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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삼역 칼부림’ 뛰어든 의인 김용수씨 “얼떨결에 달려들었다”

    ‘역삼역 칼부림’ 뛰어든 의인 김용수씨 “얼떨결에 달려들었다”

    ‘역삼역 칼부림’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즉각 달려들어 피해자를 구한 시민 김용수씨가 화제다.26일 오전 역삼역 앞에서 피의자 김모(63)씨가 흉기로 결혼정보업체 대표 A(57,여)씨를 수차례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모씨는 해당 결혼정보업체 가입했으나 업체가 적극적으로 이성과 연결에 나서지 않아 불만을 품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현장을 지나던 한 금융업체 대표 김용수씨가 달려들어 A씨를 구하고 피의자를 붙잡고 있다가 경찰에 넘겼다. 김용수씨는 연합뉴스를 통해 “지나가다가 보니 어떤 남자가 여자를 칼로 막 찌르고 여자 분이 살려달라고 하시더라”며 “나도 모르게 달려들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날 볼일을 보고 잠시 병원에 가기 위해 오전 11시 40분쯤 지하철 2호선 역삼역 5번 출구 인근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피의자 김모(63)씨가 결혼정보업체 대표 A(57·여)씨를 흉기로 수차례 찌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김씨는 “정신없이 끼어들어서는 옆에 있던 저보다 훨씬 연배가 높으신 한 할아버지와 함께 그 남자를 붙잡았다”며 “그분이 (피의자의) 목을 잡고 있는 사이 저는 팔을 비틀어 손목을 꽉 잡고 있다가 칼을 빼앗아서 옆으로 던졌다”고 급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랬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저는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피의자)의 손에 난 피가 제 양복과 셔츠에 묻어서 옷을 버렸다”고 말했다. 용감하게 흉기를 든 범인에게 달려들었지만, 김씨는 자신이 평범한 시민이라고 했다. 김씨는 “원래부터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며 “딸에게 ‘아빠 좋은 일 했다’고 알렸더니 오히려 왜 그랬느냐고 난리가 나 저는 혼만 났다”고 웃었다. 이날 피해자 A씨를 도왔던 다른 한 시민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사진 찍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주변의 무관심을 아쉬워했다. 김씨는 “그 상황이 저도 조금 이해가 안 되기는 한다”면서도 “사실 거기서 제대로 뛰어들기는 어려웠을 거다. 급박하고 위험하니까 ‘어어’하면서 그냥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피의자 김씨를 붙잡고 있다가 경찰에 넘기고는 간단한 목격자 진술을 하고 떠났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살인미수 혐의로 김모씨를 붙잡아 조사 중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손녀에게 문자 보내려는 할아버지의 부탁…시민들 반응?

    손녀에게 문자 보내려는 할아버지의 부탁…시민들 반응?

    “오늘이 내 손녀 생일이라 그러는데, 여기서 (내) 사진 한 장 찍어서 보내주고 싶어요. 도와줄 수 있어요?”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젊은 사람들에게 이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어르신 부탁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도 따뜻했습니다. 지난 24일 유튜브 채널 딩고는 ‘할아버지가 문자 보내는 방법을 물어본다면?’이라는 제목의 실험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사진을 찍어서 손녀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도와달라는 콘셉트입니다. 부탁을 들은 한 여성은 “좀 더 웃으시면 멋있게 나오실 것 같아요”라며 따뜻한 마음씨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전했습니다. 또 다른 남성은 “다리 길게 나오시게 찍어드릴게요”라며 사진 한 장 찍는 데에도 정성을 담았습니다. 이어 많은 사람이 어르신을 대신해 손녀에게 고운 메시지를 보내주었습니다. 특히 한 여성은 문자가 잘 안 보인다는 어르신의 말에 “그러면 글자 크기를 크게 해놓을까요?”라며 “저도 어릴 때 할아버지가 계셔서 글자 크기 크게 해드리니까 읽기 편하다고 하셨거든요”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영상을 접한 누리꾼들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상”이라며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따뜻해서 울컥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 영상=딩고 유튜브 채널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할아버지와 슈렉 물고기의 25년 우정 화제

    할아버지와 슈렉 물고기의 25년 우정 화제

    사람이 바다에 사는 물고기와 오랜시간 우정을 나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지난 22일 미국 보어드판다 등 해외언론은 일본의 한 할아버지와 혹난 놀래기(Asian Sheepshead Wrasse)의 25년 우정을 보도했다. 이미 지난해에도 보도돼 화제가 된 주인공은 올해 79세의 히로유키 아라카와와 혹난 놀래기종인 요리코. 지바현 타테야마만에서 스쿠버다이빙 클럽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이곳의 수중 신사(神社)를 지키며 요리코와 25년 우정을 나누고있다. 오랜 친구가 만나는 과정은 간단하다. 할아버지가 바다에 들어가 신사 구조물을 망치로 치면, 이 신호를 받은 요리코가 헤엄치며 다가온다. 이에 할아버지는 마치 연인이 키스하듯 산소호흡기를 떼내고 요리코와 입을 맞추고 쓰다듬는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를 타고 전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으며 이를 구경하는 관광상품까지 나올 정도.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 ‘슈렉’을 쏙 빼닮은 외모 탓에 ‘슈렉 물고기’란 별명을 가진 혹난 놀래기는 한국·중국·일본 근처 바다에서 종종 잡히는 어류다. 다 자라면 몸 길이가 1m에 달하는 대형어종으로 바다 바닥에 살면서 패류와 갑각류를 먹이로 삼는다. 험상궂은 외모와는 달리 온순한 성격이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고려 재상이 원나라서 들여온 호두, 천안 명물로 키워낸 천년고찰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고려 재상이 원나라서 들여온 호두, 천안 명물로 키워낸 천년고찰

