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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표결처리 vs 날치기/박대출 논설위원

    초대 국회는 나름대로 민주의회였다. 날치기 처리가 한 건도 없었다. 첫 날치기는 2대 국회 때다. 1952년 1차 개헌을 하면서다. 자유당은 발췌 개헌안을 날치기했다. 날치기는 쭉 이어졌다. 9대, 10대에서는 건너뛰었다. 문민정권 이후에도 계속됐다. 사실상 여당의 전유물이었다. 야당이 한 건 13대에 이르러서다. 1988년 8월 야3당이 처음으로 해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등 16명에 대한 출국금지안을 뚝딱 처리했다. 여소야대 국회였기에 가능했다. 그 행위는 진행형이다. 김영삼 정권 때는 노동법을 ‘그렇게’ 처리했다. 김대중 정권 때는 신한일어업협정을 역시 ‘그렇게’ 처리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사학법을 ‘그렇게’, 이명박 정권 때는 미디어법을 또 ‘그렇게’ 통과시켰다. 야당은 날치기라고 비판한다. 날치기는 ‘당하는 이’만의 표현이다. ‘행하는 이’는 부정한다. 합법적인 표결처리라고 주장한다. 중간자에겐 어정쩡한 상황이 왔다. 언론도 애매해졌다. 단독처리, 강행처리로 겨우 절충했다. 당하는 이를 편드는 언론들만 날치기와 혼용해 왔다. 한동안 먹혀들었다. 이제 그마저 도전받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놓고 재연됐다. 한나라당에서 문제삼는다. 강행처리도 부적절하다고 한다. 이두아 원내대변인은 ‘국회법에 따른 표결처리’를 주장한다.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은 여전히 ‘날치기’라고 맞선다. 논쟁은 이중잣대에서 비롯된다. 여당 때와 야당 때가 다르다. 절묘하게 꼬집은 명언이 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정치권에서는 유행어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쓰인다. 자신에겐 정당함을 포장한다. 상대에겐 부당함을 덧칠한다. 박희태 국회의장이 주인공이다. 명대변인 시절 내놓은 조어(造語)다. 비준안 직권상정이 임박했다. 자신이 불륜과 로맨스의 경계에 섰다. 의회주의가 바로 서야 한다. 합의가 안 되면 표결처리하면 된다. 이 진리는 늘 맴돌았다. 악순환을 끊어야 할 때다. 만장일치 합의 처리가 아니면 표결처리로 쓰는 게 맞다. 찬반 토론 후 찬반 표결처리, 야당 불참 속 단독 표결처리, 물리적 저지 속 단독 표결처리, 유혈 사태 속 단독 표결처리 등…. 상황 설명만 곁들이면 된다. 일부 정당이 동조할때는 그에 맞춰 쓰면 된다. 여야가 비준안을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다. 각자 하고픈 일을 하면 된다. 표결처리가 로맨스냐, 불륜이냐. 이게 본질이다. 평가는 정치권의 몫이 아니다. 국민이 심판한다. 내년 총선, 대선은 그 무대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한일건설·한일시멘트 등 7곳 압수수색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부장 윤희식)는 1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중견건설업체인 한일건설 본사와 한일시멘트 그룹 등 계열사 7곳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이날 검사와 수사관 등 10여명을 보내 10시간 넘게 압수수색, 회계장부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관련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한일시멘트그룹의 허동섭 회장 일가가 2008년 주식이 급등락하는 시점에서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긴 정황을 포착해 허 회장 일가를 검찰에 고발했다. 허 회장 일가는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건설사의 위기론이 불거졌을 당시 계열사인 한일건설 주식을 대량 사들인 뒤 리비아 대형공사를 수주해 막대한 주가 시세 차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한일건설은 건설경기 침체로 부채비율이 높아지자 지난해 10월 주채권은행인 국민은행과 경영정상화계획 이행약정(MOU)을 체결하고,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다. 한일건설은 최근에도 리비아 재건 사업 참여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흘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부고]

    ●문창엽(전 LH공사 U-ECO시티 사업단장)창호(부경대 교수)애란(전 웰콤 대표)애경(독일 거주·작가)씨 모친상 구자영(그안 대표)씨 장모상 최진옥(한국꽃꽂이협회 가향회 회장)강태경씨 시모상 1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 (02)3410-6901 ●손상진(전 KBS스포츠국장)씨 부친상 14일 경북대병원, 발인 17일 오전 7시 (053)420-6144 ●신재호(전 서울경제신문 사진부 기자)씨 부친상 14일 의정부 성모병원, 발인 17일 오전 5시 30분 (031)820-5053 ●신준용(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덕용(전 미국 피츠버그대학 경영학과 교수)해용(중앙대 수학과 교수)순용(풍납중 교장)씨 부친상 이규진(성동고 교사)김순은(동의대 행정학과 교수)씨 장인상 15일 고려대안암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 010-4239-0200 ●이선균(배우)씨 모친상 전혜진(배우)씨 시모상 15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17일 오전 7시 (02)2227-7500 ●장정진(자영업)창진(신용보증기금 안양지점장)경진(공군본부)씨 모친상 박용덕(덕산공업 대표)김종수(강변농원 대표)씨 장모상 15일 밀양 농협장례식장, 발인 17일 오전 9시 (055)355-8525 ●두형준(전 한일은행 지점장)씨 별세 원정(LG전자 연구원)씨 부친상 1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7시 (02)3410-6909 ●심재완(국문학자·영남대 명예교수)씨 별세 홍필(택산 대표이사)정필(미국 조지아주립대 교수)명필(국토해양부 4대강추진본부장)원필(안동대 교수)문필(재불 화가)씨 부친상 15일 영남대병원, 발인 19일 오전 8시 (053)620-4241 ●한영철(렉서스프라임모터 대표이사)씨 모친상 주흥로(엑셀 사장)김은수(한화 상무)씨 장모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8일 오전 9시 (02)3010-2230 ●선주현(아이파크백화점 이사)씨 부친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6시 (02)3010-2631
  • 전남~제주 쾌속선 경쟁시대…쾌속선 4대·위그선 4대 투입

    전남~제주 간 뱃길이 더 빠르고 더 편리하게 재편되고 있다. 최근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면서 이들은 더 빠르고 안락한 제주 뱃길을 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14일 목포지방해양항만청에 따르면 전남에서는 제주와 가장 가까운 완도항에서 배를 띄우는 한일고속이 새달 23일 초쾌속선을 취항시킨다. 3000t급 쾌속 카페리 ‘한일 블루나래호’가 취항하면 완도~제주 뱃길이 1시간대로 빨라진다. 3시간 10분에서 1시간 40분으로 대폭 단축된다. 목포~제주 간 국내 최고, 최대 규모의 ‘바다 위의 호텔’로 불리는 2만 4000t급 스타크루즈호를 띄우는 씨월드고속훼리는 매일 오후 2시 30분 출항하는 선박을 5000t급 쾌속선으로 대체하기 위해 계약을 끝냈다. 고흥 녹동항에서도 카페리가 조건부 면허를 받아 취항을 앞두고 있으며 씨월드고속훼리도 1시간 40분대인 해남 우수영~제주 뱃길을 연다. 현재 전남~제주를 오가는 뱃길에는 목포~제주 간 카페리 3척, 완도~제주 카페리 3척, 고흥 녹동~제주 카페리 1척, 장흥~성산포 2척 등 총 9척이 운항 중이다. 운항 시간은 최단 1시간 50분~최장 5시간. 그러나 앞으로 쾌속 카페리 4척 외에 완도~제주 간, 여수~제주 간 각각 1척과 3척의 위그선 등 총 8척의 배가 새로 투입될 예정이다. 목포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제주 추자도 올레 코스

