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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大韓每日申報/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는 한국 민족운동사와 언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우선 한국언론사의 측면에서 이 신문은 몇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1904년 7월18일 창간돼 1910년 5월21일 일본 통감부에 팔리기까지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 민족지였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총 6면에 4개면은 영문,2개 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으나 이듬해 8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분리했고 1907년 5월에는 한글전용 신문을 새로 발간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한꺼번에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발행부수도 당시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부수를 합한 것의 2배가 넘는 1만부를 기록했다. 민족운동사의 측면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항일 구국의 선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을사조약의 강제체결,高宗의 헤이그 밀사 파견과 퇴위,구한국 군대해산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것은 물론 고정란을 두고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기사와 사설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당시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했음을 증언했을 정도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성격은 발행인 裴說(Ernest Thomas Bethell)이 영국인이어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고 일본측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도 기인하지만 신문발간에 참여했던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 우리 선각자들의 역할이 컸다. 裴說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梁起鐸은 전무·주필·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의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항일논조를 주도했다.부친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만든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관여했던 그는 한학의 바탕에 양학문을 접목하고 동학당과도 관련을 맺었던 우국지사였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총감독으로 활동했고 일제 강점이후 서간도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한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던 朴殷植은 梁起鐸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신교육 구국,사회관습 개혁,대동사상등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는데 앞장섰고 나중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역사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했다.또 朴殷植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丹齋 申采浩는 민중계몽을 위한 사설과 함께 ‘독사신론’등 역사관계 논문을 연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그의 대표적 저서 ‘조선상고사’의 주체적 민족주의 사관은 이때 싹텄다.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태어나는 서울신문의 일원으로서 민족과 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섰던 선배들의 꿋꿋한 기상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민다.
  • 新구국운동 중심돼라/鄭晋錫 한국外大 교수·언론사(특별기고)

    ◎민족紙 ‘대한매일’ 재탄생에 부쳐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던 한말 구국의 필봉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던 민족언론의 본산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영국인 사장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과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모였던 이 신문은 민족진영의 마지막 보루였다.일본 헌병사령부는 러일전쟁 후 민족언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으나 대한매일에는 검열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비통한 소식을 들은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검열을 받지 않고 황성신문에 게재한 다음에 밤새 통음(痛飮)하며 목놓아 울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고 신문은 정간당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대한매일은 바로 문제가 된 황성신문의 논설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진상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헤이그에 갔던 이준 열사가 이국 땅에서 한을 품고 분사한 소식과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고종의 비극,구한국 군대의 해산 등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했던 신문이 대한매일이었다.용기 있는 기사,피끓는 논설,시간을 다투어 발행한 호외 등을 보고 국민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직필정론’의 표본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한매일이었다.통감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대한매일의 직필정론이 의병들을 더욱 격동케 한 것은 사실이었다.오죽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의 기사 한줄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겠는가.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던 것도 대한매일이었다.전국의 성금이 대한매일로 쏟아져 들어왔다.나라의 빚을 갚자는 뜨거운 정성을 담아 유생과 상류 지도층에서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탁했다. 대한매일은 국한문판,한글판,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3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일이었다.일본은 대한매일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지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공보비서이자 영어신문 편집자인 즈모토(頭本元貞)를 불러다가 서울프레스를 직접 발행해 보았으나 대한매일을 당할 재간은 없었다.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협박하고 회유하면서 신문의 배포를 방해하는 수법도 써 보았다.그러나 국민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발행되는 신문의 붓을 꺾을 수는 없었다.수년간에 걸친 일본의 끈질긴 요구와 공작으로 마침내 배설은 3주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상해까지 가서 복역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통감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신문의 편집과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였다.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일제의 강점 후에는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과 대한매일에 근무했던 애국지사들을 또다시 투옥하는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빛나는 전통 계승을 대한매일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태풍권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만회할 수 없었다.나라가 망하니 민족언론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최대의 민족지였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한일합방 후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대한매일은 다시 살아났다.새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여! 민족언론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위기에 처한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라.신 구국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라.
  • 눈길끈 金 대통령 행사장의 3人

