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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義烈 독립투쟁] (1-1) 역사적 의의와 성과 전문가 좌담

    대한매일은 광복 54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의열투쟁에 몸바친 의사·열사들의 독립투쟁 활약상과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의열 독립투쟁’을 주간 특집기획물로 연재한다.의열투쟁은 주로 개인차원에서 전개됐으나 중국의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두고 ‘중국 군인 30만이 못하는 일을 고려청년한 사람이 해냈다’고 할 정도로 그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의·열사가운데 상징적인 몇 분을 제외하고는 낯선 이름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연재에 앞서 전문가 좌담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성과 등을 짚어보기로 한다. 김삼웅 주필 지난해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꾼 이래 민족사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본지는 친일파들의 반민족행위를 고발한 ‘친일의 군상’에 이어이번에 새로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에 몸바치신 의사·열사들의 일대기와 항일정신을 되새기는 연재물을 기획하였습니다.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더러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언론매체에서 이를 집중 조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이번 좌담모임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열투쟁사 연재에 앞서 의열투쟁의 성과나 역사적 의의 등을 짚어보기 위해 마련하였습니다.먼저 역사학계에서 내리고 있는 의사·열사의 용어 정의부터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동양의 고전에서는 열사는도덕적 행위,의사는 사회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조동걸 교수 우선 ‘의열투쟁’이라는 용어나 개념은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의열투쟁사’를 편찬해낸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의·열사를 정의한 것을 보면,의사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져 행동으로 실천한 분’으로 대표적으로 안중근,윤봉길 의사같은 분을 들 수 있겠지요.반면 열사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로 저항한 분’으로 이준 열사가 대표적인 분이라고 할수 있죠. 채영국 연구원 의·열사 구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보이는 특이한 형태가 아닌가 합니다.중국에 갔을 때 ‘혁명열사기념탑’ 같은 것은 봤습니다만 ‘의사’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치 않는 것으로 압니다.두 용어를 구분하는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신용하 교수 의암 유인석 선생이 선비의 저항정신으로,첫째 무기를 들고적과 싸우는 유형,둘째 외국으로 망명,몸을 깨끗이 보존하는 유형,셋째 국내에서 자결,자정(自靖)하여 지조를 지키는 유형 등 세 유형을 들고는 그 가운데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첫번째 유형이라고 하였습니다.바로 이 저항정신이 의·열사의 정신으로 계승됐다고 봅니다.그 중에서도 의사는 개인차원이나혹은 집단적으로 특공작전을 한 분으로 개인 차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를,집단적인 차원으로는 의열단,한인애국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 주필 그러면 이같은 의·열사들의 의열투쟁은 언제,무슨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으며 어떠한 행태를 띠고 있었는지,또 의병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어떤 책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격분을 참지 못해 현지에서 자결한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선생의 순국을 의열투쟁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더군요. 조 교수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부터 의열투쟁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의열단체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 등장한 ‘오적(五賊)암살단’이 최초라고 봅니다.본격적으로 의열투쟁은 1908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이며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아무래도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부터라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계보는 1906년 나철(일명 나인영)·오기호(일명 오혁)등이 ‘오적’ 암살을 모의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물론 이들의 오적 처단계획은 도중에 발각돼 좌절됐지만 이를 계기로 1909년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탄생하였죠.전명운·장인환 두 의사의 의거는 국내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물론 미국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돼 당시 세계적인 반향을불러 일으켰습니다.흔히 일제하 의사들의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는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왜냐하면 제국주의 하에서 약소민족이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행한 의열투쟁은 일종의 ‘특공작전’으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조 교수 미국이나영국 같은 나라들이 약소국의 그런 행위를 ‘테러’로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미군의 OSS작전 같은 것도 그렇게 따진다면‘테러’지요.주임무가 주요기관 파괴·요인 처단 아니었습니까? 채 박사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의 ‘선언서’나 ‘격문’ 등에 나타난 의열투쟁 정신은 근본적으로 생존권 획득과 인류의 자유·행복추구를 목적으로 했다는 차원에서 피지배민족으로서는 정당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불렀듯이 우리입장에서 보면 일제는 ‘강도(强盜)’나 다름없었지요. 김 주필 일제하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에서 결행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독립진영에 미친 그 성과는 대단했다고 생각됩니다.안중근 의사의 의거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의열투쟁의 전개양상과시기별 특성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신 교수 무기를 사용한 의열투쟁은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전쟁적 성격 ▲유격전 성격 ▲특공작전 등 세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병전을 전면전이라면 유격전은 전쟁중 적을 기습공격한 후 재빨리 빠져나와 계속 작전을 하는 방식입니다.반면 특공작전은 강대한 적의 목표물을 공격,치명타를 입힌 후 특공대원 자신도 자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 교수 의열투쟁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특공대원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결행한다는 신 교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반면 일제말기 ‘가미가제(神風)’의 경우 자기의 의사와 무관하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는 학살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경우 거사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효과가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러 의사 가운데는 의거에 성공한분도 있지만 더러는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거사 전에 좌절됐거나 또 거사는결행했지만 실패한 분들도 있습니다.그러나 ‘살신성인’의 정신은 어느쪽할 것 없이 모두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채 박사 1910년대에 작성된 한 문건에 따르면,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간도지역에서는 조선동포들이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만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면서 신(神)처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시기별 의열투쟁의 특징으로는,우선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는 대개 ‘국권수호’를 내걸었습니다.1910년대의 의열투쟁은 의병의 세력이 쇠퇴한 상황에서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준비한 기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본격적인 의열투쟁은 1920년대 들어 의열단 결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3·1의거후 고조된민족의식과 의열투쟁의 여건이 성숙됐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독립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있던 1930년대에는 중국을 무대로 활동한 임시정부 산하한인애국단의 활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겠죠. 김 주필 끝으로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사 측면에서의 의의나 평가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보면 의열투쟁은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빠져있거나 또는 일제의 통치가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주로 터져나왔습니다.이로써 일제에게는 큰 타격을 준 반면 우리 민족진영에는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조 교수 일제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의병이나 계몽운동의 형태로 출발했다가 점차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의열투쟁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그런데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의 독립운동치고는 성과가 컸고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독립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후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안중근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부른 경우라든지 또 윤봉길 의사의거후 중국의 장개석 정부가 임정을 주목,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수 백명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큰 것이었지요.백범김구 주석이 환국후 그 복잡한 정치상황 하에서도 의·열사들의 유해봉환을중대사업으로 취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 교수 안의사와 윤의사 두 분의 의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안의사가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일본과 러시아의 만주분할 계획이 좌절되자 중국의 언론과 지사들은 안의사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돼만주와 중국땅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가 됐습니다.또 ‘만보산사건’으로 생겨난 한·중 간의 적대감은 윤의사의 의거후 곧바로 봄눈 녹듯이사라지고 말았으며 당시 장개석은 ‘30만 중국군대가 못한 일을 고려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극찬했습니다.‘김구-장개석회담’이 바로 윤의사 의거 직후에 처음으로 성사됐으며 중국측의 지원도 이 때부터 공식 시작됐지요.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을 극복하고 의열투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이론정립이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주필 일제하 선열들의 의열투쟁정신은 해방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부 계승된 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요즘과 같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의열투쟁의 정신이 더욱 값진 교훈으로 다가온다고 하겠습니다.오늘 좌담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리=정운현기자 jwh59@
  • 임진강사업 제의 배경

