 머리채를 묶은 채 한복을 입고 장승을 만드는 할아버지는 더욱 싫어.”
승희의 마음이 홀가분해집니다.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 놓고 나니 마음이 개운해졌습니다.
화를 낼 줄 알았던 엄마의 얼굴에 가을 햇살 같은 웃음이 흘렀습니다.
“그래, 나도 처음엔 그런 외할아버지가 무척 싫었단다. 망나니처럼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나무망치와 끌로 장승 깎는 일에만 골몰하는 할아버지가 왜 그리 싫었는지 몰라. 외할아버지는 장승을 만들 때면 늘 목욕을 한 후 한복을 차려입고 일을 했지. 머리라도 짧게 깎았더라면 땀도 덜 흘렸을 텐데…. 비오듯 흘려대던 그 땀 냄새도 무척이나 싫었어.”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그리운지 눈시울이 젖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 승희는 엄마와 함께 광화문 광장을 찾았습니다. 새로 꾸민 광장을 구경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장이 뭔가 좀 허전하지 않니? 그곳에 장승을 세워 놓으면 어떨까?”
엄마는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며 말했습니다.
“엄만, 누가 외할아버지 딸 아니랄까봐 장승 타령이에요?”
승희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습니다.
동작역을 지나 이수역에서 다시 7호선 열차로 갈아탔습니다.
출입문 위에 붙어 있는 열차 노선안내도를 보던 엄마가 말했습니다.
“승희야, 오랜만에 엄마가 살던 골목에 한 번 가볼까?”
“엄마 마음대로 해.”
승희는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번 정차할 역은 장승배기, 장승배기역입니다.”
“승희야, 이번 역에서 내리자.”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자 엄마는 승희의 손을 잡고 내릴 준비를 했습니다.
“엄마 살던 곳이 장승배기였어?”
“그래, 엄마 어렸을 땐 동네에 커다란 장승이 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구나.”
엄마는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습니다.
개찰구를 빠져 나온 엄마는 어느 쪽으로 나갈까 망설이다가 역무원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나가면 장승을 볼 수 있을까요?”
역무원은 승희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오른 쪽 6번 출구로 나가세요.” “예, 고맙습니다.”
엄마의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가장 먼저 눈부신 하늘이 반겨주었습니다.
승희 엄마는 두리번거리며 장승을 찾았습니다. 승희도 뚤레뚤레 주변을 둘러보며 장승을 찾았습니다.
“장승이 어디 있어? 그 아저씨가 잘 못 알려줬나?”
엄마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 때 승희의 눈에 장승 한 쌍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엄마 저기 있어. 도서관 입구에 서 있잖아.”
먼 발치 도서관 입구에 농구 선수만큼 큰 장승 부부가 헤벌쭉 있었습니다.
“애걔, 너무 작다. 기왕에 세워 놓으려면 좀 더 큰 장승을 세워놓지 않고….”
승희는 엄마의 얼굴에서 승희가 전교부회장 선거에서 두 표차로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였던 섭섭한 표정을 읽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가까이에 가서 한번 보고가요, 엄마.”
승희가 먼저 엄마의 손을 끌었습니다.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
승희가 장승에 쓰여 있는 한문 글씨를 읽었습니다.
“우리 승희 한문 실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장승배기 이름에 걸맞은 좀더 우람한 장승을 세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다시 한 번 아쉬움을 토해냈습니다.
승희는 장승 앞에 서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장승배기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참배하러 가면서 쉬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인가도 없고 행인마저 적었는데 정조가 장승을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한 이후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덩치 큰 장승들이 제법 많이 서 있었는데, 이젠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구나.”
엄마의 목소리는 그리움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없어진 거야?”
“도로를 넓힌다, 지하철 공사를 한다, 재개발한다 하면서 마구 없애버린 거지.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뽑아버린 경우도 있고….”
“엄마, 진짜 장승을 보려면 외할아버지를 찾아가면 되잖아요.”
