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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 눈의 예수들…빛고을엔 ‘희생의 꽃’이 핀다, 형형색색 고물들…양림동 펭귄마을엔 보물이 산다

    푸른 눈의 예수들…빛고을엔 ‘희생의 꽃’이 핀다, 형형색색 고물들…양림동 펭귄마을엔 보물이 산다

    20세기 초, 광주 양림동에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발을 디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만 해도 낯선 이국땅을 밟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겠지요. 태어나 자란 고향을 뒤로하고 남의 나라에 오는 것, 말도 안 통하는 땅에서 배곯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는 것, 머나먼 타지에서 눈을 감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매 순간순간이 크나큰 결심이고 용기이자 헌신이 아니었을까요. 미국과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양림동 언덕배기 땅을 사들여 집을 짓고 교회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3·1운동을 하는 신자들을 돕고, 한센병 환자의 손을 잡았으며, 남루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오늘날 그들이 지은 건물은 번듯한 근대 문화재가 되고, 이방인 선교사들의 행적은 아름다운 역사가 됐습니다.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의 조붓한 골목길에는 100여 년 전 양림동에 살았던 이들의 삶이 고여 있습니다.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에 있는 유진 벨 선교사 사택에서 성탄절을 기념하는 예배가 열렸다. 전라남도 지역에 울려 퍼진 첫 기도문, 첫 찬송가였다. 1900년대 초 양림동에 온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유진 벨과 클레멘트 C 오웬은 성탄절 예배를 시작으로 작은 동네에 터를 잡고 기독교를 전파한다. 생소한 종교를 믿는 이방인들이 읍성 내에 자리잡기는 어려웠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은 곳이 양림동, 병들어 죽은 이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는 풍장터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가진 게 없던 시절, 마을에는 병들고 배곯는 이들이 지천이었다. 이국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가르치기에 앞서 복음을 실천한다. 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고 본국의 후원금을 그러모아 양림산 자락 땅을 사들인 뒤 학교와 병원, 교회를 지은 것이다.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을 둘러보는 4.5㎞의 골목길은 양림동에 머무른 작은 예수들의 행적을 뒤따르는 길이다.●좁은 골목 사이로 오웬기념각과 광주 최초의 양림교회 양림동역사문화마을에 깃든 기독교 역사를 음미하려면 양림오거리 아래 오웬기념각을 출발점으로 삼는 게 좋다. 바로 옆에 광주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가 있으며, 수피아여학교, 우일선선교사사택, 호남신학대 선교사 묘원 순으로 동선이 잘 연결된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바지런히 누벼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걷다 보면 만나는 서양식 건축물은 선교사 이름이 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네덜란드 식으로 회벽돌을 쌓았다’, ‘원형 창과 첨두아치 형상의 창문을 조화롭게 배치했다’는 안내문 설명을 읽기에 앞서 이곳에 얽힌 선교사들의 삶을 아는 것이 먼저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양림동은 그저 오래된 동네요, 사택은 고색창연한 서양식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양림동에 거주한 선교사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한국인만큼 한국을 사랑했던 이들은 한국 이름으로 살았다. 유진 벨은 ‘배유지’, 로버트 M 윌슨은 ‘우일선’, 클레멘트 C 오웬은 ‘오원’ 또는 ‘오기원’, 엘리자베스 셰핑은 ‘서서평’으로 불렸다. 1895년 한국에 온 배유지 선교사는 수피아여학교를 세웠다. 여자여서 배움이 어렵던 시절, 여학생들은 근대식 학교에서 교육의 권리를 보장받았고, 민족의 앞날을 고민해 행동으로 옮겼다. 광주 지역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해 1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었고, 교복을 찢어 태극기를 만들었고,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우일선 선교사는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 선교에 앞장섰다. 워싱턴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촉망받는 의료인은 광주한센병원, 여수 애양원을 여는 등 한센병 환자를 향한 사랑이 극진했다.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죽으며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는 데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나같이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몸소 실천하는 삶이었다. ●배유지 선교사 만든 수피아여학교, 아치형 창문·회벽의 조화 의료 봉사를 하던 오원 선교사는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뜬다. 한국에 온 지 5년 만이었다. 오원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기념해 세운 건물이 오웬기념각이다. 요즘 용어를 빌리자면 복합문화공간이랄까. 예배는 물론, 수많은 강연, 음악회, 무용과 연극 공연이 열린 공간이다. 수피아여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예배당은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커티스 메모리얼 홀, 선교사들이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던 곳이다. 학교를 세운 배유지 선교사를 기리는 뜻에서 ‘배유지 기념 예배당’이라고도 한다. 아치형 창문과 회벽이 어우러져 고아한 아름다움이 풍긴다. 건축물 기행의 하이라이트는 호랑가시나무를 지나면 나타나는 2층 건물, 윌슨 선교사 사택이다. 우일선 선교사가 살던 집이자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소개되는 곳이다. 미국 영화에서 볼 법한 ‘잘생긴’ 주택은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아 올리고 내부는 회반죽을 칠했다. 외관만큼 집에 서린 사연도 아름답다. 이곳은 우일선 선교사의 사택이자 광주 최초로 고아원 사역을 시작한 장소다. 마당 한편에는 은단풍 나무가 있다. 우일선 선교사가 고향에서 종자를 가져와 심은 것이란다. 은단풍은 자신과 고향을 이어주는 끈이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벗이었으리라. 누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열거하지 않더라도 어떤 죽음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윌슨 선교사 사택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호남신학대 언덕에 아담한 묘원이 있다. 배유지와 오원 선교사를 포함해 양림동과 호남을 기점으로 활동한 22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원이다. 본명과 한국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비석 앞에는 방금이라도 누가 다녀간 듯 싱그러운 꽃다발이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건넨 안부 인사다. 선교사들은 눈을 감은 후에도 고국이 아닌 양림동에 묻혔다.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은 까만 눈의 사람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한껏 안아줄 수 있는 양림동 언덕배기에.출발점이었던 오웬기념각 근처에 마을의 또 다른 명소, 펭귄마을이 있다. 양림 커뮤니티센터 뒤편의 골목길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옛날 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은 색색의 폐품으로 가득하다. 목록 한번 다양하다. 멈춰버린 시계, 고물 자전거, 이 빠진 그릇, 녹슨 실로폰, 줄 나간 바이올린….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것들, 효용이 중요한 세상에서 제 기능을 다한 것들이 여기서는 귀한 취급을 받는다. 사람들 카메라에 쉴 새 없이 담기는 예술 작품, 정크아트가 된 것이다. 펭귄마을의 시작은 화재가 나 방치돼 있던 빈집에서 가져온 고물이었다. 김동균 촌장을 주축으로 마을 주민들은 맥주 병뚜껑으로 물고기 몸통을, 깨진 장독대 뚜껑으로 펭귄 팔을 만들어가며 길거리 미술관을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고물은 쓸모없다 여긴 것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유행 따라 살지 말고 형편 따라 살자’처럼 노년의 지혜가 담긴 글귀, 라면땅부터 뽀빠이까지 불량식품 가게에서의 소소한 군것질도 놓치기 아까운 즐거움이다. 버드나무가 울창해 ‘버들 양’(楊)에 ‘수풀 림’(林), ‘양림’(楊林)이란 이름이 붙은 양림동은 젊은이들에겐 놀 거리 많은 핫플레이스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골목에 세련된 레스토랑과 한옥 카페가 들어섰다. 양림동은 변화에 유연한 동네다. 풍장터에서 기독교 문화를 꽃피운 마을은 어르신의 손때 묻은 작품과 젊은이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양림동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다.●예향의 도시 축소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향의 고장, 아시아문화 중심도시, 광주. 이 도시의 예술적인 면면이 궁금하다면 양림동역사문화마을 맞은편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으로 향하면 된다. 2015년에 문을 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문화예술 전반을 아카이빙하고 전시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전지인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서 역사적 의미도 깊다. 부지는 민주평화교류원, 어린이문화원,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총 5개 시설로 나뉜다. 재밌는 점은 건축의 특이성이다. 구 전남도청 본관, 별관, 경찰청 본관을 활용한 민주평화교류원을 제외하면 모두 지하에 들어서 있어 거대한 지하세계 같다. 그렇다고 어두침침하거나 습한 기운은 없다. 건물 지붕에 설치된 70여 개 채광정 덕이다. 채광정은 낮에는 햇볕을 지하 깊숙이까지 받아들이고 밤에는 은은한 불빛을 뿜어낸다. 총면적 16만 1000㎡. 우리나라 문화 공간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보니 여행자는 입구에 들어선 순간 어디를 둘러봐야 할지 당황하기 십상이다. 시간이 여의치 않은 여행자에게 넓은 부지는 때로 부담이므로. 광주에 흐르는 예술의 향기를 맡고 싶되 1시간 남짓밖에 시간이 없다면 문화정보원 라이브러리파크로 향하자. 전시 규모가 아담해 가벼운 마음으로 휘이 둘러볼 수 있다. 도서관, 박물관, 갤러리, 극장을 하나로 묶은 라이브러리파크는 무료 전시를 자주 연다. 문화창조원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이자 기획 전시가 열리는 공간이다. 6개 복합관에는 아시아를 주제로 국내외 이름난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올라간다. 문화생활을 한 뒤 가을볕에 몸을 바짝 말리고 싶다면 문화창조원 뒤편 하늘마당이 제격이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은 전시만큼 인상적이다.●무등산 품에 안고 달리는 모노레일 무등산은 광주 시민들에게 집 앞 공원 같은 산,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은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리는 이름이다. 지산유원지 앞마당으로 소풍을 갔다, 리프트를 타고 무등산을 올랐다, 엄마 손 꼭 붙잡고 모노레일을 탔다….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에 얽힌 추억은 1980~90년대 이곳을 찾은 어린이의 수만큼 각양각색일 것이다. 1980년부터 2005년까지 선로를 달리던 모노레일은 운영업체 부도 등으로 운행이 중단됐다가 11년 만인 2016년부터 운행을 재개했다. 모노레일을 타러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무등산 등산로를 따라 산길을 오르는 방법과 745m 길이의 리프트를 타는 방법. 빨갛고 노란 철제 리프트는 1990년대 광주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이다. 