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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자·모자가 함께… 천부가 나란히/3개의 색다른 작품집 화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어머니와 아들이 나란히,그리고 부부가 정답게 호흡을 맞춰 시집과 소설집을 각각 냈다.부자시집,모자문집,부부소설집으로 이름붙은 이들 이색작품집의 발간은 낭떠러지에 서있는 우리시대의 가족윤리를 돌이켜 보게 한다는 점에서 독서가의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다. 「달빛초가집」(지혜의 샘간)은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한시에 아들의 현대시를 한데 모아 엮은 부자공동시집.아버지 고류병열씨는 지난90년 73세의 나이로 작고한 한학자로,평생 2백50여수의 한시를 남겼다.현재 체신부 서기관으로 근무중인 아들 류재영씨(55)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천평시」동인으로 활동해 왔다. 이 시집은 아버지가 남긴 한시를 아들 류씨가 직접 번역한 한시와 류씨의 현대시가 고금의 하머니를 이루며 부자지간의 내밀한 시적 감응을 느끼게 한다.류씨는 『요즘 세상에 누가 한시를 읽겠느냐는 생각에 시집을 낼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아버님의 한시를 한글로 번역해 보면서 아버님이 남긴 시가 곧 아버님의 일생이요,또 생존해 계시는 어머님의 한평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시집발간동기를 밝혔다. 어머니 천정숙씨(48)가 소설을 쓰고 아들 이호준군(25)이 시를 쓴 모자문집 「달팽이의 외출」(미래문화사간)도 아마추어의 글이라는 선입견을 넘어 모자간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아들은 「가라앉는 하루에 목을 내밀고」란 독립된 시집에 22편의 감성적인 시를 선보였다.특히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의 첫소설 「1시간40분」에 대해 천씨의 좋은 이웃이자 중진작가인 홍성원씨는 『발빠른 스피디한 문장에 재치있는 대화처리등이 기성작가의 작품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칭찬했다. 젊은 작가 정지우·서지원의 부부소설집「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부인 정지우씨의 「단상을 읽는 남자」와 남편서지원씨의 「벌레집에서 사는 여자」등 2편의 소설이 실려있다.이 소설은 두 젊은 작가가 부부로 맺어지면서 겪은 동일한 과정과 동일한 소재를 두 사람 나름의 해석과 소설기법으로 달리 쓴 작품.사랑과 결혼이라는 같은 주제를 놓고 남녀가 어떻게 달리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실험적인 작법이 돋보인다.
  • 한문학연구 주도권 뺏긴 중국

    ◎미·일학자들,컴퓨터·현지실사 통행 「삼국지」 등 앞서 중국문화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는 상업주의에 눌려 시들어가고 있는 반면 해외에서는 그 열기가 점점 높아가고 있다. 지난 91년말 한 일본신문이 「지금 세계에 삼국지 열풍이 불고 있다」고 보도한 뒤로 미국에서는 「손자병법연구열」이 불었고 한국에서는 「중의열」,독일에서는 「홍루몽연구열」,일본에서는 「공자연구열」이 고조되는 등 여러나라에서 중국문화붐이 일고 있다. 최근 광명일보는 요즘 중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형세언」이라는 명나라 말기의 단편소설집은 프랑스와 한국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고 보도했다.지난 4백여년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이 작품을 외국 학자들이 찾아냈다는 사실은 이제 외국의 한학연구가들이 중국문화연구에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하기에 족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학자들이 우물속을 벗어나 서구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으로 진출해 그곳에서 익힌 접근방식으로 중국문화를 연구,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진평원의 「중국소설 서사모델의 전변」이나 낙대전의 「비교문학과 중국현대문학」은 서방의 서사학과 비교문학이론을 통해 중국소설을 연구,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히고 있다. 외국에서 중국문화연구에 더러 돌출한 성과를 보이는 경우는 중국에선 구하기 어려운 단 한권(고본)뿐인 자료들을 갖고 있는데 따른 이점때문이다.일본에서의 삼국지 판본연구가 중국을 앞서고 있는 것도 일부 삼국지의 고본들을 일본이 갖고 있는데 연유한 것이다. 일부 중국인들은 서양학자들의 연구환경이 자기들에 비해 월등히 좋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중국학자들은 일본학자들이 개인용 컴퓨터로 일본내 모든 중문소설 정황을 훤하게 꿰뚫어 보고 있고 미국의 한학자들이 사실과 논거의 정확성을 위해 현지실사를 밥먹듯하고 있는 사실을 크게 부러워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한학연구가 고조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내에서는 저조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시장경제 열풍에 휩싸여 이미 이름을 얻고 있는 학자들마저 하해(시장경제에뛰어듦)와 도조(본래의 전문직업을 버리고 다른 직종으로 바꿈)를 서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대학에서의 한학연구를 천직으로 삼겠다는 지망생이 급격히 줄어들거나 아예 지망생이 없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어떤 연구 항목엔 계승자가 없어 학술연구가 중단될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하다. 출판계에도 시장주의가 도입되면서 상업성이 적은 연구성과들은 아무리 훌륭한 업적이래도 책으로 출판되기 어려워 심지어 대만에서 출판되기도 한다.여기에다 연구비 부족,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임금,계속 오르는 책값,최근들어 자료를 보자해도 돈을 달라하는 풍조 등으로 학문열의가 여지없이 꺾이고 있는 것이다. 학계의 뜻있는 인사들은 이같은 현상을 개탄하고 있으나 가까은 장래에 획기적인 개선책이 나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게 중국의 현실이다.
  • 조선 서예 절정기 작품 한자리에/예술의 전당서

