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할아버지
    2025-08-16
    검색기록 지우기
  • 김가연
    2025-08-16
    검색기록 지우기
  • 트럼프
    2025-08-16
    검색기록 지우기
  • 군복무
    2025-08-16
    검색기록 지우기
  • 리조
    2025-08-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907
  • 고사리 손들, 어르신 손에 장갑 ‘쏙’

    “할아버지,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초등학생들이 추운 겨울을 맞아 지역 어르신들에게 방한 장갑을 선물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르신 한 명, 한 명에게 쓴 안부 편지도 훈훈함을 더했다. 서대문구는 충현동의 경기초등학교와 틈새계층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고 9일 밝혔다. 국가 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틈새계층을 위해 교원과 초등학생들이 함께 나서기로 한 것이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과 김용일 경기초등학교장은 이날 협약식에서 홀몸 노인 지원, 문화복지 및 생필품 제공 등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경기초교는 개교 50주년을 맞아 모은 성금 200만원과 쌀 40포 등을 기부했다. 학교에서 사용하던 피아노도 충현동 주민센터에 기증했다. 앞서 경기초교 학생들은 주민센터에 지역 어르신들을 초청해 ‘재능 나눔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문 구청장은 “교사는 물론 어린 학생들까지 한마음으로 우리 이웃을 위한 나눔을 전하게 돼 뜻깊고 고맙다”며 지속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단독] ‘한 끼에 1000원’ 사랑입니다

    [단독] ‘한 끼에 1000원’ 사랑입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해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 밥 한 끼에 1000원을 받는 ‘1000원 식당’이 운영돼 추운 겨울을 조금이나마 녹이고 있다. 8일 오전 11시 30분. 부산 사하구 괴정3동 주민센터 인근에 ‘기운차림’이 문을 열자 수수한 옷차림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리를 잡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에 배추된장국, 무채볶음, 계란찜, 김치 등이 차려졌다. 가격은 단돈 1000원 한 장이면 족하다. 입소문으로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날 친구들과 함께 식당을 찾은 김모(74) 할머니는 “6000~8000원짜리 식사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며 “매일 식단이 바뀌어 좋고 입맛에 잘 맞는다”고 치켜세웠다. 계산은 식당을 나올 때 모금함에 1000원을 넣는다. 더러 동전들도 눈에 띄었다. 민간 봉사단체인 ‘기운차림 봉사단’이 지난 2일 개점했다. 부산에서는 2호점이며 전국적으로 안산·군포·대전 등에 이어 13호점이다. 이수인(60) 봉사단장은 “어르신뿐 아니라 취업준비생, 청소년 등이 따뜻한 밥 한 끼로 기운을 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하구 희망복지지원단도 운영에 힘을 보탠다. 광주 동구 대인동에 있는 1000원 식당인 ‘해 뜨는 식당’은 2010년 김선자(지난 3월 작고) 할머니가 문을 열었고 그의 딸과 시장상인회 등이 공동으로 6년째 운영 중이다. 김 할머니가 암으로 투병하던 2012년 한때 운영이 중단됐다가 독지가와 주변의 도움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김 할머니의 셋째 딸 김윤경(42)씨는 “직장인이지만 점심때 나와 밥을 직접 짓고 식당을 운영한다”며 “평일엔 70~80명, 주말엔 50여명의 노인과 시장의 영세 상인들이 점심밥을 먹으러 온다”고 말했다. 점심값이 1000원이지만 식재료값도 안 된다. 잡곡밥과 된장국, 나물류, 김치, 생선 등 3찬 이상을 밥상에 올린다. 김 할머니가 지난 3월 돌아가신 뒤 시장상인회 임원들은 한때 3~4명씩 돌아가며 김치를 담그고 찬거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이 퍼져 20㎏들이 쌀 봉지를 직접 놓고 가는가 하면, 1000원 밥값으로 1만원을 내는 ‘개미 기부자’도 다수다. 박모(75) 할아버지는 “매일 5㎞ 이상 떨어진 집에서 자전거로 와 점심을 즐기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서울 남구로역에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일용직들의 빈속을 채워 주는 ‘빨간 밥차’가 있다. 2005년부터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가 운영하고 있는 빨간 밥차는 올해 9월까지 3만 2000여명의 배를 채워 줬다. 시 관계자는 “일감이 없어 찬바람만 맞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용직에게 위로가 되는 밥”이라고 밝혔다. 시는 내년에 빨간 밥차에 4680만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빨간 밥차가 ‘일용직의 응원부대’라면 서울역 무료급식센터는 노숙인들의 ‘비빌 언덕’이다. 지난해 22만여명의 노숙인이, 올 9월까지 19만 3800여명이 다녀갔다. 무료급식센터는 월~토요일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제공한다. 일요일은 종교단체 등에서 급식 지원을 해 저녁만 제공한다. 서울시가 인건비 명목으로 1억 5900만원을 대고, 나머지 비용은 23개 종교·복지·봉사단체 등이 나눠 부담한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서울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강동 곳곳에 ‘이웃 산타’ 오시네

