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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동포애/최갑석 재향군인회 중앙이사(굄돌)

    우리나라 해외동포들의 수는 약5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중국·미국·소련·일본에는 물론 캐나다·브라질·오스트레일리아·아르헨티나·독일·스페인·영국·이탈리아등 세계 어느나라에 가도 교포사회가 있고 한글학교와 교회가 있고 신문과 방송사도 갖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민을 많이 보낸나라는 중국으로 화교가 2천2백만이고 유태인이 1천5백만 이탈리아가 5백50만 인도가 4백80만 팔레스타인이 2백50만 일본이 1백74만으로 우리나라의 해외동포가 이탈리아 다음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본국의 인구와 대비한 해외동포 비율로는 우리나라가 단연코 세계 제1위에 속하고 있다. 우리나라 이민의 역사는 구한말인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이민을 효시로 멕시코와 브라질까지 진출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게되가 고향을 등진 유민들이 만주와 시베리아등으로 떠나면서 대규모이민이 시작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일본에 강제로 징용되어 일평생을 노예처럼 광산과 벌목현장,남방개발에 투입되었던 20∼30대의건장한 청년들이다. 그들은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맨몸으로 받으며 역악한 노동현장에서 고국의 산천을 그리워하다 종전을 맞았다. 사할린에 있던 동포들은 그나마 국적을 잃고 47년간이나 조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서 뼈만이라도 고향산천에 묻히고 싶어 한다. 칠순·팔순을 넘긴 할아버지·할머니들은 『호랑이도 죽을때는 자기가 태어난곳을 돌아본다』는 속담대로 고향쪽을 바라보며 망향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들중 국내에 연고자가 없는 76명이 대한적십자사와 기독교단체,외무부,보사부등 관계당국의 노력으로 지난10월 영구귀국하게됐다. 우리민족의 서글픈 역사의 상처를 보는듯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무연고 사할린동포를 조국의 품에 안기게 하는 따뜻한 동포애는 앞으로도 지속돼야 하겠다.
  • 일­북 수교회담/「핵의혹」 해소가 관건/5일 북경 8차대좌 전망

    ◎남북상호사찰 수용땐 정상화 급진전/한중접근에 자극… 예상밖 결실 나올지도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교섭 제8차 회담이 5일부터 북경에서 열린다.이번 회담은 한·중수교등 한반도 주변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난이후 처음 열리는 것으로 특히 핵문제등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다. 북한은 지난 5월중순의 7차회담이후 다음 회담을 계속 미루어 8차 회담은 거의 6개월만에 열리는 것이다.북한은 그동안 한·중수교등 주변정세의 변화에 대한 대응방안과 핵정책등 전반적인 대외정책의 재정립을 위해 일·북한회담을 늦추어 온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북한은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내부갈등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때문에 이번 회담에서 북한의 대응자세가 주목되고 있다.최대의 초점은 양국 국교정상화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문제에 대해 북한이 유연한 자세를 보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 외부성당국자는 한·중수교로 외교적 타격을 받은 북한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위해 어떤 형태로든 유연한 자세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한국 미국등 관련국들도 최근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노태우대통령은 지난 9월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북한의 핵개발 의지가 약화되었다』고 밝혔으며 그레그 주한미대사도 『북한의 핵개발 수준은 낮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의혹을 완전히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남북상호사찰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는 한국과 미국의 기본입장에는 변화가 없다.일본도 남북상호사찰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고 있으며 나카히라 일본측 수석대표도 이번 회담에서 상호핵사찰의 필요성을 강조할 방침이다.그러나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받았으므로 핵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주장해왔다. 핵문제와 함께 중요한 의제는 보상문제이다.북한은 지난 5차회담이후 식민지지배에 대한 인적·물적피해와 고통에 대해 사죄를 전제로 한 일본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일본은 재산청구권과 경제협력방식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북한은 종군위안부에 대해서도 보상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일본은 이 문제도 재산청구권 범위에서 해결하려하고 있다. 북한과 일본은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제2차 한일협약 원본에 당시 통치자였던 고종황제의 서명이 없기 때문에 무효라는 자료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독매)신문이 최근 보도했다.그러나 일본은 『한일합방조약이 현재는 무효이지만 당시는 국제법상 유효하게 체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북한국교정상화회담은 시작된지 거의 2년이 다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상호사찰을 받아드릴 경우 일·북한국교정상화회담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양국은 기본적으로 서로 조기수교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 “한­일 합방조약 무효”/북,대일수교회담때 새 근거 제시할 듯

    ◎일지 보도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은 5·6일 이틀동안 북경에서 열릴 일·북한국교정상화회담에서 보상문제와 관련,「1910년 한일합방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독매)신문이 31일 일본외무성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부당성을 지적해온 북한은 제2차 한일협약 원본에 당시 대한제국의 박재순외무대신과 일본의 임권조 주한공사의 날인은 있으나 통치자였던 고종황제의 서명이 없기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 정신대·사할린징용 희생자 3백69명/내일 대일손배소 제기

    ◎민간법률구조회 대일민간법률구조회(회장 지익표변호사)는 27일 종군위안부와 사할린강제징용자및 유족등 일제침략의 피해자 3백69명을 원고로 하는 「일제침략으로 인한 불법행위 책임존재확인등 청구소송」을 오는 29일 한일합방 82주년을 맞아 도쿄지방재판소에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조경한선생과 김행식민족대표 33인 유족회장을 비롯,종군위안부 생존자와 유족,부도환사건 생존자와 유족,사할린 강제징용피해자와 희생자유족,오키나와 징발피해자와 유족등이 원고로 나선다. 구조회는 이번 소송에서 ▲일제침략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를 지배한 불법행위 ▲한국불법지배기간중 자행된 토지수탈및 민족말살행위 ▲태평양전쟁중의 불법행위 ▲태평양전쟁으로 초래된 국토분단및 민족이산의 책임규명 등을 요구하고 일제의 침략에 따른 피해배상을 촉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구조회는 또 일본측에 태평양전쟁 사망자의 유해 송환을 청구하고 사죄를 요구하기로 했다. 특히태평양전쟁이 국토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지적,일본 정부에 국토를 통일하기까지 소요되는 추정비용 2천억달러를 지불할 책임이 있음을 주장할 계획이다. 구조회 부회장 용태영변호사등 변호사 5명과 원고 10명은 28일 소장을 내기 위해 일본에 건너갈 예정이다.
  • 일,대한배상·사죄 미흡/경협으로 얼버무려 정신대소송등 재발