    ◎이황·한석봉 등 180명 명품 전시 중국에서 건너온 서예필법이 우리 고유의 예술로 발전,찬란한 절정을 이룬 조선중기의 서예작품들이 이달말 가을 정취 그윽한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일제히 나들이를 한다. 국내유일의 서예전문 전시관인 예술의 전당 서예관이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21일까지 계속하는 「조선중기 서예전」이 바로 화제의 행사. 예술의 전당 미술부가 작년 6월부터 1년5개월여에 걸친 준비끝에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는 퇴계 이황,고산 황기로,원교 이광사,한석봉등 당대의 명필 1백80여명의 작품2백여점이 소개된다. 이중 이황의 「퇴도선생필법」은 보물548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이며 율곡 이이의 「친필서간문」,황기로의 「초서시고액자」,한석봉의 「영낭호첩」등도 보물급에 준하는 희귀자료로 10여점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작가및 작품선정은 국내최고의 한학자 청명 임창순씨(전문화재위원장)와 최완수 간송미술관학예연구실장,한국서예사가 이완우씨(정신문화연구원)등 세명이 맡았다. 전시작은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박물관,성균관대박물관등 공공기관 소장품과 기타 70여명의 개인소장품들로 구성돼 있다. 역사학자들이 규정하고 있는 조선중기는 중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로 건국주체세력인 관학파들이 4대사화를 통해 퇴진하고 향촌사회에서 서원과 향약을 근거로 활동하던 사림파가 정치·사회·문화전면으로 부상하던 시기. 따라서 서예도 초기의 조맹부체가 극복되고 한석봉에 의해 독자적인 석봉체로 개발돼 국서체로 발전한다. 또 17세기 중반에 들면서 옥동 이서­공제 윤두서­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동국진체가 완성돼 조선고유의 서법으로 자리를 잡는다. 주최측은 서예의 이같은 시대적 변화를 쉽게 파악하도록 ▲송설체의 조선화 ▲초서의 명가 ▲석봉체의 형성과 전개 ▲명인들의 시서와 간찰 ▲양송체와 전예의 전통 ▲다양한 서풍의 발전 ▲동국진체의 맥락이란 7개의 소주제로 작품을 분류했다.
  • 「리조실록」 국내서 첫 출간/북한 민족고전연구소서 번역한 전4백권

    ◎여강출판사,북측과 출판권 계약따라 성사 북한에서 번역한 「리조실록」전4백권이 남북간 출판권계약에 의한 최초의 책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여강출판사(대표 이순동)가 「이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펴낸 이 책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1960년대에 착수하여 1991년12월31일 완간한 것. 이번에 전질이 영인돼 나온 것은 이대표가 지난 1992년1월23일 중국에서 이 책의 저작권자인 북한 민족고전연구소 윤춘현부소장과 직접 만나 「리조실록출판권설정계약」을 맺음에 따라 성사됐다. 여강출판사가 지난 7월 북한측과 최종 합의한 「리조실록출판권설정」내용은 1질당 보급가의 10%를 판권사용료로 한다는 것.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용료 지불이 불가능한 점을 감안해 여강출판사가 선임한 변호사가 해당금액을 적립·공증한뒤 지불조건이 마련되는대로 수탁금액을 사회과학원에 입금시키기로 했다. 여강출판사가 이번에 발간한 「이조실록」은 모두 5백질.가격은 권당 2만원씩 한질에 8백만원으로 북한측에 주어야할 저작권료는 4억원에 이르는 셈.출판사측은 현재 북한측과의 계약이행을 위해 우리정부 및 북한측과 다각도의 접촉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남쪽에서는 「조선왕조실록」,북쪽에서는 「리조실록」이라 부르는 이 실록은 조선시대 25대왕,4백72년간의 사실을 1천8백93권,8백88책(태백산본 기준)에 담은 방대한 역사책.남한에서는 아직 전질이 나와있지 않고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분담하여 1995년까지 4백41권으로 완간할 예정이다. 「리조실록」을 번역한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는 1954년 백남운등 역사학자들과 한학자들 중심의 「과학원 고전편찬위원회」로 조직된뒤 1963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편되어 현재 박사 12명과 준박사 50여명등 모두 1백50여명의 연구사가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국내에는 지난해 일본에서 수입된 「리조실록」 10질이 성균관대를 비롯한 각 대학 및 국립중앙도서관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리조실록」은 북한측과 정식계약을 맺은 여강출판사외에도 A출판사가 국립대인 P대에서 유출된 원본을 영인한 복사판을 곧 시판할 예정으로있어 북한원전에 대한 저작권논쟁을 한바탕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인”“중국인” 논쟁(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15)