    충남 천안시는 서북구와 동남구라는 두 개의 행정구로 나눠져 있다. 유서 깊은 땅에 역사성이 결여된 행정편의적인 구 이름 짓기는 조금 아쉽다. 어쨌든 성환읍, 직산읍, 입장면이 있는 서북구는 백제의 역사가 짙게 서려 있는 고장이다. 동남구도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구청의 홍보문구가 조금도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동남구의 병천읍은 류관순 열사의 고향이다. 그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아우내장터가 바로 여기다. 아우내장터를 ‘순대거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병천이 가진 문화적 잠재력은 그만큼 크다. 이웃한 목천읍에는 독립기념관이 있다. 류관순 열사와 아우내 의거의 상징성이 이곳에 독립기념관을 들어서게 했던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천안이 과거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남면의 천안예술의전당은 ‘21세기의 천안 문화’를 상징한다. 1642석의 대공연장과 443석의 소공연장. 미술관과 야외공연장으로 이루어진 천안예술의전당은 서울 예술의전당 인프라가 크게 부럽지 않다. 특히 수신면의 홍대용과학관은 과거를 어떻게 미래로 이어 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 흔적이다. 천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담헌 홍대용의 고향이자,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천안시의 서남쪽 끝이자, 동남구의 서남쪽 끝인 광덕면으로 간다. 광덕면이라는 땅이름은 아마도 이곳에 자리잡은 광덕사의 존재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불교적 의미의 광덕(廣德)이란 부처의 따뜻한 마음을 세상에 널리 실현해 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광덕사란 그 불덕(佛德)의 발신지(發信地)다. 불심(佛心)이 천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 수단은 호두다. ‘천안명물 호두과자’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젊은 세대를 빼놓고는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과거 기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난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것은 사실 호두과자 때문이었다. 경부선이든, 호남선이든, 전라선이든, 장항선이든 기차가 천안을 지날 때면 호두과자를 팔았다. 지금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호도과자가 인기 품목인 것은 맛도 맛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추억이 담긴 먹거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천안시에서 세종시로 이어지는 1번국도에서 광덕사가 있는 광덕면으로 가려면 풍세면을 거쳐야 한다. 풍세와 광덕을 잇는 길이 광풍로다. 지금 이 길에서는 가로수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호두나무다. 천안시는 2008년을 전후해 광풍로에 2700그루 남짓한 호두나무를 심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호두과자에 이은 또 하나의 천안명물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다. 호두는 이란·이라크와 터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러시아 남부 지역이 원산지라고 한다. 일찌감치 중국에도 전해졌는데, 실크로드를 이용한 동서 교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한 한나라(BC 202~AD 220) 시대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라고 한다. 류청신(?~1329)이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가져왔다고 대부분의 역사책은 기록한다. 류청신이 처음 호두나무를 심었다는 곳이 바로 광덕사다. 광덕사는 이제 한국 호두의 역사를 증거하는 거대한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하촌 주차장에서 광덕사로 오르다 보면 왼쪽에 근년에 세워진 ‘호두 전래 사적비’와 ‘고려 승상 영밀공 류청신 공덕비’가 눈에 들어온다. 본격적인 성역(聖域)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광덕사 사적비’가 나타난다. 일주문 뒤편에 ‘호서제일선원’(湖西第一禪院)이라는 편액이 붙은 것은 이 절이 가진 간단치 않은 역사를 짐작케 한다.광덕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652)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와 사리를 승려 진산에게 주어 도량(道場)을 열도록 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하는데, 개창 시기를 짐작케 하는 유물이나 유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추정되는 고려사경(高麗寫經)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절의 역사와 위상의 일단을 알려준다. 고려사경은 불교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광덕사 사적비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왼쪽에 제법 규모 있는 절집이 보이는데, 광덕사의 산내 암자인 안양암이다. 이름처럼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아미타도량인데, 당당한 겉모습은 독립된 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광덕사는 여기서 조금 더 오르면 나타난다. 놀랍도록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는 절집이고 마당이건만, 그 앞에 심어진 호두나무 한 그루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호두나무는 나이가 400살 정도라고 한다. 높이가 18.2m에 이르니 호두나무라기보다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느티나무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앞에는 ‘류청신 선생 호두나무 시식지(始植地)’라는 비석이 보인다. ‘호두나무를 처음 심은 곳’이라는 뜻이다. 물론 아주 오래된 호두나무인 것은 분명하지만 류청신이 살았던 고려시대 말과는 시간적 거리가 적지 않다.천안 사람들은 호두의 역사가 시작되고, 호두과자가 명물로 자리잡은 데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호두를 우리나라에 들여오고, 천안 땅에 심었다는 사람이 류청신이라는 데는 다소 복잡한 심사도 엿보인다. 심지어 지역 일각에서는 류청신과 호두나무의 전래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류청신은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에 이른바 입성론(立省論)을 제기한 인물이다.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자칫 국체(國體)를 소멸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발상이었던 때문인지 고려사는 류청신을 ‘간신전’에서 다루었다. 물론 최근에는 고려왕조의 안녕을 도모하는 외교적 노력이었다는 학계의 연구도 없지 않다. 그는 원래 이름은 비(庇)였지만,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충선왕을 환국시키고자 노력하면서 원나라 황제로부터 ‘올곧게 충성하는 신하’라는 뜻을 가진 청신(淸臣)이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몽골어가 능통했다는 류청신은 역관으로는 드물게 재상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게다가 류청신의 고향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장흥부 고이부곡은 고흥현으로 승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류청신이 천안에 살았던 기록은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다만 류청신의 손자인 류장이 천안으로 내려가 일찍이 할아버지가 가져온 호도나무의 번식에 힘썼다는 이야기가 고흥 류씨 문중에 전한다. 오늘날에도 천안에는 고흥 류씨가 적지 않게 살고 있다. 류관순 열사 역시 고흥 류씨이니 류청신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광덕사 아래는 지금도 호두나무 농장을 일구고 있는 고흥 류씨들이 있다. 류청신이 직접 광덕사에 호두나무를 심지는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천안을 호두의 고향으로 만드는 데 그의 후손들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터미네이터처럼… 마윈 “AI발 3차대전 올 것”

    터미네이터처럼… 마윈 “AI발 3차대전 올 것”

    30년내 하루 4시간·주4일 근무…“인간, AI와 싸움서 승리할 것”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그룹 마윈(馬雲) 회장이 인공지능(AI)발 3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을 경고했다.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게이트웨이 2017’ 콘퍼런스에 참석한 마 회장은 21일(현지시간) 미 경제전문방송 CNBC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이 같이 밝혔다. 그는 “1차 기술혁명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2차 기술혁명은 2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다”며 “지금은 3차 기술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마 회장은 각국 정부가 신속히 움직이지 않으면 축적된 정보와 자동화 설비의 유무에 따라 돈 많은 자와 가난한 자, 근로자와 사용자 간 격차가 심화돼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AI의 발전과 기계화의 진전에 따라 일자리가 줄어들 경우 국가 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3차 세계대전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한 것이다. 그는 향후 30년간이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다며 세계 지도자들이 자동화에 따른 고통을 피하려면 교육 시스템에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 회장은 그러나 인간이 AI와 싸움에서 승리할 것으로 내다봤다. 기계는 인간과 겨룰 지혜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혜는 마음에서 나온다”며 “AI는 두뇌에 의한 것으로 기계가 지식을 배우게 할 수는 있어도 기계가 사람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또 “AI의 목표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기계가 하게 하는 것이지, 인간 같은 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면서 “우리는 기계가 강력하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은 정보와 AI 물결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 회장은 AI 덕분에 노동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노동시간이 30년 안에 하루 4시간, 1주일에 4일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는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하루 16시간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지으며 아주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주 5일, 하루 8시간 일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느낀다”며 “30년이 지나면 사람들은 주당 4일만 일하고 하루 4시간 노동을 해도 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이 덕분에 가까운 미래에는 현재보다 훨씬 다양한 휴가를 즐기게 될 것이라며 “요즘은 30곳 정도를 휴가로 다니는데, 30년 뒤에는 300곳을 방문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손녀 같아서 포옹, 강제 추행 아냐” 주장한 60대 남성, 징역형

