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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LPGA 이예원, 고려대병원에 3000만원 기부

    KLPGA 이예원, 고려대병원에 3000만원 기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올 시즌 3승을 거두며 공동 다승왕에 오른 이예원이 팬클럽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으로 치료에 부담을 겪는 의료취약계층 환자 지원을 위해 3000만원을 고려대 병원에 기부했다. 지난 31일 고려대 병원에 따르면 이예원은 자신이 마련한 1500만원과 팬클럽 ‘퍼펙트바니’가 모금한 1500만원 등을 합쳐 성금을 전달했다. 고려대 메디사이언스파크에서 지난 29일 열린 성금 전달식에는 윤을식 고려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을 비롯한 관계자와 이예원 등이 참석했다. 이예원은 “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미루는 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부를 결심했다”며 “팬과 함께 마련한 기부금이 도움이 필요한 분께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부금은 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미루는 저소득층과 의료 취약계층 환자를 위해 활용될 예정이다.
  • 관광공사 사장 박성혁씨 임명

    관광공사 사장 박성혁씨 임명

    한국관광공사 신임 사장에 박성혁 전 제일기획 부사장이 임명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31일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박성혁 제일기획 자문역을 임명했다고 밝혔다. 임기는 3년이다. 박성혁 신임 사장은 제일기획에서 독일법인장, 유럽총괄장, 북미총괄장, 글로벌부문장(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주요 해외 시장에서 사업 전략 수립과 실행을 주도해 온 마케팅 전문가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신임 사장은 국제적인 마케팅 역량과 조직경영 능력을 갖춘 전문가로서 ‘K관광’ 패러다임 전환과 국정과제인 방한 관광객 3000만명을 조기 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인사]

    ■서울신문 ◇부국장급 승진△전국부 한상봉 △광고1팀 안도성 ◇부장급 승진△경영지원팀 유연희 △정치부 김헌주 △경제정책부 이현정△광고2팀 이승우 ◇차장급 승진△국제부 명희진 조희선 △편집부 한세원 △독자2팀 김지훈 △사업1팀 전호진 ■재정경제부 ◇국장급 전보△전략경제정책관 고광희△조달계약정책관 이주현△대외경제심의관 김동준 ■산업통상부◇과장급 전보△산업규제혁신과장 유은△화학산업과장 김건혁△자원안보팀장 김대영 ■기후에너지환경부 ◇실장급 승진△중앙환경분쟁조정피해구제위원장 서홍원 ■국토교통부 ◇실장급 전보△주택공급추진본부장 김영국△대변인 김헌정△기획조정실장 남영우△국토도시실장 정의경△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화 상임위원 박지홍△중앙토지수용위원회 상임위원 이상주 ◇국장급 전보△공항정책관 이상헌△철도국장 김태병△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도시계획국장 안석환△새만금개발청 개발전략국장 윤진환 ■해양수산부◇국장급 전보△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장 조일환 ◇과장급 전보△정보화담당관 김성국 ■국세청 ◇부이사관 전보△서울지방국세청 감사관 강동훈△성동세무서장 이광섭△분당세무서장 고영일△광주지방국세청 조사1국장 고근수△대구지방국세청 조사1국장 장우정△부산지방국세청 감사관 황동수△국세청(한국조세재정연구원) 김범구△국세청 한지웅△국세청 김준우△국세청 전지현 ■기상청 △차장 이정환 △국립기상과학원장 강현석 △대전지방기상청 청주기상지청 김경립 △광주지방기상청 관측과장 이명희 △대전지방기상청 청주기상지청 관측예보과장 김병철 △국가기상위성센터 위성기획과장 이봉주 △항공기상청 기획운영과장 강광현 △대구지방기상청 기후서비스과장 이현숙 ■국가데이터처 ◇과장급 전보△행정자료관리과장 김미애△스마트조사센터장 조윤구△경인지방데이터청 수원사무소장 송요성△동북지방데이터청 조사지원과장 김오승△동북지방데이터청 강원지방데이터지청장 홍연권△동북지방데이터청 안동사무소장 이주원△동남지방데이터청 울산사무소장 김선조 ■공정거래위원회 ◇과장급 전보△소비자거래심판담당관 김태균△유통대리점정책과장 구태모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실장급 인사△사무처장  양청삼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실장급 전보△디지털전략실장 정유경△물·토양기술실장 한대훈△국제환경협력센터장 최종인△안전관리실장 정진환△환경표지심사실장 김무겸△환경오염피해구제실장  황의득 ■국립국악원 ◇국장급△국악연구실장 김채원
  • 도망치지 않는 시-황유원론 ①/배민정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평론]

