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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군사대국 재무장하나-새 美·日 방위협력지침 해부

    일본 뿐아니라 한반도 등 동북아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올 미일방위 협력지침(가이드라인)이 이달 일본 국회에서 확정된다.이 지침으로 일본 자위대는일본을 벗어나 해외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길을 열었다.‘일본군’의 재탄생으로까지 보는 시각이 대두될 만큼 일본의 군사적 역할이나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키울 미일방위 협력지침을 해부해본다.[편집자주] 가이드라인으로 상징되는 새 미일안보체제가 한반도에 미칠 파장은 적지 않다.전문가들 견해가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대체로 북한의 전쟁도발 억지력은높아졌다는 데는 일치하고 있다. 유사시 미군에 비행기지나 군항(軍港)을 제공하는 수준이던 일본은 당당히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병참기지 역할 및 준전투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전투는 한미연합전력이 치르고 군수보급은 일본 자위대가 맡는 이른바 한반도 ‘3각 안보체제’가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억지력은 높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겐 긍정적이지 않은 면도 있다.가이드라인의 발효는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일본에 미국이 군사대국화의 길을 갈 수 있는 ‘통행증’을 부여한형국이 됐다. 일본 헌법을 개정해 교전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가 집권 자민당 총재 경선후보로부터 공공연히 제기되는 등 벌써부터 일본내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보인다. 이같은 일본의 군사적 역할 및 영향력 증대는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를 동반하게 되고 곧 동북아에서의 군비증강이 현실화할 수 있음을 뜻한다.군비증강은 한반도 주변의 긴장,대립의 고조로 이어진다. 중국 외교당국은 “새로운 분란을 야기하고 지역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경고하고 나섰다.북한도 일본의 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구실로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군사노선을 고집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미일동맹과 이에 맞서는 중국 러시아의 동반자 관계,일본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중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등 복잡한 동북아 질서는 가이드라인 이후 훨씬 미묘하게 얽히면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주변 4강의 힘의 역학관계는 21세기 통일을 꿈꾸는 한반도에 ‘현상고착’이라는어쩔 수 없는 선택을 계속 강요할 공산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으로선 당장 전쟁위협은 줄어들었지만 오랜 대일(對日) 불신이나통일여건을 따져볼 때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고는 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놓이게 된 것이다. 앞으로 한국은 새 미일안보체제의 투명성을 끊임없이 미일에 촉구해나가면서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관련,한일간 신뢰를 다층적으로 쌓아가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 한반도 유사시 후방에 전개될 자위대와 한국군이 어떻게 협력하고 자위대의 활동을 제한할 지도 주요한 과제가 됐다. 황성기기자 marry01@
  • ‘가이드라인’ 통과 이후 고개드는 日 헌법개정론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의 일본 중의원 통과직후 일본 정가에서 헌법 개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개헌론의 요지는 헌법 9조를 고쳐 자위대가 교전권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어서 주변국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집권 자민당 야마사키 다쿠(山崎拓)의원은 28일 요미우리(讀賣)와 회견에서 “헌법 개정을 자민당 총재선거의 공약으로 내걸겠다”고 밝혔다. 자민당내 4번째 파벌인 야마사키파를 이끌고 있는 그는 9월 총재선거에 입후보할 예정으로 안보문제에 보수적 입장을 보여왔다. 그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통해 국제적 안전보장에 일본이 적극적 역할을 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면서 “이는 헌법해석의 확대가 아닌 개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마사키 의원이 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호헌(護憲)입장인 당내 2위파벌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의원 등 유력 총재후보들과의 ‘차별화 전략’때문. 지난해 북한 미사일 발사와 3월 북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작선 침범사건 등을 계기로 일고 있는 ‘강한일본만들기’의 여론을 등에 업고있다. 요미우리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개헌하는 쪽이 좋다’가 53%로사상 최고지지율을 보인 것도 이런 일본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2차대전 패전뒤인 46년 제정된 일본 헌법은 9조에서 ‘육해공군의 군사력을 갖지 않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점령군 지시로 제정된 헌법을 자주헌법으로 개정한다’는 내용을정강으로 채택하고 있는 자민당 등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헌론이제기돼왔다.최근 사민 공산당을 뺀 여야4당이 헌법논의를 맡을 헌법조사회의 국회내 설치에 합의하기도 했다. 미국이 개입하는 국제분쟁에 가담할 수 있도록 한 가이드라인 법안 통과 이후 군사대국화에 발맞춘 개헌논의,유엔평화유지군(PKF)파병,유사법제 제정논의는 한동안 봇물처럼 터질 전망이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추안 태국총리 離韓

