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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터키를 새롭게 인식하자/김영기 주 터키대사

    레젭타입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8일 한국에 도착,9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많은 사람들은 터키를 소아시아 반도에 위치하면서 한국전쟁 때 우리를 위해 용감하게 싸워준 나라,그래서 서로 형제국가라고 부르는,전통 우방국가 정도로만 알고 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얽혀 있는 중요한 이해관계가 많지 않다 보니 반세기 전 우리가 입은 은혜에 대한 고마움과 그로 인해 가졌던 친밀감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엷어져 가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추세로 받아들이고 말아야 할까. 지난해 6월 초 우리 국립극장의 우루왕 공연단과 함께 터키를 방문한 도올 김용옥 교수는 “터키는 우리의 영원한 우방,인간의 순수한 마음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찬사와 함께 “우리와 가까이 있는 중국,일본보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는 터키야말로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친구”라고 감회를 표현한 바 있다. 우리 개개인도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를 가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국익을 철저하게 추구해야 하는 국가간의 관계에서 진정한 우방을 가지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터키인들은 조상이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하므로 우리와 친연성(親緣性)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다.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으로 언어구조가 동일한 까닭에 사고방식이 유사하고 중앙 아시아에서 흉노족 돌궐족으로 살던 때부터 보존하고 있는 사회관습이 우리의 유교전통과 흡사하다. 또 감성적인 기질이 강한 것까지 같아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터키인 말고 또 누가 우리와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우리가 터키와의 관계를 각별한 마음으로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로도 느껴진다. 터키는 우리의 중요한 교역파트너이기도 하다.지난해 에르도안 총리의 집권을 계기로 터키가 정치적 안정을 이룩한 가운데 유럽연합(EU) 가입을 위한 법제 개혁을 가속화하면서 최근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힘입어 우리의 지난해 수출이 종전 기록을 돌파,13억 달러대에 달했고,무역흑자 순위에서는 터키가 우리의 11번째 교역국이 되었다.터키의 대외 수출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대(對) 터키 수출도 늘어나는 면이 있지만 양국간의 무역 역조가 투자·관광 등 분야에서 보완될 수 있도록 우리가 성의있는 노력을 경주해야 양국 관계가 영원한 우방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3.5배에 달하는 국토와 7000만명의 인구를 가진 터키는 히타이트 문화,트로이 목마,미다스왕의 신화,초기 기독교 성지와 함께 7000∼8000년전 유물이 남아 있는 인류문화의 보고이다. 최근 터키는 유럽과 중동 30여개국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다시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포부와 함께 터키 국민의 역동성을 재결집해 나가고 있다.우리는 이같은 터키의 정치적 경제적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우리 정부와 경제계,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 터키와의 우호협력 증진에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드린다. 에르도안 총리 방한을 계기로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 때 한국과 터키 양국 국민이 유감없이 보여준 서로에 대한 따뜻한 정을 더욱 두텁게 하고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관계 증진은 물론 국민교류도 가일층 강화되기를 기대한다. 김영기 주 터키대사˝
  • 북파공작원들 인력파견社 차렸다

    북파공작원 동지들이 사장과 직원으로 다시 뭉쳤다.대한민국 HID 북파공작원 인천본부는 지난달 8일 ㈜인천HID라는 상호로 회사를 설립하고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인천HID의 주 사업 분야는 경비·청소·인력파견업으로 인천본부 HID 회원 150여명을 직원으로 두고 있다.회사 사무실은 인천시 남동구 간석3동에 위치한 HID인천본부 사무실을 그대로 쓰고 있다.직원들은 한국전쟁 직후 HID에서 활동한 직원부터 90년대 초반에 전역한 젊은 직원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50세를 넘긴 직원들 중엔 상당수가 한번 이상씩 북한에 잠입,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기도 하다.인천HID 이덕로 부회장은 “몸뚱이 하나를 밑천 삼아 열심히 해 보려 했지만 사회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다.”며 “하지만 언제나 사회의 부적응자로 남을 순 없다는 회원들간의 의기투합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됐다.”고 회사 설립배경을 밝혔다. /연합˝
