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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고학 100년 ‘苦·苦’한 민낯

    고고학 100년 ‘苦·苦’한 민낯

    1880년 중국 지린성 지안현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을 시작으로 1980년 경주 황룡사 터 발굴까지 100년에 걸친 우리나라 고고학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나왔다. 국내 대표적인 고고학자인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펴낸 ‘한국 고고학 백년사’(열화당)는 안타까움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고고학의 민낯을 드러낸 최초의 자화상이다. 지 전 관장은 2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고고학 100년사 중 무려 3분의2인 65년을, 일본이 주도한 식민사학과 대동아공영의 야심을 위해 자행했던 금석학적 자료를 통한 견강부회식 해석과 접근 방식을 우리 고고학의 첫 반열에 올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으로 동북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인 광개토대왕비의 역사 왜곡까지 우리 근대 고고학에서 제외할 수 없는 게 엄연한 역사적 현실임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한탄이다. 실제로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문 내용의 ‘사카와 탁본’을 토대로 일본이 과거에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고 여전히 주장하며 교과서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지 전 관장은 개인적으로 1971년 초급 학예사로 직접 참여했던 백제 무령왕릉 발굴을 고고학의 부끄러운 지점으로 꼽는다. “1박 2일 만에 발굴을 마쳤어요. 아무 사전 준비 없이 마구 파내려 가다 발굴 현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금붙이와 유물들이 발견되니 모두 우왕좌왕 허둥대다가 다시 덮었어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발굴이었죠. 정말 부끄럽지만 무령왕릉 발굴의 쓰디쓴 경험이 바탕이 돼 경주 천마총 발굴이 가능했습니다.” 현재까지도 무령왕릉 발굴은 묘실 개봉에서 유물 수습까지 보존 처리도 하지 않은 채 단 17시간 만에 끝낸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악의 발굴로 회자되고 있다. 그를 아프게 한 발굴 현장은 최근까지도 반복됐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인근 지역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거의 이뤄지지 못한 채 졸속으로 종결됐다는 게 그가 지켜본 4대강 사업의 발굴 현장이었다. 지 전 관장은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 위원으로 발굴을 지도했지만 위에서는 ‘무조건 빨리 끝내라’고 연일 독촉했다. 정말 냉가슴 앓듯이 발굴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친 현장이 적지 않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리 고고학의 정착기(1971~1980)로 정의한 시점 이후 아파트와 고속도로 등이 마구잡이로 건설되면서 국내 발굴 역사의 상당 부분은 ‘구제 발굴’에 그쳤다. 실제 고고학적 업그레이드가 될 수 있는 순수 ‘학술 발굴’은 거의 실종됐다고 그는 전한다. 지 전 관장은 “젊은 시절부터 고고학사 책을 써 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면서도 이 책을 내기까지 10여년이 넘게 걸렸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고고학 발굴 기록부터 북한, 일본, 유럽 등에서 문헌 자료를 수소문하고 모으는 데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인 중공 시절에 입수한 북한 고고학 자료들의 경우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기 위해 여행가방 밑바닥 깔판에 끼워 밀수하듯 세관을 통과했어요. 그렇게 일본, 중국, 북한 등에서 어렵게 확보한 자료들이 모두 이 책에 담겼습니다.” 지 전 관장은 한국 고고학 백년사를 여명기(1880~1900)와 맹아기(1901~1915), 일제강점기1(1916~1930), 일제강점기2(1931~1944), 격동기(1945~1960), 성장기(1961~1970), 정착기 등 7개 시기로 재구성했다. 책에는 북한 고고학 성과를 반영하고, 관련 사진 37점과 발굴 도면 108점을 수록해 충실한 이해를 도왔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이슈&이슈] 정치 꼼수에 뒤틀린 새만금 개발… 전북도, MB정권 책임론

    [이슈&이슈] 정치 꼼수에 뒤틀린 새만금 개발… 전북도, MB정권 책임론

    ‘새만금 개발’에 사활을 건 전북도가 최근 삼성그룹이 2011년 정부, 전북도 등과 맺은 새만금지구 투자협약을 철회하자 활로를 찾고 있다. 전북도는 분노한 민심을 가라앉히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전북도는 25일 “최근 삼성이 ‘경영 논리’를 앞세워 “새만금에 투자 계획이 없다”는 의사 표시를 밝히자 전북도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휘말렸다는 한탄도 나온다. 삼성그룹은 당시 ‘녹색 성장’ 정책을 선언한 이명박 정부와 껄끄러운 관계를 개선해야 했고, 정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경남 혁신도시에 넘겨준 탓에 이에 반발하는 전북도민들의 상실감을 달래야 했다는 분석이다. 삼성그룹 측은 이에 대해 사업성이 떨어져서 투자 철회를 한 기업의 결정을 음모론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삼성 측은 25일 “그룹이 내수 부진과 세계 경기 침체 등으로 새만금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면서 “2011년 당시 투자를 결정했던 풍력발전과 태양전지 사업은 사업성 부족으로 이미 철수한 상태인 만큼 앞으로 새로운 투자 계획이 있다면 새만금에 투자하는 것을 우선으로 검토하겠다”는 지난 6월의 발표를 고수했다. ●“삼성, 새만금 투자 계획 없어” 삼성그룹은 2011년 4월 27일 새만금지구에 20조원을 투자하는 ‘그린에너지 종합산업단지’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의 새만금 투자 협약서에는 당시 임채민 국무조정실장, 김재수 농식품부 1차관, 김정관 지식경제부 에너지자원정책실장, 김순택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김완주 전북도지사가 서명했다. 투자 계획은 새만금 지역 11.5㎢ 부지에 2021년부터 20년에 걸쳐 풍력, 태양전지, 연료전지 등을 포함한 그린에너지 종합산업단지를 조성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삼성은 1차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7조 6000억원을 들여 풍력발전기와 태양전지 생산기지, 그린에너지 연구·개발(R&D)센터 등을 만들기로 했다. 전북도는 2040년까지 2단계, 3단계 투자가 순조롭게 이뤄지면 투자 규모가 20조원을 넘고 2만명 이상의 고용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전북도민들도 지역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며 크게 환영했다. ●허술한 양해각서와 투자협약서 천문학적 사업비가 투입되는 초대형 프로젝트가 발표됐지만 가시적인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북도는 수년간 관계 기관과의 실무협의 등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양해각서(MOU)가 허술하다는 비판은 초기부터 나왔다. 2011년 9월 실시한 전북도의 국정감사에서 당시 민주당 장세환 의원은 “삼성의 투자협약은 대국민 사기극”이라며 민선 5기 김완주 지사를 공개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당시 전북도는 “삼성 계열사 사장을 지낸 김재명 정무부지사의 역할로 삼성이 투자협약을 제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비판을 일축했다. 지지부진하던 투자 계획은 2015년 7월 민선 6기 전북도지사가 취임하면서 문제가 됐다.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올 3월 3일 ‘투자협약 이행 및 성의 있는 후속 조치와 공식 답변’을 요구하는 서한과 공문을 삼성에 전달했다. 투자협약을 맺은 지 5년 만이다. 이에 삼성은 지난 5월 17일 ‘새만금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병국 새만금개발청장도 지난 6월 “삼성그룹이 2011년 당시 투자를 결정했던 풍력발전과 태양전지 사업은 사업성 부족으로 철수한 상태”라고 확인했다. MOU가 5년 만에 공수표가 되는 순간이었다. 송 도지사는 전북도의회에 출석해 ‘삼성의 새만금 투자 협약 진상 규명’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전북에서는 또 당시 청와대와 총리실 관계자, 전북도 민선 5기 책임자들의 책임론을 거론하고 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퇴계가 사랑한 기생…그의 순애보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퇴계가 사랑한 기생…그의 순애보

