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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환과 열애설’ 박단아의 놀라운 집안

    ‘박태환과 열애설’ 박단아의 놀라운 집안

    수영선수 박태환과 열애설이 난 박단아 씨의 집안이 공개됐다.27일 오후 방송된 종합편성채널 TV조선 ‘별별톡쇼’에서는 수영선수 박태환의 열애설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이날 두 사람의 열애설을 언급하던 도중 백은영 연예부 기자는 “박단아씨가 전국체육대회에 참여해 박태환에게 입뽀뽀를 날렸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열애설을 인정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이 여성이 얼핏 봐도 굉장히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다. 무용학도인데 키가 굉장히 크고 늘씬하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대한민국 한복 모델 선발대회 결선까지 진출을 했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리고 체육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사의 친손녀다. 박 씨의 할아버지가 88올림픽, 2002월드컵 조직위원장에 전 체육부장관인 고 박세직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하재봉 시사평론가는 “측근에 따르면 체육계 인사인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던 박 씨와 운동선수인 박태환이 체육에 대한 공감대가 잘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열애설 이전에도 두 사람이 친했던 정황이 있다”고 추가했다. 사진=TV조선 ‘별별톡쇼’ 방송 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檢 “송선미 남편 사건은 680억 재산 노린 ‘청부살인’”

    檢 “송선미 남편 사건은 680억 재산 노린 ‘청부살인’”

    장손 “후배에게 20억 제시 청부” 범행 직후 ‘우발적 살인’ 검색도검찰이 지난 8월 21일 서울 서초구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어난 배우 송선미씨의 남편 고모(45)씨 피살사건을 재산 분쟁 과정에서 발생한 ‘청부살인’으로 결론 내렸다. 이 사건은 재일교포 재력가 곽모(99)씨의 600억원대 부동산 재산을 두고 곽씨의 외손자인 고씨와 다툼을 벌이던 장손 곽모(38·구속 기소)씨가 “(성공하면) 20억원을 주겠다”며 후배 조모(28·구속 기소)씨에게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 이진동)는 26일 장손 곽씨에게 살인교사 혐의를 적용해 추가 기소했다. 장손 곽씨는 할아버지의 대전, 경기 화성 등지에 있는 68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빼앗기 위해 증여계약서를 위조한 사실이 드러나 지난 13일 기소된 상태다. 사건의 발단은 재력가 곽씨의 장남(71)과 장손이 공모해 지난해 11월부터 위조된 증여계약서를 토대로 곽씨 몰래 부동산 명의 이전을 하면서 시작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고씨는 일본에 있던 곽씨와 상의 끝에 두 사람을 2017년 2월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고소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장손은 결국 고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조씨를 동원했다. 2012년 일본의 한 어학원에서 알게 된 두 사람은 올해 5월부터는 오피스텔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마땅한 직업 없이 2억원의 빚에 허덕이던 조씨는 결국 20억원과 변호사 비용, 향후 가족 부양을 제안받고 지난 8월 21일 고씨를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나 미리 준비한 흉기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 장손이 살인를 지시했다는 단서는 휴대전화와 노트북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다. 장손은 조씨에게 “(살해 후) 필리핀에 가서 살면 된다”라는 문자를 보내는가 하면, 살인이 일어난 직후에는 ‘살인교사죄 형량, 우발적 살인’을 검색한 것으로 드러났다. 급기야 장손의 휴대전화에서는 조씨의 어머니가 약속대로 변호사 비용을 달라고 요청하는 문자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장손은 돈을 건넬 경우 살인교사 혐의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비용을 주지 않는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범행 장소를 눈에 띄기 쉬운 변호사 사무실로 선택한 경위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장손이 조씨의 민·형사 소송을 돕던 변호사까지 죽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씨가 이를 거절하자 장손은 “(겁을 주기 위해) 변호사 앞에서 고씨를 죽이라”고 주문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씨 측도 조씨가 ‘장손과의 소송 등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주겠다’며 접근해 오자 안전하다고 생각한 자신들의 변호사 사무실을 접촉 장소로 삼았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송선미 측 “남편, 계획된 흉악범죄에 의한 억울한 죽음”

    송선미 측 “남편, 계획된 흉악범죄에 의한 억울한 죽음”

    배우 송선미씨 측이 26일 검찰이 발표한 송씨 남편 고모(44)씨 청부 살인 사건 수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송씨 소속사 제이알이엔티 측은 이날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의하면 고인은 불법적으로 재산을 빼앗긴 할아버지를 돕던 중 계획된 흉악범죄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제이알이엔티 측은 “일부 잘못 보도된 바와 같이 유산이나 상속관련 분쟁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니며 생존해계신 할아버지가 불법적으로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순수하게 할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이를 보조하던 고인에게 앙심을 품은 가해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행”이라며 “고인은 정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분쟁의 당사자는 불법적으로 재산을 빼앗긴 할아버지와 이를 빼앗아간 가해자들”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망인과 어린 딸을 포함한 유족들이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고인이 마치 할아버지의 재산을 탐내어 가해자들과 분쟁을 벌인 것처럼 사실과 다르게 오도된다면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유족들에게도 다시 한번 못을 박는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래는 공식입장 전문.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의하면 고인은 불법적으로 재산을 빼앗긴 할아버지를 돕던 중 계획된 흉악범죄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가해자들은 고령의 할아버지를 상대로 문서등을 위조하며 재산을 탈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재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시던 할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이를 돕던 고인을 상대로 살인을 사주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본 사건은 일부 잘못 보도된 바와 같이 유산이나 상속관련 분쟁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니며 생존해계신 할아버지가 불법적으로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순수하게 할아버지의 의사에 따라 이를 보조하던 고인에게 앙심을 품은 가해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행이며 고인은 정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분쟁의 당사자는 불법적으로 재산을 빼앗긴 할아버지와 이를 빼앗아간 가해자들입니다. 미망인과 어린 딸을 포함한 유족들이 아직도 고인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재산환수를 순수하게 돕던 고인이 마치 할아버지의 재산을 탐내어 가해자들과 분쟁을 벌인 것처럼 사실과 다르게 오도된다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황망한 유족들의 가슴에도 다시 한번 못을 박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시어 본 사건을 가해자와 고인과의 재산다툼으로 치부하는 글이나 보도를 삼가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요청드리며 진실규명에 수고해주신 검찰관계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숨진 아내 사진 놓고 밥 먹는 노인…세상이 울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한 노인의 사연이 전해졌다.  최근 미국 ABC뉴스 등 현지언론은 작고한 아내 사진을 놓고 식사를 하는 할아버지 클라렌스 퍼비스(93)의 감동적인 사연을 보도했다. 조지아 주 리즈빌에 사는 할아버지는 매일 점심 때가 되면 단골 레스토랑을 찾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다. 주위 손님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식탁 위에 함께 놓여있는 사진 액자. 사진 속 주인공은 2013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캐롤라인이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연의 시작은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했던 청년 클라렌스는 16세의 꽃다운 소녀 캐롤라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듬해 결혼한 두 사람은 3명의 자식을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으나 4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며 64년의 행복했던 시간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홀로 남은 할아버지가 매일 같은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생전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식당이기 때문이다. 이에 아내가 떠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할아버지는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자리와 음식을 시켜놓고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한다. 레스토랑 주인 제임스 조이스는 "할아버지는 이미 우리 식당의 일부같은 존재"라면서 "돌아가신 아내 사진을 놓고 식사를 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감동적인 사연은 더 있다. 64년 간의 행복했던 추억을 기록한 사진은 여전히 그의 집에 가득차 있으며 특히 램프 하나는 밤이든 낮이든 항상 켜져있다. 그 이유 역시 생전 아내가 항상 이 램프의 불을 밝혀두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할아버지는 하루 4번씩 집 인근에 있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 묘비에 키스를 하고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긴다.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둘만의 사랑을 되뇌었다. "세상에 나보다 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원하던 것이 아내가 원하던 것이었고 아내가 원하던 것이 내가 원한 것이었다. 아내는 항상 나와 함께했고 지금도 나와 함께 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시진핑 2.0시대] 중국 공산당 신임 상무위원