    ◎평남덕흥리 고적 묻힌 「유주자사 진」/“유주는 북경일대… 4C 고구려가 지배”/북한학자/“채색벽화 중국설화 표현… 중국인 분명” 중·일 학자 4세기 후반 고구려가 국토를 크게 넓혀 북경을 포함한 중국 동북부 일대를 지배했었을까.한국과 중국 양쪽의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같은「사실」이 한 무덤의 발굴을 계기로 학계에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76년 평남 남포시 강서구역(옛 강서읍)덕흥리 무학산 기슭에서 발굴된 덕흥리고분은 찬란했던 고구려의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었다.전실과 후실 2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이 석실분은,무덤 입구의 길인 선도(연도)와 내부통로인 묘도의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채색화가 그려진 벽화고분이기도 하다. 벽화는 무덤의 주인인「유주라사 진」이 유주소속 13개 군 태수로 부터 문안을 받는 장면,소수레에 탄「진」이 말탄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관내를 행차하는 장면등을 포함하고 있다.또 그의 일대기를 적은 묘지명등 6백여자의 먹글씨가 발견돼 4∼5세기를 걸쳐 살았던 한 인간의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진」은 □□(판독 불가능 글자)군 신도현 사람으로 건위장군·국소대형·요동태수·동이교위·유주자사등을 지낸 뒤 영락18년(광개토대왕 18년,408년)에 죽었다. 이같은 묘지명의 내용 중에 특히 관심을 끈 것이 그가「유주자사」를 역임했다는 부분이다.고구려 고분에 묻힌 인물이 유주를 관할하는 자사를 지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현재의 북경일대인 유주를 지배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학설은 고분을 발굴한 북한에서 처음 나왔다.79년 북한학자 김용남은 논문을 통해▲신도현이 현재의 평북 운전·박천일대이며▲「진」이 역임한 관직이 모두 고구려의 벼슬이름 이므로「진」을 당연히 고구려 사람으로 보았다.그는 따라서『전연이 멸망해 북중국 일대가 혼란에 빠진 370년 무렵 고구려가 서쪽으로 진격해 유주를 점령,13군 75현을 두었으며 이때 진을 유주자사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나왔다.김원용박사는「진」을 고구려사람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추정했다.그의고향인「신도」를 고구려의 땅이름으로 본 것은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 하북성에 같은 지명이 있는만큼「진」은 중국인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그는『진은 중국 왕조에서 유주자사까지 지낸 고위관리였으나 뒤에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논쟁은 결국「진」의 국적이 어디인가로 바뀌었다.그가 속한 나라가 곧 유주를 지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학계는 이후 ▲무덤이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라는 점 ▲묘지명에는 유주에「13군 75현」을 두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중국 왕조중에는 이처럼 군을 구성한 적이 없다는 점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83년부터는 중국 학계가,87년부터는 일본 학계가 논쟁에 가담해 한국 학계와 함께 일제히「진=고구려인」설을 부인했다.이들은 고구려의 유주점령을 기록한 역사서가 일체 없는데다 벽화 내용이 주로 중국의 설화들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양쪽의 주장은 여지껏 팽팽히 맞서 있다.그러나 만약「진」이 중국인임이 밝혀진다 해도,그를 받아들여 호사한 무덤을 꾸며주었던 고구려의 국력과 관대함은 더욱 돋보일 뿐이다.
  • 우이동 시인 동인시집 잔잔한 화제 모아/「구름한점 떼어주고」

    ◎이생진·임보 등 4인의 개인·합작시 수록 북한산자락이 좋아 우이동에 사는 시인들의 동인시집 「구름한점 떼어주고」(작가정신)가 화제다. 우이동연작 13번째인 이 시집은 중견시인 이생진,채희문,임보,홍해리등 4명의 시가 실려 있다.세칭 「우이동시인들」로 통하는 이들의 시낭송회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열린다.멤버는 이들 4명이외에 박희진,김동호,정성수,오수일,한영옥,구순희시인과 서강대 성염교수부부,명지대 이용남교수,한양대 윤석산교수,한학자 오세용,박흥순화백,대금연주자 송성묵씨등이다.객원시인들이자 문우들인 셈이다. 『우이동에는 백운대보다도 키가 큰 사람들이 넷이나 산다/이들 네분 만나기만 하면/우이동 선이천까지 갈것 없다….이생진,채희문,임보,홍해리/그들의 눈은 하늘에 있고/그들의 귀는 땅속에 있다』.이무원시인의 시 「우이동」은 이 모임의 분위기와 4시인의 위인됨을 잘 전달해준다. 이번 시집에는 「북한산진달래」라는 합작시가 실려있다.『착각은 아름답다/착각때문에/봄이 일찍 오는 수가 있다/그럴때마다 나는/진달래 꽃봉우리를 만져 본다…』.한사람이 한연씩 지어 모두 4연으로 이뤄진 이 시는 각각의 개성이 따로 꿈틀대지만 20년 넘게 어울린 사람들답게 한편의 독립시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생진시인의 시작노트에는 『20년 넘게 북한산을 오르내리며 시를 써왔다.내집가까이에 북한산이 있고,그 주위에 시우가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그래서 나는 더 많은 시를 쓰게 된다』고 적혀있다.그의 표제시 「구름 한점 떼어주고」를 옮겨 본다. 『내 발이 종로로 향하면/나는 수백만의 인구와 부딪치게 되고/내 발이 우이동으로 향하면/내 인구는 단 하나/그때 나는 수목으로 빈 자리를 채우고/구름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구름도 먹어버릇하면 배부르다/구름만 먹고도 하루를 지낼 수 있는 나/나는 남모르게 행복하다/누가 따라올까 겁이 난다/내 행복과 그의 행복이 다르기 때문/구름 한 점 떼어주고 달랠 수 있다면 몰라도/따라오지 마라 구름 한 점으론/실망할 거다』.
  • 「생명문화연」 소장직을 떠나며 정의채 신부(인터뷰)

    ◎“인명 존중의식 확대돼 기뻐”/서강대 석좌교수로 연구 계속할터 『이제 생명의 개념이 사회전반에 어느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봅니다.건강도 좀더 돌보고 연구에도 전념할겸 연구소장직을 떠날까 합니다』 오는 26일 「사회적 환경과 생명」세미나를 끝으로 서강대부설 생명문화연구소 소장직을 떠나는 정의채신부(68).그는 『지난 91년말 연구소가 출범하던 당시의 사회는 몇년 내리 발생한 어린이 유괴사건,잔악한 살인사건,낙동강 페놀사건등 생명파괴행위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그러나 다행히도 생명문화연구소가 생명이 인간 최고의 가치임을 지향해오는 동안 유괴살해사건과 잔혹한 행위등이 많이 사라져 큰보람을 느낍니다』라고 술회했다. 『더욱이 이제는 범학문적 범종교적 범민족적으로 자연보호와 생명존중에 대한 국민의식 변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그는 사임후에도 연구소 상임고문으로,또 서강대 석좌교수로 남아 연구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카톨릭대를 나와 로마 올바노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한학자신부로 서강대교수·카톨릭대학장등 학문의 길과 불광동성당·명동성당 주임신부등 성직자의 길을 함께 추구해왔으며 「생명연구」「형이상학」「중세철학사」등을 비롯,많은 저서를 갖고 있다. 『건강을 다시 추스려 원래의 전공인 철학연구에 더욱 매진할까 합니다.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저서를 번역하는등 할일은 많습니다』
  • 서예가 조병호옹 10억원 대학기증

