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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9명 ‘무죄’ 선고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9명 ‘무죄’ 선고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제1형사부(부장 송백현)는 24일 여순사건 당시 순천역 철도원으로 근무했던 김영기(당시 23세) 씨와 대전형무소에서 숨진 농민 김운경(당시 23세) 씨 등 민간인 희생자 9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희생자들에게 적용된 포고령 위반과 내란 혐의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재판부는 “군경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고 영장 없이 구금해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공 정책을 펼치면서 공정한 재판 없이 군사재판에 넘겨 사법부를 비롯해 국가가 불법적인 재판을 자행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판시했다. 송 판사는 “이번 선고가 무죄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 명예 회복과 실질적인 피해 구제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무죄가 선고되자 재판을 참관하던 유족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재판을 마치고 나온 김영기 씨의 아들 규찬(73) 씨는 “73년 만에 명예 회복을 해준 재판부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눈물을 떨궜다. 그는 “다행히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무죄를 받았지만, 많은 유족이 있어 기쁘지만은 않다”며 “하루빨리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돼 진실이 규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순천역에서 근무하던 김영기 씨는 여순사건이 발발한 뒤 동료와 함께 진압군에 영장도 없이 체포돼 내란죄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포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마포형무소로 이감된 뒤 한국전쟁이 터진 후 행방불명됐다. 김운경 씨 등 8명은 포고령 위반 혐의로 잡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6월 대전시 산내동 골령골에서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학살 당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9년 3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었다. 앞서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지난해 1월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재심 선고 공판에서 철도기관사로 일하다 처형당한 고 장환봉(당시 29세)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아귀찜·복국 잡솨봐… 갯장어샤부 빼면 섭합니데이

