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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문학작품에서 한국은 ‘공기’ / 재미 소설가 이창래씨 방한

    “고향에 다시 와서 기쁩니다.세번째 소설 ‘어로프트(Aloft,‘하늘에 떠있는’이란 뜻)를 끝낸 뒤 한국전쟁 이후의 시대를 주제로 한 네번째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왔습니다.” 지난 1995년 소설 ‘네이티브 스피커’로 헤밍웨이재단상,펜문학상,아메리칸 북어워드 등을 수상하는 등 미국 문단의 주요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작가 이창래(38)씨가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 초청으로 모국을 찾았다.이씨는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대강당에서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소속의 문제’를 주제로 강연했다.그는 “나보고 한국 사람이냐 미국 사람이냐고 물을 때 곤혹스럽다.”며 “미국에 정착한 한인들이 이제까지는 돈 버는데 치중했지만 앞으로는 시민활동과 예술활동에 무게를 두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다음은 일문 일답. 세번째 소설을 소개해달라. -젊은 시절 한국 여성과 결혼한 60세 미국인의 가족 이야기다.나이든 주인공이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무엇을 후회하고 자식들에 다가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를 그렸다. 소설에서 아버지와 자식간의 갈등이 인종이 다르기 때문인가. -주인공이 아들과 딸이 혼혈이라는 표면적 이유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더 깊은 면에서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네번째 작품의 틀이 잡혔는지. -전직 미군 신부(神父)와 한국전쟁 때 전 가족이 죽은 젊은 한국 여성,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여성 등을 등장시켜 미국과 유럽,한국을 무대로 한 전쟁 이야기와 전후 젊은이들이 새로운 국가와 인생을 지향하는 모습을 다룰 생각이다.많은 미군이 참전해 죽었음에도 한국전은 미국 소설에서 잘 다루지 않아서 깊게 관찰하고 싶었다. 프린스턴 대학(인문학 창작과정)교수로 일하며 느낀 점은. -토니 모리슨,조이스 캐롤 오츠 등 이전에 팬으로 좋아하던 작가들과 동료로 일하게 돼 너무 기쁘다.뉴욕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프린스턴은 작지만 재미있는 도시다.물리·정치·사회학 등 다방면의 유능한 사람들이 많고 토론이 잦아 ‘지적 공동체’ 같다. ‘한국계’라는 수식어가 문학성을 가리는 게 아닌가. -많은 한국사람이 이창래가 무슨 작품을 썼는지보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데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비록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제 작품이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그렇지만 내 작품에서 한국은 ‘공기’처럼 영원할 것이다. 글 이종수기자 vielee@ 사진 안주영기자 jya@
  • [이경형 칼럼] ‘워싱턴 코드’ 맞추기

    방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2박3일간의 뉴욕 일정을 마치고 마침내 어제 워싱턴에 입성했다.노 대통령은 15일 부시 미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연일 미국의 환심을 사려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노 대통령은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주최한 연설에서 “53년 전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한국전쟁 때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북한의 승리로 끝났을 터이고,자신은 공산체제에 저항하는 정치범이 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만났을 때는 그가 유엔 주도의 대북 장기 개발계획에 한국이 적극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자 “미국과 이 문제를 조율한 뒤 결정하겠다.”며 답변을 유보했다.이에 앞서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 만나면 “주한 미 2사단은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고 한국 안보가 안도할 수 있을 때까지 현재의 위치에 머물도록 ‘간곡하게’ 부탁할 것”이라고도 했다.또 “북한 핵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북핵을 ‘제거’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미의 목표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노 대통령 발언들은 방미 전까지만 해도 우리 귀에는 생경한 내용들이었다.이 같은 언급들은 자신에 대한 미국내 비우호적인 시각을 완화하고,워싱턴 일각의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되지만 왠지 안타깝게 느껴진다.듣는 이에 따라서는 노 대통령의 코드가 갑자기 ‘원조 보수’로 바뀐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여길 지경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주한미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수시로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물론 자주국방을 강조한다고 해서 미 2사단의 현 위치 주둔 요청과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유엔의 대북 지원 협조에 즉답을 안 했다고 해서 앞으로 대북 비료,쌀 등 인도적 지원까지 일절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이 북한의 핵 보유 시인 및 한반도 비핵화선언 폐기 주장 이후 전개되는 새 국면에서 기존의 입장을 재정리하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미국의 이라크전 승리 이후 한·미 동맹관계의 재확인을 바탕으로 대북 공조를 조율하자는 참에 부시 미 대통령과 대북 인식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그래서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의 ‘방미 코드’가 지금까지의 ‘원칙 강조’에서 ‘외교적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것이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때 맞춰 미국 언론들은 연일 후세인처럼 북한 지도부를 표적으로 하는 정밀 타격방안이 대북 억지력이 될 수 있다는 둥,영변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방안이 선택될 수 있다는 둥 미국내 매파들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대북 강경 대응방식을 보도하고 있다.마치 서로 짜고 ‘노 대통령의 입지’를 압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더라도 노 대통령의 언급들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인식을 ‘워싱턴의 코드’에 맞추기 위해 너무 낮은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노 대통령의 진정한 경쟁력은 ‘한국의 당당한 젊은 리더십’에 있지 결코 ‘놀라운 변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시 미 행정부와 미국의조야도 야생마 같은 한국의 새 지도자에 대해 미심쩍음과 함께 긴장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그런데 워싱턴에 들어오기 전부터 ‘너무 길들여진 순한 양’으로 비친다면 과연 외교적 실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어떤 화술을 동원하든 한반도에 전쟁만은 피하도록 하자는 노 대통령의 진심이 백악관에서 큰 공감으로 울려퍼지기를 기대해 본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美 참전 안했다면 난 수용소에”/ 이념·성향 의구심 불식 盧대통령 워싱턴 도착