    [시진핑 2.0시대] 중국 공산당 신임 상무위원

    ‘시진핑의 오른팔’ 리잔수… 7월 한·중 정상회담도 동행 시진핑 주석과 함께 술을 마시며 우의를 나눈 사이다. ‘시진핑의 오른팔’로 불린다. 1983~1985년 스자좡지구 우지현 서기를 지낼 당시 시 주석은 바로 맞붙어 있는 정딩현 서기로 일했다. 작은할아버지가 혁명지도자며 숙부가 국공내전 도중 숨지는 등 혁명원로 가족 출신이다. 구이저우성 서기로 재임하며 생태 문명 건설이란 이념을 제시해 ‘시진핑 사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2003년 시안시 하이테크 사업 유치를 위해 서울을 방문했으며, 2014년 7월 시 주석을 수행해 방한했다. 지난 7월 베를린 한·중 정상회담에도 동행하는 등 시 주석 해외 순방의 고정 수행인사다.‘시 주석의 경제 책사’ 왕양 … 정몽구 등 재벌 총수와 인연 시 주석의 ‘경제 책사’로 통한다. 후진타오 라인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이지만 후 전 주석의 고향인 안후이성에서 20대 초반에 5년간 활동한 게 전부여서 상무위원으로 발탁됐다. ‘등롱환조’(騰籠換鳥·새장을 비워 새를 바꾸다)란 산업고도화정책을 도입해 남부의 주장삼각주 지역을 첨단 정보기술(IT)산업 지대로 바꿔 놓았다. 가난한 노동자 출신으로 초고속 승진 신화를 이룬 대표적 개혁가다. 미국과의 통상 마찰에 대응할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국무원 부총리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과 면담할 정도로 한국 재벌 총수와의 인연도 깊다. ‘3대 사상’ 만든 왕후닝… 3대 지도자 한반도 방문 때 수행 푸단대 교수 출신의 학자형 관료다.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에 이어 시진핑 사상까지 모두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품인 3명 최고지도자의 이론이 공산당 헌법인 당장에 명기돼 3개 왕조의 황제를 모두 가르친 스승이라는 뜻의 ‘삼조황사’(三朝皇師)란 호칭이 붙었다. 중국 공산당 최고의 ‘브레인’으로 불린다. 2001년 장쩌민의 북한 방문, 2008년 후진타오 방한, 2014년 시 주석 방한에 동행했으며, 지난 7월 베를린 한·중 정상회담에도 참여했다. ‘반부패 인적 청산 심복’ 자오러지… 삼성 경영진과 교류 많아 부친이 시 주석의 부친인 시중쉰 전 부총리의 고향 친구이자 부하다. 시 주석 집권 1기 중국 2인자였던 왕치산의 뒤를 이어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로 반부패 사정을 지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37세의 나이에 칭하이성 성장직을 수행했으며, 후진타오 전 주석과 시 주석에게 모두 신임을 얻었다. 시 주석의 반부패 인적 청산 작업을 뒷받침한 심복이다. 삼성 시안 반도체 공장 건설 추진 과정에서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경영진을 만났으며, 2012년 삼성 시안반도체 생산단지 기공식에도 참석했다. ‘장쩌민파 출신 경제통’ 한정… 2년간 방중 국회대표단 만나 42년간 상하이에서만 근무해 장쩌민파로 분류됐다. 2007년 시 주석이 중앙무대로 올라가기 전 경력 보완 차원에서 상하이 서기로 오자 8개월간 전력으로 보좌해 신임을 얻었다. 2012년 부산시와 상하이가 우호협력 업무협약(MOU)을 맺을 때 주도했으며 이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과도 면담했었다. 2014년, 2015년 중국을 찾은 국회대표단을 만났으며, 2016년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와 인연을 맺었다. 2011년 최영임 북한 전 총리와도 만났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더러운 피…근친은 집안 내력” 25년간 친부의 성폭행

    “더러운 피…근친은 집안 내력” 25년간 친부의 성폭행

    친딸을 성폭행해 자녀를 8명이나 낳게 한 인면수심 아르헨티나 남자가 결국 법정에 섰다. 첫 재판에서 아버지를 만난 피고의 딸은 “6살부터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친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긴급 체포된 건 2015년. 그러나 남미 특유의 늑장행정으로 첫 재판은 24일(현지시간)에야 열렸다. 재판을 앞두고 딸은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는 올해 31살이다. 하지만 벌써 8명의 엄마다. 자녀들의 친아버지는 그의 아버지, 엄밀하게 가족관계를 따져보면 외할아버지기도 하다. 그는 엄마가 가출한 날부터 친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6살 때였다.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부인처럼 살아야 했다. 학교는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어 아직도 읽고 쓸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 아기만 낳아야 했다. 8번 임신했고 그때마다 아기를 낳았다. 충격적인 진술은 계속됐다. 그에겐 형제와 자매 12명이 있다. 엄마는 가출을 하면서 12명 자식을 모두 데리고 나갔다. 당시 6살이던 딸 하나만 달랑 남편 곁에 남겨놓은 이유는 아직 미스터리다. 이 재판을 통해 자세히 알려진 가족관계는 그야말로 근친혼으로 잔뜩 얽혀 있었다. 알고 보니 그의 부모는 사촌 사이였다. 그의 친엄마는 친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 소름끼치는 내력은 대물림됐다. 그는 “내 자매 중에도 친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나처럼 살고 있는 언니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친척들도 모두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서 “이젠 이런 고리를 끊고 싶다”고 했다. 현지 언론은 “가족의 근친 내력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면서 “피고를 엄벌하라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김주영의 구석구석 클래식] 산소리, 새소리, 음악소리

    [김주영의 구석구석 클래식] 산소리, 새소리, 음악소리

    가을의 시간은 유독 알레그로(빠르게)로 흘러가는 듯하다. 아름다운 만큼 아쉬운 계절이 또 지나가고 있다.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총천연색의 붉은 기운으로 가득 찬 산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1년 중 지금뿐이다. 이제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졌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이맘때면 오로지 산길 산책을 위해 혼자 여행을 떠나곤 했다. 단풍의 대명사인 내장산도 자주 갔었는데, 단풍 시즌의 인파 속에 섞일 자신이 없었던 나는 산이 붉어지기 직전 주변의 산책로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의 정기를 만끽하는 것에 만족했다.며칠 있으면 더 농염하게 변할 산의 색채를 상상하며 그곳에서 들었던 음악은 바흐의 칸타타와 수난곡 등 합창 음악들이었다. 절대음악의 순수성을 깊은 신앙으로 강조했던 바흐의 음악을 산속에서 듣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살았던 바흐가 만들어 낸 음악 이상으로 자연에 가까운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풍경과 음악이 만들어 내는 절묘한 매치는 훌륭했다. 숲길을 걸으며 작품을 구상하곤 했던 베토벤은 자연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작곡가였다. 그의 대표작 ‘전원’ 교향곡의 2악장 말미에는 새들의 노래가 관악기들을 통해 등장한다. 꾀꼬리(플룻), 뻐꾸기(클라리넷), 메추리(오보에)들의 노래인데, 마음 내키는 대로 지저귀는 새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하지만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주고받는 세 관악기 주자들의 모습은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을 쓸 당시 30대 후반의 베토벤은 청각장애가 심각한 상태여서 숲의 소리들을 듣기가 어려운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이보다 먼저 그가 남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서도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작곡가의 슬픈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 새들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관념 속 소리이나 악성의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실제의 소리를 능가하는 사실성을 지닌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프랑스 작곡가 중 베토벤을 특별히 사랑했던 인물이 있는데, 바로 뱅상 댕디(1851~1931)다. 그가 만든 ‘프랑스 산사람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은 존경하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댕디는 할아버지 대부터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 세반 지방의 산골에서 매년 여름을 보냈는데, 이 지방 양치기의 노래를 듣고 착안했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1887년 파리 음악원에서 초연됐다. 모두 세 악장으로, 오케스트라와 함께 피아노가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해 피아노 협주곡과도 유사한 특이한 편성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여러 번 등장하는 ‘산사람의 주제’는 작품의 앞부분 잉글리시 호른의 연주로 제시되는데, 어딘가 동양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동시에 어느 나라 민요나 공통으로 지닌 특징인 편안함과 낙천적인 기분도 드는 작품이다. 20세기 영국의 대표적 작곡가인 랠프 본 윌리엄스(1872~1958)의 ‘종달새의 비상’은 피겨 여왕 김연아가 2007년 시즌 프리 프로그램에서 연기했던 음악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윌리엄스가 영국 시인인 조지 메러디스가 쓴 동명의 시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영감을 나타냈으며, 시의 내용은 전원생활로 회귀해 편안하고 근심 걱정 없는 생활을 동경하는 시인의 마음을 한없이 자유로운 모습의 종달새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바이올린은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동시에 종달새가 날아다니며 위아래로 빠르게 도약과 하강을 반복하는 모습을 실감 나게 그리고 있다. 현재는 오케스트라 반주로 더 많이 연주되는 이 곡의 바이올린과 피아노 편성으로 된 첫 발표는 1914년이었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으로, 작곡가는 전운이 감도는 도버해협을 오가는 도중 메모지에 악보를 그려 가며 작품을 완성했다. 어지러웠던 시대, 평화와 안식을 원하는 시인과 작곡가의 교감이 이루어진 독창적인 걸작이다.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특수 신분의 조교, 유엔 제재 속 北 ‘경제 핏줄’ 떠올라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특수 신분의 조교, 유엔 제재 속 北 ‘경제 핏줄’ 떠올라