    아귀찜·복국 잡솨봐… 갯장어샤부 빼면 섭합니데이

    [이우석의 미시 여행] <3>‘경남의 명동’서 먹거리 타운으로… 옛 마산의 기개 오롯한 창원 창동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일대, 오늘은 창원이 아니고 ‘마산’이다. 2010년 마산 창원 진해의 통합 전, 구 마산시의 원도심 지역이다. 마산에서 창동은 서울 명동보다 컸다. 명동과 종로, 무교동, 남대문시장 등을 모두 합친 개념이 창동이었다. 실제 면적이 큰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도심이라 그렇다. 1990년대 초반까지 마산에서 “시내 나가자”고 하면 창동으로 갔다. 대표적 문화시설인 극장이나 나이트클럽에 가려면 마산밖에 없었다. 창동 길을 걷다 보면 그날 외출한 사람들을 죄다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마산어시장, 부림시장, 유흥가인 오동동과 이어져 밤낮으로 소비가 이뤄지는 특구를 이뤘다.창동(倉洞)은 조선시대 대동법 시행 이후(1760년) 조창이 생겨났대서 붙은 지명이다. 인근 농산물과 건어물 등 세곡이 여기에 모였다가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이미 돈이 돌던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시기에도 수출자유지역으로 번성했다. 경남 최대 어시장인 마산어시장에 물건을 떼러 온 상인들과 제수용 생선을 사러 멀리 산청, 함양, 진주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 한일합섬 등 섬유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직장인들도 주말이면 창동에 나와 도심 나들이를 즐겼다. 당연히 술집, 식당, 찻집 등 외식산업이 발달하고 세련된 옷가게와 서점, 금은방 등이 창동 거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곳간이 차면 예술혼이 무르익는 법. 조각가 문신, 시인 김춘수, 이은상, 천상병, 정진업 등이 마산에서 자라며 감성을 키웠다. ‘경남의 시내’였던 창동은 주거지역의 이동과 대체상권 형성 등으로 인해 한때 상권을 잃어버리며 빛이 바랬다. 하지만 창원시가 십여 년 전부터 진행한 도시재생 프로젝트 덕에 과거의 영화를 되찾아가고 있다. 창동은 단지 법정동 ‘창동’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마산어시장 일대부터 복집골목, 오동동 아귀찜골목, 창동 예술촌, 부림시장을 잇는 원도심 벨트를 의미한다. 마산어시장부터 들른다. 엄청나게 크다. 아쿠아리움이 따로 없다. 요즘은 제철인 갯장어가 나온다. 갯장어는 개(犬)장어란 뜻이다. 이빨이 날카롭고 하도 잘 물어댄대서 개장어다. 갯장어는 육수를 팔팔 끓여 샤부샤부로 찰방찰방 슬쩍 익혀 먹으면 된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어시장 바닷가 쪽에 장어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몰려 있다. 붕장어도 판다. 고추장 양념이나 소금구이로 구워 파는데 싱싱한 놈은 ‘부산식’(마산 사람들이 화를 낼 테지만)으로 다짐 회를 썰어 달래도 된다. 출입구가 여러 곳인데 입구 쪽엔 반드시 식당가가 있다. 들어오거나 나갈 때 뭔가를 꼭 먹게 되는 이유다. 젓갈이나 건어물 코너에는 이것저것 살 것도 많다. 딱 어시장만 이리저리 둘러봐도 반나절은 족히 지나간다.길을 건너 오동동 쪽으로 오르면 복국 골목이 있다. 곳곳에 ‘복’이라 쓰인 간판 일색이다. 왠지 복 받는 느낌이다. 복매운탕이나 복맑은탕이 아니라 복국이다. 시원하게 끓여 한 뚝배기씩 내 준다. 집집마다 조금씩 메뉴가 달라 전골을 파는 집도 있다. 마산만에서는 복어가 많이 잡힌다. 일찌감치 복국이 발달한 이유다. 가장 오래된 ‘남성복집’은 양복을 파는 집이 아니다.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개업한 유서 깊은 복국집이다. 3대째 운영하고 있다. 미나리를 넣은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라 아침이나 늦은 밤 해장거리로 남겨 두는 것이 좋다.창동 어귀에 접어들면 장을 보러 온 행인이 많이 지난다. 부림시장에서 푸성귀를 사고 어시장에서 생선을 사 저녁상을 차리려는 마산 시민들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과거 경남의 대표적인 전통 재래시장답게 주전부리도 푸짐하다. 이미 관광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날 대로 난 6·25떡볶이는 물론 명태 한 마리를 통째로 지져 주는 명태전, 참기름 냄새 고소한 꼬마김밥집 등 시장 안에는 ‘뭔가 살 일 없는’ 내가 가도 한참을 머물 수 있다. 6·25떡볶이는 시장 좌판 노점으로 시작해 어엿한 점포를 이루며 ‘전국구’ 떡볶이 맛집으로 소문났다. 1970년대까지도 좌판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모여 쭈그리고 앉아 떡볶이를 먹었다. 그 모습이 한국전쟁 당시 배급장 풍경 같대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떡볶이 그릇을 받치는 화분받침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쫀득한 떡에 진한 어묵의 풍미가 배어난다. 후루룩 허기 때우기 좋은 맹숭한 잡채도 판다.부림시장 입구 쪽에서 나오면 창동에서도 가장 중심가가 펼쳐진다. 분식점이 많다. 성지여고 학생도, 한일합섬 여공도 주말이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호 웃음보를 터뜨리며 먹던 분식들이다. 우동과 메밀국수를 잘하는 만미정, 떡볶이와 팥빙수 명가 복희집, 새로 생긴 짬뽕맛집 울트라반점 등에서부터 전통의 고려당 제과 등이 거리를 지키고 있다.1970년대 초반 문을 연 창동복희집 팥빙수는 정말 예스럽다. 들들 갈아 낸 통얼음에서 쏟아진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장비의 장팔사모처럼 순식간에 혀를 베며 냉기를 집어넣는다. 직접 쑨 고소하고 달달한 통팥이 “내가 진정한 팥빙수요”라고 외치는 듯하다. 떡볶이와의 궁합도 ‘최수종·하희라 커플’처럼 딱 맞아떨어진다.1959년 개업한 마산 고려당은 오랜 세월 마산시민의 입맛을 지켜 온 노포 베이커리다. 걸핏하면 싹 갈아엎는 서울과 달리 마산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맛 좋은 ‘빠다빵’으로 소문난 고려당 빵집도 그대로 남았다.초밥 노포도 당당히 세월을 거스른 채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창동 신라초밥은 신라시대보다는 ‘좀 많이 늦은’ 1977년 개업한 집이다. 서울 강남처럼 세련된 ‘오마카세’(주방장에게 맡긴다는 뜻의 일본어) 일식집은 아니다. 호주머니 사정 가볍던(지금도 뭐 별반 나아지진 않았다) 필자의 어린 시절, 창문으로 흘끔흘끔 엿보던 그 옛날식 초밥집 분위기 그대로다. 주방장이 정성껏 깔끔하게 빚어내는 초밥은 이미 일본의 ‘스시’가 아니다. 우리 입맛이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김치를 얹은 김치초밥이 이 집의 간판 메뉴다.창동에는 예술촌이 있다. 화가, 디자이너, 공예 등 예술인이 상주하며 작업을 하고 작품을 판매한다. 관광객들은 50여개 입주시설과 12개 체험공방에서 마산의 우수한 ‘예술 유전자’를 일부 수혈받고 갈 수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든 없든 골목을 거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파리의 뒷골목에 온 듯하다. 곳곳이 포토존이라 인증샷 투어의 재미도 쏠쏠하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마산시민의 오랜 약속 장소인 ‘학문당 서점’과 시민극장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학문당 서점은 여전히 영업 중이나 시민극장은 영화관 대신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모했다. 개관 100년, 문 닫은 지 20여년 만에 시민극장이란 이름으로 지난 4월 다시 문을 열었다. 물리적 공간은 좁지만 넓고 깊은 예술 세계가 담긴 창동 예술촌을 차근차근 둘러보고 문신미술관이 있는 ‘가고파 꼬부랑길’을 걸어 보면 마산의 야경과 그 안에 숨은 멋을 제대로 느껴 볼 수 있다.창동과 오동동 사잇길에는 ‘상상길’이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세계 각국의 외국인들에게 응모를 받아 그들의 이름을 타일로 새겨 조성했다. 국내 딱 한 곳 창원 창동밖에 없다. 멀리 외국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길이 있다면, 게다가 주변에 아름다운 예술촌까지 있다면, 어찌 가 보고 싶지 않을까. 색색 타일로 수놓은 길은 창동 예술촌의 중앙을 지나 여러 테마의 골목을 연결한다. 조만간 역병이 물러가고 나면 이곳에서 ‘창원’과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먼 길을 떠나온 각국의 외국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창동에서 좁은 찻길을 건너면 바로 오동동이다. 오동동 타령의 가사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에 나오는 바로 그 유명한 동네다. 오동추야(梧桐秋夜)는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 밤을 뜻한다. 가을 밤 운치나 동동주 한 사발의 흥겨움, 기생의 장구 치는 소리, 한량들의 술놀음 등 이 모두가 오동동으로 귀결된다. 오동동은 그런 곳이다. 전국을 통틀어 이토록 술집 골목을 흥겨이 노래한 적이 있었나. 아마도 오동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 유흥가일 것이다. 지금 기생집의 흔적은 아예 사라지고 없다. 다만 달빛 아래 좁은 골목에서 비틀거리며 튀어나오는 나카오리(중절모) 차림 시인의 환영이 보일 듯하다. 오동동 골목 어디선가 상을 때리는 젓가락 장단이 들려올 듯도 하다.지금의 오동동은 아귀찜과 통술거리로 더욱 유명하다. 창동에서 이어진 골목엔 통술집이 줄을 섰고, 복국골목으로 내려가는 길엔 아귀찜 식당들이 가득하다. 마산 특유의 술문화인 ‘통술집’은 통영 다찌집, 진주 실비집, 전주 막걸리집과 비슷한 방식이다. 사실 통술은 예전 우리나라의 술문화였다. 안주를 따로 팔지 않고 술을 주문하면 먹을 만한 안주를 해 주는 것이다.이젠 통술집도 많이 바뀌었다. 요즘이야 예전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분위기도 아니고 관광객들이 몰려와 안주만 바라니, 지금은 대부분 ‘한 상에 얼마, 몇 인 상에 얼마’ 하는 식으로 영업한다. 아무튼 제철 재료나 특별한 안주를 한상 가득 깔아 주니 물가가 턱없이 높은 서울에서 온 이들로선 눈이 휘둥그레진다.제철 안주를 찌고 볶고 삶아서, 때론 생으로 내온다. 호래기(참꼴뚜기)부터 멍게, 부침개, 냉채, 전복회, 오만둥이찜, 미더덕찜, 가오리, 오징어볶음, 소고기 장조림, 생선구이, 찌개, 회까지 줄을 이어 한 상에 연착륙한다. 어떠한 입맛에도 맞출 수 있는 구성이다. 아, 물론 집집마다 계절마다 구성은 달라진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술을 많이 주문할수록 안주는 더 나온다. 그래서 필자는 통술집에서 거의 ‘국빈급’ 환대를 받는다. 통술골목에서 거나하게 취하면 안 된다. 아직 아귀찜이 남았다. 역시 마산은 아귀찜이 가장 유명하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아귀찜집 간판에는 보통 ‘마산’을 쓴다. 흉측하게 생겨서 어부들이 죄다 버렸다던 아귀다. 자연적으로 말라비틀어진 아귀를 주워다 불려 콩나물을 얹어 찜을 했더니 그게 맛이 좋아 지금의 ‘값비싼’ 안줏거리가 된 신데렐라 생선이다. 아귀는 투실하고 시원하면서도 비린내가 없어 칼칼한 양념의 찜은 물론 수육이나 전골도 좋다. 특히 부드럽고 녹진한 간과 쫄깃한 껍질 등 버릴 것도 없다. 영화 ‘타짜’에서 나온 ‘전라도 아귀’(김윤석 분)와 조금 헷갈리지만 사실 마산에선 ‘아구’라 부른다. 아귀찜의 원조로 유명하니 아귀라 쓰고 아구라 읽는 것이다. 아귀찜 골목에는 식당마다 특색이 있다. 구수한 맛, 칼칼한 맛, 매콤한 맛 등 입맛대로 즐길 수 있다. 아귀찜뿐 아니라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의 아귀탕과 부드럽고 담백한 아귀 수육도 별미다. 생아귀와 건아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투박하지만 현지의 맛을 즐긴다면 건아귀를, 좀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맛을 찾는다면 생아귀찜을 주로 취급하는 집으로 가면 된다. 오동동아구할매집처럼 둘 다 취급하는 집도 있다.마산 창동은 놀고 먹기에만 좋은 곳이 아니다. 근현대사에서 마산은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민중항쟁이 두 번이나 일어난 저항의 도시다. 그 중심에 창동이 있었다. 1960년 3·15 당시 마산 시내 중고교생이 창동에 모여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에 나섰다. 그중 한 명이 전북 남원 출신의 김주열 열사다. 당시 명문이었던 마산상고(현 용마고)에 진학하기 위해 창동을 찾은 김 열사는 시위에 참가하다 행방불명됐고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떠올랐다.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1979년 10월에는 유신독재에 항거한 부마민중항쟁이 펼쳐졌다. 마산 시민들의 저항정신을 보여 주는 두 가지 사건이다. 마산 사람들은 거침없는 다혈질 성향으로 인식된다. 그 혈기가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의 날을 제정하자 마산시의회(현 창원시의회)는 곧바로 대마도의 날을 만들어 맞대응했다. 전국 최초다. 날짜는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에서 출정한 날을 골랐다. 얼마 전인 19일, 창원시의회는 제17회 대마도의 날 기념식을 진행했다.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 지방 여러 도시가 있지만 이토록 원도심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은 드물다. 한때 경남을 대표했던 도시 마산. 지금 그 이름은 창원특례시 안에 묻혀 있지만, 적어도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만큼은 창동의 무궁한 매력과 함께 나란히 오랫동안 기억될 듯하다. 글 사진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마산 창동여행 체크리스트 어떻게 가나 : KTX 마산역에서 800번 좌석버스를 타면 마산어시장, 창동까지 간다. 동마산병원 앞에서 승차하고 삼성생명 맞은편 정류장이나 상호신용금고 앞에서 하차하면 된다. 무엇을 볼까 : 굿데이뮤지엄은 ‘무학소주’를 만드는 무학에서 운영하는 주류 박물관이다. 전 세계 5대륙 권역별로 주류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어디서 잘까 : 마산어시장 인근의 호텔 레이지 헤븐과 스카이뷰 호텔이 평점이 좋다. 창동 쪽엔 퍼스트클래스 호텔이 있다.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폴란드로 간 전쟁고아들/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폴란드로 간 전쟁고아들/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추상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을 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군은 38선 넘어 낙동강까지 물밀듯이 쳐들어왔다가 9·28 서울 수복 이후 유엔군에 쫓겨 북으로 퇴각했다. 후퇴하던 인민군은 점령지 곳곳에서 거둔 전쟁고아 1500명을 북으로 데려갔다. 전쟁고아 중 절반은 남한 출신이었다. 1951년 김일성은 폴란드 정부에 이들을 맡아 키워 달라고 비밀리에 요청했다. 부모를 잃고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던 아이들은 폴란드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만난 교사들을 선생님이 아닌 ‘엄마, 아빠’로 부르면서 8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북한에서 천리마운동이 진행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아이들은 1959년 갑작스러운 송환 명령을 받는다. 고아들은 한꺼번에 간 게 아니고 순차적으로 비행기에 태워 북으로 보내졌다. 먼저 간 아이들이 폴란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연일 동원돼 중노동을 하고 있다는 아픈 소식이었다. 폴란드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북에 돌아가지 않게 해 달라고 울며 사정했다. 그들은 한겨울 눈밭에 뒹굴기도 했다. 몸이 아픈 환자가 되면 폴란드에 남을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낳아 준 부모를 잃고 새로운 ‘부모’를 만나 겨우 안정을 되찾은 아이들이다. 다시 북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두 번 버림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빠짐없이 북으로 향했다. 헤어진 지 60여 년. 폴란드 선생님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아이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아이들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짓는다. 추 감독은 이 ‘각별한 정서적 유대’가 궁금했다. 이유가 있었다. 폴란드인 교사 중 상당수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독일의 침략으로 부모를 잃었다. 전쟁고아였기에 낯선 나라에 도착한 고아들의 마음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규칙을 정했다. 아이들이 자신들을 선생님, 아저씨, 아주머니, 원장 등으로 부르게 하지 말고 ‘엄마, 아빠’라고 부르게 하자고. 이토록 사랑하던 아이들을 북으로 떠나보낸 부모 마음이니 슬픔이 깊을 수밖에. 폴란드 ‘엄마, 아빠’들의 사랑으로 짧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그 아이들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살아 있다면 70대 중반의 나이일 것이다. 한국전쟁의 또 다른 비극이다.
  • ‘흥남철수 영웅’ 美 선장, 가톨릭 성인 추대 진전

