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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는 남미] 스쿠터 값에 팔려 성노예…남미 인디언 소녀들

    [여기는 남미] 스쿠터 값에 팔려 성노예…남미 인디언 소녀들

    아르헨티나에서 인디언 소녀들이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현지 언론은 14살 인디언 소녀의 인신매매사건을 최근 보도했다.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피해자는 아르헨티나 차코주에 집단 거주하는 '위치부족' 인디언이다. 소녀는 지난해 59세 남자에게 팔렸다. 스쿠터 1대 값을 받고 소녀를 남자에게 넘긴 건 다름 아닌 소녀의 엄마였다. 물건처럼 팔린 소녀는 남자와 동거하면서 사실상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다. 소녀는 결국 남자의 아기를 갖게 됐다. 임신 8개월째인 소녀는 현재 사우살리토라는 지역 내 한 병원에 입원해 출산을 준비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는 "10대 초반의 임신은 예비엄마와 아기가 모두 미성년이라 매우 위험하다"면서 "이미 합법적인 낙태가 불가능해 출산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돌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건은 소녀가 병원을 찾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병원 측 신고를 받고 달려간 당국자에게 소녀는 자신이 팔리게 된 경위, 아기의 아버지 등과 관련해 사실을 털어놨다. 소녀는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소녀를 거두고 키워준 건 친할아버지였다. 갑작스럽게 엄마가 찾아온 건 지난해였다. 엄마는 자식을 내놓으라며 친할아버지와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소녀를 납치하듯 데려갔다. 엄마에게 끌려간 딸은 곧바로 문제의 남자에게 넘겨졌다. 당국자는 "엄마가 남자로부터 스쿠터 1대 값을 받고 딸을 내준 사실까지 확인이 됐다"면서 "검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차코에서 이런 사건은 근래에만 벌써 3번째다. 돈에 팔린 인디언 소녀들이 성노예처럼 시달리다가 결국 아기를 갖게 됐다는 게 사건의 공통점이다. 차코주 보건부 관계자는 "신고되지 않은 사건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법무부, 경찰 등 관계기관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자료사진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다섯살 소녀들 “집에 돌아가 서프라이즈! 하자” 밖은 영하 45도

    다섯살 소녀들 “집에 돌아가 서프라이즈! 하자” 밖은 영하 45도

    한밤 중 다섯 살 소녀 둘이 탁아소 밖으로 나섭니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깜짝 놀래키려 그랬답니다. 아이들은 털모자를 쓰고 파카를 입긴 했지만 한 아이는 손에 장난감을 들었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러시아 시베리아였습니다. 아이들이 몰래 탁아소 밖으로 빠져나갔을 때 영하 45도로 올 겨울 가장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22일(현지시간) 영국 BBC 기사는 탁아소와 아이들의 집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현지 일간 ‘시베리안 타임스’는 레나란 이름의 아이 손가락 셋이 심한 동상에 걸려 야쿠츠크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했습니다. 어머니 에브도키아 쿠투코바는 “아이가 울기만 한다. 아이들이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어머니도 탁아소로 아이를 데리러 왔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아 직원들에게 말했더니 그때까지 아이들이 사라진 줄도 몰랐답니다. 아이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돼 부모에게 연락했더니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할아버지가 나중에 어머니에게 전화해 레나가 혼자 울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얼어붙은 채였다고 했습니다. 낯선 행인이 레나에게 스카프를 둘러줬더라고 남편은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장갑 없이 얼마나 추웠을까요. 상상하기도 끔찍하네요. 손에는 장난감을 들고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는 훨씬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집으로 가는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했고 한 시간 뒤에야 이웃집 처마 밑에서 발견됐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아이는 동상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체온증을 겪었지만 의료진 체크를 받고 곧바로 귀가했답니다. 이 소녀들은 전에는 탁아소를 스스로 떠난 적이 결코 없었답니다. 경찰은 아이들이 탁아소를 몰래 빠져나갈 때 직원들은 뭘하고 있었는지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섬 속의 섬을 걷다… 타이완에서 만난 풍경, 사람

    섬 속의 섬을 걷다… 타이완에서 만난 풍경, 사람

    EBS1 ‘세계테마기행’이 태평양의 작은 섬 타이완 곳곳을 찾아간다. 21~24일 오후 8시 40분 4부작으로 방송되는 ‘지금 여기 우리 타이완’에서는 배우 박재정이 시청자들을 타이완으로 안내한다. 돌담을 쌓아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섬 펑후, 전쟁의 상처가 남은 진먼, 타이완 최남단 해변 컨딩, 세계적인 미식 도시 타이베이 등을 둘러본다. 1부 ‘사람이 만든 풍경, 펑후’는 64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펑후 제도에서 시작한다. 타이완 최초의 상업 거리로 700년 역사를 품은 마궁 중앙거리에는 100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한약방이 있다. 병원이 없는 섬에서 유일하게 주민들의 아픔을 치유하던 한약방에서 한방 달걀을 맛본다. 쌍심석호는 펑후 제도의 상징이다. 풍랑이 일어 고깃배를 띄우지 못할 때 펑후 어부들은 석호를 쌓아 고기를 잡았다. 하트 모양으로 켜켜이 쌓은 석호에 물고기들이 밀물과 함께 밀려왔던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면 잡는 방식이다. 더블 하트 모양의 쌍심석호에는 펑후 어부들의 지혜가 담겼다. 2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우서 진먼’에서는 타이완 섬 정중앙 우서에서 일제에 맞서 싸우다 700여명이 학살당한 싸이더커 족의 후손을 만난다. 타이완 본섬에서 210㎞ 거리지만 중국에서는 불과 10㎞ 거리의 진먼을 찾아 또 다른 전쟁의 기억도 돌아본다. 3부 ‘오래된 길을 걷다, 신주’에서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아샤완 해변을 찾아간다. 난터우에서는 사시사철 푸른 차밭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60년간 과자를 만든 할아버지의 과자 가게에 들른다. 미식 성지로 유명한 타이베이의 야시장은 4부 ‘미식천국 행복한 사람들, 타이베이’에서 방문한다. 타이베이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동파육을 본따 만든 타이완 최고 유물 육형석을 보고 난 뒤 진짜 동파육을 먹는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세계 최고령 남성 113세 노나카 옹 별세

    세계 최고령 남성 113세 노나카 옹 별세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으로 알려진 일본인 노나카 마사조 옹이 20일 별세했다고 교도통신과 NHK가 20일 보도했다. 만 113세의 노나카 옹은 이날 새벽 1시 30분 홋카이도 아쇼로의 자택에서 누운 채 숨진 것을 가족이 발견했다. 고인은 1905년 7월 25일 태어났다. 지난해 4월 세계 기네스협회로부터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인정받았다. 오랫동안 온천여관을 운영한 고인은 TV로 스모를 즐겨 보고 지난해 생일에는 좋아하는 케이크를 가족과 함께 먹었다. 고인과 함께 사는 손녀 유코씨는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도 행복하고 즐거운 매일을 보냈다”며 “할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자택에서 지내 존엄 있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슬프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노나카의 장수비결은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에서 자주 목욕을 하고 단 음식을 즐겨 먹는 데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딸은 기네스 협회에 아버지가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고 있기에 장수를 누리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춘절 앞두고 대륙을 울린 할아버지의 페파피그