    1. 새로움이라는 단절언제부터 시작된 풍습인지그걸 아무도 모른다- ‘루마니아 풍습’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소음’이 ‘노래’가 되었을 때, ‘침묵’은 야만이었나.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②이라는 아도르노의 위치에서 다시 묻는다. 아도르노는 독일 나치에 따른 인류 최악의 참극 이후, 예술이 억압적인 현실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관한 근본적 물음을 던졌다. 물론 이러한 질문은 포스트-주의 세례의 여파가 여전한 현시점에서 새삼스러울지 모른다. 한국 현대시는 2000년대부터 “시인(1인칭)의 내면 고백”이라는 통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③음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2000년대 시가 정치적으로 무력한 ‘나’ 대신 3인칭의 낯선 존재에 집중함에 따라, 2010년대 시가 역사란 ‘끊임없는 쇠락’과 ‘그에 따른 폐허의 잔해’라는 인식에 머물기를 택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령 “절벽은 무너진 다음의 가능태”(백은선, ‘중력의 대화자들’, 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8)라는 희망 없는 세계에서, “나를 위해서 날지 않기로 마음먹”(김복희, ‘새 인간’,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사, 2018)는 인간-동물의 사유와 같은 것, 혹은 “여기는 사망맵이야”(문보영, ‘배틀그라운드-사막맵’, 배틀그라운드, 현대문학, 2019)라는 식의 농담 속에 공통으로 파국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금은 새나라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구구 울지 않습니다”(윤지양, ‘오 혹은 없음’,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라고 말하는 오늘에까지 발견된다. 세계는 개선될 여지가 없고 세계 바깥의 타자는 끝내 파악할 수 없는 채 멎어 있다면, 시가 향할 곳은 오직 ‘기대 없음’ 상태의 내면 공간뿐인 것이다. 2000~2010년대 전위·실험시는 시적 자아의 영역을 넓힌 하나의 성과였으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과연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혹 기존 관습에 대한 변화라는 이유로 새로움에 막연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가 화해의 손을 내밀 대상은 세계 바깥의 타자가 아니라, 기대조차 없는 이 현실일지 모른다는 의혹이 황유원의 시에는 담겨 있다. 시인이 “우린 문득 노래란 그런 것임을 절감하고 / 그 노래의 후렴구나 따라 불러야 했네” (‘시베리아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사운드 트랙’, 세상의 모든 최대화)라고 말했을 때, “노래”는 곧 부르는 순간 “후렴구” 같은 그리움만을 남기고 떠나는 특별한 언어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말’에서 그가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길과 “최대한 잠재워 보는 길”④을 가 보겠다고 밝혔을 때, “소음”은 곧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쯤에서 이 글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황유원의 언어를 빌려 보면, “‘소음’이 ‘노래’가 되었을 때, ‘침묵’은 야만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언어를 시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윤리를 실천하는 최근 시적 경향에 의하여, 정체성의 규율 내에서 ‘침묵’을 지키는 예술 일반은 자연히 비윤리로 규정되고 말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때 황유원 시는 예술과 현실이 지닌 ‘차이’가 아닌, 그 차이를 ‘수용할 방법’에 주목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꿈과 현실의 ‘관계 방식’에 대해 묻는 황유원 시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불가능한 꿈’의 요소들은 꿈꿀 수 없는 현실과 소통할 수 없는 타자를 모두 포용하고자 한다. 몰이해에 빠져 있을 때 ‘꿈’이라는 비약은 늘 이해의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므로. 2. 첫 번째 되감기: 작은 불행에서 최대 불가능성으로오늘 밤 동안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天天來’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이상하게도 파국이 예견된 현실에서 이미 해 본 걱정을 재차 반복할 때, 우리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최근 시가 그러한 순간들로 하나의 묵시록적 세계관을 형성했다면, 황유원 시는 “생각만으로 혼미해지는 / 믿을 수 없이 빛나는 횡설수설의 밤”(‘지네의 밤’,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 도취함으로써 당대적 분위기와 갈라진다. 물론 현실 공허를 토로하는 시와 끝내 사라질 신기루를 그려 내는 시, 둘 중 무엇이 더 적합한지 묻는 일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겠지만, 황유원의 시에 그려진 냉혹하고 왜소한 현실은 동시대 시가 빚어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의 시에서 불가능한 꿈의 형상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질 따름이다. 늘 허무로 귀결되는 환상은 현실과 만날 때라야 비로소 진실성을 얻는다는 것. 냉엄한 현실에도 희망은 피어나듯, 우리의 진심이 꿈을 향한다고 해서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 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현실도피란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세상의 모든 최대화’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 예술이란 결국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예술 작품은 결국 ‘내’가 꾸는 꿈에서 시작해 ‘내’가 그것을 실현했다고 믿는 한에서만 그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무 의식에 사로잡힐 때, “일렉기타”를 가득 싣고 가는 예술가의 마음은 길고 무거워진다. 온전히 꿈만 꾸고 싶은 사람일수록 도리어 그것이 허상이라는 진실에 강력히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기타 연주를,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신의 무능을 자각한다. 그들이 음악과 시를 사랑할수록 그들은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는 꿈이라는 허무 의식을 견고히 쌓아 간다. 그럼에도 왜 이들은 구태여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자기기만의 꿈을 꾸기를 포기하지 않는가. 현실을 바꾸는 건 오직 꿈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적 허기는 기계가 생존과 번영을 책임지는 오늘의 시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문제적 현실을 한층 더 발전된 현실로 해결하는 시대 속에서, 꿈은 현실 억압과는 무관한 일종의 자유로서 되려 그 존재감과 의의를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발전과 해결이라는 단일의 명분으로 얄팍해져 가는 현실의 두께를 자각할 수 있다면, 꿈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할 수 있다. 현실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는 “현실도피”로서의 꿈이 아니라, 예술은 결코 ‘나’라는 한계를 벗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을 넘어서려는 “현실의 최대화”라는 꿈인 것이다. “도피”의 결말이 ‘꿈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허망한 결론에 닿는다면, “최대화”의 결론은 ‘꿈’ 혹은 ‘현실’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나’의 진정성에 도달한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잊으려 애쓰는 시는 어떤 실제와도 맞바꾸지 못할 내면을 간직할 수 있다. 꿈의 귀결점이 ‘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황유원이 전통 시론을 계승한다고 굳게 믿게 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최대화’가 꿈 안에서 ‘현실 인식’을 통해 비탄과 진정성을 획득한다면, ‘무한대의 밤’은 ‘진정성 있는 꿈’이기를 넘어서 진실한 내면의 순간을 생생히 숨 쉬게 할 장소이길 자처한다. 그곳에서라면 한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백치의 마음도 그리 우스꽝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만이 ‘진짜’ 마음일지도. 물이 든 병에 천천히 꽃다발을 꽂아 주듯병든 꽃다발에 천천히 물을 부어 주듯서로 상처 주고또 용서하고…깨고 나니 꿈이었다깨고 나니 꿈이었다(…)난 사진 찍는 거 싫어하는데 그 꽃을 그 모든 꽃을 모조리 다 찍을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찍어 간직했죠 오직 그대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 한 장 한 장을 모두 기억했어요 그대는 내게 말했죠 네가 이렇게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게 그대 때문이라고 말해요 이상한 봄이 왔어요 그대로 인해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대로이긴 한데 난 그대에게 이게 다 당신 때문에 핀 거라고 당신은 내게 이제 너는 너무 자유로워졌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꿈을 꾼 적이 없어 나는 눈물이 흘러 전 세계의 모든 계절에 피는 꽃들이 다 피어 있는 언덕, 거기서 난 눈을 떴는데눈을 뜨고도 생생한 꿈이어서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무한대의 밤’ 부분(초자연적 3D 프린팅) 황유원 시에서 ‘현실 인식’이 헛된 꿈의 진정성을 획득하는 방식이라면, 지금-여기에서 느껴지는 ‘실감’은 그 진정성을 믿을 만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먼저 이 시에 드러난 꿈과 현실 인식의 관계를 살펴보자. 인용 시의 첫 연에는 냉철한 인식이 “상처”가 되고, 병적인 내면이 “용서”가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내가 사는 물속인데도 거기 발을 담그는 일이 “상처”가 되는 것은, “물이 든 병에 천천히 꽃다발을 꽂아” 줄 때까지 내가 허공을 걷는 줄 착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회복 불능의 병세가 완연한 게 “용서”되는 까닭은, “병든 꽃다발에 천천히 물을 부어” 줄 때와 같이 누구나 타락에 기대어 무의미한 생을 건너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꿈은 분명 현실이 아니지만, 간혹 ‘가능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현실에 잔류한다. 그때 ‘꿈같다’는 말은 ‘불가능’이 아니라, ‘잠재된 가능성’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시인이란 바로 그 잠재적 가능성의 느낌을 최대한 이어 가고자 생생한 언어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기에 황유원은 “깨고 나니 꿈이었다”라는 허무감을 “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라는 애틋함으로 전환하고자 놀랍도록 “생생한 꿈”을 펼쳐 놓는다. ‘무한대의 밤’은 장시의 형식을 취하면서 “깨고 나니 꿈이었다”의 반복과 변주를 보여 주는 한편, 그 사이에 다양한 고백과 경험의 순간들이 파편적으로 기입된다. 이러한 불연속적인 전개는 그의 꿈을 무시간성의 순간으로 붙잡아 두는 동시에 그 순간에만 머물고 싶은 ‘나’의 내면을 형상화한다. 인용문에서 감정이 가장 고조되는 4연에는 횡설수설한 발화가 펼쳐지고 있다. “그대”를 향한 애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우리는 화자의 정서를 내 것인 양 온전히 느껴 볼 수 있다. 믿을 만한 것이 마땅치 않은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도 믿고 싶은 하나의 진실이 생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대한 사건일지 모른다. 3. 두 번째 되감기: 영원을 위한 반복진한 피맛이 날 때까지 하늘을 사랑하는-‘북유럽 환상곡’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꿈꾸는 주체인 ‘나’는 현실 인식이라는 한계에 투신함으로써 단일한 ‘나’의 권능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황유원 시를 읽는 우리는 여전히 헛된 꿈에 몸을 내던질 수 없다. 세상에 ‘있을 법한 환상’이란 남아 있지 않은 시대에, 현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학에서조차 ‘순수’가 부담스러워진 시대에, 꿈은 어디까지나 ‘불안한 위안’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계속해서 덧없는 꿈을 꾸고, 그 실현을 믿기 위해 시를 쓴다. 그의 시에는 늘 일시적이고 불명확할 따름인 믿음을 재차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기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비관은 끝까지 무언갈 믿고 싶었던 순수의 뼈아픈 흔적이자, 더는 무너질 수 없는 ‘나’의 최후 방어선이라는 것. 이때 황유원 시의 반복은 진실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장치가 된다. 그의 시에서 “무언어”로 일관한 채 이뤄지는 윤회는 ‘나’의 내면을 널리 초월케 하는 ‘종교적’인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 미켈란젤로 프람마르티노 감독의 영화 ‘네 번’ DVD 뒤에는Language 무언어Subtitles 무자막Running time 88분이라고 되어 있었다매일 저녁 노인은염소젖과 바꿔 온 한줌의 성당 먼지를물에 타 마시고그러면 자신의 병이 나을 거라고굳게 믿는다(…)말과 말 사이말 잠깐 쉬는 곳에서먼지를 가루약처럼 물에 타 마셨다멀리멀리 퍼졌다-‘무언어’ 부분(하얀 사슴 연못) 이 시에 등장하는 영화 ‘네 번’은 “무언어”, 즉 침묵으로 일관한다. 여기서의 ‘침묵’은 언어 아닌 ‘공백’이면서 삶 아닌 ‘죽음’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노인”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매일 “한줌의 성당 먼지”를 물에 타 마신다. “먼지”가 병을 낫게 한다는 그의 믿음은 허무맹랑하지만, 그렇기에 그 믿음은 더욱 신실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노인”은 먼지를 구하지 못한 단 하루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다. 여기서 노인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지”가 노인의 헛된 꿈이었다는 식의 논리가 아니라 노인의 ‘죽음’ 자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노인-염소-전나무-숯’의 삶과 죽음을 통해 총 네 번의 윤회를 보여 준다. 이때 윤회의 과정은 “노인”의 죽음이 염소, 전나무, 숯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영생을 향한 “노인”의 꿈은 그가 죽고 난 후에야 진정 이뤄질 수 있었음을 말해 준다. 사실상 “노인”의 소망을 실현시킨 건 매일 같이 마신 “성당 먼지”가 아니라, ‘죽음’의 침묵이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이 시에서 “멀리멀리 퍼졌다”는 구절은 불변의 영적인 순간을 형성한다. 모든 존재는 ‘죽음’ 앞에 비로소 평등하기 때문에 황유원 시에서의 종교성은 절대적 신성함이나 우월감으로 고립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바깥의 존재들에게 선뜻 다가섬으로써 인간 삶의 고결함을 증명한다. 이러한 사유를 “말과 말 사이”에서 “먼지”를 물에 타 마시는 화자에게로 옮겨 와 언어적 차원에서 살펴보자. ‘무언어’에서 ‘시’가 갖는 초월적 의미는 두 가지다. 먼저, 시적 언어는 불필요한 언어를 제거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의미만을 남겨 놓는다. 이때 언어의 공백은 언어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영원성으로 초월하게 만드는 기제다. 다른 한편으로, 시는 자신의 내부에서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는 고통이기도 하다. 시가 갖는 헛된 희망은 역설적이게도, 현실에서 간과되어 온 가치가 있음을 밝혀 주는 윤리가 될 수 있다. 아마 황유원 시의 고요함과 맑음 속에 그 나름의 독특한 온기가 느껴졌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지. ‘무언어’가 윤회라는 종교성을 띤 반복을 통해 영원의 온기를 증명하고자 한다면, ‘존재와 시간’은 실없는 말장난을 통해 영원을 체험한다. 뒤틀린 시간 의식과 현실의 균열을 일으키는 말장난에 의해 이뤄지는 반복은 끝없이 새로워지는 우리들의 속된 삶을 향해 있다. “벌써 올 시가이 지놨는데 저 셰기 고장난 거 아이야?”곧 친구가 올 거라며 큰소리쳐 보지만각 한구석 잿빛 신문지 위에 쌓인 굵고 기다란 순대들시계 밖으로 꺼내져 토막난 시간의 내장처럼고요하기만 해24시간 영업하는 가게에 걸린 시계라고 해서 다른 시계보다 특별히 더바쁠 리는 없고고장이 나서 어쩌다 하루 24시간이42시간이 돼 버리는 일도 일어나진 않을 텐데(…)조금 있다 다시 보면흘러가 버리고 없다테이블에는 때마침 현재진행형으로 펄펄 끓는 순댓국 한 그릇과 찬 소주 한 병이 올려지고 있는데문득, 영감이 그토록 고대하던 친구가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존재와 시간’ 부분(일요일의 예술가) 24시간 순댓국밥집에서 얼큰히 취해 친구를 기다리던 “영감”은 엉뚱하게도 멀쩡한 시계와 시비가 붙었다. ‘ㅣ’와 ‘ㅖ’를 뒤바꿔 “시계”라는 정(正)과 “셰기”라는 반(反)을 오가는 시의 말장난은 합(合)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영감”의 일그러진 음성에 의해서 “영감”과 그의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균열을 드러낸다. 주어진 시간을 그저 충실히 살았을 뿐인데, 이제 보니 내 삶은 어디서부터 단단히 잘못되었다. 이런 “영감”의 회한은 그 시작점을 가늠할 수 없는 지난한 과거까지 소급되며, 또한 실상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친구”를 기다리는 허황한 미래에까지 뻗어 나간다. 시에서 “24시간”이라는 후회가 “42시간”이라는 선망으로 뒤바뀌고, 또 그런 “42시간”의 꿈이 부상했다가 다시 “24시간”이라는 지극한 현실로 떨어지길 반복하는 동안, 그런 “영감”의 모습을 관찰하는 화자의 시선은 줄곧 현재 시제를 견지한다. “영감이 그토록 고대하던 친구가 / 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는 화자의 생각이 과거와 미래라는 양단의 불가능성에 갇힌 “영감”의 존재를 “현재진행형”의 시간성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와 “영감”이 있는 곳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시공간’이자, ‘그냥 여기서부터’ 시작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장소이며, ‘이제’ 식사를 마치면 또 다른 시공간이 펼쳐질 모든 것의 ‘처음’이다. 이 시점에서 “영감”의 “토막난 시간의 내장” 같은 허름한 과거는 “흘러가 버리고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그가 선망하는 미래 또한 소유 불가능성으로 인해 “둘이기에 잠시나마 하나가 될 수 있”(‘백호의 손’, 일요일의 예술가)는 영원의 가능성으로 변모된다. 즉 후회와 선망이 무한히 교차되는 찌든 삶 속에서, “현재”는 화자와 “영감”이 “친구”가 되어 볼 수 있는 무한한 시간성으로 잠재해 있는 것이다. 4. 세 번째 되감기: 타자에게 보내는 안부너처럼 나도 그렇게 항상네 옆에 있을 것-‘새들의 선회 연구’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그리하여 낭만에서부터 출발한 황유원의 시는 최근 시의 화두인 타자 사유에까지 도달한다. ‘낯선 존재의 새로움’이라는 하나의 흐름과 ‘타자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 사이에서 그의 시는 의문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시가 타자를 더 많이 비춘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는 약화될 수 있는가? 본래 인간의 뇌는 ‘나’와 무관한 일에 특별한 정서를 느끼기 어려워한다. ‘나’가 사라진 시에서 애초에 내가 왜 벌레나 먼지만큼 작아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윤리적 구호는 ‘나’의 비대함만 부각시킬 뿐, 어떠한 실천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란 쉽지만, 그것이 곧 주체 중심 사고와의 결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문학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대중의 목소리는 아마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낄 수 없는 윤리적 목소리는 가짜 화해, 가짜 자유, 가짜 욕망에 불과하다.⑤그런데 왜 우리는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주장할 뿐, 이 난점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는가. 그렇기에 황유원은 현재 이곳이 편협한 지대라는 사실부터 깨닫고자 한다. 시는 명백한 고발에 의해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꿈처럼 억압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가상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⑥불화를 불화답게, 결핍을 결핍답게 그려 낸 황유원의 시에서 우리는 윤리를 본다. 그곳만이 더 나은 삶을 위한 태도를 고민할 장소로서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불을 켜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이 있습니다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이 담겨 있던 어둠은얼마나 아늑하고 그윽한 것이었겠습니까?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사과도할 수 없다는 사실에망연자실해 하며 자, 한번 곰곰이생각해 봅시다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은얼마나 천천히얼마나 우아하게 이 욕실 바닥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겠습니까?(…)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깊이 공감해 봅시다당신에게는 깊은 공감 능력이결여되어 있습니다(…)그 속에 들어앉아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떨림 속에서아까 듣던 그 음악을계속이어서 들어 봅시다-‘밤의 벌레들’ 부분(초자연적 3D 프린팅) 이 시각, 벌레들은 인간 없는 곳에서 “아늑하고 그윽”하다. 인간을 피해 자기 터전에서조차 몸을 숨겨야 하는 벌레에게서 “아늑하고 그윽”함을 보는 것은 최근 시의 경향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황유원은 여타 시들과 같이 이 땅이 벌레와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터전이라 말하지 않는다. 인간 혹은 벌레, 둘 중 하나는 만났다 하면 “혼비백산”, 한쪽은 박살이 나는 것이 진실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다분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벌레’의 심정을 대변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라는 말에는, 벌레의 존재성을 긍정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인간의 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미 불이 켜진, 낭만적 환상이 끝나 버린 이곳에서 “우아”했을 벌레의 매력을 음미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최근 시에 자주 등장하는 해체적 사유의 틀 없이도, 인간과 벌레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사유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간다. 이 시에서 벌레를 향한 인간의 “공감”은 역설적이게도, 화자가 인간과 벌레 사이의 해소 불가한 단절을 인정한 지점에서 이뤄지고 있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화자가 ‘우아함’이라는 욕망을 충족하고자 “벌레”를 등장시켰을 때, 이 시의 목적은 ‘인간 욕망의 실현’이라 보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화자의 관심은 애초에 우상이나 소유욕과 같은 질서 세우기가 아니라, 인간과 벌레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낭만이 욕망을 원리로 삼는 것에 반해, 황유원 시의 낭만은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깊은 공감 능력이 결여”된 인간이 벌레를 “공감”하게 된 원리가 인간이 벌레만큼 작아졌기 때문인 것 또한 아니다. 이 시의 인간은 그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벌레”에게 느낀 그 “떨림 속에서 / 아까 듣던 음악을 계속” 듣고 싶을 뿐이다. “음악”이라는 아름다운 꿈을 꿀 때, 인간은 벌레를 감각을 선사하는 대상으로서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 시에서 벌레와 인간은 각자가 ‘있는 그대로’ 충분히 평온하다.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인간”과 “벌레”의 좁혀지지 않는 ‘차이’가 아닐 것이다. 꿈 없이는 차이를 발견하려는 여유도, 발견 후 그것을 깊이 고민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은 이 협소한 세계.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이 놓였다는 사실이 가장 위급한 문제다. 그렇기에 황유원은 평등이 도래한 장소에서도 계속해서 ‘너’와 ‘나’의 차이를 견지하고자 한다. 고통을 경험한 ‘나’의 내면으로부터 사회적 관계에 따른 ‘너’를 향한 존중과 배려를 가능하게 한다. 충분한 추위가 없으면일부러라도 눈을 내려설산에 오른다여러 고난을 겪을수록여러 사람의 고난을 이해하게 되고나는 여러 사람이 되고갑자기 하늘 어두워지면지그시 눈을 감아 그 어둠두 배로 어둡게 만든다어느덧 두세 배로 불어난 어둠속에서하지만 두 배든 세 배든실은 그냥 같은 어둠일 뿐인어둠 속에서하산을 시작한다함께 내려가는 여러 사람들다 돌아간 카세트테이프의 나머지 한쪽이마저 돌아가기 시작한다-‘오토리버스’ 전문(하얀 사슴 연못) 한 사람이 “여러 고난을 겪”었음을 고백할 때, 우리는 비단 그 사람의 고난의 깊이만을 가늠하지 않는다. 흔히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더욱 슬프다’는 위로는 한 사람의 고난이 얼마나 넓은 아량을 갖게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인 것이다. 한 사람의 고난이 ‘나’라는 단수를 넘어 “여러 사람”으로 향하고자 마음먹을 때, ‘나’의 고난의 깊이는 “여러 사람의 고난”을 이해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 시의 “고난” 역시 “설산에 오른다”고 마음먹는 순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로 확장된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구태여 헛된 꿈을 꾸면서 현실에 관해 남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 시인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시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4연에서 화자는 “두세 배로 불어난 어둠”이라는 다수의 두려움을 “실은 그냥 같은 어둠일 뿐인 어둠”이라는 ‘나’의 두려움으로 응축시키기도 한다. 이때 두려움은 “하산을 시작”하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며, 이윽고 “함께 내려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그 기세를 잃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꿈이 그것의 덧없음을 알게 된 뒤에 진정한 효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시인이 일부러라도 시에 고통과 상실의 감각을 새겨 넣는 이유는, 그리하여 기껏 올라간 정상에서 “하산”할 운명을 하릴없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공연한 움직임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시에서 공연한 움직임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설산에 오른다”와 “하산을 시작한다”라는 상하(上下)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카세트테이프” 한쪽이 다 돌아갔을 때 자동으로 재생되는 “나머지 한쪽”과 같은 끝에서 끝으로의 움직임이다. “설산”이라는 한쪽에서 아름다움 혹은 꿈처럼 고양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하산”해 돌아가는 다른 쪽에서는 무력감과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발생한 고통은 더 나은 현실을 살고 싶다는 우리의 욕망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꿈은 부질없는 것일 때부터 이미 희망을 내포한 것이 된다. 황유원의 시가 자꾸만 예술이라는 끝과 현실 인식이라는 끝을 되감는 까닭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불편감을 표할 때마다 현실은 변화의 가능성을 갖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고통이 됨으로써 익숙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 이때 꿈을 꾸는 시는 우리의 삶과 태도를 진정 변화시키는 윤리가 될 수 있다. 5. 희망은 어떻게 이어지는가나는 걷는다내가 널 버려도너는 버려지지 않는다-‘사랑하는 천사들’ 부분(세상의 모든 최대화)영원할 것만 같았던 모험도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다. 열 장 남짓한 페이지 안에서 황유원의 시는 어디든 오갈 수 있었다. 메마른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꿈’으로, ‘성스러운’ 영원에서 ‘속된’ 영원으로, 타인 같은 ‘나’로부터 ‘나’ 같은 타인으로. 이런 모험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황유원의 시가 ‘나’라는 주체를 잃지 않았기 때문일 터다. 그의 시의 ‘나’는 극에서 극을 오가면서 넓어지고, 또 깊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한층 넓어지고 깊어진 ‘나’는 역설적이게도 더 큰 아픔과 대적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가령 야심찬 꿈과 다짐들은 사실상 냉혹한 현실 논리에 강력히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혹은 성스러운 약속들은 때로 세속적인 삶의 회한보다도 생명력이 희미하다는 사실을, 혹은 타인은 ‘나’ 같지 않고 ‘나’ 역시 타인과 결코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남김없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넓어지고 깊어진 ‘나’는 어떠한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또 다른 극점을 만나리라는 여지를 항상 남겨 둘 줄 아는 넉넉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나’는 간절히 바라던 끝이 허무하게 사라진 장소에서도 ‘과정’으로서 자신의 생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다. 그리하여 황유원의 시는 “마지막 페이지는 이미 정해져 있음”을 “완벽하게 체감”시키는 이 결론에 다다라 “원래 없던 눈을 / 누구보다도 검게 꼭”(‘12월’, 일요일의 예술가) 감는다. 그의 시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잊지 말라고. 이곳이 어디든, 꿈이든, 현실이든, 모험이 끝나 버린 직후이든, 우리가 잠시 시를 잊을지라도 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지금 이곳에서 다시 출발하는 그의 시는 보다 깊어진 걸음으로 또 한발 나아간다.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다음을 향해. ① 황유원은 2013년 등단 이후 다섯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2015),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현대문학, 2019), 초자연적 3D 프린팅(문학동네, 2022),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 일요일의 예술가(난다, 2025). ② T W 아도르노, 홍승용 역, ‘문화비평과 사회’, 프리즘, 2004. 29면. ③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창작과비평41, 2013,3. 165면. ④ 하얀 사슴 연못 중 시인의 말. ⑤ 김현, ‘문학은 무엇에 대하여 고통하는가’, 김현문학전집 1, 문학과지성사, 1991. 57면. ⑥ 같은 곳.
  • 화해되어 버리는 것들… 숨이 트이는 순환 같습니다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희곡 당선 소감]