  • '태극기 휘날리며’ 원빈

    ‘꽃미남’ 원빈(27)이 어둠 속에서 혼자 흐느꼈다. 지난 3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제작 쇼박스·강제규필름)의 시사회가 열린 서울 삼성동 코엑스내 멀티상영관 메가박스.원빈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영화 속 가슴 아린 장면에서도 그저 눈물만 글썽였던 그가 정작 영화 밖에서 연신 흘린 눈물의 의미는 뭘까? “지난해 2월부터 겨울에서 겨울로 이어진 10개월의 촬영기간은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였습니다.촬영 당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 장면들을 이렇게 직접 보니 감정을 건드렸나 봅니다.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썼는데도 장면마다 너무 고생한 기억이 되살아나 저도 모르게…” 제작비 170억원(순제작비 147억)을 들인 한국 영화사상 최대의 블록버스터 ‘태극기 휘날리며’(제작 강제규필름)에서 주인공 진석역을 맡은 원빈이 털어 놓은 소감엔 ‘빛과 그늘’이 함께 어린다.그 속엔 ‘태극기…’의 실루엣이 그대로 담겨 있다. 주된 화제는 단연 ‘고생담’.포탄이 쏟아지는 전장(戰場)에서 흙을 뒤집어 쓴 영화 속 그의 얼굴에는 촬영 당시의 고충이 생생하게 묻어난다.“영화는 한국전쟁을 내면에서 다룬 감동의 대하 서사시다.누가 총을 먼저 쏘았냐식의 이데올로기로서 바라보는게 아니라 진태(장동건)와 진석 형제를 클로즈업 한 뒤 전쟁의 와중에서 희생당한 인간의 모습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한국 전쟁 영화사를 새로 쓰는 심정으로 연출에 임한 강제규 감독의 의욕은 경남 합천과 대관령 등 18개 지방의 올 로케이션을 강행했다.혹한과 전쟁신의 굉음이 내내 따라 다녔을 것이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등 촬영 현장 자체가 전쟁터라는 느낌이었습니다.”라는 원빈은 가장 잊지못할 고생담을 묻자 마지막 전투장면을 꼽았다. “숱한 장면에 고생한 기억이 묻혀있지만 가장 힘든 때는 인민군이 된 형 진태와 만나는 하이라이트 장면이었습니다.비록 영화 속에서는 5분밖에 되지 않지만 한달을 찍었는데 무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태극기…’는 그의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여 빛이 커보인다.그 동안 그의 이미지는 여림·부드러움이었다.드라마 ‘가을 동화’의 재벌 2세,영화 ‘킬러들의 수다’에서 막내 등의 역할을 소화하면서 ‘꽃미남’ ‘미소년’ 등으로 불려왔다.이 왕자같은 미모(?)에 힘입어 그는 ‘한류 열풍’의 주역으로 떠올랐다.특히 일본에는 팬클럽이 만들어져 촬영현장이나 부산에서 개막된 ‘체험!태극기 휘날리며展’에도 극성팬들이 날아올 정도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전쟁영화라는 새 여정에 나섰다.“전쟁영화를 꼭 찍고 싶었다.”는 그에게 ‘태극기…’는 개인적 소원을 풀게 해준 작품이자 연기자로서의 도약을 시험하는 무대다. 당연히 그는 ‘태극기…’를 통해 꽃미남보다는 ‘배우’로 거듭 나기를 바란다.“이전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연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고 진짜 배우로서 한층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그의 바람은 꿈만이 아닐 성 싶다.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예의 그 여린 이미지를 보여주다가 형 진태와의 갈등이 거듭되면서 강한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이미지 변신에 반쯤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태극기…’에서 그가 보여준 가능성은 앞으로 여린 이미지의 ‘꽃미남’이라는 껍질을 벗고 ‘배우’로 훨훨 날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음을 예감케 한다. 글 이종수기자 vielee@˝
  • 술따라 맛따라-문배술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문배술로 건배하는 것을 보고 참 놀랐습니다.국내 유일한 제조자인 저도 사전에 전혀 몰랐거든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86-가)로 등록돼 있는 문배술의 제조기능 보유자 이기춘(62·문배술 양조원 사장)씨는 남북정상회담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스스로 ‘우리나라 최고의 텃술’로 자부하는 문배술이 정상회담에서 비로소 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문배술은 주암산 샘물로 빚어야 제맛”이라며 문배술에 대한 식견을 보여 주었는데,이기춘씨는 바로 평양 주암산 인근에 있던 문배술 양조장의 4대 계승자다. 문배술은 우리나라 텃술 가운데 향기로 따져 으뜸으로 평가받는다.은은하고 청초함이 느껴지는 문배꽃 향은 문배술의 생명.