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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매일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I)

    ◆이슬털기-편혜영상현이다. 이제 달은 차츰 차올라 만월이 되어 갈 것이다.그러다가 다시 조금씩 이지러지며 하현이 되고,그믐 사흘 무렵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릴 것이다.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달의 모습에 따라 시간을 측정한다지.나는 그들이 땅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이의 기준을 달로 삼은 것을 흉내 내듯이 상현이니까,음력 8일 경이로군,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예정일은 이제 겨우 오일 남았다.아기는 봉긋이 솟아오른 원피스 자락 밑에서 꼼짝 않고 양수에 폭 쌓여 있을 것이다.예정대로라면,아기는 만월이 되는 즈음에 태어날 터였다. 안방에서 징소리가 들려왔다.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대문가에 서 있었는데도귀청이 울릴 정도였다.굿이 시작된 모양이었다.마당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좁은 마루로 몰려 가고 있었다. 경칩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바닷가여서인지 유난히 밤바람이 차가운 곳이었다.나는 마당 구석으로 가서 휴대폰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무녀의 에에루하는 불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굿이 시작되기 전에 남편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으나 나는 달만 쳐다보며 계속 시간을 미루고 있었다.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어쩌면 요즘 들어 야근이 잦은 남편은 아직 회사에 있을지도 몰랐다.회사에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나는 전화기를 그냥 가방 속에 넣어 버렸다. 어딜 간다고?산책을 다녀와 막 자리에 누운 남편에게 진도에 다녀오겠다고 말을 꺼내자남편은 못미덥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진도요. 당신이?왜?대학 선배가 죽었는데,고향집에서 굿을,안돼. 단호하게 말하고는 남편은 등을 돌려 버렸다.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남편의 구부린,그러나 단단해 뵈는 등을 보며 예정일이 일주일도 채 안남은 주제에 어딜 가겠다는 거냐고 큰 소리 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하긴,이 몸으로 진도에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안된다고 진도에 가려던 마음을 접었다. 아침이 되자,나는 등교 시간에 늦은 꼬마처럼 어수선해져서 서둘러 남편을 출근시키고 다음날치 남편의 식사거리를 준비해 두었다.그리고 작은 가방에 하루치의 짐을 챙겨 수정과 함께 진도로 내려왔다.내려오는 동안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하면서도,전화를 걸지 않았다.진도에 가는 것이 야유회라도 되는 듯 일부러 들떠 있는 수정과 나의 뻔한 거짓말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진도에 가기 전이라도 내내 막대유리처럼 가늘고 위태로운 즐거움일지라도 누리고 싶었다. 들어 가자. 수정이 대문가에서 엉거주춤 선 채로 달이나 올려다 보고 있던 나를 끌어 마을 사람들을 헤집고 안방 문 앞에 세웠다.10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마을 사람들은 굿구경을 한다면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마루가 사람들로 가득차고,마당도 벌써 반이나 사람들로 차올랐다.그의 동기며 선배들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하긴,서울에서 퇴근하고 예까지 오려는 생각이라면 자정이 넘어서야 도착할 것이었다. 영등살 축제 때문인지 해남에서부터 진도로 오는 길은 길게 밀려 있었다.수정과 나는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8시가 넘어서야 진도대교를 건널 수 있었다.진도로 들어서는 길목 여기저기에 영등살 관광 안내 플래카드가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진도 대교 초입에 걸린 스피커에서는 축제 기간이어서인지 서어산에 지는 해애는 지고 싶어 지느냐아,나알 두고 가아는 이임은 가고 싶어 가느냐아는 진도 아리랑이 잡음과 함께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닷길 갈라지는 것 본 적 있니? 아니. 갈라진 바닷길을 따라 한없이 걷다보면 이상하지,다시 물이 차올라도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아,어떤 때는 관리인이 계속 호각을 불면서 나오라는데도 안나가고 있다가 끌려 나온 적도 있다니까.바닷길로 영혼이 올라간다는 말이 맞는가봐,그래서 영등(靈登)이라고 부른다는거야. 그리고 수정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8시간 정도 차를 타고 오면서도 우리는 마치 어디 가까운 곳에 소풍이라도 가듯이 들떠 있었다.휴게소에 내려 남편에게 전화를 해야지 싶다가도 배를앞으로 불룩 내밀고 맛이 덜 밴 우동을 먹고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다음휴게소에서는 망태기에 담긴 귤을 사 느릿느릿 까 먹기도 했다.해 지기 전에 진도에 닿거든 망금산 전망대에라도 다녀오자는 계획도 세웠다.다도해의 푸른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을 보면서 우리는정말 소풍이라도 온 듯 사진도 찍고 호탕하게 웃을 생각이었다. 나는 바닷물이 갈라지는 건 영혼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삭 무렵과 망 무렵에 달과 태양과 지구가 일직선으로 늘어서 조수 간만을 일으키는 힘이 강해져 해수면의 오르내림이 커지는 것 뿐이라고 대꾸할 생각도 없이,묵묵히 설설 휘감기며 흘러가는 울돌목 좁은 해협을 내려다 보았다. 아왕 임금의 굿이야 공심은 저라지요,소복을 입고 한지를 오려서 만든 넋전을 든 무녀가 징을 오른손으로 간간이 치면서,불쌍하신 최씨망자 부디도와주시어서,천도하게 하옵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고 있었다.그리고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잠깐 춤을 추다가 쌀알을 방안에 뿌렸다.무녀가 어기야청청 살이로구나라고 선창하자,그의 어머니와 시집간 두 누이가 무녀의 노래를 받아 후렴을 불렀다.나는 꼭 잡고 있는 수정의 손을 풀었다.굿판 정면에 병풍을 친 자리에 그의 한 벌 뿐인 양복이 걸려 있는 것이보여 울컥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의 옷이 무녀가 덩실 팔을 들어 올리며 춤을 출 때마다 조금씩흔들렸다.수정이 입모양으로 어디가? 라고 물었으나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추어 올렸다. 마루를 내려 서려는데 아랫배가 묵진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며 허리가 끊어질 듯한 진통이 느껴졌다.나는 훅,가쁜 숨을 내쉬며,허리를 잔뜩 구부려 배를 감싸 안았다. 으윽,잇새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누군가 마루로 올라오며,오매,괜챦으요? 어깨를 잡아 주었다.그 소리를 듣고 수정이 얼른 내 곁으로 왔다.진통은 여진과도 같이 짧은 것이었음에도 내 얼굴에는 식은땀이 잔뜩 배어나 있었다. 방에 들어가 숴야지,큰 일 나것네,아,기환이랑은 어찐 사인데 그 몸해서 여글 왔다요? 동네 아주머니인지 수정의 곁에서 나를 부축해 방에 눕혀주며 물었다.기환의 방이었던 것 같았다.어떤 사이냐고? 나는 앉은뱅이 책상 하나와 작은 옷장이 하나 있을 뿐인,주인을 잃은 지 오래인 그것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수정이 내게 베개를 받쳐주며,대학 친구예요,짧게 대답하자,아 그라요,그럼 서울서 왔겠구만,어찌게 이렇게 아파서 어쩐다요,아줌마가 걱정해 주다가 좀 쉬소,난 굿구갱 갈라요,아프면 또 부리오,하고는 마루로 나갔다. 너 정말 괜챦니? 여기서 애 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책상 위에 꽂혀 있는 책의 제목을 읽고 있었다.진통은 이미 간질병 환자의 발작처럼 진땀만 남겨 놓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선배 방이었나봐,저 책들이 그대로 있네. 수정이,내 눈을 따라 책상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 인형 봐라,사내 방에 왠 인형이라니. 수정이 쿡,웃음을 터뜨렸다.책상 한 끝에는 털에 잔뜩 때가 묻어 있는,본래는 보솜거리는 털로 덮혀 있었던 누런 곰인형 하나가 앉아 있었다.인형은,기환선배가 내게 사준 것을 내가 다시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그가 자기 아이에게 털이 보숭한 곰인형을 사주고 싶었다고 편지와 함께 인형을 보내왔다.나는 그 인형을 곧 반송시켰다. 그는 나와 동기였던 은미의 애인이었다.은미는 예쁘고 영리했지만,그것보다는 자기가 상처 받는 걸 두려워해서 복잡한 상황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겁장이였다.나는 집요하게 그에게 매달렸다.그는 남자로서보다는 내 선배였기 때문에 단호하게 내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그가,떠나버린 은미 때문에 괴로워하며 잠결에도 은미야 사랑해,내가 잘못했어,중얼거리던 때에 나는 덜컥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임신했다는 말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를 만나던 날,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다가 곧 입을 다물고 내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선배,우리 결혼해요.서툰 연극배우의 과장된 대사같은 그 말을 하고 나자,기환은 금방 멍한 표정이 되었다.그러다가 점점 그의 속내를 복사하는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휘청,현기증이 인다는 듯이 몸을 기울기도 했다.나는 그런 그의 반응에 불끈 화가 치밀어 뒤따라 나가 길거리에서 그를 맘껏 패주었다.학교 근처였고 간혹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지은아,왜 그래,그러지마,선배 저리 좀 가세요,말리기도 하였으나,그는 피하지 않았고 나는 계속 그를 후려쳤다.그를 향해 가방을 휘두르면서,문득 나는 내가 왜 그를 때리나,그는 왜 내게 맞고 있지,하는 의문이 생겼고,그러자 내가 임신을 한 것이나,우유부단하여 망설임만 많은 그나,다 불쌍하게 느껴졌고,모든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여겨져서 때리는 것을 관두었다. 집에 돌아오니 그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나는 편지 겉봉에 쓰여진 하지은이라는 내 이름을 불길하게 쳐다보며 봉투를 뜯었다. 사하라 사막 남부에 있는 부르키나파소의 구르마 지역에 사는 종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2,3 개월 동안 매일 밤 북소리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거야. 그러나,이런 긴 장례의식을 지내는 동안에도 주민들은 낮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해,옥수수를 심으며 웃기도 하고,떼지어 사냥을 나가 큰 짐승 포획에 성공했을 때에는 기쁨에 찬 커다란 함성을 지르기도 하지.낮동안 구르마족마을에는 마른 풀이 벌판 한복판에 우수수 부서져 내리는 소리나,수수 찧는소리,혹은 떼지어 놀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지.그렇게 낮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면 횃불을 밝히고 북을 치기 시작해.그들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춤을 추며 신의 품으로 돌아간 죽은 이를 추억하는거야.너 역시 평범하고 일상적인 낮시간을 보낼수 있을꺼야,밤이 되면,잠깐 나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겠지만,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추억해야 할 일이야.지은아,너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행동이 부족한 나는 생각만 많았지,한 번도 단호하지 못했구나.네 곁에 있을 수 없다.그렇다고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처럼 은미에게 돌아가려는 것도 아니다.단지,혼자 있고 싶다. 나는 편지를 갈갈이 찢고 그 길로 택시를 타,그의 자취집으로 갔다.찢은 편지를 손에 꼭 쥐고 자리에 누워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그는 사흘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고,나는 여전히 그의 방에 누워 있었다.가끔 화장실만 들락거렸을 뿐,돌아 눕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아무 것도 먹지 않으니 힘이 없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나흘째 되던 날 밤에 그가 잔뜩 술이 취해서 친구들을 데리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덜컹거리며 그가 문을 여는데도 나는 이미 돌아볼 힘마저 없어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그가,잔뜩 술 냄새를 풍기며 뛰어 들어와 나를 안아 일으켰다.나는 손에 쥐고있던 찢은 편지를 그에게 뿌렸다.내 선배이기도 한 그의 친구들이 들으라는 듯이 나는 개새끼 내 애기가 죽으면 너도 죽을 줄 알아,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가 애기? 너 애기라고 한거야? 물으며 나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 갔다. 밖에서,아가씨 좀 보소,서울서 대핵교 친구들이라고 안 왔소,하는 아낙의 목소리가 들려 수정이 밖으로 나갔다.어머 선배 왔어요,아는 체 하는 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상대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리기는 했으나 누군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여기 있었니?누군지 알 수 없는 상대방이 물었다.수정이 응,굿보다가 잠깐 여기 있었지.누구랑? 상대가 물었다.수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아마 수근거리며 글쎄 지은이가 다 왔다고,진통이 나서 방에 누워 있다고 조심스럽게 대꾸하는 것 같았다.그리고는 상대방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대화가 한참 이어지다가,그럼 이따 봐,하는 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곧 수정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이미 진통의 여운도 가시고,주인을 잃은 지 오래인 빈 방에 더 누워 있기가 뭣해서 나가려던 참이었다. 마루에 굿상이 차려져서정신 없을텐데,괜챦겠어? 수정은 누가 왔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나를 부축해 마루로 나갔다. 상청 앞에 무녀가 혼자 장고를 치면서 오구풀이를 부르고 있었다.마당의 구경꾼들까지 죄다 마루 앞에 몰려 있었다.시간은 이미 자정에 가까웠다.바리데기가 마침내 아버지를 살려내는 대목에서 구경꾼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오구풀이를 끝낸 무녀가 징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간간이 치면서 최씨 망제 어서 오소,큰 목소리로 청하고는 가족에게 상청에 제사를 올리라고 했다.망제요 망제요 불쌍코 초라한 최씨망제여 무신 나이 많아여 망제란 웬말이뇨 무녀가 소리하자 그의 둘째 누이가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큰 누이는 상에 술을 올리고 향을 피운 후 젓가락을 올려 대접하고 절을 했다.절을 하는 동안 무녀는 망자의 넋을 넋상자에 담았다.수정이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려 나는 손을 꼭 잡아 주었다.그의 큰 누이와 사촌 형제들의 오열 섞인 제사가 끝나자 무녀는 오구시루에서 명실 복실을 꺼내어 손가락에 감으면서 최씨망제 오늘 이 굿 받으시고 극락세계 가십시다 가아족들 모두에게 추욱원을내리인후 거리거리 인정쓰고 염불하며 가십시다,크게 소리한 후 나무아미타불을 고인들과 함께 부른 후 굿을 마당으로 내렸다. 나는 이번에는 소란해진 마당을 피해 아까 나왔던 방으로 들어가 집에 다시 전화를 했다.벨이 여러 번 울렸으나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어쩌면 남편은 밤 산책을 나갔을지도 몰랐다. 남편의 산책은 신혼 초 아파트에 이사온 후부터 계속되었다.아무리 피곤해도 남편은 산책을 그만두지 않았다.그가 아직 주임이 되기 전이었고,그의 부서에 갑자기 금액이 큰 해외 거래처가 생기기 전이라 야근을 하는 일도 없던때였다.남편은 초저녁에 불과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퇴근해서 돌아왔다.나는남편과 식어 있는 찌게를 조금 데워 싱거운 계란찜을 반찬으로 함께 저녁을먹었다.남편은 너무 뜨거운 국물은 먹지 않았고,간이 덜 밴 듯 싱거운 음식을 좋아했다.나는 맹탕이나 다름없는 계란찜을 젓가락으로 떠내느라 식탁에흘리면서,평생 싱거운 계란찜을,입을 델까 주저할 염려도 없이 먹고 살꺼라는예감으로 잠깐 우울해 하기도 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남편은 9시 뉴스를 보면서 그날치 조간 신문을 읽었다.뉴스가 끝나고 대충 훑어보는 신문 읽기도 끝나면 남편은 막 공사가 시작된아파트 단지까지 산책을 나갔다. 왜 산책을 나가세요?어느 날은 선을 보고 한 달만에 결혼한,아직도 낯설기만 한 남편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소리를 들으면 불길이 확확 치솟는 것 같아 아침나절의 선잠처럼 얕은 잠을 자게 돼.당신은 신경쓰지 말고 그냥 자도록 해. 날 기다릴 필요도 없고 마중을 나올 필요도 없어.
  • 시인 문정희씨 새천년맞이 행사 참관기