    화해되어 버리는 것들… 숨이 트이는 순환 같습니다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희곡 당선 소감]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붙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광 돌립니다. 엄마. 감사해요.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엄마의 말들을 이쁜 곳에 담아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였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아버지셔서 살아갈 수 있었어요. 언제나 살아남는 법을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오빠. 오빠는 평생 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야. 오빠는 언제나 나를 기 살게만 해. 나도 그렇게 평생 되고 싶었어. 고마워. 모든 게 오빠 덕이야. 우리 학교 교수님들. 잘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학교 친구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세상에 좋은 희곡을 써주신 한국의 극작가님들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미안해, 괜찮아, 하지 않아도 삶 속에서 화해되어 버리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도, 어떠한 관계에서는 그게 사과로, 또 용서의 신호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저는 그런 게 인간의 차마 한결같지 못한, 그래서 자연스러워 숨이 트이는 순환 같습니다. 그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같이 산다는 건 그런 날의 연속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은 어떨 땐 정말 끔찍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면도 옆에 있다 보면 보게 된다는 일종의 기대의 가설인 것이죠.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용서를 빚어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인/결과, 선/악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숨겨진 통로의 지점이 있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봐준다’ 라는 말이 지닌 두 가지 의미ㅡ바라보다와 넘어가주다ㅡ를 들여다보면, 그건 어쩐지 너그러운 삶과 닮아 보입니다. ▲1997년 대전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재학
  • 포기 안 한 집념의 시간에 대한 하늘의 감응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시조 당선 소감]

    포기 안 한 집념의 시간에 대한 하늘의 감응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시조 당선 소감]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지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이제, 그만!’이라는 마음이 들 때마다 ‘갈 데까지 가 보자’라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워야 했습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란 소리를 믿고 싶었습니다. 늘 빙판 위에 선 듯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아귀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형의 말맛에 빠져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가야 할 길은 먼데 해는 벌써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버틴 날들이었습니다. 더딘 걸음을 다그치고, 부족함을 담금질하며 언어와 시간을 엮고 또 엮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변하고도 남았을 열병의 시간이 마침내 평온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목마르게 갈고닦은 제 애착의 텃밭에도 환한 꽃이 피었습니다. 오늘의 영광은 그 포기하지 않은 집념의 시간에 대한 하늘의 감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뜻이 언 손을 잡아 주신 서울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두 손 모아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우리 고유의 숨결이 담긴 정형시의 바른길로 이끌어 주신 민족시사관학교 윤금초 교수님과 ‘지금_여기’의 시 정신을 일깨워 주신 임채성 시인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랫동안 얼굴을 맞댄 다정다감한 글벗이자 멘토이신 선배 문우님들께서 느긋이 기다려 주신 덕분이기도 합니다. 삶의 윤활유처럼 위로와 공감이 되는 가슴 따뜻한 시조를 쓰고 싶습니다. 고집스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먼 길을 휘돌아올 때 후줄근히 지친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가족이 있어 이제껏 버틸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고맙고 느꺼울 따름입니다. 기쁨보다는 시인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44년 전남 장흥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안정적 구조와 문장… 섬세한 감정선 유지 돋보여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소설 심사평]

    안정적 구조와 문장… 섬세한 감정선 유지 돋보여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소설 심사평]

    예년보다 한층 늘어난 응모작들을 따라 읽으며 한국문학의 외연이 다양한 갈래로 넓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심사위원들이 주목해 살핀 세 작품은 다음과 같다. ‘춘향 프로토콜’은 인류의 감정을 자원으로 사용하는 인공지능(AI) 시스템에 저항하며 “인간적인” 언어를 발굴하려 하는 창작자의 이야기다. SF적 상상력과 ‘춘향전’의 저항의식을 결합하며 나아가는 서사가 인상적이었고, 오늘날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적확히 짚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소설의 주제가 서술과 대사로 직접 표현되는 후반부가 다소 교훈적으로 느껴져 아쉬움이 남았다. ‘경계성’은 항만에서 해루질과 뱃일로 삶을 이어 가는 인물의 모습을 밀도 있게 담아냈다. 항만의 냄새와 습기가 신체로 전이되는 과정 묘사나 바다와 땅의 경계에 놓인 세계를 그려 내는 끈기가 돋보여 작가가 추후 만들어 갈 작품이 기대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치밀하게 쌓아 올린 시공간에 비해, 인물의 감정적 여정이 성급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언어의 고고학’은 독일 유학 중인 화자가 희랍어를 배우며 세상을 떠난 재한 일본인 할머니와 연결되는 과정을 그린다. 안정적인 구조와 문장, 삶을 시간의 구속에서 풀어내어 불멸하는 “빛”의 감각으로 끌어올리는 문학적 태도 면에서 큰 이견 없이 선정작으로 결정됐다. 한 심사위원의 말처럼 “섬세한 감정선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의 세목에 머무르지 않고, 사유와 형식을 밀어붙이며 지적인 작업의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이 작가의 미래를 기대”한다. 당선자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소중한 작품을 보내 주신 모든 응모자께 깊은 감사와 격려를 전한다.
  • 언어의 고고학/김세정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소설]

    언어의 고고학/김세정 [서울신문 2026 신춘문예 - 소설]