    추안 릭파이 태국총리가 2박3일간의 공식 방한일정을 마치고 27일 오후 이한했다. 추안총리는 방한기간중에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경제·통상·안보분야의 실질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으며,한국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이도운기자
  • 엘리자베스여왕 來韓…金대통령과 정상환담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내외와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내외는 19일 청와대에서 정상환담을 갖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발전 노력과 양국의문화 등 상호 공동관심사에 대해 환담했다. 김대통령은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우리의 외환위기 극복에 대한 영국의 지원과 대한(對韓)투자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2000년 서울 제3차 ASEM회의 준비과정을 설명했다고 배석한 박선숙(朴仙淑)청와대부대변인이 전했다. 김대통령은 또 한·영 국교수립 100여년만에 처음인 엘리자베스여왕의 방한을 환영했으며,두나라 정상은 지난 92년 영국 케임브리지 체류시절 및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참석차 버킹검궁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담을 화제로환담을 나눴다.엘리자베스여왕도 한국방문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뒤 서울 인사동 거리와 안동 하회마을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접하게돼 기쁘다는 뜻을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엘리자베스여왕과 부군 필립공이 김대통령 내외 초청으로 19일오후 방한,3박4일간의 방한일정을 들어갔다. 한편 외교통상부는 여왕 방한에 즈음해 홍순영(洪淳瑛)외교부장관과 데릭파체트 영국 외무담당 국무상은 20일 서울에서 한·영 사회보장협약에 서명한다고 밝혔다. 협약은 5년이하의 단기 파견근로자의 경우,본국의 사회보장보험료만 납부하면 체류국의 사회보장보험료는 상호 면제해 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있다.지금까지 양국에 상호 파견된 근로자들은 본국과 주재국에 이중으로 사회보장보험료를 내왔다. 한국과 영국정부는 엘리자베스 여왕 방한기간에 맞춰 한·영 재계회의와 한·영포럼을 개최,양국간 경제협력 강화방안을 논의한다.
  • 英 엘리자베스여왕 19일 국빈방문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내외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내외의 초청으로오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간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국빈방문한다고 박지원(朴智元) 청와대대변인이 12일 공식발표했다.엘리자베스여왕의 방한은 지난 1883년 한·영 수교이래 영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이다. 두나라 정상은 이희호(李姬鎬)여사와 엘리자베스여왕의 부군 에딘버러공이참석한 가운데 도착당일인 19일 청와대에서 양국 정상환담을 갖고 우호협력증진 방안과 문화·예술 등 공동 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엘리자베스여왕의 방한을 계기로 한·영포럼과 한·영재계회의가 열리는 등 두나라간 우호협력관계는 한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박대변인도 “엘리자베스여왕은 방한기간에 가능한 많은 지역을 방문,우리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많이 접할 계획이며,이는 두나라 국민의 우의와 이해를 더욱 두텁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여왕의 이번 방한은 로빈 쿡 외무장관이 수행하며 영국기자 50여명이 동행,취재한다.특히 재계회의 참석을 위해 영국기업인 30여명과 한국전 참전 영국군인 80여명을 비롯,영연방 참전군인 170여명이 함께 방한한다. 엘리자베스여왕 방한일정은 ▲19일=서울공항 도착,국립묘지 헌화,공식환영식 및 정상환담,미동초등학교방문 ▲20일=산업시찰,한·영재계회의 참석자면담,이화여대 방문,인사동 방문,국빈만찬 참석 ▲21일=안동 하회마을 등 방문(에딘버러공은 판문점 방문),국회의원 면담,콘서트 참관 ▲22일=한·영 시민에 대한 훈장 수여,영연방 참전용사면담,영국 문화원 및 성공회 방문,이한. 양승현기자
  • 趙錫來효성회장 경제인회의 기조연설

    趙錫來 효성그룹 회장은 8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31회 한일경제인회의 기조연설에서 양국간 자유무역협정체결과 산업구조조정 가속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趙회장은 이날 ‘21세기 아시아의 비전과 한·일협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아시아는 유럽연합(EU)의 공동시장과 같이 자율적으로 클 수 있는 매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한·일 양국이 먼저 굳건한 신뢰관계를맺고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 협력 내용으로 한일 자유무역협정 체결 산업구조조정을 통한 과잉구조 해소 투자교류 활성화 등을 제안했다. 趙회장은 이어 “자유무역협정은 한일 협력관계에서 획기적 전환점이 돼 양국의 생산성을 높이고 기술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유무역이 성사될 경우 한일무역역조의 심화를 우려하는 의견에 대해서는한국의 10배가 되는 일본 시장의 10%만 한국이 가져도 시장규모가 2배가 커지는 효과가 있고 일본 경제에도 성장요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 韓-日 항공협상 성공적

    우리 정부가 올들어 처음 열린 한·일 항공협상에서 상당한 ‘전과(戰果)’를 올려 화제다.지난 1월20일 제주에서 열린 협상 결과를 토대로 건설교통부는 지난달 24일 기대이상의 결실을 따냈다.서울∼오사카(大阪) 노선은 주 9회 늘어나게 됐고 서울∼후쿠시마(福島) 노선은 주 4회 신설되게 됐다.서울∼센다이(仙台) 노선의 주 3회 화물기 증편도 관철됐다.이로 인한 연간 수익은 5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한일어업협상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가운데 이뤄진 일이어서 더욱 대비된다. 이같은 결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 후일담을 통해 밝혀졌다.전문성과 끈덕짐,그리고 치밀한 전략의 3박자가 어울려 이뤄낸 결과였다. 우리측 협상팀인 건교부 국제항공협력관실 咸大榮국장과 鄭日永과장 등 모두 7명은 협상 6개월전인 지난해 7월부터 3개월동안 ‘적진(敵陣)’ 탐색에들어갔다.운수성의 항공정책과 공항 현황,일본 항공사별 입장 등을 체크해나갔다. 일본측 실무협상 책임자인 류에이 마에다(前田隆平) 운수성 국제항공과장을 서울로 ‘모셔와’ 회유공세도 병행했다.협상 때는 노선 증편을 반대하는 일본 항공사 대표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폭탄주까지 곁들였다.“한·일 양국이 협력하지 않은채 항공자유협정이 발효될 경우 (두나라 모두) 미국에 앉아서 당한다”고 설득했다.일본 대표단은 나중에 “가장 힘든 회담이었다.한국 대표들처럼 집요하고 공격적인 사람은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는 후문이다. 咸국장과 鄭과장등 우리측 협상팀 7명 전원은 항공 및 경제학 분야 석사이상 학위 소지자들. 협상이 성공하기 위해선 전문성,집요함,탄탄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고 건교부 안팎의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3·30 재보선 현장/2與-野