    제주 추자도 올레 코스

    이제 올레를 빼고 제주를 말할 수는 없게 됐습니다. 1코스부터 19코스까지, 일부를 제외한 제주 해안 전역이 올레로 연결돼 있습니다. 제주의 경승지들은 죄다 꿰고 있는 셈입니다. 추자도나 마라도 등 제주 본섬 밖의 곳들에도 올레는 어김없이 조성돼 있습니다. 예컨대 추자도는 18-1코스인 것이지요. 산지천에서 조천을 잇는 18코스의 가짓길, 추자도를 다녀왔습니다. 제주의 다른 부속섬과는 달리 제주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섬입니다. ●바다 위에 뜬 꽃봉오리 같은 섬 추자도는 전남 완도와 제주의 중간쯤에 있다. 상·하추자와 추포도,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뤄졌다. 고려 때는 영암, 조선시대엔 완도 등에 속했다가, 일제강점기(1910년)에 제주도로 편입됐다.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하지만 주민들의 말투나 습속, 음식 등은 전남에 가깝다. 면적으로는 하추자도(3.5㎢)가 상추자도(1.5㎢)보다 세 배 가까이 크다. 하지만 주민 2500여명 가운데 3분의2가 상추자도에 모여 산다. 남동쪽에 놓인 하추자도가 상추자도의 바람막이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상·하추자도는 추자대교로 연결돼 있다. 추자도의 주요 볼거리들은 추자도 올레 구간에 대부분 포함돼 있다. 상추자도 추자항에서 출발해 상·하추자도 산 능선길과 해안길을 돌아 다시 추자항으로 돌아온다. 거리는 17.7㎞. 오르락내리락 7~8시간은 족히 걸리는 상(上)급 코스다. 추자도의 전망 포인트로 꼽히는 나바론 절벽과 등대전망대, 돈대산 정상, 바다 위로 뜬 섬 예초마을 등을 두루 거친다. 상추자도의 중심인 추자항에서 추자도 올레 트레킹은 시작된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최영 장군 사당이다. 고려 공민왕(1374) 때 목호(牧胡·원나라 출신의 목자)의 난을 진압하러 가던 최영 장군이 풍랑을 만나 추자도에 들렀다가, 주민들에게 그물 짜는 기술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주민들이 이를 기려 해마다 제를 올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원정길에서 최영 장군은 제주 본섬 주민들과 허물기 힘든 벽을 쌓게 된다. 현지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최영 장군이 제주 사람들과 섞여 토착 세력화한 목호들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로 인해 ‘육지부’와 달리 제주에서는 최영 장군을 전혀 존경하지 않게 됐다는 것.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올레가 놓친 지역이 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다녀와야 할 곳들이다. 우선 상추자도 끝자락의 다무래미다. 추자 10경 가운데 제2경인 직구낙조(直龜照)와 만날 수 있는 곳. 썰물 때면 앞 섬까지 다녀올 수 있다. ‘용둠벙’도 마찬가지. 올레 코스를 따르자면 최영 장군 사당에서 봉글레산을 지나 곧바로 대서리 처사각 쪽으로 발걸음하게 돼 있다. 처사각 옆길을 통해 나바론 절벽 정상까지 오르는 맛도 각별하지만, 아무래도 절벽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견줘 나바론 절벽 전망터에서는 물 고인 ‘용둠벙’ 너머로 장쾌하게 펼쳐진 나바론 절벽과 마주할 수 있다. 유람선을 이용하지 않는 이상 걸어서 이처럼 기골이 장대한 절벽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은 전망터가 유일하다. ‘나바론’은 영화 ‘나바론 요새’(1961)에서 독일군 야포 진지가 있던 절벽을 닮았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옛이야기 안고 가는 섬길 추자도를 거쳐간 이 가운데,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정마리아)와 그의 아들 황경한(‘황경헌’이란 설도 있다) 이야기도 흥미롭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였던 정난주는 신유사옥 때 남편 황사영을 잃고 자신은 탐라도로 유배돼 관노로 살았다. 유배 갈 때 2살 난 아들 황경한을 추자도 예초리 물쌩이끝 바위에 내려놓았는데, 주민이 발견해 키웠다고 한다. 황경한의 묘가 예초리 산자락에 있다. 어머니 정난주의 묘가 있는 대정읍 11코스와 마주하고 있다. 묘 아래엔 ‘황경한의 눈물’이란 샘이 있는데, 어머니를 그리며 흘린 그의 눈물을 닮아 마를 날이 없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먼 바다의 섬들이 대개 애틋한 정이 담긴 이름을 갖듯, 추자도의 새끼섬들도 그렇다. 푸랭이섬, 섬생이, 악생이, 미역섬, 밖미역섬, 납덕이, 큰보름섬, 덜섬, 검은가리, 사자섬, 쇠머리섬…. 한 올레꾼은 이런 추자도의 새끼 섬들을 ‘동물농장’이라고 표현했다. 사자섬은 갈기 세운 사자를 빼닮았고, 고릴라나 악어를 닮은 섬도 있단다. 이런 풍경은 추자도 최고의 전망대 돈대산에 서면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먼 바다로 향한 신양항의 자태가 장쾌하고, 하추자도 끝자락 예초마을은 바다 위에 뜬 꽃봉오리처럼 어여쁘다. 배로 한 시간 거리의 완도 보길도나 제주 한라산도 손 뻗으면 닿을 듯하다. ●“간세다리 다 모입서”… 9~12일 제주올레걷기 축제 한국방문의해위원회(위원장 신동빈)는 올해 ‘4대 특별이벤트’ 가운데 하나로, 9~12일 ‘2011 제주올레걷기축제’(www.ollewalking.co.kr)를 연다. 행사 구간은 올레 6~9코스다. 9일은 6코스, 10일 7코스, 11일 8코스, 12일 9코스 등 하루 한 코스씩 걸으며 진행된다. 세계적인 여행서 ‘론리 플래닛’의 창업자 토니 휠러도 참가할 예정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축제의 특징은 참가자들이 길을 걸으며 야외 공연을 감상하고, 각 마을에서 선보이는 먹거리 등을 즐길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길 곳곳에 40여개의 공연 프로그램이 마련됐고 ‘쉰다리’와 ‘지름떡’ 등 각 마을의 독특한 먹거리도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쉰다리는 제주의 전통 발효 음료로,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음식이다. 여느 청량음료보다 몇 곱절 새콤달콤하고 시원하다. 한 잔에 1000~2000원. 알코올이 약간 함유돼 있으나 취할 정도는 아니다. 6코스 중간 한가세자(75) 할머니가 처음 소개한 뒤 인기를 얻고 있다. 매일 밤 8~9시 서복전시관 야외무대에선 ‘간세다리, 다 모여라’가 펼쳐진다. ‘간세다리’는 게으름뱅이란 뜻의 사투리로, 느릿느릿 걷는 제주올레 걷기축제 참가자들을 일컫는다. 축제 기간 중 각 코스 시종점과 제주시·서귀포시를 오가는 셔틀버스(편도 3000원)와 축제 코스 순환버스(무료)도 운행한다. 캠핑 장비를 가져가지 않은 캠핑족이라면 롯데호텔 제주의 캠핑존을 찾는 것도 좋겠다. 완벽하게 세팅된 캠핑장에서 흑돼지 오겹살과 LA 갈비, 전복 등 계절 해산물 모둠, 수제소시지, 랍스타 테일 등 온갖 바비큐 메뉴를 즐길 수 있다. 여기에 각종 야채와 밑반찬, 주먹밥, 컵라면, 생수, 커피, 과일 등이 곁들여진다. 직접 고기를 구울 수 있도록 앞치마와 장갑, 조리사용 모자 등도 제공된다. 이마저 서툴거나 귀찮다면 호텔 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텐트, 캠핑 트레일러 등에 전기장판까지 설치돼 따뜻하게 쉴 수도 있다. 여느 캠핑장과 똑같지만 숙박만은 객실을 이용해야 한다. 글 사진 추자도(제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4) ▲가는 길:제주항에서 하루 두 번 추자도를 오간다. 제주항→추자항은 매일 오전 9시30분(핑크돌핀·1만 2500원)·오후 1시 40분(한일카훼리 3호·1만원), 추자항→제주항은 오전 10시 30분(한일카훼리 3호)·오후 4시 15분(핑크돌핀·1만 1000원)에 출발한다. 쾌속선 핑크돌핀 호(758-4233)는 1시간 10분, 차량을 싣고 가는 한일카훼리3호(751-5050)는 2시간이 걸린다. ▲잘 곳:민박집만 20여곳 된다. 숙박과 식사가 가능하다. 낚시 관련 도구들도 빌릴 수 있다. 무인도 등을 오가는 어선도 운영한다. 일인당 4만원. 추자면사무소 742-8400. ▲맛집:굴비정식은 추자도의 별미로 꼽힌다. 추자항 선착장 앞 중앙식당, 추자삼거리 등이 이름났다. 대개 2인 기준으로 판다. 1인 8000원 선.
  • [결실의 계절 가을… 순수한 ‘지식 나눔’ 행사 풍성] “틀어진 세종로 축 복구 꿈 키워요”

