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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3사 특집 ‘전쟁 아픔’ 고발

    한국전쟁 발발 49주년을 맞아 방송 3사는 다큐멘터리와 생방송 등 다양한한국전쟁 특집을 방송한다.방송사들은 17일부터 25일까지 1주일가량 이들 프로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상처 등을 보여준다. 우선 KBS는 17일 밤 10시부터 2시간 동안 1TV와 위성1TV,사회교육방송을 통해 특별생방송으로 ‘남과 북,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생방송한다.북한에가족을 둔 남쪽 이산가족이 KBS 스튜디오에 나와 ‘남에서 북으로 띄우는 사연’을 발표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KBS2 ‘추적 60분’은 17일 밤 9시50분 특별기획으로 ‘사라진 6.25전사자4만명’을 방송한다.전쟁이 일어난지 49년이 지났음에도 당국의 무책임한 전사자 처리로 인해 아직까지 아픔을 안고 있는 유가족의 모습을 살펴보고 보훈행정의 현주소를 고발한다. KBS1은 또 23일 밤 10시 ‘6·25 특집’으로 ‘임시수도 부산,1000일의 기록’를 내보낸다.자갈치 아지매,국제시장 또순이,부산부두의 얌생이로 통칭되는 피난민들의 고달픈 삶과 희망을 임시수도 부산을 무대로 그려본다.또전쟁과가난을 못이겨 고국을 등진 한 전쟁고아의 삶을 다룬 ‘군용백 속의아이’(25일 밤 10시)도 방송한다.지난 53년 콜롬비아로 돌아가는 참전국 병사의 군용백에 숨어 해외로 건너간 전쟁고아 윤우철씨(당시 9세,현 55세)의이야기이다. MBC는 ‘특별기획 남북이산가족찾기-이제는 만나야한다’를 23일밤 9시55분부터 3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한다.지난 한해 동안 MBC에 출연해 헤어진가족을 만난 사람들을 스튜디오로 초청한다.아울러 남쪽 가족을 찾는 북한주민과 남한에 살면서 북한의 가족을 찾는 남한이산가족의 애달픈 사연을 소개한다. MBC는 이어 남파간첩으로 붙잡혀 모두 31년 5개월동안 수감된 정순택씨의 삶을 다룬 특선 다큐멘터리 ‘보호관찰 대상자 정순택의 꿈’(21일 오전 11시)을 내보내 분단의 고통을 조명한다. SBS는 19일 ‘문성근의 다큐세상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베트남전의 끝나지않은 고통-고엽제’를 방송한다.한국전쟁은 아니지만 전쟁의 아픔은 같다는 점에서 이 프로를 마련했다.이 프로는 30년전 한미간에 체결된 브라운 각서를 공개한다.이 각서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전사상자의 보상금지급문제가 포함돼 있다. 허남주기자 yukyung@
  • 남북한 불교도 금강산서 통일기원 합장

    국토분단후 처음으로 ‘겨레의 영산’인 금강산에서 민족화합과 조국통일을기원하는 법회가 열렸다. 고산(고山)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조계종 총무원장)등 승려 200여명과불자 350여명은 지난 3일 오전 금강산 신계사터에서 ‘민족의 화합과 나눔을 위한 불교도 금강산순례’법회를 갖고 민족의 화합과 남북의 통일을 염원했다.남한측 불교지도자들이 범종단 차원에서 대거 금강산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법회는 승려들의 탑돌이를 시작으로 삼귀의례,반야심경 봉독,법어,사홍서원 순으로 30여분간 진행됐다.마지막으로 통일기원 발원문 봉독도 있었다.고산 총무원장은 법어를 통해 “분단후 북녘에서 첫 법회를 가져 감격스럽다”고 말하고 “남북으로 나뉜 동족이 화합해 이 땅에 불국토(佛國土)를건설,세계평화에 이바지하자”고 호소했다. 불교계는 이번 법회가 남한불교계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분단후 북한 땅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라 법흥왕때 창건된 신계사는장안사,표훈사,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명찰로 꼽혀왔으나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모든 전각이 불타고 지금은 3층석탑과 돌기둥만 남아있다.불교계는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금강산 관광사업자인 현대그룹과 신계사 복원문제를 논의중이다. 이에 앞서 금강산 순례단은 2일 동해항 출항직후 ‘민족화해와 평화통일기원 방생대법회’를 금강호 선상에서 가졌으며 북한에 전달할 금동좌상불과오존(五尊)괘불도 점안식도 봉행했다.금동좌상불은 높이 55cm이며 오존괘불도는 가로 145cm,세로 205cm규모의 탱화로,올 하반기 고산 총무원장의 방북이 이뤄질 경우 북한측에 직접 전달할 계획이다. 한편 금강산을 찾은 불자들은 금강산행을 이구동성으로 ‘성지순례’로 표현했다.이는 우선 ‘금강산’이란 산 이름이 ‘일체의 번뇌를 깨뜨림’을 뜻하는 불교용어에서 연유하고 있기 때문이다.또 비로봉,관음연봉,문수봉 등주요 봉우리의 이름도 부처와 보살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또 신계사,유점사,표훈사,장안사 등의 명찰등이 있으며 서산대사를 비롯한 만공·동산·효봉·청담스님 등의 고승이 금강산에서 배출됐다.이밖에 금강산에는 ‘8만9암자’란 말처럼 골마다 사찰과 암자로 가득했고 아직도 그 유적이 곳곳에 남아산 전체가 가히 불교박물관이라 할만 하다. 효봉선사의 손(孫)상좌인 보성(菩成) 송광사 방장은 “노스님이 득도하신신계사를 찾으니 감개무량하다”며 풀밭에 덥썩 엎드려 주위를 숙연케 했다. 금강산 정운현기자 jwh59@
  • 신계사는

    신계사(新溪寺)는 신라 법흥왕 6년(519년)에 창건된 고찰로 장안사·표훈사·유점사 등과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중의 하나다.위치는 외금강 온정리 인근,구룡폭포로 가는 초입에 있다.임진왜란으로 창건당시의 건물이 소실됐다가 1597년 중창됐으나 이 역시 1951년 미군 폭격으로 전소되었다.지금은 절터에 3층 석탑과 돌기둥들만이 스산하게 서 있어 이 절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신계사는 원래 15채의 건물로 이뤄진 큰 사찰로 대웅전과만세루를 남북축으로 대웅전 구역에는 대웅전과 3층석탑,동서쪽으로는 여러전각들이 들어서 있었다.만세루 구역에는 만세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부속건물이 있었다.한국전쟁 때만 해도 대웅전과 만세루,11채의 전각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3층석탑과 만세루를 떠받치던 돌기둥만 남아있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95호인 신계사터는 현재 남북한 불교계에 의해 복원이추진되고 있다.금강산 문화유적복원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법타 외)는 지난해 6월 신계사 복원방침을 정하고 현대그룹측과 협의중이다. 정운현기자
