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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인구 565년간 100배 늘어

    서울 인구가 처음 기록된 1428년부터 최대를 기록한 1993년까지 565년동안 100배가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24일 선사시대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서울 인구의 규모와 구성, 인구변동의 배경과 원인, 사회적 변화양상 등을 분석한 ‘서울인구사’를 발간했다.1417쪽 분량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1428년 세종실록에 기록된 당시 한양도성 안팎의 인구는 10만 9372명이었다. 이로부터 565년이 지난 1993년에는 서울의 인구가 최대로 늘어 서울통계연보에 1092만 5464명으로 기록됐다. 원영환(68·강원대 명예교수) 편찬위원장은 “세종실록에는 태종 때인 1409년 실시된 호구조사 결과 나온 호(戶)수가 기록돼 있지만, 가구수로는 당시 인구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1428년에 와서야 호수가 아닌 사람수가 기록됐다.”고 말했다. 서울인구사에 따르면 서울시내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을 토대로 구석기 시대에는 32개 유적 32곳의 집터에 128명, 신석기 시대에는 62개 유적 1034개의 집터에 4650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됐다. 1993년을 정점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서울의 인구는 지난해 1028만 7847명이었으며,2030년엔 902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4×6배판으로 만든 서울인구사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시청역에 위치한 서울시 정기간행물 판매처 ‘하이서울 북스토어(2171-2126)’와 교보·영풍문고 등 시내 주요서점에서 2만 5000원에 판매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국보1호 바꿔야 하나(사설)

    국보1호 「서울남대문」을 바꾸자는 논의가 세간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남대문보다 문화재적 가치와 상징성이 더 높은 「훈민정음 원본」이나 「경주 석굴암」으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는 대안까지도 나오고 있다.이러한 논의는 최근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국보1호 변경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공론화(공논화)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남대문이 국보1호로 적합치 않다면 국민의 여론을 들어 바꿀 수도 있는 일이다.그런데 이같은 논의에는 국보1호가 「국보중의 국보」라는 서열의식이 전제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국보의 지정번호가 문화재의 가치나 중요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국보지정은 행정편의상 순번이 부여되었을 따름이다. 그것을 굳이 가치와 상징성에 따라 순번을 바꾸기로 한다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 작업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일반의 논의중에는 일제가 우리문화재를 격하시키려고 일부러 남대문을 국보1호로 정했다던가,심지어 남대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화재라는 잘못된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남대문이 초라하다』는 격하움직임조차 보이고 있음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서울 남대문은 태조 5년(1396)에 처음 세워졌고 현재의 건물은 세종때(1448) 개축한 것으로 540년이나 된 옛 건축물이다.오랜 연대와 함께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대표격이며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한양도성의 정문으로 도성의 관문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성도 강하다. 다만 지정명칭인 「서울남대문」을 본래 이름인 「숭례문」으로 바꿔주는 일은 필요하다고 본다.국보1호 변경논의는 자칫하면 문화적 소아병에 빠질 우려가 있는데다 소모적 논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 뛰어난 축성술(백제를 다시본다:18)

    ◎토성 쌓는 판축기법 5세기에 발달/진흙·마사겹겹이 다져… 노동력 절감/통일신라에 전수… 일본에도 전해져/후기 들어 돌·흙 함께 사용… 안팎겹쌓기 등 공법 다양화 백제는 처음 창례성에 도읍하였고,이어서 하남창례성 혹은 한성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반기까지 였다.이후 웅진(오늘날 공주)과 사비(오늘날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익산지역에 별도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낭군과 말갈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또 한군현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축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 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것으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이러한 강안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잦은 외침에 대비 백제가 고구려의 대대적인 남침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내놓고 새로이 마련한 도읍이 웅진이었다.