    국민회의와 자민련 지도부가 3·30 재보선 현장에서 공조의지를 다졌다.양당은 23일 안양시장 보선에 출마한 국민회의 李俊炯후보 사무실에서 합동 지도부회의를 가졌다.양당 지도부는 선거때까지 현장을 함께 훑는 ‘철벽공조’를 다짐했다.가라앉은 선거 분위기를 띄우는데 최선을 다하지는 의지도 다졌다.양당공조를 통해 투표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여성과 노인 자영업자에 대한 접촉을 늘리기로 했다.낮은 투표율에서는 확실한 지지층의 투표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양당은 25일엔 시흥,선거종반엔 구로을 지구당에서도 합동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국민회의 趙世衡총재권한대행은 이날 회의에서 “지지층들을 엮어서 투표소까지 가도록 연결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민련 朴泰俊총재는 ‘지명도가 높은 자민련의원을 이 지역 선거지원에 투입해달라’는 국민회의측 요청에 대해 “필요한 자민련 의원들을 추천해달라”고 화답했다. 양당은 합동간부회의에서 ▒안양교도소 이전 ▒안양지청·안양지원 신설▒가축연구소이전 ▒새마을호 안양역 정차 등 이 지역 숙원사업 해결을 적극 지원키로 약속하기도 했다. 합동회의에는 국민회의에서는 趙대행을 비롯해 金令培 安東善 부총재,鄭총장,韓和甲총무,張永喆 정책위의장,金玉斗 지방자치위원장,鄭東采 기조위원장,尹鐵相 조직위원장,鄭東泳대변인 등이 참석했다. 자민련에서는 朴총재,金龍煥수석부총재,朴俊炳총장,具天書총무,車秀明정책위의장,李完九대변인 등이 참석했다.당사를 옮겨놓은 것처럼 고위 당직자들이대거 참석했다. [곽태헌 tiger@] 한나라당의 3·30재보선 전선(戰線)에 비상을 걸었다.초반 판세가 심상찮다는 자체 분석때문이다.특히 구로을과 시흥지역에 적신호를 켰다.자금난과 조직열세를 느끼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3일 안양 시흥 첫 정당연설회에 지도부등 중진이 총출동했다.위기 탈출을위한 시발점으로 삼으려는 분위기였다. 이날 안양시 안양1동 ‘2001 아울렛’ 매장앞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李會昌총재는 국민연금,한일어업협정 등 현정권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특히 한일어업협정은 이 나라의 영원한 자존심을 짓밟는 국치”라면서 “올바르게 가는 정치는 협력할 것이지만 엉터리로 가는 정치는 끝까지 바로 잡겠다”말했다.李총재는 또 “우리당 愼重大후보는 공무원생활 23년 동안 돈봉투 한번 받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라면서 “60만이나 되는 거대도시 안양을 이끌어갈 시장은 정치인보다는 풍부한 행정경험을 갖춘 행정가여야 한다”고 愼후보의 지지를 호소했다. 愼후보는 “공직생활에서 배운 풍부한 행정경험을 안양을 위해 쏟겠다”면서 “시장이 되면 지역구분없이 탕평인사를 하고 경기교육대학을 유치하고고등학교 3개교를 신설하여 고교입시 탈락생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겠다”고말했다. 朴槿惠부총재는 “안양발전은 정말 필요한 사람을 뽑는 현명한 선택으로만가능하다”면서 “정치가 깨끗해져야 살기좋은 사회가 되는 만큼 오랜 공직생활을 깨끗하게 해 온 愼후보를 뽑아달라”고 호소했다. 李漢東전대표도 조목조목 현 정권의 실정을 비판한 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안양토박이’,청렴·결백한 행정전문가 愼후보를 뽑아달라”고 호소했다. [박준석 pjs@]
  • [‘99 지구촌 점검] (1) 총론

    천연자원 확보를 둘러싼 국가간 갈등은 인류의 전쟁사를 지배하는 첫번째 요인으로 꼽혀왔다.최첨단의 정보전쟁이 도래할 미래에도 천연자원은 여전히국제사회 분쟁과 역학구도의 커다란 축이될 것이다.부존자원의 고갈이 인류를 위협하고,본격적인 경제전쟁시대가 전개될 21세기를 앞두고 천연자원을둘러싼 지구촌의 동향과 이슈 등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이라크가 미국의 경제제제 조치를 벗으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경제전문가들은 ‘제2의 중동붐’이 일것으로 예상한다.사우디에 이어 세계 제2의 석유매장국인데다가 가스매장량도 3조㎥에 달하기 때문이다.미국의 공습을 1주일걸러 한번씩 받으면서도 버티는 이라크의 무기는 바로 이 천연자원. 국제사회를 끊임없이 긴장으로 몰고 있는 천연자원은 다채롭다.아시아인의 주식인 쌀과 농산물이 그렇고 시베리아 광할활 대지에 묻혀있는 천연가스,아프리카 미답의 천연 자원보고 등이 그것들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지하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극에 달한다.민주와 독재,단순민족갈등으로 비쳐지는 내전의 이면에는 모두 천연자원 확보라는 경제논리가 숨어있다.앙골라 라이베리아 콩고 등은 다이아몬드와 금의 보고.유정지대인 카빈다 지역을 둘러싼 앙골라 정부군과 반군의 골깊은 내전 등은 아프리카를 피의 살륙장으로 만들고 있다. 중국 티베트에서 발원한 메콩강 일대의 풍부한 수자원과 목재 천연가스는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등 아시아환란의 여파에서 재도약을 꿈꾸는 나라들의 지렛대다. 시베리아의 자원 역시 러시아 부흥의 강력한 무기 역할을 하고 있다.지난달 중국과 러시아는 40억달러 규모의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부를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건설에 협력키로 했다.또 시베리아 지역내 19개 자치정부가 자원의위력을 들어 끊엄없이 독립을 향한 도전장을 내고 있다.지난해 말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아시아 언론과 쌀’회의는 우루과이라운드 등 선진국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아시아가 쌀주권을 찾으려는 노력의 하나다.오는 5월 ‘쌀안보’워크숍이 열릴 예정이다. 한일 어업협상에서 보듯 배타적 경제수역(EZZ)등 수역 확보전은 석유 못지않은 자원전쟁이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崔麟