    [결실의 계절 가을… 순수한 ‘지식 나눔’ 행사 풍성] “틀어진 세종로 축 복구 꿈 키워요”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일본 신사에 보관돼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요. 명성황후의 능이 있는 이곳 홍릉에서 제가 여러분을 만난 오늘 이 순간이 여러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다시 쓰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스님·음악가 등 다양한 무료강연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앞장서 온 혜문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안중근 의사의 총탄, 을미사변에 대한 기록 등이 커다란 스크린에 지나가자 탄성도 터져나왔다. 혜문 스님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문화재 반환도 할 수 없게 됐다는 포기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혜문 스님은 세종로의 축이 경복궁과 틀어져 있다는 점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일제가 틀어놓은 이 각도를 원래대로 돌리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9일 서울 홍릉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는 테드x홍릉의 첫 행사가 열렸다. 테드x는 대표적 지식콘서트로 꼽히는 테드의 지역 기반 행사다. 강연 시간 18분, 스폰서 최소화, 무료 강연 등 모든 원칙이 테드 공식 행사와 동일하다. 테드x홍릉 역시 강연자와 행사 진행자가 모두 무료로 참가했다. ‘그 순간 나는’이라는 주제로 열린 올해 테드x홍릉에는 대학생, 회사원, 고등학생, 방송 및 출판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똥박사’ 정화조 연구 수출하기도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박완철 KIST 책임연구원은 자신의 별명에 얽힌 그 순간을 털어놓았다. 그는 “30년 전 정화조에 대한 연구를 연구실 막내라는 이유로 떠맡았다.”면서 “지금까지 내가 해 온 결과물이 한국의 배수처리장에 설치되고 일본과 타이완에 수출되는 것을 보면서 ‘똥 박사’라는 별명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이매뉴얼 페스트라이시(이만열)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만 알던 내가 해인사에서의 경험 덕분에 한국에 정착하게 됐다.”면서 사고의 전환 과정을 설명했다. 장재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디지털음악을 실제로 들려주며 “쇼팽도 음악이지만 기이한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두뇌는 머리에 있지만 손끝에도 있다.”며 실천을 강조한 신인철 작가에게는 강의가 끝난 뒤 젊은 참가자들이 몰려들어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기도 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집 나간 부처가 돌아왔다’를 사자성어로 하면 뭘까.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말이 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이승에서 본래의 자리가 어딘지 몰라 우왕좌왕 헤맨다고 한다. ‘금강경’에 그 뜻을 풀이해놨다.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관련된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고 그에 따른 조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 이른 시일에 인도하겠다.” 이는 2006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4년간 지속적인 반환운동을 전개하고 한·일 국회의원과 시민단체가 협력해 이루어 낸 한·일관계의 중대한 일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 스님이 있었다. 일본 최고 두뇌 집단이라고 하는 도쿄대를 끈질기게 상대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고, 일본 권력의 중심인 일본 왕궁에 직접 들어가 조선왕실의궤를 목격한 뒤 반환의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혜문 스님은 이 밖에도 도쿄 시내 오구라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 ‘평양율리사지 오층석탑’ 환수 등 북한까지 포함시켜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문제로 그 영역을 확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오류 바로잡기’ 운동가로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예가 있다.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는 잘못된 번역이다. 하여 당국에 정정 신청을 내 ‘송어’라고 교과서에 고쳐놨다. 국보146호 청동방울은 당초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혜문 스님은 추적 끝에 강원도가 아닌 충남 논산으로 올바르게 돌려놨다. 안동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은 안동군수가 심었다는 것도 그가 새롭게 밝혀낸 일이다. 도산서원 준공 당시 박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가서 금송을 심었는데 겨울이라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겁을 먹은 안동군수가 몰래 금송을 사다가 심었다는 것. 또 있다. 명성황후가 생전에 쓰던 표범가죽 양탄자의 행방을 찾아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돼 있던 조선시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과 백백교 교주 머리의 보존 중지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렇다면 스님이 이런 일을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나 그 까닭을 먼저 물었더니 ‘환지본처’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다시 “그래도 꾸준히 그런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을텐 데요.”라고 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교수나 공무원이 독립운동하는 것 봤냐고 말입니다.”라며 크게 웃는다. 그렇다면 문화재 환수를 위해 그동안 일본에만 40여 차례 오갔는데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했다. “다 부처님 것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구, ‘도 닦은 스님’에게 괜히 물어봤나 보다. 이렇게 그의 말은 빨랐고 거침이 없었다. 호탕하게 웃는 것도 그랬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은 어떻게 벌이게 됐을까. “2003년 저희 은사 스님인 철안 스님께서 경기도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셨습니다. 철안 스님은 불교문화재에 관심이 많으셔서 봉선사의 관할 사찰 중 27개의 전통사찰에 대한 문화재 현황 파악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멸실된 문화재의 현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지요. 예를 들어 현등사 사리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조선왕조실록’은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됐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불법적인 유통경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고 이에 따라 흩어진 문화재를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탄력을 받은 혜문 스님은 ‘한·일협정 문서공개’와의 연관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1432점의 문화재를 돌려받고 문화재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한·일협정 문서는 일부만 공개됐다가 2004년 완전 공개되는 과정에서 과연 1432점의 반환 문화재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세세하게 살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등 문화재적 가치가 의심되는 것들을 보고 졸속 협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됐다. “때마침 그 무렵 일본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있는 것을 알게 됐지요. 신물(神物)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문득 느꼈습니다. 일왕 궁내청에서, 1922년 진상품으로 건너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버린 ‘조선의궤-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를 봤을 땐 더욱 그랬습니다. 원래의 소장처를 나타내는 ‘오대산’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군요. 색을 화려하게 배합해 그려진 갖가지 그림은 1895년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무려 2년 2개월에 걸쳐 치러진 생생하고도 슬픈 ‘국장의 기록’들이었습니다.” ‘보인소의궤’란 책이 눈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단다. 고종 13년(1876),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발생한 화재로 조선의 옥새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고종은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 옥새와 인장을 새로 제조하도록 명령, 각종 보인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의 제작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종합보고서가 바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로 이는 옥새 제작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한민국 국새’ 제작도 ‘보인소의궤’에 근거해서 제작된다고 한다. 스님은 또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의 탄생과 관련된 중요한 의궤인 ‘대례의궤’란 책을 봤을 때도 ‘신물의 부름’으로 울컥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한·일 간 피로 피를 씻었던 사건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의병,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등 반일운동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살고 있는 봉선사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신물의 부름이 아니겠습니까. 명성황후를 죽인 칼 ‘히젠도’를 후쿠오카에서 봤을 때는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고 국부검사를 자행한 기록 ‘에이조 보고서’를 입수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가운데 고종의 갑옷과 투구 반환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대대로 내려오던 임금의 투구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군대가 싸울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것과 같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스님은 여러번 강조한다. “조선시대 군사권력의 최고 상징인 투구, 정치권력의 최고 상징인 임금의 관모 익선관(翼善冠·높이 19㎝)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아직까지 인질처럼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스님이 던지는 말문마다 조목조목 비장함이 서려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까지 친일 논쟁만 했습니다. 누가 친일을 했느니 안 했느니 말입니다. 일본에서 들은 얘기지만 2000년 이후에야 직접 도쿄에 와서 ‘우리 문화재 내놓으라’고 일본 외무성을 압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당국은 그런 사람들을 예의 주시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장본인이거든요. 사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문화재 환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너무 늦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북·일 수교 때 대대적인 문화재 반환을 약속받아야 하는 것도 지금부터 바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본은행에 있는 징용 노무자 공탁금 4조원이나 사할린 강제징용 문제 등도 말입니다.” 그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50가지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10가지밖에 못 했다.”며 웃는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조경과 석등이 일본식으로 돼 있는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중국 갑옷과 일본도를 차고 있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실의궤도 원소장처인 오대산 제자리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무렵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오늘 화장을 하는데 염불하러 가야 한다.”며 바삐 자리를 떴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혜문 스님은 1998년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에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01년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에서 진제 스님을 모시고 수선안거를 한 이래 봉선사에서 정진하고 있다. 2004년 일본 교토 유학 중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음을 확인한 후 ‘조선왕조실록환수위’를 구성, 반환운동에 앞장섰다. 2006년 9월 ‘조선왕실의궤환수위’를 조직해 4년에 걸친 운동을 전개, 일본 정부로부터 1205점의 문화재를 반환받게 했다. 그 외에도 6·25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약탈했던 ‘표범카펫’의 행방에 문제를 제기, 60년 동안 박물관수장고에 있던 것을 찾아냈으며 보스턴미술관 소장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운동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과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등을 맡고 있다.
  • [부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 별세