    【대전】대전지역 원로 서예가이자 사학자 겸 한학자인 정향 조병호선생(80·대전시 서구 정림동)은 3일 하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고서 1천여권과 부동산등 10억여원대에 이르는 전재산을 대전대에 기증했다.
  • 북한의 핵개발 능력/박군철 서울대교수·핵공학(굄돌)

    지난 3월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이후 그간 계속되어온 핵개발의혹이 가시화되고 있다.또 북한이 플루토늄 추출의 인정과 더불어 IAEA에 제시한 파손핵연료의 샘플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극히 소량이 아닌 보다 많은 양의 플루토늄이 추출되었음이 판명되어 북한이 대량의 플루토늄을 생산,은닉하고 있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독일 슈테른지는 KGB 보고서를 인용하여 북한이 구소련으로부터 56㎏의 풀루토늄을 밀수입한 것으로 보도하였다.어쨌든 영변에 있는 5Mw급 실험로가 86년부터 90년까지 정상 운전되었다고 가정할때 추출가능한 플루토늄양을 토대로 수 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원료는 확보하고 있다고 예상하고 있다.그러나 궁극적으로 과연 북한이 이 플루토늄으로 핵폭탄을 제조하였는지 혹은 제조할 능력을 갖추었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이다.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다 과학적으로 그들의 제반 원자력산업 기술수준을 파악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기술 및 학술적 정보가 거의전무하고 관련기관들도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정보수집 및 분석은 하지않고 IAEA나 미국이 제시해주는 자료나 피상적인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따라서 일반적인 자료와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판단할때 그들의 핵개발능력에 대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첫째 긍정적 측면으로는 우선 그들이 재처리기술 및 플루토늄을 확보함으로써 폭탄의 원료를 보유하고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사회주의적 접근방식외에도 수박과 같은 구소련의 연구소체제 아래 십수년간 북한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상당한 기술을 확보하였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전쟁용 무기는 원료와 이론만으로는 실용화될 수 없다.비록 제조되었어도 실험으로 입증되어야 하고 그리고 무기로서 취급·보관·수송등 여러가지 제반기술이 확보되어야 한다.이러한 제조를 포함한 모든 기술의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중국의 핵개발역사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같은 양측면을 보다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북한 기술정보 수집과 전문가그룹의 체계적인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또 핵사찰이란 정치적 수단도 좋지만 상호 학술교류가 추진되어야 할 것이고 이를 토대로 어쩌면 나아가 휴전선부근에 공동으로 원자력발전소 건설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율곡선생 마음이 편찮겠다(박갑천칼럼)

    사람에 따라 이름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경우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첫째는 글자(한자)가 어려운 경우이다.가령 김양씨를 보자.한학자 할아버지가 어려운 글자 「양」(당노양)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불러주는 사람들은 『김양씨!』하지 않고 『김석씨!』한다.「석:주석석」자로 생각한 때문이다.하건만 신문의 인사이동란 같은데를 보면 어려운 자들이 적지않다. 둘째가 동명이인의 경우이다.한글 아닌 한자로까지 똑 같은 이름의 사람은 대단히 많다.참고삼아 전화번호부에서 「김순자」를 한번 찾아볼 일이다.전화번호부가 그럴때 거기 실리지 않은「김순자」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그 많은 동명이인이 하나같이 좋은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지금 진행되고 있는 사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름이 같아 피해를 보는 사례가 생겨나는 것도 그것이다.대학부정입학 학부모의 이름과 같아서,혹은 비리와 관련된 별자리의 이름과 같아서 한바탕 웃음거리로 되기도 한다. 셋째가 괴상한 이름의 경우이다.지난해 여름 수원지방법원에 개명허가원을 낸 이건달·박공순씨의 경우,하필이면 건달씨는 무직이고 공순씨는 S전자 공원이었다.그뿐이 아니다.90년 대법원이 펴낸 개명허가 사례집 가운데는 정말로 희한한 이름들이 보인다.­조지나,김동태,방구석,김치국,지기미,한시만…등등.이들은 물론 이 이름들 버리고 새 이름으로 새 생활을 시작한다. 율곡은 우리가 두루 알고 있듯이 조선조의 거유 이이의 호이다.그는 이 호 때문에 지금 지하에서 속이 상해 있을 법하다.그가 전에 지하에서 속상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타계한지 1년후의 어느날 임금이 대사헌 구봉령에게 말한다.『세 신하(박근원·송응개·허□)가 이를 거간이라 했는데 과연 그런가.바른대로 말하라』.이때의 대답이『이가 비록 간사하지는 않으나 본래 경솔한 사람입니다.자신의 의견만 옳다하고 남의 말은 듣지 않으니…』.거기에 영의정 노수신까지 가세한다.『이는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기를 좋아했으며 문장에는 힘을 다하지 않았건만…』(김시량의 「자해필담」에서). 지금 속상하는 것은 그때와는 다르다.「율곡사업」운운하면서 그의 호가 비리와 관련되어 들먹여지기 때문이다.그옛날 율곡이 제창했던 10만양병론을 기리면서 붙여진 「율곡사업」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하건만 잘못된 운용으로 말썽이 되면서 지하의 거유 마음을 편찮게 하고 있구나.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3)

