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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 출간/제호변경·뿌리찾기 배경

    ◎항일의 역사 등 정리 서울신문이 11일자로 제호를 ‘대한매일’,사명(社名)을 ‘대한매일신보사’로 바꾸면서 새로운 비상의 날개를 편다. 이에 때를 맞춰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항일언론사를 정리한 책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가 출간됐다. 엮은이는 현 서울신문 金三雄주필.251쪽,가격 8,000원.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는 한말 국난기에 태어나 국권수호를 외치다 일제의 강압으로 중절(中絶)된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과 일제하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된 이후의 오욕의 역사도 담았다. 또 해방 후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신문’으로 재창간된 과정과 최근 ‘뿌리찾기’ 일환으로 ‘대한매일’로 다시 제호를 바꾸는 배경 등도 담고 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장에서 ‘대한매일신보’연구의 권위자인 외대 鄭晋錫 교수(언론학)의 기고를 싣고 있는데 鄭교수는 이 글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민족 언론의 정신사적 원류’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2장은 대한매일신보를 빛낸 4명의 논객(梁起鐸·朴殷植·申采浩·張道斌)의 일제하 항일구국운동과 약력을 정리한 것. ‘부록’으로는 이들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활동하면서 본지에 게재한 대표적 항일논설 몇편을 원문대로 싣고 있다. 제3장은 지난 93년 서울신문사가 ‘뿌리찾기’ 작업을 벌이면서 서울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전재한 것. 이 연재는 초창기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과정,‘한일병합’ 이전까지의 항일 언론활동,영국인 사장 베델(한국명 裵說)의 행적 등을 보도했다. 제4장은 11월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란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의 전문을 수록한 것이다.
  • 국문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5)

    ◎국문교과서 편찬·문법 통일 주창/부녀자·중하류층 대상 사회참여 의식 고취/구국교육에 큰 역할 용기있는 대중지 ‘뿌리’ 대한매일신보는 발간 4년째인 1907년 5월23일부터 한글판을 내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은 국·영문판 합본 형식으로 창간했던 만큼 한글판 간행이 두번째였다. 한글판 재발간 당시 대한매일은 한자 위주의 국한문(國漢文)판을 519호까지 내고 있었다. 그러나 새 국문판은 뒤에 나왔지만 대한매일을 일으킨 ‘장자’(長子)라 할 국한문판을 그냥 한글로 옮겨 실은 ‘곁방’신문이 아니었다. 또 창간 때의 한글판을 답습하지도 않았다. 타블로이드 크기 4면을 온전히 한글로 채운 대한매일의 새 국문판 신문은 여러모로 새로웠다. 본래 대한매일은 국·영문으로 창간할 당시에는 독립신문의 정신에 입각해 대중을 상대로 서구적인 민권사상에 의거한 민중 교도와 내정 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다 5개월 동안 휴간한 뒤 국한문판으로 중간하면서 한자에 익숙한 유림 등에게 반외세,국가와 왕실의 수호를 호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항일의식의 논조는 변함이 없었지만 좀더 유생들에게 친근한 동양의 유교적 정치와 윤리,중국의 고사 등을 수시로 활용하였으며 유림에 기대를 걸고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논설을 자주 썼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나라의 위기상황은 유림 등 지식층에게만 기대를 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광범위한 대중 계몽을 모색하게 됐고 여기에서 국문판의 재발행이 기획됐다. 언론 탄압을 향한 통감부의 신문지법이 공포되기 직전에 발간된 국문판은 국한문판과 함께 한일합병 때까지 계속 발행됐다. 이 새 국문판 신문은 다듬어진 국한문판의 틀을 잘 활용해 창간 당시의 한글판보다 훨씬 짜임새가 있었다. 무엇보다 글을 띄어 쓰고 구어체에 가깝게 풀어서 써 읽기가 편했다. 이에 따라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부녀자 및 중하류층의 일반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 국문판이 발간될 1907년 무렵에는 일반 대중이 읽을만한 항일논조의 국문지가 없었다. 기존의 그같은 신문들은 논조가 현저히 위축된 상태였다. 새로운 국문지의 출현을기대하는 일반 민중의 욕구와 국권 회복 측면에서 민중 계몽을 중시하던 지식층의 욕구가 합쳐져 대한매일의 국문판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국문판은 대상 독자층이 달랐기 때문에 국한문판과 차이점이 상당했다. 논설은 시사적이라기보다는 계몽적인 내용을 많이 싣고 있으며 경제관계,외국소식 등 딱딱한 기사는 생략하고 있다. 기서는 부녀자 및 일반 대중이 보내온것을 많이 게재했다. 특히 국문판은 역사전기류의 소설과 독자들이 보낸 우스갯소리 등 오락성 있는 연재물에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학식이나 의식이 뒤지는 부녀자·하류층 등 대중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대한매일 국문판은 국채보상운동·구국교육운동 등에 영향을 끼쳤으며 각처의 의병활동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그 타당성과 봉기의 필연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한글로 신문을 내는데 그치지 않고 한글 문법의 통일과 국문 교과서의 편찬을 주장하는 등 국어 보급에 힘썼다. 또 주 독자층이 여성이었던 관계로 여성교육의 필요성,과부 재가의 정당성,축첩의 부당성 등을강조하고 여성 자신의 자각과 사회참여 의식을 고취,여성 계몽에 앞장섰다. 또 국어학 측면에서 당시 사용되던 우리말을 연구하는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무엇보다 일제의 언론 통제로 여타 민족지들이 침묵으로 비켜설 때 뚜렷한 항일 논조로 일반 민중에 다가간 마지막 용기 있는 대중지였다. ◎광고게제 어떻게/맨뒤 4면 전체 할애 1905년 3면 일부 내줘/행당 6전씩 받아 1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문에 있어 광고는 매우 중요하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때부터 광고를 실었다. 월 30전 하는 구독료 못지 않게 행당 6전씩 받은 광고료가 신문사 주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국·영문 합쇄의 초창기는 미국 영국 일본 등 열강 광고뿐이었고 한국 광고주 것은 전무하다시피했다. 국한문판 등장과 함께 상황이 달라진다. 맨뒤 4면 전체를 차지한 광고에 한국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점유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가 확연했다. 무엇보다 광고란 자체가 확장됐다. 국한문판은 발간 3개월까지는 대체로 3면을 기서,추가 잡보 및 연재물로 채웠으나 1905년 말부터 광고가 3면까지 거슬러 올라온다. 1906년 중반 쯤이면 광고가 고정적으로 3면 중간부터 나타났다. 그래서 대한매일 국한문판에는 연재소설이 드물었다. 1908년에는 4개 면중 2개 면 전체에 광고를 싣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으며 1909년이 되면 ‘신성한’ 1면까지 치고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모집,책 및 서점 그리고 약광고가 주류를 이루었다. 술,기숙관(하숙) 광고에 이어 제물포 권련연초회사의 원시표 거미표 태극표 및 일본정부 제조 연초인 스타 등 담배 광고가 윤곽 그림과 함께 매일 보였고 미국 수입 우유광고도 자주 나타났다. 약광고는 큰 활자로 국문으로 써 눈에 쉽게 띄었는데 미국에서 수입한 창병(성병)특효약 광고가 1907년에 벌써 나타나고 국문판에 한정됐지만 1909년엔 여성 생리대 광고가 나온다. 명월관 등 요리집도 국문 큰 글씨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작은 활자의 개인 광고도 많는데 자신의 이름을 무엇으로 바꿨으니 이를 알린다는 광고도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아들 동생 등 가까운 식구가 자신의 명의를 도용해 재산관련 계약을했으나 이것은 무효라고 사전 포고하는 광고였다. 자신의 아들이 허랑방탕하고 사기성이 농후하니 조심하라는 광고도 흔했다. 1909년 3월31일자에 한 간판 광고업자가 대한매일에 실은 광고문구는 당시 이미 신문광고를 통해 활발한 영업활동이 이뤄졌음을 짐작케 한다.
  • 친일의 군상:11/여자 밀정 裵貞子(정직한 역사 되찾기)