    ◎NHK 지적 【도쿄=이창순특파원】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 교섭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배상 및 사죄의 의미를 포함시키지 않고 경제협력으로 해결하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으며 미국의 개입에 따라 그같은 방식으로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일본의 공영 NHK­TV가 14일 밤 보도했다. 「아시아로부터의 제소」라는 제목의 이 특집기사는 일본이 배상 및 사죄문제를 정식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전종군위안부들의 배상요구 소송이 계속되는 등 일본정부의 전후처리 자세가 문제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서 양국은 한일합방의 유효성 여부와 일본측 자금지불의 명목을 둘러싸고 계속 대립,한국측은 청구권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일본측은 한국의 독립축하금 명목의 지불을 주장했었다고 NHK방송이 보도했다.
  • 3대 독립운동가문 첫 공인

    ◎4대 임주수씨,광복절에 선친 건국훈장 수상 확정/을사조약후 무장항일운동 주도/1대/부친도와 독립의군부결성 기여/2대/전북지역 군자금모금·운반담당/3대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증손자가 국가로 부터 서훈을 받게 돼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 탄생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무장독립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자 자결한 돈헌(돈헌)임병찬선생의 손자 임수명선생(지난 77년 80세로 사망)이 오는 15일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게 됨으로써 3대에 걸친 이 집안의 조국독립 의지가 함께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1대 임병찬선생은 62년 독립장을,2대 임응철선생(지난 31년 60세로 사망)은 90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었다.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조국광복을 위해 대를 이어 몸바친 3대가 모두 「공식」인정을 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임병찬선생은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선생과 함께 향리인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의 한일합방후에는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시·도 대표 3백29명으로 독립의군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5월 체포돼 전남 여수군 거문도에 감금당한 뒤 끝내 나라 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2년후 목숨을 끊었다. 구한말 홍문관 학사와 승정원 비서승등을 역임한 2대 임응철선생은 부친을 도와 독립의군부 결성및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협등과 함께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했고 그해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게 된 3대 임수명선생도 이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할아버지 임병찬선생이 거문도에 감금돼 있는 동안 뒷바라지를 한 데 이어 아버지 임응철선생을 따라 조선독립대동단에 들어가서는 전북지단 이사를 맡아 김흥순등 수십명을 가입시켰으며 이들로 부터 걷은 군자금을 서울 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1·2대가 쉽게 공적을 인정받은데 비해 임수명선생의 「독립유공」은 그동안 공인받지 못했다. 그의 활동이 워낙 비밀스러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4대째인 임주수씨(68·경기도 수원시 고등동 롯데아파트 1동208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내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전북향토문화연구회와 그 지역 역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자료를 입수해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됐다. 그 자신 독립운동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막일을 하며 어렵게 성장한 임주수씨는 현재도 월세 20만원짜리 20평형 아파트에서 부인 이지순씨(64)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위해 헌신해온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사실과,선대가 남긴 훈장을 자랑으로 여기며 깨끗이 살아왔다』면서 『다만 광복절을 단지 공휴일로만 생각하고 왜색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드는 듯한 젊은 세대들을 보면 선조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 한국여인 고난의 삶 표현/정인영씨,창작춤판 「황사」 마련

    한국무용가 손인영씨(30)가 오는 30일 서울 문예회관대극장에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 여인의 의지를 담은 작품 「황사」로 세번째 창작춤판(하오4시30분 7시30분)을 마련한다. 이번 공연은 개인무용단으로는 드물게 작품에 출연할 무용수들을 두 차례의 공개오디션을 통해 모집하는등 기획단계에서부터 화제를 모았던 무대. 손씨가 직접 안무한 창작무용 「황사」는 한일합방부터 해방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여인들의 고난의 삶을 춤으로 구성한 작품으로 프롤로그와 3개의 장,에필로그로 구성된 45분짜리 대작. 이 작품은 특히 각 장마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해 놓고 이미지가 선명하게 전달되도록 소품과 마임적인 동작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대학시절 무용을 전공했으면서도 결혼이나 직장생활등 바쁜 일상에 쫓겨 무용공연보기를 멀리했던 주부 2백명을 무료로 초대해 무용인구의 저변확대를 시도하고 있는 이번 무대에는 「황사」이외에 「어제,그리고 오늘」도 공연된다. 세종대,이화여대 대학원을 졸업한 손씨는 7년간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해오다 지난해부터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는 의욕에 찬 30대 춤꾼이다. 음악 원일,손인영 심효정 양혜진등 16명 출연.
  • “일제의 조약날조 남북 공동대처를”/연 총리,정 총리에 서한

    연형묵북한정무원총리는 22일 정원식국무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최근 새롭게 발견된 자료들을 통해 일제의 조선강점이 당초부터 불법 비법이었다는 것이 더욱 명백해졌으며 동시에 일제의 조선강점의 역사가 1910년 한일합방으로부터가 아니라 1905년부터 시작되고 그 식민통치기간이 36년이 아니라 41년이라는 사실이 더욱 뚜렷이 입증되게 되었다』며 이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오는 26일의 고위급회담 교류협력분과위원회 제5차회의에서 긴급의제로 토의,공동결의문 같은 것을 채택하자』고 제의했다.
  • 일 중학교 새 역사교과서 출간/식민통치·정신대부문 증보

    ◎노 대통령의 일 국회연설도 게재 일본의 새로운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식민지지배등 일본 근현대사를 보다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 24일 밝혀졌다.문부성 검증을 마친 교과서는 정신대등 강제연행,한일합방,노태우대통령의 방일연설등 역사적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새 교과서는 지난 89년 고시된 신학습지도요령에 의해 개편된 최초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8개 출판사가 교과서를 펴냈으며 내년 신학기부터 4년간 사용된다. 새 교과서 중에는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노태우대통령의 일본국회연설을 게재한 것도 있으며 한국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안중근의사의 이름을 기술한 교과서는 과거의 3개사에서 6개사로 증가했다고 아사히(조일)신문이 보도했다. 일본의 새 교과서들은 한일합방과 의병활동등 격렬한 저항운동,일본이 무력으로 식민지화를 강화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창씨개명등 한국인의 황국식민화정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새 교과서 중에서 자기나라 말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한국 어린이의 고통을 기술한 것도 있으며 지난 45년 8월15일 종전을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대만·조선 등의 민족해방일」로 쓴 교과서도 증가했다. 현행 교과서도 남경대학살,한국·중국으로부터의 강제연행등을 다루고 있으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게재한 것은 1개 교과서뿐이다.
  • 규장각 자료서 드러난 일제의 날조 파장/긴급좌담