    강동 곳곳에 ‘이웃 산타’ 오시네

    “제 소원은 산타 할아버지를 실제로 만나 보는 거예요.” 이번 크리스마스에 강동구의 한 부모 가정 어린이들 ‘소원’이 이뤄진다. 강동구 길동주민센터는 성탄절을 앞둔 오는 23일, 지역 한 부모 가정을 대상으로 ‘산타 할아버지 우리 집에 오셨네’ 행사를 진행한다고 8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아빠 또는 엄마와 단둘이 외롭게 지내는 아이들에게 행복한 추억과 희망을 전하고자 마련됐다. 특별한 산타의 방문을 위해 주민센터 직원들 외에 지역 영성라이온스 회원들과 풍선아트 봉사자들도 마음을 모았다. 이들은 3개 조로 나눠 산타 복장을 하고 한 부모 가정 20가구를 방문할 예정이다. 33명의 아이에게 맞춤형 선물과 생필품, 케이크 등을 선물하며 용기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밖에도 연말을 맞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이색적인 행사들이 준비돼 있다. 지역 사업체와 마을공동체가 함께 준비한 ‘싱싱 저염 불고기 파티’가 그중 하나다. 독거노인 50여명에게 저염 건강식을 대접하며 간단한 시력 테스트를 통해 돋보기도 선물로 나눠 준다. 오는 15일에는 동 주민센터와 직능단체협의회가 손잡고 이웃돕기 성금 모금과 물품 기부 릴레이도 전개한다. ‘사랑애(愛)·희망애(愛) 기부데이’ 행사다. 무엇이든 기증할 수 있고 물품은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된다. 길동 주민센터는 저소득층에 쌈채소와 불고기감을 선물하는 ‘금요일은 불고기데이’, 독거노인 가정을 방문해 안부를 확인하는 ‘길동사랑 청소년 자원봉사단’ 등을 꾸준히 운영하며 소외계층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情 넘치는 강북 만든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情 넘치는 강북 만든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꿀맛 같은 주말 늦잠과 즐거운 게임을 포기하고 낯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찬통을 들고 홀로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자원봉사 수기 최우수상 수상작 중에서) 8일 강북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는 한 해 동안 우리 동네 자연 지키기, 재능기부, 집수리, 웃음치료, 미술놀이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한 자원봉사자 700여명이 모였다. 강북구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애쓰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함께하는 자원봉사, 살맛 나는 희망강북’을 주제로 열린 ‘제17회 강북구 자원봉사자 한마음 대축제’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은 서로 지난 일 년간의 체험을 이야기하며 봉사의 기쁨을 나눴다. 강북구는 이날 누적 자원봉사시간이 100시간 이상인 600여명의 봉사자들에게 인증서를 전달했다. 올해 자원봉사 현장체험수기 공모전에서는 신일고 양상오군의 ‘사연이 가득 담긴 반찬통’이 최우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양군은 가족과 함께 주말마다 독거노인에게 밑반찬 배달 봉사를 한 생생한 경험담을 이날 무대 위에서 직접 낭독했다. 구는 자원봉사자들에게 표창과 인증서를 수여해 봉사자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참여의식을 키우고 있다. ‘자원봉사자 한마음 대축제’에는 자원봉사를 한 시민 외에 봉사활동에 관심 있는 구민들도 참석해 봉사활동 기회를 탐색하는 시간도 가졌다. 박겸수 구청장은 “자원봉사자들의 묵묵한 헌신과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강북구가 살맛 나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면서 “앞으로도 많은 주민이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봉사자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할아버지, 산타 맞죠?”…동심 지켜준 남성 훈훈한 감동

    “할아버지, 산타 맞죠?”…동심 지켜준 남성 훈훈한 감동

    아이들의 동심은 어른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도 쉽게 흔들린다. 그런데 작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한 노년 남성의 이야기가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7일(현지시간) 영국 매체 데일리메일은 자신을 산타로 오해한 소년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재치를 발휘한 캐나다 남성 콜린 메드카프의 사연을 소개했다. 메드카프의 선행은 같은 지역 주민 마크 허슨(39)이 페이스북에 자신이 우연히 목격한 상황을 상세히 전하면서 현지 네티즌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지난달 16일, 허슨은 자신이 거주하는 온타리오 주 퍼거스 시의 한 식당에 들어선 메드카프를 향해 4~5살로 추정되는 어떤 소년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서는 모습을 보았다. 소년은 “맙소사, 산타할아버지다”고 크게 소리쳤다. 흰 수염과 좋은 풍채를 지닌 메드카프의 외모를 보고 그를 진짜 산타로 오해했던 것. 당황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메드카프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산타를 연기했다. 그는 “올해는 (내게) 편지를 보냈니?”하고 물었고 소년은 아직 그러지 못했다며 “오늘 밤 편지를 꼭 쓰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메드카프는 산타할아버지답게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가족들에게 잘 해야 한다”고 당부한 뒤 대화를 나눴으며 마지막에 소년과 인사를 나눌 때는 “이제 남극으로 돌아가 요정들과 함께 장난감을 만들어야겠다”고 말하고 식당을 떠났다. 허슨은 “이후 식당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니 모두들 눈시울이 조금 젖어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며 아이의 동심을 무시하지 않은 메드카프의 따듯한 마음에 느낀 감동을 전했다. 며칠 후 같은 식당에서 우연히 메드카프를 다시 만나 기념사진을 촬영한 허슨은 대화를 통해 그가 종종 다른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오해를 받아오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마크가 올린 페이스북 글에 어떤 부모는 “나도 이 산타할아버지를 몇 년 전에 만난 적 있다”며 “그때도 그는 이번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줬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한 현지 네티즌은 “많은 성인들과 아동들이 다시는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주던 마법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쉽다”며 “이 이야기는 내게 큰 미소를 선사했다. 감사합니다, 산타할아버지”라며 메드카프의 선한 마음을 응원하는 글을 남겼다. 사진=ⓒ페이스북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80세 할아버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에 맞고 사망

    80세 할아버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에 맞고 사망

    길을 걷다가 벼락에 맞을 비율이 높을까, 앉아 있다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사람에 맞을 확률이 높을까? 산책을 나와 벤치에 앉아 있던 한 80대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에 깔려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졌다. 애꿎은 사망으로 이어진 황당사고가 벌어진 곳은 스페인 발렌시아의 도시 알리칸테. 한 여자가 투신자살을 시도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48세로 나이만 공개된 이 여자는 8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렸다. 여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까닭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목숨을 끊기로 작심한 여자는 창문을 열고 힘껏 몸을 날렸지만 낙하지점(?)을 계산하진 못한 듯하다. 건물 밑으로 수직 낙하한 여자는 아파트 벤치 위로 떨어졌다. 벤치가 비어 있었다면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날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벤치엔 노부부가 앉아 한가로운 밤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가 떨어진 곳은 부인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잠시 쉬고 있던 80세 할아버지의 머리 위. 가속이 붙은 사람의 몸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서 할아버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 반면 자살을 시도한 여자는 큰 부상을 당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옆에서 남편의 황당한 죽음을 목격한 할머니는 충격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관계자는 "할머니가 크게 쇼크를 받아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계신다."며 "아직까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에 맞아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투신한 여자는 중상이지만 천천히 회복 중이다. 경찰은 여자가 정신을 찾는대로 자살동기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알쏭달쏭+] “산타는 없어!”…동심 사라지는 평균 연령은?