    “북한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해요.” 북한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중국의 접경도시인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한 북한 식당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쑹톈위(宋天宇·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따금 북한을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쑹은 이른바 ‘조교’(朝僑·북한 국적 화교)로 불린다. 북한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에 그곳을 떠나 단둥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는 북한이 싫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군대에 가기 싫어서다. 북한 인민군의 복무 기간은 무려 10년이나 된다. 북한 남성이면 누구나 군 입대를 피할 수 없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중국 국적을 얻기 위해 단둥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조교는 북한과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수한 대접을 받는다. 중국 국적을 취득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직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지만 북·중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조교의 ‘특권’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조교가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뚫고 북한 경제의 흐름을 도와주는 ‘핏줄’ 역할을 하는 북한의 새로운 ‘무기’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유엔 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로 압박받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이들 조교가 두 나라 무역 통로 및 중재자뿐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교량 역할도 하고 있다고 지난달 17일 보도했다. 조교는 두 나라 간 무역의 3분의1을 담당할 정도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단둥에 있는 북·중 무역상과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칭화(淸華)-카네기 정책센터 북한 전문가인 자오퉁(趙通)은 “북·중 간 공식 무역 채널이 많이 닫힐수록 많은 북한 사람이 조교 네트워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서 “무역 통로 역할을 하는 조교가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관세청)에 따르면 유엔의 대북 제재가 이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난 1~8월 대북한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3%나 증가한 22억 8241만 달러(약 2조 6000억원)에 이른다.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조교는 1만~1만 5000명으로 추산된다. 북한과 가까운 중국 지린(吉林)성의 투먼(圖們)과 훈춘(琿春), 단둥 등지에서는 북한에서 이주한 조교 2만~3만여명이 삶을 꾸려 가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한 화교는 1921년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탈중(脫中) 행렬’이 초고점에 이르렀다. 이후 중·일전쟁과 1949년 중국 사회주의 정권 수립, 1950년 한국전쟁 등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서도 북한 지역에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살아온 이들이다. 특히 김일성은 젊은 시절 중국에서 항일투쟁 독립군으로 활동한 만큼 중국과의 교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 출신인 이들에게 상당한 자치권까지 부여하며 우대하는 이유다. 예컨대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중국과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전화기를 이들에게 허용할 정도였다. 애덤 캐스카트 영국 리즈대 중국사 강사는 “조교는 사회주의 국제주의 시대의 최후의 잔존자(殘存者)”라며 “이들은 북한 체제 안팎에 일정 정도의 자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쑹은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이민을 와 터전을 닦은 이후 태어난 조교 3세대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북중국을 점령했던 1940년대에 식솔을 이끌고 산둥을 떠나 신의주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국공내전으로 민초들의 삶이 북한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쑹의 사촌도 비슷한 경우다. 그의 사촌은 할아버지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내세운 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뒤 북한에 눌러앉았다. 이들 조교는 1980년대 북·중 협정에 따라 연 2회 중국 방문이 허용되면서 역할이 증대됐다. 이는 조교들이 돈을 버는 데 커다란 ‘무기’로 작용했다. 중국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면서 중국의 상품을 북한으로 들여와 차익을 챙길 수 있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유로운 이동권을 바탕으로 조교의 상당수는 북한에 시장 거래가 불가능한 금을 ‘밀매’하거나 중국의 공산품을 밀수해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런 돈벌이는 자연스레 북한 당국 고위 관계자들과의 ‘결탁’으로 이어지게 됐다. 덕분에 이들 조교의 경제적 영향력은 점차 확대됐다. 더욱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조교들의 돈벌이는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북한 내부에서 소비재 생산이 사실상 중단됨에 따라 조교들이 들여온 중국제 소비재 상품들이 북한 장마당을 장악한 것이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처절한 사투를 벌일 때 조교들은 오히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폭발적인 고도성장으로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바람에 수혜를 본 셈이다. 북한은 이때부터 중국과의 정치·외교적 예속은 크게 약화돼도 경제적 예속 관계는 오히려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들이 ‘조교들의 위상’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조교의 역할은 2009년 원자바오(溫家寶) 당시 중국 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원 총리는 조교들이 북·중 교역에서 훌륭한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원 총리는 일반 중국인들의 경우 북한 국경을 넘기 위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것과 달리 이들 조교는 맘대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조교들은 신의주와 단둥을 가르는 압록강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여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조교들은 북한 내에서도 또 다른 특수 대접을 받는다. 모든 북한 주민이 빨간색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하지만 조교는 예외다.쑹은 “올해 말 중국 국적을 취득하면 가장 먼저 자동차 면허를 딸 예정”이라며 “자동차 면허를 따면 자동차를 몰고 신나게 달리면서 중국 일주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태어난 북한에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조국은 중국이지만 모국은 북한이라고 생각한다. 쑹은 지금도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던 북한 친구들과 교류한다. 주요 교류 수단은 휴대전화다. 북한 친구들은 휴대전화의 SIM카드를 교체하는 것, 중국산 옷과 신발을 사는 것 등을 원한다. 쑹은 친구들의 부탁을 즐겁게 들어준다. 그는 이런 일을 ‘식은 죽 먹기’라고 표현했다. 쑹은 “사람들이 북한이 나쁜 나라라고 하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남들이 북한이 좋은 나라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말하는 데 약간 주저하지만 그래도 북한은 기본적으로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북한 사람들이 좋다”고 강조했다. 쑹은 그러나 “많은 북한 주민이 김정은을 싫어한다. 더욱이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비롯해 200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일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그 이유에 대해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북한에서는 더이상 그들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북한 친구들은 대부분 봉제공장이나 전자회사에서 일한다. 하지만 앞으로 이들에게 기회는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유엔 대북 제재로 북한의 대중 섬유 수출이 봉쇄됐기 때문이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이 기사는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 중인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goo.gl/sdFgOq)의 전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 [현장 행정] 동화 읽어주고 마음 읽어주는 일일동장 왔네