    “손녀 같아서 포옹, 강제 추행 아냐” 주장한 60대 남성, 징역형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의 손녀를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60대 남성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인천지법은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A(61)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고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고 22일 밝혔다. 법원에 따르면 A씨는 설날인 올해 1월 28일 오전 10시 30분쯤 인천에 있는 지인 B씨의 집에서 B씨의 손녀인 중학생 C(15)양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오랫동안 같은 동네에 살며 B씨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 명절날 술을 마시다가 할아버지 집에 인사하러 온 C양을 만났다. A씨는 B씨와 그의 가족이 잠깐 외출한 사이 혼자 남은 C양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 직후 B씨에게 “내가 미쳤었나 보다”고 사과했고, B씨 형에게도 “나를 때려죽여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재판에서는 말을 바꿨다. A씨는 법정에서 “C양이 손녀처럼 생각돼 ‘많이 컸구나’라고 말하며 포옹한 적은 있지만, 강제추행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적으로 신빙성이 있고 C양이 허위로 A씨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술을 마신 후 오랜 지인의 손녀인 피해자를 추행했다. 만 15세에 불과한 피해자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고 있고, 피해자와 부모도 엄벌을 탄원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화마당] 소중한 사람을 웃게 하기 위해 쓴 소설/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문화마당] 소중한 사람을 웃게 하기 위해 쓴 소설/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언젠가 은행에 환전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백만 원을 유로화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더니 창구 담당 직원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물었다. “유럽여행 가시나 봐요. 어디 가세요?” 이때까지만 해도 그분의 자세는 ‘당신이 어디에 가는지 궁금하다기보다 이건 그야말로 고객 응대 차원에서 묻는 겁니다’에 가까웠다. 물론 대놓고 업무 매뉴얼 느낌이 물씬 풍기는 표정으로 물은 건 아니다. 다만, 환전하러 오는 고객에게 늘 웃는 얼굴로 이런 것까지 물어봐 주려면 저분도 나름대로 귀찮겠구나 싶어서 “프랑스요” 하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그러자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사진 꼭 찍으세요(웃음)”라는 다소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차 묻는다. “프랑스만 가세요?” “네?” “비행기로 그렇게 멀리 가면 다들 주변에 다른 나라들도 돌아보고 오시던데.” “네에.” 이 대목에서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망설였지만 가만히 있으면 뭔가 비싼 비행기값 내고 고생하며 날아가서 달랑 프랑스만 구경하고 돌아올 한심한 인간 취급을 받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행사에 초대받아 가는 거라고 변명 비슷하게 덧붙였다. 아까의 매뉴얼에 가까워 보이는 자세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궁금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무슨 행사요?” “도서전요.” “무슨 도서전요?” “파리 도서전…”까지 얘기했을 때 내가 마주한 표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가만히 바다의 물길을 응시하던 노인이 거대한 청새치를 발견했을 때의 눈빛 같았다고 하면 짐작이 가실지. 움직이던 손을 멈춤과 동시에 눈이 동그래지더니 “에에? 작가세요?” 하고 진심으로 감탄한 듯 활짝 웃으며 묻는다. 이런 표현은 실례지만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우시던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속으로는 ‘당신을 웃게 할 수 있다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느냐면 오늘 소개할 남자가 그런 이유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설탕 공장이 있던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고교 시절을 보내고 하버드대에 진학해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글쓰기를 시작한 마이클 르윈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내 아내가 웃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소설은 마침내 첫 번째 앨버트 샘슨 시리즈인 ‘인디애나 블루스’로 완성되었다”고 적었다. 실제로 작가 마이클 르윈은 자상하고 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가 창조한 탐정 또한 작가의 심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그 특징을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술을 즐기지 않는다. (2) 술맛보다는 커피맛에 더 까다롭다. (3) 담배는 일절 피우지 않는다. (4) 하물며 마약 따위야 더더욱 사절. (5) 탐정 주제에 권총을 무서워한다. (6) 대신 책을 좋아한다. (7) ’율리시즈’부터 ‘법률과 가사’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시간만 났다 하면 책을 꺼내 든다. (8) 미인에게 유혹받아도 깨끗하게 거절할 줄 안다. (9) 오직 한 사람만을 마음에 두고 있는 순정파. (10) 여성에 대한 태도처럼 스포츠도 오직 농구만을 사랑하지만 모든 스포츠에 관해 박식하다. 즉, 앨버트 샘슨이라는 인간은 그야말로 성실함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탐정인 것이다. 이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샘슨을 모델로 ‘행복한 탐정’ 시리즈를 네 권이나 썼을 정도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천연사이다 같은 바른생활 탐정을 한번 만나보시면 어떨지.
  •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등대야 이젠 외롭지 않지?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등대야 이젠 외롭지 않지?

