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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도쿄서 한일축구 평가전 사령탑 자존심 대결

    ‘진돗개’냐,‘마법사’냐-.7일 오후 7시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리는 올림픽축구대표팀 평가전은 한국(허정무)과 일본(트루시에) 축구사령탑간의 자존심을 내건 두번째 맞대결로 관심을 끈다.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진돗개’라는 별명이 붙은 허정무 감독은 선수로,지도자로 일본과의 경기에서 단 한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어 ‘일본 킬러’로이름을 드날렸다.트루시에와는 지난해 방콕아시안게임 때 한차례 맞닥뜨려 2-0 승리를 안았다.3-4-3 포메이션이 바탕을 이루지만 변칙적인 4-4-2 전법을 내세운 지난달 유럽 전지훈련 7경기에서 19득점 1실점의 뛰어난 성적을 거둔 뒤 “주전들이 고른 기량을 갖춰 전술 펴기가 수월하다”며 자신감에 차있다. 프랑스월드컵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감독을 지내는 등 10년간 아프리카에서 ‘백인 명승부사’로 이름을 떨친 프랑스 출신 필립 트루시에 감독도 반드시 ‘허정무 사단’을 꺾고 명예를 되찾겠다는 각오다.트루시에는 특히 부임 이후 몇차례 터져나온 사퇴설 탓에 한국과는 악연으로 얽혀 있다. 지난 3월 브라질국가대표팀의 아시아투어에서 한국의 선전 때문에 터진 사퇴설이 가장 뼈아픈 기억.한국에 0-1로 쓴잔을 든 뒤 곧바로 일본으로 이동해 온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0-2로 완패,사퇴하라는 비판 여론에 시달렸다. 따라서 그는 99나이지리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축구 사상 최초의 세계4강을 넘어 2위까지 끌어올리며 되찾은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며 벼르고 있다. 트루시에는 전통적인 3-5-2전법 ‘애호가’로 ‘허리 싸움’에 승부를 거는 스타일.이탈리아 프로 페루자팀에서 뛰고 있는 골게터 나카타 히데도시를중심으로 상대진영을 미드필드에서부터 압박하며 골 찬스를 만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송한수기자 onekor@
  • [21세기 초일류 전문기업] 삼성전자(1)

    대한매일은 21세기를 앞두고 자체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세계 초일류 전문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대표적인 변신노력과 밀레니엄 비전을 차례로 연재한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삼성전자가 또 한번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반도체로세계시장을 제패한데 이어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세계 ‘톱3’메이커로 발돋움한다는 구상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매출액 25조원,순이익 3조원으로 이 두가지 기준에서 모두 국내 최고봉에 올라서 있다.순이익을 매출액으로 나눈 당기순이익률도 14%나 된다.이같은 당기순이익률을 달성한 기업은 미국의 GE(제너럴일렉트릭)과 인텔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사업영역도 TV,냉장고 등 가전제품에서부터 휴대폰,TFT-LCD(박막액정표시장치),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전자의 모든 것’을 총망라하고 있는유일한 기업이다.삼성전자 윤종용(尹鍾龍)사장은 6일 호주 시드니에서 가진기자회견에서 “앞으로 VCR과 컴퓨터 프린터,디지털TV,HDD(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등 4개 품목을 세계 1위 품목으로 추가하겠다”고 호언했다. 현재 삼성이 세계 1위 자리를 갖고 있는 품목은 반도체 D램 및 S램 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모니터,전자레인지,CDMA 단말기 등 6품목.양적으로 뿐아니라 질적으로도 세계시장을 제패했다.2003년까지 세계 1위 품목을 10개품목으로 늘리겠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반도체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오던‘돈 줄’도 다양화해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지난 해까지는 삼성전자 매출의 절반을 반도체가 담당해왔다.그러나 올해에는 반도체 매출비중이 35%로 줄어든 대신 그 자리를 휴대폰(25%)과 가전·정보통신(40%)이 메운 상태다. 삼성전자가 2000년대 초 내세우는 간판스타는 정보통신과 반도체,디지털TV등 ‘3두(頭)마차’.삼성은 이들 미래 1위 품목의 시장규모가 1,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휴대폰은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미래에는 휴대폰이 인터넷 등 컴퓨터의 기능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또 휴대폰을 많이 팔면 그에 따라 주요부품인 비메모리 반도체와 TFT-LCD의 매출도 연계돼늘 수있다.2005년쯤 전세계 휴대폰 수요 5억∼6억대 가운데 1억대를 삼성전자가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앞으로 삼성전자는 ‘그룹’이 될 수도 있다.윤사장은 “지주회사가 법인세를 내고 또 배당세를 내야하는 이중과세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삼성전자도지주회사를 만들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이 말은 전자와 연관이 있는 삼성계열사인 삼성전관과 삼성전기,삼성코닝,삼성SDS 등이 ‘삼성전자그룹’으로 묶일 수 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그룹화가 실현되면 전자와 전관,코닝 등은 수직계열화가 이뤄져 ‘시너지효과(통합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삼성전자는 보고 있다.예를들어 삼성전관은 전지,삼성전기는 박막제품,삼성코닝은 표시장치 유리에서 ‘세계 1위 등극’이 쉬워지리란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이같은 ‘장미빛’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당분간 ‘사원복지’보다는 ‘투자’에 더 신경을 쓸 방침이다.현재 800여명인 박사급 인력을 서울대 교수인원 수준인 1,500명으로 확대하기로 했다.국내인력만을 고수하는것이 아니라 미국,일본,영국,러시아 등지에서 우수인력도 충원한다. 삼성전자도 ‘걱정거리’가 있다.바로 외국인에 의한 경영권 위협이다.현재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은 42%.IMF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윤사장은 “주주총회에서 외국인 주주들이 나가라고 하면 그냥 옷을 벗을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시드니 권혁찬.수원 추승호 기자 ■과거정부와 다른점 강봉균(康奉均)재정경제부 장관은 6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국민회의 의원 연수에 참석,정부 재벌개혁 정책의 ‘처음과 끝’을 일목요연하게설명했다. 강장관은 먼저 “재벌개혁은 차입에 의한 문어발식 방만한 사업확장과 이를 가능케하는 총수 1인 지배체제를 바꿔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정부의 개혁드라이브는 외환위기가 재발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막기 위한 책무이자새 천년의 경제 재도약을 위한 역사적 과업”이라고 강조했다. 강장관은 이어 현정부의 재벌개혁 추진방식이 과거 정권들과 다른 점으로다섯가지를 꼽았다. 첫째,과거 정부의 ‘부실기업정리방안’이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조치’등 일과성 조치나 행정명령이 아닌,국회를 통과한 법에 따라 개혁을 추진한다.둘째,관료주도가 아닌 채권금융기관 책임 아래 개혁을 추진한다.이는 과거 방식보다 체계적이고 투명하며 지속적이라는 것이 장점이다.셋째,과거에는 재계와 합의 없이 정부의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으로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지금은 재계와의 합의를 통해 추진한다.넷째,한자릿수 금리와 증시활성화 등 기업들의 재무구조개선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고,마지막으로 개별 기업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성을 견지,영향력을배제하고 있는 점이 과거 정권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강장관은 “특히 정부의 재벌개혁정책에 대해 ‘관치경제’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데 이는 개혁의 신속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정부 주도에 의한일방적 개혁으로 인식하는 데서 나온 비판”이라고 해명했다.또 재벌개혁 후속조치에 재벌의 제2금융권에 대한 소유제한이 빠진 것과 관련,“우선 경영지배구조 개선 방식으로 접근한 뒤 성과가 기대에 못미치면 소유제한 방안도 검토할 것”이라며 결코 재벌개혁의 고삐를 늦춘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균미기자 kmkim@
  • 올림픽팀, 한일전 4연승‘야심’