    |뉴욕·워싱턴 곽태헌특파원|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앞으로의 성공을 위해서도 미국의 도움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12일 저녁(한국시간 13일 아침) 미국 내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인사들의 모임인 코리아소사이어티(회장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가 뉴욕 피에르호텔에서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국을 어느 곳보다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들어나갈 것이며,내국기업과 외국기업을 차별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미국의 도움을 당부했다. ▶관련기사 5면 ●“국내외 기업 차별 않을것” 노 대통령은 “여러 차례 같은 약속을 반복해도 아직도 저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그래서 다시 이 자리에서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만약 53년 전 (한국전쟁 때)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이념이나 성향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북핵 국제기구 검증 필요”” 노 대통령은 앞서 숙소인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에서 뉴욕 금융계 및 재계 주요 인사를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갖고 “남북관계의 전망은 핵문제에 달려있다.”고 전제,“북한핵의 완전 포기와 기존 핵물질에 대한 완전 폐기,이에 대한 국제기구의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 지원과 관련해 인도적인 지원문제는 당연히 우리나라도 동참할 것이지만 유엔의 북에 대한 장기개발계획에 대해서는 현재 북·미간에 북핵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미국과도 사전조율해 결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13일 오전(한국시간 13일 밤)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을 떠나 워싱턴 앤드루스공군기지에 도착했다. tiger@
  • 클로즈업/ ‘맥아더와 한국전쟁’ 재조명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정전협정 50주년을 맞아 맥아더 장군의 실상과 한국전쟁을 재해석하는 ‘맥아더와 한국전쟁’(오후 11시30분)편을 11일·18일 2주에 걸쳐 방송한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은 한국전쟁사에서 논란의 인물이다.인천상륙작전은 중요한 공헌으로 꼽히지만,한편으론 한반도내의 제한전을 주장하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도전해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하고,원자폭탄의 사용을 계획하는 등 전쟁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제작진은 섬너 맥아더 연설문 작성 담당,프랭크 색튼 극동사령부 보좌관 등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맥아더와 한국전쟁에 얽힌 진실을 파헤친다.또한 1950년 12월 맥아더가 26개의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구했다는 사실도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낸다.한편 지난 1월말 시작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5번째 시리즈는 이 프로그램으로 마무리된다. 이순녀기자 coral@
  • 편집자에게/ 6·25 양민학살 규명 균형감각 찾아야

    -‘한국전 정전50년 양민학살 재조명’기사(대한매일 5월6일자 12·13면)를 읽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됐지만 ‘양민학살’ 문제가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이 추진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도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대전 산내사건,경남 산청 외공리사건,전주형무소사건 등이 언론에 보도돼 특별법을 제정하고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최근의 보도들은 우익이 좌익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새로운 방향의 색깔논쟁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한국전쟁은 한 민족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민족적 비극이었다. 그러나 우익이 좌익을 처형한 문제점만 부각시키고 좌익이 우익을 살해한 사건은 묻혀버릴 경우 이데올로기의 혼돈을 가져온다.차제에 좌익인사가 우익인사들을 살해한 억울한 사건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언론은 양민학살사건을 편향된 시각으로만 보지 말고 좌익이 퇴각하면서 우익인사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도 재조명해 보도에 균형감각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차종윤 전라북도재향군인회 사무처장
  • 진상조사 보고서 내용 / “제주 4·3사건 인명피해 3만명”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4·3 진상조사 보고서’는 이 사건을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규정했다.보고서는 사건으로 2만 5000∼3만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기 때문에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특히 집단 인명피해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최종 책임이 있고,미 군정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관심을 모았다.다음은 보고서 내용 요약.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촉발 4·3사건은 광복 이후 급격한 인구 증가와 실직,생필품 부족,콜레라 발생,흉년 등의 악재 속에 47년 3·1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었다.3·1절 발포 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8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고,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 반경(反警) 활동과 ‘3·10총파업’을 벌였다.총파업은 관공서·민간기업 등 제주도내 전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 최초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4·3사건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고,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결국 1948년 4월3일 오전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인명피해 2만 5000∼3만명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 4028명이지만 미신고·미확인 희생자가 많을 것으로 추정돼 정확한 규모파악은 어렵다.위원회는 당시의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인명피해를 2만 5000명∼3만명으로 추정했다. 