    춘절 앞두고 대륙을 울린 할아버지의 페파피그

    중국 최대의 명절인 음력설 춘제를 앞두고 공개된 만화영화 예고편이 대륙을 울리고 있다. 외딴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는 세 살 난 손자가 춘제 선물로 페이치를 원하지만 그것이 무언지를 알지 못한다. 페이치는 영국 BBC에서 만든 만화영화 ‘페파피그’의 중국식 이름으로 중국 아이들에게 한국의 뽀로로만큼이나 인기있는 캐릭터다.할아버지는 춘제에 집으로 오는 손자에게 선물하고 싶은 페이치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마을의 스피커 안내방송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고군분투한다. 결국 베이징에서 아이를 봐주는 보모 경험이 있는 친구의 셋째 며느리로부터 페이치가 만화영화에 나오는 붉은색 작은 돼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끼 돼지에게 붉은색 페인트를 칠하려던 할아버지는 며칠간 힘들게 금속 송풍기를 용접해서 직접 페이치를 만들고 이 페이치는 손자뿐 아니라 13억 중국인의 가슴을 녹인다. ‘페파피그가 춘절을 축하해요’라는 만화영화의 예고편은 지난 17일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게시됐는데 5분 30초 분량의 영상을 2000만명 이상이 시청했으며 10만 회 이상 공유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베이징대 첸샤오펑 교수는 관영 글로벌타임스를 통해 “영화 예고편의 인기는 중국인들이 물질보다는 가족간 정을 더 중시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전통적인 중국의 가족 중시 가치관이 새로운 젊은 세대에도 공감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만화영화는 이번 설 연휴에 상영될 예정이다. 페파피그는 중국 젊은이들에게도 ‘사회인’의 상징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사회인’은 비주류 젊은이를 뜻하는 것이라 한때 중국 공산당이 인터넷상 페파피그 동영상 방영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망치는 젊은이’라는 뜻의 ‘사회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중국 젊은층들이 페파피그 문신을 하거나 페파피그 캐릭터 시계 등을 즐겨 하면서 중국 정부의 탄압 대상이 됐다. 올해 춘절에도 오는 21일부터 3월 1일까지 약 29억회의 이동이 예상되며, 유동량은 지난해보다 0.6%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음주운전 인명사고’ 10대가 최고…어려서부터 교육 필요해

    ‘음주운전 인명사고’ 10대가 최고…어려서부터 교육 필요해

    전체 운전면허 소지자 가운데 술을 마시고 차를 몰다 인명사고를 가장 많이 낸 연령대는 ‘1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연령대별 음주운전 인명사고 발생 건수는 19세 이하가 283건(사망자 18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20대가 4063건(사망자 118명), 30대는 4745건(사망자 84명)으로 집계됐다. 사고 건수로 보면 30대가 가장 많다. 그러나 운전면허 소지자 수 대비 음주운전 인명사고 발생 비율은 19세 이하가 0.093%로 전체 연령대에서 가장 높다. 그다음으로 20대가 0.083%, 30대는 0.07% 순이다. 실제로 10대들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인명사고는 끊이질 않는다. 지난해 6월 새벽 경기 용인시 도로에서 A(17)군이 만취 상태로 오토바이를 몰다가 신호 위반 좌회전을 해 맞은편에서 직진하던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당시 A군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0.091%로 측정됐다. 2017년 9월 전남 나주시에서는 B(19)군이 술을 마시고 할아버지의 승용차를 운전하다가 길을 걷던 노인(72)을 들이받아 숨지게 했다. 또 지난해 9월에는 C(19)군이 전북 전주시의 한 도로에서 면허도 없이 만취 상태로 차를 몰다 전신주를 들이받아 동승자를 다치게 했다. 전문가들은 지금보다 단속 빈도를 늘리고, 관련 교육을 강화해 어릴 때부터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제주 4·3사건은 한국 근대사의 ‘대학살극’이다. 2003년 발표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른 공식 희생자(사망, 행방불명 등)만 1만 4000여명이다. 추정되는 희생자는 그 두 배가 넘는다. 세상이 이승을 떠난 수많은 넋을 기리는 동안, 억울하게 전과자가 돼 몸을 낮추고 살아야 했던 불법 군사재판의 피해자들은 71년을 더 살아왔다. 이름도 불리지 않고 형량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전국 각지 형무소에 흩어져 청춘을 허망하게 보내버린 18명의 피해자들이다. 육체에 남은 크고 작은 흉터만큼, 이들에게 남겨진 전과기록도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서울신문은 구순이 다 돼서야 공권력이 찍은 낙인을 떨치게 된 이들의 한 맺힌 삶을 들었다. 인터뷰는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16일 피해자들의 자택에서 진행됐다.●“그냥 살았는데 내란죄래… 따지지도 못했어” 4·3이 극으로 치닫던 1948년 10월.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토벌 작전으로 희생됐다. 미처 해안가로 이주하지 못해 사살된 주민들도 있었고, 뒤늦게 내려온 주민들도 ‘폭도들을 지원했던 것 아니냐’며 무차별적으로 끌려갔다.양근방(86) 할아버지도 군경 작전으로 부모님과 떨어지고 형제도 잃었다. 중산간 마을에 혼자 남아 총살될 위기에 처했던 양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자 산에서 버틸 수 없어 헌병대에 자수했다. 곧바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배에 실려갔더니 인천형무소였어. 마당에 줄줄이 앉혀 놓더니 ‘이 열은 7년, 이 열은 15년, 이 열은 무기(징역)’ 이러더라고….” 6·25 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양 할아버지는 광주까지 갔다가 다시 붙잡혀 형이 추가됐다. “광주고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넌 북한군이 풀어줬으니 도피자다’라면서 징역 10년을 더 때리더라고. 그땐 10년인 줄도 몰랐어. 최근에 광주형무소에 신원조회해서 알았지.”부원휴(90) 할아버지도 학교에 다니던 19세 때 집에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지금도 봉투에 싸서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공립농업중학교 학생증’을 황급히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 막사에 붙잡혀 갔는데 ‘너 삐라 같은 거 안 뿌렸냐. 산사람들한테 쌀 갖다주지 않았느냐’ 하더라고. ‘학생이어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고 하니까 봉으로 마구 팼어.” 전주형무소로 갔다가 인천형무소로 이감된 부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유는 ‘내란죄’라고 했다. 왜 내란죄냐고 미처 따지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7년, 15년 선고받았는데 ‘난 살았다’고 생각했지. 그땐 재판 없이 가두고 쏴 죽이고 아주 무법천지였어.” 형무소 시설이 좁고 수형자 관리가 엉망이어서 부 할아버지가 있던 전주형무소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세면장에 가면 피고름이 섞인 똥이랑 온갖 이물질이 쌓여 있었어. 제대로 먹질 못해서 이질(설사병)도 걸리고 많이 죽어나갔지.” 1949년 7월 열여섯 살이던 김순화(86) 할머니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갇혔다.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몇 년 형인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에 김 할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이유가 뭔지. 재판도 안 받고 붙잡혀 있다가 배 타고 형무소로 갔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토벌대가) 부모님을 왜 죽였는지도 모르겠어.”●“전과자 낙인 찍히니 육지로 돌아다녔지” 형을 마치고 살아 나왔지만 흉터는 진하게 남았다. 김 할머니는 왼쪽 팔에 있는 콩알만 하고 동그란 초록색 문신을 보여 줬다. “형무소에 같이 수감됐던 분이랑 각자 왼팔에 바늘로 이렇게 새겼지. 나중에 만나서 알아보게.” 함께 문신을 새긴 김경인(87) 할머니와는 69년 뒤 같이 재심을 청구하는 동지로 다시 만났다. 작은 문신은 71년 세월을 버텼고, 김 할머니의 아픈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어. 피곤해. 그냥 묻어버리고 싶어. 생각만 하면 너무너무 속상해.” 양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가장 한이 맺힌 일이 있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1960년 10월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오자 불과 7개월 전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 3월에 아버님이 형무소로 면회를 오셨어. 내가 나갈 시한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아버님이 ‘너를 두고 어떻게 제주로 가느냐’ 하시고, 돌아서서 막 눈물을 흘려. (나도) 감옥에 돌아가서 한참 울었어.” 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제주로 돌아온 뒤 일주일 만에 숨졌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면회를 다녀온 뒤 식사를 하지 않고 줄곧 피를 쏟아내더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양 할아버지는 10년 만에 육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4·3으로 10년 가까운 형을 산 양 할아버지는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돼 있었다.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밭을 살 때도 조총련과 연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연고도 없는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겨 목장 일을 하며 20년을 살았다. 그렇다고 정부의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전과자가 신고도 안 하고 제주도에서 없어지니까 ‘북한으로 가려는 거 아니냐’면서 제주도로 다시 잡아가더라고. 남의 목장에서 월급 받고 산다고 말해서 하룻밤 조사받고 풀려났어.” 양 할아버지가 다시 제주로 돌아온 건 1990년이었다. 전과기록 탓에 자꾸만 찾아와 감시하는 경찰들 때문에 부 할아버지는 본적도 바꿨다. “원래 본적이 화북리였는데 이도1동으로 옮겼어. 옮겨도 얼마간은 찾아오더라고.” 부 할아버지는 이후 19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지만 전과 기록 때문에 하마터면 운명이 달라질 뻔했다. “공무원도 전과가 있어서 못할 뻔했어.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된 거야. 제주 사람들은 4·3으로 억울하게 형무소 갔다 왔다는 걸 다 아니까.” ●“만시지탄… 그래도 새로 태어난 기분” 재심이 시작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수형인 명부’는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처음 발견했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진상보고서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불법재판의 피해자들이 유죄의 낙인을 지우는 데는 그로부터 15년이 더 걸렸다. 재심 당사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정기성(97) 할아버지는 치매가 악화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후부터 공판에 출석하지 못했다. 형사재판은 피고인 출석이 원칙이지만 재판부는 정 할아버지의 상태를 고려해 진단서로 대신하면서 공판을 진행했다. 부 할아버지는 인터뷰 도중 거듭 “만시지탄”이라고 되뇌었다.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양 할아버지는 연방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험하고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 오늘에 왔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야.” “이제 우는 것도 귀찮다”던 김 할머니도 기뻐했다. 김 할머니는 4·3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한 채 살았다고 한다. “내가 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록만 없어졌으면, 아이들에게도 그(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억만 없어졌으면 좋겠어.”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조선의 화가로소이다 - 진도 운림산방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조선의 화가로소이다 - 진도 운림산방