    ‘흥남철수 영웅’ 美 선장, 가톨릭 성인 추대 진전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1만 4005명의 목숨을 구한 ‘흥남철수의 영웅’ 레너드 라루(1914~2001년) 선장을 가톨릭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노력에 커다란 진전이 이뤄졌다. 21일 미국의소리(VOA) 등에 따르면 미국 가톨릭주교회의는 지난 17일(현지시간) 춘계총회에서 라루 선장에 대한 지역교구 성인 추대 안건을 표결에 부쳐 99%의 찬성률로 통과시켰다. 가톨릭교회는 탁월한 덕행이나 순교 등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하느님의 종’과 ‘복자’ 등 과정을 거쳐 ‘성인’으로 추대한다. 각 단계에서 생전 또는 사후의 기적이 인정돼야 한다. 미 해군과 상선 선원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비영리단체 ‘바다의 사도’는 2017년 라루 선장을 성인으로 추대해 달라고 가톨릭교회에 요청했다. 2019년 첫 단계인 하느님의 종으로 인정된 라루 선장은 이번 주교회의 승인에 따라 다음 단계인 복자 추대 절차를 밟게 된다. 미 필라델피아 출신의 라루 선장은 한국전쟁 당시 군수물자 수송 명령에 따라 7600t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이끌고 함경남도 흥남 부두로 갔다. 하지만 그가 흥남에 머물던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개입과 극심한 추위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라루 선장은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배 안의 군수물자를 버리고 그 자리에 피란민을 승선시켰다. 12월 23일 흥남 부두를 떠나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성탄절인 25일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한 이 항해를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렀다. 60명 정원에 1만 4000여명이 승선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 기록에 올랐다. 당시 구조된 1만 4000명의 후손은 현재 약 100만명으로 추정되며, 문재인 대통령도 이들 중 한 명이라고 현지 언론은 소개했다. 라루 선장은 1954년 ‘마리누스’라는 이름으로 성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해 수사 생활을 하다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태균 선임기자 windsea@seoul.co.kr
  • [기획] ‘수탈과 분단‘, 질곡의 역사 한눈에… 철원 ‘소이산’

    [기획] ‘수탈과 분단‘, 질곡의 역사 한눈에… 철원 ‘소이산’