지금의 공산성이 그것으로 후대의 보수와 개축이 있었음에도 백제 도읍지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공주에서 공산성의 외곽인 시가지까지 나성을 갖춘 새로운 형식의 도성제도가 있었는지는 학자간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계획된 천도에 의해 서기 6세기 전반에 마련된 사비도성은 산에 의지한 산성과 거기서 뻗어내려 온 시가지를 감싸고 도는 나성을 마련함으로써 우리나라 성곽 발달에 있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한 것임이 확인된다.이러한 나성을 가진 도성제도는 고구려의 경우 장안성을 쌓은 6세기 중엽의 일이었다.어쩌면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결합한 도성제도는 백제인에 의해 처음 고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경우 산성에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을 가진 뒤에도 그 외곽에 또다른 산성을 쌓아 이중·삼중의 방어망을 구축한 도성제를 바탕으로 번영하였다.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굳건한 방어망이 백제인들에게 안일한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후세에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백제의 성곽들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하여 흙으로 켜쌓기하는 이른바 판축의 기법으로 축조한 것들이 많다.본디 이 판축기법은 중국에서 일찍이 발전된 것이다.일정한 구간을 나누어 기둥을 세우고 구간마다 칸을 마련하여 진흙과 마사토를 교대로 부어가며 길다란 대나무로 일일이 다져쌓는 것이었다. 백제에 있어서는 최근에 조사된 여러 개의 성들에서 이러한 공법으로 축조된 성벽이 많이 확인되었다.특히 처음에는 다지다가 차츰 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만든뒤 구간 사이에 돌로 가장자리를 쌓아 기단을 만들어 그 위를 판축하는 특유의기술이 공산성이나 부여의 나성,그리고 지방의 커다란 성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산성등서 확인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내외겹축)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외축내탁)이 확인되고 있다.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먼저 백제의 판축기법은 거의 그대로 통일신라로 이어졌다.신라는 돌로 겹쌓는 방법이 대부분이었으나 백제의 판축기법을 받아들여 낮은 위치나 험하지 않은 산성에 그대로 적용했다.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흙으로 쌓는 성은 돌로 쌓는 성보다 공사비가 약 3분의 1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한다.적은 노동력으로 훨씬 크고 웅장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이 공법이 점차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추세는 더욱 후대에까지 이어졌다.고려시대 주요한 지역에 축조된읍성들은 거의 전부 판축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또 조선왕조의 도성이었던 한양도성도 처음에는 많은 부분이 흙으로 쌓아졌으며 세종 때에야 돌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뒤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일기·축자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수성을 쌓았다고 하였다.또 서기 665년8월에 달률(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게 하고 역시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대야·연이라는 두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김전)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대야성)·미즈키(수성)·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고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 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서기에 기록 일본의 고대성곽 가운데 가장 긴 학술적 논쟁을 거친 것으로 고고이시(신총석)란 것이 있다.이는 우리나라의 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계곡부분은 돌로 벽을 만들고 성문과 수구문을 두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돌로 된 기단위에 판축의 토루로 구성되었다.수십년간 이것을 놓고 성역설과 한국식 산성설로 논란을 거듭하다가 발굴조사에 의하여 산성임이 확인되었다.이의 축조연대는 아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그러나 백제의 축성술이 주축이 되고 신라와 고구려 계통의 영향도 받아 이룩된 우리나라 성곽의 연장임은 우리보다 일본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백제성곽 유적/한강·금강유역에 많이 남아/풍납동 토성·부여산성등이 대표적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 토성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 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에 이른다.