    [부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 별세

    구인회 LG 창업주의 막내 동생으로 1970~1980년대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던 구두회 예스코(LS그룹 계열의 도시가스전문회사) 명예회장이 지난 2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3세. 23일 LS그룹에 따르면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는 구자경(86) LG그룹 명예회장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구자홍 LS그룹 회장, 구자열 LS전선 회장 등 LG가(家)의 주요 경영인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명박 대통령 조화 보내 이명박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고인에게 조의를 표했고,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과 허동수 GS칼텍스 회장도 조문해 고인을 기렸고, 남용 전 LG전자 부회장과 정병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등 과거 LG그룹에 몸담았던 기업인들도 이곳을 찾았다. 구인회 LG 창업주의 다섯째 남동생인 고인은 1928년 경남 진주 수지마을에서 태어났다. 1958년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곧바로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1963년부터 금성사(현 LG전자) 상무를 시작으로 LG그룹 경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고인은 주로 그룹 내 전자 계열사(LG전자, LS산전)와 에너지 업체(호남정유, 호유에너지)를 맡아 산업화 시기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며, 1988년에는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형제인 태회(88·LS전선 명예회장), 평회(85·E1 명예회장) 등과 함께 2003년 LS그룹을 만들어 LG에서 분리해 독자 경영에 나섰다. 현재 LS그룹은 이른바 ‘태평두’ 삼형제의 2세들이 중심을 맡고 있는데, 구태회 회장의 장남인 구자홍 회장은 LS그룹을, 구평회 회장의 장남인 구자열 회장은 LS전선을 맡고 있다. 구두회 회장의 장남인 자은씨는 LS니꼬동제련에서 부사장을 맡아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구자경 명예회장과 돈독한 관계 고인은 LG그룹 재직 시절 구자경 명예회장과의 관계가 유달리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숙부와 조카 사이인 구두회 명예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은 1970~80년대 그룹의 성장기를 함께하며 LG그룹의 ‘신화창조’에 일조했다. 구인회 창업주가 1969년 타계하자 그룹을 맡게 된 구자경 명예회장은 자신보다 세살 어린 작은아버지인 구두회 명예회장과 함께 그룹의 성장 축을 일궈 내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금성반도체(현 하이닉스반도체), LS산전 등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고인이 어떤 분이셨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구 명예회장은 3시간여 빈소에 머물며 상주인 구자은 LS니꼬동제련 부사장과 고인에 대한 기억을 나누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고인의 가족으로는 부인 유한선(78)씨와 구자은(47) LS니꼬동제련 부사장, 은정(50), 지희(48), 재희(44)씨 등 1남 3녀가 있다. 발인은 25일 오전 6시 30분이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건설주 ‘껑충’

    카다피 리비아 전 국가원수 사망으로 리비아 재건 수요와 공사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건설주가 급등했다. 21일 코스피는 전날보다 33.29포인트(1.84%) 오른 1838.38로 거래를 마쳤다. 기관이 2000억원어치를 순매수해 지수를 끌어올렸으며, 특히 건설업종이 5.19%의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리비아에 진출한 한일건설과 신한이 각각 가격제한폭까지 오른 2380원과 4965원에 거래를 마쳤다. 대우건설(7.76%)과 대림산업(7.50%), 현대건설(6.55%) 등 대형 건설사들도 상승세를 기록했다. 증권가에선 카다피 전 원수의 사망으로 리비아 정세가 차츰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면 국내 건설사들의 리비아 재건 사업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일본통신] 이승엽, 일본 생활 8년이 남긴 것

    [일본통신] 이승엽, 일본 생활 8년이 남긴 것

    이승엽(35)이 8년동안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국내로 복귀한다. 이승엽의 한국 복귀는 일본 산케이 스포츠를 비롯한 주요 언론을 통해서도 공식화 됐고 선수 본인 역시 한국 유턴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이승엽은 지난 2004년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2006)를 거쳐 오릭스 버팔로스(2011)까지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게 됐다. 일본 진출 첫해 타율 .240 홈런14개에 머무르며 실망을 안겨준 이승엽은 그러나 2년차인 2005년에 타율 .260 홈런30개, 82타점을 기록하며 일본야구에 서서히 녹아드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2005년에 처음 도입된 양대리그 교류전에선 12개의 홈런포를 터뜨리며 인터리그 홈런왕에 올랐고 그해 열린 한신 타이거즈와의 일본시리즈에선 홈런 3개를 쏘아올리며 지바 롯데가 31년만에 일본시리즈 패권을 차지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해냈다. 2006년 이승엽은 일본야구의 자존심인 요미우리로 이적한다. 하라 타츠노리 감독 제 2기 체제의 중심선수로 활약한 이승엽은 그해 타율 .323, 홈런41개, 108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비록 팀은 4위에 머물렀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속에서 그가 터뜨린 홈런 하나하나는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도쿄돔을 ‘돔런’이라 부르며 타 구장에 비해 유독 홈런이 잘 나오는 곳이란 평가도 있었지만 이승엽이 쏘아올린 홈런의 비거리는 여타 선수들에 비해 워낙 탁월해 구단 관계자들의 넋을 빼놓기도 했다. 시즌 후 이승엽은 요미우리와 4년간 30억엔의 초대형 계약을 맺으며 팀의 4번타자로서 기대가 컸지만 무릎 수술과 오른손 엄지손가락 인대 통증으로 인해 타율 .274 홈런30개 74타점을 기록해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후 이승엽은 손가락 수술을 감행하며 더 큰 도약을 노렸지만 2008년 처참하게 무너지며 팬들을 실망시켰다. 시즌 초반부터 극심한 타격부진에 빠지며 2군으로 내려갔던 이승엽은 그러나 8월에 열린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 한국이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하지만 소속팀에선 점점 더 자리를 잃어가는 모습이었다. 특히 그해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 찬스때마다 헛방망이를 돌리며 빈축을 샀는데 5차전까지 시리즈 전적 3-2로 앞섰던 요미우리가 세이부에게 역전을 당하며 패권을 넘겨준것은 이승엽의 부진이 결정적이었다. 이해 이승엽은 타율 .248 홈런8개, 27타점으로 일본 진출 후 최악의 성적표를 남기기도 했다. 2009년엔 주로 2군에 머물며 타율 .229 홈런16개 36타점, 그리고 지난해엔 타율 .163 홈런5개 11타점으로 끝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요미우리에서의 활약을 종료했다. 거취가 불투명 했던 이승엽은 그러나 오릭스와 2년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의 마지막을 불꽃을 피우려 했지만 올 시즌 타율 .201 홈런15개, 51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특히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오릭스는 승률 단 1모 차이로 3위자리를 세이부에게 내줬다. 이 경기에서 이승엽은 4타수 무안타에 머물며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와 더불어 본인 자신도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며 많은 아쉬움을 샀다. 이승엽의 일본 통산 성적은 타율 .257 홈런159개, 439타점이다. 혹자들은 이승엽을 가리켜 일본에서 보여준 8년동안의 선수생활을 실패로 규정한다. 물론 최근 몇년동안의 성적부진을 감안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승엽이 일본 진출은 멋진 도전이었다. 좀 더 편안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 그리고 이승엽을 통해 한일 양국간의 야구수준을 어느정도 가늠할수 있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그가 일본야구를 경험한 것은 훗날 지도자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큰 밑거름이 될것이 자명하다. 비록 일본에서의 전성기는 짧았지만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국가의 부름에 충실하며 국위선양은 물론 후배 선수들의 ‘병역 브로커’ 역할을 했던 것은 국민타자 라는 수식어를 들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이승엽의 국내 유턴은 뜨거운 열기를 더해 가고 있는 한국프로야구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칠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프로야구는 이승엽이 없는 동안 많은 발전을 이뤄냈지만 그처럼 홈런에 특화된 타자의 출현은 거의 없었다. 한때 외야석에 잠자리채까지 등장했던 관중석의 모습을 전설로만 기억하고 있을 팬들에겐 이승엽이란 존재가 갖는 흥행성은 매우 크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역시 600백만 관중시대에 더해 이승엽의 국내 복귀, 그리고 제 9구단 NC 다이노스 창단 등, 호재로 작용할 일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 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일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친일파 후손 “독립 위해 애쓰신 분께 사죄”

