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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 인권운동가 방탄소년단에 감사표한 이유

    홍콩 인권운동가 방탄소년단에 감사표한 이유

    5년 전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홍콩 민주화 운동과 지난해부터 이어진 민주화 시위를 이끌고 있는 홍콩의 인권운동가 조슈아 웡이 한국의 방탄소년단에 대해 감사의 뜻을 밝혔다. 조슈아 웡은 지난 17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노란 우산을 들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사진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들은 방탄소년단에 대한 공격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웡의 트위터에 네티즌들은 “홍콩 인권운동의 상징인 노란 우산을 든다는 것은 중국 시장을 포기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인데 방탄소년단은 대단하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견에 중국 정부가 반일운동과 반미운동을 벌여도 중국인의 아이폰 구매와 같은 소비가 끊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반박도 있었다. 게다가 방탄소년단은 세계 팬들과 소통하는 커뮤니티인 위버스를 통해 판매하는 생수의 이름을 ‘비워터’(be water)라고 지었는데 이 역시 홍콩 시위의 구호 가운데 하나다. 한 홍콩 네티즌은 중국 공산당이 진실은 제대로 판별하지 않고 홍콩 시위와 관련된 것은 무조건 공격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며 우연이든 아니든 방탄소년단이 노란 우산을 들고 홍콩 시위 슬로건을 생수 이름으로 한 것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 지지 댓글 하나당 5마오(약 90원)를 받는다고 해서 ‘우마오’라고 불리는 중국 공산당 댓글 부대를 비판했다. 앞서 방탄소년단은 한·미 우호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밴플리트상 수상 소감에서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으로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중국 내에서 맹비난을 받았다. 미국에 맞서 한국을 도왔다는 이른바 ‘항미원조’ 정신을 내세우며 방탄소년단이 중국의 희생을 무시했다고 보도했던 중국 관영언론 환구시보는 이후 한국 언론의 선정적 보도가 논란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한국 추상조각 개척자’ 최만린 별세

    ‘한국 추상조각 개척자’ 최만린 별세

    한국 추상조각을 이끈 최만린 조각가가 17일 오전 별세했다. 85세.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서울대 미술대학장과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고, 2001년 서울대 명예교수로 위촉됐다. 한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1세대 조각가로서 동양철학의 근원적 속성을 추상의 형태에 담은 작품세계를 통해 ‘한국 추상조각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1958년 한국전쟁의 상흔을 ‘이브’라는 인류의 대명사를 빌려 표현한 연작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60년대부터 ‘천’, ‘지’, ‘현’ 시리즈와 ‘일월’ 시리즈 등 서예의 필법과 동양철학이 모티프가 된 작품을 펼쳤다. 생명의 보편적 의미와 근원의 형태를 탐구하는 ‘태’, ‘맥’, ‘0’ 시리즈 등 최근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 왔다. 고인은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이던 2004년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양기탁과 베델의 흉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작품은 서울 중구 본사 1층에 전시돼 있다. 1997년부터 2년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내며 1998년 미술계 숙원인 덕수궁 분관을 개관했고, 서울관 건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미술인대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성우 겸 배우인 아내 김소원씨, 아들 최아사(계원예술대 건축학과 교수), 딸 최아란(연극배우)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19일 오전 8시.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50억 이어 또 10억… ‘고려대 아름다운 기부왕’

    50억 이어 또 10억… ‘고려대 아름다운 기부왕’

    10년간 고려대에 5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한 졸업생이 코로나19 극복에 힘써 달라며 또다시 모교에 거액을 쾌척했다. 고려대는 조흥건설 창업주인 유휘성(82)씨가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심혈관질환 연구에 쓰라며 10억원을 기부했다고 16일 밝혔다. 충북 진천 출신인 유씨는 13살 때 한국전쟁으로 부친을 여읜 뒤 어려운 시절을 보냈으나, 학업에 정진해 1958년 고려대 상과대학 상학과(현 경영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유씨는 1970년대 건축 공사와 토목 자재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해 기업가로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11년 건립기금 10억원을 시작으로 2015년에는 연간 40여명의 학생에게 생활비를 지원할 장학금 10억원을 내놨다. 2017년에는 가족과 평생 살아온 서울 서초구 아파트(당시 시가 22억원 상당)를 학교에 기증했으며, 지난해에는 과학 연구에 써 달라며 10억원을 기부했다고 고려대는 밝혔다. 유씨는 지난 3일 고려대 본관에서 열린 발전기금 기부식에서 “고대인의 새로운 자긍심이 된 의료원에 예전부터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코로나19로 의료계가 힘든 시기에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가좌역~효창공원앞역 6.3㎞ 철길, 격동기 그림자 짙은 대한제국 뒤안길