    “한·일전이라는 부담이 크기는 하지만 이 역시 올림픽 본선을 향한 훈련의 하나일 뿐이다” 오는 7일 오후 7시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리는 한·일 올림픽축구대표팀친선경기를 위해 5일 출국한 한국대표팀의 허정무감독은 예상외로 가벼운 마음임을 강조했다. 유럽전훈 이후 이동국 이영표 등 4명을 새로 보강,내년 시드니올림픽 최종예선(10월1∼11월14일) 체제로 팀을 개편한 만큼 모든 것은이에 대비한 차원에서 이끌어가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허감독도 일본에 져서는 안된다는 팬들의 성화를 모르지 않는다.스스로도 비록 적지이지만 일본전 패배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그러면서도 여유를 보이는 이유는 자신이 이끈 올림픽팀이 지난해 12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 2-0 완승을 거둔 바 있고 올림픽팀간 최근 전적에서도 3전 전승을하고 있기 때문. 허감독이 한·일전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공수 전환,골 결정력 등 그동안미흡했던 부분의 보완과 새로 보강된 선수들과 기존 멤버간의 조화.선수 개개인에 대해서는 전우근과 이영표에게는 상대공격을 차단하거나 최전방 공격수에게 결정적 찬스를 만들어내는 역할,이동국과 신병호는 많은 움직임으로수비수들을 따돌리고 골을 넣는 임무를 줄 예정.기존의 윙플레이 콤비인 박진섭 박지성의 사이드 돌파력도 시험대상이다. 그러나 프랑스출신 트루시에감독이 이끄는 일본대표팀은 이탈리아에서 활약하고 있는 ‘천재 미드필더’ 나카타를 합류시키는 등 만만치 않게 덤벼들것으로 예상돼 허감독이 실제 경기에서 훈련의 연장이라는 당초의 구상을 실행에 옮길지는 미지수다.특히 나카타의 합류는 트루시에감독이 이탈리아를직접 찾아가 “나카타를 이번 한·일전에 내주면 최종예선 2게임에는 부르지않겠다”며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져 그 각오를 감지케 한다. 따라서 양국의 경기는 포장만 친선경기일 뿐 내용은 정면충돌이 될 가능성이 크며 그만큼 흥미를 돋우고 있다. 곽영완기자 kwyoung@
  • 한·일 총리회담 안팎

    [도쿄 이도운특파원]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일본 총리는 2일 오전 도쿄 시내 영빈관에서 40분간의 단독회담과 1시간의 확대회담을 잇달아 가졌다.김총리와 오부치 총리는 재일동포 참정권과 대북 정책공조 등 양국의 주요현안을 폭넓게 협의했다.분야별 주요 협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일동포 참정권 선거권을 먼저 부여한 뒤 피선거권을 추후에 부여하는 순차적 해결 방식으로 의견이 좁혀졌다.외교 당국자는 “일본 공명당과 민주당이 국회에 제출한 법안도 선거권만 부여하는 내용”이라면서 “선거권을 우선 확보한 뒤 피선거권까지 획득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우리측도 법무부 등에서 일부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나,일본 등과의 형평에 맞게 외국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내용으로 관계법을개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총리를 수행한 김기재(金杞載)행정자치부장관도 일본 자치성장관과 만나재일동포 참정권 추진방안을 협의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김총리는 일본 자위대의 ‘독도 탈환 작전훈련 계획설’ 등 최근 일본내의보수우경화 움직임과 관련,“평화 3원칙을 지키고 있지만,조금씩 변화한다는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부치 총리는 “잘 유념하고 아시아 각국에 불안감을 주지 않도록 유념하고적절히 대처하겠다”고 답변했다. ■북한 미사일 북한이 미사일을 다시 발사하기 전에 저지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양국은 오는 7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북·미 미사일회담에서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를 표시했다. 대북 경수로 사업 등 제네바 합의의 이행이 필요하다는 데도 합의했다.그러나 일본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경수로 분담금을 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양국간 교류 확대 오는 2002년 수도권간의 셔틀기 운항과 함께 월드컵 개최도시간의 항공운항 증편도 추진하기로 했다.올해 한일 각료간담회는 10월23일과 24일 제주도에서 개최하기로 확정했다.또 제주도에 수자원조성센터를 만들어 양국 어민의연안양식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dawn@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JP,오자와 자유당 당수와 ‘반상외교’/訪日 이틀째 이모저모