위원회는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지사가 밝힌 피해자 2만 7719명 등을 감안한 숫자지만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이 사건으로 전사한 군인은 180명,경찰은 140명 안팎으로 추정됐다. ●대량 희생의 최종 책임은 ‘이승만’ 48년 10월부터 49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전체 희생자의 80%가량의 희생자가 나왔다.이 기간에 작전을 지휘한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사건 등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해야 미국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 및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성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강경작전을 지시했다. ●미 군정 개입도 밝혀져 사건은 미 군정 아래에서 시작됐으며,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 자격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계속 보유했고,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했다. 중산간마을을 초토화한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했다.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송요찬 연대장의 활동상을 널리 알리도록 한국 정부에 요청한 기록도 있다. ●미완의 진상규명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전체 모습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위원회의 평가다.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거부,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게 위원회의 지적이다.보고서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서청원 “盧 개혁독재”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는 5일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좌우 편가르기를 통해 한국전쟁 이후 국론을 가장 크게 분열시키고 있다.”면서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개혁독재’라고 강력 비판했다. 서 대표는 기자간담회를 갖고 “민주화된 사회에서 언론을 자기중심적으로 멋대로 탄압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며,한나라당도 강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여권의 신당 창당 추진과 관련,“평민당,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등 김대중 전 대통령이 써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면서 “경제,안보,전교조 문제 치유 등에 국정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데도 총선용 신당을 만드는 것은 국민들로부터 공감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어 “권력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한나라당에서) 빼가는 일은 좌시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지운기자 jj@
  • 韓國戰 정전 50년 양민학살 재조명

    한국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났는데도 몸서리쳐지는 아픔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당시의 양민학살 현장에서 최근 유골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보상,명예회복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다. ■경남 산청 외공리사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는 3년 전부터 매년 4월5일 위령제가 열린다. 소정골에서 양민들이 학살됐다는 소문은 2000년 5월 14일 사실로 확인됐다.진주와 산청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앞장서 현장에서 250여구의 유골과 유품을 발굴했다. ●통비(通匪)로 몰린 마을주민 떼죽음 당시 발굴작업을 지켜본 참석자들은 설마하다 쏟아져 나오는 유골을 보며 치를 떨었다.굴삭기가 땅을 1m쯤 파내려가자 희생자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됐다.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도 다수 있었다.발굴단은 당초 6기의 무덤을 모두 발굴키로 했으나 1기에서 엄청난 유골이 나오자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발굴된 유골만 수습해 합장하고 작업을 중단했다. 발굴작업을 주도했던 ‘지리산 외공리 민간인학살 진상규명대책위원회’ 김영이 사무국장은 “뒤엉켜 있는 유골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면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유골이 나와 작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전 당시 거창·함양에서 양민들이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낮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밤에는 인공기를 꽂는 상황이었지만 국군들은 양민들을 통비(通匪)로 몰아 무차별 처형했다.당시 열한살이었던 강복석(63·진주시 상봉서동)씨도 “학살현장에서 2시간 정도 총소리가 들렸고,골짜기에서 나온 군인들이 삽과 곡괭이를 강물에 씻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이곳에서의 학살은 사건발생 10년만에 신문보도로 드러났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쿠데타로 다시 어둠속에 묻혔다. ●유골 쏟아져 작업중단 외공리 대책위는 누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난 3월 개혁당 김원웅 의원을 통해 국회에 청원도 했다.외공리 대책위 서봉석 실행위원장은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반인륜적인범죄”라며 “한국전이 끝난지 5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안됐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산청 이정규 기자 jeong@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사건 경북 경산시 평산동 폐(廢)코발트광산 인근 대원골에서 최근 한국전쟁 직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두개골·치아 등 25점의 유골과 신발밑창 등 다량의 유류품이 발견됐다.2000년 3월 폐쇄된 코발트광산 입구 및 갱도 속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형된 희생자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데 이은 것이다. ●70년대 초 정부가 갱도 입구 폐쇄 경산 폐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의 희생자는 35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들 대부분은 대구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건이 터진 것은 50년 8월 중순쯤.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북측에 가담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전국적으로 대량 학살이 저질러질 때였다. 학살은 군경이 이들을 폐광산 위 수직갱도 주변으로 끌고가 총살하거나 산 채로 수직갱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알려졌다.