    국내에서 아주 멀리 무한대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온통 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지에서조차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이 거대한 문명(?)의 벽을 뚫고 저 멀리까지 내다볼 도리가 없다. 최근엔 미세먼지까지 극성을 부려 맑은 날씨가 아니면 이마저도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 ‘소이산’ 정상 무한감동 쓰나미…웅장한 평강고원, DMZ 한눈에 무의식 속, 이런 기회에 대한 체념이 굳게 자리 잡아가던 어느 날 남북 분단의 아픔과 긴장감을 실감할 수 있는 접경지역, 강원 철원의 한 나지막한 산에 다다랐다. 거친 호흡과 함께 제법 가파른 산길 오르기를 20여분, 정상에 서는 순간 홀연히 맞이한 놀라움에 온통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정도 높이에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수십 리가 뻥 뚫린 평야의 경이롭고 장쾌한 광경은 퇴화하던 눈마저 번쩍 뜨이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동시에 체화(體化)됐던 체념의 벽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막 정상에 오른 찰나였지만 감정의 흐름은 마구 요동쳤다. 예기치 못한 신선한 충격에 온통 정신이 혼미하고 멍해지기를 잠깐, 이젠 무한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그 순간이 지나 겨우 정신을 차리자 비로소 말문이 트이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대단하다. 멋지다! 굉장하다!” 온갖 머리를 짜내 지금까지 살아오며 익히고 써왔던 모든 표현 중에 적절한 말을 찾아보려 애쓰지만 궁색하기 그지없다. 이런 대형 사고를 친 범인(?)은 민통선 바로 옆에 위치한 야트막하고 보잘 것 없는 ‘소이산’(362m) 이었다. 400m가 채 안되는, 이름조차 생경한 이곳 정상에서 바라본 드넓은 산야의 모습은 감동적이고 웅장했다. 거대한 대지와 무한의 하늘이 맞닿은 평강·철원고원의 경이로운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막힌게 하나 없어 사방 수십리가 탁 트인,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은 마치 만주 벌판에 온 듯한 착각에 빠트린다. 이런 감동의 맨 끝엔 ‘분단’이란 현실이 만들어 낸 오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은연히 솟구친다. -사철 자연 옷 갈아입는 ‘멋쟁이’…열하분출 드넓은 용암대지 형성면적 600여㎢, 평균 해발 320m의 거대한 평강·철원평야 일대를 두루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한 곳 소이산. 그 정상에서 바라본 드넓은 평야는 철따라 자연의 옷을 갈아입는 ‘최고 멋쟁이’였다. 봄철이면 가둬 놓은 논물이 반사돼 은빛 세계를 이루고, 모내기가 끝난 드넓은 평야는 푸른 물결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한여름 한껏 무성해진 벼는 가을 접어들어 알알이 영글은 나락으로 바뀌며 황금 물결 친다. 겨울철 눈이 내려 순백의 세상으로 변한 들판은 월동을 위해 찾아온 멸종 위기종 재두루미 등 철새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이런 감동을 주는 거대한 용암대지는 언제, 어떻게 탄생했을까? 수천만 년 전 북녘땅 평강, 세포군 두 지역에서 일어난 미약한 화산 중심분출(中心噴出)은 그 형성의 시작이다. 평강 오리산(458m)과 세포 검불랑 북동쪽 680봉이 바로 그 폭발의 중심지역이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평강, 철원 지역 추가령 열곡(길게 갈라진 틈)에서 열하분출(裂罅噴出)이 이어졌다. 검붉은 용암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수백리에 이르는 지역을 뒤덮고 서서히 식어 광활한 대지를 형성했다. 화산 중앙에서 솟구치는 폭발이 아닌 길게 갈라지 틈에서 나온 용암이 대지를 뒤덮은 것이다. 기존 하곡이 용암에 묻히면서 하계망(河系網) 혼란과 분수계(分水界)에 변화가 일어났다. 중심분출이 있었던 두 곳은 북한 안변 남대천 그리고 임진, 한탄, 북한강 분수계의 중심지역이 됐다. 아주 오랜 세월 내린 비와 눈은 낮은 곳을 찾아 흐르며 침식작용을 일으켰고 마침내 하계망을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임진, 한탄강의 멋진 주상절리다. 중심분출이 일어난 평강에서 철원 방향 평야지대 경사는 2~3° 정도로 점차 낮아지는 지세를 이뤘다. 이 복잡하고 긴 과정이 평강·철원고원이 형성된 지리, 지형학적 역사의 대략이다. -북녘땅 평강, 철의 삼각지대 격전지 한눈에 조망60여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던 소이산 정상에 서면 북녘땅 평강 오리산과 읍 소재지 중심에 있는 호암산(574m), 한탄강 분수령을 이루는 백암산(1110m), 낙타고지(565m)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궁예가 새 도읍 진산으로 정했던 일명 김일성고지 고암산(780m)도 또렷하다. 소이산에서 평강읍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20km, 평야 지대여서 맑은 날이면 지척에서 보듯 북녘땅을 관찰할 수 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미지의 땅 언젠가는 꼭 가야 할 우리의 또 하나의 소중한 영토다. 남녘땅 철원 지역에도 볼거리는 다양하다. 일제 때 축조한 산명호저수지, 경원선 단절로 폐역사가 된 철원·월정리역, 최북단에 있어 비무장지대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평화전망대를 정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때 철원역은 금강산행 기차를 타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던 곳이다. 철원에서 장안사가 있는 내금강역까지 운행하던 금강산전기철도 시발역이었던 까닭이다. 1924년 일제 강점기 때 개통했으나 6.25전쟁 발발 이후 군사분계선이 설치되면서 운행 중단됐다.동족상잔 비극의 현장인 철의 삼각지대, 6.25전쟁 주요 격전지도 살펴볼 수 있다. 6.25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던 백마고지가 정상 왼쪽에 선명하게 보인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여일간 지속된 전투는 30만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고지 주인은 무려 20번이 넘게 바뀔 만큼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3000여명, 중공군 1만 4000여명이 전사했다. 백마고지 동쪽 8km 지점엔 또다른 격전지 아이스크림 고지가 있다. 높이가 223m였으나 집중포격으로 표고가 3m나 깎여 나갈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야생동물만 오가는 군사분계선‥무거운 정적만소이산 정상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비무장지대(DMZ)의 생생한 모습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금단의 아픔을 지난 비무장지대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혀 넓고, 긴 녹색 띠를 형성하고 있다. 드넓은 평야지대를 두 동강 낸 비무장지대에는 젊은 남북의 초병들이 총부리를 들이대고 대치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한민족의 아픔과 생채기를 간직하고 있는 분단의 상징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비무장지대는 남북의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오랫동안 야생 상태로 방치(?)돼 왔다. 덕분에 자연환경과 생태계가 완벽하게 보전되는 특혜(?)를 누려 생명의 공간이 됐다. 2700종이 넘는 야생동식물과 80여종의 멸종위기종이 서식하고 있다. 하천과 습지가 잘 발달한 이곳에는 이념과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야생동물들만이 먹잇감을 찾아 자유롭게 군사분계선을 오갈 수 있을 뿐이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일촉즉발 긴장감이 반세기가 훨씬 넘게 무겁게 흐르고 있다. 남북 경계초소(GP)에 내걸린 태극기와 인공기가 서로 마주보고 노려보는 듯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DMZ 내 철원성 전각 사라지고 군 시설이 대체정상에 서자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이 새삼 와닿는다. 역사, 지리,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면 정상에서 바라본 전망은 그저 기념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위해 필요한 아름다운 풍경일 뿐이다.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태봉국 군주인 궁예가 세웠다는 궁궐터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며 말이다. 둘레가 무려 13km(내성 7.7km)에 달하는 태봉국 도성 철원성은 무성한 숲에 덮여 방치된 채 비무장지대에 남아있다.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했던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당시 풍천원(현 홍원리)에 건설한 대규모 도성이다. 이처럼 평지에 쌓은 성은 발해나 중국에서나 볼 수 있다. 해방 당시 내성에는 궁궐터 포정전지와 국보 118호였던 석등이, 외성 남벽에 남대문지와 석탑, 귀부 등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으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 도성 위치는 절묘하게도 비무장지대 안에 있으며 그 중간을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일제 강점기에 건설한 경원선은 외성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현재 철재 궤도는 모두 제거되고 제방만 남아 있다. 남북이 양분하고 있는 도성의 조사와 연구는 한민족 공통 과제다. 하나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선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요원해 보인다. 궁궐 내 전각은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엔 군사시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안타까움만 더해진다. -질곡의 근현대사 지닌 철원‥일제 강점기, 6.25전쟁 아픔 간직민통선 내에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지은 근대 건축물이 여럿 있다. 저수지 산명호 얼음을 저장했던 콘크리트 구조물 ‘얼음창고’, 수탈적 성격의 식민 금융기관인 ‘제2 금융조합’, 해방 직후 북한 통치하에 지역주민 노동력과 자금을 강제해 지어진 ‘노동당사’ 등 건축물과 터가 구 철원 시가지 민통선 안팎에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한국전쟁) 당시 수탈과 만행의 현장이자 사라진 도시 철원의 자취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전쟁의 상흔까지 남아 있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 점철된 질곡의 근현대사를 지닌 철원은 일제 강점기 경원선 개통과 근대적인 수리시설 축조로 교통·물류, 농업생산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제대로 된 관개시설이 없던 철원평야는 알려진 바와 다르게 한탄강 수량 한계 때문에 척박했던 곳이다. 평강에 수리시설 ‘봉래호저수지’를 준공한 이후 비로소 땅이 비옥해져 농업 생산력이 한층 높아졌으나 일제의 수탈과 착취가 이어졌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철원은 북한에 편입되면서 주민에 대한 노동력 착취, 사상통제와 감시 등 고통은 계속됐다. 이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구 철원은 휴전협정으로 땅이 두 동강 나는 아픔까지 겪는다. 오래전 이곳에서 터전을 일궈온 주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졌고 그 고통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사진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낙동강 사수 못하면 죽음… 워커 장군의 신념 기억해야”

    “낙동강 사수 못하면 죽음… 워커 장군의 신념 기억해야”

    “월턴 워커(오른쪽) 장군의 낙동강전선 승리는 한국전쟁의 전환점이자 자유세계의 기적이었지만 저평가돼 이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봉규(왼쪽) 부경대 유엔문화콘텐츠연구소장은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워커 장군이 6·25전쟁 당시 주둔한 캠프 복원과 경관 조성 사업뿐 아니라 워커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영화 제작 등을 통해 그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 소장은 지난해 12월 23일 워커 장군 70주기 특별추도식을 열고 한국전에서 그의 활약상을 미국의 정치권 등에 알리는 등 자국에서 저평가된 워커 장군의 업적 알리기에도 나섰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면서 워커 장군은 잊혀진 영웅이 됐다. 부경대 대연동 캠퍼스(옛 부산수산대학)에 한국전쟁 당시 워커 장군이 낙동강 전투를 지휘했던 임시사령부인 워커하우스가 남아 있으며 현재 대학 임시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 소장은 이곳을 하고자 한다. 워커하우스 정문 입구 앞에 세울 워커 장군의 흉상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그는 “흉상 제작 재능기부를 받는 등 많은 사람이 뜻을 같이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유엔 파크 조성, 유엔문화(영화)예술제, 유엔어린이합창단, 유엔장학재단 설립 등도 구상하고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이 직접 쓴 워커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시나리오인 ‘워커 스토리’를 미국의 영화사 등에 보냈다”고 덧붙였다. 워커 장군은 6·25전쟁 때 파병된 미8군 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지키지 못하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 전투의 승리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함께 참전한 아들의 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하러 가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월드피플+] 6·25참전 미군 71년만에 가족 품으로…北 유해 상자서 신원 확인