    정부가 11일 남북 공동의 임진강 수해방지 사업 추진을 공식 제의했다.남북 협력을 통해 임진강 유역의 홍수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남북 당국간 접촉을 더욱 활성화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임진강 유역 일대의 치수는 남북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론 어렵다.254.6㎞에 이르는 강 가운데 중·상류에 해당하는 162.6㎞는 북한 관할이고 92㎞만 남측에 속해있다. 최근 들어 남북은 북한에 속하는 임진강 상류지역의 산림 황폐와 강우의 급격한 유출로 홍수예보 및 하천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임진강 하류뿐 아니라 중·상류지역에서도 적잖은 홍수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우리측이 공동 사업을 제의한 배경이 됐다. 제의는 ▲임진강 상·하류의 관련자료 교환 ▲홍수예방 경보시설 공동 설치 등 치수 사업 ▲농업용수 공급 및 수도 건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장기적으로는 댐 건설도 협의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건설교통부의 이왕우(李王雨) 수자원국장은 “수위관측소나 우량(雨量)관측소 등 홍수 예·경보시설 건설은 10억∼20억원 정도면 가능하다”며 적은경비로 하기 쉬운 일부터 단계적으로 실현해 나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이번 제의를 수락할지는 미지수다.하지만 이날 11일 판문점 연락관접촉을 통해 제의 서한을 접수해 간 것은 고무적인 반응으로 해석된다.북한이 지난 86년 우리측의 남북수자원 관계당국 회담 제의를 접수조차 거부한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석우기자 swlee@
  • 아시아통화기금 설립 일본과 본격 협의 예정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다음달 2일 도쿄에서 열리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아시아통화기금(AMF)설립 문제를 본격 협의할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총리는 최근 일본 방문을 앞두고 김도형(金都亨)KIET일본연구실장,신희석(申熙錫)아태정책연구원장 등 일본 전문가들을 공관으로 초청,방일 대책을협의하는 과정에서 AMF 설립 추진 문제를 검토했다고 정부 관계자가 8일 밝혔다. 정부는 이에 따라 재정경제부와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AMF설립의 구체적추진 방안을 준비중이다. 정부는 특히 최근 태국측이 내년 2월 방콕에서 열리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10차 총회에서 AMF 설립을 공식 제안하겠다고 천명함에 따라 아시아지역 국가간에 AMF 설립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함께 정부는 지난해 12월 하노이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 7개국 및 한국·일본·중국의 정상이 참석한 ‘ASEAN+3’ 정상회의에서 제기된 아시아 단일통화 (Asian Monetary Unit) 추진 문제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당국자는 아시아 단일통화 문제도 김총리의 방일기간 중 협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총리는 지난해 11월 일본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각료간담회에서 오부치총리에게 “일본이 중심이 돼 3,000억 달러의 기금을 조성, 아시아지역의 외환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AMF를 설립하자”고 제안했었다. 김총리는 또 지난달 6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AMF 창설은 충분히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도운기자 dawn@
  • 金총리 새달1일 日 방문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내외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의 초청으로 다음달 1일부터 닷새간 일본을 공식방문한다고 총리실이 5일 발표했다. 김총리는 일본방문중 아키히토(明仁) 일황을 예방,한국 방문을 요청하고 양국우호협력 증진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다. 김총리는 또 오부치 총리와 회담을 갖고 북한 미사일 발사 움직임에 대한대응 등 대북 정책 공조 강화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양국 총리는 아울러 투자협정 체결을 비롯,지난해 10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일본방문 때 채택한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후속조치를 협의하고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진행 방안,청소년 교류를 포함한 인적 교류와 문화협력 증진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이도운기자
  • 정부 ‘北 미사일 저지’ 전방위 외교