  • [기고] 比대통령 訪韓을 맞아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나라가 필리핀이다. 지난 48년 신생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한 후 국제사회의 인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때에 미국·중국·영국·프랑스 등 4대 강국에 이어 5번째로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가 필리핀이다. 나아가 필리핀은 한국전쟁때 연대 규모의 병력을 파병했고 냉전구도의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입장을 꾸준히 지지했다.황장엽 망명사건 때와 같이 대외적으로 부담이 되는 경우에도 우리를 성심성의껏 도와준 진정한 맹방이다. 한국이 아세안(ASEAN)의 대화 상대국이 되도록 적극 지지했던 필리핀은 최근 우리 대통령이 제의한 아세아 비전그룹을 실현시키는 데 앞장서는 등 우리의 아세안 외교에 있어 소중한 동반자다. 그동안 우리가 이처럼 소중한 친구 필리핀에 대해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보답해 왔는지는 의문이다.오히려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찾아온 필리핀 근로자를 홀대라도 하지 않았나 염려된다. 오늘날 한·필 양국 관계는 모든 면에서 순조로우며 경제관계는더욱 긴밀해지고 있다.양국의 경제는 상호보완성이 크며 경제협력의 여지도 크다.필리핀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아세안 국가이며 우리가 아세안 시장에진출하는 데 있어 관문이 된다.필리핀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일본에 이은 주요한 투자처다. 문자 해독률이 90%를 넘고 영어를 구사하는 필리핀의 우수한 인력은 제조업 분야의 투자를 위한 이상적인 여건을 제공한다.필리핀은 우리 건설업체들이 현재까지 23억달러 상당의 수주를 하고 올해만 해도 5억달러 상당의 수주가 예상되는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건설시장이다. 한·필 교역은 IMF 충격 속에서도 약 10% 성장,98년 교역량은 36억달러에달한다.150여개의 우리 투자업체들은 컴퓨터칩·통신장비·전자제품·의류·신발 등의 분야에서 호조를 보이고 있다. 6일부터 시작되는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방한은 이처럼 심화되고 다원화된 양국관계를 한차원 높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민주주의 시장경제,인권존중에 대한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만큼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아시아지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도 기대된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치 아마추어로 오해받기도 한다.그러나 그는 지난 1969년 마닐라 인근 신후안시 시장으로 당선돼 1년간 명시장으로 이름을 떨쳤다.이후 상원의원과 부통령직을 역임,총30년간 정치가이자 행정가로서 경륜을 쌓은 진정한 프로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영화배우 시절 줄곧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도우며 악한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정의의 사나이 배역을 맡아 왔다. 이번에는 대통령으로서 빈곤퇴치,부정부패 일소를 외치면서 현실정치에서정의를 구현하고 있다.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취임 이후 비(非)아세안 국가로는 첫번째 공식 방문국으로 우리나라를 선택한 것은 우리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기대의 표시다. 올해는 양국이 수교한 지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우리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따뜻한 마음,열린 마음으로 환영하면서 한·필리핀 혈맹관계가 21세기에도 꾸준히 발전할 수있도록 기원해야겠다. 신성오/필리핀대사
  • [발언대] 병무비리 관련자 호국정신 되새겨야

    거지왕 김춘삼의 일대기를 다룬 TV드라마를 보았다.드라마 중에는 일제하에서 일본경관을 지내던 인물이 해방 이후 한국정부의 경찰서장으로 둔갑해 출세가도를 달리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의 혼란했던 시기에 역사의 평가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가치관의 정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음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서글펐다. 최근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설정,평화와 화해분위기 조성에 반대하는 북한내부 극좌세력의 적화통일 야욕을 현실감있게 묘사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도 최근 물의를 빚은 최장집교수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새로운 세기를 맞아 과거역사에대한 바른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 언론을 통해 자주 언급이 되듯이 대한민국 성년남자라면 기꺼이 수행해야 할 국방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저지르는 병무비리는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없는 운명탓에 2차대전 당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가 없어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 수백만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체험하였다.이를 교훈삼아 중동전쟁 당시 수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참전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온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미국은 자국군인이 외국에서 사망하면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현재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과거 국가가 존망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분연히 나서 본인과 가족들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조국수호의 전선에 뛰어든 분들의 희생과 공헌 위에 세워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올해도 어김없이 6월은 왔다.전쟁 중에 나라의 안위를 위해 몸바친 분들을 기리는 날인 현충일이 들어있는 달이다.지금이라도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뜻을 새롭게 기려야 하지 않을까. 권옥선 [서울 강북구 수유동]
  • 金대통령 간담회 초청 받은 5人 ‘화제’