    학과 필수모듈인 어학 파트에서 ‘초급 그리스어’를 들을 거라고 말했을 때, 홍은 조금 놀란 듯했다. 당장 졸업 작품부터 준비해도 모자랄 세 번째 학기였다. 그리스어나 라틴어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쪽 친구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고, 차라리 일본어를 듣는 편이 도움이 될 거라고 홍이 종용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은 겨우 열 명 남짓이었다. 상대적으로 비인기 언어라 그런지 학생 수는 다른 수업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원탁으로 빙 둘러앉은 좁은 강의실에서는 쿰쿰한 곰팡이 냄새와 학생들이 흘리는 땀내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가 났다. 교수가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어 학습 동기를 물었을 때, 그들 대부분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리스 계통이지만 자신은 그리스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아마 높은 확률로 거짓말일 것임이 분명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아마 수업 하나쯤은 먹고 들어가려는 심산이겠지. 사실 그런 학생들은 생각보다 흔했다. 이쪽은 어머니가 프랑스인이고, 저쪽은 할머니가 러시아인이고, 쟤는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던 삼촌이 루마니아인이래, 하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디흔해서, 그런 일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곧 교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강의실에서 유일하게 동양인인 내가 그리스어 수업을 들으려는 이유를 내심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 호기심 어린 미소에 힘입어, 그럭저럭 교수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가령, 코흘리개 시절부터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있어 제대로 연구해 보고 싶었다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에 희랍어가 등장한다는, 꽤 그럴듯한 말로 이야기의 물꼬를 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학습 동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였고, 이들에게 그 이유ㅡ‘아오리스트의 마지막 습작을 읽기 위해서’라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그 말을 독일어로 제대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 사람이 내게 들려줬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 사람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일생에 한 번쯤은 안티고네를 원서로 읽어 보고 싶어서요. 금발로 덮인 두피 곳곳에 희끗한 새치가 돋아난 중년의 교수가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롭다는 듯 빙긋 웃더니,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이 학생이 아주 ‘야심 찬 계획’(ambitionierten Plan)을 가져온 것 같다는 모호한 농담을 던졌다. 그는 말했다. 그 계획에 이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 방언을 익혀야 하는지. 현대 그리스어에 대한 배경지식은 물론, 고전 그리스어의 아티카 방언, 이오니아 방언과 아이올리아 방언까지. 소포클레스나 호메로스 같은 작자들을, 화자가 사라진 언어를 읽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아냐면서. 시대와 지역별로 나눈 그리스어의 기원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설명 방식은 내 어깨를 점점 짓눌렀다. 마치 모든 학생 앞에서 나의 ‘야심 찬 계획’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이 자리에서 당장 밝혀내겠다는 듯. 그의 눈빛은 이제 처음 드러냈던 조소를 넘어 약간의 경멸마저 내비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는 것, 그 사실에 관해서라면 이미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수업에서 학습 동기를 제대로 밝혔더라면, 어쩔 수 없이 나의 ‘계조모’(Stiefgroßmutter)라고 소개해야 했을, 적어도 내가 아는 지구상의 유일한 아오리스트(Aorist)인 나의 할머니 하나코 씨로부터 말이다. * 시제(Tense)는 시간(Time)과 시상(Aspect)과 함께 작동한다. 할머니의 ‘아오리스트의 필사 노트’는 그렇게 시작된다. * 내가 그 노트를 처음 발견한 것은 라이프치히대학 문창과에서 석사 첫 학기를 보낸 직후였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학기 과제를 제출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초봄이었다. 많이 아프셔? 출국하기 전에도 할머니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어제 쓰러지셨어, 라고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말했다. 또? 엄마는 답하지 않았다. 조금 지친 목소리로 첫 학기도 보냈는데 한국에 한 번 들어와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아무 음악도 영화도 틀지 않은 채 맞은편의 화면을 응시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노란 경로를 따라 비행기 모형이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한반도 오른편에 있는 섬나라를 바라보았다. 문득 홍의 고향인 하코다테와 후추시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궁금했다. 엄지와 검지를 펼쳐 그 사이를 가늠해 보았다. 겨우 손톱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좁은 너비였다. 부모님은 대학에 합격한 후에야 유학에 대한 나의 의지를 인정했다. 엄마는 애초부터 내가 독일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왜 거기까지 가서 또 글을 쓰려고 하냐고. 대체 돈은 언제 벌 셈이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찬성하지도 않았다. 아마 아버지는 내심 형과 함께 시장의 곡물 가게를 이끌어 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독일에 오기 전까지 나는 서울로 도망간 형 대신 아버지의 쌀가게 일을 도왔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아 보였다. 불과 삼 주 뒤에 죽음이 임박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혈색에, 당황한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나중에 병실 복도에서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내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날부터, 할머니의 정신이 거짓말처럼 맑아졌다고 했다. 나를 보자마자,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내 뺨을 매만졌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고, 애가 왜 이렇게 피골이 상접해 뱃가죽이 등에 눌어붙었느냐면서. 요 몇 달 동안,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거울에 비춰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손길이 낯설기도 했고 멋쩍기도 했다. 할머니가 그 정도로 내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아 침대 위에 살며시 놓았다. 나는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몰라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물어 가는 햇빛이 할머니의 눈동자 속에서 반달 모양으로 일렁이면서 반짝였다. 그녀의 눈 밑에 오랜 세월 동안 자리 잡았을 것임이 분명한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할머니는 해외 생활은 잘 맞는지, 음식은 어떤지, 앞으로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약간의 시차를 둔 채 차분히 물어왔다. 침묵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잠시 창밖을 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와 나누는 대화는 항상 그랬다. 할머니는 서른이 다 되도록 취업하지 않은 나의 처지를 별달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묻는 것은 미래뿐이었다. 그것이 정말 나의 미래를 궁금해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현재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배우고자 하는 문학을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사람은 가족 중에서 할머니가 유일했다. 입원하기 전부터 종일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끼고 살았던 할머니였다. 그녀는 내가 유럽에서 인종차별을 겪지는 않았는지, 왜 라이프치히를 선택했는지, 독일의 문학 수업에서는 정말 그리스 신화들을 중요하게 읽는지, 평소 자신이 궁금해했던 질문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나로서는 평생 장사를 하면서 살아온 외할머니와 동년배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의 방향이나 밀도가 전혀 다른 할머니의 목소리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하면서도, 가슴속에서는 그런 지적인 대화를 가족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독일에서 지내면서 궁금해진 것들도 많았다. 가령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할머니의 시간에 대해. 홍과 같은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그녀의 발자국-그 삶의 궤적에 대해. 그러고 보니 너 마침 잘 왔다. 한참 동안 질문을 쏟아내던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다고, 혹시 집에서 노트 한 권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노트요? 희랍어 노트 말이야. 요즘에도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계시냐고, 내가 깜짝 놀라 묻자, 할머니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일생에 한 번쯤은 안티고네를 원서로 읽어 봐야 하지 않겠니. 나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옆에 앉아 있던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는지 어서 갔다 오라는 듯 문을 향해 조용히 턱짓했다. 나는 외투를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생긴 노트인데요? 아오리스트. 네? 표지에 아오리스트의 필사 노트라고 적혀 있어.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다. 내가 반사적으로 아오리스트가 무엇이냐고 묻자, 할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왜 이리 군말이 많아. 일단 가져와. 그러면 다 설명해 주겠다고, 할머니는 힘도 없으면서 내 엉덩이를 팡팡 내려치고는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냈다. 갔다 오면서 밥도 먹고 와. * 아오리스트(Aorist)는 무정시제이다. 아오리스트로 포착된 사건은 완결적으로 제시되며, 문맥에 따라 과거에만 묶이지 않고 다양한 시간으로 퍼져 나간다. α -(아니다) όριστος(규정된, 한정된)는 정해지지 않은(αόριστος)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όριστος는 ὅρος(경계)에 맞닿아 있다. ‘무정’은 ‘부정’(不定)일 수도 있고 ‘미정’(未定)일 수도 있다. ‘부정’(不定)과 ‘부정’(否定)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구별되어야 한다. * 사실 할머니의 일생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고, 그때 우리는 구포시장 근처에 있는 고급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당시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지도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시기여서, 나는 그 모든 상황이 이상하고 낯설기만 했다. 할머니는 외할머니와 같은 나이인데도 열 살은 더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와 부드러운 말투 때문인지 외할머니에게선 느낄 수 없던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할머니의 첫인상은 내게 꽤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건 그날, 내가 절반쯤 남겨 버린 짜장면을 할머니가 자신 앞으로 가져가 거침없이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이미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와 배가 부른 상태였다. 조금 전부터 할머니가 내 그릇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긴 했지만, 갑자기 그릇을 가져가 처음 보는 아이가 남긴 잔반을 거리낌 없이 먹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네가 입이 짧은 모양이구나. 할머니가 조용히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부모님을 바라보자, 아버지가 아무리 그래도 잔반을 드시냐고, 아직 출출하시면 한 그릇을 더 시켜 드리겠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됐다. 그냥 딱 한 입 정도만 더 먹고 싶었어. 그리고 할미가 손주가 남긴 음식을 먹는다는데. 그깟 잔반이 뭐가 대수냐. 할머니가 반대편 손으로 냅킨을 꺼내 들며 덧붙였다. 이제 가족인데. 당시, 나는 그런 할머니의 행동에 내심 감동을 받았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게 의도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마 아버지의 남동생 내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 여자가 나이가 어린 엄마를 가족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분위기를 내심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렬한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나와 할머니 사이의 감정적 거리는 꽤나 오랫동안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할머니는 구포동에 있는 오래된 주공아파트 단지에 홀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치 분기 보고서를 쓰듯, 의무적으로 식재료를 잔뜩 사서 할머니를 방문했고,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는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내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그때가 전부였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나는 그 어색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괜히 할머니의 방안을 둘러보곤 했다. 안방의 벽에는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시간들 속에서 할머니를 조금씩 알게 됐다.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면서-이제 돈 쓰는 법도 좀 배우세요. 평생 고된 일만 하시고. 저희가 하지 말라고 해도 식당 일에, 식모 생활에… 몸 쓰는 일만 하셨잖아요-그녀의 성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아들이 용돈을 줘도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 그렇게 번 돈의 대부분을 저금하는 사람. 남편의 병수발을 들고, 두 아들이 먹을 반찬을 만드는 데 평생을 보낸 사람. 그러나 정작 두 아들은 일본식 반찬을 학교에 가져가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집에 두고 가고, 먼저 간 남편은 자신을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 일생을 거부당한 사람. 그래서 누구보다 상처받은 사람이 할머니였다. 그래서 가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한 시간이 지나 정해진 칭찬의 레퍼토리가 모두 소진되면, 마치 알람 시계라도 설정해 놓은 사람처럼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면, 할머니의 기만당한 삶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가장 가까이서 보고 들었을 텐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쏜살같이 일어나 집을 나서려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마치 아버지의 진심을, 아직 오지 않은 불편한 미래를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머니 인생도 굴곡이 많았지. 아버지는 종종 제사를 지낼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친모가 아니라 계모라는 사실, 친모는 아버지를 낳은 지 이 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그때 들었다. 구포동 할머니는 1928년에 도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조선으로 넘어와 구포에 정착했다고.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조선인 남자와 눈이 맞아 결혼했지만, 불과 일 년 만에 병에 걸린 남편과 사별했다고 했다. 일본인 송환 때 돌아가지 않으신 걸 보면 아는 친척도 없으셨던 모양이야. 우리한테는 아들을 조선에서 키우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셨지만. 하나밖에 없던 아들은 전쟁 중에 죽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스물세 살 때 할아버지를 만난 거라고 아버지는 덧붙였다. 아버지 바람기가 보통이 아니니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지. 제사상에 할아버지의 영정을 놓을 때마다 아버지는 그 시절이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구포동 할머니를 들이기 전까지 집안에 몇 명이 거쳐 갔는지. 다들 하나 같이 화장이 진한 술집 여자들이었다고 했다. 구포동 할머니는 어린 아버지가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은 유일한 여자였다. 다른 여인들처럼 분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산만한 아버지를 따끔하게 혼냈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이 사람이 아니면 싫다고 했다. 다른 여자들은 싫다고. 어머니로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어린 아버지의 고집에, 할머니는 얼마 가지 않아 쌀가게 사모님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참 박하게 사셨지. 같이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수군거리지를 않나. 그때만 해도 말을 좀 어눌하게 하셨으니. 대놓고 쪽발이라고 부르는 못된 인간들도 많았어. 나나 동생도 사춘기 때는 참 못됐지. 길가에서 친구들이랑 걷다 어머니를 만나면 일부러 못 본 척하고 피해 다녔으니. 어머니도 숨통 트일 때라곤 가끔 일본인 친구들 만나러 가는 게 전부셨을 거야. 거기 모임 이름이 뭐랬더라, 부영회였나? 나중에 검색해 보고서야 나는 그 모임의 이름이 ‘부용회’(芙蓉會)라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자신의 생떼로 별난 할아버지 곁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삶을, 할아버지의 권유로 이른 나이에 아이를 세 번이나 유산해야 했던 그녀의 인생을 얼마간 가엾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해, 하나코라는 인간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에게 할머니란 그저 어머니, 지극히 언어적인 의미로서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 무정시제 연습 55 지배하다 현재 시제 : 지배하고 있다 과거 시제 : 과거에 지배를 했고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다 완료 시제 : 과거에 지배를 했고, 현재에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무정 시제 : 과거에 지배를 했지만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무정 시제 연습 178 잃어버리다 현재 시제 : 잃어버리고 있다 과거 시제 : 과거에 잃어버렸고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다 완료 시제 : 과거에 잃어버렸고, 현재에도 여전히 잃어버리고 있다 무정 시제 : 나는 과거에 잃어버렸으나, 그 일은 그때 완결되었고,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과거에 아이를 잃었으나, 그 일은 그때 한 번으로 완결되었고 지금도 잃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만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일이 아니기에 이것은 미완료가 아니다. 과거에 발생한 그 일이 현재에 하나의 상태로 고정돼 있다고 말할 수 없기에 완료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잊지 않는다. 영원히 재현할 수 없다. 늘 불완전한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다. 이 모든 것이 그 死語(사어)로부터 비롯되었다. * 홍과 만난 것은 베를린에서 어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어학원 친구의 소개로 시내에 있는 한식집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홍은 내가 살고 있던 사설 기숙사 근처에 살고 있었다. 한 번 외식을 할 때마다 잔고가 추락하는 독일의 미친 물가 덕에, 우리는 제법 큰 공용주방이 있는 나의 기숙사에서 함께 요리를 하면서 가까워졌다. 홍이나 나나 독일의 행정은 지긋지긋해했지만, 맥주만은 사랑했다. 홍의 아버지가 외교관이라는 것, 일본에서 태어나 하코다테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것, 일본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솔직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얼마간 비참해지기도 했다. 그건 아마 잦은 변화 속에서도 자상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홍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나의 친부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친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친가와도 교류가 없었다. 친부는 고등학교 때까지 복싱선수로 활동하다 부상을 당한 뒤부터 구포시장의 도축업자로 일했다고 들었다. 내가 다섯 살 때, 심장병으로 죽은 그는 나에게 자랑할 만한 번듯한 직업조차 남기지 않았다. 고집불통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 아들보다는 딸을 원해 내 이름을 중성적으로 지어버려, 늘 사람들에게 나는 남자라고 해명하게 만든 사람.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들은 친부에 대한 전부였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괜히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 해외에 계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읊어 놓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가 재혼한 뒤부터는 나에게도 번듯한 아버지가 생겼으니까. 나는 새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곡물 사업을 하고 있다는 모호한 말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은근히 조장했다. 친구들과 격투기 시합을 볼 때면 우리 아버지도 복싱을 했었다고 말했고, 식당에서 시킨 소고기가 생각보다 적어 보일 때는 아버지가 축산업을 해서 아는데, 라는 말로 운을 뗐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오류는 있었을지언정 틀린 말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할머니도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하시지 않았어? 언젠가 홍이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물론 홍은 그 할머니가 혈연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나는 언젠가 그 말을 하려 했다. 때가 되면 홍의 머릿속에서 파편적으로 떠다닐 나의 가족들을 구분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일본인이셔. 술에 취한 그날에도 그랬다.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서야 아차 싶었지만, 말을 고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야. 그럼 너, 어떻게 보면 일본인 혼혈인 거네? 나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듯한 그 미소가 좋았다. 그 미소가 나도 모르게 거짓을 사실처럼, 허구를 진실처럼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그런가?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부모님도 아니고 기껏해야 할머닌데…. 얘 좀 봐. 21세기에 무슨 그런 시대착오적인 발언이야. 피곤함에 지쳐 있던 홍의 눈빛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됐고. 할머니 이야기 좀 더 해 봐. 혹시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그즈음 홍은 소논문을 위해 일본 여성들의 이주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해명하는 일을 포기했다. 구포동 할머니가 도쿄도 후추시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오랫동안 부용회라는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사람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들은 그대로 말했다. 쌀가게에서 나오는 수익을 몇 번이나 빼돌려 해방 후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의 생계를 돕고, 홀로 이국땅에서 죽은 그들을 위해 손수 장례까지 치러 주는 바람에 할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은 적도 있다고. 그러고 보니 이번에 장례식 끝나고 할머니 노트 가져왔는데. 노트? 무슨 노트? 그게… 할머니가 좀 특이한 분이셨거든. 그리스어 공부가 취미셨어. 나는 서랍 어딘가에 있는 할머니의 노트를 가져왔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에, 엄마가 버리려던 것을 겨우 말려서 들고 왔다고. 구포동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썼던 수십 권의 노트들 중 하나라고 했다. εἰ μέν κ᾽ αὖθι μένων Τρώων πόλιν ἀμφιμάχωμαι 만약 내가 여기 머물며 트로이의 도시를 두고 싸운다면, ὤλετο μέν μοι νόστος, ἀτὰρ κλέος ἄφθιτον ἔσται 내게서 귀향은 사라지겠지만, 불멸하는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할머니는 이 부분을 반복적으로 필사하셨어, 라고 나는 말했다. ‘일리아스’의 문장이래. 왜? 그야 나도 모르지. 잠깐 줘 봐. 홍이 할머니의 노트를 들고 가더니 빠르게 뒤쪽의 페이지를 훑었다. 할머니랑은 한국어로 소통했어? 응.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어가 침투해오는 부산식 한국어긴 했지만. 너희 할머니 작가였어? 무슨 소리야? 너 뒷부분 안 읽어 봤어? 그냥 필사노트라 앞쪽만 읽었는데? 홍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노트를 건넸다. 그러고는 마지막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노트를 건네받았다. 그녀의 말대로 뒤페이지에는 앞쪽의 시제 연습과는 달리 꽤 긴 산문이 있었다. 모두 그리스어로 기술돼 있었다. 할머니는 그 위에 일본어로 ‘아오리스트의 마지막 습작’이라고 적어 놓았다. 나는 홍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국의 문자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 모든 아오리스트는 언어의 흐름 속에서 소외된 존재다. 그러나 소외되었다는 사실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오리스트는 단일하고 완결된 사건이지만 지속성과 반복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아오리스트는 사라짐이 아니라 한순간의 존재다. 아오리스트는 불멸하는 명성을 추구한다. 끝났으나 끝나지 않은 것들을 찾아 헤매고, 떠나왔으나 정주하지도 귀향하지도 않으며, 죽었으나 결코 죽음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치 나의 아이처럼. 마치 아이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처럼. 알 수 없는 것으로 끊임없이 남겨 두려 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영원한 탐구가 가능해진다. 나는 무정시제이다. 나는 한 명의 아오리스트다. * 그리스어 수업은 처참한 성적표와 함께 끝났다. 홍의 말대로 나는 이미 수준급의 그리스어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 틈에서 시간이 갈수록 기가 죽었고, 독일어로 작품을 써내느라 수업조차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날이 잦았다. 그리스어를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반년 뒤였다. 졸업작품을 최종적으로 제출한 늦가을부터였다. 홍과는 그즈음을 전후로 헤어졌다. 나는 학업에 뜻이 없었고, 독일에 계속 체류할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홍은 미국에서 박사 유학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이국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깔끔하게 돌아섰던 마지막조차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느껴졌다. 한국에는 돌아가기로 결정했어? 아직 잘 모르겠어. 교수님이 졸업 작품을 출간해 보자고 하시는데. 너는 마음에 안 들지? 홍의 즉답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결말 부분을 좀 더 고치고 싶어서. 신중하게 써야지. 홍이 말했다. 너희 할머니 얘기잖아. 나는 그 말에도 잠시 주춤했다. 이번에도 홍의 대답이 곧장 돌아와서는 아니었다. ‘너희 할머니’라는 말.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일본에서 보고 싶은 게 있어. 겸사겸사 한국도 잠시 가고. 다른 계획은 있어? 그냥 친구들이나 만나겠지. 그간 미룬 성묘도 좀 가고. 홍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건 좀 궁금하네. 뭐가? 너희 할머니가 쓴 글들. 너는 마지막까지. 왜,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그간 미국행 준비로 바빴는지 홍의 얼굴이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아니, 라고 말하면서 홍이 미지근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너만 알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오래전처럼 화면 속의 경로를 응시했다. 홋카이도와 도쿄. 고료카쿠 타워와 도쿄 타워. 이제 나는 그곳으로부터 밀려나고 있었다. 오쿠니타마 신사와 유쿠라 신사로부터. 내가 한때 가깝다고 느꼈던 공간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소들에 대한 체감까지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웅크려 있던 그 수많은 장소들의 생동감까지 잃고 있는지는. 언젠가 홍과 함께 하코다테시의 도심을 거닐었던 적이 있다. 홍은 유년을 보낸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 했고, 그해 여름, 우리는 홍의 고향인 홋카이도로 떠났다. 홍은 이곳에 올 때마다 자신이 여기서 살았는지 헷갈린다고 했다. 그 시절이 자신에게 정말로 존재했는지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한때 이곳을 떠났고, 떠남에 고통을 느꼈지만,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있다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이 지극히 아오리스트적인 느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을 아오리스트적 사고로 접근하니, 그 모든 일들을 아오리스트적 사건으로 남겨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친모를 잃었고, 그때 그 일은 완결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잃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죽은 친부는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은 완결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기고 있지 않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날,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주인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이름 아래에는 ‘손자’라고 적힌 칸이 있었고, 그곳에 내 이름은 없었다. 아버지는 경황이 없었다고 했다. 남동생이 기입을 맡았는데 자신이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냐…. 작은아버지란 사람은 여전히 엄마와 나를 무시했다. 나는 그 장례식장 구석에서 양복을 차려입고, 서울에서 몇 년 만에 내려온 형과 마찬가지로 몇 년 만에 만난 사촌 동생이 사람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에겐 애도할 권리조차 없구나. 그런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그 학기에 교수가 기말과제를 내주며 했던 말-이번 학기에는 신화적 원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세요-이 연이어 생각났다. 그때 느낀 박탈감은 이미 완결되었다. 그러나 그 박탈감이 아직까지 어딘가에서 지속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서…. 너는 이야기를 만들지. 그날 병원에서 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왜 그러고 싶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창밖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내가 가져다준 노트를 유심히 보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계속 쓰다 보면 잊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진심이었다. 엄마에게도, 한국에서 글을 쓰던 친구들에게도, 라이프치히 학우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심. 변주하다 보면 그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자 할머니가 갑자기 나의 손을 덥석 잡아들었다. 그러지 마. 네?…. 나는 당황했다. 그런 신음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할머니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그때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할머니가 나보다 오랫동안 글을 쓴 사람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비록 할머니에게 나는 지극히 언어적인 차원에서의 손자에 불과했지만. 할머니의 글을 읽으면서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왜 일본어도 한국어도 아닌 언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평생토록 자신의 삶을 부정당한 사람은 그 부정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이중부정이 삶을 긍정의 세계가 아니라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비타협의 상태로 남겨 둔다면 어떨까? 미정도 부정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왕복운동으로 인해 삶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비록 할머니의 글에 신화와 문법에 대한 오독이 있을지라도, 나는 할머니가 노년에도 조화나 타협을 포기한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완료형이 될 수 없는 시제였던 것처럼, 나에게도 예술가 하나코는 완료형이 될 수 없는 시제다. 할머니와 나는 그런 점에서 닮았다. 우리는 현재와의 연결성이 불확실한 아오리스트였다. 어쩌면 그래서 여전히 그리스어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오리스트를 쓰기 위해. 아오리스트로 말하기 위해. * 나는 무덤이 되고 싶다. 한때 무정시제라는 언어체계였으나 그 야성적인 규칙에서마저 빠져나가 버린, ‘정해지지 않았다’는 규정에서조차 탈출해 버린 야성의 시간이 묻힌, 어느 범박한 무덤*이 되고 싶다. * 후추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미리 예약해 둔 호텔에 들러 체크인을 했다. 할머니의 노트를 넣은 백팩을 메고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식당은 신사 근처였다. 신사 정문에서 본당까지는 꽤나 기다란 돌길이 일자로 뻗어 있다. 홍과 하코다테를 방문했을 때 들렀던 유쿠라 신사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말끔하게 도색된 유쿠라 신사의 도리이와 달리, 이곳의 석조 도리이에는 검은 이끼들의 흔적이 역력했다. 밝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단지 회색빛으로 수수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 길을 따라 양쪽에 늘어선 나무 도리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역의 기둥들은 차라리 무덤가에 꽂힌 묘목들에 가까워 보였다. 할머니의 소설은 이곳, 오쿠니타마 신사의 어둠 축제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이곳을 떠났던 어린 할머니와 같은 나이인 여덟 살 소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천 년의 역사를 지닌 신사로 들어선 소녀. 그러나 어째서인지 일본식도 한국식도 아닌 안티고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얼굴 위로 노란 등빛이 번진다. 나는 할머니의 소설을 손에 쥔 채 그들의 맞은편에 쭈그려 앉는다. 이곳에는 빛이 없지만 저곳에는 빛이 있다. 그 빛 속에서 소녀는 부모님에게 신사의 전설을 듣는다. 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부인의 순산을 기원했던 이곳에는 늘 행복과 결연의 신이 사람들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고. 앞으로 우리 딸은 어떻게 살려나. 그런 물음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오로지 어머니와 딸의 대화로만 이루어진다. 마치 미래를 단정 짓듯, 혹은 예언하듯 미래형의 아오리스트로 기술된 이 소설에서 할머니는 미래를 잃지 않는다. 비록 단발성과 완결성으로 끝난 사건일지라도, 아오리스트의 불확정성이 이미 완결된 운명적 사건에 대한 상상을, 그 미래에 관한 끝없는 고투를 가능하게 한다. 그 습작에서 할머니는 농사꾼이었던 남편과 다시 사별하게 된다. 그러나 일 년 만에 헤어지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그를 더욱 극진히 간호했고, 사별하게 될 남편은 무려 일 년을 더 살게 된다. 그 일 년 동안, 할머니는 그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조선어가 서툴러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분명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머니는 소설에서도 할아버지와 결혼한다. 시장 사람들에게 쌀가게 사모님으로 불리고, 결국 이번에도 할아버지의 주사에 뺨을 맞고, 결국 이번에도 임신했던 아이를 유산한다. 그러나 유산할지언정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육 년을 살게 된다. 아이는 여섯 살이 되던 해, 피란길에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지만, 그가 죽기 두 달 전, 할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고향인 후추시에 방문한다. 바로 이곳에 와서 아이와 함께 밤의 축제를, 가부키극을, ‘거대한’(μέγα) 건물과 ‘넓은’(εὐρὺ) 하늘, ‘꺼질 줄 모르는’ (ἄσβεστον) 불빛들을 지켜본다. 어느새 그들이 바라봤던 집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하늘의 풍경도, 그들을 비추었던 불빛도 희미해진다. 시간은 아이를 잃고 하나코 씨를 잃는다. 돌길 한편에 쭈그려 앉아 그들을 바라봤던 나도 잃어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만, 반대로 무언가 분명 거대하게 남을 것이라고, 아오리스트는 말한다. 하늘을 바라봤던 사람의 심장에 단발성의 고통이 있었고, 그것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넓었는지 미래의 자신은 분명 알 것이라고, 아오리스트는 말한다. 한때 이곳에서 손을 잡고 있었던 사람들을 밝혔던 불빛, 한순간의 빛과도 같은 그 시간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 순간은 꺼지지 않을 것이고, 그 시간은 어느새 내가 될 것이며, 나는 미래에도 이곳에 있다고, 아오리스트는 말한다. *허수경, ‘꽃핀 나무 아래’(‘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어느 범박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 “핵잠 한미 합의, 되돌릴 수 없게 트럼프 정부 때 진척시켜야” [김미경의 다른 시선]