    ◎“을사조약등 무효” 대일 공식통보를/5년간의 의병희생등 추가배상 마땅/두나라 교과서등 역사기술 새로해야/학계도 일자료 의존 탈피,원전연구 나설때 ▷참석자◁ 윤병석 인하대교수·역사학 신용하 서울대교수·사회학 백충현 서울대교수·법학 일본은 일제의 한국 침략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정미7조약」등 두 나라사이의 국제조약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 왔다.우리 국민역시 일제의 역사왜곡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력하게 국권을 내어 준것으로 잘못 알아왔다.그러나 서울대 규장각 소장자료 정리·분석과정에서 을사조약을 비롯,대한제국말기의 각종 조약과 칙령 등이 황제의 승인없이 일제에 의해 날조된 것(서울신문 12일자 보도)으로 밝혀짐에 따라 원인무효의 조약에 의한 일제36년의 청산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역사적 사실의 재정립 및 대일피해보상 등 한·일간의 새로운 현안들을 짚어보는 전문가 좌담과 조약체결과정에대한 박성수교수의 글을 싣는다. ○“체결”로 거짓 발표 ▲신용하교수=일제가 지난 1905년 조선에 강요한 을사조약과 1907년의 정미7조약등 각종 조약과 식민지법령이 당시 조선황제인 고종의 인준을 받지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일제에 의해 황제의 서명이 위조된 것이라는 서울대 규장각의 발표는 국민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을 겁니다.먼저 제가 1905년 을사조약체결과정과 이를 둘러싼 조선조정의 대응등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으로 오늘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뒤 조선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일제는 을사조약을 만들어 일본 헌병대를 동원해 대신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체결하려다 고종의 완강한 거부로 고종의 인허·수결·옥새·날인 어느 것도 받지 못해 조약체결에는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는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거짓으로 발표해버렸습니다.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가로서 모든 외국과의 조약과 칙령에는 황제의 친필서명과 옥새의 압인이 필수요건이었으므로 을사조약은 무효인 것이지요.이 과정에서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은 조약체결에 반대해 헌병들에게 멱살이 잡힌채 밖으로 끌려나갔고 민영기 이하영등도 이를 막아보려 했습니다.이밖의 국내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윤병석교수=당시에는 국내의 친일파들 말고도 미국·영국·독일등 제국열강들 조차도 일제의 불법을 자국의 이익에 따라 묵인한 상태여서 일제의 조선침략은 계획대로 진행됐죠.이는 바로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할 교훈인데 지금도 달라진 것은 크게 없습니다.물론 일부에서는 1세기전에 국가간 조약을 체결하면서 지금처럼 철저하게 법적절차를 거치고 그에 대한 인식이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예를들어 「양국간의 통상을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만해도 조약체결 당사자들의 서명은 물론 이들의 도장 왼쪽에 양국통치권자의 서명·날인이 돼있습니다.하물며 한나라의 국권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조약에 통치권자의 서명·날인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신=이들 조약들이 법적효력이 없다는 것이 확인됐는데 그럼 무엇이 달라지고 지금 우리가 취할수 있는 대응책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백충현교수=을사조약이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공표됐다는 것은 학계내부에서는 알려져있었지만 우리의 원본으로 공식확인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입니다.그리고 정미7조약과 같은해 12월에 반포된 48개의 칙령등에 순종의 수결이 위조됐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해야합니다.외교권박탈과 통감부설치에 의한 조선지배등을 규정한 을사조약이 무효이므로 이후 일본이 외국과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이나 내치를 위해 반포했던 일체의 식민지법도 모두 무효가 됩니다.여기에서 지난 65년 체결된 한일기본협정에서 일본측이 취했던 입장을 짚고넘어가야 합니다.일본측은 1910년 한일합방을 합의했던 것자체가 무효가 아니라 당시 조선황제의 동의를 얻어 제정·반포된 법에 근거해 합법적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전세계에 알려야 그러나 을사조약자체가 무효라는 것이 판명된 이상 물적배상의 차원을 떠나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되어야하며 이는 역사의 잘못된 반복을 막으며 장래한일양국관계의 정상화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신=저도 백교수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저는 이밖에도 선언적인 의미에 그칠지는 몰라도 을사조약이 체결도 안된 것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봅니다.또 이사실을 사후에라도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공식문서로 작성해 일본정부에 전달해야 합니다.한일교과서의 내용도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였다」는 서술을 「일제는 1905년 소위「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려다가 실패하자 체결되지도 않은 조약을 체결된 것처럼 제멋대로 거짓 반포하였다」로 고쳐써야 할 것입니다.또한 지난65년 한일기본조약체결때 1910∼1945년에 대한 배상만을 논의했는데 1905∼1910년사이 일제침략에 무참하게 학살된 수만명의 의병들의 희생에 대해서도 추가로 배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윤=저는 신선생님의 제안에 몇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이번 기회에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간교함,기만적인 부분들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일부에서는현재의 한일관계가 수교이후 가장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감정적인 대응을 경계해야 한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한시점에 근거한 단견입니다.국제관계란 때로는 소원해질수도 있고 가까워질수도 있는거니까요.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며 아직까지도 계속 거론되는 친일잔재 역시 하루빨리 완전청산돼야합니다. ○주권지켜낼 정도 ▲백=규장각 자료분석작업에 직접 관여하면서 저를 포함해 학계가 반성해야한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우리는 여러이유로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돼있지 않아 일본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 풍토가 만연돼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고 굴절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이번경우도 규장각에 소장돼있던 자료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굴된 겁니다.우리 학계는 이제 간접자료가 아닌 원본에 근거한,원칙에 충실한 연구자세를 지향해야하며 우리의 문헌을 창고에 방치하지 말고 근본적인 자료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마지막으로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역사사실이 우리사회에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 잘못 알려져온 역사는 바로잡고 이로인해 손상당한 우리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며 또한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최근 일본에 치우쳐있는 국민들의 무비판적인 관심을 한번 거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또 우리민족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갖도록 역사사실을 알려 최근 물밀듯 상륙하고 있는 일본의 경제·문화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을 지니도록 해야하는데 이는 바로 우리의 주권과 문화적인 자주성을 지켜나가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고종,“순할지언정 인허 못한다”/을사조약 이등협박에 끝까지 불응/박성수 정문연교수·역사학(특별기고)/이완용등 오적변절… 대신회의서 “가” 결정/황제,“적자 모두 일어나라” 국민항쟁 촉구 1905년의 을사조약이 조약당사국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은 일제의 명명)의 비준없이 체결되고 1907년의 정미조약도 융희황제(순종)의 위조된 수결로 체결된 사실이밝혀져서 이 시기의 모든 법령은 물론 1910년의 소위 합병조약(경술조약)까지도 무효임이 밝혀져 이 시기에 관한 기존의 역사 기술에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1905년 11월17일 광무황제의 재가 없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국권탈취의 원흉 이등박문이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1월9일 하오.이튿날 낮12시 덕수궁의 황제를 알현,소위 일본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1차로 협박하고 2차 알현을 요구하였으나 황제가 거절,15일에 가서야 2차 협박에 성공했다. 그러나 얻어낸 결과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인허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등=만약 폐하가 이 조약을 거절하면 중대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황제=이 조약은 국가중대사이므로 짐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국민의 의사를 물어 봐야 한다. ▲이등=국민의 의사 운운하심은 국민을 선동하여 일본에 반항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황제=이 조약을 인허하는 것은 망국이나 같은 것이니 짐이 종사에 순할지언정 절대로 인허할 수 없다. 죽으면 죽었지 이 조약은 받아 들일 수 없다는 황제의 태도는 그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5월17일 이등박문이 불법으로 소집,주재한 대신회의에서 이완용등 오적이 변절하여 「가」라고 대답했을 때 황제는 그들의 배신행위를 「천재의 유한」이라 개탄하면서 『짐의 적자는 모두 일어나 이 슬픔을 함께 하라』고 말했으며 피를 토하여 통곡하였다.황제의 뜻이 이러하였으므로 을사조약에 수결했을 리 만무하다.따라서 이 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일 뿐 아니라 일제는 이 조약 자체를 위배하고 있다.즉 한국의 외교권만을 침탈하기로 되어 있는 조문을 무시하고 한국의 모든 내정권을 유린하고 있다.이것도 명백한 불법이다. 광무황제는 이보다 먼저 1904년 러 일전쟁 발발 직전에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으나 이것도 일제가 불법적으로 묵살하였다.1907년 해아특사를 파견하여 만국평화회의에 친서를 전달하게 되는데 그 요지가 을사조약의 무효선언이었다. 『짐은 최근 한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은 무력협박과 감금속에서 강요된 것이므로 무효를 선언한다.짐은 이조약을 절대 승인한 바 없으며 장차도 그럴 의사가 없다』 헐버트에게 보낸 전신에서 황제는 이렇게 명언하고 있다.이 사건으로 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나 그 때도 퇴위아닌 황제대리를 선언하였다.그러나 일제는 또다시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양위를 발표하였다.그리고 한국군 해산을 골자로 하는 정미조약을 체결했다.이것마저도 융희황제의 재가없이 강행하였다면 당연히 무효이다. 이등의 주구였던 이완용의 매국내각을 인정할 수 없듯이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이후 1910년 경술조약까지의 모든 법령,안중근의사에 대한 사형판결까지도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런 전제하에서 한일 두나라 교과서는 물론 모든 역사기술을 재검토하여 새로이 집필되어야 할 것이다.특히 일본은 1931년 이후 소위 15년간의 침략통치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그 이전의 한국침략을 합법적이었다고 보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관을 버리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을사조약 고종 인준없이 체결/일제/정미조약 칙령은 순종수결위조