    ◎伊藤博文의 꼭두각시로 매국·배족 선봉에/1885년 도일… 이등박문 만나 ‘스파이 교육’ 받아/러 견제·고종퇴우 막후활동… 만주지역서 독립운동가 탄압/태평양전쟁때 韓人 부녀자 100여명 위안부로 내몰아/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된뒤 후회의 눈물/시골 아전의 딸로 출생 대원군 실각후 집안 몰락/어릴때부터 조정에 반감/한때 官妓여승으로 전전 1949년 2월 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서울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姜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했다.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姜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을까?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裵貞子(1870∼1952). 흔히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배정자가바로 그 노파였다.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사(裏面史)에 ‘일제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배정자급(級)에 드는 친일파는 몇 안된다. 한말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었다. 친일파 가운데 우두머리급에 드는 친일파였다. 해방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중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마타 하리’를 든다. 고급창녀 출신의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배정자를 바로 이 ‘마타 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분남(粉男).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가 세살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 관청에 체포됐다.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뜻밖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安경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들여앉히고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이름을 지어주었다. 裵貞子의 ‘貞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소위 ‘밀봉교육’을 시킨 셈이다. 일본으로 간지 9년만인 1894년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아뢴 바 있다. 양장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 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安重根 의사에게 살해됨(10월26일)으로써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현 瀋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귀순공작을 담당했었다. 배정자는 1920년 일제가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할 때 배후인물로도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초대회장 崔晶圭는 대한제국 시절 참위(소위)출신이었다. 매국노 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崔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배정자는 192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00여평의 토지를 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여성 100여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해방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배정자의 형량과 얼마동안 징역을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죽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裵貞子의 남성편력/빼어난 미모에 화려한 경력 소유/결혼·동거 등 거쳐간 남자 7∼8명 裵貞子는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남자’는 田在植. 한 때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재회,결혼했다. 이 사이에서 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현 외무부)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만에 육군 참장(종2품·현 준장)으로 승진,농공상부 협판(차관)직을 맡았다.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까이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朴榮喆(일본육사 15기 졸업,함북도지사·중추원 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일본인 오하시(大橋),은행원 崔모,전라도 갑부 趙모,대구 부호의 2세 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중·고교서 日 학생들과 교류 꺼려/日 수학여행단 발길 돌린다

    ◎학업지장·위색동화 이유… 한국 대신 중·호 찾아/작년 4만2,000명 방문… 96년보다 5.3% 줄어 해외 수학여행지로 한국을 즐겨찾던 일본 중고생들이 최근 중국 등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이는 일본학생의 경우 수학여행지의 학생들과 반드시 교류를 갖도록 돼 있으나 한국 중고교에서 수업차질 등을 이유로 교류를 꺼리는 탓으로 풀이된다. 한국관광공사는 30일 ‘일본청소년 한국 수학여행 활성화 방안’이라는 자료를 통해 “현재 일본은 방문국 학생과의 교류를 전제로 공립학교의 해외수학여행을 허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그러나 한국 학교에서 양국학생의 교류를 회피,일본수학여행단의 유치에 어려움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방한한 일본 중고생 수학여행단은 245개교 4만2,000여명에 이른다.이는 일본 중고교 전체 해외수학여행자의 34.4%에 달하지만 전년의 4만4,000여명에 비해서는 5.3%가 줄어든 것이다. 반면 한국 다음으로 일본 수학여행단이 많이 찾는 중국은 지난해 전년대비 2.8%가 늘어나 2만8,000여명에 이르렀다. 한국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한 호주 등 오세아니아 역시 전년대비 5.0%가 증가해 2만2,000여명을 기록했다. 일본중고생의 방한이 이같이 감소추세를 보이는 것은 한국 학교에서 일본학교의 요청을 거부하는데 주요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일본수학여행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학생들이 해외수학여행을 다녀오는 이유는 국제친선 도모가 가장 많았고 다음은 △방문국 학생과의 교류 △외국 견학을 통해 일본을 더 잘 알기 위함 △외국어교육 등의 순이었다. 그러나 한국 학교는 △일본문화의 무분별한 확산 △학업지장 등의 이유로 한일 양국 학생의 만남을 꺼리고 있다고 공사측을 설명했다. 관광공사의 한 관계자는 “이들 일본 수학여행단의 방한으로 연간 400억원의 외화를 벌어들이지만 이보다 한일 청소년 교류를 통해 진정한 양국간 우호증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교사들의 태도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절정의 韓日 최고수/盤上대전

    ◎이창호­조치훈 새달 2일 삼성배 4강 격돌/李 6승1패 우위… 제2 전성기 趙 설욕 다짐 이창호 9단과 조치훈 9단이 격돌한다.다음달 2일 삼성화재 유성연수원에서 열리는 제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대회 4강전에서다. 역대 전적은 6승1패로 이 9단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이 9단은 92∼93년 한일TV정상속기전에서 한차례 승패를 나눠 가졌지만 93년 4기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3­0으로,96년 7기 동양증권배 준결승에서 2­0으로 조 9단을 일축했다.아직 무르익지 않았을 때다.96년만 해도 이 9단은 주도권은 쥐고 있었지만 조훈현 9단,유창혁 9단과 타이틀을 나눠가지고 있었다.조치훈 9단도 일본 3 대기전 가운데 본인방,기성전 등 2개를 차지,제2의 전성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2년 10개월이 지난뒤 두사람은 이무기에서 용으로 승천했다.이 9단은 현재 5개의 국제기전 가운데 삼성화재배,동양증권배,후지쓰배 등 3개의 타이틀을 쥐고 있는데다 9단이 출전할수 있는 국내 12개 기전 가운데 10개를 차지하고 있다.조 9단도 일본 3대기전인 기성,명인,본인방을 2연패하며 제2의 전성기를 구사하고 있다.특히 올해는 본인방 10연패의 신기록을 세운데다 통산 999승을 거둬 1,000승을 눈앞에 두고 있을 정도로 호조다.
  • 정무위/國監 하이라이트