    어느 곳이나 오랜 시간 꼭꼭 숨겨둔 장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한 해 1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린다는 충남 태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관광객이 태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어도 덜 알려진 곳은 여전히 있습니다. 옹도는 그중 하나입니다. 여태껏 태안이 숨겨둔 보물 같은 여행지이지요. 옹도가 개방된 것은 2013년입니다. 그 이전까지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지만 ‘등대지기’가 외로이 섬을 지키는 동안 소문은 계속 번졌습니다. 2007년에는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등대 16경’에 포함됐고, 2012년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등대섬 20선’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개방 전부터 섬과 등대에 관한 소문이 섬 밖으로 향하고 있었던 거지요. 100여년 만에 개방됐다는 의미를 제외하면 사실 섬은 대단한 절경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웃한 가의도 등을 돌아보며 선상 유람을 즐기고, 안면도 등 태안 안쪽의 명소들을 묶어 돌아보는 재미만큼은 꽤 쏠쏠합니다.●독을 닮은 섬… 측면에서 보면 작은 고래도 닮아 옹도를 상찬하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106년 만의 개방’이다. 그동안 일반에 빗장을 풀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원인은 등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국의 여러 섬에 등대를 세운다. 자국 상선의 안전 항행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속내는 강제 병탄을 뒷받침할 군함들이 원활하게 오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천의 팔미도 등대가 1903년 가장 먼저 불을 밝혔고, 1907년 옹도 등대가 뒤를 이었다. 이후에도 군사적 이유 등으로 일반의 출입을 제한하다 팔미도 등대가 106년 만인 2009년에 개방됐고, 옹도는 2013년에 빗장을 풀었다. 옹도의 경우 태안해안국립공원에 포함됐던 것도 개방이 늦어진 한 요인이었지 싶다. 옹도는 이름에서 보듯 독을 닮았다는 섬이다. 옛사람들은 뿌연 해무 속에서 드러나는 섬의 모습에서 옹기의 모습을 떠올렸던 거다. 측면에서 보면 작은 고래를 닮기도 했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 선 등대는 고래가 숨 쉬며 내뿜는 분수를 빼닮았다. 옹도로 가는 뭍의 들머리는 안흥외항이다. 옹도는 예서 12㎞ 정도 떨어져 있다. 안흥외항을 떠난 배는 가의도를 지나 옹도에 닿는다. 옹도 여정은 다소 아쉽게 진행된다. 유람선이 하루 한 차례 오가고, 섬에 내려서는 1시간 정도 머물 뿐이다. 가의도를 슬쩍 둘러보는 것까지 포함해도 3시간 정도의 여정이다.●가파른 270여개 계단 오르면 저멀리 보이는 가의도 옹도 선착장에 내려서면 갯메꽃이 이방인을 맞는다. 이맘때면 갯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지만, 암벽 사이에 핀 모습을 보자니 제법 절해고도의 느낌이 난다. 섬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목재 데크로 조성한 길이다. 거리는 채 400m가 못 된다. 산책로 초반은 가파른 계단이다. 모두 270여개라고 한다. 섬 중턱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동백 잎을 본뜬 초록빛 차양 사이에 장승이 섰고, 옹기 포토존도 조성했다. 옹기 포토존은 옹기를 반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정상의 등대가 보이도록 배치한 조형물이다. 인증샷 찍기 딱 좋다. 전망대에 서면 시원한 풍경이 두 눈에 가득 찬다. 단도와 가의도가 손에 닿을 듯 선명하고, 그 사이로 배들이 장난감처럼 오간다. 동백 터널을 지나면 곧 섬의 정상이다. 제법 너른 공간에 등대와 광장, 숙소 등이 들어찼다. 광장에는 옹기와 고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 섬이 옹도, 혹은 고래섬이라 불리는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하다. 등대 아래는 전시관이다. 전시물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종과 DGPS다. 무종은 이름에서 보듯 종이다. 등명기가 없던 시절, 해무 등으로 시야 확보가 어려울 때 소리로 섬의 존재를 알렸다고 한다. DGPS는 위성항법장치(GPS)의 오차를 줄여주는 시스템이다. 옹도 등대는 그러니까 항로표지 외에도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등대 아래로 산책로가 나 있다. 목재 갑판을 따라 섬 가장자리까지 갈 수 있다. 멀리 바다 너머로 중국이 탐낸다는 격렬비열도가 있다는데, 아쉽게도 짙은 해무 탓에 이를 볼 수는 없었다.●갯바위가 빚어낸 이웃섬 가의도가 손에 닿을 듯 옹도까지 들어가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지만, 나올 때는 1시간 남짓 걸린다. 가의도와 일대의 풍경들을 돌아본 뒤 돌아오기 때문이다. 가의도는 봄꽃으로 이름난 섬이다. 갯바위들이 만든 풍경도 빼어나다. ‘독립문 바위’가 대표적이다. 커다란 갯바위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모양을 하고 있다. 섬 주민들은 ‘마귀할멈바위’라고 부른다. 오래전 마귀할멈이 조류 거세기로 악명 높은 ‘관장목’을 건너다 속곳이 젖자 홧김에 소변을 봤는데, 그때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가의도에는 중국 장수에 얽힌 고사가 전해져 온다. 현지 관광해설사가 전한 내용은 이렇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가씨 성을 가진 명나라 장수 3대가 조선에 파병됐다. 임진왜란 때는 1, 2대가, 정유재란 때는 3대가 함께 왔다. 이들이 태안으로 들어가기 전 머물며 전열을 추스른 곳이 가의도다. 당시 이들의 수행원 가운데 주씨 성 가진 이는 전란 뒤에도 귀환하지 않고 아예 가의도에 터를 잡았다. 한데 정유재란 때 문제가 생겼다. 손자만 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전사한 것이다. 손자는 둘의 시신을 중국으로 옮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현재의 태안 남면에 숭의사를 짓고 정주하게 됐다고 한다. 가의도에서 뱃길을 재촉하면 사자바위가 나온다. 태안의 바닷길을 지킨다는 바위다. 수사자가 갈기를 날리며 앉아 있는 모양새다. 사자바위 앞은 관장목이다. 전남 진도의 울돌목처럼 조류가 거세기로 악명이 높은 수로다. 사나워 보이는 검푸른 바닷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안흥항 옆 마도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보물선도 관장목을 건너려다 침몰했다고 한다.●사막처럼 펼쳐진 국내 최대 규모 신두리 해안사구 안흥항에서 태안 쪽으로 들어가면 신두리 해안사구(천연기념물 431호)가 나온다. 길이 3.4㎞, 폭 0.5∼1.3㎞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다. 사막처럼 펼쳐진 넓은 모래벌판에 다양하고 특색 있는 생태계가 형성돼 있다. 지금은 많이 육지화된 상태다. 갯완두, 초종용, 금개구리 등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사구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목재 갑판길을 벗어나 사구 쪽으로 발을 디디면 안내센터에서 곧바로 방송이 나온다. 목재 갑판 안쪽으로만 다니라는 얘기다. 사구 주변을 다 돌아보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린다. 여정이 촉박하다 해도 가급적 천천히 돌아보길 권한다. 태안까지 와서 안면도를 찾지 않을 수 없다.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조류가 거센 관장목에서 조운선의 침몰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조선 조정에서 이를 피하기 위해 운하를 건설하려 했고, 그러다 찾은 곳이 안면곶이었다. 1638년 무렵 현재의 남면과 안면도 사이 200m 정도 구간에서 운하공사가 시행됐고, 그 결과 뭍이었던 안면곶이 안면도라는 섬이 됐다. 뱃길은 수월해졌지만 안면도 주민들은 안면교가 건설된 1970년까지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산책을 부르는 삼봉해변 곰솔숲… 걷는 재미 쏠쏠 백사장항과 꽃지해변 사이에 삼봉, 밧개 등 아름다운 해변이 숨어 있다. 특히 삼봉해변 곰솔숲은 정말 일품이다. 산책을 부르는 솔숲이다. 바닷가 쪽에는 ‘천사길’이 조성돼 있다. 장애인과 어르신 등 여행 약자를 위해 만든 길이다. 거리는 1004m다. 다소 짧지만, 순비기와 해당화 핀 해안길을 걷는 재미가 각별하다. 한국관광공사의 김세만 대전충남지사장은 “태안은 낭만적 해안여행을 즐길 수 있는 명소가 많아 다양한 체험과 이채로운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며 “올여름 휴가지로 강력 추천한다”고 말했다. ■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 옹도까지는 하루 한 번 유람선이 오간다. 오후 2시 안흥외항을 출발해 오후 5시쯤 돌아온다. 휴가철 성수기에는 하루 두 차례로 증편된다. 선비는 2만 3000원이다.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맛집 : 딴뚝식당(673-4171)은 굴밥을 잘한다. 돌솥밥 위에 굴을 잔뜩 얹어 끓여낸다. 안면도 꽃지해변 앞에 있다. 태안 읍내 바다꽃게장(674-5197)은 꽃게찜과 꽃게장, 태안등기소 앞 토담집(674-4561)은 우럭젓국으로 각각 이름났다. angler@seoul.co.kr
  • [공희정 컬처 살롱] 지도를 따라가면 길이 보일 것이다