    ◎매신의 인걸들/선각자들 결집… 「국권회복」 구심체로/영국인… 일제탄압에 울타리역할/배설/총무 맡아 항일논조 사실상 주도/양기탁/박은식·신채호는 주필로 민족자부심·독립정신 고취 대한매일신보가 민족의 대변지로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 신문에 관련 또는 종사했던 사람들의 면면인데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어 매우 다채로운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신문을 이끈 주역은 영국인 사장 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논객이자 사학자이며 항일투사였던 국내 인사들로 돼있다.배설(Ernest T Bethell)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시 북부 애쉴리에서 태어났다.극동상대의 무역상이던 토머스 헨콕과 전도사의 딸인 마서 제인 홀름의 다섯 남매중 장남으로 브리스톨의 머천트 벤처러스스쿨을 나왔다. 이 학교를 졸업한뒤 열다섯살 때인 1888년 일본에 건너와 1904년초까지 16년동안 고베(신호)에 살면서 무역업에 종사했다.1899년에는 동생들과 함께 「베델 브러더스」라는 무역상을설립했다.이 회사는 지금도 런던에 있다.어떻든 배설은 한때 돈을 많이 벌어 러그(rug·깔개)공장을 차리기까지 한것을 보면 사업수완이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인들의 방해로 실패,재산을 모두 날렸다.졸지에 삶의 기반을 잃게 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대로 늘 활달한 쾌남아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수영 크리켓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 음악에는 타고난 감수성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체계적인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청중들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부를만큼 빼어난 가창력도 지녔다. ○늘 활달한 쾌남아 서양장기를 잘 두었으며 술과 담배 또한 즐기는 편이었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문장력도 여간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학력은 비록 고졸에 그쳤으나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재능과 기질은 언론인으로서 훌륭한 잠재력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이윤추구가 최대의 목표인 무역업보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창의성을 발휘,정치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업인 신문발행이그에게는 적격이었던 셈인지도 모른다. 그가 언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러그사업에 실패한 직후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온 것이 계기가 됐다.그리고 그는 불과 4개월 1주일만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할 수 있었다.배설의 언론입문은 그의 자질이나 성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당시 한국의 실정 역시 배설과 같은 언론인을 절실히 필요로 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양기탁을 만나 대한매일신보의 견본판 「양자신문」을 만들기는 1904년 6월29일이었으며 실제로 신문을 창간하기는 20일 뒤인 7월18일이었다.그로부터 1909년 이 땅에 뼈를 묻히기까지 줄곧 한국인의 편에서 일제에 맞선 항일언론의 선봉장으로 또 신보를 이끌고 지킨 울타리 역할을 다 해냈다. 배설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양기탁은 신보를 떠받친 기둥이요 대들보로 비유해도 좋다.그는 신보사의 전무와 주필 그리고 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인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일논조를 사실상 주도한 신보의 분신이었다. 양기탁은 호가우강으로 1871년 4월2일 평양태생이다.배설보다는 1년7개월 먼저 태어난 셈이다.부친은 한학자로 그 지방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양시영이었다.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사람됨이 매우 총명하여 보기드문 소년 문장가로 꼽힐 정도였다. 그가 서울에 오기는 배설이 일본에 갔던 같은 나이인 15살 때였다.상경직후 동학및 유림의 명망가이자 우국지사인 나현태를 알게 됐다.이후부터 여러 우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애국사상에 감화를 받게 되었고 동학당과도 관계하면서 견문과 사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외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되던 국내외 정세에 영향을 받은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반년동안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따라서 그의 지식과 사상은 어려서 배운 한학의 토대위에 양학문과 기독교 정신이 접목된 것이 아닌가 한다.또 동학과도 관계함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일제의 가슴에 예리한 비수를 들이대는 듯 했던 신보의 반일논설 필봉은 그의 이런 사상과 학식에 바탕한 것이다. 그는 한때 부친과 함께 캐나다의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이 한영사전은 1897년 6월에 출판됐는데 인쇄소는 요코하마에 있는 복음인쇄합자회사였고 발행소는 서울야소교서회로 되어 있다. 그는 신보를 이끈 항일지사형 언론인의 전형적 인물이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그 총감독으로 활동한 바도 있으며 나라를 빼앗긴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일제에 대항케한 열혈투사이기도 했다.여러차례의 옥고끝에 만주로 도피한 그는 상해에서 광복운동에 종사하던중 1933년 김구에 의해 법무담당 국무위원에 임명,1년4개월간 재임했다.강소성 담양현에서 그 파란의 삶을 마쳤는데 그 해가 1938년이다. 백암 박은식은 황해도 황주태생의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본래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이 신문이 정간된 뒤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겨 정력적인 항일언론 활동에 나섰다. ○신민회에도 참여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 원로회원으로서 교육 및 출판부문을 담당하기도 한 그는 신보를 통해 주로 애국계몽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신교육구국사상·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 애국계몽사상을 설파,국권회복운동을 적극 고취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한일합방뒤에는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한편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많은 역사 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박은식의 뒤를 이어 신보의 주필로 활동한 단재 신채호는 충남 대덕출생으로 명성 높은 사가였다.역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가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민중계몽 및 정부편달 중심의 시론과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3대충노」「이십세기 신국민」「서호문답」「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등의 논설과 「독사신론」「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등 역사관계 논문및 시론등을 연재,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신민회조직에 참여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했다.한마디로 그는 신보의 국권회복운동을 이끈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구축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이밖에 대한매일신보를 이끌어온 사람들로는 임기정 이교담 옥관빈 강문수등이 있다.이들은 주로 업무분야 종사자들로 신보의 조직을 통해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사람들이다.
  • 중진서예가 여원구씨 회고전