    모스크바 유민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러시아 방문기간 중 대한매일과 인연이 깊은 러시아 한반도전문가 5명 모두가 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화제다. 김 대통령은 오는 29일 각계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를 골라 ‘오찬간담’을갖는데 이 자리에 참석하는 러시아측 인사가 모두 본사와 인연을 맺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비탈리 이그나텐코 이타르 타스통신사장을 비롯,아나톨리 토르쿠노프 국제관계대학총장(MGIMO),미하일 티타렌코 극동문제연구소장,블라딜렌 마르티노프 국제경제·국제관계연구소장(IMMEMO),예브게니 바자노프 외교아카데미부원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바자노프 부원장은 지난10년 동안 본사의 ‘지구촌 칼럼리스트’로 이름을 날린 명문장가.지난 73년 구소련의 샌프란시스코영사 시절 김대통령의 연설에 매료됐고 김 대통령의 박사학위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김대통령과의 인연이 두텁다.부인 나탈리아 바자노바도 아태평화재단의 도움으로 최근 ‘한국전쟁의 전말’이란 한국어판 단행본을 내는 등 두 부부가 ‘한반도통’이다. 티타렌코 극동문제연구소장도 한때 본사의 ‘지구촌 칼럼리스트’ 필진이었던 인물.우리나라 국제정치학회 해외자문위원직도 맡고 있으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해 많은 논문을 남긴 사람이다. 토르쿠노프 국제관계대학총장은 ‘서울신문(대한매일의 전신) 50주년 기념행사’에 러시아쪽을 대표해 기념메시지를 보내준 인물.당시 그는 “러시아와 한국의 가교역할을 충실히 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며 본사의 무궁한 발전을 축원해줬다. 이그나텐코 이타르 타스통신사장은 뭐라 할 것없이 친한(親韓)인사로 분류되는 한반도전문가.김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직전 한국을 찾아 강연도 하고대한매일 본사도 방문했었다. 블라딜렌 마르티노프 IMMEMO소장은 한반도 중요문제를 분석할 때마다 본사에 좋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다. rm0609@
  • 주한 외국대사에 듣는다-퍼거슨 뉴질랜드 대사

    로이 퍼거슨 뉴질랜드 대사는 22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뉴질랜드 두나라간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을 강화하는데 힘쓰겠다고 말했다.지난 달29일 신임장을 받은 퍼거슨 대사는 “최근 발효된 양국의 워킹 홀리데이 비자협정 등은 민간교류활성화의 촉진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신임 대사로서 포부를 밝히신다면. 한국은 사실 첫 부임지입니다.뉴질랜드와 오래 전부터 성숙된 외교관계를맺고 있는 한국에서 첫 대사임무를 수행하게돼 무척 기쁩니다.한국전쟁 이후 양국은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등에서긴밀한 협력을 해오고 있습니다.양국 이해 증진을 위한 인적 교류가 더욱 왕성해지도록 힘쓰겠습니다. 우호관계 발전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들이 있을까요. 지난 달 체결된 워킹 홀리데이 비자협정은 상당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아직 아이디어 수준이긴 하나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시티와 자매결연 도시인 송파구간 문화그룹 교환을 할 수도 있겠고 한국전쟁 50주년인 내년엔 뉴질랜드 문화 단체의 교류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럴드 맥기 전임 대사께서는 지하철 타기를 권유하는 공익광고에도 출연,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비슷한 활동을 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맥기 대사 부부는 환경 보호 차원에서 광고에 출연하신 것으로 압니다.물론 지지합니다.그러나 제게 그같은 공익 광고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뉴질랜드는 올해 APEC 순번 의장국으로 9월 열릴 APEC정상회담 준비에 분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PEC은 뉴질랜드가 주최하는 행사 중 최대 규모의 국제행사입니다.정부는 APEC 태스크 포스를 구성,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뉴질랜드 제니 쉬플리 총리의 정상회담도 열린텐데요. 먼저 뉴질랜드가 항상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한반도 상황이 논의될 것 같습니다.뉴질랜드는 한국 김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을 지지합니다.또 한·뉴질랜드 관계 발전도 회담의 포커스가 될 것입니다. 뉴질랜드는 한국 학생들이 선호하는 유학지의 하나입니다.한국 학생들을유치하기 위한 장학금 제도 등 혜택은 없을까요. 뉴질랜드는 정부는 특정 국가 학생들에게,재정 지원을 하는 등의 혜택은 부여하지 않고 있지요.질높은 교육과 쾌적한 생활 환경,특히 미국 달러에 비해 싼 뉴질랜드 달러의 환율이 충분한 인세티브가 아닐까 합니다. 워킹홀리데이 교환 프로그램 협정이 지난 달 체결됐습니다.어떻게 발전될것이라고 보십니까. 아직은 걸음마 단계입니다.지난 10일 접수마감을 했는데 호응이 아주 좋았습니다.인원은 200명에 한정돼 있지만 이 제도 실시가 갖는 의미는 무한하다고 봅니다.뉴질랜드 학생들의 한국행 신청현황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최근 70여개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등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만큼 점점 더 많은 뉴질랜드 젊은이들이 한국을 찾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난 95년 이후 뉴질랜드 이민법 강화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계의 이민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이민법이 변화될 여지는 없는지요. 지난해 이민법이 다시 완화됐습니다.이민자격영어 시험 ‘IELTS’때 내야하는 예치금 제도도 폐지됐고 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이민 후 어학연수를 받을것을 증명하는 서류만 갖추면 됩니다. 뉴질랜드는 정부 개혁의 모범사례로 손꼽히는 나라입니다.공무원들의 반발도 만만찮았을텐데요. 뉴질랜드의 정부개혁을 설명하는 것은 뿌듯한 일입니다.공공부문 개혁에 들어간 84년 당시는 경제위기 와중이었습니다.물론 공무원들의 감축으로 반발이 거셌지만 정부부처뿐 아니라 산업분야 등 다른 부문들도 함께 가혹한 구조개혁의 희생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그러나결국 ‘고효율의 작은 정부’는 국민들의 세금 감축,고품질의 공공 서비스로 돌아가 국민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기고] 로마 韓人음악도들의 對北메시지