    가좌역~효창공원앞역 6.3㎞ 철길, 격동기 그림자 짙은 대한제국 뒤안길

    1905년 서울~신의주 잇는 경의선 개통日·美·佛·러 등 경의선 부설권 이권다툼 70년대 연남파출소 인근 기사식당 생겨홍대부근 기찻길 거리에는 예술 작품들서서갈비·마포최대포집 등 추억의 맛집 김구 묘·안중근 가묘 모셔놓은 효창공원한강 심원정 터엔 수령 670년 느티나무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5회 ‘경의선 숲길 걷기’ 편은 마포구 가좌역에서 용산구 효창공원앞역까지 6.3㎞에 이르는 경의선 숲길 전 구간을 걸었다. 경의선 숲길 공원 전체가 서울미래유산이다. 제국주의 열강이 집어삼킨 대한제국의 어느 시간을 들춰도 안 아픈 곳 없다. 일제의 자원 약탈과 대륙 침략을 위해 놓인 경의선 철길을 걷는 마음이 만추의 단풍처럼 화사하지만은 않다. 깊어가는 가을, 나무에 매달린 단풍잎보다 떨어져 뒹구는 낙엽이 더 많다. 수렴의 이치는 새봄에 다시 피어날 새잎에 닿아 있으니, 가을이 남긴 유산 앞에서 마음이 숙연하다.경의중앙선 가좌역 4번 출구에서 출발했다. 소란한 자동차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사천교를 건너 다리 아래 도로에서 경의선 숲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에 도착할 무렵부터였다. 하늘거리는 억새꽃과 절정 지난 단풍이 어울려 반짝인다. 경의선 기찻길의 추억을 위해 설치한 철로는 햇볕을 머금은 듯 빛나지 않는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서울~개성~사리원~평양~신의주에 이르는 499㎞의 경의선이 개통됐다.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일제의 계획이 부산~서울을 잇는 경부선과 서울~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완성되면서 구체화됐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이 경의선 부설권을 놓고 이권다툼을 벌이는 사이 대한제국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역사의 격동기 대한제국의 어느 하루를 들추어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으니, 경의선 숲길의 화려한 단풍은 그 아픔 위에서 피어난 꽃이거니 생각했다. 경의선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지상의 철길 구간은 공원이 됐다. 좁은 흙길 양쪽에 은행나무가 줄지어 섰다. 은행나무길 끝 소실점을 향해 걷는다. 나무 밖에 아파트 단지 건물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은행나무 단풍길에서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애완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붉은 단풍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불타는 가을도 쉼표가 필요하다. 입동이 지난 지도 꽤 됐으니 계절이 바뀌는 하늘 아래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가 을씨년스럽다. 경의선 숲길이 찻길에 의해 끊겼다 이어진다. 그 부근에 연남파출소가 있다. 파출소 좌우로 이어지는 도롯가에 기사식당이 띄엄띄엄 자리 잡았다. 이른바 ‘연남동 기사식당 거리’다. 이 거리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70년대부터 생기기 시작한 기사식당들은 택시기사의 단골식당이 됐다. 손님이 없는 사이 잠시 짬을 내 식사를 해야 하는 택시기사의 입맛을 사로잡던 음식들 덕에 이 거리의 기사식당들은 맛을 찾아다니는 청춘들의 순례지가 되기도 했다.홍대입구역 부근에서 경의선 숲길은 도로를 건너고 역이 있는 건물을 지난다. 홍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길은 본 모습을 찾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쪽을 바라본다. 그 길 끝에 옛 당인리발전소가 있다. 1923년 용산에서 당인리발전소를 오가는 철길이 놓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 철길 옆에 상가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철로는 1976년에 폐선됐고 주변 상가 건물만 남았다. 그 거리 중 마포구 서교동 365-2에서 26번지까지 구간이 ‘서교365’라는 이름으로 서울미래유산이 됐다. 은방울자매가 부른 대중가요 ‘마포종점’도 서울미래유산이다. 노랫말에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라는 구절이 있다. 서대문~마포 구간을 운행하던 전차의 마포종점이 지금의 불교방송국 부근에 있었다. 이 노래를 작사한 정두수씨가 당시 마포구 도화동에 살았다고 하니, 그가 마포 종점에서 당인리 발전소의 불빛이 꺼지고 어둠만 남은 풍경을 보았던 것이다. 홍대 부근 기찻길 옆 마을, 생활의 편린이 나뒹굴던 거리에 예술이 꽃피기 시작한 건 홍대 주변에 둥지를 튼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 덕이었다. 문화예술의 전초이자 게릴라였던 그들이 가난과 고독을 딛고 창작해낸 예술의 물결 위에서 홍대 주변 거리는 넘실댔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문화 위에 덧씌워진 상업의 잇속이 옹이처럼 단단하게 남았지만, 거리에 흐르는 예술의 혈맥은 경의선 숲길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분야별로 접할 수 있는 부스 주변 길에서 상상을 자극하는 예술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 길에 붙은 이름이 ‘경의선 책거리’다.그 거리 끝을 ‘땡땡거리’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른다.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갈 때 ‘땡땡땡땡’ 울렸던 소리를 따서 만든 별칭이다. 예전에 이 부근에 고기를 구워 먹던 실비집이 많았다. 오랜만에 주머니 든든한 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집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서강로를 가로지르는 서강하늘다리를 건넌다. 다리 왼쪽 이면도로 골목에 있는, 1953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연남서식당’도 서울미래유산이다. 드럼통 가운데 연탄불을 피워 양념에 잰 소갈비를 구워 먹는다. 메뉴는 소갈비 하나다. 식당에 의자가 없다. 그냥 서서 먹는다. 그래서 단골들 사이에서 불리던 ‘서서갈비’라는 별칭이 더 유명해졌다. 한국전쟁 이후 화기와 연료가 부족했던 시절, 드럼통에 연탄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던 초창기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초창기에는 버스와 트럭 기사가 많이 찾았다. 지금은 외국인들도 종종 눈에 띈다. 고기 굽는 향을 뒤로하고 가로수가 터널을 이룬 길로 접어들었다. 마지막 가을을 불태우는 단풍잎들이 머리 위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할머니 대여섯 분이 길가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이야기를 나누신다. 50년도 넘게 이 마을에서 살고 계시다는 할머니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을 공원처럼 만들어서 좋다시며 단추공장이 있던 자리까지 손수 안내해 주신다. 어느 가게 담벼락에 붙은 마을 옛 사진을 함께 본다. 할머니는 단추공장 사람들 이야기를 하시다가 옛날에는 사람들이 정도 많았다며 웃으신다. 공덕역 부근에서 길은 다시 도로에 의해 끊어졌다 이어진다. 그 언저리에 있는 ‘역전회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역전회관은 1962년 용산역 앞에서 역전식당으로 시작했다. 용산역 앞이 개발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금의 역전회관을 있게 만든 바싹불고기, 선지술국, 선지백반과 함께 새로운 메뉴도 개발해서 손님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역전회관 창업주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시가에서 요리를 배워서 식당을 시작했다. 바싹불고기는 얇게 저민 치맛살에 양념을 해서 숯불 향 짙게 구운 요리다. 선지백반은 구구하고 담백한 선지국을 곁들인 한상 차림이다. 공덕역 5번 출구 부근에 있는 ‘마포진짜원조최대포집’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55년 처음 문을 열었다. 돼지갈비 전문이다. 소금구이와 껍데기도 인기다.길은 경의선 숲길 커뮤니티센터로 이어진다. 새창로 언덕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길에서 만난 커다란 수양버들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 간다.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 다 놓고 쉬었다 가라는 위로처럼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낭창거린다. 고개를 넘으면 도착지점이 보인다. 이 고개가 새창고개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관리하던 창고인 만리창이 이곳에 들어섰다. 새 창고가 생겼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새창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하고, 고개 이름도 새창고개라고 지었다. 이 부근에서 마포구 도화동과 용산구 효창동이 만난다. 새창고개 북쪽에는 효창공원이 있다. 효창공원은 원래 조선시대 정조 임금의 큰아들인 문효세자의 묘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그곳에 공원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를 이곳에 썼다. 김구의 묘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이곳에 있다. 효창공원 위에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새창고개를 지나 남으로 달려 한강에 닿는다. 옛날에는 이 산줄기를 용산이라고 불렀다. 한강이 보이는 산줄기에는 함벽정, 삼호정, 심원정 등 정자가 있었다. 함벽정은 지금 용산성당 부근, 삼호정은 성심여고 후문 부근, 심원정은 용산문화원 부근에 있었다. 삼호정은 조선시대 여류 시인들이 모여 시를 짓던 곳이다. 심원정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왜군이 강화회담을 했던 곳이다. 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명과 왜는 ‘왜명강화지처비’를 세우고 백송도 심었다. 비석은 남아 있고 백송은 죽었다. 670년 정도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심원정 터에 남아 있어 옛일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새창고개를 넘어 도착지점인 효창공원앞역에 이르렀다. 두 시간 정도 걸어서 경의선 숲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었다. 점심때가 되었고 배도 고팠다. 걷기는 끝났지만 서울미래유산은 아직 한 곳 남아 있으니, 그곳이 바로 용문시장에 있는 ‘창성옥’이다. 1967년에 문을 연 창성옥은 해장국으로 유명하다. 해장국에는 된장의 구수한 맛과 비법 양념장의 맛이 어우러져 녹아 있다. 글·해설 장태동 여행작가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강의에서 BTS 내용 빼라”…중국 대학, 강의 검열까지