    두향의 남자, 퇴계의 여자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양계초(梁啓超)가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없이 성인이라 칭한 퇴계 이황. 이 근엄 무쌍한 도학자에게 실로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것도 이팔 청춘 한창때가 아니라, 불혹(不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맞닥뜨렸던 가슴 아픈 사랑이었다. 그 상대 여성은 그럼 누구였던가? 되도록이면 팩트에만 근거하여 퇴계의 러브 스토리를 재구성해보도록 하자. 내가 더듬어본 자료에 의하면, 퇴계의 사랑과 그 상대 여성이 일반에게 알려진 계기는 정비석의 '명기열전'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두향(杜香)이라는 단양 기생과 퇴계 사이에 있었던 러브 스토리를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단양기 두향’편을 씀으로써 퇴계와 두향의 슬픈 사랑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단양에 두향이라는 명기의 슬픈 사랑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정비석이 안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그 상대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작가가 단양에 내려갈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물어보고 자료를 뒤져봤지만, 종내 그들의 사연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고서를 뒤적이다가 우연찮게 두향의 무덤에 관한 한시 두 수를 발견하게 된다. 그중 한 수는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처음으로 전파시킨 이광려(李匡呂)라는 실학자의 작품으로, 그가 두향묘를 참배하고 지은 시라 한다. 孤墳臨官道 국도변에 외로운 무덤 하나 頹沙暎紅萼 물가 모래에 어리는 붉은 꽃 杜香名盡時 두향이란 이름 잊혀질 때야 仙臺石應落 강선대 바위도 사라지리라 이로써 ‘두향’이 ‘전설’이 아니라 ‘실화’임을 확신할 수 있었을 뿐더러, 시편에서 풍기는 가락으로 보아 두 사람의 사랑이 예사롭지 않은 거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면, 한낱 기생의 무덤을 두고 대시인들이 이런 시를 남겼을 리 만무한 노릇 아닌가. 그뿐 아니다. 400년도 더된 무덤이 아직까지도 보존되고 있어, 한때 이 무덤을 찾은 노산 이은상이 다음과 같은 소회를 그의 기행문 속에 남겼던 것이다. '내 비록 풍류랑은 아닐망정, 그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못 놓고 가는 것이 어떻게나 서운한지 모르겠다.' 이 무덤의 주인 두향의 남자는 누구일까? 작가는 우연찮은 기회에 마침내 ‘그 남자’를 알아내게 됐는데, 정말 이럴 수가? 입이 딱 벌어지는 사실이었다. 작가가 전하는 전말은 다음과 같다. 퇴계학 관련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안동 도산서원으로 내려가던 중 기차가 단양을 지날 때, 작가가 단양 명기 두향의 남자를 몇 해째나 찾아봤지만 알아내지 못했노라고 푸념처럼 말하자, 동행하던 한문학자 이가원(李家源) 교수가 불쑥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두향의 상대 남자는 바로 퇴계 아니오.” 이 교수는 퇴계학의 권위일 뿐 아니라 퇴계 14대 후손이기도 하다. 어찌 믿지 못하리오. 알고 보니 이미 오래 전부터 퇴계 문중에서 두향묘를 관리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 교수 역시 몇 년 전에 두향묘를 찾아, 무덤 한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나 있는 걸 보고는 마을 사람에게 베어달라고 하면서 돈까지 주고 왔다는 것이다. 이로써 퇴계와 두향과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정비석은 안동에서 올라오던 길에 우정 단양에서 내려 강선암 아래 쑥대밭 속에 누워 있는 두향의 묘를 주민의 도움으로 찾았다. 과연 무덤 한가운데는 이가원 교수가 말한 대로 소나무 그루터기 하나가 박혀 있었다. 의심할 바 없는 퇴계의 여자 두향의 묘였다. 작가는 한 길 넘는 쑥대밭 속에 누워 있는 두향에 대해 창연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주머니돈을 털어 촌민에게 건네며 표석 하나만이라도 세워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귀로에 올랐다고 한다. 매화, 시, 음률로 맺어지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온 것은 명종 3년(1548년) 정월, 그의 나이 48살 때였다. 그때 단양 관기인 두향의 나이는 18살, 30년이란 세월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는 공유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 가지였다. 첫째가 매화, 둘째가 시, 셋째가 음률이었다. 퇴계는 대철학자이지만, 동시에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매화를 깊이 사랑하여 생전에 백 수가 넘는 매화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매화시만으로 ‘매화시첩’을 만들기도 한, 그야말로 매화 마니아였다. 아래의 시는 그가 얼마나 감각적인 시인인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가작이다. 步躡中庭月趁人 뜰을 거닐으니 달이 사람 좇아오네 梅邊行遼幾回巡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 香滿衣巾影滿身 꽃내음 옷에 스미고 그림자 몸에 가득하네 또한 퇴계는 일종의 음악론인 ‘금보가(琴譜歌)’를 쓰기도 할 만큼 음률에도 밝았다. 그렇다면 두향이 사정은 어떤가? 일단 미모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인급에는 못 미치는 듯하지만, 아주 귀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양매(養梅)와 거문고의 고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시에도 밝았다. 그러니 퇴계와 두향은 유효 거리 내에서는 언제든지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활성 원소와 다름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퇴계는 두 번째 부인 권씨를 잃은 지 2년이 지난 홀아비 신세였음에랴. 퇴계가 두향을 만났을 때는 권씨가 세상을 떠난 지 이태가 지난 뒤였다. 이래저래 활성 기체 같았던 두 남녀의 첫 얽힘에 대해서는 상상으로나 그려볼 수 있을 뿐, 어차피 기록은 없다. 그러나 매화와 음률, 시 등으로 두 사람이 30년 세월과 신분을 훌쩍 뛰어넘어 서로에게 침잠했을 거라고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교양과 기예, 재능과 학문을 갖춘 젊은 여인의 향기 속에 퇴계는 속절없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양매의 고수인 두향이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30년 묵은 백매와 청매 두 분(盆)을 퇴계의 거처에 옮겨두었다고 한다. 퇴계가 특히 매화를 혹애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백매와 청매는 참으로 기품 높은 나무로, 고수는 서로 한눈에 알아본다고, 퇴계는 한눈에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챘을 것이다. 그 무렵 매화를 읊은 퇴계의 시가 여러 편 전하는데, 다음의 시가 두향의 매화를 보고 지은 것으로 보인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이 걸렸구나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소슬바람 다시 불러 무엇하리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온 뜰에 가득한데 퇴계는 두향이 어린 나이임에도 깊은 인품과 내명(內明)한 자질을 지닌 여인임을 알고는 여러 번 감탄했다고 한다. 더욱이 퇴계는 남녀상열지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청상이 된 며느리를 재혼하라면서 친정으로 돌려보내기까지 한 휴머니스트였다. 단양은 벽지이지만 산수가 빼어나기로 이름 높은 고장이다. 예로부터 단양에 부임해오는 원님들은 모두 울며 왔다가 울며 간다는 말이 전해진다. 올 때는 궁벽한 곳으로 간다고 눈물짓지만 갈 때는 아름다운 고장을 떠나기 못내 아쉬워 운다는 것이다. 명승으로 꼽히는 곳을 들자면, 먼저 정도전의 전설이 얽혀 있는 도담삼봉을 비롯해, 석문(石門), 사인암(舍人巖), 상·중·하선암(下仙岩), 구담봉(龜潭峰) 그리고 옥순봉(玉筍峰) 등 팔경을 앞세울 수 있고, 그밖에도 기암괴석, 옥류가 곳곳에 널려 있다. 퇴계와 두향은 이 절경들을 둘러보면서 꿈결 같은 생의 한때를 보냈을 것이다. 지금 흔히 말하는 ‘단양팔경’은 퇴계의 아이디어로, 그때 두향과 같이 다니면서 퇴계가 스스로 이름 붙이고 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퇴계가 공무를 뒤로 하고 매양 놀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성(誠)’이라면 둘째 가기 서러워할 퇴계 아니던가. 그는 단양이 물이 많은 고장임에도 자주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사실을 직시하고는 최초로 물을 가두는 보를 쌓는 등, 뛰어난 치적을 올린 지방관이었다. 이 보가 생긴 이후로 단양에서는 굶는 사람이 없어졌다 한다. 지금 충주호를 보면 4백 년 전 퇴계의 선견지명을 능히 알 수 있다. 이 보의 이름은 복도소(複道沼)라고 한다. 이 보가 완공되었을 때 퇴계는 준공기념으로 ‘복도별업(複道別業)’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부근의 바위에 새기게 했는데, 그 각자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남아 있는 퇴계의 글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퇴계가 아침마다 세수를 한 곳에 새겨져 있는 ‘탁오대(濯吾臺)’ 세 글자다. 퇴계와 두향은 특히 남한강 가 강선대(降仙臺) 위에서 자주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노닐었다. 강선대는 백 명이 올라가 놀 수 있을 만큼 너른 너럭바위로, 지금은 충주호에 잠겨 있지만, 갈수기에는 가끔 그 모습을 물 위로 드러내기도 한다. 두 사람은 단양팔경 속을 거닐며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았다. 그러나 퇴계와 두향의 단양 시절은 가을이 미처 다 가기도 전인 시월에 갑자기 막이 내린다. 불과 아홉 달 만에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것은 퇴계의 넷째 형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형이 자기의 직속상사로 온 것이다. 공사가 엄격했던 퇴계는 이를 피하기 위해 인근 고을인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되었다. 두향과의 이별은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절절했을 것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밖엔 없다. 단양을 떠날 때 퇴계의 짐은 책 두어 궤짝과 괴석(怪石) 두 개뿐이었다고 한다. 단양을 떠나 한 나절쯤 가면 풍기와의 경계인 죽령에 이른다. 두 사람은 아마 거기에서 작별한 듯하다. 그리고 그로부터 21년 후 퇴계가 70살로 눈을 감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편지 왕래는 있었던 모양이다. 두향에게 보낸 다음의 시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黃卷中間對聖賢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 虛明一室坐超然 빈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으로 봄소식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 마주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 퇴계의 나이 52세 되는 해(1552년)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두향과 헤어진 지 4년째 봄을 맞아 쓴 시이다.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임이 분명해 보인다. 두향은 이 시 한 편을 받고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로 불렀으리라. 퇴계와 헤어진 후 두향은 기적에서 몸을 빼내 이듬해 봄, 강선대가 눈 아래 굽어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움집을 짓고는 평생 홀로 살았다고 한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두 번씩이나 보낸 두향이 이 초당을 떠나게 된 것은 퇴계의 부음을 들었을 때였다. 두향은 바로 집을 나서 죽령을 넘어가는 험란한 200릿길을 단신으로 걸어 나흘 만에 안동 도산서당이 있는 도산면 토계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빈소에는 찾아가지 못하고 멀리 상가가 보이는 산기슭에서 소복한 차림으로 망곡하며 하룻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두향과 헤어진 후 퇴계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풍기군수를 일년 남짓한 퇴계는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조정에서는 계속 퇴계를 불러,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지만, 이미 벼슬에는 뜻이 없는데다 병약한 퇴계는 번번이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평생 동안 사직서를 쓴 것만도 80여 회나 된다고 한다. 말년엔 안동에 서당을 지어 은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퇴계의 학문적 성취는 대개 두향과의 이별 이후인 50대~60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자연과 학문 속에서 위안을 찾으며 살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의 명산인 청량산을 특히 자주 찾았고, 때로는 며칠씩 산에 있다가 내려오기도 했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그의 명시조 '청량산 육륙봉'은 그래서 태어난 것이다. 청량산 육륙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퇴계에게 또 하나의 큰 위안은 매화였다. 죽을 때까지 매화를 가까이하며 뜰에도 심고 방안에서도 가꾸던 퇴계는 마치 매화 대하기를 사람 대하듯 했다고 한다. 매선(梅仙)이라 하기도 하고 매형(梅兄)이라 부르기도 했다. 병으로 몰골이 심히 초췌할 때엔 매화 보기가 부끄러우니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도 했다. 세상을 떠날 때 퇴계의 마지막 말은 자신이 사랑하던 매화를 보며 ‘저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물녘이 되자 누워 있던 자리를 정리하게 한 후, 제자들이 일으켜 앉히자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1570년 음력 12월, 향년 70세.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죽기 전 퇴계가 손수 지어놓은 묘비명 끝 구절은 다음과 같은 글이었다. 근심 속에 낙이 있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었네(憂中有樂 樂中有憂) 조화를 좇아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乘化歸盡 復何求兮) 이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종결이 있을까. 강선대 위 초막으로 돌아온 두향은 이듬해 봄 거문고와 서책 등을 모두 태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퇴계의 뒤를 따랐다. 자료에 따라서는 강물에 뛰어들었다고도 하고 부자차를 끓여 마시고 죽었다고도 하는데, 증거는 없지만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깔끔한 성품의 두향이 강물에 빠진 시신을 수습하는 폐를 남에게 끼치고 싶진 않았으리라. 유언은 그녀가 생전 퇴계와 노닐었던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덤은 전 충주호가 생겨나면서 수몰을 피해 200m쯤 위로 묘가 옮겨졌다. 두향이 죽은 뒤 퇴계의 제자인 이산해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고 한다. 지금도 퇴계의 후손들과 유학자들은 퇴계의 제례를 지내고 나면 충북 단양의 강선대로 와 두향의 묘를 참배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두향을 향한 퇴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시 한 편을 읽는 것으로 퇴계와 두향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끝내기로 하자. 前身應是明月 내 전생은 응당 밝은 달이었으리 幾生修到梅花 몇 생애나 더 닦아야 매화가 될까. 글·사진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양쯔강 생태계 비상 中 홍수로 외래종 철갑상어 방류