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 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목책 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위례성의 주성,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 이성산성은 풍납동 토성,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 아차산성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광장동에 있다.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 및 나성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환산성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이밖에 예산의 임존성은 백제가 망한뒤 유장 흑치상지가 백제의 부흥운동을 꾀했던 곳이다.이곳에서 흑치상지는 한때 나·당연합군을 깨뜨려 잃었던 옛땅을 한 때나마 되찾기도 했다.이곳은 또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와 견훤이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거리:중/을지로엔 약종상 밀집 “의료타운”(서울6백년만상:16)

    ◎서민촌 충무로,일제시대 환락가 변모/동대문부근 배오개길 상인들로 북적 조선시대 「육조앞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가 사대부 양반이나 부유층의 거리였다면 구리개(일명 동현·을지로)는 서민들의 거리였다. 구리개는 지금의 을지로입구에서 동대문운동장앞까지의 거리로 요즘의 표현을 빌리면 의료타운이라고 볼 수 있다.지금의 국립의료원자리에 조선조 개국초부터 국립의료원격인 혜민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양으로 천도한후 궁궐,종묘등을 1년여에 걸쳐 완성한 태조 이성계는 천도 그 이듬해인 1395년 음력 9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1396년1월부터 2차에 걸쳐 본격적인 도성축조에 들어갔다.1·2차에 걸쳐 축조에 동원된 인력이 19만7천여명.당시 상주인구가 5만여에 불과했던 한양으로서는 도성축조에 동원된 역군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대군이었다.그러다보니 숙박시설이나 음식이 변변치 못해 역군들의 한양생활은 참혹했으며 1천명에 가까운 역군들이 부상이나 동상으로 죽거나 다쳤다한다. 이때 사상자를 치료하기위해 세워진 것이바로 혜민서였고 그이후로 구리개일대에는 자연스럽게 약방골이 조성됐다.구리개 앞옆으로 당시 한의원 양성기관인 전의감 졸업생들이 독점적으로 개업한 한의원이나 동의수세보원이니 연년익수라고 써붙인 약종상(한약방)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에는 내의원,전의감,혜민서의 허가없이는 한의원이나 약종상을 개업할 수없었고 이들 한의업 특권층들은 한약업계의 메카인 구리개에 개업을 했다.따라서 시골에서 약재를 팔러온 사람은 구리개아니면 한약재를 팔 수없게 구리개는 서민층 아픈사람이나 한약재를 팔려는 시골뜨기로 연중 북적거렸다고 옛문헌들은 적고 있다. 구리개는 한일합방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약방골로 명성을 누렸으나 지금의 충무로에 뿌리를 내린 일본상인들이 서서히 잠식해오면서 미두시장으로 바뀌게 된다.그리고 서울의 약방골은 종로4가와 경동시장근처로 옮겨 옛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또 하나의 서민의 거리는 배오개(이현)길과 지금의 충무로인 진고개(이현)길.당시에는 동대문근처에 산림이 울창해 1백명이 모여야 지날 수있다해서 백고개혹은 백채라고도 불렸다는 배오개길은 지금의 이화여대부속병원에서 동국대학교자리까지 이르는 길로 배오개장(동대문시장) 상인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그후 한양의 인구가 크게 팽창하며 배오개장 중심의 상권이 당시 물품의 유일한 대량수송로였던 한강변의 나룻터를 중심으로 다변화되며 서울의 거리도 크게 늘어난다. 특히 조선조 중기의 황금시대인 영조시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한양의 인구가 20만을 훨씬 넘어서고 노들나루를 비롯 뚝섬,용산,마포,왕십리,서강,서빙고,망원정,연서,안암,전농,두모포등 12강이라 불리는 나룻터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며 마포로,서강길등 현재의 주요도로 골격을 갖추게 됐다. 배오개길과 함께 한양의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살던 거리는 진고개(이현)길.비가 올때면 남산으로 이어진 고갯길이 온통 진흙탕을 이뤄 통행자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해서 진고개로 불리게되었다고 전해진다.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천도해서 조신들에게 집지을 땅을 나누어주면서 계급과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고 벼슬아치나 양반들은 모두 청계천북쪽으로 배정해 진고개일대는 요즘말로 달동네인 남촌을 이뤘다. 구한말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진출을 꾀하면서 경제적 기반구축을 맨처음 시도했던 곳이 진고개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한양도성 10리안에 발조차 제대로 들여놓지 못했던 일본상인들은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위상이 높아지자 진고개일대 가가(가건물)를 하나둘 사들여 진고개의 면모를 일신해갔다. 급기야 5년후 한일합방이후에는 마을이름을 전부 일본식으로 뜯어고치고 일본상권을 형성해 서서히 구리개까지 그들의 상권으로 편입시켜 갔다.특히 진고개일대에는 1887년의 정문루라는 요정을 시작으로 개진정,남산정,송본루등이 즐비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환락가였다고 한다.