    [알쏭달쏭+] “산타는 없어!”…동심 사라지는 평균 연령은?

    연말이 되면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거론하는 부모가 많아진다. 아이가 떼를 쓰거나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주신다”는 말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한다. 이때 아이로부터 “산타는 없다”는 반박을 듣게 되면 당혹한 표정을 감추기 어렵다. 공공연한 비밀인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지나치게 일찌감치 폭로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인터넷이다. 인터넷 검열 반대 단체인 하이드마이애스닷컴(HideMyAss.com)이 미국 부모 2036명과 그들의 0~15세 자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모 8명 중 1명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된 것이 인터넷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부정하게 된 연령도 점차 낮아졌다. 하이드마이애스닷컴의 조사 결과 세계 최대 검색서비스인 구글이 런칭된 1997년부터 사회적네트워크시스템(SNS)인 페이스북이 런칭된 2005년까지, 불과 8년새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된 아이들의 평균 나이는 8.05세에서 7.71세로 낮아졌다. 또 3~10세 아이를 둔 부모가 어린 시절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된 평균 나이는 8.7세인 반면, 현재의 아이들은 불과 7.25세에 산타클로스의 실체를 알게 됐다. 아이들은 구글이나 페이스북에서 ‘산타’(Santa)를 검색한 뒤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 등을 담은 설명을 접하거나, 혹은 우연히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권하는 인터넷 광고를 접하면서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부모 중 61%는 인터넷을 통해 자녀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검색한 뒤 검색 기록을 삭제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아이 중 8%는 부모의 이러한 흔적을 직접 발견한 뒤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됐다고 답했다. 이에 조사를 이끈 하이드마이애스닷컴 측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산타클로스를 믿게 하자는 캠페인(Keep Believing in Santa)를 시작했다. 부모가 이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무료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와 관련한 검색어를 입력했을 때 자동으로 관련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 하이드마이애스닷컴 관계자는 “인터넷이 산타에 대한 아이들의 믿음을 깨는 중요한 도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면서 “이번 캠페인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및 산타클로스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조금 더 연장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포토리아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아베와 대조되는 日왕실의 ‘전쟁’ 발언

    아키히토 일왕의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왕자는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항상 기억에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키시노노미야 왕자는 30일 50번째 생일을 맞아 NHK 등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후 70주년인 올해 할아버지인 쇼와 일왕의 항복 메시지 원본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고 소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나 자신도 전후 20년이 지나서 태어났다”면서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에게서 듣거나 서적을 읽는 등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20대인 자신의 두 딸에게 “전후 70주년의 해를 하나의 계기로 삼아 전쟁에 대해 알아가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일본 왕실 인사들은 전후 70주년을 맞은 올해 들어 전쟁에 대한 기억과 공부의 필요성을 잇달아 강조해왔다. 이는 헌법 개정을 통해 ‘전후체제’에서 벗어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앞서 아키히토 일왕은 올 1월 1일 신년소감에서 “이번 기회에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치코 왕비도 지난 10월 20일 81세 생일을 맞아 진행한 일본 언론과의 서면 회견에서 “올해는 내 주변에서도 차세대 또는 그다음 세대 사람들이 각종 행사나 전시장을 찾아 진지하게 전쟁과 평화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든든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왕의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도 지난 2월 만 55세 생일을 앞두고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전쟁의 기억이 흐려지려고 하는 오늘날, 겸허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전쟁을 체험한 세대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비참한 경험이나 일본이 밟아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당신이 꿈꾸던 크리스마스의 모든 것!… 2015 코리아 크리스마스 페어 개최

    당신이 꿈꾸던 크리스마스의 모든 것!… 2015 코리아 크리스마스 페어 개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이 날은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축복을 전하는 연말 최고의 기념일로 여겨지고 있다. 가족은 감사를, 연인은 사랑을, 친구들은 우정을, 소외된 이웃에게는 온정을 전하는 특별한 날인 것. 이에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할 선물을 준비하고, 뜻깊은 일을 계획하고 있다. 만약 크리스마스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2015 코리아 크리스마스 페어(페스티벌 & 컨퍼런스 시즌2)’에 방문해 미리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알찬 성탄 계획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크리스마스에 특화된 전문 전시회인 2015 코리아 크리스마스 페어는 12월 11(금)일부터 12월 20일(일)까지 고양 킨텍스 전시장에서 열린다. 올해 2회를 맞이하는 이번 행사는 행사기간과 규모를 2배 이상 확대,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문화, 제품 등을 다양하게 선보인다.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통해 향후 경기도 고양시를 대표할 문화관광상품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특히 구세군 자선냄비, 컴패션, 월드쉐어, 어린이재단 등 다양한 자선단체의 자선 활동 행사가 펼쳐지고,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다양한 선물 용품을 만날 수 있으며, 다채로운 부대행사와 이벤트, 컨퍼런스가 준비된다. 다채로운 내용이 준비돼 가족 나들이, 연인 데이트 등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올해는 전시회와 더불어 열리는 동시개최행사 ‘Show In Show’가 눈길을 끈다. 한국판 ‘박싱데이’를 진행, 리빙, 잡화, 패션브랜드의 인기 상품을 선보이고,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줄 Children’s Wonderland’ 특별관도 마련된다. 리스페이스, 냠냠전, 달맞이가 콜라보레이션을 이뤄 특별 플리마켓을 개최, 핸드메이드작가, 신진디자이너, 아마추어 베이커, 소상공인들의 작품과 디저트를 한 자리에 모은다. 이외에도 미국의 영어교육기관인 몰리 매너스(Molly Manners)가 ‘글로벌 에티켓, 매너’ 등을 교육하는 세미나와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법, 크리스마스 케이크 만들기, 크리스마스 캘리그라프 등의 행사와 이벤트는 물론 ‘에콰도르로 떠나는 초콜릿 여행’, ‘콜럼비아와 함께하는 커피 테이스팅’ 등 각국의 대사관에서 준비한 문화 체험행사와 같이 다양한 부대행사들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행사 기간 중에는 롯데백화점의 후원으로 핀란드에서 ‘진짜’ 산타할아버지가 방문하여 행사장에 방문하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할 수 있는 시간도 준비되어 있다. 킨텍스 관계자는 “본 행사는 지난해 하루 평균 1만명 이상이 방문해 성공적으로 진행된 인기 전시회”라면서 “올해는 예년보다 2배 이상 확대되어 10만명~15만명의 참관객을 유치할 예정이며 더욱 풍성하고 다채로운 전시내용으로 꾸며져 참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크리스마스 페어는 현재 참관객을 위한 온라인 사전등록을 진행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christmasfair.co.kr)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사전 등록시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영원한 의회주의자 ‘마지막 등원’… 고인의 육성 들리자 오열

