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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인 아버지 이태우, 우주 에너지 연구..김구라에 “자기중심적”

    이상인 아버지 이태우, 우주 에너지 연구..김구라에 “자기중심적”

    16일 KBS 2TV에서 방송된 교양프로그램 ‘속보인’에서는 50년째 우주 에너지 연구에 빠져 있다는 탤런트 이상인의 아버지, 이태우 씨의 사연이 공개됐다. 지난 50년간 한결같이 알 수 없는 연구에 빠져 지내는 아버지가 걱정이라며 ‘속보인’을 찾은 탤런트 이상인. 우주 에너지 연구를 위해 집까지 지었다는 놀라운 얘기에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경남 밀양으로 찾아갔다.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 우주 에너지 연구를 위해 지었다는 집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틈만 나면 명상을 한다는 이태우 할아버지. 이유인 즉슨, 바로 그 장소가 우주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완벽한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 우주에너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집 천장을 할아버지가 직접 피라미드 형태로 설계하고 지었다고. 우주에너지를 쬐는 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피라미드 집으로 동네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진지하게 이태우 할아버지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 그런데 그 손에 들린 것이 바로 펜듈럼이다. 보통 수맥을 찾는데 사용되는 작은 금속 추인 펜듈럼으로 사람의 체질 판별부터 시작해 아이큐 등 세상 만물의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할아버지. 20여년 전 실제로 이 펜듈럼으로 우주 에너지의 기운을 읽어 아들 이상인에게 탤런트 시험을 보라고 한 것도 할아버지였단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회계사 시험을 한 달 앞둔 아들에게 갑자기 KBS공채 탤런트 시험을 보라 했다는 것. 그런데, 그 해 바로 KBS공채 탤런트에 합격한 이상인씨, 이듬해엔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 주연까지 단박에 꿰찼다. 이후, 자칫 얼토당토 않아 보일 수 있는 할아버지의 연구를 가족들은 말릴 수 없었다고 한다. 펜듈럼으로 좋은 에너지가 나오는지를 확인한 식재료로 담가 놓은 발효액과 동서양 의학연구 서적들부터 UFO연구 자료까지 지난 50여년 간 장르와 경계 없는 연구 흔적들로 가득하다. 늘 새로운 연구 시도 덕분에 농업분야에서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단다. 특히 야생에서만 자라는 ‘꾸지뽕’을 국내 최초로 대량 생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얼음골 사과 묘목 개발도 해냈다. 한편 펜듈럼으로 감정한 결과 ‘속보인’의 김구라에게 “자기중심적이다. 겸손할 것”라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할아버지. 반면 박은영 아나운서에게는 “아이큐가 140! 머리가 좋아서 뭘해도 성공했을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 (5) ‘삼성가 장손’ CJ그룹 이재현 회장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 (5) ‘삼성가 장손’ CJ그룹 이재현 회장