    새천년 희망의 장정(長程)을 목전에 두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참극이이곳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다.공포에 질리고 굶주림에 지친 코소보 난민의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그들이 전하는 살육과 파괴의 증언에 전율을 금할수 없다.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은 반세기 전의 우리 자화상이기도 하다.한국전쟁시참혹한 경험을 한 우리에게는 남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어려움을 나누는미덕이 있다.재해를 당한 이웃에 전하는 온정은 이제 우리의 문화이며 저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5월15일 로마에서 활동중인 우리의 젊은 음악인들이 세계식량계획(WFP) 본부에서 코소보 난민 지원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가졌다.WFP와 한국대사관이 공동 주최해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토대로 푸치니가 작곡한 ‘잔니 스키키’를 공연하였다.인습과 낡은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조소,새시대를 향한 인간의 갈망이 주제였다.공연이 끝난 후의 오랜 기립박수는 관객이 받은 감동의 깊이를 나타낸 것으로서 그만큼 보람도 컸다.이번 행사는 그동안각국으로부터 기여금을 받아 긴급식량을 지원해 온 WFP가 처음으로 자체적으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주선한 행사라는 의미도 있었다. WFP는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모토로 1961년 유엔총회 결의를 통해 창설됐다.이후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개도국을 도왔으며 60년대 전반까지 우리나라도 수혜자였다.북한은 95년 홍수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해 기아의 위기에몰리자 국제사회에 긴급지원을 호소했다.이에 따라 WFP는 95년 9월부터 금년 3월까지 4차에 걸쳐 곡물 102만톤(3억700만달러 상당)을 북한에 제공했다. 우리는 이중 3,300만달러 정도를 WFP를 통해 북한에 지원했다.로마에는 WFP외에 주로 세계식량안보를 위한 농업기술 지원 및 정책조언을 하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개도국의 농업개발사업을 지원하는 목적의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이 있다. 북한은 이들 유엔기구를 통해 이루어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최악의 위기는 면했으나 아직 식량이 부족하며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북한의 식량난은 자연재해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북한의 농업정책,농업의 구조적 취약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오늘의 북한은 단순한 식량원조를 넘어 ‘식량의 증산을 위한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나 북한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조짐이 있다. 부분적으로 개별농가의 자영농업을 허용하고 농수산물 유통경로로 농민시장활성화도 묵인하고 있다.선진국으로부터의 농업기술 도입을 모색하고 있으며 관련 유엔 농업기구로부터 기술 및 개발사업의 지원도 받고 있다.문제는 우리의 적극적인 협조의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남북간의 직접협력을 기피하는 점이다.북한의 변화가 기대되는 부분인 동시에 그때까지 우리가 ‘길을 돌아’ 목적지로 향하는 지혜를 강구해 볼 대목이기도 하다. 냉전이 끝난 후 세계는 정치적,이념적 대립의 유산을 청산하고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유럽은 단일통화를 출범시키고 완전한 통합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아직도 ‘역사의 유물’로 전락한 냉전의 볼모가 되어 우리에게 아까운 시간과 노력의 소모를 강요하고 있다.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는 북한이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야 가능하다.남북한이 하루빨리 협력하고 공존 공영하는 것만이 한민족이 세계의 조류에 뒤지지 않고 그 중심에 서는 길이다.대북 포용정책의 진의도 바로여기에 있다.북한의 화답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700년 전 피렌체의 무대를 빌린 한인 음악도들의 ‘잔니 스키키’ 공연은잘못된 현실을 박차고 새 시대를 열자는 북한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鄭泰翼 駐이탈리아 대사]
  • [대한광장] 밀레니엄 유감

    요사이 시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밀레니엄(millenium)’이다.정부는 ‘새천년준비위원회’를 만들어 국가 천년대계의 비전을 설계하고,각 지방자치단체도 적지 않은 예산으로 다채로운 행사와 사업을 준비하고있다. 그런데 최근 밀레니엄이 상업성과 결합해 이벤트 중심으로 흐르는 조짐이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관(官)은 비슷비슷한 일회성 행사에 귀한 예산을 중복투자하고,민간에는 ‘밀레니엄 베이비’라는 웃지 못할 기념아(記念兒) 경쟁까지 일어나고 있다.그야말로 1000년이란 문명적 엄숙함은 역설적이게도 1년,아니 순간을 위한 상업성 이벤트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업성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새천년을 맞이하는 철학의 문제이다.1세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1900년 1월1일자 세계 주요신문에는 과학과 문명을 근거로 20세기에 대한 찬미와 낙관적 전망이 줄을 이었다.그리하여 스탠퍼드대학의 조단 총장은 ‘20세기에의 초대’에서 “20세기인(人)은 희망인”이라규정하고 “그는 세계를,세계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세계대전이 일어났고,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일본의 군국주의와 2차세계대전,그리고 긴 냉전이 뒤따랐다.즉 20세기 서양의 현실은 ‘끔찍한 세기’ 또는 ‘극단의 시기’였다. 동양과 아시아의 20세기는 더욱 처참했다.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미국과 베트남 전쟁,중국과 베트남 전쟁,캄푸치아와 베트남 전쟁,이란과 이라크 전쟁,쿠웨이트·미국과 이라크 전쟁,구 소련 중앙아시아 여러나라의 민족분규,최근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 등 많은 전쟁과 수난이줄을 이었다.특히 한반도에는 일본의 한국 병탄과 잔악한 식민통치,미·소에 의한 분단과 한국전쟁,남북의 냉전 등,다른 어떤 곳보다 잔인하였다. IMF사태 전까지만 해도 21세기에 대한 전망은 20세기보다 더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러한 진단은 한편으로는 정보통신혁명 등 생산력의 확장,냉전체제의 해소와 자유주의의 승리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등에 기인한 것이지만,다른 한편으로는 현재가 단지 세기적인 전환이 아니라 그 10배인 밀레니엄이라는 마술 때문이기도 하다. 