    ◎金芝河씨 시 일역 3공때 눈엣가시로 “명예 회복한 느낌”/조국민주주의 염원 김 대통령 계속 도와 20년간의 아픔 회상 ▷쓰카모토◁ 【도쿄=黃性淇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방문한 첫날인 7일 저녁 金대통령 환영행사에 참석한 몇몇 사람들은 깊은 감회에 젖었다. 일본 황궁에서 열린 金대통령 내외를 환영하는 일황 초청 만찬에 초대된 쓰카모토 이사오(塚本勳·64·오사카 외국어대 교수)씨.쓰카모토씨는 ‘조선어대사전’을 펴낸 일본 최고의 한글학자. 그러나 朴正熙정권때 반체제 시인이던 金芝河의 시나 동화 등을 번역,일본에 소개하면서 독재정권의 눈밖에 났다.한국에 가면 24시간 감시를 당하는 등 ‘북한첩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는 “나같은 사람을 어떻게 초대했는지…”라고 당혹해하면서도 “명예가 회복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趙活俊·金鍾忠씨◁ 도쿄 시내 호텔에서 재일동포와의 간담회에 참석한 趙活俊(68·도쿄 거주)·金鍾忠(76·〃)씨.이들은 행사를 마친 뒤 자리를 옮겨 술잔을 나누며 옛 생각에 잠겼다.趙씨는 ‘金大中 납치사건’ 당시 金대통령이 운영하던 한국민주제도통일문제연구소(한민통)의 일본 책임자였고,金씨는 金대통령의 하의초등학교 친구이자 먼 친척.우연히 이날 행사에서 만난 이들은 어려웠던 지난 20여년을 회상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趙씨는 “70년대 초반 金대통령의 통일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에 감동, 따르게 됐다”면서 “역경의 세월을 딛고 대통령이 되어 일본에 오신 모습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金씨도 “멀리서나마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들은 노력해왔다”며 이젠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 오늘 552돌 한글날/세종문화회관서 기념식

    훈민정음 반포 522돌 한글날 기념식이 9일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와 박준규 국회의장 김용준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허웅 한글학회이사장 등 국어학계 인사,시민대표 등 3,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또 오후 2시에는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글학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공동주관하는 ‘한글의 역사와 미래’ 특별전이 예술의 전당 예술자료관 1층 전시장에서 열린다. 이와 함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한글을 주제로 한 밀물현대 무용단의 창작무용이 공연되며,세종대왕기념관에서는 제6회 한글 글자체 공모전이,10일 한글회관에서는 전국 국어학 학술대회가 각각 개최될 예정이다.
  • “우리땅 한글이름으로”/한글땅이름학회 새주소 지정사업 9개월째

    ◎도곡동→독구리 역삼동→맛고을 청담동→원앙길/일본식 지명 등 1,460여곳 새 이름 붙여줘 “○○동 ○번지 앞 골목길보다는 감나무길·갈대길·대추나무길이 더 정감 있고 운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말 땅이름을 짓는 일에 힘쓰고 있는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의 한글 예찬론이다. 이 학회는 지난해 2월부터 ‘새 주소 지정사업’을 추진중인 행정자치부 및 한글학회와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1년여 동안 연구한 끝에 서울 강남구와 경기도 안양시에서 각각 960개와 500여개의 길에 새 이름을 붙여줬다.지금은 경기도 안산시와 충남 공주시,충북 청주시,경북 경주시 등 4개 시의 길 4,000여개에 대한 기초 조사를 하고 있다. 우선 일본식 이름을 우리 이름으로 바꾸는 데 주력하고 있다.배회장은 “수백년 동안 써온 우리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른 지 반세기도 채 안됐지만 사람들은 옛 이름을 모두 잊어버렸다”면서 “일제시대에 일본식으로 바뀐 우리나라 땅이름 31% 가운데 절반 가량은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예전에 돌이 많아 ‘돌골’로 불렸던 서울 강남구 도곡동길은 ‘돌구리’로 바꿨다.삼성동 3번지 일대는 배가 닿았던 곳이라 해서 ‘배곳이길’로 정했다. 새로 조성된 거리는 거리의 특성에 맞는 순우리말 이름을 골랐다.현재 음식점이 많이 들어서 있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679번지 일대는 ‘맛고을길’,예식장이 많은 청담동 4번지 길은 ‘원앙길’로 지었다.포이동 163번지는 ‘갯벌길’로 했다. 땅이름을 되살리는 데는 옛 문헌을 뒤지거나 토박이 주민들의 증언도 참고했다.순우리말로 고치기 어렵더라도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 일도 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는 욱천(旭川)은 ‘넝쿨이 무성하다’는 뜻의 ‘만초천(滿草川)’으로 바꿨다.종로구 인왕산(仁王山)의 ‘왕’자도 ‘旺’자로 쓰던 것을 ‘王’자로 옛 표기를 되찾아 고쳐 쓰도록 했다.
  • 우리가 지켜야 할 한글(사설)