타임머신은 시속 5㎞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리프트가 두 발을 대신하고 시간은 넉넉하니 가족, 연인, 친구는 번다한 일상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모노레일은 탑승역인 빛고을역과 종착점인 팔각정 아래를 25분 동안 왕복한다. 끼이익, 모노레일에서 이따금 섬뜩한 소리가 난다. 선로가 하나라 약간의 덜컹거림도 피할 수 없다. “아빠, 여기서 떨어져도 죽진 않겠죠?” “이거 누가 타자 그랬어! 무섭잖아!”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스릴은 없지만 옛날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짜릿함에 여기저기서 즐거움 섞인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모노레일 밑으로 나무들의 초록색 정수리가 빼곡하다. 종착점인 팔각정은 무등산 향로봉 기슭에 자리해 광주 도심이 한눈에 담긴다. 드넓은 광주가 아담해지는 순간, 빛고을의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는 순간, 마음이 쉰다. 글 이수린(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62)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 오산IC를 타고 논산천안고속도로 천안분기점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서광주IC에서 서광주 쪽으로 들어선 뒤 중외공원 입구에서 ‘무등산, 시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양동시장에서 ‘남광주교차로, 양동시장’ 방면으로 들어서 천변좌로를 따라 2㎞가량 이동하면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이다. →맛집 충장로에 있는 1960백선청원모밀(268-1960)은 6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메밀 집이다. 역사만큼 음식 맛이 깊어 2011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 편에 이름을 올렸다. 가다랑어포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는 여타 메밀 집과 다르게 멸칫국물로 육수를 내 시원하다. 영미오리탕(527-0248)은 ‘백종원의 3대천왕’에 나온 뒤 사람들로 더욱 북적인다. 들깻물에 미나리와 오리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들깨오리탕이 유명하다. 푸짐한 남도 밥상이 당긴다면 금다연(374-1000)이 어떨까. 친환경 식재료를 써서 호박죽, 전, 회까지 한 상 가득 거하게 차려낸다. →잘 곳 양림동역사문화마을 주변에 게스트하우스가 여럿 있다. 호남신학대 부근의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682-0976)는 옛 선교사의 사택을 리모델링했다. 고즈넉한 적벽돌 집의 2층 테라스에서는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 있다. 지산유원지 내에 자리한 호텔무등파크(226-0011)는 골프연습장, 온천사우나, 볼링장 등 부대시설이 다양하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30년 전 서울올림픽 열렸던 그곳… 2000년 전 한성백제의 고향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30년 전 서울올림픽 열렸던 그곳… 2000년 전 한성백제의 고향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9회 차 송파(백제의 꿈) 편이 가을이 익어가는 9월의 셋째 주말인 지난 15일 진행됐다. 이날 투어는 30년 전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서울올림픽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행사였다. 투어 일정을 서울올림픽 개막일에 최대한 가깝게 맞췄고 마침내 ‘D-2’에 투어를 가질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서울을 전 세계에 알린 1988년 9월 17일 역사적인 개막식을 떠올리며 메인스타디움을 찬찬히 둘러봤다. 또 88올림픽기념전시관에서 상영하는 굴렁쇠 소년의 영상을 보면서 감회에 젖었다. 투어 내내 30년 전 그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를 출발한 투어단은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메인스타디움에 들어가서 본부석과 성화대, 관중석을 걸었다. 88올림픽기념관에서 메달리스트들의 영광스런 얼굴과 유니폼을 보면서 그날의 열기를 체감했다. 입장료는 연구원이 일괄 부담했다. 한국광고박물관~삼전도비~석촌호수~석촌동 고분군 코스가 이어지는 잠실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시간상 무리라고 판단해 종합운동장~잠실 구간은 지하철로 이동했다. 이지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재치 넘치는 해설로 투어를 안정감 있게 이끌었다. 대부분의 참가자가 처음 방문한 한국광고박물관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참가자들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답사가 좀 늦게 끝나더라도 해외광고제 수상작을 시청하길 원했다. 광고의 역사는 물론 수준 높은 외국 광고를 접할 기회였다. 희망에 따라 20분짜리 광고 영상을 시청, 이날 투어는 낮 12시 30분에 종료됐다.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는 22일(토)은 물론 26일(수), 29일(토)에도 진행될 예정이다. 30년 전 대한민국의 맥박을 뛰게 했던 서울올림픽에 관한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도시에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올림픽 개최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 선진 시민의식의 성숙과 함께 도시공간의 뼈대를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성된 한강개발, 체육시설과 잠실아파트단지, 올림픽공원이 거대한 도시의 구조물로 남았다. 올림픽은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의 발전을 앞당긴 기폭제이자 촉매제의 역할을 해냈다. 현대도시 서울의 변혁은 한강종합개발사업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7~1970년 시행된 제1차 한강종합개발사업은 홍수 피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1차원적인 몸부림이었다. 한강변에 쌓은 제방 위에 강변북로를 만들고 공유수면 매립 사업으로 얻은 동부이촌동과 압구정동, 여의도, 잠실에서 귀중한 택지를 조성했다.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은 1981년 한강 고수부지에 체육시설을 만드는 사업으로 시작, 1986년 5월 올림픽대교 개통으로 마무리됐다. 36㎞의 수조가 정비됐고 연중 2.5m의 수심이 유지됐으며 60여만평에 체육공원이 들어서는 등 지금 한강의 얼개가 이때 완성됐다. 19세기까지 천하절경을 유지했던 구불구불한 한강물길은 사라졌지만,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현대적 의미의 한강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올림픽을 계기로 1000만 시민을 수용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의 도시네트워크가 갖춰진 것이다.올림픽을 전후로 서울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1981년과 1989년을 비교해 보면 ‘올림픽의 힘’이 느껴진다. 1981년 867만명이던 인구는 1989년 1000만명을 돌파했다. 서울시 예산도 1조원에서 3조 5000억원으로 3배 이상 증액됐다. 지하철의 경우 9.5㎞ 1개 노선이 115㎞ 4개 노선으로, 차량은 20만대에서 77만대로 크게 불었다. 도로 총연장은 6600㎞에서 7200㎞, 시설공원은 550곳에서 943곳, 가로수는 14만 그루에서 24만 그루로 늘었다. 상수도 생산량은 9억 4000t에서 16억 2000t, 하수처리시설은 하루 36만t 처리 규모에서 300만t 처리 규모로 뛰었다. 공중화장실은 1700곳에서 8300개로 늘어났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현대화된 도시는 전무후무하다고 한다.올림픽의 성공과 잠실의 탄생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은 1970년 12월 수립됐다. 15만평의 종합경기장을 포함한 210만평 규모의 사업계획이다. 여름철이면 홍수로 범람하던 잠실섬의 강남 쪽 물길을 막아 매립한 83만평과 토지구획사업으로 얻은 127만평을 합친 땅이다. 위대한 구상이었다. 1970년 서울에서 개최키로 한 제6회 아시안게임 개최권을 반납하는 수모 끝에 절치부심해서 얻은 국제경기장 공공부지이기도 하다. 그때 우리에겐 대회를 치를 국제경기장이나 도시기반시설이 없었다. 1971년 오늘의 석촌호수로 흔적이 남은 한강 물막이공사가 잠실을 상전벽해로 변모시켰다. 조선 500년 동안 서울의 동쪽 관문과 광주를 잇던 송파나루와 삼전나루는 사라지고 뭍이 되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서울의 역사는 600년이었다. 1994년 ‘정도 600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면서 남산한옥마을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서울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하기로 했었다. 서울은 4대문을 중심으로 한 강북도시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잠들어 있던 한성백제의 역사가 1997년 무렵 깨어나면서 600년 설은 깨졌다. 서울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기술된 기원전 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서울의 역사는 2000년으로 수정되었다. 역사교과서는 새로 쓰였다. 2000년 전 한성백제가 처음 터를 잡은 땅은 강북이 아니라 강남이었다.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대성(大城)이자 북쪽성(北城)이었고,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 몽촌토성은 남쪽성(南城)이었다. 그리고 두 성의 배후지대인 석촌동 고분군은 왕릉이었다. 한성백제는 전형적인 강남 왕국이었다. 3세기 중반부터 4세기 중반 이전에 100만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해 길이 3500m, 높이 11m, 너비 43m의 거대한 토성을 한강변 동서남북 사방에 쌓았다. 강 건너 아차산에 진을 친 고구려와 세력을 다퉜다. 현재 동벽과 북벽이 도로로 8토막이 난 채 남았다. 한강 쪽 서벽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됐다. 풍납동 대동아파트 옆 경당지구와 지금은 풍납백제문화공원으로 옷을 갈아입은 미래지구가 풍납토성 안 한성백제의 왕궁과 신전이 자리한 핵심지대로 여겨진다. 풍납토성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고적 제27호로 지정됐지만 토성 성벽만 지정해 토성 안에 민가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해방 후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하고, 1964년 성 안을 발굴했지만 잠들어 있던 백제혼을 깨우지 못했다. 1997년 세 줄의 깊은 해자 즉 삼중환호(三重環濠)와 여(呂)자형 집터 등 74기의 유구와 수천 점의 백제유물을 수습, 백제왕도의 단서를 찾아내기 전까지 온조가 도읍을 정한 하남 위례성이 풍납토성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몽촌토성은 서울올림픽 덕분에 개발 압력을 이기고 현 상태로나마 보전될 수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몽촌토성의 존재감이 올림픽공원의 훼손을 막았다고 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올림픽공원 부지는 1960년대부터 미래의 국제경기장 부지로 지정돼 있었다. 메인스타디움을 비롯한 주요 경기장 시설이 잠실종합운동장에 먼저 건설된 탓에 올림픽공원은 단순 체육시설 부지에서 몽촌토성, 상징조형물과 올림픽회관, 야외공연장, 체육학교, 공원 등 복합 체육문화시설단지로 개발 방향이 전환됐다. 한성백제의 왕릉이라고 할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도 200여기의 돌무덤이 5개밖에 남지 않은 상태로 무참하게 훼철됐다. 사적지 내부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3호분과 4호분 사이로 35m의 차도가 뚫리기도 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쏠린 관심이 고분 안 민가를 이전철거하고 관통도로를 지하화하면서 모양새를 살렸다. 송파는 2000년 전 한성백제의 고향이다. 갓 깨어난 백제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신당동(광희문 주변), 정동(대한제국을 기억하며) ●일시: 9월 22일(토) 오전 10시~낮 12시, 9월 26일(수)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7번 출구 앞, 시청역 4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자치광장] 동대문구 전통시장의 새로운 도약/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