문배술을 문배로 담은 과실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꽤 많다. 그러나 문배술은 찰수수와 메조,누룩 단 세가지로 빚는 순곡 증류주.이처럼 단출한 재료에서 어떻게 향긋한 문배꽃 향이 날까. 문배술의 역사를 나타낸 문헌은 찾아보기 어렵다.다만 고려 태조 왕건 시대에 신하들이 앞다퉈 진상한 술 가운데 하나가 문배술이었는데,왕이 그 맛을 아주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구전돼 내려올 뿐이다. 이씨 집안의 문배술 계보는 증조모로부터 시작,조부(이병일),부친(이경찬),이씨,아들 승용씨로 이어진다.조부때까지는 집안에서 빚는 술인 가양주 수준이었고,부친 때부터 양조장을 만들어 문배술을 팔았다.부친이 해방후 평양 주암산 인근에 세운 ‘평천 양조장’에선 연간 3만ℓ의 문배술을 생산했다고 하니 당시로선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씨는 한국전쟁때 부친의 손에 이끌려 남쪽으로 넘어왔다.부친은 1954년 서울 성북구에서 ‘거북선’이란 이름으로 문배술을 생산했으나,이듬해 곡주 생산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이 발효되면서 생산이 중단됐다.이후 금지조치가 풀리면서 90년 김포시 양촌면 마산리에 ‘문배술 양조원’을 세우고 술을 빚어내고 있다. 이씨는 부친 타계 전엔 공무원,항공사 직원 등 월급쟁이로 지냈다.부친은 가업을 잇기를 바랐지만 젊은 객기에 옛 것보다는 현대적인 것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우리것의 진정한 가치를 느꼈고,적극적으로 제조 기능을 익힌 끝에 95년 기능 보유자로 지정받았다.아들 승용씨는 대학에서 농화학을 전공하고,현재 미국에서 술 관련 공부를 하고 있는 등 본격적으로 문배술 계보 잇기에 나선 상태. “우리술은 중국 술처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지 않아요.일본 술처럼 섬세하지도 않고요.보드카처럼 독하지 않습니다.과실주가 아닌데도 느껴지는 은은한 향,자연스러운 빛깔,같은 알코올 도수라도 유난히 부드러운 느낌,자꾸 마시다 보면 느끼게 되는 미세한 맛의 차이,통음 후에도 두통이 없는 술이 가장 좋은 우리술입니다.” 그는 특히 약한 술보다는 증류 과정에서 불순물을 깨끗이 걸러내는 증류소주류가 건강에도 좋다고 주장한다. 좋은 술을 위해 반드시 전제돼야 할 것은 경건한 마음자세.조상에 제를 지내듯 엄숙한 마음으로 술을 빚어야지,언짢은 상태로 술을 빚으면 이상하게 맛과 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씨는 그래서 지금도 술을 빚기 전 목욕재계하고 부친과 조상을 모신 사당에 제를 올린단다. 그러나 요즘엔 전통주와 일반 주류 가릴 것 없이 상당수가 이같은 정성 없이 조변석개로 변하는 대중의 입맛 맞추기에만 급급하는 것 같다고 탄식했다. 글 김포 임창용기자 sdragon@ ● 따라 빚어보세요 준비물:찰수수,메조,백곡(누룩) 1.메조 3㎏으로 밥을 지어 식힌 뒤 누룩가루 2㎏과 버무린다. 2.조밥 2배 분량의 물을 부어 잘 섞은 뒤 이틀 정도 발효시킨다.(밑술 완성) 3.수수 4.5㎏을 알갱이째 쪄서 식힌다. 4.누룩가루 3㎏과 버무려 밑술에 섞어 술독에 담는다.(된죽 형태의 덧술 완성) 5.18일 정도 발효시킨다. 6.16도 정도의 원료술을 떠내 증류기로 증류한다.(증류기는 시중에서 살 수 있음). 7.처음 약 5분간 증류되어 나오는 술은 ‘꽃술’이라고 하여 68도 정도의 독주로,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으므로 버린다. 8.증류시간이 길수록 주도가 점점 낮아지므로,가장 맛과 향이 좋은 40도에 맞출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 소공동 양복점 거리-왕년엔 대통령도 회장님도 단골손님

    전통을 유난히 고집하는 런던내기들,그들은 몸에 딱 맞는 양복을 고를 때 ‘세빌로가’를 찾는다.고급 맞춤양복점이 밀집해 있는 이 곳에는 ‘지브스&호크스’ 등 명품 브랜드가 즐비하다.서울의 세빌로가는 단연 소공동 양복점 거리다.시청앞 광장에서 남산3호터널 방향으로 난 5차로 양쪽에는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으로 치장된 양복점 20여곳이 줄지어 있다.주문양복점 1번지인 소공로 거리다.한때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 실력자들이 단골손님이었던 소공로는 저렴한 기성복에 밀려 예전 같은 세(勢)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그러나 여전히 멋을 아는 사람들은 손으로 직접 만든 주문복의 맛을 찾아 이곳으로 향한다. ●전문양복 20여곳은 즐비 조선 태종은 시집 가는 둘째딸 경정공주에게 집을 지어주며 아버지의 애틋한 정을 표시했다.사람들은 임금의 둘째딸이 살던 일대를 작은공주골 한자로는 소공주동(小公主洞)이라 불렀다.일제시대에는 필동에 모여 사는 총독부 고급관리들이 조선은행 샛길인 작은공주길로 출퇴근했다.소공로에는 이들을 상대로 양복점이 하나둘씩 생겼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소공로 양쪽에는 신축건물이 들어섰다.지금은 재개발지구로 묶여 쇠락했지만 당시엔 번화가였다.한국은행을 비롯해 은행원이나 사무직 직장인들을 주고객으로 흡수하는 양복점이 늘어났다.고객의 성향 탓일까.소공동은 종로나 충무로 등 다른 양복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가 제품을 팔았다.3,4공화국 때는 국민복이 등장해 잠시 추춤했지만 70년대까지 소공로 맞춤 양복점은 전성기를 구가했다.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매출이 높았고 재단사 보조라도 하려는 젊은이들이 넘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기양복점에서,김대중 전 대통령은 잉글랜드양복점에서 양복을 즐겨 맞췄다고 한다.