    다시 한글날을 맞는다. 오늘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훈민정음),즉 한글을 만들어 널리 펴신지 552돌이 되는 날이다. 다행히 올해 한글날을 앞두고 우리 말과 글의 발전에 도움이 될 책 두권이 발간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용례중심의 실용사전인 ‘연세한국어사전’과 음성인식 컴퓨터 개발에 도움이 될 ‘세종대 음성학’이 그것이다. ‘연세한국어사전’은 기존 국어사전의 부족한 점을 메워줄 것이라는 점에서,그리고 ‘세종대 음성학’은 정보화 시대에 한글 기계화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작업이다. 두권의 책을 펴 낸 집필자들의 노고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이런 반가운 소식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글의 현주소는 우울하다. 세계화에 밀려 한글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정체불명의 신조어 범람과 한글의 잘못된 사용 등 우리 말 파괴 현상이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한자에 치였던 한글이 이제는 영어에 밀려 그 설 자리를 위협 받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이 즐겨 사용하는 컴퓨터 통신 대화방의 한글 오염은 매우 걱정스럽다. 단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거나 외래어를 남용하고 무리하게 줄인 말을 사용해 우리 말이 잡탕말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근(당연하다)’‘몰팅(몰래 하는 채팅)’‘20000(이만 안녕)’등 이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암호에 가깝다. 대중가요,영화제목,상호 간판등에서 영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교육과 함께 대중의 언어사용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언론에서도 로마자를 제목으로 그대로 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구 제국시대’에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고 있으므로 우리도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한다는 엉뚱한 주장이 한 소설가에 의해 제기돼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에는 현존하는 세계언어의 90%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글은 사라지는 언어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네스코는 지난해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우리 글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했는데 정작 우리가 한글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일이다. 언어는 그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최후 보루다. 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일은 겨레의 얼을 지키고 가꾸는 일임을 한글날 우리 모두 마음 깊이 새겨야겠다.
  • 安元奎·安顯景·金鉉九·金東寓·姜相湖/독립투사 5위 유해 봉환

    ◎미·일서 활동… 대전국립묘지 안장 일제 때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미주지역 독립운동가 安元奎 安顯景 金鉉九 金東寓 선생과 일본지역 姜相湖 선생 등 순국선열 5명의 유해가 28일 국내로 봉환됐다. 유해는 이날 오후 4시30분 김포공항에 도착,서울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임시로 안치됐다가 29일 오후 2시 대전국립묘지 현충관으로 옮겨져 金義在 국가보훈처장과 安椿生 광복회장,유족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된다. 이로써 해외에 안장된 독립유공자 179명 중 62명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왔고 49위의 묘소는 현지에서 단장됐으며 68위는 소재가 확인되지 않아 묘소확인작업이 진행중이다. 安元奎(1880∼1947),安顯景(1881∼1957),金顯九 선생(1889∼1967)은 각각 대한제국 말기 미국으로 건너가 군자금 조달 등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金東寓 선생(1896∼1988)은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에는 미주지역 ‘맹호군’ 대원으로 활동했다. 姜相湖 선생(1919∼1945)은 1941년 요코하마 전문대 재학중 창씨개명 및 한글폐지 반대운동에 앞장서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정부는 安元奎,安顯景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金顯九,姜相湖 선생은 건국훈장 애국장을,金東寓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 자민련 소장파 모임 삐걱/한글세대 7∼8명이 추진