    삼성그룹에서 분리 뒤 22년만에 CJ 20배 괄목성장선진적 기업문화로 취준생 ‘입사하고 싶은 기업1위’ 삼성가 장손인 이재현(58) 회장은 설탕과 밀가루 제조기업에 불과한 제일제당을 19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한 이후 적극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서 오늘날 CJ그룹으로 일군 ‘제2의 창업자’로 평가받는다. 분리 당시 1조 7300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이 지난해 약 35조원을 기록하는 등 22년만에 CJ그룹을 엔터테인먼트, 홈쇼핑, 물류 등을 아우르는 종합생활문화그룹으로 키웠다. 이 회장은 어릴 때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체격 등 외모, 사고나 행동방식까지 조부와 비슷해 ‘리틀 이병철’이라고도 불린다. 이 회장은 김만조 전 연세대 교수의 딸 김희재(58)씨와 결혼한 후에도 독립하지 않고 할머니 박두을씨가 2001년 1월 별세할 때까지 서울 장충동 집에서 모셨다. 지금도 모친 손복남(85) 고문을 모시고 산다. 경복고, 고려대 법대 출신인 이 회장은 1983년 씨티은행에 취직, ‘탈 삼성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이 “장손인 재현이에게 왜 남의 집살이를 시키냐”는 불호령을 내려 1985년 제일제당 경리부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기획관리부장,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대우, 제일제당 부사장, 부회장을 거쳐 2002년 마침내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 회장은 남들이 제조업과 수출에만 매달려 있던 20여년 전에 이미 문화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에 나섰다. 단기 적자에 연연하지 않고 큰 그림의 사업방향을 제시하며 그룹의 도약을 이끌었다. 1995년 미국 신생 영화제작사 드림웍스에 3억 달러(약 3000억원) 투자를 결정하고,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영화사업에서 철수할 때 문화사업을 뚝심있게 밀어부쳤다. 이 회장이 CJ그룹을 키운 데에는 시련도 함께 했다. 이 회장은 만성신부전증과 삼성가의 유전병으로 알려진 CMT(샤르코-마리-투스)를 앓고 있는 등 몸이 편치 않다. 2013년에는 배임·탈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면서 그룹이 총수 부재의 위기상황을 맞기도 했다. 2017년 5월 경영일선에 복귀한 이 회장은 ‘그레이트 CJ’와 ‘월드베스트 CJ’를 경영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레이트 CJ는 2020년까지 매출 100조원을 실현하겠다는 것이고, 월드베스트 CJ는 2030년까지 3개 이상 사업에서 세계 1등이 된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지난해 그룹 지배구조를 CJ, CJ제일제당, CJ대한통운으로 단순화했다. 인수합병과 매각 등을 통해 주요 계열사들을 정비하고 있다. 2011년 대한통운을 인수한 이후로 해외시장에 눈을 돌렸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브라질 셀렉타, 러시아 라비올리, 베트남 민닷푸드 등을 인수했다. CJCGV는 러시아에 진출한 데 이어 호주, 말레이시아, 인도 등에 4D플렉스 상영관을 열었다. CJ대한통운도 2017년 아랍에미레이트 이브라콤, 인도 다슬로지스틱스를 사들인 데 이어 베트남 제마뎁과 지분 인수 계약을 맺었다. 올 들어 대대적인 내부 사업 재편에도 나서 지난 7월 CJ 오쇼핑과 CJ E&M의 합병 법인 ‘CJ ENM’을 출범시켜 국내 최초의 융복합 콘텐츠 커머스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기업문화도 선진적으로 바꿨다. 2000년부터 말단직원에서부터 CEO에 이르기까지 직급에 관계없이 이름 석자에 ‘님’자만 붙여 부르는 호칭파괴와 복장자율화, 플렉서블 출퇴근제 등을 단행했다.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로 한달 동안 ‘자녀입학 돌봄휴가’를 낼 수 있다. ‘긴급 자녀 돌봄 근로시간 단축’도 신설해 일시적으로 긴급하게 자녀를 돌봐야 할 상황이 생기면 하루에 2시간 단축 근무를 신청할 수 있다. 남성의 출산휴가(배우자 출산)를 2주 유급으로 늘리는 등 임신과 출산 지원 역시 법정기준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이뤄진다. 이런 기업문화로 잡코리아에 따르면 CJ그룹은 2018년 취업준비생들이 상반기에 입사하고 싶은 기업 1위로 꼽혔다. 2016년부터 3년 내리 취업준비생들이 꼽은 ‘직원 복지문화’가 제일 좋은 기업이기도 하다.이 회장은 부인 김희재씨와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녀 이경후(33) 상무는 미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조직심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2011년 7월 CJ주식회사 사업팀 대리로 입사했다. 지난해 11월 CJ 미국지역본부 상무로 승진한 뒤 지난 7월부터 CJ ENM의 브랜드전략담당으로 근무중이다. 남편 정종환(39) 상무는 CJ미국지역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미국 사업을 관할하고 있다. 아들 이선호(28)씨는 미 컬럼비아대 금융경제학을 전공한뒤 2013년 CJ그룹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에서 대리점 영업, 마케팅 등 현장경험을 쌓은 뒤 제일제당 BIO사업관리팀에서 일하고 있다.이 회장의 외삼촌인 손경식(79) 회장은 1995년 제일제당 회장에 취임한 이후 20년 넘게 이재현 회장과 함께 CJ그룹의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경기도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씨가 부친이다. 이 회장의 어머니 손복남 고문이 친누이다. 손 회장은 경기고 2학년 재학 중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한 수재다. 안국화재 사장, 제일제당 부회장을 거치며 삼성그룹에서의 분리독립 등 위기때마다 이 회장을 도왔다. 손 회장은 대한상의회장을 거쳐 경영자총협회장을 맡고 있는등 경제계를 대표하는 원로 경영인이다.이 회장의 누이인 이미경(60) CJ그룹 부회장은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힌다. 서울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미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동아시아 지역연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푸단(復旦)대 대학원에서 역사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늘날 CJ 그룹이 글로벌 문화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동생인 이재현 회장을 도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왔다. 지난해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의 신규회원으로 위촉됐다. 진보적인 영화를 제작·지원한다는 이유 등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영일선 퇴진을 압박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년간 미국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둘째 남동생은 이재환(56) CJ파워캐스트 대표다. 이 대표는 최근 요트를 개인 용도로 구입해 수십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있는 중이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금태섭 “헌법 명시된 판결문 공개…사법 불신 해소의 첫걸음”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금태섭 “헌법 명시된 판결문 공개…사법 불신 해소의 첫걸음”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는 가장 먼저 법원 재판의 문제점을 소액재판, 심리불속행, 판결문 등 세 분야로 나눠 짚어 봤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문제는 너무 많은데 해결 방법이 뾰족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지난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검사 출신인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서울신문 사회부 법조팀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인 금 의원은 두 시간 가까이 우리 재판의 문제점을 짚어내며 사법 불신을 해소하려면 재판의 결과물인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액재판, 심리불속행 모두 판결문에 판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지 않으냐”며 “판결문, 나아가 소송 기록을 공개하면 심리가 충실해질 수밖에 없고 당사자들도 판결이 왜 그렇게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민영 기자(이) 서울중앙지법 소액법정을 자주 찾았다. 변호사 수임료 반환 소송을 제기한 할아버지가 패소했는데 판결문에는 패소 이유가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왜 패소했는지 혹시 아느냐”고 묻더라. 하도 답답하니까 같이 재판에 들어갔던 기자는 혹시 알지 않을까 싶었다고 하더라. 남편과 불륜 관계인 여성에게 3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도 있었다. 판결문을 보니 100만원을 지급하라고 나와 있었다. ‘피고의 부정행위, 내용, 기간 등을 고려했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그럼 불륜을 3.3%만 인정한 걸까. 이런 식이라면 원고든 피고든 만족하기 어렵지 않겠나. 금태섭 의원(금) 한국은 변호사 강제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소액법정에 가보면 당사자가 직접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원고와 피고 모두 주장과 증거가 정리가 안 된 채 나온다. 판사가 판결문을 쓰려면 누군가 쟁점을 정리해 줘야 한다. 당사자들은 주장과 증거를 구별하지 못한다. 판사가 인정해 주고 싶어도 영수증 같은 형식적 증거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은 변호사 2만명 시대다. 소송 제기 전 상담해 줄 변호사가 필요하다. 예전 같으면 변호사 쓰는 데 돈이 많이 들었지만, 지금은 금액이 많이 내려갔다. 풍부한 변호사 인력을 이용해 당사자 주장을 충실하게 정리해 주면 판사는 변호사들이 정리한 서류를 보면 된다. 금융기관 사건 등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다툼이 있는 사건은 금액이 적더라도 당사자들이 제대로 재판받을 수 있게 기준을 바꿔야 한다. 홍희경 기자 소액사건 기준을 대법원 규칙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지극히 법원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을 무리하게 추진해 재판거래 의혹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의 관심은 상고심에만 있고 하급심에는 없다. 금 소액사건 기준은 대법원 규칙이 아닌 법률로 정하는 게 맞다. 규칙으로 정해지다 보니 소액사건 기준 금액이 지난해 2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50%나 뛰었다. 판사 입장에서는 사건 금액이 적으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기준은 국회가 정해야 국민의 인식을 반영할 수 있다. 나상현 기자 얼마 전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문건에 ‘국민은 대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라는 내용이 있어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법원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어서 심리불속행 기각률이 높은 거 아닐까. 금 한국처럼 모든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오는 나라도 있고 미국처럼 1년에 70~80건 대법원으로 오는 나라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기준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관예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1년 재판 건수가 얼마 안 되니까 그야말로 역사에 남는 판결을 내놓는다. 1966년 미 연방대법원이 ‘미란다원칙´을 만들었다. 미란다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성폭행범이었다. 미란다가 전관 변호사를 썼겠나? 대법원이 그 사건을 선택했고, 변호인 선임권과 진술 거부권의 원칙을 정립했다. 한국은 모든 사건이 대법원에 가기 때문에 변호사로서는 심불 기각이 나오면 큰 타격이다. 그래서 변호사가 의뢰인의 손을 잡고 대법관 출신을 찾아간다. 현재 대법원 사건이 4만건인데 대법관 12명이 재판 기록을 일일이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상고법원은 우리에게 악의 축이 돼 버렸다. 영미나 독일은 상고허가제로 사건을 다 쳐내고 일부만 대법원에서 본다. 일각에서는 대법관 증원도 이야기한다. 한국 현실에서 뭐가 더 맞을까. 금 개인적으론 상고허가제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 대법원 재판은 기본적으로 전원합의체가 원칙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대법관 전원이 머리를 맞대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대해 논의하는 게 헌법 취지에 맞다. 만약 대법관이 50명이라면 부별 재판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 항소심과 다를 게 없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대법관이 들어가서 대법원 판례를 바꾸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대법원이 사회적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는 재판을 하려면 상고허가제로 가야 한다. 이 어사그 보도를 통해 처음 공개된 대법관 주심별 심리불속행(심불) 기각률에 변호사들이 굉장히 놀라더라. 누구라도 기각률 낮은 대법관에게 재판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금 대법관 중 누구는 심불을 많이 하고, 누구는 적게 하는 사실이 공개되는 게 망신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공개해서 로스쿨에서 대법관별 판결문 분석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법관이 유사 사건에서 어떤 건 심불 처리했고 어떤 건 판결문을 썼다는 식으로 분석이 나와야 심불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다. 허백윤 기자(허) 형사판결의 경우 무죄면 판결문이 자세하고, 유죄면 지나치게 간단하다. 판결문을 받는 건 소송 당사자인데, 당사자에게 설명해 주는 게 아니라 검사에게 ‘당신이 기소했지만 나는 이런 이유로 무죄를 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는 걸로 보인다. 금 판결문에 들이는 수고를 줄여야 한다는 법원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재판 과정에 대한 사후 검토가 가능해야 한다. 미국은 판결문을 잘 쓰지 않지만 대신 소송 서류를 거의 다 볼 수 있다. 한국은 소송 기록은커녕 판결문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법원은 판결문 공개가 권위와 신뢰 상실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판결문 공개로 인한 개인정보보호법 위반도 걱정한다. 그래서 내가 이를 면책하는 법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 주장은 모순된다. 개인정보보호 논리로 판결문 공개가 안 되는 거라면 공개 법정에서 매일 위법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민 누구나 아는 땅콩 회항 사건에서 법원이 언론에 공개한 판결문을 보면 K그룹 T항공이라고 돼 있다. 조현아는 A라고 돼 있더라. 허 블랙리스트 판결문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H 대통령이라고 했다. 김동현 기자(김) 국정농단 사태 때 구속 전 피의자 심문 결과가 나오면 영장전담판사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로 뜬다. 판결문이 공개되면 판사를 공격하는 사례가 많아질 수도 있다. 금 판사 신상털기는 엄하게 다뤄야 한다. 검찰도 영장 기각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기보다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치권에서도 자기 당과 관련이 있으면 무조건 들고 일어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판결문 공개의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판결에 대한 사회적 비난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가려 놓으면 오히려 찾아내서 욕을 한다. 판결문 공개는 헌법에 명시됐다. 김 판결문 공개를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금 법원 불신을 해소하는 지름길이다. 전관예우도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보려면 빅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변호사를 못 만나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대법관 청문회에서 다운계약서를 물어볼 게 아니라, 그간 판결한 내용을 갖고 비판해야 한다. 건전한 비판이 필요하다. 소송하려는 사람들은 변호사 비용이 없으면 서점에 가서 ‘알기 쉬운 민사소송’ 책을 산다. 그것만 갖고는 절대 혼자서 소송할 수 없다. 판사들도 책보다는 판례를 찾는다.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판결을 찾아보면 증거로 뭘 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재판 정보가 공개돼야 한다. 정리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다음 회부터 수사·재판을 아우르는 형사사법의 비상식적 관행 점검이 본격 시작됩니다. 우선 선거범죄 처벌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이뤄지는지 검증합니다.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70년 전 中서류 찾아와라”… 머나먼 독립유공자 서훈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70년 전 中서류 찾아와라”… 머나먼 독립유공자 서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모든 재산을 내놓았던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독립유공자 예우법을 제정해 후손들의 생활을 돕고 있다. 애국지사들을 유공에 따라 건국훈장 1~5급,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으로 나눠 유족들에게 매달 58만~244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문제는 후손들이 조상의 독립운동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국가보훈처는 1895년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한 사실이 있어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에 한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나눠 독립유공자를 지정한다. 서훈 사실이 없을 때는 후손이 공적서와 평생이력서를 구비해 보훈처에 제출하면 국가보훈처는 제출 서류를 바탕으로 공적심사위원회 심의를 통해 포상 부여 여부를 결정한다. 보훈처는 심사 과정에 필요한 일제 치하 재판 기록 등 일반인들이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후손들에게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세월이 흘러 후손들이 증명 자료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심사 과정에서 독립운동 여부를 인정하는 기준이 모호해 심사위원들의 주관적인 평가가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보훈처의 현행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기준 탓에 독립운동가들이 독립투쟁 역사에 비해 저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는 6개월 이상 독립운동을 하거나 3개월 이상 옥고를 치른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선정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서훈 논란이 매년 끊이지 않는다.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 안맥결(1901~1976) 여사에 대한 서훈 불인정이 논란이 됐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이자 서울 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안 여사는 3·1 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선전원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펼치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됐다. 1937년 6월 28일부터 11월 9일까지 종로경찰서에서 수사를 받으며 고문을 당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1개월 만인 같은 해 12월 20일 만삭이라는 이유로 가석방됐다. 문제는 안 여사가 최소 ‘옥고 3개월 이상’이라는 조건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포상에서 탈락했다는 점이다. 안 여사의 포상을 추진한 흥사단과 유족들의 반발이 거세자 보훈처는 지난 4월 옥고 기준 3개월 조항 폐지 등 포상 기준을 완화해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 기준을 서둘러 바꿨다. 조선혁명군 부사령 박대호의 손자 박홍민씨도 할아버지의 포상 근거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그는 “1992년부터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위해 보훈처가 요구한 할아버지 재판 서류와 석방 서류를 찾으려고 5년간 헤맸지만 중국에서 서류를 찾지 못했다”면서 “여러 독립운동 자료에 할아버지의 독립 유공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데도 보훈처는 70년이 넘은 중국의 법원 서류를 가져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을 탈출해 항일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임도현 선생의 조카 임정범(63)씨도 마찬가지다. 큰아버지가 1931년 12월 동료 6명과 함께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서는 일제의 공출과 징병에 대한 거부 운동을 벌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43세에 생을 마쳤다. 임씨는 2004년부터 큰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심사를 8차례나 했지만 매번 탈락했다. 임 선생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은 모두 기록 문건뿐이라 공신력 있는 자료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펼치고도 수감 기록 등 증빙 자료가 부족하거나 소속 단체의 성격 등을 이유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200만명이 넘는다. 하지만 2017년 말 기준 독립유공자는 1만 4830명에 불과하다.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지정 절차가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이뤄지는 셈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지난해 9월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독립유공자 발굴 및 포상 확대 계획안’을 조속히 실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을 지낸 정운현 상지대 초빙교수는 “해방 이후 친일을 청산하지 못해 1994년에서야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그동안 독립유공자 서훈에 필요한 사료와 자료들이 대부분 사라졌다”면서 “독립투쟁 역사에 비해 독립유공자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은 모두가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포상 문턱을 대폭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대우에도 소홀함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과 전 재산을 팔아 독립군을 양성한 이회영 선생은 독립유공자 3등급이다. 3·1 운동의 상장인 유관순 열사도 3등급이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를 역임한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는 임병직은 1등급이다. 등급 기준에 원칙이 없다. 현재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 자유한국당 홍문표 의원, 바른미래당 이혜훈 의원이 각각 발의한 상훈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개정안은 서훈을 재조정할 수 있는 규정을 신설했다. 현행 상훈법은 서훈의 추천, 확정, 취소에 대한 규정만 명시돼 있고 사후에 서훈을 재조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염원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jrlee@seoul.co.kr
  • 광저우 독립운동가 33인… 역사마저 그들을 묻었다