    까아만 씨앗 하나가 눈부신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시간의 축복 때문이다. 시간은 언제나 새것이다.매순간 숫처녀로 다가와 우리를 씨앗으로 만들고또다시 꽃으로 피워놓는다. 이제 새로운 시간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이 천년의 신방에서 우리는어떤 아이를 만들 것인가. 새 천년 맞이 대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광화문에서 나는 2000개의 씨앗들이이곳을 향해 일제히 쏟아지고 있는 착각을 했다.그리고 그 씨앗들이 다시 꽃으로 피어날 새로운 시간들에 대해 신부처럼 가슴을 두근거렸다. 세종로는 마치 세계의 한복판이 된 것 같았다. 광화문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새로운 시간속으로 그 존재를 서서히 드리밀고있는 북악산을 바라보았다.북악산도 이 순간 한알의 크낙한 씨앗을 연상시켰다.그는 오늘밤 분명히 한알의 생명체였다.당장이라도 부시시 일어서서 은빛날개를 사방으로 펼치며 아름다운 생명의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대형 우주시계에 새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햇빛이 점화되기 전 지난 천년과의고별의식으로 축제는 시작되었다.모 든 조명이일시에 꺼지고 태엽감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세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할말이 너무 많다.냉장고에 쇠고기와 콜라를넣어놓고 대문에 한 대의 자동차를 세워놓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 반을 남의식민지로 허리 구부리고 살았었고,지금도 허리에 금 그어놓고 형제끼리 총겨누고 살고 있다. 또한 단군 이래 최대의 국난이라고 했던 IMF는 어땠었나. 그러나 지금은 한 세기가 시작되는 장엄한 축제의 시간.우리 어머니들이 기쁜 날 콧마루 시큰한 눈물을 훔치듯이 축제의 마당에서 잠시 아릿해오는 기억들을 훔쳐내며 나는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따스한 입김을 내뿜었다. 하늘에 걸어놓은 우주시계에 변산반도에서 채화해온 햇살이 점화되었다.세종로 네거리가 세계의 한복판이요,밀레니엄 옴파로스(배꼽)가 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전국의 산부인과에 연결되어 있던 인터넷을 통해 즈믄해 새아기의 울음소리가 으앙!으앙! 터져나왔다.생명의 신선한 피를 묻히고 이 땅 새 아기들의 울음이 세계로 퍼져나갔다. 꽃불과 청사초롱이 밝혀졌다.그 가운데 바웬사를 비롯한 5명의 노벨 평화상수상자가 한국말로 세계를 향해 평화의 새생명선언을 했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새시간 위에는 부디 물질보다는 생명이 전쟁보다는 평화가 그리고 한반도라는 좁은 주변국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 되기를 비는 의미였다. 광화문일대는 대낮처럼 밝았다.한밤 속에서 새천년을 맞는 세계의 도시 가운데 유독 대낮처럼 밝은 빛 속에서 새천년을 맞는 서울발 새천년소식을 미국CNN이 열심히 리포트하는 모습도 보였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한때는 세계의 수도였던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 신년을 맞았던 기억이 났다.지하철공사를 위해 조금만 건드려도 천년의유물이 나오는 그 고대의 시간 위에 얹혀지는 새로운 시간의 눈부심을 목격했었다.시간은 한마디로 생명이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은 시작되었다.새 생명의 탑인 2000개의 시루탑 주위로 2000명의 1월1일생들이 둘러섰고,생일축하노래와 분수불꽃이 치솟았다. 전세계 186개의 국기와 평화 화평 피스 등으로 표기된 고자락을 잡고 세계의 손님들과 함께 고풀이 놀이가 시작되었다. 우리 앞에새로 펼쳐진 처녀의 시간 천년!나는 눈부신 세종로 한가운데서 나의 하얀 손을 가만히 펴보았다.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15)이봉창 의사