    ◎총무가 나서 21명으로 확대/‘포럼 비전21’ 명명/초선·3선급 모두 반발 자민련 소장파 모임이 흔들리고 있다.결성도 하기 전에 의원들의 거부사태에 부딪쳤다.24일 발족식마저 불투명하다.친선 연구단체라는 결성 취지는 퇴색되고,갈등만 심화될 조짐이다. 소장파 의원들은 친선 연구단체를 준비해왔다.李完九 사무1부총장,鄭宇澤 의원 등 초선의원들이 중심이 됐다.당내 활성화라는 명분을 걸었다.‘노인당’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뜻이다.국민회의와 한나라당내 소장파 모임에 자극받아 출발했다. 이들은 ‘한글세대 모임’을 추진했다.정례적으로 모여 ‘젊은 아이디어’를 양산하기로 했다.그래서 재선의원들을 대상에서 뺐다.45년 광복 이후로 나이도 제한했다.7∼8명이 된다.소규모가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그랬다. 즉각 당내 반향을 샀다.호응도가 높아지자 具天書 원내총무가 나섰다.그는 대상을 늘렸다.재선은 물론 3선의원도 추가했다.또 姜昌熙 과기부장관 등 당출신 각료를 참여시켰다.참석대상은 21명으로 늘어났다.그 숫자를 따 명칭을 ‘포럼비전21’로 정했다.21세기를 대비하는 뜻도 된다. 일부 초선의원들이 반발했다.具총무가 주도하는 모임에 참여할 수 없다고 발끈했다.李부총장과 鄭의원은 24일 발족식에 불참키로 했다.3선의 李肯珪 의원도 난색을 표시했다.李의원은 “왜 내가 참석자 명단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했다. 사태가 갈등조짐으로 비화되자 朴俊炳 총장이 중재를 시도했다.具총무와 李부총장을 불러 화해를 주문했다.具총무는 “당내 활성화를 위해 대상을 확대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하지만 서로 얼굴만 붉히고 말았다는 후문이다.
  • ‘아래아한소프트회원’ SK대리점서도 가입

    한글과컴퓨터사는 지난 11일부터 SK텔레콤 행사 대리점을 통해서도 ‘아래아한소프트회원’ 가입을 받기 시작했다. 1만원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하는 사람에게는 한글815 특별판이 주어진다. 한컴은 전국 831개 SK텔레콤 행사 대리점에 각각 50개씩의 한글815판을 배포 완료했다.
  • 漢字 교육/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한자(漢字)를 둘러싼 실수나 웃지 못할 희비극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얼마전 전주시의 한 외곽에서 차량을 검문하던 의경이 운전자가 제시한 주민등록증의 이름중 ‘설(卨)’자를 보고 경찰청 상황실에다 “탱크처럼 생긴 한자인데 어떻게 읽느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자깨나 공부했다는 사람도 읽을 때와 쓸 때가 헷갈릴 적이 많다. 어쨌든 한자문맹 현상은 지식수준 탓이 아니라 학교에서 제대로 한자를 가르치지 않은 때문이다. 지난해 전국 4년제 49개대학 61개 학과 졸업생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 한자능력검정회가 치른 한자시험에서 아홉 구(九)자를 못쓰는 사람이 무려 55%나 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지 못하거나 부모이름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했다. 전에는 대학생들이 교재에 나오는 한문을 읽지 못하면 창피하게 여겼으나 지금은 ‘한글세대’를 내세워 모르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북아(東北亞)가 새 세기의 문화경제를 함께 이뤄가는 시대다. 베이징(北京)이나도쿄(東京)를 여행하면서 한자로 된 간판이나 표지판을 읽지 못한다면 전혀 자랑스러울 것이 못된다. 북한은 68년이후 문화경제적 고립을 실감하여 고교와 대학과정에서 각각 1,500자씩 3,000자의 한자교육을 시키고 있고 일본은 중학교까지 상용한자 1,945자,사회에서는 3,000여자를 이용하여 문자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우리도 정식과정에는 없지만 초중고에서 학교재량으로 1,800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방치된 감이다. 경찰청은 주민등록증에 기재된 한자이름을 읽지 못하거나 잘못 읽어 업무수행의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잦아지자 전국 5만여명의 의경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한자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자를 모르면 한자가 7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말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 전통을 제대로 아는데도 도움이 되지못한다. 한자를 읽지못하는 층의 85%가 ‘한자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한 것만 봐도 한자교육의 불가피성을 절감할수 있다. 한글전용이니 국한문 혼용이니의 논쟁을 떠나 실생활에서 불편한가 아닌가가 먼저 문제다. 일시적 혼란이 따르더라도 실용적인 한자교육의 시급성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라는 생각이다.
  • 국민회의 부실기업 정리 공청회 주제발표