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과 현대 정주영 창업주는 해창양복점의 오랜 단골손님이었다. ●사라지는 맞춤 양복 “체구만 쓱 훑어봐도 치수가 눈앞에 그려집니다.” 35년째 양복을 지어온 김용화(50)씨는 소공동의 베테랑 재단사다.양복에 관해서는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는 김씨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로 가득하다.명절이면 기업들이 수백벌씩 선물용 양복표를 주문해 고향에 내려가기조차 힘들 정도였다.한달에 수백벌씩 지었는데 요새는 10벌 주문받기도 힘들다. 소공동에서 맞춤 양복 한 벌 값은 120만원선.물론 재단사의 기술이나 양복감,공정과정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수제품 양복 한 벌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주일 정도.물리적인 시간은 2∼3일 정도지만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형태가 찌그러지지 않는다. 1958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가업을 이어받아 40여년째 해창양복점을 운영하는 이순신(68)씨는 “주문복은 2만 5000번을 꿰매야 한 벌이 완성되는 인고의 과정”이라면서 “재단기술은 10년 이상 배워야 한 사람의 몫을 겨우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노동부가 뽑은 대한민국 기능명장에 소공로는 3명을 배출했다.‘라이프’의 박종오씨와 ‘홍균’의 이홍균씨,‘프라자’의 하석근씨.하지만 이런 장인들의 노고를 얼마만큼이나 이어갈지는 의문이다.명문대 학벌을 내던지고 재단사의 길을 자청했던 이씨는 “내 아들마저도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었다.”면서 “맞춤복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조형예술품인데,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며 아쉬워했다. 이유종기자 bell@˝
  • 고은이 노래하는 비극·절망의 풍광/연작시 ‘만인보’ 16~20권 출간

    고은 시인의 연작시 ‘만인보(萬人譜)’ 16∼20권이 창비사에서 나왔다.1986년 처음 세상에 나온 ‘만인보’는 97년 15권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민중의 다양한 삶의 결을 노래하면서 총체적인 역사인식을 불어넣어왔다.7년 동안 호흡을 고르며 정제해 내놓은 이번 연작시 719편이 태어난 공간은 민족사의 대전환기인 식민지·해방공간·한국전쟁 전후를 아우른다. 시인은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삶과 맞닥뜨린 죽음의 상황,전래사회가 무너진 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실존과 폐허(…),비인간화를 몰고온 전쟁 등이 비극의 풍광으로 그려진다.” 시인이 이 ‘폐허’에서 부르는 절망의 노래에는 이번에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김일성·조소앙·이승만·신익희 등 좌우익을 망라한 정치인을 비롯,임화·이중섭·선우휘 등 예술가와 남인수·현인·김정구 등 가수 등이 시인의 웅장한 서정성으로 살아난다.또 한라산을 핏빛으로 물들인 빨치산과 토벌대,창녀,장작 장수,노천 사진사 등 이름없이 그 공간을 메웠던 민초들의 절절한 사연이 역사 위로 복원된다.사람만이 아니다.1300명의 양민이 학살당한 진주 초등학교 운동장,서울 변두리 판잣집 풍경이 또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살아나 스산하던 당시의 진상을 증언한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해설에서 “당대의 숱한 사람들을 통해 우리 역사의 모습들을 섬세하게 직조하면서 역사의 진행을 거대한 양감으로 재구성한다.”고 상찬한다.시인은 올 하반기에 5권,내년에 5권을 더 보태 모두 30권으로 ‘만인보’라는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을 예정이다. 이종수기자
  • 주말매거진We/꼬불꼬불 뒷골목-서울 삼각지 화랑·액자 거리

    한국전쟁 직후 가난한 무명 화가들의 집결지로 출발해 60∼70년대 이른바 ‘이발소 그림’을 양산했던 원산지.현재는 대중적 미의식과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이 대량 생산되는 곳.이 때문에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이단아’처럼 취급받는 곳. 서울 용산우체국에서 미8군 정문에 이르는 약 1㎞의 도로 양쪽에 형성된 삼각지 ‘화랑·액자거리’에 대한 평이다.최근 부동산 개발 붐과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여전히 크고 작은 화랑과 화방 60여곳에서 그림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무명 화가들이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국의 몽마르트르 화랑·액자거리는 한국전쟁 직후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위해 하나둘 문을 연 화랑들이 시초다.