    1949년 3월 20일 서울지방법원(구 대법원 건물)대법정.법정안은 발디딜 틈도 없이 초만원이었다.오후 1시 정각 검찰관과 재판관이 입장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재판관의 뒤로 법정 정면에는 중앙에 태극기를 두고 한 쪽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휘호가 걸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3·1독립선언서’가 걸려 있었다. 피고인석에는 백발에 수척한 모습의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그의 나이 71세,이름은 최린(崔麟)이었다.‘3·1의거’ 당시 오세창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바로 그 최린이었다.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지 5일만인 49년 1월 13일 명륜동 자택에서 체포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중의 한 사람으로,청장년 시절 항일운동에 몸바쳤던 그가 해방된 조국의 법정에서 민족반역자로 지목돼 심판을 받는 것은 민족의비극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서성달(徐成達) 검찰관이 그의 죄상을 읽어내려갔다.‘▒죄명:반민법 제4조 2항(중추원 참의),3항(칙임관이상의 고관),10항(친일단체의 수뇌간부)위반.▒범죄사실:피고인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여 보성중학교장 및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하고,기미독립운동시 33인의 1인으로서 천도교회의 대표로 기독교,기타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음으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그 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등 장로로 있었던 자인 바, 1)1934년 이른 봄부터 1937년까지의 약 2년여,1939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시까지의 약 5년여에 도합 7년여간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 참의로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의하여 총독정치에 기여하고, 2)…’.이어서 검찰관이 기소장 낭독을 마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서순영(徐淳永) 재판장이 경력을 물은 뒤에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그는 “기미년 당시 일제에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뿐이다”며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최린(1878∼?,창씨명 佳山麟)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그의 집안은 중인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후에 그가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해권력에 집착한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같은중인 출신인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변절에 대해서도 이같은 논리를 펴는 견해도 있다. 청년시절 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자임은 사실이나 그 무렵그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회의론을 펴는 견해도 만만찮다.1909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천도교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그는 1차대전 종결후 ‘민족자결주의’ 물결과 1919년 2월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선포하자 이에 고무돼 ‘3·1독립선언’에 가담하였다. ‘3·1의거’ 당시 그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가 이 일로 체포돼 재판정에서 행한 발언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그는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도저히 조선의 안녕·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919.7.17 예심조서)고 진술하였다. 또 독립선언서 선포와 관련,“…본래의 의사는 극히 온건한 수단에 의하여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민을 선동하는 것 같은 문귀 등은피한 것이므로 우리들의 선언서를 본 사람은 그러한 폭동에 가담할 리 없으리라고 생각한다”(일자 미상)고 진술하였다. 첫번째 진술은 일제의 ‘한일합병’ 논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두번째 진술내용은 자신들이 주도한 ‘3·1의거’를 ‘폭동’ 운운하고 있는 그가 과연 ‘민족대표’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또 재판장이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일본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결국 그가 말한 ‘독립국’은 일제의 통치를 사실상 인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치국’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그가 나중에‘자치운동’에 나서는 것과 무관치 않다. ‘3·1의거’로 의거 당일 일경에 체포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21년 12월 22일 일제당국의 ‘배려’로 가출옥하였다.‘3·1의거’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총독은 그가 표방한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할 작정이었다.그의 가출옥 배경에는 사이토의 정치참모인 아베(阿部充家,‘京城日報’사장 역임)의 공작이 있었다. 그가 가출옥한 직후 아베가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날의 형세로보아 민원식·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 세력을 이룩하기는 어렵고,간접사격으로…일을 꾸미자면…여기에는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들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1921년 12월 29일자)라는 귀절이 보인다.‘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최린보다 앞서 가출옥(1921.10.19)한 육당 최남선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이번에 최린군을비롯하여 제군의 출감을 보면서 백열(柏悅)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특히 당사자들도 선생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있습니다… ’(1921년 12월 25일자,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서 입수) 1926년 9월 그는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구미 각처로 여행을 떠났다.당시 파리에 체류중이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의 염문이 떠돌던 시기가 바로이 무렵이었다.그 해 10월말 일본에 도착한 그는 다시 아베를 만나 “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고,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며 ‘조선자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친일’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1933년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면서 부터다.이듬해 4월 그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더니 8월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동아(東亞) 제(諸)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매진할 것,특히 조선은 일선융합(日鮮融合)·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외쳤다. 37년 다시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해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보도를 적극 독려하였다.이 무렵 그는 총독부의 전시 최고심의기구인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후방지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면서 전쟁지원에 협조하기도 했다. 또 1941년 8월에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을 거쳐 10월 이 단체가 윤치호(尹致昊)계열의 흥아보국단과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탄생하자 단장에 취임하였다.징병제 선전과 학병권유에 앞선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일제 패망직전인 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언론단체를 조직,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짧은 ‘항일’에 비하면 그의 ‘친일’은 길고 열렬했다.해방후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반민특위에 구속돼 민족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 49년4월 20일 3회 공판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재판과정에서 그는 다른 피고인에 비해 비교적 솔직한 참회로 재판부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정을 샀다.심지어 그는 “민족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사죄해 법정안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이후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그는 친일한 동기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 망명도,자살도 하지 못하고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털어놓았다.결국 그는 부모에 대한 효(孝) 위에 나라에 대한 효,즉 충(忠)이 있음을 몰랐던 셈이다. 정운현
  • “한일漁協 따라 줄인 감척선박 활용”…金국무총리

