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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유교적 혈연주의가 이념 초월할 것

    ◎일 학자의 조망 다케사다 히데시 기고/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남북한 상호불신은 표면적… 내면에선 동포애 흐른다 1990년 6월25일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40년째의 날이다. 일반의 일본인에게 「올해는 한반도에 어떤 의미가 있는 해인가」를 물어보았자 답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0세이하의 일본인에게는 「특유」라는 어휘가 교과서에 실려있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6ㆍ25에 대해 당사자와 주변제국의 국민들은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는가. 북한에는 「좀더 용의주도하게 준비했던들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미국은 「다수의 행방불명 미군을 생기게 한 전쟁」이라는 견해가 강하다. 소련에는 최근 「북한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라는 비공식 레벨의 발언이 계속되고 있음을 생각할때 지금은 「정책의 오류의 결과 발발되고 확대된 전쟁」이라는 평가일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는 전쟁후 일관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방지를 위해 협조해온 것에 비추어 「어쩔 수 없이 의용군을 보냈으나 코스트가 높아 두번다시 있어서는안되는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한국에는 어떠한가. 6ㆍ25는 일요일 아침의 돌연한 포성,남에의 피란행렬,북한에 살고 있는 「육친」이라는 낱말과 관련되는 이미지다. 한국영화의 라스트신에는 혈연관계가 부자연스럽게 되는 장면이 많다. 그것이 관객의 눈물을 가장 많이 유도하기 때문이지만 그것은 국토분단과 한국전에 의해 이산가족이 생겨나고 혈연관계가 이상하게 되는 상태가 되어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여서 「전쟁=이산가족의 발생」이라는 점에서는 당사자인 남과 북과의 사이에 일치한다. 이처럼 6ㆍ25의 이미지는 당사자와 주변제국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이것은 앞으로의 한반도장래를 생각할때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왜 한반도에는 독일과 같은 통일논의가 떠오르지 않는가. 한반도는 독일과는 달라 전쟁책임을 묻기 위해 분단된 것이 아니라 대국의 정치역학에 의해 분단됐다. 그 점에서는 일응 독일보다도 통일을 위한 조건은 정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독일의 경우만큼은 「통일에 의한 영향」에 관해 주변제국과의 조정은 필요로 하지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통일논의가 일어나고 있지않다. 그것은 북한이 동독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동독에 서독의 정보가 유입되며 동독의 서독에의 인구유출이 멈추지 않았다. 또 동독에는 없었던 지도자의 카리스마성이 북한에는 있다. 동구제국의 민주화에 관련해 말한다면 동구변화의 원인이 되었던 이민족국가라는 조건은 북한에는 없으며 북한은 극히 균질적인 사회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될 것은 한반도의 내부역학이다. 현해탄 이쪽에서 한반도정세를 보고있으면 남북간에는 낙관론은 있어도 실제로 상호불신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중국 연길의 탈이데올로기,혈연중시의 기질을 생각해 보자. 연길사람들의 한국에의 관심은 강하지만 그들사이에는 북한에 사는 동족의 생활이 고달프다는 것에 대해 걱정은 하고 있어도 북한에의 불신감은 없다. 즉 연길의 한인들은 『북에서 남으로 바꿔탔다』는 것은 아니고 극히 자연스럽게 같은 코리안으로서 한국에 있는 동족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남북한은 어떠한가. 주체사상이라 하더라도,한국근대화의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 불과 30년의 역사이다. 코리안의 유교이데올로기는 1천7백년이상의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문화의 저류에는 연길의 코리안이 갖고 있는 탈이데올로기ㆍ혈연주의가 흐르고 있는 셈으로 한반도의 남북불신이라는 말은 피상적이라는 것이 된다. 둘째 남북간의 교섭과정을 살펴보자. 1980년대 북한의 한국에 대한 수해구호물자의 지원이 있었으며 한국내에서 북한무드가 급속히 불타올랐다. 남북사이의 교류 및 대화가 갑자기 시작되고 또 돌연중단 되기도 한다. 이같은 한국의 대북자세 및 여론의 변화,대화의 재개ㆍ중단과정은 배경 및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외국인에게는 어렵다. 이것을 상호불신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북한에 체재했던 영화감독의 수기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간부 연회석상에서 한국의 가요곡이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지도자도 심정적으로는 탈이데올로기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반도를 말할 때의 「남과 북의 불신감」이라는 틀에 박힌 문구는 재검토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독일문제는 사실상 동독이 서독에 합류하는 형식으로 통일에의 기운이 가속됐다. 한반도의 경우 일단 북한에서 정책변화가 생겼을 때 남북한 상호의 감정에 비추어,독일형 통일이 아니라 감정적이며 혈연중시의 발상을 갖는 남과 북 사이에 구체적인 통일문제가 부상하면 독일문제와 같은 「통일에 대한 구체적 제문제의 검토」같은 절차는 생략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한은 독일이상의 템포로 통일의 길을 밟게 되는 것이 아닐까.
  • “한반도 통일전기 도래 전국민 역량 결집해야”

    ◎노대통령,참전용사 위로연 연설 노태우대통령은 24일 『10년후 한국전쟁 50주년을 맞는 2천년에는 통일된 조국을 이루어 민족상잔의 비극이 지나간 과거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전진하자』고 다짐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세종문화회관서 열린 재향군인회(회장 소준열) 주최 6ㆍ25참전용사위로연에 참석,이같이 말하고 『동서 독일처럼 남북한 관계가 변화할 결정적인 시기가 오고 있으므로 통일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독일의 통일과정은 경제적 역량이 통일에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첫째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지도록 해야하며 둘째 우리 사회내부에 모든 역량이 결집되도록 국민적 통합을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우리는 이 세계적 변혁을 슬기롭게 이끌어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열 전기를 맞고 있다』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북한이 개방과 협력의 세계로 나오는 것은 시간의 문제』라고 전망했다.
  • 한국전쟁 참전으로 중국 경제발전 지연/홍콩 대공보

    【홍콩=우홍제특파원】 6ㆍ25동란은 소련 스탈린의 판단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남침행위라고 24일 홍콩의 친중국계 대공보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조선전쟁 40주년과 한반도 형세」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북한 김일성은 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협의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택동에게 밀사를 보내 이 사실을 보고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중국이 49년 정부 수립이후 한창 국가발전에 힘쓸 때 북한에 지원군을 보냄으로써 개방계획이 큰 차질을 빚게 됐을 뿐 아니라 소련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느라 지게 된 빚을 갚기 위해 고통을 겪었다고 밝혔다.
  • 자유총련등 6단체 노대통령,격려서한

    노태우대통령은 22일 6ㆍ25 40주년을 앞두고 재향군인회ㆍ한국전쟁기념사업회ㆍ한국자유총연맹ㆍ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ㆍ실향민애국운동협의회ㆍ건국청년운동협의회 등 6개 민간단체에 서한을 보내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평화의 탑」부지 임진각 인근 확정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는 19일 가칭 「평화의 탑」을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사목리 임진각이웃 4만6천여평의 부지위에 건립하기로 확정했다. 사업회는 오는 91년2월까지 설계를 확정,상반기안에 착공할 계획이다.
  • 「한ㆍ소 정상회담과 남북관계」 세미나