    영원한 의회주의자 ‘마지막 등원’… 고인의 육성 들리자 오열

    유신 독재와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영원한 의회주의자이자 9선 의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국회를 찾은 26일, 오전부터 흩날리던 진눈깨비는 오후 2시쯤부터 함박눈으로 변했다. 체감 기온 영화 5도의 추위와 하늘을 뒤덮은 눈보라는 고인과 결코 ‘영결’(永訣·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영원히 헤어짐)하고 싶지 않을 유족들은 물론 장례위원, 주한 외교단과 조문 사절, 각계 인사와 시민들의 마음을 더 비통하게 만들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장택상(1893~1969) 의원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거산’(巨山·김 전 대통령의 호)의 정치 역정이 제1공화국에서 제6공화국까지 여야를 넘나들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듯 세대와 정파를 가리지 않은 다양한 추모객들이 영결식장을 찾았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영원한 맞수’였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 전현직 의원들도 대거 참석하는 등 고인의 유훈대로 화합과 통합의 장을 연출했다. ●이명박 前대통령·권양숙 여사 참석 전직 대통령 중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가 유일하게 참석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차가운 날씨와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했다. 차남 김홍업 전 의원이 대신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인 권양숙 여사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불참했다. 주최 측은 1만여석을 마련했지만 갑작스러운 한파 탓에 곳곳에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오후 1시 50분쯤 김 전 대통령의 영정과 유해를 모신 검은색 링컨 리무진 운구차가 국회로 들어서자 식장에 모여 있던 내빈과 추모객이 기립했다. 부인 손명순 여사와 은철·현철씨, 혜영·혜경·혜숙씨 등 직계가족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김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덕룡 전 의원,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김광석 전 청와대 경호실장 등 상도동계 인사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운구를 맞이했다. 김동건 아나운서의 개식 선언과 함께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약력 보고가 이어졌다. 정 장관은 “헌정 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자 최다선 국회의원으로 의원직 제명과 2차례에 걸친 가택연금을 당하셨다”고 설명했다. 장례위원장인 황교안 국무총리의 조사와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의 추도사가 계속됐다. 고인과 가족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시작으로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4대 종교의 추모 의식이 끝난 뒤 김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이 담긴 기록 영상물이 상영되면서 숙연함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박정희 독재 정권과 맞서며 일갈한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1985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을 당시 경찰 앞에서 “날 감금할 수는 있어.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순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라는 고인의 육성이 흘러나오자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상영된 기록영상물 유족이 직접 골라 반면 대통령 재직 시절 어린이날 행사 중 여자 어린이가 “대통령 할아버지가 ‘학실히’(확실히)라고 하신 걸 많이 봤는데 정확하게 발음해 주세요”라는 짓궂은 부탁을 했음에도 김 전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학실히”라고 응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났을 땐 영결식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김 전 대통령의 흑백사진을 배경으로 “누구나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사회,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나라가 신한국입니다. 우리 모두 이 꿈을 가집시다”라는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가 나왔다. 영상에 담긴 자료 화면은 유족들이 직접 고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휠체어를 탄 손 여사가 석석원 전 청와대 비서관의 도움을 받아 헌화 및 분향에 나섰고 차례로 직계 유족들이 한 명씩 단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권양숙 여사와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 정의화 국회의장,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양승태 대법원장, 황교안 총리,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정의당 심상정 대표 등 의회 지도자들까지 차례로 헌화와 묵념을 했다. 마지막을 장식한 건 김 전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알려진 가곡 ‘청산에 살리라’였다. 최현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바리톤)와 청소년합창단이 함께 불렀다.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에 따라 3군(육해공군) 통합 조총대가 21발의 조총을 쏘아 올리고 조악 연주가 울려 퍼지면서 1시간 20분의 영결식이 마무리됐다. 김 전 대통령도 30여년을 함께한, 분신과도 같던 국회와 ‘영결’했다. 영결식에서는 김 전 대통령을 모셨던 이들은 물론 한때 경쟁하거나 대립했던 인사들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새정치연합 권노갑 상임고문, 김옥두·이훈평 전 의원,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이사장 등 동교동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것이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일부터 함께 빈소를 지킨 데 이어 영결식과 동작동 현충원에서 진행된 안장식까지 동행했다. 이 밖에 전남 강진 흙집에서 칩거하다가 부음을 접하고 서울로 올라와 줄곧 빈소를 지켰던 손학규 새정치연합 전 상임고문과 박원순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도 눈에 띄었다. ●與 “업적 재평가” 野 “민주주의 사수” 김수한 의장은 영결식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거산은 가셨지만 그 뜻은 앞으로 더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는 “후배들이 (김 전 대통령의) 개혁을 완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개혁 업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표는 “당신께서 평생 싸워 이룬 민주주의가 다시 흔들리고 역사가 거꾸로 가는 상황에서 떠나보내게 되니 한없이 착잡하다. 이젠 후배들에게 남겨진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정든 이웃 다시 볼 수 없다니 실감 안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인이 있었던 26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김 전 대통령 자택 일대는 침통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자택으로 들어가는 골목 초입에 위치한 식료품 가게에서는 주민 서너 명이 모여 앉아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행되는 영결식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수십년째 김 전 대통령과 이웃으로 지내 왔다는 최영희(70·여)씨는 “대통령이 사는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는데 마을의 중심을 잃은 기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김형용(53)씨는 “매년 새해 첫날이면 방문해 인사를 드렸는데 올해는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이 안 좋아 얼굴을 보지 못하고 돌아선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김 전 대통령 자택 앞에는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나선 시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김옥순(83·여)씨는 “이웃에 살며 오가는 모습을 자주 봐 정들었는데 이제 볼 수 없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김 전 대통령이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유현진(43·여)씨는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임아린(9)양은 김 전 대통령을 “뒷산에서 만날 때마다 웃으며 인사해 주시고 안아 주시던 할아버지”라고 기억했다. 오후 4시 10분쯤 운구 차량이 김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골목길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운구 행렬은 오후 4시 25분쯤 상도동 ‘김영삼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지나쳤다. 도서관에는 고인의 대형 사진과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운구차량은 잠시 정차해 고인의 뜻을 기린 뒤 아쉬운 마음으로 배웅하는 시민들을 뒤로하고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뜨거운 놈들이 온다