    金鍾泌국무총리는 4일 한·일어업협정에 따른 감척(減隻)선박대책과 관련,“수협 등 민간기관이 북한과 합작회사 등을 설립할 경우 감척선박을 활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金총리는 국회 본회의 경제 및 사회·문화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감척선박을북한에 지원하는 방안에 대해 “북한과의 교류협력 및 상호이익 증진에 바람직하다”면서 이같이 답변했다.金총리는 한·일어업협정 협상과정에서 조업대상에서 누락된 ‘쌍끌이어선’문제에 대해 “조속한 시일안에 일본측과 협의해 조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그래도 불가능할 경우 별도 대책을 강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日대중음악 50년’ 서울 강연

    일본 대중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강연회가 오는 3월2,3일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과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주최하는 ‘일본 포퓰러음악의 50년,그 주류와 언더그라운드’주제의 이 강연회에는 권위있는 음악평론가 호소카와 슈헤이씨(44·도쿄공업대학 조교수)가 강사로 나와 지난 50년간 일본 팝뮤직의 변천을 되돌아본다. 엔카,록,그룹 YMO로 대표되는 테크노 팝스,재즈 등 일본 대중음악의 줄기를 살펴보고 음악사에 남을 만한 40곡을 선정,다양한 영상자료와 함께 소개한다.또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한일 음악교류 및 협력에 대해 전망하는 시간도 갖는다.호소카와씨는 “한국에서는 80년대부터 일본의 대중음악이 비공식적으로 들어와 젊은층이 이를 즐기고 있다고 들었다”며 “이번 강연회가 일본 대중음악의 이해를 도와 양국 문화교류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음악원 민경찬 교수가 통역 및 해설을 돕는다.4일 부산경성대학교,7일 제주관광민속관 등 지방강연일정도 마련돼있다.(02)765-3011李順女
  • 與, 한일漁協 ‘海風 차단’나섰다

    두 여(與)가 ‘해풍(海風)’차단에 나섰다.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어민들의 피해는 갈수록 심각하다.한·일간 외교마찰 조짐마저 보인다.새 한·일어업협정 이행 유보로 야기됐다.전략은 전방위(全方位)다.일본측을상대로 의원외교를 가동했다.‘어심(漁心)’을 캐기 위한 조사단도 보냈다. 국민회의에서는 金奉鎬국회부의장이 선두에 섰다.27일 일본으로 출국했다.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농수산상 등 일본측 각료들을 만날 예정이다.일본이 나포한 우리 선원과 어선 송환을 요구할 예정이다.협상 재개를 위한 일본측 협력도 요청키로 했다.출국에 앞서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주한일본대사를 만나 양국 입장을 조율했다. 자민련에서는 ‘일본통’인 朴泰俊총재가 가장 바쁘다.지난 26일 사토 고코 일본 자민당 국제어업문제위원장과 전화통화를 했다.두 가지를 요구했다.첫째,일본에 억류된 한국 어선 및 선원 석방을 위해 적극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또 일본 순시선의 나포를 피해 어민들이 빠져나오면서 두고온 어구(漁具)를 되돌려달라고 주문했다.고코 위원장으로부터 적극 협조를 약속받았다. 국민회의는 이날 간부회의에서 조속한 실무협상 타결을 촉구했다.또 한나라당측 공세 차단도 시도했다.한나라당은 협상 난항으로 우리 어민만 피해를입고 있다고 연일 공세다.鄭東泳대변인은 ‘무분별한 정치공세’라고 반박했다. 국민회의는 金泳鎭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포항과 속초 등 동해안 항구도시에 보내기로 했다.자민련은 이날 정부측과 합동으로 어민피해조사단(단장 金東周의원)을 급파했다.부산과 포항 기장 영일 통영 등 5개 지역에서 이틀 동안 활동할 예정이다.
  • 金대통령, 개혁 계속추진 경제재건 힘모아야