    ◎“은행 합병전에 구조조정부터 하라”/“감원·부실자산정리 없으면 수퍼 부실은행 탄생 우려”/조건부 승인은행 부실 추궁 30일 국회 정무위의 금융감독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는 조건부승인 은행과 대한·한국 두 부동산신탁회사의 정상화방안에 초점이 맞춰졌다.의원들은 魏聖復 조흥은행장 등 7개 은행장과 吳世鐘 장기신용은행장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합병에 따른 동반부실과 조흥·외환은행의 회생 여부 등을 추궁했다. 국민회의 李錫玄 의원은 “조흥은행은 10월 말까지 외자유치나 합병이 가시화하지 못하면 임원들이 물러난다고 했는데 한두 달 연장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느냐”고 물었고 魏행장은 “11월 초 다른 은행과의 합병 계획을 금감위에 보고하겠다”고 답변했다. 한나라당 李思哲 의원은 “부실 은행인 외환은행이 신원그룹이나 동아건설에 수천억원의 협조융자를 해준 것은 정부와의 사전 협의에 따른 것 아니냐”며 “상업 한일 조흥 외환 등 4개 은행장도 퇴출 은행장과 마찬가지로 검찰수사를 받고 쇠고랑을 찰 사람들”이라고 부실경영 책임을 추궁했다. 국민회의 金民錫 金台植·한나라당 金映宣 의원 등은 “부실 여신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인력 감축과 부실자산 정리 등 강력한 구조조정을 선행하지 않으면 우량은행간 합병도 ‘슈퍼부실은행’만 탄생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權英子 의원은 “은행들이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여성들만 집중적으로 퇴직시키고 있다”고 남녀 성차별을 문제삼았고 자민련 李麟求 의원은 “대한부동산투자신탁은 ‘대불신(大不信)’ 한국부동산투자신탁은 ‘한불신(韓不信)’으로 불릴 만큼 경영이 부실해 당장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정상화계획을 이행하고 있는 조건부승인 은행에 특검을 벌일 계획은 없다”고 말했으며 합병 은행장들은 “시너지효과를 예상,자발적으로 합병을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 구조조정 “흐르는 강물처럼”/전경련 孫炳斗 부회장

    ◎“막을 수도 없지만 재촉할 수도 없어”/타율보다 시장경제 논리로 풀었으면/인색한 여론 섭섭… 미국도 10년 걸려/반도체 호황땐 통합법인 설립 무의미 “신3저를 수출증대로 연결시키려면 무엇보다 금융시스템이 정상화돼 금융경색이 풀려야 합니다.반도체 경기가 호황으로 돌아서면 현대와 LG의 통합법인 설립계획은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孫炳斗 전경련 부회장은 요즘 ‘리틀 김’으로 불린다.金宇中 전경련 회장만큼이나 바쁘기 때문이다.29일부터 이틀간 일본에서 열린 한일재계회의에 그룹총수들과 함께 참석한 뒤 30일 오후 곧 바로 귀국한 그를 만나봤다. ­재계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는 지적들이 여전합니다. ▲여론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기업구조조정은 정부개입보다는 시장경제의 원칙아래 경쟁력을 잃은 기업이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퇴출하는 식으로 이뤄져야 합니다.기업은 환경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기업환경이 어디보다 좋다는 미국이 구조조정에 10년이 걸렸습니다.경제개혁에 성공한 뉴질랜드도 7년이 걸렸습니다. ­이(異)업종 상호지급보증 해소,계열기업 축소 등 구조조정 촉진을 위한 정부의 재계압박이 본격화되고 있는 느낌인데요. ▲상호지보 해소는 2000년 3월까지 마무리하게 돼있습니다.기업들이 성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이업종에 대한 정의가 분명히 내려져야 합니다.기존의 상호지보 해소계획과 상충돼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계열기업 정리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몇% 줄인다고 말할 수 없으나 재무구조 개선차원에서 주력사업이나 핵심 우량기업도 매각할 수 있습니다.물론 정부 지원책이 따라야 합니다.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도 빨리 이뤄져야 하지 않습니까. ▲삼성자동차 문제는 이제 삼성 스스로 판단할 문제이며 삼성이나 다른 그룹에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도체가 호황으로 돌아서면 현대와 LG의 통합법인 설립계획이 무산되리라는 전망이 많습니다.약속위반이 아닙니까. ▲시장은 항상 동태적으로 움직입니다.흑자가 난다면 굳이 통합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재계의 지지부진한구조조정이 신3저 활용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기업 구조조정은 경기순환과 관계없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경기침체는 단순히 기업의 구조조정이 지연되어서라기 보다는 금융 기업 노동 등 경제주체의 구조조정이 조화롭게 추진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3저 활용을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신3저 추세가 지속된다면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경제에 아주 다행스런일입니다.신3저가 수출증대로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수출금융이 활성화돼야 합니다.무역금융을 대기업에도 허용해돼야 합니다.
  • 의병활동(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3)