    20세기 전반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일제의 침략을받았다.일제의 침략을 받은 각 민족은 국가와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 일본에저항해 싸웠다.그러나 한국민족만큼 강인하고 격렬하게 일제와 싸운 민족은드물었다.그 중에서도 침략의 괴수인 일왕 처단을 시도한 민족은 우리민족뿐이었다. 1932년 1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이 타고 가던 마차에 폭탄이 날아들었다.일왕을 처단하려는 조선인 애국지사가 던진 세번째 폭탄이었다.1924년 박열(朴烈) 의사가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 사전에발각되었고,1925년엔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본궁성으로 들어가는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바 있었다.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한국인 청년은 이봉창(李奉昌) 의사였다.이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수원의 철로부근에 있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탓으로 그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랐다.소년시절에는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와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연습생으로일하기도 했다.그리고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뒤 6년여동안 나고야 등지를 떠돌며 노동으로 삶을 꾸려갔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이 의사는 일본인과 분간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일본말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습속도 잘알고 있어 겉모습은 일본인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일본인의 고용살이를 하면서,또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민족의 피가 끓고 있었다.스무살때 경험한 3·1의거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있었다. 1931년 1월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 의사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라고 일왕의 처단을 촉구했다.일왕을 손쉽게 죽일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를 임시정부에선 의심스럽게 여겼다.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인과 흡사하였기 때문에수상히 여긴 것이다.김구(金九)는 직원을 시켜 이 의사를 은밀히 떠보도록하였다.어느 술자리에서 이 의사는 “작년에 도쿄에서 일왕이 능행(陵行)한다고 행인들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생각하기를 지금 나에게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라며 자신이 일왕을 죽일수 있다는 얘기를 또다시 꺼냈다. 그를 은밀히 살피던 김구가 이 의사를 직접 만났다.그는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습니다.이제부턴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몸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김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의열투쟁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일왕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독립사업에 몸바치겠다는 이 의사의 각오는 김구를 감복케 하였다.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마침내 일왕을 폭살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준비는 김구가 맡았다.김구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 병공창에서 폭탄을만들었다.준비한 폭탄은 두 개였다.하나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이 의사 자신의 자결용 폭탄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단장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의사는 “나는 참된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屠殺)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적국의 괴수,그것은 일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이 의사는 이 해 12월말경 일본 도쿄로 향했다.그는 일왕이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김구에게는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이 의사는 거사장소로 일본궁성 근처에 있는 경시청 앞을 택하였다.일왕은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櫻田門)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예정대로 신년 관병식이 거행되었다.이 의사는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왕이 탄 마차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 의사는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일왕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은 ‘회고’에서 군중과 일왕의 거리가 100미터 되는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 의사의 일왕 저격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중에서도 중국의 반응은 남달랐다.중국의 각 신문은 이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못하였다”고 하며,일왕을 폭살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일제는 이러한 중국의 보도에 반발,1932년 1월 상해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놓은 일왕을 폭살시키려 했다는점에서,그리고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순국하였다. 해방후 김구는 일본에 있던 이 의사의 유해를 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효창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62년 이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이봉창의사 주변 일본제국주의의 총수격인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신은 적지 일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봉창 의사.순국 당시 이 의사는 32세로 미혼이었다.그런 이 의사에게 직계후손이 있을 리 없다.이 의사와 가장 가까운 혈손으로는 이복형의 딸인 질녀 은임씨가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은임씨는 이 의사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 일본서 노동자생활을 할 때 이 의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거사를 앞두고 이 의사는 백범에게 질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방후 환국한 백범은 은임씨에게 집을 사주는 등 이 의사와의 약속을 지켰다.은임씨도 이미 수 년전 작고했다.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 중에서도 번듯한 후손을 둔 경우는 그래도 낫다.기념관이나기념사업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묘소를 돌보기도 한다.그러나 이 의사처럼 후사가 없는 선열들의 경우는 죽어서도 외롭다. 현재 이 의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나 추모단체는 없는 실정이다.다만 효창원순국선열추모회가 4월 13일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동상 역시 지난 95년에야 겨우 효창원에 건립됐다.이 의사처럼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한채 청춘에 간 애국선열은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당국이나 종친에서 ‘외로운 영혼’을 위해 양자라도 한 사람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다. 정운현기자
  • [새천년 이렇게 맞자] (7)안전문화 생활화-건설분야