    북한 미사일 발사 저지를 위한 ‘전방위 외교’가 가시화되고 있다.‘자주권’을 앞세운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의 실험 발사 의지를 굽히지 않는가운데 정부의 대응 행보도 더욱 숨가빠지는 형국이다. 정부는 한·미·일 3국의 공조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제재’를 바탕에 깔고 광범위한 ‘국제적 협력 확산’ 작업에 돌입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그동안 다진 한반도 4강 외교가 판가름나는 시험대인 셈이다. 오는 26·27일 연쇄적으로 열리는 ARF(아세안 지역안보포럼)와 ASEAN PMC(아세안 확대 외무장관회담)회의는 국제적 여론환기를 위한 주요 무대다.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은 미·일·러·중 한반도 4강과 머리를 맞대 북한미사일 저지를 위한 최종 의견 조율을 시도할 계획이다. AFR 의장성명에 북한 미사일 문제를 정식으로 삽입시키는 한편 PMC의 지역정세 파트에 공식 의제로 선정,국제적 압력을 가중시킨다는 복안이다. 북한 미사일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일본은 한·미·일 ‘3자 외무장관 회담’을 제의한 상태다.보다강력하고 확고한 국제적 제재 방안이 도출될 가능성이 크다. 8월 하순엔 홍순영-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계획하고 있다.북한 미사일 발사 시 KEDO 사업 동결을 주장하는 일본에 대해 핵-미사일 ‘분리전략’을 설명하고 한치 흔들림없는 양국 공조를 확인하는 자리로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압박전’도 병행되고 있다.올들어 북한과 관계복원을 시도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 견제력을 활용하는 것이다.미사일발사 이후 ‘국제적 고립’을 자청하지 말라는 ‘경고’가 다양한 채널로 전달됐다는 후문이다. 특히 중국은 미·일이 추진 중인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가 미사일 발사이후 ‘급발진’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중국이 당초 “미사일 개발은 북한의 주권”이라는 관망자세에서 벗어나 최근 중·일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다”며 적극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일만기자 oilman@
  • 민족정신회복운동 나선 시인 金芝河 특별인터뷰

    요즘 김지하(金芝河·58)시인의 화두는 ‘단군(檀君)’이다.구체적으로 말하면 ‘개방적 주체’를 표방한 단군사상이다.서울대 미학과 학생이던 지난 63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첫 투옥된 이래 반독재·민주화 투쟁으로 청·장년기를 보낸 그가 ‘긴 여행’에서 돌아와 90년대 중반에 안착한 자리는 인간중심의 ‘생명사상’이었다.이제 다시 한 단계 도약하여 ‘단군’을 만났다.지난해 전통 풍류도를 되살리는 문화운동단체인 율려(律呂)학회를 발족한이래 김지하의 사상적 행보는‘담론부재’의 현 시점에서 또 하나의‘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22일 오후 안국동 로타리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서북쪽으로 탁 트인 창,양식사무실 한켠에 한식으로 꾸민 응접실은 그의 사상을 대변하는 듯 했다. 김지하가 임시대표를 맡아 지난 21일 발족한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약칭‘민족정신’)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민족정신’이 표방하는 것은 종교운동입니까,사상·정신운동입니까. 한마디로 동학사상과 그동안 내가 주창해온 생명사상,그리고 단군사상을 하나로합쳐 민족정신 회복의 구심력을 되찾자는 겁니다.근대 이후 우리 지식인들은 밖(서양)으로만 관심을 돌려 민족의 사상적·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였습니다.종교 차원이 아니라 문화운동 차원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아 줏대를 바로세우자는 거죠. 정신공황·경제파탄에 담론부재까지 겹쳐 오늘의 형국은 마치 ‘적막강산’과 꼭 같습니다.한마디로 21세기는 ‘문화담론’시대입니다.미학적 생산성,영적 창조력을 키워나가려면 예술가들의 깊은 명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시인이 갑자기 ‘단군’을 거론하는 것은 뜻밖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돌이켜보면 내 청춘은 ‘뿌리를 찾는 여행’이었습니다.4·19후에는 탈춤·판소리·민요 등 민족문화 운동에 탐닉하였고,동학사상을 거쳐‘오적(五賊)’을 발표한 직후에는 가톨릭에 귀의해 내적 평화를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14년전 강증산(姜甑山)동네에 갔다가 단군그림을 보고 영적 충격을 받았습니다.일종의 ‘정신적 환상’이었죠.그런데 당시 나를 치료하던 의사가 집단무의식,즉 조상문제가 그 원인이라고 했습니다.그 때 처음 ‘단군’을 깨달았습니다. ■‘단군’을 모체로 한 운동은 자칫 배타적·국수주의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프랑스 음악가가 우리의 영산회상을 듣고는 ‘하늘의 음악’이라고 극찬한 적이 있습니다.문화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열매입니다.네것 내것하는 식으로 나누지 말고 단군사상을 ‘타자(他者)를 흡수하는 주체’로 승화해 세계화 시대의 지구적·세계적 사상으로 키워보자는 거죠.민주주의는서양만 해온 것이 아닙니다.이미 단군시대에도 신시·화백과 같은 직접민주주의가 있었습니다. ■김 시인이 주장하는 ‘개방적 주체’란 구체적으로 무얼 얘기합니까. 우선 각 문화권이 ‘나와 다른’문화를 인정하고 이를 토대로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서양 지식인들은 지적으로 한계에 이르면 고대로 돌아갑니다.이들이 마르크스,니체,푸코,하버마스 등 대표적인 현대 서구 사상가들을 뛰어넘어 안착한 곳은 바로 그리스 시대입니다.‘고대로 돌아가는 큰 물결’을이룬 셈이죠.그런데 우리 학자들은 모두 서양사람들을 베껴올줄만 압니다.IMF이후 우리도 지구시대의 민족주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우리는 우리 스스로 서야 합니다. ■단군의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습니다만. 단군의 실체는 고구려 고분의 묘지(墓誌)나 광개토대왕비(碑)등 명문(銘文)을 통해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통감부시절 일제는 총 51회에걸쳐 상고사 관련사료 23만건을 몰수했습니다.그런데 그 사료를 파기한 것이아니라 모처에 비밀리에 보관해 두고는 식민사학자들이 이를 참고하여 단군사 등 상고사를 이 지경으로 왜곡하였습니다.우리가 곰의 자식이라니 말이나되는 얘깁니까. ■‘선언’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계획한 사업은 어떤 것들입니까. 왜곡된 상고사 교육을 중지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상고사 연구붐을 일으켜나가면서,남북·재외교포를 망라한 ‘민족역사교육 문화회의’를 소집할생각입니다. 아울러 일제가 탈취해간 상고사,특히 단군 관련사료 반환운동을적극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남북문제도 쌀·비료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닙니다.남북이 동일한 담론인 ‘단군’으로 만나서 정신적 통합을 먼저 이룩해야합니다.당장 통일은 못해도 화합은 이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가 한마디를 던졌다.“내후년이면 환갑입니다.일생의마지막 과업으로 알고 이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생전에 ‘문화국가’건설을 소망했던 백범(白凡)의 영(靈)이 요즘 나를 이끄는 듯 합니다.그러고보니올해가 백범 50주기지요”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朴正熙와의 화해는 잘못된 것인가