    “鳴一世(명일세) : 세상을 진동시키다” 낯설 수도 있다. 유럽의 중세 문화를 대표하던 회화처럼 조선 후기에도 그림이 한 세상을 흔든 시기가 '잠시'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원 장승업(1843-1897)이었다. 그는 1800년대 말 조선의 운명을 마름질하던 청나라 사신들의 조선인 역관들의 후원을 받아 조선 후기 사대부 문화에 장식용 그림을 본격적으로 집어넣은 인물이다. 오죽하였으면 고종의 어명(御命)을 받아 그림을 그리다가 도망을 쳐도 무사할 정도로 오원은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장승업과 아울러 조선 회화의 맥을 굳건히 지켜 나갔던 조선말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9-1892)이 만든 화실인 진도의 운림산방으로 가 보자.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하였다는 장승업 그림에도 근저에는 조선 후기 남종화의 화풍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바로 사대부들 회화 문화에 있어 남종화는 고매한 인격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장식용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남종화풍의 회화 양식을 벗어나는 그림은 더이상 그림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사대부들이 즐겼던 회화 전통은 곧 남종화의 역사였다.여기서 남종화란 인격이 드높은 사대부(士大夫)가 수묵 담채로 담백하게 그린 맑은 정신세계의 연장선이며 눈앞의 사물을 뛰어넘는 유교의 정신 문화였다. 대표적인 조선 남종화 대가가 단지 서예가로만 우리에게 알려진 추사 김정희(1786-1856)였으며 그의 작품인 '세한도'는 조선 후기 남종화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서예성을 강조하고 주변의 군더더기들은 과감하게 지워버린 세한도는 조선 후기 사대부 회화의 최고봉으로 여전히 손 꼽힌다.바로 이런 남종화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의 제자가 허련이었다. 그는 더 이상 중국의 산수화 화풍을 답습하지 않고, 조선 회화만의 특성을 잘 살린 화가였다. 허련의 화풍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이 독특하였는데 붓을 다루는 솜씨가 강직하였고, 구도 및 수묵의 농암 표현이 자유분방하였다. 따라서 허련 이후부터 조선 남종화가 중국 남종화 화풍에서 벗어나 조선 남종화만의 특성를 지닌 스스로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이런 허련의 특성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내려왔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1908~1987)이다. 허건은 고답적인 조선의 회화 양식에서 벗어나 특유의 ‘신남화’(新南畵)라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내었다. 허건은 신남화에서 할아버지 허련의 ‘갈필법’(渴筆法)‘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고 발전시키는데. 갈필법이란 물기가 거의 말라버린 붓으로 먹을 조금만 묻혀 마른 붓질을 하는 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이 갈필법으로 농촌의 풍경, 산과 들, 바닷가 등의 향통적 풍경을 그려 제23회 조선전람회(1944)에 출품한 ‘목포의 일우’로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허씨 가문이 이룩한 조선 수묵화의 전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진도의 운림산방은 진도 첨찰산을 배경으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ㄷ’자 모양으로 만든 기와집인 운림산방은 초가로 된 살림채, 전시관, 연못과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인공 섬에는 배롱나무가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남도 회화의 맥을 이어온 허씨 가문 출신 화가들의 수준높은 작품도 관람이 가능해서 서양 회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눈에 색다른 관람 기회를 주기도 한다. <진도 운림산방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진도에 들러 시간이 남는다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넓은 화실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들.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3. 가는 방법은? - 전남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 군내 버스 이용(운림산방 앞) 4. 감탄하는 점은? - 잘 가꾸어진 정원. 조선 후기 남종화의 세밀하면서 웅장한 스케일.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늘상 조용한 편이다. 관람객이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기념관 내의 작품들.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쌈밥정식 ‘가족회관’, 성게비빔밥 ‘신호등회관’, 한우 생고기 ‘묵은지’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jindo.go.kr/tour/sub.cs?m=10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신비의 바닷길, 진도타워, 진돗개 테마파크, 이충무공 전첩비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조용한 곳이다. 진도에 들러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편안히 가 볼만한 곳. 특히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가 있는 장소.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율희 아버지 “사위 최민환, 첫 만남에 혼전임신 고백”

    율희 아버지 “사위 최민환, 첫 만남에 혼전임신 고백”

    율희의 아버지가 ‘살림남2’에 첫 출연해 눈길을 모았다. 지난 16일 방송된 KBS2 예능프로그램 ‘살림하는 남자들2’(이하 ‘살림남2’)에서는 율희 아버지가 첫 출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율희 아버지는 “안녕하세요, 율희 아빠 재율이 외할아버지 46세 김태우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살림남2’ 측은 “살림남 최연소 장인”이라고 설명했다. 율희 아버지는 사위인 최민환에 대해 “우리 사이에 벽이 하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민환과의 첫 만남에 대해 말했다. 그는 “재작년 12월에 처음 봤다. 인사를 하러 왔는데 뜻밖의 소리를 했다. 아기를 가졌다고 말하더라. 인사가 아니고 결혼을 하겠다고 온 것이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율희 아버지는 “할 말이 없었다. 화조차도 안 나는 것 같았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사진=KBS2 ‘살림남2’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대나무꽃을 보셨나요?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대나무꽃을 보셨나요?