    [현장 행정] 동화 읽어주고 마음 읽어주는 일일동장 왔네

    궁동어린이도서관 ‘100일’…동화 구연에 운영 현황 챙겨 현장서 찾은 민원 88% 처리 “쓴소리 바른소리 안 가릴 것”“학부모들이 아이들과 많이 방문하고 있나요.” 지난 16일 서울 구로구 수궁동의 궁동어린이도서관. 이성 구로구청장이 개관한 지 갓 100일을 넘긴 궁동어린이도서관을 방문해 안종태 도서관장에게 운영 현황을 묻고 부족한 점이 없는지 확인했다. 안 관장은 “최근 부쩍 늘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궁동어린이도서관은 구로꿈나무어린이도서관, 개봉어린이도서관, 글마루한옥어린이도서관에 이은 지역 내 네 번째 구립 어린이 전용 도서관이다. 이날 이 구청장은 동화 구연자로 나서 3~5세 아이들 15명에게 ‘요건 내떡’이라는 제목의 책을 직접 연기까지 하며 읽어 주기도 했다. 요건 내떡은 떡을 무척 좋아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떡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고, 배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구청장은 “일일동장으로서 아이들도 보고 도서관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확인차 왔다. 주민들에게 평소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구로구의 ‘일일 동장’ 프로그램이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일일 동장은 발로 뛰는 소통 행정을 구현하기 위한 자리다. 2012년 이 구청장은 “주민을 만나는 최일선에 있는 동장으로서 지역 현장을 세밀하게 살피고 현안과 불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일일 동장을 자처했다. 올해는 지난 11일 개봉 2동에서 시작했고, 내달 6일 구로2동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가족통합지원센터 건립 예정지 등 주요 사업 현장이나 저소득가구, 복지관을 집중적으로 방문할 예정이다. 개봉초, 구일중, 영일초, 우신중, 오류초 등 초중고 학부모와 만나 교육 현안과 해결방안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댄다. 이 구청장은 구민의 요구를 단순히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구로구는 프로그램이 시작된 다음해인 2013년부터 2016년까지 15개 동으로부터 민원 496건을 접수해 436건(88.0%)을 처리·완료하거나 사업 추진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처리 사업은 ‘자율방범대원 동계복장 마련’, ‘경로당 전기장판 지급’ 등이다. 소소하지만,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구민들의 목소리를 이 구청장이 소중히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민들도 구청장과 소통할 기회과 많다는 측면에서 반기고 있다. 이 구청장은 “2010년 취임 이후에 직접 현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주민들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숨 가쁜 일정이지만 현장 방문에 잰걸음을 하게 된 이유”라면서 “쓴소리, 바른 소리 가리지 않고 주민의 의견을 경청하고 주민과 함께 호흡하는 구정을 구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송파, 주말엔 맛있는 ‘삼시세책’

    송파, 주말엔 맛있는 ‘삼시세책’

    책을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축제 한마당이 이번 주말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문 광장에서 열린다.서울 송파구는 오는 21일, 22일 책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제5회 ‘책 읽는 송파’(포스터) 북페스티벌을 준비했다고 17일 밝혔다. 올해 주제는 ‘책의 맛(味)’이다. 음식만큼 다양한 책의 매력을 선보이겠다는 취지다. 예를 들어 그림책, 만화책, 판타지, 요리 등 분야는 ‘상상의 맛’에 해당한다. 각 맛에 따라 전시·체험 부스를 설치할 예정이다. 21일 오후 9시까지 운영되는 ‘별 스푼 북 캠핑’은 가을 밤 텐트 안에서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밖에 박춘희 송파구청장과 함께하는 가족 낭독회, 할머니·할아버지의 동화구연, ‘아무것도 아닌 지금은 없다’ 저자 글배우 사인회 등이 준비돼 있다. 둘째 날인 22일에는 어린이 독서퀴즈대회, 드래곤빌리지 작가와 함께하는 사인회, 마술쇼 등이 열린다. 도서 할인 판매도 이뤄진다. 서점 반디앤루니스, 한국서점조합송파지부와 함께하는 도서 브랜드전도 진행된다. 구는 2012년부터 ‘책 읽는 송파’ 사업을 전개해 왔다. 생활 속에서 손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올 7월에는 국내 최초로 공립 책박물관 기공식을 열기도 했다. 박 구청장은 “먹어보지 못한 음식은 맛을 알 수 없듯이 책도 마찬가지”라면서 “독서하기 더할 나위 없는 계절인 가을을 맞아 온가족이 함께 책 읽기의 오묘한 맛에 빠져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클럽서 만나 결혼한 男, 알고 보니 에티오피아 왕자

    클럽서 만나 결혼한 男, 알고 보니 에티오피아 왕자

    한 미국 여성이 12년 전 현대판 무도회장인 클럽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식을 올려 아프리카의 왕자비가 됐다. 알고 보니 남성은 에티오피아 왕실 집안 출신이었다. 17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은 뉴욕타임즈의 13일자 기사를 인용해, 지난 달 9일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아리아나 오스틴(33)과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하일레셀라시에 1세(1892~1975)의 증손자 요엘 마코넨(35)이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식은 13명의 성직자를 포함해 에티오피아 정교회 혼례로 치뤄졌으며, 둘은 왕관과 망토를 쓰고 왕실 가문의 부부가 됐음을 증명했다. 오스틴과 마코넨은 2005년 미국 워싱턴 DC의 나이트클럽 ‘펄’(Pearl)에서 처음 만났다. 마코넨은 첫눈에 오스틴에게 반했고, 단숨에 그녀를 미래 신부감으로 점찍었다. 그의 적극적인 구애에 둘은 곧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듬해 마코넨이 대학을 졸업한 후 프랑스로 인턴십을 가면서 둘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됐다. 2008년 마코넨이 돌아왔지만 이번엔 오스틴이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2012년 오스틴이 미국으로 왔을 때 둘은 잠시 떨어져 있기로 정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밸런타인데이에 마코넨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오스틴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 청혼을 하면서 둘은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오스틴은 “마코넨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즉각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진지한 만남이 이어지면서 진실은 자연스레 밝혀졌다. 성서 속 솔로몬 왕과 시바여왕의 뿌리를 지닌 왕실 가족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됐다. 그의 가족들은 블랙파워와 고대 기독교 전통을 결합한 무적의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며 기뻐했다. 한편 오스틴 역시 평범한 집안의 딸은 아니었다. 왕족의 피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 그녀는 긴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 가이아나 일족 출신으로 외할아버지가 가이아나 수도 조지타운의 시장을 역임했다.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새영화> ‘미국에서 온 손자’, 심술궂은 할아버지와 고집불통 손자의 동거기

    <새영화> ‘미국에서 온 손자’, 심술궂은 할아버지와 고집불통 손자의 동거기

    영화 ‘미국에서 온 손자’가 10월 19일 개봉한다. ‘미국에서 온 손자’는 중국 서부의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혼자 사는 은퇴한 전통 그림자극 명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손자가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가족 드라마다. 영화에 담긴 정(情)이 느껴지는 시골을 배경으로 심술궂은 할아버지와 고집불통 손자가 만들어가는 따뜻한 가족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 중국의 전통 그림자극인 ‘피영’이 영화의 색다른 볼거리로 등장한다. 이 밖에도, ‘미국에서 온 손자’는 중국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제29회 중국영화 금계장 3개 부문 노미네이트, 제13회 중국 백합장 2개 부문 수상, 제12회 한국 광주 국제영화제 패밀리시네마 부문에서 상영됐다. 여기에 중국 최대 문화예술 추천 사이트인 ‘또우반(Douban)’에서 당시 외화 포함 전체 영화 평점 4위를 기록하며 큰 관심을 받았다. 영화 ‘미국에서 온 손자’는 전체 관람가다. 88분.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월드피플+] 한 가문에 ‘육손’이 모두 12명…다지증 가족 화제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한쪽에 6개 이상 존재하는 선천성 기형인 다지증(多指症). 보통의 부모라면 다지증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걱정이 태산이겠지만 이 가정만큼은 다르다. 최근 영국 데일리메일 등 해외언론은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 사는 드 실바 가족의 흥미로운 사연을 전했다. 드 실바 가족 중 다지증을 가진 사람은 놀랍게도 모두 12명. 얼마 전 비니시우스 역시 각각 12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갖고 태어나 드 실바 가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다지증은 선천적 증상으로 유전적 변이가 그 원인으로 알려져있다. 다지증은 3000명 중 1명이 태어나 매우 희귀하지만 드 실바 가족에게는 50%의 확률로 태어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손'을 부끄러워하지만 드 실바 가족에게 이는 자랑스러운 '훈장'이라는 사실. 비니시우스의 아버지 알렉산드로는 "아기가 나처럼 육손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랬다"면서 "출생 후 실제 다지증을 갖고 태어나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어 "여분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잘 움직여 오히려 남들보다 유리하다"며 웃었다. 실제로 드 실바 가족은 남들보다 더 많은 손가락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축구 골키퍼나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알렉산드로는 "다지증이 할아버지 때 부터 시작돼 3대에 걸쳐 내려오고 있다"면서 "육손은 우리 가문의 상징과도 같다"고 말했다. 이어 "남들은 이를 장애로 보지만 우리는 특별한 장점으로 본다"면서 "육손으로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월드피플+] 신생아 중환자실 지키는 ‘천사 할아버지’

    [월드피플+] 신생아 중환자실 지키는 ‘천사 할아버지’