    [도쿄 이도운특파원] 일본을 공식방문중인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가 2일저녁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자유당 당수와 ‘반상(盤上)외교’를 벌였다. 김총리는 이날 저녁 도쿄 이이쿠라 총리공관에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가 베푼 만찬에 참석한 뒤 숙소인 영빈관으로 돌아와 오자와 당수와 심야 바둑 대결을 벌였다.자민당 간사장을 지낸 오자와 당수는 10선의 중진으로 지난해 자유당을 창당한 뒤 자민당과 연정에 참여하고 있다. 김총리는 오자와 당수와 만나 “일본의 미래에 관한 확실한 비전을 보유하고 있는 오자와 당수와는 공식행사보다는 별도로 자리를 마련해 말씀을 나누고 싶었다”고 밝혔다.김총리는 이어 “이제 재일한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부여할 만큼 분위기가 성숙된 만큼 국회에 계류중인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고 오자와 당수도 공감을 표시했다. 김총리는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오부치 총리와 회담을 갖고 경제 6단체 공동주최 오찬 등 세차례의 강연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김총리는 뉴오타니 호텔에서 열린 일본 경제6단체 주최 오찬에서 “양국의무역이 일방적인 역조를 극복하고 확대 균형의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일본의 경제 지도자가 협력해 달라”고 요청하고 “일본 정부도 한국의 관심사인 섬유·신발 등 16개 품목의 관세를 인하하고 비관세 장벽을 제거해 달라”고 요구했다.김총리는 당초 일본어 연설을 준비했으나 건배사만 일본어로 하고 연설은 한국어로 했다. 김총리는 또 ‘일·한 협력위’창립 30주년 기념 강연과 한일 친선4단체 주최 환영회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을 보완하는 아시아 금융협력체제 구축이필요하다”고 아시아통화기금(AMF)창설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dawn@
  • “차례상 차리기 겁난다”

    추석을 20여일 앞두고 장바구니 물가에 비상이 걸렸다. 대표적인 추석용품으로 꼽히는 신고배를 포함한 햇과일류는 물론이고 축산농가 도산 등으로 도축량이 지난해 보다 크게 줄어든 축산물,한일 어업협정타결 이후 생산량이 급감한 수산물 값이 줄줄이 폭등할 조짐이다. 1일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유통공사 등에 따르면 제수용품으로 쓰이는 사과 배 등 햇과일 값이 강세를 띠고 있다. 햇과일의 가격은 도매가 기준으로 아오리 상품 15㎏짜리 한상자가 2만5,000원,신고배 15㎏(20∼25개들이) 한 상자가 6만2,500원 수준이다.신고배의 경우 지난 해에는 추석을 전후로 집중출하되는 바람에 상품 한상자당 3만원에 머물렀다. 농수산물 유통공사 관계자는 “신고배의 경우 나주 순천 등 남부 지역에서폭우로 인한 낙과 피해가 많았고 생산자들이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산지에서 출하를 미루고 있어 물량이 부족한 편”이라며 “아직 추석물가를 논하기에는 이르지만 도매가격이 6만5,000원선이면 소매가는 10만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생산자들과의추석용품 가격협의회를 가진 E마트 관계자는 “올 추석대목을 겨냥한 과일류와 수산물,정육세트 가격이 지난 해에 비해 평균 20∼30% 오른 선에서 형성됐다”고 전했다. E마트는 이에 따라 지난 해 4만5,000∼15만원하던 정육·갈비세트(5㎏)를올해에는 6만∼20만원선으로 올려 제품군을 구성할 계획이다. E마트 관계자는 “정육세트는 지난 설에 백화점과 할인점에서 거의 전량이판매되는 바람에 재고가 바닥난 상태인데다 축산농가의 도산으로 생산량이 40% 정도 줄어들어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옥돔·굴비 등 수산물의 경우 지난 해보다 30%이상 오를 것으로 보이며 청과류의 경우 사과·배는 30%,거봉이나 귤(하우스)은 10∼20% 정도 오른 가격대를 이룰 전망이다.그러나 폭우 이후 계속 치솟았던 채소류 값은 재파종 물량이 출하되며 안정세를 되찾았다. 함혜리기자 lotus@
  • 제1회 한일청소년영화제 아산서 열려

    제1회 한일청소년영화제가 3일부터 7일까지 충남 아산에서 열린다.영화제는일본 장편영화와 재일동포 영화 등을 모은 ‘프리즘 오브 저팬’,인도네시아·베트남 등 동아시아 영화를 선보이는 ‘포커스 온 아시아’,한국 우수 단편영화를 소개하는 ‘코리아 영 오피니언’,한일 단편영화 경쟁부문인 ‘영포커스’등으로 구성됐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프리즘 오브 저팬’부문의 상영작들.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괴담 시리즈의 원조가 된 히라야마 히데유키의 ‘학교괴담’,오시마 나기사와 함께 쇼치쿠 누벨바그의 대표감독으로분류되는 시노다 마히로의 90년작 ‘소년시대’,2차대전 이후 일본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마이 다다시의 59년작 ‘키쿠와 이사무’,핑크영화출신 신예감독 이소무라 이쓰미치의 98년작 ‘파이팅 에츠코’등이 일본 장편영화 상영작 목록에 올라 있다. 재일동포 감독 영화로는 ‘윤의 거리’(김우선),‘어스’(김수길),‘건너야할 강’(김덕철)등이 상영된다. 이 영화제는 아산시청 대강당과 국민생활관을 주상영관으로,아산 온양 신정호수 관광단지 내 잔디광장 등 야외에서도 상영한다.(02)543-0403
  • [일본속의 한국인] 김희로씨 석방결정 계기로 본 현주소