    광저우 독립운동가 33인… 역사마저 그들을 묻었다

    경기 안양에 사는 김기용씨는 1988년 출판한 가문 족보에서 자신의 작은할아버지 김근제(1904~1927·추정)에 관한 기록을 발견한다. ‘독립투사, 독립군장교, 흑룡강전투에서 순국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김씨는 어렸을 때부터 작은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길 수차례 들었다. “과묵한 성격으로 힘이 셌고, 3·1 운동 때 일본 순사를 때려눕히고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갔다. 상하이에서 독립군 장교 교육을 받고 독립투사로 활약하다 하얼빈에서 23세의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확인하려 여러 종친을 찾아다니며 물어보고 250여권의 책을 뒤졌다. 그러나 어떤 증거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에게서 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중국 광저우에 사는 강정애씨가 “황푸군관학교 묘비에서 ‘김근제’라는 이름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2013년 8월 독립기념관 중국남부지역 독립운동유적지 실태조사 일행과 함께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를 방문한다. 벅찬 마음을 억누르며 묘비를 어루만진 김씨는 준비한 태극기와 국화꽃을 묘비 옆에 세우고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 한 병을 부어 참배를 올렸다. 강씨가 김근제에 관한 행적을 다수 발견했지만, 김근제 지사는 여전히 독립운동 유공자 명단에 들지 못한 상태다. 묘비가 광저우에 있지만 족보에는 순국지가 흑룡강전투라고 기록된 탓이다.중국 광저우의 역사연구가 강씨가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33명을 발굴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자료는 강씨가 10년 동안 중국 지역의 서적과 자료를 뒤지고 발품 팔아 찾은 것들이어서 순도가 높다. 강씨의 연구로 인해 그동안 어긋났던 사료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이들 가운데에는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우리 학계가 외면했던 이들에 관한 행적이 다수 담겼다. 이들의 행적이 사실로 드러나면 독립운동사 관련 연구에 큰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강씨가 발굴한 33인 가운데 신해혁명에 참여한 첫 한인으로 알려진 범재 김규흥을 제외하고 32명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다. 일부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학계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황푸군관학교에서 항공 비행사 교육을 받은 뒤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장교를 지냈던 박태하의 경우 해방 후 북한을 택하면서 남한에서 거론이 되지 않았던 사례다. 강씨는 광저우에서 입수한 자료와 1922년 조선일보 기사 등을 토대로 그의 행적을 밝혀냈다. 박태하는 1916년 12월 스물다섯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1917년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해 설치한 대원수부 항공처 산하의 비행기 수리공으로 취업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취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김복’(金復·본명 김규흥)의 주선 덕분이었다. 김복은 1908년부터 광저우에서 쑨원의 혁명 활동에 참여해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광둥성 정부의 고관이 된 인물이다. 쑨원 정부 아래에서 여러 공을 세운 박태하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1926년 5월 옛 소련으로 유학을 간다. 소련에서 항공 교육을 마쳤지만 박태하는 중국으로도 조선으로도 귀국하지 못하고 파블로프스키 촌에 남아 공산청년회 책임서기를 지내다 광복 후 북한에서 인민군 공군 사령으로 활동했다.이름이 알려진 이라 하더라도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행적을 비롯, 학계의 논란이 될 만한 사실도 다수 확인됐다. 박태하와 마찬가지로 황푸군관학교에서 항공 비행사 교육을 받은 차정신은 강씨가 현지의 여러 중국어 사료를 대조한 결과 남한 군인 김진일로 밝혀졌다. 김진일은 우리 공군 창설의 주역으로, 당시 행적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씨의 자료 가운데 불교계 독립 운동가들로 현지에서 사망한 이들, 한국에 돌아왔으나 알려지지 않은 세 명의 승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이육사가 광저우 중산대학에 재학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강씨가 발굴한 33명의 독립운동가에 관한 자료는 내년 초쯤 출판사 수류산방이 묶어 책으로 낼 예정이다. 심세중 수류산방 편집장은 “자료가 워낙 방대한 데다 교차 확인을 거치느라 3년 가까이 걸렸다”면서 “우리에게 알려진 상하이, 미국 등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 외에 그동안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을 구축하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보훈처, 건국포장 추서하며 가족에게 통보도 안 해”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보훈처, 건국포장 추서하며 가족에게 통보도 안 해”

    양인집 어니컴㈜ 대표는 지난 13일 미국에서의 항일 운동 자료를 통해 공개된 강명화 지사의 외종손이다. 강 지사의 손녀인 수잔 강을 설득해 하와이 모 대학으로 넘길 뻔한 이 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케 했다. 강명화 지사뿐만 아니라 아들 영대, 영소, 영문, 영상, 영각과 사위 양우조가 모두 독립유공자다. 양 대표는 이번 기증 과정에서 국가보훈처의 미숙한 일 처리를 아쉬워했다.보훈처는 강명화 지사의 다섯째 아들 영각씨가 199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고 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전혀 몰랐다. 가족에게 어떤 통보도 없었다. 포장이 집에 전달되지도 않았다. 양 대표는 “부인과 후손들에게 건국포장을 전달하려는 보훈처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강명화 지사와 수잔 강이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임을 증명하라며 1866년생인 강 지사의 사망진단서를 보훈처 직원이 요구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다. 1866년생이면 당연히 생존하지 않고, 더욱이 강 지사가 북한에서 사망해 증명서를 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진단서 요구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씨는 “할아버지 강명화-아버지 강영각-손녀 수잔 강의 관계를 증명하는 가족관계증명서만으로 충분한데 보훈처는 굳이 애국지사 본인의 사망진단서 제출을 요구했다”면서 “현실을 도외시한 채 규정만 강조한 융통성 없는 일 처리”라고 꼬집었다. 양 대표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기까지 문턱이 너무 높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는데,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뒤에도 보훈처의 일 처리가 매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jrlee@seoul.co.kr
  • 무대 오르는 부자, 무대 만드는 부부

    무대 오르는 부자, 무대 만드는 부부

    전무송 주연·아들 전진우 큰아들역 맡아 딸 전현아 제작PD·사위 김진만은 연출 17~26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서 공연“자, 다시 할게요.” 지난 12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지하연습실. 연출가의 사인과 함께 10초간 침묵이 흘렀다. 감정선을 다시 잡은 노배우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제3회 늘푸른 연극제(옛 원로연극제)에서 무대에 오르는 배우 전무송(76)의 ‘세일즈맨의 죽음’ 연습실에는 이날 오후 내내 긴장감이 흘렀다. 주인공 윌리 노먼의 극중 나이는 63세다. 1984년 40대의 나이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처음 연기했던 전무송은 어느새 윌리보다 연장자가 됐다. 이번이 그에게는 일곱번째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그는 “체력이 옛날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대에서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이번 공연은 아역배우 출신인 사위 김진만이 연출하고 아들 전진우가 극중 큰아들 비프로, 딸 전현아가 제작 PD로 참여해 포스터에 ‘전씨’만 3명이다.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자는 생각은 딸이 먼저 했다. 아버지의 대표작이자, 작품 출연을 처음 권유한 연출가 권오일 선생의 10주기를 기리는 뜻도 됐다. 무엇보다 익숙한 작품이니 아버지에게 덜 부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무대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편치 않다. 전현아는 “신경이 예민해진다며 자꾸 식사를 거르시려고 한다”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전무송을 쳐다봤다. 이번 공연은 실제 부자인 전무송, 전진우가 작품 속 아버지와 아들로 출연해 호흡을 맞춘다. 작품 속에서 부자는 수시로 싸운다. 산업화의 부품으로 전락한 세일즈맨 아버지와 한때 집안의 자랑이었지만, 성인이 돼 변변한 직장도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들은 서로를 원망하고 갈등하지만, 어쩌면 동일인물이나 다름없다. 이날 무대 뒤에서 스태프와 취재진을 챙기던 전현아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서로 멱살을 잡으며 폭발하는 연기를 할 때는 감정이입이 된 듯 뚫어지게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전무송은 아들의 연기를 어떻게 평가할까. “서로 세대도 다르고 감각도 다르지만, 제 주장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주장이 이 작품에 녹아들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대 위에서는 상대 배우일 뿐이라면서도 아들에 대한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묻어 나왔다. 전무송은 “주변에서 ‘야, 아들이 너 젊었을 때보다 100배는 연기 잘하더라’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전현아도 이번 작품에 배우로 참여하고 싶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극중 윌리의 부인 린다 역에 욕심이 났지만, 아버지와 부부로 호흡을 맞추기에는 아무래도 감정이입이 되기 어려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 김태윤군이 작품에서 ‘목소리’로 잠깐 출연해 외할아버지와 호흡을 맞춘다. 이들은 올해 10월 결혼을 앞둔 전진우까지 일산에서 3대가 함께 살고 있다. 하루 8시간의 연습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도 “다시 맞춰 보자”며 연습은 계속된다고 한다. 전무송은 “가족이 있는 이들이게는 ‘거울’을 보듯 감정이입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라며 “가족이 다 같이 와서 함께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연은 오는 17∼26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할아버지 ‘깜박’ 실수로 8시간 동안 차에 방치된 손녀 사망