    ◎“구한말맺은 모든 한­일조약 무효”/서울대 규장각 발표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무효조약이며 일제는 순종의 서명을 위조,이에따른 칙령을 발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대 규장각 이태진관장(국사과교수)은 11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905년 체결한 을사조약은 고종황제의 반발속에 국제법상의 요건인 위임장과 인준서를 갖추지 못한 무효조약』이라면서 『지금까지 을사조약이 대한제국과의 협의아래 체결되었다는 일본측 주장은 모두 허위임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관장은 또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1907년의 정미7조약도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됐음이 드러났다』고 말하고,『특히 정미7조약에 따라 반포된 각종 칙령은 일제가 순종의 서명을 위조해 반포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관장은 이날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은 을사조약원본및 순종의 자필서명과 함께 위조된 사실이 뚜렷한서명을 공개했다. 이관장은 이와함께 『일본공사와 외무대신 박제순이 체결한 을사조약을 인허하지 않았고 수결을 압인하지도 않았으며 독립된 황제권을 조금도 다른나라에 양여하지 않았다』는 고종의 친서를 실은 1907년 1월16일자 대한매일신보도 공개했다. 이에대해 서울대 신용하교수(한국사회사)는 『이 문서는 을사조약이 국제법상 요건을 갖추지 않은 강제조약으로 원인무효에 해당한다』면서 『이로 미루어볼때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등 당시 한일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이 무효이며 따라서 일제 36년동안 행해진 정책들은 모두 불법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한일합방등 “불법” 판명/규장각서 밝혀낸 「국권찬탈」 실상