    “강의에서 BTS 내용 빼라”…중국 대학, 강의 검열까지

    한국인 강사, 검열 거부하고 강의 취소 중국에서 방탄소년단(BTS)의 ‘밴 플리트’상 수상 소감에 대한 문제 제기로 한바탕 논란이 됐던 가운데, 최근 현지 대학이 BTS가 언급됐다는 이유만으로 강의를 검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동안 중국 당국은 BTS를 두고 벌어진 논란에 공식 입장과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검열이 이뤄지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16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쓰촨대와 미국 피츠버그대가 중국 쓰촨에 공동 설립한 쓰촨대-피츠버그인스티튜트(SCUPI)의 한국인 조교수 정아름씨는 지난 10월 경영대학원에서 ‘K팝의 소프트파워’에 대한 강의를 할 예정이었지만 학교 당국으로부터 BTS와 관련한 부분을 삭제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정씨는 “나는 자기검열을 하지 않는다”면서 BTS 부분을 삭제하는 대신 해당 강의 자체를 거부했다. 정씨는 “학교 당국이 강의 내용을, 그것도 (중국) 국수주의자들이 뿜어낸 터무니없는 주장 때문에 검열하려는 것에 화가 났다”고 SCMP에 말했다. 정씨는 “특강 주제를 BTS와 K팝의 국제적인 인기에 대해 하겠다고 했고, 대학원 측에서도 OK 했는데 수상소감 논란 뒤 갑자기 특강에서 BTS 언급은 제외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연합뉴스에도 전했다. 이어 “BTS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등의 설명을 했지만, 그쪽에서 계속 같은 요청을 해 와서 결국 정중하게 특강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다만 중국 교육계에서 BTS 수상소감 파장이 여전히 크냐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면서 “사실 저도 이 특강 일이 아니었다면 파장이 큰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다”고 말했다. BTS는 지난달 초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해 한미관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밴 플리트’상을 수상하며 “양국(한미)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에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와 환구시보의 영문판 글로벌타임스는 중국 누리꾼들이 이 수상소감에 분노를 표시했다며 논란에 불을 붙였다. 당시 중국군의 개입에 대해 ‘미국에 대항해 한반도를 도왔다’(항미원조)는 역사인식을 지닌 중국인들은 BTS가 중국군의 희생을 외면했다며 분노한 것이다. 당시 유엔군에 밀리던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인식이다. 중국 내 국수주의 성향의 누리꾼들을 자극한 환구시보의 보도 이후 BTS를 향한 공격이 거세게 이어졌다. 삼성은 BTS를 모델로 기용한 중국 내 광고를 내렸고, 중국 내 대형 물류업체들은 BTS 관련 상품 배송을 별다른 이유 없이 중단했다. SCMP는 ‘한국의 K팝이 중국 공산당과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씨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중국의 수많은 밀레니얼이 한국의 K팝에 매료된 가운데 K팝이 중국 당국에 의해 ‘정치적 뜨거운 감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거주하는 12만 한국인이 양국 간 정치 체계와 미국에 대한 시각 사이에서 시험에 들고 있다고 밝혔다.한류가 높은 인기를 누리던 2016년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문제로 중국이 ‘한한령’(한류 제한령·限韓令)을 내리면서 한류에 빗장을 건 이후 여전히 K팝 스타의 중국 본토 공연이 제한되고 한류 스타의 중국 활동이 막히는 등 파장이 계속되는 것이 단적인 예라는 것이다. SCMP는 2016년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 혁명이 일어났을 때 베이징대에서도 10여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연대 집회를 계획했었지만 결국 논의 끝에 취소한 일이 있었다고 당시 관련 논의에 참여했던 한 학생을 인용해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해당 학생은 “나는 10년 넘게 중국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공산당이 위협적이다”라며 “한국 학생들이 한국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일지라도 중국에서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글로벌 In&Out] 미 대선으로 재평가될 한국 외교/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글로벌 In&Out] 미 대선으로 재평가될 한국 외교/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최근 한 달 동안 전 세계적으로 최대 관심거리는 미국 대선이었다. 지난 4년간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전 세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이유는 미국이 지구상 최대 강대국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미국 대선 승자가 조 바이든이냐, 도널드 트럼프냐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만큼 어쩔 수 없다. 일단은 중국부터 이야기하자면 ‘트럼프 행정부 스타일’ 때문에 최근 4년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였고 큰 피해를 입었다. 트럼프의 강한 외교전 때문에 아주 예민해진 중국이 안 그래도 그동안 물컹물컹하는 온화한 이미지를 잃게 됐다. 이란 역시 이번 대선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국내 언론에서 미국 대선 결과를 실시간으로 특보했다. 이란의 지방도시도 이란 시민들이 미국 대선 덕분에 접전이 벌어진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같은 경합주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학습하게 됐다고 한다. 반면에 친미 성향이 강한 나라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겪고 있는 독일은 트럼프보다는 바이든을 선호하는 모습을 취했다. 반면 민주주의 후퇴 문제에 큰 목소리를 내지 않은 트럼프 스타일의 행정을 좋아하는 터키는 바이든의 당선을 원하지 않았다. 영국이나 캐나다는 바이든과 트럼프 양쪽에 같은 거리를 두었다. 한국은 미국 대선에 매우 관심이 큰 나라였다. 1948년 한국 정부 수립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이었다. 미국 내에서 때로는 사회주의적인 발언을 하던 트루먼은 그 당시에 우파에서 비난받을 복지 정책을 내기도 한, 대외적으로 아주 강력한 보수파였고, 냉전체제 탄생에 큰 기여를 했다. 한반도 분단의 여러 원인 중 하나도 트루먼 대통령의 강력한 반공 정책에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애치슨 라인’ 설정 등으로 6·25전쟁이 터지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는 6·25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 당시 대선이 한국에서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한국전쟁도 휴전으로 마무리됐다. 한국에서 관심거리였던 또 다른 선거는 1968년 선거다. 그 선거 역시 2020년 선거 때처럼 미국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의 하나였다. 인종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매일 시위가 있었고, 미국이 아주 난장판이었다. 한국은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의 당선 여부가 관심이었다. 닉슨 후보는 한때 열렬한 반공 정치인이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 때 한미 관계가 어떻게 보면 제일 좋았던 시기인데, 이 분위기가 계속될 것인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닉슨 정부는 중국을 방문하면서 데탕트 시기를 연 탓에 한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권 친미 반공 국가들에서 긴장이 강화됐다.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1981년 대선도 관심이 컸다. 지미 카터 정부에서 한미 동맹이 약화됐고 한국에서 신군부의 쿠데타가 있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겐 카터보다 레이건의 당선이 훨씬 좋았다. 카터 시절에 파손된 한미 관계는 개선됐다. 오늘날엔 트럼프냐 바이든이냐에 따라 각 나라의 입장이 다르다. 그러나 한국은 옛날처럼 한 후보에게 올인하기보다 양 후보를 따로따로 보고 있었다. 한국은 영국과 캐나다의 거리두기와 비슷했다. 한국의 이러한 떳떳한 모습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한국이 예전의 약한 국가가 아니고, 한 국가에 의존하는 피동적인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핵심적인 것인데, 한국의 외교다. 외교라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잘 푸는 것만큼이나 미래에 발생할 문제들을 미리 파악하고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은 트럼프든 바이든이든 누가 당선돼도 자국에 유리한 외교적 라인을 이미 구축한 상황이다. 한국은 이런 외교력 덕분에 미국 대선에서 다른 나라들이 취했던 피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이런 외교적 역량이 지속되면 좋겠다.
  • 노근리 피해자와 미군 유족 ‘치유·위로’의 만남

    노근리 피해자와 미군 유족 ‘치유·위로’의 만남

    “전쟁은 모든 이들에게 재앙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기틀이 됐으면 합니다.” 한국전쟁의 비극인 노근리사건이 발생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에서 10일 한미 양국의 전쟁 피해자들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노근리사건 7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노근리사건으로 가족 3명을 잃은 양해찬(77) 희생자유족회장과 1950년 8월 낙동강 전투 중 실종된 미군 장교의 딸 조르자 레이번(73) 등 6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한미 간 우호증진을 기원하며 양국 국기가 새겨진 배지를 달아 준 뒤 부둥켜안고 서로 상처와 아픔을 위로했다. 레이번은 노근리 유족들을 위해 써 온 편지를 읽으며 울먹였다. 그는 “노근리 사건은 너무 끔찍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한국전쟁과 노근리사건의 교훈을 계승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노근리재단 정구도(65) 이사장은 “우리는 모두 전쟁의 아픔을 다시 겪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함께하며 평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며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위해 힘을 합하자”고 당부했다. 노근리사건은 1950년 7월 26일 북한군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이 노근리의 피난민들을 공격해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슬픈 역사다. 당시 미군은 피난민 대열에 북한군이 숨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 사진 영동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포토] 워싱턴DC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 찾은 강경화 장관