    할아버지 ‘깜박’ 실수로 8시간 동안 차에 방치된 손녀 사망

    생후 10개월 된 여자 아이가 할아버지 승용차에 8시간가량 방치돼 있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12일 스페인 마요르카섬 마나코르 경찰에 따르면, 신원미상의 할아버지(56)는 지난 10일 오전 7시쯤 커피를 마시러 가기위해 손녀를 차에 태워 집을 나섰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자신이 손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볼일을 본 후 오후 3시쯤 돌아왔고, 그제야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알아차렸다. 할아버지가 차를 주차해놓고 떠났을 당시 손녀는 뒷좌석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나가던 의사의 신고로 응급구조대가 현장에 출동했으나 어린 손녀의 생명을 되살리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은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불안 발작 증세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 “손녀를 차에 태웠다는 것을 깜박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더위에 약한 어린 손녀가 무더운 날 차 안에 장시간 방치돼 열사병으로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 관계자는 “사고 당일 기온이 30도 이상이어서 차 안 온도는 이보다 더 했을 것”이라며 "숨진 여아의 죽음을 둘러싼 조사가 진행 중이며 조만간 기소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할아버지의 한 지인은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다. 손녀를 대단히 좋아했던 그가 끔찍한 비극으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구글이미지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현장 행정] “불암산 힐링타운은 행복충전소로”

    [현장 행정] “불암산 힐링타운은 행복충전소로”

    “주민들이 활력을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지난 6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 불암산 자락길. 오승록 노원구청장이 800m 길이의 자락길을 천천히 걸으며 생활공간에 자연과 문화를 더 가깝게 끌어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자락길 인근에 위치한 중계주공아파트의 주민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김상호(72) 할아버지는 “집에 있으면 더운데 자락길은 시원하니까 하루에 한 번씩은 오는 것 같다. 무장애길이라 산에 마음 편하게 올 수 있다”며 웃었다. 이날은 기온이 35도까지 올랐지만 자락길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오 구청장은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냐”면서 “서울시의원 시절 예산 13억원을 확보해서 만든 곳이다. 공사 초기에는 과잉 투자라며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는데 지금은 ‘세금을 제대로 썼다’고 주민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노원구가 구민들에게 휴식과 행복을 줄 수 있는 ‘힐링도시’ 만들기에 나섰다. 주민들이 멀리 가지 않고 동네에서 제대로 쉴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오 구청장의 생각이다. 민선 7기 구호도 ‘자연과 문화 속으로! 힐링도시 노원’으로 정했다. 구 관계자는 “최근 구에서 푸른도시과, 문화예술과가 포함된 힐링도시추진단을 만들고, 다음달 30일까지 관련 아이디어를 구민들에게 받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구는 불암산에 힐링타운을 조성한다. 힐링타운은 자락길, 나비정원, 산림치유센터 등 3곳이 중심이 된다. 자락길은 현재 구간에서 불암산 전망대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연장 구간은 260m로 구는 예산 7억원을 투입한다. 다음달쯤 개관 예정인 나비정원은 곤충 생태학습 및 체험활동 공간으로 손님맞이 준비에 바쁘다. 산림치유센터는 건립 부지를 마련하고 공사를 앞두고 있다. 심신이완실, 검사실, 족욕실 등이 센터에 들어선다. 오 구청장은 “힐링타운 방문객들이 ‘자락길→나비정원→치유센터’의 코스를 통해 힐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구는 지역 내 또 다른 명소인 수락산, 영축산, 초안산도 힐링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수락산에 서울시 최초의 휴양림을 건설하고, 영축산·초안산에는 불암산처럼 무장애숲길을 만든다. 영축산은 숲길 코스가 5.4㎞에 달한다는 게 구 관계자의 설명이다. 불암산 자락길(800m)의 7배 길이다. 오 구청장은 “노원구를 자연, 문화 친화적인 도시로 만들어 구민들이 언제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김정은 위원장의 반팔 차림이 의미하는 것들 BBC의 분석

    김정은 위원장의 반팔 차림이 의미하는 것들 BBC의 분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늘 입던 인민복을 벗고 짧은 반팔 셔츠 차림을 해 눈길을 끌고 있다고 영국 BBC가 9일(현지시간) 전했다. 북측에도 폭염이 상당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로동신문 첫 면과 둘째 면에 걸쳐 보도된 사진들을 보면 다른 간부들은 모두 인민복 차림인데 반해 부인 리설주와 함께 금산포 젓갈 가공공장을 시찰하는 김 위원장 혼자만 짧은 반팔 차림이다. 방송은 선전선동 목적에 부합하는 사진만 철저히 걸러내는 북측 풍토로 볼 때 현재 북한 전역을 덮친 폭염 피해가 상당히 심각하고 식량 위기에 대한 걱정이 그만큼 높다는 반증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번 주초 시찰에 나설 때만 해도 김 위원장은 회색 재킷에 밀짚모자, 그리고 특유의 넉넉한 바지 차림이었다. 북한 정권 수립자인 할아버지 김일성이 ‘마오 스타일’을 약간 변형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주초 최고 기온이 섭씨 37.8도까지 치솟자 재킷을 벗어던지고 반팔 셔츠를 허리띠 아래로 집어넣었다. 대신 리설주가 남편의 재킷을 받아들고 수행했다.방송은 나아가 김 위원장이 지난 6일 삼천 메기농장을 찾은 지 이틀 만인 8일 젓갈 가공공장을 찾은 것은 북한이 폭염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또 메기농장과 젓갈 가공공장을 찾은 것이 한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미 당국은 가뭄 피해가 심각하다고 호소했고 지난해 인구의 70%가 식량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도된 이 나라의 농업에 상당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북한 당국은 연일 생선이나 버섯 같은 대안 식품들의 증산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KCNA)은 삼천 메기농장을 시찰했을 때 탱크에 메기가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지난해보다 10배 증산됐다고 선전했다. 지난해 김 위원장의 시찰 때 의도치 않게 그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탄도미사일 두 대가 자세히 알려진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달 일련의 시찰 때 김 위원장이 현지 간부들의 혼을 내는 모습이 공개됐다. 당시 김 위원장은 발전소 건설이 17년째 이뤄지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면서 문제가 있는 간부들을 종신형에 처하거나 부패 혐의로 처단하겠다는 식으로 위협했다. 이런 과거의 예처럼 김 위원장이 단순히 더워서 정복을 벗어던진 것이 아니라 숨겨진 뜻과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자전거에 11대 스마트폰 포케몬고 즐기는 대만 할배

    자전거에 11대 스마트폰 포케몬고 즐기는 대만 할배

    자전거에 11대의 스마트폰을 장착해 포케몬고 게임을 즐기는 이 할아버지, 그걸로도 모자란단다. 앞으로 4대를 더 설치하겠단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포케몬 삼촌’으로 통하는 첸산위안씨를 영국 BBC가 9일(현지시간) 소개했다. 손주한테 게임을 배웠는데 이젠 푹 빠져 바스켓 안에 담긴 보조 배터리의 전원이 닳아질 때까지 하루 20시간 내내 게임에 매달리려고 11대의 스마트폰을 자전거에 비치했다. 게임에 한달 동안 쓰는 돈만 1290달러(약 144만원) 이상 된다. 주로 교통체증 없는 밤늦게 타이베이와 대만 전역을 돌아다니며 게임을 즐긴다. 현지 뉴스 채널 EXP.GG이 인터뷰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는데 그 때는 11대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겼다. 이 게임을 즐기는 팬들은 소셜미디어 레딧 닷컴에 그의 사진이 올라왔을 때 처음 그의 존재를 알았다. 그는 친구를 만들게 해주며 치매를 예방한다고 이 게임의 장점을 소개했다. 2016년 7월 출시된 포케몬고는 빠르게 전 세계에 확산돼 닌텐도 주가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정신이 팔려 죽거나 다칠 위험을 높인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생후 10개월된 딸을 종교적 이유로 아사하게 만든 부모

    생후 10개월된 딸을 종교적 이유로 아사하게 만든 부모

    종교상의 이유로 의료기관을 불신하고, 치료를 거부한 부모가 10개월 된 딸을 영양실조와 탈수증으로 죽게 내버려뒀다. 8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 뉴욕 데일리 등 외신은 미시간 주 시더 스프링스시 출신의 세스 웰치(27)와 타티아나 푸사리(27)가 딸 메리를 숨지게 해 지난 6일 ‘1급 아동학대와 중죄모살(살의 없이 범한 살인)’로 기소됐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2일 아침 웰치는 유아용 침대 안에서 딸 메리가 숨을 거둔 것을 목격하고 구조대에 신고했다. 당시 아이는 눈이 퀭하고 볼이 움푹 들어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다. 다음날 사체 부검 결과, 메리의 사망 원인은 방치로 인한 영양실조와 탈수로 밝혀졌다. 이에 부모는 경찰에 연행돼 받은 조사에서 딸이 죽기 한 달 전부터 바싹 여위고 저체중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켄트 카운티 법원 서류에 의하면 두 사람은 아동 보호 서비스(Child Protective Services)를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고, 의료 서비스에 대한 믿음과 신뢰 부족, 종교적 이유들 때문에 의학적인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의사들을 ‘의학관련 신흥 종교집단의 성직자들’로 간주해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웰치는 평소에도 페이스북을 통해 신앙과 복종, 의사에 대한 불신을 언급해왔다. 그는 신이 병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에 메리를 포함해 각각 2살, 4살인 나머지 자녀들에게도 백신을 맞히지 않았다. 진화와 적자생존을 거론하며 ‘약한 자는 죽도록 놔두고 강한 자가 생존하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뒤늦게 자신들이 최악의 부모임을 깨달은 두 사람은 나머지 아이들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댁으로 보냈고, 막내딸의 죽음을 가슴아파했다. 현재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인 푸사리와 웰치는 20일 법정에 재출두해 중죄모살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야한다.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잡고 말거야!”…스마트폰 11대로 ‘포켓몬 고’ 하는 할아버지