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김모(73)씨는 “사건 후 폐광산 주변 계곡에서 흘러 나온 물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악취도 심해 농사를 짓지 못할 지경이었다.”며 “그러다 70년대 초에 와서 정부가 갱입구를 시멘트나 흙,철망으로 막아 버렸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95년 평산동청년회 등이 중장비를 동원,광산 입구를 파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그러나 이후 5년여간 방치돼오다 ‘경산시민모임 민간인학살대책위(위원장 장명수·47)’가 구성되면서 본격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2000년 첫 확인… 본격 진상조사 경산시의회도 지난해 말 ‘경산 민간인학살 특별위원회’를 구성,학살현장 확인 등 조사활동을 벌인 뒤 관련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유족과 시민모임대책위는 2000년부터 매년 7월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경산유족회 이태준(66·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 공동대표는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문제를 제쳐 두고라도 50여년간 구천을 헤메고 있을 원혼을 달래려면 정부 차원의인도적인 진상규명과 유골 수습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경산 김상화기자 shkim@ ■대전 산내사건 대전 ‘산내학살사건’의 희생자는 7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제주 4·3사건 관련자 300명,여순반란 및 보도연맹사건 관련자 3000여명에다 민간인들도 상당수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이 터진 것은 1950년 7월 초에서 중순 사이.북한 인민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말에 군경이 대전 동구 산내동(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 계곡에 이들을 모아놓고 2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첫번째 학살은 7월4일부터 6일까지 사흘 동안 이뤄졌다.대전형무소 수감자 3000여명을 트럭으로 이곳에 실어온 뒤 총살했다.2차 학살은 17일 같은 곳에서 있었다.이 때 여성 등 민간인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美국립문서보관소 관련자료 나와 지난해 4월 발굴된 영국 데일리 워커지 앨런 위닝턴 기자의 증언록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는 “학살 직후 현장엔 6개 구덩이에 7000여명이 묻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그는 “인민군이 금강을 돌파하자 이날 새벽 남아 있던 대전형무소와 인근 교도소 정치범 등을 트럭 1대에 100명씩 모두 37대에 태워 옮긴 뒤 학살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의 관심으로 바깥에 알려졌다.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사건으로 군경에 의한 학살사건이 공론화되자 이 단체는 99년 10월 ‘산내학살사건 민간조사단’을 구성하고 진상조사에 나섰다.같은 해 12월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증거가 나왔다.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비밀문서가 해제된 뒤 탐라대 이도영 교수가 아버지를 잃은 4·3사건 관련자료를 뒤지다 이를 발견한 것이다. ●“최고 상층부서 지시” 기록 비밀문서에는 “사흘간 대전형무소 수감자 1800명이 산내에서 학살됐다.”며 “이는 최고 상층부의 지시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그러나 위닝턴 기자는 증언록에서 “미군의 지시로 일어난 학살사건 중 하나다.”고 밝혀 누구의 지시로 학살사건이 이뤄졌는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유가족과 대전참여연대는 2000년부터 매년 7월8일 희생자들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특별법청원 박재욱의원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이 추진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관심도 탄력을 받고 있다.개혁당 김원웅 의원 등이 발의한 법률안 2건이 계류돼 있고,경북 경산 등 전국적으로 15곳에 이르는 사건의 특별법 제정 청원이 24건이나 된다. 지난 해와 올해 두 차례 입법청원을 낸 한나라당 박재욱(사진·경북 경산·청도) 의원과의 일문일답. 청원서를 내게 된 배경은. -경산에 코발트 광산이 있었는데 6·25 직후에 3500명 가량이 갱도에서 처형됐다.규모로는 전국에서 제일 클 것이다.3∼4년 전부터 유족과 지역주민들의 제기로 진상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해 경산시의회 등에서 청원이 올라왔다.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이다.피해보상까지 해주면 좋지만 현재로선 기념식과 위령탑 건립을 바라고 있다. 사실 이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당시에는 법도 없었고 재판절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양민이 상당수 무고하게 희생됐을 것으로 본다. 최근 예결위에서도 정부의 지원을 요구했는데. -행정자치부는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서류나 증거물이 미비하다며 국회나 기타 신뢰성 있는 조사기관이 진상조사를 실시하면 정부 차원에서 적극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예산 문제다.조사가 시작되면 아마 전국적으로 피해 신고가 봇물처럼 올라올 것이다.일개 부처에서 손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국회 차원의 조사 활동은. -곧 시작할 것이다.공청회도 해야 한다. 박정경기자 olive@
  • 韓國戰정전 50년 양민학살 재조명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 가운데 제주 4·3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해서만 정부가 조치를 취하자 여기저기서 형평성 문제를 들면서 억울한 원혼을 달래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전국의 대표적 양민학살 현장을 다시 돌아보고,특별법 제정과 관련한 청원을 낸 국회의원과 정부의 입장을 알아본다. ■고양 금정굴사건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학살사건의 유족들은 지난달 1일부터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9·28수복직후 부역혐의자 연행 지난달 30일 농성장에 나온 희생자 유족회 서병규(68) 회장은 15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두 형을 금정굴에서 잃었다고 했다.서씨는 “정부와 정치권은 금정굴 학살 진상조사를 더 이상 미뤄선 안된다.”고 말했다. 1995년 9월 유족들은 자비와 시민단체가 모은 1300만원으로 금정굴 유해 발굴작업을 폈다.당시 발굴된 유골은 모두 153인으로 추정됐다.그중엔 여성 10여명과 어린이 유골도 1구 발굴됐다.금정굴 학살은 50년 9·28 수복 직후부터 그해 11월 초까지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경찰과 우익단체가 혐의자를 대거 연행,경찰서 창고에 가뒀다가 살해한 사건이다. 경기도의회는 99년 진상조사특위를 구성,금정굴 사건이 학살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경기도는 이에 따라 고양시에 유골의 추가 발굴과 위령사업을 추진하도록 통보했다. ●지하 15m 금광서 400여명 처형 고양시의회는 그러나 ‘금정굴위령사업촉구결의안’을 부결시켰다.유족들과 고양시민회 등이 결성한 ‘금정굴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시의회의 공식 사과와 우익단체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며 분노했다.