    재일동포 무기수 김희로(金嬉老·71)씨의 석방결정을 계기로 일본내 한국인의 삶과 인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일제의 강제이주로 고국땅을 등지고 일본에 뿌리내린 재일 한국인들은 어느 이국땅의 한인들 보다 고단하고 힘겨운한세기를 살아왔다.64만 재일동포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여류작가 유미리(柳美里·30)씨는 97년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 아쿠타가와(芥川)상을 수상한 뒤 우익세력의 협박에 시달렸다.‘일본인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게 이유였다.일본 전국을 돌면서 친필사인회를 가지려던 유씨는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사인회를 취소했다.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은 이처럼 뿌리깊다.일제가 노동력을 착취하기위해 데려온 수백만의 조선인은 ‘일하는 기계’에 불과했다.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을 살인자 집단으로 몰아 학살했는가 하면,2차대전 패전 직후에는 100만명의 한국인을 ‘범죄분자’로 분류했다. 이같은 인식은 전후에도 이어져 21세기, 새 세기를 앞둔 지금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이나 취업 등에 큰 제약을 받으며살고 있다. 나고야에 사는 구모씨(55)는 10년전 마쓰모토(松本)로 성을 바꾸고 일본으로 귀화했다.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였다.그의 딸(29)은 일본 명문대를 졸업한 뒤 일류 직장인 도쿄미쓰비시 은행에 취직해 일본인과 결혼을 준비하고있다.한국 국적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라고 구씨는 생각하고 있다.대부분의 재일 한국인들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일본의 공직이나 일류 대기업에 취업하기는 힘들다.제출서류인 호적등본에 한국인이라는사실이 드러나면 입사를 거절당하기 일쑤다. 도쿄에 거주하는 박모씨(54)의 아들(16·고1)은 성인이 되면 귀화할 생각이다.아버지 박씨도 그런 아들을 말릴 뜻이 없다.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일본 최고의 명문 도쿄대에 강상중(姜尙中·49)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정교수로 채용된 것이나 가나가와(神奈川)현 등 극소수 지방자치단체가 한국인을 채용한 것도 불과 1년전의 일이다. 공무원의 경우 이들이 오를 수 있는최고의 자리는 국장급인데 그것도‘결재권이 없는’자리뿐이다. 한국인에게‘문호’를 열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시늉 정도라 할 수 있다. 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총련계 여학생들이 폭행과 놀림을 당하고 외국인 등록 때마다 범죄자처럼 지문을 찍는 수모를 재일 한국인들은 일상사로 겪어왔다.한국인의 자긍심을 택할 것인가,생활을 택할 것인가,재일 한국인들의 50여년간 고민은 새 세기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황성기기자 marry01@*在日 韓人 최대현안은 참정권·戰後보상 일본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인 법률과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한국인들을푸대접해왔다.외국인의 지문날인제가 폐지되는 등 일본의 악법들이 하나둘씩없어지거나 고쳐지고 있긴 하나 지방참정권이나 전후보상문제 등은 재일 한국인의 숙원으로 남아있다. ■지방 참정권 일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경제 활동에 따른 각종 세금을 일본인과 똑같이꼬박꼬박 내고 있는 재일 한국인들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91년 한·일 외무장관 각서교환에 이 문제가 포함된 이후 민단은 전국조직을 총동원,지방 참정권 획득운동에 나섰다. 지난해 10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일본 방문 당시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부여를 일본 정부가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뜨거운 감자’가 됐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자민당이 진지하게 검토하토록 노력하겠다”고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 여야는 물론 정부 내에서조차 참정권 부여에 대해 의견이 팽팽히 엇갈려 있다.민주당 등은 이미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는 법안을 국회에제출해놓은 상태.반면 자민당 일부에선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나라가거의 없고,한국정부가 재한 일본인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고 있는‘상호주의’를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반면 지방자치단체는 3,302개 지자체의 41%인 1,364개 지방의회가 참정권 부여 결의안을 채택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전후보상 2차대전 때 일본군에 강제징집 당해 부상을 입은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일본인과 똑같이 연금과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해 놓고있다. 일본 법원은 그러나 이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국적조항’을 들어 패소판결을 내리고 있다.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관방장관 같은 실세 정치인의 “금세기 문제는 금세기에 푼다”는 전향적 태도에도 불구,“전후보상은 한일기본조약으로 매듭됐다”는 관료들의 저항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황성기 기자*제일교포 關西지방에 31만으로 가장 많아 외교통상부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64만5,000여명.상사 주재원이나 외교관,유학생 등 일반 체류자를 뺀 순수 영주자들은59만명이다.이중 일본인과 결혼한 한국인은 2만명 가량 된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65년 35.8%이던 재일동포 1세는 30년 뒤 7%로 줄어들었다.2,3세가 늘면서 일본 귀화도 증가해 50년 이후에는 20만명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오사카(大阪) 등 간사이(關西)지역에 가장 많은 31만명,도쿄 등 간토(關東)지역에 17만명 등이 몰려 살고 있다.
  • 김희로씨 31년 옥살이 마감…새달 조국서 새 인생

    지난 68년 조센징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야쿠자 2명을 살해한뒤 장기복역중인 김희로(金嬉老·71)씨가 수감 31년만에 고국에서 새 인생을 살게 됐다. 김씨의 이번 석방은 외형적으로는 박삼중 스님 등이 펼친 석방운동에 힘입은 것이지만 일본의 재일교포 문제 접근법이 달라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앞으로 재일교포의 일본내 처우 등 한일관계가 종전과 달리 전개될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자신의 석방이 가시화되자 석방을 위해 힘써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삼중스님에게 하기도 했다. 김씨는 부산 출신인 어머니 박득숙씨와 목재하역부였던 아버지 권명술씨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그는 어릴적부터 유난히 험한 개인사를 갖고 있다. 아버지 권씨가 사망한 3년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성이 바뀌었다.김씨는 소학교에 진학한 이후 조센징이라는 ‘죄’로 멸시와 천대를 줄곧 받았다.결국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이름을 여덟차례나 바꾸었지만 번번이 들통나 직장에서 쫓겨났다.일본여성과 결혼했다가 실패하고 항만노무자로 전전하다가 걸핏하면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그는 마침내 68년 2월20일 ‘사건’을 저질렀다.당시 마흔살이던 그는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더러운 조센징 돼지새끼”라고 욕하며 빚독촉을 하던 야쿠자 2명을 엽총으로 쏘아 죽인뒤 차량으로 도주,혼카와네의 온천여관에서 투숙객 13명을 붙잡고 88시간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된것.72년 1심,74년 2심을 거쳐 75년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김씨는 인질극을 벌이면서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경찰관의 차별을 성토하고경찰의 사과와 해당 경찰관의 파면을 요구하기도 했다.일본언론은 김씨를 흉악범으로 몰았으나 여관주인은 당시 김씨가 준 시계를 아직도 보관하면서 그의 인간미를 얘기한다. 김씨는 수감후 어머니에 의지해 살아왔으나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출소를보지 못한채 지난해 11월 유명을 달리했다. 김씨의 비극적인 인생은 비단 김씨 자신 뿐만 아니라 재일교포의 삶을 단면으로 보여준다.이 탓에 90년대 들어 한일 양국에서 김씨의 스토리가 영화와TV 등으로 자주 다루어졌다. 김성호기자 kimus@
  • [화제의 책]