    식물에는 뿌리와 잎, 줄기, 꽃과 열매, 종자와 같은 여러 기관이 있다. 이 기관들은 식물의 삶에서 늘 함께하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존재한다. 잎과 줄기 등의 영양기관은 대체로 삶의 긴 시간 동안 존재하지만 꽃과 열매, 종자와 같은 생식기관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오뉴월이 되면 식물을 그리는 나는 더욱 바빠진다. 산과 들에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기 때문이다. 현화식물 중 대부분은 1년에 한 번 꽃이 피지만, 민들레처럼 1년 동안 여러 번 꽃을 피우는 식물도, 무궁화처럼 아침에 개화했다가 저녁에 꽃이 지는 것을 반복하는 식물도 있다.그래서 꽃을 기록하는 일은 잎이나 가지, 열매를 기록하는 일에 비해 까다롭다. 꽃은 다른 기관보다 피어 있는 기간이 짧거나 그 시기가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필요하다고 그들을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꽃이 피었다는 소식에 급히 그곳에 가면 금세 다 꽃이 져 있는 일도 많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식물의 개화 시기를 놓치면 나는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내년을 기약할 수 있는 건 한편 다행스러운 일이다. 언제 꽃을 피울지 기약 없는 대나무와 같은 식물도 있기 때문이다. 건축이나 무기, 식기와 생필품 등 다양한 분야에 이용되는 대나무는 60년에서 12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마저도 우리의 추측일 뿐 인간의 100여년 생 동안 한 번 보기도 힘들다고 하는 게 바로 대나무꽃이다. 꽃이 너무 귀해 신비의 꽃, 혹은 행운의 꽃이라 불릴 정도다. 며칠 전 나는 일본의 소도시, 고치현의 한 식물원에 갔다. 식물원의 정식 이름은 고치현립마키노식물원. 일본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노 도미타로 박사를 기념해 그의 고향에 만들어진 식물원이다. 나는 이곳에서 열리는 표본관 소장품전을 보고 표본관의 연구원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정원을 산책했다. 식물들을 둘러보다 잠시 멈춰 선 사이 한 할아버지께서 내게 다가오더니 일본어로 “귀한 꽃을 보여줄까요?” 하며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세계의 어느 식물원과 공원에 가도 늘 젊은이보다는 어르신이 많고, 그들은 때때로 지나가는 외국인인 나에게 자국어로 말을 걸기도 한다. 시시콜콜한 식물에 관한 이야기부터, 장소에 관한 이야기까지. 어르신들과 나누는 이야기와 그들이 보여 주는 장면에는 늘 배울 것들이 있고, 그건 내게 늘 좋은 경험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의심 없이 처음 보는 그 할아버지를 따랐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그는 한 나무 군락 앞에 섰다. “이 꽃을 봐요.” 이것은 대나무의 한 종류, 왕대의 꽃이었다. “이게 100년에 한 번 피는 귀한 꽃이에요.” 하며 흡사 곤충과 같은 그 꽃을 웃으며 가리켰다. 우리가 늘 보는 꽃의 형태는 아니었다. 꽃잎이 없이 노란 수술이 가느다랗게 매달려 있는 모습은 작정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워 보였다. 몇 년 전에 나는 왕대를 그렸었다. 인류 역사를 바꾼 식물이란 주제로 사람들에게 대나무를 소개하는 그림이었다. 물론 그때 나는 왕대꽃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었기에 어렵게 구한 고해상 클로즈업 사진을 보고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겐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대나무 꽃을 보는 순간 그 그림이 떠올랐다. 내가 기록했던 것보다 수술이 크고 색도 짙었다. 이걸 관찰해 스케치해서 수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꽃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지나던 사람들도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는 왕대꽃 앞에 멈춰 섰다. 사람들과 함께 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어느새 사라졌다.이 왕대가 꽃을 피우기까지 기다린 100년의 시간과 내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한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 그리고 할아버지와 나의 인연이 모두 더해져 볼 수 있었던 대나무꽃. 사람들은 내게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면서 왜 늘 책상에 붙어 있지 않고 산과 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지 의아해한다. 내가 책상에 앉아만 있었다면, 과거에 그린 왕대 그림은 영원히 틀린 기록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식물세밀화가의 삶이란 늘 식물을 쫓는 나비나 곤충의 삶과 같다. 나는 언제까지나 식물을 따라다니는 작은 동물일 것이다.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족보도서관 설립, 시장 바뀔 때마다 달라집니다…우리 핏줄의 역사 문제 아닙니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족보도서관 설립, 시장 바뀔 때마다 달라집니다…우리 핏줄의 역사 문제 아닙니까”