    ◎“북 「하나의 조선정책」 수정 국면에”/개혁압력에 적화통일 명분잃어 북한동향/개방하면 통합분위기는 곧 성숙 남북관계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는 1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소 정상회담이후의 통일정세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서울대 박봉식교수는 한소 정상회담이후의 동북아정세,남북한 관계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이미 분위기가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개방만하면 단시일내에 통합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세대 이기탁교수는 「한소 정상회담이후의 북한의 동향」이라는 주제발표에서 한소 정상회담은 북한의 기본정책인 「하나의 조선」 정책을 수정해야 할 단계에 직면토록 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주제발표 요지이다. ◇한소 정상회담 이후의 동북아정세,남북한관계(박봉식 서울대교수)=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적대적이었던 나라중의 하나가 소련이었다. 소련은 한반도분단과 6ㆍ25전쟁에 대해 어는 나라보다 무거운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러한 나라의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흐름의 전환점을 상징해준다 하겠다.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연설은 소련의 아시아정책이 자유선택과 평화공존에 입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소련의 정책원리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수립을 통해 냉전적인 체제와 의식을 깨는 것이 첩경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련의 입장으로서는 아태지역 진출에 장애가 되고 있는 북한과 일본에 충격을 줄 뿐 아니라 한소수교가 이루어 진다면 이는 군사전략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소련이 서울에 깃발을 세울 수 있다면 이는 소련을 가상적 또는 위협의 배후세력으로 보는 한미 협력중심의 아태지역 군사협력체제의 대의명분을 수정케 하는 것이며 평화를 앞세워 이 지역에 무임상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진전이 소련에 주는 정치적 상징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소련은 그들의 새로운 정책실현을 위해서 북한이 변해주어야 하고 한국으로서도 북한의 자세변화가 절실하다. 한소양국에 북한은 이제 공동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북한은 60년대 중소대립시 중국편을 들었다가 소련으로부터 경제원조를 중단당한 일이 있다. 체제개방과 한국과의 관계게선은 김일성에게는 40여년간의 정치명분을 포기하거나 바꾸어야 하는 것이 된다. 북한은 어떠한 형태든 가까운 시일내에 변화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한 한 체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길을 택하겠지만 완전히 안전한 길은 없을 것이다. 89년 소련과 동유럽 혁명의 바람은 아시아로 오면서 약해지고 있다. 바람을 몰고 올 실체는 소련인데 소련내에서 문제가 생겨 북한까지 그 바람이 전달되는 데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동서독간에는 오랜 교류가 선행됐지만 남북한간에는 그렇게 긴 교류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미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개방만 하면 단시일내에 통합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체제의 붕괴를 동반하지 않는 개방은 어려울지 모른다. 한반도에 개방과 화해의 바람은 중국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기존의 대화채널을 유지하면서 북한의 지배층이 개방과 화해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소 정상회담 이후의 북한의 향방(이기탁 연세대교수)=한소 정상회담은 북한의 기본정책인 「하나의 조선」정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셈이 됐다. 북한은 「하나의 조선」정책을 어떤 형식이나 형태로 견지하거나 이를 수정해야 할 단계에 직면하게 됐다. 북한으로서 「하나의 조선」정책을 수정한다는 것은 북한의 모든 권력의 논리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북한의 대남정책,남북한정책 또는 북한의 대외정책 모든 측면에서 북한의 기본정책을 수정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조선」정책으로 설득하여 오던 북한의 「대내정책」의 논리를 수정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정치적인 전면적 재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번 정상회담은 북한의 국제적 지위의 기반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의 와해를 의미한다. 한소 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공식반응이 「범죄행위」라는 평가에서 알 수 있다. 「하나의 조선」정책을 이탈해야 할 북한으로서는 두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수정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며 또 하나는 권력의 재편성이라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 수정주의의 길을 가든 권력의 재편성을 실천하든간에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사회에 구조적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수정주의는 우선 개인숭배문제에서 부터 출발하리라고 본다. 그 이유는 김일성 스스로의 「권력의 논리」인 「하나의 조선」정책과 통치이론이 한소 정상회담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는 곧 남조선해방이라는 정치적 명제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권력 재편성문제라고 본다. 이는 북한의 사회구조가 정치구조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지역에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모든 인구가 남하함에 따라 농촌의 지역적인 집단화가 이루어지고 사회계급이 획일화돼 완벽한 병영국가가 형성됐다. 이 점은 「김일성 이후」라는 한반도의 현상을 본질적으로 야기케 할 정치변동에서 중요한 전환적인 사회적 요인이 된다고 본다. 이같은 점을 감안할 때 북한사회구조에서 김일성 이후의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세력은 북한의 군부밖에 없다고 본다. 북한의 군부가 김일성 이후의 권력을 메울 경우 한반도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간에서 많은 문제점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한국전 기원과 성격」… 「6ㆍ25」 40돌 국제학술회의

    ◎스탈린,49년 3월 김일성 만나 “남침”확정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가 주최하고 통일원이 후원한 한국전쟁 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가 14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전쟁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미소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등이 집중 토의됐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은 미소의 갈등으로 빚어진 특수한 내전이면서도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고 주장하는 존 메릴 미국무성연구관의 논문 「한국전쟁의 기원 대답없는 질문」과 소련이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을 사주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윌리엄 스투웨크 미조지아대교수의 논문 「소련과 한국전쟁의 기원」을 소개한다. ◎6ㆍ25의 기원/윌리엄 스투웨크 미 조지아대교수/크렘린,미ㆍ서구 밀착 저지 겨냥/극동에 긴장 조성… 미 경제난 유도 속셈도 한국전쟁은 주모자인 북한과 주요 군사물자 제공자이자 군사고문단 및 병력의 결정적인 공급자였던 소련,그리고 중국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정보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에 소련이 이같은 모험을 추진할 것을 결정했느냐의 의문이 남는다. 당시 소련은 팽팽한 긴장속에 미국의 핵무기와 잠재된 기동력에 눌려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49년 가을 마샬플랜의 시행,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서독정부의 출범,미의회의 대서유럽군사원조결의 등 일련의 사태로 미루어 볼때 미국의 관심이 서유럽에 집중됐다고 판단,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의 단결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국내외 문제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스탈린은 대외정책에 관한한 공개토론을 허용했다. 49년에서 50년에 걸쳐 프라우다지는 몰로토프,스슬로프와 같은 온건관료층의 견해를 주로 반영했고 이즈베스티야지는 말렌코프,베리야와 같은 강경군국주의자들을 지지했다. 강경파들은 미국경제가 점차 퇴조하고 있으므로 소련이 서유럽에 압력을 가중한다면 미국은 곧 해외원조를 포기하고 서유럽에서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 반면 온건파들은 서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강화와 경제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강조,소련의 압력이 오히려 서방국가를 결속시켰으므로 긴장상태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유럽에서는 평화정책을 쓰는 대신 극동지역으로 관심을 돌려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국제긴장상태 조성을 통해 ▲국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소련주변 위성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분산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정책전환에 따라 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휘말리게 되면 미국의 경제적 위기가 촉진되고 상대적으로 중국이 소련에 의존하게 되리라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가장 위험성이 높은 북한의 남침 등 여러조치들을 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시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한으로부터 미국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모험을 할 수 있었다. 49년 한햇동안 미국은 남한주둔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으며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50년 1월12일 연설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 방위체계에서 남한을 제외시켰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어 1월 중순에는 미하원에서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안이 거부됐다. 스탈린은 이같은 상황이라면 남한이 위기에 처하더라도 미국동맹국들의 집단적인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49년 3월 김의 모스크바 방문시 북한의 침공을 논의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마지막 남아 있던 미군이 철수하게 되니 침공계획을 세우라고 격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 김일성과 군사원조 합의안에는 서명했지만 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은 피했다. ◎6ㆍ25의 성격/존 메릴 미 국무성연구관/초강국갈등서 비롯된 「특수내전」/이해 엇갈린 미ㆍ소ㆍ중의 대리전 양상도 지녀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 북한은 결코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폐쇄체제의 영웅적인 자화상을 훼손하고 평양 당국으로 하여금 1백50만명에 달하는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를 스스로 인정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에 대한 영웅적인자화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지속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수년동안 평양에서 열리는 반미투쟁월의 경축행사를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관해 북한사람들이 형식주의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자신있게 변호하지도 않는다. 평양 당국은 전쟁초기의 며칠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세한 설명을 결코 출판물을 통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또 한국전쟁에 관한 학술토의에 참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유심히 살펴본 비판적인 독자라면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호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평양을 격하하거나 40년전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특히 그들이 남한과의 신뢰를 구축하고 통일이라는 공동목표를 공유하려면 이러한 태도는 더욱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남한도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한 문제,즉 한국전쟁은 침략인가 아니면 민족해방전쟁인가에 대한 해답은 두가지 모두 해당된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조전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강제적으로 가로놓여진 경계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 1950년에 국토의 분단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그것을 영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수단과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승만대통령도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 들어왔던 것처럼 북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이 국제전인가 아니면 내전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도 해답은 양자가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분단은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강대국의 불간섭과 그에 따른 한국에서의 경쟁적인 양체제의창출은 한국내의 좌익과 우익간 투쟁의 국내적인 측면을 강화했다. 이제 소련이 미묘하게 표명하고 있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개입(현재 우리가 조심스럽게 표명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듯이 소련의 개입도 있었다)에 따라 국제화의 성격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두개의 한국이 상호 경쟁하는 국내적 성격이 다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 중국학자가 밝힌 「중국의 6ㆍ25참전 배경」