    金大中대통령은 5일 오후 대한상공회의소(회장 金相廈)가 주최하는 신년인 사회에 참석,“경쟁력이 없는 부분은 과감히 정리하고 튼튼한 재무구조와 국 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해야 할 것”이라면서 “올해는 개혁과 재건의 한해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이날 3부 주요인사와 경제 5단체장,언론계,학계,사회단체,노동 계 등 각계 대표 및 주한 외교사절 등 1,100여명과 새해인사를 나눈 뒤 “작 년 한해 우리가 힘들여 이룩한 개혁의 큰 틀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하며,불경기를 이겨내고 경제재건에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이같 이 말했다. 이어 “올해는 반드시 나라경제를 튼튼한 기반 위에 세우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이라면서 “성장과 고용증대를 위한 효과적인 방안도 적극 모색,경 제재건을 힘차게 시작하겠으며 나라 경제의 중심을 고부가가치산업으로 바꾸 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이제 정치권도 나라경제의 개혁과 재건에 원군이 되어야 할 때”라면서 “정치가 잘되어야 여야도 살고 나라도 살 수 있다”고 역설 했다. 또 “여야 정치권 모두가 힘을 합쳐 개혁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지역 및 학 력차별 등 각종 차별을 일소해서 반드시 국민총화를 이루어내야 한다”고 덧 붙였다. 이날 신년인사회에는 윤관대법원장,金鍾泌국무총리,韓勝憲감사원장과 康仁 德통일·朴相千법무·千容宅국방·金正吉행정자치·李海瓚교육·姜昌熙과학 기술·申樂均문화관광·朴泰榮산업자원·南宮晳정보통신·李起浩노동부장관 등 국무위원,申鉉碻한일협력위원회장,金炳洙연세대총장,丁範鎭성균관대총장, 張裳이화여대총장 등 학계,具平會무역협회회장,鄭夢九현대그룹회장,具本茂LG 그룹회장,朴定求금호그룹회장,孫吉丞SK그룹회장,朴容旿두산그룹회장 등 경제 계,車一錫대한매일사장,尹世榮서울방송회장 등 언론계,朴仁相한국노총위원장 등 노동계,徐燉珏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등 종교계 인사가 참석했다. [梁承賢 yangbak@]
  • 친일의 군상:18/명성왕후 시해 가담 禹範善(정직한 역사되찾기)

    ◎명성왕후 시해·시신 소각 등 지휘/‘씨없는 수박’ 만든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부친/무관 출신… 친일 개화세력과 돈독한 관계 유지/일 공사 미우라에 포섭돼 을미사변때 병력 동원/사건후 일 망명… 1903년 일 지방도시서 피살 일본인 여류저술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84)씨는 지난 90년 ‘나의 조국(わが祖國)’이라는 책을 출간했다.얼핏 책 제목만 보면 본인의 자서전 같다.그러나 부제를 보면 남의 이야기를 쓴 책임을 알 수 있다.부제는 ‘우박사(禹博士)의 운명의 씨앗(種)’.부제에 나오는 한국인 성(姓)을 가진 ‘禹박사’는 과연 누구인가?흔히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주인공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1898∼1959)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쓰노다 여사가 우 박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데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1914년 도쿄에서 태어난 쓰노다 여사는 1960년대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일본 군인들의 전기(傳記)를 주로 집필하였다.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부터 한일관계사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이 87년에 출간된 ‘민비암살(閔妃暗殺)’이다.쓰노다 여사는 자료수집차 85년 한국을 방문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한국인 학생으로부터 민비(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조선군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이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쓰노다 여사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우 박사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육종학자였던 데다 그동안 그런 얘기를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쓰노다 여사는 이후 3년간 한일 양국을 오가면서 우 박사의 흔적을 뒤지고 우 박사 유족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나의 조국’은 이런 인연에서 탄생한 우 박사 집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1895년(을미년) 10월8일 새벽 5시30분경.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들이닥쳤다.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洪啓薰 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乾淸宮)으로 쳐들어갔다.이들은 국왕(고종)의 침전인 곤령전에 난입,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국왕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또 왕세자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폭도에게 상투를 잡힌 채 그가 휘두른 칼에 목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칼등을 맞아 목숨을 건졌다. ○시해후 시신능욕 만행도 이들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궁내부 대신 李景稙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고종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이어 왕비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울려퍼졌다.궁녀 3명과 왕비(민비,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였다.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李拓(순종의 본명)을 통해 피살된 자 중의 한 사람이 민비임을 확인하고는 민비의 시신를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솔밭에서 석유불에 태워버렸다. 여기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지않은 비화 한토막을 소개하면,폭도들은 민비를 시해한 후 민비의 시신을 능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77년 작고)는 당시 구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있던이시즈카(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 내용(‘…왕비를 끌어내 2∼3 군데 도상(刀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다…’)을 인용,“폭도들이 사체(死體)를 능욕했다”(‘日本の韓國倂合’·1966년 출간)고 폭로한 바 있다.이에 대해 崔文衡(한양대·사학과) 교수는 “시체에 대한 국부검사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능욕’이란 표현도 적당치 않다”며 “왕궁침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자들이 시간(屍姦,시체를 강간함)도 서슴치 않았다고 봐야한다”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일국의 왕비가 괴한 무리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능욕을 당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진상이다.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을미사변’은 비참하고 치욕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치욕스런 사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바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부친 우범선(禹範善·1857∼1903)이었다.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포섭돼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이 사건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상황이 전개되자 당초 임무대로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민비의 시신 ‘처리’도 맡았다.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20세 되던 해 무과 급제 민비 시해에 적극 가담한 우범선은 어떤 인물인가.대한제국 시절에 군인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나 ‘대한제국관원이력서’나 ‘구한국 관보(官報)’ 등 공식자료에는 그의 출신·경력사항이 나와있지 않다.야사(野史) 몇 군데서 일부 확인될 뿐이다.‘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라는 책에 따르면 우범선이 (별기군의) 참령관(參領官)으로 근무할 당시 생도들이 그를 ‘자네’라고 불러 그가 반발했던 사실로 봐 출신성분은 그리 대단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송촌 池錫永이 尹雄烈에게 그를 추천하면서 ‘무위영(武衛營) 집사(執事) 우범선은 구세군교가(九世軍校家)에 병학(兵學)이 한숙(숙달됨)한 인물’이라고 평한 걸로 봐 무술에 능했음은 분명하다. 실지로 우범선은 무인(武人)집안 출신으로 20세가 되던 해(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했다.별기군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건의로 1881년 한국군의 군제(軍制)개혁의 일환으로 창설되었는데 그가 친일로 나선 첫 실마리는 이로부터 시작된다.여기서 그는 친일 개화세력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정책에 눈을 떠 개화파에 가담하였다.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입,민씨 정권을 몰아내자 그는 개화파들의 천거로 군국기무처 의원이 돼 갑오(甲午)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훈련대가 창설되자 그는 제2대대장에 보임됐다. 훈련대는 나중에 일제의 친일세력 확장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이무렵 민비는 러시아와 손잡고 친일세력 축출을 기도하고 있어 친일세력으로선 궁지에 몰린 입장이었다.일본은 국면전환을 위해 공사를 이노우에(井上馨)에서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로 교체하였다.미우라는 부임직후 ‘여우사냥’ 운운하면서 민비시해계획을 세우고는 당시 한국에서 암약하던 일본인 낭인(浪人)패거리들을 끌어 모았다.낭인 가운데는 친일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와 시바 시로우(柴四郞)등 일본의 대표적 명문대 출신의 지성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이들 중 더러는 나중에 각료·중의원 의원 등을 지냈다). 미우라는 이들 외에 조선인 협력자를 물색하던중 평소 친일성향을 가진데다 당시 민씨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있던 우범선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우범선은 미우라에게 “조선의 정치개선은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어렵다”며 민비시해를 통한 친일정권 수립을 역설하였다.이어 훈련대 제1대대장 李斗璜(중추원 부찬의·전북 도장관 역임),제3대대장 李軫鎬(총독부 학무국장·중추원고문 역임) 등이 속속 포섭되자 미우라는 당초 계획날짜를 이틀 앞당겨 거사(?)를 결행하였다.결국 ‘을미사변’은 일본 공사관의 주도 아래 일본인 낭인무리와 조선인 친일군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일 여인과 결혼뒤 거처 옮겨 사건 후 우범선은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도쿄에서 망명생활 도중 사카이(酒井ナカ)라는 일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1903년 구레시(吳市)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해말 자객 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그의 비명횡사는 일본으로 도망갈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현재 그의 묘는 살해된 구레시와 도쿄 두 군데 있다.도쿄 청산(靑山)묘지에 있는 묘는 일본인 후원자가 유골을 분골(分骨)하여 그의 사후 1년 뒤인 1904년에 만든 것이다. 우범선에게는 우장춘 이외에 유복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차남은 명문 제1고등학교·동경(東京)제국대학 법과를 졸업,일본 유수의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였다.그는 모계(母系) 집안에 입적돼 호적상으로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다.반면 우 박사는 6·25 와중에 귀국,일생을 조국의 농업발달을 위해 연구에 전념했다.우 박사로서는 그 길이 아버지의 과오를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한·일 기업 전략적 제휴 모색/양국기업 간담회