    인천 호프집 참사 이후 유흥업소의 불법 영업이 줄었을까.‘그렇지 않다’는 것이 답일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에는 ‘허리케인’과 ‘떼제베’라는 특별기동 단속반이 있다.유흥업소의 불법영업을 뿌리뽑기 위해 지난 7월 창설됐다. 허리케인은 한번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붙여졌다.떼제베 역시 강렬한 속도로 달리는 고속열차처럼 불법 업소를 덮쳐 깨끗이 정화하겠다는 취지다. 이들 단속반은 10월에는 무허가 영업과 미성년자 출입 허용 업소 등 1,326건을,11월에는 1,879건을 적발했다.적발 건수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55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난 10월30일의 호프집 참사가 교훈이 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예다.강남 한복판에서 한순간에 무너진 삼풍백화점 사건,동강나서 내려앉은 성수대교 사건,어린 새싹들의 고귀한 목숨을 앗아간 화성씨랜드 수련원 화재 사건 등은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끄러운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까.새천년에도 ‘우리는 안돼’라는자괴감에 빠질 수는 없다. 어처구니 없는 참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은 국민 의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인간존중의 안전문화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안전생활시민연합 이규원(李圭元) 행정실장은 8일 “경제성장에만 총력을기울인 결과 안전을 소홀히 하는 의식이 만연해 있다”고 말했다.그는 한 예로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건설노동자가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으면 벌금형에 처하게 되어 있지만 아직 단 한 건의 벌금도 물린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씨랜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외신들이 “한국은 급속한 경제발전 과정에서안전을 중시하는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우선 순위를 두지 않았다”고 지적했던 것을 이제라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환경안전연구소 운영부장 이정학(李正學·응용화학부)교수는 “학교에서 안전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다”면서 “안전에 대한 조기 교육체제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미국에서는 95명의 인명을 앗아간 58년 ‘레이디 오브 에인절’ 초등학교 화재가 유아 및 어린이 보호 안전대책의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다.이교수는 “위기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안전사고 실습 체험장을 만드는 것도 대안”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산업안전공단 안전문화추진본부 강영모(姜泳模) 무재해추진부장은 “새천년에는 민간단체가 주도해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캠페인을 벌여나가고 정부는 예산 등을 통해 측면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말이 되면 들뜬 마음에 안전 불감증이 오기 쉽다”면서 “특히 Y2K문제 등을 소홀히 하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안전생활시민연합 이실장은 “솔선수범해 안전시설을 잘 설치하고 관리를잘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화재보험료를 깎아주는 등 인센티브제를 도입하는방안도 모색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 덤핑수주·'대충 시공' 청산 부실공사 악순환 끝낼때 국내 건설업계의 고질적 병폐인 입찰 담합행위는 과연 없어서는 안될 ‘필요악’인가. 또 담합의혹을 피하고 회사 생명을 잇기 위해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수주한 공사는 결국부실공사로 이어지는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최근 공공기관 발주 대형공사 심의에서 설계 점수를 조작한 혐의로 14개대학 공대교수 46명과 공무원 2명,이들에게 돈을 준 15개 건설업체가 무더기로적발되며 이 문제가 또다시 수면위로 부상했다. [덤핑수주와 부실공사] 지난 91년 3월26일 팔당대교 붕괴,92년 7월30일 경남남해 창선대교 붕괴, 그 이튿날 신행주대교 붕괴,94년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등 대형 다리 붕괴사고가 터질 때마다 ‘덤핑수주가 부른 인재(人災)’라는 지적은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우선 공사를 따고 보자는 심산에서 설계가격 대비 50∼60%의 저가로 입찰을하고 뇌물공여 등 갖은 수단을 통해 공사를 낙찰받은 건설업체는 대부분 설계서와 규정을 무시하고 공사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수지를 맞추기위해 저질 자재를 쓰거나 투입량을 줄이는 것이다.저가수주다 보니 하도급업체에 무리한 요구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은 대충대충 엉터리로 시공한다. 겉만 그럴듯하게 마무리지으면 된다는 식이다.준공 몇달만 지나면 하자보수공사가 시작되기도 한다. 건교부의 한 관계자는 “팔당대교 공사만 보더라도 시공업체인 Y건설은 세차례에 걸친 분할발주에서 각각 설계가의 52%,72%,75%씩에 수주,공사비를 낮추기 위해 임의로 설계를 변경해 공사를 진행하다 사고를 낸 것”이라고 밝혔다. [입찰담합 필요악인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3월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들이 가담한 입찰담합 비리를 적발,26개사에 101억원의 과징금을 부담하자 건설업계는 지난달 9일 현행 입찰제도 아래서는 담합을 할 수밖에 없다며 제재수위를 낮춰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한건설협회의 김민관(金敏寬)정책본부장은 “계속된 건설경기 침체로 건설업체들이 공공공사 수주에 매달리면서 뇌물을 써서라도 낙찰을 받거나 담합을 통해 낙찰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제값 주고받고 제대로일하기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A건설업체의 B임원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담합은 명백한 불공정행위”라면서도 “그러나 적정 공사비를 확보토록 해 부실공사를 방지하는 긍정적인측면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담합은 최소한 범위안에서 인정해야 한다”고주장했다. 지난 95년말 입찰담합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C사의 한 관계자는“낙찰률이 94% 이상이면 담합으로 몰아붙이고 반대로 85% 이하면 덤핑입찰로 간주해곤혹스러웠다”며 “담합의 정의에 대해 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D사의 한 임원은 “현재 입찰제도 아래서는 손해를 무릅쓰고 라도 저가낙찰을 받든가 처벌을 감수하고 담합입찰을 하든가 양자택일할 수 밖 에 없다”고 말했다. 박성태기자 sungt@ *건설 안전관리 전문가 제안@ 새 천년의 안전관리는 안전의식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서 출발해야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경제개발을 지상과제로 한 압축 성장시대에는 ‘공기단축,공사비 절감’ 등이 실천과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성수대교 붕괴,삼풍백화점 붕괴 등대형사고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점검과 유지관리’를 통한 안전확보가 지상과제가 된 시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안전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유·무형적 투자가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연세대 조원철(趙元喆)토목공학과 교수(수해방지대책기획단장)는 “미국의경우 방재비용으로 한해 1억달러를 투자해 10억달러 이상의 경제적 이득을보고 있다”면서 “우리도 사후 약방문식이 아닌 예방사업 중심으로 안전행정을 펼치는 한편 시민들의 안전의식 고취를 위한 홍보교육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서울시립대 이창수(李昌洙)토목공학과 교수는 “선진국의 경우 건설보다 유지관리에 더 많은 비용을 들이고 있으나 우리는 반대”라면서 “안전투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건설분야의 표준화 작업도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황용주(黃鏞周)중앙대 건설대학원 교수는 “부품·설계·시공·관리 등 건설산업의 표준화를 하루 빨리 이뤄내야 건설분야의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탈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기능의 통합도 필요하다. 연세대 조교수는 “수자원 개발,하천관리는 건설교통부,치수·방재 등 재해관리는 행정자치부,상·하수도 및 수질관리는 환경부,농업용수 개발은 농림부가 맡고 있다”면서 “종합적 기능통합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1일 출범한 국무총리실 산하 안전관리대책기획단과 대통령 직속기구인 수해방지대책기획단의 활동이 주목된다. 안전기획단장이기도 한 황교수는 “국민의 전반적인 안전의식 제고,정부내안전관리 조직체계 정비,분산·중복돼 있는 안전관련 법령 정비 및 현실과괴리된 제도개선 등 안전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근원적인 안전관리 종합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큰 사건이 터지면 나오는 대책기획단 신설 등은 땜질 처방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이 때문에 시립대 이교수등은 일관성 있는 건설안전 관리를 전담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현갑기자 eagleduo@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28일 창립 10주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함께 한국 개신교 연합체의 양대축 가운데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지덕목사)가 오는 28일 창립 1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 한기총은 지난 19일 서울여대에서 ‘하늘 새땅 그리고 새천년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갖고 한국 개신교의 당면 문제들을 점검한 데 이어오는 29일 오후6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한국 교회의 밤’을 10주년 기념예배를 갖는다.또 ‘한기총 10년사’와 목회자 500명의 설교내용을담은 ‘한국기독교대표설교전집’을 올해 안으로 펴낸다. 한기총은 1989년초 한경직(韓景職) 유호준(兪虎濬) 목사 등 원로 목사 10여명이 발의해 그해 12월28일 출범한 연합체.현재 예장통합을 비롯해 50개 교단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국대학생선교회 등 15개 단체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KNCC가 진보적 노선을 견지하는 것과 달리,한기총은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띄며 개신교 지도자들의 친교·협력과 선교 사회문제에 대한 공동보조를주도하고 있다.창립 이후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순결서약운동’‘북한복음화’에 앞장서 왔는데 그동안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통해 100억원을 모아 국내외 불우아동과 사회복지시설을 도왔으며 북한에 쌀 1만가마를보내기도 했다. 지난 93년부터 학교와 교회 군, 경찰 등에서 전개해온 ‘순결 서약운동’은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는 성과를 낳았다.지난 95년부터는 북한동포 돕기, 북한교회 재건 등에 치중하고 있으며 중국 동북3성의 탈북자 보호뿐만 아니라탈북자들이 UN에서 국제 난민자격을 인정받도록 1,000만명 청원운동도 벌이고 있다. 김성호기자
  • 겨울철 돌연사‘아침 찬바람’조심

    ‘아침에 일어나 문밖을 나서다 갑자기 쓰러지셨대요’‘건강하던 양반이 아침 조깅중에 갑자기 쓰러지셨어요’날씨가 추워지면서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듣는 대화다.대부분 심장마비나 뇌졸중을 일으켜 돌연사한 경우다. 날씨가 추워지고 일교차가 심한 11월∼12월엔 이러한 돌연사 위험이 가장 커진다.찬공기에 갑자기 노출되면 관상동맥이 수축돼 막히기 쉽고,뇌혈관도 막히거나 터지기 십상이다.이렇게 되면 심장근육이나 뇌가 혈액을 공급받지 못해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이 온다. [심장마비] 가장 조심해야할 사람은 평소 동맥경화나 고혈압이 있는 이들.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김효수 교수는 “동맥경화로 평소 혈관이 좁아져 있는상태에서 갑자기 찬공기를 쐬면 혈관수축 혈압상승 심박동수 증가 등의 현상이 나타나고,혈관벽에 붙어 있던 지방질(콜레스테롤 등) 덩어리가 파열되면서 혈전이 갑자기 증가해 관동맥이 막힌다”고 말한다. 또 술과 담배를 많이 한 다음날 아침에도 심장마비의 위험이 매우 커진다.과음과 흡연을 함께 하면 관동맥의 경련과 수축이잘 일어나고 니코틴 성분이교감신경을 자극해 심혈관계에 무리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음과 지나친 흡연을 한 다음날 아침 무방비 상태로 찬 기운을 갑자기 쐬는 것은 기름통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뇌졸중] 뇌혈관이 막혀 생기는게 뇌경색,터져 일어나는게 뇌출혈이다.심근경색과 마찬가지로 평소 동맥경화나 고혈압 환자가 최고 위험군이다. 고대안암병원 신경외과 이훈갑 교수는 “이런 사람들이 갑자기 찬 공기를 쐬면 뇌혈관이 수축되고 혈압이 급상승하면서 심하면 막히거나 터지게 된다”고 말한다. 당뇨나 고지혈증,흡연도 뇌졸중의 중요한 유발요인이다.특히 흡연할 때 나오는 일산화탄소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해 심장근육과 뇌에 대한 산소공급을 방해한다.따라서 애연가는 추운날 아침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전조증상] 뇌졸중과 심장질환은 본격적인 증세가 나타나기전 이를 예고하는증상이 올 때가 많다.따라서 이를 잘 체크해 미리 대처하는게 좋다. 뇌졸중 전조증상으로는 손발 저림과 무기력함,어지럼증,신체감각 이상,물건이 둘로 보임,얼굴 마비,구토와 출혈 등이 있다.이런 증상이 두개 이상 동시에 나타난다면 서둘러 병원을 찾는게 상책이다.또 뇌졸중 고위험군에 있는사람은 평소 병원에서 뇌혈관 혈류 속도를 재는 뇌혈류검사(TCD)를 통해 발병 가능성을 미리 체크하는게 좋다. 심근경색은 발병전 가슴 한복판이 조이는 느낌과 뻐근함,답답하고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 올 때가 많다.사람에 따라서는 목이나 턱,왼쪽 팔과 어깨에통증이 일기도 한다.따라서 이런 증상들이 1분 이상 지속된다면 지체없이 병원을 찾아야 한다. [겨울 뇌졸중 심장마비 예방수칙] 아침에 실외 화장실이나 신문을 가지러 갈때는 반드시 덧옷을 입어 몸을 찬 공기로부터 보호한다. 또 평소 아침운동을별로 하지 않던 사람은 가급적 겨울에 아침운동을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평소 운동을 해왔더라도 옷을 충분히 입고 운동한다. 아침운동량을 다른 계절보다 약간 줄이는 것이 좋으며 이른 새벽보다는 해가뜬 후에 하는 것이 안전하다. 운동하다가 가슴이 답답하거나 통증을 느끼면즉시 중단하고 심하면심장전문의 진단을 받는다. 임창용기자 sdragon@
  • [의열 독립투쟁](12)나석주 의사