이중섭 화백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박수근 화백도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미군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가난한 무명 화가들이 점차 이곳을 찾기 시작하면서 60∼70년대에 전성기를 맞는다.이른바 ‘이발소 그림’으로 대표되는 ‘키치미술’(색채가 한눈에 확 들어와 현란하지만 어딘가 촌스러운 그림)이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의 그림은 미국 등지로 수출되는 값싼 서양화들이 대종을 이뤘는데,붓으로 물감을 캔버스에 찍어 그린다는 의미로 ‘쫑쫑이 그림’이라 불리기도 했다.밀레의 ‘만종’과 같은 유명작품을 모사하기도 했다. 80년대 이후 화가들의 인건비가 오르면서 수출용 그림의 가격 경쟁력이 중국 등에 밀리자 이곳에서는 국내 가정집이나 상점 등에서 요구하는 ‘내수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이곳 화가들은 이를 ‘상업미술’ 또는 ‘생활미술’이라 부른다. 종로구 인사동이 유명작가들의 동양화·고서·골동품을,강남구 청담동이 고가의 서양화를 주로 취급하는 데 비해 액자·화랑거리에서는 값싼 서양화 작품이 유통된다.한국의 ‘몽마르트르’ 거리인 셈이다. ●‘빵’을 위해 ‘혼’을 담는다 화랑·액자거리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박갤러리’나 ‘민화랑’‘터화랑’ 등은 작가가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작업공간이자 전시·판매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다.‘다빈치화랑’이나 ‘0901아트’ 등은 여러 작가들이 그린 상업화를 모아 전시·판매하며,‘견지나무액자’ 등은 액자의 주문제작이나 판매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이곳에서 거래되는 그림과 액자의 종류는 천차만별이다.몇 만원대부터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그림과 액자가 혼재한다.하지만 전국 각지의 그림도매상이나 화랑가로 팔려 나가는 그림은 대개 호(1호는 대략 엽서 한장 크기)당 2만∼4만원 선이며,20∼30호 크기라면 액자를 포함해 40만∼100만원이면 장만할 수 있다.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 화가들의 그림은 20∼30호 기준으로 10만∼30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다. ‘박갤러리’의 박명복씨는 “이곳의 그림을 상업미술이라고 폄하하지만,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을 지나치게 양분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면서 “이른바 ‘빵’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만,작품 이미지를 굳혀 나가는 등 ‘혼’을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이곳 화랑·액자거리는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해 있다.최근 미군기지 이전문제가 가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낙후됐던 이 지역에부동산 개발 바람이 불어 땅값과 임대료 등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터화랑’의 박광출씨는 “미술을 생활 속에 자리잡게 만든 곳은 인사동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면서 “무분별하게 개발하기보다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해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
  • 中 “한국戰 외교문서 공개못해”

    |홍콩 연합|중국이 1949년 공산 중국 건국 이후 50여년만에 처음으로 기밀해제하는 외교문서들 가운데 한국전쟁 관련 문서는 공개하지 못한다고 중국 외교부가 27일 밝혔다.롄정바오(廉正保) 중국 외교부 문서보관소 관장은 이날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외교문서 기밀해제가 중국의 대외관계를 위험에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에 앞서 중국 외교부는 지난 18일 1949년부터 1955년까지의 외교문서 1만여건을 담고 있는 3000여권의 자료를 기밀해제하고 일반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공개한다고 중국 신화통신이 보도했었다. 롄 관장은 “한국전쟁은 매우 복잡하며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면 북한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당시 옛 소련과 북한 등 3개국 관계 관련 문서도 공개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선지루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정치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미국과 러시아의 북한 관련 문서도 공개됐다.”면서 “중국도 사전 검열을 최소화하고 총괄적으로 기밀해제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 [CEO 칼럼] CEO가 되려면

