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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버지
    202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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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할머니·할머니·엄마 ‘3대 싱글맘’ 가족

    아이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 등 3대가 모두 ‘싱글맘’(배우자 없이 혼자서 자식을 기르는 여성을 이르는 말)인 특별한 가족이 영국 대중지 데일리메일에 소개됐다. 영국 뉴캐슬에 사는 주부 케일레이 왓슨(22)은 10대에 사라(4)와 엠마(2) 등 두 딸을 낳고 곧바로 남편과 이혼했다. 현재 케일레이는 홀로 아이들을 기르며,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 등 4대가 함께 모여살고 있다. 한지붕에 여자만 5명으로 이뤄진 케일레이의 가족에게는 독특한 사연이 하나 더 있다. 케일레이를 포함해 아이의 할머니인 폴린(48)과 증조할머니 제인 허친슨(79)도 모두 이혼으로 혼자가 된 싱글맘인 것. 케일레이는 “아버지나 할아버지 없이 자랐기 때문에 나는 빨리 아기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면서 “남편과 이혼한 뒤 보조금을 받으며 어렵게 두 딸들을 키우고 있지만 그래도 내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의 증조할머니인 제인은 대물림된 이혼의 아픔에 대해서 걱정했다. 제인은 “아버지 없이 아이를 기르는 건 외롭고 힘겨운 일”이라면서 “딸과 손녀가 나처럼 혼자되는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며 안타까워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http://twitter.com/newsluv)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5) 나주 상방리 호랑가시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5) 나주 상방리 호랑가시나무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오래된 과거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게 곧 역사라는 의미심장한 언술이리라. 대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우리의 살림살이에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사람 사는 곳 어디라 해도 옛사람들의 자취는 남아있고, 그 품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선인의 향기를 오래 간직하고자 애쓰기 마련이다. 옛사람이 손수 심고 키운 나무를 세심하게 돌보는 것도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짚어 보는 역사적 상징임에 틀림없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발적으로 의병을 모아 이순신 장군을 찾아간 우리 조상이 있었어요. 오득린이라는 장군이죠. 지략이 뛰어나서, 이순신 장군이 매우 아끼며 참모로 기용한 명장이에요. 그 할아버지가 왜군의 총탄을 맞고 할 수 없이 물러나서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일으켰어요.” ●마을을 일으킨 오득린 장군이 심어 나주 오씨 집성촌인 전남 나주 공산면 상방리 상구마을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오영선(54)씨의 이야기다. 오득린(吳得隣, 1564~1637)은 충무공의 참모로 활약하며,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이 전사한 뒤에도 끝까지 전투를 이끈 명장이다. 조근조근 들려주는 오씨의 이야기에는 마을 선조에 대한 자부심이 한가득 담겼다. “마을 서쪽으로는 숲이 울창한데, 반대쪽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서 조금 휑하게 보여요. 풍수를 보는 사람들은 좌청룡 우백호의 좌청룡이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을 일구며 오득린 할아버지는 마을의 동쪽 입구에 마을 숲이라 해도 될 만큼 많은 나무를 심으셨어요.” 원래 마을 동쪽 입구는 조릿대와 같은 낮은키 나무들이 덤불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쪽의 울창한 숲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장군은 이곳에 느티나무, 팽나무 등 크고 오래 자라는 나무를 골라서 심었다. 장군은 마을이 평화롭고,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숲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오씨는 덧붙였다. 그때 심은 나무 가운데 10여 그루가 아직 살아 있다. “마을 입구의 나무에서는 해마다 정월 그믐에 당산제를 지내요. 당산제 때는 당산나무 앞인 마을회관 마당에 100명 정도 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올리고, 음식을 나눠먹곤 합니다. 먹고 남은 음식은 저 나무 앞에 땅을 파고 잘 묻지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잖아요. 나무에도 좋은 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천연기념물 지정된 유일한 호랑가시나무 오영선씨가 가리킨 나무는 최근 천연기념물 제516호로 지정된 나주 상방리 호랑가시나무다. 잎 가장자리에 난 날카롭고 억센 가시가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고 해서 호랑가시나무라고 이름 붙인 나무다. 딱딱한 잎과 억센 가시가 특징인 상록성 나무로, 호랑이가 등을 긁을 때 쓸 만하다 해서, 호랑이등긁개나무라고도 부른다. 호랑가시나무는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 자생하는 나무로, 전북의 변산반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군락지도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 가까운 곳에서 자란 나무인데, 홀로 서 있는 독립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상방리 호랑가시나무가 처음이자 현재로서는 유일한 나무다. 키가 5.5m나 되는 이 나무는 호랑가시나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다. 어른 허리 높이쯤에서 줄기가 둘로 나눠지면서 동그랗게 자란 나무는 사나운 이름과 달리 부드럽고 착한 생김새를 갖췄다. 나무 바로 앞에는 오득린 장군의 기념비를 세워 나무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새겨볼 수 있게 했다. “겨울이 되면 빨갛게 맺히는 열매가 예뻐요. 꽃은 언제 피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데, 열매는 정말 좋아요. 열매를 맺으면 새들이 달려들어서 금세 먹어치우지요. 먹을 게 없는 겨울이라 그런지, 새들이 저 열매를 특히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네요.” 연한 황록색의 호랑가시나무 꽃은 모내기로 농부들이 가장 바쁜 5월쯤 피어난다. 또 잎겨드랑이에서 지름 7㎜ 밖에 안 되는 크기로 작게 피어나기 때문에 한창 모내기로 분주한 농부들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농사일이 줄어들어 한가해지는 겨울에는 상록성의 초록 잎 사이에 맺히는 빨간 열매가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굳이 농부가 아니라 해도 호랑가시나무는 열매가 인상적인 나무로, 흔히 성탄절 장식이나 카드의 그림으로 많이 쓰인다. 호랑가시나무는 은행나무처럼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어서 암나무에만 열매가 맺힌다. 상방리 호랑가시나무는 농한기에 농부들의 눈길을 빼앗는 암나무다. “열매 맺는 나무가 따로 있군요. 아, 그래서 마을회관 뒤에 있는 몇 그루의 호랑가시나무에서는 열매가 달리지 않는 거였군요.” 오영선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택시 운전을 하는 이 마을의 오생교(58)씨가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오다가 다가왔다. 영선씨와 사촌 간이라는 생교씨는 식사를 뒤로 미룬 채, 나무 이야기를 보태려고 영선씨 곁으로 바투 다가섰다. ●상여도 못 나가게 하며 지켜와 “지금도 적은 건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입구엔 나무가 많았어요. 어르신들이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말도 못 해요. 가지를 꺾으면 몸에 큰 병이 든다고 했죠. 또 초상집에서 나가는 상여도 그랬고, 혼례를 치른 신랑 신부도 이 나무들 사이로는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니까요.” 400여년 전에 마을을 일으킨 선조가 심은 호랑가시나무 앞에서 이루어진 봄날 한낮의 나무 이야기는 그러고도 계속 이어졌다. 나무 이야기라고는 했지만, 나무의 생육 정보보다는 나무를 대하는 옛사람들의 마음으로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다르지 않았다. 나무를 통해 이어간 사람살이의 작은 역사, E H 카의 이야기처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였다. 글 사진 나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길섶에서] 백발/박홍기 논설위원