유족들은 “희생자들은 반공과 국가안보라는 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양민”이라며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한을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금정굴 사건 공대위 이춘열 집행위원장은 “금정굴 희생자와 함께 연행된 사람들 가운데 부역혐의가 짙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당시 서울로 송치됐고 아이로니컬하게도 대부분 목숨을 건졌다.”며 희생자들이 억울하게 처형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금정굴 현장은 1995년 1차 발굴후현재 방수포로 덮여 있다.금정굴은 일제 때 금을 캐기 위해 뚫었던 수직굴로,유골이 발굴된 곳은 지하 15m 지점이다.유족들과 증언자들은 당시 금정굴로 끌려간 이들이 400여명에 이른다며 추가 발굴도 요구하고 있다. 입구엔 장승 조형물이 세워졌고 철제 안내문과 안내판이 서 있다.유족들은 인근 창고를 사무실로 쓰면서 현장을 지키고 있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 ■나주 세지면 동창교사건 전남 나주시 세지면의 일명 ‘동창교 양민학살 사건’(51년 1월20일) 희생자는 136명.면 소재지인 오봉·벽산리 300여가구 주민 가운데 어린이와 노약자를 뺀 젊은이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육전에 희생됐다. 이들은 대낮에 “동창교 아래에서 강연이 있다.”며 위협하는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군인들의 총칼 아래 억울하게 죽어갔다.군인들은 함평에서 영암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국사봉의 빨치산을 토벌하러 가던 길이었다.(육군 전투상보 기록) ●주민 5열로 세운뒤 총난사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는 조기영(73·세지면 벽산1구)씨는 당시 22살 청년으로 현장에 끌려갔다가 ‘경찰가족’이라고 거짓말해 사지(死地)를 벗어났다.현재 세지우체국 담벼락에 몸을 숨긴 그는 “군인들이 동창다리 밑으로 주민들을 5열횡대로 세운 뒤 다리 위에서 M1소총과 기관총으로 난사한 뒤 인근 논과 밭,산에서 일하던 주민들까지 잡아죽였다.”고 증언했다.이어 “당시 세지초등학교 박모 교사의 부인을 총으로 쏜 군인들이 등에 업혀 울던 세살바기마저 사살했다.”고 몸서리쳤다. 이후 47년간 숨죽이며 살던 세지면 주민(37명)들은 1998년 7월,‘세지 동창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상계·46·나주시의원)’를 출범시켰다.이어 유족회를 만들고 2000년부터 해마다 합동위령제(음력 12월12일)를 지내고 있다.내년에는 위령탑을 세울 계획이다. ●“주검 일일이 확인사살” 이상계 추진위원장은 “군인들은 총을 쏘기 전 주민 5명을 가려내 소를 잡아 먹고 일일이 주검을 들춰가며 확인사살까지 자행할 정도로 인간 이하의 행동을 했다.”는 증언 녹취록을 공개했다. 이 추진위원장은 “한국전쟁의 동일선상에서 자행된 함평 양민학살 사건은 60년 6월 국회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조사가 이뤄졌으나,동일부대의 만행으로 저질러진 동창 양민학살사건은 조사마저 안돼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나주 남기창기자 kcnam@ ■전주형무소 사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북 전주시 전주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좌익 정치·사상범 1400여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는 증언과 자료가 나와 한국사에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시 형무관 “4차례 자행” 증언 당시 전주형무소 형무관이었던 이순기(78·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씨는 “50년 6월 26일부터 전주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7월 20일까지 4차례에 걸쳐 좌익 사상범들이 퇴각하는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됐다.”고 증언했다.전쟁이 터진 다음 날인 26일 상부로부터 좌익 사상범에 대한 ‘예비검속령’이 떨어졌고,이날 저녁부터 3년 이상 장기복역한 사상범이 끌려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해 7월 4일 이씨는 사상범 40명이 5명씩 끈으로 묶여 실려가는트럭에 동승했다.전주농고 동문 쪽 야산에서 군인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죄수들을 나란히 세우고 기관총으로 쏘아 살해했다고 증언했다.이씨는 “사상범들은 현재 전북대가 있는 건지산,농협전북본부와 완주군청이 있는 자리,진안으로 나가는 소리개재 등으로 끌려가 살해되고 그 자리에 묻혔다.”고 말했다.특히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황방산에 묻힌 시신들은 막판에 재판도 받지 않고 끌려가 죽은 사람들이라고 밝혔다.이들은 좌익계통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있던 억울한 사람들이었다. ●“좌익 접촉” 이유 재판없이 처형 “7월 16일 전주를 떠났다가 10월 13일 다시 돌아와 보니 전주교도소 주변에서 인민군과 함께 철수하던 좌익들이 우익인사 400명을 죽여 시신들이 수습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진보잡지인 ‘월간 말’은 5월호에 한국전쟁 당시 전주형무소 집단학살 사건의 처형장으로 지목됐던 전주 황방산 부근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유골을 찾아냈다며 이를 다룬 미국 정부문서보존소 사진을 공개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정부 대책 없나 정부는 다수의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추가 대책을 마련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양민학살 관련 정부지원 현황 대규모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작업은 행정자치부 산하 ‘4·3사건 지원단’과 ‘거창사건 지원단’에서 맡고 있다.4·3사건이 한국전쟁 이전에 불거졌다는 점을 고려하면,전쟁 당시의 민간인 희생과 관련된 정부지원단은 거창사건이 유일하다.지원단의 업무는 해당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묘역조성사업 등이다.피해보상 문제는 제외됐다. 거창사건 지원단의 경우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에 따라 구성됐다.지원단은 그동안 거창사건과 관련된 피해접수자 557명 가운데 548명,산청·함양사건 피해접수자 399명 중 386명에 대해 각각 명예회복을 마쳤다.현재는 묘역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4·3사건 지원단은 99년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구성돼 그동안 1만 4028명의 피해신고를 받았다.이 가운데 2778명을 희생자로 결정했으며,오는 2004년 말까지 모든 접수자에 대한 결정을 마친다는 계획이다. ●다른 피해자들과 형평성 문제 정부는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의 어려움,전쟁 당시 다른 피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이 얽혀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어 난감한 입장이다. 거창사건의 경우 당시 이루어졌던 군사재판을 근거로 진상규명 등을 했지만,양민학살사건 대부분은 관련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따라서 진상규명작업이 유가족들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객관성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다. 100만∼200만명으로 추정되는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들의 형평성 문제 등을 고려,희생자 1인당 1억원씩 보상한다해도 최소 100조원이 필요해 국가재정에서 충당이 불가능하다.게다가 양민학살사건은 군의 작전과정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정확한 진상조사를 위해서는 국방부가 나서야 하지만,양민학살 인정은 군의 명예 실추와 직결된다는 부담도 있다. 정부 관계자는 “유가족들의 억울함을 이해하지만,정부가 대책 마련에 앞장 서기도 어려운 입장”이라면서 “국회 차원의 정치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장세훈기자 shjang@