    우리사회는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단견과 경박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사안의 경중도 가리지 못하고 여론이라는 이름의 장단에 휩쓸리기도 한다.감정이 지배하는 가운데 이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양상도 나타난다.도대체 목표가 분명치 않고 중심도 없다. 고위층 여인네들의 철없는 행동에 여러날 동안 온 나라가 들썩거렸고 신문들은 신바람이 나서 연일 지면을 도배질하다시피 했다.그게 그렇게 온 나라를 뒤흔들 만큼 큰 일이었을까? 무슨 중대한 로비가 성사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지나치게 요란을 떤 게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물론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그러나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 와중에 정작 중요한 남정네들의 비리의혹은 쟁점이 되지 못했다.최순영리스트 말이다.옷 로비로 그렇게 요란법석을 떤 결과 6·3 재선거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고급옷 로비사건이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주관없이 여론과 감정에휩쓸려 투표장으로 달려간 보통 여인네들은 선거결과에 만족할까? 대부분의 주요 신문들은 여당의 참패를 1면 머릿기사로 올렸다.그런데,남북간에 차관급 회담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보다 재선거 결과가 더 중요한 뉴스였다고 할 수 있을까? 차관급 회담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외교와 북한에 대한 일관된 포용정책이 결실을 낳은 소중한 결실로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이산가족들은벌써 가족과 상봉하는 꿈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개혁을 등한시해서도 안되겠지만 우리시대에,그리고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하는 과제는 동서와 남북의 화합 및 통일이라고 생각한다.이 둘은 동시에 가야 한다.동서가 지역감정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현실을 모른 체하고 남북통일만을 추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따라서 남북관계의 개선을소신있게 밀고 나가고 있는 정부로서는 동서갈등의 해소도 동시에 추진하는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대중대통령이 지난 달 대구에서 박정희 전대통령과화해선언을 한 것은 의미있는 사건이었다.그런데 일부 언론과 시민운동단체,그리고 지식인들이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그 이유는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내린 정략적인 판단이란 것이었다.그리고역사학자의 몫을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빼앗아갔다는 주장이었다. 그럴까? 그런 논리라면 이제 역사학자들은 할 일을 잃고 손을 놓고 있어야한다.김대통령의 선언은 지역감정을 풀기 위한 대통령으로서의 선택이고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여전히 역사학자들의 과제로 남아있다.설령 정략적인 선택이라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기념관 건립을 정부에서 지원하느냐 않느냐는 방법론의 문제일 뿐이다. 호남지역의 상징이었던 김대통령이 박정희를 포함한 전직 대통령들과 대립하고 있는 한 지역감정의 해소는 요원하다.그러면 김대통령이 자신을 박해했던 전직 대통령들과 계속 반목하면서 원칙만을 고집해야 옳을까? 그럴 경우뭇사람들은 이를 두고 정치보복이라고 할 것이다.김대통령의 선택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역감정의 해소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김대통령은 지금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 전대통령은 공보다 과가 훨씬 많다.그러나 공과를 따지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과 동서갈등을 푸는 일은 별개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영남지역의 정서가 거기에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고 동서화합을 얘기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지금은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큰 마음으로 동서가 하나가 된 가운데 남북의분단구조를 청산하여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나가야 할 때라고 믿는다. 金 東 敏 한일장신대 교수·언론학
  • [사설] 한·러 정상회담의 성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3박4일간의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30일 다음 방문국인 몽골로 떠났다.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건강문제로 당초 떠날 때의 우려와는 달리 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이를 통해 한때 외교관 상호 추방사태까지 빚었던 양국관계가 전면 복원(復元)되게 됐다는 것은 커다란 외교적 성과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 전반을 위해서도 더없이 다행한일이 아닐 수 없다. 정상회담의 성과는 러시아측이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반도뿐 아니라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공고하게 할 남북한 사이의 접촉과 생산적 대화를 촉진하려는김대중정부의 정책에 지지를 표명한다”고 적시(摘示)한 대목에 잘 나타나있다. 러시아는 한반도 분단은 물론 6·25전쟁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엄연한주변국이다.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앞으로도 통일문제·긴장완화·군축문제등 한반도와 관련해 결코 소외될 수 없는 세력이다.그런 점에서 김대중대통령이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한 ‘6자회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풀어가려는 구상은 합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4자회담’ 당사국들이 각기 이해관계가 달라서 ‘6자회담’으로건너뛰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그런 사정은 러시아도 잘 알고 있다.그럼에도 원칙과 정책방향을 그렇게 잡아두면 언젠가는 길이 트일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특히 양국이 모든 국가의 핵확산금지조약(NPT)·화학무기금지협약(CWE) 가입을 희망하면서 94년 미국과 북한간 제네바 핵합의의 성실한 이행을강조한 부분에 주목한다.러시아는 아직도 북한의 군비체계나 핵문제와 관련해 결코 작지 않은 지렛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북한의 핵문제나 미사일 수출문제 해결이 한결 쉬워지리라 믿는다.이 분야와 관련,러시아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한국과 러시아는 또한 한동안 위축됐던 양국간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하기로 했다.그중에서도 나홋카 공동공단 개발협정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현지 인프라에 취약성이 없지 않고 러시아의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성으로해서 조심스럽기는 하나 잘만 된다면 11년 뒤에는 한반도 접경과 인접한 연해주에 무려 100만평에 달하는 합작공단이 조성된다.이는 양국에 경제적 이득 외에도 여러가지 긍정적인 과실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한국과 러시아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 협력한다는 것은 동북아 정세 전개의 중요한 변수라 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이번 김대통령의 방문외교는 의미가 매우 크다.
  • 추안 태국총리 離韓