    ◆공자의 이름으로… 중국의 명·청대에 한창 나이의 여성이 많이 숨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예문서원이 펴낸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전여강 지음,이재정 옮김)은그 이유로 정절을 강조하는 당시 사회·경제적 분위기를 꼽았다. 명·청대에는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의 가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국가가 보상을 하고 각 지방 관아에서는 ‘열녀’를 추앙해,결과적으로 수절과 자살을 장려했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또 당시 과거시험의 경쟁 심화로 남성들이 깊은 좌절을 겪게 되고,이것이여성 자살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자살 여성이 많은 곳은 과거시험에 실패한 학자의 수도 많았다는 것.귀신이되면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민간신앙도 여성을 죽음으로 몰게 한 주요원인이라고 책은 말한다.저자는 그러나 당시 여성들이 ‘공자(유교)의 이름으로’ 죽었으며,‘공자가 죽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값 7,500원. ◆증언 반민특위… 해방직후 구성된 ‘반민족행위 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반민특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주요 인사 7명의 최초 증언록이다.제목은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정운현 지음,삼인 펴냄). 저자는 이 책의 가치를 사장될 뻔했던 역사의 편린을 담은 ‘행운의 책’이라고 평가했다.그래서 증언자들의 말투까지 실어 진실을 그대로 전달하려는노력을 보였다. 80년대초 귀순한 신경완씨의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에 대한 증언은 사료적인 가치를 더한다.뛰어난 기억으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를 소상하게 밝힌신씨는 증언 3개월만에 작고했다. 증언자들은 반민특위의 구성경위와 체포 당시의 반민족주의자들의 태도 및수감 때의 정신상태,반민특위 해체를 부른 이른바 지난 49년의 ‘6.6사건’전말,반민특위 활동자의 역사의식과 개인적인 성향,특위관계자에 대한 이승만과 친일파의 협박 및 회유책도 소상히 전하고 있다.값 9,000원. ◆정치야 맛좀 볼텨 시사 만평의 묘미는 짓눌리고 응어리진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주는 데 있다. 시사 만화가 박재동씨의 ‘정치야 맛좀 볼텨’는 작가가 지난해 TV 시사만평에서 세태를 풍자한 시사 애니메이션 작품을 그림과 함께 CD로 구성한 것이다.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 사회의 환부를 촌철살인의 시각으로 날카롭게 꼬집어독자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든다. 책에는 39개의 얘기가 실려 있다.고급옷 로비사건을 비롯해 세풍사건,한일어업협정,대기업 빅딜 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굵직한 사건을 다룬다.정치적으로 민감해 TV에 방영되지 못했던 작품들도 모두 담았다.한 시대의 정치 사회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작품마다 기획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세하게 실어,시사 애니메이션 작가 지망생의 교재로 활용될 수 있다(박재동 지음, 산성미디어 펴냄). 값 1만2,000원. 정기홍기자 hong@
  • 의열 독립투쟁(2)-강우규 의사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가운데서 의사(義士)라고 하면 흔히 20∼30대 열혈청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실제로 윤봉길(尹奉吉)·조명하(趙明河)의사는의거 당시 24세였고,이봉창(李奉昌)의사는 32세, 김상옥(金相玉)의사는 33세,그리고 나석주(羅錫疇)의사는 36세였다. 1924년 일황의 궁성 정문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의거 당시 44세로 드물게 40대에 속하는 정도다. 그런데 환갑이 넘은 60대 나이로 의거를 행한 의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지.그러나 실제 우리 의열투쟁사에는 60대 노(老)투사의 의거기록이 있다. 1919년 9월2일 오후 5시경.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역(현 서울역) 주위에는 일본 군경이 삼엄한 경계를 펼친 가운데 어느 고관의 도착을 기다리는 준비가부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이윽고 5시가 되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신임 총독 일행을 태운 열차가 플랫폼으로 도착하였다.사이토 총독 내외와 일행은출영나온 내외 인사·신문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귀빈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사이토가 귀빈실에서나와 입구에 마련된 쌍두마차에 오르려 하자인근 한양공원(현 남산공원)에서는 그의 부임을 축하하는 21발의 예포(禮砲)소리가 울려퍼졌다.예포가 끝나고 사이토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사이토가 탄마차 인근에 폭탄 한 발이 굉음을 울리며 작렬하였다.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병을 비롯해 신문기자 등 30여명이 일순간 현장에서 고꾸라졌다.폭탄이 떨어진 곳은 사이토가 탄 마차로부터 불과 7보(步)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3·1의거 후 격앙된 조선민족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고 부임한 신임 총독 사이토.그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후 받은 첫번째 선물은 ‘폭탄세례’였다.이날 신임 총독이 부임하는 자리에폭탄을 던져 조선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드높인 의사가 바로 강우규(姜宇奎)의사다.강 의사의 그때 나이는 64세,이미 환갑이 지난 노인이었다.일제하 숱한 의·열사 가운데 강 의사는 가장 고령에 속한다. 1855년(철종 6년)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태어난 강 의사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모두 보고싶지 않은 사람,보고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이듬해 봄 가솔(家率)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만주길림성에 정착하여 신흥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해온 강 의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노령(露領)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에 참가,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키로 작정한 강 의사는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으로부터 러시아 돈 50원을주고 영국제 폭탄 한 개를 구입한 후 6월1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배를타고 원산을 거쳐 8월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 머물면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과 거사 계획을 세운 강 의사는 마침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 이어 사이토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남대문역에서 그를 처단키로 결심했던 것이다. 9월2일 의거 당일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 허리춤에 차고 그 위에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다.또 시골영감 티를 내기위해 파나마 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손에는 양산과 수건을 하나씩 들고 남대문역으로 향했다.이런 강 의사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 구내 다방에서 군중 틈에 끼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강 의사는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에 오르려하자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투탄거리가 불과 6∼7m 정도에 그쳐 사이토가 탄 마차에는 미치지 못한데다 폭탄의위력이 약해 사이토를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이토는 폭탄의 파편이 혁대를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고 같이 부임한 정무총감 미즈노(水野鍊太郞)는 경미한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그러나 성과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총 37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 가운데 스에히로(末弘又二郞) 경기도 경시(警視)는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는 상처를 입어 9일 후인 9월11일 사망하였다.또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다치바나(橘)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를 뚫고 들어가 11월1일 사망하였으며야마구치(山口諫男)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고 결국 팔을 절단 하였다. 한편 사건 직후 일경·헌병들은 남대문 일대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돼 수색을 벌였다.그러나 60대 노인인 강 의사는 별다른 검문도받지 않은 채 무난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며칠간의 수소문 끝에 투탄자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경은 의거 보름 만인 9월17일 가회동 하숙집에서강 의사를 체포했다. 강 의사를 체포한 사람은 조선인 경찰 가운데 애국지사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김태석(金泰錫)이었다. 강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도 의연함과 당당한 기개를 잃지 않아 일본인 재판장이 ‘영감님’ ‘강선생’으로 호칭하였다고한다.고등법원의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자 강 의사는 면회온 장남중건(重健·작고)에게 “사람은 한번 나면 죽는 것이다.네가 나의 사형을 슬퍼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나는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이루어놓지 못하였음을 슬퍼할 뿐이다.내가 이때까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내가 이번에 죽어서 우리 청년들의 가슴에 어떠한 감상과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 이상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고 하고는그 뜻을 전국 13도의 각 학교와 교회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노 투사는 최후까지 조국을 걱정하였다.1년간의 옥고를 치른 강 의사는 이듬해 11월29일 오전 9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때 나이 65세였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 집행자가 “유언이 없느냐”고 묻자 대답 대신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사형대에 홀로 서니(斷頭臺上) 춘풍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요(豈無感想) 강 의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현 은평구 신사동 소재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54년 수유리로 이장됐다가 67년 다시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로 이장됐다.1962년 정부는 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강 의사의 의거현장인 서울역 역사(驛舍) 앞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기념표지석이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쓸쓸히 서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긴 상태다.장남 중건씨는 연해주에서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친손녀 영재(榮才)씨도 수년 전 작고했다.영재씨의부군은 도쿄제대 출신의 농학자로 수원농사시험장장을 지낸 최병석씨.현재강 의사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는 조카 항렬의 강영복(姜榮福·72·서울 거주)씨로 강씨가 강 의사의 훈장과 훈장증을 보관하고 있다.그러나 직계 후손이 아니어서 연금수령은 못하고 있다.강 의사의 제사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매년 순국일인 11월29일 지내고 있다.변변한 일대기 한 권도 없고 그흔한 추모사업회,기념사업회 하나 없는 것은 대가 끊겨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이다.강 의사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고적(孤寂)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양부, 어업교섭관 2명 특채