밀레니엄은 흔히 새 것에 대한 찬미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거느리고 다닌다.그러나 묵은 현실을 갈아 엎지 않는 한 미래는 새 것이 되지 않는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바로 묵은 현실의 과제,즉 1~2년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세기를 넘기면서까지 여전한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새 것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 모태인 현실의 역사적 과제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면,그것은 범죄행위요 사기행각이다. 아마도 21세기 한반도에선 20세기에 당면한 과제들이 여전한 화두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분단과 통일,민주주의의 확대,주변 4강과 한반도 문제 등이여전히 중요한 개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아니 새천년을 여는 21세기 처음10년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역동적으로 표면화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19세기말,그리고 불과 몇년 전,미래에 대한 부박(浮薄)한 기대가 바로 미래에의 몽매를 불러일으켰음을 직시하자. 2세기 전에 태어난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슈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노여워하지 말라’고 노래했다.‘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이기에.그가 노래하고자 한 것은 미래에 대한 부박한 기대가 아니다.아마도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중력(重力)은 없다는 것,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낙관의 신념으로 현실을 개조하자는 것이다.그가 차르(Tsar)를 타도하려는 혁명가 데카브리스트(Dekabrist)였듯이. [都珍淳 창원대 교수·한국사]
  • [金三雄칼럼] 북한, 白凡자료 협력을

    백범(白凡)김구(金九)선생 사후 50년만에 남북한의 추모행사 관련 논의는만시지탄이지만 퍽 다행한 일이다.북한이 지난달 30일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를 통해 평양에서 ‘김구선생 회고모임’을 갖자고 제의한 것을 한국의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는 7일 김구선생 추모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자고 수정제의했다. 이수성(李壽成)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장은 백범의 묘소와 유가족,비서진 대부분이 생존한 서울에서 추모모임을 갖는 것이 고유의 전통으로 봐도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수정제의 배경을 밝혔다. 우리는 민족 지도자 백범 50주기를 앞두고 남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을 높이평가하면서 양측이 민족지도자를 추앙하는 대승적 입장으로 기일인 6월26일에는 반드시 성사되기를 바란다.아울러 북한당국에 한가지 협력을 제의하고자 한다.다름아닌 백범 관련자료다. 대한매일신보사는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와 함께 백범전집 출간을 준비중이다.국내 자료는 물론 중국·대만·미국·일본에 산일되고 묻혀있는 각종 자료를수집하여 12권짜리 전집을 발간한다. 그동안 남북한에서는 친일파들을 포함하여 각급 인사들의 각종 전집이 출간되었다.반면에 젊어서는 반봉건·반외세투쟁,청장년 시절에는 항일독립전쟁,노후에는 통일정부수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비명에 가신 20세기 한민족의 대표적 지도자요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백범의 전집이 아직까지 발간되지 못한것은 남북한이 함께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연유에서 백범과 연고가 각별한 대한매일신보사가 전집을 준비중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백범전집은 실국(失國)시대와 독립운동과 해방과 분단과정에서 항상 의롭고 정도를 걸은 민족지도자의 삶의 궤적을 집대성하는 것은 물론 민족의 근현대 정신사를 정리하는 의미가 새롭다.따라서 이번에 편찬되는 전집에는 백범과 관련되는 모든 자료가 망라돼야 한다.그런데 임시정부와 관련된 많은 자료가 6·25한국전쟁 과정에서 분실되고 그 중 상당 부분이 북한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진다. 경위를 살펴보면 이렇다.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 임정문서의 책임자는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趙擎韓)선생이었다.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11월 중국 중경(重慶)으로부터 귀국할 때 큰 가죽가방 13개에 임시정부 문서와 임시의정원자료를 간추려 가지고 귀국했다.그 다음해까지는 경교장(백범자택)에 두었으나 정국이 불안해 관계자들의 집으로 자주 옮겼다고 한다.그러다가 임정비서처 서무위원회 용도과장이던 조남직(趙南稷)씨의 집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6·25 때 조씨가 납북되고 그의 부인이 문서들은 모두 타버리고 없다고 했지만,조경한 선생은 보관된 창고나 집에 불탄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전란통에 북한으로 옮겨졌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이 증언이 아니라도 북한에는 백범과 임정 관련의 상당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 터이다.북한 당국은 이 기회에 이들 자료(복사본이라도)를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넘겨서 전집발간에 협력했으면 싶다. 백범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라고 가르쳤다.오늘 남북한이 크게는 민족문제 해결에서 작게는 백범추모모임문제에있어서 이같은 정신으로 접근한다면 쉽게 풀리지 않을까 한다. 북쪽에서 태어나 제3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남쪽에서 숨진 인물,분단과정에서 그는 남쪽을 택했고 지금 효창원에 잠들어 계시다.그의 추모모임이 북쪽에서 열리면 어떻고 남쪽에서 개최되면 어떤가.장소가 타협이 안되면판문점에서 열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혹은 소급하여) 민족이 함께 존경하는 인물의 추모모임이 50주기에는 꼭 열려야 한다는 겨레의 소망이다.그에 앞서 북한당국이 백범의 자료를 보내주어 완결된 전집을 놓고 남북의 관계자들이 해주의 생가(터)와 서울 효창원 묘소를 교환 방문하면서 그를 추모하고 그의나라사랑 정신과 통일정부수립의 의지를 이었으면 한다. 50주기와 20세기가 저물기 전에.