    [공희정 컬처 살롱] 지도를 따라가면 길이 보일 것이다

    최근 방송되고 있는 한 드라마에는 흥미로운 뇌 이야기가 나온다. 뇌의 한 부분이 과도하게 발달하여 작은 소리에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 아이는 뇌의 일부분을 제거한 후 고통에서 해방됐다. 물론 후유증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됐지만, 뇌도 일반 장기처럼 제거를 통한 치료가 가능한가라는 생각에 뇌과학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푸른 눈의 시간여행자, 그는 왜 매일 아내와 이별하나’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든이 넘은 영국인 할아버지. 그분의 아내는 한국인이다. 항공 기관사였던 그가 한국에 들렀을 때 아내를 만났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세계를 여행하며 행복하게 살아온 부부는 남편이 은퇴한 뒤 한국에 정착했는데, 몇 달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은 매일 아침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 찾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파트 경비실도 가고, 동네 지구대도 가고, 심지어 아내가 다녔던 병원에도 가보지만 아내는 없었다. 아내가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아내와 이별했던 그 순간처럼 서럽게 울었다. 밤이 지나 아침이 오면 처음 있는 일인 듯 보이지 않는 아내를 찾아 그는 또 집을 나섰다. 도대체 그의 기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내를 찾고 기다리고 이별하기를 반복하는 영국 할아버지의 순애보는 애절했다. 얼마 전 이런 일도 있었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낯익고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 듯했다.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나랑 무슨 일로 알고 지낸 사이였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은 아는 척 환한 웃음과 조금은 큰 목소리로 별일 없냐고 인사를 건넸다. 상대방도 잘 지내고 있다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잠시의 침묵. 그쪽도 나를 명료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답답하다.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헤어지고 한참 뒤에야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났다. 일 때문에 만나 함께 회의도 몇 번 했고, 심지어 밥도 먹었던 사이인데 이렇게 깜깜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사람 이름은 명함첩을 뒤져 간신히 찾아냈다. 기억은 이렇게 소멸되거나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때론 다르게 저장되기도 한다. 현직에서 은퇴하신 선배님들과의 모임에 가보면 지난 시절 무용담이 꽃을 피운다. 대부분 결과가 좋은 일에는 자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 그렇지 못한 일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듣게 된다. 하지만 다른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새로운 사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일인데도 기억의 편차는 컸다. 무의식속 보호 본능이 만들어 낸 자기중심적 기억의 왜곡이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 보면 원본이 무엇이었는지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기억도 그렇게 사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때로는 왜곡이, 거짓이 진실이 되고, 때론 자신까지 속는 경우도 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잃는 것과 같고, 기억을 왜곡하는 것은 길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 잃어버린 길은 찾으면 되지만, 망가진 길은 복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급한 마음에, 이기적인 마음에 걸어온 길을 망가뜨리지 말자. 그 길에 이어 만든 새 길의 끝이 낭떠러지일 수 있다. 지도를 펼쳐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면 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기억도 그러하다.
  • 인교진♥소이현 딸 인하은, 훌쩍 큰 근황 ‘말도 잘하네~’

    인교진♥소이현 딸 인하은, 훌쩍 큰 근황 ‘말도 잘하네~’

    배우 인교진, 소이현 딸 인하은의 근황이 공개돼 화제다. 20일 소이현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목욕하기 전♡ 인하은이 한글놀이~^^ 요새 부쩍 말도 잘하고 단어 연결도 하고. 엄마 이리와~도 하고ㅋㅋ 진짜 신기해죽겠네”라는 글과 함께 동영상 한 개를 올렸다. 영상에는 부부의 딸 인하은이 단어 몇 개를 말하는 모습이 담겼다. 인하은은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악어’, ‘꽃’, ‘기린’ 등 다양한 단어를 말하는 모습으로 귀여운 매력을 뽐냈다. 인하은은 아빠 인교진과 함께 지난해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한 바 있다. 당시에 비해 훌쩍 큰 모습 또한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편, 지난 2014년 결혼한 인교진, 소이현 부부는 슬하에 딸 인하은을 뒀다. 최근 소이현은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한 바 있다.사진=인스타그램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터키의 저항 작가 ‘네집 파즐 크샤큐렉’의 작품 100여권 한국에

    터키의 저항 작가 ‘네집 파즐 크샤큐렉’의 작품 100여권 한국에

    터키의 출판인 엠라 크사큐렉(오른쪽)이 19일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해 터키의 유명 저항 작가이자 본인의 조부인 네집 파즐 크사큐렉의 작품 100여 권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엠라 크사큐렉은 지난해 6월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했다가 도서관 내 정기간행물실의 ‘터키의 창’ 서가에서 우연히 조부의 도서를 발견했다. 생각지 못한 일에 큰 감동을 받은 엠라 크사큐렉은 당시 국립도서관 관계자에게 할아버지의 작품 전질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고, 터키가 주빈국으로 참여한 ‘2017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해 이 약속을 지켰다. 엠라 크사큐렉은 “이번 도서 기증을 바탕으로 한국과 터키의 문화 교류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라이프 톡톡] 고질 민원인과 절친된 민원처리 달인의 3가지 비법

    [라이프 톡톡] 고질 민원인과 절친된 민원처리 달인의 3가지 비법

    “민원에도 첫 단추가 중요합니다. 첫 단계에서 민원인이 하는 얘기를 경청하고, 되는 부분과 안 되는 부분을 명확하게 인내심을 갖고 설명해 줘야 합니다. 그런 게 안 되니까 불만이 쌓이고, 불신이 깊어지다 보면 고질 민원이 되는 겁니다.”#“경청·전문성·원칙으로 민원인 대하라” 류춘열(57)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 심사기획과 서기관은 37년에 걸친 공무원 생활 가운데 25년을 민원 관련 업무를 한, 글자 그대로 ‘민원처리 달인’이다. 지난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만난 그는 오랜 민원처리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정립한 철학을 들려준다. 그는 “공무원이 하는 일은 결국 민원인과 관련한 업무가 대부분”이라면서 “민원만 잘 처리해도 백점 공무원”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민원처리를 잘하기 위한 덕목”을 물었더니 “첫째는 상대방 입장에서 잘 듣는 경청하는 자세, 둘째는 해당 업무에 대한 전문성, 셋째는 당장엔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법규를 정확하게 이행하는 원칙”이라고 꼽았다. 류 서기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대학에 갈 형편은 안 되고 먹고살기 힘들어서” 공무원에 지원했다. 9급 초임 시절 10년 가까이를 관세청 마산세관 창원출장소에서 보냈다. 관세청엔 수출입 관련 민원처리 업무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분야 업무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 설립된 부패방지위원회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민원처리 관련 업무를 많이 다뤘다. 특히 권익위가 2011년 정부 최초로 만든 고충민원특별조사팀에서 활동하던 무렵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고충민원특별조사팀은 대개 수십년간 동일한 사안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이른바 ‘고질 민원’을 해결하려면 별도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는 고민에서 나왔다. 그는 이곳에서 고질 민원인 약 60명을 담당했다. “절반가량은 해소했습니다. 지금도 두세명은 가끔 통화를 하고요. 고질적인 민원인도 사람이라는 사실에 눈을 돌릴 일입니다. 먼저 전화해 안부도 물어보고 하면서 조금씩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합니다. 맺힌 게 많은 분들이라 통화 한번 하면 한두 시간쯤 꼼짝못하죠.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상당한 효과가 있더라고요.” “민원 대응 인력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 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고질 민원인 A씨에 얽힌 사연도 남겼다. 20년 넘게 “증조할아버지 호적을 찾아 달라”는 민원을 제기해 온 A씨는 시청부터 법원, 감사원, 청와대 등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증조할아버지가 1840년에 태어난 분이라 호적 자료를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류 서기관은 “왜 증조할아버지 호적을 찾으려 하는지 이유도 얘기하지 않고 심리상담을 연결해 주려 해도 거부하는 게 많이 안타까웠다”고 되돌아봤다. 류 서기관이 보기에 고질 민원을 해결하려면 결국 가슴에 맺힌 걸 풀어 주는 일이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 강조하는 게 바로 초기대응이다. 또 “대부분 고질 민원은 처음에는 별거 아닌 것에서 시작한다”면서 “불만이 쌓이고 쌓이면서 고질 민원으로 커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원에 대응하는 인력에 대한 좀더 체계적인 교육과 양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글 사진 세종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개성상인의 ‘그 집’ 켜켜이 쌓인 예술사랑… 전통의 멋, 공유하다