    양쯔강 생태계 비상 中 홍수로 외래종 철갑상어 방류

    중국에서 양식장에 기르던 1만t의 외래종 철갑상어가 홍수로 방류됐다. 이에 양쯔강(揚子江)에 살던 멸종위기 1급 보호종 중국 철갑상어가 위기에 처했다. 22일 글로벌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7월 대규모 홍수로 후베이(湖北)성 양쯔강 지류인 칭장(淸江) 댐에서 물이 방류되면서 양식장에 있던 시베리아 철갑상어와 칼루가 철갑상어가 대량으로 양쯔강으로 퍼졌다. 양쯔강 어업관리국이 부랴부랴 직원들을 동원해 수거 작업에 나섰지만 외래 철갑상어는 이미 양쯔강 중류와 하류까지 퍼져 나간 상태다. 양쯔강 어업관리국은 이들 외래 철갑상어가 양쯔강 지류인 후난(湖南)성 둥팅후(洞庭湖)와 장시(江西)성 포양후까지 퍼졌을 것이라며 “양쯔강에 외래 철갑상어 천지다”고 한탄했다. 양쯔강 어업연구소의 웨이치웨이 연구원은 이번 외래 철갑상어의 대탈출이 양쯔강 생태계를 뒤흔드는 대재앙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이들 외래 철갑상어는 원래 양쯔강에 살던 어종이 아니다”면서 “이 철갑상어들이 양쯔강 토종 어종들과 먹이와 영역 다툼을 하게 될 것”이라면서 이들 철갑상어는 매우 크고 힘이 세서 양쯔강의 토종 생물을 무작위로 잡아먹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중국 정부가 보호하는 중국 철갑상어와 만나 교미 등을 통해 섞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웨이 연구원은 양쯔강의 중국 철갑상어가 외래 철갑상어와 만나 유전자가 섞이면 멸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기상청 “밤에 지진나도 장관에게 다음날 아침에 전화 보고” 매뉴얼 논란

    기상청 “밤에 지진나도 장관에게 다음날 아침에 전화 보고” 매뉴얼 논란

    기상청의 지진 대응 매뉴얼에 ‘심야시간 지진 발생시 장관에게는 가능하면 다음날 아침에 전화보고 하라’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21일 SBS 보도로 밝혀졌다. 뉴스에 따르면 이번 경주 지진 때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주요 기관들은 기상청의 조기 경보 문자를 받지 못했다. 경주 지진의 첫 발생 시간은 12일 저녁 7시 44분이지만 국무조정실이 유선보고를 받은 것은 30분 후였고, 환경부 장·차관이 유선보고를 받은 시간은 1시간 10여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기상청이 공개한 조기경보 송신 기록을 보면 지진 발생 50초 내에 정부 주요 관계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되어있다. 문제는 문자 전송이 절반 가량 실패했다는 것이다. 수신자 1851명 가운데 842명이 기상청의 문자를 받지 못했다. 특히 8시 32분 지진 땐 12명만 메시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기상청은 “총 999개만 나갈 수 있는데 연결된 것이 1000개가 넘어서 오류가 발생했다. 그런 사항들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뿐만 아니라 기상청의 지진 후속 대응 매뉴얼에는 “심야시간에는 가능하면 다음날 아침에 전화 보고하라”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국내 지진 발생시 시간대별 조치 및 절차’를 보면, 기상청장과 차장에게는 지진 탐지 후 15분 내에, 상급기관인 환경부 장·차관에겐 필요할 경우 15분이 지난 뒤에 전화 보고하도록 돼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네이버 아이디 ‘rhro****’는 “국민이 공포에 떨던 말던 거룩허신 고위공무원님들이 신경이나 쓰시겠습니까? 본인들 꿀잠이 더 중요한 것을…”이라며 분노를 표했다. 같은 포털 ‘aust****’ 역시 “세월호이후 변한것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한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고국 위해 美 정보 유출… 아팠지만 후회 없어”

    “고국 위해 美 정보 유출… 아팠지만 후회 없어”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1996년 9월 24일 밤이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수사관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 “당신 자동차가 접촉 사고를 냈다”며 그를 데려갔다. 가족과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이별한 그는 미국 국가기밀을 누설한 스파이 혐의로 9년의 복역과 1년의 보호관찰을 포함해 20년 동안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싸늘한 시선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미 시민권자로 항공우주국(NASA)과 해군정보국(ONI)에서 일하던 한국계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76)이 고난을 겪는 동안 한국 정부는 철저히 그를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출소 후 지인들에게 고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매주 보냈다. 그렇게 쌓인 편지 425통 가운데 80여통을 엮은 책 ‘로버트 김의 편지’(온북미디어출판그룹)가 최근 출간됐다. 추석 명절과 출판기념회 참석을 위해 지난 9일 고국에 온 그를 21일 만났다. 김씨는 “(기밀 유출은) 한국인이었기에 망설임 없었던 선택이었다”며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였지만 (그 일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에게 자료를 넘긴다고 해서 내가 스파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의 우방인 한국 역시 북한의 동향을 추적한 정보를 알아야 할 당사자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다. 그는 “영국, 호주와도 공유하는 정보였기 때문에 국가기밀을 누설한 스파이라는 혐의는 정말 억울했고, 왜 내가 스파이냐고 항변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정부와 전혀 무관하고 관심도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내가 한 일은 한국에서 시킨 것도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었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국 정부는 한·미 간의 공조 관계에서 저를 언급하는 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을지도 모릅니다. 제 사건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스파이 사건은 그를 지독하게 아프게 했다. 출소 6개월 전 부친이 별세했고, 불과 한 달 보름을 앞두고 모친마저 영면했다. 그는 “씻을 수 없는 한”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교회 청소부로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아이들에게 ‘네 아버지는 사심 때문에 범죄자가 된 게 아니라 고국을 사랑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자녀들에게 박힌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다. 그는 보호관찰 집행정지 결정으로 풀려난 직후인 2005년 11월 2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의 편지를 이메일로 받아 보는 구독자가 3만여명에 달했다. 그는 “고국을 그리며 매주 편지를 쓰게 됐다”며 “대한민국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인간 내면은 쇠퇴하고, 정신적으로 한국 사회가 성숙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덧붙였다. 그는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참사 소식을 접하고 편지 쓰기를 중단했다. “이게 나라인가”라고 한탄하다 쓰러져 수술을 하고 병상에서 지내다 이제야 몸을 추슬렀다. 그는 “많은 한국민들이 제게 박수를 보내고 격려해 주셔서 결코 외롭지 않았다. 많이 행복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한국과 공유 안한 정보 한국대사관에 넘긴 게 스파이냐”