    ◎자본투자·부품공장개발·유휴설비 활용 방안 등 논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일 일본 게이단렌(經團連)과 도쿄에서 한일간담회를 가졌다.양국은 기업간 전략적 제휴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한국의 사업구조조정에 일본 기업의 적극적인 자본참여를 요청했다. 이번 간담회에는 한국측에서 金昇淵 한화회장을 비롯한 철도차량 항공기 석유화학 발전설비 선박용엔진 자동차 화섬 등 7개 업종 21명의 대표가,일본측에서는 미쓰비시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 도레이 등 120여명이 각각 참석했다.일본측은 공동발표문에서 “한국의 산업구조조정이 한일간 새로운 경제협력의 가능성을 높여 줄 것으로 평가하며 간담회를 계기로 양국간 자본협력과 전략적 제휴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한국측의 업종별 참여업체와 제안내용을 간추린다. ●자동차 현대,대우,삼성 등 완성차 3사,부품업체인 동원금속과 자동차부품조합이 참가.일본 완성차업계의 한국 부품업계에 대한 외주구매 확대,부품의 상호공급,부품산업에 대한 일본 자본참여 확대,공동기술개발 및 선진국 배출규제에 대한 공동 대응 등을 제안. ●화섬 고합이 참가.한국기업의 증자 또는 매각시 일본기업의 참여와 양국간 생산물량의 조정,한국내 유휴설비의 일본기업 활용방안 등을 제시. ●석유화학 삼성종합화학,한화종합화학,효성이 참여.한화는 옥탄올과 PP사 업 매각에 일본업체의 자본참여를 제의. ●철도차량 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이공동으로 설립하는 통합법인의 대표로 현대정공이 투자제안을 설명.일본 철차제작사 및 부품사,종합상사 등에 대한 자본참여 요청과 제어기술의 설계 및 제작,신호 및 통신기술설계,시스템엔지니어링 등의 분야에서 상호협력을 제안. ●항공기 항공 통합법인의 대표로 대우중공업과 삼성항공이 참가. 통합법인지분의 50% 이내에서 일본업체의 자본참여,80∼100석 규모의 중형항공기 공동개발에 대한 한중일 3국의 공동타당성 조사 및 개발,별도의 판매법인 설립 등을 제안. ●발전설비 및 선박용엔진 한국중공업이 참가.민자발전사업 및 산업플랜트의 한일 공동 해외진출 및 일본업체의 자본참여를 제의.한중의 민영화프로그램 추진에 일본업체의 적극적인 자본참여 희망.
  • 재계 빅딜 수정안 ‘수위 조절’ 부심