    ◎“을미 거사는 국권회복 명분” 보도/을사조약후 항일 상보/‘비분강개’ 논조 의병 급증/실력 양성 노선 권고 통감부 진압 강력 비판 일제의 병탄 마수에 붙잡힌 대한제국은 날로 허수아비 국가가 되어갔다.주권뿐 아니라 대다수의 신민도 얼이 빠져갔으나 뜨거운 피의 백성들은 의병으로 나섰다.대한매일신보는 민중의 구국 의용군인 의병에 뚜렷한 지지를 표했다. 일제는 한일신협약의 비밀각서에 따라 고종을 퇴위시킨 지 보름도 안된 1907년 8월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했다.이때 많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의병으로 나서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제가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과 을사늑약 체결 때도 곳곳에서 의병들이 봉기했었다.고종 퇴위,군대 해산을 당해서 일어난 의병은 어느 때보다 규모가 컸고 조직적이었다.1907년에는 300여차례 일본군과 무장충돌했으며 1908년에는 1,400여회나 일본군과 맞붙어 싸웠다. 대한매일은 군대 해산에 반발한 봉기에 대해 군인으로서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은 최고의 굴욕이며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논조를 폈다.의병활동 소식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면서 의병의 성격과 원인 및 수습대책 등을 제시해 나갔다. 그러나 초기에는 의병에 대해 보수적이며 비판적이었다.첫 의병이 나온 을미사변으로부터 10년이 흐른 1905년 9월 대한매일은 명칭만 의병이지 그 목적은 마을에 돌입하여 곡식과 돈을 강탈하며 총검을 수탈하는 도적(匪徒)과 같다고 했다.그러다 을사늑약 이후 견해를 달리하면서 다른 신문보다 상세히 의병 소식을 보도한다.군대 해산 이후에는 한층 더 하였다. 대한매일은 1906년 5월 “을미년 거사는 국가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로 삼았으며 금년 거사는 국권회복을 명분으로 한다”고 말했다.국권회복 방안으로 실력양성 쪽에 무게를 두었던 대한매일로서 무력항쟁인 의병활동 역시 그 목표가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말 유생들의 입장을 서술하고 의병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했던 黃玹은 매천야록 1906년 조에 “각 신문들은 의병을 폭도나 비류라고 불렀으나 유일하게 대한매일만은 의병이라 칭했다.시비를 가리고 논하는 데 조금도 굴함이 없고 일본의 악독함을 낱낱이 폭로하여 사람들이 서로 다퉈 보려고 해 일시에 신문이 귀해졌다”고 썼다. 또 이같은 대한매일의 기사를 읽고 비분강개하여 의병에 가담하고 일본에 저항했다가 체포된 의병들이 진술한 내용을 주한 일본공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예를 들어 의병장 이강녕의 모집대장인 이중봉은 대한매일을 읽거나 그 기사를 전해듣고 분개하여 의병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으며 농사 인부로 하와이로 갔다가 귀국한 김현진이란 사람은 대한매일에서 일본이 강제로 황제에게 한일신협약을 조인케 하고 일본인들이 토지를 빼앗는다는 기사에 격분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같이 대한매일은 일제의 침략적 소행을 사실적으로 보도했으며 국민에게 국가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대한매일은 1907년 9월 일본이 고종 양위를 강행하고 군대를 일시에 해산시킨 ‘망녕된’ 행동에서 의병이 일어났다고 꼬집고 있다.이어 정치적 이유와는 상관없이 일본에게 억울하게 경제적 피해를 당한 양민들이 유생과 군인을 따라 의병에 가담한다고 지적했다.아울러 통감부가 진압책으로 의병을 도와준 동리뿐 아니라 의병이 머물렀던 마을까지 불을 지르는 바람에 오히려 의병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의병들의 활동을 어느 신문보다 자세히 보도한 대한매일이지만 의병의 증가가 대일 항전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그래서 통감부의 과도한 진압책을 비판하는 한편 의병에 대해서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의거만큼이나 각자 교육과 식산에 힘쓰면 자주국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의병들에게 실력양성 노선으로의 전환을 권한 것이다. ◎신랄한 시사만평/“황족귀인… 매국노… 개돼지만도 못한…” 의병의 정반대편에 친일파,특히 이완용 내각이 서 있다.대한매일은 시사만평을 통해 이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1907년 기사 중에서 몇개를 골라본다. ▲여보 세계 각국 사람이여 매국노를 다수 수입하려거든 대한으로 건너오시오 황족 귀인과 정부대관이 매국노 아닌사람이 없소 대금도 아주 싸요 그것은 사다가 무엇하게 개 돼지만도 못한 것을 거저주어도 가져가지 않겠네. ▲이른바 황제 선위의 ‘七賊대신’이 비밀 모사와 기이 술책으로 이미 이름을 날린 바 앞으로 무슨 공명을 더 얻을까 일본에 대 공훈을 세워주었으니 일본 내각대신 자리를 얻을지. ▲이번 7조협약은 각 대신이 농공상대신 송병준씨 사가에 모여 의결하였으니 4천년 대한국이 일개 송병준 수중에 엎어질 줄 누가 예측이나 하였으리오. ▲한국 내각을 장차 일본인으로 조직하리라 하니 현 내각 대신들은 추풍낙엽이 될지라 그때를 당하여도 뇌수에 정신이 들지 안들지. ▲일본인 거류지 니현 근처에 대한 관인의 인력거 등불이 야시를 이룬다 하니 한인 자격으로 일인과 한번 교제를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등용문이겠지. ▲일진회에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어 선언서를 한다 기념연을 한다 국채보상을 반대한다 하더니 마침내 이 회 평의장이 농부대신의 지위를 점거했으니 가위 공든 탑이 무너지랴로고. ▲일본서 차관한 1,300만원 중에 100만원은 구문으로 사라졌다니 구문은 누가 간섭하였는지 전국 재정을 주관하는 금고대신(탁지부)은 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니 인민은 술 끊고 밥 줄여 잔금을 출연하니 털보 대감(민영기)은 어찌 마음이 편할까.
  • 은행 동일계열 여신한도 3조7,035억원 초과

    은행들이 같은 계열 기업군(그룹)에 여신한도 이상으로 빌려준 대출금액이 3조7,035억원에 달하고 있다.은행의 동일계열 여신한도는 현재 자기자본의 45%이나 2000년 7월부터는 총자본(자기자본+보완자본)의 25%로 줄기 때문에 은행은 2년 이내에 초과대출을 모두 해소해야 한다. 은행감독원이 29일 국회에 낸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13개 은행의 22개 계열 기업군에 대한 여신한도 초과 대출금액은 3조7,035억원이다.1개 계열 기업군에 한도 이상으로 평균 1,600억원을 빌려 주고 있는 셈이다. 은행별로 여신한도를 초과해 대출받은 대표적 그룹은 ▲상업=삼성(56.7%) ▲한일=삼성(59.8%) ▲외환=현대(77.3%) 대우(57.2%) ▲한미=삼성(52.5%) 현대(60.1%) ▲하나=삼성(66.6%) 현대(69.8%) ▲보람=삼성(99.5%) 현대(97.8%) LG(87.8%) 두산(61.6%) 대우(55.7) ▲평화=현대(81.6%) 대우(80%) ▲강원=현대(211.4%) 등이다.
  • 만찬 초대 못받은 5대 그룹 ‘떨떠름’

    ◎‘오지않은 초대장’ 무언의 빅딜 채찍/“나름대로 노력했는데”/당국 평가 절하에 아쉬움/‘구조조정 압박카드’ 분석 29일 청와대 우수기업인 초청만찬에서 제외된 5대 그룹은 떨떠름해하는 표정들이다. 5대 그룹들은 나름대로 구조조정을 위해 노력해왔음에도 정부와 여론이 이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며 다소 불만스런 목소리를 냈다. 孫炳斗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재계의 구조조정이 더디다는 지적이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며 “지난 8월 5대 그룹이 구조조정 태스크포스를 구성한 이래 불과 2개월만에 7개업종의 사업구조조정을 추진키로 한 것은 당초 정부의 3대 업종 빅딜수준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당국의 평가절하’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날 초청된 한화 두산 등 13개 그룹 및 중견 대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경기침체와 신용경색속에서도 과감하고 신속한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극복한 기업들이어서 5대 그룹이 만찬에서 제외된 사실 자체가 해당그룹엔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공교롭게 이날 일본에서 열린 제15회 한일 재계회의에 李健熙 삼성·金宇中 대우·鄭夢九 현대·손길승 SK회장이 참석,4개 그룹 총수는 부재중이었다.때문에 다소 위안을 삼을 수는 있지만 5대 그룹은 이날의 ‘우수기업 초청만찬’을 구조조정을 촉구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청와대 만찬은 구조조정으로 살아남은 기업들을 부각시킴으로써 희망을 제시하고 한편으로는 경제계의 주력인 5대 그룹의 구조개혁을 가속화시키려는 의지의 표현같다”고 평가했다.
  • “섬좌표 국제관례상 표시안해”/외교통상부