    추안 릭파이 태국총리가 2박3일간의 공식 방한일정을 마치고 27일 오후 이한했다. 추안총리는 방한기간중에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경제·통상·안보분야의 실질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으며,한국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이도운기자
  • 3黨 총무회담·국회본회의 이모저모

    국회가 27일 회기 연장을 통해 쟁점 법안을 둘러싼 이견 조율에 들어갔다. 여야 모두 물리적 충돌을 피하고 대화 모색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마련한 셈이다.그러나 정부조직개편과 노사정위 구성 등 민감한 현안을 놓고 여야간 의견 접근이 쉽지 않을 전망이어서 진통이 예상된다. ?拉箕ト릿? 국민회의 손세일(孫世一) 자민련 강창희(姜昌熙)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는 이날 오후 1시30분 국회 귀빈식당에서 회기 연장을 위한회담에 들어갔다.국민회의는 오는 30일까지,자민련과 한나라당은 내달 4일까지 회기를 연장하는 안을 내놨다가 결국 내달 3일까지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알려졌다. 손총무는 회담 직후 기자들과 만나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고 국회를 합의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타협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만하면 잘 됐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이총무도 “회기 연장까지 한 마당에 여야가 단독 처리와 물리 저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며 “의정 파행은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당초 한나라당은 이날 본회의에서‘퇴장 후 여당 단독처리’방식으로 ‘노사정위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 통과를 묵인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총무회담을 통해 정부조직개편안과 함께 계속 논의키로 합의함에 따라 타협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정부조직개편안 가운데 대통령 직속의 중앙인사위 설치와 국정홍보처 신설 조항에는 여전히 강력 반대하고 있어 합의 처리가 불투명하다는 분석이다. 다만 개방형 임용제의 범위는 여당의 20%안과 야당의 10%안을 절충한 15%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알려졌다.기획예산처의 예산기능을 재경부로 이관해야한다는 한나라당의 주장도 다소 신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전언(傳言)이다. 한편 이날 총무회담 도중 한나라당 김문수(金文洙)의원이 “결식학생 중식지원을 위해 280억여원을 이번 추경예산에 추가 배정해야 한다”며 갑작스럽게 회담장에 뛰어 들어가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김의원은 “예산청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3당 총무들이 꼭 반영해 달라”고 고함을 지르자 3당 총무가 이구동성으로 “총무회담중에 이게 뭐냐”“예의를 지켜라”“3당이 격식을 갖춰 회담을 하는데 무법자냐 뭐냐”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擥뽁맛? 당초 오후 2시로 예정된 이날 본회의는 예결위 심사가 늦어지는 바람에 두차례씩이나 연기됐다.진통끝에 여야는 예결위에서 수정 결의한 안을그대로 통과시켰다. 이날 본회의에서는 국민회의 박광태(朴光泰)·천정배(千正培)의원, 한나라당 김광원(金光元)·김문수(金文洙)의원, 자민련 어준선(魚浚善)의원 등이 5분발언을 통해 대한항공 사고와 지하철 파업,한일어업협정 관련 어민 피해보상 문제 등을 도마에 올렸다. 박찬구 추승호 박준석기자 ckpark@
  • 韓-日 항공협상 성공적