    ◎“대한제국과 협의” 일 주장 허위 입증/고종 끝내 항거… 근대사 재조명 돼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토록한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의 정미7조약이 국제조약상 반드시 필요한 당시 통치권자인 고종황제의 강력한 저항속에 위임장과 인준서없이 작성된 「무효문서」로 밝혀짐에따라 을사보호조약체결에서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근대사부분에 대한 학계의 재평가가 불가피하게 됐다. 한일합방이 일제의 무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다시한번 극명하게 확인된 동시에 당시 대한제국이 무기력하게 국권을 넘겨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따라 우리의 역사교과서의 수정은 물론 일본의 교과서 역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하게 된 것이다. 11일 서울대 규장각(관장 이태진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일제는 이외에도 1907년 12월13일 조선총독부체제에 거의 접근한 「각부관제통칙」등 48건의 각종 칙령을 당시 순종황제의 서명을 위조해 공포함으로써 1910년이전에 반포된 일체의 법령에 대한 정밀조사가 필요하게됐다.이태진관장은 『그동안 일제의 침략이 형식적으로는 법적절차를 갖춘 합법적인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사실은 을사조약자체가 체결조차 되지 않은셈』이라면서 『일제가 조약체결을 추진하다 고종황제를 설득할 수 없게 되자 황제의 동의없이 부랴부랴 세상에 공표해 마치 기정사실인양 역사적 사실을 위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고종황제는 자신이 을사조약에 서명·날인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런던트리뷴지 특파원 투글내스 스토리에게 위탁한 친서(1907년 1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를 통해 밝혔고 같은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세계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2차례에 걸쳐 천명한 것으로 확인돼 고종이 마지막 순간까지 한일합방을 막기 위해 항거했다는 사실에 대한 학계의 재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신용하교수(서울대)는 또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킨 것도 일제의 을사조약에 수결할 것을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교수는 『1907년 반포된 48건의 칙령에 있는 순종의 수결은 순종이 1898년 독다사건이후 신체의 일부가 마비돼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사실에 비춰볼때 놀라울 정도로 달필이어서 순종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일제에 의해 위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이 법적효력이 없는 「무효문서」임이 증명됨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 일이 국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약체결의 다른 당사자인 일본에서도 마땅히 병행되어져야 하며 일제의 한반도 침략으로 인한 배상의 시기 역시 1910년이 아니라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으로 앞당겨져야 한다고 학계에서는 지적한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의사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이 한몸 광복위해”… 일 기념식장 폭탄던져/“상해사변 승리” 들뜬 일군 수뇌부 7명 사상/32년 4월 홍구공원에서 거사… 12월에 총살형/장개석 총통,“중국 1백만대군도 못한 일 조선 한 청년이 해냈다” 격찬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매헌 윤봉길 의사가 선정됐다. 4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침략이 극에 달했던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군 수뇌부를 강타,조국독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윤의사는 거사 직후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19일 가나자와(금택)현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윤의사의 의거와 생애 사상을 되새겨 본다.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인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는 일황 히로히토(유인)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상해사변의 전승기념식이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홍구공원 안에는 수많은 일본 거류민단과 장병·학생들이 도열해 있었고 중앙식단위에는 일본의 대륙침략 중심인물인 상해주둔 군사령관 시라가와(백천의측)대장과 해군 함대사령관 노무라(야촌길삼랑) 중장,우에다(식전겸길) 중장 등 군수뇌와 시게미쓰(중광채) 주중공사,무라이(촌정창송) 총영사,거류민단장 가와바타(하단정차) 등 외교관들이 착석해 있었다. 윤의사는 미리 작정했던대로 군중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최후의 의거 준비를 했다. 상오 11시20분 축하식의 1차 행사인 관병식을 끝내고 2차 순서인 축하식으로 들어가 일본 국가가 제창되고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윤의사는 도시락으로 된 자결용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낸 뒤 재빨리 앞사람을 헤치고 2m가량 전진,단상위로 힘껏 던졌다. 폭탄이 단상중앙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불꽃이 솟아 식장은 순식간에 피와 살이 튀는 아수라장이 됐다. 억눌리고 짓밟힌 약소민족의 원한과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위력이었다. ○군사령관은 즉사 시라가와 대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우에다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는 다리가 절단되고 무라이 총영사 등 3명은 중상을 입었다. 윤의사는 거사후 경비군경에게 체포되어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은 뒤 5월25일 상해주둔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윤의사의 거사성공 소식을 들은 장개석 총통은 『중국군의 1백만 대군도 못하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윤의사야말로 우리 4억 중국인 누구보다도 위대하다』고 격찬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씨와 김원상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윤의사가 태어난 이듬해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저격하고 그 다음해는 한일합방으로 2천만 민족이 조국을 잃었다. 윤의사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개벽」잡지등을 읽으며 농촌활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나갔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설립하고 농촌개혁운동을 펴는 한편 체육회·월진회 등을 조직,농민들의 친목과 생활개선·체력향상 등에 몰두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지며 원산총파업·용천농민투쟁 등이 일어나자 윤의사는 일제에 항거,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동지들을 규합했다. 1930년 3월6일 윤의사는 『장부가 집을 떠나니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편지를 남기고 사랑하는 처자를 두고 만주로 망명했다. 31년 8월 활동무대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겼다. 보다 큰 인물과 접하면서 무엇인가 나라를 위한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윤의사는 프랑스 조계 안공근 선생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동포가 경영하는 공장에 취업하는 한편 밤에는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익혔다. ○김구선생 찾아가 그해 겨울부터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맹세했다. 1932년 1월8일 일본 도쿄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본왕을 폭살하려다 실패하자 일본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김구선생은 무력에 의한 의열투쟁을 계속할 조선인 청년들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열혈청년들이 김구선생 휘하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무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중 『4월29일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행사를 일본군의 상해점령 기념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을 지참하고 행사에 참가하라』는 일본신문의 보도를 읽고 기념식에 참석할 일본군의 수뇌부를 일거에 괴멸시킬 방법을 논의했다. 거사를 위한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야채행상을 가장한 윤의사는 여러차례 행사장을 사전 답사하고 지형·지물을 익혔다. 4월26일 윤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인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고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김구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나는 붉은 충성심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들을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윤의사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살신성인의 길에 올랐다. 일본거류민으로 위장한 윤의사는 기념식장에 들어가 예정된 작전시간에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인 군수뇌부에 폭탄을 터뜨려 2천만 조선민족의 울분을 풀어주었다. 일본헌병에 붙잡힌 윤의사는 『나의 각오는 철권을 가지고 적을 즉시 타도함이다. 죽어 관에 들어가면 쓸모없다』고 말해 거사의 성공을 즐거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해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의사는 일본상해 주둔사단의 모국기지인 가나자와(금택)현으로 옮겨져 12월19일 상오 7시27분 총살형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효창공원에 안장 윤의사의 유해는 46년 5월 순국 14년만에 가나자와에서 봉환,효창공원 묘소에 안장됐다. 윤의사의 생가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는 광현당이 복원되어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윤의사는 22년 배용순씨(88세 별세)와 결혼,종과 담 두 아들을두었으나 담은 두살때 영양실조로 죽고 종은 농수산부에서 근무하다 퇴직,원호사업을 하다 80년대 후반 어머니 배씨보다 먼저 별세했다. 윤의사의 동생 남의씨(76)는 현재 예산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윤의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광복군 창설 중국지원의 계기로/이강훈 광복회회장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겼을때 우리 민족은 수많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찾기에 목숨을 바치는 지사와 선열들을 배출했다. 당시 선각자들은 나라를 찾기 위한 일념으로 사랑하는 부모·형제·처자를 남겨두고 험난한 형극의 길로 뛰어 들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문맹퇴치와 농촌개혁을 통한 민족 부흥운동을 주도하다 중국으로 망명 일본군국주의 군 수뇌부에 철퇴를 가해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과시했다. 윤의사의 상해 의거는 민족항쟁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으며 약소민족의원한을 풀어주는 기폭제가 되었다. 윤의사의 쾌거가 알려지자 당시 4억 중국인들은 한국사람들만 보면 『당신들 조선인들은 훌륭한 민족』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윤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증오의 눈으로 우리를 대하던 중국인들은 신뢰의 우정으로 변하게 되었다. 중국 국민당정부는 33년 낙양군관학교에 한국청년을 위한 한청반을 설치해주고 40년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창설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윤의사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84세인데 25세로 순국영령이 되어 자손만대의 사표가 되어 있다. 필자는 윤의사의 뜻을 받들려면 거사도 실패하고 무엇하나 남긴 것 없이 살고 있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짧은 일생동안 모든 것을 구국의 제단에 바친 윤의사의 성스러운 위업을 거울삼아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지름길로 매진해야 한다. 윤의사 의거 6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이같은 조국이 있게 해준 윤의사의 명복을 빌면서 새로운 각오로 선열의 순국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성결한의혈만이 역사의 앞날을 눈부시게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 외언내언