    국민회의는 8일 국회에서 ‘부실기업 재건 및 정리촉진방안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참석자들은 부실기업의 효율적 재건과 정리를 위해 도산법 등 법률 정비, 채무상환구조 개선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다음은 주제발표 요지. ◎경영투명성 제고 방안/尹鍾圭 회계사/“자산·부채 실사 정보 공개해야” 회사정리 및 화의신청 기업에 대한 자산·부채 실사 보고서가 공정성을 가질 수 있도록 절차 개시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조사돼야 한다.법원에 공시실을 설치,관련자료의 경중에 따라 공개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외국인 투자와 인수·합병 관계법령 및 규정은 변경이 잦은 편이나 이런 정보를 외국인이나 일반 투자자들이 쉽게 접하기 어렵다.한글과 영어로 웹사이트를 설치,최신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부도거래처에 대한 외상 매출채권은 거래처의 중소기업 여부와 해당 채권의 부도발생일 전후 여부에 관계없이,부도어음과 동일하게 처리해야 한다.즉,부도 발생일로부터 6개월 경과시 대손처리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채권 상각 특별계정을 이용하여 50% 손금 산입을 용인,기업체 질의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기업구조 건전성 확보를 위해 회사정리절차 또는 화의 진행,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기업 등에 대해 결손금 소급공제 특례를 인정해주는 것도 바람직하다.워크아웃 등의 협약에 의해 추가대출하는 경우 동일인 대출한도 예외를 인정하도록 개선돼야 한다. 금융기관의 경우 주식투자 한도와 유가증권 총액투자한도가 규제되어 있으나 앞으로 출자전환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다.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한 자산 재평가의 경우 자산 재평가세를 면제하거나 일부 감면할 필요가 있다. 부실기업의 가공채권등 분식결산에 대한 책임은 형사상의 책임으로 소추하고 세법상으로는 기업에는 부담을 주지 않도록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법제 개선방안/韓敏 변호사/“도산법제 통합… 절차지연 최소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부실기업이 급증하면서 회사정리나 화의를 신청하는 기업도 늘었다.현행 법에선 법정관리,화의,파산절차중하나를 선택해 절차를 진행하다가 다른 절차로 바꾸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든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처럼 도산법제의 통합 또는 본격적인 정비작업이 필요하다.정비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한시적인 운용을 전제로 해 경우에 따라 특별법 제정을 하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회사정리 절차 지연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한 방안으로 보전처분의 생략 및 개시결정 기간의 단축을 생각할 수 있다.또 주식소각제도 개선,관리인의 경영능력 제고,구주주의 경영참여 기회제공 등을 통해 회사정리절차를 변경,화의절차로 몰리는 기현상을 치유할 필요도 있다. 또 회사정리절차로부터 파산절차로 이행할 때 각종 절차를 속행하면서 청산절차를 병행하는 것도 절차지연을 최소화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볼수 있다.3∼6개월정도 걸리는 법원의 절차개시 결정기간을 1개월 안팎으로 줄여 절차지연으로 인한 폐해를 줄여나갈 필요도 있다. 회사정리절차 개시후 채무자의 재산과 부채에 대한 엄정한 실사가 진행돼야 한다.이어 채권자와의 채무상환조건 협상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수 있도록 함으로써 실현가능한 부채상환계획(채무경감,출자전환,M&A 등)이 수립되도록 해야 한다. 또 구(舊)주식의 강제소각제도 개선,관리인의 경영능력 제고 및 인센티브 부여,구주주에 대한 경영참여 기회 제공 등을 통해 현행 법정관리제도에 유연성을 줌으로써 화의신청 폭증현상을 근원적으로 해소할 필요가 있다. 회사정리절차에서의 구주(舊株) 소각문제와 관련,‘부채’와 ‘자산’의 개념 및 그 산정방법을 대법원 예규 등에 명시해보는 것도 좋다.또 ‘부실경영책임’에 대해서는 사정(司正)제도 및 형법,상법상의 규정을 통해 묻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 움직이는 서예 독특한 아름다움

    ‘움직이는 서예전’. 서예가 유경식씨의 서(書)예술 이벤트 ‘유경식의 열린 서예전’이 경기도 성남시 분당 중앙공원에서 열린다(20일까지). 서예는 벽에 걸어 놓고 글의 내용이나 글씨의 조형성 등을 감상하는 정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이처럼 야외로 끌고 나와 관객들이 직접 만지면서 감상하도록 한 것은 이번이 국내 처음. 서예의 이벤트화,장식이 아닌 기치(旗幟)로서 서예,움직이는 서예로의 연출,민족 고유의 풍습의 순수예술로 환골탈태 등을 위해 마련됐다. 유씨의 예술철학에 맞게 한글의 모음이나 자음과 닮은 갖가지 형상을 깃발로 내건 이번 설치전은 한마디로 그리예술의 극적인 퍼레이드다. 장례식에 사용하는 만장(輓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0346)716­6104
  • 읽기 쉬운 ‘삼국사기’ 출간/전남대 이강래 교수 2년간 작업