    “핵잠 한미 합의, 되돌릴 수 없게 트럼프 정부 때 진척시켜야” [김미경의 다른 시선]

    한미 관세 협상·후속 협의3500억弗 美투자 日보다 좋은 조건우라늄 농축·핵 재처리 물꼬도 성과실무진 TF 통해 조율… 실속 챙겨야한반도 둘러싼 외교·안보트럼프 김정은에 러브콜… 회담 의지韓 북미 만남 공헌하려면 신뢰 필요중일 갈등에 공개 발언은 신중해야“새해에도 관세 등 통상 전쟁은 장기화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등 ‘두 개의 전쟁’도 이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엄혹한 현실을 잘 돌파해 나가려면 국력과 외교력을 키워야 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각국을 상대로 벌이는 관세 전쟁과 미중 갈등, 북러 밀착, 중일 마찰 등 우리나라를 둘러싼 외교·안보 정세가 출렁이고 있다. 유럽과 중동에서 수년째 이어지는 두 개의 전쟁은 세계적으로 국방비와 에너지 등 물가를 동시에 올리는 등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외교와 경제, 안보가 엮인 복합다층적 위기 앞에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경제외교 전문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등을 역임한 이시형(68) 한국외교협회 신임 회장을 지난 17일 서울신문 광화문 사옥에서 만나 현 상황에 대한 평가와 새해 전망 등을 들었다. 그는 2일 취임식을 갖고 3년 임기를 시작한다. ●韓 중재 없이 북미 만나면 위험할 수도 -트럼프의 복귀로 전 세계가 각자도생의 시대로 가는 것인가. “2025년은 트럼프발 큰 파도가 덮친 시기였다. 아직 코만 내놓고 호흡하는 정도지 빠져나온 게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쪽으로 튈지 불안한 요인이 많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쟁, 우리에게는 상수일 수밖에 없는 북한 문제 등 2026년에도 상황이 그다지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한미가 관세 협상을 타결하고 후속 협의가 진행 중인데. “한미 관계는 두 대통령의 회담으로 관세 협상 합의 등 물꼬는 잘 텄는데 지금부터 속을 채워 나가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라는 큰 그림은 나왔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으니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한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트럼프식 톱다운 협상으로 기대 난망이던 이슈들도 밖으로 나왔는데 실무진의 추가 협의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실속을 챙기는 데 집중해야 한다.” -한미 합의 중 ‘1500억 달러 조선 투자, 2000억 달러 추가 투자’ 평가는. “양측 간 밀고 당기기를 통해 관세율과 투자금액이 정해지는 과정에서 조선 투자 아이디어가 들어갔고 처음엔 현금 투자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상 현금 투자로 끝났다. 5500억 달러 투자를 합의한 일본보다는 낫다는 평가가 있으나 우리가 경제적으로 감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선 협력은 양측이 윈윈할 수 있고 추가 투자는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중요 분야에서 수익 배분 등을 더 구체화해야 한다.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서 보면 우리가 아쉬운 면이 있지만 그만큼 투자 수익을 내야 한다.” -‘핵추진 잠수함 승인’과 ‘우라늄 농축·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지지’도 포함됐는데. “관세로 시작해 안보, 핵잠에 농축·재처리까지 물꼬를 틀 수 있게 미국의 인정을 받아내고 문서화한 것은 상당한 성과다. 그동안 한미 원자력협정 협상마다 제약이 많았는데 통상과 안보 문제가 결합해 패키지딜이 되니 가능했다. 각각 태스크포스(TF)를 통해 조율하고 구체화해야 한다. 핵잠은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 때문에 우리가 기회를 잡은 것인 만큼 트럼프 정부 때 상당히 진도를 나가서 되돌릴 수 없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 미국보다 우리가 급하니 실무 협의를 진척시켜야 한다.” -한미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한 가운데 ‘자주파 vs 동맹파’ 논란이 있다. “외교부와 통일부는 서로 하는 일이 다르지만 함께 정책을 조율해야 한다. 그런데 자주파로 밀어붙이는 원로들이 다시 등장해 현재 여건을 고려하기보다 평양에 가서 사진 찍고 내년 선거도 고려하고 그런 수준으로 보인다. 장관도 했던 분들인데 지금은 나라를 위해 걱정하는 건설적 역할이 필요하다.” -새해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은. 이재명 대통령은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했는데. “트럼프 대통령 특성상 정확한 예측은 어렵다. 김정은을 향한 노골적 러브콜을 보면 의지는 있어 보인다. 페이스 메이커는 레토릭으로는 좋지만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우리 편은 물론 상대방과 최소한 같은 경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굳이 용어로 정의하지 말고 북미가 협상 테이블에서 만날 수 있도록 뭔가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라면 우선 양측으로부터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하노이 노딜’ 후 남북 간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북미가 한국의 중재 없이 만나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또 북러 관계, 미중 관계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남북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니 주시해야 한다.” -미중 간 관세 협상이 휴전 중이다. 이 대통령이 ‘안미경중’은 취할 수 없다는데. “미중 간 갈등과 경쟁 관계는 단기간 끝날 상황이 아니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이라는 용어는 치우자는 건데 미중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대중 수출이 전체의 50%까지 차지하다가 지금은 20%로 미국과 거의 비슷하다. 중국 경제 자체의 열기가 식은 데다 대미 투자와 무역이 늘어난 결과다. 기업들도 시장 다변화 필요성을 느꼈고 그러다 보니 미국, 아세안, 인도 등에 수출이 더 늘었다. 미국이 안미경중을 우려하지 않을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본다.” -최근 중일 갈등 속 이 대통령이 중재 역할을 언급했는데. “중일은 동북아에서 서로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이라 중재는 큰 의미가 없다. 한일 간 신뢰가 중일 관계보다 더 돈독한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중일 관계도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다. 일본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으로 야기된 중일 갈등은 중국이 과잉 반응을 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중국의 의도는 대만 문제를 함부로 건드리면 다른 나라들도 그냥 안 둔다는 경고성으로 보인다. 그러니 우리도 중재 입장보다는 국가 지도자가 대중 관계에 있어 공개적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李정부 실용외교 치우침 없어 긍정적 -이재명 정부의 ‘국익 중심 실용 외교’에 대한 평가는. “한미 관계뿐 아니라 일본, 중국과도 우려했던 것만큼 한쪽으로 과도한 밀착 없이 잘 조절하고 있어서 긍정적이다. 전 정부의 ‘가치외교’가 단지 싫어서 실용외교인가 싶었는데 그런 걱정이 줄고 있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는 대놓고 뭘 할 수 없겠지만 상황 관리를 하는 것 같다. 북러 밀착 등 러시아도 한반도 문제 관련국인 만큼 더 벌어지지 않고 나중에라도 복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 -‘글로벌 코리아’의 외교 수요는 늘어나는데 외교 인력은 제자리걸음이다. “인력 부족은 외쳐 봤자 공허한 메아리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외교부의 사기가 떨어져 황폐화하는 것이다. 이왕 키운 외교 인력을 국익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데 본전을 뽑지 못하고 있다. 공관장 인사가 지연되면서 20% 이상 비어 있고 주요 지역에 경험 없는 특임공관장이 나간다고 한다. 특임 40%설까지 있는데 박근혜 정부 때까지 15% 이내였고 그 뒤로도 25%를 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외교부 관련 인사가 장관이 관여하지 못한 채 이뤄지니 적재적소 인사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큰 손실이다.” -한국외교협회 새 회장으로서 포부와 계획은. “전직 외교관 1200명, 현직 600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대국민 공공외교 및 포럼·출판 등 학술·연구 활동 강화에 힘쓰고자 한다. 은퇴 외교관과 대기업, 스타트업, 지방자치단체 등을 연결해 자문·컨설팅을 제공하고 고등학교 등을 찾아 안보특강, 진로상담 등 교육사업도 확대할 예정이다. 회원들의 활동 참여를 독려해 미국외교협회(CFR)처럼 정책 제언 등 전문성을 발휘하는 조직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시형 외교협회장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 14회로 입부한 정통 외교관 출신. 지난 11월 회원 투표를 통해 제24대 회장으로 당선됐다. 임기는 1일부터 3년이다. 주미대사관·주제네바대표부 등을 거쳐 부처 교류에 따른 재정경제부 경제협력국장,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 폴란드 대사 등을 역임했고 외교부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를 지냈다.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미경 논설위원
  • 도자 한 점… 수묵 한 점… 새해엔 비움과 유연함, 그것으로 채워봐