    해양수산부는 16일 대외어업 교섭업무 등을 담당할 수산전문가 2명을 공개경쟁 방식으로 특별채용했다. 어업교섭관(5급 상당)으로 채용된 소성권(蘇聖券)·정동근(鄭東根)씨는 미국과 일본에서 수산 관련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과 연구소에서 근무해왔다. 이들은 앞으로 수산 관련 대외 협상에 대비,기초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대응 전략 등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는다.해양부는 “수산 전문가가 부족해 한일·한중 어업협상에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이들을 활용하면 어업협상 능력이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건승기자 ksp@
  • 고양시장 보선 이틀 앞으로

    경기 고양시장 보궐선거가 턱밑으로 바짝 다가왔다.이번 선거는 내년 총선의 예비전 성격이 강해 지난 3일 선거전 시작과 함께 여야 수뇌부가 대거 지원유세에 나서는 등 일찌감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특히 중산층과 젊은층 유권자가 많은 일산신도시 주민들을 향한 여야의 관심도가 의미를 더해준다. 국민회의는 공동여당 후보로 이성호(李星鎬·63)씨를 내세웠다.과거 고양부군수와 동두천 부시장을 지낸 지역 토박이인데다 풍부한 행정경험과 깨끗한 이미지로 지역발전을 바라는 신도시 주민들의 지지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있다는 계산이다. 한나라당은 황교선(黃교선·60)씨를 차별화된 후보로 맞세웠다.한일약품 명예회장 등을 역임한 황후보는 효율과 서비스를 최우선으로 한 ‘경영시장’으로서 중앙의 부당한 간섭과 통제에 맞서 독자적인 지역발전을 이루겠다고주장하고 있다. 이번 보선은 黃碩夏(45)·崔聲權(47) 두 무소속 후보의 약진이 두드러진 점도 특징이다.이들은 유권자의 주류인 젊은층이 정치에 무관심과 냉소적 시각을 보여 투표율만 높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한다. 황후보는 대학생과 여성들을 발판으로 ‘인물부재전’의 틈새를 적극 공략하겠다는 전략이고 최후보 역시 순수 시민후보임을 자처,여야 후보들을 패거리정치인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한편 이번 보선의 선거인수는 남자 25만3,372명,여자 26만5,573명 등 총 51만8,945명으로 투표율이 30%를 밑돌 것으로 보여 6만표 가량을 얻으면 당선권에 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고양 박성수기자 songsu@
  • ‘과천 세계예술제’구경오세요

    연극인들과 과천시의 갈등으로 집행위원장이 교체되는 등 파행을 겪은 ‘과천세계마당극큰잔치’가 ‘마당99,과천세계공연예술제’로 이름을 바꿔 오는 9월 10∼19일 제3회 행사를 개최한다. 바뀐 명칭에서 알 수 있듯,우리 고유의 전통연희 양식인 마당극과 세계 각국의 거리극을 위주로 한 이전 행사와 달리 무용·음악·퍼포먼스 등 야외에서이뤄지는 모든 장르를 수용해 복합 공연예술의 장으로 탈바꿈한다. 해외초청작으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7개국에서 8개 공연이 선정됐다.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국제 페스티벌에서 호평을 얻은 작품을 우선해서 뽑았다.일본 ‘류잔지’(流山兒)의 ‘광인교육’,한일공동제작‘거짓이라는 이름의 진실’등 2편의 정극과 미국 세컨핸드 무용단의 ‘인간파리 외’공연을 제외하곤 모두 퍼포먼스이다. 이중 가장 눈여겨볼 작품은 프랑스 ‘메자닌’의 ‘양들의 방황’.세기말을살아가는 인간들의 처절한 일상과 절망,그리고 그 끝에 매달린 희망을 육체언어로 그려낸 이미지극이다.이탈리아 ‘누클레오’의‘마스카로’,독일 ‘살푸리’의 ‘항해’등도 주목받고 있다. 국내 초청작은 경기도립극단의 ‘별 산대놀이가 다 있네’(마당극),극단 처용의 ‘로미오와 줄리엣’(연극),우리극연구소의 ‘불의 기쁨,밥의 평화’(퍼포먼스),‘신관웅과 재즈 빅밴드’의 ‘듀크 엘링턴 탄생 100주년 기념콘서트’(음악)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18편이 선보인다.이밖에 영호남연극발전협의회가 준비한 마당극 ‘화개장터’와 한국연극배우협회의 ‘춘향전’,경기도연극인연합극단의 ‘도당제’가 기획공연으로 무대에 오른다. 행사기간중 이탈리아,호주,영국,프랑스 극단의 워크숍과 국제학술심포지엄,세계연극평론가협회장 이안 허버트의 특강 등이 곁들여진다.과천시민회관 안팎 9곳에서 행사가 진행되고,‘양들의 축제’‘난타99’‘대우서커스’등 3편이외에는 모든 공연이 무료이다.(02)500-1233. 한편 이번 예술제는 지난 2년간 행사를 주관해온 한국연극협회와 민족극협의회가 불참한 가운데 추진돼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운영방식에 대한 과천시의 간섭으로 빚어진 불화는과천시가 집행부를 새로 구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집행위원장 교체 등 일련의 진행과정에서 쌓인 연극인들간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순녀기자 coral@
  • 올 대입 ‘더 좁은 문’