    뜨거운 놈들이 온다

    ‘사랑이 아빠’ 추성훈(왼쪽·40·일본)이 아빠의 온화한 미소를 잠시 접고 ‘싸움꾼’의 본능을 드러낸다. 추성훈은 오는 28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종합 격투기 UFC 파이트 나이트(이하 UFN) 서울 대회에 출전한다. UFC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의 격투기 단체다. 국내에서 UFC 대회가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추성훈은 알베르토 미나(33·브라질)와 겨룬다. 추성훈은 2004년부터 UFC와 K1 메이저 대회에서 피와 땀을 흘려 왔다. 통산 전적은 14승5패2무효다. 최근 연패를 당하며 부진했지만, 지난해 9월 UFN 일본 사이타마 대회에서 아미르 사돌라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재기했다. 유도 선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타격과 테이크다운(쓰러뜨리기)에 능하다. 미나의 통산 전적은 11전 전승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군소 단체에서 쌓은 승리다. UFC에서는 딱 한 경기를 치렀다. 지난해 8월 강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일본의 안자이 신쇼와 난타전 끝에 겨우 KO로 이겼다. 5살부터 유도와 주짓수(브라질 유술)를 수련했다. 서브미션(관절기) 기술 위주로 경기를 끌고 갈 가능성이 크다. 신체 조건은 미나가 좋다. 추성훈보다 7살이 젊고 키는 5㎝가 크다. UFC 공식 프로필상 미나의 신장은 182㎝, 추성훈은 177㎝이다. 팔도 추성훈보다 10㎝ 이상 길다. 추성훈은 25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진행된 공개 훈련에서 “상대가 나처럼 유도를 했다고 들었다. 유도하는 선수에게는 지기 싫다”며 필승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이어 “한국에서 UFC 대회가 열리길 고대해 왔다. 이제 격투기계에서는 할아버지뻘인 마흔이 됐지만, 멋있는 시합을 보여드리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인 최초로 UFC에서 10승을 달성한 김동현(오른쪽·34)도 출격한다. 웰터급 랭킹 7위인 김동현은 81위 도미닉 워터스(26·미국)와 겨룬다. 이변이 없는 한 김동현이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김동현은 “UFC 선수들은 모두 다 강하다. 쉬운 상대는 없다. 시합 때 내가 가진 걸 다 보여주겠다”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메인 이벤트는 벤슨 헨더슨(32)과 조지 마스비달(31·이상 미국)이 장식한다. 전 라이트급 챔피언인 헨더슨은 주한미군 출신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는 ‘전사’, ‘헨더슨’, ‘명예’ 등 몸 곳곳에 한글 문신을 새기고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여 국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2월 웰터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마스비달 역시 라이트급에서 웰터급으로 전향했다. 둘은 웰터급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양보 없는 싸움을 벌일 전망이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사회적 불평등·절망감… IS 젊은이들의 테러 이유부터 살펴야”