    [자치광장] 동대문구 전통시장의 새로운 도약/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

    다양한 편의시설과 서비스로 무장한 대형마트들이 전국 각지에 들어서면서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편의시설이 낡거나 보행환경 등이 좋지 못한 각 지역 전통 재래시장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그렇다고 수많은 서민이 땀을 쏟으며 살아가는 재래시장의 쇠퇴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 특히 우리 지역엔 서울약령시, 경동시장, 청량리종합시장, 청량리청과물시장 등 대형 전통시장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실제로 필자는 그동안 우리 지역의 전통시장을 활성화하려는 방안을 끊임없이 강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을 펼쳐 왔다. 우리 구는 2012년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조례를 처음 만들었다.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기업들과의 마찰이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동대문구를 대표하는 경동시장에는 대형마트의 상생스토어를 개점함으로써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의 관계가 경쟁이 아닌 상생이라는 사고의 전환을 이뤄냈다. 지난해에는 서울약령시와 경동시장의 재도약을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결과물이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바로 ‘서울한방진흥센터’다. 서울약령시에 위치한 센터는 개관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프로그램과 콘텐츠, 전통 한옥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세련된 외관을 갖춰 기존의 주 방문객인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청년층 방문객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는 전통시장의 현대화를 위해서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비·햇빛 가리개 및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설치, 간판 정비, 화장실 환경개선 사업 등을 통해 방문객들이 편리하게 시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국비 5억여원을 들여 경동시장사거리부터 청량리역까지의 보도를 정비하는 보행환경 개선사업도 10월 중 마무리할 예정이다. 행정안전부 공모에 선정된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한 지능형 화재감지시스템 구축 사업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우리 지역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해 전통시장의 앞날을 환히 비출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손녀에게 줄 동화 만들다가… 작가로 인생 2막 시작”

    “손녀에게 줄 동화 만들다가… 작가로 인생 2막 시작”

    “딸이 어느 날 손녀에게 전해 줄 동화를 써 달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일이 ‘인생의 2막’을 열어줄지 그때는 몰랐죠.”지난 10일 세종시 한적한 마을의 ‘우보고택’에서 만난 최민호(62)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가족을 위한 동화 작가로 변신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보고택은 최 전 비서실장이 사는 오래된 한옥에 자신의 호인 ‘우보’(牛步:소의 걸음처럼 느린 걸음)를 따 붙인 이름이다. 지난해 12월 출간한 ‘미노스의 가족동화-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도 이곳에서 집필했다.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에 입문한 최 전 비서실장은 충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인사실장에 이어 차관급인 소청심사위원장, 행복도시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을 거쳤다. 책을 출간했을 때만 해도 순수하게 글로써 평가받고자 ‘미노스’(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섬의 전설적인 왕)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공직자 출신임을 비밀에 부쳤다. 책이 출간되자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쏟아졌고, 오히려 더 많은 독자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대중 앞에 섰다. 처음 동화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땐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낯선 길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는 딸의 말에 동화가 가진 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 전 비서실장은 “서점과 도서관에 가서 수많은 동화를 읽으며 ‘세상엔 좋은 동화와 나쁜 동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의붓어머니가 딸을 죽이려 하고, 또 그런 의붓어머니를 죽임으로써 복수하는 백설공주를 나쁜 동화로 꼽았다. 반면 “톨스토이가 쓴 동화들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묵직하게 전달한다”면서 “이렇게 상상력을 키워 주면서도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갖게 하는 이야기가 좋은 동화”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최 전 비서실장의 동화에는 오래도록 곱씹게 만드는 교훈이 담겨 있다. ‘아들 속의 아버지’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부하 직원의 실수로 발생한 금전적 손실을 자신이 메워 주고 부하의 허물을 덮어 준다. 최 전 비서실장은 “실제 일제시대 농업은행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일화가 담긴 이야기”라면서 “살면서 보고 느낀 것들에 상상력을 더해 가족을 위한 동화가 됐다”고 말했다. 요즘 두 번째 동화를 쓰고 있다는 최 전 비서실장은 “책이 나오면 전국에 있는 도서관으로 책을 보내 많은 부모와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글 사진 세종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7회 성북(북정마을 가는 길) 편이 지난 8일 성황리에 진행됐다. 매주 월요일 0시에 시작되는 치열한 예약전쟁을 뚫은 예약자 30명과 대기자 10명 등 모두 40명이 이날 10시 정각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 모였다. ‘노쇼’에 대비, 대기자를 뒀지만 무단결석자가 사라지면서 예약자와 대기자 구분 없이 정원이 40명으로 늘어난 지 오래다. 걷기 좋은 날씨, 더할 나위 없는 코스에 대한 기대감이 참석자들을 들뜨게 했다.베테랑 해설자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안내한 이날 코스는 한양도성 혜화동전시안내센터를 출발, 성북동 국시집~최순우 옛집~마전터 표지석~북정마을~성북동 비둘기 소공원~만해의 심우장~이종석 별장~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 및 복자사랑 피정의집~이태준의 수연산방~쌍다리식당~간송미술관의 순서로 이어졌다.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와 사연의 손때가 묻은 곳이다. 성북동의 명소이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과 성당이 이날 처음으로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에 공개됐다. 한국인이 창설한 최초의 수도원인 두 곳 모두 서울미래유산이다. 일행을 안내한 신부님의 입에서 “최초 공개”, “첫 방문”이란 말이 반복됐다. 또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일반인의 방문을 허용하는 간송미술관도 답사단이 보화각과 간송 흉상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설문에 응한 23명의 참가자는 “평소 가고 싶었던 곳, 가려운 등을 콕 집어 긁어주는 코스”, “2시간 30분도 짧은 듯”, “새록새록 앎이 즐겁다”, “신부님의 해설 감동, 해설자의 해설 만족”이라는 호평을 소감으로 남겼다.조선시대 혜화문 성곽 안과 밖은 딴 세상이었다. 성곽 안 동촌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동인들이 살던 양반마을이었지만 성곽 밖은 찢어지게 가난한 자내(字內) 산골이었다. 자내마을은 성곽을 지을 때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에서 조상할 조(弔)까지 97개의 글자 구간으로 나눠 축조한 구간을 말한다. 자내마을은 지명이 없이 구간의 이름이 주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이 구간 성곽의 안은 종로구, 바깥은 성북구 성북동과 동소문동으로 행정구역이 갈린다.해방 이후 서울의 행정구역은 종로구와 중구 등 옛 도심에 접한 지역은 사대문을 중심으로 남대문구, 서대문구, 동대문구라고 이름을 붙였고, 나머지 성저십리(성 밖 십리)마을은 도성의 동쪽과 북쪽이라는 뜻에서 성동구와 성북구로 정했다. 성북구는 말 그대로 성 밖 북쪽 마을이다. 한양도성은 성안과 성 밖 주민의 신분을 구분 짓는 엄격한 경계였다. 성곽이 해체되고, 삶의 공간이 확대되면서 성은 분리와 경계의 대상에서 삶의 질과 경관의 대상으로 변했다. 근현대 변혁의 물결 속에서 옛것이 사라져버린 성 안보다 오히려 성 밖이 각광받는 세상이 됐다. 성 안은 아파트와 빌딩이 점령했지만, 성 밖은 숲과 한옥과 골목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시인 김지하는 ‘오적’에서 성북동을 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장성, 고급공무원이 사는 도둑촌으로 지목했지만 덕분에 성북동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지 못하는 품격 있는 동네로 남았다. 성북동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조선시대 선잠단이 성북동의 정체성이다. 선잠단은 양잠(養蠶)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신성한 공간이다. 농업과 잠업은 중세 사회의 두 축이었다. ‘남경여직’(男耕女織)이라고 해 남자는 논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는 게 본분이라고 여겼다. 권농은 왕이, 권잠은 왕비가 직접 주관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혜화문 밖 마을의 최초 이주자는 숙정문과 혜화문을 지키는 군인가족들이었다. 농사 대신에 시전에서 판매하는 포목을 잿물에 빨아서 삶아 말리는 일(마전)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먹고살았다. 겨울철에는 메주를 담가서(훈조) 시전에 납품했다. 둘 다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영조의 생계조치이자 특혜였다. 지금의 성북초등학교는 빨랫감을 말리는 장소였고 북정마을은 메주를 쑤는 동네였다. 빨래골, 북적골이라는 지명이 전해졌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성곽마을 북정마을이 북적골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는 식민지의 수도 경성이 꼴 보기 싫어서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의 본거지였다.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이 깃들고, 이태준과 박태원에 이어 청록파(조지훈·박두진·박목월) 시인의 청록집이 만들어진 문화예술인촌이었다. 한국전쟁 후 피란민과 월남민들이 도성을 따라 판잣집, 토막집을 지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고급주택이 들어섰다. 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댄 채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이, 구준봉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부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성북동의 새 정체성을 만든 사람은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이다. 간송은 만석꾼 문화재 수장가요, 혜곡은 국립박물관 학예사 출신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고스란히 넘어갈 위기에 처한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을 지킨 혜곡에게 간송이 큰절을 올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인과 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충렬이 쓴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라는 두 권의 책을 종합해 보면 간신히 의문이 풀린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두 달여 전인 1950년 4월 16일 수장가와 학예사로 처음 인사를 나눴다. 흔히 ‘천학매병’이라고 알려진 ‘청자상감운학매병’을 간송이 국보특별전시회에 출품하자 같은 해 4월 30일자 서울신문에 혜곡이 ‘역사에 빛나는 도자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게 계기였다. 간송이 만남을 청했으나 이때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얼마 후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은 보화각(간송미술관)의 문화재를 평양으로 옮길 사람으로 혜곡과 소전 손재형을 지목했다, 혜곡과 소전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힐 때까지 목숨을 걸고 포장을 늦춰 문화재의 북송을 막았다. 이후 간송은 혜곡을 아우이자 애제자로 대했고 혜곡은 간송을 큰형님이자 스승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최순우는 간송이 감사의 마음으로 혜곡에게 선물한 필명이다. 혜곡의 집안 항렬자인 순박할 순(淳)에 간송 집안 아들항렬 돌림자인 비 우(雨)자를 합해 순우(淳雨)라는 필명을 만들어 준 것이다. 처음에는 최희순이라는 본명과 병행해서 사용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는 최순우란 이름을 본명처럼 썼다. 간송은 스승 위창 오세창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재 감식안과 필생의 안목을 혜곡에게 낱낱이 전수했다. 위창과 간송이 고졸 출신의 혜곡을 한국미의 순례자에 오르게 했다. 스물네 살 때 조선의 거부 40인에 들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뒤 위창으로부터 받은 ‘문화보국’의 기치를 마음에 심은 간송이 왜 하필 성북동에 최초의 사설박물관을 지었을까. 간송 또한 만해처럼 식민지의 수도 경성을 등지고, 일제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고자 했다. 1938년 4년여의 공사 끝에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박물관이 완공되자 위창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미술관 건물을 보화각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박물관의 본래 이름은 북단장(北壇莊)이었다. 1934년 수장고로 사용할 건물이 먼저 완성되자 위창은 북단장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일제가 사직단과 합친다며 선잠단을 해체하자 사람들이 박물관 터를 ‘북쪽에 있는 선잠단’이라는 뜻에서 북단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북동을 이루는 근대의 간송미술관은 결국 중세 선잠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송파(백제의 꿈) ●일시 : 9월 15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 :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포토 다큐] 600년 별빛 따라… 궁으로 숨어든 밤