    2000학년도 4년제 대학 입시 경쟁률이 당초 예상보다 다소 올라갈 전망이다. 15일 교육부가 집계한 각 대학들의 입학정원에 따르면 서원대 등 3개대가자발적으로 정원을 감축한 데다 62개 대학이 정원을 동결했다.서원대는 50명,침례신학대는 30명,한일장신대는 40명을 줄였다. 특히 ‘두뇌한국(BK)21’ 사업을 신청한 서울대 등 89개 대학들도 지원대상으로 선정되면 해당분야 학부의 입학정원을 줄일 계획이어서 정원 감축 규모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이화여대 등도 대학원 입학정원 증원을 전제로 학부정원을 감축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복수지원을 고려하지 않은 4년제 평균 대입경쟁률은 교육부가 예상했던 1.41대1보다 올라갈 것으로 분석됐다. 한편 전문대도 가톨릭상지대 170명,제주관광대 80명,벽성대 120명,영월공대 60명 등 17개대가 1,990명의 정원을 감축하기로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정원 자율화 요건인 교원 및 교사(校舍) 확보기준이 강화된 데다 고교 학생 수도 점차 줄어 대학들이 정원을 늘리기보다는 정원을축소,내실화를 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박홍기기자 hk
  • ‘도쿄 대재판’ ‘일본문화사’등 실체 밝힌 책 출간 봇물

    “일본은 왜 망언을 되풀이할까” “일장기는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천황은 어떤 존재일까”. 일본의 역사와 정신을 다룬 각종 책들이 8·15를 즈음해 봇물을 이루고 있다.이들 서적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앞두고 한일간의 상호이해를 높이자는 뜻에서 발간되고 있다. 망언이 거듭되는 배경은 중국인 황허이(黃鶴逸)가 쓴 ‘도쿄 대재판’(백은영 옮김,예담출판사)은 2차대전 직후 일본 전범에 관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일본이 여전히 군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다.이 책은 모두 4,019명의 증인이 출석하고 4,336부의 증거문서가 제출된 극동국제군사법원,즉 2차대전 전범처리를 위해 열린 도쿄재판의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아울러 재판 이후 전범들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지배층으로 재부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장기와 기미가요의 뿌리는 홍윤기 외국어대 교수는 ‘일본문화사’(서문당)에서 기미가요의 원형으로 서기 912년경 완성된 20권짜리 시가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실린 와카를 꼽는다.‘와카’란 우리의 향가나 시조에 해당되는 일본 고유의 시가.다이고천황(재위 897∼930) 칙령으로 편찬된이 시집은 와카 1,111수를 모아놓은 것으로,343번째 노래가 바로 현재의 기미가요 원형이라는 것.홍 교수는 “기미가요의 어머니격인 이 노래는 고려가요인 ‘정석가’와 너무 비슷하다”면서 “1880년대 노래 첫머리가 일부 바뀌어 지금의 기미가요가 됐다”고 말한다. 일장기는 에도(江戶)막부 때인 1811년 이후 일본 국기로 공식 사용됐다.이전 일본 무장들이 지휘용 부채 등에 집어넣던 그림이었는데 메이지(明治)시대때 국기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천황은 누구인가 이규배 탐라대 교수는 ‘누가 일본의 얼굴을 보았는가’(푸른역사)에서 “‘조선왕조실록’ 없이 조선을 이해하지 못하듯 천황을 빼놓고는 일본을 바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천황은 1192년경 처음 등장해 1868년 700년만에 절대군주로서위치를 굳혔다.현재 3부 요인을 임명하는 등 절차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이 교수는 “천황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면서 “천황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일본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이밖에 일본 곳곳에남아있는 한국역사의 흔적을 모은 김정동 목원대 교수의 ‘일본을 걷는다·2’(한양출판),비교문화연구가 김명학이 일본 여고생에게 특유한 행태인 원조교제 등을 살펴본 ‘나,일본여고생’(이채)등의 책도 잇달아 출간돼 독자를기다리고 있다. 박재범기자 jaebum@
  • [義烈 독립투쟁] (1-1) 역사적 의의와 성과 전문가 좌담