    “사회적 불평등·절망감… IS 젊은이들의 테러 이유부터 살펴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5)가 25~26일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강연과 좌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25일 열린 제15회 김옥길 기념 강좌에서 르 클레지오는 ‘혼종과 풍요: 세계문학과 문화로 본 이주’를 주제로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과 이민자 문제를 짚었다. 이민자의 후손으로 프랑스와 모리셔스 이중국적을 지니고 있는 그는 내전과 테러를 피해 유럽으로 건너오는 이민자들은 위협적 요소가 아니라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24일 오후 중국 난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르 클레지오를 이화여대에서 만나 최근 벌어진 프랑스 파리 연쇄 테러와 다문화사회의 위기 그리고 한국 문학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지난 9월부터 난징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난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충격적인 연쇄 테러가 발생했다. 파리가 왜 이슬람국가(IS)의 테러 표적이 됐다고 생각하나. -왜 파리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희생자들에 대한 생각을 먼저 말하고 싶다. 많은 무고한 젊은이들이 희생된 건 충격적이다. 젊은이들은 아무 죄 없이 젊음을 만끽하다가 죽었다. 테러가 일어난 장소 근처에 사는 내 딸의 친구들도 죽었다. IS 젊은이들이 어떻게 폭력과 범죄, 테러에 가담하고 어떤 사상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일본 노벨문학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17세’라는 소설에서 국가가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테러를 세뇌시키고 일본의 군국주의, 민족주의를 고양해 사람을 죽이게 하고 희생시키는지를 반군국주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있다. 왜 파리인가. 왜 프랑스인가.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테러가 일어났을 때 반향이 큰 나라들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프랑스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어느 나라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9·11테러 이후 전 세계적으로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나. -9·11테러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어제오늘 시작된 새로운 상황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도처에서 전쟁 상태가 계속됐다. 식민지 나라는 자유를 위해 싸웠고, 독립 이후에도 내전 같은 전쟁을 겪었다. 독립과 민주화에 대한 준비가 안 돼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리카는 늘 전쟁 상태였다. 옛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증오감이 극단주의자를 키웠다. 거기에 종교 원리주의자들이 가세해 테러와 같은 극렬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나이지리아는 독립 이후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 간 내전을 겪었다. 전쟁이나 폭력적인 상태는 계속 있어 왔다. →유럽 극우세력은 이번 테러 사건을 난민과 이주자 수용 반대, 국경 폐쇄의 근거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파리 테러 이후 일주일 동안 영국에서 반이슬람 증오 범죄가 평소보다 3배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으로서 ‘테러 없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원하는 것 중 하나가 그런 반작용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평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무력화하고 오로지 전쟁밖에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그들의 목적이다. 모든 정치인, 학자, 언론인이 움직여서 멈추게 해야 한다. 정부는 늘 옳게 행동하지 않는다. 일례로 프랑스 사회당이 모스크에서 아랍어로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프랑스어로 설교를 하면 프랑스에 동화가 잘될 거라는 판단에서다. 부조리할뿐더러 말도 안 되는 행동이다. 사회당은 극우파에 비하면 이주자들에게 너그러운 입장인데 그들마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또 다른 극단주의를 키울 뿐이다. →이번 강연의 주제도 마침 이주에 관한 것이다. 이민자 후손이라는 개인사가 인생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어릴 때 프랑스 문화권에서 자랐다.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194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모리셔스 섬에서 태어났다. 모리셔스, 프랑스 이중국적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 살면서 프랑스 문화에 훨씬 더 가깝게 자랐다. 프랑스 교육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출신 국가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모든 학생이 프랑스 부모를 가진 것처럼 교육을 시키는데 그것은 오류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단 하나의 문화만 인정할 경우 이주민들에게 한을 갖게 한다. 통합에도 나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테러는 일종의 병이다. 범죄자들은 벌해야 한다. 그러나 근원을 찾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다. 사회적 불평등, 젊은이들의 절망감 등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테러가 정치인들의 ‘프로파간다’로 이용돼선 안 된다. →이민자들로 인해 유럽이나 프랑스가 위협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수혈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프랑스는 원래 다문화국가다. 게르만 등 여러 문화가 늘 섞여 왔다. 다문화는 경제나 문화를 더 풍요롭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벽을 쌓고 그들을 막는다면 프랑스는 그들끼리만 사는 감옥에 불과하다. 프랑스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다 마찬가지다. 세계화 시대에 인간들은 서로 만나 관계를 맺어야 한다. 물은 장애물이 있어도 흘러 내려가듯 인간도 똑같다. 벽을 치고 막아도 새로운 땅으로 가려는 욕망이 있어 그 벽을 뚫고 가기 마련이다. 문학도 기술도 마찬가지다. 자기네 문학, 자기네 기술에만 갇혀 산다면 발전이 없다.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공부하고 멕시코와 파나마, 미국 그리고 한국에서도 체류하는 등 끊임없이 전 세계를 돌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늘 세상을 돌아다녔고 지금도 그렇다. 아마도 가족의 유산일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할아버지는 모리셔스 섬과 영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늘 세계 도처로 돌아다녔다. 호기심 때문에 세계를 돌아다닌다. 문화는 보면 볼수록 매우 다르다는 걸 느낀다. 한국에 체류하면서 많은 것을 봤다. 프랑스에서 고사리나 묵을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한국에선 맛있게 먹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샤머니즘과 불교, 기독교가 조화를 이루며 뒤섞여 있었다. 기독교 문화에서 자라 미신, 샤머니즘 하면 두려웠는데 한국에서 미신과 유일신이 잘 조화된 걸 봤다. 이것은 한국인 정신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다문화적인 문화다. 여행을 하면 열린 나라들, 탐구정신이 강한 나라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내 작품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2001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2008년에는 이화여대에서 1년간 강의하는 등 한국과 유독 인연이 깊다. 예전 어느 인터뷰에서는 “한국과 내 작품에는 정신적 유사성이 있다. 나는 혈통상 아시아인일지도 모른다”고까지 했는데, 특히 어떤 부분에서 그런 점을 느끼나. -한국의 시나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다. 최근의 프랑스 문학은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작품들뿐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한국 작품은 타인에게 말을 걸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그런 점에서 나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착도 닮았다. 문학은 타인에게 보내는 편지다. 내가 느끼는 감동, 희망, 절망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문학이다. →오랜 기간 한국과 인연을 이어 오고 있는데 한국 문학과 한국 사회의 어떤 점에 특히 끌렸나. -한강, 김애란 같은 작가는 남성 작가가 주를 이루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페미니스트 같은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거다. 프랑스에선 이런 여성 작가를 볼 수 없다. 예전에 이대에서 한강과 만났을 때 황석영, 이승우 등을 예로 들며 ‘한국에는 한(恨)의 작품이 많다’고 했더니 한강은 ‘나는 그런 한이 없다. 한국전쟁 이후 어려움을 겪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문학적으로 표현하는지가 나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은 극단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4·3사건, 6·25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었는데 그 어려운 역사를 잘 극복한 게 굉장히 감동적이다. 지난 추석 때 TV 뉴스로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봤다. 일흔 살 아들이 아흔 살 어머니 품에 안겨 우는 걸 보고 뭉클했다. 나도 전쟁으로 얼룩진 유년기를 보냈는데 어려운 시대를 겪었기에 희망을 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 문학이 지금보다 더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아직 배출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도 크다. -노벨문학상을 받으려면 먼저 영어나 스웨덴어로 작품이 번역돼야 한다. 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웃음). 해외 학계에선 한국 젊은 작가들의 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세계에 한국 문학을 더 잘 알리기 위해선 작품 번역도 중요하지만 문학저널을 외국어로 발간해야 한다. 프랑스에는 ‘코리아나’라는 문학잡지가 있어 젊은 한국 작가들의 단편소설이 많이 실린다. 가능한 한 많은 외국어로 문학저널을 발간하는 게 중요하다. 인터뷰 이순녀 문화부장 coral@seoul.co.kr 정리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르 클레지오는 ▲1940년 프랑스 니스 출생 ▲1960년 영국 옥스퍼드대 유학, 이듬해 니스대 졸업 ▲1963년 첫 소설 ‘조서’로 프랑스 르노도상 수상 ▲1964년 앙리 미쇼 연구로 엑상프로방스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1980년 ‘사막’ 발표.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폴 모랑상 수상 ▲1994년 ‘리르’지가 선정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어권 작가’ ▲2001년 대산문화재단,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주최한 한불 작가 교류 행사로 첫 방한 ▲2007~2008년 이화여대 불문과, 통역대학원 석좌교수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2015년 9~12월 중국 난징대 초빙교수
  •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88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DJ·1926~2009)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쌍두마차’였다. 바른길로만 가겠다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정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로 ‘정치 9단’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아호인 거산(巨山)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의 ‘거’와 정치적 고향인 부산의 ‘산’을 따 지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통영중 재학 시절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했고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였다. 이어 경남고를 거쳐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으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과 손 여사는 장녀 혜영(63), 차녀 혜정(61), 장남 은철(59), 차남 현철(56), 삼녀 혜숙(54)씨 등 2남 3녀를 뒀다. 이 중 현철씨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활동상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거제에서 출마해 최연소 의원(27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9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7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을 쏟아냈다. 그의 정치 행보는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고, 이는 야당 정치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지만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되고 이듬해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며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고,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자택 앞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도 당했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줬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한 것이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선 후보로 탈바꿈했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퇴임 후에도 부산·경남(PK)을 기반으로 한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곤지암리조트 새달 초순 개장