    1926년 12월28일 오후 2시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식산은행(남대문로 2가)과 동양척식회사(을지로 2가)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7명을 살상시킨 사건이 일어났다.공격 대상이 토지를 장악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집중되던 일제의 기관이었으니 조선인들로선 그야말로 응어리진 민족의 한을 씻어주는 쾌거였다.이 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격정의 장을 펼쳐낸 장면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나석주(羅錫疇·1892∼1926) 의사였다. 황해도 재령 태생인 나 의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1세에 이문성(李文成)과 결혼하였다.15세에 고향 마을의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해신학문을 배우고,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학교(養山學校)를 다녔다.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 의사를‘제자이자 동지’라고 표현하였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강탈당하자 나 의사는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치고자맹세하고 1913년 21세때 1차 망명길에 올랐다.만주로 건너간 그는 북간도를거쳐 이동휘(李東輝)가 개설한 나자구(羅子溝)의 무관학교에 입학,군 간부로 성장하였다.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는 국내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1917년에는 동양척식회사 사리원지점에 농토를 전부 몰수당한 그는 결국 소작농으로 몰락하고 말았다.훗날 동양척식회사를 응징하게 된 것은 이 일이 한 계기가 됐다.3·1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겸이포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미곡상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황해도 사리원으로 옮겨 표면적으로는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으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1920년 김덕영(金德永) 최호준(崔皓俊) 최세욱(崔世郁)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결성하고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숙청을 계획하였다.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안악의 부호 원형로(元炯潞)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송금하기도 했다.일경 1명과 악질 친일파인 은율군수를 처단한 후 일경에 쫓기던 그는 마침내 독립운동의 새 돌파구마련을 위해 중국으로 제2차 망명길에 올랐다.상해로 간 나 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백범 김구 밑에서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동포사회에 파고 드는 밀정을 찾아내 박멸하고 정부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특히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의 경찰과 첩보전을 펼치고 있던 상황이기에 나 의사가 소속된 경무국 경호원들은 정보수집과경찰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후반 들어 김구·여운형(呂運亨) 등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이는 ‘독립은 전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 양성과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1922년 10월 조직한 것이 한국노병회다.정부가 군대를 유지할 능력을 갖지 못하니 한 사람이라도 군사훈련을받아 군사요원이 되고 또 노동자가 돼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으로서 출전하는 계획이었다.즉 한 사람이‘노동자’요‘병사’가 되는 것이다. 한국노병회는 군간부 양성을 위해 요원을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나 의사는 첫 요원으로 파견된 1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3년 초 한단(邯鄲)군사강습소에 입교,사관훈련을 받고 이듬해 중국군 초급장교로 임관되어 중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부터 그는 국내 침투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세가지구도 위에 전개되고 있었다.임시정부와 한국노병회를 대표해 김구,제2차 유림단의거를 진행하고 있던 김창숙(金昌淑),그리고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金元鳳)이라는 세 세력의 협조에 의해 나 의사를 비롯한 요원들이 국내로 잠입해 의열투쟁을 벌이는 투쟁이었다.즉 김구가 키운 군사 간부로서,김창숙이 국내 유림에게서 모금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의열단원으로서 국내로침투하는 것이다.목표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925년 중국인으로부터 배 한 척을 구입하여 국내로 잠입하고자 하였다.그 과정을 보여주는 나 의사의 서신(금년 6월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발간한 ‘백범 김구전집’ 4권에 실림)을 보면 그가 천진에서 이승춘(李承春) 한봉근(韓鳳根)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국내 침투용 선박 구입자금을 준비하는 내용을 알 수 있다.그러나 계획이 연기되다가 끝내 자금 부족으로 계획을변경할 수밖에 없던 사정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초의 계획은 수정되고,실행은 1926년으로 연기되었다.마침 1926년(병인년) 1월1일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조직됐다.병인의용대는 한국노병회가 정체현상을 보이자 의열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나 의사는 여기에 가입한 후 국내 침투계획을 재추진,1926년 12월26일 단독으로여객선 이통환(利通丸)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마중덕(馬中德)이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나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갖고 들어왔다. 이틀 뒤인 12월28일 오후 2시쯤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불발이었다.곧바로 인근 동양척식회사로 이동한 나 의사는 일본 경찰과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이것마저 불발이었다.거사 준비과정이 너무길다보니 폭탄의 성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나 의사는 곧장 거리로 나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자 마침내 권총으로 자결하였다.나의사는 숨지기 전 본인의 이름과 의열단 소속이란 것만 밝혔을 뿐 더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순국하였다./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나석주 의사 후손과 추모사업 나석주 의사가 일경과 대치 끝에 권총으로 자결,순국한 후 장남 응섭(應燮)은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8일 동안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순국 직후 일제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된 나 의사의 유해는 아들에 의해 수습돼 고향 황해도 재령 땅에 묻혔다.당시 일제의 감시 때문에 아무런 표식이나 봉분도 만들 수 없었는데 분단 이후 그 소식을 알 수 없다.이 때문에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묘소 대신 무후선열제단에 나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다.장남은 일찍 사망하고 장녀 응서(應瑞·1918년생)는 9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현재 나 의사는 직계 후손이 절손된 상태다. 지난 17일 제6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나 의사의 의거 현장인 당시동양척식회사 본점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 터)에서 나 의사의 동상이 제막됐다.추모 단체로는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으며 동상 건립도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결과다. 나 의사는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43)노동시인 박노해

    “긴 공장의 밤/시린 어깨 위로/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로 시작되는 시‘시다의 꿈’이 황지우·김정환이 주축이 되어 나왔던 동인지 ‘시와 경제’ 제2집에 발표된 것은 1983년이었다.그리고 이듬해 당시로서는 매우 낯 선 투박한 판화에다 시집 크기로는 약간 어색하게 국판으로 된 ‘풀빛 시선’5권으로 ‘노동의 새벽’이 나왔다. “오늘 우리의 시는 마땅히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려는 몸부림의 한복판 바로 거기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풀빛 시선을 내면서’)는 이 기획의제1권은 김지하의 ‘황토’였고,이어 ‘낙화’(양성우),‘붉은 강’(강은교),‘국밥과 희망’(김준태)이 나와 있는 비중 높은 시리즈였다. 표지 날개에는 박노해를 “1956년 전남 출생.15세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 ‘일하는 사람들의 미래(‘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 외 시 6편발표”라고 짤막하게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표4에는 “‘노동의 새벽’은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박노해의 첫 시집이다”라고 소개돼 있다.해설‘노동 현장의 눈동자’에서 채광석은“70년대 중반 유동우의 ‘어느 돌맹이의 외침’ 이래 쏟아져 나온 근로자들의 체험 수기,80년대에 들어와 ‘우리들 비록 가진 것 적어도’‘모퉁이 돌’ 등을 통해 선보인 근로자들의 시·수필·소설·르뽀·마당극 대본들과 더불어 박노해의 작품은 70년대 이래이 땅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현실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노력한 고통의 결실이다”고 선언했다. “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작업복을 입었다고/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공장장님 로얄살롱도/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한참 피를 흘린 후에/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손무덤’).손쓰기 늦어진 그 잘린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는 냉엄한 현실적인 장면을 비롯한 노동현장의 충격으로 이 시집은 이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으나,베스트셀러가 되었음에도 시인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아니,그런 훌륭한 노동시를 쓸만한 시인은 존재하지 않고 기성 시인 누군가의 대필이라는 설이 파다한가운데 다시 그의 이름이 부각된 것은 계간지 ‘노동해방문학’을 창간(1989년 4월)하면서 였다. 발행인 김사인에 편집위원 백무산·정인화·조정환·정남영·임규찬·임홍배가 포진했던 이 잡지는 “이 나라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계급의 과학적 사상 위에 굳건히 선 노동자 월간 매체를 간행하면서,천만 노동형제들에게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순수한 노동해방 일꾼들이 주도하는 노동자계급의 매체가 될 것”을 다짐하며 “단결합시다! 힘차게 전진합시다!”고선언하고 있다. ‘노동해방문학’은 창간호 권두 특집으로 ‘노동해방 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히는 박노해 시인의 신작시 12편’을 싣는다.“제가 아직도 신분상의 이유로 공개적 활동을 하지 못하여 미력이라도 보탤 수 없지만,멀리서나마 동지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가슴 졸이며 함께 하고 있습니다.동지들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시 몇 편을 투고합니다.건투를 빕니다.1989년 3월 4일”이란 전문이 붙어있는 이 특집에서 그는 ‘머리띠를 묶으며’‘임투 전진 족구대회’ 등 ‘노동의 새벽’의 시보다 더 투쟁적인 작품을 발표했다.이어 그는 8월호에서 시사시를 제창하며 강력한 현실 고발시를 썼고,그 뒤 시뿐이아니라 산문으로도 현실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올 겨울옷 ‘솜처럼 가볍고 포근하게’/패션경향을 살펴보면