    ◎한일어협때 독도관련 언급안해 지금까지의 언론보도와는 달리 한·일 어업협정합의서에는 독도 명칭은 물론 좌표도 전혀 표시돼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尹炳世 외교통상부 아·태국 심의관은 29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애초부터 한·일 어업협정합의서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尹심의관은 “국제 관례상 섬의 좌표는 표시하지 않는다”면서 “섬의 영해를 좌표로 표시하려면 무수한 점들을 설정해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는 또 독도의 좌표 표시가 없다고 해서 독도가 중간수역에 포함되거나 우리의 독도영유권이 침해당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일 어업협정 제 1조 ‘이 협정은 양국의 배타적경제수역(영해를 제외한,연안 기점 200해리 수역)에 적용한다’는 규정에 따라 독도와 주변 12해리 영해는 자동적으로 이번에 설정된 중간수역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은행 주주대표 등에 과다 대출

    ◎모두 9조7,243억… 총 여신의 4% 국내 은행들이 주주대표나 대주주가 추천한 비상임 이사들에게 10조원에 가까운 과다대출을 해 준 것으로 지적됐다. 자민련 李麟求 의원은 29일 금융감독위원회 국정감사 질의에서 12개 시중은행과 9개 지방은행 등 21개 일반은행이 지난 6월 말 현재 주주대표와 비상임이사 261명에게 9조7,243억원의 대출을 해 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이들 은행의 총 여신 245조원의 4%에 해당된다.주주대표로의 대출이 8조4,465억원,비상임이사로의 대출이 1조2,778억원으로 1인당 대출규모가 372억원에 달한다. 은행별로는 한일은행이 1조7,874억원으로 가장 많고 조흥(1조5,052억원) 서울(9,254억원),보람(9,161억원),하나(9,107억원) 등의 순이다. 李의원은 주주대표에 대한 대표적인 과다여신 사례로 조흥은행(金容大) 1,481억원,상업은행(權秉烈) 1,821억원,한일은행(朴晟容) 1천,537억원,주택은행(許眞碩) 1,079억원,신한은행(李熙健) 750억원 등이라고 밝혔다. 李의원은 주주대표나 비상임이사에 대한 여신한도를 제한해야 한다고주장했다.
  • 고종 퇴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2)

    ◎순종 승계 강제성 통렬히 고발/황제대리조칙 반박/수차례 논설로 따져/고종 도쿄친행 거부/헤이그밀사 자결 등 호외로 대내외 알려 1907년 7월19일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태자에게 양위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는 일제와 이에 빌붙은 친일파 내각에 의해 축출당한 것이었다.창간 때부터 고종 황제와 각별한 관계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정면으로 지적하며 이의 부당함을 거세게 따졌다. 을사늑약(勒約)후 2년도 안돼 이뤄진 고종 퇴위는 고종의 헤이그(海牙) 밀사 파견과 관련이 깊다.고종은 일제의 한국 침탈 실상과 조약의 무효함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李相卨 李儁 李瑋鍾 등 3인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다.고종의 친서를 휴대한 밀사들은 6월25일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영국 등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밀사 이준은 울분 끝에 현지에서 분사(憤死)했다. 고종은 대한제국 제위에 오르면서 강한 배일주의 성향을 보여왔다.일본은 밀사 파견을 고종 퇴위의 호기로 보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대신들을 앞세워 고종을 핍박했다.7월18일 고종은 내각의 섭정추천 요청을 거부했으나 19일 황태자 대리 조칙을 내린 뒤 20일 양위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일신협약(7월24일),군대해산(8월1일)으로 이어지는 1907년 7월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대한매일은 그간 높이 쳐들어온 반일의 기치에 한 가닥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매섭게 필봉을 휘둘렀다. 7월4일 논설을 통해 “해아 평화회담에서 일본인의 잔학을 호소하려는 한국의 제의가 배척됐지만 한국인은 실망하지 말고 자주독립의 대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층 힘써야 한다”고 격려했고 7월9일에는 “한국이 자국의 명운을 국제 중재에 위탁하기에는 열강의 태도로 보아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면서 “이번에 한국 파견인이 거절된 것을 길조로 여길 수 있다”고 국민들을 위무했다. 이완용의 잦은 통감부 방문을 주시하면서도 일제의 고종 퇴위 속내를 알아채지 못했던 대한매일은 16일 일본報知신문 기사를 전재해 처음으로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이 일본 신문은 “한일협약을근저에서 짓밟은 한국 황제를 폐하든지,일본으로 불러 사죄케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이에 대한매일은 18일 ‘일본 신문의 무례를 반박한다’라는 장문의 논설로 강경하게 맞섰다. “일본 신문이 논하는 구절구절이 해괴하고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한국에 대해 일본 사회와 언론의 마음 속에는 병탄 외에는 어떤 생각도 없다”고 갈파했다.그런데 이같은 논설을 내보낸 대한매일은 같은 날 몇시간 후 “황제가 대신들의 섭정추천,동경친행 사과 요구를 거절했으며”“해아밀사 이준이 忠憤을 이기지 못해 자결,만국 사신들 앞에 뜨거운 피를 뿌렸다”는 내용의 호외를 뿌리게 된다. 만 하루가 지난 19일 낮 대한매일은 다시 호외를 냈는데 ‘황제께서 황태자에게 대리를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는 소식이었다.황제가 하룻만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이 호외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대한매일이 조칙에 바로 잇대어 “이 조칙 반포가 황제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일반의 주목거리이나 이 사건이 외인의 강핍과 대신들의 위협으로 된 것은 세상 사람이다 알 바”라고 쓴 점이다. 조금도 곁눈질하지 않고 즉각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적시한 것이다.대한매일은 20일 ‘이등후’,21일 ‘대리역사’,25일 ‘禪位’,28일 ‘선위속론’등의 논설을 잇따라 써내면서 퇴위가 외부의 강박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이 와중에서도 대한매일은 만국회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연설로 큰 갈채를 받은 밀사 이위종을 한국에 희망을 주는 청년으로 극찬했다(19일).또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독립이 흔적도 없어졌다”고 한탄하면서도 “한국인이 한국의 이익을 위해 자치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희망 또한 피력해 마지 않았다.(27일). ◎사설 ‘선위속록’/“왕실의 대리와 선위… 핍박과 위협으로…” 대한매일은 고종 퇴위에 관해 여러 차례 사설을 썼다.이 중 7월28일자 ‘선위속론’의 주요 부분을 발췌한다. 무릇 황위의 전해짐과 물려줌은 천하대사라 동서고금 역사가 이에 관해서는 한층 근엄한 필법으로 사실에 준거해 곧게 쓰는 것을 공리로 하고 있고 이것이 역사가의 정당한 의무로다. 한국 황실의 대리와 선위라는 큰 사건이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이뤄졌다.외인의 강한 핍박과 내각 제대신의 위협적인 요청에 의한 것은 일반 세상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특히 선위에 있어 내각 대신의 한층 괴이하고 해괴한 행동에 관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모든 세계 인사와 대한 신민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고 가슴에 새겨 잊지 말지어다. 선위가 논해질 무렵 아직 조칙이 내려지지 않아 실시할 수 없다고 어느 원로 대신이 지적하자 농공상대신 송병준은 이렇게 하면 어떻고 저렇게 하면 어떻단 말이냐며 벌컥 화를 내면서 그 원로를 포박하려 하니 그 사람이 황겁공포하여 신도 신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박영효가 이완용 총리를 면전에서 격렬하게 반박하자 다음날 그를 포박했으며 내관 이병정이 이총리에게 30년 동안 임금을 섬긴 대감은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와 같은 은공을 입었는데 오늘 이같은 짓이 대감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꾸짖자 그 역시 경무청으로 끌고가 가두었다더라. 이런 사실은 모두 너무 잘 드러나서 숨길 수도 없어 세계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고 붓을 든 사가가 대서특필하지 않을 수 없다.
  • 정부,조흥銀에 연내 2조∼3조 출자/제일·서울銀중 한곳과 합병