    “잡고 말거야!”…스마트폰 11대로 ‘포켓몬 고’ 하는 할아버지

    한때 전 세계를 휩쓸었던 증강현실 모바일 게임 ‘포켓몬 고’의 열풍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이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공개됐다. 영국 메트로 등 해외 언론의 8일 보도에 따르면 대만에 사는 풍수 전문가인 천샨위안(70)은 지금까지도 포켓몬을 잡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자전거에 총 11대의 스마트폰을 장착하고 포켓몬을 잡기 위해 시내를 배회한다. 스마트폰 11대의 화면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핸들 위쪽에 이를 장착한 채 거리를 달리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포켓몬을 잡기 위한 그의 열정은 남다르다. 그의 자전거에는 하루 20시간 이상 포켓몬 고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 배터리가 부착돼 있으며, 이를 이용해 하루 대부분을 공원과 거리에서 포켓몬을 포획하는데 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그가 처음 포켓몬 고에 빠진 것은 2016년 손자로부터 게임의 존재와 방법을 알게 된 후부터다. 전 세계에 불었던 열풍은 냄비가 식듯 사라져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포켓몬 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열정이 사그라지기는커녕, 포켓몬을 잡을 수 있는 스마트폰을 15대까지 늘리는 것이 그의 소원이다. 그는 “게임을 하면 치매와 같은 질병을 예방하는데 좋다. 뿐만 아니라 다른 노인들과 대화할 이야깃거리도 생기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포켓몬 고를 향한 애정이 남다른 그는 현지 언론에도 소개되며 ‘포켓몬 아저씨’로 불리고 있다. 한편 포켓몬 고는 한때 교통사고를 유발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포켓몬 고 사용자가 급증하면서 10일 동안 11만 건의 교통사고가 유발됐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햇볕으로 인한 화상이나 게임 중독 등의 후유증을 경고하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사진=EPA·연합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 (3) 이부진, 이서현 사장의 ‘자매경영’

    [이종락의 재계인맥 대해부] (3) 이부진, 이서현 사장의 ‘자매경영’

    ‘삼성가 3세’ 자매지만 다른 경영스타일로 승부수‘리틀 이건희’ 이부진, 공격 경영으로 성과 일궈내‘정중동’ 이서현, 침체에 빠진 패션업계에서 부각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녀 이부진(49) 호텔신라 사장과 차녀 이서현(43)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만큼 ‘삼성가 3세’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외모는 차분해 보이지만 경영 스타일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성격과 외모를 빼닮아 ‘리틀 이건희’로 불리는 언니 이부진 사장은 공격적인 경영 스타일을 발휘하는 반면 이서현 사장은 ‘정중동’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부진 사장은 대원외고, 연세대 아동학과 출신으로 1995년 삼성복지재단에 입사한 이후 2001년 기획부장을 시작으로 호텔신라에 몸담고 있다. 2005년 상무, 2009년 전무로 승진했고 2010년 사장에 올라 호텔신라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2013년 한국 기업으로는 최대 규모의 첫 해외매장인 싱가포르 창이공항 화장품·향수 사업권을 획득했다. 이후 2014년 마카오국제공항 면세점 사업권을 획득해 지난해 홍콩첵랍콕국제공항 화장품·향수·액세서리 매장 운영권을 획득하는 등 호텔신라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라이벌인 현대가와의 합작은 이 사장의 승부사 기질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2016년 호텔신라는 신규면세점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서울시내에 마땅한 부지가 없을 뿐더러 호텔신라의 당시 국내면세시장 점유율이 30%가 넘어 독과점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부진 사장은 현대산업개발과 손잡음으로써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소했다. 면세점 경쟁에 함께 뛰어 든 사촌지간인 신세계와 등을 돌렸다. 업계는 당시 삼성과 현대가의 ‘정략결혼’을 ‘신의 한수’로 평가했다. 이렇게 탄생한 ‘HDC신라면세점’은 지난해 1월 신규면세점중 최초로 손익분기점 돌파에 성공하며 5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매출액 4조 115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 상반기 매출액 2조 3004억원과 영업이익 1137억원을 거두는 등 호실적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이부진 사장은 지난해 포브스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100인’에서 93위(2017년 11월), 포춘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기업인(비미국지역 여성 기업인)’ 50인중 40위(2017년 9월)에 선정됐다.이부진 사장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병치레를 많이 해 이 회장이 가장 많이 챙긴 딸이다. 이 사장이 2001년 호텔신라 부장으로 입사했을 때 이 회장은 호텔신라에 두 달 가까이 직접 숙박하면서 딸에게 힘을 실어줬을 정도다. 이렇게 애지중지한 딸이었기 때문에 삼성에스원 평사원이었던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과 결혼하려는 딸의 고집을 이 회장이 꺾지 못했다. 이 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 이 사장의 결혼사진은 ‘이부진이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는 딸’이라는 사실을 대변해준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채 1999년에 결혼한 이 사장은 15년 뒤인 2014년 임 전 고문과 이혼소송에 돌입했다. 지난해 7월 서울가정법원은 자녀 친권과 양육권을 이 사장이 갖고, 이 사장은 임 전 고문에게 86억 1031만 원 재산을 분할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임 전 고문이 항소해 소송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동생 이서현 사장은 삼성물산에서 패션디자인 길을 걷고 있다. 서울예술고등학교와 미국 뉴욕의 패션전문학교인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했다.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한 후 2005년 상무, 2010년 전무, 2011년 부사장을 거쳐 2014년 경영기획담당 사장으로 승진했다. 2015년 통합 삼성물산이 출범하면서 같은 해 12월 패션부문장 사장에 선임됐다. 패션과 광고, 디자인, 라이프 스타일 분야에 정통한 경영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섬세한 판단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이 사장은 삼성물산에 속한 건설, 상사, 패션, 리조트 4개 부문 가운데 유일하게 적자를 내는 패션부문에 메스를 가했다. 2016년부터 경쟁력이 떨어지는 일부 브랜드를 철수하고 상품군별로 세분화됐던 브랜드를 통합하는 등 브랜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했다.이서현 사장이 불러온 가장 큰 변화는 신사복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사업구조를 캐주얼과 여성복으로 확대시킨 점이다. 2003년 인수 당시 매출 100억원대 브랜드였던 ‘구호’는 2016년부터 1000억원대 브랜드 반열에 올렸다. 삼성의 대표적인 의류 브랜드인 ‘빈폴’은 골프와 키즈, 액세서리, 아웃도어까지 다양한 서브라인을 확장해 매출을 6000억원대에까지 늘리는 등 국내 최고의 캐주얼 브랜드로 키웠다. 이서현 사장은 대외활동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다. 평소 외부에 드러나는 활동을 삼간다. 1남 3녀의 엄마 역할을 하는 데 열과 성을 쏟을 정도로 가정적이다. 오빠 이재용 부회장과 언니 이부진 사장과 비교해 외부에 덜 노출되는 이유다. 이 사장은 2000년 동아일보 사주 김병관 회장의 차남인 김재열(50)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 연구담당(사장)과 결혼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청운중 동창인 김 사장은 소치동계올림픽 선수단장(2014),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2011~2016) 등을 역임하고 2018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위원, 2022베이징 동계올림픽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조정위원회 위원,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집행위원 등을 맡아 삼성의 브랜드력 향상과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가’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 회복 퇴짜 맞아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가’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 회복 퇴짜 맞아

    왕산(旺山) 허위 일가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일부는 귀국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일제에 쫓겨 이역만리를 전전하다 그곳에 뼈를 묻었다. 후손들은 중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북한 등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맏형 방산(舫山) 허훈(1836~1907)은 전 재산인 논 3000마지기를 동생들의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을 위해 내놓았다. 왕산은 4남4녀를 두었다. 1913년 선생의 바로 위 형인 성산(性山) 허겸(1851~1940)의 인솔로 허위 일가는 모두 만주 서간도로 떠났다. 왕산 선생의 사촌인 범산(凡山) 허형, 시산(是山) 허필 일가도 1915년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허겸은 의병운동을 하다 1912년 만주로 들어가 중어(中語)학원을 세우고 남만주 농민 자치기관인 부민단 단장을 지냈다. 71세의 고령이던 1922년 부하 30여명과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허위 장손녀 국적 회복에 5년 걸려 장자 허학(1887~1940)은 만주에서 동화학교와 동흥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4년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동지 54명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허학은 아우 허영, 허준, 허국과 함께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수배를 받았다. 그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뒤 일본인 밀정에게 체포돼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허위의 장손녀들인 허학의 두 딸 중 허로자가 2011년 어렵사리 국적을 회복해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정부는 문서상의 미비점 등을 이유로 번번이 국적회복 신청에 퇴짜를 놓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 나라의 국적을 찾는 데 무려 5년이나 걸렸다. 허위의 둘째아들 허영(1890~?)의 아들이자 허위의 장손인 허경성씨가 대구에서 살고 있다. 허위의 셋째아들 허준(1895~1956)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본인과 장남 광배는 북한에서 사망했으며 1남3녀가 북한에 있다. 허준의 둘째아들인 웅배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일보’ 발행인과 모스크바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허준의 셋째아들 환배는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고 한국에 다녀갔다. 허위의 넷째아들 허국(1899~1971)도 맏형 허학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5남4녀를 두었고 두 아들 허 게오르기와 허 블라디슬라브는 2006년 조국으로 특별귀화했다. 그러나 블라디슬라브는 2년 정도 살다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갔다. ●사촌 형의 외손자는 저항시인 이육사 허위의 사촌 형 범산 허형(1843~1922)은 을사늑약 이후 1906년 예순을 넘긴 나이에 오적암살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허형에게는 3남1녀가 있었다. 허위가 순국하자 허형은 둘째아들 허발과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허발(1872~1955)은 3·1운동 때 남만주 대표로 국내로 잠입해 1년간 활동했다. 1933년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허형의 셋째아들 허규(1884~1957)는 1928년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돼 5년의 수형생활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 입법의원을 지냈다. 허형의 외동딸 허길(1876~1942)은 안동 진성 이씨 가문에 출가해 아들 여섯을 낳았다. 둘째아들이 옥사한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다. 맏형 이원기는 의열단 등 만주 독립운동단체들의 국내 활동을 후원했다.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기도 했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동생 육사와 원일, 원조와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범산 허형의 동생 시산 허필(1855~1932)은 한학과 의학에 조예가 있어 만주에서 한약방을 열어 일가를 부양하고 독립운동을 도왔다. 둘째아들 허형식(1909~1942)은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어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7년 4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어 1941년까지 제3로군을 지휘하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42년 8월 만주국 토벌대에 포위되어 장렬하게 전사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수천번의 붓질로 탄생한 초상화, 사진과 비교할 수 없죠”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수천번의 붓질로 탄생한 초상화, 사진과 비교할 수 없죠”