    ◎서예 70·도서각 50점 등 3백여점 전시/반야심경인존·구당인존 2권도 발간 회갑을 맞은 중진서예가 구당 여원구씨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망라한 대규모 회고전을 20일 조선일보미술관(723­ 6328)에서 열고 있다. 26일까지 열리는 이 회갑전에 출품작품은 서예 70여점,도서각 50여점,전각 2백여점등 자그마치 3백여점.아울러 3백쪽에 이르는 기념서집과 반야심경인존,구당인존 2권을 함께 발간했다. 한학자인 선친 여운필선생으로부터 한문과 글씨를 익힌 그는 오랜 세월을 보내고 40대에 들어서 여초 김응현선생을 만나 다시 글씨를 배웠다.그러나 동아미술제,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수상등의 화려한 경력을 거칠 만큼 늦 경지를 닦았다.지난 89년부터 91년까지 3년간은 한중 서법교류전의 한국대표로 중국에도 작품을 발표,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에게는 「외화를 즐기지 아니하고 진률을 추구하는 서가로 호방한 필법에서 우러나는 천의무봉의 경지를 보인다는 평이 따라 붙는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장,서울서예대전 초대작가 선정위원 등을 역임했고,현재는 한국전각학회와 국제서법예술연한,동방연서회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예술의전당과 덕성여대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개인적으로 양소헌서회를 운영해 왔다.
  • 남북한학술교류 가능성 타진/민간교류추진협,오늘 학술토론회

    ◎“외국 한국학학자·북학자 연합학회 설립” 제안 핵문제와 남북화해 및 교류에 관한 기본합의서의 부속합의서 채택문제로 제동이 걸린 남북한 관계를 민간학자들과 전문가들의 교류증대를 통한 개선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학술토론회가 열린다. 남북민간학술교류추진협의회(공동의장 이상수 김계수)는 오는 29일 숭실대에서 협의회소속 90개 학술단체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한 학술교류 가능성모색과 우리의 대응자세」라는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갖는다. 이는 특히 지난 24일 북한의 조선역사학회가 한국역사연구회측에 을사5조약등 일제가 허위조작한 한일관계 조약들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남북역사학자회담을 제의해 온데 대해 정부가 이에 앞서 당국간 「남북합의서」부속합의서 채택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회담의 성사가능성이 불확실한 시점에서 열려 더욱 관심을 모은다. 이번 학술토론회에 참가하는 전득주교수(숭실대·한국미래연구학회회장)는 「남북한 학술교류와 학자들의 자세」라는 발표문에서 『정부당국자간의 문제해결이 난항에 부딪쳤을 때 학자나 전문가의 교류는 오히려 쌍방 정부당국자에게 보다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북한학자들로 하여금 개방화·자유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면서 『그러나 정부의 창구단일화정책은 남북한 학술교류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이럴 때일수록 학자들에 대한 정부의 신뢰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전교수는 또 남북학자들의 직·간접적인 교류를 제도화하기 위해 재외 한국학 학자및 북한학자들과 함께 세계한국학연합학회(가칭)등의 설립을 제안한다. 한편 「남북한 학술교류에 대비한 국민의식과 태도」라는 발표문에서 신윤표교수(한남대)는 지난 88년부터 91년까지 일본·중국등지에서 열린 남북한학자들의 학술회의 특히 국제고려학회의 성격과 활동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신교수는 지난 90년 8월 일본 오사카에서 창립총회를 가진 국제고려학회는 한국학의 주체는 남북한인 만큼 현재의 일본과 중국학자중심의 학회운영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정부예산사업으로 국제고려학회의 남북한 개최유치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교수는 또 남북학술교류에 대비해 우선 오는 8월19∼23일 중국 북경에서 열리는 학술회의 및 총회에 남한학자들의 개별참가보다는 단체참여를 유도하고 북한이 94년도에 국제고려학회를 개최할 경우 93년 지역총회를 서울에서 준비하거나 평양대회준비에 국제고려학회 임원으로 참여해 남북이 공동협의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신교수는 이어 국내학계도 연합학회적인 체제를 갖춰 정기적으로 남북민간공동체의 공동연구과제를 모색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한국학 연구가 가능하도록 협조하며 중·장기 남북공동체 이해사업계획을 세워 남북학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한편 외국학자 및 유학생들의 한국학연구를 적극 지원할 수 있는 상설기구를 설치,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요청된다고 강조했다.
  • 연변교포에 농업기술 가르친다/서울대농대·한국과학재단·사업계획 확정

    ◎벼육종학자 허문회박사등 7월초 파견/신품종 개발위한 연구농장도 운영계획/가을엔 공산권교포 농업학자 초청 심포지엄 개최 한국과 중국 조선족간 농업기술을 서로 교환하고 공동연구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북방산업 개발계획」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농업생물신소재 연구센터(소장 박관화교수·식품공학)는 2일 한국과학재단(사무총장 권원기)과 함께 「북방농업 개발 및 연구협력계획」을 확정,오는 7월부터 연구원교류를 시작하는등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센터내 특수사업부(부장 부경생교수·응용곤충학과) 주관으로 이뤄지는 이 사업은 우리나라의 발달된 농업기술을 연변조선족 연구기관에 이전,우리교포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하는 한편 우리측도 중국측의 협력으로 현재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농업 유전자원의 부족과 연구농장 및 기능인력 부족현상을 해결하는 두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국내에서는 연구센터에 소속돼 있는 서울대 경북대 등 9개 농과대학이,중국측에서는 연변농학원(원장 장기건,중국의 학원은 우리의 단과대학에 해당) 및 연변농업과학연구소(소장 장창식) 등 2개 연구기관이 각기 사업에 참여한다. 부경생교수는 『중국 연변의 조선족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연변농학원등 교육연구기관의 인력도 80% 이상이 조선인이지만 농업기술 수준은 매우 낙후된 실정』이라고 밝히고 『이에 따라 우선 연변측에 시급한 내냉성벼 육종기술과 담배건조기술을 1차 공동연구사업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월 서울대 농대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벼육종학의 대가 허문회박사가 7월1일부터 1개월간 서울대학을 찾게 된다. 연구센터는 이와 함께 북방지역의 한민족 농업과학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국제심포지엄도 계획중이다. 올 가을이나 겨울,연변이나 서울에서 중국은 물론 내몽골 옛 소련의 교포농업과학자와 북한학자들까지 초청하는 대규모 학술교류행사를 갖는다는 것이다. 센터측은 이밖에도 중국에 공동시험연구농장을 건설,종자채취등을 위한 작물의 위탁재배와 공동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공동연구과제도 벼 콩옥수수 등의 품종육성과 과수·채소·약용식물 등의 개발을 위한 유전자도입,생물농약 및 백신개발을 위한 유전자원탐색 등으로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연구센터는 또 생물자원의 보고로 알려진 백두산의 중요한 동·식물을 수집,유지 증식시키기 위해 동·식물원의 개설과 운영도 추진하고 있어 공동연구사업이 계획대로 실현될 경우 국내 농산자원의 다양화 및 개발·이용에 커다란 기여가 기대된다.
  • 청백리의 귀감 이호종 청양군수(이런 공무원)