    도자 한 점… 수묵 한 점… 새해엔 비움과 유연함, 그것으로 채워봐

    옛 선조들이 그러했듯 도자 한 점, 수묵 한 점으로 새해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절제와 여백에서는 비움, 실험과 변형에서는 유연함을 배울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신상호: 무한변주’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신상호: 무한변주’ 전은 도예에 대한 편견을 깨뜨릴 뿐 아니라 흙으로 한 전복적인 사유를 마주하는 자리다. 전시는 도자 90여점과 아카이브 70여점을 통해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신상호 작가의 60여년에 걸친 창작 여정을 조명한다. 작가는 국내 최초로 가스 가마를 도입하고 도자 조각이라는 뜻의 ‘도조’(陶彫)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통의 현대화’를 도모했던 인물이다. 1991~1995년 작가가 집중했던 ‘분청’ 연작에서는 항아리를 캔버스 삼아 드로잉하듯 풀, 새, 물고기 등 자연물을 새겨 놓았는데, 완숙한 필치와 흙을 다루는 균형감이 돋보인다. 이후 영국에서 아프리카 미술을 경험하고 타문화의 원시성에 매료된 작가는 이를 표현할 최적의 물질이 흙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아프리카의 꿈’ 연작은 그 깨달음의 산물이다. 전시는 3월 29일까지. ●금산갤러리 ‘주섬주섬, 오밀조밀’ 생활 도자전… 글래드스톤갤러리 ‘불경한 형태들’ 도예에 대한 도전 오랫동안 감상의 대상과 생활 속 쓰임 사이, 그 경계에 있는 도자의 모습을 조망하는 전시, ‘주섬주섬, 오밀조밀’ 생활도자전이 오는 16일까지 서울 중구 금산갤러리에서 열린다. 정길영, 김성천, 김남숙, 김도연, 빈성은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는 도자를 감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아가, 일상 속에서 사용되는 도자의 다양한 모습을 함께 조망한다.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는 불완전한 상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도자전 ‘불경한 형태들’이 3일까지 열린다. 이헌정, 김주리, 김대운 세 명의 작가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인 흙을 통해 완벽함을 추구했던 옛 도예의 방식에 도전한다. 전시는 깨지고, 변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오히려 그대로 받아들이는 실험 정신에 초점을 맞춘다. 세 작가는 ‘완성’이라는 목표 대신 재료가 가진 약함(가마에서 변형되거나, 물에 의해 깎이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불완전함을 아름다운 과정의 이야기로 바꿔 놓는다. ●광양 전남도립미술관 남도 수묵 정신의 대가 김선두의 40년 예술 세계 조명… 경주 솔거미술관 ‘신라한향’展 전남 광양시 전남도립미술관에서는 3월 22일까지 남도 수묵의 정신을 토대로 전통 한국화의 미학을 동시대적으로 확장해 온 김선두 작가의 40여년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 ‘색의 결, 획의 숨’을 선보인다. 김선두 회화의 핵심은 전통 한지인 장지 위에 분채와 안료를 수십 차례 반복해 쌓아 올리는 독자적인 채색 기법에 있다. 겹겹이 축적된 색의 층위는 단순한 색채의 반복을 넘어, 작가가 오랜 시간 지속해 온 수행과 사유의 흔적, 곧 ‘시간의 결’을 드러낸다. 경북 경주시 솔거미술관 ‘신라한향: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 전을 놓쳤다면, 지금이라도 박대성 화백의 거대한 수묵화 두 점을 감상하러 가길 추천한다. 작가 작품 가운데 가장 대작인, 너비 15m, 높이 5m에 달하는 ‘코리아 판타지’ 속에는 단군왕검부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고구려 사신도, 신라 천마도, 금강산과 해금강, 북두칠성 등이 담겼으며 5m 화폭 ‘반가사유상’을 통해서는 상반신이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만 남은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이 작가의 상상으로 재탄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4월 26일까지.
  • “교육 본질 회복이 최우선 목표… 공교육 새로운 표준 될 것”

    “교육 본질 회복이 최우선 목표… 공교육 새로운 표준 될 것”

    학생 협력·성장하는 배움 제공교사 수업·평가·상담 환경 조성학부모 신뢰받는 공교육 구축총 65개 공약 중 28개 과제 완료8대 정책분야  이행률 90% 이상대입 제도 개편, 경기교육 핵심“새해 경기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교육의 본질 회복’을 최우선으로 들 수 있다. 교육의 본질이란 학생에게는 생각하고 협력하며 성장하는 배움을, 교사에게는 수업평가와 상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학부모에게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신뢰받는 공교육을 구축하는 것이다.”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은 세밑인 지난달 28일 서울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경기 교육이 대한민국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도록, 교육의 본질을 중심에 두고 학교가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며 미래 교육의 지속과 확장을 목표로 한다”며 2026년 경기교육의 기본 계획을 밝혔다. 임 교육감은 그동안 주력했던 하이러닝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AI) 서·논술형 평가 시스템 확대, 수능 영어 듣기 평가 폐지, 지역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한 균형 발전 전략 등을 강조하며 ‘임태희 교육 시즌2’ 구상을 설명했다. 다음은 임 교육감과의 일문일답. -임기 목표는 얼마나 달성했나.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지난해 실시한 ‘2025 전국 교육감 공약이행 평가’를 보면 전체 65개 공약 중 28개 과제가 완료됐고, 나머지 37개 과제도 정상 추진 중이다. 이를 종합한 임기 내 공약과제 목표 이행률은 92.8%로 평가됐다. 2024년 하반기 대비 6.4% 상승한 수치다. 에듀테크 기반 학생 맞춤형 교육, 글로컬 융합 인재 양성, 학생 맞춤형 진로·직업 교육, 교육 복지와 돌봄, 교사 수업 지원, 교육 행정 개편 등 8대 정책 분야 전반에서 대부분 90% 이상의 이행률을 기록했다.” -하이러닝 등 AI 서·논술형 평가 시스템 확대 목표와 기대 효과는.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확대·도입하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공교육이 학생의 학습 과정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체제를 정착시키고, 교사는 수업·평가와 상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교육의 본질 회복, 공정한 평가 체제 구축이라는 경기 교육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 서·논술형 평가 확대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교사의 채점 부담이었다. 하이러닝 기반 AI 채점과 데이터 관리 체계는 반복적·소모적 업무를 줄이고, 교사가 학생 개별 피드백과 수업 개선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돕는다. 기술 중심 정책이 아니라, 공교육이 평가의 책임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이다. 속도보다 신뢰, 양보다 질을 기준으로 학교 현장에 안착할 수 있는 평가 혁신을 추진해 나가겠다.” -수능 영어 듣기 평가 폐지의 제안 배경과 현재 진행 상황은. “문제 제기의 출발점은 ‘영어 교육의 목적과 평가 방식이 과연 일치하나’라는 질문이었다. 영어 듣기 능력은 분명 중요하지만 일제식·선다형 듣기 평가가 학생의 실제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 그리고 학교 수업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지에 점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현행 영어 듣기 평가는 학교 현장에서 활용도가 점차 낮아진 상황이다. 실제로 수행 평가 반영 비율이 해마다 감소해 왔고, 다수 학교에서는 수업 흐름과 충분히 연계되지 않는 일제 평가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문제 의식 속에 경기도교육청은 올해부터 EBS 영어 듣기 평가 시도 분담금을 편성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는 영어 듣기 능력을 평가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가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영어 듣기 평가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평가하자는 취지다.” -경기도교육청의 균형 발전 전략은. “경기도는 지역별로 인구 규모와 산업 구조, 교육 여건이 크게 다르다. 그래서 우리 도교육청의 균형 발전 전략은 모든 지역에 같은 정책을 적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 특성과 여건을 교육 강점으로 살리면서도 교육 격차가 구조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지역 맞춤형 정책, 협력·공유를 핵심 축으로 균형 발전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주요 전략은 ▲지역 특성을 교육 과정과 연결하는 전략 강화 ▲지역 협력 기반 교육 생태계를 통해 학교 교육력 확장 ▲경기 공유 학교와 경기 온라인 학교를 통한 지역 간 교육 격차 해소 ▲지역 맞춤형 교육 지원 체계로 균형 발전 뒷받침 ▲교원 전문성 강화 등이다.” -지난해 활발한 국제 교육 교류를 했다. 올해 계획은. “2025년에는 국제 교류 운영 학교 확대, 국제 교류 연구 학교 운영, UN 글로벌 아카데미 및 국제 포럼 개최 등을 통해 학생 참여형 국제 교류 모델을 정착시키는 데 주력했다. 경기 공유 학교와 경기 온라인 학교를 활용한 비대면·혼합형 국제 교류를 통해 지역·학교 여건에 따른 참여 격차를 줄였고, 교육지원청 중심의 국제 교류 협력 체계도 구축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올해는 국제 교류를 정책-교육 과정-학생 참여가 연결되는 구조로 고도화할 예정이다. 우선 국제 교류 협력을 경기 미래 교육 정책과 연계해 대륙·주제별 전략적 국제 교류를 추진한다. 학생 중심 국제 교류도 보다 구체화한다. 교육 1섹터(학교)에서는 국제 교류 협력 매칭 시스템을 통해 학교가 필요로 하는 교류 유형에 맞춰 해외 학교와 연결하고, 국제 교류 활동이 교육 과정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도록 지원한다. 교육 2섹터(공유 학교)에서는 중심 교육지원청을 거점으로 지역 특색을 반영한 국제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국제 교류 협력 경기 공유 학교를 확대해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도 국제 교류 수업과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교육 3섹터(온라인 학교)에서는 경기 온라인 학교를 활용해 실시간 공동 수업, 프로젝트형 국제 교류 수업, 국제 토론 수업 등을 정례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재외 한국 교육원에 지방 공무원을 파견해 현지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경기 한국어 랭귀지 스쿨(KLS)과 K-컬처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언어·문화 교류도 체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2026 경기교육의 방향과 주력 정책은. “역시 ‘교육의 본질 회복’이다. 이는 학생에게는 생각하고 협력하며 성장하는 배움을, 교사에게는 수업·평가와 상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학부모에게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신뢰받는 공교육을 마련하는 것이다. 올해 경기교육은 지난해 비전, 목표, 기조, 4대 정책은 유지하되 학교의 선택과 자율을 확대하고, 정책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주요 과제를 재구성했다. 주력 4대 정책은 ▲학생 성장에 초점을 둔 교육 체제 전환 ▲공교육 평가 신뢰 회복 ▲학교가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행정 역할 재정립 ▲교육의 공적 책임 확대다. 학교의 본질 회복을 출발점으로, 지역과 시공간, 행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교육 체계를 통해 경기 미래 교육의 지속과 확장을 도모하고자 한다. 모든 학생이 기본 인성과 기초 역량을 갖춘 미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공교육을 실현해 나가겠다.” -‘임태희 교육 시즌2’의 핵심 비전은. “경기교육이 가야 할 방향은 학교 교육이 배움과 성장의 본래 역할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완성하는 것이다. 핵심은 바로 대학 입시 제도 개편이다. 경기도교육청은 ‘경기 미래 교육 2032’ 이른바 ‘임태희 교육 시즌2’의 비전을 설정했다. 핵심은 ▲학교 본질을 제도적으로 완성 ▲공교육의 내·외연 확장과 균형 ▲AI와 디지털 매체의 역할을 교육 목적에 맞게 정립 ▲자율·균형·미래라는 교육 기조를 제도로 완성하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경기 미래 교육이라는 공교육 체제를 완성해 가는 단계다. 학교 현장에서 이미 시작된 변화를 대입 제도 개편, 현장 중심 정책으로 뒷받침해 흔들림 없는 구조로 만드는 것, 그리고 경기교육이 대한민국 공교육의 새 표준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완성해 나갈 가장 중요한 책무다.”
  • 선거의 해, 스포츠 해 [2026 캘린더]

    선거의 해, 스포츠 해 [2026 캘린더]