    ◎김일성,남침2개월전 북경에 통보/모택동,유엔군 38선 넘자 심한 불안감/중국,미 무력위협 견제위해 참전 선언/소의 공군ㆍ물자지원 조건으로 병력 파견 6ㆍ25발발 40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전쟁을 중국의 시각에서 조명한 논문이 중국학자에 의해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주최로 14일부터 이틀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리는 한국전쟁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국제전략연구소의 적지해연구원이 발표할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대한 재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배경을 새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국민당정부를 후원하는 미국으로부터의 무력개입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6월20일 5천1백만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을 주은래 책임아래 1천4백만명을 감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50년4월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귀환도중 밀사를북경에 파견,모택동에게 군사적인 수단으로 조국을 통일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했으나 군사계획과 그밖의 상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한국전에 개입할 의도는 없었고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인민해방군에 속한 한국계 중국군을 보내는 것만으로 평양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트루먼이 6월27일 중국본토와 대만사이에 제7함대를 배치하자 미국이 국민당을 구하기 위해 중국내전에 다시 참가하기로 결정할 것으로 믿었다. 이에 따라 7월10일 「미국의 대만 및 한국침략에 대한 중국인민위원회」가 북경에 설치됐고 모택동은 등후아장군으로부터 급속한 남진,보급선 확대,후방의 공백상태등 한국전의 상황을 보고받고 김일성에게 「남진속도를 늦추고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하라」는 충고를 했다. 9월초 북동부지역 사령관인 가오강은 한국전 상황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통일할 기회는 이미 지나갔으며 김일성의 군사행동은 처참하게 실패하리라고 확신했다. 이에 모택동은 9월9일 동부군사지구 제10군에게 철도에근접하게 병력을 배치,압록강에 대한 병력보강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10월2일 주은래는 당시 인도대사인 파니카를 통해 만약 미군이 북한을 점령한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뒤 영국외상 포리스트 버빈은 네루를 통해 유엔군이 만약 38도선을 넘어야 할 경우에는 압록강 40마일 앞에서 멈추겠다고 중국지도자들에게 통보했다. 미국은 인도를 통해 전달한 자신의 약속을 두차례나 어겼으므로 중국지도자들은 미국의 맹서는 사기술이라고 믿게됐다. 1천㎞에 이르는 압록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언제 적이 침입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중국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50년 10월1일 김일성은 불리한 전황을 알리면서 인민의용군의 즉각 투입을 요청하는 전문을 모택동에게 보내왔다. 그러나 북동부지역 사령관 가오강과 임표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중국경제력의 열세와 군사력의 열세,후방의 취약성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어 열린 정치국특별확대회의에서 ▲한국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취약한 고리이며 ▲전면적인 핵전은 불가능하며 ▲한반도지형은 미군의 기계화부대와 화력운용에 불리하다는 결론에 따라 장기적으로 어느 정도 희생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됐다. 만약 중국이 전쟁을 회피한다는 것은 국민당에 대한 해방전쟁이 몇년 더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0월2일 정치국 특별회의에서 모택동은 소련이 공중지원과 전쟁물자를 원조한다는 조건으로 병력파견을 승인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전황이 김일성에게 크게 불리해지자 스탈린은 딜레마에 빠지게 됐으며 이러한 딜레마의 탈출구로서 지상은 중국군이,공중은 소련공군이 기꺼이 맡기로 합의했다. 결국 10월13일 모택동은 김일성이 중국으로 후퇴하기 전에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압록강을 건너 진격키로 결정했다. 소련은 합의대로 50년말 공군 2개사단(2백대전투기)을 파견,압록강철교와 1백㎞에 이르는 의용군 보급로를 엄호했으며 중국군복을 착용한 이들 소련군조종사는 생포되더라도중국계러시아 소수민족이라고 속였다. 한국전에 투입된 2백30여만명의 중국인민의용군은 당시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전야전군의 66%,전포병사단의 60%,전기갑사단의 1백%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모택동이 중국과 미국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거나 모택동이 본토를 석권했을 당시 트루먼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면 스탈린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모택동의 결정을 제지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에서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지난 30년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트루먼행정부가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중국의 참전이라는 비극은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동북아 새기류… 세계의 시각

    지난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 이후 남북한의 통일등 한반도의 장래를 진단하는 많은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이미 무너진 동독과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정권의 「최악의 요소」만 갖추고 있어 체제존속이 어려울 것』이란 마이클 윌리엄스 미코넬대객원교수의 전망(8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나 「한국 성큼 걸어 나오다」라는 제목아래 『공산국가들은 남한의 경제력으로 보아 통일한국은 남한이 지배하게 될 것』으로 분석한 9일자 영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보도들이 바로 그것이다. 두 기사의 내용을 간추린다.〈편집자주〉 ◎미교수,「상항랑데부」이후 예진/“김일성 사후 북한붕괴 가능성”/무너진 루마니아의 최악 요소만 지녀/미 인터내셔널 트리뷴 한소 관계의 발전은 지난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만남으로써 극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이 만남이 미국 땅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더욱 뼈아픈 상처를 입게 됐다. 이번 회담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동북아 정정에 가장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 회담은 북한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지난 50년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지 꼭 40년만에 이뤄진 노ㆍ고 회담은 한국의 정치ㆍ경제적인 우위를 반영한 것이다. 이 회담은 또한 지난 48년 이후 지속돼온 북한 김일성체제가 계속 지탱할 수 있을지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노ㆍ고 회담은 한소 관계를 또다른 차원으로 올려 놓았다. 이 회담으로 한소간 완전한 국교수립과 대사의 교환은 이제 단지 시간문제일 뿐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한소의 접근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지난 7일 북한은 한국 대통령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배신적인 협상」을 했다고 고르바초프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북한은 경제ㆍ군사원조의 대부분을 여전히 소련으로부터 얻고 있기 때문에 사실 소련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는 형편이다. 공산세계에서 유독 북한만이 정치개혁은 물론 경제적 변화까지도 거부하고 있다. 소련학자들은 올해 78세인 김일성의 사후에도 현북한공산정권의 존속 가능성에 대해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미 무너진 동독과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정권의 최악의 요소만 함께 갖춘 북한정권이 존속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소 정상회담 개최로 북한이 그동안 소련과 중국사이에서 벌여온 줄타기 외교가 더이상 먹혀들지 않게 됐다. 중국으로서는 크메르 루주만큼 「국제적으로 이미지가 아주 나쁜」 북한의 유일한 지지국으로 남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회담이 주변지역 긴장을 완화한다는 점에서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이니셔티브는 일본이 새롭게 일고 있는 대소협력물결에 합류해야 한다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일본기업인들은 잠재적으로 거대한 소련시장에 한국과 미국이 침투하는데 대해 점차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 있다. 항시 날카로운 타이밍 감각을 발휘해 온 고르바초프는 이번 방미기간 중에도 자신이 1991년에 일본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확인했다. 도쿄는 그가 아직까지도 찾아가지 않은 유일한 세계 주요도시이다. 소일관계는 일본에서 북방영토로 불리는 쿠릴열도내 4개섬을 둘러싼 양국간의 오랜 분쟁으로 마비돼 왔다. 미소 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되고 모스크바 당국이 최근 한국에 접근함에 따라 소련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일본의 경제적 지렛대 기능은 크게 손상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일본의 경제원조대가로 소련이 4개섬을 반환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르바초프로서는 한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소일 정상회담을 늦춤으로써 소련이 일본에 대해 어떤 중대한 영토 양보조치도 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해온 것 같다. ◎영 경제지,남북한의 장래 전망/“통일한반도 한국이 지배한다”/경제력 절대우위… 유엔가입 장애없어/영 이코노미스트지 한반도의 교착상태가 흔들리고 있다. 한국의 노태우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상면하게 됨에 따라 일견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한반도 문제가 탄력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들 두사람의 만남은 고르바초프에 의해서 부시대통령과의 회담후 귀로에 갖는 것으로 짜여졌고 회담시간도 불과 1시간밖에 안되었으나 그 결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이로써 소련은 사실상 과거 동맹국인 북한을 버린 것이다. 지난 88년 12월까지만 해도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남한과 외교관계를 가질 의향이 없다고 공언했으며 그후로 북한은 공산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변화에 눈과 귀를 막고 지냈다. 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적 성공을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국가들에 있어서는 한국이 그들에게 줄 것이 많은 나라로 떠오른 것이다. 88년에 3억달러였던 한소 무역은 89년에 6억달러로 늘었으며 금년에도 늘어날 것이다. 공산국가들은 남한의 경제력으로 보건대 통일이 되더라도 남한이 지배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다. 두나라의 경제는 서로 잘 어울리는데 소련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원료를,그리고 한국은 비교적 덜 정교하긴 하지만 소련에게는 필요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은 서방의 대공산권수출통제기구인 코콤(COCOM)의 멤버가 아니며 코콤 또한 금지규모를 완화하려고 하고 있는 중이므로 한국과 소련간에는 괜찮은 거래가 가능한 입장이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37년이 되는 한반도의 긴장은 팽팽하다. 주로 소련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은 남한을 2대1로 압도하고 있으며 직접대화는 잘 나가는듯 하다가도 실패로 끝나곤 한다. 지난 11월 남한이 북한의 문화교류 제의를 거부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남북대화 파탄의 책임은 주로 북한측에 있다. 남한이 다음에 성취할 큰 일은 유엔회원국이 되는 일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한국의 유엔가입안을 물리치는데 소련과 중국의 거부권을 믿어왔으나 이제 소련은 더이상 거부권을 행사할 것 같지 않다. 그럼 중국은 어떠한가. 과거에 김일성은 소련이 까다롭게 나오면 중국과 포옹함으로써 소련을 협박하곤 했다. 이러한 포옹은 이제 더 이상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중국도 그동안 계산을 다시 해오고 있는 중이다. 한중간에 외교관계는 없지만 두나라의 무역거래량은 작년 경우 26억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는 중국과 북한무역의 4배나 되는 것이다. 남한은 유엔가입안을 신중히 다루고 있다. 지난 4월 노대통령은 유엔주재 한국외교부를 교체했다. 정치인이며 노대통령의 측근인 현홍주 신임대사는 북경과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한 일이 있다. 남한의 무역ㆍ기술ㆍ투자 등은 중국에게는 매력적인 것들이다. 북경과의 외교관계전에 남한은 대만과의 관계를 격하시켜야 되는데 대만측이 반발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현재 극소수에 불과한 「이념국」인 북한을 버리기 전에 재고 삼고를 하고자 할 것이다.〈연합〉
  • 「김일성 독전 명령서」등 첫 공개/공보처