    개성상인의 ‘그 집’ 켜켜이 쌓인 예술사랑… 전통의 멋, 공유하다

    1917년에 태어난 인물 중에 한국의 근현대기에 활약한 유명 인사들이 유독 많다. ‘마지막 개성상인’ 송암(松巖) 이회림(1917~2007) OCI 그룹 창업자도 그중 한명이다. 신용, 검소, 성실의 3대 덕목을 생활 신조로 삼아 사업을 일구고 불모지였던 국내의 화학산업을 개척했던 송암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물론 기업의 성장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술품 수집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개인 송암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송암의 예술사랑의 의미는 우리 전통 예술의 멋을 음미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더욱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고서화와 도자기 등 골동품 수집을 시작한 그는 사업의 본거지인 인천의 학익동에 송암미술관을 지어 평생 수집한 8400점의 미술품과 함께 인천시에 기증했다. 생전에 본인의 개인 재산을 기부해 설립한 송암문화재단은 그의 장학사업과 예술후원사업을 이어 가고 있다.송암문화재단 산하의 OCI미술관에서 송암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전 ‘그 집’이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송암의 사저 터에 건립된 송암회관을 전시공간으로 개조해 2010년 개관한 미술관은 그의 예술사랑 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는 뜻깊은 장소다. 전시는 옛 그림과 도자기, 말년에 정성을 쏟아 수집했던 북한 유화 등 송암이 살아생전 수집하고 사랑했던 애장품과 OCI미술관의 프로그램을 통해 육성된 젊은 작가들의 현대미술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문화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던 송암의 의지가 후대에 이르러 이런 결실을 거두었음을 보여 준다. 석지 채용신과 우청 황성하를 비롯해 박경종, 박종호, 양정욱, 유근택, 이우성, 이현호, 임택, 전은희, 정재호, 한상익, 허수영, 홍정욱 등 작가 14명의 작품과 작자 미상의 책가도, 도자 등으로 구성됐다. ‘OCI 영크리에이티브스’와 OCI미술관 창작 스튜디오를 거쳐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 8명이 신작을 출품했다.전시는 1층부터 3층까지 전시장을 따라 올라가며 집의 바깥부터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도록 짜여져 있다. 1층은 바깥세상의 풍경이다. 개성 출신 화가 우청 황성하의 10폭 산수화를 중심으로 현대미술가들이 바라보는 하늘, 숲, 산, 호수의 풍광이 펼쳐진다. 송암이 고향을 그리며 모았던 1500점의 북한 유화 중 공훈예술가 한상익이 그린 금강산 풍경 ‘삼선암에서’(1986)도 걸렸다. 2층은 석지 채용신의 ‘팔도 미인도’ 병풍, 책가도와 도자, 전은희와 정재호 작가가 그린 오래된 집의 풍경, 양정욱의 키네틱 아트 ‘어느 가게를 위한 간판’ 등이 어우러져 북적이는 거리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3층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 박경종은 시공간을 넘나들듯 과거 송암이 사용하던 물건과 현대의 일상용품을 뒤섞어 설치해 놓았다.송암의 손녀인 이지현 OCI미술관 부관장은 “할아버지께서는 매일 아침 소공동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붓글씨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곤 하셨다”면서 “벽돌 쌓듯 차곡차곡 모아온 시간과 정성, 인연으로 만들어 낸 공간에서 작가들과 함께 할아버지의 정신을 기려 보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미술관이 된 그 집 5층에는 송암의 방이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수준급 서예가였던 그가 사용했던 다양한 종류의 붓과 벼루, 연습하던 종이 더미가 은은한 묵향과 함께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책상 위에는 돼지저금통부터 ‘정로환’ 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양의 저금통이 놓여 있다. 한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송암은 동전이 생기면 무조건 저금통에 넣었다고 한다. 커다란 인삼주 병도 눈길을 끈다. 사람에 대한 존중과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송암은 주변 사람들의 건강이 염려되면 “먹고 힘내라”는 말과 함께 6년근 인삼을 종이에 둘둘 말아 선물하곤 했다. 인삼은 개성의 특산품으로 그의 고향사랑이 담긴 격려품이었다. 송암의 첫 직장인 손창선 상점은 1000여가지의 물건을 취급하는 만물상이었다. 10대의 그는 자전거에 짐수레를 달고 주문받은 물건을 배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낡은 자전거는 성실하게 페달을 밟았던 젊은 송암을 보는 듯하다. 한국 경제사의 1세대 기업가로 부와 명예를 일군 송암은 어떻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회에 돌려줄 수 있었을까. 책상 뒤 벽에 걸린 누렇게 바랜 액자 속의 휘호가 그 답일 것 같다. 그가 수시로 보고 마음에 새겼을….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 전시는 7월 1일까지.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현직 교수진 현장중심 커리큘럼으로 전문성 키워”

    “현직 교수진 현장중심 커리큘럼으로 전문성 키워”

    한은주(48·조리산업경영학과3)씨는 막걸리를 혼합해 발효 과정을 거친 뒤 쪄내는 증편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한다. 4년제 일반대학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관련 일을 하다 10년 전부터는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가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5년 전부터는 발효 떡을 연구 중이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인 가미증편은 화학 식품을 빼고 자연발효에 중점을 두면서 백화점 등에 공급되는 탄탄한 브랜드로 알려졌다.가업을 받은 데다 현장 경험도 풍부한 전문가지만, 발효학에 대한 이론에 대해 늘 갈증을 느꼈다. 이론이 뒷받침해 줘야 연구를 이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대학을 알아보면서 사이버대로 관심이 옮겨 갔다. “교수진에 가장 우선 순위를 두었는데, 세종사이버대 조리과는 현직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더라고요. 현장 실습 과정 등도 촘촘하게 잘 짜놓았고요.”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하지만 공부는 절대 몰아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중에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루 1과목은 무조건 수업을 듣기’를 원칙으로 해 짬 날 때마다 공부한다. 한 학기를 겪어 보니 역시 실제로 이론은 달랐다. 그래서 현장 경험을 이론으로 구체화하는 데 즐거움이 크다고 했다. “그동안 했던 일들 속에 이런 이론이 바탕이 됐던 거였구나 확인하곤 합니다. 전문성이 더 확장되는 느낌이어서 만족합니다.” 한국전통식품개발원에서 떡 분야를 맡고 있는 한씨는 현장과 이론을 접목해 자격증 발급까지 가능한 교육 과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떡은 하나의 중요한 음식 장르”라며 “한국의 전통 음식 가운데 떡이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정답 없는 과제하는 아이들… 수업 눈빛이 달라졌다