    “그는 마치 천사 같았어요” 미국 조지아주 라그레인지 출신의 메리 베스 브륄로떼(33)는 출산 예정일보다 석 달 반 정도 일찍 아들 로건을 낳았다. 몸무게가 1㎏도 되지 않는 아들은 병원 집중치료실(ICU)로 옮겨졌고, 브륄로떼는 일로 바쁜 남편과 돌봐야할 8살짜리 딸아이 때문에 어린 아들 곁에 있어줄 수 없어 큰 죄책감을 느꼈다. 지난 달 말 2시간을 달려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한 80대 노인을 만난 이후 다행히도 아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브륄로떼는 “한가득 근심을 안고 병원에 도착했는데 곤히 잠에 빠진 로건을 부드럽게 안고 있는 남성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집중치료실 할아버지’라고 소개했다”고 말했다. 그 할아버지는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고 곧장 달려와 간호사에게 아기를 안아 자장가를 불러도 되는지 물은 뒤 재우고 있던 중이었다”고 답했다. ‘집중치료실 할아버지’는 데이비드 도이치먼(82)이었다. 그녀에게 깊은 감명을 남긴 도이치먼은 애틀랜타 어린이 병원 집중치료실에서 12년 넘게 근무한 자원봉사자다.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에는 소아 집중치료실에서 어린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목요일엔 신생아 집중치료실을 순회한다. 은퇴후 근처 대학 초청강사로 일하던 그는 보람있는 일을 찾다가 어린이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집중치료실에서 자신이 공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 행복하다는 도이치먼은 유독 한 아이를 한 시간 혹은 그 이상 오래 안고 있는 편이다.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 다시 혼자가 되는 아기에게 온기를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도이치먼은 어린 환자들뿐 아니라 아이들의 부모와도 함께 있는 걸 즐긴다. 부모들이 병실에서 의사보다도 그의 방문을 기다릴 정도다. 실제로 그의 마음 씀씀이는 부모들에게도 세심하게 미친다. 도이치먼은 “병원에서 아이들이 의사와 간호사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 걸 보면서 나는 재빨리 알아차렸다. 어쩌면 내 역할은 아이 부모들을 보살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부모들에게 다가가 아침식사를 했는지 묻고, 그렇지 않은 경우 병실을 지키고 있을테니 가서 먹고 오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들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자녀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러면 나는 ‘아이 말고 당신이 괜찮은지’ 여쭙는 거라고 다시 말한다. 아이만큼 지친 부모들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쓰러지거나 긴장한 상태로 밤을 꼬박 지새우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도이치먼의 애정과 헌신은 브륄로떼와 같은 부모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난 아들과 떨어져 있어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가 항상 우리 아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살펴 주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합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굉장한 사람이다”라며 아낌없는 칭찬을 보냈다. 이에 대해 도이치먼은 “집중치료실의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좋다.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좋을 뿐”이라며 “내 나이에는 에너지를 얻을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나 여기만 오면 힘이 솟는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는 한 봉사활동을 당장 중단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사진=브륄로떼 페이스북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송선미 남편 청부 살해’ 연루된 父子, 재산 빼돌리려다 재판에

    ‘송선미 남편 청부 살해’ 연루된 父子, 재산 빼돌리려다 재판에

    배우 송선미의 남편을 청부 살해한 의혹에 연루된 부자(父子)가 거액 자산가인 할아버지의 600억원대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부장 한석리)는 재일교포 1세 곽모(99)씨의 장남(72)과 장손(38) 및 법무사 김모씨 등 총 3명을 사문서 위조 및 행사, 공전자기록 등 불실기재 및 행사 등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고 13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장남 등은 교포 1세 곽씨가 국내에 보유한 6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가로채려고 계약서 등을 위조하고 예금 수억원을 인출한 혐의(사기)를 받는다.곽씨 주식을 판매하면서 5억원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도 있다. 검찰은 이들이 연루된 송씨 남편 청부살해 사건은 계속 수사할 방침이다. 앞서 검찰은 8월 21일 서초동의 한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송씨의 남편인 영화 미술감독 고모씨를 살해한 혐의로 조모(28)씨를 구속기소 했다. 살해된 고씨는 장손 곽씨와 사촌 관계였지만 외할아버지 재산 상속 문제로 갈등을 빚어 온 것으로 파악됐다. 조씨는 곽씨로부터 ‘고씨를 살해할 방법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씨에게 접근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검찰은 “고씨 청부살해 의혹 사건을 수사해 온 형사3부와 곽씨 부자의 문서 위조 혐의를 적발한 형사4부가 합동으로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가을, 그리움에 물들다