  • 「정도 6백년 지도전」/서울의 변화상 한눈에

    ◎28∼4월25일까지 성신여대박물관서/조선이후 서울지도등 1백종 자료 전시/행정·정치도등 다양… 「경조오부도」 눈길 조선시대 지도책의 첫장에 그려지곤 했던 「천하도」는 중국을 중심대륙으로 비해와 환대륙,영해가 차곡차곡 감싸고 있는 모습을 담은 원형의 세계지도이다.유독 조선에서만 크게 번성한 「천하도」의 사상적 기원은 중국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당시의 세계관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지도는 이처럼 그 지역의 문화사를 간직한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된다.「천하도」가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처럼 각 지도에는 당시에 필요로 하였던 요소들이 당시 의식하에 그려져 있어 그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서울정도 6백년 서울지도전」은 바로 지도에 나타난 서울의 변화상을 통해 지도가 지닌 이같은 의미를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성신여대박물관(관장 허영환)이 28일부터 4월25일까지 여는 이 전시회에는 조선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50종의 지도를 포함한 1백여종의 서울 관련 자료가 선을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이미 지도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한반도의 모양이 실제와 비슷한 정도까지 파악되고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옛지도는 모두 조선시대 것이다.조선시대의 지도제작술은 천문도를 그리는 기술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태조4년(1395년)에 1천4백63개의 별을 그린 대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든 기술은 태종2년(1402년)에는 상당히 정확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까지 만들어 낼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72종의 서울지도가 만들어 진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이번 전시회에는 그 가운데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 완성한 「대동여지도」의 제1첩인 「경조오부도」와 이보다 20년 앞서 만든 목판본 「수선전도」를 비롯,필사본으로 1780년대 만들어진 「한양도성도」와 「도성지도」등 30종이 출품된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국립지리원과 천문대 기상대의 기능을 합친 서운관과 도화서에서 정치·군사·산업·운수등 국가경영에 필요한 다양한 지도를 만들었다.출품된 지도 가운데 1394년 서울에 정도하고 경복궁 조성을 시작한뒤 그린 「경복궁도」나 1620년 경희궁을 완성하고 그린 「서궐도」등이 정치도에 해당한다면 1454년 인구 10만명인 서울을 5부49방으로 나눈 「경성도」는 행정도에 해당한다.또 1750년대 「도성삼군문분계지도」는 서울방위용 군사지도이며 1765년의 「사산금표도」는 벌목·매장·개간등의 금지지역을 표시했다.행정도인 「경성도」는 행정단위가 5부47방으로 바뀐 17 92년에는 「성시전도」가 제작되는등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새로 그려졌다. 이번 전시회에는 조선시대 것 뿐 아니라 일제시대 및 해방 이후 만들어진 지도도 각각 10종씩 선을 보여 그동안 서울의 변화상을 확연하게 보여준다.예를 들어 1939년 제작된 「최신대경성전도」에 나타난 여의도와 동부이촌동 일대의 거대한 모래사장은 1987년 만들어진 「서울특별시 행정안내도」에는 시가지로 변했다.
  • 창의문 개방(외언내언)

    서울 청운동 막바지,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한양도성 4소문중 하나인 창의문이 있다.자하문으로 더 잘알려진 창의문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1396년 도성과 궁궐을 짓는 대토목공사를 일으키면서 만들어진 성문이다.그러나 4대문중 북한산에 위치한 북문인 숙정문(처음에는 숙청문)이 창건된지 18년만인 태종때 폐쇄되면서 창의문 역시「산중에 있고 지대가 높다」해서 폐쇄당하는 불운을 겪는다.숙정문을 열어두면 도성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것이 폐문의 이유였다고 한다. 숙정문과는 달리 창의문은 양주나 고양으로 통하는 길이 연결돼 곧잘 이용되어왔다. 1623년 인조반정때는 지방에서 진군한 군사들이 홍제원에 집결했다가 창의문을 통과해 궁궐에 들이닥쳐 광해군을 왕좌에서 몰아냈다.그 당시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지금도 걸려있다.근래에 와서 창의문이 다시 폐쇄돼 「금단의 문」이 된 것은 68년 북한의 무장간첩 김신조일당이 청와대 기습을 노려 이곳까지 침투한 1·21사태이후.안보상 이유로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인왕산·북악산과 함께 창의문도 폐쇄조치가 내려졌다.그바람에 사적인 창의문 경내에는 군인막사와 경비초소등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어제 굳게 닫혔던 창의문이 개방되었다.일대 9백여평의 소공원까지 아담하게 조성돼 시민들에게 공개된 것이다.새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 청와대앞길,인왕산길,대통령비서실장 공관(효자동 사랑방)개방등 일련의 청와대주변공개조치에 따른 것이다. 때마침 내년은 서울 정도6백년.갖가지 기념행사가 준비되고 있는중에 유서깊은 사적인 창의문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어 한결 더 뜻깊다.도성의 4소문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문인 창의문과 동남문인 광희문(일명시구문)뿐이다.그중에서도 문루와 함께 완벽하게 원형을 갖추고 있는 곳은 창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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