    ◎「6ㆍ25」 40돌 맞아 「한국전쟁」 펴내/수송ㆍ전투계획등 남침준비 한눈에/미공개 미국 무성자료 8점도 수록 공보처가 6ㆍ25 40주년을 맞아 6ㆍ25의 민족사적ㆍ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9일 펴낸 「실증자료로 본 한국전쟁」에 실린 자료중에 북한의 남침준비ㆍ전투훈련ㆍ수송계획ㆍ독전명령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미공개자료가 8점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끌고있다. 북한의 남침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발간된 이 책자의 자료들은 그동안 전사편찬위원회ㆍ미국무성 및 미의회도서관ㆍ조지 타운대도서관에서 소장해 오던 것이다. 이 책자에 실린 미공개자료를 연대별로 살펴본다. ①46년 7월1일부터 3일까지 개최된 「북한보위국(내무성)회의록」. 이 회의록 목록 6번째에는 소련군 「주구루잔 대좌의 지시」가 포함돼 있는데 당시 북한이 소련의 지휘아래 있음을 밝혀주는 것으로 볼수 있다. ②북한군이 작성한 「1950년 하기전투 정치훈련계획표」. 부대장 안일성과 부부대장 조인석 명의로 된 이 계획표는 6ㆍ25남침을 준비하기 위한 훈련임을 보여주고있다. ③「371군부대 참모부명령」 50년 6월8일 철원에서 제00118호로 대대전술훈련실시에 관해 하달된 명령서에는 「포병부상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50년도 하기전 훈련계획을 일부 개정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대대계획표를 하달하면서 이를 원만히 진행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명령한다(중략). 군관 및 하사관 훈련은 이미 하달된 계획표대로 실시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④⑤「철도수송에 대한 명령서와 열차적재계획」 특히 50년 6월15일 남포에서 작성된 제466군부대 철도수송에 관한 명령의 전문에는 「현하조국이 조성된 정치정세하에서 우리 부대는 금번 보위성에 실시하는 하기 대연습에 참가하기 위하여…(이하 생략)」라고 쓰여있어 북한군이 치밀한 수송계획을 세워 병력과 보급품을 운송했음을 알 수 있다. ⑥북한보위성 전투훈련국이 50년 8월5일 작성한 「단기정치훈련계획」. 11번째 줄에 「우리조국을 통일시킬 시기는 왔으며 승리는 반드시 우리 인민들 편에 있을 것이다」고 명시돼 있다. ⑦⑧북한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이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전열재정비를 지시한 「독전명령서」와 북한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이 김일성의 독전명령서 집행을 위해 하달한 지령서. 김일성의 「명령서」(50년 10월14일작성) 서두에는 「지난 6월에 미제국주의자들의 지시에 의하여 우리 조직에 동족상쟁의 내란을 도발시킨 이승만 괴뢰군의 불의의 공격을 받고…」 운운해 6ㆍ25남침을 북침으로 호도하고 있다. 이 책자에는 이밖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41년 12월10일) ▲태극기가 걸려있는 48년 5월1일의 북한노동절행사 ▲인민군 총사령부가 50년 6월18일 각사간에 하달한 러시아어 정찰명령1호 ▲우리 6사단의 방어계획 ▲6ㆍ25당시 우리 주민진술서 등 6ㆍ25전후의 희귀한 자료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공보처는 이 책자가 정치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보고 시판도 계획하고 있다.
  • 6월의 전쟁과 평화/이재근 논설위원(서울칼럼)