    1953년 가을,한국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폐허였던 때,나는 고향을 떠나 상경해 고교 2학년으로 복교했다.친척집에 잠깐 머물렀다가 방을 얻어 나왔다.돈을 벌어야 했다.운좋게 서울신문 보급소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그때 내가 맡은 보급소의 신문 독자는 겨우 100여명.부수를 늘리려고 열심히 뛰었다.독자가 늘어나면서 수입도 늘었다.6·25 세대는 모두 그렇게 뛰면서 공부했다.세월이 흘러 CEO가 된 지금,신문에 글을 싣다니 감회가 깊다. 많은 사람이 CEO가 되기를 열망하고 그 길을 찾고 있다.CEO와 지망자에게 CEO가 되는 길을 여섯가지로 정리해 제언한다. 첫째,지식기반이 튼튼해야 한다.지식이 적은 사람은 작은 사업은 가능하지만,큰 기업을 경영하기엔 무리다.경영에 필요한 기초학문과 전공분야의 지식은 필수적이다.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경영학을 공부해야 한다.경영자는 적어도 대차대조표,손익계산서 정도는 볼 줄 알아야 한다.숫자를 모르고 경영을 하면 실패할 수 있다. 글로벌 시대에는 외국어 능력을 갖춰야 한다.이젠 영어·일어에 중국어까지 해야 한다.한·중·일 삼국의 비중이 커지는 시대에 한자는 필수가 되어 가고 있다. 둘째,도전정신·기업가정신이 있어야 한다.지식은 CEO에게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지식이 많은 교수가 CEO가 된다고 경영자로서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니다.비즈니스는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지식은 깊지만 비즈니스에 과감하게 도전하지 못하면 성공한 CEO가 될 수 없다.경영은 이론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기업가 정신이 강해야 하며,뜨거운 사업의욕과 성취욕구가 있어야 한다. 셋째,체험이 중요하다.경험이 있으면 의사 결정에 자신이 생기고,실패를 예방하며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다.영업·생산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쳐 보기도 하고,경영관리·국제관계 등의 실무경험이 있으면 사안의 판단이 신속·정확하고 오류의 발생을 미리 막아 과감히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넷째,지덕을 겸비하여야 한다.덕이 모자라면 리더십에 문제가 있고,지혜롭지 못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인간 생활의기본적인 덕목이다.너그럽고 어진 사람,불의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사람,법·질서를 지키며 예의가 바른 사람,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는 사람,약속을 꼭 지키고 남을 욕하지 아니하며,믿음이 가는 사람이어야 한다.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고 가정을 원만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남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CEO로서 경영도 잘할 수 있다. 다섯째,건강이다.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CEO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어렵다.‘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건강을 잃는 것은 모두 잃는 것’이라고 한다.우선 건강한 체질이어야 하고,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기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마지막으로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옛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충성과는 개념이 다르다.CEO는 그 기업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기업이 투명하고 정도로 경영하고 성장·발전하도록 충성을 다해야 한다.이것이 주주·고객과 사원을 위하는 길이요,국가 사회에 충성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능력있는 CEO는 만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행복을 책임진다.능력있는 CEO가 많이 나와 국력을 배양하고 글로벌 시대에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 부고/원일한 연세대 이사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던 원두우(元杜尤·H.G.Underwood) 선교사의 손자 원일한(元一漢)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가 15일 오후 11시2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87세.원 박사는 1917년 10월 서울에서 태어나 미 뉴욕 해밀튼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해 1939년 연희전문학교 영어 강사로 연세대와 첫 인연을 맺었다.한국전쟁 때는 미 해군 대위로 참전,휴전 회담 때 유엔측 수석통역관을 맡기도 했다.한미협회 부회장,대한성서공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유족으로는 부인 원성혜씨와 한광·한옹·한석씨 등 3남이 있다.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지고 빈소는 연세대 루스채플에 마련됐다.발인은 19일 오전 10시.(02)2123-2003.