    65년 족보 인쇄 외길 회상사 박병호 대표가 말하는 ‘족보’“6층에 보관하고 있는 족보 책이 한 3만~4만 권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필름으로도 그만큼 보관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문중의 족보는 여기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족보 인쇄가 사양길에 접어들다 보니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관하는 족보는 개인 재산 차원을 넘어 한국인의 핏줄 역사가 담긴 문화재입니다. 대전시가 족보도서관 만들어 영구보관한다고 이야기 나온 게 십수년이 됐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6층 회상문보원 서가엔 900여가문 족보 빼곡히 꽂혀 65년째 족보 인쇄의 외길을 걷는 대전시 동구 중동 회상사(回想社)가 족보 보관에 애로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11일 박병호(73) 대표를 찾았다. 회상사 겉모습은 출판사라기보다는 창고와 같아 보였다. 건물 1층 사무실에 석유난로를 켜고 직원 몇 사람이 일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박병호 대표를 만나러 왔다.’라고 했더니 한쪽 책상에 앉아있던 ‘내가 박병호입니다.’라며 일어나 기자를 맞았다. 1층 사무실을 둘러보니 벽에는 철제 캐비닛이 몇 개 서 있고, 책상만 몇 개 놓여 있었다. 박 대표는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석유난로를 옮겨왔다. 족보 책은 보이지 않았다. 족보 전문 출판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족보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 대신 나가자고 했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올라갔다.6층엔 회상문보원(回想文譜院)이란 간판 아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서화 냄새가 어우러진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 안에는 금천 강씨(衿川 姜氏)부터 900여 가문의 족보가 가나다순으로 서가에 꽂혀 있었다. 한쪽 벽면엔 각종 문집과 향교지 등도 보관하고 있었다. “1991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족보도서관인 여기에 보관된 족보가 한 3만~4만 권쯤 될 겁니다. 2007년 제가 취임한 후로 대동보(大同譜) 500여종, 세보(世譜·일명 파보) 1500여종, 가승보(家乘譜) 900여종 등 모두 600만 부 이상 발간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휘호도…윤보선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납 활자본도 고스란히…희귀 벽자 700여개도 보관“하루 족보 35쪽 입력…족보 한권은 통상 800쪽”5층엔 선친 박홍구의 아호를 딴 춘전(春田)기념관이 있다. 여기에는 족보를 받은 문중에서 기념으로 선물한 고서화, 병풍 등이 가득했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화친(和親)’도 보였다. 1983년 윤보선 전 대통령의 해평윤씨 대동보 발간 기념 친필 휘호,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도무문(大道無門) 백자 도자기, 199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회상사 방문 및 친필 실사구시(實事求是) 휘호도 받아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따로 연락이 없었다고 말한다. 4층엔 납으로 인쇄하던 시절의 활자본이 보관돼 있었다.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은 옥편에도 안 나오는 한자를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읽는 법은 당사자에게 물어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한자로 짜잡기해서 글자를 만든 벽자(僻字)도 700개 남짓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선 족보를 만들기 위한 인쇄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여성직원이 기존의 족보 책을 뜯어내 하나하나 컴퓨터로 입력하고 있었다. “몇십 년 전에 납 활자로 인쇄한 족보는 컴퓨터 데이터가 없어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입력합니다. 하루 8시간 작업하면 35~40페이지 정도 입력합니다. 족보 만들 때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보통 족보 한 권이 800페이지 전후이니 수작업의 번거로움이 짐작된다. 창문 너머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곳엔 족보 필름이 책으로 환산하면 3만~4만 권이 보관돼 있지요.”그가 5층과 6층의 족보도서관과 기념관을 보여주고 나서 문을 자물쇠로 굳게 잠그고 나서 다시 확인했다. “도서관이라면서 왜 이렇게 잠그느냐”라고 물었다. “도둑이 들어서…. 과거엔 사람들이 와서 열람도 하고 했는데 이젠 인력이 부족해 관리가 소홀하니 족보도 훔쳐가고 고서화도 훔쳐가고 해서…. 도난당한 족보만 해도 수천 권에 이를 갑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도 도둑맞은 겁니다. 모사품을 새로 걸어둔 것이지요.” 그리고 보니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아무렇게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낙관도 어쩐지 흑백이더라. 체계적 보관과 관리가 시급해 보였다. “도난당한 족보 수천권…박정희 대통령 휘호도 도난당해체계적 관리, 영구보존 대책 시급…시장 박뀌면 백지화”“이렇게 관리상에 어려움이 많아도 이 자료들이 나름대로 귀중한 문화재 아닙니까. 소멸하면 혈족에 관한 국가적 문화재가 사라지는 것이니 출판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료를 빼고 모든 자료를 대전시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영구보존하려는 것이죠. 회상사가 설립된 1954년부터 출판한 450문중의 대동보와 14문중의 인터넷 족보, 600문중의 전자족보, 800여 권의 한문 서적 등을 기증하기로 한 것입니다.” 대전시가 족보도서관을 만든다고 이야기가 나온 지 십수년이 됐습니다만 확약서를 쓰지 않은 탓인지 여태까지 잘 안 되고 있단다. “우리 회상사가 대전시에 기증할 족보와 고서화 등의 자료를 보관할 장소가 500~600평 정도 필요하지만 대전시문화원이 제공하려는 공간은 260평 정도로 협소하고, 관리·보존이나 재원 마련 계획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장이 바뀌면 이런 계획마저도 백지화됩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요즘 일거리가 많은지 물었다. “1970~80년대 족보 만들기가 붐이었지요. 전쟁통에 불타거나 잃어버린 집안이 많아서…. 그때는 집성촌을 찾아가 남아있는 족보를 모아서 복원하곤 했지요. 족보 인쇄를 시작하면 문중에서 개판식(開版式)을 성대히 치렀습니다.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지요. 그런데 요즘엔 누가 족보 만들려고 하나요. 그래도 제대로 족보 만드는 기업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텐데….” 최근에 한글을 병기한 족보에 조상의 사진도 넣는다고 한다. 일부 문중은 전자족보, 인터넷 족보를 운영한다고 귀띔했다. “한때는 디스크나 CD롬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요즘 컴퓨터엔 CD플레이어가 부착돼 있지 않으니 보려면 불편합니다. 첨단기술이라는 게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종이 족보는 보관만 잘하면 수백 년 흘러도 볼 수 있고 편리합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납 활자로 족보를 만드는 기업, 200년 역사의 회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부 문중 전자족보, 인터넷 족보 운영종이 족보 보관 잘하면 수백년 문제 없어”요즘 또 다른 고민은 가업인 족보 인쇄를 맡아갈 아들을 찾는 것이다. “사양 산업으로 돈벌이가 잘되지도 않으니, 아들들이 서로 맡지 않으려 합니다. 아들이 넷이 있는데 서로 상의하고 있겠지요.” 그도 1954년 설립된 회상사를 2007년에서야 맡았다. “선친이 장남인 제게 이 일을 물려줄 생각에 공고에 가라고 해서 대전공고에 들어갔죠. 그때만 해도 족보 만드는 일을 계승할까 했는데, 어느 날 경쟁업체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쳐들어와서 큰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걸 보고 오만 정이 다 떨어져, 선친의 뜻을 어기고 약대로 진학했습니다. 도립 충남홍성병원에서 약제과장을 지내다 약국 개업도 했지요. 그때도 선친이 회사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저는 뿌리치고 시의원과 초대 및 3대 대전 동구청장을 지내며 제 길을 갔습니다.” “구청장 임기 끝나고부터 회상사 일을 맡았습니다. 선친이 많이 편찮으셨거든요. 그때가 2007년 1월이었습니다. 직원들 퇴직금도 밀린 상태였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한창 때는 직원이 150명도 넘었는데 …. 이 일대가 한창때 우리가 일거리를 주면서 생겨난 업소들 거리였습니다. 이젠 어엿한 ‘인쇄 골목’이 됐지만.” 족보를 만들면서 봤거나 겪었던 특이하거나 재미난 성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박 대표는 “그 문중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며 한사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어떤 문중에서는 족보가 발간되자마자 이를 받아들고 회상사 건물 앞 계단에서 조상님들께 고하는 고유제를 지냈습니다. 또 직원들 한명 한명 붙잡고 감사하다고도 인사했지요.” “한창 시절, 경쟁업체가 도끼 들고 쳐들어와만정 떨어져, 가업 계승 대신 구청장 길 걸어발간된 족보 들고 제사 지내는 문중도 있어”회상사엔 세가지 불문율이 있다. 먼저 족보 내용이 인쇄된 파지는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또 인쇄된 용지는 밟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족보는 ‘모신다.’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족보 유래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왕실의 제왕년표(帝王年表)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의종 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시초다. 민간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나온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인데 기록만 전한다. “회상사에는 선친의 피눈물이 들어있습니다. 이를 가업으로 잘 넘겨주는 것이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선친은 충북 제천에서 ‘권학사’라는 서점을 운영하며 돈을 좀 만졌습니다. 6·25때 총부리를 겨누고 협박하는 인민군에게 돈을 빼앗겼고, 다시 방첩대는 인민군에게 돈 줬다고 선친을 불러다 엄청나게 때리고 재산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전쟁 이후 권력 기관에 의해 괴롭힘을 무척 많이 당했습니다. 선친이 한번은 어린 저를 붙잡고 치욕적이라며 부들부들 떨며 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곤 맨손으로 아무도 모르는 대전으로 나왔던 거죠. 인쇄소에 1년 남짓 다니시다가 족보를 인쇄할 생각을 하셨던 거죠. 그리곤 전국 최대의 족보 인쇄 회사를 일구셨습니다.” 가짜 족보 문제도 많다고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족보를 출판하는 인쇄업자입니다. 족보 내용은 문중의 종친회장인 발행인의 승낙 없이는 손대지 못합니다. 문중의 어르신들이 와서 돋보기를 들고 하나하나 다 교정을 봅니다. 족보는 정확성입니다. 그것이 신뢰이고, 우리의 철칙입니다. 요즘 가짜족보 문제는 문중 재산 즉 조상 땅 싸움 때문에 발생합니다. 문중에서 법정 소송이 벌어지면 족보가 증거로 채택됩니다. 검찰에서 우리가 보관한 족보를 복사해 간 적이 몇번 있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족보에 끼워달라는 부탁을 몇 차례나 받았습니다만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최근 가짜 족보 문제는 문중 재산 싸움 탓우린 출판업자, 발행인 승낙 없이 수정 못해족보는 과거 아닌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그에겐 족보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가업을 승계하는 차원을 넘었다. “고리타분한 핏줄, 즉 혈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족보는 그런 면에서 현재의 나와 조상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인 셈입니다.” 한편, 2015년 통계청 조사결과 한국인의 성씨는 모두 5582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5인 이상인 성씨는 530여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0년대의 270여개 성씨와 비교하면 급증한 것이다. 다문화의 영향으로 외래 성씨가 급격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은 삼국시대부터 일부 계층이 성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110년 전인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대전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횡재했네”…금속탐지기로 17세기 금반지 찾은 여성