    “한국과 공유 안한 정보 한국대사관에 넘긴 게 스파이냐”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1996년 9월 24일 밤이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수사관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 “당신 자동차가 접촉 사고를 냈다”며 그를 데려갔다. 가족과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이별한 그는 미국 국가기밀을 누설한 스파이 혐의로 9년의 복역과 1년의 보호관찰을 포함해 20년 동안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싸늘한 시선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미 시민권자로 항공우주국(NASA)과 해군정보국(ONI)에서 일하던 한국계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76)이 고난을 겪는 동안 한국 정부는 철저히 그를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출소 후 지인들에게 고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매주 보냈다. 그렇게 쌓인 편지 425통 가운데 80여통을 엮은 책 ‘로버트 김의 편지’(온북미디어출판그룹)가 최근 출간됐다.  추석 명절과 출판기념회 참석을 위해 지난 9일 고국에 온 그를 21일 만났다. 김씨는 “(기밀 유출은) 한국인이었기에 망설임 없었던 선택이었다”며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였지만 (그 일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에게 자료를 넘긴다고 해서 내가 스파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의 우방인 한국 역시 북한의 동향을 추적한 정보를 알아야 할 당사자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다. 그는 “영국, 호주와도 공유하는 정보였기 때문에 국가기밀을 누설한 스파이라는 혐의는 정말 억울했고, 왜 내가 스파이냐고 항변도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정부와 전혀 무관하고 관심도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내가 한 일은 한국에서 시킨 것도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었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국 정부는 한·미 간의 공조 관계에서 저를 언급하는 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을지도 모릅니다. 제 사건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스파이 사건은 그를 지독하게 아프게 했다. 출소 6개월 전 부친이 별세했고, 불과 한 달 보름을 앞두고 모친마저 영면했다. 그는 “씻을 수 없는 한”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교회 청소부로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아이들에게 ‘네 아버지는 사심 때문에 범죄자가 된 게 아니라 고국을 사랑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자녀들에게 박힌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다.  그는 보호관찰 집행정지 결정으로 풀려난 직후인 2005년 11월 2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의 편지를 이메일로 받아 보는 구독자가 3만여명에 달했다. 그는 “고국을 그리며 매주 편지를 쓰게 됐다”며 “대한민국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인간 내면은 쇠퇴하고, 정신적으로 한국 사회가 성숙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덧붙였다. 그는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참사 소식을 접하고 편지 쓰기를 중단했다. “이게 나라인가”라고 한탄하다 쓰러져 수술을 하고 병상에서 지내다 이제야 몸을 추슬렀다. 그는 “많은 한국민들이 제게 박수를 보내고 격려해 주셔서 결코 외롭지 않았다. 많이 행복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베네수엘라 프로축구팀, 무장강도에 축구화까지 털려

    베네수엘라 프로축구팀, 무장강도에 축구화까지 털려

    베네수엘라의 치안불안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경기를 마친 베네수엘라 1부 리그 프로축구단이 무장강도를 만나 몽땅 털린 사건이 발생했다. 축구단은 축구화까지 빼앗겨 맨발이 된 선수들의 인증샷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확산되는 치안불안을 한탄했다. 베네수엘라의 프로축구단 트루히야노스 FC는 18일(현지시간) 모나가스에서 원정경기를 했다. 1대2로 패한 축구단은 19일 새벽 연고지로 귀환길에 올랐다. 공포의 강도사건은 이때 벌어졌다. 베네수엘라 북부 안소아테기주의 고속도로를 타고 연고지로 돌아가던 버스는 전쟁무기로 중무장한 6인조 강도단을 만났다. 버스를 세운 강도단은 버스를 돌려 2km가량 다른 방향으로 몰게 한 뒤 소지품을 털었다. 선수들이 강도단의 위협에 떨며 버스에 갇혀 있던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축구공과 유니폼, 심지어 축구화까지 몽땅 빼앗은 강도단은 "쫓아오면 수류탄을 터뜨려 증거를 없애버리겠다"고 위협하고 도주했다. 구단 관계자는 "몇몇 선수는 입고 있던 옷까지 빼앗겼다"며 "귀중품은 하나도 남김없이 강도단이 가져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강도단이 내내 수류탄을 터뜨리겠다고 위협해 누구도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심각한 경제위기와 정치불안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다. 현지 검찰에 따르면 지난해 베네수엘라에선 살인사건 1만7778건이 발생했다. 인구 10만 명당 58.1명이 살해됐다는 뜻이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이현청 교육산책] 어머니의 눈물

    [이현청 교육산책] 어머니의 눈물

    자식 사랑의 형태는 국가마다 민족마다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다. 교육을 위해 힘쓰는 어머니들은 세계 교육 강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자녀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는 그리 흔치 않다. 수능이 있을 때 수능이 있기 100일 전부터 기도를 하는 어머니의 눈물을 볼 수 있고 수능 당일 잠긴 교문에서 흐느끼며 기도하는 어머니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은 어떤 형태로든 값진 교육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동안 크게 확산됐던 조기 유학의 경우에도 외국에서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이 있었을 것이다. 유치원 보내면 유치원에서 잘하기를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있었고 대학원을 나와 최고 학위를 받는다 해도 어머니의 눈물은 있었으며 결혼을 하고 취업해도 어머니의 눈물이 늘 있었다. 그것이 기쁨의 눈물이든 한탄의 눈물이든 슬픔의 눈물이었든 간에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더구나 수능 점수 때문에, 성적 때문에, 학교폭력 때문에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있는 요즘 사회에서 자녀를 먼저 보낸 어머니들의 눈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눈물이라 볼 수 있다. 도리스 페이버가 쓴 ‘대통령의 어머니들’(First mothers)이라는 책을 보면 대통령을 만든 어머니들의 눈물은 그 어떤 어머니들의 눈물보다 더 엄격한 눈물이었고 더 헌신적인 눈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세 가지를 분명히 가르쳤다고 한다. 첫째는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둘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르쳤다. 셋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섬김과 겸손을 가르쳤다고 한다. 링컨 대통령 어머니가, 케네디 대통령 어머니가, 카터 대통령의 어머니가 그리 했다고 한다. 이들 어머니의 눈물은 우리 어머니들의 수능 시험날 흘리는 눈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들은 꼭 필요한 때 진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였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어머니들은 자녀가 참사람이 되고, 참리더가 되고, 봉사하는 리더가 되기를 소망하는 눈물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링컨 대통령의 경우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그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이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을 늘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카터 대통령 어머니의 경우 기자들이 ‘훌륭한 아들을 두셔서 자랑스러우시겠다’라고 말했을 때 ‘나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는데 어느 아들을 이야기하는 겁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자녀에게 공평하면서도 속으로 흘리는 어머니의 사랑의 눈물을 통해 담대하고 겸손한 대통령 아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엄할 때 엄하고 유할 때 유하며 자유를 줄 때 자유를 주되 책임을 함께 느끼게 하는 눈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교육과 미국의 교육을 비교해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의 교육에서 배워야 할 점을 다룬 ‘미국 교육의 반성’이라는 책을 보면 아시아 국가들의 교육이 미국 교육보다 나은 이유 중 하나로 어머니들의 교육열과 자녀 교육에 대한 헌신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어머니들의 자녀 사랑에 대한 눈물은 미국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어머니들은 어렸을 때는 믿음의 기본을 가르쳤고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느끼게 하는 것을 가르치며 성장한 후에는 자기가 일생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어머니의 눈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녀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잘못할 때는 이유가 있다고 수용하는 눈물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없고 학부모는 있으며 어머니의 사랑은 있되 함께하는 사랑이 없을 때 진정한 교육적 눈물이 아닌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사람 만드는 눈물이어야 하고 섬김을 가르치는 눈물이어야 하고 용서를 가르치는 눈물이어야 하며 꿈과 비전을 가르치는 눈물이 돼야 한다. 그때 어머니의 눈물은 진정으로 값진 교육적 눈물이 될 것이다.
  • ‘나혼자산다’ 기안84, 이국주 “관심 있다는 여자 많아” 어떤 매력?

    ‘나혼자산다’ 기안84, 이국주 “관심 있다는 여자 많아” 어떤 매력?

    ‘나혼자산다’ 개그우먼 이국주가 기안84에게 관심있다는 여자가 많다고 밝혔다. 16일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에서는 무지개 회원들이 전현무의 집들이에 참석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기안84는 무지개 회원들이 요즘 대세로 떠오른 씨잼의 근황 얘기를 하고는 자신에 대해 언급하자 “마감 못하고 와서 큰일났다”고 신세한탄을 했다. 이국주는 “기안84에 관심이 있다는 여성분들이 굉장히 많다”고 기안84가 인기 있다고 말했다. 전현무는 “그게 제일 미스테리하다”고 기안84의 인기를 의아해 했다. 이국주는 “내가 그 집 가서 살림해 주고 싶다는 분들이 굉장히 많더라”며 기안84에게 모성애를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고 전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오늘의 눈] 서울형 청년주택, 중단 없이 전진해야/이범수 사회2부 기자