    일본 도쿄엘 가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낯선 광경에 접할 때가 있다.「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만세」라든가 「헌법개정과 일본군 해외파병지지」 혹은 「북방영토 회복하자」등의 과격구호 깃발을 펄럭이며 거리를 누비는 지프다.사람 왕래가 많은 번화가에 세워 놓고 열변을 토한다.재무장을 역설하고 대동아공영권을 강조하며 일제의 군가를 볼륨껏 틀어놓기도.◆이른바 「우요쿠」(우익)다.일본의 극우파.그 시조는 일제대육랑인의 우두머리로 유명한 도야마 미쓰루와 그가 만든 현양사.「순수일본주의」 또는 「대아시아주의」가 기본이념.패전이후 이들은 친미애국과 반공반소를 표방하며 미일안보조약 견지와 천황제 옹호 및 헌법개정·재무장 추구의 우익운동을 전개해 왔다.◆한마디로 일제의 후예요,신봉자들.전전엔 일제의 한반도와 만주진출에 앞장서고 태평양전쟁 수행의 지주역할을 했다.한반도에선 민비시해와 한일합방을 주도한 세력의 정신적 계승자들.8백여개 단체에 12만여명을 헤아리며 폭력수단을 사양 않는다.이제는 일본민족주의를 위해 미국에도대항의 자세를 취하는 변화도.◆이들에 의한 가장 최근의 충격적인 사건은 90년1월 『일왕에게도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한 모토지마(본도) 나가사키시장 저격.전국 우익단체들이 궐기해 천주(천벌을 대신 가함)를 외쳤으며 마침내 저격까지 했던 것.주로 좌익과 진보세력이 공격의 대상이었다.◆집권 자민당과 재계 보수세력이 지원을 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들로부터 보수 자민당의 부총재 가네마루씨가 공격을 받은것은 역설적.그는 북한과의 성급한 조기수교 주도로 극우파의 비판과 위협을 받아왔다.3발의 총탄은 빗나갔으나 간담이 서늘했을 것.『왜 내게 이런일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지만 그가 모를리야.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일본의 극우화 추세가 걱정스럽다.
  • 「허위감정 여부」 수사 계기로 본 오늘과 내일