    수도권 최대 스키장인 곤지암 리조트가 다음 달 초순 개장한다. 곤지암 리조트는 이번 시즌 국내 스키 저변 확대를 위해 3대 가족이 함께 스키장을 찾을 수 있도록 세대별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스키 1세대인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와 함께 스키장을 다시 찾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대한스키협회 원로 스키인들을 중심으로 ‘스키클럽 곤지암’을 창단했다. 스키클럽 곤지암은 스키어를 위한 안전 패트롤 지원, 어린이 스키어를 위한 기술 지도 등의 역할을 할 예정이다. 경제적으로 스키를 타고 싶어 하는 2세대를 위해서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스키를 즐길 수 있는 ‘미타임패스’ 리프트권을 할인 판매한다. 주중(일~목요일) 밤 10시~새벽 4시 운영하는 심야 스키의 경우 3·4·6시간권 15%, 주말과 공휴일 오전 7시~10시에는 3시간권을 25% 할인 판매한다. 스키 3세대인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강습 프로그램인 ‘곤지암 어린이 스키 교실’을 확대 운영한다. 스키 꿈나무를 응원하는 ‘어린이 스키대회’, 경제적 이유로 스키장을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사랑 스키캠프’도 개최한다. 아울러 스키 강사가 슬로프를 순회하며 무료로 원포인트 강습을 해 주는 ‘슬로프V맨’ 서비스를 새롭게 선보인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씨줄날줄] 미국판 ‘수저 계급론’/김성수 논설위원

    “나만 (후보 중에) 억만장자가 아니다. ‘슈퍼팩’(선거 때 정치자금을 거두는 조직)은커녕 ‘백팩’(배낭)도 없다. 나는 강의실을 왔다 갔다 하는 교수처럼 양손으로 짐을 들고 다닌다. 속옷도 한 벌밖에 없다. 심지어 옷도 드라이어가 없어 라디에이터에 말린다.” 새터데이나이트라이브(SNL)에 출연한 코미디언 래리 데이비드(68)의 속사포 같은 개그가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진다. SNL은 정치 풍자로 유명한 미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정치인들은 이 프로에서 다뤄 주지 않으면 오히려 서운해할 정도다. 래리가 흉내 낸 사람은 민주당의 대통령 경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버몬트주) 상원의원이다. 우리 나이로 75세(1941년생). 손자 7명을 둔 할아버지다.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진보정치인이다. 2010년 12월 10일에는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이 합의한 부자 감세 법안에 반대하며 무려 8시간 37분 동안 ‘마라톤연설’을 해 유명세를 탔다. 원래 무소속인데 이번에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미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이며 선거에 출마한 이유라고 밝힌다. 미국 경제의 비극은 초부유층은 갈수록 더 부자가 되고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데 있다는 것이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 한창인 우리 사회와 꼭 닮았다. 미국판 ‘수저 계급론’인 셈이다. 샌더스는 억만장자인 빌 게이츠나 석유재벌 찰스·데이비드 코흐 형제, 카지노 재벌 셸던 에덜슨 등 미국의 최고부자 15명이 최근 2년간 자산이 200조원 가까이 늘었고, 이는 하위 40%의 자산보다 많다고 지적한다. 또 미국 최상위층 0.1%의 자산은 지난 30년간 전체의 10%에서 22%로 두 배 넘게 늘었는데, 이는 빈곤층과 근로자의 부를 빼앗아 이들에게 가져다준 것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부(富)의 독점은 비도덕적이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당 7.25달러인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자고 주장한다. 그래야 주에 40시간 이상 일하는 미국인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월가의 금융기업을 세금으로 구제해 줬던 만큼 이번에는 월스트리트에 투기거래세를 도입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여기서 생긴 재원으로 공립대학 무상교육을 하겠다고 공언한다. 1%가 아닌 99%의 서민을 위한 경제를 만들겠다는 약속에 미국인들은 쫑긋 귀를 기울이고 있다. ‘꼴통 재벌’로 막말만 일삼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와 비교되면서 주가는 더욱 뛰고 있다. 하지만 힐러리를 잡고 내년에 본선에 나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돌풍은 몰고 왔지만 미국 대선판에 부의 불평등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는 데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김성수 논설위원 sskim@seoul.co.kr
  • [특파원 칼럼] 다시 출발점에 선 한류/이석우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다시 출발점에 선 한류/이석우 도쿄 특파원

