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둠벙 할아버지/장수명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다.
“휴, 비는 언제 온담.”
바싹 마른 바닥에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기호가 타박타박 걷는다.
“기호, 이제 오니?”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기호를 보자, 우물가로 가시더니 두레박에서 물을 퍼 올린다.
“기호, 이리 온. 할애비가 등목 시켜줄 테니.”
할아버지는 기호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말했다. 우물에서 갓 퍼 올린 물은 얼음 같다.
“아~, 차차 차가워. 할배.”
기호가 엎드렸던 몸을 발딱 일으켜 세우며 호들갑을 떤다.
“원, 녀석도 뭐가 차갑다고 호들갑이누.”
할아버지는 길러 놓은 물을 할아버지 몸에 퍼붓는다.
“피, 할아버지 억지로 참는 것 다 안다 뭐.”
기호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팔딱팔딱 뛰어 툇마루로 재빨리 올라선다.
몹시도 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하지만 어찌나 긴 가뭄을 겪었는지 논바닥은 쩍쩍 갈라지고 제대로 자란 벼도 그다지 없었던 농사는 가을이 되어도 별로 추수할 거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둠벙을 하나 파야겠어.”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둠벙을 파신다고요?”
작은아버지의 낯빛이 싸늘해졌다.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되지 싶다. 저기 윗마을에 있는 우리 논에….”
할아버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은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버지, 그 논에 둠벙을 판다는 게 말이 돼요. 다른 사람들 다 가만있는데 왜 번번이 아버지가 나서요. 지난 번 영식이네가 돌아왔을 때도 문중에서 모두 가만있는데 아버지가 나서서 그 위에 있던 논 한 마지기하고 밭 한마지기 털컥 떼 주더니 이번엔 또 우리 논에 둠벙을 판다고요?”
작은아버지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다 할 참인가 보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목청을 돋우기 시작했다.
“그래요. 아버지 땅이니까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난 이제 이곳을 떠나서 살 거예요. 더는 농사짓기도 싫고, 이곳도 지긋지긋하고….”
작은아버지는 휑하니 나가버렸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셨다. 그런 작은아버지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시더니 천천히 몸을 움직여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허참, 쟤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네.”
할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지으며 먼 산으로 눈길을 돌리신다.
몇 날이 지났다. 집안 분위기는 잔뜩 가라앉아 숨조차 마음대로 쉬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기호는 늦잠을 잔 탓에 허겁지겁 밥을 먹고 가방을 둘러메고 잰걸음으로 학교로 달려갔다.
일교시가 끝날 무렵이었다.
“기호야.”
작은아버지가 학교로 찾아 왔다.
“작은아빠, 작은아빠가 웬일이세요?”
기호는 멀뚱멀뚱한 눈빛으로 작은아버지를 올려다 본다.
“오늘, 12시 차로 작은아빠는 작은엄마하고 서울 올라가려고 한다.”
“서울요?”
“넌, 할아버지와 있다가 우리가 자리잡고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 학교 잘 다니고 할아버지랑 잘 지내도록 해야 한다.”
기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학교에 찾아와서 서울 간다는 작은아버지의 말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작은아빠, 정말 갈 거예요? 정말, 나하고 할아버지만 두고, 서울로 갈 거예요?”
“그리 알고 수업 마치고 집으로 곧장 가도록 해라. 알았지.”
작은아버지는 이미 마음을 굳혔나 보다. 기호의 어깨를 몇 번 도닥거리더니 총총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서울….’
느닷없이 나타나 서울 간다는 작은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호가 작은 주먹을 움켜잡는다. 기호도 가고 싶던 서울이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처럼은 아니다. 기호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읜 기호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를 친부모처럼 따랐는데, 덜컥 기호를 두고 간다니….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가 없는 집은 마치 빈집처럼 휑하기만 했다.
바닥 가장자리 천이 닳고 닳아서 헤져 작은 구멍이 난, 아주 오래된 낡은 배낭을 할아버지는 찾아냈다. 다 먹은 주스병에 물을 담아 배낭에 챙겨 넣고, 반찬 몇 가지며 밥도 챙겨 넣었다. 그리고 허벅지까지 오는 고무장화도 차곡차곡 접어서 배낭에 넣는다.
“할아버지 어디 가요?”
“그래 기호야, 할아버지 좀 늦게 올지도 모르니까 밥 알아서 챙겨 먹어라.”
헛간에 세워져 있던 삽자루를 자전거 뒤에 싣고 할아버지는 대문을 나선다.
“할아버지, 윗마을 가요?”
“그래.”
여름 내내 비 한 번 오지 않았던 날씨 탓에 논바닥은 마치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펌프로 물을 뽑아 올렸지만 그것도 한정이 있었다.