    [오늘의 눈] 서울형 청년주택, 중단 없이 전진해야/이범수 사회2부 기자

    “난 산골짜기에나 들어가 살아야겠다.” 중학교 동창 6명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 ‘집 보러 다니는 중’이라는 메시지를 남기자 한숨 섞인 답들이 돌아왔다. 내년이면 서른넷, 적지 않은 나이지만 서울에 집 한 채는커녕 방 한 칸 없는 현실이 답답했을 거다. 다른 친구들도 “나 같은 서민에게 집은 사치다. 지방행 고려 중”, “요즘은 서울 밖으로 안 쫓겨나는 것도 능력이더라” 등의 신세 한탄을 이어 갔다. 툭 하고 던진 말이었지만 친구들의 고민은 생각보다 심각했다.‘우리 친구들’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한국감정원의 2015년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에 따르면 전국 주택 평균가격은 2억 6213만원으로 조사됐다. 서울은 5억 1200만원으로 약 2억 5000만원이 비쌌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신기록을 세웠다는 소식도 들린다. 전·월세 상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30대 집 수요자들의 임금은 형편없다. 지난해 LG경제연구원에서 펴낸 ‘세대별 일자리 관점에서 본 한국 고용의 현주소’ 보고서에 따르면 30대의 월평균 임금은 176만 2000원에 불과했다. 20~30대가 부모나 은행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울시가 지난 1일 발표한 ‘역세권 2030청년주택’의 연내 본격화 소식은 그래서 반갑다. 서울시는 오는 11월 시범사업으로 충정로역(충정로 3가), 삼각지역(한강로 2가) 주변에 1587가구(공공 410가구, 준공공 1177가구)의 착공에 들어가고, 2030년까지 최대 20만 가구를 공급할 예정이다. 임대주택을 지어 청년에 제공한다는 것 자체가 숨통을 틔워 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역세권이다 보니 임대료가 높아져 ‘청년 주거난 해결’이라는 정책 목표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공공임대가 주변 시세의 60~80% 수준이지만, 국토교통부의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을 보면 한강로 2가의 전용면적 60㎡ 이하는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160만원에 이른다. 그러니까 약 100만~120만원의 월세를 지불해야 입주가 가능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범사업지구가 서울서도 노른자위라서 월세가 높다고 설명했지만, 이런 고가 월세를 낼 서민 청년이 얼마나 될까 걱정된다. 또 생각보다 입주 물량도 많지 않다. 시범지역의 임대주택 가운데 10~25%만 공공임대주택(45㎡ 이하)이고, 75% 이상은 민간임대(60㎡ 이하)다. 부작용 우려가 크지만 서울시의 2030청년주택 사업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서울시는 시범사업 외에 1차 사업 대상지 87곳을 선정해 2만 5852가구 건립에 연내에 들어가는데, 서울 외곽 지역도 포함돼 월세는 시범사업지 두 곳에 비해 크게 낮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형 청년주거 정책’이 여러 갈등을 뚫지 못하고 중단된다면 피해는 또 청년에게 가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청년수당’이다. 청년주택 사업의 진행에서도 주체들의 책임감 있는 결단과 생산적인 대화가 반드시 선행돼야 하는 이유다. 서울시는 언론과 시민단체 등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민간 사업주들을 설득해 초기 임대료를 낮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bulse46@seoul.co.kr
  • 양승태 대법원장 대국민 사과…“청렴성은 법관의 존재 자체와 직결”(전문)

    양승태 대법원장 대국민 사과…“청렴성은 법관의 존재 자체와 직결”(전문)

    양승태(68·사법연수원 2기) 대법원장은 6일 현직 부장판사 뇌물수수 구속 사건과 관련해 공식 사과했다. 대법원장이 법관 비리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며 10년 만의 일이다. 양 대법원장은 이날 오전 10시 서초동 대법원청사에서 전체 대법관과 고위 법관 40여명이 참석해 열린 전국법원장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한 법관의 잘못된 처신이 법원 전체를 위태롭게 하고 모든 법관의 긍지와 자존심을 손상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양 대법원장은 “가장 크게 실망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묵묵히 사법부를 향해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내면서 법관이 우리 사회의 소금이 되기를 절실히 기대하고 믿어 온 국민들”이라며 “먼저 국민들께 머리 숙여 사과하고 깊은 자성과 절도 있는 자세로 법관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양 대법원장은 “법관에게 청렴성은 다른 기관에 있어서의 청렴성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것은 법관의 존재 자체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청렴성을 의심받는 법관이 양심을 가질 수 없고, 양심이 없는 법관이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양 대법원장의 사과 발표 이후 열린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는 이번 사태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책 마련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대법원은 전국법원장회의가 끝난 후 회의에서 논의된 대책 등을 발표할 계획이다. 다음은 양 대법원장의 사과문 전문 전국의 법원장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 현직 부장판사가 법관의 직무와 관련하여 거액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구속된 일로 인해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이 모임을 열고 있습니다. 아직 남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분명히 가려져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법관이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직업윤리와 기본자세를 저버린 사실이 드러났고, 그 사람이 법관 조직의 중추적 위치에 있는 중견 법관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느끼는 당혹감은 실로 참담합니다. 한 법관의 잘못된 처신이 법원 전체를 위태롭게 하고 모든 법관의 긍지와 자존심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작년에 이어 다시 이 같이 일이 거듭되어 법관 전체의 도덕성마저 의심의 눈길을 받게 됨으로써 명예로운 길을 걸어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온 모든 법관들이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크게 실망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동안 묵묵히 사법부를 향해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내면서 법관이 우리 사회의 소금이 되기를 절실히 기대하고 믿어 온 국민들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이 상식을 벗어난 극히 일부 법관의 일탈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해서도 아니 되고, 우리가 받은 충격과 상처만을 한탄하고 벗어나려 해서도 아니 됩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일지언정 이 일이 법관 사회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 자체로 먼저 국민들께 머리 숙여 사과하고 깊은 자성과 절도 있는 자세로 법관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사법부를 대표하여 이 일로 인해 국민 여러분께 끼친 심려에 대해 깊이 사과드리며 앞으로 밝혀질 내용에 따라 엄정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전국의 법관 여러분 청렴성은 법관들이 모든 직업윤리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입니다. 우리의 사표,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부정을 범하는 것 보다 굶어 죽는 것이 더 영광이다’라고 갈파하신 것과 같이, 지금까지 모든 법관들은 청렴성을 생명처럼 여기며 직무를 수행하여 왔고 청렴성에 관한 한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과 긍지를 지녀 왔습니다. 우리가 청렴성을 그토록 중히 여기는 이유는 청렴성이야 말로 모든 신뢰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청렴하지 않은 법관이 양심을 가질 수 없고, 양심이 없는 법관이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습니다. 청렴성을 의심받는 법관의 재판은 아무리 법리에 부합하는 결론을 낸다 해도 불공정한 재판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법관에게 청렴성은 다른 기관에 있어서의 청렴성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것은 법관의 존재 자체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청렴성이라는 가치를 생명처럼 지켜왔기에 과거 법원은 적어도 청렴도에 관한 한 다른 기관에 비해 높은 신뢰를 받아 왔고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긍지였습니다. 그러한 긍지가 최근 계속되는 몇몇 법관의 일탈행위로 말미암아 추락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청렴성에 대한 신뢰는 깨지기 쉬운 얇은 유리와도 같이 사소한 부주의나 불찰에 의해서도 쉽게 금이 갑니다. 법관이 일상생활 중에서 항상 처신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물며 자신이든 다른 법관이든 그의 직무와 관련하여 금품을 받는 행위는 법관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일이 한 번이라도 법관 사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한 눈으로 우리 내부를 꼼꼼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다가는 자칫 우리가 하는 재판의 정당성이 상실될 뿐만 아니라 법관의 존립 기반 자체도 흔들릴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전국의 법관 여러분 저는 우리 법관들이 사시사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행복한 일상마저도 뒤로 한 채 성실히 근무하며 공정한 재판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묵묵히 열심히 근무해왔던 법관들이 이번 일을 접하면서 느꼈을 큰 충격, 자신이 한 재판의 공정성마저 의심받는 상황에 대한 자괴감과 억울함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비록 재판은 법관 각자가 담당하여 행하는 것이지만, 국민들이 인식하는 법원은 모든 재판결과와 경험이 녹여져 들어 있는 하나의 법원임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어느 한 법관의 일탈행위로 인하여 법원이 신뢰를 잃게 되면 그 영향으로 다른 법관의 명예도 저절로 실추되고 맙니다. 동료 법관의 잘못된 처신으로 직무에 의혹이 제기될 때 그 의혹의 눈길은 자신의 직무에도 똑같이 쏟아집니다.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자기만은 신뢰와 존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이는 모든 법관들이 직무윤리의 측면에서 상호 무한한 연대책임을 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동료 법관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위기가 찾아 왔을 때 타인의 일처럼 바라만 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잠겨 있을 수만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훼손된 신뢰를 회복하고 법관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는데 발을 맞추어야 할 것이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직무윤리에 있어 이완된 분위기가 법관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서로 격려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법관 수가 3,000여 명에 육박할 정도로 규모가 커진 법원에서 고귀한 명예의식과 직업윤리에 관한 굳은 내부적 결속 없이는 앞으로 계속 위기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친애하는 법원장 여러분 우리는 이번 일로 말미암아 다 같이 아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더 발생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마음도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청렴성에 관한 신뢰 없이는 사법부의 미래도, 법관의 명예도 없습니다. 법관은 헌법에 의해 철저한 신분보장을 받습니다. 이는 법관이 자기 통제를 충실히 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우리가 그에 대해 해답을 내놓아야 할 때입니다. 저는 우리 법관들이 어떤 누구보다도 청렴하고 성실하며 유능하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우리 국민들로부터도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모든 법관들이 함께 뜻을 모은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의 회의가 사태의 전말을 정확하게 파악한 위에서 허심탄회한 토의를 통해 그 원인과 문제점을 진단하여 더 이상 법관의 도덕성에 관한 논란이 일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 내는데 법원장 여러분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회의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께 실망과 충격을 안겨 드린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법원장 양 승 태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나 혼자 산다’ 기안84 “‘거지근성’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악플 한탄

    ‘나 혼자 산다’ 기안84 “‘거지근성’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악플 한탄

    ‘나 혼자 산다’ 기안84가 악플로 힘들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지난 2일 MBC ‘나 혼자 산다’에서는 전현무가 새 집 입주까지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을 기안84의 집에서 보내게 된 내용이 방송됐다. 이날 기안84는 전현무에게 부엌에 있는 식탁을 보여주며 “저 식탁 때문에 얼마나 욕을 먹었는 줄 아냐. 거지근성이라는 말도 들었다”며 그간의 고충을 토로했다. 그 식탁은 이사를 앞둔 전현무가 기안84에게 사용하라고 넘겨준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나 혼자 산다’에서 방송되자 값비싼 식탁을 공짜로 얻어갔다며 많은 악플들이 달렸다. 이에 전현무는 “나도 첫 악플을 받았을 때는 외출을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며 악플로 힘들었던 때를 언급했다. 이어 “하지만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 그것도 관심이다”라며 악플에 대한 소신을 밝히며 기안84를 위로했다. 임효진 인턴기자 3a5a7a6a@seoul.co.kr
  • [데스크 시각] 규제 ‘장벽’… 지금 누군가 울고 있다/송한수 정책뉴스부 차장