    [손원천 기자의 호모나들이쿠스] 가을, 그리움에 물들다

    가을이 시나브로 깊어 갑니다. 북적대는 본격 단풍철보다 외려 요즘이 나들이하기에 더 낫지 싶습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오지의 풍모를 가진 곳을 찾는다면 강원 횡성이 어떨까요. 봉황의 울음소리 들린다는 봉명폭포까지 짧은 산행을 즐겨도 좋겠고, 백덕산의 옛 42번 국도를 따라 산길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겠습니다. 안 가면 손해인 태기산, 물안개로 수채화 같은 풍경을 펼쳐내는 횡성호도 있지요.먼저 봉명(鳳鳴)폭포부터. 발교산 자락에 깃든 폭포다. 횡성에서 가장 큰 폭포라는데, 과문한 탓에 여태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한자를 알면 이름 풀이는 쉽다. 계곡수 흐르는 소리가 봉황(鳳)의 울음소리(鳴)를 닮았다는 폭포다.●봉황 울음소리 닮았다는 봉명폭포… 걷다 보면 야생화 천지와 조우 폭포의 들머리는 고라데이 마을이다. 고라데이는 골짜기란 뜻의 사투리다. 오래전엔 한국전쟁도 모르고 지낼 만큼 오지였다는 마을이다. 이런 곳이 서울에서 불과 1시간 40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는 게 놀랍다.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요즘엔 알음알음 찾는 도시인을 상대로 화전민, 심마니 등 산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폭포로 오르는 길섶은 야생화 천지다. 벌개미취가 어린아이 이처럼 가지런한 꽃잎을 선보이고, 물봉선과 산괴불주머니 등도 뒤질세라 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숲에 들면 곧 휴대전화가 불통이다. 그러니 휴대전화 배터리를 아낄 요량이라면 숲에 들기 전에 전원부터 꺼 둘 일이다. 제비 닮은 명맥새가 슬피 울었다는 ‘명맥바위’를 지나면 길은 곧 계곡과 능선으로 갈라진다. 왼쪽은 계곡, 오른쪽은 능선을 따라 걷는다. 어느 곳으로 가도 봉명폭포에 닿지만,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다소 수월하다. 숲은 활엽수 일색이다. 늦가을이면 불붙는 듯한 단풍을 선보이지 싶다. 들머리에서 봉명폭포까지는 30분 정도면 족하다. 천천히 걸어도 그렇다. 이끼 낀 작은 폭포 몇 개를 지나면 곧 봉명폭포다. 멀리서 거대한 암벽을 타고 폭포수가 쉼 없이 떨어져 내린다. 횡성에서 가장 큰 폭포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작은 숲이 숨겨둔 폭포치고는 제법 기골이 장대하다. 폭포 옆으로는 불퉁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쳤다. 암벽 표면은 초록빛 이끼 일색이다. 봉명폭포를 달리 이끼폭포라 부르는 건 저 모습 때문일 터다. 폭포의 높이는 30m 정도다. 폭포수가 3단으로 굽이치며 쏟아져 내린다. 수량은 많지 않다. 가을철 갈수기에 접어든 탓이다. 하지만 폭포수의 소리는 더없이 청량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숲의 나뭇잎들을 흔든다. 누군들 봉황의 울음소리 들어봤으랴. 저마다 마음에 담아 두는 게 봉황의 소리일 터다. 이제 가을이 내려앉은 횡성의 옛길을 찾아나설 차례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옛 42번 국도다. 옛길은 백덕산 자락에 남아 있다. 백덕산은 횡성과 평창, 영월 등 3개 군에 걸쳐 있다. 높이는 1350m. 제법 큰 산이다.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으로 이름난 산이기도 하다. 능선 곳곳에 단애를 이룬 기암괴석과 단풍이 제법 잘 어우러진다.●42번 국도 옛길 8㎞ 명품숲길선 소나무·낙엽송 어우러진 풍경 반겨 옛 42번 국도는 한때 강릉과 서울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더 이전엔 ‘관동대로’라 불리기도 했다. 안흥은 둘 사이의 중간쯤에서 번성했다. 지금은 안흥의 명물이 된 찐빵 역시 당시엔 여행자와 인근 주민들이 즐겨 먹던 먹거리였을 터다. 그러다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뚫렸고, 새 길에서 나앉은 안흥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옛 42번 국도는 숲 사이에 겨우 명맥만 남아 있다. 이 길을 따라 한때 시외버스가 평창까지 오갔다는 게 좀체 믿기지 않는다. 그 흔적이 평창과의 경계 지역 고갯마루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옛길 중간쯤에 ‘명품숲길’이 있다. 상찬의 표현이 아닌 실제 이름이 명품숲이다. 산림청이 솔숲 사이 능선을 따라 조성했다. 숲길은 얼추 8㎞ 거리다. 대개 평탄한 길이어서 걷기는 수월한 편이다. 전 구간을 도는 게 가장 좋지만 초입까지만 가도 소나무와 낙엽송이 어우러진 빼어난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횡성 동북쪽의 병지방 계곡 임도도 가을 산책에 딱 좋다. 각종 낙엽활엽수와 낙엽송 우거진 숲길이 줄곧 이어진다. 무엇보다 적요해서 좋다. 여름철이면 제법 많은 피서객이 계곡을 찾지만 임도까지 들어오는 이는 드물다. 들머리에서 2㎞ 남짓 들어가면 나무 위에 ‘마음이 다한 곳 나!!’라는 이정표가 매달려 있다. 여기를 반환점 삼는 게 무난하다.●오르기 수월한 태기산에서 만나는 ‘인생 풍경’ 해넘이 횡성에서 태기산(1261m)을 빼놓으면 손해다. 가을에는 더욱 그렇다. 일교차가 큰 가을 아침이면 태기산 주변으로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넘실대는 구름을 뚫고 정상까지 솟구쳐 오르면 발아래로 강원의 산들이 섬처럼 떠 있다. 비 갠 오후라면 더 좋다. ‘인생 풍경’이라 할 만큼 멋진 해넘이 장면과 마주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오르기가 쉽다는 것이다. 국도 6호선 양두구미재에서 임도를 타면 정상까지 단박에 오를 수 있다. 거리는 약 4㎞다. 임도 곳곳에서 만나는 전망도 빼어나다. 태기산 주변으로 탐방로가 조성됐다. 올가을에 처음 선보인 길이다. 12.4㎞ 길이의 탐방로는 3개 구간으로 나뉜다. 풍력발전6호기에서 시작되는 1코스(2.5㎞) 청정자연체험 구간, 태기분교터에서 출발하는 2코스(4.5㎞) 역사문화체험 구간, 송덕사가 들머리인 3코스(6.9㎞) 자연명소 트레킹 구간 등이다. 구간마다 목재 데크를 깔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데크 주변에 가을 야생화도 심었다.●물안개 어우러진 횡성호 산책 즐기기 딱 좋아 물안개와 호수가 어우러진 수채화 같은 가을 풍경과 만나려면 포동교를 찾으면 된다. 횡성호를 따라 놓여진 여러 다리 가운데 하나다. 가을 아침이면 거의 예외 없이 다리 주변으로 물안개가 영근다. 호수를 에두른 소로를 따라 산책을 즐기기 좋다. 포동교 인근에 ‘망향의 동산’이 있다. 횡성댐 수몰민을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횡성호 둘레길 가운데 가장 풍경이 빼어나다는 5구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9세기 말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중금삼층석탑 2기도 이곳에 있다. 한 곳만 더 덧붙이자. 청일면 고시리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2014) 촬영지가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480만여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다. 주인공은 무려 76년 동안 해로한 고 조병만 할아버지와 강계열 할머니다. 노부부는 어딜 가든 ‘커플룩’(한복)을 입었고, 두 손 꼭 잡고 다녔고,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으며 걷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촬영지 풍경은 수수하다. 아마, 사랑도 그럴 것이다.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봉명폭포 들머리는 고라데이 마을(344-1004)이다. 이정표를 따르면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고라데이 마을에서 숙박 시설도 운영한다. 백덕산 옛 42번 국도는 상안리가 들머리다. 내비게이션에 횡성군 서동로상안10길이나 소나무낙엽송명품숲을 입력하면 찾을 수 있다. 옛 국도 주변으로 임도가 실핏줄처럼 나 있다. 주로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산길이다. 사륜구동 차량이라면 도전해 볼 만하지만 임도가 워낙 길고 되돌릴 곳도 마땅하지 않은 만큼 초행자라면 옛 국도 주변만 편하게 돌아보길 권한다. 병지방 계곡 임도는 오토캠핑장 못 미처 시작된다. 이정표가 작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임도가 매우 좁아 차는 주변에 세워 두는 게 좋다. →맛집:횡성 하면 역시 한우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횡성축협에서 운영하는 축협한우프라자다. 횡성 읍내의 본점(343-9908)과 새말점(342-6680), 둔내점(345-8888) 등이 있다. 운동장해장국(345-1770)은 한우 해장국을 잘한다. 횡성종합운동장에 있다. →축제:제11회 안흥찐빵축제가 13~15일 안흥면 안흥찐빵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찐빵을 주제로 안흥찐빵 주제관과 찐빵 만들기 체험, 찐빵 많이 먹기 대회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놀거리를 준비했다. 안흥찐빵을 무료로 시식할 기회도 마련했다. 안흥찐빵은 막걸리로 발효해 차지고 구수하다. 특히 대부분 업소들이 여태 손으로 빚는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맛과 풍미가 깊다. 안흥찐빵축제위원회 340-2703.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북한의 새로운 무기’로 떠오른 조교(朝僑)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북한의 새로운 무기’로 떠오른 조교(朝僑)