    백발에 가깝다. 흰 머리카락이 검은 것보다 많다. 마음과 상관없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역력하다. 굳이 백발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염색이 좋을 것도 없고 해서 그대로 지낼 뿐이다. 한데 남의 눈은 다른 모양이다. 솔직히 신경 쓰이게 한다. 머잖아 오십이 되건만 아직도 남의 시선을 뿌리치지 못하는 탓인 듯하다. 언젠가 지하철을 탔을 때 젊은이가 “여기, 앉으세요.”하며 일어서는 게 아닌가. 순간 두리번거리는 척하려다 “괜찮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이럴 수가, 머리만 희끗할 뿐인데….” 황당했다. 그 후에도 두어번 지하철에서 ‘착한 젊은이’들을 만났다. 한번은 약국에 들렀을 때 바로 옆에서 의자를 오르내리며 장난치던 한 꼬마의 아버지가 하는 말, “할아버지 귀찮게 하면 안 돼.” “할아버지라니….” 흰 머리와 나이를 연결 짓는 문화라지만,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을 때 헛웃음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본다. “염색으로 변신을 꾀해 봐?” 그러다 바꾼다. “일단 그대로 살면서 나잇값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낫지.”라고.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어린이날 노래’ 작사가이자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 동시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년)이 때아닌 ‘고향’ 논란에 휩싸였다. 법정 공방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논란은 윤석중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에서 불거졌다. 노경수 한서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지난해 말 펴낸 ‘동심의 근원을 찾아서-윤석중 연구’에서 윤석중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향’의 정서는 충남 서산 지역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자신의 단국대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심화시킨 결과물이다. 윤석중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두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외조모 밑에서 잠시 크기도 했고, 젊은 시절 부친이 거주하던 서산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①태어나서 자란 곳 ②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③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보기에 따라 윤석중의 ‘고향’은 서울도, 서산도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노 교수는 “시골과 고향을 노래한 윤석중 작품을 살펴보면 그의 고향은 서산을 가리키며, 서산은 향수의 공간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 예로 ‘서울 사는 아이야/ 시골 왜 왔니?/시골 바람 맑은 바람/쐬고 싶어 왔단다’(‘서울 사는 아이야’ 중) 또는 ‘시골 사는 아이들은/몇 갑절 저보다 큰/나뭇짐도 잘 지고’(‘시골 사는 아이’ 중) 등의 시구를 든다. 하지만 유족들은 이에 거세게 반발한다. 윤석중의 장남 태원(미국 거주)씨는 “아버지는 일본 도쿄 유학 생활을 제외하고 80여년 동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했다.”면서 “(아버지의) 정신적 고향이 서산이라거나 향수에 관련된 많은 작품이 서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법정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이에 대해 문단은 아동문학계에서 차지해 온 윤석중의 독보적 위치를 감안할 때 ‘고향’ 논란은 이해가 가지만 법정 공방까지는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그 이면에는 윤석중의 아픈 개인사가 있다. 윤석중의 부친 윤덕병(1885~?)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소속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세 차례나 투옥됐던 민족주의계열 좌익 지식인이었던 것. 1930년대 초 윤덕병은 사회 활동을 접고 사별했던 전처(윤석중의 모친)가 남겨준 땅이자 윤석중의 외가인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46번지’로 내려와 은거하다 한국전쟁 때 좌우익 대립 속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유족들은 아직까지 윤덕병의 유골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노 교수는 “윤석중의 작품 이면에는 좌익계열이었던 부친을 한국전쟁 때 잃은 뒤 동심주의, 낙천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 체험, 반공주의와 연좌제가 서슬 퍼렇던 시대적 배경이 있다.”면서 “서울에서 태어나고 주로 활동했을지라도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외조모와 부친이 있었던 서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중 전기를 썼던 신현득(78) 새싹회 전 이사장은 “할아버지로 인한 불편한 기억 때문에 유족들이 아버지 윤석중과 할아버지 윤덕병, 그리고 서산과의 인연이 새삼 거론되는 것 자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노 교수의 책이) 윤석중에 대한 일각의 일방적 비판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대목 등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윤석중에게는 ‘거목’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일제 치하 현실에 순응하려는 동심주의와 그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낙천주의를 앞세워 아이들의 정서를 박제화시켰다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노 교수는 “겉으로 드러난 윤석중의 작품 세계는 동심주의적 정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초기 작품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한 민족주의적인 색채와 일제 수탈에 대한 저항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조선아들행진곡’에서는 ‘피도 조선 뼈도 조선/이 피 이 뼈는/살아 조선 죽어 조선/네 것이라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1929년에 쓰인 ‘허수아비야’는 ‘허수아비야…/ 여기 쌓였던 곡식을/누가 다 날라 가디?/…/넌 다 알 텐데/왜 말이 없니?/넌 다 알 텐데 왜 말이 없니?’라며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현실을 상징과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나와 통일] (5) 하임숙 한동대 4학년

    [나와 통일] (5) 하임숙 한동대 4학년

    나와 친구들은 지난달 서울 인사동의 가나 아트스페이스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 전시회에는 12일 동안 무려 2만 5000여명이나 다녀갔다. 예상치 못했던 뜨거운 반응이었다. 지난해 교내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반응이 좋아 ‘서울에서도 한번 해 보자’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정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왜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전시를 기획한 나조차도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 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가 없었던 것이었다. 관람객들 가운데는 20~30대의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잔인한 내용인데도 거부감 없이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끔찍한 수용소의 실상을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전시장을 나갈 때에는 북한 인권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전시장을 두세번씩 들른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는 연인 한쌍이 전시장을 다시 찾아왔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방명록을 쓰고 있는데, 그 전에 함께 들렀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너희도 다시 왔구나. 그럴 줄 알았어.”라면서 공감이 확산되는 것을 여러 차례 목도했다. 시기적으로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 것 같다. 통일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나는 통일 문제는, 경제적 이득이나 기회비용을 떠나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는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따라 흘러간다고 본다. 같은 민족, 가족, 형제로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 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양의 특권층 3000명은 잘먹고 잘살지만, 북한 주민들의 삶은 정말 처참하다. 탈북에 한 차례 실패해 북송 집결소에 있었던 언니 또래 여인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내 또래 20대 가운데에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 친구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통일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이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세대는 민주화를 위해, 할아버지 세대는 산업화를 위해 인생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이념적으로 대립했을 수 있고 서로에 대한 상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위 세대들이 이뤄 놓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세대다. 북한과 정치적으로 엮이지 않고, 아픔도 없기 때문에 통일을 준비할 수 있는 세대다. 당연히 의견은 진보, 보수가 나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진보, 보수가 같이 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통일이 바로 그런 문제라고 생각한다. 통일 이후의 정책을 세우는 데에는 가치관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우리 세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어려운 북한 주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 가치가 아닌가. 나는 남한이 주도해 통일을 이뤄 나갔으면 한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의 성공과 실패는 너무나 분명하게 나뉘었다. 남한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공을 이뤘다. 서독이 동독과 통일을 할 때 자신감이 있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주도적으로 통일을 이뤘으면 한다. 남한은 이제 보편적인 행복은 퍼져 있는 사회다. 그런 행복을 북한 사회와 나눴으면 좋겠다. 북한 인권을 얘기할 때 미국의 노예 해방을 많이 얘기한다. 노예 해방 문제는 남북전쟁을 일으킬 만큼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었다. 그러나 노예 해방이 이뤄진 후에는 평등, 자유가 보편적 가치가 됐다. 통일도 그렇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떤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해 줬으면 좋겠다. ●약력 ▲24세 ▲한동대 산업정보디자인 학부 4학년·국제기업가정신 전공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세이지’ 학회장
  • [독거노인 사랑잇기] (1)벼랑 끝에 선 노인들 ④사랑 잇는 전화 참여한 국민연금공단