    우리 정부가 올들어 처음 열린 한·일 항공협상에서 상당한 ‘전과(戰果)’를 올려 화제다.지난 1월20일 제주에서 열린 협상 결과를 토대로 건설교통부는 지난달 24일 기대이상의 결실을 따냈다.서울∼오사카(大阪) 노선은 주 9회 늘어나게 됐고 서울∼후쿠시마(福島) 노선은 주 4회 신설되게 됐다.서울∼센다이(仙台) 노선의 주 3회 화물기 증편도 관철됐다.이로 인한 연간 수익은 5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한일어업협상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가운데 이뤄진 일이어서 더욱 대비된다. 이같은 결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 후일담을 통해 밝혀졌다.전문성과 끈덕짐,그리고 치밀한 전략의 3박자가 어울려 이뤄낸 결과였다. 우리측 협상팀인 건교부 국제항공협력관실 咸大榮국장과 鄭日永과장 등 모두 7명은 협상 6개월전인 지난해 7월부터 3개월동안 ‘적진(敵陣)’ 탐색에들어갔다.운수성의 항공정책과 공항 현황,일본 항공사별 입장 등을 체크해나갔다. 일본측 실무협상 책임자인 류에이 마에다(前田隆平) 운수성 국제항공과장을 서울로 ‘모셔와’ 회유공세도 병행했다.협상 때는 노선 증편을 반대하는 일본 항공사 대표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폭탄주까지 곁들였다.“한·일 양국이 협력하지 않은채 항공자유협정이 발효될 경우 (두나라 모두) 미국에 앉아서 당한다”고 설득했다.일본 대표단은 나중에 “가장 힘든 회담이었다.한국 대표들처럼 집요하고 공격적인 사람은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는 후문이다. 咸국장과 鄭과장등 우리측 협상팀 7명 전원은 항공 및 경제학 분야 석사이상 학위 소지자들. 협상이 성공하기 위해선 전문성,집요함,탄탄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고 건교부 안팎의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 한나라 비주류중진들 李총재 압박

    한나라당 李會昌총재의 정국 운영방향을 둘러싸고 당내 비주류 중진들의 ‘훈수’가 잦아지고 있다. 특히 여야간 이견으로 총재회담이 늦어지자 “대승적 견지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며 은근히 李총재를 압박하고 있다.이번 주 중 총재회담이 열리지 못한데는 李총재의 정치력 부재가 한몫했다는 지적이다.장외투쟁후 여권의 정계개편중단 약속이 나왔을때 대화정국으로 나갔어야 하는데도 여러고리를 다는 바람에 총재회담의 시기를 놓쳤다는 분석이다. 10일부터 다시 임시국회를 연데 대해서도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세풍사건의주역인 徐相穆의원을 보호하기 위한 ‘방탄국회’라는 비난이 잇따르자 李총재의 지나친 집착의 결과라며 곱지않은 시선이다.최근 정치쟁점으로 떠오른내각제,국민연금,한일어업협정 문제 등에 대처하는 李총재의 전략,전술도 “미흡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달 집단지도체제 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한 李基澤 전총재대행은 “장외투쟁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는 등 현재 한나라당은 야당도 여당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라면서 “당의 움직임을 좀처럼 예측할 수 없다”고 李총재의당 운영행태를 비판했다.李전대행은 “현재 영남지역은 ‘반여(反與)’기류때문에 야당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야당을 지지하는 것은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주류에 속한 金德龍부총재도 최근 李총재의 대여 전략에 이의를 제기했다. 金부총재는 8일 총재단회의에서 “당 지도부가 여권내 내각제 논란을 둘러싸고 미온적 태도를 보여 오히려 당내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면서 “당 내분으로 이어져 스스로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고 충고했다. 金潤煥전부총재도 여전히 李총재와 거리를 두고 있다.“한마디 상의도 없이 나를 당 고문으로 앉혔다”며 불만을 표시할 정도다.李漢東전부총재는 金전부총재와 지난 6일 골프 회동을 통해 교감을 나눴다.金守漢전국회의장과 徐廷和의원도 자리를 같이 했다. 이에 대해 李총재쪽은 “현재 당내 비주류는 뚜렷한 ‘실체’없이 ‘과대포장’돼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당을 아끼는 일부 중진들의 건전한 비판일 뿐 비주류가전면에 나설만한 명분도 없고,여건도 조성되지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 정치공세 보다 대안제시에 무게/李會昌 총재 오늘 기자회견