    “횡재했네”…금속탐지기로 17세기 금반지 찾은 여성

    한 아마추어 보물 사냥꾼이 15cm 땅 아래에서 17세기 금반지를 발견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지난 10일(현지시간) 잉글랜드 블랙풀 출신 여성 미셸 발(53)이 스코틀랜드 로몬드 호수 근처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반지를 찾았다고 보도했다. 이 반지의 보존 상태는 매우 완벽해 최대 1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1400만원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금속탐지기를 들고 땅 속에 묻힌 보물을 찾는 미셸은 스코틀랜드 로몬드 호수 근처의 개인소유지에서 주인의 허가 아래 탐사 활동을 벌이던 중 이 금반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겨우 15cm를 파고 내려갔을 뿐인데 반지가 나왔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모르고 그저 금을 찾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설명했다. 미셸은 반지 감정을 위해 한 경매사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 반지가 찰스 2세(1660~1685)를 섬기던 신하 에드워드 콜만(1636~1678)의 것임을 확인했다. 에드워드는 1678년 ‘구교도 음모사건’으로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찰스 2세를 보필했다.구교도 음모사건은 1678년 영국의 재침례교파 타이투스 오츠(1649~1705)의 음모로 죄없는 카톨릭 교도들이 처형된 사건이다. 당시 타이투스는 카톨릭이 국왕 찰스2세를 암살하고 동생 제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해 여론을 들쑤셨다. 공황 상태는 1681년까지 3년간 계속됐고, 에드워드 콜만을 포함해 최소 22명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에드워드의 반지는 그의 할아버지 사무엘 콜만이 물려준 가보로, 1673년 제임스 2세의 왕비 메리 모데나를 수행하면서 스코틀랜드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스코틀랜드국립박물관은 반지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박물관이 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데일리메일은 그 반지가 박물관에 소장된다면 미셸과 토지 소유주에게 일정액의 보상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20세기 최고 그림책 작가’ 버닝햄 별세

    ‘20세기 최고 그림책 작가’ 버닝햄 별세

    20세기 최고의 그림책 작가 존 버닝햄이 지난 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83세.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버닝햄의 대리인은 7일 그의 죽음을 최종 확인했다. 버닝햄의 가족은 성명을 통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놀라게 하며, 또 화나게 했던 진정으로 멋지고 독창적인 남편이자 아버지, 할아버지를 잃었다”고 기렸다. 영국 서리주 파넘에서 태어난 고인은 아방가르드적인 생각을 가진 부모와 주거용 트레일러에서 살았고 학교를 9번이나 옮겨 다녔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2년 반 동안 슬럼가 청소, 산림보호, 학교짓기를 하는 등 작품 전체에서 드러난 학교와 어른, 권위에 대한 거부감을 지닌 버닝햄은 권위와 강요에 대한 냉소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호기심과 고통, 슬픔을 예리하면서도 통쾌하고 따뜻하게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미술학교에 입학한 어린시절 친구를 만난 뒤에 삽화가가 된 고인은 1963년 첫 번째 그림책인 ‘깃털없는 기러기 보르카’를 발간했다. 국내에도 소개된 ‘지각대장 존’과 ‘내친구 커트니’, ‘동생이 태어날거야’ ‘크리스마스 선물’ 등 50여년간 60권 이상의 그림책을 펴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아름다운 가사·율동… 동요는 인성교육의 출발점”

    “아름다운 가사·율동… 동요는 인성교육의 출발점”

    가구회사 CEO… 10년 전 동요에 푹 빠져 이천 임시 동요박물관에 자료 500여점 “동요 확산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 필요”종합 가구회사 최고경영자(CEO)에서 동요(童謠) 전도사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 윤석구(80) 한국동요문화협회 회장이 주인공이다. 윤 회장은 굴지의 가구 회사에서 20년 넘게 전문 경영인으로 몸담았던 가구산업의 산증인이다. 그의 동요 사랑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유시인으로 등단해 동요에 꽂혔고, 50여곡의 동요를 작사·작곡할 정도로 사랑했다. 본격적인 동요 사랑은 자료 확보에 나서면서부터다. 윤 회장은 “동요 자료를 소장한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갔고, 전국 대형 고서점은 거의 다 뒤졌었다”고 뒤돌아봤다. 6년 전에는 동요협회 회장을 맡았다. 한두 점씩 모으기 시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2014년 경기 이천시 서희 청소년센터에 임시로 동요박물관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윤 회장이 모은 자료와 기증 자료를 합쳐 500여 점이 전시됐다. 희귀한 자료도 많다. 누구나 아는 동요 ‘반달’(윤극영 작사·작곡) 자료는 이곳에만 있다. 이천은 유명한 동요 선생님이 태어난 곳도 아니다. 윤 회장의 고향도 아니다. 가구 공장이 이천과 여주 사이에 있는 관계로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동요 보급 활동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이천은 동요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윤 회장의 1단계 동요 사랑이 잊힌 동요 찾기와 박물관 운영이라면, 2단계 동요 사랑은 동요 보급이다. 동요박물관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다. 동요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2012년부터 시작된 동요강좌 수강생은 1만여명에 가깝다. 윤 회장은 “동요박물관은 동요를 직접 불러보고 동요를 만들어보는 체험활동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이천 어린이들로 구성된 서희 중창단은 전국 대회를 휩쓸고 있다. 이름을 떨치면서 지역 행사는 물론 주요 국가행사에도 초청받을 정도다. 대형 가수 뮤지컬에도 출연하고, KBS 국악관현악단이 찾아와 협연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 윤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받은 훈장은 ‘동요 할아버지’라는 이름이다. 정부가 준 것이 아니라 동요를 사랑하는 어린이들에게서 받은 훈장이라서 남다르다. 윤 회장은 동요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동요는 아름다운 가사와 율동이 어우러진 어린이 종합예술이라서 동요를 많이 부르는 것이야말로 인성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또 ‘반달’,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를 예를 들며 “동요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현재 세대, 어른들 세대까지 3대가 공감하는 예술이고, 한류(케이팝)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국가 차원의 동요 확산도 주문했다. 동요 교육 강화, 동요 체험공간 확대, 동요 지도자 육성을 제시했다. 동요를 유산으로 기리도록 동요 박물관 건립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윤 회장의 10년 동요 사랑과 지역 정치인(송석준 자유한국당 의원)의 노력으로 올해 정부 예산에 동요 박물관 건립 화수분을 마련했다. 새해에는 박물관 건립 용역을 시작할 계획이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최고의 치킨’ 김소혜, 가슴 아픈 과거 공개 ‘목욕탕 은둔’ 왜?