    미국은 아직까지 15년전의 월남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전 당사자간의 정치적 협상에 의한 종전이며 미국으로서는 그에 따른 전략적 철군인 것이다. 건국이래 나라밖의 어떤 전장에서건 결코 패배해 본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미국이지만 그들에게 월남전은 두번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전쟁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미국에 있어 40년전 6ㆍ25 한국전쟁은 어떤 것인가. 「한국전쟁을 가리켜 『이상한 시기에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하게 일어난 전쟁』이라고 지적한 이가 있었다. 그럴듯한 표현같지만 기실 그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자체가 정상이 아닌 비상이며 이상인 까닭이다. 오늘의 미국을 대표하는 부시대통령의 6ㆍ25관은 이러하다.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되어 「잊혀진 승리」로 불려진다』「잊고 싶은 전쟁」(월남전)과 「잊혀진 승리」(한국전)란 표현은 그들이 밖에서 치른 전쟁이란 한 「대상」의 앞뒤면을 설명해준다고 해도 좋다. 해방후 한반도 북쪽에서 김일성이 손쉽게 한 정권을 창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현대사가들은 다음 4가지로 꼽는다. 즉 첫째 뛰어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서울에 모여있었다. 둘째 다른 당파들은 서울이나 평양에서 모두 분열,쟁투하고 있었다. 셋째 그가 북의 군과 정보를 장악했다. 넷째 소련 진주군이 그를 한가닥으로 밀었다는 점 등이다. 그 정도의 호재를 갖는 여건위에 남한에서 미군마저 철수하자 그 힘의 공백을 틈타 김일성은 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다. 사실이 그러한 터에 지금에 와서 6ㆍ25가 「민족해방전쟁」이며 「북침에 의한 것」이거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도발전」이라는 검증될 수 없는 가설이 한때나마 유행처럼 언설됐던 것은 객관적으로도 결코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된 것은 6ㆍ25 사흘후인 6월28일 이었다. 그래 세상에 어느 멍청한 정권이 자기네 수도가 사흘만에 거꾸로 적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의 모험을 안고 「침략전쟁」을 일으킨단 말인가. 대개 무기를 갖고는 평화를 얘기하기 못한다. 인간의 정신과 의지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그 평화는 헌장이나 협정만으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사람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착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증오에 앞서 평화에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 속에서 만나고 다짐해야 한다. 이 화사한 성장의 계절에 왜 6ㆍ25를 얘기하는 가는 묻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모순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의 분단상태가 해소되지 않고는 해마다 6월에 우리들은 전쟁과 평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경구가 있다. 상대가 문제해결 수단으로 무력을 택한다면 군축이나 협상에 의한 평화유지는 어렵다. 그렇다면 전쟁수행 능력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 옛말에 일렀다. 나라가 비록 크나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편안하나 싸움하는 방법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하다(국수대 호전필망 천하수안 망전필위). 평화를 얘기하고 전쟁을 논할즈음 「좋은 전쟁」이니 「나쁜평화」니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전쟁은 전쟁이고 평화는 평화일 뿐이다. 평화와 전쟁,전쟁과 평화는 흔히 대립개념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평화에 대한 평균적인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둘은 반드시 대립개념은 아니다. 교전 당사자간의 투쟁을 전쟁이라 할 때 전쟁의 개념은 명백해지지만 평화의 개념은 그렇지 못하다. 평화란 전쟁과 관련되면서도 매우 추상적인 데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중세유럽에서의 평화개념이 오히려 오늘의 그것보다 더 명료하다. 즉 『일반적으로 어느 지역이 평화롭다는 것은 그 지역민중이 공유하는 환경의 이용가치가 외부의 폭력적 간섭으로 손상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세적 개념의 평화란 단순히 영주간에 전쟁이 행해지고 있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민중이 자신의 문화를 유지해 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ㆍ정신적 기반 즉 「생존의 보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전쟁의 상흔이외에 6ㆍ25가 우리에게 남긴 더큰 상처는 분단의 굴레를 우리민족 가슴속에 깊이 내면화 시킨데서 더나아가 전쟁과 평화,평화와 전쟁에 대한 위기적 인식을 생활화 시켰다는 점이다. 그나마의 「생존의 보호」가 언젠가 송두리째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전쟁신드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판문점ㆍ휴전선ㆍ국립묘지와 저 소모적인 콘크리트 장벽 논쟁ㆍ땅굴 등 6ㆍ25의 전쟁적 실체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지금 이 평화적 생존의 보호에 대해서는 언제나 초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모두들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림자가 사라져가고 있다고들 얘기한다. 6ㆍ25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1950년 6ㆍ25당시 소련에 있어 한국은 미국의 대소전방 기지였다. 원래 북한정권의 수립을 직접 주관했고 한국전쟁에서도 북한을 지원했던 그 소련의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을 만난 것은 소련이 더이상 한국을 미국의 대소전초기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쪽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연의 산세는 골이 깊어 수림이 무성하다지만 인간사에선 상처가 크면 치유도 오래갈수밖에 없다. 6ㆍ25가 아직도 그 자체로서 역사적 인식이나 평가 또는 전쟁사적 해석에 있어 미진한 채로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6ㆍ25의 피맺힌 상처는 우리가 그것을 한과 증오의 대상으로서 보다 민족과 역사의 교훈으로 살려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래서 6월엔 아무래도 전쟁과 평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이기탁 연세대교수/한ㆍ소 정상회담을 보고(특별기고)

    ◎새로운 아시아 건설의 시발/북한 개방을 유도… 한반도의 긴장 풀어야 스탠퍼드대학(현지시간 4일)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지금 바야흐로 아시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원천지가 한반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시아의 「냉전」은 40년전 한국전쟁으로부터 시작됐고 한국전쟁의 종결이 곧 아시아냉전의 종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북아냉전 종식 서막 고르바초프가 싫든 좋든간에 우리민족이 스스로 뽑은 노대통령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확실히 한반도의 냉전을 종결하는 것과 동시에 아시아의 냉전을 종결시키는 「시발」이 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냉전의 종결이 「시발」이 된다는 말은 「고전적」인 러시아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소련의 새로운 아시아정책과 이에서 기인하는 새로운 한반도접근이 시작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구한말 이래의 러시아의 「이익」이라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대담하게 우리의 입장을 확실히 한 것은 우리 외교사와 아직까지 종결을 못보고 있는 한국전쟁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우리 모두가 자부해도 좋을 것같다. 문제는 아시아와 한반도냉전의 초점이 북한이라는데 있다. 아사아와 한반도의 냉전은 북한이라는 긴장의 근원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 소련에겐 북한이라는 긴장의 근원을 제거하거나 궤도의 수정 없이는 아시아의 부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반도를 한국전쟁이라는 형식으로 교란하였고 이어서 전후 반세기동안 아시아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과 전제위에서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고 본다. 아마도 이번 노ㆍ고르바초프정상회담의 최대ㆍ유일의 성과는 두 정상이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본다.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과 소연방간의 강화조약을 전제로한 국교정상화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는 사실은 아시아의 냉전사에 전환점을 긋는 획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절차와 시간이 남아있으나 우리 민족은기다릴 줄을 안다. 현실적으로 소연방의 한국승인의 시작은 북한이 권력의 기본논리로 내세우는 「하나의 조선」정책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는 곧 한반도 문제해결의 출발을 의미한다. 북한이 노동당규약을 근거로 남한을 공산화하는 것이 노동당의 당면목적이라고한 「하나의 조선」정책은 오랫동안 한국민을 괴롭혀온 정치사상과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조선」정책은 아시아긴장의 원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소연방의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을 직접 만남으로써 「하나의 조선」으로부터 「두개의 조선」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후의 혼란에 책임 한소 두 정상간의 회담 그 자체에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북한이 「두개의 조선」으로 이행하지 않는한 통일의 출발이 시작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의 말대로 「한반도의 빙산은 깨지기 시작」하고 있다. 소련이 우리를 도와 빙산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신 우리는 장차 통일의 주체와 상대로서 첫째 북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둘째 소련이 우려하는 북한고립정책을 원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소련에게 한 것이다. 실제로 이의 중요성은 북한의 군부를 제외하고는 김일성이후가 초래할 북한에서의 권력의 공백을 메울 또하나의 힘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데 있다. 이는 우리의 군사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민족의 힘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남북한의 통일의 기본 원칙은 북한의 민주화가 실천될때만 가능한 것이다. 또 이는 아시아의 평화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이 한국전쟁을 종결해야할 전환적인 시점이라면 소련은 한국전쟁에 대한 종결에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또 고르바초프대통령은 그 자신이 소련사회를 「민주화」했듯이 앞으로 북한에 대한 「민주화」를 격려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평화와 아시아의 평화는 소련이 경험하고 있듯 역시 「민주화」의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소련의 「평화외교」를 돈으로라도 살 준비가 되어 있다. 소련이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한다면 우리는 소련국민의 생활에 도움을 줄 소비재를 기꺼이,우리 생활을 희생하고서라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소련국민의 「민주화」에도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련말이 우리말로 둔갑한 해방이후의 「다와이」외교에도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소련의 국가이익에도,한국의 국가이익에도 현실적인 상호간의 「균형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가 회담직후 『우리가 그(노대통령)와 회담을 갖기로 결정한 이유는 통상관계 때문』이라고 말한것은 전통적인 외교에서는 조금 벗어나는 말이긴 하나 우리는 선의의 「다와이 외교」로 해석,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대통령이 귀국일자와 시간을 연기하고 더욱이 유일한 기회였던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관광을 취소하고 작은 나라 한국대통령과 대좌한 성의는 한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한국과 소련간의 국교문제만이 아니라 북한의 최종적인 반응이라고 본다. 한반도 냉전의 종결은 북한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만간 닥쳐올 「김일성이후」 완벽했던 김일성권력이 완전히 붕괴했을 때 생길 「힘의 공백」을 메울 정치적 힘은 결국 북한의 군부라고 볼때 조만간 한반도에 걸릴 「부하」는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위험ㆍ희망의 양면성 이번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간의 한소정상회담은 위험과 희망이라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잇다. 여기에 우리 민족이 고르바초프의 소련에게 기대하는 초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해방이후 북한의 문을 닫았던 소련이 다시 이를 열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 정상회담 성사배경과 전망(한ㆍ소 새 시대:1)