    [독거노인 사랑잇기] (1)벼랑 끝에 선 노인들 ④사랑 잇는 전화 참여한 국민연금공단

    전국의 독거노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안부 전화를 하는 ‘사랑의 메신저’ 전화 상담원들은 “보람 있는 일이지만 연중 한두번이라도 서로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친근한 관계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피력했다. “할머니, 오늘은 별일 없으셨죠?” “전화도 좋은데, 언제 한번 강원도로 놀러 와요.” 지난 18일 서울 논현동 국민연금공단 강남지사의 상담원 하지인씨는 강원도에 거주하는 한 독거노인과의 통화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하 상담원이 담당하는 독거노인은 강원 고성군에 사는 전춘선(83) 할머니. 하 상담원은 전 할머니 등 2명의 홀로 사는 노인에게 매주 2~3회 정기적으로 안부전화를 하고 있다. 1월 31일부터 보건복지부와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의 ‘독거노인 사랑잇기-사랑 잇는 전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318명의 국민연금공단 상담원들은 강원 지역 독거노인 648명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안부전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화 주제 1위는 ‘날씨’ 대상 노인이 대부분 강원 지역에 거주하다 보니 통화 내용에서도 지역색이 자연스럽게 배어난다. 국민연금공단 대구지사 조금숙 상담원과 통화하는 권오운(71·강원 태백시) 할아버지는 교통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권 할아버지는 “사는 곳이 엄청 오지인데, 교통이 불편해 10리나 떨어져 있는 경로당까지는 갈 엄두도 못 낸다.”면서 “무엇보다 늘 식수가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권 할아버지는 “상담원하고 이런 말이라도 하니 그나마 속이 시원하다.”고도 했다. 큰 눈이 자주 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날씨와 안전 얘기가 통화의 화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난 2월 폭설 때 지역에 피해는 없었는지, 건강에 별 문제는 없는지 등이 주된 상담 내용이었다. 하 상담원은 “강원도는 서울과 날씨가 다른 날이 많다.”면서 “상담 전에 강원 지역 날씨를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다.”고 말했다. 또 “앞으로 사랑 잇는 전화 사업에 계속 참여하게 되면 계절별로 노인들이 겪는 문제와 바라는 점 등에 대한 사전 지식도 많이 쌓일 것”이라며 사업의 지속성에 기대감을 표했다. 상담원들은 ‘사랑 잇는 전화’를 두달가량 진행하면서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고 전했다. 바로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한계다. 늘 목소리로만 소통해야 하니 노인과 교감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 노인들이 고령에 난청인 경우가 많아 상세한 상담이 다소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 상담원은 “1년에 한두번은 직접 찾아뵙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독거노인이 거주하는 해당 지역에서 안부전화를 하면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노후 책임지는 ‘평생 월급’ 국민연금공단은 ‘사랑 잇는 전화’를 비롯해 국민의 노후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60~75세 연금 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긴급 생활자금 대출사업을 추진한다. 생활이 어려운 연금 수급자의 생활비와 의료비 등 긴급자금을 대여해 위기 노인들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긴급자금 대여사업을 통해 2년간 최대 500만원까지 빌려주게 된다. 수급자는 5년에 걸쳐 원리금을 연금에서 균등 분할해 갚으면 된다. 이 사업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자는 3년간 1만 8000명으로 900억원의 자금을 빌려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국민연금공단 측은 밝혔다. 미래가 막막할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직원들이 보험료를 지원하는 사례도 노후 사각지대 해소에 나선 공단의 대표적인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보험료 납부가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232명의 가입자에게 1억 4500여만원의 보험료가 지원돼 수급자 89명이 노령연금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는 “다른 사회 공헌 활동처럼 이번 사랑 잇는 전화 사업도 연금공단의 대표적인 나눔 활동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면서 “지금의 정기적인 안부전화 사업이 정착되면 상담원들이 직접 노인들을 찾아뵙는 봉사활동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안석기자 ccto@seoul.co.kr
  • 서울 ‘무료 노인법률 서비스’ 결실 잇따라