    을지로입구 지하서 40년 외길 김진삼 작가가 말하는 ‘초상화’누구나 카메라를 가진 ‘1인 1카메라’ 시대다. 뭔가 색다르거나 의미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스마트폰 카메라가 수시로 “찰칵”한다. 특히 자신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이를 공유하는 SNS시대가 된 요즘 ‘셀카’는 생활의 일부가 됐다. 어찌보면 자기 도취에 빠진 나르시스가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도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물 사진이 넘쳐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40년째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 김진삼(71)씨는 “스마트폰 사진은 순간적이지만, 초상화는 인물의 성격과 분위기까지 담는다”고 말한다. 3일 오후 서울시청 바로 앞 지하도에 있는 그의 화실 ‘후암 초상화 연구소’를 찾았다. 화실 밖 유리창에는 이승만, 세종대왕, 제임스 딘 등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찾기는 쉽다. 지하도를 오가는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잠깐씩 초상화를 구경하곤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액자를 박차고 나올 듯한 초상화 주인공들··한 자리서 40년된 화실 화실에 걸린 견본 초상화들이 액자를 박차고 나올 듯 살아 꿈틀거린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김수환 추기경이 “괜찮아”라며 위로하고, 맥아더 장군은 앞을 쏘아보는 눈길에서 불굴의 의지가 엿보인다. 혜민 스님은 금방이라도 말을 붙여올 것같고, 처칠에게서 단호한 대응을 천명하는 연설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세밀화를 그리는 초상화 작가의 눈매는 뭔가를 꿰뚫어보고 얼굴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생겼을 것이라는 기자의 선입견과는 달리 김진삼씨는 잘 늙어가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작업한지 40년이 넘었어요. 별의별 사람을 다 겪었으니, ‘에라, 모르겠다’하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습관이 됐지요. 허허.”그에게 “마음 편하게 산다”는 게 뭔지 묻자 “초상화를 의뢰하러 들어오는 사람은 굉장히 반갑지만, 나중에 찾으러 오는 손님이 두렵고 무섭다”는 답이 돌아온다. “간혹 ‘얼굴이 다르다’며 안 찾아가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손님을 만나면 젊은 시절엔 의뢰한 사진을 보여주며 따졌지만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가져가지 마세요’라고 하지요.” 40년째 하다보니 요즘은 손님에게서 타박 맞는 일은 없지만 “손님이 반가우면서 무서운 우리네 마음이 양복쟁이 마음과 같지 않겠느냐”고 한다. 수입을 묻자 그는 “노령 연금으로 화실 임대료를 낸 적도 많다”며 웃어 넘겼다. ●“빛 바랜 사진에는 의뢰자의 추억이 담겨···그 마음까지 담아야” ‘초상화에서 얼굴이 다르면 문제가 아니냐’고 따지자 그는 “의뢰자가 빛 바래고 작은 부모님 사진 한 장을 갖고 오지만 사실은 자신의 기억 속의 이미지를 그려주기를 바란다”며 “우리가 무슨 수로 그런 추억을 알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의뢰자의 눈매나 입술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사진 속의 인물과의 관계와 닮은 점 등을 묻고 참고해 초상화에 담기도 한다. 낡은 사진이라도 한 장 있으면 다행이다. 사진도 없는데 의뢰자가 말해주는 대로 몽타주 그리듯 한 적도 많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경찰서에 가서 몽타주를 그려주기도 했다.“모 문중에서 조상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거예요. 후손들은 아무도 본 적이 없고, 행장과 같은 문중 기록에 남아있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형형하고’ 이런 것을 근거로 해서 상상화를 그려야 했지요. 너무 막연해서 그래서 항렬이 높은 후손들 몇분의 사진과 기록을 근거로 그려드렸더니 만족하더라구요.” 김씨는 “후손들이 초상화 대상인 조상을 잘 알거나 전혀 모르면 (그리기) 편한데 어설프게 알면 “이게 아닌데”, “저게 아닌데···” 하면서 까다로워집니다”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 사진 한 장 없는 선친 의뢰···새벽마다 청운동서 설명” 심지어는 사진도 없이 의뢰하는 손님도 있단다. “우리 아버지가 최불암씨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눈매만 이렇게 고쳐주세요’ 하더라구요. 사진 한 장 없는 아버지, 그 기억은 자식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든요.” 1948년 황해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그는 6·25 한국전쟁이 터진 3살때 남쪽으로 피난 내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북에 두고 내려왔기에 사진 한 장 없는 후손들의 애틋한 심정을 제가 좀 잘 알지요.” “한번은 정주영 회장님이 아버지를 그려달라고 했어요. 남긴 사진 한 장도 없는데. 그래서 사흘에 한번씩 새벽 5시에 정 회장의 청운동 자택에 찾아가 설명을 듣고 그림을 그려 가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눈매가 달라’라고 했어요. 그러면 수정해서 다시 보여드리면 ‘아까 그게 더 비슷해’라고 해서 다시 원래 그림으로 바꿔드리면 ‘아냐, 아냐’라며 퇴짜를 놓아지요. 그래서 ‘가족 중에 누가 가장 비슷하게 닮았느냐’고 묻자 정몽준 회장이라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허바허바 사진관에서 정몽준 회장님 사진을 찍어서 보내 주기도 하더라구요. 그걸 참고해서 그린 스케치도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왕 회장’에게 아버님은 회장님 마음 속에 있으니 굳이 그리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결국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고, 스케치북을 드렸지요.”“이런 일도 있었지요. 1991년인가 어떤 사람이 와서 ‘밖에 세워둔 6호 크기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얼마냐’고 묻기에 ‘40만원’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다음날 가져온 사진을 보니 김영삼 당시 총재였어요. 이런 유명 정치인은 40만원에 안된다고 했더니 ‘이미 40만원으로 보고해서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 초상화가 대선 공보물로 들어가 있더라구요. 대통령에 당선됐지요. 하하.” ●“평범한 사람들, 초상권 문제로 피해···젊은 연예인은 잘 안 와” 그가 가장 비싸게 판 초상화는 내로라하는 재벌이 아니었다. 경북 포항의 한 기업인이었는데 4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도 모 기업 문화원에 걸려있다고 한다. “어느날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사람이 와서 초상화에 대해 정말 꼼꼼하게 묻고 가더라구요. 그리고 가격을 묻기에 평범한 사람인줄 알고 200만원이라고 했더니 다음날 가져온 사진이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님이었던거죠. 재벌에겐 이런 가격에 안된다고 했더니 비서실인데 그렇게 상부에 보고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요. 나중에 초상화를 가져가면서 100만원을 더 주더라구요.” 화실에 전시된 그림 가운데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의 모습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김씨는 “일반인은 ‘왜 함부로 내 얼굴을 그려놨느냐’며 초상권 시비가 나오면 골치 아프니, 그래서 잘 안하지요. 그리고 외국인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해 오히려 그리기가, 성격을 표현하기가 더 쉬워요”라고 말한다. “지나가던 연예인들이 한번씩 들어와서 슥~ 훑어봐요. 과거엔 많이들 왔지요. 자신의 초상화가 없으면 ‘하나 그려서 전시해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한 점 주문하셔야 합니다’고 답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연예인도 있었지요.” 요즘 젊은 연예인들은 “지하로 다니지 않아서인지” 찾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정치인 초상화는 어떠냐고 묻자 호불호가 선명하게 엇갈려서 밖에 내놓기가 애매하다고 답한다. “지난번 촛불 시위대가 이승만 전 대통령 초상화를 보더니 “당장 치워라”며 유리창을 발로 차고 그래서 저와 한바탕했지요.” 이 화실에서 그림이 아닌 사진도 한 점 있단다. “저기 백범은 사진입니다. 초상화 원본은 김구재단에 걸려있고, 그 재단에서 제가 그린 초상화를 사진 찍어 보내준 겁니다.” ●“영정 초상화 분위기 많이 바꿔···웃으며 차 한잔 권하는 모습도”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후 늦어 문을 닫으려는데 어떤 사람이 급하게 사진 한 장 들고 달려왔습니다. ‘우리 아버지인데, 병원에서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영정 초상화로 내일 아침에 쓸 수 있게 완성해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밤을 새워 그렸죠. 그런데 다음날 사진을 찾으러 오지 않는 거예요. 오후에 전화가 와서는 ‘고비를 넘겨 건강이 회복됐습니다. 영정 초상화가 당장 쓸모 없게 됐으니···다음에 찾으러 가겠습니다’고 해요.”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한 듯 그는 영정을 미리 그려두면 수의를 준비했을 때처럼 “오래 산다”고 말해준단다. 그는 요즘 영정 초상화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귀띔했다. “예전엔 무게 잡고, 경직된 모습이었는데 요즘엔 ‘내 상가에 오신 조문객들에게 감사하다’는 듯 웃으면서 술 한 잔, 차 한 잔 권하는 모습이 많지요.”그가 초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박봉’ 때문이다. 그림 솜씨를 타고난 그는 20대 시절엔 문화공보부 미술실 소속 공무원이었다. “그 당시 포스터 그리고, 글씨 쓰고···박정희 대통령의 선전기관이었죠. 그런데 당시 월급이 겨우 쌀 반가마였죠. 초상화를 그리면 돈을 잘 벌 수 있겠다 싶어서, 1978년에 여기에 화실을 연 거죠. 처음 한 10년동안에는 그림 퇴짜도 많이 받고, 공무원 그만둔 것 후회도 하고, 갈등이 정말 많았죠.” 자영업자의 간판이 2년을 넘기기 어려운 요즘 그는 한 곳에서 40년동안 화실을 운영했다. 그의 실력을 짐작케 한다. “초상화 공부는 처음에 사사를 받았죠. 한 10년 그리니깐 초상화를 알겠더라구요. 경지에 도달하려면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해야 돼요. 지금까지 하루 10시간씩 40년은 그렸다고 봅니다. 집안에 그림 그리는 DNA도 물려받고, 두 딸도 유화를 좋아하더라구요.” ●오른손에는 잔 근육들이 발달···손가락 끝엔 굳은 살 허락을 받아 오른손잡이인 그의 손을 만져봤다. 손 등은 두툼했고,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손에는 세밀한 근육들이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5개 손가락 끝에는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인물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눈과 입이죠. 코는 크기와 중심을 잡아주는 반면 눈과 입은 분위기와 표정을 살려주지요.” 사진은 변하지만 초상화는 변하지 않는다. “실크 재질에 아교칠을 한 물감으로 수천번의 붓질로 탄생한 초상화는 생명력이 있어요.” 사진과 비교할 수 없는 질감이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초상화를 의뢰할 때 인물 사진이 많으면 좋단다. 그리고 인물의 성격이나 분위기, 특성 등을 설명해주면 초상화를 그릴 때 엄청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가족들 초상화는 부모님만 그렸죠. 그동안 제자들 가르치느라 또 작품하느라 시간이 안 나서 못했는데 이젠 제 초상화, 자화상도 한번 그려봐야죠.” 그러나 눈이 침침해 더 이상 그릴 수 없을 때 이 곳이 문을 닫는 게 아닐까하는 것이 그의 걱정이다. 점점 초상화 화실이 줄어드는 탓이다. “철공소가 대형화되어 하나가 살아남듯, 초상화도 수요는 적어지겠지만 살아남을 겁니다. 이곳을 제자가 넘겨받아 이어갔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사진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글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길섶에서] 폭염과 노인/임창용 논설위원