    “무거운 옷들은 가라.가볍고 부드러운 게 좋다.” 일반적으로 겨울옷 하면 무겁고 투박하다는 생각을 갖지만 올해 선보인 코트나 겨울 옷들은 디자인과 소재선택에서 무게를 줄이기 위한 노력들이 돋보인다.간결한 디자인에 캐시미어와 본딩,폴라플리스 등 가벼운 소재가 강세를보이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을 살펴보면 겨울 코트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커다란 단추나 장식이자취를 감췄다.속단추와 벨크로(일명 찍찍이)로 앞여밈 부분을 처리,깔끔하고 가벼워 보인다.칼라도 없애거나 하이네크로 처리했으며 길이도 발목길이의 긴코트보다는 무릎길이가 많다. 고급소재로 알려진 캐시미어는 산양의 털중 모근 부분만 사용한 것으로 일반 양모보다 털이 가늘고 유연하며 매끄러운 감촉과 윤기가 특징이다.그러나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양이 워낙 적어 가격이 비싼 것이 흠. 좋은 것일수록 부드럽고 윤기가 흐르며 털방향이 가지런하다.손질이 까다로워 매일 입으면 털이 상하고 변형될 염려가 있으므로 하루입고 사흘은 입지않는 옷으로 알려져 있다. 엘지패션서영주대리는 “캐시미어 혼용률은 10∼100%로 혼용률에 따라 가격 차가 많이 나므로 반드시 확인한 다음 구입하라”며 “혼용률이 무조건높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남자 양복바지는 캐시미어 혼용률이 10% 내외의 것을 선택해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본딩은 폴리에스테르에 특수 코팅처리를 한 것으로 이탈리아 패션브랜드인프라다에서 개발해 일명 ‘프라다 공단’으로도 불린다.바람을 막아 줘 방한복으로 이용되며 이 소재로 만든 프라다 가방은 최근 패션리더들 사이에 필수품목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인기다.수입브랜드에서 많이 볼수 있으며 국내브랜드에서도 몇 품목씩 선보였다. 가죽처럼 보이지만 가죽보다 부드럽고 가볍다.신축성도 좋아 활동에 편하다. 가격은 가죽에 비해 싸며 방수처리가 돼 겨울철 눈비에도 옷이 젖지 않는다. 얼룩이 묻더라도 물수건으로 닦아내면 돼 편리하다. 서영주씨는 “가볍고 실용적인 면들이 부각되면서 본딩소재 코트나 점퍼는벌써 인기품목으로 자리잡았다”며 “여성복에서도 일부 선보였으나 스포츠웨어와 골프웨어에서 더욱 인기”라고 말했다. 찬 느낌을 보완하기 위해 겉감과 안감사이에 보온성 높은 천을 대거나 아예안감으로 폴라플리스를 사용하기도 한다.또 모피를 안감이나 목·팔부분에사용,착용감과 보온성을 높인 것도 있다.현재 코트,투피스,가방,신발 등이나와있다. 스포츠웨어로 많이 사용되는 폴라플리스는 폴리에스테르를 양모느낌이 나도록 가공한 것을 말한다.가볍고 따뜻해 방한복의 안감이나 등산복 등 스포츠웨어에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점퍼,셔츠와 조끼,장갑,모자,머플러,아이들 옷으로 많이 이용된다.마찰에 약해 보풀이 많이 생기므로 손빨래를 하는 것이좋다. 안감으로 사용한 경우 부착형과 분리형으로 나뉜다.분리형은 따로 입어도어색하지 않아 1석3조 효과를 거둘수 있다. 신원의 이선아씨는 “올 겨울 옷은 소재와 디자인 외에 색상도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파스텔톤의 따뜻하고 밝은 색이 유행”이라며 “이는 새로운세기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밖에 솜이나 오리털을 넣어 누빈 패딩은가볍고 따뜻해 올해도 여전히 인기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강선임기자 sunnyk@
  • KBS ‘태조 왕건’ 세트장서 고려궁 상량식

    ‘문이경사(聞而慶事)’란 말에서 지명이 유래됐다는 경북 문경시에 큰 잔치가 한판 벌어졌다. 10일 오후 백제와 신라를 이어주던 관문이 있는 문경시 새재도립공원안 용사골에 축포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2000년 3월4일 첫 방송을 띄울 KBS 150부작 대하사극 ‘태조 왕건’(극본 이환경 연출 김종선)의 주무대가 될 ‘고려궁’의 상량식이 거행된 것이다. 문경시로부터 2만여평의 부지를 무료로 제공받아 짓고 있는 세트장의 맨 위쪽에 자리잡은 이 궁은 높이 21m의 철골조 건물로 세워져 촬영이 끝나면 철거되는 다른 세트와 달리 영구히 촬영장소로 쓰일 수 있게 했다.아래쪽으로는 사비궁과 궁예궁으로 쓰이게 될 ‘새끼궁궐’을 비롯,47동의 기와집과 48동의 초가집,그리고 성벽 등이 세워진다.건물 면적만 1만2,000여평에 이르러‘고려 민속촌’이란 별칭이 붙어도 좋을 규모다. KBS가 부담하는 세트조성 예산은 모두 22억원.문경시(시장 김학문)가 지반다지기 공사와 도로·교량 개설 등에 12억원을 지원했다.다음달 하순 세트장을 완공해 10년간 KBS가 무상으로 사용하고 시에 소유권을 넘기기로 계약됐다.시는 이 세트장을 주변의 문경온천 등과 연계해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이날 상량식후 KBS아트비전측은 그동안 고증 등을 통해 복원한 후삼국과 고려시대 의상을 최수종 등 주요 출연진을 통해 선보였는데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색채와 활동성을 살린 패션이 조선조 의상과는 또다른 멋을 선보였다.고려 귀족여인의 옷은 현재의 한복과 반대로 치마를 윗저고리 위에 입은 것이특이했다.모두 1,200여점이 이번에 새로 제작됐다. 김 PD는 “해상무역에 일찍 눈을 뜬 왕건은 국제정세를 이용할 줄 아는 혜안을 갖고 있었고 적의 참모를 포용하며 민심을 굽어볼 줄 아는 큰 리더십의보유자”라며 “새천년 대륙으로 나아가는 기상과 민족화해의 통일을 지향하는 시대정신을 담기에 적격”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고려는 사료가 부족하고 당시 생활상에 대한 고증에도 어려움이 많아 TV 사극에서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500년을 유지한 왕조임에도 조선왕조실록은 400권이 넘고 고려사는 11권에 불과하다.따라서 역사적 사실 여부를 놓고 재야학자들과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왕건이 29명의 부인과정략결혼 등으로 왕권을 유지해나간 부분과 당시 만연됐던 근친혼 묘사가 제작진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다. KBS는 편당 1억5,000만원의 제작비,세트장과 의상 재현에 들인 정성과 비용이 남다른 만큼 왕건 이후 역시 150작 분량으로 무신 최충현,삼별초,공민왕등으로 고려사 시리즈를 10년동안 이어간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다. 문경 임병선기자 bsnim@*'왕건'役 최수종“제왕의 큰꿈 선굵게 연기” “왕건은요,자신보다 10살이 어린 부하에게도 항상 존대를 했대요.잘못을 저지른 부하도 과감히 끌어안을 줄 아는 남자였구요.뜻을 세우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참을성을 지닌 점에도 많이 끌리더라구요”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의 주연으로 발탁돼 10일 상량식이 거행된 고려궁앞에 고려조 장군의 전투복을 입고 등장한 탤런트 최수종은 배역이 주는중압감 탓인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왕건에 대한 책도 구해 읽고 있지만 머리 속에 어떤 인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될 수 있으면 지우려 하고 있다”는 그는 무엇보다도 왕건의 겸손함을부각시키려 노력했다. “해상왕 장보고보다 100년 이전의 사람인 왕건이 제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해상무역을 통해 익힌 국제정세를 보는 감각 덕분이었다”고 나름대로 해석력을 과시한 그는 한국의 영어명 ‘코리아’를 있게 한 고려인들의 기상을안방에 전달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또 한 시대를 호흡하며 뜻을 함께 세우고 경쟁했던 견훤(서인석),궁예(김영철)와의 관계를 그려나가는 데도 중점을 두겠다는 그는 KBS-2TV ‘야망의 전설’에서 얌전한 귀공자 이미지를 벗고 선굵은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전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임병선기자]
  • KBS-2 ‘…코미디 파일’ 북한의 대중문화 변천사 추적