    [포토 다큐] 600년 별빛 따라… 궁으로 숨어든 밤

    고궁이 새로운 ‘문화허브’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와 예술을 결합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옛 궁궐 안에서 펼쳐진다.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경복궁 별빛야행’은 한낮의 번잡함을 벗어난 고궁에서 품격 있는 왕실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힐링 프로그램’이다.은은한 별빛이 짙게 드리워진 경복궁. 손마다 청사초롱을 쥔 관람객들이 한껏 들뜬 기분으로 고궁 나들이에 나섰다. 조선 시대 궁중 의상을 차려입은 상궁이 옛 말투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흥례문(興禮門)의 중문이 열리고 동편 회랑(回廊)을 지나 별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가니 왕세자가 글을 읽던 비현각(丕顯閣)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일으킬 만큼 배우들이 당시 세자가 대신들과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었다.본격적인 투어를 하기 전 들른 곳은 궁궐의 부엌인 소주방(燒廚房)이다. “주상 전하께서 여러분에게 특별히 진찬연을 베풀라 하셨지요”라며 수라간 상궁이 맞았고 ‘도슭(도시락의 옛말) 수라상’이 차려진 방으로 안내했다. 도시락이라 하여 요깃거리일 줄로만 알았는데 임금이 즐기던 12첩 반상이었다. 궁중 나인의 수발 속에 즐기는 만찬은 정갈하면서도 담백했다. 더불어 마당에서 열리는 퓨전국악 공연은 먹는 내내 입맛을 돋워 주었다.식사 후 시작된 본격적인 고궁 산책은 이제껏 야간엔 공개하지 않았던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交泰殿)으로 이어졌다. 금남(禁男)의 구역이었던 궁녀들의 생활 공간을 엿보는 흔치 않은 기회다. 전각에 들어가기 전에 보여 주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사랑을 샌드 아트로 그려낸 영상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윽고 둘러본 각각의 방은 단아한 고가구와 소박한 꽃들이 아 기자기한 모습으로 조화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문양의 창호(窓戶)에서 퍼져 나오는 불빛이 은은하다. 내부 관람이 처음으로 허용된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은 경복궁 내전의 침전(寢殿)으로서 우리 한옥의 건축미가 돋보였다.후원을 거쳐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니 별빛야행의 백미인 경회루(慶會樓)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못을 앞에 두고 조명과 어우러진 누각은 고요함 속에 고고한 멋을 발하고 있었다. 사라져 버린 왕조의 순간들이 물위로 아른거리는 듯하다. 낮에는 볼 수 없던 고궁의 비경을 카메라에 담는 관람객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별빛 아래 펼쳐진 왕실 조경의 진수에 모두가 흠뻑 취한 듯했다. 별빛야행에 참가하려고 휴가를 냈다는 회사원 민경배씨는 “낭만적인 감흥을 많이 받았고 특히 늦은 밤에 구경해 보니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신발을 벗고 2층 누각에 오르니 힘 있게 술대로 내려치는 거문고 소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인왕산과 경복궁의 전각들은 물론 도심 속 빌딩의 야경까지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내려다보는 풍경이 사뭇 색다르다.행사의 마무리는 근정전(勤政殿)에서 진행됐다. 조명으로 꾸민 밤의 근정전은 고즈넉하면서도 화려했다. 2단의 월대(越臺) 위로 세워진 경복궁 정전(正殿)의 자태가 당당하다. 월대를 둘러싼 난간 기둥마다에는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과 십이지상 등이 배치돼 있다. 관람객들은 이곳저곳 놓칠 수 없는 장면을 둘러보기에 바쁘다. 학원 강사인 서지숙씨는 “조명 불빛 아래 화려함이 더해진 단청이 환상적”이라며 탄성을 터뜨렸다.조선 최고의 건축과 정원을 배경으로 운치를 더하는 ‘시간 여행’을 다녀온 초가을 밤. 600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궁은 우리 곁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글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치킨집 내려면 이곳에!”…50년간 모은 전국 업소 빅데이터 푼다