    ◎자구계획 조건부 추진 정부는 조흥은행이 외자유치나 합병 계획을 가시화하지 못하더라도 연내 조흥은행에 2조∼3조원의 공적자금을 출자하기로 했다. 대신 은행장을 포함해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고 제일·서울 두 은행 가운데 1개 은행 등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할 방침이다. 28일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계에 따르면 정부는 감자(減資)와 인원 감축 등 자구계획을 조건으로 조흥은행에 2조∼3조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6대 시중은행 가운데 외환은행을 제외한 제일·서울·상업·한일·조흥은행 등 5개 은행은 모두 정부은행이 된다. 정부는 출자에 앞서 조흥은행의 자본금 9,304억원을 1,000억원 미만으로 줄일 예정이다. 출자 규모는 자산실사 이후 확정하지만 부실채권이 늘어 2조원 이상은 될 전망이다. 정부의 고위관계자는 “조흥은행이 당장 외자유치나 합병에 성공할 가능성은 적다”며 “먼저 은행을 정상화시킨 뒤 외자유치나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안”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조흥은행 출자와 적기시정조치에 따른 경영개선조치 요구는 별개인 만큼 11월 초 증자지원 발표와 함께 경영진 교체를 요구할 계획으로 이미 ‘10월 말까지 합병 등을 구체화하지 못하면 전 임원이 물러나겠다’는 퇴진각서를 받은바 있다. 경영개선조치 요구에는 다른 은행과의 합병도 포함,제일·서울은행 중 1개 은행이나 외환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토록 할 계획이다. 조흥은행 관계자는 “제일은행이면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효과가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감위 관계자도 “모두 정부은행이 되기 때문에 지금보다 합병이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그러나 외환은행과의 합병 추진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독일 코메르츠은행이 정부 지원에 따른 감자에 반발하고 있으나 부실경영에 책임이 있는 기존 주식만 소각하면 코메르츠은행도 합병에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기술적 검토에 착수했다. 한편 정부는 제일·서울은행에 1조5,000억원씩,상업·한일은행에 1조6,321억원씩 출자했다.
  • 개방후 첫 한일합작 영화 제작

    ◎일 인기작가 코지소설 ‘링’ 새달 크랭크인 일본문화 개방발표후 공식적인 첫 한일합작영화가 내달중 크랭크인한다. 한맥영화사는 28일 일본 오메가 프로젝트사와 국내 자본이 50대50으로 참여하는 합작영화 ‘링’을 제작키로 했다고 밝혔다.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스즈키 코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국내와 일본에서 동시 개봉할 예정이다. 오메가 프로젝트사는 일본판 ‘링’의 제작사로,아시아 최대 영화배급망을 목표로 창설된 AFDF코리아(대표 전태섭)를 통해 자본만 댈뿐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14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링’의 연출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의 김동빈 감독이 맡았으며 캐스팅은 아직 미정.11월중 제작발표회와 크랭크인에 들어갈 계획이다. ‘링’은 지난 91년 출간돼 1,000만 이상의 독자를 열광시킨 컬트호러소설로 죽음의 비디오테이프를 둘러싼 가공할 미스테리를 다루었다.일본에서는 이미 영화로 제작돼 지난 상반기중 500만 관객을 동원했다.
  • 농림해양수산위/國監 하이라이트

    ◎‘한­일 어업협정 문안 공개’줄다리기/김 장관,의원 요구에 “독도는 우리땅” 선언/배타적 경제수역·어업협상 분리 비판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의 28일 해양수산부 국정감사는 독도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야당측은 처음부터 독도 영유권을 포기했다고 집중포화를 터뜨렸고,여당의원들은 국민정서상 민감한 문제임을 감안,정부측을 위해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金泳鎭 농림해양수산위원장이 개회선언을 하자마자 한나라당 李海龜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가서명된 한일어업협정 문안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면서 포문을 열었다.이어 尹漢道 權五乙 朱鎭우 李佑宰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잇따라 일본어와 영어로 된 협정문안 공개를 요구했다.이에 尹鐵相 金珍培 의원 등 국민회의 의원들이 “진행중인 외교문서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반박,업무보고가 1시간 동안이나 지연되기도 했다. 한나라당 金淇春 의원은 “정부가 무인도에 대해서는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포기했다”면서 “그럴 바에야 왜 170억원이나 들여접안시설을 만들고 상주민까지 뒀느냐”고 공격했다.金의원은 이어 “일본과 베네주엘라,미국등은 우리 독도보다 작은 섬에 대해서도 EEZ를 적용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자민련의 李完九 의원까지도 “일본의 노련한 외교술에 말려 들어 일본측 주장대로 어업협상과 배타적 경제수역 협상을 분리,논의한데 이어 공동수역 주장까지 받아들였다”고 정부를 비판했다.반면 裵鍾茂 의원(국민회의)은 정부가 관광상품을 만드는 등 독도개발에 적극 나서 영유권을 다져야 한다고 제안을 했다. 야당측의 공세가 고조되면서 辛卿植 의원(한나라당)의 요구에 따라 金善吉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선언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 국채보상운동 앞장(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1)