    #사례1 딸이 5개월 전 교통사고로 사망해 슬픔에 빠져 있던 김모(74) 할아버지. “딸이 빌려간 돈을 갚으라.”는 낯선 이의 협박 전화에 줄곧 시달려 왔다. 김 할아버지는 시립 은평노인종합복지관에 무료 법률상담을 요청해 변호사로부터 “딸의 채무에 보증을 서지 않았기 때문에 김 할아버지가 딸의 빚을 갚을 필요가 없고, 계속 독촉 전화가 오면 경찰에 협박죄로 신고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사례2 노후를 위해 작은 평수의 다세대주택 한채를 월세로 내놓은 송모(80) 할아버지는 세입자가 월세도 주지 않고, 집을 비우지도 않아 속을 썩였다. 법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시립 강서노인종합복지관의 무료 법률상담을 통해 1심 재판에서 승소했다. 서울시가 19개 시립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시행 중인 ‘무료 법률상담서비스’가 5개월 만에 정착돼 가고 있다. 이 서비스는 이제까지 민원인이 시 청사까지 찾아와 상담을 해야 했던 것을 변호사가 직접 노인종합복지관으로 찾아가 1:1 대면 상담을 하는 방식이다. 각 분야의 전문 변호사 345명이 복지관별로 월 1회 상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상담 횟수와 시간은 탄력적이다. 이제까지 320여명의 노인들이 무료 법률상담서비스를 이용할 정도로 호응도 높다. 주요 상담 내용은 사소한 채권·채무 문제부터 상속, 임금 체불 등 다양하다. 상담을 원하면 복지관에 문의해 미리 상담 일정을 정하고, 예약일에 복지관 상담실을 방문해 변호사와 대면 상담할 수 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출발 드림팀 시즌2(KBS2 일요일 오전 10시 35분) 매회 웅장한 스케일과 스릴 넘치는 종합 장애물 5종 경기를 선보이고 있는 ‘출발드림팀2’가 이번에는 드림팀 종합장애물 경기 사상 최초로 남녀선수가 함께 도전하는 커플장애물 6종경기를 펼친다. 우여곡절 끝에 선정된 10팀의 커플 중 과연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커플 왕좌를 차지할 주인공은 어느 팀이 될까. ●학자의 고향(KBS1 일요일 오전 7시 20분) 송시열이 유배되었던 제주도 글씐바위에는 그의 한이 담긴 글이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왕조 500년 중 가장 혼란했던 17세기에 살았던 우암 송시열. 그는 당쟁의 중심이자 18세기 조선 성리학의 초석이기도 했다. 그의 유배 흔적이 묻어 있는 그가 은거했던 화양동의 아름다운 절경과 그의 사상, 삶을 들여다본다. ●주말특별기획 드라마 욕망의 불꽃(MBC 토요일 밤 9시 50분) 태진이 있는 별장을 찾아온 나영은 민재를 설득해 데려가려 하지만 민재는 할아버지처럼 살겠다고 거절한다. 밤늦게 다시 태진의 별장으로 찾아온 나영은 어린 날 자신이 보았던 지옥 같은 장면들을 이야기하며 죗값을 치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나영은 태진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것이 알고싶다(SBS 토요일 밤 11시) 1990년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던 아동범죄의 피해 아동들. 사건 후 부모 품으로 돌아갔던 그들은 잘 지냈을까. ‘추적 사건과 사람들’에서 방송돼 큰 화제를 모았던 서커스 소녀 심주희양과 아버지가 보험금 때문에 아들 손가락을 잘랐던 사건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현재 모습을 살펴본다. ●사랑을 믿어요(KBS2 토요일 밤 7시 55분) 윤희는 우진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셔츠를 선물로 사지만 우진이 아이들을 야간 업소에서 노래 부르게 한 줄로 착각하고 미사리 공연장까지 쳐들어간다. 우진은 자신을 오해한 윤희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윤희는 울음을 터트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한편 승우는 혜진의 재능과 일에 대한 기회들을 하나씩 마련해 준다. ●반짝반짝 빛나는(MBC 일요일 밤 8시 40분) 정원은 금란에게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자고 말한다. 그런 금란은 평창동 집에 가서 나희와 함께 자신이 살게 될 방을 꾸미고 정원의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지웅처럼 편집일을 배우게 될 거라고 선언한다. 한편 금란은 승준에게 앞으로 연락해도 되느냐고 묻고, 정원은 승준과 함께 있는 금란의 모습을 보게 된다. ●SBS스페셜(SBS 일요일 밤 11시) 규모 9.0의 일본 역사상 최악의 대지진이 벌어졌다. 대형 쓰나미와 원전 폭발까지 이어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누군가의 집과 학교와 회사가 사라졌다. 쓰나미가 몰려와 손써 볼 틈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 둔 채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현장을 찾아가 본다.
  • ‘히어애프터’ 개봉으로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인생

    ‘히어애프터’ 개봉으로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인생

    ‘올해 나이 여든하나!’ MBC ‘무릎팍도사’의 개그맨 유세윤 버전으로 그렇다. 그런데 이 ‘사내’-2008년작 ‘그랜토리노’의 고집불통 참전용사를 떠올리면 할아버지란 표현은 맞지 않는다-는 지칠 줄을 모른다. 환갑을 넘긴 1990년 이후 감독으로 전성기를 맞았고, 19편을 연출했다. 다작이면 작품 수준이 들쭉날쭉할 법한데, 그렇지도 않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으로 오롯이 두 시간을 끌고 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얘기다. 그의 신작 ‘히어애프터’(Hereafter)가 24일 개봉했다. 1960년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스파게티 웨스턴’(이탈리아에서 만든 서부영화) 3부작-황야의 무법자·석양의 건맨·석양의 무법자-의 총잡이와 1970~80년대 ‘더티 해리’ 시리즈의 망나니 형사가 어떻게 거장이 됐는지 56년 영화인생을 더듬어 봤다. ●선악이 모호한 총잡이와 무대포 형사 1955년부터 B급 영화의 단역으로 나서던 그가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1959년 CBS 서부연속극 ‘로하이드’였다. 주인공 로디 역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때문인지 감독이던 토마스 카는 “게으르다. 한 번도 촬영 시작을 같이한 적이 없다.”고 뒷담화(?)를 남겼다. ‘로하이드’의 인기가 쇠할 무렵 기회가 왔다. 무명에 가깝던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원제:A Fistful of Dollars)였다. 이때가 1964년. 레오네 감독은 찰스 브론슨, 제임스 코번을 원했는데 거절당했다. 이스트우드는 “모두에게 친절한 영웅에 신물이 나던 찰나였다. 안티 히어로가 될 때임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저예산 스파게티 웨스턴 3부작은 흥행은 물론,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판초를 뒤집어 쓰고 시가를 씹어대는 고독한 카우보이는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정통 서부극의 영웅과는 정반대 지형에서 관객의 뇌리에 각인됐다. 1970~80년대는 ‘더티 해리’ 5부작과 보냈다. 샌프란시코의 강력계 형사 해리 캘러헌이 법망을 피하는 악당들을 매그넘44 권총으로 단죄하는 이 영화는 ‘파시스트적인 폭력’이란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관객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전성기에도 그의 연기에 대해 “뻣뻣한 나무 막대기” “얼굴 찌푸리고 서 있는 것 외에 할 줄을 모른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연기는 고함치고, 울부짖고, 감정을 쥐어짜는 게 전부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감독 20년 만에 거장 반열 경력이 쌓이면 카메라의 뒷사정이 궁금해지는 모양. ‘더티 해리’ 돈 시겔 감독의 연출 권유에 솔깃해진 그는 1971년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찍으면서 제작사 맬파소프로덕션을 차렸다. DJ와 스토커를 다룬 데뷔작은 흥행은 물론, ‘소름 끼치는 스릴러이자 아름다운 음악영화’란 호평을 얻았다.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것은 20년이 지난 뒤. 악명을 떨쳤던 무법자가 은퇴 이후 조용히 살려고 하지만, 악덕 보안관과 피할 수 없는 대결에서 결국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의 ‘용서받지 못한 자’로 1992년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쓸었다. 배우 출신으로는 5번째 감독상 수상. 2005년에는 30대 여성복서와 늙은 트레이너의 ‘유사 부녀’ 관계를 다룬 ‘밀리언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또한번 거머쥐었다. 필름 바깥의 삶도 흥미롭다. 1952년 공화당원이 됐고, 68·72년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지원했다. 하지만 한국·베트남·이라크전에서 미국이 ‘세계의 경찰’인 척하는 것은 질색했다. 스스로는 “리버테리언”(자유지상주의자)이라고 말한다. 1986~88년 카멜시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중소기업과 환경 보호에 힘썼다. ‘아름다운 보수주의자’란 수식어가 붙었다. ●‘히어애프터’는 어떤 영화 기획자로 나선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협업으로도 화제를 모은 ‘히어애프터’(12세 이상 관람가)는 사후세계를 다룬다. 영혼과 대화하는 심령술사 조지(맷 데이먼)와 쓰나미에 휩쓸려 죽다가 살아난 여기자 마리(세실 드 프랑스), 모든 걸 의지했던 쌍둥이 형을 잃은 마커스(프랭키 맥라렌)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한발짝 물러서 관조한다. 죽음의 위험이 일상화된 세상에서도 결국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란 메시지를 던진다. 이스트우드는 “저 세상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저마다 믿는 바는 있지만 모두 가설일 뿐이다. 가 봐야 아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영화 속 사후세계의 영상은 평화롭다. 노감독은 죽음마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25일 TV 하이라이트]