    “치킨집 내려면 이곳에!”…50년간 모은 전국 업소 빅데이터 푼다

    ‘750만개 정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어 단순 나열 탈피… 지역별 분포 등 세분화 ‘한옥 민박’ 등 각종 부가 사업 창출 기대한국관광공사는 외국인 전용 민박업과 한옥 체험(내외국인용) 민박업, 관광펜션업 인허가 정보를 주기적으로 제공받아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 서비스를 제공한다. 글로벌 지도서비스 업체인 ‘히어솔루션즈’도 국내 숙박업소와 음식점, 상점의 위치 정보를 이용해 자사의 지도서비스에 관련 정보를 해외에 소개한다. 음식점 창업을 준비하던 박모(43)씨 역시 서울 종로구의 요식업 개·폐업 현황과 영업 지속률 등 상권 자료를 분석해 지난해 말 시장 발전성이 가장 높은 곳에 숯불구이 가게를 창업했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소재인 업소·업종 인허가 정보를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정부 서비스가 개편된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민박 정보 서비스인 ‘한국판 에어비앤비’나 국내 관광객을 위한 ‘한옥민박’과 ‘맛집정보’ 등 다양한 부가 사업들이 창출될 것으로 보인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50년간 축적된 지방자치단체 인허가 정보 750만개를 민간에 개방하는 ‘지방행정 인허가 데이터 개방 시스템’(localdata.go.kr)을 개선해 6일부터 새롭게 운영한다고 5일 밝혔다. 이 시스템은 한국지역정보개발원이 17개 광역시·도와 226개 시·군·구 인허가 자료를 수집해 날마다 업데이트한 뒤 국민과 소상공인, 자영업자, 기업 등에 제공한다. 애초 인허가 데이터 개방시스템은 2015년에 구축됐지만 서비스 개선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편의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따라 지역정보개발원은 인허가 데이터 분류 체계를 개편하고 ‘공공데이터 제공과 활용’이라는 기본 목적에 충실하고자 시스템 전반을 개편했다. 기존 단순 나열식의 데이터 개방에서 탈피해 7개 분야 36개 그룹 189개 업종으로 세분화해 사용자 편의를 높였고, 지역별 업종 분포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지역별 검색도 가능해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이 상권 분석이나 시장성 검토 작업에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기업들은 전국 750만 업종·업소 정보를 빅데이터화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활용할 수 있고,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 서비스 개발 업무에도 활용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정보기술(IT) 산업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정윤기 행안부 전자정부국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지자체 인허가 데이터 품질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적 관심이 큰 인허가 관련 업종 정보를 더 많이 개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구시 2018 도시재생 뉴딜 공모사업 최다선정

    대구시가 도시재생 뉴딜사업 2018년 공모에 7곳이 선정되어 국비 총 680억 원을 지원받게 됐다. 이는 선정건수로는 전국 광역시 중 최대 규모이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정부 100대 국정과제로 2017년부터 연간 10조 원, 5년간에 걸쳐 총 50조 원의 사업비가 투자되는 정부 역점사업이다. 지난 4월 공모선정 계획 공고 및 7월 사업계획서를 접수하여 서면심사, 현장실사, 발표평가를 거쳐 8월 31일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도시재생특별위원회에서 전국 99곳을 최종 선정하였다. 이번에 선정된 7개 지역은 중구 성내동(경상감영공원 일원),북구 산격동(경북대학교 일원, 공공기관제안형), 중구 성내동(옛 구암서원 일원), 달서구 죽전동(구 달서구 보건소 일원), 서구 비산동(경부철로변 남측), 남구 이천동(상수도 사업본부 남측), 북구 복현동(경북대학교 동측, 공공기관제안형) 등이다. 이들 지역은 노후주거지를 개선하고 골목상권 활성화 및 청년 일자리 창출, 주민공동체 회복 등을 위하여 앞으로 5년간 국비 680억 원을 포함한 총 5120억 원 규모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도시 재활성화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선정된 사업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중구 성내동은 경상감영공원을 복원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 역사·문화 자산을 활용하여 문화·복지 공공서비스와 도심 관광 및 골목경제 활성화를 꾀한다. 북구 산격동은 복현오거리 일원에서 경북대학교와 공공이 함께 청년혁신공간 및 지역공헌센터를 조성하여 창업지원과 스마트 도시환경을 구축한다. 중구 성내동의 옛 구암서원 일원사업은 동산 한옥마을과 계산 지역을 지나는 골목을 기반으로 생활·문화·경제공동체를 형성하여 각종 활성화사업을 펼친다. 죽전동은 노후주거지에 행복주택, 창업지원시설 및 주민 복지ㆍ문화시설을 조성하여 마을공동체를 회복하고 활기를 불어넣는다. 서구 비산동은 스마트 공공임대주택 보급 및 햇빛나눔발전소 시스템 구축과 더불어 주민이 건강나눔공동체를 형성하여 주민 스스로의 마을관리시스템을 만든다. 남구 이천동은 대봉배수지 일원에 이천문화마당과 청년예술가 레지던시를 조성하고 그림자극 공연장 및 이천커뮤니티센터를 세워 노후주거지를 청년예술가들이 꿈꾸는 마을로 탈바꿈한다. 이번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선정으로 대구시는 지난해 말 시범사업으로 선정된 3곳과 더불어 모두 10곳에서 곳당 90 ~ 360억 원 규모의 마중물 사업비와 함께 총사업비 5808억 원이 투자될 예정이다. 지역의 쇠퇴한 구도심을 중심으로 노후주거지를 개선하고 주민공동체 회복과 더불어 청년 및 지역주민 일자리 창출을 통하여 도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우리시가 그동안 ‘시민이 함께 만드는 젊은 대구’ 창조를 위한 도시재생 비전을 갖고 주민역량을 모아 열정적으로 추진한 결과 도시재생 뉴딜사업 국비확보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며, “앞으로도 쇠퇴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주민이 행복한 도시재활성화를 위하여 도시재생사업에 시정의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고즈넉한 김포 전통한옥마을 숙박체험하러 오세요”

    “고즈넉한 김포 전통한옥마을 숙박체험하러 오세요”

    “고즈넉한 김포 전통한옥마을 숙박체험하러 오세요.” 경기 김포문화재단은 9월부터 김포아트빌리지 한옥마을에서 ‘전통한옥숙박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28일 밝혔다. 문화관 53㎡, 김포관 44㎡, 평화관 34㎡ 규모로 모두 3개실을 운영한다. 전통한옥숙박체험관은 현재 시범운영중으로 다음달부터 본격 문을 열어 연중 운영될 예정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취사는 안되고 조리된 식품은 가져와서 먹을 수 있다. 실내에는 호텔식 침구가 구비돼 있고 두꺼운 오리털 이불과 샤워실이 있다. 세면 편의용품 일체를 제공한다. 에어컨과 난방시설도 돼 있다. 오후 3시 입실해서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체크아웃하면 된다. 체험을 희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김포아트빌리지 홈페이지(www.gimpoartvillage.or.kr)에서 예약하면 된다. 1박시 요금은 4인 기준으로 주중 6만원, 주말에는 8만원이다. 1명 추가시 추가요금 1만원을 내면 된다. 앞으로 숙박체험 이용객들에게 한옥마을내 도예공방이나 한복·플라워공예·문인화·서각·인형 만들기 등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 프로그램과 연계해 운영할 계획이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추석에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을까”

    “추석에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을까”

    경기 시흥시는 다음달 8일과 15일 전통한옥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추석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28일 밝혔다. 능곡동 향토유적 제4호 영모재에서는 오는 15일 오전 우리 조상들이 추석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본다. 주말 프로그램으로 8일 생태 소품 만들기, 29일에는 승경도 놀이가 진행된다. 영모재는 광해군의 장인인 문양부원군 류다신 선생의 재실이고 고종22년, 1885년에 건립됐다. 죽율동의 향토유적 제7호 생금집에서는 8일과 15일 오후 추석 대표음식인 송편 빚기를 비롯해 강강술래와 차례 의미 배우기를 진행하며 추석의 절기적 특징을 살펴본다. 생금집은 일반가옥으로 금녕김씨 자손이 12대에 걸쳐 살아온 거주지다. 본체는 1913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황금깃털이 있는 닭을 키워 부자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번 프로그램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1차례당 10명을 모집한다. 오는 30일부터 문화바라지 홈페이지(www.culturesiheung.com)에 회차별 신청 접수하면 추첨해 참가자를 선정한다. 시흥에는 전통한옥 두 곳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배치돼 전통놀이 체험 등 상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매주 토요일에는 천연염색 체험을 비롯해 계피리스 만들기, 시흥 역사 배우기 등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는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영모재에서는 전통한옥 활용 특별 프로그램으로 비언어극 ‘성가족’을 공연할 예정이다. 자세한 문의는 시흥시 문화예술과(031-310-6703)로 하면 된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평양 출신 가수 현미 “이산가족 상봉 신청...두 동생 찾는다”

    평양 출신 가수 현미 “이산가족 상봉 신청...두 동생 찾는다”