    드라마는 ‘종달새’,에로영화는 신상옥감독의 ‘소금’,가요는 ‘휘파람’,‘귓속말’등….북한의 인기 대중문화 목록이다. KBS-2TV ‘김병찬,장진영의 시사터치 코미디파일’(밤10시55분)은 11일 ‘김한석의 최종분석’코너를 통해 90년대까지의 북한 대중문화 변천사를 소개하는 르포를 마련했다.중간중간 귀순자 인터뷰,북한 인기 드라마·코미디 재연 등을 곁들여 흥미를 배가한다. 냉전붕괴의 90년대,북한 안방극장도 사랑타령과 청춘물의 점령이 뚜렷한 게현실이다.‘종달새’는 최근 유행 장르가 된 TV소설.하지만 우리식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며 유경애라는 유명성우가 남녀노소 목소리를 독점 더빙,한편의소설을 보는 듯한 데서 붙여진 명칭. 북한영화에서의 노출신은 키스 정도.그나마 양산으로 가리는 게 대부분이다. ‘소금’에서 최은희가 허벅지를 드러냈을 때 북한 총각들은 충격파에 휩싸였다고.속도감있는 트렌디를 수출해도 이곳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관객들이한사람 죽는데 3∼4분씩 걸리는 ‘느림의 미학’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 ‘꽃파는 처녀’의 홍영희,‘도라지꽃’의 오미란 등 ‘인민배우’와 스타감독이 된 신상옥씨 화보도 곁들여진다. MC들이 빨간색 한복을 차려입고 사회를 보는 쇼프로,덩크슛을 꽂아넣기로,드리볼을 내몰기로,패스를 연락으로 말바꾼 농구중계 장면도 보여준다.북한 귀순자들은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우선 뉴스가 나쁜 사건을 보여주는 게 이해가 안간다.북에선 뉴스는 선동의 수단이기 때문에 안좋은 소식은 나갈 수 없다. 권선징악이 뚜렷한 북한 작품과 달리 나쁜일 하는 사람이 때로 벌을 안 받는다는 것도 의문점.이들은 영화‘물 위를 걷는 여자’등처럼 친구의 남편을사랑하는 건 북에선 있을 수 없다고 이구동성.또 북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조차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극을 보면 누가누군지 모르겠단다.영구,빨간 양말,배도환 등 바보 감초들의 인기요인도 미스테리. 프로를 맡은 김웅래PD는 “지난 10월 북한 위성TV 개방을 기점으로 북한 대중문화를 짧게나마 점검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면서 “과거 동서독의경우처럼 우리도 통일의기틀이 전파의 자유로운 왕래에서부터 놓여졌으면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손정숙기자 jssohn@
  • 성동구, 생활한복 입고 전통을 배운다

    어린이들이 개량한복을 입는 어린이집이 탄생한다. 성동구는 지난해 11월 착공한 성수1가1동의 구립 ‘진터마루 어린이집’을완공,10일 개원한다. 사업비 13억여원을 들인 이 어린이집은 연면적 160평에 지하 1층,지상 3층규모로 지어졌다. 관내 생활보호대상자 가정의 어린이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일반가정 어린이도 사설 어린이집보다 보육료가 훨씬 싸다. 성동구 관계자는 “어린이들에게 고유의 미풍양속을 가르치기 위해 생활한복을 입히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창동기자
  • [대한광장] 준법이 상식화되는 사회로

    1517년 10월31일은 세계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어냈다.독일 동북부의뷔텐베르크시의 성곽교회 정문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자보가 나붙었다. 대자보는 95개 항목에 걸친 교회의 개혁 요구 문건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신의 은총으로 사죄받고 구원받는다는 명제가 유난히 강조되었다.말하자면 인간은 신을 믿음으로 사죄받는 의로움에 이르고 믿음에 대한 신의 은총이 의롭게 되는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95개조 개혁 요구 대자보는 당시 교회가 추진하던 ‘면죄부’ 관행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취소를 요구하고 있었다.사죄받아 의롭게 되는 면죄부를 일정액의 헌금을 받고 팔고 있었던 것이다.요즈음 용어로 표현하면 일종의 범칙금이나 벌금 또는 보석금에 다름아니다.이런 면죄부 구매를 당시에는신이 기뻐하시는 선행의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고 있었다.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지만 동시에 면죄부 구매라는 선행을 통해서도 구원받는다는 변질된신앙이 횡행했던 것이다. 중세기를 가리켜서 기독교왕국이라고도 하고 윤리도덕의 암흑기라 표현하기도 한다.당시 기독교는 동로마제국을 중심한 비잔틴문화권을 휩쓸던 ‘정교회’가 하나였다.정교회는 지금도 북아프리카,중동지역,동유럽지역의 주력기독교로 군림하고 있다.서로마제국의 라틴문화권은 오늘날의 서유럽을 중심으로 삼고 있었고 이곳에는 ‘천주교’가 주력 기독교로 자리해 왔었다. 종교개혁의 불길은 서로마 라틴문화권의 천주교 한복판에서 일어났고,당시베네딕트수도원 수도승 겸 신학교수로 명성을 날리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대자보를 통한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기존의 천주교를 비판하고 갈라져 나온 저항그룹이 만든 교회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이름한다.천주교가 구교라면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신교를 일컫는다. 종교개혁의 불길은 여러 나라로 번져나가면서 개혁의 지도층과 나라의 형편에 따라 여러 명칭의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장로교,감리교,침례교,성결교 등등 다양한 이름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그런데 신교의 모태와 뿌리는 역시 루터의 이름을 따라 형성된 루터교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482년 동안 갈등을 빚어온 신·구교의 분열 역사를 치유코자 천주교의 본산인 로마 교황청과 종교개혁의 발상 교회로 자부하는 루터교의 세계연맹이 수년 동안의 작업 끝에 최근 공동선언을 통해 교회일치의 거보가 내디뎌졌다. 종교개혁 신학을 정립하면서 ‘오직 신의 은총’으로 구원받음을 선언했던독일의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양쪽 교회가 모여 ‘오직 신의 은총으로’와 동시에 ‘신의 은총에 힘 입은 인간의 선행으로’를 추가함으로써 일종의 타협적 공동선언을 만들어낸 것이다.특히 루터교나 일부 신교 교파들 사이에서반대와 저항이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긍정적인 화합과 일치의 계기를 이룬것이라 보고 싶다. 종교개혁의 일면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인간의선행을 면죄부 구매와 연관시킨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성당 건축과 유지비용충당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죄과가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원인 중의 하나였다는 것도 종교의 종교다운 개혁을 위해서는 좋은 계기였을 것이다.482년이 지난 오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신의 은총에 힘 입은 선행은 어떤 경우든 면죄부 판매 같은 망발은 인정치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의 선행의 최소한도 규범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준법이 선행이다.그런데 정치권력은 법을 권력으로 사버린다.초법적 정치범죄가 횡행한다.부자는 법을 돈으로 사들인다.매수가 그것이다.정경유착의늪에서 우리 기업과 재벌이 허우적거린다.정치가 휘말린다.공무원과 업소가불법유착하여 법을 사고파는 행태 때문에 인천의 호프집이 불이 나고 수십명의 젊은이들이 불에 타죽는 비극이 생겼다.씨랜드 참사가 그렇고,멀리는 성수대교 붕괴의 비극이 그랬다. 법만이라도 지키는 사회가 필요하다.하지만 21세기에는 ‘신의 은총에 힘입은 선행’이 요구되듯 ‘하늘 뜻을 따르는 법’이 요구된다.초법,탈법,범법이 자리할 곳이 없는 하늘의 뜻이 받쳐주는,법이 상식화되는 사회가 우리들의 미래사회일 것이다. [박종화.기독교장로회 총무]
  • [외언내언] 인사동 길

    현대도시들은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설계되지만 구불구불 아기자기한 골목길에 사람들은 향수를 느낀다.역사의 향기가 밴 골목은 그래서 관광명소가 된다.유럽 관광안내 책자들은 그런 골목을 빼놓지 않고 소개한다.그 고장의 전통과 문화,그리고 생활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스톡홀름 구(舊)시가지의 감라스탄처럼 골목길이 얼마나 좁은가가 화제가 되는경우도 있다. 서울에는 인사동이라는 멋진 골목이 있다.종로구 안국동 로터리에서 종로2가 탑골공원 3거리까지 약 1㎞에 이르는 길이다.이 길을 등줄기 삼아 양옆으로 미로처럼 뻗어 있는 20여개의 좁은 뒷골목까지 포함해서 흔히 ‘인사동길’‘인사동 골목’으로 부른다.화랑과 골동품점·필방·표구점·전통찻집·한식집 등이 고만고만한 규모로 오밀조밀 늘어서 있어 서울 어느 곳에서도느낄 수 없는 옛맛을 간직한 이곳은 이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방문한명소다. 그러나 이 전통문화 거리의 앞날은 불확실하다.건물 주인이나 땅 주인이 바뀌면 전자오락실나 호프집이 들어서는 등 거리 모습이 바뀌기 때문이다.인사동 골목의 집들 가운데 약 70%가 한옥이지만 가회동처럼 보호대상은 아니다. 게다가 당국마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좁은 골목길을 넓히고 막힌 골목을 뚫어 ‘시민들의 통행편의’를 돕는다는 엉뚱한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이 계획은 시민단체와 지역상인들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지만 인사동의 불안한 앞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사동길 등줄기 한복판에 있는 400여평의 땅과 부속건물이 최근 팔려나가이 지역의 ‘현대적 개발’에 대한 우려가 다시 일고 있다.이곳에 자리잡은전통문화 업소 12곳이 내년 3월까지 가게를 비워야 하게 됐다는 것이다.현대적 빌딩이 들어서면 임대료가 오르기 때문에 화랑·골동품 가게 등이 계속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다.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인사동 모습이 바뀌어가면 인사동이 그 정취를 잃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인사동이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하겠지만 현재로선 인사동의 땅임자나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작해야 고도제한 규정에 따라 5층 이상 건물만 못짓게 할 수 있을 뿐이다.결국 성숙한 시민의식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마침 지난 일요일 인사동에서는 종로연대 발대식이 있었다.서울YMCA·인사전통문화보존회·도시연대·조계사 등 종로에 뿌리를 내린 4개 단체로 구성된 종로연대는 인사동을 포함한 서울 북촌지역의역사와 문화를 지켜 우리 아이들이 서울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게 하려 한다니 그 활동에 우선 기대해본다.아울러 당국도 인사동을 지키는 것이 개인 재산권을 더욱 보호받는 길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임영숙 논설위원
  • [독자의 소리] 시민공원 관리자 이용객 배려하는 자세를