    ◎번역본의 한문·한문투 한글로/기존 책들의 오류도 바로잡아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최고의 정사 역사서이다. 국역작업이 여러번 이루어졌지만 읽기가 여간 번거롭지 않다. 대부분 한문 또는 한문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길사가 최근 삼국사기를 현대 언어감각으로 옮겨 펴냈다. 사료로서 뿐만 아니라 읽히는 삼국사기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 출판사의 의도다. 그래서 순한글을 원칙으로 하되 한자사용이 불가피한 경우에만 괄호에 원문의 한자를 표기,한자 노출을 최대한 줄였다. 번역도 원뜻에 충실하되 현대어법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했으며 과거 번역본이 안고 있던 오류도 바로 잡았다. 주석도 본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한정했다. 번역작업은 소장 사학자 전남대 이강래(41) 교수가 맡았다. 2년간 이 일에 매달렸다. 민족문화추진회가 발행한 ‘교감 삼국사기’를 대본삼아 정신문화연구원이 발행한 ‘역주 삼국사기­감교 원문편’과 비교하는 형식으로 번역작업을 진행했다. ‘교감 삼국사기’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목판본 ‘임신년 간본’을 영인한 것으로,조선 중종 때 판각된 이 간본은 ‘정덕본’으로 불리기도 한다. 새로 나온 삼국사기는 번역본 2권과 원본 1권 등 모두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번역본 제1권은 신라본기 12권과 고구려본기 10권으로 구성됐으며 제2권은 백제본기 6권과 연표 3권,잡지 9권,열전 10권을 포함하고 있다. 제3권은 삼국사기 원문을 수록한 책으로, 기존 인쇄본이 오자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 목판본 원본을 두달간의 컴퓨터 작업으로 그대로 옮겨 오류 발생을 극소화했다.
  • ‘아래아한글’ 정품사용 흐지부지/불법복제품 여전히 활개

    ◎윈도우98·훈민정음 등 CD 단돈 만원에/부품업소도 매상노려 불법설치 부채질/단속에 한계… 소비자의식변화 따라야 지난 6월 있었던 ‘한글과 컴퓨터’사의 한글 개발 포기 파동 이후에도 불법 복제 컴퓨터 프로그램이 여전히 대량으로 나돌고 있다. 21일 상오 11시30분 서울 지하철 4호선 용산역.전자상가로 이어진 구름다리를 따라 어깨에 가방을 맨 10대 대여섯명이 무언가 팔려는 듯 서성대고 있었다. 행인들이 삼삼오오 지나가자 이들은 준비한 유인물 서너장을 통로벽에 붙인 뒤 “백업 시디(back up CD) 만원”하고 외쳤다.그러자 삽시간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이 파는 불법복제 CD의 종류는 10여가지.‘UTIL’ ‘전문 PRO’ ‘그래픽’ ‘CAD’ 등의 이름이 붙은 전문 분야의 복제품도 있었다.‘한글 윈도우 98’ ‘훈민정음 98’ 등 10여개의 프로그램이 복제된 것도 있었다.정품가격이 수십만원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담은 만원짜리 CD에 행인들은 절로 발길이 끌리는 듯했다. ‘고객’들은 대부분은 학생들이었고 더러 직장인도 눈에 띄었다.“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는 李모군(25·D대 무역학과 3년)은 2장을 사갔다. 판매원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게릴라식’으로 판다.100여장만 들고 행인들이 많은 길목에서 기습적으로 팔고 사라진다.다 팔면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서 물건을 갖고 다시 나타난다.손님이 요구하면 구입한 지 며칠 지났더라도 다른 것으로 교환해 주는 등 최소한의 서비스도 제공한다. 컴퓨터 부품을 판매하는 매장도 마찬가지였다.상인들은 ‘정품사용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정품을 쓰자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었다.그러나 잠시 뿐이었다.손님들을 끌기 위해 컴퓨터를 사는 사람들에게 예전처럼 불법으로 프로그램을 설치해 주고 있었다.‘한글’ 개발 포기 파동도 잊은 듯 했다. S컴퓨터 점원 金모씨(35)는 “한컴 사태 이후 한동안 정품을 사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흐지부지됐다”면서 “손님들은 프로그램을 설치해 주는 매장으로 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한컴’ 金廷修씨(30·여)는 “한컴 사태 이후 단속이 강화되기도 했지만한계가 있다”면서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복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 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에 적발된 업체도 95년 43개사,96년 151개사에서 지난해에는 720개사로 급증했다.한컴측은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의 복제품 점유율이 80%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러 한국문화실 설립 한마음/모스크바대 김연수씨 기금마련 바자주도