  • [화제의 책]『두 아내』전2권 /정소성 지음

    조국의 분단문제에 주목해온 중진 소설가 정소성씨(단국대 교수)가 ‘두 아내’(전2권·도서출판 찬섬)란 장편소설을 냈다.개인사를 통해 전쟁의 아픔을 그리되 체제가 아니라 삶의 기본단위인 가족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주인공 철우는 아내를 북에 둔채 남에 정착한 지식인 출신의 사내.한국전쟁전 상머슴의 딸 가영과 결혼한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불가항력으로 남쪽에남게 되고,희애란 여자를 만나 재혼한다.희애는 옛날의 곁머슴이었던 떡쇠의 딸.철우는 떡쇠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으나 갈수록 북의 아내를 잊지 못한다.두 아내를 지켜야 하는 철우는 결국 두만강을 통해 남과북을 오가게 된다.일종의 상황비극인 셈이다. 작가는 전쟁의 처참함과 개인의 의지로 살 수 없는 사회의 혼란상을 특유의 탄탄한 문체로 속속들이 그려낸다.작가는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억수같은 빗줄기를 맞으며 피난대열에 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쟁 당시를회고한다. [정소성 지음 도서출판 찬섬 각권 7,500원]김종면 기자
  • [역경을 딛고…]고대에 10억기증 崔丙順할머니 육필수기(1)

    평생 모은 재산 10억원을 고려대에 장학금으로 내놓은 최병순(崔丙順·84)할머니(대한매일 3일자 23면 보도).장학금 기증으로 ‘희망의 닻’을 내린감동 못지 않게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한다.할머니는 일제시대,광복 이후의 혼란기,한국전쟁,5·16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을 홀몸으로 견뎌냈다.부역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가난과 병마,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인내와 용기로 꿋꿋이 이겨낸 최할머니의 육필 원고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별안간 다리가 부러진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지난 세월이 떠올라 설움이 북받친다. 언제 뜰 지 모르는 세상,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이 몸에 소망이 무언가…,소망의 닻을 주리라’.즐겨 부르던 찬송가를 불러봤다.이제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유언 공증을 해야겠다.은행에 있는 돈과 집까지 모두 고려대학교에 내놓으려 한다. 가난과 병마,고통,불행으로 점철된 내 삶의 이야기도 함께 적는다. 지나온 날들은 밤과 같은 세월이었다.하루하루가 생존과의전쟁이었다. 어려서부터 찾아온 병마,손을 쓸 수 없었던 가난,젊은 세월을 옥죄던 봉건적 가족제,전쟁과 이념에 희생돼 치렀던 10년간의 옥살이….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병으로 죽어갈 때도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버텨냈다.‘빨갱이’라는 낙인에 등을 돌린 세상.이를 악물고 버텨왔다.식모살이,품팔이,행상,창녀촌 빨랫일,보모,극장 암표상 등 안해본 일이 없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운명이 또 있을까.인생의 행복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살아온 한 생.이제는 자식없는 설움과 고독만이 남았다. 나는 1915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에서 났다.할아버지와 아버지,어머니,삼촌,오빠,그리고 나 6식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5살 때였다.갑자기 목에 조그만 혹이 생기기 시작했다.불행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이른바 ‘연주창’이라는 것이었다.혹은 계속 커져만 갔다.고개를 가눌 수가 없었다.여름이 되니 열이 나고 곪아터져 고름이 나왔다.촌구석에 살다보니 고칠 수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혹은 눈으로,가슴으로,겨드랑이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병은 깊어지고 있는데 7살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가눌 시간도 없었다.곧바로 부뚜막 일을 시작했다.농사일도 거들어야 했다.학교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 때는 15∼17세면 결혼을 했다.그러나 나는 시집을 갈 수도 없었다. 병마에 시달린 지 14년.하늘의 은혜가 내렸다.18세되던 해 마을을 지나던한 노인이 집에 찾아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했다.자신을 ‘돌팔이 의원’이라고 소개한 이 노인은 맥을 짚어보더니 치유를 장담했다.하얀 가루를 솜에 뿌려 환부에 대고 불을 붙이니 고름이 쏟아졌다.몸에서 불이 나는 듯 했다.환부 이곳저곳에 여러차례 하니 고름이 모두 빠지면서 혹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내가 낫기를 기다렸다는 듯 19세 나던 해 근처의 마을로 나를 시집보냈다.고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엄청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남편은 노름과 술에 찌들어있던 사람이었다.집안 일을 돌보지 않고 나가서만 살았다.시댁에서는 남편이 해야할일을 나에게 강요했다.시댁은 많지 않은 논과 주변의 텃밭으로 근근이 생활했다.농사일과 막내 며느리로서의 집안일은 모두 내가 해야 했다. 시댁에서는 동짓달에도 방에 불을 때주지도 않아 늘 냉방에서 자야 했다.텃밭을 일구고 거름을 져 나르고,식사준비에서부터 설거지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잠시도 쉴틈이 없었다.
  • 한국 근-현대사 정리 앞장 선 방선주-양기백박사 서훈 추진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료·문헌발굴과 정리에 평생을 바쳐온 재미 사학자방선주(方善柱·65)박사와 미 의회도서관 동양부 부장을 지낸 양기백(梁基伯·78)박사에게 정부의 서훈을 추진하는 운동이 관련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일고 있다. 건국대 신복룡(정치학과)교수는 “방박사는 한동안 금기사항으로 있던 현대사분야의 자료발굴로 현대사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분이며,양박사는 미국내에서 한국관련 자료수집의 최대공로자”라며 “근.현대사 전공자를 중심으로 두 분이 한국관련 사료발굴·정리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정부의서훈을 건의키로 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움직임은 4월초 국가기록연구원(원장 김학준·인천대 총장) 발족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이 단체는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제정을 계기로 공공기록물의 효율적인 수집·관리·보존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현재 연구원측은 신교수 등과 공동으로 방·양 두 박사에 대한 공적 조서등 구비서류 준비를 마치는 대로 과당국에 서훈 신청을 할 계획이다. 49년 미국 정부의 주선으로 도미한 양박사는 6·25전쟁으로 귀국치 못하고이듬해 8월 미국 의회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방박사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등 미국 내 한국관련 자료발굴의 ‘1등공로자’로 꼽힌다.그동안 방박사는 한국근·현대사 자료 100만 점 이상을발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미국군정·한국전쟁 관련 자료는 이 분야 연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방박사가 발굴한 자료중일부는 방박사가 객원교수로 있는 한림대 등에서 자료집으로 출간됐다.최근임정80주년기념 학술대회 참가차 귀국했던 방박사는 백범암살 관련 미공개자료를 입수,본사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제공한 바 있다.두 사람은 현재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南北정상회담 2년내 가능할것”

    전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는 29일 “1∼2년 내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당총비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재단 대표로 활동중인 퀴노네스 박사는 이날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한국기독언론인모임(총무 鄭逸和)에 참석,“한국의 상황이 좋아지고 있는 만큼 북한이 한국에 대화를 제의,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같이 전망했다. 퀴노네스 박사는 또 “현재 매월 미군 20명이 교대로 북한에 들어가고 나오는 방식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이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다”며 “96년 시작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은 올해 6차례 실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구본영기자 kby7@