    ◎과수연,독립성·권위 되살려야 한다/조직체계 문제점/관할기관 내무부에 전담부서도 없어/연구추천 통한 도제식교육 못벗어나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일부 직원의 비리와 관련,허위감정여부에 대한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이를 계기로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과학수사연구소의 보다 공정한 감정업무수행을 위해 연구소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그 위상을 재정립하는 방안이 적극 모색돼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연구소직원의 자질향상과 함께 무엇보다도 외부의 유혹이나 압력을 받지 않는 독립성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수사연구소는 치안본부산하기관으로 있다 지난해 8월 경찰청의 독립과 함께 내무부 직속기관으로 바뀌면서 지휘·감독권에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이번 사건 역시 이같은 지휘·감독체계의 취약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과학수사연구소는 『지난 55년 연구소직제가 제정되면서부터 경찰이 이 연구소를 관할해온 점등을 감안,경찰청산하기관으로 두어야 한다』는 경찰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법무부와 검찰에서 『경찰뿐만 아니라 주요수사기관이 의뢰하는 전문적인 감정업무는 상급기관에서 맡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함에 따라 결국 내무부로 넘겨졌었다. 그러나 법조주변에서는 실질적인 지휘·감독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내무부보다는 전문성을 갖고 보다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수 있는 법무부나 총리실등 상급관청이 감독·지휘할수 있게 직제를 완전히 별개기구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내무부소속기관으로 계속 둔다면 연구소의 전문적인 업무를 담당할 전문부서가 없어 효과적인 관리·통제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찰은 그러나 그동안 이 연구소를 관할해온 「기술축적」을 토대로 조직을 확대개편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럽다면서 경찰청장에게 지휘·감독권을 맡기는 내용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운영규칙」을 내무부 훈령으로 제정할 것을 건의해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함께 일부에서는 감정의 공정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외국과 같이 감정기관의 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윤전변호사도 이같은 취지에서 『어떤기관에 소속돼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중요한 것은 정확하고 공정하게 감정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감정인의 정신자세』라고 말했다. 독립성의 보장과 함께 이 연구소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는 전문성의 향상이라고 할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필적과 인영의 감정을 하는 문서분석실과 거짓말탐지기를 분석하는 범죄심리실,사진을 감정하는 형사사진실 등 3개 부서는 대학에 관련학과가 전혀 설치돼 있지 않아 인력의 충원과 교육에 많은 애로를 겪고 있다. 필요한 인원은 비슷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추천등의 방법으로 뽑아 교육을 시켜 양성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로 양성하기 위한 교육과 연수도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도제형식의 교육과 비정기적인 해외연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체계가 잡혀있지 않은 주먹구구식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55년 발족… 지문감식은 83년 역사 ▷연혁◁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수사기관에서 분리돼 지금과 같이 독립된 운영체제를 갖추게된 것은 지난 5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직제가 제정되면서부터다. 그러나 한일합방직전인 1909년 법무국 행정과에 지문계가 설치돼 지금과 비슷한 업무를 취급한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83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35년 4월에는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 법의학·이화학 및 형사사진실이 설치됐고 광복후 48년 11월 내무부 치안국에 감식과를 설치하고 법의학계와 이화학계및 지문계를 두었다. 55년 연구소 발족 당시는 법의학 및 이화학적 감식업무만 연구소가 직접 관장했고 지문감식업무는 치안국 감식계가 맡아왔다. 「범죄수사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과학수사연구소는 현재 일반직 2급인 소장 아래 법과학부와 연구개발부 등 2개부와 법과학부 산하에 법의학·생물학·약독물·마약분석·화학분석·물리분석·총무과 등 7개과,연구개발부 산하에 범죄분석실·교통공학실·장비개발실 등 3개실을 두고 있다. ◎외국서는 이렇게/연방·주 감정기관 따로/미/지방에만 55곳… 전문요원 충분/일/7개 과학연구소 유기적 협조/영 재판제도가 일찍부터 발달한 일본이나 구미선진국은 감정인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감정기술개발을 추진해 감정의 권위를 높여나가고 있다. 특히 이들 선진국은 전문감정인력육성에 중점투자해 두터운 인력을 바탕으로 외부의 유혹이나 압력 등을 막을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 ▷미국◁ 우리나라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해당하는 미연방범죄수사국(FBI)의 FBI연구소가 있고 각 주마다 감정기관이 설치돼 있다. FBI연구소는 총무과·문서부·과학분석부·특별계획부의 3부1과로 구성돼 있다. 문서부는 필적·인쇄물·위조수표등을 감정하며 이밖에도 족흔적과 미술품 감정등을 맡고 있다. 과학분석부는 생화학·약학·폭발물·혈액등 물리화학적 감정을 주로 맡는다. ▷일본◁ 과학수사의 기능을 크게 부검과 법과학으로 나눈다.부검은 도쿄도감찰의무원과 각 지방대학 의학부의 법의학교실에서 감정처리하고 있으며 법과학분야는 경찰 산하의 각급 과학연구소에서 맡고 있다. 법과학분야는 중앙에 경찰청산하의 일본과학경찰연구소가,지방에는 각 현의 경찰본부 형사부에 과학수사연구소 또는 감식과안의 범죄과학연구소 등 55개의 연구소가 있다. 과학경찰연구소는 도쿄도에서 발생한 사건과 중요사건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건만 취급하고 주로 지방연구소직원에 대한 이론 및 기술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지방연구소는 과학경찰연구소보다 규모는 작지만 시설이나 전문요원이 충분해 신속하고 합리적인 감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 모두 7개의 법과학연구소가 독자적으로 과학수사연구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런던경시청의 법과학연구소는 세계최대규모를 자랑하며 다른 6곳은 내무부에 직속돼 있다. 6개 연구소는 서로 규모가 비슷하며 이 가운데 버밍검연구소는 문서감식을,헌팅턴연구소는 총기감식을 주로 담당하며 쳅스토연구소는 생물학부 화학부 독성부등의 기구를 갖고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밖에 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지방경찰에 모두 12개의 법과학연구소가 이들 7개 실무연구소의 연구활동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검찰외 수사가 시작되면서 일부 드러났듯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특히 필적이나 인영감정을 하는 문서분석실의 업무에 있어 더욱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하루에 감정의뢰가 약 12건에 이를 정도로 업무량이 과다해 사실상 정확한 감정이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며 감정요원의 자질이나 사명감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감정의 비과학성을 극복하는 것도 큰 과제로 남아있고 연구소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우선 연구소의 독립성문제에 있어서는 현재대로 내무부산하에 두면서 독립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한다. 경찰에서 주장하고 있는대로 경찰청산하에 두는 것은 자율·독립성을 보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며 내무부 아닌 다른 부처산하로 옮긴다거나 별개의 관청으로 완전독립시키는 것도 규모나 업무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일본도 우리와같이 내무부아래 과학수사연구소를 두고 운영하고 있으며 소속때문에 큰 문제점은 없는 것으로 안다. 감정요원의 자질문제에 있어서는 김형영실장이 인장업에 종사하던 고졸학력자로 알려졌듯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이나 채용절차를 거치지 않아 개선책이 시급하다. 연구소의 감정인이 되기위해서는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제도화 돼야하며 전문감정인의 양성기관도 세워야 한다. 일본은 국립경찰과학수사 연구소에서 해마다 30명씩 전문감정인을 양성하고 있으며 재교육도 실시하고 있다.미국에도 감정인 양성기관이 많이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분쟁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명감 고취를 위해서는 대우와 보수를 높여주어 다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한달 보수가 1백만원정도 밖에 안된다는 김실장에게 높은 사명감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필적감정의 하나의 원칙은 대조하는 필적 상호간의 동일 또는 유사비율을 산정하여 판단한다는 것이나 비율산정자체가 결국은 감정인의 주관과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같은 비과학성을 극복하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한 「화상처리」방법등 과학적 연구가 다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도 하루속히 감정의 과학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와 장비개발및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 일,대북수교 4원칙 제시/주권존중·상호불가침·내정불간섭등

    ◎6차 수교협상 일정 하루 연기 【도쿄=이창순특파원】 일본은 31일 북경에서 속개된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교섭 이틀째 회의에서 처음으로 국교정상화의 4개 원칙을 제시했다. 일본이 제시한 4개 원칙은 ▲주권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무력이 아닌 평화적 수단에 의한 분쟁해결 등이다. 북한과 일본은 그러나 국교정상화 때의 합의문서에 포함된 기본문제에 대해서는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양국은 기본의제 논의에 난항을 겪으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자 회담일정을 하루 더 연기,2월1일에 경제문제,국제문제를 중심으로 협의를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측은 『쌍방이 지배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합의문서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일본측은 『일·북한 양국은 국제연합 가맹국이며 국제정세도 변했기 때문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다.지배권문제는 북한이 처음 제기한 것으로 협상의 난제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년)및 한일기본조약(1965년)의 유효성,한일합방조약의 합법성등을 명기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이들 조약의 불법성을 주장,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북한은 한일합방은 당초부터 무력으로 부당하게 체결됐기 때문에 무효라고 지적하고 한일기본조약에 대해서도 『남·북은 통일과정의 잠정적인 관계에 있으며 2개의 국가를 가상한 처리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북,「핵서명」 지렛대로 대일 협상/북·일 6차수교회담 안팎