    ◎한반도 냉전종식의 역사적 전기/북방ㆍ개혁정책 일치… 양국수교 “초읽기”/통일여건 조성에 큰 파급효과 예상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의 6월4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은 한소 수교임박이라는 양국관계에 뿐 아니라 냉전체제의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시각에서 그 의의가 엄청나게 크다. 노ㆍ고르비회담은 우선 한소 수교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한소 양국간에는 지난해 4월 서울과 모스크바에 각각 무역사무소가 교환설치된 이래 1년도 채 못돼 금년 2월과 4월에 주모스크바 한국영사처,주서울 소련영사처가 설치되었으며 이번에 한소 정상회담이 예상을 뒤엎고 전격적으로 성사됨으로써 양국수교는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 노ㆍ고르비회담에서는 한소 관계정상화가 핵심적인 의제로 등장될 것이 틀림없으며 미수교국간의 정상이 회담을 갖는 사실 자체가 이미 수교에 대한 기분적인 인식이 일치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는 「조속한 시일내에 한소 관계를 정상화 한다」는 수교원칙에 합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수교원칙을 토대로 양국 수교교섭단이나 양국 외무장관이 빠르면 7월중에 1∼2차에 서울과 모스크바 및 유엔본부 등을 오가며 수교에 따른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소 수교는 9월이전에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한소간의 관계긴밀화 발전속도에 따라서는 노대통령의 연말 방소,2차 한소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않다. 한소 정상회담의 전격 성사배경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장래를 경제적 번영으로 귀결시키려는 소련측의 실질적 욕구와 남북관계개선 방법을 「서울­모스크바­평양」이라는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구사해야겠다는 우리의 입장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는 신흥공업국인 한국의 건설ㆍ제조업분야 등을 유치,자국의 시베리아개발,일반국민들의 생필품수급확대 등 경제번영의 촉매가 되게하고 또한 한국경제의 소련진입이 경제대국 일본으로 하여금 소련경제부흥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듯하다. 한국으로서는 남북관계진전,나아가 민족공동체로서 남북 통일시대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해야하나 북한이 한사코 폐쇄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북방외교를 통해 북한을 개방쪽으로 움직이게할 필요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북방외교의 관건인 「모스크바」를 평양으로 가는 우회징검다리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 바로 이번 노ㆍ고르비회담 추진의 결정적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소 정상회담의 또 하나의 의의는 남북한 관계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소련의 개혁ㆍ개방물결이 베를린장벽을 허물고 동구에 자유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2차대전후 지속되어온 냉전체제의 급속한 붕괴가 이뤄진 최근의 세계적 화해 무드가 「분단 한반도」에 까지 불어닥친 것이다. 냉전체제의 최후의 산물인 남북한 분단의 해소없이는 진정한 데탕트가 이뤄질 수 없다는 인식이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차 있었다면 소련과의 관계정상화 없이는 방북외교의 완결을 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노대통령에게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ㆍ고르비회담은 북한에 대한 개방압력,남북통일 여건조성이란 면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소련은 이번 회담을 통해 「북한을 절대 고립시키지 않으며 그들의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노대통령의 솔직하고도 진지한 메시지를 확인한 뒤 이를 북한측에 전달하면서 남북대화재개 등을 종용하고 북한도 개방의 길을 걷도록 권고할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이 소련의 충고를 끝내 거부할 경우에 구사할 수 있는 대북압력카드는 매우 다양할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폐쇄노선을 고수하면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핵 개발관련 기술지원의 중단을 들 수 있다. 이미 소련은 북한의 핵개발을 공식비판한데 이어 소련핵기술팀을 철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북한의 고도무기체계가 소련무기체계로 이뤄져있는 점을 감안할때 군사적 압력이 용이하고 석유공급도 압력수단으로 구사할 수 있으며 북한외채의 80%가 소련채무인점도 충분한 영향력 행사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은 『비록 사회주의가 어렵더라도 자본주의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포기는 물론 사회주의가 얻은 전리품도 포기하는 것』(5ㆍ24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이라는 폐쇄노선을 다짐했지만 결국은 소련의 압력을 점진적으로 수용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중단된 남북대화나 인적ㆍ물적교류가 이번 노ㆍ고르비회담으로 다시 가동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으며 이러한 남북 관계진전은 통일시대 개막의 여건을 성숙시켜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한소 관계발전이 가속화될 경우 시베리아개발에 한국의 자본ㆍ기술이 지금도 현지에 나가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그같은 「결합」은 남북한 관계진전에 새 전기를 제공할 것이다. 한편 한소 정상회담→양국 관계정상화로 이어질 북방외교성취는 집권후반기를 맞고 있는 노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위상제고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되며 내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외치로 보상하는 효과도 거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번 노ㆍ고르비회담은 분단시대를 열게 했던 주역과 관계정상화를 통해 분단을 해소하고 청산해간다는 의미에서 북방외교의 완결이자 분단시대의 종식을 앞당기는 결정적 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한ㆍ소 최근 접촉 일지 ▲78년 4월=KAL기 소 무르만스크 남쪽 2백마일 빙판에 강제착륙 ▲〃 9월=한국각료로는 처음으로 신현확보사장관 세게보건기구총회참석자 소련입국 ▲79년 4월=한소 국제전화 개설 ▲83년 9월=KAL기 사할린부근 상공서 소전투기에 피격 ▲88년 1월=소련,서울올림픽참가 공식발표 ▲〃 8월=박철언대통령정책보좌관 극비방소,수교교섭 개시 ▲89년 3월=최호중외무부장관,방콕에서 아태 경제사회위원회 총회에 참석한 리가초프 소 외무차관과 접촉 ▲〃 4월=소 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 개설,대한무역진흥공사 모스크바사무소 개설 ▲〃 6월=김영삼민주당총재 방소 ▲〃 11월=한소 영사처 상호교환 개설 합의 ▲90년 2월=주모스크바영사처 개설 최호중외무장관 한소 외무장관회담제의 ▲〃 3월=공로명 초대 주소 영사처장부임,주한 소련영사처 개설,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일행 방한 ◎한ㆍ소관계 7백50년 약사/1884년한ㆍ노 수교조약… 공식외교 개시/무역사무소 작년 개설,양국관계 급진전 한국과 소련 양국은 서기 1246년 당시 고려 왕자인 왕준ㆍ왕전형제가 몽고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고왕 정종즉위식을 계기로 러시아 수스달 공국의 제로슬라브대공과 솔란게스왕자와 첫 접촉을 가진 이래 이번 노태우대통령ㆍ고르바초프 소대통령간 정상회담성사까지 7백50여년간 공식ㆍ비공식관계를 유지해왔다. 한소 양국이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861년 중로 북경조약체결로 연해주땅이 러시아영토가 됨에 따라 한로 국경이 두만강을 경계로 접하면서부터. 이후 부동함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으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1884년에는 한보 수교통상조약이 체결돼 양국간 공식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한국전쟁이후 한소 양국간 적대관계가 지속됐으나 70년대 들어 한국정부는 6ㆍ23선언등을 통해 소련을 포함한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교류및 관계개선용의를 표명했다. 6공들어 한국정부의 적극적 북방정책추진과 함께 한소간 인적 교류가 증대되었으며 88년 8월 박철언 당시 대통령정책보좌관이 극비 방소,양국 수교교섭을 시작했다. 특히 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선수단이 참가함으로써 양국관계진전에 결정적 전기가 됐으며 한소 양국은 지난해 4월 서울과 모스크바에 각각 무역사무소를 교환개설했다. 이어 11월 공식관계의 시초라고 할 영사처교환설치에 합의,양국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에따라 지난 2월 주소 영사처가 개설되고 공노명대사가 초대 주소 영사처장으로 부임했으며 소련측도 3월 중순 시로추크를 영사처장대리로 임명,영사처업무를 정식개시했다. 이에앞서 지난해 6월 당시 김영삼민주당총재가 소련과학원산하 세계경제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했으며 3월에는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과 박철언 당시 정무1장관 등 당정고위인사들이 소련을 또다시 방문,고르바초프등 소련측 고위인사들과 만나 한소 관계정상화에 합의했다. 이어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간에 이를 뒷바침하는 친서가 교환됨으로써 양국은 1904년 국교단절이래 86년만에 다시 공식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평을 열었다.
  • 「한일 신시대」 전개의 전제조건 특별기고/이기탁 연세대교수ㆍ정치학