    [월드피플+] 6·25참전 미군 71년만에 가족 품으로…北 유해 상자서 신원 확인

    6·25전쟁(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가 71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WSPA 보도에 따르면 15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앤더슨 출신 윌리엄 빌리 맥컬럼 상등병의 유해가 고향에 도착, 장례 절차가 시작됐다. 1931년 6월 19일 태어나 17살에 미 육군에 입대한 맥컬럼 상등병은 31연대전투단 32보병연대 1대대 도그중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12월 2일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투라 불리는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된 것으로 보고됐다. 1953년 12월 31일 공식 사망선고가 내려졌으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맥컬럼 상등병의 유해는 2018년 북미정상 간 싱가포르 합의에 따라 미국으로 송환된 55개 상자에서 일부 발견됐다. 같은해 8월 1일 추모식 직후 신원확인작업에 돌입한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2019년 9월 11일 유전자(DNA) 분석을 통해 맥컬럼 상병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역만리 한국의 전장에 청춘을 바친 맥컬럼 상등병은 71년만인 15일 극진한 예우 속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앤더슨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여동생 프랭키 카인은 “마침내 오빠가 집으로 돌아왔다”면서 “공항에서부터 집까지 오빠의 유해가 운구되는 동안 참전용사에 대해 경의를 표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한다. 지역사회에서 이렇게 지지해주실 줄 몰랐다. 영광”이라고 말했다.맥컬럼 상등병의 유해는 현지 장례식장에 안치돼 있으며, 오는 17일부터 이틀간 추모식 후 고인의 생일인 19일 장례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미군 유해송환에 합의했다. 북미정상회담 공동성명 제4항에 ‘북미는 신원이 이미 확인된 전쟁포로, 전쟁실종자들의 유해를 즉각 송환하는 것을 포함해 전쟁포로, 전쟁실종자들의 유해 수습을 약속한다’고 명시됐다.미군 유해가 담긴 상자 55개를 인도받은 미국은 활발한 신원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15일 현재까지 한국전 참전용사 76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KFVS 보도에 따르면 가장 최근에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미주리주 출신의 로이드 A. 앨럼보우 병장이다. 제7보병사단 7의무대대 앰뷸런스 중대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앨럼보우 병장 역시 1950년 11월 28일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됐다. 현지언론은 병장의 유해가 6·25전쟁 71주년인 오는 25일 고향땅에 묻힐 예정이라고 전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中 역사미화 본격화…“마오쩌둥 아들 죽음, 볶음밥 때문 아냐”

    中 역사미화 본격화…“마오쩌둥 아들 죽음, 볶음밥 때문 아냐”

    중국이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두고 과거사 미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5일(현지시간) 공산당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 시각에 대응하라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를 받은 중국역사연구원이 과거사 미화의 전면에 나섰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오쩌둥(1893~1976)의 장남 마오안잉(1922~1950)이다. 그는 한국전쟁 때인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숨졌다. 전날 두대의 미군 정찰기가 중국군의 위치를 탐지한 뒤 다음 날 정오에 4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마오안잉이 있는 곳에 떨어졌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마오안잉이 막사에서 계란 볶음밥을 만들다가 위치가 노출돼 폭사했다는 것이다. 방공수칙을 어기고 불을 피웠다가 연합군 폭격기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계란 볶음밥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마오안잉의 음식’으로 여겨진다. 지난 2003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공식 발간한 비망록에도 이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중국역사연구원은 지난해 11월 소셜미디어를 통해 “계란 볶음밥을 만들다가 폭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마오안잉의 죽음을 희화화는 헛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마오안잉의 위치가 알려진 것은 부대 사령부의 무전이 노출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마오안잉과 함께 사망한 가오루이신의 딸 양옌쿤도 현장 목격자인 작전실 주임 청푸에게 문의해 “당시 작전실에는 달걀이나 프라이팬이 없었다”는 답을 받았다. 마오안잉이 계란 볶음밥을 만들어 먹다가 사망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공산당은 역사를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단속도 강화한 상태다. 중국의 사이버 감독기관인 중국 국가사이버정보판공실은 “일부 저의를 품은 이들이 온라인에서 역사적 허무주의와 관련한 유해한 정보를 퍼뜨리고 당의 역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산당의 역사나 지도부를 비판하다가 단속되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WSJ는 전했다. 중국 내부에서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역사 왜곡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분위기다. 베이징의 한 역사 교수는 역사 미화 작업의 전면에 나선 중국역사연구원에 대해 “공산당 지도부에게 아부하고 승진하고자 학문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서울광장] 민간인 국방장관이 필요한 이유/김상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민간인 국방장관이 필요한 이유/김상연 논설위원

    1950년 10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며 인해전술을 펴자 12월 이승만 정권은 급히 법을 만들어 17세 이상 40세 미만을 예비 병력으로 모집한다. 애국심 넘치는 청년들이 대거 지원해 50만명 규모의 ‘국민방위군’이 탄생했다. 하지만 부대가 채 자리잡기도 전에 적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국민방위군도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남하 과정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병사가 속출했다. 알고 보니 군 고위층이 병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식량과 의복 예산을 착복해 벌어진 비극이었다. 이로 인해 숨진 병사가 수천명에 달했고,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사망자가 9만명이 넘는다. 길가에 쓰러진 병사들의 시체에 가마니를 덮어 둔 참혹한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하자 분노한 여론이 폭발했고 결국 김윤근 사령관 등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절체절명의 전쟁 중에도 부정을 저지르는 우리 군의 놀라운 부도덕성은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한 지금도 그 DNA가 면면히 살아 있는 것 같다. 부하 부사관을 사적인 술자리에 참석하도록 강요한 뒤 다른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버젓이 성추행하고 상관들은 조직적으로 은폐·회유에 나선다. 천문학적 국방 예산은 다 어디에 쓰는지 편의점 도시락만도 못한 급식을 한창 먹을 나이의 병사들에게 거리낌 없이 준다. 대한민국 다른 분야의 수준이 모두 완벽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군대처럼 이상한 짓을 대놓고 하는 조직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폐쇄성과 상명하복 문화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죄의식이 둔감해졌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비판 여론이 들끓자 국방장관이 사과하고 압수수색을 펼치는 등 뒤늦게 호들갑을 떤다. 그러면서 개혁을 다짐한다. 하지만 미덥지 않은 게 사실이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반복적으로 들었던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개혁’이란 단어는 원래 살가죽을 벗겨 낸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신의 살가죽을 벗길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개혁하겠다는 다짐은 사실 거짓말이다. 평생 밥 먹는 습관 하나 고치기 힘든 게 인간인데 무슨 수로 그 방대한 조직의 살가죽을 스스로 벗길 수 있다는 말인가. 검찰이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고 결국은 외부에 의해 개혁을 당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흥미롭게도 검찰 개혁을 밀어붙인 여당 안에서도 검사 출신 국회의원들은 개혁안에 반대했는데, 그들이 특별히 반개혁적이어서가 아니라 친정(검찰)과 같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검사는 검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판사는 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마찬가지로 군인은 군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따라서 군을 정말로 개혁하고 싶다면 민간인 출신이 국방장관을 맡아야 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30년 가까이 됐지만 이 나라의 국방장관은 여전히 군인 몫이다. 북한이라는 호전적 집단과 대치하고 있는 안보 불안을 명분으로 들먹인다. 과연 맞는 말일까.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상시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매일같이 전사자가 나오는 나라다. 하지만 건국 이후 200년이 넘도록 군 출신이 국방장관을 맡은 적은 거의 없다. 한국전쟁 때도, 본토를 핵전쟁 위험에 빠뜨린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미국의 국방장관은 민간인 출신이었다. 자동차 회사 사장 경력을 가진 국방장관도 있었다. 그러니 한국에서 안보를 핑계로 국방장관을 군 출신이 도맡아야 한다는 논리가 군인들의 ‘밥그릇 지키기’로 의심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대목에서 군에 묻고 싶다. 국방장관이라는 밥그릇은 정말 그토록 악착같이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자리일까. 이순신 장군의 압도적 아우라는 마지막 보직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만약 장군의 커리어가 병조판서로 끝났다면 지금만큼의 카리스마가 있을까. 미국의 전쟁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도 마지막 자리가 사령관이 아닌 국방장관이었다면 지금만큼 카리스마를 가질 수 있을까. 군인에게 국방장관이라는 직함은 커리어의 사족(蛇足)과 같다. 눈부신 제복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장군 출신이 무슨 영광을 더 보겠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국회의원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하나. 성우회 등 군 원로들이 앞장서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을 요구했으면 한다. 계속 이대로 가서 군이 더 망가지면, 그래서 국민적 혐오 집단이 되면 군 출신이라는 명함도 차마 못 돌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carlos@seoul.co.kr
  • ‘6·25 동란과 싸우는 강원경찰’ 책 발굴