    ●TV 미술관(KBS1 밤 12시 10분) ‘아트데이트’에서는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함께 최북단 비무장지대(DMZ)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경기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7번째 ‘희망의 벽’을 설치한다. DMZ 분단선에 인접한 대성동 초등학교 아이들의 꿈을 통해 절망의 선이 희망의 선으로 변하길 바라는 강익중, 그의 작품 세계를 함께 만나 본다. ●VJ특공대(KBS2 밤 10시) 폐업 위기에서 가격 파괴로 승부수를 던진 가게들이 있다. 강원 강릉시의 초호화 리조트 부럽지 않은 펜션에서는 매주 화요일마다 1인 9900원의 특가 식사를 제공한다. 화요일 숙박 시엔 황토 찜질방, 노래방, 노천탕까지 무료라는데…. 비수기에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가격 파괴 풀 서비스로 대박 행진을 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가 본다. ●MBC 파워매거진(MBC 밤 6시 10분) 꽃집 아가씨는 깃털처럼 가볍다, 청초하다,라는 편견을 무참히 깨는 인천의 한 주부가 있다. 화분에 물을 주고 예쁘게 꽃꽂이를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축구 생각뿐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직접 체험할 기회는 흔치 않다. 남성 못지않게 그라운드를 누비며 열의에 불타오르는 ‘레이디 사커’를 만나 본다.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SBS 밤 8시 50분) 38살 나이 차이로 아버지뻘인 89세 할아버지를 남편으로 맞이한 여자의 러브 스토리. 여자는 남편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지금의 남편이 여자에겐 인생의 스승이자 모든 걸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데…. 10년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던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인생 후반전(EBS 밤 10시 40분) 책으로 세상을 꿈꾸는 남자 강수걸씨. 부산 토박이인 그는 10년째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지역에 작은 출판사를 차렸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은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고, 마침내 대학 시절부터 꿈꿔 온 출판사를 열게 된다.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는 그의 특별한 인생 후반전 이야기를 함께해 본다. ●명불허전(OBS 밤 10시 5분) 시사만화가 박재동 교수의 진행으로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 인간문화재인 우봉 이매방 선생의 77년 춤 인생을 들여다본다. 국내에서 두 종목 인간문화재는 그가 유일하다. 전통 춤의 계승과 더불어 한국 춤 형태를 과학적으로 재정립한 춤꾼이자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전통 춤의 가교이기도 하다.
  • 송재호·윤소정 “갈 길 머잖은 노년의 사랑 더 순수”

    송재호·윤소정 “갈 길 머잖은 노년의 사랑 더 순수”