    ‘최고의 치킨’ 김소혜, 가슴 아픈 과거 공개 ‘목욕탕 은둔’ 왜?

    김소혜의 가슴 아픈 과거가 밝혀진다. 오늘(9일) 방송될 드라맥스, MBN 수목드라마 ’최고의 치킨’(극본 박찬영, 조아영, 연출 이승훈, 제작 iHQ, 메이퀸픽쳐스)에서는 김소혜(서보아 역)가 목욕탕에 은둔하게 된 심상치 않은 사연이 드러날 것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앞서 김소혜는 친할아버지인 동방우(서명동 역)가 박선호(박최고 역)에게 5년 동안 운영해온 목욕탕 건물을 임대해 길바닥으로 나앉을 위기에 처했다. 목욕탕 철거를 위해 들이닥친 박선호와 인부들을 내쫓고 출입문을 걸어 잠근 그녀를 끌어내기 위해 동방우는 오함마까지 동원해 문짝을 부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김소혜를 강경하게 몰아붙이던 동방우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목욕탕에 은둔한 손녀딸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들기 위한 할아버지의 큰 그림이었던 것. 이에 방송 직후 시청자들은 그녀의 숨겨진 이야기를 추측하며 높은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의문의 남자와 마주친 김소혜가 포착돼 호기심을 일으키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남자를 피하려고 급히 허둥지둥 대는 그녀의 모습에선 크게 당황한 기색이 느껴진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바라보는 김소혜의 표정에선 한겨울 바람보다도 더 차가운 한기마저 감돈다. 특히 이 남자는 5년간 이어진 김소혜의 ‘방구석 라이프’와 큰 연관이 있어 과연 5년 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김소혜를 목욕탕에 은둔하게 만든 사연의 전말은 오늘(9일) 밤 11시에 방송되는 드라맥스, MBN 수목드라마 ‘최고의 치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래퍼 마미손, 고무장갑 마미손 무료 모델 나선 이유

    래퍼 마미손, 고무장갑 마미손 무료 모델 나선 이유

    핑크 복면을 쓴 래퍼 마미손이 고무장갑을 만드는 회사 마미손과 무료 광고계약을 맺었다. 마미손은 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pinkbeanieboiboi)에 이런 사실을 알렸다. 앞서 올해 초 인터넷 게시판에는 마미손 캐릭터가 인쇄된 비닐로 포장한 고무장갑이 대형마트 매대에 진열된 사진이 ‘마미손X마미손 콜라보’라는 제목으로 화제가 됐다. 래퍼 마미손은 (주)마미손의 모델 제의를 먼저 받고 회사를 방문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어릴 적 할머니 집에 도착한 기분이었다”며 “거의 대부분 직원분들이 20년 이상, 길게는 30년 가까이 근무하신 분들이 많았다”고 적었다. 마미손은 “한 회사에 오래 일한 직원이 많다는 건 노후생활이 어렵고 소위 ‘갑질’이 만연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며 “젊은 시절을 회사에 바친 분들이 젊은이에 비해 일손이 다소 더디다고 일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는 임원진 말씀이 인상 깊었다”고 밝혔다. 마미손은 “할아버지댁에 놀러 온 손자 대하시듯 용돈을 꽤 많이 주셨는데 의미있는 일에 쓸 것”이라고 밝혔다.네티즌들은 “인성까지 완벽한 마미손”, “마미손의 계획은 어디까지”, “이게 힙합이고 스웩”이라며 마미손의 미담에 찬사를 보냈다. 마미손은 지난해 9월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트리플세븐’에 독특한 모습으로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마미손이 유튜브에 공개한 뮤직비디오 ‘소년점프’는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라는 후크로 큰 인기를 얻었다. 마미손의 정체가 매드클라운이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하지만 마미손(매드클라운)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며 정체를 숨기고 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월드피플+] “경찰 되고싶어요”…中 ‘눈송이 소년’ 그후 1년

    [월드피플+] “경찰 되고싶어요”…中 ‘눈송이 소년’ 그후 1년

    1년 전 머리카락이 하얗게 언 채 등굣길에 올랐던 중국 윈난성 루디현의 ‘눈송이 소년' 소식이 다시 전해져 화제다. 당시 어린 소년이 볼이 빨개진 채 눈썹과 머리카락 전체가 얼었던 사진이 전세계에 공개되며 온라인 상에서 그를 돕겠다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진 바 있다. 네티즌들에 의해 '눈송이 소년'이라는 별칭이 붙은 소년의 이름은 왕푸만(9)으로, 중국 서부 내륙 지방인 윈난성 루디현의 산골 마을이 고향이다. 당시 왕 군이 재학 중이었던 초등학교과 거주지에는 보일러가 설치돼 있지 않은 탓에 매년 겨울마다 영하 9~10도의 추운 날씨를 견뎌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머리카락과 눈썹이 언 채 등하굣길을 오갔고, 수업 중에도 언 몸을 녹일만한 마땅한 시설이 없었다는 것이 현지 언론을 통해 공개됐던 바 있다. 이후 소식을 전해들은 네티즌들이 왕 군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온정의 손길을 모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1월까지 왕 군을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성금은 약 347만 1265위안(약 5억 6500만원)이다. 성금 금액이 크다는 점에서 윈난성 정부는 일명 ‘윈난청년기금회’를 구성, 지역 내 왕 군과 같은 처지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해당 기금을 활용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껏 해당 기금은 성 내 거주하고 있는 6943명에게 방한 용품, 교육 교재 등의 형식으로 전달됐다. 뿐만 아니라, 올해에는 왕 군이 재학 중인 주안산바오 초등학교에도 각종 난방 시설이 확충, 올해 겨울만큼은 왕 군과 그의 친구들이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학교 내에는 난로, 온풍기 등의 난방기가 설치, 재학생들은 더 이상 얼음장 같은 물로 손을 씻거나 난방이 되지 않는 영하 5~6도의 실내에서 언 손을 녹이며 공부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또 먼 거리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거주할 수 있는 기숙사 건물이 한 채 들어섰다. 왕 군을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 보내 준 방한 용품, 의류, 난방 시설 용품 등을 활용, 학교 측은 자체적인 과학 실험실과 미술실, 컴퓨터실 등을 추가로 확충했다. 뿐만 아니라 왕 군과 같은 처지에 있는 학생들의 등굣길 안전을 위해 학교 인근의 도로는 모두 시멘트 포장 도로로 개선됐다.이 뿐 만이 아니다. 지난해 온라인 상에 사진이 공개되며 일약 스타가 됐던 왕 군 덕분에 그의 가족들의 생활도 크게 개선됐다. 특히 지난해 6월 무렵에는 왕 군과 그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등 3대는 함께 거주할 수 있는 크기의 벽돌 집으로 이사를 했다. 왕 군의 아버지 왕강규 씨는 “오래된 흙담 집에서만 살아봤는데,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비바람을 막아낼 수 있는 새 집을 얻게 돼 기쁘다”면서 “이제 우리 가족 모두 비바람을 맞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앞으로의 생활이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왕 군의 아버지 왕씨는 중국 쿤밍의 한 공사장에서 전기 용접 및 벽돌을 쌓는 업무를 담당하는 일용직이다. 그가 하루 평균 벌어들이는 수익은 약 200위안(약 3만2500원)으로 수입의 상당수는 고향에 있는 가족을 위해 송금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의 온정의 손길로 도움을 받은 왕 군의 장래 희망은 공안이 되는 것이다. 왕 군은 “지난해 처음 베이징에 여행을 다녀왔다”면서 “당시 높은 건물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보고 큰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됐다. 많은 도움을 받았던 만큼 바른 사람으로 성장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공안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왕 군이 재학 중인 주안산바오 초등학교 측은 “왕 군의 성적은 학급 내에서 3~5등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라면서 “올해에는 반에서 노동 위원을 맡는 등 친구들과의 관계도 친밀한 학생”이라고 전했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신과의 약속’ 한채영 오윤아, 마주앉은 모습 포착 ‘냉랭한 기운’