    [데스크 시각] 규제 ‘장벽’… 지금 누군가 울고 있다/송한수 정책뉴스부 차장

    ‘해와 하늘 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밤새 울었다’ 서정주(1915~2000)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친일 행적이 생전 그를 옥죄었다. 작품 ‘문둥이’는 그렇지 않다. 새파랗게 젊은 20대 일제강점기 전에 탄생했다. 풀이가 여러 갈래다. 누군가는 “같잖은 속설처럼 아이 간을 빼먹은 뒤 서럽게 울었다는 표현”이라고 썼다. 어떤 이는 “처지를 한탄하며 자신을 뜯어 먹었다는 얘기로 들린다”고 한다. 그토록 큰 절망에 휩싸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애기’에 머물렀다. 그래서 “희망(달)도 떴다가 금세 사그라졌다”고 덧붙인다. 살고자 하는 바람은 누구나 같다. 자살하려다 구조된 사람이 “살려줘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지 않은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격언은 틀림없다. ‘자살’이 다시 화두다. 기업체를 꾸리다 장애물에 부딪혀 자살하는 숫자도 적잖다. 재도전 여지가 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태도다.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런 용기로 세상을 살아가지 왜 그랬을까. 그러나 이런 의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절망의 크기가 솟구쳐 오르는 희망을 짓누른 게다. 보통 용기론 제 풀에 목숨을 버리지 못한다. 쉽게 놓치는 게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목에서 느끼는 절망이 크다는 점이다. 예컨대 평소 믿었던 주변 지인의 말에서, 마지막 동아줄로 여겼던 국가 기관에서 만나는 절망은 영 다르다. 그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규제다. 오죽하면 ‘손톱 밑 가시’로 불릴까. 손톱을 해코지당하면 글자 그대로 단말마(斷末魔)라고 부를 만하다. 필자는 대학 때 겪어서 안다. 이제 ‘갈라파고스 규제’라는 말이 그만 들렸으면 좋겠다. 따지고 보면 정책도 ‘규제하느냐, 풀어 놓느냐’ 하는 문제로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남들을 앞질러 규제를 철폐한 역사를 지녔다. 백성의 아픔을 헤아린 ‘위민 정신’ 덕택이다. 이미 590년 전인 1426년 남성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한 달이나 줬다. 숨막힐 듯 견고한 신분제에도 숨통은 터졌다는 반증으로 여겨도 괜찮다. 뒷간에 가서나 달을 올려다보며 목놓아 울었을 법한 노비들이다. 1756년엔 나무를 엮어 무겁게 얹는 ‘큰머리’를 금지했다. ‘금수저’로 태어난 덕분에 권세를 한껏 누리던 양반 계층들에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즈음 용어를 빌리자면 적극행정의 결실이다. 130년 전인 1886년엔 노비 세습제를 아예 폐지했다. 규제란 게 없애고 나면 “여태껏 왜 그랬나”라고 의문을 품을 만큼 도드라지게 효과를 낳는 분야다. 지난해 강원 동해안에 철갑처럼 둘러쳐졌던 군 경계철책을 걷어낸 게 대표적이다. 행정자치부와 국방부 등 부처들의 협업에 힘입었다. 안보 걱정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우리 정보통신 기술로 메우고도 남았다. ‘시작이 반’이란 격언 역시 들어맞는다. 60여년에 걸친 주민들의 숙원이 거짓말처럼 시원하게 풀렸다. 규제 개혁에 100% 완성이란 없다. 따라서 시한도 없다. 규제의 그늘에 가려 억울하거나 불편한 국민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국민들의 생채기를 보듬어 평안을 안기는 일은 국가에 주어진 책무다. 단, 개혁은 빠를수록 좋다. 누렇게 곪아 손톱이 빠지기 전에 단행하는 게 최선이다. 손톱 밑 가시를 뽑은 뒤 얼마나 후련할 것인가. onekor@seoul.co.kr
  • [와우! 과학] 지구는 새로운 지질시대에 접어들었나?

    [와우! 과학] 지구는 새로운 지질시대에 접어들었나?

    과연 지구는 새로운 지질시대에 접어든 것일까? 최근 영미권 출신의 지질학자들로 구성된 인류세 워킹그룹(Working Group on the Anthropocene·AWG)이 1950년께를 새로운 인류세(人類世)의 시작으로 주장하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다소 낯선 용어인 인류세는 지난 2000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화학자 폴 크뤼천이 처음 제안한 용어로 새로운 지질시대를 일컫는 개념이다. 지구 탄생 이래 현재 우리는 신생대 제4기인 ‘홀로세’(Holocene)에 살고 있다. 약 1만 2000년 전에 시작된 홀로세(충족세)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세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AWG 등 일부 학자들은 산업화로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지구가 급격히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새로운 인류세를 주장하고 있다. AWG가 1950년께를 인류세의 시작으로 규정한 것은 1945년 7월 16일이 기점이다. 이날 인류는 사상 처음으로 핵실험을 벌였다. 당시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 아래 뉴멕시코 북부 사막에서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이 프로젝트의 연구 책임자인 존 오펜하이머 박사가 “이제 나는 가장 큰 파괴자가 됐다”며 한탄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어록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핵실험으로 ‘버섯 구름’은 4만 피트 상공까지 치솟았고 방사능 입자는 적도까지 퍼졌으며 160㎞ 밖에서도 충격파가 감지될 만큼 지구는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한 달도 안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수많은 인명과 자연을 파괴했다. 여기에 산업화로 야기된 대기오염, 이산화탄소 증가, 빠른 동식물 멸종, 닭 등 가금류 확산, 넘치는 플라스틱 등도 AWG가 주장하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알리는 유력한 증거들이다. 결과적으로 지구를 망가뜨려 새로운 지질시대를 연 주범이 바로 인간인 셈. AWG 회장이자 레스터대 지질학부 얀 잘라시에비치 교수는 "지질 경계(geological boundary)를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다”면서도 "인류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한 기준으로 보면 핵실험 이후가 가장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간 생산된 수많은 플라스틱 역시 지구를 덮고있으며 바다 생태계도 위협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많은 지질학자들은 인류세라는 지질시대 개념에는 공감하고 있으나 그 시점은 조금씩 다르다. 인류세를 주장한 크뤼천 등 일부학자들은 지구 대기의 변화를 기준으로 산업혁명을 그 시작점으로 삼기도 한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新국토기행] 전쟁 상처 서린 한탄강, 이제 낭만 안고 흐르네