  • [기고] 2공화국의 민주주의와 통일문제

    민주당정부 등장직후부터 통일문제는 국가의 근본 존재를 민감하게 건드리면서 전체 사회를 예리하게 가르기 시작했다.한국사회에서 통일은 가장 기저(基底)에 해당하는 문제라 즉각 드러나지는 않으나 일단 드러나면 폭발성을갖는다.게다가 논쟁에 북한이 개입하자 갈등은 증폭할 수 밖에 없었다. 1960년 당시 북한의 대남인식은,남북한 국력차를 반영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4·19직후 북한은 남한정부의 통치능력을 전면 부인,임시정부를 구성하라는 비현실적인 요구를 제기했다.남한경제의 피폐상을 언급하며 남한의 경제정책 수립에 직접 개입하려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다.물론 교류협력,주한미군철수,연방제 역시 강도높게 주장했다. 정치·시민사회의 통일논의,연속적인 북한의 제의 및 그들과 시민사회의 직접적인 의견교환에 대해 정부당국은 공적인 통제기능을 행사하지 못했다.특히 독재타도라는 ‘민주주의 문제’에서 인식이 일치돼 ‘정권형성연합’을이룬 민주당과 사회세력·학생은 ‘통일문제’를 놓고는 정면대립하는 관계로 돌아섰다.정권형성연합의 재빠른 해체는 민주당정부 붕괴의 핵심요인이되었다. 민주당 정부의 수세적 위상은 남한의 국력이 북한보다 열세인 데서 오는 구조적 문제였다.북한의 통일제안은 휴전선 너머에서 그치지 않고 남한내부의논쟁에 깊숙이 들어왔다.급진 통일론은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인정,공산세력과의 연립추구,미국 안보우산의 거부,자유민주주의 지양을 담았다는 점 때문에 분단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에게는 북한 주장에 접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5·16군사쿠데타의 첫번째 명분이 ‘반공 국시’라는 점은 민족문제에의 대처가 민주정부를 타도한 논리적 근거가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시민사회에서 다양하게 표출된 통일논의가 이념대결 양상을 띠어가며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고,정부가 민주적 방식으로는 이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임이 드러난 시점에서 제2공화국은 붕괴된 것이다.냉전의 절정에서 등장한제2공화국은 통일문제가 다른 문제를 압도하자 이니셔티브를 상실한 채 그속에 함몰해 버렸다. 그러나 제2공화국이 통일문제 해결에 실패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세계 냉전구조의 온존,미국의 제3세계 정책과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다.세계적인 냉전체제가 해소되지 않고는 주변부 국가가 냉전질서를 해체하기 불가능하다는 점을 제2공화국 사례는 보여준다.전방 반공초소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의지 역시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와 평화 진전에 대한 관심을 압도했다.최근 공개된자료에 따를 때 미국은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 움직임을 한달 전에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정부와 박정희 양쪽에게 어떤 적극적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제2공화국의 공식적인 통일정책에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북진통일론이 소멸되고 통일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악습이 사라진 것만도 민주화 때문에 가능했다. 국가형성 과정,한국전쟁,그리고 냉전질서에 따른 전초기지로서의 위치 때문에 남한정부는 통일문제에서 선택폭을 제한받을 수 밖에 없었다.분단국가의기본적인 제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극우적인 것만큼이나 급진파들의 통일논의 역시 냉전과 분단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적인 주장이었다.통일지상주의는 단순히 정부정책을 변경하는 수준이 아니라 분단정부와 질서의 근본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이다.분단국가에서 혁명을 이루어도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전에 체제의 수용 범위를 넘어선 급진적 민족주의를 제기하는 것은 민주화 자체를되돌릴 수 있음을 장면정부 붕괴 과정은 보여준다. [朴明林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실장]
  • 이장호 감독 월드컵 영화 3편 제작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한 영화시리즈 3부작이 제작된다.영화감독 겸 판 엔터프라이즈사의 대표인 이장호 감독은 19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부터 2002년까지 ‘히아신스’‘붉은 악마’‘허그(HUG)’등 월드컵소재 영화 3편을 잇달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95년 ‘천재선언’이후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했던 이 감독이 야심차게 기획한 이 시리즈는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마련된 대형프로젝트.이 감독에 따르면 1부 ‘히아신스’는 한국전쟁 직후 첫 월드컵출전을 배경으로 전쟁속의 희망과 축구속의형제애를 보여주게 된다.내년 1월1일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2부 ‘붉은 악마’는 한일응원단을 소재로 양국의 자존심을 건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양국 젊은이의 투지와 우정을 그린 영화.한·일 공동제작을 구상하고 있다.3부 ‘허그’는 남북단일팀 구성이라는 민족의 희망을 반영한 작품으로 남·북한과 일본 3국이 함께 작업할 계획이다. 이 감독은 “국내 최초의축구영화,연속 기획영화로 2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쳤다”며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美 ‘한국戰 추모행사’ 어떻게/’자유수호’의미 재평가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 행정부가 내년부터 2003년까지 3년 동안 한국전쟁을 대대적으로 추념하기로 한 이유는 전쟁 이후 한국의 눈부신 발전이자유수호라는 미국의 참전이유와 그 타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흔치 않은사례로 재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 내에서 한국전은 패전한 베트남전에 가려 제대로 되돌아봐지지 않았다.이 때문에 작가 리처드 콘라드 스타인은 94년 한국전에 관한 책을내면서 제목을 ‘한국전쟁-잊혀진 전쟁’이라고 쓰기까지 했다. 이 책이 나온 뒤 한국전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고 95년에는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뜰,베트남전쟁 기념조형물을 마주한 곳에 한국전쟁 기념조형물이 생겨났다.이어 마침내 전쟁발발 50주년을 맞으면서 미 행정부가내년부터 3년 동안 갖가지 한국전쟁상황과 시간대를 맞춰 전국적인 추념행사를 갖기로 한 것이다.인천상륙작전일,피의능선 전투일,흥남 철수일,서울수복 기념일 등이 차례로 미국과 한국에서 함께 기억된다. 미국 내에서 한 전쟁이 이처럼 대대적으로 추념되는 경우는 미국민들에게커다란 상처를 남긴 남북전쟁 외에는 사례가 없다.그만큼 한국전쟁은 참전의 가치와 의미가 큰 전쟁으로 와닿은 것이다.당시 갓 태어난 차량 지프와 제트전투기 등 갖가지 신종병기가 사용됐고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국제사회에강대국 면모를 과시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또한 3만3,000명의 미군을 포함,유엔군 9만명의 희생이라는 값진 의미도 있다. 특히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남의 일에 피흘릴 필요가 없다는 개인주의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정부가 추념행사를 통해 대대적인 주의환기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미 행정부는 또 행정단위마다 한국전쟁에 관한 일화나 참전용사 무용담을적극 개발,전국규모 행사 이외에도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전시회나 기념사업을 펴는 것을 비롯,기념비를 세우거나 기념장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를 위해 미 행정부는 또 백악관과 국가안보회의를 비롯한 각 행정부처의관리들로 이뤄지는 ‘한국전쟁추념위원회’를 구성,모든 일정과 계획을 종합관리해 나갈 방침이다.