    한나라당 李會昌총재의 2일 기자회견은 대여(對與)정치공세보다는 정책대안 제시에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여야간 정쟁(政爭)에 식상한 여론을 감안,여당의 정국 운영을 비난하거나 정책 혼선을 신랄하게 꼬집기 보다 대국민 메시지와 비전을 부각시키는데 역점을 둘 것으로 알려졌다.한 측근은 “정책야당으로서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李총재 기자회견의 초점은 경제문제와 대북관계,정국운영 등 세가지 정도로 압축될 것으로 보인다.李총재는 특히 정국 정상화를 위한 총재회담에 긍정적인 의사를 피력할 방침이다. 金大中대통령의 지난달 24일 기자회견 언급 내용을 ‘진일보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충분한 의사’를 밝힐 예정이다.辛卿植사무총장은 “부정적인 내용은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측근은 “날짜를 명시하는 단계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원론적인 언급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며 “분위기나 시점으로 볼때 기자회견 이후 총재회담을 추진하는 실무협상이 가속을 받을 것”이라고내다봤다.향후정국운영의 물꼬를 트게 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상생(相生)의 정치를 위해 여권이 인위적 정계개편 등 야당파괴 기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듭 제기할 작정이다. 경제문제와 관련,李총재는 실업대란과 노사갈등,‘빅딜’의 부작용,한일어업협정의 ‘실패’에 따른 어민 피해,국민연금 도시지역확대의 문제점 등을도마에 올려 사안별로 대안을 내놓을 것으로 전해졌다.대북관계에서는 ‘햇볕정책’의 부작용을 거론하고 정부의 ‘일괄타결 방식’이 북한에 이용당할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점진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요구할 참이다.
  • 韓-日 문화인협의회 신설…새달 실무협의

    ┑도쿄 黃性淇 특파원┑한일 정부는 문화교류를 다룰 ‘한일 문화인협의회’ 신설에 합의,3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 방한때 정상회담에서 확인키로 했다고 도쿄(東京)신문이 13일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협의회 설치는 지난해 10월 일본을 방문한 金大中대통령이 오부치 총리에게 처음 제안했다. 일본 정부는 협의회가 두 나라 국민의 상호이해를 깊게 하고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공동개최나 일황 조기방한의 환경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3월초 양국정부 실무자 회의를 열어 협의회 명칭이나 토의사항,구성원에 대해 논의한다.marry01@
  • ■黨政 한일漁協 후속대책 논의

    정부와 국민회의는 한일어업협정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어민들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정부와 국민회의는 28일 오전 여의도당사에서 당정협의를 가졌다.당정은 일본에 피랍된 7척의 어선과 선원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일본 수역내에서 철수하지 못한 우리 어민의 어구 회수도 추진하기로 했다. 특히 한일간 쟁점인 대게 및 장어조업문제도 집중 논의했다.일본측이 워낙강경한 입장이어서 이를 완화시키는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당정을 이를위해 다각적인 채널을 활용하고 있다.일본 외무성및 정치권을움직여 일본 농수산부를 설득하겠다는 전략이다.일본을 방문중인 金琫鎬 국회부의장은 다케시타 전총리,사토 고코 자민당 국제어업문제 특별위원장 등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일본통’인 朴泰俊자민련총재는 이미 26일 다케시타전총리,고코위원장과‘전화 외교’를 펼쳤다.金泳鎭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도 이날 나카가와일본 농수산상과 면담을 갖고 협조를 구했다.어업협상의 ‘사령탑’인 金善吉해양수산부장관은 30일 도쿄로 날아간다.양국간 장관회담을 갖고 교착상태에 빠진 협상을 마무리 짓겠다는 계획이다.외교마찰에 대비,외교통상부는 해양수산부와 협조체제를 갖췄다. 당정은 특히 한일어업협정과 관련,대국민 홍보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최근의 상황은 지난 34년간 구(舊)어업질서가 신질서로 전환하는데 따른 과도기적 진통이라는 점을 부각하기로 했다. 한편 국회 농림해양수산위는 이날 오후 전체회의를 열어 한일어업협정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한나라당의원들은 특히 실무협상의 지연이유와 어민 피해보상대책,배타적 경제수역내에서의 조업금지에 따른 대책등을 집중 추궁했다.
  • 지역감정 부추기는 야당집회

    경제청문회가 여당 단독으로 열리고 있는 가운데 야당은 장외투쟁에 열을올리고 있다.한나라당은 오는 24일 경남 마산역 광장에서 ‘정치사찰·지역민생파탄규탄’ 대규모 집회를 갖고 이어 다음주 중에는 경북 구미에서 연쇄 옥외집회를 가질 준비를 하고 있다.한나라당은 겉으로는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명분으로 옥외집회를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산 창원 울산 구미 등 경남북 공단지역을 포함한 영남권의 지역정서에 영합하고 이를 부추겨 대여 정치공세를 강도 높게 펴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들은 삼성자동차·한일합섬·LG반도체 등 대기업의 연이은 퇴출과빅딜 조치로 최근 들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기류가 크게 상승하고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공단 주변에서는 “대기업 빅딜은 경상도 기업을죽이기 위해 추진한 것” “전라도에는 실업자가 없다” “구미공단의 공장을 뜯어 광주로 옮기려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진작부터 난무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한나라당이 이같은 상황에서 지역감정을 조장·선동하는 대규모 집회를 갖는 것은 책임 있는 공당이 취할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깊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경제적 불만과 지역감정이 팽배한 곳에서 대중선동으로 군중심리를 자극하고 그 결과 과격시위가 촉발되는 등의 불상사가 일어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결국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한나라당에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영호남 결속과 화해를 위해 시민단체는 물론 두 지역의 각 지방자치단체 등 민관(民官)이 발벗고 나서고 있는 이때 유독 정치집단인 야당만이 이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사이익을 얻어보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공동청문회를 위한 여야협상도 단 한 차례의 회담으로 등을 돌린 뒤 망국적인 지역감정에 호소하려는 태도는 의회정치의 틀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이다. 오늘날 야당이 엄동설한에 장외투쟁을 벌이게 된 데는 정국운영을 원만하게 이끌지 못한 여당의 책임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야당이 국제통화기금(IMF)체제 1년 만에 우리의 국가신용등급이 ‘투자적격’으로올라서는 등 어느 때보다 국난 극복을 위한 국민적 결의가 높아가고 있는데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한나라당 지도부가 냉철한 이성으로 돌아가 지역감정을부추기는 옥외집회 계획을 철회하기 바란다.또한 정부와 여당도 악성 유언비어 근절과 함께 영남지역 주민들의 소외감을 치유할 수 있는 특단의 정책적배려를 강구해 줄 것을 당부한다.
  • 임시국회 19일부터/회기 20일… 민생법안 처리