    ◎「정년군수」 전재산이 달동네 13평 집/민원인이 놓고간 쇠고기 문밖에 매달고/직원 숙소 현관서 청탁막아 「문지기」 별명/결혼 축의금도 돌려보내는 “결벽”… 가족들이 토끼 길러 생계 보태 「청백리」 예부터 이들이 많으면 국운이 성했고 적으면 그렇지 못했다. 한결같이 이들은 국가를 지탱하는 동량으로 국난을 타개 했으며 국민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인공위성이 날고 달을 정복한지도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들을 국가는 원하며 상을 내리기도 한다. 「깨끗해야 백성이 따른다」는 이치를 단지 「모든일을 내집일 같이 하되 신세는 지지 않는다」는 소박한 신조로 실천해온 오늘의「청백이」는 천안에서도 승용차로 족히 2시간은 가야하는 내륙의 오지인 충남 청양군에 있었다. 이호종청양군수(59)는 단벌 양복을 5∼6년씩 입으며 한때는 점심을 소금밥으로 대용하는등 근검 절약하는 내핍생활을 해오면서도 그동안 31년간의 공직생활중에서 주위의 유혹에 한눈판 일 없이 오직 「정의」로만 봉직해온 공무원이었다. 그는 지난달에 퇴직원을 내놓았다.면사무소 서기보로 출발해 군수자리까지 올라봤으니 여한이 없다고 했다.그의 전재산은 대전시 중구 대사동 산중턱 달동네에 있는 13평짜리 집이 고작이다. 『공무원은 주민을 위해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어야지요』그는 공무원이 청빈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공무원의 기본자세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군수의 이런 자세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신조를 귀감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는 도시락을 싸오거나 아니면 반드시 청내식당을 이용한다. 공무외에는 관용차를 절대로 타지 않았고,대전시청과 충남도청에 근무할 때는 버스타기도 꺼려 대사동 집에서 꼬박 30분을 걸어 출퇴근했다는 것이 주위의 이야기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4명의 누이동생을 출가시켰죠.아들 두명은 대학을 나와 결혼해 잘 살고 있습니다.남들은 박봉이라 할지 모르지만 국가에 봉사한 만큼의 월급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어요.공무원의 의무는 무한정합니다.그렇다고 남의 신세를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신세안지기 신조로 한때는 「결벽증」이 심하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했다. 공무원의 의무가 무한정하다는 말은 지나온 그의 발자국을 조명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40여차례에 걸친 전보 또는 승진발령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발령사실조차 주위에서 알려줄 정도로 무관심했다고 한다. 언제 어떤자리로 옮겨가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가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지난 84년 대전시 감사실장에서 충남도 감사담당관으로 발령을 받았었습니다.감사실장은 지방서기관이고 감사담당관은 국가사무관으로 강등이 된 셈이었지요.그래도 저는 그 자리로 기꺼이 갔습니다』 꼭 자신이 적임자라서 불렀다면 오히려 보람있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했다.사실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감사·기획·예산·법무계통의 자리에 오랜기간을 있었다. 『공직생활 자체가 보람이었지만 굳이 보람된 일을 꼽으라면 아산군수 시절 군청사를 새로 지어 옮긴 것입니다』 구청사를 팔 때는 일부업자로부터 「싸게 팔면 거액을 건네주겠다」는유혹도 있었지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6개월간 업자들과 승강이를 벌인 끝에 예상가격보다 5억원을 더 받아 냈다.당시 이 일을 놓고 「관청이 도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감사관 시절에는 직원들의 숙소 현관 옆방을 차지하고 외부인들의 청탁을 막아내 「문지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가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4명의 여동생과 두아들을 결혼시키는 동안 단한차례도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사실도 그의 곧은 성품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대목이다. 지난 70년 논산군 감사실장시절 둘째누이를 결혼시켰을 당시 유일하게 동료직원들이 참석했는데 그때는 신랑측에서 보낸 청첩장을 보고 왔으나 이들이 낸 축의금은 곧 돌려 주었을 정도였다. 충남지방공무원 교육원장으로 있던 지난해 3월 맏아들 결혼식 때였다.교육원 간부 한명이 이를 알고 「동료직원만이라도 참석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그러면 날짜를 바꾸겠다』고 해 직원들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행사를 치르고 나면 그는 꼭 부하직원들을 집으로 불러 평소 때처럼 저녁식사를 함께 해오곤 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건은 두차례의 「고기 소동」이었다. 처음은 부인 신부희씨(53)와 결혼한지 채 몇달도 되지않았던 60년의 일이었다.동료 2명이 결혼축하차 쇠고기 두근을 사들고 갔다가 부인 신씨만 있어 고기를 건네주고 그대로 돌아갔다.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군수는 신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크게 꾸짖었다. 이를 본 주위사람들이 『너무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는 『앞으로 오랜기간 공직에 머무를 텐데 지금부터 집사람을 바르게 살도록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랬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공주군청 행정계장으로 있을 때의 「고기소동」이었다.그때도 누군가가 쇠고기 두근을 집으로 전달했다.부인은 한번 혼난 일이 있어 되돌려주려 했으나 고기를 갖고 온 사람이 그대로 가버려 돌려 줄 수가 없자 대문기둥에 이틀동안이나 매달아 놓았다.결국 고기는 썩어 못먹게 되었고 이를 안 동료들이 이웃집에라도 주지 그랬느냐고 하자 『어떻게 옳지 못한 뜻을 남에게 전해주느냐』고 했다는 것이다.이밖에 한 여직원이 이군수가 떨어진 양말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양말을 선물했다가 돌려 받은 일등 그의 신세 안지기 일화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제가 오랜 공직생활동안 한결같이 자세를 흐트러 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집사람,그리고 두아들과 딸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어려운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토끼를 길렀고 두아들과 딸은 집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 스스로 「서울 유학」을 포기하고 가까운 충남대학에 진학했다. 『공무원은 언제나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래서 틈만나면 「독행불책영 독침불책금」이라는 한학자 김집선생의 말씀을 후배공무원들에게 말해주곤 합니다』 공무원은 혼자 가더라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혼자 잠을 자더라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후배공무원들에게 꼭 남겨주고 공직을 떠나겠다는 그에게서 자랑스런 공무원의 참모습을 보았다.
  • 남북 전자공학 관계자/연길서 첫 대좌