    일본과 한국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맛있는 음식에 대한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일본 어린이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형제자매,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들을 그려 냈다. 음식을 함께 먹었던 공간 등 배경도 정성 들여 묘사했다. 누구와 함께 어떤 상황에서 음식을 먹었는지가 강조돼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 초등학생들은 어떤 음식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내가 먹은 음식’이 강조됐고, 음식 그 자체를 부각시켰다. 누구와 어떤 상황이었는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 나라 어린이의 이런 그림들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이 한국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 주최한 ‘한국과 일본의 음식박람회’에 전시된 것들 중 일부다. 전시회는 지난 10일까지 두 달 보름 동안 계속됐다. 전시회에는 400평 남짓한 공간에 한국인의 음식습관과 세시풍속, 한국 음식문화 연구 성과와 자료, 주방용품 500여점과 부엌 등이 재현됐다. 일본 것도 비교 전시됐지만, 한국에 초점이 맞춰졌다. 전시품 상당수가 한국에서 수송됐고, 박물관의 별도 공간에 음식 체험 코너가 마련돼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오사카공대, 교토조형예술대 등 지역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영상매체와 디자인 작업을 통한 한국 음식의 표현과 재현이라는 실험적인 코너도 있었다. “한국 음식이 맛있고 재미있다”는 반응과 함께 현지 일본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행사는 개막 초기에는 바닥이던 한·일 관계가 투영된 듯 “왜 전시 제목에 한국이 우리나라(일본)보다 먼저 나오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 왜 한국 관련 행사를 하느냐”는 등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전시를 기획한 일본 민족학박물관의 인류학자 아사쿠라 도시오 교수는 “음식을 통해 한국 알기가 목적”이라면서 “오감을 통해 한·일 음식과 문화를 비교하고, 한·일 소통의 계기를 마련했다”며 뿌듯해했다. 고려자기의 세계적인 컬렉션을 자랑하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서 두 달 넘게 열리고 있는 ‘새로운 발견, 고려청자’ 전시회도 현지인들 사이에 한국의 미와 수준을 다시 보여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 등 역대 일왕들이 오사카 방문길에 빼놓지 않고 들르는 이 박물관에서는 한국이 소장한 주요 고려청자와 박물관이 소장한 고려청자 등 200여점을 비교, 전시하고 있다. 관람객들 사이에서 “한국을 다시 보게 됐다. 한국이 좋아졌다”는 반응과 반향이 뜨겁다. 오사카한국문화원 주최로 지난 13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제1회 한국영화제에서도 행사마다 마련된 좌석의 2배 이상의 관람객이 몰렸다. 다시 꿈틀대는 한류의 가능성과 힘을 엿보게 했다. 일본에서 가장 한국 친화적이라는 오사카에서 최근 열리고 있는 문화 행사들은 악화된 한·일 관계 속에서 기존 한류에 식상한 일본인들에게 한류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다시 보여 줬다. 뻔한 스토리의 TV 드라마와 몇몇 아이돌 연예인에게 의존하는 차원을 넘어 깊이와 영역을 넓힌 한국의 문화적 성취와 전통은 일본인의 마음을 흔들고, 감동시킬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달 초 3년 반 만의 단독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관계 정상화가 모색되는 가운데 우선 우리의 문화적 성취와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새롭게 돌아보고 확인하는 것이 절실하다. 한국인의 무궁한 멋과 미의 발산을 기대한다. jun88@seoul.co.kr
  • 한류 확산·봉사활동 헌신한 외국인들 “한국인 돼 기뻐”

    한류 확산·봉사활동 헌신한 외국인들 “한국인 돼 기뻐”

    “이제 명실상부한 한국인이 됐습니다. 오늘은 딸의 한국 사랑을 누구보다도 지지해 준 어머니의 90세 생신인데 커다란 선물이 될 겁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의 친구’라고 소개하는 프랑스 국적의 작가 겸 언어학자 마르틴 프로스트(64·여) 박사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프로스트 박사는 1979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뒤 두 나라를 오가며 우리 문화를 알려왔다. 법무부는 이런 공적을 인정해 19일 프로스트 박사와 이탈리아 국적의 김하종(58·이탈리아명 빈센초 보르도) 신부에게 대한민국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특별공로로 우리나라 국적을 부여받은 이들은 기존 국적과 더불어 복수 국적을 갖게 된다. 프로스트 박사는 파리7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파리7대학 한국학과장 겸 콜레주 드 프랑스 한국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연세대 불문과 강사로 재직 중이던 1983년 당시 학생이던 다섯 살 연하의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지한파’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외규장각 의궤 반환 지지협회’를 만들어 2011년 외규장각 도서가 돌아오는 데 앞장섰다. 파리7대학 내부의 한국식 정원인 ‘솔섬 정원’도 그가 추진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2009년 그에게 문화포장을 줬다. 그는 “한국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올해 초부터 한국 국적을 꼭 취득해야겠다고 생각해 법무부에 국적 취득 신청을 했다”면서 “요즘은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남편과의 첫 만남을 그리는 책 ‘할아버지’를 프랑스어로 집필하고 있다”고 말했다. 20여년간 원했던 한국 국적을 갖게 된 김 신부는 1990년에 국내에 들어와 독거노인과 장애인을 찾아다니는 봉사활동을 해왔다. 1998년부터에는 경기도 성남에 국내 최초의 실내 무료 급식소이자 사회복지법인인 ‘안나의 집’을 세웠다. 지금까지 150여만명의 노숙인과 독거노인, 가출 청소년 등에게 따뜻한 밥을 먹였다. 올 5월에는 대통령 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도 받았다. 최근에는 가출청소년들을 직접 찾아가는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 운동’을 시작했다. 김 신부는 한국 국적을 받기까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그는 1990년대 초반에 국적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한국인과 결혼을 하거나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외국인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제도 때문이었다. “20년 넘게 한국에서 소외된 이들을 도운 노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더욱 힘이 생깁니다. 한국인으로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 땅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겠습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노인학대 주범은 아들?

     충북지역에서 발생한 노인학대를 한 사람 가운데 아들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충북도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0월까지 발생한 노인학대 120건을 분석한 결과 아들이 45명으로 가장 많았다. 뒤를 이어 배우자 29명, 딸 10명, 며느리 3명 순으로 조사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인학대 발생장소의 절반 이상이 가정으로 나타났다. 학대 유형은 언어폭력에 해당하는 정서적 학대, 물리적 폭력을 의미하는 신체적 학대, 부모를 찾지 않는 등 방치하는 방임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여러 유형의 학대가 함께 가해지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올 초 A(77) 할머니는 아들이 술만 먹으면 욕을 하고 집에 있는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한다며 경찰 지구대로 몸을 피했다. 아들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혼자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배우자 등 가족들의 돌봄을 받지 못해 수천 마리의 바퀴벌레와 함께 생활하는 B(91) 할아버지도 발견됐다. 이 할아버지는 119구급대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긴급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희망복지지원단은 할아버지 자택을 소독하고 생활물품을 지원했다.  충북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자녀에 의한 노인학대가 증가하지만 피해노인이 신고를 꺼리거나 처벌을 원치않아 처벌이 쉽지 않다”며 “노인학대를 한 사람이 상담, 치료 등을 의무적으로 받을 수 있는 대안적 처벌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