  • 월북작곡가 안기영作 ‘어린이날 노래’ 발견

    월북 작곡가인 안기영(사진·1900∼1980)이 1947년 발표한 ‘어린이날 노래’의 악보가 발견됐다.그해 5월5일자 ‘예술신문’의 1면에 실린 것으로,고서수집가인 오영식(서울 보성고 국어교사)씨에 의해 발굴됐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이라는 윤석중의 노랫말에 붙인 이 곡은 현재 널리 불리고 있는 같은 가사의 윤극영 작곡 어린이날 노래보다 1년 앞서 발표된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윤극영의 어린이날 노래는 경쾌한 행진곡풍인 반면,안기영의 곡은 다소 장중한 느낌을 준다. 작곡가이자 테너 가수였던 안기영은 연희전문을 나와 1926년 미국으로 유학했고 귀국한 뒤에는 이화전문 성악과 교수로 재직했다.‘그리운 강남’ ‘마의태자’ 등 예술가곡과 한국 최초의 오페라로 평가받는 ‘견우직녀’를 작곡하는 등 가곡과 전통민요 연구에 힘쓰다 한국전쟁 중 월북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치욕 서린 건물도 문화재 등록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와 옥천 죽향초등학교,진천의 옛 덕산양조장,김제의 농장사무실…. 문화재청이 지난주 문화재로 등록을 예고한 15건의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 일부이다. 조금 과장하면 노근리 쌍굴다리는 그야말로 볼품없는 콘크리트 덩어리.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한국전쟁 당시 수백명의 민간인이 피살된 곳이다. 죽향초등학교와 덕산양조장은 건축적 가치도 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다녔고,현재도 3대가 가업을 이어 전통주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김제의 농장사무실은 일본인에 의한 토지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동안에는 건조물이 얼마나 ‘건축적 가치’를 갖고 있는지가 문화재로 등록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면,이제는 ‘역사’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무엇보다 치욕의 역사와 부정적인 역사도 간직해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문화 유산으로 과감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데서 등록 문화재 제도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경성부청사였던 서울시청청사.경복궁안에 있던 일(日)자모양의 옛 조선총독부청사는 헐렸지만,본(本)자 모양으로 짝을 이루던 옛 경성부청사는 등록문화재로 보존하게 된다. 일본사찰인 군산의 금강사 대웅전도 포함됐다.1913년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지은 전형적인 에도(江戶)시대 사찰건축을 보여준다.제천기관차사무소 수검고가 등록 대상으로 예고된 것도 눈길을 끈다.1937년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오폭으로 남쪽 부분이 파괴되자 외장을 벽돌로 쌓아 복구했다.건축물로는 순수성을 잃어버렸지만,근현대사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는 더 크다는 것이다. 김정동 문화재위원(목원대 건축학과 교수)은 “이런 것까지 문화재로 등록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좋은 역사만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도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 자체가 별로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서 “문화재로 등록하여 당시의 흔적이나마 남겨놓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등록 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자 지난해 3월 도입됐다.현재까지 서울 태평로 옛 국회의사당과 강경 남일리 옛 남일당한약방 등 모두 66건이 등록되거나,등록이 예고되어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 北核 보유 시인 파문 / 美 대응 시나리오

    25일 끝난 북·미·중 3자회담에서 북한이 핵보유를 시인함으로써 앞으로 미국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일단 미국은 북한의 진의를 파악해 한국·일본 등 동맹국들과 협의한 뒤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만일 북한의 핵무기 보유와 8000여개 폐핵연료봉 재처리가 사실로 확인되면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행동에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미국이 밟을 수 있는 대응책 중 하나는 유엔을 통한 대북 경제제재에 나서는 것이다.이 방안은 북한 주변국들이 북한의 핵무장을 수용할 수 없다고 거듭 밝혀와 이같은 제재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케네스 퀴노네스(전 미 국무부 북한 분석관) 미 인터내셔널센터 한반도 프로그램 담당 이사는 “북한이 석유와 식량을 중국과 한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만큼 경제제재는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해상봉쇄 등 다국적 군사작전이다.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핵무기를 수출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핵무기 비확산을 고수하는 미국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가 불량국가나테러리스트들에게 옮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을 봉쇄할 가능성이 있다. 미 정부 고위관리는 이같은 조치를 취하기 전에 미국이 이에 대한 광범위한 국제지지를 모으는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워싱턴 포스트에 25일 밝혔다.단순하게 무기를 실은 선적만을 막을 것인지,북한을 들고나는 모든 선박을 봉쇄하는 전방위적 봉쇄를 할 것인지도 선택의 문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한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나 실현 가능성은 낮다.북한은 수십년 동안 이를 준비해왔고 한국전쟁 경험 등으로 비무장지대 인근 산악지대에 4000문 가량의 포대를 배치해둔 상태다.따라서 미국의 공격이 당장 감행될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는 드물다. 특히 북한에 대한 공격은 서울에 대한 보복공격을 불러일으키며 이라크 전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힘든 전쟁이 될 것이라고 미 정보분석가들은 보고 있다.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의 반대도 미국으로서는 부담이다. 전경하기자 lark3@
  • 사회 플러스 / 노근리 쌍굴다리 문화재 등록

    한국전쟁 당시 비극의 현장인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가 문화재로 등록된다.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노근리 다리를 문화재로 등록하기로 관보에 예고했다고 24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노근리 다리는 많은 양민이 피살된 것으로 알려진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역사적 장소인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등록 이유를 설명했다.