    2026년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가 밝았다. 오행 중 ‘병’은 불의 성질을, ‘오’는 말을 의미한다. 불의 기운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생기와 활력이 넘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새해에 어떠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미리 살펴본다. 1월 최저임금 시간당 1만 320원 [최저임금] 새해 첫 날 최저시급이 1만 320원으로 인상된다. 2008년 이후 17년 만에 노사 합의로 결정됐다. 지난해 1만 30원 대비 2.9% 올랐다. 월급으로 따지면 215만 6880원(주 40시간·월 209시간 기준)이다. 2월 겨울 스포츠의 ‘꽃’ 동계올림픽 [아르테미스 2호]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5일 아르테미스 2호 임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우주 비행사 4명이 열흘 동안 달 주위를 비행한다. [동계올림픽]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이 6일(현지 시각) 이탈리아에서 개막해 17일간 열전에 돌입한다. [설 연휴] 2026년 첫 연휴인 설 연휴가 14일 토요일에 시작해 18일 목요일에 끝난다. 음력 1월 1일인 설 당일은 17일이다. 닷새 연휴. 3월 다시 돌아온 야구의 계절 [코스피 70년] 지난해 코스피 4000 시대를 열어 젖힌 한국거래소(KRX)가 3일 70주년을 맞는다. [달의 몰락] 3일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을 볼 수 있다. [WBC와 프로야구 개막] 야구 최강국을 가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가 5~17일 열린다. 한국 프로야구는 28일부터 정규시즌에 돌입한다. [노란봉투법 시행] 근로조건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청업체 등을 사용자에 포함하는 내용 등이 담긴 노란봉투법이 10일 공포 6개월 만에 시행된다. 4월 K도서의 매력에 빠질 차례 [세월호 참사 12주기] 16일 304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 12주기를 맞는다. [파리도서전 주빈국 한국] 파리도서전이 17일부터 19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이 주빈국으로 선정됐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40주년]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주 체르노빌에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자력 사고가 발생했다. 최대 83만 명이 피폭된 이 사건은 냉전 종식과 소비에트 연방 붕괴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5월 다시 노동절 [63년 만에 본래 명칭 되찾는 노동절] 1일 ‘근로자의 날’이 63년 만에 본래 명칭인 ‘노동절’로 돌아간다. 우리나라에서는 1923년부터 매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다가 1963년 박정희 정부 시절 근로자의 날로 명칭을 변경했다. 6월 지역 일꾼 뽑고 월드컵 즐기고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3일 전국 지역단체장과 지역 의원, 교육감을 뽑는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판 커진 월드컵] 북중미 월드컵이 11일부터 7월 19일까지 멕시코, 미국, 캐나다에서 열린다. 본선 참가국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확대된다. 한국은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과 A조에 편성됐다. [서울국제도서전] 24~28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울국제도서전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다. 2024년과 지난해에는 2년 연속 15만 명이 도서전을 찾았다. 7월 미국 독립기념일 깜짝 이벤트 [미국 독립 250주년] 4일은 북미 대륙 13개 대영제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해 미국의 기초를 쌓은 지 250년이 되는 날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연중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8월 유네스코도 인정한 백범의 해 [백범 탄생 150주년] 29일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년을 맞는다. 김구 선생이 교육, 과학, 문화, 평화 증진에 기여한 가치가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받아 탄생 150주년인 2026년이 유네스코 기념해로 지정됐다. 9월 하필 금요일! 추석 연휴 나흘뿐 [한국 첫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세계유산의 등재, 보존, 보호와 관련한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19~29일 부산에서 열린다. [아시안게임]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 19일 개막해 10월 4일까지 열린다. [추석 연휴 나흘뿐] 추석 연휴가 24일 목요일에 시작해 27일 일요일에 끝난다. 추석 당일이 금요일에 자리하면서 무척 짧은 연휴가 됐다. 지난해 개천절부터 추석, 한글날이 이어지며 7일간 ‘황금연휴’를 누렸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다. 10월 78년 만에 간판 내리는 검찰청 [공소청·중대범죄수사청 출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출범한 검찰청이 2일 7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검찰의 기소 기능을 담당할 공소청과 중대범죄 수사를 담당할 중대범죄수사청이 새롭게 출범한다. 11월 임기 중간평가 받는 트럼프 [미국 중간선거] 3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의 미국 중간선거가 실시된다. 연방 하원 전체, 상원의 3분의1, 상당수의 주지사와 주법무장관, 주의회 의원 등 다양한 공직자를 선출한다. [수능] 19일 202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다. 2008년생이 주요 응시 대상자로, 2015 개정 교육과정, 고교학점제 전면 도입 전의 마지막 수능이다. 성적 통지표는 12월 11일 배부된다. 12월 수인선 송도역에서 KTX 출발 [인천~ 부산 2시간 30분] 수인선 송도역에서 출발하는 인천발 KTX가 12월 말 개통 예정이다. 부산까지 약 2시간 30분 소요된다. 경기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를 잇는 수도권 전철 신안산선 1단계도 개통 예정이다.
  • 서울 아파트 거래 60% 급감… 강남 3구, 연일 신고가 행진

    서울 아파트 거래 60% 급감… 강남 3구, 연일 신고가 행진

    서울 전역과 경기 12곳을 ‘삼중 규제’(조정대상지역·투기과열지구·토지거래허가구역)로 묶은 ‘10·15 부동산 대책’ 이후 서울의 주택 거래가 ‘반토막’났다. 하지만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연일 신고가를 갈아치우고 있다. 거래가 줄었는데 가격이 오르는 이상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국토교통부가 31일 발표한 11월 주택통계에 따르면 전국 주택 매매 거래량(신고일 기준)은 6만 1407건으로 전월 6만 9718건에서 11.9% 줄었다. 10·15대책 발표 이후 매수 심리가 위축된 영향이다. 수도권은 2만 7697건으로 전월 3만 9644건 대비 30.1%, 서울은 7570건으로 전월 1만 5531건 대비 51.3% 감소했다. 특히 서울의 아파트 거래 신고 건수는 4395건으로 전월 1만 1041건에서 60.2% 급감했다. 반면 지방 주택 거래는 3만 3710건 신고되며 전월 대비 12.1% 증가했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 규제 여파로 비수도권 지역에 ‘풍선효과’가 나타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부동산 시장에서 거래량이 줄면 가격이 하락하는 것이 통념이다. ‘수요·공급의 법칙’에 비춰봐도 수요가 줄면 가격이 내려가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부동산 시장에서는 거래량이 줄었는데도 가격은 오르고 있다. 서울 강남 3구에선 매매 건마다 신고가를 기록 중이다. KB부동산에 따르면 11월 서울 아파트 ㎡당 매매 평균 가격은 1770만원으로 올해 1월보다 16.8% 상승했다. 지금처럼 거래가 감소하는데 가격이 치솟는 상황은 ‘공급 절벽’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달 서울 주택 분양 물량은 0호다. 지난해 11월에는 5506호가 분양됐다. 올해 1~11월 누적 서울 분양 물량도 1만 2219호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만 6084호)보다 53.2% 줄어들었다. 또 ‘똘똘한 한 채 보유’라는 트렌드 속에 서울 강남 3구·한강벨트 지역에 수요가 몰리는 현상도 원인으로 꼽힌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확장재정 기조로 인해 유동성이 풍부해져 집값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대차 시장에서는 ‘전세의 월세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11월 월세 거래량은 13만 2381건으로 지난달 대비 4.4% 증가했다. 지난해 11월보다는 19.0% 늘어난 것이다. 1~11월 누적 전월세 거래량 중 월세 비중은 62.7%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3% 올랐다. 한편 정부는 경기 의왕·군포·안산·화성과 인천 남동구에 7만 8000가구 규모 공공주택지구 계획을 승인하고, 경기 구리·오산에 5만 5000가구 지구지정 절차를 완료하며 총 13만 3000가구 공급 계획을 구체화했다.
  • 회화·만화 속 말은 어떤 모습일까… ‘말의 해’에 열리는 전시회

    회화·만화 속 말은 어떤 모습일까… ‘말의 해’에 열리는 전시회

    2026년 말띠 해를 맞아 말의 의미를 짚어보는 다양한 전시가 열려 관객들을 맞는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오는 3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2에서 말띠해 특별전 ‘말(馬)들이 많네-우리 일상 속 말’을 연다. 매년 띠 전시를 통해 십이지 동물과 한국 민속 문화를 소개해 온 민속박물관은 이번엔 말 문화와 상징을 다층적으로 조명한다. 1부 ‘신성한 말’에서는 말이 교통수단을 넘어 신성한 존재로 인식된 문화와 함께 말방울에 담긴 벽사(귀신을 쫓거나 복을 구하는 것)의 의미를 살핀다. 2부 ‘우리의 말: 제주마’에서는 말의 고향 제주에 주목해 제주마의 역사와 특징을 조명한다. 조선 회화 속 말, 말과 관련된 의서와 안장, 왕의 행차에 등장한 말들의 풍경도 펼친다. 말과 인간의 공존을 보여주는 3부 ‘말과 함께’에서는 마패, 마구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서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활약한 제주마 레클리스 이야기도 풀어낸다. 대표적인 말띠 인물인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이야기를 민속 유물을 활용한 4컷 만화 형식으로 풀어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 기간 몽골 전통 악기 마두금 연주와 탱고 공연, 닥종이 편자 만들기, 양모 말 장식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대구동구문화재단 아양아트센터 아양갤러리에서는 120여명의 지역 작가들과 함께 내년 1월 11일까지 ‘말 그림’ 전을 연다. 2009년부터 매년 새해 ‘띠’를 주제로 이어온 기획전이다. 붉은 말이 상징하는 열정과 도약, 창조성을 각자의 예술 언어로 풀어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조명래 작가의 ‘같은 곳을 바라보다’, 방성희 작가의 ‘초원을 향한 갈기’ 등은 말의 역동성과 상승의 이미지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희망, 미래를 향한 의지를 담아낸다. 인천 미주사 주지 무현스님은 인천 중구 심산산방 갤러리에서 5일까지 개인전 ‘타오르는 말’을 연다. 국민이 말처럼 힘차게 달리며 소원을 성취하길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말 그림 30여 점이 전시된다. 지난해와 올해엔 용과 뱀을 주제로 개인전을 연 바 있다. 민화 속 말을 즐길 수 있는 전시도 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은은 박은주 작가 개인전 ‘사랑을 누비다’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민화를 통해 꾸준히 탐구해 온 길상의 의미와 개인적 서사를 집약한 자리다. 말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민화 본연의 기능인 ‘행복을 빌어주는 그림’에 주목해 가족의 건강과 안녕, 삶에 대한 소망을 따뜻한 필치로 담아냈다. 전시는 1월 5일까지.
  • 불의 기운 지닌 ‘붉은 말’처럼 힘차게 달려라 [2026 적토마의 해]

    불의 기운 지닌 ‘붉은 말’처럼 힘차게 달려라 [2026 적토마의 해]

    천간과 지지 모두 ‘불의 성질’ 지녀생명력·활동성·변화가 강조되는 해현대차 포니·美 머스탱 등 ‘말 상징’인간과 신을 잇는 매개체로도 인식‘푸른 뱀의 해’ 을사년(乙巳年)을 보내고 ‘붉은 말의 해’ 2026년 병오년(丙午年)을 맞았다. 말은 털빛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있는데, 이 가운데 털빛이 붉은 말을 부르는 한글식 표현은 ‘절따말’이다. ‘붉은 말의 해’는 동아시아 전통 역법 체계에 근거한다. 하늘의 기운을 풀어낸 열 개 천간(天干)과 땅의 기운을 나타내는 열두 개 지지(地支)로 시간과 우주의 질서를 표현한다. 천간 중 병(丙)은 오행에서 불, 동물 상징과 연결된 지지 중 오(午)는 말을 상징한다. 오 또한 불의 성질을 지닌 지지로 분류되기 때문에, 병오년은 천간과 지지 모두 불의 기운을 지닌 해로 해석된다. 불은 붉은 색, 태양, 열, 생명력, 확산과 표출의 의미를 갖는다. 계절로는 여름, 시간으로는 정오에 해당한다. 이런 불의 속성이 말이라는 형상과 결합한 병오년은 전통적으로 활동성과 변화가 강조되는 시기로 인식됐다. 말은 인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동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인간은 야생마를 길들여 타고 다니면서 이동의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이는 전쟁과 교역, 탐험을 가능하게 한 이동 수단이자 노동력이었으며, 문명이 형성되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근대 이후 운송수단이 기차와 자동차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옛 기억은 분명히 남아있다. 현대자동차가 처음 독자 생산한 승용차는 포니(조랑말)였고, 에쿠스 역시 라틴어에서 말을 뜻한다. 미국 자동차 머스탱도 북미 지역 야생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탈리아 자동차 페라리는 도약하는 말을 상징으로 쓴다. 속세의 이동 수단인 말은 또한 다양한 문화에서 생과 사, 인간계와 신성한 세계를 잇는 경계의 존재로 여겨졌다. 신라 천마총에서 출토된, 하늘을 힘차게 날아가는 말 그림인 천마도(天馬圖)가 대표적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선 십이지지 동물들을 방위와 시간을, 인간의 삶을 수호하는 존재로 형상화해 십이지신(十二支神), 또는 십이신장(十二神將), 십이신왕(十二神王)이라 불렀다. 열두 동물은 각각 의미를 갖는다. 자신(子神·쥐)는 지혜와 다산, 축신(丑神·소)은 인내와 성실, 인신(寅神·호랑이)은 용맹과 용기, 사신(巳神·뱀)은 통찰과 신비, 유신(酉神·닭)은 성실과 경계 등이다. 이중 오신(午神)은 수행과 안락, 자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관장하는 존재로 설명된다. 한국 무속에서는 말을 탄 신(神)을 표현한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하얀 말을 탄 백마신장은 장군신으로서 공동체를 수호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무신도에는 붉은 말을 탄 장군의 모습도 나타난다. 말 색깔은 달라도 인간과 신을 매개하는 역할은 동일하며, 붉은 말은 불의 힘과 전투성을 강조하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불교 회화에서도 말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태고사 시왕도와 같은 불교 탱화에는 저승사자가 말을 타고 망자를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해놨다. 이는 죽음 이후의 이동과 이행을 상징한다. 장례 행렬에 사용된 상여 장식 꼭두에 말 탄 인형들이 있는데 역시 이런 인식과 연결된다. 이육사는 시 ‘광야’에서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며 고난과 희생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강한 믿음을 노래하기도 했다. 말과 관련된 속담도 많다. ‘말은 타 봐야 알고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안다’는 경험을 통한 판단의 중요성을, ‘말이 천 리를 가고 고삐는 손에 있다’는 능력에 대한 통제와 책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말은 마구간에 있어도 빛이 난다’는 본질적 가치가 환경과 무관하게 드러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한반도 역사에서 병오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병오박해다. 1846년(조선 헌종 12년)에 발생한 병오박해는 다른 박해에 비해 희생자가 적었지만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이자 성인으로 시성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사건으로 중요도는 크다. 띠로 성격을 파악하거나 십이간지에 색깔을 입혀 해석하는 게 과학적이지 않다는 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소한 의미라도 붙잡아 마음을 다잡고 싶은 게 새로운 시작, 새해를 맞이하는 심정이기도 하다. 붉은 말의 해에는 달리되 고삐를 쥐고, 불타오르되 소진되지 않는, 속도 속에서도 쉬어가고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배울 수도 있다. 말의 등에 어떤 마음으로 올라탈지는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 中, 반도체 자립 속도… “새 공장에 국산 장비 절반 써라”