    ◎‘빚 갚아 나라지키기’ 불씨 지펴/희사자 명단 게재 등 국민적 호응 유도/의연금 접수 주도… 사회公器역할 충실/日帝,양기탁 선생 횡령혐의 씌워 구속 일본이 한국 병탄의 전진기지로 통감부를 설치한 1년 후인 1907년 초 대한의 백성들은 열렬한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는 자연스레 이 전국적 운동의 가장 힘찬 엔진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그때까지 일본에게 빌린 돈 1,300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아 국권을 수호하자는 자발적인 민중운동이었다.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인을 재정고문으로 두면서부터 대일 차관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자도 비쌌고 100원 빌릴 때 10원을 구문(口文)으로 또 일본에 뜯기는 악조건이었다. 당시 대일 차관 1,300만원은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출판사 광문사를 경영하는 金光濟 徐相敦이 주창,곧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퍼져갔다. 이들은 취지서를 통해 대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필연적 사실이라면서 국채보상의 실천방안으로 금연운동을 부르짖었다. 이 운동은 단시일에 전국 규모로 확산되었는데 여기에는 신문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특히 이때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부수를 발행하던 대한매일은 취지 전파와 의연금 접수에서 첫째가는 큰 공을 세웠다. 대한매일은 2월21일 김광제 등이 공개서한으로 발표한 국채보상 취지서를 게재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경향 각지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는 지역단체들이 속속 결성됐으며 대한매일은 이 단체들이 보내온 결사 취지문을 빠짐없이 실었다. 이와 함께 개인들의 의연금 희사에 관한 기사가 지면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은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과는 달리 운동 초기였던 이때 의연금을 접수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으며 2월28일을 시발로 이를 사고로 밝혔다. 의연금을 거두는 기관이 공식 결정되기 전에는 돈을 함부로 받을 수 없다는 신중한 판단이었다. 3월 들어 ‘이같이 중대한 일에 선후책을 확실히 정하기 전에는 보상금을 영수하기 어렵다’는 사고가 매일 나갔다. 그럼에도 의연금 접수요청이 빗발치자 3월16일 이때까지 국채보상 期成會에 의연금을 낸 명단을 부록으로 발행한 뒤 3월31일 특별사고를 통해 직접 의연금을 접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국채보상 의연금이 대한매일에 봇물처럼 쏟아졌다. 광고면이었던 대한매일의 맨 뒤 4면은 매일 보상금 출연자 명단으로 몽땅 뒤덮였다. 이름이 넘쳐 가끔 부록을 내기도 했다. 또 4월 초 경향 각 조직들이 제각각 거두는 국채보상 의연금을 통합된 조직에 일원화해 적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 국채보상 지원금 總合所가 설립됐는데 이 총합소 임시사무소를 대한매일에 두기로 했다. 더불어 양기탁이 재무를 담당,대한매일이 이 운동의 실질적인 본부가 된 셈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을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던 통감부는 1908년 7월 총합소 재무담당인 양기탁을 의연금 횡령혐의를 씌워 전격 구속했다. 이때까지 대한매일에 기탁된 의연금은 6만1,000여원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사회적 공기로서의 대한매일 성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지만 운동 자체는 성공하지 못했다. 1910년 합방 때까지 모아진 의연금은 18만원(일본 헌병대 자료)∼16만원(黃玹 매천야록) 사이에 머물렀다. 반면 대일 국채는 4,400만원까지 불어났다. ◎당시 紙面을 보면/“12살 女兒 은반지 내고… 황제 담배 끊어…” 대한매일은 운동기간중 거의 매일 감동어린 의연금 희사 기사를 게재했다. 1907년 3∼5월에 난 몇몇 기사를 풀어본다. □전비서 송인회씨의 부인 박씨는 ‘無國이면 無民’이란 신문기사를 보고 1원을 부인회 사무소에 냈으며 그 집의 12세 되는 여아 또한 6전5푼중 은지환을 냈다하니 국가사상이야 남녀노소가 없으며 여자의 애국성심이 더욱 희한하다는 칭송이 자자하더라. □재령군 우리방 성황촌에 사는 양성옥씨는 빈한농민으로 읍 장날 쌀을 팔아 일년치 피울 연초 40봉지를 샀으나 마침 민국 형편과 국채보상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국채는 국민이 갚아야만 하며 게다가 대황제께서도 연초를 끊었는데 어찌 감히 피우거나 딴 사람에게 팔겠느냐며 다 불사른 뒤 2원을 출연했다하니 벽촌농민이 이같으니 우리 대한의 앞길이 영원무궁하리라. □일본인 제광길씨도 만국통의로 5원을 국채보상에 기부하면서 다른 이에게도 의연을 권고하겠다니 국민의 의무는 한국과 일본이 매일반이로다. □남녘사람 소문에 제주군 건입리의 신서봉 처 홍씨는 과부로 살림이 여유롭지 못함에도 국채보상 소식을 듣고 애국성심이 솟아 돈은 없고 하여 수의를 짓기 위해 고이 간직한 비단 명주를 팔아 12원을 의연하여 모두가 칭찬해 마지 않다더라. □평북 강계군 여학도 여교사 조덕순씨가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학도들이 국민된 의무로 애국성금을 표한바 여학도 천일신씨는 가난해 납채받은 비단상의를 의연했고 리순덕씨는 15세로 “내 나라를 사랑하는 데 어찌 단발을 두려워하랴”면서 구름같은 머리채를 잘라 의연했다더라.
  • 상업·한일은행 합병 새 이름 확정/‘한빛은행’ 내년 출범

    내년 1월에 새로 출범하는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합병은행 이름이 ‘한빛은행’으로 결정됐다. 두 은행은 27일 공모를 통해 접수된 12만359건의 공모안 중 전문가심사를 통해 6개를 선정한 뒤 선호도 조사와 법률자문 등을 거쳐 한빛은행(1,748건 응모)을 당선작으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두 은행은 한빛은행은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적인 이미지와 21세기 우리나라의 금융을 선도하는 큰 빛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공모결과 우수작은 ‘우리은행’,‘새론은행’이,가작은 ‘에이스은행’과 ‘드림은행’이 각각 뽑혔다.당선작을 써낸 사람들 중 추첨을 통해 한 명에게 상금 1,000만원이 주어진다. 한편 하나은행과 보람은행은 이날 오후 각각 확대 이사회를 열어 하나·보람 합병은행의 이름을 ‘하나은행’으로 확정했다.
  • 高宗 밀서사건(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0)