    ◎일본은 아시아의 의구심 떨쳐라/「통석」의 기교론 새질서 개편의 주역 될 수 없어 한일관계는 아시아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패전 후 처음으로 일본은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를 점하려는 전환점에 이르고 있다. 일본은 장기적인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아시아정책과 일본의 역할을 가늠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빼앗겼던」 아시아에서 미국이 다시 후퇴를 하게되는 「힘의 공백」을 일본이 메우기 시작하려는 힘의 논리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이번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은 어떤 의미와 윤곽 속에서는 「도쿄외교」이지 「서울외교」의 성격은 없는 것이다. 유럽이 독일을 중심하여 돌기 시작한다면 아시아가 일본을 중심하여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일본의 새로운 야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연합헌장에는 아직도 엄연히 「적국조항」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중부유럽,즉 「독일의 재등장」은 일본에 깊은 영향과 격려를 주고 있는 것이다. 독일이 고르바초프와 대결하고 타협하여 승부에 이겼다면 이제 일본이 고르바초프를 극동에서 맞이할 준비를 하면 된다. 여기에 일본외교의 전후 대전환점을 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일본외교는 전후 「소련의 위협」을 전제하여 미국과의 동맹을 통하여 「안보무임」을 실천할 수 있었고 오늘날 또 하나의 명치 이래의 일본의 이상인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제 고르바초프를 극동으로 끌어내 「소련의 위협」과 타협할 수 있다면 일본의 전후는 끝나는 것이다. 이는 퇴조하는 미국의 공백을 메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과 상쇄되는 일본외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외교의 대아시아정책의 시발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대통령의 연설에 「우뢰와 같은 박수」라는 일본의 특징과 성격에서 보듯이 우리는 처음부터 일본외교의 「들러리」를 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가 있다. 이번 방문은 확실히 한일간 외교문제의 의미는 있다. 또한 한일간의 우호관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한미동맹과 함께 앞으로도 필수적인 우리외교의 기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 일본의 노대통령 초청 외교는 단순한 한일간의 외교만의 차원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일본의 대아시아외교의 시발의 일환이라고 깊이 관측해야 한다고 본다. 유럽에서의 대변화 즉 「독일의 통일」과 유럽이 다시 독일을 중심하여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다는 세계적인 차원의 「새로운 질서」에 일본이 참여하고 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려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독일문제」와 아시아에서의 「일본문제」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특히 우리입장에서는 명심해야 한다. 일본문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대외정책의 하나이다. 다른 아시아국가와 달리 일본에 직접 「식민지」의 노예가 되었었고 또한 앞으로 복잡한 통일을 지향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잡아야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는 깊은 영향을 받게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속의 전후 독일에는 철저한 「비 나치화」정책(Entnazifizierung)으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나치의 범죄가 나타날 때에는 형법의 시효는 없다. 과거에 죄가 없는 독일학생들이 유럽학생들과 모였을 때에독일제국군대의 구호인 「아인 츠바이」(하나 둘) 구호가 농담으로라도 나오면 불쌍하게도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에 반하여 오늘의 일본은 전후 동경재판소의 전범(Class A)으로 구분되어 스가보형무소에 수감됐던 하토야마,기시,이케다,사토가 차례로 출감하여 총리에 올라서서 만든 일본인 것이다. 이점에서 오늘의 아시아에서는 독일문제와는 판이하게 「일본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시아에서는 대륙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일본문제」가 가려져 있었으나 이제 「일본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또 일본이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문제」는 경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아시아에서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국가들은 이제 아시아의 이데올로기문제가 걷히면서 등장하려 하는 일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정면으로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국외교는 냉전 하에서는 도리어 「한미동맹」으로 한국전쟁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균형」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남북한 모두가 일본이라는 파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진실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외교의 대아시아외교의 첫 시발이며 관문인 「조선반도문제」를 어떻게 시발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의 외교가 아니라 일본의 대내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통석」이라는 일본의 「오도리」춤에서 보는 섬세하면서도 기만적으로 보이는 언어의 기교에서 보듯이 기교로만 끝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아시아의 장에 떳떳한 역할을 갖고 나서려 할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국민의 「가치체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경험없이 전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메워 이를 경영하느라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나마 미국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가치체계」였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아시아를 부분적으로나마 지배하였고 또 우리는 이를 위해서 헌신하여 온 것이다. 반면 일본이 과연 미국과 같은 가치체계를 갖고서 이제 아시아에 접근하려 하고 있는지 한국과 아시아 모두가 깊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나 아시아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국민이 역사를 반추하고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한가지 다시 독일문제와 비교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행여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게르만의 멘탤러티를 일본국민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이며 아시아의 관찰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 북한 “인도주의 입장서 송환” 거듭 생색/미군유해 판문점 오던날

    ◎인도ㆍ인수 서명후 “앞으로 협조” 양측 악수/“반환협상때 소 도움 받아” 미 대표 첫 공개 ○…28일 상오 판문점에서 열린 미군유해 인도식에서 북한측은 식이 시작되기전 「위생차」(구급차) 3대에 나무관 5개와 유품상자 5개씩을 싣고와 군사정전위회담장앞 북측지역 광장에 1m 간격으로 정돈해 놓은 뒤 미 대표단에게 유품과 유해를 직접 확인시켰다. 유해는 흰색천 위에 신체부위별로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는데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으며 유해 1구마다 하나씩 딸린 유품상자(가로 30cm,세로 40cm,높이 20cm)에는 군복일부와 단추,인식표 등이 담겨져 있었다. 미대표단은 정전위회담장옆 군사분계선을 통해 우리측 지역에 인도된 유해들을 미8군 군목의 기도등 간단한 의식절차를 거친 뒤 미8군 운구차로 용산 미8군 사령부로 옮겼다. ○…이날 송환된 유해의 신원은 북한이 일부 밝히기도 했으나 미국측은 이를 무시,하와이 호놀룰루의 미육군 중앙신원확인연구소로 옮겨 첨단기술로 확실한 신원확인절차를 거친 뒤 유족에게 통보된 뒤에나 공개할예정. ○…유해 반환에 앞서 양측대표단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에서 상견례와 함께 인사를 교환. 참석자는 미하원 원호위원장 GV 소니 몽고메리위원과 로버트 스팀포위원,군정위비서장인 제임스 텔리 미육군대령등 미국측대표 4명과 이성호 북한측 「최고인민회의 대외문화연락협회」 부위원장,조상호 「조선 작가동맹」 중앙위 부위원장,손종철 「조선무역연구소」 부소장 등 북한측 대표 3명. 이 자리에서 북한측 수석대표격인 이성호는 짐짓 여유있는 표정으로 『먼데서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넸으며 몽고메리위원은 『북한이 한국전쟁중 사망한 미군의 유해를 돌려준 데 감사한다』고 답례. 양측은 판문각 북한측 지역에 놓은 유해를 확인한 뒤 다시 본회의장에 들어가 유해 인도ㆍ인수서에 서명했으며 유해가 모두 인도된 뒤 양측대표는 공동경비구역 군사분계선에서 『앞으로 서로 협조하자』며 악수를 교환. ○…이성호 북측대표는 유해인도가 끝난 뒤 판문각 앞 계단에서 간단한 기자회견을 갖고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미군유해인도 사업이 진행됐다』고 이날 행사의 의미를 강조. 이 대표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미국측에 유해인도를 제의했으나 미국측이 인위적 난관을 조성해 유해인도가 늦어졌다』고 말하고 『미국이 때늦긴 했지만 우리의 인도주의적 제의를 받아들여 미의회 대표단을 보내 유해를 인수해 가기로 한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생색,이대표는 또 『인도주의적 입장이라면 절차에 구애받지 말고 유해를 무조건 넘겨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미국측이 비방을 일삼고 비우호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장애요인』이라고 답변. ○…몽고메리 미하원 원호위원장은 유해인수후 자유의 집 앞계단에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전쟁중 북한측 지역에서 실종된 미군이 8천여명이나 된다』고 밝히고 『36년만에 재개된 유해송환이 앞으로 보다 많은 유해인도의 시작이기를 바란다』고 기대감을 표명. 몽고메리 위원장은 또 이번 유해반환 협상에서 소련측의 도움을 받았다고 공개하고 소련과 북한측에 따르면 현재 1백여구에 가까운 유골이 발견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생존전쟁포로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북한측이 이번 송환을 인도주의적 견지라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데 대해 미­북한간 협상에 참가한 제임스 빌브레이 의원은 『북한의 주유엔대표가 양국의 관계개선을 희망했다』고 밝혀 정치적 동기를 인도주의로 포장했음을 입증. 이날 미군유해 인도식에는 인수단 말고도 스틸웰 전유엔군사령관등 미국측 인수참관단 8명과 내외신기자 1백20여명이 나와 인수현장을 지켜보는등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북측에서도 소련의 타스통신등 내외신 기자와 관계자등 70여명이 나와 참관.
  • 대미 공식창구 노린 유화책/북한의 미군유해 송환 안팎