    “저는 친일파의 손자입니다.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드립니다.” 18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경기도에 사는 윤모씨는 지난달 초 연구소 홈페이지에 비공개로 위와 같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윤씨는 일제 강점기 초반 군수를 지낸 할아버지의 친일 행위에 대해 후손으로서 느끼는 복잡한 심경과 속죄의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 윤씨는 “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혹시 할아버지도 일제 초기 군수를 지냈다면 명부에 있지 않을까 해 도서관에 달려가 찾아봤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해방 후 반민특위를 통해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것이 역사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생각했고, 친일파와 그 자손들은 호의호식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어렵게 살고 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분개했는데 내가 친일파 후손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할아버지가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을사국치와 한일강제병합의 과정 속에서 관직에 계셨던 할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셨을까.”라며 안타까워했다. 윤씨의 글과 친일인명사전 내용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 윤모씨는 관비유학생 파견 사업으로 일본에서 유학한 뒤 대한제국 농상공부 관리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한일합병이 된 뒤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등에서 군수를 지내다 1926년 퇴직했다. 윤씨는 할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알고 난 후 민족문제연구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고생하신 많은 분과 그 자녀들에게 한 친일파의 손자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가슴 깊이 사죄드린다.”며 글을 마쳤다. 연구소 측은 이달 초 윤씨를 직접 만나 전문 게재를 허락받고 글을 공개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군수는 당시 직업 관료로서, 일제 지배체제에 협력했다는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는 없지만 책임이 더 무거운 이들의 후손들도 전혀 사죄의 움직임이 없다는 점에 비춰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꽃미남 스타들이 있어 더 즐거운 부산영화제

    꽃미남 스타들이 있어 더 즐거운 부산영화제

    영화제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는 역시나 헐벗은 여배우들이다. 그러나 여배우들의 패션대결 못지 않게 팬들의 가슴을 뛰게하는 것은 꽃미남의 등장이다.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열리고 있는 9일 오후 3시 해운대 BIFF 빌리지 야외무대에서는 여성팬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장근석(24)과 로건 레먼(19)의 만남이 이뤄졌다. 영화 ‘너는 펫’ 개봉을 앞둔 장근석은 신한류의 주역으로 불리며 누나팬들을 이끌고 있는 배우. 3D영화 ‘삼총사’를 들고 부산을 찾은 로건 레먼 역시 한국에는 생소한 편이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들은 아역배우로 출발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아역배우의 생활에 대한 의견을 주로 나눴다. 장근석은 정신없이 달려왔던 과거경험을 얘기하면서 “언젠가는 미래의 아역배우들을 위해서라도 그에 대한 법률을 만들어 그 친구들의 시간과 자유를 지켜주고 싶다.”고 말했다. 로건 레먼 역시 “부모님 덕분에 배우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다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며 공감을 나타냈다. 앞서 8일 오후 4시 해운대 CGV센텀시티 스타리움관에서는 한일 양국의 원조 미남배우 장동건(39)과 오다기리 조(35)가 나란히 섰다. 300억원을 들인 강제규 감독의 블록버스터 ‘마이웨이’ 주연배우 자격이다. 이 자리에서 장동건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연기자로서 확고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어서 좋았다.”고 오다기리 조를 한껏 칭찬했고, 오다기리 조 역시 “너무 친절하고 배려를 많이 해줘서 내가 여자라도 장동건에게 반할 거라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부산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담배 끊고 나랏빚 갚자”… 달구벌서 되살리는 선열의 얼

    “담배 끊고 나랏빚 갚자”… 달구벌서 되살리는 선열의 얼

    한국 근대사에서 기부 문화의 효시로 꼽히는 국채보상운동이 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대구시는 옛 대한제국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5일 문을 연다고 3일 밝혔다. 기념관은 대구시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지하 2층, 지상 2층(연면적 1129㎡) 규모로 지어졌다. 여기에는 국비와 시비 각 20억 1000만원과 국민모금액 7억 8000여만원 등 모두 50억 1000여만원이 들어갔다. 전시관에는 일제 침략의 배경과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에 대한 사료와 사진이 비치된다. 또 이 운동을 주도한 김광제, 서상돈, 양기탁, 베델 등 인물 코너도 마련됐다. 항일운동에 관한 도표와 모형도 전시된다. 국채보상운동의 발단은 일본이 한국을 경제식민지화하는 계략에서 비롯됐다. 한일합방(1910년) 3년 전에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와 을사늑약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일본은 불필요한 차관을 강요했고, 식민지건설 비용을 모두 한국 정부에 전가했다. 1905년부터 1908년 사이 일본에 빌린 부채는 1300만원으로, 이미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에 대구지역의 선각자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선 국가채무부터 갚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김광제·서상돈 선생 등은 담배를 끊어 외채를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1월 대구 인쇄업체인 광문사(현 중구 수창공원)에서 발기인 대회를 가진데 이어 2월 21일 첫 집회인 대구군민대회를 북후정(대구시민회관)에서 열었다. 거사일 북후정에는 아이들까지 포함해 2000여명의 대구 시민들이 집결, 시위를 했고 경북도 경무부는 이를 무허가 집회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등 덕분에 전국 각지와 해외로 확산됐고, 고종황제까지 참여했다. 부녀자들은 은비녀와 가락지 등 패물을 내놓는가 하면 고관들도 비단옷과 가마를 버리고 밥 대신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1년 반만인 1908년 일제의 탄압과 방해로 막을 내렸고 목표액인 1300만원에 크게 못 미치는 16만원을 모금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국민의 피와 눈물이 섞인 국권 회복운동은 훗날 3·1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항일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준공되면서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서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당시의 흔적과 이를 기리는 상징물이 대구 시내 곳곳에 있다. 기념관이 자리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4만여㎡ 규모의 대형 도심 공원이다. 이 공원은 국채보상운동을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공원에는 우리 역사상 처음 일어난 여성운동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있다. 김광제·서상돈 선생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기념관을 가로지르는 도로 이름은 ‘국채보상로’이다. 달구벌대로와 함께 대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주 도로에 국채보상운동의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북후정에는 기념비가 서 있고 광문사 자리와 진골목에 국채보상운동을 상징하는 표석이 설치됐다. 대구시 관계자는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대구의 자랑인 국채보상운동을 자세히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EPL 이슈] EPL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는?

    [EPL 이슈] EPL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는?