    ◎1백여명,전자정보통신학술대회 참석 남북한 전자공학자와 산업계인사 1백여명이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하는 대규모 한민족전자공학학술대회가 19일부터 23일까지 중국 연길시에서 열린다. 「91국제전자정보통신학술대회(ICEIC91)라 명명된 이 학술대회는 중국 연변대학이 주최하고 대한전자공학회(회장 임제탁·한양대전자공학과교수)및 연변 자동화연구소·전자공학연구소가 공동후원하는 형식으로 돼 있으며 소련 미국 일본등의 교포학자들도 다수 초청돼 총 94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특히 이번대회에는 김용열(김일성대학) 홍기태(과학원) 소종식(김책공과대학) 강민기(자연과학대학)교수등 북한학자 11명이 처음으로 참가,컴퓨터시스템,전자교환기분야등에서 9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5개분과에서는 남한측 학자들과 나란히 공동좌장도 맡게 된다. 이번대회에서는 또 남한측에서 최상규 금성사상무,권승한 삼성전자상무,오계환 현대전자전무등 업계관계자가 별도로 마련된 「산업」분과에 참가,각 전자업체 현황을 소개하도록 돼 있어 주목된다.
  • 고 김종무씨 빈소 조의

    노태우대통령은 14일 하오 원로한학자 김종무박사 빈소에 관계비서관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 북한,서울학술대회 20명 파견/평양방송 보도

    ◎새달 21∼24일 철학자회의 첫 남북학술교류 성사 남북한간의 쌀직교역에 이어 학술부문에서의 남북 직교류가 이뤄지게 됐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27일 방송보도를 통해 오는 8월21∼24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한민족철학자대회」에 학자 10명을 포함한 20명의 학자대표단을 8월20일 서울로 파견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북한방송은 또 이같은 내용을 담은 편지를 오는 30일 판문점을 통해 한국측에 전달할 계획이며 북한은 서울로 파견될 학자대표단에 대한 신변안전보장각서와 이들에 대한 편의제공을 한국측에 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관계당국은 북한은 이날 하오 북한적십자회 리성호위원장대리 명의의 전화통지문을 김상협대한적십자사총재 앞으로 보내 『사회과학원 김창원 철학연구소장의 요청에 따라 서울대 소광희교수(한민족철학자대회 준비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30일 상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전달하겠다』며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한편 소교수는 한민족철학자대회에 북한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관계당국으로부터 북한주민접촉승인을 받고 지난 2월 사회과학원 박창곤부원장,사회과학원 김창원철학연구소장,주체과학원 리성갑연구소장등 10명의 북한학자들에게 방한초청장을 보냈었다고 말했다.
  • 북한학자 19명 초청/대북 접촉신청 승인

    정부는 27일 연세대 손한교수(국제한국어 교육회장)가 향가연구의 대가로 알려진 홍기문 북한 사회과학원 부원장(월북작가 홍명희의 장남)과 46년 월북한 원로 언어학자 김수경(현재 북한 인민대학습당 운영방법연구실장) 등 북한학자 19명을 초청하기 위해 낸 북한주민접촉 신청을 승인했다.
  • “「팀스피리트」훈련 관계없이 북,새달 총리회담 참가”

    ◎LA 학술회의 참석 북한학자 밝혀 【로스앤젤레스 연합】 북한의 남북문제담당 고위책임자 중 한사람인 군축 및 평화연구소 김병홍부소장(55)은 22일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과 관계없이 오는 2월 예정된 남북 총리회담에 참가할 것이며 좀더 신축적인 자세로 통일을 위한 대화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사아학회 주최로 UCLA에서 이날 저녁 개최한 학술회의 참석차 로스앤젤레스를 방문중인 김부소장은 연합통신 특파원과 가진 단독인터뷰에서 『남북한이 금년 안에 하나의 통일방안을 정하고 오는 95년 이전에 통일을 이룩해 분단 50년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는 2월 평양에서 열기로 예정된 제4차 남북 총리회담에서 북한이 신축적인 자세를 보일 것이라면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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