    2015년 이후 중단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오늘(20일) 3년 만에 재개된 가운데 ‘MBC 스페셜’이 이산가족 상봉 특집 3부 ‘이산’을 방송한다. 20일 방송되는 ‘MBC 스페셜’에서는 70년 이산의 역사와 이산가족의 비극적 사연을 다룬 ‘옥류관 서울1호점’ 3부 ‘이산’편이 그려진다. 특히 평양이 고향인 실향민 1세대 가수 현미의 사연이 전해질 예정이어서 시청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가수 현미의 이산가족 찾기, 보고 싶은 명자야! 길자야! 올해로 데뷔 61주년을 맞은 영원한 디바 현미. 그가 삼시 세끼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바로 백미, 현미도 아닌 평양냉면. 평양이 고향인 실향민 1세대 가수 현미에게 평양냉면은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울푸드다. 현미(본명 김명선)는 평양냉면을 먹을 때마다 6.25 전쟁 중 헤어진 두 동생 김명자, 김길자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되새긴다.“우리 집이 폭격 때문에 반이 날아갔어요. 할머니가 그럼 6살, 9살은 둬라. 나중에 봄에 데려가라. 언니, 오빠, 나, 동생 둘, 부모님만 평양에서 나왔어요. 피난 가라고 했으면 악착같이 밤새 가서 (동생들까지) 데리고 갔죠. (정부가) 대동강만 건너라. 일주일만 피해 있어라. 일주일이 68년이 된 거예요.”-현미 인터뷰 中 남북 간 정식 교류가 없던 1998년, 현미는 북에 있는 동생 길자를 48년 만에 만나게 된다. 제3국의 중개업자를 통해 연락이 닿은 길자와의 만남은 결코 쉽지 않았다. 북한 당국의 엄격한 신원 확인과 삼엄한 감시 아래 현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들은 그 난관을 어떻게 이겨내고 만날 수 있었을까? 극적인 상봉의 순간은 당시 MBC 다큐멘터리로 방영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20년이 흘렀다. 현미는 상봉의 후유증으로 우울증까지 앓았다. 때만 되면 이산가족 상봉 신청서를 내던 언니와 오빠는 이제 세상에 없다. 살아남은 가족을 대표해 대한적십자사를 찾은 현미! 떨리는 손으로 직접 상봉 신청서를 작성한 현미는 과연 명자와 길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70년의 기다림, 이산가족 헤어져 흩어진, ‘이산가족’. 이번 제21차 상봉 행사의 최종 경쟁률은 569대 1이었다. 신청 대기자들에게 상봉 재개 소식은 희망이자 고통이다. 20차례의 상봉 행사를 통해 2천여 명의 이산가족이 헤어진 혈육을 만났지만 이후 재상봉은커녕 서신 왕래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대한적십자사에 상봉 신청을 한 13만여 명 중 과반수는 사망했고, 생존자 대부분은 70세 이상 고령자다. 그들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백령도(白翎島). 본래 황해도에 속했던 이곳은 뱃길로 30분이면 북한에 닿는다. 인천에서는 쾌속선으로 4시간이 걸리는 서해 최북단이다. “보고 싶고 그리운 거 그건 뭐 말로 할 수도 없고...이제 만나도... 딸이 엄마도 모를 거고 내가 딸을 모를 거고요.” - 최응팔 할머니 인터뷰 中 얼굴이 하얗고 곱던 소중한 첫 아이. 네 살 된 아이의 모습이 북에 두고 온 큰딸(김신애)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그렇게 바다 건너 지척에 서로를 둔 채 70년이 흘렀다. 93세 노모는 큰딸이 사는 고향 땅이 보이는 백령도를 70년 동안 떠나지 못했다.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20년 전 처음 상봉 신청을 한 후 자나 깨나 그려본 큰딸과의 재회. 이번에는 늙어버린 딸, 신애를 품에 안아볼 수 있을까? 최응팔 할머니는 고향 땅이 보이는 심청각에 서서 오늘도 그리움을 노래한다. ■ 그리움을 먹다, 우리 곁의 냉면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냉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장인. 마지막 평양냉면 1세대 창업자 박근성 옹이 세상을 떠났다. 평양 모란봉 냉면집의 장남이었던 그는 1951년 1.4 후퇴 당시 혈혈단신으로 피난을 온다. 그는 피난민이 모여 살던 대전 숯골에 자리를 잡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통을 지켜왔다. “젊었을 때 자식들 못 보게 돌아서서 많이 울었어요. 그런 모습 볼 때면 불쌍해서 나도 눈물이 나오더라고.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으면 저렇게 울까? 그러다 고향에 한 번 못 가보고 저렇게 돌아가셨잖아.” - 부인 한옥산 인터뷰 中 부모님의 생사조차 알 수 없어서 제사도 지낼 수 없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이면 그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목 놓아 울었다. 매일 냉면을 만들며 부모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박근성 옹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우리 곁에 그가 남긴 냉면 한 그릇. 이산과 실향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냉면을 먹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현실은 무엇인가?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가 담긴 박근성 옹의 마지막 냉면 한 그릇을 전한다. 한편 이산가족 상봉 특집 ‘MBC 스페셜’은 이날(20일) 오후 10시 50분 방송된다. 사진=MBC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전주 마중길 간판 개선해 첫인상 바꾼다

    전북 전주시가 마중길 주변 상가 간판을 정비해 시의 첫인상을 개선하기로 했다. 전주시는 내년부터 국비와 지방비, 자비 등 4억 4000만원을 들여 마중길 구간 500m 주변 상가 65개소의 낡고 난립한 간판 146개를 정비하기로 했다고 19일 밝혔다. 이 사업은 2019년도 행안부 간판개선 시범사업 공모사업에 2년 연속 선정돼 국비를 지원받아 추진한다. 시는 노후된 간판을 철거하고 한옥마을과 풍남문 등 전주시를 상징하는 전통보전구역과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교체할 계획이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쾌적한 인상을 심어주고 전주역 일대 주변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주시 관계자는 “시와 마중길 주변 상인, 주민 등이 합심해 행안부 간판개선시범 공모사업에 선정된 만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간판을 설치해 전주역 주변을 전국적인 명소로 만드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처용무 춤신춤왕’ 종로구청장

    ‘처용무 춤신춤왕’ 종로구청장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궁중무용인 처용무를 선보인다. 무형문화재 제39호이자,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지정된 춤이다. 서울 종로구는 15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제5회 시민들과 함께 하는 궁중무용 여민(與民)마당을 개최한다고 13일 밝혔다. 궁궐들이 모여 있는 종로에서 궁중무용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2014년부터 ‘궁중무용 여민마당’을 개최하고 있다. 소수 전문예술가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궁중무용도 대중예술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에서 시작했다. 김 구청장은 총 4부로 이뤄진 공연 중 3부에서 직접 무대에 올라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을 공연한다. 학춤과 연화대 춤, 그리고 처용무를 한 무대에서 뽐내는 것이다. 2010년부터 최근 6·13 지방선거까지 내리 3선한 김 구청장은 종로의 정체성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표현하는 한옥, 한복, 한식, 한글에 주목해 왔다. 전통무용 공연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김 구청장은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처용무를 직접 보여드리게 됐다”면서 “어렵게만 느껴지던 분야이지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생활예술로 정착되는 작은 디딤돌로 여겨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부채로 북촌 한옥마을 사생활 지켜라” 학점 부담 벗으니 아이디어가 터졌다

    “부채로 북촌 한옥마을 사생활 지켜라” 학점 부담 벗으니 아이디어가 터졌다

    “무작정 관광객 통행을 막기보다는 한옥의 창문을 부채로 가리고 사진 촬영을 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요?”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6층 강의실에는 북촌 한옥마을을 옮겨 놓은 듯한 모형이 등장했다. 서울과학기술대와 성균관대, 한성대 학생 6명으로 꾸려진 ‘가디언즈오브북촌’ 팀이 “관광객의 무분별한 사진 찍기에 몸살 앓는 북촌 한옥마을 문제를 해결할 비법을 보여 주겠다”며 가져온 모형이었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2가지다. 우선 한옥 대문에 적외선 센서를 붙여 관광객이 근접하면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카메라 아이콘과 ‘X’ 표시를 공중에 쏴 사진 촬영이 안 된다는 점을 인식시킨다. 또 한옥 거주민들이 주로 창문 등 사생활 노출 위험이 있는 부분의 촬영을 꺼린다는 점에 착안해 한옥 창문 사진을 새겨 넣은 부채를 관광객에게 판매하고 부채로 창문을 가린 채 촬영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발표를 맡은 공성호(성균관대 화학공학 3)씨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주로 관광객 통금시간을 정하거나 출입을 막는 방식 등을 생각했는데 관광객과 거주민 모두 선호하지 않았다”면서 “공존 해법을 찾아 본 것”이라고 말했다.이 학생들은 성균관대·서울과기대·한성대가 공동 주최한 ‘융합기초프로젝트’ 참가자다. 대학 3곳의 재학생 69명이 꾸린 13개 팀은 5주간 구도심인 종로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역 난제를 발굴해 이를 해결할 시제품을 만들었고, 이날 선보였다. 성균관대가 학생 중심의 인문·공학·예술 융합 교육 과정인 ‘C-스쿨’의 핵심 프로젝트로 2014년 처음 시작했는데 올해부터 인근의 서울과기대와 한성대까지 함께하기로 했다. 종로 지역 지하철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곧 진입할 열차의 객차별 혼잡도를 표시해 탑승객의 분산을 유도하는 ‘지하철 신호등’이나 사직동에 많은 노후 주택의 지붕 기울기와 진동을 센서로 감지해 붕괴 위험 정도를 LED로 표시해 주는 아이디어 등 참신한 발상이 많았다. 이 중 가디언즈오브북촌 팀이 대상을 받는 등 8개 팀이 수상했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배상훈 성균관대 대학교육혁신센터장(교육학과 교수)은 “강의실에서 교과서만 파지 말고 사회에서 겪을 법한 경험을 미리 해 보도록 하자는 취지로 기획했다”고 말했다. 기업에 취업하면 학교나 전공, 성별, 나이 등 다양한 배경의 동료와 일해야 하는데 정작 대학에서는 그럴 기회가 적다는 것이다. 69명의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온전히 프로젝트에 쏟아부었지만 학점은 1점도 이수받지 못한다. 배 교수는 “학점이 걸리지 않아야 상상력 가득한 작품이 나오는 역설이 있다”고 말했다. 학점이 걸리면 학생들은 출제자 의도를 파악해 ‘실패하지 않을 법한 뻔한 답’만 써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해에는 산불 끄는 기계 아이디어를 내놓은 팀이 우승했는데 산꼭대기에 열감지 폴대를 세워 360도 회전하며 감시하고, 산불이 나면 로켓을 쏴 순간 진공상태를 만들어 진화한다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당장 상용화 가능성을 떠나 상상력을 높게 평가받은 덕택에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아이디어를 낸 학생을 인턴으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할 정도였다고 한다.20대 초반 청년들은 특정 주제에 호기심만 느끼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 가며 해결책을 찾았다. 멘토로 참여한 교수들은 “대학의 역할은 단순히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뽑고 마는 게 아니라 교육을 통해 동기부여해 주는 것임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경세·문장 모두 탁월… 임진왜란 위기 헤쳐나간 명재상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경세·문장 모두 탁월… 임진왜란 위기 헤쳐나간 명재상