    ◎미 의회와 직접 접촉… 관계개선을 모색/남북대화 진전·긴장완화에 「한몫」 기대 북한이 미국의 현충일인 28일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미군병사 유해 5구를 판문점을 통해 미 의회대표단(단장 GV 몽고메리하원 원호위원장·민주·미시시피주)에게 인도한 것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북한이 유엔군사령부소속 장병들의 유해를 유엔사에 마지막으로 인도했던 것은 휴전협정이 발효된 1년뒤인 54년 8월17일로 당시 유해는 북한의 한만 국경지역 14개 포로수용소에 수감중 사망한 미군 1천8백69명을 포함한 4천23구로 올해 유해송환은 만 3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유엔군사령부는 휴전이후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공산측과 80여차례나 유엔군장병 유해송환을 위한 협상을 벌였으나 북한측의 무성의로 결실을 보지 못했었다. 미국은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인 88년 12월6일 북경에서 북한과 외교접촉을 전개하고 지난달 26일까지 8차례의 비공식접촉을 통해 양국간의 현안을 토의해왔다. 미국측은북한과의 접촉에서 ▲남북대화 진전 ▲비무장지대안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 ▲실종미군유해 인도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 가입 ▲테러포기 ▲대미 비방중지등을 촉구하고,북한측은 ▲주한미군 철수 ▲남북한 상호감군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한미 정부간 직접대화및 관련개선 ▲실종미군 송환을 위한 양국정부간 협의등을 내세웠다. 지난 1년 5개월동안 수차례에 걸쳐 계속된 북경접촉과 주유엔 북한대표부 허종부대표의 워싱턴에서의 미 정계·관계인사들과 빈번한 접촉끝에 이번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해송환에는 북한측이 미국측에 보내는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투중 혹은 포로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된 미군은 모두 8천1백77명이며 이밖에 한국군과 영국·프랑스·터키·캐나다 등 참전 16개국의 유해도 2천2백33구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만3백여구의 유해중 이번에 인도되는 5구의 유해송환을 시작으로 앞으로 한국군과 참전 16개국의 유해송환문제도 계속 협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군사관계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 대변인 링크대령은 『북한이 어떤 의도로 5구의 유해를 미국측에 인도하는지 알 수 없으나 외교적인 루트를 통하지 않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판문점을 이용하는 것은 앞으로 남북대화나 긴장완화를 위해서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은 당초 미군의 유해발견 사실을 뉴스를 통해 흘린 뒤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측 대표들의 인도주의적인 인도요구를 무시하고 미국과의 공식대화의 무기로 이용하려는 기도를 보여왔다. 유해반환은 교전 당사국간의 군사적 문제로 정전위원회 소관사항이나 북한이 유해인도계획을 몽고메리의원에게 직접 서한으로 통보한 것은 미 의회와 접촉해 보려는 외교적인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측은 처음 미 의회대표단이 직접 평양에 와서 유해를 인수해 가라는 제의를 했었으나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로 인도장소를 바꾸었다. 이번 인도된 5구의 유해는 판문점에서 헬리콥터를 이용,오산 미 공군기지로 이송된 뒤 29일 C141 미 수송기로 미 육군중앙신원감식소(USACIL)에 보내져서 첨단과학 장비를 이용,신원확인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신원감식소에서는 인식표·단추·만년필 등 유류품이 있을 경우 이를 토대로 1차 감정을 하고 2차로 X선·레이저빔·유골의 조직검사 등으로 신원을 최종 확인한 뒤 유가족에게 통보한다. 1975년 월남전쟁이 끝난 뒤 설립된 미 육군신원감식소는 그동안 태평양전쟁이나 월남전에 희생된 유해를 정밀하게 분석,신원파악을 해와 이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미군 관계자들은 이번의 경우 전쟁이 일어난지 40년이나 지나 유해만 가지고 신원파악이 어려운 데다 설령 신원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유족을 찾는 작업이 더 어려워 이들의 대부분이 무명용사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37개월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은 8천1백77명의 실종자이외에 3만3천6백29명의 사망자와 10만3천2백84명의 부상자를 내고 3백89명의 돌아오지 않는 포로를 내었다. 미국이 무명용사의유해반환을 위해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이나 베트남·북한과 공개접촉 혹은 비밀접촉을 하는등 끝까지 송환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유족들의 슬픔을 달래주려는 인도주의적인 면도 있으나 미국군복을 입고 전사한 장병들의 시신은 끝까지 국가가 신경을 써 응분의 대우를 한다는 것을 보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긍지를 높이려는 의도도 짙다. 북한도 그동안 회피해왔던 미군유해 송환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은 이를통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려는 계산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전인철외교부부장이 지난 15일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우리는 미군의 유해를 더 발견하는 경우 유해를 모두 반환할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협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실종·미귀환포로 현황 (유엔군사령부 집계) 국적 실종 미귀환포로 계 한국군 1,647 1,647 미군 8,177 389 8,566 기타참전국 18 197 215 계8,195 2,233 10,428
  • 미 대표단 판문점 방문때 북한,“대미 관계개선 희망”

    ◎모든 미군유해 송환/외교부 부부장 【헬싱키 AP 연합】 전인철 북한외교부부부장은 15일 미 의회대표단이 이달말 한국을 방문할 때 북한과 미국간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미 하원대표단은 지난 50∼53년의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들의 유해 5구를 북한당국으로부터 인수하기 위해 이달말 판문점을 방문할 예정이다. 전 부부장은 이날 핀란드 방문 3일째를 맞아 수도 헬싱키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베를린 장벽이 이미 무너졌는데 한국이 남북한사이에 세운 콘크리트장벽을 우리가 제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우리는 미국인들이 한반도통일을 위한 우리의 협상제안을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전은 『우리가 미군의 유해를 더 발견하는 경우 발견한 유해를 미국측에 모두 반환할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협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부부장은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 『미국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줄 것을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순방을 위해 핀란드를 방문하고 있는 전은 이날 스웨덴으로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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