듬성듬성 누렇게 말라 다 타버린 나락줄기를 만지던 할아버지 얼굴은 일그러져,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배낭을 벗고, 할아버지는 삽으로 논바닥을 뒤집기 시작했다. 뿌연 흙먼지가 삽을 따라서 하얗게 일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할아버지 손등으로 올라온 굵은 핏줄 위로 땀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논바닥은 거의 다 뒤집혀져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몇 날이 지나고 몇 달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마치 곧장 일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바람 쌩쌩 부는 겨울이 되었는데도 하루도 쉬지 않고 논으로 갔다.
진눈깨비가 어지럽게 날리는 날이다.
“할아버지 이제 그만 쉬었다가, 날씨 풀리는 봄에 해요.”
기호가 할아버지를 말렸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기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어김없이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처럼 사람 손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할아버지를 따라 윗마을로 간 기호의 눈은 화등잔처럼 커졌다. 윗마을 논은 움푹 파인 분화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떠냐! 기호야.”
기호는 말문이 막혔다. 아침 햇살을 받고 선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처럼 빛나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이제 저 곳에 연도 심고, 고기도 놓아 기르면서 우리 마을 농업용수로도 쓰고, 너희들이 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으면 수생생물들의 생태를 공부할 수도 있는 학습장이 되게도 할 테다.”
“할아버지 정말 대단해요! 혼자서 이 넓은 땅을 팠단 말이에요!”
기호는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우며 말했다.
“다행히 저 산 가까운 아래쪽에서 물이 샘솟는구나.”
시간이 지나자, 둠벙엔 물이 차기 시작했다. 봄비도 알맞게 내려주었다.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둠벙으로 가서 연도 심고, 수초도 곳곳에 심으셨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할아버지 바람처럼 둠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잔물결도 만들었고, 그 위로 잠자리도 날아다녔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오리 몇 마리가 날아들어 둠벙 이곳저곳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해를 거듭할수록 둠벙은 아름답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얼굴은 점점 야위어 가고 몸도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신 것 아니에요. 병원에 가 봐요!”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그러고 보니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가 집을 나간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동안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작은아빠 오시라고 할까요?”
“끄응….”
작은아버지라는 말에 할아버지가 돌아누우시며 앓는 소리를 내신다.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자 기호는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찾아 뒤적인다.
“작은아빠, 저 기호예요. 지금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세요. 빨리 내려오셔야겠어요.”
일요일 아침이었다.
몇 날 동안 대문 앞을 기웃거리던 기호를 보자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신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게서 며칠 동안 왜 그러누?”
그때였다.
“기호야!”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다. 순간 할아버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귀밑 볼이 불그레해졌다.
“창이 왔구나! 어서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 손을 덥석 잡아 끈다.
“아버지, 죄송해요.”
작은아버지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이제 작은아버지는 서울로 안 간단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둠벙을 가꾸겠단다. 아침부터 온종일 작은아버지는 둠벙으로 가서 일했다.
작은아버지 손길이 닿은 둠벙은 멋지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연꽃도 더 많아졌고, 부들이며 수초들도 더 많이 자라기 시작했다. 게다가 둠벙 가운데를 가로질러 직접 만들어 놓은 나무로 만든 구름다리는 둠벙을 찾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인기 최고였다.
‘작은 생태학습장 -둠벙 이야기-’
작은아버지는 둠벙에 팻말을 세웠다.
둠벙 들머리 정자에 걸터앉아 작은아버지의 바쁜 손길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할아버지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기호야, 저 둠벙은 네 것이기도 하다.”
기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둠벙 가운데에 우뚝 선 부들을 살랑대며 춤추게 하고 있었다.
*둠벙:둠벙은 물웅덩이의 방언으로서 우리 조상들이 가뭄에 대비해 농촌 곳곳에 만들어 놓은 작은 못으로, 한국형 습지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중심이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타인에 대한 배려엔 인색하기 그지없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호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와 나눠주기,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귀중함과 자연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있는 어른이다.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와는 반대로 요즘의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나눠주면서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 가까운 것에 대한 귀중함과 소중함들을 한번쯤은 되짚어보며 살아가자는 생각에서 기호의 할아버지를 통해 조금은 느리게 살면서 얻게 되는 삶의 기쁨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작가 약력
아동문학평론 ‘해님이 사는 마을’, 아동문예문학상 ‘지훈이와 할아버지’ 당선으로 등단. 제24회 새벗문학상 수상, 동화 ‘호수에 갇힌 달님’. 주요작품: 동화집 ‘내 이름은 아임쏘리’ 그림동화집 ‘도깨비 대장이 된 훈장님’ ‘동백꽃’ 외 다수. 현재 한라산학교 강사, 서귀포신문 동화연재 중, 제민일보 생활칼럼 집필진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