    정답 없는 과제하는 아이들… 수업 눈빛이 달라졌다

    대구 경서중 ‘교과 통합’ 총리賞 5분짜리 조부모 인터뷰 동영상 기록유산 배우고 영어 자막 붙여 층간소음 연구 등 수업 다양해져 대구 달성군 옥포면 경서중 2학년 학생들은 올 3월 특이한 과제를 받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5분짜리 동영상을 만들어 오라는 것.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신 학생들은 근처 경로당을 찾아 이야기를 들었다. 5분짜리 인터뷰지만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야 했고, 처음 해 보는 인터뷰여서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했다.등 떠밀려 마지못해 진행한 인터뷰는 그러나 학생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로 이어졌다. 지루할 줄만 알았던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이 재밌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할머니께서 어릴 적 바닷가에 사셨던 이야기와 그 지역에만 있는 ‘이월’이라는 명절에 대해 말씀해 주셨어요. 책에도, 인터넷에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머니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어요.” 이 학교 학생 박나경양의 말이다. 박양을 비롯해 2학년 전교생 61명은 이렇게 한국전쟁 이야기, 마을 역사에 얽힌 이야기, 조부모의 학창 시절, 군대 이야기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수업은 경서중 교사들이 올 2월 모여 만든 교과 통합 프로젝트로, 지난 1학년 2학기 자유학기제 수업 이후 연결되는 ‘포스트 자유학기제’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조부모에 대한 인터뷰는 2007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메모로’(기억의 은행)에서 착안한 국어 수업이다. 역사 수업에서는 ‘기록문화유산’이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배웠다. 기술 수업은 휴대전화로 촬영한 영상에 영상편집 프로그램으로, 음악은 어떻게 넣고 자막은 어떻게 입히는지 위주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영어 수업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하고 이를 영어 자막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이렇게 만든 61개 영상을 메모로 사이트에 올리는 것으로 이번 달 수업을 마무리한다. 수업을 설계한 나혜정(38) 국어교사는 “수업을 어떻게 바꿔 볼까 교사들이 아이디어를 내 만든 수업인데,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 반응도 좋았다”면서 “자유학기제를 진행하며 새로운 수업 아이디어가 많이 생겼다”고 말했다. 교육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은 14일 조부모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교과 통합 수업 ‘세상과 나누는 각양각색 이야기, 우리로 성장하다!’로 1등 상인 국무총리상을 받은 경서중 수업 사례를 비롯해 교과수업개선 부문 사례 20편, 자유학기활동 부문 16편, 학교 교육과정운영 부문 11편 모두 47편을 ‘자유학기제 실천사례 연구대회’ 우수작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미니 광섬유 조명 등 전기회로를 이용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든 경기 중원중 등 입상작 46편의 연구자 101명은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교육부는 수상작들에 대해 “지난해에 비해 자유학기제 기간 다양한 수업이 진행됐다”고 밝혔다. 예컨대 서울 문현중은 ‘소통’, ‘재판’, ‘애니메이션’ 등을 주제로 과학과 미술, 국어와 사회 등 교과 간 융합 수업을 하고, 수업 연구 동아리에 모든 교사가 참여해 매월 정기모임을 열어 수업 동영상을 제작했다. 이 밖에 ‘무료 실내화 대여소 운영’, ‘층간소음 실태 연구’ 등 생활 속 주제를 선정해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기 시흥중 사례도 주목받았다. 입상작은 올 8월 서울 더케이호텔에서 열릴 ‘자유학기제 수업콘서트’에서 발표된다. 연구대회 네트워크(에듀넷-티클리어)와 교육부 자유학기제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3대 걸쳐 10명… 바다 지킨 해군 명가

    3대 걸쳐 10명… 바다 지킨 해군 명가

    가족의 군 복무기간을 합치면 총 200년이나 되는 집안이 있어 화제다. 지난달 25일 임관한 이준호(21) 해군 하사의 가족과 외가는 10명이 3대에 걸쳐 해군·해병대에서 복무했다.해군은 11일 장교, 부사관, 병사를 여러 명 배출한 이 하사 집안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가 해군 간부가 된 데는 해군 간부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이 하사의 아버지 이재갑(47) 원사는 1988년 해군 부사관 115기로 입대해 항공기체 직별에서 29년째 복무 중이다. 할아버지 이동환(75)씨는 1961년부터 1995년까지 34년 동안 해군에서 복무하고 원사로 퇴역했다. 베트남전에 파병돼 해군수송전대 임무를 수행했고 강원함 주임원사를 지냈다. 이 하사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부대에는 고모부 표세길(52) 원사가 있다. 이 하사의 작은아버지도 해군 병장 출신이다. 이 하사의 작고한 이모할아버지(아버지의 이모부)인 임경호씨와 안천응씨도 각각 해군과 해병대에서 20∼30년 동안 근무했다. 해병대는 편제상 해군본부 예하에 있어 넓은 의미의 해군에 들어간다. 해군의 자부심에서는 이 하사의 외가도 뒤지지 않는다. 외할아버지 조승일(73)씨는 해군에서 36년 동안 근무하고 1998년 원사로 퇴역했다. 조씨도 베트남전 참전용사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조씨는 외손자인 이 하사의 임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 하사는 외할아버지를 찾아가 임관 신고를 했다. 이 하사의 외삼촌 3명 가운데 2명은 해군 병장 출신이다. 이 하사의 친가는 해군 7명을 배출했고 복무 기간을 합하면 158년 3개월이다. 외가 쪽에서는 해군 3명이 나왔고 복무 기간은 모두 41년 5개월이다. 복무 기간을 다 합하면 199년 8개월에 달한다. 이 하사는 “해군에 젊음과 청춘을 바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존경한다”면서 “집안 3대가 해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조국과 해군에 꼭 필요한 부사관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이병철 생가, 곡식 쌓아 놓은 형상의 산 끝자리 ‘명당 중 명당’

    이병철 생가, 곡식 쌓아 놓은 형상의 산 끝자리 ‘명당 중 명당’

    경남 의령군 정곡면 이병철 회장 생가는 소문난 부자 관광 명소다. 이 회장 할아버지가 1851년 손수 지은 한옥이다. 이 회장은 이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결혼해 분가하기 전까지 살았다. 그동안 몇 차례 증·개축을 거쳤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광 등의 건물이 뒷산과 대숲, 바위벽, 토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지 면적은 1907㎡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산 능선 마지막 평탄한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풍수지리학자들에 따르면 곡식을 쌓아 놓은 것처럼 생긴 노적봉 형상을 한 주변 산의 기가 산 끝자락에 있는 생가자리에서는 혈이 돼 맺혀 있어 지세가 융성해 후손까지 번성하다고 풀이한다. 멀리 10리 밖에 흐르는 남강 물이 생가 쪽을 향해 물길을 바꿔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를 이뤄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생가 마당 옆에 있는 자연석 바위는 가장 센 부자 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몇 년 전부터는 바위에 가까이 갈 수 없게 앞쪽에 화단을 만들었다. 생가 관리인 전모씨는 “사람들이 앞다퉈 바위를 만지려고 하거나 바위에 올라가는 바람에 사고 위험이 있어 접근을 통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가 태어난 명당을 구경하고 기를 받으려고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전씨는 “평일에는 주로 관광버스 등을 이용해 하루 400여명이 방문하고 휴일에는 1000여명이 찾는다”고 말했다. 올해 초 창원상공회의소 소속 지역 기업인들이 이 회장 생가를 둘러보며 기업이 번창하기를 소원했다. 마을 주민들은 생가 주변 음식점과 커피가게, 슈퍼마켓 등도 장사가 잘된다고 귀띔했다. 상가마다 이름 앞에 ‘부자’가 붙은 곳이 많다. 복권을 파는 가게도 지난해 문을 열었다. 복권 판매가게 주인은 “주말이면 복권이 다 팔린다”며 “로또 복권 판매점 신청도 했다”고 말했다. 글 사진 의령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신이라 불린 소년’…꼬리 제거 후 ‘인간’된 사연