    축구에서 골키퍼가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흔히 동네 축구에선 잉여자원이 서는 자리가 골키퍼지만 프로의 세계에선 다르다. 안정적으로 후방으로 지켜주는 문지기가 없다면 경기 내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플레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에드윈 반 데 사르를 잃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다비드 데 헤아 영입에 거액을 투자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난 주말 맨유는 ‘남자의 팀’ 스토크 시티와 1-1로 비겼다. 시즌 초반 무서운 상승세가 한풀 꺾였고 지역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의 추격을 허용했다. 에이스 웨인 루니의 공백과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의 초반 부상 등 악재도 있었지만, 만약 골키퍼 데 헤아의 몇 차례 선방쇼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패할 수도 있는 경기였다. 그만큼 골키퍼는 공격수 못 지 않게 경기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위치에 놓여 있다. 최근 미국 스포츠 전문사이트 ‘블리처리포트’는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골키퍼 TOP10’이란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1992년 새롭게 재편되어 잉글랜드 축구의 부흥을 이끈 프리미어리그는 수많은 천재 골키퍼들을 배출해냈다. 국내 축구 팬들에게도 유명한 피터 슈마이켈을 비롯해 근래 맨유의 전성기를 이끈 반 데 사르 그리고 첼시의 넘버원 페트르 체흐까지 늘 최고의 팀에는 최고의 골키퍼가 존재했다. 10. 팀 플로워스 (잉글랜드) 블랙번의 전설적인 골키퍼다. 그의 가치는 블랙번이 그를 영입하게 위해 지불한 금액에서 알 수 있다. 당시 블랙번은 팀 플로워스를 영입하기 위해 골키퍼 최고 이적료를 제시했다. 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블랙번은 그해 맨유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1994/1995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9. 나이젤 마틴 (잉글랜드) 나이젤 마틴은 잉글랜드 출신으로는 최초로 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한 골키퍼다. 그는 크리스탈 팰리스를 떠나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축구 팬들이 잘 알고 있는 ‘리즈 시절’을 이끌었다. 마틴은 또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3번째로 많은 무실점을 기록한 골키퍼이기도하다. 8. 데이비드 제임스 (잉글랜드) 41살의 데이비드 제임스는 여전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왓포드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리버풀에서 214경기를 소화하며 전성기를 지냈다. 이후 아스톤 빌라, 웨스트햄, 맨시티, 포츠머스 등을 거치며 최다 경기 무실점 기록을 보유하며 프리미어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그는 지금도 브리스톨 시티에서 활약 중이다. 7. 브래드 프리델 (미국) 올 시즌 토트넘에서 새롭게 커리어를 시작한 브래드 프리델은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1994년 뉴캐슬로 임대되며 유럽 무대와 인연을 맺은 프리델은 이후 갈라타사라이, 리버풀, 블랙번, 아스톤 빌라를 거치며 정상급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리그에서 가장 골을 넣기 어려운 골키퍼 중 한 명이다. 6. 셰이 기븐 (아일랜드) 셀틱 유소년 출신의 셰이 기븐은 블랙번을 통해 잉글랜드 무대에 데뷔했고 1997년 뉴캐슬에 입단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뉴캐슬에서 무려 354경기를 소화하며 넘버원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기량을 인정 받아 부자구단 맨시티의 러브콜을 받고 이적을 했지만 조 하트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아스톤 빌라로 다시 팀을 옮겼다. 기븐은 프리미어리그에서 100경기 무실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5. 페페 레이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빅토르 발데스와의 경쟁에서 밀린 페페 레이나는 이후 비야레알을 거쳐 리버풀에 안착했다. 레이나는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의 지도 아래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골키퍼로 성장했다. 그는 리버풀 데뷔 시즌에 50경기에서 29골만을 허용하며 리버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한 때 맨유를 비롯해 다수의 빅 클럽이 그의 영입을 노린 것도 이 때문이다. 4. 에드윈 반 데 사르 (네덜란드) 네덜란드 출신의 에드윈 반 데 사르는 맨유의 전설 피터 슈마이켈이 그랬듯이 맨유의 전설적인 골키퍼가 되었다. 아약스에서 유럽 정상을 차지한 그는 이후 유벤투스에서 실패를 맛본 뒤 풀럼으로 이적하며 잉글랜드 무대에 입성했다. 풀럼에서 맹활약한 그는 퍼거슨 감독의 눈에 띄었고 맨유에서 또 다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3. 페트르 체흐 (체코) 퍼거슨 감독은 데 헤아 영입과 관련해 “과거 체흐를 놓친 경험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만큼 체흐의 기량은 뛰어났다. 2004년 프랑스 렌느에서 첼시로 이적한 그는 주제 무리뉴 감독과 함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반 데 사르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최장시간 무실점 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머리 부상 이후 기량이 조금은 하락했다는 것이다. 2. 데이비드 시먼 (잉글랜드) 아스날의 전설적인 골키퍼다. 1980년대 버밍엄 시티와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거쳐 1990년 아스날에 입단했다. 이후 아스날에서만 무려 405경기를 소화했다. 그는 아스날 뿐 아니라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부동의 넘버원 자리를 지켰다. 비록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호나우지뉴에게 프리킥을 허용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진 못했지만 실력만큼은 잉글랜드 최고였다. 1. 피터 슈마이켈 (덴마크) 맨유가 골키퍼를 교체할 때마다 언급되는 선수다. 그만큼 피터 슈나이켈이 맨유에서 남긴 자취는 진하고 강했다. 그는 5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4번이나 UEFA 선정 최고의 골키퍼로 뽑혔다. 또한 1999년에는 맨유가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기적의 트레블을 차지하는데 공헌을 했다. 기록과 실력 모두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최고의 골키퍼임에 틀림이 없다. 사진= 리버풀 레이나 골키퍼 / pitchaction.com 서울신문 나우뉴스 유럽축구통신원 안경남 pitchaction.com
  • [부고]

    ●박종필(전 한일약품 전무이사)광현(애드21 대표·전 스포츠서울 광고국장)씨 모친상 26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2258-5971 ●송병의(신한다이아몬드공업 대표이사 사장)병권(서경대 전자공학과 교수)씨 모친상 26일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10-9713-3310 ●김태형(건설경제신문사 산업금융팀 기자)씨 장모상 26일 강원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 (033)258-9405 ●서정욱(신용보증기금 창원지점장)영국(동진금속 전무)정인(영남대 공대 교수)정화(메리츠화재)씨 부친상 26일 영남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 (053)620-4241 ●김경호(청우식품 대표이사)창수(자영업)형문(〃)씨 모친상 26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2227-7587 ●신종철(브이앤텍 과장)현숙(삼성증권 대리)씨 부친상 김광연(문화일보 광고국 사원)씨 장인상 25일 서울경찰병원, 발인 27일 오전 10시 (02)431-4400 ●이학주(전 진로 상무이사)학영(전 하나은행 부장)씨 모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5시 30분 (02)3010-2291 ●배기춘(자영업)기재(대구경북과학기술원 대외협력팀장)씨 모친상 26일 대구가톨릭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53)655-4501 ●양순열(인천신문 정경부장)씨 장인상 26일 전남 진도 산림조합추모관, 발인 28일 오전 6시 (061)543-4040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5) ‘만세전’의 작가 염상섭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5) ‘만세전’의 작가 염상섭