    수도권의 한 지방의료원 원장이 엊그제 응급실 의사의 글을 SNS에 공유했다. 응급실에 열사병 환자 천지란다. 대부분 노인인데, 밭에서 일하다가, 교회 가다가, 찜통 방안에 누워 있다가 실신해 실려 온다며 제발 주변에서 말려 달라는 내용이다. 기온이 35도가 넘으면 체내 열 배출이 거의 불가능하고, 특히 혼자 계시다 실신하면 손도 못 쓰고 그냥 돌아가시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노인들은 체력이 약한 데다 정보 부족 등으로 폭염의 위험성엔 외려 둔감할 수 있다고 한다. 집 앞 텃밭의 고추가 말라 죽는데 덥다고 그냥 둘 수 없다고, 10분만 걸으면 교회에 갈 수 있는데 어떻게 예배를 빼먹느냐면서, 머리가 잠시 어지럽다고 무슨 큰일이야 나겠냐면서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나섰다가 속절없이 사고를 당하는 것이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올여름 온열질환자가 벌써 3000명에 육박했다. 사망자는 30명을 넘었다. 폭염이 심했던 2016년 통계치를 이미 넘어섰다고 한다. 앞으로 열흘 이상 폭염이 지속될 것이라고 하니 참 걱정이다. 스마트폰으로 이런 글을 읽는 이들이야 대부분 젊고 건강할 터. 정말 취약한 사람은 할머니·할아버지들이다. 혹여 위험에 노출된 분은 없는지 모두 주변을 돌아봐야 할 때다. sdragon@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난 한국인 피를 가진 일본인… 한·일 관계 작은 ‘키맨’ 될 것”

    [색다른 인터뷰] “난 한국인 피를 가진 일본인… 한·일 관계 작은 ‘키맨’ 될 것”

    이름·역사 함께 물려받는건 숙명·사명심수관요전 열고 한·일 문화교류 앞장“日, 한국 이해·관심 서서히 개선될 것”“서른 살쯤에 김칫독 만드는 걸 배우러 경기도 여주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어떤 분이 저에게 ‘400년 된 일본의 때를 벗겨 내고 한국의 혼을 품으라’고 하시더군요. 일본에서는 조선의 성(청송 심씨)을 쓴다고 ‘조센징’으로 불렸는데, 한국에선 제가 나고 자란 일본을 부정하라고 하니 이걸 어쩌나요. 우리(심수관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저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답하지요. ‘아니요, 저는 분명히 일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피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기록적인 무더위가 찾아온 올여름을 제15대 심수관(59·본명 심일휘)은 여느 해보다 분주하게 보내고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을 기념해 지난 6~7월 ‘사쓰마도기 420년: 심수관요(窯)전’을 개최했고, 오는 10일에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구성되는 일본 내 전문가 모임 ‘일·한 문화인적 교류를 추진하는 심의회’에 참여한다. 그를 만난 것은 심수관요전 마지막 날인 지난달 12일 도쿄 신주쿠의 한국문화원에서였다. ‘일본에 뿌리내린 조선 도공의 제15대 적자’이자 ‘일본의 3대 도자기를 대표하는 장인’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타이틀과 달리 그는 ‘큰형님’과 같은 호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습명(이름을 물려받음)을 한 지 내년이면 20년.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과 안목, 그리고 자신이 부여받은 ‘숙명’과 ‘사명’을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요즘 한·일 관련 기념 행사와 모임으로 바쁘신 것 같다. 두 나라 사이에서 ‘심수관’이라는 존재는 어디쯤에 있나. -어떤 신문에서 내가 한국을 모국으로 생각한다고 했던데 그건 잘못 쓴 것이다. 한국은 할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다. 모국, 즉 어머니의 나라는 일본이다. →그러면 심수관가의 도자기는 어떠한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심수관 가문의 도자기는 훌륭하다. 그런데 그 도자기는 한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것은 훌륭하다.’ 그러면 이런 논법은 어떤가. ‘한국의 도자기는 훌륭하다. 그런데 그 도자기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의 것은 훌륭하다.’ 거기에 동의할 한국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문화는 이동하는 것이다.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420년 전 이곳에 온 조선 문화가 일본의 사회와 풍토에서 적응한 모습이 우리 심수관가의 사쓰마도기다. ‘진화론’을 인용하자면 강하니까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한국의 씨앗이 일본의 토양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두 나라 사이를 좀더 좋게 만들기 위해 고민도 크시겠다. -옛날 에도시대 나카쓰(오이타현)에 미우라 바이엔이라는 학자가 살았다. 한번은 그가 항구에 나와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했다. ‘바다에 물 한 국자를 부어 넣고 바닷물이 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늘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중요한 것은 바다에 한 국자의 물을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을 위한 나의 노력도 그런 것이다. 내가 하는 소소한 일들이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시킬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갖고 활동을 이어 가는 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해와 관심은, 설령 당장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개선되는 쪽으로 갈 것으로 믿고 있다. →상대방 지방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해 왔는데. -틈만 나면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서울 같은 대도시 말고 한국의 지방을 여행해 보라고 권한다. 지방의 다양성과 매력을 알고 느끼게 되면 그 나라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가을에는 많은 인원의 일본인을 데리고 한국의 통영, 하동, 삼천포, 남해, 청송 등을 둘러볼 계획이다. →원래 도자기를 좋아했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15대 심수관이 되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도 같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숙명이었다. 대학(와세다대 사회학과)을 졸업할 때까지도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명문이었던 교토대 법학부를 나온 할아버지(13대)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나온 아버지(14대)도 작은 고향 마을로 돌아와 가문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그분들을 보고 자란 내가 다른 일을 하겠다는 말을 꺼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대학 졸업 후 도쿄를 떠나 고향으로 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나의 장래가 다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우리 회사(심수관요)에 25명의 장인이 있는데, 그중에 도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그게 누구냐면 나다(웃음). 농담으로 가끔 하는 말이긴 하지만 같이 일하는 다른 24명은 무수한 직업 중에서 도자기 만드는 게 제일 좋아서 이걸 택한 사람들이고, 나는 집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 있게 됐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나와 다르게 우리 아들은 가업을 즐겁게 이어받기로 해 안심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예술의 영역이어서 적성에 부합하는지도 고민이 많았겠다. -심수관이 되기로 결정하면서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표현’이라는 말을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내 안에서 떨쳐 낼 수 있었다. 다소 어려운 얘기가 될 수도 있는데 표현의 ‘표’(表)와 ‘현’(現)은 둘 다 뭔가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현’에는 인간 내면의 생각, 감격, 불안 등이 관련되는데 여기에는 형태가 없다. 이걸 눈에 보이도록 형체화하는 것이 ‘표’다. 결국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표현’인 셈이다. 나는 내 안의 생각과 감정에 해당하는 ‘현’을 도자기라고 하는 ‘표’를 통해 형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 적성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차(茶)의 종가나 가부키의 종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두 가지 고민 중 다른 하나는. -‘심수관’이라는 이름 석 자에 대한 중압감이었다. 가문의 뿌리가 조선임을 숨기지 않았던 우리 집안은 420년 역사에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겪어 왔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로 갔던 시기였다. 그때 조선에 뿌리를 둔 많은 가문들이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우리 심수관가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심수관의 이름을 계승한다는 것은 그런 무겁고 엄중한 역사도 함께 물려받는다는 것인데, 나에게 더없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15대 심수관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인가. -전통이란 지층과 같은 것이다. 가장 밑에 있는 초대를 기반으로 그 위에 2대, 3대, 4대 순으로 켜켜이 쌓이게 된다. 각각의 세대들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추구한다. 14대인 우리 아버지(92·본명 심혜길)의 세계는 역대로 가장 독특하고 화려했다. 전에 ‘우리 가문을 망가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버님밖에 없다’고 말씀드린 적도 있었다(웃음). 나도 내 세대의 색을 만들어야 한다. 그 토대는 ‘로컬’과 ‘아날로그’다. 세상이 글로벌화·디지털화하고 있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가고시마의 원료와 가고시마의 기술로 구현되는 가고시마의 미(美)의식 구현이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심수관家는 어떤 곳인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왜군에 의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온 남원(전북) 도공 심당길의 후손으로 ‘사쓰마(薩摩·가고시마의 옛 지명)도기’를 발전시켜 온 심수관 가문을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청송 심씨의 성을 따르는 한국식 이름을 받는다. 사쓰마도기는 1873년 12대 심수관이 오스트리아만국박람회에 도자기를 출품해 정교한 기술과 색감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성을 인정받으면서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제15대 심수관은 누구 -1959년 일본 가고시마현 출생 (본명 심일휘) - 1983년 와세다대 졸업 -1985년 교토부립 도공고등기술전문교 수료 -1988년 이탈리아 국립미술관 도예학교 졸업 -1990년 경기 여주 김일만토기공장 연수 -1999년 제15대 심수관 습명
  • [여기는 중국] 이웃집 개에게 머리 물린 4세 아이, 중상 입어