  • 화폐개혁 논란/정부“고액권으로 충분”韓銀 “디노미네이션 필수”

    화폐제도 개편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한국은행에 이어 정부와 정치권도 고액권 발행 방침 등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그러나 한은은 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절하)을 제도 개편의 핵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는 반면 정부는 고액권 화폐만 발행하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한은 “화폐단위 1000분의1로 조정을” 한은은 디노미네이션을 화폐제도 개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기본구상은 지금의 화폐단위를 1000분의1로 조정하는 것이다.즉,1000원은 1원으로,1만원은 10원으로 각각 절하해 이를 기준으로 100원(지금의 10만원에 해당)짜리 고액권을 만들겠다는 복안이다.단위절하에 따라 미국의 센트(100센트는 1달러)와 비슷한 전(錢) 등 100분의1짜리 보조단위도 만든다는 방침이다. 한은은 계산·기록·지급·대외거래의 편의 등을 위해 디노미네이션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한은 관계자는 “분석 결과 앞으로 5∼6년 뒤면 조(兆)의 1만배인 경(京)이 각종 경제수치에 등장하게 될 것”이라면서 “이렇게 복잡한 단위를 쓰는 나라는 선진국 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정부 등 외부의 지적과 달리 디노미네이션에 따른 물가상승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한 관계자는 “유럽연합(EU) 12개국이 2002년 1월 유로화를 도입했을 때,이탈리아 리라화가 2000분의1 가까이 액면절하되는 등 대부분 나라들이 디노미네이션을 경험했지만 물가는 첫 달에만 0.2%포인트가 올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특히 상품가격을 구권기준과 신권기준으로 이중 표기하면 함부로 물가를 올리지도 못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한은도 디노미네이션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에 대해서는 자신하지 못한다.고액권을 발행하면 현금인출기,자동판매기 등만 고치면 되지만 디노미네이션을 하면 대기업부터 구멍가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전체의 회계장부와 전산프로그램 등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재경부 “디노미네이션,경기에 찬물” 재정경제부는 박승 한은 총재가 2002년 취임 직후 화폐개혁 구상을 꺼냈을 때부터 ‘디노미네이션 반대,고액권 발행 찬성’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김광림 차관은 13일 기자들과 만나 “디노미네이션을 하게 되면 과소비를 부추길 수 있고 물가도 자극할 수 있다.”면서 “득실을 따져 본 결과,경제적 실효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할 경우,기업·가계 등 경제 주체들의 심리적 위축과 경제적 충격에 대한 우려감도 깔려 있다. 재경부는 고액권 발행 논의가 나온 데 대해서는 내심 반기는 눈치다.겉으로는 ‘연간 수표 발행 및 거래비용 8000억원 절감’ 등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속으로는 경기부양효과를 기대하고 있다.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도 이날 10만원권 화폐 발행에 협조할 뜻을 밝혔다. ●시민단체들 고액권 발행 반대 전문가들은 대체로 고액권 발행에는 찬성하면서도 디노미네이션에는 신중한 입장이다.LG경제연구원 김성식 연구위원은 “10만원권 발행에는 찬성”이라면서 “그러나 디노미네이션은 경제위기 상황 등에서 개발도상국들이 하는 혁명적인 조치로 시장주도 경제가 자리잡은 국내에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한국개발연구원(KDI) 김현욱 박사는 “디노미네이션은 물론,고액권 발행 또한 비용에 비해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며 “신용카드와 전자결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10만원짜리 고액권을 발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시민단체들도 뇌물제공 등 부정부패를 부추기고 지하경제 등 자금의 음성화를 조장할 수 있다며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은이 디노미네이션을 관철시키기 위해 고액권 발행을 같이 제시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금융권 관계자는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고액권 발행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면서 “두가지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은 다소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안미현 김태균 김유영 기자 hyun@ ■화폐개혁 3차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3차례 화폐개혁이 있었다. 