    ◎교수·정치인·유명연예인 동참/28일 예술의전당서 애장품 판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한국문화실을 설립하기 위한 바자회가 오는 28일 하루동안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앞마당에서 열린다. 유명 문화예술인을 포함,인기 연예인들이 대거 참여할 계획으로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 바자회가 열리게 된 것은 모스크바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방학을 맞아 최근 귀국한 김연수씨의 노력에 따른 것이다. 지난 94년 모스크바대학 비교문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김씨는 자료실 등이 없어 애태우는 이 대학 한국학 전공 학생들의 실정을 소개하고 관심있는 사람들의 뜻을 모았다.특히 모교인 수도여고 동창회에서 적극 나서 이같은 바자회가 준비됐다. 김씨는 첫목표로 5천달러 정도를 잡고 있으며 한국문화실을 만들어 자료실과 교수연구실 등 연구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김씨에 따르면 모스크바대학은 한국학과는 아직 독립돼있지 못하고 동남아­몽골­한국과에 속해 있으며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학부 대학원 합쳐 40여명.그러나 전용 연구실이 없어이들이 빈방을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반면 같은 과에 속한 말레이시아 전공의 경우 해당국 대사관에서 전용연구실을 설치,학생들의 교육을 돕고 있으며 독립과인 일본과는 대사관이 지원해준 60여대 컴퓨터로 컴퓨터교실을 개설,학생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대사관측에 수차례 문화실 개설과 컴퓨터지원을 요청했으나 진전이 없어 동창회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게 됐다”면서 “삼성문화재단도 이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조만간 한국학 전공학생들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바자회에는 앙드레 김 등 유명 디자이너,김혜수 채시라 최지우 고소영 이혜영 정혜선 차인표 신애라 손창민 고두심 이상아 등 남녀 탤런트,정선경 문성근 박정자 등 영화 및 연극인,노사연과 김무송부부 조영남 김수철 조용필 등 가수들이 평소 애용하던 물품들을 일반에 내놓게 된다. 또 차범석 문예진흥원장,김도수 단국대 총장,유민영 단국대 교수,작가이문열 등도 책자나 의상을 내놓는다.한글과 컴퓨터사에서는 컴퓨터소프트웨어를 제공하며 권영자 국회의원,김한길·최명길 부부 등도 참여한다.문의 706­0005
  • 정겹지만 낯선 소설속 우리말/토박이말·속담풀이 ‘소설어사전’나와

    ◎이인직서 전경린작품까지 샅샅이/월북작가·북한소설서도 뽑아 정리 “그것도 초짜뜨막 일이고 백정이라고 저승사자가 피해가는 법 있나? 굿하던 무당도 굿마당에서 나자빠지는 판에”(박경리 ‘토지’) “입에 마닐마닐한 것은 밤에 다 먹고 남은 것으로 요기될 만한 것이 피밤 여남은 개와 흰무리 부스러기뿐이었다.”(홍명희 ‘林巨正’) 소설 속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살려 써야할 고유어들이 수없이 많다.그러나 ‘의식없는’ 언어생활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그런 낱말들은 생경하기 조차 하다.‘초짜뜨막’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또 ‘마닐마닐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초짜뜨막은 잠깐동안,마닐마닐하다는 연하고 보드랍다는 뜻의 우리 말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토박이말,속담 등을 용례와 함께 풀어 설명한 ‘소설어사전’(김윤식·최동호 엮음)이 고려대출판부에서 나왔다.10년간의 자료수집과 3년동안의 제작기간을 거쳐 출간된 이 사전에는 모두 1만5,000여개의 어휘가 실렸다.이인직의 ‘혈의 누’(1906년)에서부터 지난 95년 등단한 전경린의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1,300여편의 작품이 분석대상이 됐다. 특히 분단이전 월북작가의 작품은 물론 분단이후의 북한소설에 나오는 말들도 엄선해 실어 관심을 모은다. 언어는 보통그 발달단계에 따라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생존어와 생활의 공식수단으로 활용되는 생활어,그리고 문화적으로 갈고 닦여진 예술어로 구분된다.일제하의 한글이 생존어의 단계라면,해방후 오늘까지의 한글은 생활어 단계라고 할 수 있다.이 사전은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민족어의 완성,곧 예술어로의 승화를 목표로 한다. 내둥내(이때껏) 구누름(못마땅해 혼자서 하는 군소리)가리단죽(다른 사람의 것을 가로채는 행위) 등 다양한 개인 소설어들을 발굴해 싣고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7만원
  • 박은식 선생著 ‘한국통사’/순한글판 영인본 첫 공개