    요즘 극장가에 조용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그대를 사랑합니다’(이하 ‘그대사’)이다. 지난달 17일 개봉한 이 영화는 소리 소문 없이 스크린을 장악하더니 마침내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21일 현재 누적관객은 103만여명. 미국 아카데미 수상작과 블록버스터 공세 속에서도 주말 박스오피스 4위를 지키고 있다. 뒷심의 원동력은 입소문. ‘돌풍의 주역’인 송재호(72)와 윤소정(67)을 만나 ‘그대사 신드롬’과 ‘노년의 사랑’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눠 봤다. ●그레이 로맨스 할리우드 공세 막아 →‘그대사’는 김만석(이순재·76), 송이뿐(윤소정), 장군봉(송재호), 조순이(김수미·60) 네명의 황혼 순애보를 그린 영화다. 주연배우 네명의 평균 나이가 68.8세다. 젊은 톱스타나 화려한 볼거리도 없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같은 제목으로 인기리에 연재된 만화가 원작이지만 원작자인 강풀의 만화 가운데 영화로 성공한 작품이 별로 없어 크게 흥행을 예상하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강풀 징크스’를 깨고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윤소정(이하 윤) 일단 영화가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다. 솔직히 요즘 너무 난폭하고, 자극적이고, 악만 남은 영화가 많지 않았나. ‘그대사’는 보고 나면 여운이 남고 좋은 기분을 오래 가져갈 수 있는 영화다. 험한 영화를 보면 꿈자리가 사나운데, ‘그대사’는 꿈까지 행복하게 꾸게 만든다. 송재호(이하 송) ‘그대사’의 ‘까도옹’(까칠하고 도도한 할아버지) 순재 형님이 ‘만추’의 현빈을 눌렀다는 얘기를 듣고 희망을 가졌다.(웃음) 생각만큼 홍보를 많이 못해 아쉬웠는데 관객들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후폭풍을 타면 롱런할 수밖에 없다. 내가 출연한 영화 ‘해운대’, ‘살인의 추억’ 등의 관객수를 모두 맞혔는데 ‘그대사’는 650만명을 예상했다. →우유를 배달하는 까칠한 할아버지 만석과 폐품을 수집하지만 따뜻한 미소가 아름다운 할머니 이뿐. 치매에 걸렸어도 남편의 사랑만은 잊지 않는 할머니 순이와 그런 아내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로맨티스트’ 군봉. 이 두 커플이 보여주는 노년의 사랑은 젊은이들의 사랑처럼 감각적이거나 요란하지 않지만 더 큰 설렘과 울림을 준다. 윤 사랑이란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찾아와 설레고 아무 조건 없이 서로 좋아하는 것인데, 요즘엔 사랑이라는 포장에 계산이 다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 거품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들이 사랑하면서 그런 조건을 따지겠나. 그러니까 더욱 순수하게 느껴지는 거다. 송 노년의 사랑은 생김새나 재력, 사회적 지위를 다 떠나서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 아닐까.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생각하는 그게 진짜 사랑인 거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의 속박을 받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강요하지 않아도 흐르는 눈물 →오롯이 실버 세대를 주인공으로 한 본격적인 상업영화는 ‘그대사’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송 맞다. 그동안 노인들이 영화 주변부에 놓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주인공 삼은 영화는 처음인 듯싶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가 더 잘됐으면 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들의 사랑은 분명 젊은이들과는 다르다. 노인들의 사랑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가슴 아프고 멋지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윤 영화에 만석 할아버지가 이뿐 할머니의 리어카에 우유팩을 얹어주고 신나하는 장면이 나온다. 별 장면 아닌데 찍으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장면이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노년의 사랑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군봉과 순이 커플이 보여주는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사랑, 만석과 이뿐 커플의 죽음 앞에서 절제하는 사랑. 이 두 사랑은 관객에게 진정한 사랑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데. 송 사랑은 서로에 대한 희생과 봉사라고 생각한다. 배우자는 인생의 반려자라고 하지 않나. 군봉의 입장에서는 전혀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고자 한 거다. 윤 늘그막에 어렵게 찾아온 사랑을 두고 뒷걸음질치는 이뿐을 답답하다고 하는 분도 있는데, 젊은 애들처럼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꼭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론 절제하고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사는 것도 필요하다. 이뿐은 평생 소외되고 자신감 없는 삶을 살아 온 이다. 만석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하면서도 발에 안 맞는 꽃신처럼 그 사랑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다. ●결혼생활 40~50년… 현실 속 사랑은? →실제 삶에서 두분의 사랑은. 송 아내가 첫사랑이다. 결혼한 지 벌써 50년이 넘었다. 군봉의 사랑에 더 공감한 까닭도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집사람이 젊었을 때 고생한 얘기 하는 것을 싫어해서 지금도 토크쇼에 일절 나가지 않는다. 배우 생활 하면서 본의 아니게 스캔들에 휘말린 적도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50년째 누구보다 견고하고 튼튼한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윤 지난달 28일이 결혼 43주년 기념일이었다(윤소정의 남편은 배우 오현경이다). 그런데 그런 날만 되면 꼭 싸우게 되더라고.(웃음) 사랑은 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부부는 서로에 대한 약속이다. 이 나이 되면 신뢰와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대사’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는 사람이 많지만 영화는 결코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연기하면서 힘들지는 않았나. 윤 남편(오현경)이 이 영화를 두번 봤는데, 실제 윤소정의 모습이 영화에 나온다고 하더라. (서구적인) 외모 때문에 번역극에 많이 출연했고, 그로 인해 카리스마가 많이 부각됐지만 실제 윤소정은 영화 속 이뿐처럼 지극히 한국적인 여자다. 집에서 바느질과 토속 음식을 즐기고, 사고도 아주 고지식하고.(웃음) 송 또래의 삶과 사랑이라 연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추창민 감독과는 처음 작업하는데, 영화의 맛을 아는 아주 똑똑한 ‘여우’다. 배우는 언제나 선택을 받는 직업이지만,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는 두 사람. 어쩌면 노년의 사랑이란 이들의 모습처럼 겸허한 삶의 자세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저 혼자 어르신 36명 돕지만 오히려 제 마음이 따뜻해져요”

    “저 혼자 어르신 36명 돕지만 오히려 제 마음이 따뜻해져요”

    “어르신을 보살피면서 제 마음이 오히려 따뜻해집니다.” 20일 ‘홀몸 어르신 돌보미’로 뛰는 남정욱(사진 왼쪽 두번째·45·여·서울 관악구 남현동)씨는 이렇게 말하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보라매동 726-3 시립관악노인복지관 3층에서 만난 그는 동료 도우미들과 나란히 앉아 일과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남씨는 2008년 6월 정부에서 도우미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자마자 뛰어들어 벌써 4년째 접어들었다. 남씨는 관악구청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다가 홀로 지내는 노인들을 찾아가 필요한 서비스를 하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는 “딱하게 여기던 차에 일종의 행운이었다.”며 웃었다. 가족을 뒀는데도 마음껏 돕지 못하는 마당에, 연고도 없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팔을 걷어붙이기로 결심했다. 무작정 돕겠다고 나서면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노인들의 심리 파악과 웃음치료와 같은 대처방법 등에 대한 전문교육을 오전 9시~오후 6시 한달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어르신은 박해만(왼쪽 세번째·71·인헌동) 할아버지라고 했다. 시각장애 6급으로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왼쪽 눈이 불편한 어르신이다. 무엇보다 딱한 사정이 남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추위가 몰아닥치기 시작하던 2009년 초겨울 할아버지를 만났다. 수도 시설은 둘째치고 화장실도 없어 이웃집을 전전하거나 적잖게 떨어진 고시원을 이용하고 있더라며 당시의 안타까움을 전했다. 남씨는 “우리 집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어렵게 살아가는 어르신도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알았다.”면서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돕겠다는 얘기를 꺼내자 처음엔 할아버지가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힘들었다고 했다. 남씨는 “혼자서 어르신 36명을 돌봐야 해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는 전국 노인복지관 평균 수준이다. 두살 터울의 남매를 둔 남씨는 “첫째인 아들이 올해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TV 하이라이트]

    ●인간극장(KBS1 오전 7시 50분)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요즘 시대 애국자 소리를 듣는 부부가 있다. 전남 담양 시목마을에서 소문난 7남매를 키우고 있는 결혼 15년차 나정채, 김영미 부부.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돌보고 엄마 대신 어린 동생들을 챙기며 아빠의 농사일을 돕는 감나무골 남매들. 서로 마주만 보아도 웃음이 나는 7남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본다. ●위기탈출 넘버원(KBS2 밤 8시 50분)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사랑스러운 내 아이. 하지만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되면 독이 되는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충치가 있는 부모님의 신체 접촉으로 인해 옮을 수 있는 충치균이다. 충치균이 옮을 수 있는 경로와 실험을 통해 문제점을 제시하고 예방법을 알아 본다. ●짝패(MBC 밤 9시 55분) 집 안에 숨겨둔 강 포수의 총을 찾으러 간 도갑은 맹돌 일행에게 부상을 당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천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봉놋방에 장꼭지 내외를 숨겨준 사실을 알게 된 동녀는 그들을 내보내려 하지만 천둥은 그럴 수 없다며 다툰다. 한편, 민 도령 앞에 나타난 귀동은 보잘 것 없는 활솜씨를 보이며 활쏘기 내기를 할 것을 제안한다. ●재미있는 퀴즈클럽(SBS 밤 8시 50분) 새로운 형식의 퀴즈 버라이어티로 소소한 웃음을 주는 난센스 퀴즈부터 마지막까지 시선을 뗄 수 없는 반전형 사진과 동영상 퀴즈까지, 다양한 유형의 퀴즈를 오직 재치로 풀어야 한다. ‘재미있는 퀴즈클럽’은 기존의 컨셉트를 살리되 웃음을 통한 소통이라는 취지를 보완해 좀 더 강력한 웃음으로 찾아간다. ●다큐10+(EBS 밤 11시 10분) 참다랑어는 번식기가 되면 대서양에서 지중해의 따뜻한 물로 이동 후 짝을 짓고 산란한다. 산란이 끝나면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의 관문인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다시 대서양으로 돌아간다. 번식기에 다랑어들이 좁은 해협으로 몰리는 것을 아는 포식자들은 다랑어들이 지나는 길목에 몸을 숨긴 채 다랑어 무리의 출현을 기다리는데…. ●경찰25시(OBS 밤 11시 5분) 배로 국내와 해외를 오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국제여객터미널. 그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불법으로 국내에 밀수품들을 들여오고 있다. 중국에서 마약을 입수한 용의자는 남녀 각각 한 명씩으로 그들이 마약을 갖고 들어오는 방법은 충격적이다. 군산 해양경찰서에서 불법으로 밀수품을 갖고 들어오는 현장을 덮친다.
  • 허달재 매화도는 다르다