    염상섭(1897~1963)은 널리 알려진 ‘국민작가’다. 염상섭이 ‘국민작가’인 것은 물론 그의 걸출한 문학작품 덕분이지만, 그의 삶이 근대 이후 한국사의 중요한 맥락들과 궤를 같이해 온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철들 무렵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고, 그는 한일병탄 2년째인 1912년 일본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만주로 건너갔다가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38선을 간신히 통과해서 서울로 돌아왔고, 이후 종군작가로 한국전쟁을 체험한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 해방과 한국전쟁을 마주했던 염상섭의 삶의 국면들은 100편이 훨씬 넘는 그의 장·단편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가히 문제적 시대를 살아낸 문제적 작가인 셈이다. 그러나 역사와 시대가 문제적이었다고 해서 반드시 문제적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한국문학사에서 염상섭을 일컬어 ‘리얼리즘의 최고봉’이라 하는데, 이 찬사 속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는 평가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염상섭이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선망과 자괴 사이에서 일본 유학생 시절, 그는 식민지인이라는 피해자의 입장과 제국 일본을 선망하는 학습자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이른바 ‘친밀한 적’을 마주해야하는 고통, 즉 일본을 본받고 따라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경멸하고 자책하는 이중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 유학한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염상섭의 경우는 좀 더 특별난 데가 있었다. 그의 유학이 일본군 육군 중위였던 맏형의 보살핌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맏형 염창섭은 대한제국 시절, 영친왕이 유학이라는 명분 아래 일본으로 인질처럼 끌려갈 때 그 시종으로 따라갔다. 이후 염창섭은 대한제국의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는 일본군대로 편입하는 길을 선택한다. 곡절 많은 내력이지만, 현실에서 일본군 장교라는 위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형 덕분에 염상섭도 사립학교나 학원가를 전전하던 조선유학생들과는 달리 정규 일본 명문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후 염상섭은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일본특파원)를 비롯해서 시대일보, 조선일보, 심지어 총독부기관지였던 매일신보, 만주국의 홍보지 역할을 했던 만선일보에서까지 두루두루 일한다. 할 일 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는 가난한 식민지 지식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게다가 염상섭만큼 일본어와 일본문학에 정통한 문인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염상섭에게는 ‘군복자락 콤플렉스’, ‘현해탄 콤플렉스’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일본군 장교인 형은 든든한 버팀목이었지만 부끄러운 존재였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바다 현해탄을 오가는 것처럼 일본을 선망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식민지인임을 자각하고 괴로워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콤플렉스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오사카 독립선언서 사건이다. 염상섭은 2·8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8일 오사카에서 단독으로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거사를 꾀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의 미결수 생활을 겪는다. 이 독립선언문에는 ‘오사카 한국 노동자 일동 대표 염상섭’이라고 쓰여 있다. 그 전해에 병으로 대학을 자퇴했고, 작은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가 노동자 대표라기엔 다소 억지스럽다. 게다가 정규 일본 명문 중학을 졸업하고, 귀족자제들이 다니던 게이오 대학 문과에 입학했던 그의 이력을 떠올리면 생뚱맞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노동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그의 깊은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염상섭의 내면에는 일본 육군장교의 동생, 안온한 일본유학생이라는 자괴감이 늘 존재했고, 그 반작용의 심리로 자신을 노동자대표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군복자락으로부터 야차의 길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어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체념했다. 또 어떤 이는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과 투쟁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했다. 어떤 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 괴로움으로 현실을 등지거나 스스로 자기 파멸로 내몰아가기도 했다. 물론 자기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무리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염상섭은 자기 삶을 글쓰기로 옮겨놓음으로써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세계와 대면하고자 한다. 염상섭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만세전’(1924)은 자전적 경험이 깊이 투영된 일본 유학생 ‘이인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인화’는 답답한 현실에 대해 맹렬하게 발작을 일으킬 정도이면서도 딱히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는 괴로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기변명과 자기연민, 자조가 뒤범벅인 소설 속 인물. 그런 인물을 그려놓는 일, 바로 글쓰기를 통해 염상섭은 새로운 길을 만난다. 그는 1923년 첫 창작집 ‘견우화’를 발간하면서 자신의 소설쓰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이란 것이 인생과 그 종속적 제상을 묘사하는 것인 이상 인간이 어떻게 고민하는가를 그리는 것은 물론이다. 소설에 예술적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연극적·음악적·회화적·조각적 요소를 어떻게 약배하며 약동하도록 그리겠느냐는 문제이지만, 기초적 조건은 역시 사람은 어찌하여, 어떻게, 얼마나 고민하는가, 또는 그 고민이 어떻게 전개되며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묘사함에 있다. (중략) 이러한 의미로 나의 처음 발간하는 단편집에 대하여 야차(夜叉)의 마음을 가진 보살을 의미하는 ‘견우화’라는 표제를 택하였거니와…….” (‘견우화’의 서문) 그에게 소설쓰기는 세련된 기교를 펼쳐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적 사명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가차 없이 속속들이 살펴보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죽하면 첫 단편집을 “야차의 마음을 가진 보살을 의미하는 ‘견우화’”라고 이름 붙였다고 스스로 해명하는 것일까. 혼란스럽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일은 스스로 야차(악마)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야차되기를 선택함으로써 그는 군복자락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일본 육군장교의 동생이자 독립선언을 하는 식민지 조선인, 총독부 기관지의 정치부장이자 조선인 소설가. 이러한 극단들을 오가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그러한 자신이 속해있는 두 세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 그것이 염상섭의 작가적 출발이자, 글쓰기의 의미였다. 물론 두 눈으로 세계를 똑똑히 본다고 해서 쉽게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염상섭의 작가적 두 눈은 해답보다는 일상적 삶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삶의 미세한 진실을 바라보고자 했다. 일상 속에서는 아무도 순결하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박쥐 같은 양면성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가족들조차도 핏줄보다는 돈(욕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등. 1930년대 ‘삼대’가 그려낸 풍경은 그러한 삶의 이면에 대한 해부였다. 그래서 염상섭의 작품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거나, 마치 외눈박이처럼 하나로만 바라보는 것을 온전히 다 보여준다.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나 전쟁 상황에서도 염상섭의 이러한 자세는 계속 이어진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서 1·4후퇴 때까지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낸 ‘취우’(1953)는 전쟁의 극한상황이나 고통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와중에도 노골적으로 돈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왜 염상섭이 국민작가로 회자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역사와 삶을 대면하는 방식으로서의 글쓰기. 그리고 단면적인 세계, 양가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 그의 글쓰기는 현실의 복잡함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두 눈 크게 뜨고 자신과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자기 삶의 응시가 그로 하여금 글쓰기로 나아가게 했고, 그것이 국민작가 염상섭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일 터이다. 김연숙 남산강학원
  • 뱅커로 변신한 前 운동선수들 “승부근성·끈기가 밑천입니다”

    왕년에 라켓과 공을 들고 코트를 누비던 스포츠 선수들이 성공한 은행원으로 변신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25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선수시절 훈련을 통해 습득한 승부근성과 끈기가 은행 업무의 밑천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황찬익(41) 산은금융지주 스포츠마케팅단장은 1990년대 초 국내 남자테니스 랭킹 3위에 올랐던 선수 출신이다. 당시 랭킹 1, 2위였던 공태희(41)·신지협(40)씨와 함께 1993년 산업은행에 입행했다. 그는 대우중공업, 대한항공 등 높은 연봉을 제시한 실업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하고 은퇴 후 직업이 보장된 산은에 둥지를 틀었다. 황 단장은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기업금융 3실에서 해태, 동아그룹 등 30대 기업의 구조조정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운동만 했던 터라 기업구조조정촉진법 등 법적 지식이 없어서 1년 6개월 동안 새벽 2~3시까지 공부하고 퇴근했다.”고 말했다. 개인영업추진실, 여신감리실 등 주요부서를 두루 거친 황 단장은 지난달 강만수 산은 회장이 주도해 만든 스포츠마케팅단을 맡아 마케팅과 스포츠의 접목을 실험하고 있다. 홍성대(54) 우리은행 영등포영업본부장은 한일은행 탁구팀 선수 출신이다. 지난해 12월 본부장으로 승진해 여성 행원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1975년 한일은행에 들어간 홍 본부장은 1982년 선수 생활을 접고 은행 일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돈 세는 것부터 시작했다. 과장 승진 시험을 치르면서 좌절도 했지만 운동하면서 얻은 승부근성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서울은행 실업축구팀에서 링커(미드필더)로 활약했던 황재군(52) 하나은행 경기 광주지점장은 ‘특기’를 십분 발휘한 케이스다. 1989년 서울 중곡동 지점에서 영업을 시작한 그는 서울, 경기지역 구청, 경찰서 등 관공서와 중소기업의 축구동호회 감독을 자청했다. 주말에는 조기축구회를 지도하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넓혔다. 황 지점장은 “당시만 해도 은행원은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군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고객을 찾아가는 영업’을 했던 것이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구 의정 탐방] 마포구의회 - 더 나은 區 위해 ‘공부 또 공부’

    [구 의정 탐방] 마포구의회 - 더 나은 區 위해 ‘공부 또 공부’

    마포구의회는 한마디로 ‘공부하는 의회’다. 의원 기본소양에서부터 의정활동 지식, 여러 전문분야에 이르기까지 학구열은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고 있다. 이런 ‘열공’ 바람은 특이한 의회 구성에 기인한다. 지난해 제6대 출범 때 의원 18명 중 무려 11명이 초선이었다. 이에 원활한 의회 운영을 위해 4선인 박영길 의장을 중심으로 의정활동기법 등 초선들을 위한 강의를 개최했다. 그런데 이외로 선배 의원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하자 강좌를 아예 정기화했다. 의회는 박 의장을 비롯, 조남진(복지도시위원장)·강성국·김수진·서종수·송병길·윤동현·조영덕·차재홍 의원 등 한나라당 소속 9명과 정형기 부의장 및 유동균(행정건설위원장)·이필례(운영위원장)·김순금·김효철·마동환·장영숙·한일용 의원 등 민주당 8명, 오진아 진보신당 의원으로 구성돼 여야가 팽팽한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스마트’한 의정을 익히는 데에는 여야가 없다. 공부는 전문가를 초청한 특강 형식으로 많이 진행된다. 지난달 8일에는 엄길청 경기대 교수가 ‘글로벌 경제위기 속 한국경제’를 주제로 최신 경제동향과 전망, 이를 활용한 지역경제 정책 수립 방안 등에 대해 강의했다. 또 ‘행정사무감사 조사기법’, ‘의회운영기법 및 안건심사기법’ 같은 의정활동 실무 강의와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 ‘성희롱 예방교육’, ‘구의원의 역할과 과제’ 등 의원 기초 소양 교육을 병행해 ‘열린 구정’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열매는 달았다. 아동·여성의 안전한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한 ‘아동·여성 보호에 관한 조례’, 저소득층을 위한 지역아동센터 후원, 관련 종사자 처우 개선 등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지역아동센터 운영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통반 설치조례 일부개정조례’, ‘일본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결의안’이 대표적이다. 현안에 집중활동을 벌이는 특별위원회도 빛을 발했다. 지난해 말 교육지원특위를 꾸려 무상급식 관련 현황을 파악하고 다른 자치단체의 우수사례를 벤치마킹했다. 또 관내 학교시설 현황을 직접 점검하고 교사·학부모 등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교육청 등 관계 기관에 전달했다. 올해 초에는 ‘마포구를 관광산업의 메카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관광산업활성화특위를 구성해 각종 관광자원 현황을 파악하고 새로운 자원 개발에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특색 있는 관광자원을 발굴해 벨트화하는 정책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일본통신] ‘명선수 명감독’ 소프트뱅크 아키야마 코지