    [포토] 워싱턴DC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 찾은 강경화 장관

    8일(현지시간) 방미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서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올해 ‘임종국상’에 강성현 교수, 박시백 화백

    올해 ‘임종국상’에 강성현 교수, 박시백 화백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는 14회를 맞은 올해 수상자로 학술 부문에 강성현(왼쪽) 성공회대 교수, 문화 부문에 박시백 화백을 선정했다고 6일 밝혔다. 사업회는 강 교수가 역사사회학자로서 한국과 동아시아의 사상통제와 공안, 국가폭력과 제노사이드, 냉전과 과거청산 등을 주제로 주목할 성과를 꾸준히 내놨다고 설명했다. 수상저서인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푸른역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반일 종족주의’를 비롯한 한일 극우연합세력의 역사부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사업회는 강 교수가 최근 미국과 영국 등 외국의 기관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 관련 중요자료를 발굴 수집해 연구 지평을 넓히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설명했다. 박시백 화백은 일제강점기의 우리 역사를 다룬 7권짜리 ‘35년’(비아북)으로 수상자에 선정됐다. 박 화백은 국내외 독립운동 현장을 답사하고 자료수집과 연구에 매진해 5년 동안 작품을 썼다. 사업회는 박 화백이 치열한 항일투쟁의 역사가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시사만화가로 만화계에 발을 디디고서 전업작가로 전환해 201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 20권을 완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임종국상은 친일문제에 천착한 임종국(1929∼1989) 선생을 기리고자 마련했다. 선생은 국민적 반대 속에 1965년 한일협정이 굴욕적으로 체결되자, 반민특위 와해 이후 금기시하던 친일문제 연구에 착수했다. 이후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던지고,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작들을 남겨 한국 지성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사업회는 ‘친일청산’,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선생의 높은 뜻과 실천적 삶을 오늘의 현실 속에 올바르게 계승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를,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두 부문에서 선정해 수여한다. 한편, 시상식은 오는 9일 오후 6시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피란수도 부산으로 랜선 시간여행

    ‘피란의 역사 70년, 평화를 밝힌다.’ 부산시는 5일 피란수도 부산 70주년을 맞아 지역 문화유산의 가치와 매력을 알리는 ‘2020 피란수도 부산 문화재 야행’ 행사를 6~7일 이틀간 개최한다고 밝혔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문화재청 공모사업으로도 선정된 이번 행사는 한국전쟁 당시 1023일간 ‘대한민국 임시수도’였던 부산만이 보유한 역사자원, 문화재 등을 바탕으로 근대 부산의 모습과 피란민들의 생활상이 재현된 공간에서 다양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체험하는 야간문화 향유 프로그램이다. 올해 행사는 부산 문화재 야행 홈페이지(www.busan-heritage-night.com), 유튜브 채널 ‘2020 피란수도 부산 문화재 야행’, 바다TV 등에서 온라인으로 개최된다.야설(피란수도 70년 평화를 노래하다, 문화재 야행 골든벨), 야사(과거와 현재의 역사 이야기 토크쇼, 판자촌 거리 재현) 등 5개 테마(5夜), 20개 프로그램, 40개 콘텐츠를 제공한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내 이름은 순자” 한국계 여성 첫 美연방의원 나왔다

    “내 이름은 순자” 한국계 여성 첫 美연방의원 나왔다

    3일(현지시간)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한국계 의원이 2명 당선됐다. 특히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여성 정치인이 연방의회에 입성해 주목받았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워싱턴주 10선거구에 출마한 민주당 메릴린 스트릭랜드(왼쪽)가 사실상 당선을 확정지었다. 개표가 80% 이상 진행된 상태에서 스트릭랜드는 50%가량 득표를 얻어 2위 후보를 여유롭게 앞섰다. ‘순자’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그는 군 복무를 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만 2세가 되기 전에 미국으로 갔다. 2010년부터 워싱턴주 타코마시장을 8년간 역임하는 등 풀뿌리 정치인으로 성장한 뒤 이번 하원 선거에 도전했다. 특히 스트릭랜드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을 만큼 한국계로서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왔다. 그는 최근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등 한반도 역사와 현황에 관한 미 의회의 인식 제고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한반도 평화 달성을 위해서도 힘쓰겠다”면서 “한인 사회와 미국 사회가 서로 강한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이번 선거에서는 한국계 앤디 김(오른쪽) 하원의원이 재선에 성공했다. 김 의원은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 55%의 득표율(75% 개표 기준)로 공화당의 데이비드 릭터(43.9%) 후보를 따돌리고 재선을 확정 지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한국계 이민 2세인 김 의원은 2009년 9월 이라크 전문가로서 국무부에 첫발을 디딘 뒤 2011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의 전략 참모를 지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국방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각각 이라크 담당 보좌관을 역임한 바 있어 민주당 내에서는 ‘오바마 키즈’로 불린다. 그는 첫 임기에서 하원 군사위원회 소속으로 활약했다. 이들 외에 공화당 소속 미셸 박 스틸과 영 김도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에 도전한 상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태평가’ 복원 이은주 명창 별세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태평가’ 복원 이은주 명창 별세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는 바치어 무엇하나/…/니나노-” 한국전쟁 때 한동안 불리지 않던 ‘태평가’를 복원해 대중민요로 알린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이은주(본명 이유란) 명창이 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8세. 1922년 경기 양주에서 태어난 이 명창은 열네 살 때 원경태 명창에게 시조와 가사, 잡가 등을 배우며 소리꾼의 길에 들어섰다. 예명 은주(銀珠)는 쟁반에 은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다는 뜻으로 스승이 지어 줬다. 1939년 인천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평안도 민요 ‘수심가’를 불러 1위를 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한국전쟁 이후 명창대회에서 잇따라 1등에 올라 실력을 인정받았다. 1975년 고 안비취·묵계월 명창과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됐다. 고인과 안비취·묵계월 명창은 ‘경기민요 여성 3인방’으로 불리며 전승과 보급에 평생 헌신했다. 1948년 고려레코드와 킹스타레코드를 통해 음반을 내기 시작해 80여장의 유성기 음반과 300여장의 LP를 내며 대중적인 사랑도 얻었다. 이은주경기창연구원을 개원해 후학을 키웠고, 80대에도 하루 여섯 시간씩 제자들을 가르칠 만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1993년 옥관문화훈장, 2006년 방일영국악상 등을 받았고 2010년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민요부문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딸 최순희씨 등 2녀가 있다. 빈소는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5일 오전이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6·25 끝나지 않은 전쟁을 기억하며