    ‘6·25 동란과 싸우는 강원경찰’ 책 발굴

    경찰대학 한국경찰사연구원은 1950년대에 발간된 ‘6·25 동란과 싸우는 강원경찰’ 책자를 발굴했다고 15일 밝혔다. 강원문화연구소가 1951년 12월 25일 발행한 이 경찰 전사(戰史)는 한국전쟁 발발 전 강원도의 치안 상황, 강원경찰국의 후퇴 과정, 강원경찰전투사령부의 설치·전투, 전쟁 발발에 대한 교훈 등 모두 108쪽으로 구성됐다. 가로 12.1㎝, 세로 18.4㎝ 크기이며 세로쓰기 형태다, 저자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원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용운씨다. 이 전 서장은 원주경찰서가 대구로 후퇴하자 강원경찰환자수용소장과 강원경찰전투사령부 제1대대 대대부(大隊附·지금의 부대대장 격 직위)로 근무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했다. 표지화는 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고(故) 김성환 화백이 그렸다. 이 책자는 그동안 경찰 최초 전사로 알려진 ‘대한경찰전사 제1집 민족의 선봉’(1952년)보다 4개월 일찍 발간됐다. 한국경찰사연구원은 17일 오후 1시 30분 ‘경찰전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자료의 공개’라는 주제의 온라인 학술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한강하구 ‘지뢰’ 위험지역…“개방 섣불러”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한강하구 ‘지뢰’ 위험지역…“개방 섣불러”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경기 고양시 한강하구에서 지뢰 폭발사고가 잇따르고 있어 개방이 너무 섣불렀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12일 서울신문 취재 결과 한강하구는 지난 4일 종류 미상의 지뢰가 폭발해 환경정화활동을 하던 50대 남성이 다리를 크게 다치는 등 지뢰 관련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해 7월에는 김포대교 아래 고양지역 한강변에서 70대 남성 낚시객이 의자를 설치하던 중 북한에서 떠내려 온 대인지뢰를 건드려 다리를 크게 다쳤다. 추가 수색에 나선 군 당국과 민간 업체는 9월에도 고양대덕생태공원 한강변 쓰레기 더미 안에서 한국전쟁 이후 유엔군 측이 접경지역에 뿌린 M14 대인지뢰 1발을 발견해 회수하는 등 지난 1년 동안 모두 3발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뢰는 평소 장마나 홍수 때 접경지역에서 떠내려 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대인지뢰는 어디에 얼마나 묻혀 있는지 정확한 통계가 없는 데다, 지름이 5.5cm 안팎으로 작고 플라스틱으로 제작돼 탐지도 쉽지 않다. ‘발목지뢰’로도 불리는 M14 대인지뢰는 물에 뜨는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물살에 휩쓸리면 쉽게 떠내려갈 수 있고, 북한의 목함지뢰 역시 마찬가지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특히 장마 후 임진강이나 한강하구에서 자주 발견되는 목함지뢰는 살상력이 높다. 지난 2010년 8월 연천에서 폭우로 쓸려 내려온 목함지뢰를 주웠다가 1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쳤다. 이후 3~4년간 수거된 목함지뢰는 260여 발에 달한다.이번 폭발사고와 관련 고양시와 환경단체는 한강하구 장항습지를 포함해 대덕생태공원(가양대교~방화대교), 행주산성역사공원(방화대교~행주대교), 고양한강공원(행주대교~김포대교) 일대에 대한 추가 폭발물 수색을 군부대에 요청했지만 장마철 등의 영향으로 당분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때문에 장항습지는 당분간 개방이 어려운 상황이다.고양시는 한강유역환경청에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장항습지 탐방을 전면 통제할 것을 요청했다. 현재 군과 경찰은 폭발물의 정확한 종류 등을 파악하기 위해 폭발 당시 파편들을 모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분석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2∼4주가 소요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이었던 한강하구가 지난 2018년 민간에 개방되고 생태탐방로를 건설중인 것이 너무 섣불렀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김기호 한국지뢰제거연구소장은 “이번에도 양구 인제 화천 등 비무장지대(DMZ)에 매설하거나 뿌렸던 대인지뢰가 쓰레기더미와 함께 한강하구로 떠내려 왔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지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견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양 김포 강화 등 한강하구에서는 늘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찍겠습니다, 한국의 영웅이여

    [그 책속 이미지] 찍겠습니다, 한국의 영웅이여

    “그래. 난 한국전쟁 미 해병대 참전용사야.” 6·25전쟁 당시를 설명하는 살바토레 스칼라토의 눈에선 광채가 번뜩였다. 그에게 한국전 참전은 상처이자 자부심이었다. 끔찍한 일을 겪기도 했지만, 한국인을 위기에서 건져낸 값진 일이었다. 저자는 2016년 대한민국 육군 군복 사진전에서 만난 스칼라토에게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명을 받았다. 무료로 그들의 사진을 찍어 주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찾아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2개국 1500여명의 참전용사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책은 그들 중 30여명의 사진과 사연을 담았다. 한국전쟁의 이면을 보여 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값진 기록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국전쟁 애환 담은 ‘2021 부산아리랑’

    한국전쟁 애환 담은 ‘2021 부산아리랑’

    (사)부산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회장 오수연)는 오는18일부터 20일까지 부산예술회관에서 ‘2021 부산아리랑’을 선보인다. ‘2021 부산아리랑’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아리랑을 소재로 지역의 근현대사를 재조명하는 가무악극이다.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전국의 예술가들이 부산으로 피난을 와 지역의 예술가들과 어우러지며 부산만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한다. 이번 공연에는 젊은 국악인들로 구성된 앙상블로운이 정선아리랑, 본조아리랑, 밀양아리랑 등 아리랑의 원곡과 아리랑별곡, 자장가 꿈이로다 등 아리랑을 재구성한 곡을 소개한다. 서지영무용단은 한국춤을 응용한 허튼춤, 예인의 춤, 동백꽃춤 등 창작무를 선보인다. 오수연 회장은 “‘부산아리랑’이 부산의 예술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며 큰 울림을 주는 명품 공연으로 자리 잡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서울컬처 culture@seoul.co.kr
  • 경기도의회 ‘한반도 평화 선언 서명 운동’ 참여

    경기도의회 ‘한반도 평화 선언 서명 운동’ 참여

    경기도의회가 8일 ‘한반도 평화선언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이번 서명운동은 “한국전쟁을 끝내고 휴전에서 평화로 나아가자!”는 목소리를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모아가는 국제 캠페인으로,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었던 2020년부터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진행되며 전 세계 1억명의 서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달 전국시도의회운영위원장협의회 제7차 정기회에서 서울특별시의회 운영위원장이 ‘한반도 평화 선언 서명’ 운동 동참을 제안했고, 이에 경기도의회에서도 경기도민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염원을 전달하고 지혜를 함께 모으자는 뜻으로 장현국 의장을 포함, 142명의 경기도의원 전원이 캠페인에 참여했다. 특히 이날 이재명 경기도지사 및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등 집행기관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더욱 의미 있는 서명 운동이 진행됐다. 이날 사회를 맡은 경기도의회 정승현 운영위원장은 이번 한반도 평화선언 서명 운동에 동참하게 되어 매우 뜻깊다며 “경기도는 분단과 대결의 장소였던 DMZ가 위치한 상징적인 지역으로 한반도 평화 번영과 남북한 화해 협력을 위하여 남북교류추진 특별위원회 구성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남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 차원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기도의회 서명부는 캠페인이 종료되는 2023년 한국전쟁 관련국 정부들과 유엔에 전달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나우뉴스] 50년 간 서로의 존재 몰랐던 韓 입양 자매, 극적 상봉