    ◎5대그룹 본부장소집 업종별 구조조정 실적 점검/청와대 간담회 앞서 금융권과 물밑대화도 모색 ‘대(對)정부 우호분위기를 조성하라’ 재계가 바빠졌다.구조조정을 둘러싸고 격앙된 정부와 금융당국의 강경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랴,항공기 등 3대 업종 수정빅딜안의 ‘수위’를 조절하랴 정신이 없다.한편으론 金大中대통령 주재의 정·재계정책간담회를 앞두고 금융당국과의 물밑 대화도 활발히 모색하고 있다. 전경련은 金대통령이 주재하는 이번 간담회가 ‘구조조정계획의 마무리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정부와 협력,구조조정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마무리한다는 구상이다.이를 위해 뇌혈종 수술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金宇中 회장이 직접 나서 정부·금융권과의 구체적인 협의에 착수,정·재계간담회 이전에 구조조정을 둘러싼 의견조율을 끝낼 계획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부와 재계 수뇌부간에는 지금까지 5차례 정책간담회를 통해 구조조정 원칙과 방향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으며 남은 과제는 금융권의 협조를 얻어내는 일”이라고 말했다.재계는 5대 그룹 차원에서 ‘양보안’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7개 구조조정업종별로 윈 윈(Win Win)전략에 기초해 모기업과 퇴출사업 부문,금융기관 등 3자가 합리적으로 손실분담을 해야한다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우선 이번주 중으로 5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회의를 소집,그룹별 분사와 사업매각.외자유치 실적을 점검하는 한편 5대 그룹 총수가 대통령과 합의했던 5대 사항의 추진실적 및 구조조정 업종별 추진현황,‘빅딜 수정안’ 작성작업을 마무리,청와대에 제출키로 했다.아울러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일기업경영간담회의를 통한 외자유치 계획도 적극 알리기로 했다. 이밖에 정·재계간담회 이전까지 재벌에 대한 우호적 여론 조성을 위해 그룹별로 대규모 인턴사원 채용을 비롯,연말정기 인사의 조기단행,계열사 축소계획 등 다양한 조치를 내놓을 계획이다. 삼성이 1,000명의 인턴사원을 채용키로 한 데 이어 LG가 정사원 1,000명을 공채키로 했으며,대우(1,000∼2,000명) 현대(1,000명)도 인턴사원 채용을검토하고 있다. 또 오는 4일 SK를 시작으로 잇따라 연말정기 사장단 인사도 단행될 전망이다.LG가 오는 8일 사장단회의에서 사장단 인사를 확정할 예정이며 삼성 대우 현대도 이달 중순께 사장단 인사를 마무리지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와대 주재 정·재계간담회 전에 정부·금융권이 5대 그룹에 대해 최대한의 양보안을 끌어낸다는 입장이어서 재계와 정부·금융권간에 팽팽한 막바지 줄다리기도 예상된다.
  • 5대 그룹 “도저히…”/“제머리는 못깎겠네”

    ◎3개 업종 구조조정안 채권단 거부에 불안/청와대 직접 주재 소시에 “차라리 잘됐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강도높은 구조조정 압력에 5대 그룹이 부심하고 있다.연일 당국의 압박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채권단(사업구조조정위원회)이 석유화학과 항공기,철도차량의 구조조정안을 거부함으로써 한층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됐다.일기에 비유하면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날씨다. 재계는 30일 거부당한 3개 업종을 중심으로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지만,“지원을 약속해 놓고 이제와서 너무 강경하게 나오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터뜨렸다.그러나 한편으론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정책간담회를 주재키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정부와 재계 수뇌부,정치권이 이번에 기업 구조조정의 속도와 범위,방향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전경련은 이날 오전 8시 孫炳斗 부회장 주재로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3개 업종에 대한 구조조정 수정안을 마련,채권단과 재협상에 나서기로 했다.아울러 이날이 시한인 반도체 통합법인의 경영주체 선정이 사실상 어려워졌다고 보고 경영주체 선정기한을 12월말로 1개월 가량 연장해 줄 것을 요청키로 했다. 재계는 석유화학 업종의 경우 채권단이 영업이익보다 금융비용이 커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점을 감안,새 사업개발을 통해 영업이익을 늘리고 외자유치로 금융비용을 더 줄이는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이와 관련,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한일 기업경영간담회에서 미쓰이물산으로부터 15억달러의 외화를 유치하는 의향서도 교환한다는 구상이다. 사업성은 있으나 자구노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정된 철도차량에 대해서는 과잉설비와 과다인력의 해소 등 자구노력을 한층 강도높게 추진한다는 내용을 수정안에 담기로 했다.항공분야도 채권단이 군수용으로만 국한시켜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했으나 한일 기업경영간담회에서 민수용 항공기분야의 사업협력을 논의키로 한 점 등을 강조할 계획이다.
  • 韓·日 자유무역협정 추진/金 총리 오늘 訪日… 오부치와 회담

    한일 각료간담회가 28일 金鍾泌국무총리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 및 양국 경제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고시마 시로야마 관광호텔에서 열린다. 양국은 이번 각료간담회에서 대북 정책 공조,경제·통상 협력 확대 등 양국의 현안을 포괄적으로 협의한다.양국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금창리 지하 의혹시설 건설 등에 대한 우려를 공동으로 표명하고,대북 정보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합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양국은 특히 ‘21세기 한·일 경제관계연구회’를 통해 양국간 자유무역협정(FTA)체결 문제를 계속 검토해나가기로 의견을 모을 것으로 알려졌다. 金총리는 각료간담회에 앞서 열리는 오부치 총리와의 단독회담에서 대북 정책 공조방안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각료간담회가 끝난 뒤 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과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외무장관은 양국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일어업협정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간담회 내용을 발표한다. 이에 앞서 金총리는 이날 아침 서울공항에서 특별전용기편으로 일본으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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