    [일본통신] ‘명선수 명감독’ 소프트뱅크 아키야마 코지

    한국인 투수 김무영(26)이 뛰고 있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2년연속 퍼시픽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이다. 비록 지난해엔 정규시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도 포스트시즌에서 지바 롯데에게 발목을 잡혔지만 올 시즌 역시 압도적인 전력으로 리그 1위를 질주 중이다. 근례에 들어 소프트뱅크는 일본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고 있는 오 사다하루(왕정치)의 장기집권 체제에서 벗어났다. 현역시절 보여준 그 화려한 성적이 부담이 될 뻔도 했지만 왕정치는 14년의 감독 재임기간 동안 3번의 리그우승(2번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왕정치가 감독에서 물러난 후 바통을 이어받은 감독이 지금의 아키야마 코지(49)다. 아키야마는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91년 제1회 한일슈퍼게임 당시 조규제(당시 쌍방울)에게 홈런을 터뜨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던 아키야마는 공수주를 완벽히 갖춘 대타자 출신이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개인 통산 100홈런에 최초로 도달한 인물이 이만수(당시 삼성)다. 이만수는 1982년 프로원년 멤버로 데뷔 1986년에 가서야 100홈런을 기록했는데 당시 경기수를 감안하면 대단한 페이스라 할만하다. 하지만 70년이 넘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에서 프로데뷔 후 가장 이른 시일에 100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바로 아키야마 감독이다. 이 기록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단시간(23세)으로 아키야마는 첫 풀타임 1군 멤버로 뛰었던 해(1985년)에 40홈런을 기록한 전설적인 타자중 한명이다. 1981년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 한 아키야마는 장타력만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1990년 도루왕(51개)를 비롯 통산 303개의 도루는 그의 통산 400홈런(437개)과 더불어 현역시절 가장 빛나는 업적중 하나다. 아키야마는 일본프로야구사에서 홈런왕(1987년. 43개)과 도루왕을 차지한 유일한 타자다. 500홈런의 장훈(하리모토 이사오) 선생도 현역시절 통산 300 도루를 달성했지만 이 두개의 타이틀을 모두 갖진 못했다. 야구에서 홈런왕과 도루왕을 차지했다는 것 자체가 흔한 기록이 아니기에 아키야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경이로울수 밖에 없다. 현역 시절 아키야마가 가지고 있는 최초 기록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30홈런-50도루(1990년), 11경기 연속 장타 기록, 5경기 연속 결승타점, 18년 연속 올스타전 출전 역시 사상 최다 기록이다. 2개 구단(세이부,다이에)에서 일본시리즈 MVP를 받은 최초의 선수, 그리고 다이에 시절(현 소프트뱅크)인 1999년 일본시리즈 MVP 수상은 역대 최고령 수상(37세)자로 기록돼 있다. 덧붙여 1999년 달성한 400홈런-300도루 기록은 장훈 선생에 이어 역대 2번째, 역대 2번째가 되는 11번의 골든 글러브 수상(역대 1위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전설적인 대도 후쿠모토 유타카의 12번), 왕정치에 이은 역대 2번째인 9년연속 30홈런 기록 역시 아키야마가 내세울 수 있는 기록들이다. 그야말로 야수로서 이룰만한 기록들을 모두 써냈다고 보면 된다. 현역시절 아키야마는 오락게임에서나 나올법한 홈런 후 세레모니가 유달리 돋보였던 타자중 한명이었다. 홈런을 친 후 홈플레이트 앞에서 공중제비를 도는 그의 독특한 세레모니는 현역시절 아키야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중 하나다. 그런 아키야마가 왕정치에 이어 소프트뱅크 감독을 맡고 있다. 비록 부임 첫해(2009년)엔 리그 3위를 기록하긴 했지만 전년도 꼴찌였던 팀을 단시간에 일으켜 세운것만은 높이 평가 해야 한다. 지난해 소프트뱅크는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우승은 힘들어 보였지만 막판 뒷심을 발휘하며 세이부를 단 2리의 승률 차이로 따돌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올 시즌은 초반부터 1위를 질주하며 현재 우승까지 매직넘버 12를 남겨두고 있다. 이미 2위 니혼햄과 8.5경기 차이로 앞서고 있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년연속 정규시즌 우승은 따논 당상이다. 올해 소프트뱅크는 투타 양면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팀이다. 스기우치 토시야-와다 츠요시의 좌완 원투펀치를 비롯 리그 최강의 중심타선(마츠다,카브레라,코쿠보,우치카와)과 안정된 불펜전력까지 흠잡을게 없을 정도다. 2000년대 들어 퍼시픽리그를 기준으로 2년연속 우승을 차지한 팀은 니혼햄이 유일하다. 니혼햄은 트레이 힐만 감독시절인 지난 2006,2007년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는데 만약 올해 소프트뱅크가 우승을 한다면 절대강자가 없는 퍼시픽리그에서 니혼햄에 이어 2번째로 2년연속 우승한 팀이 된다. 센트럴리그에 오치아이 히로미쓰 감독(주니치)이 있다면 퍼시픽리그엔 아키야마 코지 감독이 있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현역시절 누구도 넘볼수 없었던 대타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스타는 명장이 될수 없다’는 말도 이젠 옛말이다. 아키야마는 현역시절에 이어 감독으로서도 전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일본야구통신원 윤석구 http://hitting.kr/  
  • “도봉의 얼 기릴 역사 탐방로 만들것”

    “도봉의 얼 기릴 역사 탐방로 만들것”

    “도봉에는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또 1960~80년대 산업화 시기에 민주화를 위해 애쓴 역사적 인물이 많아, 그분들을 기억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최근 ‘도봉구 근·현대사 인물 탐방로’를 기획하고, 현장을 확인한 소감을 19일 이렇게 밝혔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가인 김병로, 벽초 홍명희,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 등이고, 민주화 운동가로서는 씨알의 소리의 함석헌·계훈제 선생, 노동운동가 전태일, 시인 김수영 등이다. 이 구청장은 “도봉에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각별한 저항 정신이 살아 있는데, 그 시작은 16세기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도봉서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15일 가을을 시샘하듯 인디언서머가 찾아와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훌쩍 넘긴 가운데 그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2시간 남짓 땡볕을 견디며 걸었다. 가장 먼저 중종 때 개혁적 선비로 이름을 날린 조광조(1482~1519)를 떠올렸다. 사림의 대표로 기존 정치세력과 맞서지만 실패하고 1519년 그의 동료 70명과 함께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개혁에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린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즉위한 1568년 기대승의 청원을 들어 조광조의 신원을 회복시켰고, 5년 뒤 경기도 양주목사는 그를 기리는 ‘도봉서원’을 지을 수 있었다.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던 도봉은 1963년에 서울시 성북구로 편입됐고, 1973년 다시 도봉구로 갈라져 나왔다. 이 구청장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등 독립운동가들이 도봉에 많이 살았던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탄이 일어나고서 이듬해 10월 15일 창동역을 개통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은 일본 관원의 눈초리를 피하면서 서울과 접근성이 좋고 집값 또한 싼 곳을 찾았을 텐데, 창동역 개통에 때맞춰 이쪽으로 이주하신 거죠. 당시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었습니다. 가인 선생이 맨 먼저, 홍명희·김진우·송진우 선생 등이 들어온 거죠. 도산 안창호 선생도 김병로 선생에게 놀러 왔다가 오고 싶다고 해서 가인 선생이 방학동 쪽에 집 계약을 대신했는데, 검거돼 옥사하시는 바람에 이주를 못하셨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살았던 집으로는 함석헌과 김수영의 본가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고 대부분은 사라졌다. 작은 초가였던 홍명희의 집은 창5동 신도브래뉴아파트 출입구로, 송진우의 집은 한신휴아파트 주차장으로, 김병로의 집은 안경점으로, 정인보의 집은 노래방으로, 계훈제의 집은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전태일이 살던 쌍문동 6평 무허가 집도 삼익세라믹아파트로 바뀌었다. 이 구청장은 “표석을 세운다든지 해서 이분들을 알리고, 특히 1930~40년대 ‘창동의 3사자’로 불렸던 김병로, 김진우, 정인보 선생을 기리는 공원을 조성하고 싶은데, 현재 창5동 공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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