    [나우뉴스] 50년 간 서로의 존재 몰랐던 韓 입양 자매, 극적 상봉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50년 가까이를 살았던 한인 자매가 극적으로 상봉한 사연이 현지 언론에 소개됐다. NBC보스톤 등 현지 언론의 1일 보도에 따르면 코네티컷주에 거주하는 한인 입양인 여성인 크리스틴 펜넬은 2세 때인 1971년 11월, 대구의 한 기차역에 버려진 채 발견됐다. 이 여성은 3세 때 미국 코네티컷 주에 거주하는 한 백인 가정에 입양돼 자랐다.이 여성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가족들과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한국인을 처음 만났을 만큼 한국과의 접점은 찾기 어려운 배경 속에서 자랐다. 자신의 뿌리인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 이후부터, 그녀는 한국에 대한 책을 읽고, 한국전쟁 이후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 낸 가부장적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성인이 된 이후 가족을 찾겠다는 결심을 했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헤어진 가족이나 친척을 찾아주는 사이트를 통해 DNA 검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인 2019년 12월, 검사 결과 그녀에게 혈육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펜넬은 “유전가 검사 결과 화면을 봤을 때, 나의 친자매가 벨기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쏟았다”면서 “내게 언니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벨기에에 거주하고 있던 펜넬의 언니 역시 입양된 한국계로, 자신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50년 가까이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펜넬의 언니인 킴 헬렌은 “내가 누군가의 친 언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47년을 살았다”면서 “영상통화를 통해 서로를 확인한 뒤, 나와 같은 한국인이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매우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71년 말 당시, 몇 주 간격으로 같은 기차역에 버려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극적으로 상봉한 자매는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서로의 집을 찾는 등 그간 나누지 못했던 자매의 정을 나누고 있다. 또 고향인 대구를 함께 찾는 등 행복한 추억을 쌓고 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영상] 50년 간 서로의 존재 몰랐던 韓 입양 자매, 극적 상봉

    [영상] 50년 간 서로의 존재 몰랐던 韓 입양 자매, 극적 상봉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50년 가까이를 살았던 한인 자매가 극적으로 상봉한 사연이 현지 언론에 소개됐다. NBC보스톤 등 현지 언론의 1일 보도에 따르면 코네티컷주에 거주하는 한인 입양인 여성인 크리스틴 펜넬은 2세 때인 1971년 11월, 대구의 한 기차역에 버려진 채 발견됐다. 이 여성은 3세 때 미국 코네티컷 주에 거주하는 한 백인 가정에 입양돼 자랐다. 이 여성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가족들과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한국인을 처음 만났을 만큼 한국과의 접점은 찾기 어려운 배경 속에서 자랐다.자신의 뿌리인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 이후부터, 그녀는 한국에 대한 책을 읽고, 한국전쟁 이후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 낸 가부장적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성인이 된 이후 가족을 찾겠다는 결심을 했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헤어진 가족이나 친척을 찾아주는 사이트를 통해 DNA 검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인 2019년 12월, 검사 결과 그녀에게 혈육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펜넬은 “유전가 검사 결과 화면을 봤을 때, 나의 친자매가 벨기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쏟았다”면서 “내게 언니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벨기에에 거주하고 있던 펜넬의 언니 역시 입양된 한국계로, 자신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50년 가까이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펜넬의 언니인 킴 헬렌은 “내가 누군가의 친 언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47년을 살았다”면서 “영상통화를 통해 서로를 확인한 뒤, 나와 같은 한국인이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매우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71년 말 당시, 몇 주 간격으로 같은 기차역에 버려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극적으로 상봉한 자매는 주기적으로 왕래하며 서로의 집을 찾는 등 그간 나누지 못했던 자매의 정을 나누고 있다. 또 고향인 대구를 함께 찾는 등 행복한 추억을 쌓고 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한국戰 기리러 온 긴 줄… 한국 아닙니다, 미국입니다

    한국戰 기리러 온 긴 줄… 한국 아닙니다, 미국입니다

    “한국전쟁이 ‘한미 동맹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많은 미국인이 알았으면 좋겠어요.”미국의 현충일인 31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만난 멜라니 그랜트(39)는 “사실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잘 모른다”고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원봉사로 하루 4시간씩 이곳 방문객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알리는 그는 “한미 양국은 한국전쟁에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섰고 지금도 가까운 친구”라며 “공군으로 참전했던 나의 할아버지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격언을 가족들에게 자주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날 찾은 한국전 기념공원은 ‘추모의 벽’ 공사 때문에 ‘기억의 못’ 둘레에 가림막을 설치했고, 전투대형으로 선 미군 19명을 형상화한 동상 주변에도 철조망을 친 상태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한미 정상회담 뒤 추모의 벽 착공식에 참석한 바 있다. 기억의 못 둘레에 화강암으로 세우는 추모의 벽에는 한국전에서 사망한 미군과 카투사(미군 배속 한국군) 4만 3769명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이날 여러 명의 미국인이 공사에 대해 물었고 그랜트는 “완공까지 2년은 걸릴 것 같다”, “베트남전 추모비에는 전사자 이름이 있는데 한국전쟁 추모비에는 없었다”는 등의 설명을 했다.현충일에 전날 호우까지 겹친 터라 이날 한국전 기념공원을 돌아보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렸다. 추모 화환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의 역사를 가르치는 모습도 여럿 볼 수 있었다. 인근에서 만난 베트남전 참전용사 밥 스와츠(82)는 “우리가 공산주의 때문에 도미노처럼 무너지던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을 텐데, 젊은 세대들은 전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인근 알링턴국립묘지에서 열린 현충일 기념식 연설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민주주의는 지켜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주의는 미국의 영혼이자, 지키기 위해 싸우거나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영혼”이라며 민주주의 강화와 보호를 통해 순국 선열을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바이든은 이 연설 후 부인 질 바이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부부와 일정에 없이 워싱턴DC 14번가 프랑스 식당 ‘르 디플로맷’을 깜짝 방문해 점심을 즐겼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글 사진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美 현충일, 한국전 기념공원 ‘긴 줄’… “한국전쟁 의미 알았으면”

    美 현충일, 한국전 기념공원 ‘긴 줄’… “한국전쟁 의미 알았으면”

    ‘추모의 벽’ 공사에 가림막 및 철조망 세웠지만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줄 서 관람자원봉사자 “한국전은 한미 동맹의 시작 의미”“한국전쟁은 그저 미군의 희생이 아니었어요. ‘한미 동맹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많은 미국인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미국의 현충일인 31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만난 멜라니 그랜트(39)는 “사실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원봉사로 하루 4시간씩 이곳을 찾아 방문객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설명한다는 그는 “지금도 미국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인 한국과의 관계가 시작된 계기였다”며 “나의 할아버지도 한국전에 공군으로 참전했는데 늘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했다. 이날 찾은 한국전 기념공원은 ‘추모의 벽’ 공사 때문에 ‘기억의 못’ 둘레에 가림막을 설치했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19명이 전투대형으로 행군하는 동상 주변에도 철조망을 친 상태였다. 지난 21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뒤 ‘추모의 벽’ 착공식에 참석한 바 있다. 기억의 못 둘레에 화강암으로 높이 1m로 설치되는 추모의 벽에는 한국전에서 사망한 미군과 카투사(미군 배속 한국군) 전사자 4만 3769명의 이름을 새겨 넣게 된다. 많은 미국인들이 공사에 대해 물었고 그랜트는 “완공까지 2년 정도 걸릴 것 같다”, “베트남전 추모비에는 전사자 이름이 있는데 한국전쟁 추모비에는 없었다”는 등의 설명을 했다.현충일에는 특히 방문객이 많은데 전날 호우까지 겹쳐 이날은 줄을 서서 돌아볼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렸다. 한국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화환이 공원 곳곳에 놓여 있었고, 곳곳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의 역사를 가르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한 남성은 “군인들의 희생으로 미국이 안전한 나라가 됐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려 데려왔다”고 말했다. 반면 인근에서 만난 베트남전 참전용사 밥 스와츠(82)는 “우리가 공산주의 때문에 도미노처럼 무너지던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을텐데, 젊은 세대들은 전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서운해 하기도 했다. 한국전 기념공원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필요하다’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경고 표지판이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몰렸음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경우가 대략 절반을 넘었다.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알링턴국립묘지에서 열린 현충원 기념식 연설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민주주의는 지켜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주의는 미국의 영혼이자 지키기 위해 싸우거나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영혼”이라며 민주주의 강화와 보호를 통해 순국 연설을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이든은 연설 후 영부인 질 바이든 여사,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부부와 일정에 없이 워싱턴DC 14번가 프랑스 식당 ‘르 디플로맷’을 깜짝 방문해 점심을 즐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전국이 ‘서점 멸종’ 위험지역… 70년 책방 골목도 발길 끊겨