     “북한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해요.”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중국의 접경도시인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한 북한 식당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쑹톈위(宋天宇·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따금 북한을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쑹은 이른바 ‘조교’(朝僑·북한에 거주하는 중국인)로 불린다. 북한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에 그곳을 떠나 중국 단둥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다. 이곳으로 이사온 이유는 북한이 싫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군대에 가기 싫어서다. 북한 인민군의 복무 기간은 무려 10년이나 된다. 북한 남성이면 누구나 군 입대를 피할 수 없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중국 국적을 얻기 위해 단둥으로 이주해온 것이다. 조교는 북한과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수한 대접을 받는다. 중국 국적을 취득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직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북·중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조교의 ‘특권’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조교가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미국 주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뚫어 북한 경제의 흐름을 도와주는 ‘핏줄’ 역할을 하는 북한의 새로운 ‘무기’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 등은 유엔 안보리의 강력한 대북 제재로 압박하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이들 조교가 두 나라 무역 및 중재자뿐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교량 역할도 하고 있다고 지난달 17일 보도했다. 조교는 두 나라 간 무역의 3분의1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단둥에 있는 북·중 무역상과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칭화(淸華)-카네기 정책센터 북한 전문가인 자오퉁(趙通)은 “북·중 간 공식 무역 채널이 많이 닫힐수록 많은 북한 사람들이 조교 네트워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서 “무역 통로 역할을 하는 조교가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관세청)에 따르면 유엔의 대북 제재가 이행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난 1~8월 대북한 수출액은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25.3%나 증가한 22억 8241만 달러(약 2조 6000억원)에 이른다.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조교는 1만~1만 5000명으로 추산된다. 북한과 가까운 중국 지린(吉林)성의 투먼(圖們)과 훈춘(琿春), 단둥 등지에는 북한에서 이주한 조교 2만~3만여 명이 삶을 꾸려가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작한 화교는 1921년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이들의 ‘탈중(脫中) 행렬’이 초고점에 이르렀다. 이후 중·일전쟁과 1949년 중국 사회주의 정권 수립, 1950년 한국전쟁 등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서도 북한 지역에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살아온 이들이다. 특히 김일성은 젊은 시절 중국에서 항일투쟁 독립군으로 활동한 만큼 중국과의 교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 출신인 이들에게 상당한 자치권까지 부여하며 우대하는 이유다. 예컨대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중국과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전화기를 이들에게 허용할 정도였다. 애담 캐스카트 영국 리즈대 중국사 강사는 “조교는 사회주의 국제주의 시대의 최후의 잔존자(殘存者)”라며 “이들은 북한 체제 안팎에 일정 정도의 자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쑹은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북한으로 이민을 와 터전을 닦은 이후 태어난 조교 3세대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북중국을 점령했던 1940년대에 식솔을 이끌고 중국 산둥(山東)을 떠나 신의주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국공내전으로 민초 들의 삶이 북한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쑹의 사촌도 비슷한 경우다. 그의 사촌은 할아버지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내세운 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뒤 북한에 눌러 앉았다.  이들 조교는 1980년대 북·중 협정에 따라 연 2회 중국 방문이 허용되면서 역할을 증대됐다. 이는 조교들이 돈을 버는데 커다란 ‘무기’로 작용했다. 중국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면서 중국의 상품을 북한으로 들여와 차익을 챙길 수 있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유로운 이동권을 바탕으로 조교의 상당수는 북한에 시장 거래가 불가능한 금을 ‘밀매’하거나, 중국의 공산품을 밀수해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런 돈 벌이는 자연스레 북한 당국의 고위 관계자들과 ‘결탁’으로 이어지게 됐다. 덕분에 이들 조교의 경제적 영향력은 점차 확대됐다. 더욱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조교들의 돈 벌이는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북한 내부에서 소비재 생산이 사실상 중단됨에 따라 조교들이 들여온 중국제 소비재 상품들이 북한 장마당을 장악한 것이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처절한 사투를 벌일 때 조교들은 오히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폭발적인 고도성장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바람에 수혜를 본 셈이다. 북한은 이때부터 중국과의 정치·외교적 예속은 크게 약화돼도 경제적 예속관계는 오히려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들이 ‘조교들의 위상’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조교 역할은 2009년 원자바오(溫家寶) 당시 중국 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원 총리는 조교들이 북·중 교역에서 훌륭한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원 총리는 일반 중국인들은 북한의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지만 이들 조교는 맘대로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조교들은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가르는 압록강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여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조교들은 북한 내에서도 또다른 특수 대접을 받는다. 모든 북한 주민들이 빨간색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하지만 조교는 예외다.  쑹은 “올해 말 중국 국적을 취득하면 가장 먼저 자동차 면허를 딸 예정”이라며 자동차 면허를 따면 자동차를 몰고 신나게 달리면서 중국 일주여행을 하고 싶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태어난 북한에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조국은 중국이지만 모국은 북한이라고 생각한다. 쑹은 지금도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던 북한 친구들과 교류한다. 주요 교류 수단은 휴대전화이다. 북한 친구들은 휴대폰의 SIM카드를 교체하는 것, 중국산 옷과 신발을 사는 것 등을 원한다. 쑹은 친구들의 부탁을 즐겁게 들어준다. 그는 이런 일을 ‘식은 죽 먹기’라고 표현했다. 쑹은 “사람들이 북한이 나쁜 나라라고 하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남들이 북한이 좋은 나라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말하는데 약간 주저하지만 그래도 북한은 기본적으로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북한 사람들이 좋다”고 강조한다.    쑹은 그러나 “많은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싫어한다. 더욱이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비롯해 2000년대 태어난 젊은이들이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일하기를 원한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북한에서는 더이상 그들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북한 친구들은 대부분 봉제공장이나 전자회사에서 일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들에게 기회는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유엔 대북 제재로 북한의 대중 섬유수출이 봉쇄됐기 때문이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2만 5000개 블록에 새긴 ‘소통의 언어’

    2만 5000개 블록에 새긴 ‘소통의 언어’

    ‘원래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정직도 습관이다’, ‘내려와야 다시 오를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마무리가 중요하다’, ‘물과 민심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중요한 건 영원한 현재뿐….’ 2017년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 ‘강익중, 내가 아는 것’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제1전시장은 가로·세로 3인치의 알록달록한 종이 위에 쓰여진 한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석굴암 원형 방의 형상을 띤 전시장의 벽면과 공간을 가득 채운 글자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례로 연결되어 문장들을 이룬다.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한 문장들의 사이에는 달항아리의 이미지들이 마침표의 역할을 하며 설치돼 있다.작가 강익중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면 사람들은 남들의 생활이나 글, 사진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내가 아는 것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는 것 같다”면서 “이번 전시는 제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시민 약 2300명의 삶과 역사, 기억이 축적된 지식의 집합체로 2017년 집단 지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이자 프로젝트를 가리키는 ‘내가 아는 것’은 작가가 30년 전부터 붙들고 있는 화두나 마찬가지다. “결혼 직후 장모님께서 ‘자네가 아는 게 뭔가?’라고 물었을 때 ‘아는 게 없다’고 대답했어요. 그후 스스로에게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하곤 했어요. 처음에 썼던 문장이 ‘폭풍 직전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였습니다.” 이태원 경리단길 언덕배기에 살던 어린 시절에 바라본 남산 하늘이 떠올라 완성했던 이 글이 ‘내가 아는 것’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됐다. 오랜 시간 한글, 달항아리를 주제로 작업해 온 강익중은 2010년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과 2013년 순천만 정원박람회 등에서 한글설치작품 ‘내가 아는 것’을 선보인 바 있다. 그의 예술적 의지의 연장선에 있는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 6월 일반 시민을 위한 작품 제작 공모를 시작으로 뉴욕, 워싱턴, 서울, 나주에서 펼쳐진 10여차례의 워크숍과 예술캠프를 열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내가 아는 것’에 대한 문장을 가로·세로 각각 3인치(약 7.62m)의 소나무 목판에 붙인 뒤 액체 플라스틱을 발라 타일처럼 만들어 붙였다. 전시장에는 2만 5000개의 우드블록이 설치됐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에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쓴 까닭에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만큼이나 다채롭다. 97세의 할아버지는 ‘내 장수의 비결은 정직성에 있다’고 적었고,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콩나물 무침은 참기름 맛이다’고 적었다. 작가는 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쓴 ‘한 가지 고마운 일, 눈물엔 색깔이 없다’, 중국인 친구 빙리가 적은 ‘잔은 다 채우지 않는다’ 등 인상적인 문장들을 짚어 가며 읽어 주기도 했다. 도종환 장관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인 도종환’이라고 썼고, 박원순 시장은 ‘혼자 꾸는 꿈은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만나서 하나의 소리를 이뤄 내듯이, 두 개의 도자기를 위아래로 붙여 달항아리가 만들어지듯이 서로 다른 생각과 지혜를 모으면 바로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집단 지성이 되지 않을까요? 100년 뒤 후손에게 보여 줄 21세기의 정신적 문화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이 전시가 끝난 뒤에도 ‘내가 아는 것’ 프로젝트를 이어 갈 계획”이라며 “가능하다면 과거와 미래, 남과 북 등 끊어진 틈새를 채워 세상을 잇고 싶다”고 말했다. 제2전시장에서는 프로젝트 과정을 보여 주면서 관람객들이 퍼포먼스 등 다양한 활동을 체험할 수 있는 무대로 꾸몄다. 미디어아티스트 강기석, 김다움, 무진형제, 건축가 정이삭, 실험극단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와 제너럴쿤스트, 에듀케이터 전민기 등 젊은 예술가들이 함께한다. 전시는 11월 19일까지.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비평 제약받던 1980년대, 사회 변혁 싹 틔운 무크지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비평 제약받던 1980년대, 사회 변혁 싹 틔운 무크지