  • 美, 한국戰 대대적 추념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잊혀진 전쟁’으로 간과돼온 한국전쟁이 발발 50주년을 맞아 미국민에게 20세기 역사의 교훈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된다. 미 행정부는 19일 6·25전쟁 발발 50주년이 되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 3년동안 한국전쟁의 발발서부터 휴전협정까지 시간대별 상황에 맞춰 추념식을 거행하는 등 전국 규모의 행사계획을 확정했다. 또 한국어가 쓰인 기념휘장과 로고도 확정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백악관과 국가안보회의는 또 한국전쟁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나 영웅담을 적극 발굴,전후세대를 대상으로 자유수호 가치 등을 교육시키는 자료로 활용키로 했다. 미국정부가 이같이 대대적인 한국전쟁추념 계획을 세운 것은 미국이 상당량의 인원과 물자를 투입,자유를 수호함으로써 한국이 마침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게 하는 등 의미가 큰 사건임에도 그동안 소홀히 다뤄져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따라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오는 5월31일 미현충일,7월4일 독립기념일,내년 2월14일 재향군인의날 등 각종 기념일과 각 군부대 창설기념일에 한국전 참전용사 및 관계자를 참석시켜 추념행사를 갖기로 했다. 이어 내년 6월1일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의 한국전쟁 추념식을 필두로 ▲6월25일 전쟁발발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2001년 8월18일 피의능선전투 ▲9월13일 단장의고개전투 등 전투추념 ▲2002년 6월25일 한국전세미나 ▲2003년 7월27일 휴전 등 한국전 주요상황에 따른 추념행사 등을 한국 현지와 미국에서 동시에 열기로 했다.
  • 고은著 ‘화가 이중섭’

    천재적인 화가 이중섭의 삶은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처럼 철저하게 비극적이었다.유럽은 고흐의 예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가난과 절망에 몰아넣어던 ‘죄의식’에서 ‘고흐 신화’를 만들었다.우리나라에도 가장 한국적인 화가중의 한 사람인 비운의 화가 ‘이중섭 신화’가 있다. 그 신화 속에 이중섭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지난 1월21일부터 3월9일까지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이중섭 유작전’에 9만명이나 몰려,그의 작품이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이중섭 열풍 속에 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책 ‘화가 이중섭’이 민음사에서 나왔다.어느 비극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삶을 살다 40세에 요절한 이중섭의 삶과 예술이 시인 고은의 탁월한 필치로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이 책은 지난 1973년 이중섭의 조카 이영진씨 등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고은씨가 쓴 최초의 이중섭 평전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를 일부 보완,다시출판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였던 1916년 평남 평원군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순수하고따듯한 영혼의 소유자였다.어린이 같은 그의 순수함은 현실의 삶을살아가는데 어떤 힘도 되지 못했지만 가난과 병마 속에 고달프게 살았던 삶의 흔적들과 화가로서의 열정과 좌절은 ‘신화’가 되어 남아 있다. 그는 한국전쟁을 피해 일본에 가 있던 일본인 부인 마사코(결혼후 이남덕으로 개명)와 아이들이 그리워 밤이면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혼자 대화를 했다.첫아들을 잃었을 때에는 한밤중에 일어나 아들이 먹을 천도를 그려 놓았다.수도육군병원에서 그의 거식증을 정신질환이라고 하자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입원환자의 모습을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렸다.그러나 한밤중에 일어나 자기 작품은 가짜라며 불태우고 예술을한답시고 세상을 속였다고 자학하기도 했다. 그는 1956년 9월6일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그의 시신은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병원 영안실에서 3일간 방치됐다.침대에는 그동안 밀렸던 18만원의 입원비 계산서가 붙어 있었다. 그의 잔인하게 찢겨진 생애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 곳은 1951년에 살았던서귀포였다.그는 그 곳에서 대표작 ‘황소’를 비롯 ‘서귀포가 보이는 풍경‘ 등을 남겼다.그러나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그나마 본격적인 작품보다는 우편엽서나 담배갑 속의 은박지 등에 그린 작품이 많다.서귀포에는 그가 머물렀던 초가가 단장되고 ‘이중섭거리’가 만들어져 있다. 이창순 기자 c
  • 金대통령, 해병대 50돌 축하메시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10일 해병대사령부에서 열린 해병대 창설 50주년 기념식에 축하메시지를 보내 “국민의 사랑과 존경 속에서 성장해야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믿음직한 해병이 돼달라”고 당부했다. 김대통령은 “우리 해병이 한국전쟁과 월남전,그리고 대간첩작전을 통해 쌓아올린 혁혁한 전공은 국민의 방패다운 자랑스러운 것”이라며 “그 고귀한희생에 경의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양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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