    6·25 끝나지 않은 전쟁을 기억하며

    한국전쟁 70주년의 해가 저문다. 전쟁 세대가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끔찍한 참상도, 트라우마도 희미해진다. 경기도미술관이 올해 마지막 전시로 기획한 ‘흰 밤 검은 낮’은 기억에서 멀어지는 전쟁의 흔적들을 현재로 불러내 희생자와 실향민에 대한 애도와 위로를 건네는 자리다. 전시는 ‘겨울나무집 사람들’, ‘흰 도시’, ‘함께 추는 춤’ 등 3개 소주제로 나눠 작가 14명(팀)의 작품 41개를 배치했다. ‘겨울나무집 사람들’은 전쟁 세대의 이야기다. 텍스트의 흔적을 이미지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는 고산금 작가는 전쟁 발발 당시 신문 지면을 인공진주로 시각화한 작품을 선보인다. 김금순 작가의 그래픽노블 ‘나목’은 박완서의 동명소설에서 묘사한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전후 1세대 화가 하인두(1930~1989)의 대표작 ‘만다라’와 ‘묘계환중’ 등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흰 도시’는 경기도 접경 지역에 남아 있는 분단의 현실을 조명한다. 가장 오래된 주한미군 기지였던 캠프 그리브스의 장교 숙소를 모형으로 설치한 정정주의 작품과 파주 적군묘를 촬영한 전명은의 사진 작품 ‘적군의 묘’ 시리즈 등이 전시된다. ‘함께 추는 춤’에서는 기억과 애도의 방식을 담는다. 한석경 작가는 실향민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삶을 소재로 한 사운드 설치작품 ‘늦은 고백’을 내놨고, 업셋프레스_안지미+이부록은 젊은 시인들과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는 시모음집 ‘금단의 서재’를 선보였다. 전시 제목은 한강의 소설 ‘흰’에서 따왔다. 구정화 경기도미술관 학예사는 “과거로 소환되는 과정을 완전한 빛도 완전한 어둠도 없는 하루로 은유한 데서 영감을 얻었다”면서 “70년 전 사건을 마주하기에 적절한 태도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내년 2월 14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실명 위기도 못꺾은 무대…늙어도 좋아, 난 노역배우

    실명 위기도 못꺾은 무대…늙어도 좋아, 난 노역배우

    “저도 이제 노역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어요.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연극 ‘더 드레서’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송승환’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덟 살에 연기를 시작해 평생을 대중과 함께해 온 그다. TV에서 자주 봤던 배우가 스스로 ‘노역배우’라고 부르니 뭔가 아쉽고 야속하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표정이 밝았다. ‘노역배우’라는 의미를 달리 해석한 데서 온 감정의 간극이었던 거다. “나이 들어 할 수 없이 노역을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제 늙은 역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정말 긍정적인 의미죠. 젊었을 땐 연극 ‘아마데우스’ 살리에리나 ‘세일즈맨의 죽음’ 속 아버지를 얼마나 하고 싶었다고요.” 예순셋 나이와 희끗해진 머리칼과 어울리는 그 단어로,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배우와 제작자를 거쳐 다시 새 출발을 준비하는 그를 지난달 19일 정동극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들뜨고 설렌 그 얼굴이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송 감독은 오는 18일 개막하는 정동극장 신작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로 오랜만에 무대에 선다. 2014년 뮤지컬 ‘라카지’를 제작하면서 잠깐 출연한 것을 건너뛰면 2011년 연극 ‘갈매기’로 명동예술극장에 선 뒤 9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다. 정동극장 개관 25주년을 기념할 연극을 올리기로 하고 지난해 수많은 작품을 고심하다 송 감독이 직접 대본을 골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 ‘피아니스트’ 각본을 쓴 로널드 하우드의 탄탄한 원작이라는 점이 좋았다. 더욱이 무대와 분장실을 배경으로 한, 배우 이야기라는 점에 단번에 마음이 갔다. 정작 무대 위에서 배우가 배우를 연기할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서 그런지 집보다 무대나 분장실이 더 편할 때가 있어요. 문을 열면 환한 무대 조명이 보이는 분장실에서 땀 흘린 배우들과 먹는 짜장면과 라면은 그 어떤 식당에서도 맛볼 수 없는 편안하고 남다른 맛이 있죠.” 그런 공간을 배경으로 한 대본을 읽으니 마냥 재미있고 좋았다. 게다가 극 중 그가 연기할 ‘선생님’(Sir)은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 대표이자 배우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공습경보가 울리는 통에도 극장을 꿋꿋이 열고 연극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있다. 평생 배우와 극단 대표, 제작자로 활약한 그와 매우 비슷하다. 송 감독은 1965년 KBS 아역배우로 데뷔한 뒤 꾸준히 브라운관과 무대에 섰다. 대학에서도 활발하게 연극회 활동을 했고 극단76, 환퍼포먼스를 이끌며 대학로를 누볐다. 1996년 PMC프러덕션을 세운 뒤 타악 퍼포먼스 ‘난타’의 성공과 함께 제작자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7년 초연된 ‘난타’는 지난해 말까지 전 세계 58개국 318개 도시에서 총 4만 7087회 공연됐다. 1437만 6050명이 ‘난타’를 봤다. 이와 함께 뮤지컬 ‘달고나’, ‘호두까기 인형’, ‘젊음의 행진’ 등 그가 20여년간 PMC프러덕션에서 제작한 작품만 50편이 넘는다. 그런데 송 감독이 작품에 참여하기로 하고 불과 1년 만에 코로나19라는 공습경보 수준이 아닌 직격탄이 날아왔다. 공연계에 몸담고 단 한순간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작품과 현실의 차이였다. 해외 관광객이 관객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난타’와 매년 선보이던 어린이 뮤지컬이 관객을 만날 수 없게 되자 8개월째 모든 공연이 ‘올스톱’ 됐다. 직원들은 유급 휴직 중이다. “23년간 한 번도 쉬지 않은 ‘난타’를 멈췄으니 일생에서 밖에서 닥친 가장 큰 시련이고 어느 때보다 어려운 날들인 건 맞다”는 토로가 굵지만 길진 않았다. 그나마 이달부턴 제주 난타전용관은 조심스레 문을 열 계획이다. 서울 명동과 홍대는 아직 기약이 없다. “‘난타’는 공항이 활짝 열리기 전까진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라면서 “올해는 일단 잘 버티고 살아남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매년 2~3편 이상 공연을 올리며 성패를 걱정하던 그에겐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달을 흘려보낸 것 같고 지금은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면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희망을 품으며 버티는 것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공연계 ‘큰형’으로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연장에선 아직까지 코로나19 확산 사례가 없다는 걸 강조하며 객석 띄어 앉기를 완화해 줄 것을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다. 지난 8월 세종문화회관과 대형 뮤지컬 제작사 대표 6명과 함께 기부콘서트도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취소됐다. 그래도 무대가 멈춰선 안 된다는 바람을 거듭 밝혔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옛 명동 국립극장(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해요. 문화예술이라는 게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혼을 맑게 해 주니 이런 때일수록 필요하죠.” 폭풍 같은 시기라고 언급하면서도 송 감독은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다행이다”, “고맙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던 일을 멈추고 인생을 돌아보니 마냥 고마운 게 많더라”면서 “그래도 이 와중에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냐”고 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과 부감독으로 호흡을 맞춘 장유정 연출부터 안재욱·오만석·배해선·정재은 등 함께 연기할 배우들이 “송승환 선배님 때문에” 작품에 모였다고 입을 모은 것도 고맙고, 무엇보다 자신이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에도 감격스러워했다. 사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마친 뒤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렸다. 시력이 자꾸 떨어지길래 병원을 찾았더니 황반변성과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으로 실명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실명까진 아니지만 결국 시각장애 등록을 하고야 말았다. “평생 연기를 다시는 못할 줄 알았어요. 다행히 진행이 멈춰 더 심하게 나빠지진 않았고, 이렇게 다시 할 수 있게 되니 감사하죠.” 20년 전 그와의 추억이 담긴 연극표를 건네자 눈 가까이 대고 골똘히 보고도 “(표에 그려진) 얼굴이 안 보인다”며 기억을 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형태 정도만 볼 수 있고 글씨는 아예 읽기 어려워 음성지원되는 전자기기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대본을 외운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번 작품 상견례 겸 첫 리딩 때 대본을 다 외울 정도로 완벽한 열의를 보였다. 다시는 설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무대의 소중함을 매일 연습실에서도 표현하고 있다. 개막도 전에 ‘더 드레서’의 시즌제 공연을 꿈꾸는 것은 그만큼 애정과 열정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였다. “눈이 안 좋아진 뒤부턴 아침에 일어나서 파란 하늘만 봐도 고마워요. 내가 이걸 볼 수 있다니! 더구나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으니 고맙고 행복하죠.” 그는 작품 속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대사가 유독 절절하게 와닿는다고 했다. “40대였으면 이 감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60대라 공감할 수 있다”며 너스레도 떨었다. 고집스럽게 무대에 집착하면서도 결국 그곳이 가장 행복과 위안을 주는 곳임을 보여 주는 극 중 선생님처럼 송 감독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가장 좋아하는 무대에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으로 유튜버에 도전하기로 한 것인데 콘텐츠가 독특하다. “선배님들의 그간 배우로서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배우로 거쳐 온 무대나 방송에 얽힌 이야기들, 진짜 재미있는 게 많은데 저만 알기 아깝거든요. 그분들의 영상회고록을 아카이브처럼 남겨둘 거예요.” 벌써 이순재(85), 오현경(84), 김영옥(83)을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한 사람당 4~5시간씩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방대한 ‘기록’을 적당한 분량씩 나눠 조만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 마지막회는 제 회고록이 되겠죠. 55년간 연기생활, ‘난타’ 등 공연 제작자의 삶. 언제쯤 다 얘기할 수 있을까요.”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노역 배우로 새 출발”… ‘베테랑’ 배우·프로듀서 송승환의 설렘과 고마움

