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회피인가 불가항력인가/윤석우 대한의학협상근부회장
◎「진료거부」 의사도 할말은 있는데…
21일과 22일자 각 일간지에 「일요응급환자 또 거부」 제목으로 「동맥끊긴 30대 청년이 경관을 대동하고 6곳을 전전하다가 겨우 수술을 받았으나 중태」라는 기사가 크게 보도돼 우리나라 의료계 전체가 마치 부도덕ㆍ비윤리행위를 하는 것같은 인상을 풍겨줘 국내의료인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같은 기사는 불과 2개월전인 지난 3월25일에도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사는 정모씨가 낙상을 당해 4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찾아간 영등포 C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사망하였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된바 있다.
이러한 보도에 접할 때마다 우리 의료계는 의료에 관한 비전문인인 환자ㆍ언론 등이 의료문제를 다루다 보니 진료거부니,병원을 전전이니,사망이니,중태이니하는 용어와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겠지만 하여간 이와같은 보도가 끼치는 국민의 의료계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커지며 의료인이 당하는 상처 내지는 위축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할 때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우선 이러한보도에 접할 때마다 진료거부의 한계는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이며,의사라고 해서 응급을 포함한 모든 질환에 과연 만능일 수 있느냐,또 만능의 시설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의문이 앞서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그 해답을 얻자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의료단체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또 의사의 한 사람으로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름대로 살펴보고 그 근본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나라에는 선진 각국에서와 같은 의료분쟁대책이 전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의사가 위험한 환자,자신있게 치료할 수 없는 환자는 되도록 손을 안대려는 경향이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현상이지만 의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진료에 임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좋지 않아 만일 환자가 사망했거나 질환이 더 악화되었을 경우 의사는 예외없이 폭력ㆍ난동ㆍ점거농성 등으로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진료풍토인 것이다. 의사도 신이 아닌 인간인 이상 모든 질병에 만능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결과가 만족하지 못하다고 하여 이렇게 큰 고통과 경제적ㆍ물질적 피해를 입게 된다면 누구라도 적극 진료에 나서기는 곤란할 것이다. 최근의 예만 보더라도 이에 시달리다 못한 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해당 병원에는 수억원의 배상판결까지 내린 사실이 그것이라 하겠다.
다음에는 제도적으로 응급치료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들수 있다.
선진국에 웬만한 도시처럼 지역별 또는 구역별로 응급환자 전담병원이 설치돼 관할구역내 모든 응급환자를 충분히 수용,처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같은 전담병원은 대개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에서 직영으로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 민간병원을 지정,보조금을 지급하는 예도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응급진료권이 설정되었다고 하더라도 환자 및 병상현황을 상시 파악하여 환자발생 신고접수시 수용 가능한 응급병원을 즉시 안내하는 기능도 매우 중요하다.
3월에 있었던 천호동 환자의 경우 서울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헤멘 결과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으며 따라서 병세를 악화시켰겠는가 말이다. 실정이 이런데도 무턱대고 병원과 의사만 탓하는 것은 큰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지난해 7월 전국민의료보험제도의 시행과 함께 의료전달체계를 병행한 결과 종합병원의 응급실이 크게 붐비고 있으며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응급실환자가 더더욱 붐비고 있는 사실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면 소위 「진료거부」로 매도되고 있는 이 악순환의 근본 치유책은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두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 다시말하면 의사가 의료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자신의 능력을 정성스럽게 발휘할 수 있는 진료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의료심사조정위원회의 활성화ㆍ의료피해보상법의 제정 등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든 불가항력적인 진료결과는 의사와 환자간의 대화 또는 법적으로 해결하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상호간의 신뢰를 높여야 하겠다.
다음은 응급진료체계의 확립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거니와 전화 한 통화로 신속하고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하루속히 확립되어야 한다.
인구 1천만이 넘는 대도시 서울에 그러한 진료체계망이 아직까지 없다는 것은 국가적인 수치이다.
그런데도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담당의사를 고발,자격정지처분하고 해당병원을 행정처분하는 다분히 단견적이고 임기응변식 대처로 일관한다면 「다람쥐 쳇바퀴」식 악순환만 되풀이 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의료인이 정부만 탓하고 응급환자에 뒷짐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의료인들은 갖가지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국민보건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다만 어쩌다가 있을 수 있는 의사부재ㆍ능력부족ㆍ시설부족 등 불가피한 경우에서 마치 의사가 악의를 가지고 고의로 진료를 거부한양 보도되는 경우가 있어 우리를 안타깝게 함은 물론 의료인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보사부에서 지금 응급환자진료체계 확립에 관한 작업을 진행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기대를 걸게하고 있는데 그 계획이 하루속히 확정돼 시행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