    ◎핵사찰·과거보상문제등엔 여전히 이견/북,「정신대」 새로 제기… 교섭 걸림돌로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회담은 이번 6차 회담을 통해 보다 실질적인 교섭단계로 접어들었다.그러나 양국은 구체적인 문제에 많은 시각차를 나타내고 있다. 북경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회담에서 북한과 일본측 대표는 경제보상·핵문제·식민지 지배문제 및 국교정상화 때의 합의문서 등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했으나 의견접근에 실패했다.양측은 회담일정을 하루 더 연기,2월1일까지 경제보상문제등에 대해 협의를 계속한다. 북한은 합의문서에 지배권 포기를 명시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그러나 일본은 『필요없다』며 이에 반대했다.핵문제와 관련,전인철 북한측 수석대표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사찰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에 핵문제는 이제 해결됐다』고 강조했다.그러나 나카히라(중평)일본측 수석대표는 『핵사찰협정 서명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핵사찰의 실질적인 실시』라고 말했다. 한일합방조약(1910년)에 대해서도 양쪽은 근본적인 시각차를 노출했다.전인철 북한대표는 『한일합방조약은 당초부터 무력으로 부당하게 체결됐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반면 나카히라 일본대표는 『현재는 무효이지만 당시는 유효하게 체결,실시됐다』고 강조했다. 북한측은 더욱이 이번 회담에서 종군위안부 문제를 새로이 제기,일본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었다.북한측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여러번 거론하며 반인륜적인 만행이라고 강도높게 비난했다.북한측은 또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 가해자로서의 진정한 청산노력을 하지않고 역사적 책임을 회피해 왔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정치평론가들은 북한의 이같은 강도높은 비난은 일본의 약점을 이용,보다 많은 경제보상을 받아내고 국교정상화회담을 경제문제 중심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5차회담에서 식민지지배 시대의 인적·물적피해와 고통에 대해서만 보상을 요구했었다.일본측도 이번 회담에서 지난번의 북한측 제안을 바탕으로 더 자세한 경제보상을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이번 회담을 통해 국교정상화 교섭을급히 서두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북한의 전대표는 『본직적인 문제는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고 강조하고 회담의 실질적인 진전을 위해 일본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줄 것을 촉구했다. 북한이 국교정상화회담을 서두르는 이유는 현재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개방화」움직임과 경제난 극복을 위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구체적인 협상에 소극적이었다.그러나 북한의 IAEA와의 핵사찰협정서명을 계기로 보다 적극적인 협상자세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일본은 여전히 북한과 핵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북한의 핵사찰서명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더욱이 북한이 실제로 IAEA의 핵사찰을 받을 경우를 대비,본격적인 협상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지적한다. 국교정상화교섭을 시작한지 1년만에 열린 이번 회담에서도 양국은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이러한 대립으로 정상화회담이 답보상태에 머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하지만 북한의 핵정책 전환을 계기로 앞으로의 회담은 보다 탄력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일본의 국교정상화 4개원칙제시로 정상화회담은 중요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 외언내언

    『정의의 나라가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우리는 힘이 모자라 전쟁에서 진 것이다.그러나 조국은 불멸이다.절망하지 말고 근면하라』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총리 도조 히데키(동조영기)가 남긴 유서내용이다.일제가 정의의 나라였음을 강변하고 있다.반성의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일본에는 그를 증오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보다 존경하는 사람이 많다.특히 우익이라는 사람들의 경우 그런 경향이 심한 것을 본다.크레송총리의 일본비판이 화제가 되고 있는 프랑스의 르 피가로신문에 등장한 일본교수들의 발언도 그러한 우익성 망언의 하나,무시해 버릴 수도 있으나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일본인,특히 우익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같아 염려스럽다.『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세계정복이나 인민학살을 구상한 일이 없다.일본군은 군사목표만 공격했으나 미군은 민간인을 폭격했다.한일합방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쳐 「그레이트 브리튼」(영국)이 된 것과 같은 방식이다』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사학자 와타나베 시오시의 주장이다.◆도쿄 교린대의 다쿠보 다다에란 교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일본이 군국주의적이고 침략적인 민족주의로 돌아서려면 다음 3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야 한다.구미보호무역주의가 일본경제의 번영을 깨고 지진이 일어나며 한국인이 쳐들어오는 경우가 그것이다』◆이들 조건이 조성되면 일본은 또 한차례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소리가 아닌가.한국인이 쳐들어갈리는 없으나 2개의 조건은 쉽게 갖추어질 가능성이 있다.이 기사가 실린 15일자 서울신문의 외신면엔 크레송 프랑스총리의 허수아비 목을 「닛폰도」로 내리치는 일본인다운 섬찌ㅅ한 우익의 사진모습이 보도되었다.역사는 되풀이 되는가.일본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 일 국교 교과서에 전쟁영웅 재등장

    ◎노일전쟁 주역 도고제독등 42인 “미화” 내년부터 일본 국민학교 6학년 사회과 교과서에 2차대전 후 교과서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노일전쟁의 신화적인 인물 도고(동향평팔랑) 제독이 등장한 것을 비롯,42명의 역사적인 인물이 모든 교과서에 수록된 것으로 1일 밝혀졌다.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할 것으로 알려진 8개 출판사들의 사회과 교과서에 의하면 모두 본문에 도고를 등장시켜 『러시아군을 격파한 도고 등의 군인은 일로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사람으로서 극구 찬양받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 출판사가 노일전쟁의 전장 지도를 싣고 있으며 2개 출판사는 도고의 얼굴사진을,1개사는 해전그림을 곁들이고 있다. 또 『일노전쟁의 승리는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를 향상시켰다』,『아시아의 소국이 유럽의 대국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오에(대강지내부) 교수 (이바라키대·근대사)는 『국민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적은 지면에 도대체 군인 도고를 가르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각 출판사가「국제적인 지위 향상」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데 대해 『궁극적으로 한일합방 등 침략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덮어두고 있어 근대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균형을 잃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개정된 각 사회과 교과서는 「하노마루」,「기미가요」를 국기·국가라고 명시하거나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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