    우리 민족의 아픈 근대사를 다룬 朴殷植 선생의 한국통사(韓國痛史) 순한글판이 영인본으로 제작돼 13일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독립기념관이 개관 11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소장자료 중 희귀자료만을 모아 발간하는 영인교양총서 시리즈 제1권으로 펴낸 한국통사는 대원군이 집정한 1864년부터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까지의 역사가 근대사,일제침략사,민족운동사 등(3편 114장)으로 나뉘어 기술돼 있으며 당시 미주 한인사회의 양대 지도자인 李承晩·朴容萬의 서문이 함께 실려 주목을 끌고 있다.
  •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 공청회/“영문표기 발음대로 합시다”

    ◎이탈리아어 발음기준 모음수 적어 무리/박→Bank,최→Chweh로 해야 박찬호와 박세리가 미국 프로야구와 프로골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두사람의 성은 똑같이 박씨지만 미국인들은 ‘찬호팍’,‘세리팩’으로 부른다. 박찬호의 박은 PARK,박세리의 박은 PAK으로 표기돼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이다. ‘박’이 ‘팍’,‘팩’으로 둔갑하는 것은 한글의 로마자표기의 중요성을 대변해주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어 로마자표기학회(회장 김복문)는 지난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어 로마자표기법’ 공청회를 개최,눈길을 끌었다. 공청회에서 로마자표기학회는 김회장이 개발한 ‘영어발음기준 모의발음부호법 표기방식’을 소개하면서 김충배 고려대 교수,류건호 충북대 컴퓨터과학과 교수,이정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전 기획관리본부장 등 유관인사의 의견을 청취했다. 김회장은 주제발표에서 “21개나 되는 한글의 모음을 5개밖에 되지 않는 이탈리아어 발음기준으로 수용,표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면서 “영어가 국제어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영어를 기준으로 한 새로운 표기법이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회장이 창안한 모의 발음부호법 표기방식은 여러가지로 발음되는 영어 철자 가운데 항상 같은 발음을 내는 표기법을 찾아 이를 발음부호처럼 사용하는 것. 이에 따르면 ‘아’는 ‘AH’,‘어’는 ‘UR’,‘오’는 ‘OH’(받침이 있을 때는 H 생략),‘이’는 ‘EE(받침이 있을 때는 I)’로 된다. ‘리→이’처럼 두음법칙이 될 경우 앞에 ‘Y’를 붙인다. 이를 성씨에 적용하면 박은 Park이나 Pak가 아닌 Bahk이 되고 강은 Gahng,최는 Chweh가 돼 ‘갱’(Gang),‘캉’(Kang) 또는 ‘초이’(Choi)라는 이음(異音)이 나오지 않게 된다. 실제 김회장이 고안한 모의 발음부호방식은 음가 반영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모의 발음부호방식과 현재 정부에서 쓰고 있는 안,국어연구원이 지난해 마련한 개정시안을 비교조사한 결과 모의 발음부호방식은 500점 만점에 439.7점이나 돼 225점인 정부안,172.3점인 개정시안을 월등히 앞질렀다. 김회장은 이에 따라 영문표기를 의도한 발음대로 읽어주지 못하는 현행 체제는 하루빨리 모의발음부호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제발표가 끝난 뒤 가진 토론에서 류건호 교수 등 대부분의 패널리스트들은 동대문이 ‘통대문’이 되고 을지로가 ‘을차이로우’가 되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사용자 측면에서는 가장 합당한 대안이라고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고려대 김충배 교수는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부호를 많이 쓰는 것은 언어낭비라며 이러한 약점이 연구,보완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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