    ‘신과의 약속’ 한채영 오윤아, 마주앉은 모습 포착 ‘냉랭한 기운’

    ‘신과의 약속’ 한채영과 오윤아가 마주 앉은 모습이 포착됐다. 5일 MBC 주말드라마 ‘신과의 약속’ 측은 만나기만 하면 살벌한 신경전을 펼치던 한채영과 오윤아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의 스틸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 속 한채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오윤아에게 다가서고 있고 오윤아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 듯 깜짝 놀라 한채영을 바라보고 있다. 이후 작은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도 포착되었다. 할 말이 있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오윤아를 쳐다보는 한채영과 시선을 회피한 채 꼿꼿하게 앉아있는 오윤아 사이에는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들만 쏟아내기 바빴던 두 사람이 무슨 일로 차분하게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오윤아를 상대하기 싫어하는 한채영이 왜 스스로 오윤아를 찾아간 것인지 호기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한편, 지난 방송에서는 재욱(배수빈 분)이 지영(한채영 분)을 만나러 양평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경(오윤아 분)이 지영을 찾아와 준서(남기원 분)의 문제로 다투다 오히려 지영에게 따귀를 맞았다. 그리고 지영은 “네가 저지른 짓이 어떻게 너에게 비수로 꽂히는지 봐야겠다”라고 강력한 선전포고를 했다. 또한, 현우(왕석현 분)는 자신의 친부가 재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천지가(家)에 들어오라는 할아버지 상천(박근형 분)의 말에 자신을 키워 준 부모님을 잘 돌봐 달라는 조건을 제시하며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오랜만의 가족 캠핑에서 현우는 할아버지를 만난 사실을 이야기했고 지영의 가족은 충격에 빠졌다. 극 말미 현우가 상천의 집으로 가는 모습이 그려지며 현우가 가져올 또 다른 파장이 어떻게 펼쳐질지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MBC ‘신과의 약속’은 5일 오후 9시 5분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음성품바축제 사랑나눔 릴레이 이벤트

    음성품바축제 사랑나눔 릴레이 이벤트

    ‘거지 성자’로 불리는 고(故) 최귀동 할아버지의 나눔정신 계승을 위해 열리고 있는 충북 음성품바축제가 20주년을 맞아 사랑나눔릴레이 이벤트를 마련했다. 4일 음성군에 따르면 이 행사는 아이스버킷 챌린지 형태로 진행된다. 미션 수행 후 다음 기부자를 지명하는 형식이다. 군은 100명 참여를 목표로 잡았다. 이벤트는 축제 개막일인 오는 5월22일까지 계속된다. 미션은 △포토프레임 앞에서 품바의상 착용 및 품바분장하고 음성품바축제 홍보하기 △품바의상 착용하고 품바타령 30초 하기 △품바의상 착용 후 품바댄스 추기(플래시몹) 등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 하면 된다. 장소는 자유다. 품바복장은 읍·면사무소 도움을 받으면 된다.미션 수행자는 48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고 다음 참가자를 지명한 뒤 후원금 계좌(예금주 음성예총)로 기부금을 보내면 된다. 신재흥 음성예총지회장은 지난 1일 제야의 타종 행사에서 첫번째 주자로 나서 품바의상을 착용하고 품바댄스를 선보였다. 신 지회장에게 다음 기부자로 지명된 조병옥 음성군수는 지난 3일 포토프레임 앞에서 품바의상과 품바분장을 하고 음성품바축제를 홍보했다. 조 군수는 조천희 음성군의회 의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이벤트 후원금은 제20회 음성품바축제 열림식에서 복지사각지대 지역아동에게 전달된다. 자세한 사항은 음성예총(043-873-2241)이나 이메일(esart2241@hanmail.net)로 문의하면 된다. 군 문화체육과 강호정 주무관은 “많은 기부금이 모아져 여러 아이들이 혜택을 받았으면 한다”며 “개인별 기부금 액수는 다음 참여자들이 부담이 느낄수 있어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다리밑에 거적을 치고 사는 신세였지만 자신보다 못한 걸인들을 도와 음성 꽃동네 설립의 모태가 된 인물이다. 1986년 2월 15일 ’작은 예수라’는 칭호를 들으며 ’한국가톨릭대상’ 사랑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음성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2030 세대] 양갱을 들여다보자면/김현집 미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2030 세대] 양갱을 들여다보자면/김현집 미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어렸을 땐 뭐든 단정해 버리기 쉽다. ‘나름 다르다’, 이런 말은 밋밋하고 설득력이 없다.방학 때 집에 돌아오면, 한국과 외국 생활을 비교했다. 한국에선 무엇이든 신속하고 편리하고 정확하다. 길도 시원스럽다. 영국은 오래되고 낡아 불편하지만 아름답다. 풀과 나무는 짙푸르고 화려하다. 반면 한국의 색은 왠지 어둡다. 어린 나에겐 이 점이 특히 거슬렸다. 유럽의 색은 다채롭다. 사람들도, 심지어 하늘도, 잔디도 그렇다. 풀벌레도 자지러지지 않고 점잖게 우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건 서양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대학에서 들었던 ‘동양의 미와 예술’ 같은 강의도 나의 이런 억지를 막지 못했다. 그럴 즈음 읽었던 책이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다. 나쓰메는 나처럼 영국 유학 경험이 있었다. 정확히 100년 전이다. 나쓰메도 동서양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박쥐처럼 쥐와 새 사이를 오갔다. 일본은 서구화되고 있었고, 나쓰메는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동양의 미에 대한 사유로 가득하다. 양갱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도 한다. ‘서양 과자 중에서 이토록 쾌감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크림의 빛깔은 약간 부드럽기는 해도 다소 답답하다. 젤리는 언뜻 보석처럼 보이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어 양갱만큼의 무게감이 없다. 백설탕과 우유로 오층탑을 세우는 짓은 언어도단이다.’(송태욱 역) 동양의 아름다움을 처음 나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 준 글이었다. 감각적인 미,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도 있었다. 양갱에도 있고, 양갱과 같은 어두움을 품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 정원 석등 위에 자란 이끼에도 있다. 양갱 하나로 나쓰메는 내가 동양의 색깔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 놓았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축을 다시 잡았듯이. 서양의 색이 발랑 드러내놓은 색이라면 동양의 색은 감추고 여민 색이다.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양갱을 먹을 때마다 나는 나쓰메를 떠올리고 동양의 색을 음미하게 된다. 동시대의 일본의 또 다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동양의 색과 어둠을 얘기했다. ‘음예예찬’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말한다. 일본인은 원래 외광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의 맛을 선호하고 즐겼다. 거무스름한 그림자. 그게 일본인의 색이라는 거다(혹은 동양의 색이다). 서양식 화장실은 하얀 타일로 바닥을 깔고, 밝은 전등불로 밝히는데 일본의 화장실은 어둡다. 굳이 화장실이 훤히 밝아 민망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좋겠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또한 옻칠한 검은 그릇에 담긴 된장국의 깊은 색을 얘기한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이게 내 ‘색’이다 말하는 색은 부담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듣고 있다. 이 독일 음악보다 내 마음을 움직일 음악은 없을 듯하다. 동서양을 너무 따지면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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