“그래,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엄마의 눈빛이 능소화꽃처럼 환해졌습니다.
“엄마, 그럼 이번 토요휴업일에 꼭 다녀와요.”
“장승이라면 무섭다고 까무라치던 네가 웬일이니?”
“엄마, 장승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이고 서민적인 민속문화재래요,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웠어요.”
승희의 목소리에서 외할아버지의 팔뚝 같은 힘이 묻어났습니다.
승희는 토요휴업일을 맞아 엄마와 함께 속리산 부근에 있는 장승공원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승희 외할아버지가 30여년 동안 피땀을 흘리며 가꿔 놓은 곳입니다. 공원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벌개미취, 구절초, 쑥부쟁이 같은 초가을 들꽃들이 승희네를 반겨 주었습니다. 수크령과 억새꽃도 어서 오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공원에는 수많은 장승들이 다양한 몸짓과 재미있는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엄마가 저녁밥을 준비할 동안 승희는 공원을 한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장승들에게 승희의 눈길이 오래오래 머뭅니다.
턱이 유난히 긴 ‘주걱턱장승’, 이가 다 빠지고 얼굴이 쭈글쭈글한 ‘노인장승’, 전통혼례를 올리는 ‘신랑 각시장승’, 하나의 나무에 각기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한몸장승’, 얼굴이 꼭 닮은 ‘쌍둥이장승’, 수줍은 듯 기둥 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처녀장승’ 등 앙증맞은 장승들이 많이 서 있습니다. 장승 외에도 높다란 장대 위에 나무새를 앉힌 솟대도 서 있고, 나무로 지은 정자도 여러 채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복을 차려입은 외할아버지는 정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여러 장승들의 표정이 참 재미있어서 정다운 느낌이 들어요.”
할아버지의 표정이 구절초꽃처럼 환해졌습니다.
“우리 승희가 이제 다 컸구나. 어렸을 때엔 장승을 보고 무섭다며 울음을 터뜨리던 애가 정다운 느낌이 든다니….”
“제가 언제 울었어요?”
승희는 엄마한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조금 머쓱해진 승희가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우리 조상들은 왜 장승을 세웠나요?”
“장승은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서서 오가는 길손들을 맞이하던 사람들의 친구였단다.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꿋꿋이 견디며 경계표나 이정표로,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수호신 역할을 했지. 사람들은 때로 장승을 찾아와 개인의 소원을 빌기도 했단다. 장승은 이렇게 정다운 친구로, 때로는 수호신이나 믿음의 대상으로 우리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 고마운 존재란다.”
“할아버지, 어떤 장승은 아주 험상궂게 생겨 무섭기도 해요.”
“근엄하고 무서운 표정의 장승은 수호신의 역할을 한단다. 잡귀와 재앙을 막아 내려면 무서운 표정을 지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나 지금은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정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장승을 만들지.”
“그래서 재미있게 생긴 장승들이 많군요.”
“그래, 장승은 못 생기면 못생길수록 정감이 가고 재미있단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맞아요. 할아버지. 제가 장승을 좋아하게 된 것도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장승들을 보고나서부터거든요.”
“이제 우리 승희와 대화가 통하니 이 할애비는 참 기쁘구나.”
“할아버지 이제부터 제가 장승홍보대사가 될 거예요. 친구들이 제 별명을 ”장승“이라고 부르면 활짝 웃을 거구요.”
“승희야, 고맙다. 역시 넌 내 손녀야.”
할아버지는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승희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승희는 할아버지 얼굴이 가을 언덕배기에 줄지어 핀 해바라기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작가의 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장승은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 유산이다. 한때 우상숭배라는 미명 아래 장승이 수난을 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후손에 물려줄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 약력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꿈꾸는 대나무)▲새벗문학상 장편동화 당선(원숭이 마카카)▲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정동아동문학상 수상▲동화집:개미가 된 아이, 원숭이 마카카 등 50여권▲현재, 서울영일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