    허달재 매화도는 다르다

    외로운 가지 하나 덩그러니 있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나뭇결도 거칠다기보다는 허벅허벅하니 푸근하다. 포인트처럼 찍히는 화려한 꽃송이도 없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가지와 꽃이 만발한 모양새다. 사군자 가운데 매화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꽃이다. 해서 대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모양새로 그려진다. 허나 ‘심조화 화조심’(心造畵 畵造心)이란 이름이 붙은 직헌(直軒) 허달재(59)의 매화는 정반대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격조도 중요하지만 시대상도 중요하지요. 컬러를 쓰고 풍성한 것은 그런 현대 사회의 심상이 투영된 게 아닐까요.” 허 작가는 남종화(南宗畫·중국 명나라 때 막시룡 등이 일으킨 화풍으로 장식적인 북종화와 달리 수묵과 담채 위주의 문인화를 중시)의 대가로 꼽히는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의 장손이다. 그럼에도 현대적 변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기초적인 작업방식에서 할아버지를 떠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림까지 할아버지처럼 그리는 게 계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림 크기도 실용적이다. 병풍 모양으로 제작한 작품들도 있는데, 소파나 침대, 사무실 뒤편에 두고 쓸 수 있도록 그림 높이를 현대적으로 조절했다. 4월 25일까지 서울 명동 롯데갤러리. (02)726-4429.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길섶에서] 도그마/김성호 논설위원

    ‘이번 정차할 역은 성내역입니다.’ 사라진 성내역이란다. 지하철 2호선 객차 속 안내방송이 생뚱맞다. 역명이 잠실나루역으로 바뀐 지 반년이 지났는데. 귀에 콕 박히는 성내역의 느닷없는 부활이 혼란스럽다. 내처 육성으로 흐르는 정정방송. ‘잠실나루역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기관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왠지 반갑다. 망각의 작용은 참 편리하다. 성내역에서 바뀐 이름 잠실나루가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었다. 안내방송 때마다 생경하고 듣기 거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성내는 자연스럽게 잊혔고, 이젠 귀에 거슬리는 이름이 되었으니. 말 그대로 살게 마련인가 보다. 아니, 빠른 전환의 흐름에 익숙한 탓일까. 그 순치의 속도가 놀랍다. 저기 그 노인이 또 보인다. 매일 아침 맞닥뜨리는 ‘좌측통행’ 할아버지. 이젠 오른쪽 걷기가 널리 퍼져 자리잡았는데. 마주치는 이들에게 화까지 내가며 좌측통행을 소리쳐 고집한다. 나름의 도그마일 터인데. 망각의 순치와 꺾이지 않는 도그마의 사수.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 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 때부터 겪은 쓰디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다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그의 노래가 듣는 이에게 위안이 된다는 이유로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 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솔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 만에 10만 관객을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 볼 예정이어서 또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동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먼저 이번 공연의 의미와 공연을 앞둔 소감을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하는 ‘솔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 때 2~3곡 정도 불러 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 나, 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도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는 가사에 영어발음을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 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으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고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 노래 발표회에도 솔로로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 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방망이를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 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 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을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중 고 3때 한 스카우트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 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공감을 통해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라는 이름은 세살 때 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 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며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달프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바비 킴은 누구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음악과 운동을 병행한다. 음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트럼펫을 배웠고 노래도 했다. 학교 발표회 때마다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야구와 미식 축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특히 야구는 포수와 1번 타자를 맡았는데 고교 때는 학교 대표로 출전해 3할대의 타율을 자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클럽 바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고 래퍼로 활동했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음반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1994년 앨범 ‘닥터 레게’로 데뷔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후 터보, 젝스키스 등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 나갔다. 1999년 룰라 이상민의 14인 프로젝트 그룹 브로스의 멤버, 2000년에는 무브먼트 크루의 멤버, 다음 해 부가 킹즈를 조직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혔다. 그러던 중 2004년 8월에 발표한 새 앨범 ‘고래의 꿈’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독특한 창법이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의 ‘나몰라 패밀리’를 통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지난해 세 번째 정규 앨범 ‘하트 앤드 솔(Heart & Soul)’을 발표했으며 ‘쩐의 전쟁’ ‘하얀 거탑’ 등 드라마 OST에도 참여했다. 2009년부터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때부터 겪은 쓰디 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 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설움을 견디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노래를 듣는 이에게 묘한 위안을 준다는 공통분모로 세대를 뛰어 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 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소울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만에 10만관객을 채우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볼 예정이어서 또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먼저 이번 공연을 갖는 의미와 소감이 어떠한지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 하는 ‘소울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 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때 2~3곡정도 불러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들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나,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가사에는 영어발음으로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부르고 그랬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느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구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에서 솔로로 노래 발표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 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방망이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은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고 3때 한 스카우터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 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 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구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그러던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못얻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에게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진실한 공감을 통해 하나 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Boby)라는 이름은 세살 때 친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많이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 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면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닯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더욱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오늘의 눈] 미국목사·한국목사/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오늘의 눈] 미국목사·한국목사/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미국 교회는 어떠할까라는 궁금증에 13일 아침 인터넷을 두드려 찾아간 곳은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커뮤니티 유나이티드 감리교회’였다. 청교도적 신성(神聖)과 고풍스러움으로 찬연한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일생을 성경과 기도로 살았을 법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옹기종기 앉아 백발이 성성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신도들 자리까지 내려와 문답식으로 설교하는 칼 리플리 목사의 모습은 종교적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윽고 단상으로 올라간 그는 설교 내용(사순절)과 관련한 ‘평범한’ 내용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다 ‘뜻밖에도’ 일본 지진을 언급하면서 일본인들이 속히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고는 리비아에 평화가 깃들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마쳤다. 아,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 사랑은 미국의 어느 시골 교회 한 구석에서도 어김없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흐뭇한 여운을 안고 귀가해 인터넷으로 한국을 연결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서울 한복판 초대형 교회의 목사가 일본 지진을 두고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한 데 대한 경고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면 센다이로 달려가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기적을 베풀까, 아니면 ‘거 봐라, 나 안 믿으니까 그런 꼴 당하지.’라고 고소해할까.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면 원수는커녕 이웃마저 사랑하는 데 인색한, 가진 것 많은 부자 목사의 편을 들까, 종교를 떠나 불쌍한 자들을 걱정하는 시골 목사를 귀하게 여길까. 개신교를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는 원래 ‘항의하다’(프로테스트)라는 말에서 나왔다.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타락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항거한 정신에서 비롯됐다. 부패하고 비뚤어진 한국의 ‘재벌 교회’에 항거하는 일은 이교도의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서약한 기독교인들의 책무다. carlos@seoul.co.kr
  • 컴맹 할아버지, IT 강사 됐네