  • [시론] 北核회담 관전법

    북핵 위기를 협의하기 위한 베이징회담을 앞두고 북·미 당사자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샅바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다.미국이 베이징 회담의 성격을 3자회담이라고 못박으며 ‘북한의 핵폐기 보상이 없다.’고 선수를 치고 나가자 북한은 3자회담이 아닌 북·미회담이라고 응수하며 ‘핵연료봉 재처리 진행중’이란 강수를 구사하며 정면대응하고 있다. 미국의 강경파들은 이라크 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북한을 완벽하게 압박하여 핵 동결이 아닌 포기시킨다는 적극 공격자세로 상대방이 백기를 들도록 회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반면 북한은 샅바싸움에서부터 밀리면 회담은 하나마나라는 절박감 속에서 보내기번트보다는 강공전략을 채택하고 있다.이러한 신경전은 향후 회담의 갈 길이 만만치 않으며 모든 의제와 안건이 회담장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어려운 회담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회담을 둘러싼 북·미간 신경전이 치열해지면서 한국의 불안감은 깊어만 가고 있다.야당에서는 한국이 회담 당사자로서 참여하지 못하고 경제적 부담만 감당하였던 제네바합의의 재판이라고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북핵위기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평화적 해결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3자회담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국내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하다.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정부와 국민들은 베이징 회담에 대한 바람직한 관전법은 무엇인지 심사숙고해야 할 것 같다.국익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관전전략이 필요하다. 첫째,회담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현재 시점에서 성급한 낙관도,비관도 현명치 않다.한두 차례 회담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하여 중장기 대응전략을 수행하여야 한다.베이징 회담은 길고 지루한 회담 장정(長征)의 시작일 뿐이다.어차피 양측의 사활적 국익이 걸린 이상 토씨 하나를 수정하는 데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대응전략을 세워야 한다. 둘째,북한이 다자간 회담의 틀을 수용하였으나 회담은 기본적으로 북·미 양자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북측이 금번 회담에서 중국은 장소국(場所國)으로서의 해당한 역할에 그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회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변수다.중국 역시 이러한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미국의 희망대로 한국과 일본이 참여하는 다자틀로 확대된다고 하여도 한·일의 역할은 경제적 부담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양자틀의 회담포맷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마지막으로 회담이 국론 분열과 정쟁의 소재로 비화하지 않도록 신중하여야 한다.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평화적 해결의 구도가 형성되면서 고조되던 전쟁의 분위기가 가라앉음에 따라 국민들에게 여유가 생기면서 모두가 너무 이상적인 해결을 그리고 있지 않은지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물론 북한의 무리수로 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결자해지 차원에서 북한이 협상에 나오는 것은 순리이며 한국이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그간 한반도 관련 회담에서 한국이 당사자로 참여한 회담은 소수에 불과하다.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은 어제오늘의 전략이 아니며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 분단 상황은 현실이며 북측에 우리와 다른 체제가 57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실존이다.결국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 인식하에서 베이징 회담을 관전하는 것이 실망과 좌절을 사전에 예방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남 성 욱 고려대교수 북한학
  • 6·25때 전주교도소 사상범 유골 집단발굴/ “남한 군경 퇴각때 학살” 증언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황방산 일대에서 한국전쟁 직후 남한의 군경에 의해 집단 처형됐던 사상범의 유골이 17일 대량 발굴됐다. 이 유골은 53년 전 전주형무소(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1400여명의 사상범이 남한의 군경에 의해 집단 처형돼 효자동 공원묘지 내 기독교 안식관 부근 야산에 매장됐다는 당시 전주교도소 형무관(교도관) 이순기(78·전주시 효자동)씨의 증언에 따라 알려졌다. 이씨와 유족들은 이날 현장에서 굴착기 등을 동원,발굴작업을 벌여 유골 수백점을 수습했다.이씨에 따르면 전주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50년 7월 이전 4차례에 걸쳐 전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1400여명의 사상범들이 퇴각하는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됐다고 말했다. 특히 군경은 사상범들을 전주교도소 부근 공동묘지와 황방산,건지산,솔개재 등 4곳으로 끌고가 살해 후 매장했다고 증언했다.그는 황방산 부근에 살았던 주민들도 이 곳에서 집단 학살됐다는 얘기도 전해들었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증언은 이도영(55) 박사가 최근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에서 찾은 한국전쟁당시 군경에 의해 벌어진 좌익사범 집단 처형 자료 중 하나인 사진 1장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3자회담 한국 배제 안팎/ 한국, 北核 방관자 되나

    23일 시작되는 다자회담 과정에서 핵심은 핵문제의 해결이지만,향후 우리 한국의 참여가 이뤄질지도 주요 관심사다.한반도 핵문제 해결 첫단계에서 북한·중국·미국이 회담의 당사자가 되고 한국이 배제된 것과 관련,한국의 주도적·적극적 역할론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향후 핵 및 군사 문제 즉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한국측 의지가 봉쇄되는 틀이 고착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 다. ●정부,“우려 말라” 정부는 한국의 참여가 없는 한,실질적인 논의의 진전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3자 회담을 우리 정부가 수용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 정부 양측으로부터 다자 회담이 시작되는 대로 최대한 빠른 시일내 한국을 참여시킨다는 점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미측이 지난 3월말 3자안을 제시했을때 한국이 거부한다면,북한과 대화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며,핵문제 해결의 기회를 우리가 버리느냐,마느냐의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북한의 수용 문제 미국과 중국의 의지와 별개로,줄곧 한국 참여를 배제하자는 게 북한의 입장이었다.