    전국이 ‘서점 멸종’ 위험지역… 70년 책방 골목도 발길 끊겨

    “13년 동안 한강문고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지만 시장 변화와 오프라인 독서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게 돼 사업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동안 아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07년부터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문화 사랑방’ 역할을 한 중형 서점 한강문고는 지난해 5월 이 같은 글을 남긴 채 문을 닫았다. 서울 불광동에 있는 불광문고의 분점이었던 한강문고는 온라인 서점의 공세에 밀려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불광문고의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 전에는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 구매 비율이 8대2였다면 현재는 9대1”이라며 “게다가 최근에는 대형체인서점이 쇼핑몰 내에 입점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비자들이 지역의 작은 서점보다는 규모가 큰 매장에서 책을 구매하려는 경향이 크다”며 현 상황을 짚었다.●독서인구 감소·코로나로 이중고 해마다 독서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대형 서점·온라인 서점과 경쟁에서 밀린 지역 서점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2년마다 발표하는 ‘2020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2019년 전국 지역 서점은 1976곳으로 2003년 3589곳, 2015년 2116곳보다 큰 폭으로 감소했다.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서점이 아예 없는 곳도 다섯 곳(인천 옹진군, 전남 신안군, 경북 영양군·울릉군, 경남 의령군)이나 된다. 서점이 한 곳뿐인 서점 멸종 예정 지역도 42곳에 달했다.부산의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보수동 책방골목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피란 온 손정린씨 부부가 책방을 열면서 시작된 책방골목은 한때 80개가 넘는 책방이 들어서면서 문전성시를 이뤘다. 매체 환경 변화에 따라 온라인 서점이 활성화되고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현재는 31곳만이 손님들을 맞고 있다. 문을 닫은 책방 자리에는 카페와 공방 등이 들어섰다. 책방골목 입구에 있었던 서점 8곳은 최근 오피스텔 신축 공사가 진행되면서 무더기로 폐업했다. 보수동 책방골목 회장 허양군(대영서점 운영)씨는 “평일에는 거의 개점휴업 상태이고 그나마 휴일에 반짝 손님들이 찾아와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면서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골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며 우려했다.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오프라인 서점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비대면 활동이 일상화되면서 온라인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반면 동네 서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현저히 줄었다. 한 서점 관계자는 “3월과 9월 새 학기를 맞아 참고서와 문제집을 많이 팔아서 1년을 버티는 지역 서점들이 많은데 지난해 개학이 연기되면서 매출이 눈에 띄게 떨어진 곳이 많다”고 말했다. ●대형 오프라인 서점 매출도 온라인에 치중 타격을 입은 건 대형 오프라인 서점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지난 4월 발표한 ‘2020년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교보문고의 경우 지난해 오프라인 부문 매출액은 2556억원으로 전년 대비 0.7%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온라인 부문 매출액은 3395억원으로 전년 대비 30.3%나 증가했다. 전국 중형 서점들의 모임인 한국서점인협의회 김기중(경북 구미 삼일문고 운영) 대표는 “대형서점도 코로나19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온라인 서점도 병행하고 있어 수익을 그쪽에서 메울 수 있다. 지역의 작은 책방은 그렇지 않다”면서 “온라인 시장이 커지면서 출판사 역시 마케팅을 온라인 시장에 집중하는 까닭에 오프라인 서점은 점점 축소된다”고 지적했다.오프라인 서점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점주들은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등 생존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2009년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책방이음을 운영한 조진석 대표는 지난해 12월 오프라인 매장의 문을 닫았다. 대신 지난 4월 종로구 누하동의 사립도서관 호모북커스 내에 새 둥지를 틀었다. 현재는 온라인 판매를 위주로 서점을 운영하는 중이다. 조 대표는 코로나19 직후 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하는 손님의 발길이 끊긴 데다 임대료 부담 때문에 책방 운영 형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조 대표는 “지역 서점 가운데 임대료와 인건비, 세금 등을 충당하기 위해 ‘투잡’, ‘스리잡’을 뛰는 주인들도 있다”면서 “2년마다 돌아오는 임대 재계약 시기가 되면 ‘이렇게까지 힘들게 책방을 운영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 때문에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역서점 생존 위한 컨설팅 등 지원책 내놔야 서점인들은 책방이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장소가 아니라 한 지역에 문화를 확산하는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서둘러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삼일문고의 김 대표는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서점을 제외하면 주민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면서 “책을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면 앞으로 지역 간 문화 격차도 점점 더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면 카드사 할인에 무료배송까지 되고 별도로 혜택까지 제공하는 상황인데 지역의 작은 서점은 여건상 그렇게 하면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면서 “책 가격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이원화된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 서점들이 온라인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지역 서점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면서 점점 온라인 상점을 병행하고 있지만 결제 수수료나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는 인력 문제 등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면서 “서점인들이 인터넷 경제에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판매망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백 대표는 이어 “앞으로 지역 서점들이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책의 주제나 카테고리 등을 전문화하거나 특성화해야 한다고 본다”면서 “서점들이 살길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가 금융면에서 지원하거나 책방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컨설팅이나 교육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 조희선·부산 김정한 기자 hsncho@seoul.co.kr
  • 이준석 돌풍에 ‘40세 대선 출마제한’ 개정 목소리…“시대에 맞지 않아”

    이준석 돌풍에 ‘40세 대선 출마제한’ 개정 목소리…“시대에 맞지 않아”

    정치권에서 ‘40세 미만 대선 출마제한’을 못박은 헌법 규정을 고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권 주자인 이광재 의원은 31일 페이스북에서 “2030은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나.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제도는 과감히 개선해야 한다”며 “2030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도록 규정 개정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동학 청년최고위원도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 출마 자격을 만 40세로 규정한 현행 헌법은 한마디로 장유유서(長幼有序) 헌법”이라고 비판하며 나이제한 폐지에 대해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안에도 담긴 내용”이라고 밝혔다. 고용진 수석대변인은 최고위 회의 후 “청년 희망을 사회가 잘 반영하는 헌법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많은 분이 동의할 것 같다”며 “개헌은 별도 절차가 필요하니 논의를 진전시켜나가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전날 정의당 류호정 의원도 “36세 이준석이 제1야당 대표가 될 수 있다면 마흔이 되지 않아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고,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도 “40세 미만 출마 불가 조항은 박정희가 만들었다”면서 폐지를 주장했다. 현행 대한민국헌법 제67조 4항은 대선 출마 자격으로 “선거일 현재 40세에 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마련된 대통령·부통령선거법에 “만40세 이상의 자는 피선거권이 있다”고 규정한 것이 5·16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12월 5차 개헌을 통해 헌법에 처음 못 박혔다. 정치권에서는 최근 4·7 재보선을 계기로 20·30 세대에서 분출하는 ‘공정’ 문제 제기와 피선거권 이슈가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피선거권 연령을 낮추는 것은 기득권 타파로 연결된다”며 “우리나라에는 왜 30대 총리가 없냐는 지적이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준석 후보를 통해 다시 새롭게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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