    [新국토기행] 전쟁 상처 서린 한탄강, 이제 낭만 안고 흐르네

    70㎞가 넘는 비무장지대(DMZ)를 접하는 강원 철원은 6·25전쟁의 아픈 상흔을 간직한 ‘평화의 고장’이다. 철의 삼각지, 노동당사, 제2땅굴 등 수많은 6·25전쟁 전후의 아픈 상처와 훼손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자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고통의 역사를 딛고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유치와 경원선 남북 연결, 금강산선 복원 연결로 통일시대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를 꿈꾼다. 9세기 후반 후삼국시대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철원은 도성의 성곽 등 유적지와 함께 궁예 왕과 관련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화산지대로 이뤄진 현무암 단층의 한탄강 절경이 있고 우리나라 중부 제1의 곡창인 철원평야에서는 명품 오대쌀이 생산된다. 한탄강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10선’에 선정된 한여울길이 있어 한탄강의 기암절벽과 철원평야의 황금 들녘을 감상하며 자전거 등 레저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명소로 자리잡은 지도 오래다. 폭염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지만 자연은 가을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를 느낄 수 있는 철원으로 떠나 보자. [볼거리] ●백마고지 전투 등 6·25 격전지 ‘철의 삼각지’ 6·25전쟁사에 길이 남을 철의 삼각지는 북위 38도선 이북에 있는 철원, 김화, 평강지역을 잇는 삼각지대로 백마고지 전투 등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던 곳이다. 문혜리에서 시작해 지경리, 청양리, 와수리를 잇는 이 지역은 전쟁 때 공산군이 군수물자를 보급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쟁으로 미8군이 이곳 일대 철원평야를 빼앗은 뒤 김일성이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통곡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비무장지대로 남아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다. 2007년에는 중부전선 최북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철원평화전망대가 들어섰다. 2층 전망대에서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해 평강고원과 북한선전마을을 조망할 수 있다. 초정밀 망원경시설과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지형 축소판이 있어 민족 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이다. 편안하고 안전한 관광객 수송 시스템인 모노레일을 운행,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육단리에 있는 승리전망대는 휴전선 155마일에서 가장 중앙에 있는 전망대로 북한군의 이동 모습은 물론 오성산이 정면으로 보이고, 금강산철도, 광삼평야, 아침리 마을 등 남북분단의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발견한 제2땅굴 철원 제2땅굴은 한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발견한 땅굴이다. 시추 작업으로 땅굴 소재를 확인한 뒤 수십일간의 끈질긴 굴착 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한국군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북괴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을 확인했다. 땅굴은 견고한 화강암층으로 지하 50~160m 지점에 놓여 있다. 땅굴의 길이는 총 3.5㎞에 이르고 군사 분계선 남쪽으로 1.1㎞까지 파내려 왔다. 규모는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됐다. 땅굴 내부에는 대규모 병력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고, 출구는 세 개로 갈라져 있다. 제2땅굴이 발견될 당시 수색하던 한국군 7명이 북한군에 의해 희생됐다. 이 땅굴을 이용하면 1시간에 3만여명의 무장병력이 이동할 수 있으며 탱크까지 통과할 수 있다. ●北공산독재 시절 주민 착취 악명 떨친 노동당사 광복 이후 북한이 공산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이곳은 6·25전쟁 때까지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사용되며 주민들을 착취했다. 북한은 노동당사를 지을 때 성금이란 구실로 이당 백미 200가마씩을 착취했고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했다. 특히 건물의 내부작업 때는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멘트와 벽돌로 쌓은 3층 건물로 6·25전쟁 당시 주변 다른 건물들은 모두 파괴됐지만 유독 이 건물만 남아 있어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공산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 수탈과 애국인사들의 체포·고문·학살 등의 소름 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했다. 한번 이곳에 끌려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했을 만큼 무자비한 살육이 저질러진 곳이기도 하다. ●기암괴석·주상절리… ‘지질 표본실’ 한탄강 주상절리는 용암이 굳어지면서 기둥 형태를 이룬 모양으로 한탄강과 대교천 현무암 협곡층에서 발견된다. 한탄강 유역은 한반도 제4기의 지질과 지형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교천은 한탄강의 지류이지만 하상에 현무암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한탄강 주류 하천이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대교천이 한탄강으로 유입되는 부근의 기반암은 쥐라기의 화강암이다. 쥐라기는 중생대를 3기로 나눴을 때 2기에 해당하며 1억 8000여만년 전부터 1억 3500여만년까지 4500여만년간의 시기이다. 대교천 현무암 협곡의 폭은 25~40m이고 높이는 30여m에 이른다. 강바닥과 강 주변 절벽들은 화강암이 부정합으로 덮여 있어 제4기 사력층 또는 추가령 현무암의 부정합면, 계곡지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용암류와 주상절리 등이 있다. 이런 이유로 한탄강 유역에서도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뤄 천연기념물 제43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의 근거지였다는 고석정 동송읍 장흥리에 있는 고석정은 철원 팔경의 하나로 한탄강 중류에 있다. 일반적으로 강 중앙의 고석(孤石) 정자와 그 일대의 현무암계곡을 아울러 고석정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명종 때 임꺽정이라는 문무를 겸비한 천인이 산적 무리를 조직해 강 건너편에 석성을 쌓고 함경으로부터 조정에 상납되는 공물을 빼앗아 서민들에게 분배해 줬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도 강 중앙에 위치한 20m 높이의 거대한 기암봉에는 임꺽정이 은신했다는 자연 석실이 남아 있다. 강 중앙에 약 23m의 높이로 우뚝 솟은 고석바위와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기암절벽 아름다운 순담계곡 래프팅 명소 각광 순담계곡은 한탄강 물줄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진 곳이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깎아내린 듯한 벼랑, 연못 등이 수없이 이어지고 물도 많을 뿐 아니라 계곡에는 보기 드문 천연 하얀 모래밭이 형성돼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연중 끊임없이 찾는다. 특히 계곡 뒤쪽으로는 래프팅 최적지인 뒷강이 있어 여름철 래프팅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근래 들어 수려한 주변 경관과 급하지 않은 물살로 인해 주말을 이용해 새롭게 래프팅을 배우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계곡 주변에 전문강사들이 운영하는 스포츠숍들이 많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철원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먹거리] ●한탄강 최상류 메기로 끓인 풍미 가득한 매운탕 한탄강 메기매운탕은 철원지역 향토음식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아 철원의 대표음식으로 꼽힌다. 맵지 않고 깊게 우려낸 국물 맛이 기본이다. 계피, 감초 등 한약재로 달인 물을 육수로 사용해 민물고기에서 나는 특유의 흙냄새를 제거해 비린내가 없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한탄강 최상류에서 잡아 올린 메기에 게를 넣고 끓여 맛을 돋우고 두부, 미나리, 무, 대파 등을 아낌없이 넣어 풍미가 가득해 다른 곳에서 쉽게 맛볼 수 있는 매운탕과 사뭇 다르다. 메기는 단백질 함량이 풍부하고 비타민도 많이 들어 있으며 특히 당뇨병이나 빈혈이 있는 사람들에게 좋다. ●두릅밥·버섯잡채… ‘농가맛집 대득봉’ 한상차림 철원 역사를 배경으로 해 신라 금성(김화) 태수의 딸 혜원 비구니가 궁예에게 바친 산채 상차림을 현대에 대득봉 지킴이가 ‘농가맛집 대득봉’ 상차림으로 재현했다. 농가맛집 대득봉의 대표 메뉴인 오대두릅밥은 철원 오대쌀과 대득봉 자락에서 재배한 다양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 한식 상차림이다. 밥은 황기 등 건강한 재료로 우린 물을 이용해 두릅을 얹혀 짓고, 오가피 장아찌류와 도라지 튀김, 더덕구이, 산목이 버섯잡채 등이 상차림으로 나온다. 몸에 활력을 공급해 주고 피로를 풀어 주며 항암작용과 혈당조절 등에 효과가 좋은 두릅은 산채의 제왕이라고 부를 만큼 건강한 식재료로 알려졌다. ●깨끗한 물과 고지대 신선한 바람이 키운 오대쌀 철원오대쌀은 휴전 이후 인적이 끊긴 DMZ에서 흘러드는 깨끗한 물과 해발 250m 고지대의 신선한 바람, 기름진 황토흙, 깨끗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천혜의 무공해 청정지역에서 재배, 생산되고 있다. 이렇게 좋은 철원오대쌀을 주원료로 만든 철원오대쌀국수 포포면은 멸치맛과 매운맛 등 두 종류로 생산되며 쫄깃한 식감과 쌀을 재료로 한 웰빙 식품이다. 또 철원오대쌀의 맛을 이어갈 가공식품전문점 ‘모락모락’에서는 우리쌀과 농산물을 기호 식품화한 쌀찐빵, 쌀쿠기, 쌀마들렌, 쌀와플, 쌀머핀, 쌀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먹거리를 개발하고 있다. ●‘비타민·철분·칼슘의 여왕’ 철원산 파프리카 철원산 파프리카는 주야간 온도 차가 크며, 겨울이 춥고, 논을 밭으로 만든 깨끗한 토양의 환경에서 재배돼 색깔이 곱고 선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향이 좋고 단맛이 강해 다양한 요리 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비타민, 철분, 칼슘 등이 풍부해 암과 비염 예방에 효능이 있어 일본으로 전량 수출되는 철원의 특산품이다. ●민통선 샘통에서 생산한 국내 유일 물고추냉이 철원 최전방 민통선 안에 있는 샘통은 사시사철 수온이 13도를 유지하며 변화가 거의 없는 천연암반수 용출지역으로 이곳에서는 국내 유일 물고추냉이가 생산된다. 물고추냉이 잎과 줄기를 활용한 고추냉이 고추장, 장아찌, 미용비누, 탈취제 등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철원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유배의 여름을 견디며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유배의 여름을 견디며

    궁핍했던 유배 생활을 절절하게 묘사해 크게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 있다. 1781년 추자도에서 1년 반 유배 생활을 했던 안도환(安道煥)의 가사 작품인 ‘만언사’(萬言詞)가 그것이다. 만언사의 내용은 추자도로 유배당한 신세 한탄과 함께 자신의 과거사를 회상한 것이다. 11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10여년간 외가에 의탁했다가 후에 계모를 맞아 효행을 다했던 일과 혼인해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면서 행락에 빠지기도 했던 일을 노래했다. ‘만언사’는 가사로서는 아주 특이하게 세책(貰冊)으로 인기가 있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 세책점이 융성했다. 세책점이란 돈 주고 책을 빌려 보는 책방이다. 이 세책점을 통해 생산, 유통된 책을 세책본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소설이었다. 그러나 안도환의 ‘만언사’는 소설이 아닌 가사인데도 세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요즘 말로 베스트셀러라 해도 틀리지 않다. 작가는 출생과 성장의 흥미로운 서사 구조를 기반으로 궁핍했던 추자도 유배 생활을 절절하게 묘사해 독자들의 호기심과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인기 덕분에 ‘만언사’는 궁궐의 궁녀들에게도 전해지게 됐고 이것을 읽은 궁녀들이 동정심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정조 임금 또한 ‘만언사’를 읽게 돼 결국은 안도환을 추자도에서 해배시켜 준다. 순전히 감동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감동은 모든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그런데 ‘만언사’의 내용 중에 “남방염천 찌는 날에 빨지 못한 누비바지, 땀이 배고 땀이 올라 굴둑 막은 덕석인가, 덥고 검기 다 바리고 내암새를 어이 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남쪽 지방의 찌는 날씨에 빨지 못한 바지를 입고 다니니, 땀 때문에 굴뚝을 막는 멍석처럼 더럽고 축축하고, 냄새가 나는 것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 여름은 연일 35도를 경신하는 남방염천(南方炎天)의 나날이었다. 이런 날에 빨지 못한 바지를 입고 걸인 행세를 하는 유배인의 모습은 결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요즘 에너지 빈곤층들이 겪는 여름의 모습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산층이라 해도 누진세가 무서워 에어컨도 제대로 못 틀고 멍석을 덮어쓴 기분으로 열대야를 보내기는 유배인이나 매한가지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다산 정약용은 더위가 극심하자 ‘소서팔사’(消暑八事)라고 “소나무 밑에서 활쏘기”, “홰나무 아래서 그네뛰기”, “시원한 대자리 위에서 바둑 두기” 등 ‘더위를 식히는 8가지 방법’을 시로 남겼다. 여기에 “종을 불러 책에 바람 쐬기”, “아이들 모아 시를 가르치기” 등 또 다른 8가지도 시로 남겼는데 이 16가지는 어려운 유배 생활을 겪은 후 얻어진 여유였다. 특히 “책에 바람 쐬기”를 포쇄(曝?)라 하는데 우리에게는 오래전에 읽다가 꽂아 둔 묵은 책들이 있다. 그것들을 꺼내 바람을 쐬어 습기와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읽다 보면 새로운 감동이 더위를 잊게 해 줄 것이기에 이 방법을 권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만언사’의 유배인처럼 힘들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럴 때마다 끝내 그런 어려움을 겪어 내어 이제는 삶의 여유를 갖춘 다산처럼 서쪽 연못에서 연꽃을 구경하거나, 책에 바람을 쐬는 등의 소박한 시간들을 일부러라도 가져 볼 일이다. 그런 소박한 여유야말로 삶의 어려움은 물론 숨이 막히는 여름 더위를 이겨 내는 가장 큰 지혜와 용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젖먹이 딸 허벅지가 부러졌는데 ‘아이패드’만 찾는 아빠…뭐 담겼길래?