    ‘신이라 불린 소년’…꼬리 제거 후 ‘인간’된 사연

    등에서 돋아난 기형 꼬리 때문에 지역민들 사이에서 ‘신’으로 추앙받았던 소년이 현지 병원의 도움으로 꼬리를 제거하고 정상적인 삶을 찾은 사연이 공개돼 화제다. 영국 일간 미러는 최근 인도 북부 찬디가르 시에 살고 있는 14세 소년 아시드 알리 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칸은 엉덩이 위 척추로부터 돋아난 18㎝ 가량의 꼬리 때문에 현지 주민들에게 힌두교의 원숭이 신 ‘하누만’의 현신으로 여겨져 왔다. 마을 주민들은 칸을 찾아와 꾸준히 ‘공물’을 바치는 등 칸을 추앙했지만 칸은 꼬리로 인한 불편에 점점 지쳤고, 결국 현지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꼬리를 제거하게 됐다. 2001년에 태어났을 때부터 칸은 10㎝ 길이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200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듬해 재혼한 어머니가 칸을 버린 이후로는 할아버지 이크발 쿠레시(64)와 단 둘이서 살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칸을 찾아와 경배하고 물건과 현금을 선물로 두고 갔다. 그렇지만 계속 꼬리를 매단 채 살 수는 없었다. 꼬리로 인해 척추에 문제가 생겨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고, 이동 시에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등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을 얻어야 할 지 몰랐다. 이크발은 “시골에 살며 교육도 못 받은 우리는 어떤 의사에게 부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전에 찾아갔던 의사들은 수술에 부담을 느꼈고, 우리 또한 그들에게 맡겼다가 칸의 목숨에 혹여나 해가 갈까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지난 2월, 한 사회복지가가 모할리 시 포티스 병원 의료진에 대해 얘기해줬다. 칸에 대해 들은 병원 의료진이 칸의 꼬리를 제거하고 척추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칸의 수술을 집도한 포티스 병원 신경외과의 아시스 파탁은 “칸에게는 내반족(발이 안쪽으로 휘는 병) 증상이 있었고 하체가 매우 부실했다. 꼬리를 빨리 제거하지 않는다면 위쪽의 척추에 변형을 일으킬 위험도 있었다”고 당시 상태를 설명했다. 7시간에 걸친 복잡한 수술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끝났다. 포티스 병원측은 수술비도 받지 않고 칸을 도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이크발은 “의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칸은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며 “그동안 사람들은 칸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생각에는 남들과 똑같은 아이일 뿐이다. 이제 다른 이들과 동등해 진 것 같아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칸 또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기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신으로 칭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는 내가 보통 아이라고 생각해 왔고 신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밝혔다. 사진=ⓒ유튜브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지금, 이 영화] ‘8인의 수상한 신사들’

    [지금, 이 영화] ‘8인의 수상한 신사들’

    ‘8인의 수상한 신사들’의 원제는 ‘류조와 7인의 부하들’이다. 부하라는 말보다, 일본어 그대로 ‘꼬붕’(子分)이라고 해야 말맛이 제대로 살 것 같다. 그러면 꼬붕의 상대어, 두목을 뜻하는 ‘오야붕’(親分)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제목만 봐도, 이 작품은 야쿠자 분위기가 물씬 난다. 게다가 감독도 기타노 다케시가 아닌가. 그는 ‘소나티네’(1993)와 ‘하나비’(1997) 등의 영화에서 야쿠자 캐릭터로 세계의 잔혹성을 형상화한 바 있다. 확실히 ‘8인의 수상한 신사들’은 야쿠자 영화가 맞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인 것과 달리 이 작품은 15세 관람가다. 야쿠자가 나오긴 하는데 누아르가 아니라 코미디 장르라서 그렇다.사실 기타노 다케시는 전체 관람가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1999)도 만든 적이 있다. 엄마를 찾으러 길을 나선 소년과 전직 야쿠자와의 동행을 다룬 이 영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다재다능한 감독이자 배우인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어린아이와 어른-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는 애어른 같은 남자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기타노 다케시도 올해 70세다. 그가 자신과 비슷한 노년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60대 후반에 이 영화를 찍었다. 주연은 그 또래 배우들이 맡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야쿠자 영화이기는 하되, 은퇴한 야쿠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제는 야쿠자라기보다, 동네 할아버지가 된 그들의 생활이 왜 짠하지 않겠는가. 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기타노 다케시는 자기 스타일대로 서사를 밀어붙인다. 연민 따위 없다. 모든 캐릭터가 기타노 다케시처럼 어린아이와 어른―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는 애어른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분명 기타노 다케시표 코미디 영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웃기기만 하지 않는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패러디한 ‘8인의 수상한 신사들’은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7인의 사무라이가 농민을 약탈하는 산적 떼와 맞섰듯이, 류조와 7인의 부하들은 보이스피싱 등의 수법으로 늙은이를 등치는 양아치 조직과 대결한다. 이런 대립은 노인과 청년 간 세대 갈등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화 주인공이 노인인 한에서,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옛날에 대한 향수가 배어난다. 세련됐으나 속물적인 현재에 비하면, 거칠더라도 낭만적인 과거가 낫다는 복고적 태도를 기타노 다케시 역시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볼만하다. 그가 세월의 흐름을 존중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 기타노 다케시는 좋았던 지난날을 추억하는 본인마저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냉철한 코미디언이기도 하다. 그는 수다스럽게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영화뿐 아니라 인생 전체에 걸쳐, 기타노 다케시는 자기를 발명하고 스스로 증명해왔다. 8일 개봉.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월드피플+] 64년 전 사 2000배 뛴 주식…98세 노인, 환경단체에 기부

    [월드피플+] 64년 전 사 2000배 뛴 주식…98세 노인, 환경단체에 기부

    64년 전 1000달러에 산 주식이 현재 무려 200만 달러(22억 4000만원)의 값진 보물이 돼 돌아왔다.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ABC뉴스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시의 토박이인 98세 노인 루스 그레멜의 훈훈한 미담을 보도했다. 100세를 눈 앞에 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직 정정한 루스 할아버지는 '좋은 주식은 장기 보유하라'는 격언을 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그러나 단순히 돈을 불리는 것이 목적인 보통사람과 할아버지는 출발부터 결말까지 달랐다. 미 육군장교 출신으로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한 루스 할아버지는 반갑게도 워싱턴 D.C.에서 근무하며 한국전쟁에도 기여했다. 주식을 사들인 것은 1953년으로 언젠가는 약과 화장품이 유망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시카고의 한 제약회사 주식을 1000달러를 주고 샀다.   전역 후 법률가로 활동한 할아버지의 또하나의 직업 아닌 직업은 바로 보이스카우트 단장이었다. 자연과 동물을 벗삼아 수많은 청소년들의 멘토로 지내왔다. 이렇게 그는 한평생을 청소년들과 함께했으나 정작 본인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지금까지 홀로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사연이 미 전국 언론을 장식한 이유는 오랜시간 장롱 속에 묻혀있는 이 주식을 비영리 환경단체인 일리노이 오듀본협회에 기부했기 때문이다. 특히 오듀본협회 측은 이 돈으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야생동물보호구역을 만들 계획이다. 일리노이 오듀본협회 톰 클레이 이사는 "루스 할아버지는 나의 영웅이자 미국인의 영웅"이라면서 "1965년 협회에 가입한 이후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자연과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가르쳐왔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평생 헌신한 자연으로 돌아갈 할아버지의 감회는 물론 남다르다. 루스 할아버지는 "내가 수많은 아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말만 들어도 행복하다"면서 "여러 세대가 자연보호구역을 방문해 즐기고 느끼기 바란다"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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