    “노역 배우로 새 출발”… ‘베테랑’ 배우·프로듀서 송승환의 설렘과 고마움

    “저도 이제 노역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어요.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연극 ‘더 드레서’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송승환’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덟 살에 연기를 시작해 평생을 대중과 함께해 온 그다. TV에서 자주 봤던 배우가 스스로 ‘노역배우’라고 부르니 뭔가 아쉽고 야속하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표정이 밝았다. ‘노역배우’라는 의미를 달리 해석한 데서 온 감정의 간극이었던 거다. “나이 들어 할 수 없이 노역을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제 늙은 역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정말 긍정적인 의미죠. 젊었을 땐 연극 ‘아마데우스’ 살리에리나 ‘세일즈맨의 죽음’ 속 아버지를 얼마나 하고 싶었다고요.” 예순셋 나이와 희끗해진 머리칼과 어울리는 그 단어로,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배우와 제작자를 거쳐 다시 새 출발을 준비하는 그를 지난달 19일 정동극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들뜨고 설렌 그 얼굴이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동극장 신작 ‘더 드레서’로 9년 만에 연극 무대 복귀 송 감독은 오는 18일 개막하는 정동극장 신작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로 오랜만에 무대에 선다. 2014년 뮤지컬 ‘라카지’를 제작하면서 잠깐 출연한 것을 건너뛰면 2011년 연극 ‘갈매기’로 명동예술극장에 선 뒤 9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다. 정동극장 개관 25주년을 기념할 연극을 올리기로 하고 지난해 수많은 작품을 고심하다 송 감독이 직접 대본을 골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 ‘피아니스트’ 각본을 쓴 로널드 하우드의 탄탄한 원작이라는 점이 좋았다. 더욱이 무대와 분장실을 배경으로 한, 배우 이야기라는 점에 단번에 마음이 갔다. 정작 무대 위에서 배우가 배우를 연기할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서 그런지 집보다 무대나 분장실이 더 편할 때가 있어요. 문을 열면 환한 무대 조명이 보이는 분장실에서 땀 흘린 배우들과 먹는 짜장면과 라면은 그 어떤 식당에서도 맛볼 수 없는 편안하고 남다른 맛이 있죠.”그런 공간을 배경으로 한 대본을 읽으니 마냥 재미있고 좋았다. 게다가 극 중 그가 연기할 ‘선생님’(Sir)은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 대표이자 배우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공습경보가 울리는 통에도 극장을 꿋꿋이 열고 연극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있다. 평생 배우와 극단 대표, 제작자로 활약한 그와 매우 비슷하다. 송 감독은 1965년 KBS 아역배우로 데뷔한 뒤 꾸준히 브라운관과 무대에 섰다. 대학에서도 활발하게 연극회 활동을 했고 극단76, 환퍼포먼스를 이끌며 대학로를 누볐다. 1996년 PMC프러덕션을 세운 뒤 타악 퍼포먼스 ‘난타’의 성공과 함께 제작자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7년 초연된 ‘난타’는 지난해 말까지 전 세계 58개국 318개 도시에서 총 4만 7087회 공연됐다. 1437만 6050명이 ‘난타’를 봤다. 이와 함께 뮤지컬 ‘달고나’, ‘호두까기 인형’, ‘젊음의 행진’ 등 그가 20여년간 PMC프러덕션에서 제작한 작품만 50편이 넘는다. ●전쟁에도 멈추지 않은 ‘선생님’… ‘난타’는 몇 달째 올스톱 그런데 송 감독이 작품에 참여하기로 하고 불과 1년 만에 코로나19라는 공습경보 수준이 아닌 직격탄이 날아왔다. 공연계에 몸담고 단 한순간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작품과 현실의 차이였다. 해외 관광객이 관객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난타’와 매년 선보이던 어린이 뮤지컬이 관객을 만날 수 없게 되자 8개월째 모든 공연이 ‘올스톱’ 됐다. 직원들은 유급 휴직 중이다. “23년간 한 번도 쉬지 않은 ‘난타’를 멈췄으니 일생에서 밖에서 닥친 가장 큰 시련이고 어느 때보다 어려운 날들인 건 맞다”는 토로가 굵지만 길진 않았다.그나마 이달부턴 제주 난타전용관은 조심스레 문을 열 계획이다. 서울 명동과 홍대는 아직 기약이 없다. “‘난타’는 공항이 활짝 열리기 전까진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라면서 “올해는 일단 잘 버티고 살아남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매년 2~3편 이상 공연을 올리며 성패를 걱정하던 그에겐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달을 흘려보낸 것 같고 지금은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면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희망을 품으며 버티는 것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공연계 ‘큰형’으로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연장에선 아직까지 코로나19 확산 사례가 없다는 걸 강조하며 객석 띄어 앉기를 완화해 줄 것을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다. 지난 8월 세종문화회관과 대형 뮤지컬 제작사 대표 6명과 함께 기부콘서트도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취소됐다. 그래도 무대가 멈춰선 안 된다는 바람을 거듭 밝혔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옛 명동 국립극장(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해요. 문화예술이라는 게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혼을 맑게 해 주니 이런 때일수록 필요하죠.” ●“실명 위기” 진단, 글씨 읽기 어려운 정도… “평생 연기 못할 줄 알았는데 감사” 폭풍 같은 시기라고 언급하면서도 송 감독은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다행이다”, “고맙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던 일을 멈추고 인생을 돌아보니 마냥 고마운 게 많더라”면서 “그래도 이 와중에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냐”고 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과 부감독으로 호흡을 맞춘 장유정 연출부터 안재욱·오만석·배해선·정재은 등 함께 연기할 배우들이 “송승환 선배님 때문에“ 작품에 모였다고 입을 모은 것도 고맙고, 무엇보다 자신이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에도 감격스러워했다. 사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마친 뒤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렸다. 시력이 자꾸 떨어지길래 병원을 찾았더니 황반변성과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으로 실명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실명까진 아니지만 결국 시각장애 등록을 하고야 말았다. “평생 연기를 다시는 못할 줄 알았어요. 다행히 진행이 멈춰 더 심하게 나빠지진 않았고, 이렇게 다시 할 수 있게 되니 감사하죠.”20년 전 그와의 추억이 담긴 연극표를 건네자 눈 가까이 대고 골똘히 보고도 “(표에 그려진) 얼굴이 안 보인다”며 기억을 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형태 정도만 볼 수 있고 글씨는 아예 읽기 어려워 음성지원되는 전자기기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대본을 외운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번 작품 상견례 겸 첫 리딩 때 대본을 다 외울 정도로 완벽한 열의를 보였다. 다시는 설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무대의 소중함을 매일 연습실에서도 표현하고 있다. 개막도 전에 ‘더 드레서’의 시즌제 공연을 꿈꾸는 것은 그만큼 애정과 열정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였다. “눈이 안 좋아진 뒤부턴 아침에 일어나서 파란 하늘만 봐도 고마워요. 내가 이걸 볼 수 있다니! 더구나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으니 고맙고 행복하죠.”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로 유튜브도 도전… ”원로 배우들 영상 회고록“ 그는 작품 속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대사가 유독 절절하게 와닿는다고 했다. “40대였으면 이 감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60대라 공감할 수 있다”며 너스레도 떨었다. 고집스럽게 무대에 집착하면서도 결국 그곳이 가장 행복과 위안을 주는 곳임을 보여 주는 극 중 선생님처럼 송 감독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가장 좋아하는 무대에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으로 유튜버에 도전하기로 한 것인데 콘텐츠가 독특하다. “선배님들의 그간 배우로서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배우로 거쳐 온 무대나 방송에 얽힌 이야기들, 진짜 재미있는 게 많은데 저만 알기 아깝거든요. 그분들의 영상회고록을 아카이브처럼 남겨둘 거예요.” 벌써 이순재(85), 오현경(84), 김영옥(83)을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한 사람당 4~5시간씩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방대한 ‘기록’을 적당한 분량씩 나눠 조만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 마지막회는 제 회고록이 되겠죠. 55년간 연기생활, ‘난타’ 등 공연 제작자의 삶. 언제쯤 다 얘기할 수 있을까요.”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한국전쟁 70주년의 해가 저물고 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끔찍한 참상도, 트라우마도 희미해지고 있다. 경기도미술관이 올해 마지막 전시로 기획한 ‘흰 밤 검은 낮’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기억에서 멀어지는 참혹한 전쟁의 흔적들을 현재의 시공간으로 불러내 희생자와 실향민에 대한 애도와 위로를 건네는 자리다. 전시는 ‘겨울나무집 사람들’, ‘흰 도시’, ‘함께 추는 춤’ 등 3개 소주제로 나눠 작가 14명(팀)의 작품 41개를 배치했다. ‘겨울나무집 사람들’은 전쟁 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모았다. 텍스트의 흔적을 이미지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는 고산금 작가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신문 지면을 인공진주로 시각화한 작품을 선보인다. 김금순 작가의 그래픽노블 ‘나목’은 박완서가 원작 소설에서 묘사한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전후 1세대 화가 하인두(1930~1989)의 대표작 ‘만다라’와 ‘묘계환중’ 등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흰 도시’는 김포, 파주, 연천 등 경기도 접경 지역에 남아있는 분단의 현실을 조명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미군 기지였던 캠프 그리브스의 장교 숙소를 모형으로 설치한 정정주의 작품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군묘를 촬영한 전명은의 사진 작품 ‘적군의 묘’시리즈 등이 전시된다. ‘함께 추는 춤’에서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전쟁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한석경 작가는 실향민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삶을 소재로 한 사운드 설치작품 ‘늦은 고백’을 내놨고, 업셋프레스_안지미+이부록은 젊은 시인들과 함께 한국전쟁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시모음집 ‘금단의 서재’를 선보인다. 전시 제목은 한강의 소설 ‘흰’에서 따왔다. 구정화 경기도미술관 학예사는 “과거 속으로 소환되는 과정을 완전한 빛도 완전한 어둠도 없는 하루로 은유한 데서 영감을 얻었다”면서 “70년 전 사건을 마주하기 위한 적절한 태도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내년 2월 14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시티투어버스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서울시, 투어+공연 무료 이벤트