    [여기는 중국] 이웃집 개에게 머리 물린 4세 아이, 중상 입어

    중국에 사는 4세 여아가 이웃집이 키우는 개에게 머리를 물리는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다. 화상바오 등 현지 언론의 4일 보도에 따르면 산시성(省) 시안시(市)에 사는 신신(欣欣, 4)은 현지시간으로 지난 1일 저녁 8시 경, 이웃집이 키우는 개에게 머리를 물린 뒤 병원으로 후송됐다. 신신은 무직으로 지내다 집을 나간 아버지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대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손에 자라던 아이다. 사고가 있던 날, 작은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집 근처로 사과를 팔러 나가고 신신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열린 문으로 이웃집 개가 들어왔고, 잠시 후 아이의 머리를 물고 달아났다. 작은 아버지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집으로 달려왔고, 이미 집안 곳곳이 아이의 피로 물든 후였다. 작은 아버지는 곧바로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향했지만 무려 병원 4곳이 치료를 거부했다. 두부(頭部)의 손상이 너무 심해 치료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들른 병원에서 신신을 받아줬지만 아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두피가 심하게 찢어져 출혈이 많았고,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로 외상이 심했다. 병원 측은 곧장 찢어진 부위의 감염을 막기 위한 치료를 시작했지만 상처가 심해 피부 이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현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개 주인인 양(楊, 61)씨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묶어두지 않았던 개가 집 밖으로 나갔다가 사고가 생겼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두었다”면서 “아이의 치료비는 마땅히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 주인이 치료비를 내겠다고 밝혔지만 신신과 가족의 걱정은 줄지 않았다. 아이의 치료비가 워낙 큰데다, 병간호를 하느라 작은 아버지가 장사를 나가지 못하는 탓에 생활고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신의 사연을 접한 네티즌들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현지 언론은 신신과 가족을 돕기 위한 모금기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사업 실패·소송, 형제들 불화 얽힌 베델… 한국행 배에 오르다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사업 실패·소송, 형제들 불화 얽힌 베델… 한국행 배에 오르다

    일본에서 무역 일을 하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한동안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오래지 않아 악재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 업체들의 담합·소송에 휘말리고 형제들과도 관계가 나빠져 결국 일본 사업을 포기했다.●9개나 되는 공장 차렸다가 못 버티고 폐업 1888년 고베에 와 아버지와 이모부 밑에서 무역 일을 배운 베델은 1899년 ‘베델 브러더스’를 세워 독자 사업에 나섰다. 일본의 골동품을 영국에 내다파는 중개업에 자신감이 붙은 베델은 한발 더 나아가 일본에서 직접 물건을 만들어 영국에 수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베델 브러더스’가 생산하기로 한 첫 제품은 바로 러그였다. 러그는 바닥깔개나 무릎덮개 용도로 쓰는 직물제품을 말한다. 베델은 형제들과 1901년 7월 오사카 남부 사카이 지역에 소규모 러그 제조 공장 9개를 차렸다. 당시 사카이에는 일본인들이 조합 형태로 운영하는 러그 공장이 많았다. 한때 이곳은 지역 주민의 70%가 러그 생산에 매달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베델 브러더스’는 이런 사카이에 공장을 차린 첫 외국인 업체였다. 이들이 만든 러그는 품질도 꽤 좋았던 것 같다. 영자지 ‘재팬 크로니클’은 기자가 사카이 공장을 직접 방문하고 쓴 르포 기사에서 “베델의 러그는 터키에서 생산된 최고급 제품과 차이가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조업을 처음 해 보는 베델이 한꺼번에 9개나 되는 공장을 무리하게 운영한 것이 화근이 됐다. 일본에서는 1899년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이 마무리돼 이들에 대한 소송이 급증했는데 ‘베델 브러더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품질 좋은 러그를 만들기 위해 주변 공장에서 일하던 일꾼들을 대거 스카우트한 것이 일본업체들을 자극했다. 공장을 9개나 돌리다 보니 경쟁회사에서 데려 온 장인의 수도 상당했을 것이다. 이 지역 카르텔은 ‘베델 브러더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영업을 방해했다. 결국 베델 형제들은 이들의 보이콧을 버티지 못하고 얼마 안 가 러그 사업을 접었다.●3억원대 러그 납품 분쟁… 日반감도 커져 베델은 이 시기 최소 3건의 소송에 휘말렸다. 사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수세미 사건’과 ‘러그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세미 사건’은 주방용품이나 목욕용품으로 쓰는 수세미의 납품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1902년 2월 고베 상인 나리타 세이사부로는 “‘베델 브러더스’가 수세미 3만 6942개를 주문했지만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며 1567.31엔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1905년 7월까지 3년 반 동안 재판이 이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결론은 알려지지 않았다. ‘러그 사건’은 러그 납품 대금 관련 소송이었다. 베델이 조선에 온 뒤인 1904년 10월 러그 상인 도이 젠노스케는 베델을 상대로 대금 5026.73엔과 6%의 이자를 별도로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에서 거래된 엔화의 평균가를 고려하면 5026.73엔은 지금 가치로 27만 4870달러(약 3억 700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베델은 이 시기 조선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활동하고 있었다. 원고(도이)와 피고(베델)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자 손해배상 청구가 자연스레 기각돼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도이가 이듬해 2월 베델을 상대로 또 한 번 소송을 제기했다. 손해배상 청구 금액도 처음보다 11% 늘어난 5795.73엔으로 책정했다. 고베 지역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은 이 사건의 첫 공판이 있었던 1904년 10월부터 1905년 2월까지 네 차례의 공판을 기사로 다뤘다. 이 역시도 재판 결과는 기록이 없다. 사업과 관련한 두 가지 분쟁 사이에 작은 소송 하나가 더 있었다. 1903년 초 고베에 살던 히로시마 수마라는 여성이 “1902년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과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이 영국에 갔을 때 이들을 수행하고 96.91엔을 받기로 했지만 실제 대가는 40엔이 전부였다”며 재판을 걸었다. 비록 수세미나 러그 대금처럼 큰돈은 아니었지만 베델 입장에서는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렇다할 합의 노력 없이 소송부터 하고 보는 일부 일본인들의 행태에 상당히 실망했던 것 같다. 영국 런던에서 만난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 베델(59)은 “할아버지(베델)가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선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일본인들의 줄소송으로 인한 반일 감정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한다”고 전했다.●日사업하던 형제들 항일 신문 만든 베델 내쳐 베델은 매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베델의 후손들은 그가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1901년 8월 베델은 고베의 인력거꾼들과 요금을 놓고 시비를 벌이다가 싸움이 나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당시 ‘고베 크로니클’은 “외국인을 집단 폭행한 인력거꾼들의 잘못이 크지만 인력거 면허번호를 떼어 내는 등 불필요한 행동으로 이들을 자극한 베델도 생각이 모자랐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베델은 형제들과도 사이가 나빠져 결국 동업을 정리하게 된다. 아마도 이들은 일본인들과의 소송 과정에서 관계가 더욱 악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베델이 한국에서 신보와 KDN을 발행하던 1905년 ‘고베유신일보’ 11월 27일자에는 ‘베델 브러더스’ 고베 지사에서 일하던 S E 길스가 신문사로 찾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베델은 한때 ‘베델 브러더스’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고래였고 결근도 잦았다. 급기야 회사를 내팽개치고 한국으로 건너갔다. 이제 이 회사는 베델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는 이 내용을 신문에 광고도 했다”고 밝혔다. 길스를 대리인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베델을 과음과 근무태만, 무책임 등의 단어로 묘사한 것을 볼 때 (사실 여부를 떠나) 그를 바라보는 남동생 허버트(1875~1939)와 아서 퍼시(1877~1947)의 감정이 부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 영자신문에 베델이 해고됐다는 사실을 광고까지 한 것을 보면 한국에서 항일신문을 발간한 큰 형(베델)을 이렇게라도 내치치 않을 경우 ‘베델 브러더스’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형제들의 복잡한 속내가 읽혀지기는 한다.앞서 ‘고베유신일보’는 11월 26일자 기사에 “베델은 1899년 ‘베델 브러더스’를 설립해 지난해(1904년)까지 도자기업을 운영하다가 (사업) 실패로 야반도주하다시피 한국으로 건너간 러시아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베델이 러시아 스파이라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가 사업에 실패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러그 사업이 실패한 뒤 도자기 판매로 활로를 모색했지만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베델은 사업 실패와 잇따른 소송, 형제와의 불화 등으로 16년간 살던 고베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의 조선 특파원에 지원해 언론인으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가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한 것이 조선에는 되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베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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