    ◎을사조약 강제성 낱낱이 들춰/영지게재 6개 조항 1면 논설통해 소개/일제 정정요구 거부/밀서 사진으로 전재 “고종 진의 확인” 공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발생한 ‘고종 밀서사건’은 언론을 통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대한제국의 주권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것이다.한국침탈을 강행한 일제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를 크게 손상받았고 한반도 정책에서 더욱 강경책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내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반일감정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결국 일제가 대한매일 등 민족지를 탄압하고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진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다. 고종 밀서사건은 대한제국 황실과 영국의 런던트리뷴 특파원인 더글러스 스토리 간에 극비리에 진행된 일종의 작전이었다.스토리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한 미국공사 모건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전말을 들은 뒤 고베에서 통감부 총무장관으로 새로 임명된 스루하라 일행과 함께 한국에 온 것은 1906년 초. 서울의 지인들과 두루 접촉한 끝에 고종을 만난 스토리는1906년 1월29일 고종의 밀서를 전달받는다.밀서는 모두 6개 조항으로 고종이 ▲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고 ▲조약을 일본이 반포하는 데 반대했고 ▲독립권을 한치도 타국에 양여할 수 없고 ▲이 조약의 외교권도 근거가 없으므로 내치상 한건도 인준할 수 없고 ▲통감의 주둔을 허락하지 않는 동시에 황실권도 외국인에 허가하지 않고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고종의 붉은 옥쇄가 찍힌 이 밀서는 고종의 측근들이 일본측 정탐꾼들 눈을 피해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고 나온 것이다. 스토리는 이 밀서를 대한매일 사주 裵說에게 보여준 뒤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배에 올라 2월7일 중국 지부에 도착한다.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를 찾아가 고종의 밀서사실을 알리고 밀서내용 기사를 런던트리뷴 본사로 송고했다. 다음날 트리뷴 3면 머리에 이 기사가 실렸다.“을사조약은 고종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고종은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라는 내용이었다.을사조약 체결 경위와밀서 6개항이 영문으로 함께 번역 게재됐다. 일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주영 일본대사관은 트리뷴의 보도가 전혀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나섰다.또 고종이 보호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관계로 오히려 고종이 이 조약에 동의했다고 억지를 부렸다.그러자 스토리는 2월10일자 또 다른 기사로 일본의 주장을 반박했다.일본이 한국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해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상세한 전말을 고종 측근의 말을 인용해 썼다. 이 기사는 트리뷴에 실린 뒤 로이터 통신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대한매일은 2월28일자 1면 논설 ‘保護’에 트리뷴의 기사를 소개했고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한국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고종 밀서사건은 영국·일본·중국·한국 신문에 계속 보도됐고 1907년 1월부터 한국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다.스토리는 1906년 10월부터 트리뷴에 ‘동양의 장래’란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다섯번째로 12월1일자에 문제의 밀서를 크게 실었고 대한매일은 이 밀서 사진을 1907년 1월16일자에 그대로 올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통감부가 적극 나서기 시작한다.밀서가 근거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무색해졌고 고종의 진의를 한국민들이 확실하게 알게 됐기 때문이다.통감부는 “고종이 밀서를 준 일이 없다”고 강력 부인한 뒤 대한매일에 제동을 걸었다.裵說 추방책을 영국정부와 타진하기 시작했다.먼저 “밀서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친의(親誼)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1월21일자 관보에 실었다.또 한국정부 외사국장 李建春을 시켜 “대한매일에 실린 밀서기사는 사실무근이니 이를 정정하라”는 공문을 裵說에게 보냈다. 몇몇 친일계열 신문이 관보에 실린 내용을 게재했지만 대한매일은 오히려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으로 맞섰다.1907년 1월23일자에 “이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까지 갖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 한국인들에게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 없다”는 기사를 싣고 기사정정 요구를 무시했다. ◎고종 밀서 전말/한국의 중립화 목표/미·러 협조 실현안돼/외지에 일 음모 고발 고종의 밀서사건은 국내 반일감정 악화에 따른 통감부의 여론통제 방침을 더욱 강경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다.통감부는 밀서사건 뒤 곧바로 대한매일 등 항일 민족지의 논조를 희석시키고 통감부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친일지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면 이처럼 일제를 자극한 고종의 친서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외세 강점기 이 밀서가 나오기까지 고종의 생각은 한국이 시종일관 중립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종은 일제 강점을 막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방향으로 열강의 협조를 구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세계 각국에 이를 알리기 위한 비밀문서까지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밀서사건 때까지 고종의 이같은 노력은 수차례에 걸쳐 추진됐었다.1900년 주일 한국공사 李夏榮이 처음 제기한 ‘한국의 중립화’안은 러일간에 고조된 긴장상태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그리고 4년 뒤인 1904년 1월21일 고종의 명을 받은 외부대신 李址鎔이 한국의 엄정중립을 명기한 성명을 냈다.각국 주재대표 11명이 각국 정부에 이 선언서를 알렸지만 결국 2월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됐고 이같은 중립화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고종은 열강의 힘을 본격적으로 빌리기 시작한다.1905년 2월 고종은 러시아 육군소장 데시노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다.이 밀서는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를 통해 러시아로 전달됐다.또 을사조약 직전인 그해 10월에는 헐버트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프랑스 주재 한국공사 閔泳瓚을 미국에 보내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민영찬은 12월초 현지에 도착해 미 국무장관 루트에게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미국은 무심한 입장표명을 했다. 결국 고종은 이같은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에 와있던 외국기자를 통해 만국에 알리는 방안으로 밀서를 쓰게 됐던 것이다.
  • 자율 미흡땐 채권단이 ‘칼자루’/5대그룹 계열사 분리방안/정부

    ◎일정지분 매각통해 ‘완전분리’/은행 여신중단·회수 등 무기로 5대 그룹의 계열사 축소를 통한 몸집 줄이기는 당사자인 5대 그룹과 채권금융기관의 자율협의를 통해 최종 확정된다.정부는 5대 그룹 구조조정 방안을 오는 12월15일까지 확정한다는 방침이다. ◇구조조정 절차=상업(LG) 한일(삼성) 제일(대우,SK) 외환(현대) 등 5대그룹 주채권은행은 그룹측이 지난 17일 낸 재무구조 개선계획 수정안을 토대로 다음 달 15일까지 구조조정계획 초안을 만든다.5대 그룹이 낸 수정안은 채권금융기관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자체안으로,채권은행 여신담당자와 회계법인 전문가로 구성될 ‘5대그룹 사업구조조정 추진위원회’가 이를 평가한다. 채권단은 위원회의 평가 내용을 토대로 초안을 채권단협의회를 거쳐 확정한 뒤 12월15일까지 재무구조 개선계획에 반영하게 된다.다음 달까지 나올 재계의 7개 업종 빅딜방안 역시 채권은행과의 협의를 거쳐 구조조정계획에 담게 된다. ◇방법=정부는 5대 그룹의 자체 구조조정계획이 미흡하거나 채권단과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을 강행토록 할 복안이다. 일반적 방식은 다른 계열사의 도움 없이는 생존 가능성이 없는 한계기업 또는 사업부문의 매각이나 정리다.그러나 보다 강도높은 조치는 일정지분의 매각을 통해 계열을 분리하는 것이다. 감독당국 관계자는 “공정거래법상 계열 선정기준에 의해 일정비율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거나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는 사람의 지분을 매각토록 해 연관관계를 없앰으로써 그룹에서 떼어내는 방안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정 사업을 매각한 뒤 그룹에서 떼어내 별도 관리하는 분사(分社)도 있으나 지분관계를 계속 유지해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5대 그룹의 기업구조 재편을 위해 채권단은 신규여신 중단이나 기존여신 회수,우량기업에 대한 보증채무의 이행청구 등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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