    젖먹이 딸 허벅지가 부러졌는데 ‘아이패드’만 찾는 아빠…뭐 담겼길래?

    생후 50일 된 아이의 허벅지 뼈가 부러진 사건과 관련, 학대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아버지가 사건 발생 후 수상쩍은 행동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 어머니 A(25)씨는 사건이 발생한 5월 1일 이후 충격을 받고 남편 B(25)씨에 대해 격리조치를 요청했다. 그러나 B씨는 격리조치에도 아내와 아이가 사는 집을 세 차례 찾는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 B씨는 이후 짐을 챙겨 가겠다며 5월 19일 A씨가 집을 비운 사이 집 주인에게 문을 열어 달라며 찾아왔다. B씨를 수상하게 여긴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이틀 뒤인 5월 21일과 6월 19일에도 B씨는 A씨를 찾아왔다. B씨는 “짐을 찾아가겠다”고 말했지만,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A씨가 짐을 챙겨 보내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집을 찾아와 평소 게임을 즐기던 ‘아이패드’를 내놓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A씨는 처음에는 왜 저렇게 아이패드에 집착하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아이패드에 있는 대화 내용을 보고는 B씨가 아이패드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아이패드 속에는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과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이 담긴 대화가 담겨 있었다. A씨는 “처음에는 게임을 하려고 달라고 그러나 싶었는데 대화 내용을 보니 ‘그냥 아이가 싫다’, ‘결혼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행복하다’ 등 자신에게 불리한 대화 내용이 담긴 증거를 가져가려는 것 같았다”며 “말도 못하는 딸이 크게 다친 것보다 불리한 증거가 담긴 아이패드가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B씨는 평소에도 원치 않는 결혼을 한 것에 대해 자주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 후에도 변변한 직장이 없던 B씨는 온종일 집 안에서 게임을 하며 지냈다. 생활비는 시댁에서 보내주는 돈과 A씨가 결혼 전에 친정어머니와 운영하던 가게의 수익금으로 충당했다. A씨는 “나중에서야 아이패드를 보게 됐는데 결혼을 해서 남편이 결혼 전 키우던 강아지가 죽을 때 함께 하지 못해 울면서 잠에서 깬다는 내용을 보고는 아이가 불쌍해 한참을 울었다”며 “남편에게는 이 결혼도 아이도 모두 원망의 대상이었다”고 한탄했다. B씨는 사건 발생 이후 병원에서는 “기저귀를 갈다가 아이가 다쳤다”, “신생아 체조를 시키다 그랬다”, 경찰에서는 “아이와 함께 잠들었는데 아이를 떨어뜨린 것 같다” 등 혐의를 부인하며 진술을 번복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 19일 기소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지만, 검찰은 피의자와 피해자 진술이 상반돼 기소 유지가 어렵다며 사건을 재수사하도록 지휘를 내렸다. A씨는 “사건이 알려지면서 혹시나 다시 남편이 찾아올까 봐 하루하루가 불안하다”며 “수사당국이 구속 수사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당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아이 향한 ‘父情’… 김정은 체제 ‘否定’하다

    아이 향한 ‘父情’… 김정은 체제 ‘否定’하다

    평소 통치자금 마련 압박 토로 런던 혼잡통행료 한탄할 만큼 궁핍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온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평소 대북 제재로 인한 통치자금 마련에 압박감을 느끼고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해 왔다고 가디언, BBC 등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북한 핵심 가문 출신인 그의 탈북이 정치적 동기보다는 자녀의 교육과 장래 진로까지 고려한 ‘이민형 탈북’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태 공사는 영국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선전 업무를 맡아 왔지만 사석에서는 궁하게 살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평소 “북한의 친지들은 물가가 엄청나게 비싼 런던에서 한 달 1200파운드(약 174만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지 못한다”며 “내가 마치 수영장과 사우나가 갖춰진 저택에서 살고 있는 줄 안다”고 말했다. 태 공사 가족이 런던에서 거주한 집은 방 두 개와 좁은 부엌이 딸린 연립 주택이다. 그는 북한 체제 선전 강연을 하면서도 얼굴을 찡그리며 “대사관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 걱정되는 것은 (런던의) 혼잡통행료”라고 털어놓았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북한 소환을 앞둔 태 공사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방세계에서 생활하던 자녀들이 북한으로 돌아가 적응하기 어려운 점도 감안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26세의 장남과 19세 차남과 딸 등 2남 1녀를 뒀으며 장남의 경우 런던 해머스미스병원에서 공공보건 관련 학위를 받았다고 텔레그래프가 보도했다. 특히 ‘금혁’으로 알려진 차남은 런던 서부 액턴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올가을에 영국에서 2~3위를 다투는 명문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진학해 수학과 컴퓨터를 전공할 예정이었다. 임페리얼 칼리지는 지난해 QS 세계대학평가에서 8위를 차지했고, 노벨상 과학분야 수상자 14명을 배출한 명문 대학이다. 태금혁은 영국 친구들과 페이스북, 와츠앱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발히 이용했으며 온라인 게임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좋아한 게임광이다. 영국 미러는 그가 ‘북한은 최고의 한국’(North Korea is Best Korea)이라는 게임 아이디를 사용했으며, 누적 게임 시간은 368시간에 이른다고 전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18일 “1990년대 이전에는 정치적 이유나 개인 신상의 문제로 불가피하게 탈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면 지금은 삶의 질을 생각하는 측면의 ‘이민형 탈북’도 있다”며 태 공사 가족의 탈북이 개인적 행복 추구임을 시사했다. 태 공사가 한국으로 어떻게 망명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영국 정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이 망명을 주선하고 망명 초기 안전가옥에 머물도록 배려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서브 리시브 범실 속출···이정철 감독 “다들 좋은 경기 하려했는데···”

    서브 리시브 범실 속출···이정철 감독 “다들 좋은 경기 하려했는데···”

    8강에서 탈락한 한국 여자배구의 이정철 감독은 “중요한 경기를 너무 못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16일(한국시간) 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지뉴에서 열린 리우올림픽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 세트 스코어 1-3(19-25 14-25 25-23 20-25)으로 패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한국은 주포 김연경(28·터키 페네르바체)이 양 팀 통틀어 최다인 27점을 올리며 맹활약했으나 잇따른 서브 리시브 실책으로 주도권을 좀처럼 잡지 못했다. 한국은 서브 리시브가 경기 내내 갈팡질팡했다. 이로 인해 패턴 플레이는 실종됐고, 김연경 한 명에게 의존하는 단순한 공격 끝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한국은 3세트에서 한 세트를 만회했으나 자체적으로 경기력을 회복했다기보다는 네덜란드의 공격 범실이 쏟아지면서 따낸 세트에 가까웠다. 경기 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만난 이 감독은 “중요한 경기에 나와서는 안 될 모습들이 다 쏟아졌다.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들이 경직됐다. 과도한 불안 탓인지 1세트부터 서브 리시브가 흔들리면서 패턴 플레이를 전혀 만들지 못했다. 대충 때워버리는 식의 공격밖에 하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보다 훨씬 큰 장신의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동메달의 쾌거를 이뤄냈다. 지금의 대표팀은 신장도 한층 좋아졌고, 김연경이라는 걸출한 공격수가 있음에도 그때의 영광 재현에 실패했다. 이 감독은 그 이유로 기본기 부족을 꼽았다. 이 감독은 “과거 큰 선수와 경기할 때는 걱정도 안 했던 부분이 바로 서브 리시브였다. 그때는 서브 리시브와 수비로 버텨왔다”면서 “지금은 유럽에는 다소 딸리긴 하지만 높이가 좋아졌다. 그런데 이제는 기본기, 볼을 다루는 기술을 걱정해야 한다는 게 안타깝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은 김연경의 레프트 파트너인 박정아(23·IBK기업은행)의 서브 리시브가 안타깝게도 경기 내내 흔들린 것이 뼈아팠다. 리베로 김해란(32·KGC인삼공사)마저 고비처마다 아쉬운 서브 리시브 실수가 나왔다. 그는 “선수들도 다들 좋은 경기 하려고 생각하고 그렇게 준비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점점 더 경직된 것 같다”며 “서브 리시브는 기본이 돼야 하는데, 그게 함정이 됐다. 큰 숙제다”고 한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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