    “할아버지들이 모두 컴맹이라는 편견을 버려!” 침침한 눈 탓에 돋보기 안경을 썼다. 그래도 잘 보이지 않는지 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붙인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도 둔하다.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 할아버지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름 이 바닥에서는 컴퓨터로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정보기술(IT) 고수들이다. 바로 마포구에서 운영하는 ‘컴퓨터 전문강사 양성반’의 노인 수강생들 얘기다. 이 프로그램은 구의 ‘2011년 노인일자리사업’ 가운데 하나다. 하루 2시간씩 주 다섯차례, 두달에 걸친 교육이 끝나면 지역 경로당에 파견돼 컴퓨터 강사로 활동한다. 월 20만원의 강사료를 받으며 제2의 취업 인생을 시작하는 셈이다. 특히 ‘노인 강사진’은 수강생과 나이대도 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눈높이’ 교육도 가능하단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이호준(73) 할아버지는 14일 “돈을 버는 것보다 직접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내가 아는 걸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게 뜻깊다.”며 웃었다. 사업을 위탁·운영하는 대한노인회마포구지회가 지난달 희망자를 모집한 결과 55명이 응모했다. 이 가운데 컴퓨터 활용정도와 강사경험 등을 고려해 1차 서류전형에서 교육생 48명을 선발했다. 한글과 엑셀, 인터넷기초 등 기본적인 컴퓨터 활용 방법을 교육하며 희망자에 한해 개인블로그와 UCC(사용자 직접제작 콘텐츠) 제작, 사진편집 등도 알려준다. 구는 이번 사업에 구비 2142만원을 포함해 총 사업비 6120만원(시비 2142만원, 국비 1836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3153-8855.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독거노인 사랑잇기] 어르신 1대1 매일 안부전화… 폭설땐 하루 2500명 체크

    [독거노인 사랑잇기] 어르신 1대1 매일 안부전화… 폭설땐 하루 2500명 체크

    “제가…, 아무래도 제가 봄되면 죽을 텐데, 내 장례를 맡아 줄 분 어디 없을까요.” 지난 2월 중순, 서울 용강동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내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중랑구에 사는 65세 기초수급자라고 밝힌 이 할아버지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말기 폐암 환자였다. 길어야 두달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은 할아버지의 바람은 바로 가족을 대신해 장례를 치러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주변 정리를 하던 할아버지는 “비록 가족도, 친구도 없지만 쓸쓸히 죽은 모습이 몸 상한 뒤에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는 정말 싫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곧바로 독거노인지원센터는 할아버지가 거주하는 동 주민센터에 연락해 방법을 물었다. 다행히 방법은 있었다. 동 주민센터는 연고가 없는 기초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지자체의 장례서비스를 연결해줬다. 할아버지는 “외롭지 않게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센터에 고마움을 전했다. 지난 1월 27일 개소한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에는 하루에도 100여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단순히 안부를 묻고 답하는 전화에서부터 ‘저승 가는 길’ 책임져 달라는 전화까지, 전화 한 통화이지만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는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의미있는 대화들이 유선을 통해 전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방문한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에서는 상담원과 독거노인의 전화통화가 쉴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센터에 근무하는 인원은 모두 10명. 이들은 오전 7시~오후 9시 2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지원센터의 업무는 ▲노인복지서비스 안내 및 지원 ▲보건복지부 독거노인 사랑잇기사업 관련 업무 ▲민간 참여기관 교육 등 크게 3가지다. 센터가 중점적으로 펼치는 ‘마음 잇는 전화’ 사업은 민간·공공기관 콜센터 상담원이 노인들에게 1대1로 안부 전화를 하며 이들의 안전을 매일 확인하는 일이다. 만약 노인이 안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콜센터는 즉시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에 이 사실을 알리고, 센터 직원들은 곧바로 현장에 나가 노인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노인들에게 직접 전화도 하지만, 거주지의 이장이나 동장, 경로당 등에 전화해 노인들의 안전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독거노인 봉사활동을 펼치는 기업과 기관에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는 것도 센터의 주된 과제 중 하나다. 특히 독거노인 사랑잇기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참여 기관과 대상 노인이 늘어나 업무량도 크게 증가했다. 폭설이나 혹한과 같은 이상기후로 노인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는 센터의 업무량도 덩달아 급증한다. 실제로 지난 2월 14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폭설 사태 때는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해 하루 2500여명의 독거노인 안부를 일일이 확인했다. 평소 통화량보다 10여배나 늘어났으니 업무를 마친 상담원들이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센터 상담원 송미숙(43) 씨는 “‘주변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렸다. 집이 무너질 것 같다’며 걱정하시던 어르신들과 통화하며 이분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감사함도 느꼈다.”면서 “특히 피해가 많았던 지역민들이 더욱 고맙게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독거노인지원센터를 위탁 운영하는 노인종합복지관협회는 우리나라 노인복지의 어제와 오늘을 알 수 있는 ‘현장 지표’다. 복지관을 찾는 노인들의 욕구와 이에 따른 역할 변화에서 고령사회의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서울 효창공원 내 중부노인종합복지관을 시작으로 현재는 전국에 설립된 노인복지관이 250여곳에 이른다.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였다. 이 당시에는 재가(在家)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 등이 노인복지관의 주된 사업이었다. 노인학대와 자살 예방 프로그램처럼 노인에 대한 보호는 지금도 여전히 노인복지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최근에는 노인들이 가진 ‘욕구’에 초점을 맞춘 복지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일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노인일자리사업, 중고령자들을 위한 은퇴 프로그램 등이 그 예다. 최진영 노인종합복지관협회 과장은 “복지관을 찾는 노인 대상자의 연령은 더욱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노인 인구 확대에 따라 민간자원과의 연계 등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안석기자 c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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