    여야는 15일 국회에 계류중인 규제개혁 일괄처리 법안을 비롯한 각종 민생 및 개혁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정기국회가 폐회된 뒤 오는 19일부터 20일간의 회기로 임시국회를 열기로 했다. 국민회의 韓和甲,자민련 具天書,한나라당 朴熺太 원내총무는 이날 오후 국회의장실에서 朴浚圭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3당 총무회담을 열어 이같이 합의했다. 여야 3당 총무는 회담에서 규제개혁 법안 등 민생 관련 법안들을 연내에 처리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李會晟씨 구속에 따른 ‘세풍 및 총풍사건’에 대한 여야 공방이 계속되고 있고,한나라당이 千容宅 국방장관 해임 건의안을 다시 제출한 데다 규제개혁 일괄처리 문제,교원정년 단축 문제,한일어업협정 비준 동의안 처리문제 등에 대해서도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임시국회도 난항이 예상된다. 이에 앞서 국회는 이날 법사·재경·통일외교통상 등 7개 상임위를 열어 한일어업협정 비준 동의안 등 계류법안 심의를 계속했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韓·日 자유무역협정 추진/金 총리 오늘 訪日… 오부치와 회담

    한일 각료간담회가 28일 金鍾泌국무총리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 및 양국 경제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고시마 시로야마 관광호텔에서 열린다. 양국은 이번 각료간담회에서 대북 정책 공조,경제·통상 협력 확대 등 양국의 현안을 포괄적으로 협의한다.양국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금창리 지하 의혹시설 건설 등에 대한 우려를 공동으로 표명하고,대북 정보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합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양국은 특히 ‘21세기 한·일 경제관계연구회’를 통해 양국간 자유무역협정(FTA)체결 문제를 계속 검토해나가기로 의견을 모을 것으로 알려졌다. 金총리는 각료간담회에 앞서 열리는 오부치 총리와의 단독회담에서 대북 정책 공조방안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각료간담회가 끝난 뒤 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과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외무장관은 양국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일어업협정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간담회 내용을 발표한다. 이에 앞서 金총리는 이날 아침 서울공항에서 특별전용기편으로 일본으로 출발한다.
  • 韓­美 정상 뭘 논의할까

    ◎카트먼 방북 결과 토대 ‘北 지하핵’ 의견 조율/韓國 경제개혁 ‘보증’/외자유치 측면 지원도 갑작스런 이라크 사태로 ‘온다,안온다’설(說)이 무성했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한(訪韓)이 결국 ‘오는 쪽’으로 확정됐다.체류기간도 당초 예정된 1박2일보다 대폭 늘어나 3박4일로 결정됐다.20일 밤에 와서 23일 아침에 떠난다.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3박4일 동안 머무는 것은 6·25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후 처음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21일 오전 청와대에서 金大中 대통령과 1시간30분동안 정상회담을 갖고 곧바로 1시간동안 내외신 공동기자회견을 열 계획이다.이날 청와대에서는 국빈만찬도 예정돼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일정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기자회견과 만찬 사이에 잡혀 있는 ‘라운드 테이블(원탁회의)’모임이다.우리측 저명인사들과 클린턴 대통령이 특정한 주제를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간담회 형식.클린턴 대통령이 한·미 양국간 이해를 넓히기 위해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과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이 자리에는 우리측의 학계와 재계,문화계 인사 10여명이 참석한다. 이라크 사태로 APEC에도 불참했던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 방문을 끝까지 고집했던 것은 카트먼 미국 한반도 평화담당특사의 방북(訪北)과 관련이 깊다.미·북 고위급접촉 결과를 토대로 북한 지하핵시설의혹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양국정상간에 이뤄질 전망이다.미 행정부는 앞으로 6개월안에 지하시설의 성격을 규명하지 못할 경우,대북(對北)지원예산을 삭감당할 형편이어서 효율적인 한·미 공조의 확립이 절실한 실정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에는 이례적으로 바셰프스키 USTR(미 무역대표부)대표와 글릭맨 농무장관,데일리 상무장관 등 3개 경제부처 장관이 수행한다.미국은 우리의 경제개혁에 대해 “잘하고 있다”고 평가,외자유치를 돕는다는 방침이다.동시에 金대통령과 고어 부통령과의 회담때처럼 대미(對美)철강수출 급증에 대한 한국정부의 간접지원 의혹 등 일부 업종과 관련한 불공정 무역시비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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