    1966년, 1970년에 각각 창간한 두 계간지 ‘창작과비평’(창비), ‘문학과지성’(문지)이 1980년에 동시에 폐간됐다. 모든 언론 보도와 간행물을 국가가 직접 검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 정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지식인들의 손과 발을 영원히 묶어 둘 수는 없었다.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법의 테두리를 피해 동인지와 무크지를 만들어 냈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순수 문학 잡지마저 출판에 제한을 받게 되자 새로운 형식을 가진 매체가 절실해졌다. 무크(Mook)는 매거진(magazine)과 북(book)의 합성어로 1970년대 초 미국 출판계에서 처음 등장했다. 잡지처럼 시리즈로 출간하지만 발행에 일정한 간격이 정해진 것은 아니며 내용 구성은 단행본처럼 꾸미는 것이 특징이다. 부커진(bookazine), 매거북(magabook)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현재는 부정기 간행물로 순화해 사용한다.가수로 예를 들자면 저 유명한 ‘나훈아-남진’처럼 탄탄한 독자층이 있었던 창비와 문지가 동시에 폐간되면서 우선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없어졌다는 큰 문제에 부딪혔다. 이에 사회가 통제되던 또 다른 시기인 일제강점기 시절 생겨났던 동인지 운동에 다시 힘이 실렸다. 창비는 잡지가 폐간된 이듬해인 1981년 신예 작가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지면을 만들어 준다는 의미로 신작 시집 시리즈를 해마다 한 권씩 펴냈다. 첫해에 내놓은 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에는 신경림 시인의 장시(長詩) ‘남한강’을 시작으로 시인 열세 명의 작품을 실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자 다음해에는 참여 시인을 스물한 명으로 늘린 ‘꺼지지 않는 횃불로’를 펴냈다. 1982년에 나온 두 번째 신작 시집 시리즈에는 훗날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될 김용택의 섬진강 연작시 네 편이 실렸다.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사였던 김용택씨가 시인으로 이름을 알린 첫 책이다.문지는 1982년부터 매년 한 권씩 ‘우리 세대의 문학’이라는 무크지를 발행했다. 이를 발판 삼아 1988년 봄에는 ‘문학과사회’ 창간호를 선보였다. 잡지 앞쪽에는 “사회 변화와 문학적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성민엽, 홍정선, 임우기, 정과리 등이 쓴 글을 실었다. 폐간됐던 잡지의 핵심 인물이었던 평론가 김현의 문학비평이 한쪽 지면을 차지했고 고은, 오규원, 이성복 등의 시가 실렸다. 소설은 이청준, 이인성, 김성동의 작품이 들어 있다. 또한 이렇게 구성된 계간지 문학과사회 창간호에서 특별한 점은 1980년대 줄곧 이어 오던 무크운동의 의미를 평가한 글이 기획서평이라는 이름으로 꽤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폐간됐던 잡지들이 하나둘 다시 돌아오는 시점에서 지난 10년간 각지에서 벌여 온 무크운동을 한기, 허석렬, 송기호 등이 글로 정리했다.1980년대에는 실로 다양한 무크들이 생겨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했는데 어쨌든 그 운명 자체가 부정기 간행물이었기 때문에 책 한 권을 만들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를 마음에 다지고 있었을 것이다. 책을 살펴보면 어떤 것이든 그런 다짐과 용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1983년 9월에 제1권을 펴낸 청사출판사의 무크 ‘민중’은 “시대적 이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부정기 사회비평지”라는 특징을 표지 제목 아래에 크게 새겼다. 책의 첫 시작은 고은 시인의 서시 ‘별’로 장식했다. 시에는 “제3세계 젊은이들에게”라는 부제를 달았다. 특집 기사로 “칠십 년대, 그 모순의 극복을 위하여”라는 주제 아래 1970년대의 사회변혁운동의 여러 모습을 정리했다. 2010년에 작고한 리영희 선생은 30여 쪽에 걸쳐 “한반도는 초강국들의 ‘핵볼모’가 되려는가”라는 제목으로 국제 정세를 분석한 글을 실었다.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 상황이 약간 달라지기는 했어도 한반도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핵무기를 둘러싼 각 국가의 신경전을 이미 1980년대에 예리한 시각으로 내다보고 있으니 그 현안이 놀랍다.팔십 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출판에 대한 법의 규제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폐간된 잡지와 똑같은 이름으로 1985년에 무크를 발행했던 창비는 허가 없이 잡지를 발행했다는 이유로 출판사 폐쇄 조치까지 받았으나 1988년에는 다시 이름을 찾아 복간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됐다. 규제가 완화돼 발행되는 잡지의 내용과 성격도 비교적 다양해졌다. 1986년 풀빛출판사에서 창간호를 펴낸 ‘겨레와 어린이’는 “어린이의 참삶을 위한 부정기 간행물”이라는 특징을 내세웠다. 창간 특집 기사로 “오늘의 현실과 어린이 문학”이라는 주제를 잡았는데 첫 글은 이오덕 선생이 문을 열었다. 1960년대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던 최하림 시인은 “톨스토이 민화에 나타난 교육사상 고찰”을 기고했다. 그 외에 동화작가 권정생의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서정오의 “할아버지의 보물” 등 동화도 함께 실렸다. 풀빛출판사는 지금까지도 어린이 책 쪽에 큰 힘을 기울이고 있다.여성운동 또한 계속해서 힘을 받으며 목소리를 키워 나갔다. 한국 여성문학연구회는 1989년에 ‘여성과 문학’ 제1집을 창간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여성 관련 문학작품과 논문들을 정리하는 노력을 시작했다. 팔십 년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여성 비평가의 눈으로 해석한 글을 특집으로 마련했고 김보희, 박희진 교수는 버지니아 울프 문학을 여성학적으로 재조명했다. 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던 유안진, 강은교, 신달자, 오정희 등의 시와 소설이 그 뒤를 이었다. 채숙희 교수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유명했던 ‘계약결혼’에 대한 논평을 썼다. 이 외에도 1980년대에는 실로 많은 무크들이 존재했지만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모두 실패한 실험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발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들이 그 뒤를 받치고 있어야 한다. 실패와 성공이라는 결과론을 떠나서 다양한 시도들이 공정하게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부를 만하다. 격동의 한 시기를 마감하고 뒤를 이어 다가온 1990년대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문민정부의 시대였고 문화와 경제가 크게 발전했던 때이기도 하다. 나는 이 당시에 창간했던 두 잡지를 무척 아낀다. 하나는 1991년 겨울 초입에 첫 호를 선보인 ‘녹색평론’이다. 멈출 줄 모르는 산업화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 환경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한 용감한 잡지다. 또 다른 잡지는 1994년 겨울에 창간한 ‘리뷰’(REVIEW)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문화대통령’ 서태지를 표지 모델로 쓴 문화비평 잡지다. 지금도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헌이 서태지를 인터뷰했고 박상우, 한강, 김소진의 소설을 함께 실었다. 비록 지금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 잡지지만 이 역시 돌아보면 대중문화비평이라는 넓은 밭에 뿌려진 귀중한 씨앗이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크고 작은 잡지들이 있다. 이들에게 성공과 실패의 잣대는 의미가 없다. 모두가 하나의 씨앗이기에 저마다 소중하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애환…‘고향이 어디세요’ 예고편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애환…‘고향이 어디세요’ 예고편

    “여기서 죽기는 싫어요. 고향에 가서 죽고 싶어요.” 휴먼 다큐멘터리 ‘고향이 어디세요’ 30초 예고편이 공개됐다. ‘고향이 어디세요’는 1946년 영하 50도의 혹한 지역 캄차카에 파견된 이후,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조선인 노무자들의 애절한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는 고향이 휴전선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두고 온 처자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김용복 할아버지, 서울 출신으로 이북에 시집을 갔던 홍순옥 할머니, 포항 출신으로 만주에 갔다가 38선이 그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손진택 할아버지 등 영하 50도 혹한의 땅 캄차카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담았다. 공개된 예고편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3,700km 떨어진 혹한의 땅, 캄차카 반도”라는 카피를 배경으로 “고향이 어디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수십 년간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조선인 노무자들의 답변은 그들의 인고의 세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특히, 함경남도 신창읍이 고향인 송유득 할머니가 “여기서 죽기는 싫어요. 고향에 가서 죽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과 임양한 할아버지의 “꿈에도 보여. 꿈에도 조선이 보인단 말이야…”라는 절절한 이야기는 그들의 사무친 그리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기에 임양한 할아버지의 아내 발렌찌나 스쩨파노브나가 “한국인을 어떻게 죽이고 학대했는지를 밝히세요.”라는 말은 캄차카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20년에 걸쳐 캄차카에서 버림받은 한국인들을 치열하게 기록한 정수웅 감독의 ‘고향이 어디세요’는 한 개인의 애환만이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가슴 아픈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예정이다. 영화 ‘고향이 어디세요’는 11월 개봉 예정이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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