    서울시가 도심 여행과 서울의 역사적 스토리, 문화·예술 공연이 결합된 이색 시티투어버스 프로그램 ‘2020 메모리즈 인 서울’을 4일부터 20일까지 총 3주간 운영한다고 3일 밝혔다. 참가비는 무료다. 시민들은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덕수궁,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 서울의 주요 명소와 역사적 장소로 이동한다. 각 장소에선 독립운동 등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연극, 마술, 무용, 팝핀 등의 다채로운 공연이 열린다. 시민들은 버스 안에서 관람할 수 있다. 서울시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테마 아래 총 3개 코스를 운영한다. 코스 별로 각기 다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이야기부터 1960년대 버스 안내방송을 담당했던 승무원 여차장까지 ‘도심고궁남산코스’와 ‘전통문화코스’에서 만날 수 있다. 덕수궁 대한문 등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밀서를 주고받으며 결의하는 모습의 연극이 펼쳐지고, 전쟁기념관 등에서는 학도병이 가족과 이별하는 장면을 현대무용으로 만날 수 있다. 두 개 코스에선 드라마 ‘임꺽정’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 ‘김홍표’가 스토리텔러로 참여해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지난 2019년 글로벌 슈퍼스타 방탄소년단과의 협업으로 화제가 된 댄스팀 ‘로보트로닉 하모닉스’도 공연을 선보인다. ‘평화의 길 코스’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서울을 넘어 파주DMZ까지 가는 코스다. 해설사와 함께 전쟁기념관과 임진각을 둘러보고, DMZ를 직접 투어한다. 서울시는 ‘2020 메모리즈 인 서울’을 통해 코로나19로 인해 지친 시민들에게 작은 여행을 선물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참여를 희망하는 시민은 오는 15일까지 공식 홈페이지(www.shnesquetour.com)에서 ‘서울, 버스, 여행’에 대한 자신만의 사연을 작성해 신청하면 된다. 시는 추첨을 통해 최종 탑승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이은영 서울시 관광산업과장은 “코로나19의 여파로 올 한 해 여행도, 공연도 자유롭게 즐기지 못했던 시민들에게 이번 시간여행 테마의 서울시티투어버스 프로그램 운영이 안전하고 의미 있는 ‘뉴 노멀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발맞춰 새롭고 다양한 시도로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국내 여행객에게도 일상 속에서 훌쩍 떠나는 여행처럼 접근성 높은 문화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탄원… 항일투쟁 외교 전선의 선구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탄원… 항일투쟁 외교 전선의 선구자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는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들을 독립의 희망에 부풀게 했다. 그런 배경에서 같은 해 8월 중국에서 민족지도자들이 발족한 신한청년당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 파리에 대표로 간 인물이 김규식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김규식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국제 정세에 밝아 적임자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 직전 결혼한 김순애와 바로 이별해야 했다. 여운형과 김순애 등은 국내외 각지로 가서 파견 경비를 모으는 한편 한국 대표의 외교활동에 힘을 실어 주려면 대규모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알렸다. 이런 활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 속에 만세운동이 계속되던 1919년 3월 13일이었다. 김규식의 임무는 회의석상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비망록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승국인 일본의 방해로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를 예상한 김규식은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먼저 파리 샤토가 38호에 한국공보국을 설치했다. 각국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언론, 정당은 물론 사회주의 조직과도 접촉했다. 그를 통해 일제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했다.●한국 독립 문제 국제적 부각… 동정 여론 형성 한국공보국은 공보국회보를 발간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탄원서’를 회의에 제출했다. 김규식이 만났던 미국 인사는 외교관이자 언론인인 스티븐 본잘이라는 사람이었다. 본잘은 한국에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결정권이 없었다. 그의 대답은 “우리가 유럽에서 전범을 응징하면 나중에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김규식은 좌절하지 않았다. 조르주 클레망소 강화회의 의장에게 임정 대통령 이승만 명의의 서한을 전달했다. 김규식이 파리에 머물던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대표단 지원사업은 임시정부로 이관됐다. 임정은 공보국을 임정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김규식을 임정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 주었다. 김규식은 4월 26일에는 ‘통신국회보’를 발간해 3·1운동 등 독립운동 소식을 알렸다. 한일합병의 무효화 등을 요구하는 20개 항목을 담은 독립공고서를 비롯한 서한을 강화회의 이사회 위원들과 각국 정부에 여러 차례 보냈다. 달걀로 바위 치기 같았지만 김규식의 다각적인 노력에 침묵을 지키던 유럽 신문들이 움직여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활동은 열강들의 외면으로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고 동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간접적인 성과는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사(尤史) 김규식은 1881년 1월 29일 부산 동래에서 김지성과 경주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선전관을 지낸 부친은 일제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누명을 쓰고 귀양을 갔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 김규식은 사실상 고아가 됐다.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지만 형편이 어려워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어린 나이에 고난을 겪었다.●16세 美 유학… 박사과정 장학생 접고 귀국길 그를 구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그의 아내 릴리아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언더우드는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했다.” 언더우드는 병든 김규식을 극진히 보살피고 입양했다. 5세 때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교(경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영어를 대단히 빨리 익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어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김규식은 독립신문사에 입사하고 독립협회에도 가입했다. 김규식은 16세가 된 1897년 서재필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동부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에 입학했다. 예과를 2등으로 마치고 본과에서도 전 과목 평균 90점 이상을 받았다. 외국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전교강연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스스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지만 1903년 전체 3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한 해 가을 그는 프린스턴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 1년 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장학생으로도 선발됐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을 결심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김규식은 은인인 언더우드 목사를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 언더우드의 비서와 주일학교 교장직을 맡으면서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105인 사건’을 일으켜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했을 때 투옥은 모면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심해졌다. 