    대한매일은 광복 54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의열투쟁에 몸바친 의사·열사들의 독립투쟁 활약상과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의열 독립투쟁’을 주간 특집기획물로 연재한다.의열투쟁은 주로 개인차원에서 전개됐으나 중국의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두고 ‘중국 군인 30만이 못하는 일을 고려청년한 사람이 해냈다’고 할 정도로 그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의·열사가운데 상징적인 몇 분을 제외하고는 낯선 이름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연재에 앞서 전문가 좌담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성과 등을 짚어보기로 한다. 김삼웅 주필 지난해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꾼 이래 민족사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본지는 친일파들의 반민족행위를 고발한 ‘친일의 군상’에 이어이번에 새로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에 몸바치신 의사·열사들의 일대기와 항일정신을 되새기는 연재물을 기획하였습니다.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더러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언론매체에서 이를 집중 조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이번 좌담모임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열투쟁사 연재에 앞서 의열투쟁의 성과나 역사적 의의 등을 짚어보기 위해 마련하였습니다.먼저 역사학계에서 내리고 있는 의사·열사의 용어 정의부터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동양의 고전에서는 열사는도덕적 행위,의사는 사회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조동걸 교수 우선 ‘의열투쟁’이라는 용어나 개념은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의열투쟁사’를 편찬해낸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의·열사를 정의한 것을 보면,의사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져 행동으로 실천한 분’으로 대표적으로 안중근,윤봉길 의사같은 분을 들 수 있겠지요.반면 열사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로 저항한 분’으로 이준 열사가 대표적인 분이라고 할수 있죠. 채영국 연구원 의·열사 구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보이는 특이한 형태가 아닌가 합니다.중국에 갔을 때 ‘혁명열사기념탑’ 같은 것은 봤습니다만 ‘의사’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치 않는 것으로 압니다.두 용어를 구분하는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신용하 교수 의암 유인석 선생이 선비의 저항정신으로,첫째 무기를 들고적과 싸우는 유형,둘째 외국으로 망명,몸을 깨끗이 보존하는 유형,셋째 국내에서 자결,자정(自靖)하여 지조를 지키는 유형 등 세 유형을 들고는 그 가운데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첫번째 유형이라고 하였습니다.바로 이 저항정신이 의·열사의 정신으로 계승됐다고 봅니다.그 중에서도 의사는 개인차원이나혹은 집단적으로 특공작전을 한 분으로 개인 차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를,집단적인 차원으로는 의열단,한인애국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 주필 그러면 이같은 의·열사들의 의열투쟁은 언제,무슨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으며 어떠한 행태를 띠고 있었는지,또 의병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어떤 책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격분을 참지 못해 현지에서 자결한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선생의 순국을 의열투쟁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더군요. 조 교수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부터 의열투쟁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의열단체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 등장한 ‘오적(五賊)암살단’이 최초라고 봅니다.본격적으로 의열투쟁은 1908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이며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아무래도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부터라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계보는 1906년 나철(일명 나인영)·오기호(일명 오혁)등이 ‘오적’ 암살을 모의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물론 이들의 오적 처단계획은 도중에 발각돼 좌절됐지만 이를 계기로 1909년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탄생하였죠.전명운·장인환 두 의사의 의거는 국내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물론 미국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돼 당시 세계적인 반향을불러 일으켰습니다.흔히 일제하 의사들의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는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왜냐하면 제국주의 하에서 약소민족이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행한 의열투쟁은 일종의 ‘특공작전’으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조 교수 미국이나영국 같은 나라들이 약소국의 그런 행위를 ‘테러’로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미군의 OSS작전 같은 것도 그렇게 따진다면‘테러’지요.주임무가 주요기관 파괴·요인 처단 아니었습니까? 채 박사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의 ‘선언서’나 ‘격문’ 등에 나타난 의열투쟁 정신은 근본적으로 생존권 획득과 인류의 자유·행복추구를 목적으로 했다는 차원에서 피지배민족으로서는 정당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불렀듯이 우리입장에서 보면 일제는 ‘강도(强盜)’나 다름없었지요. 김 주필 일제하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에서 결행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독립진영에 미친 그 성과는 대단했다고 생각됩니다.안중근 의사의 의거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의열투쟁의 전개양상과시기별 특성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신 교수 무기를 사용한 의열투쟁은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전쟁적 성격 ▲유격전 성격 ▲특공작전 등 세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병전을 전면전이라면 유격전은 전쟁중 적을 기습공격한 후 재빨리 빠져나와 계속 작전을 하는 방식입니다.반면 특공작전은 강대한 적의 목표물을 공격,치명타를 입힌 후 특공대원 자신도 자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 교수 의열투쟁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특공대원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결행한다는 신 교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반면 일제말기 ‘가미가제(神風)’의 경우 자기의 의사와 무관하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는 학살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경우 거사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효과가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러 의사 가운데는 의거에 성공한분도 있지만 더러는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거사 전에 좌절됐거나 또 거사는결행했지만 실패한 분들도 있습니다.그러나 ‘살신성인’의 정신은 어느쪽할 것 없이 모두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채 박사 1910년대에 작성된 한 문건에 따르면,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간도지역에서는 조선동포들이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만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면서 신(神)처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시기별 의열투쟁의 특징으로는,우선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는 대개 ‘국권수호’를 내걸었습니다.1910년대의 의열투쟁은 의병의 세력이 쇠퇴한 상황에서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준비한 기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본격적인 의열투쟁은 1920년대 들어 의열단 결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3·1의거후 고조된민족의식과 의열투쟁의 여건이 성숙됐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독립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있던 1930년대에는 중국을 무대로 활동한 임시정부 산하한인애국단의 활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겠죠. 김 주필 끝으로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사 측면에서의 의의나 평가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보면 의열투쟁은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빠져있거나 또는 일제의 통치가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주로 터져나왔습니다.이로써 일제에게는 큰 타격을 준 반면 우리 민족진영에는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조 교수 일제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의병이나 계몽운동의 형태로 출발했다가 점차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의열투쟁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그런데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의 독립운동치고는 성과가 컸고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독립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후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안중근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부른 경우라든지 또 윤봉길 의사의거후 중국의 장개석 정부가 임정을 주목,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수 백명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큰 것이었지요.백범김구 주석이 환국후 그 복잡한 정치상황 하에서도 의·열사들의 유해봉환을중대사업으로 취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 교수 안의사와 윤의사 두 분의 의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안의사가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일본과 러시아의 만주분할 계획이 좌절되자 중국의 언론과 지사들은 안의사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돼만주와 중국땅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가 됐습니다.또 ‘만보산사건’으로 생겨난 한·중 간의 적대감은 윤의사의 의거후 곧바로 봄눈 녹듯이사라지고 말았으며 당시 장개석은 ‘30만 중국군대가 못한 일을 고려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극찬했습니다.‘김구-장개석회담’이 바로 윤의사 의거 직후에 처음으로 성사됐으며 중국측의 지원도 이 때부터 공식 시작됐지요.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을 극복하고 의열투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이론정립이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주필 일제하 선열들의 의열투쟁정신은 해방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부 계승된 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요즘과 같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의열투쟁의 정신이 더욱 값진 교훈으로 다가온다고 하겠습니다.오늘 좌담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리=정운현기자 jwh59@
  • 독립군 지도자 김정규선생 일기 원본 첫 공개

    의병 및 독립군 지도자이자 성리학자인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奎)선생이 한일합병을 전후해 15년 동안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실들을 중심으로 쓴 일기원본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독립기념관이 광복 54주년을 앞두고 공개한 이 일기는 1907년 3월27일부터 1921년 11월16일까지 무려 15년에 걸쳐 쓴 17권 18책 2,044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천안연합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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