    낙동강 물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감싸고 돌며 수려한 긴 모래사장을 형성한 마을, 고색창연한 한옥과 전망 좋은 정자가 즐비한 마을, 산세가 험하지 않고 그늘이 없이 밝은 마을, 바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이다. 조선 명재상으로 꼽히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배출한 곳이다.#이름을 짓기 어려운 큰 그릇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상촌 신흠은 서애를 수행했을 때 기억을 이렇게 술회했다. “공은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는 이유로 반드시 나에게 붓을 잡으라고 명하고 입으로 불러주어 문장을 이루게 하였다. 줄줄이 이어지는 문서나 편지를 비바람 몰아치듯 신속히 지었는데, 붓이 멈추지 않고 문장에 점 하나 더하지 않았어도 찬란하게 격을 이루었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까지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우리가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을 선현 중에는 경세에 능했던 인물도 있었고, 문장에 능했던 인물도 있었고, 학문에 능했던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한 인물이 두 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커다란 능력을 드러낸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문장이나 학문에 능한 사람은 경세나 행정에 어둡고, 경세에 밝은 사람은 문장이나 학문이 얕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애는 그런 상식에서 예외적인 인물이다. 영의정,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경세가이자 ‘맹자’의 문체를 체득한 이름난 문장가였다. 주자학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당시 학자들이 이단시하던 육상산과 왕양명의 학설에까지 관심의 범주를 넓혔던 학자이자 병법에 밝은 실무형 이론가이기도 했다.#퇴계 수제자… 병법에도 밝은 실무형 이론가 퇴계 이황의 수제자를 꼽을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서애다. 21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퇴계의 문하에 들어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서를 배웠는데, 퇴계는 그를 만나 보고 나서 하늘이 낸 인재라고 찬탄했다 한다. 퇴계의 예언대로 서애는 임진왜란 당시 국가가 위난에 빠졌을 때 크게 공을 세웠다.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이 땅을 벗어나시면 조선은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선조는 여차하면 중국으로 넘어갈 요량으로 국경과 가까운 곳으로 피란하려 했다. 조정의 일부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지만 서애는 극구 반대해 자칫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민심의 동요를 잠재웠다. 선조가 장수로 삼을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했을 때는 지방 수령으로 있던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해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를 역전시키게 만들었다. 소극적이던 명나라 원군을 설득해 끝까지 왜적을 몰아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명나라의 신병법인 기효신서법을 배워 군사들을 조련했고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사력 향상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파에 따라 서애의 활약상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이 몇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그의 탁월한 안목과 기여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사상의 정수가 담긴 잡저 서애의 문집은 가장 먼저 ‘잡저’(雜著) 부분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서애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잡저는 송(宋)나라 역사를 읽으면서 당대에 귀감이 될 만한 사건들에 대한 평설(評說)을 기록한 ‘독사여측’(讀史測) 등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정주학(程朱學) 계통의 이론을 담은 ‘주재설’(主宰說) 등과 양명학을 비판하는 ‘왕양명이양지위학’(王陽明以良知爲學) 등은 서애의 학문적 사상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글들이다. 일견 여타의 정주학자들과 비슷한 견해를 보이지만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읽어 보면 양명의 주장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은연중 보여 주기도 한다. “왕씨의 의도를 잘 살펴보면, 대개 당시 세상의 학문이 외면적인 것으로만 치닫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결같이 본심(本心)을 위주로 하여, 무릇 마음을 써서 강구하는 행위를 모두 행(行)이라고 여겼던 것이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지나치게 곧게 된 경우이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서애는 부단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계속해서 윤허하지 않았다. “의리상으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였으나 정으로 볼 때에는 친구 사이와 같았다. 나만큼 경을 잘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 당인들은 집요하게 그를 공박했다. 마침내 그가 57세이던 1598년에 파직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때 관작을 삭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애초에 벼슬에 초연했던 서애로서는 이런 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전란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유비무환의 교훈을 담은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다양한 사실을 담고 있어 숙종 연간에 이미 일본에서 입수해 출판하기도 했다. 이후로 다시는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지만, 나라를 향한 서애의 충정은 죽는 날까지 식지 않았다. “나라 위한 마음은 늙어서도 그대로라 세모(歲暮)에 빈산에서 비장하게 읊조리네 노년이라 매사에 감회가 일어나니 무단히 눈물이 홀연 옷깃을 적시네.” #사관(史官)도 놀란 조문 행렬 대신이 세상을 떠나면 사흘 동안 조정은 공무를 중지하고 시장은 문을 닫는 것이 전례였다. 서애가 고향 풍산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는데, 시장 상인들은 애도의 뜻으로 하루 더 문을 닫았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 사관의 평이 흥미롭다. 1000여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한때 서애가 살았던 묵사동 빈집에 모여 조곡(弔哭)을 하였던 일을 전례가 드문 일이라고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인물이 조정에서 발자취가 끊어졌고 상(喪)이 천리 밖에서 났는데도 온 성안 사람들이 빈집을 찾아 모여서 곡을 하였으니, 아마도 시사(時事)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후임으로 수상(首相)이 된 자들이 모두 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추억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 역시 불쌍하다.” 선조실록은 북인이 중심이 돼 기술했기 때문에 서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내용이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사람들이 서애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서애집’은 서애집(西厓集)은 조선 선조 조의 명재상이었던 류성룡의 시문집이다. 원집(原集) 20권 10책, 별집(別集) 4권 2책, 연보(年譜) 3권 2책 등 총 27권 14책으로 구성됐다. 인조 11년(1633년) 봄에 합천 해인사에서 원집과 별집을 합쳐 초간했다. 고종 31년(1894년) 가을에 하회의 옥연정사에서 연보를 추가 중간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82년에 번역, 출간했다. 류성룡의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목포·군산·영주 근대 역사공간, 문화재 등록

    목포·군산·영주 근대 역사공간, 문화재 등록

    마을·거리 등 선·면 단위로는 최초 “경관 보존 용이… 역사 교육 활용 이점”한국 근대 문화유산이 밀집해 있는 전남 목포, 전북 군산, 경북 영주의 역사 공간이 등록문화재가 됐다. 지금까지 개별 건축물이나 문헌 등 점(點) 단위만 문화재로 등록됐지만 마을, 거리 등 선(線)·면(面) 단위가 문화재로 등록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군산 내항 역사문화공간’,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3곳을 각각 등록문화재 제718~720호로 고시했다고 8일 밝혔다. 등록문화재는 국보나 보물 등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이 지난 근대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점 단위로 문화재를 등록할 경우 지역의 역사와 문화, 당대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을 보존하기 어려웠다”면서 “선과 면 단위 등록제도를 통해 공간에 관련된 스토리와 맥락에 따라 문화재를 입체적으로 관리하고 동시에 역사 체험 교육 등에 활용하는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 11만 4038㎡로, 1897년 개항 이후 격자형 도로망을 따라 목포가 근대도시로 발전한 과정과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목포의 시작을 알리는 목포진지를 비롯해 옛 목포 일본영사관과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옛 목포공립심상소학교 등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아우르는 근대 건축 유산이 자리잡고 있다. 군산 내항 역사문화공간에는 1899년 대한제국 개항 이후 초기 군산항의 모습에서부터 일제강점기 경제 수탈의 아픈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이 모여있다. 등록 면적은 장미동 일대 15만 2476㎡다. 1920~30년대에 준공된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 내항 호안시설(석축 구조물), 내항 철도와 1970년대 건물인 옛 제일사료주식회사 공장, 경기화학약품상사 저장탱크 등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1941년 영주역이 만들어지면서 배후에 조성된 영주동, 하망동 일대 2만 6377㎡다. 1930∼60년대 건물인 옛 영주역 5호 관사와 7호 관사, 영주동 근대한옥, 영광이발관, 풍국정미소, 제일교회 등이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첫 국정 미술교과서 ‘도화임본’ 문화재 된다

    첫 국정 미술교과서 ‘도화임본’ 문화재 된다

    한옥성당 ‘통영 황리공소’와 등록 예고 군산 중국집 ‘빈해원’ 등 7건 문화재 등록우리나라 최초의 국정 미술교과서인 ‘도화임본’(圖畵臨本)과 한옥성당 ‘통영 황리공소’가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6일 두 유산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도화임본은 1906년 제정된 보통학교령 시행규칙에 따라 학부(學部·대한제국 시기 교육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에서 편찬해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정 미술교과서다. 1907~1909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화임본에는 당시 한국인의 생활 모습과 생활 용품, 자연 풍경을 묘사한 그림들이 수록돼 있다. 서양화법을 도입하면서도 민족의 주체의식이나 미적 감각이 자연스럽게 표현돼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경남 통영의 황리공소는 포구라는 지리적 여건상 일찍부터 교역과 군사의 중심지로 발달한 황리 지역에 자리잡은 이후 영남 남부 해안 지역의 천주교 거점 역할을 했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교회를 일컫는다. 1934년에 건립된 황리공소는 처음부터 교회 기능에 맞게 계획해 세워진 것인 만큼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근대기 천주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한옥이 변모해 가는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화재청은 또 1908년 군산항에 군산세관의 본관으로 건립된 ‘구 군산세관 본관’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독일인 신부 알빈 슈미트(1904~1978)가 설계한 ‘칠곡 왜관성당’, 군산 중국집 ‘빈해원’, 1957년 건립된 관공서 건물인 ‘파주 구 교하면사무소’,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에 완공된 후 전남대학교 본부로 사용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 등 총 7건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남북 공동 DMZ 세계유산 등재, 꼭 해보고 싶습니다”