김규식은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굳혔다.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자 호주로 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때는 32세 때인 1913년 4월 중순이었다. 신규식, 박은식 등이 창설한 동제사(同濟社)가 프랑스 조계에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중국에서의 첫걸음을 떼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돼 임무를 마친 김규식은 임정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돼 1919년 8월 22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해 외교 활동을 벌이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사실상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김규식은 미국 국무부 당국자들에게 독립운동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윌슨과 관리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냉대를 받았다. 구미위원부는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대중 연설이나 홍보물 배포, 신문·잡지 기고 등의 간접적 활동을 폈다. 이는 미국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1920년 3월 미국 상원에 한국 독립안이 상정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김규식은 1921년 1월 상하이로 돌아가 임정에 합류했다. 그러나 임정의 내부 갈등에 염증을 느껴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학무총장을 사임하고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해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규식은 참가를 결정했다.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거쳐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막된 회의에 참석했다. 50여명이 참가한 한국대표단은 레닌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중국으로 돌아온 김규식은 복단·동방·북양대학 교수로 일하는 한편 삼일중학을 세웠다. ●독립단체 통합 참가, 민족혁명당 국민부 부장에 1925년부터 김규식은 독립운동 계파 통합을 위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자 교육에만 열중했다. 1935년 7월에는 난징에서 한국독립당, 의열단 등 5당 통합으로 창당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과 국민부 부장으로 선임됐다. 1942년에는 좌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정을 중심으로 통합했다.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규식은 충칭 임시정부로 와서 국무위원과 선전부장으로 선임됐다. 1944년에는 임정 부주석에 취임했다.광복 후에도 그의 통합정신은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으로 이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란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에 납북당했다. 평북 만포진까지 끌려간 김규식은 그해 12월 10일 동상과 천식 등으로 고통받으며 69세를 일기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1989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고모이기도 한 부인 김순애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사설] 리더십 한계 외교 수장, 자리보전 부끄럽지 않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최근 잇따르고 있는 해외공관 직원들의 성비위 및 기강해이 사건 등과 관련해 “리더십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를 이끌고 나갈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각종 사건사고에 대해 국민에게 송구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테지만 스스로 지도력의 한계를 인정한 만큼 계속 장관직을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더구나 지금 외교부는 성비위뿐 아니라 외교 현안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 등 ‘외교력 부재’로 국민적 질타를 받고 있는 상황 아닌가. 강 장관은 그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감에서 해외공관 직원들의 성비위 관련 질의에 자신의 리더십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외교부가 수십 년 동안 폐쇄적인 남성 위주 조직에서 탈바꿈하고 있는 전환기가 아닌가 싶다”며 남성중심적 조직 문화를 탓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언급했듯 장관 취임 이후 성비위 근절을 외교부 혁신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고 3년 넘게 이행해 왔는데도 관련 사고가 그치지 않는 것은 결국 장관의 통솔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단호하고도 강력하게 엄벌하지 않고 항상 물에 물 탄 듯 어물쩍 넘어가니 영(令)이 설 리가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전쟁 역사왜곡 발언에 대한 강 장관의 입장 등도 그냥 넘기기 어렵다. 강 장관은 국감에서 “과거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통해서도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다고 명시돼 있는, 논쟁이 끝난 문제”라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우리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 발언 하루 뒤에야 논평 형식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늑장 대응한 것도 모자라 ‘중국 입장’을 은연중 인정한 셈이다. 오죽하면 여당 소속인 송영길 외통위원장조차 질책했겠는가. 강 장관은 거취와 관련해 “리더십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대통령이 평가하면 합당한 결정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대통령의 결정에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능력 부족을 자인한다면 임명권자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도 스스로 용퇴하는 게 맞다.
  • 본지 탐사기획부 ‘법에 가려진 사람들’ 노근리평화상 언론상 신문부문 수상

    본지 탐사기획부 ‘법에 가려진 사람들’ 노근리평화상 언론상 신문부문 수상

    서울신문 탐사기획부(안동환·박재홍·송수연·고혜지·이태권·고 조용철 기자)가 27일 노근리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근리평화상심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이날 제13회 노근리평화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언론상 신문부문에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혹한 사법 정의의 실태를 다룬 탐사취재 ‘법(法)에 가려진 사람들’을 보도한 서울신문 탐사기획부가 선정됐다. 방송부문은 ‘다큐 숨’을 제작한 MBC 강원영동 김인성 기자가 수상한다. 인권상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문학상은 장편소설 ‘떠도는 땅’을 쓴 김숨 작가가 받는다. ‘법에 가려진 사람들’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맞닥뜨린 가혹한 법의 현실과 가난이 또 다른 형벌로 작동하는 구조와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신문은 지난해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탐사보도로도 수상해 2년 연속 노근리평화상을 받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다수의 피난민이 학살된 노근리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2008년 제정된 노근리평화상은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이 주관해 국내외 인권 신장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에 수여한다. 올해 시상식은 다음달 11일 충북 영동군 복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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