    중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제조업체의 신규 생산라인에 국산 장비를 50% 이상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과 기술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반도체 자립 기조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해당 지침이 공식 문서로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최근 몇 달간 공장 신설이나 증설을 위해 국가 승인을 신청한 반도체 업체들은 조달 입찰에서 장비의 최소 절반이 중국산임을 증명해야 했다. 한 소식통은 “당국은 50%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선호한다”며 “궁극적으로는 100% 국산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구 기준에 맞지 않으면 신청은 대부분 반려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공급에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는 국산 장비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첨단 생산라인에는 기준을 완화하는 식으로 당국이 유연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번 조치는 반도체 공급망 자립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이 도입한 중대한 지침 중 하나라고 로이터는 분석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해 일부 최첨단 장비 수출을 통제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미국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 유럽 등에서 장비 수급이 가능함에도 중국 업체들이 자국 장비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는 로이터의 논평 요청에 답변하지 않았다.
  • ‘반이민 정책’ 저격수들 손잡은 맘다니… 트럼프와 대립각 예고

    ‘반이민 정책’ 저격수들 손잡은 맘다니… 트럼프와 대립각 예고

    법률고문에 ‘反트럼프’ 뱅크스·카셈진보 상징 샌더스는 취임 선서 주재보수 성향 정부와 마찰 가능성 전망 무명의 정치신예임에도 돌풍을 일으켜 뉴욕시장에 당선된 조란 맘다니가 1월 1일 취임식과 함께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는 가운데, 뉴욕시 법률 담당 책임자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인 인사를 기용해 주목받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표방하는 맘다니 당선인은 진보 진영에서도 파격적으로 평가받는 공약을 내세웠던 터라 강한 보수 성향인 트럼프 행정부와 법적 분쟁 등 마찰을 빚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맘다니 당선인의 취임식은 미국 진보 진영의 상징인 버니 샌더스(무소속·버몬트) 상원의원이 주재하며 시민단체와 노조 관계자, 코미디언, 유튜버 등 다양한 계층이 취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맘다니 당선인은 30일(현지시간) 뉴욕시 법률 고문으로 반트럼프 인사인 스티브 뱅크스 전 뉴욕시 사회복지국장을 임명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이 매체는 “법률 고문은 법정에서 뉴욕시를 대표하는 직책”이라며 “맘다니 당선인이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 정책에 반대한다는 공약을 냈던 만큼, 뱅크스가 상당히 바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맘다니 당선인은 지난 11월 4일 선거에서 승리한 후 당선 연설에서 “뉴욕은 이민자의 도시로 남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뱅크스는 민주당에서도 진보 성향이 강한 빌 드블라시오 전 뉴욕시장 측근으로, 퇴직 후 대형로펌에 합류해 공익 부문 책임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해당 로펌이 지난 4월 백악관과 연관된 단체에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히자 사임하는 등 반트럼프 인사로 꼽힌다. 맘다니 당선인은 이날 조 바이든 정부 시절 이민정책 고문을 지낸 람지 카셈 변호사도 뉴욕시 법률고문으로 임명했다. 카셈은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에 참여했다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대학생을 변호하는 등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정책 대척점에 서 있는 인사다. 보수성향 폭스뉴스는 “카셈이 과거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카에다 인사를 변호한 이력이 있다”며 그의 임명을 비판했다. 맘다니 당선인은 31일 자정 무렵 1945년 폐쇄된 옛 뉴욕시청 지하철역에서 가족과 지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 취임식을 한다. 그는 성명에서 “이 역은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킬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고자 했던 도시의 용기를 보여주는 물리적인 기념비”라고 설명했다. 이어 1일 뉴욕시청 앞에서 공식 취임식을 하며 샌더스 상원의원이 취임 선서를 주재할 예정이다. 소설 ‘파친코’의 이민진(한국계 미국인) 작가 등을 비롯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48명의 취임위원회 위원과 4만여명의 시민이 참석할 예정이다.
  • ‘물리 4대 천왕’은 떠났지만… 오늘도 K연구실의 불은 켜집니다 [초격차 과학인재 1만人 프로젝트]

    ‘물리 4대 천왕’은 떠났지만… 오늘도 K연구실의 불은 켜집니다 [초격차 과학인재 1만人 프로젝트]

    2003년 대전과학고 신입생 중에는 ‘물리 4대 천왕’으로 불린 4명이 있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국내 과학계에 남아 있는 이는 없다. 3명은 의대·한의대로 진학했다. 나머지 한 명인 최순원 교수가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국이 아닌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있다. 고교 졸업 후 미국 대학으로 진학한 최 교수는 “한국에 있었다면 과학으로 진로를 정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인력 부족과 인재 이탈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 지 오래다. 과학 영재 대부분의 제1지망은 의학이다. 과학계에 남은 석·박사 연구 인력은 해외로 떠난다. 김영오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은 31일 “서울대 공대 입학 정원 850명 중 매년 100명 이상이 의대 진학을 위해 1학년 때 학교를 떠난다”고 말했다. 허약한 기초과학, 부실한 지원, 수도권 쏠림, 관료주의 등 한국 과학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젊은 과학 인재 부족이다. 과학기술 인재의 국적·거주지가 곧 반도체·바이오·모빌리티 등 최첨단 산업의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상황에서 서울신문은 새해 화두로 ‘초격차 과학 인재 1만인(人)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매년 10만명씩 들어오는 대학 이공계 신입생 중 10%만이라도 재능을 꽃피우도록 키우자는 취지다. 묵묵히 연구실을 지키는 이들의 목소리를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 6·3 지방선거 레이스 돌입

    6·3 지방선거 레이스 돌입

    ‘대권 징검다리’ 최대 격전지 서울민주, 6년 만에 서울시장 탈환 노려국힘, 개혁신당과 연대 전략 필요성대전·충남 행정통합 변수청와대 인사 차출설 등 설왕설래현직 이장우·김태흠 단일화 가능성 6·3 지방선거가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 각 정당은 모두 지방선거 승리에 사활을 걸고 있다. 총선과 지난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까지 압도적 승리를 노리는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주요 광역단체장 ‘탈환 플랜’을 가동한 상태다. 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후보 간 ‘명심’(이재명 대통령 의중) 경쟁도 치열하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뒀던 국민의힘은 ‘수성 전략’ 구상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이번 선거에서 최대 변수로 떠오른 대전·충남 행정통합은 선거판 전체 구도를 흔들 것으로 보인다. 범여권·범야권의 ‘빅텐트 연대’ 구축 여부도 이번 선거를 판가름할 변수로 꼽힌다. 서울시장은 여야 모두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격전지다. 무엇보다 서울시장은 하나의 광역단체장을 넘어 대권 가도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자리인 만큼 탈환과 수성 싸움이 더욱 치열하게 벌어질 전망이다. 민주당은 박원순 전 시장 이후 6년 만에 서울시장 탈환을 노리며 전현직 의원들이 대거 도전장을 내밀었다. 원내에선 박주민·박홍근·김영배 의원이 출마를 공식화한 가운데 전현희·서영교 의원이 출마 준비에 분주하다. 원외에선 홍익표·박용진 전 의원이 출마를 고심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소셜미디어(SNS) 공개 칭찬을 받은 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전하면서 당내 경선이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민의힘에선 ‘현직 프리미엄’ 오세훈 시장이 헌정사 최초 5선을 노린다. 원내에서는 ‘6·3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단장을 맡은 나경원 의원이 ‘당심’을 등에 업은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권영세·신동욱·조은희·조정훈 의원, 한동훈 전 대표도 자천타천으로 물망에 올랐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의 연대론도 꾸준히 거론되는 상태다. 부산시장 유력 후보로 거론된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통일교 금품수수 의혹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민주당의 부산시장 선거 전략은 다소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일각에선 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온 하정우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의 출마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힘에선 박형준 부산시장이 3선에 도전한다. 당장 올해 지방선거에서 대전시장과 충남지사가 아닌 초대 대전·충남 통합시장을 뽑을지도 관심사다. 현재 대전시장과 충남지사 모두 국민의힘 소속으로 민주당은 대전·충남 탈환을 중요 과제로 삼고 있다. 대전에선 허태정 전 시장과 장철민·장종태 의원이 경선 참여 의사를 보인 가운데 박범계 의원, 김제선 중구청장 등도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충남에선 양승조 전 충남지사와 박정현 부여군수가 출마 결심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문진석·박수현·복기왕 등 현역 의원들도 출마를 고심하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대전·충남 행정통합에 불을 붙이면서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의 차출설도 끊이지 않고 있다. 강 실장은 충남 아산을 3선 의원 출신으로 그간 충남지사와 서울시장 후보로도 거론됐다. 국민의힘에선 현직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의 단일화 가능성이 있다. 대전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박성효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이사장과 정용기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 등도 후보 단일화의 변수로 꼽힌다. 애초 김 지사의 양보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충남지역 기초단체장 등 출마 예상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1% 포인트 차이’로도 승패가 갈리는 선거인 만큼 군소정당이 얼마나 ‘바람’을 일으키냐도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개혁신당과 조국혁신당이 자체 후보를 낸다면 각각 보수와 진보 표가 분산될 수 있어 빅텐트 연대 구축은 필승 전략의 요소가 될 전망이다. 혁신당은 민주당과의 연대를 강조하면서도 최대 지지 기반인 호남에서의 경쟁 구도는 부각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과 협력을 통해 국민의힘 광역·기초단체장을 ‘0’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혁신당이 후보를 낼 경우 표가 분산되는 만큼 선거 직전 단일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종무식에서 다가올 지방선거에 대해 “어쩌면 대한민국 생긴 이래 가장 중요한 선거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 안정적인 대결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혁신당 연대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통일교 특검을 고리로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간 공조로 ‘보수 연대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지만 양측 ‘선거 연대’와 관련해선 현재까지는 선을 긋는 모습이다. 국민의힘은 쇄신과 지지율 회복이라는 과제를, 개혁신당은 독자 생존 전략이라는 목표를 각각 안고 있는 상황이다.
  • [사설] 민생 주름 펴지게 정치 복원, 경제 회생… 다시 도약을

    [사설] 민생 주름 펴지게 정치 복원, 경제 회생… 다시 도약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관세전쟁의 포연이 자욱한데, 2026년 병오년 첫날은 밝았다. 희망의 기지개를 켜야 할 새해 아침에도 우리 어깨는 마냥 가볍지 않다. 올 한 해 뚫고 헤쳐 나갈 터널은 길고, 걸어가야 할 길은 멀고 또 험하다. 급변하는 세계 무역질서 속에 한국의 좌표를 단단히 설정하는 숙제가 우선 무겁다. 새로운 무역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4월 방중은 강대국 패권이 재편되는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동북아에서도 연초부터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과 방일, 북한의 9차 노동당대회가 예정돼 있다. 북미·남북 간 대화가 어떤 속도와 폭으로 전개될지도 변수다. 국내 상황도 혼란스럽다. 이재명 정부 2년 차에 접어들지만 내란 관련 종합특검 및 재판 등을 둘러싼 여야 갈등과 대치 정국은 진행형이다. 6월 지방선거를 내란 청산의 완결판으로 삼고자 하는 여당과 절멸 위기 속에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야당의 대결이 거칠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국내외적 불확실성이 중첩된 복합 위기를 돌파해야 할 일차적 책무는 정부와 여당에 있다. 내란 청산의 구호를 이제 그만 멈추고 민생의 주름살을 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민생 회복에 국민의 역량을 모으고 실질적 해법을 제시하는 책임정치를 해야 할 시간이다. 개헌과 정치개혁으로 낡은 정치와 결별하고 독선과 배제가 아닌 통합의 실력을 보여 주길 바란다. 국민의힘은 건강한 보수와 중도층을 두루 아우를 수 있는 합리적 대안 세력으로 그야말로 환골탈태해야 할 것이다. 지지율 20%대를 탈피하려면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양당 중심 정치의 균형이 잡혀야 민생을 뒷받침할 정책이 반듯하게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략에 휘둘려 경제의 발목을 잡는 자해적 퇴행 정치를 벗어나 협의 정치를 복원할 책임이 여야 모두에 있다. 올해 경제는 회복과 불확실성이 공존하는 전환기가 될 전망이다. 미래 생존의 필수 조건인 인공지능(AI)을 향한 산업 생태계 재편에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이다. 경제 역동성을 막는 규제를 개혁하고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 속 공급망·경제안보 역량을 더 탄탄히 키워야 한다. 이 숙제들을 해결해 허약한 체질을 개선할 수 있다면 우리 경제는 도약의 발판에 가뿐히 올라설 수 있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를 1.8%로 잡고 있다. 저출생·고령화로 인구구조가 바뀌면서 이마저도 달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023년부터 1%대에 빠진 저성장의 늪을 빠져 나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일일이 꼽기가 벅차다. 고환율, 치솟는 집값, 고물가 속의 내수 침체를 극복하려면 규제·금융·공공·노동·연금·교육 등 6대 구조개혁도 더이상 미룰 수가 없다. 고통스럽더라도 한발 한발 걸어 터널을 지나면 반드시 햇빛은 기다린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2026년은 국가 재도약의 모멘텀이었다고 훗날 말할 수 있게 하자.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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