    “남북 공동 DMZ 세계유산 등재, 꼭 해보고 싶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유독 문화재와 관련한 굵직한 사안들이 쏟아졌다. 지난 6월 경북 안동 봉정사 등 한국 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는가 하면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20년 간의 복원을 마치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2012년 소유권을 되찾은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난 5월 113년 만에 태극기를 게양했다.지난해 8월 취임한 김종진(62) 문화재청장은 국내외를 오가며 문화재 역사상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된 현장에서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취임 1년을 하루 앞둔 6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김 청장은 최근 문화재청이 이룬 성과에 대해 “최대한 국민과 현장의 의견을 반영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문화재청 직원들과 매 사안마다 협력해 준 관계자들 덕분에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김 청장은 최근 국내 전통 사찰 7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에 큰 의미를 뒀다. 세계유산 등재 시 관광 자원으로 큰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맺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 참석했던 김 청장은 “앞서 ‘한국의 서원’과 ‘한양도성’이 세계유산 등재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긴장이 됐지만 현장에 가기 전에 왠지 등재될 것만 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한 스페인을 비롯해 중국 등이 지지 발언을 해 준 데다 외교부의 협력이 뒷받침되면서 등재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들이 종교 활동을 하는 동시에 일반인들의 휴양 공간으로도 이용되는 복합 승원의 의미를 짚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국내외적으로 가치를 알릴 예정”이라면서 “(한국의 산사가) 장차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좋은 경관과 마음이 차분해지는 분위기를 동시에 선사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남북 간 화해 분위기 덕분에 자연스럽게 남북 문화재 교류에 대한 안팎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향후 북한과의 교류·협력 사업을 통한 한반도의 문화유산 보호 및 관리에 있어 문화재청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는 시점이다. “지난 5월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 가입 30주년 기념 국제세미나’ 참석차 방한했던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강원 철원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했었어요. 궁예도성 등 문화유산과 더불어 자연유산까지 두루 갖춘 DMZ를 보면서 남북이 향후 공동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하면 유네스코 정신에도 부합하고 여러모로 의미가 클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해당 지역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지뢰 제거 등의 사전 준비 과정이 필요한데, 그 행위 자체가 평화를 상징하는 데다 역사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저희로서도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 꼭 해 보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문화재청은 안동 임청각이나 경복궁 흥복전, 덕수궁 광명문 등 일제가 훼손한 문화재의 원형을 복원하는 한편 항일 독립 문화유산을 지속적으로 문화재로 등록하고 있다. ‘일제 주요 감시 대상 인물 카드’가 그중 하나다. 일제강점기에 사상이나 보안과 관련해 감시해야 할 인물 4858명에 대해 작성한 신상 카드다.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였다가 후일 친일 활동을 한 이광수, 주요한, 최남선 등이 포함됐다. 문화재청은 이를 조만간 문화재로 등록할 방침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인 안동 임청각(보물 제182호)은 1942년 일제가 마당에 철도를 놓으면서 가옥과 주변 경관이 심각하게 훼손됐습니다. 2023년까지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 이전 시점을 기준으로 임청각과 주변 환경을 복구할 예정입니다. 특히 내년이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인 만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항일 독립 유산을 지속적으로 발굴할 예정입니다.” 문화재는 어렵고 딱딱하다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국민들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도 이어 가고 있다. 우선 문화재 안내판에 담긴 용어를 알기 쉽게 바꾸기 위해 정비 대상을 선정하고 내년까지 작업을 마칠 계획이다. 올 연말에는 가족들이 함께 가 볼 만한 전국의 역사 여행지 정보를 담은 ‘아이와 함께 하는 문화유산 가이드북’(가칭)도 출간한다. “그간 문화재 안내판이 다소 어렵고 전문적인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관람객이 많이 찾는 서울 소재 고궁과 조선 왕릉, 경주·부여 등 고도(古都)에 있는 안내판을 중심으로 새로 정비할 계획입니다. 특히 문화재에 관심 있는 시민자문단이 직접 정비에 참여하도록 하는 등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현장의 생생한 의견을 반영할 예정입니다.” 김 청장은 임기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에 대해 “문화재가 국민들 삶 속에서 친근하게 살아 숨쉴 수 있도록 다양한 접점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문화재가 있기 때문에 국민에게도, 지역에도,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는 공감대를 높이고 싶습니다. 한옥마을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주처럼 역사와 경관이 어우러진 각 지역의 특정 공간은 문화 자원으로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활용 프로그램을 늘리고 지역 주민과의 협력이 잘 이뤄진다면 그 지역의 경쟁력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문화 자원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공간을 가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문화재청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봅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1939년 개업한 한일관…우리의 식문화史 ‘고스란히’

    강남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은 통틀어 7곳이다. 음식점으로는 한일관(압구정로)과 영동스낵카(도곡로) 등 2곳이 있다. 영동스낵카는 1972년 이동식 식당으로 개업한 강남 개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당이다. 이 밖에 추억의 사진관 허바허바사진관(테헤란로)과 1919년 개업한 홍성균한의원(강남대로)이 시민생활분야에서 인정받았다. 태권도 보급의 요람 국기원(테헤란로)은 문화예술 분야에서, 한남대교와 양재천은 도시관리분야에서 각각 이름을 올리고 있다. 강남을 ‘한국현대사의 얼굴’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대한민국 서울에서 차지하는 강남의 위상에 비하면 미래유산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1970년에 본격화한 강남의 문화사가 그만큼 일천하다는 의미다. 이날 답사단이 찾은 한일관은 1939년에 개업, 3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는 갈비전문 식당이다. 종로3가 허름한 한옥을 개조해 창업주가 화선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을 때는 국밥, 내장 구이, 추어탕을 팔았다. 1945년 한일관으로 상호를 변경한 뒤 종로 1가 피맛골로 이전했고 60년대 후반부터 육수불고기를 팔기 시작했다. 한일관은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식문화사 측면에서 지속적인 관리와 보존이 필요한 미래유산으로 인정받았다. 한일관과 함께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된 해방 이전에 개업한 서울 시내 주요 음식점은 이문설농탕(1904년 개업, 설렁탕, 종로구 우정국로), 진아춘(1925년, 중식, 종로구 대명1길), 형제추어탕(1926년, 추어탕, 종로구 평창문화로), 용금옥(1932년, 추어탕, 중구 다동길), 은호식당(1932년, 꼬리곰탕, 중구 남대문시장4길), 청진옥(1937년, 해장국, 종로구 종로), 문화옥(1940년, 설렁탕, 중구 창경궁로), 청일집(1945년, 빈대떡, 종로구 종로) 등이 있다. 하나같이 종로구와 중구에 몰려 있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중국대학생 51명 ‘대프리카’에서 뜨거운 여름나기

    중국 대학생들이 대프리카의 도시 대구를 찾아 뜨거운 여름 나고 있다. 천저우(21)씨 등 중국 장쑤성 소재 롄윈강회해공학원 대학생 51명이 지난 16일부터 대구의 영진전문대에서 여름방학 연수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다. 이들은 다음달 13일까지 영진전문대학교에서 한국어수업, 한복입기, 한지공예와 태권도와 드론 체험, UCC제작 등을 진행한다. 또 대구근대골목과 강정보 투어, 대구박물관과 동화사 방문에 이어 현대중공업, 포항제철 견학, 서울 경복궁과 북촌 한옥마을, 부산 국제시장 등을 둘러볼 계획이다. 연수기간 중에 촬영한 동영상으로 UCC제작, 실습을 갖고 수료식 때 발표한다. 장쑤성 쉬저우시 장쑤건축직업전문대학 재학생 등 36명도 이 대학교에서 단기연수중이다. 지난 22일부터 시작된 연수는 실내인테리어 전공 교육과 대구근대골목 보전 사례 탐방, 기업체 견학에 나선다. 난징시 난징심계대학 재학생 등 25명은 다음달 5일부터 17일까지, 광둥성 선전지역 고교 재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80명은 지난 18일부터 다음달 9일까지 3차례에 걸쳐 영진을 방문한다. 현대중공업 공장견학을 다녀온 팡쨔하오(19세·회해공학원)씨는 “중국에서 멀지 않은 한국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번 연수에 참여하며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게 됐고, 한국 선진기술과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등 한 달이라는 짧지 않는 시간에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 될 것 같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천저우씨는 “대구 날씨는 소문대로 많이 덥지만, 제가 살고 있는 롄윈강과 비슷해 적응하기엔 괜찮다. 한복체험과 한국전통 예의문화 수업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고 특히 한복을 입고 절하는 방법을 배워보니 이것이 한국 문화의 상징이라는 것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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