북한은 10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연기시키는 등 남한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고 있다.핵 문제는,북·미간 현안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남한의 군사주권을 무시해온 차원의 전략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모양새만 다자틀인 북·중·미 3자 회담에서 실질적 북·미 대화를 추진하고 있는 북한이 한국 등의 참여를 받아들일지 미지수다.북한 입장과,한국의 참여속에 실질적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한국·중국·미국 입장 등이 맞서 힘들게 남북한과 미국,중국만 참여하는 4자회담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 ●1994년의 재연론 전문가들은 한국 참여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94년 제네바 핵합의 때처럼 한국이 북·미간 논의를 귀동냥하는 처지에 빠질 것을 우려했다.당시 미국은 한·미·일 공조체제의 대표로 북한과 테이블에 마주 앉았었다.이번에는 정전협정 당사자인 중국이 북·미간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는 점이 더욱 문제란 것이다.북핵 문제를 북·미간 현안으로 치부해온 정부의 태도가 자충수였다는 지적도 나온다.핵문제의 효율적 해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옹호론도 없지 않다.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미·중이 한국전쟁 종전 당사자인 구조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중국의 대북 후원자 역할을 인정하는 것은 북핵 문제 해결차원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서울에 온 50~60년대 북녘그림 / 월·납북화가 30명의 작품 밀알미술관서 60점 전시

    배운성·정종여·길진섭·리팔찬·정영만 등 1950∼60년대 북한 미술계를 이끈 화가들의 작품이 서울에서 대거 전시되고 있다. 남북나눔운동(회장 홍정길 목사)이 주최한 서울 일원동 밀알미술관의 ‘한국미술의 잃어버린 페이지’전.월북하거나 납북된 작가 30명의 작품 60여점이 나와 있다.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기간중 북으로 올라가 활동한 이들은 대부분 주체사상이 확립된 1970년대 이후 미술사에서 자리를 잃고 소리없이 사라진 인물들.일부는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하는 작품으로 방향을 틀기도 했다.전시작은 지난 93년부터 지금까지 북한돕기사업을 펴온 남북나눔운동이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500여점 중 엄선한 것. 홍 회장은 “지난 10년간 500억원 상당의 생필품을 북에 지원해 왔다.”면서 “북한측은 그 답례로 미술품 등을 선물해오곤 했다.”고 밝혔다.유럽 유학 화가 1호로 2001년 덕수궁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던 배운성의 경우 판화 ‘다듬이질’‘제기차기’ 등이 나왔고,한국전쟁 때 월북한 조선화가 정종여의 작품으로는 ‘참새’연작이 출품됐다.조선화 ‘노인습작’이 출품된 리팔찬은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며,역시 조선화 ‘참새’를 그린 김기만은 운보 김기창의 셋째 동생으로 2000년 가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서울에 온 적이 있다.청전 이상범의 맏아들 리건영이 1950년대 후반 그린 조선화 ‘경축’도 만날 수 있다.이밖에 출판화가이자 공훈예술가인 함창연의 판화작품이 특별전 형식으로 선보여 눈길을 끈다. 28일까지(02)3411-4661. 김종면기자 jmkim@
  • 경제플러스 / 한국전 미군 기념물 1弗에 美수송

    한진해운이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석탑·석등 건립에 쓰일 석재를 미국 시애틀까지 단돈 1달러에 수송키로 했다. 한진해운은 미국 워싱턴주 소재 ‘한국전쟁 고아 기념사업회’가 한국전 휴전일(7월27일)을 맞아 벨링햄시 ‘빅 가든 파크’에 설치할 석탑·석등용 자재 수송을 요청해 옴에 따라 16t가량의 석재를 1달러에 부산에서 시애틀까지 운송했다고 7일 밝혔다.
  • [씨줄날줄] 新 지조론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이 황폐한 풍경이/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한국전쟁 당시 다부원 전투 현장을 보고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조지훈의 시 ‘다부원에서’의 한 대목이다.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조지훈(1920∼1968).‘승무’ 등의 시에서 우아하고 섬세한 필치로 민족정서를 노래했던 그는 자유당 정권 말기 지사적(志士的) 논객으로 거듭난다. 그는 3·15 부정선거 한달전인 1960년 2월15일 월간 ‘새벽’에 기고한,그 유명한 ‘지조론’에서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고 설파하며 지식인과 정치지도자들의 맹성을 촉구했다.이어 4·19 혁명 나흘전 같은 잡지에 실린 ‘선비의 직언’을 통해 불의와 부패에 대한 지식인의 항거를 직설적으로 요구했다.“직언하는 선비는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역사의 준엄한 감시가 있기 때문이다.바른말 한마디로 목숨을 잃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 살아서 무엇하리.”라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그로부터 20여년 뒤인 1980년대 초 또 다른 군사정권이 기승을 부리자 사학자이자 당대의 논객이던 김성식(1908∼1986)은 ‘신 지조론’에서 “비판이 없는 협조는 맹종이요,협조가 없는 비판은 파괴행위”라며 현대적 의미의 지조론을 주창했다.“정부를 비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부에 협조할 줄도 모른다.협조하기에 앞서 비판이 있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석에서 “(김성식의) 글 한마디는 날카로운 총알이요,1개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오늘은 제 47회 신문의 날.꼿꼿했던 두 논객이 생각나는 것은 오늘날 언론의 책무가 바로 그들이 주창한 선비의 지조를 지키는 것이라는 자성에서다.“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명제는 어느 시대이건 유효하다.‘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시대를 열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각오는 가상하지만 절대 부패하기 쉬운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는 여전히 이 시대 지성인의 몫이요,언론의 책무다.신문의 날 아침 정치지도자는 지도자대로,언론은 언론대로 저마다의 ‘신 지조론’를 새겨보자. 김인철 논설위원 ickim@
  • 부시의 전쟁 / 바그다드 진입 美제3보병사단

    바그다드 공격을 주도한 미 제3보병사단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1차 걸프전 등 미국이 참가한 주요 전쟁에 빠짐없이 참가해온 미군의 최정예부대 가운데 하나다.이번 작전은 3사단의 제2여단 64기갑연대 소속 탱크·장갑차 등이 주도했다.제18공수군단 예하 사단으로 조지아주 스튜어트와 베닝 기지를 본거지로 한다.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불린 1차 걸프전 때도 독일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동배치된 뒤 쿠웨이트에 침공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한 100시간여의 전투에서 이라크군 탱크 418대,장갑차 447대와 이라크군 방공시설 100여곳을 파괴하는 전과를 거뒀다. 한국전쟁 때 ‘철의 3각지대’로 유명한 철원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큰 수훈을 세웠다. 유세진기자 yu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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