    며칠전 탑골공원 앞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기다려도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아 공원에 들어가보니 공원안은 가로등이 모두 꺼져 어두웠다. 그때 마침 문닫을 시간이니 ‘지금 즉시’나가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공원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슨 들어오면 안될 곳에 들어온 사람 취급을 하듯느닷없이 권위적인 목소리의 안내방송은 기분을 상하게 했다. 공원관계자들에게 당부한다.공원 마감시간 전까지는 불을 켜놓아야 한다.아직 문 닫지도 않은 공원이 너무 어두워 자칫 종로 한복판에서 범죄라도 일어날까 걱정스럽다.또 방송이 필요하다면 보다 친절한 목소리로 녹음해 마감시간 20분전부터 몇차례에 걸쳐 안내방송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문수[서울 서초구 방배2동]
  • 관악구 29일 합동고희잔치

    구청과 주민들이 하나가 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한 고희(古稀) 잔치를 벌이기로 해 화제다. 관악구(구청장 金熙喆)는 평소 돌보는 가족이 없어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있는 저소득 노인들을 위한 ‘효나누기 합동 고희잔치’를 29일 봉천4동 한솔뷔페에서 열기로 했다. 구청과 주민이 함께 준비한 이날 행사에는 올해 70세를 맞는 노인 50명이초청됐으며 이들 전원에게 한복을 무료로 맞춰줬다.관내 주민들로 구성된 ‘관악구 복지후원회’에서는 기념품을 마련했다.또 관악문화원 전통무용반 단원들이 찬조출현,노인들이 좋아하는 판소리와 민요 등을 부를 계획이다. 아울러 참여노인을 대상으로 장기자랑을 마련하는 등 다채로운 여흥도 마련돼 있으며 특히 구청 행정차량 2대가 각 가정을 돌며 노인들을 직접 실어나를 예정이다. 조덕현기자 hyoun@
  • 시드니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조선시대 문화제 90점 출품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일 뿐 아니라 문화예술의 제전이기도 하다.2000년 9월15일부터 10월1일까지 열리는 시드니 올림픽도 예외는 아니다.시드니 올림픽문화예술축전은 8월19일 시작되어 9월30일까지 계속된다. 세계각국에서 모인4,000여명의 예술가들이 53개의 비중있는 공연과 50개의 전시회를 갖는 한편시내 45개 장소에서는 갖가지 축전을 여는 등 400여가지 행사가 펼쳐진다. 특히 한국은 퀸스랜드 박물관과 파워하우스 박물관에서 국보급을 포함한 명품 도자기와 서화가 대거 출품되는 ‘조선시대 미술전’을 갖고,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이 ‘보자르 트리오’의 일원으로 아시안 유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한몫을 하게된다. ‘조선시대 미술전’은 내년 6월16일부터 8월20일까지 브리스번의 퀸스랜드박물관에서 먼저 호주국민들에게 선보이고, 9월8일부터 2001년 1월28일까지는 올림픽 공식프로그램으로 시드니의 명물인 파워하우스 박물관에서 세계인들을 만난다.이 전시회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케치 전’,그리스의 ‘고대 그리스 조각·도예전’과 함께 조직위원회로 부터 “값을 매길수 없을 만큼 소중한 전시품목”으로 극진히 예우받고 있다. 이 전시회에는 국보 66호인 백자철화매죽문항아리와 보물 1060호 백자철화수뉴문병,보물 1069호 분청사기조화수조문편병 등 도자기를 중심으로 정선과김홍도,강세황의 그림 등 주요문화재 80∼90점이 출품된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또 김덕수패 사물놀이가 특별공연을 하고,한국음악 워크숍도 갖는 등 이날 만큼은 시드니 한복판에서 한국 문화축제가 벌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올림픽 문화예술 축제는 18일 원주민과 개척자의 첫만남을 상징하는환영식에 이어 19일 수퍼돔에서 열리는 ‘개막 기념 콘서트’로 본격화된다. 핀란드 출신의 거장 에도 데 바르트가 말러의 교향곡 8번을 지휘하는데,‘천인 교향곡’이라는 이 곡의 별명에 걸맞게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벵게로프 등세계적인 솔로이스트 8명을 포함하여 모두 1,000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번 축전에는 개막 콘서트에 나서는 시드니 심포니를 비롯하여 에사 페카살로넨이 지휘하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리카르도 무티의 스칼라 가극장,뉴질랜드 심포니,호주 챔버 등 모두 7개의 오케스트라가 참여한다. 호주 국립 오페라단인 ‘오페라 오스트랄리아’는 ‘시몬 보카네그라’‘카프리치오’ 등 5개 작품을 공연하고,영국의 DV8 신체극단과 독일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부퍼탈무용단,대만의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도 초청됐다. 이밖에도 연극,재즈,합창,영화,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걸맞는 세계적인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레오 쇼필드문화예술축전 예술총감독의 설명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남산공원‘야생동물의 낙원’…현재 59종 서식

    서울의 한복판 남산이 야생동물들의 낙원으로 바뀌고 있다. 19일 서울시와 남산공원관리소에 따르면 현재 남산공원에는 고라니와 솔부엉이를 비롯해 다람쥐,들쥐,조류 등 모두 59종의 야생동물이 살고 있다. 서울시가 추진중인 ‘남산공원 야생동물 증식사업’에 따라 지난 6월 처음방사된 고라니 4마리는 당초 우려와 달리 남산 생태계에 잘 적응하고 있는것으로 조사됐다. 남산공원관리소는 앞서 지난 5월 서울대공원 인근 청계산에서 채취한 산개구리와 도롱뇽 알 수백개씩을 방사했고 야외식물원 연못에는 흰뺨검둥오리새끼 12마리를 풀어놓았다. 관리소는 흰뺨검둥오리 새끼가 아무 탈없이 잘 자라자 8월에는 한국조류협회의 협조를 받아 청둥오리를,지난달 14일에는 솔부엉이 7마리를 방사했다. 솔부엉이는 서대문구 신촌동과 성북구 장위3동,국방부 영내 등지에서 부상당한 상태로 구조된 것들로 방사후 빠른 적응상태를 보이고 있다. 관리소는 야생동물이 이처럼 늘자 이들의 서식환경을 알맞도록 가꿔주기 위해 공원내 모든 지역에 걸쳐 귀화식물을 제거했고 자연학습장 주변에 생태연못도 만들었다. 19일 공원을 찾은 시민 이승혜(서초구 서초동)씨는 “서울 한복판의 야산에서 야생동물들을 관찰할수 있다는게 신기하다”면서 “아이들도 동물원이나식물원의 꽉 막힌 공간에서 관찰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제형(李濟炯) 남산공원관리소장은 “멀지않아 남산을 찾는 시민들이 각종야생동물들의 뛰노는 모습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며 “야생동물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대형 전기히터를 설치하고 냇물 결빙으로 마실 물이 부족하지않도록 물받이통도 달아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창동기자 moon@
  • [굄돌] 영화배우 문희의 눈물

    종종 젊은 감독과 중견 감독을 만날 때마다‘미워도 다시한번’의 문희를출연시키보라고 권한다.감독들은 한결같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문희’라는배우의 컴백은 김지미 윤정희 엄앵란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한다. 벌써 나이를 들먹이는 것이 부끄럽다.하여튼 10대 초반의 소년이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문희의 눈물을 보았다.그후로 문희가 출연하는 영화만 보면 눈물이 흘러 나왔다.자연인으로 태어나 나의 의식의 최초눈물은 이때가 아닌가.영화를 보는 일은 문화적 의식이고 문화적 의식은 곧성장기 통과의례와도 같다.이 시기의 의식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눈물 흘리는 습관은 기도의 시간과도 맞먹는다. 간혹 아내와 함께 TV드라마,논픽션 드라마,‘편지’‘약속’같은 영화를 보노라면,결정적인 순간에 아내가 이렇게 말한다.‘또 눈물을 흘리고 있지?’라며 나의 눈가에 자기 얼굴을 갖다댄다.문희의 눈물을 보며 자란 나는 오늘영화평론가가 되었다. 절대 여자를 울리지 말자!이감상주의가 성장하여‘절대 타인의 가슴에 상처를 주지 말자’는 인생관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나는 문희에게 감사한다.많은 여자 배우가 나타나고 사라졌다.반드시 멜로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숱한 여성캐릭터를 연기한 여배우들이 눈물을흘렸건만,유독 문희의 눈물만이 맑게 비쳐지고 내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기능을 하는 걸까.잘 알 수가 없다.그토록 좋아하는 내 인생의 배우 문희를 딱한번 실제로 만나는 기회가 왔다. ‘아,나는 행복하다’라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그 옛날 스크린에 비친 심상이 그대로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세월과 더불어 들려온 그녀의 인생 곡절 많이 들어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 안에서 태우고 자기를 가꿔온 배우가한국에도 있구나. 8월19일 영상자료원에서 그녀에게 받은 사인을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 자랑했다.세월의 먼지가 덮힌 나의 앨범에 그녀의 한복입은 브로마이드를 꽂은지꼬옥 30년만의 경사다.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에 문희를 사숙하는 나는 행복하다. [양윤모.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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