첫번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북한군이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보관돼 있던 1000원권을 탈취,북한 인민권과 함께 시중에 유통시키고 100원권을 마구 찍어내면서 생겨난 경제교란 때문이었다.정부는조선은행권 유통을 정지시키고 이를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도록 했다.53년 1월까지 5차례에 걸쳐 719억원의 조선은행권이 한국은행권으로 교체됐다. 두번째는 살인적인 인플레를 잡기 위해 53년 2월 이뤄졌다.45년부터 52년까지 산업생산은 부진한데 막대한 군사비 지출이 이어져 물가상승률이 무려 4만여%에 달했다.정부는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고 구권 100원을 1환으로 교환해줬다. 특히 화폐교환 때 일정액을 은행에 예치하는 ‘봉쇄(封鎖)예금’을 의무화해 과잉유동성(돈)을 흡수했다.물가가 잡히고 봉쇄예금을 통해 산업자금까지 확보,1석2조의 효과를 올렸다. 세번째는 62년 6월.5·16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10환을 1원으로 바꿨다.목적은 물가상승 억제와 산업자금 확보를 위한 봉쇄예금의 도입.53년의 성공적인 화폐개혁을 본뜬 것이었지만 최고 100%에 이르는 봉쇄율에 국민들이 강력 반발하자 1개월여만에 자금봉쇄를 해제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 ■새 화폐인물 누구로 고액권 발행에 대한 논의가 급진전되면서 남성 전유물로 통했던 화폐모델에 여성이 채택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은행 김두경 발권국장은 “현재 지폐의 모델이 모두 조선시대의 이씨 성을 가진 남자들(세종대왕,이황,이이,이순신)로만 돼 있다는 지적이 있다.”며 “시대가 바뀐 만큼 여성모델을 화폐에 등장시키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덕여대 김경애 교수 등 일부 여성학자들은 그간 여성지위 향상 차원에서 여성을 화폐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지난해 만들어진 ‘여성인물을 화폐에! 시민연대’는 모델후보로 선덕여왕,신사임당,유관순,명성왕후,허난설헌,최승희를 꼽았다.일본은 오는 7월부터 메이지시대 여성 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 초상을 넣은 화폐를 발행할 예정이며,호주는 화폐 양면에 각각 남성과 여성모델을 쓰고 있다. 남성 화폐모델로는 장영실,정약용,광개토대왕,김구 선생,안중근 의사,담징,김홍도 등이 거론되고 있다.2001년 한은의 여론조사에서는 김구,안중근이 이황,이이보다 순위가 높았다. 한은은 설문조사를 통해 화폐모델을 선정할 계획이며,남성 화폐모델을 채택할 경우에도 조선시대를 벗어나 5000년 역사로 지평을 넓히겠다는 입장이다. 김유영기자 carilips@
  • 주말매거진 We/꼬불 꼬불 뒷골목 -서울 천호4동 ‘족발골목’

    도시의 가로가 정장 차림으로 맵시있게 차려입은 신사나 숙녀라면,골목은 일상복을 입은 바로 우리들입니다.그래서 골목길은 정겹고 인간의 정취가 서려 있습니다.1000만 거대 도시의 뒷골목을 찾아 그 유래와 요즈음 풍경을 살펴봄으로써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는,흔해 빠진 말은 않겠습니다.하지만 입소문이 나 전국에서 알아주는 족발이죠.” 서울 지하철 5·8호선 천호역에 내려 3·4번 출구로 나와 현대백화점 옆으로 난 2차로를 걸어 들어가다 보면 한길에서도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떨어진 입맛을 금방 되살릴 듯한 이 은은한 냄새의 주범(?)은 현대백화점에서 7∼8분 거리인 천호4동 417 ‘희망3길’ 족발 골목이다. 천호동산 족발은 인근 423번지에 위치한 이른바 ‘텍사스촌’과 운명(?)을 같이 해왔다는데,업주들은 이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족발전문 골목길로 변한 것도 대규모 윤락가가 들어서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내 대표적 윤락가인 천호4동 423 일대에는 현재 40여개 업소만 남았지만 한때 400여개를 헤아렸다.여기서 생활하던 수천명의 ‘입’을 맞추려는 맛내기 경쟁은 자연스레 불꽃을 튀겼다. ●야화(夜花)들이 만든 천호동 족발의 전성기 “80년대 초에는 천호동이 전국의 ‘족발 열풍’을 주도했습니다.장충동 아래로 치면 서운하지요.” 강원도 철원군이 고향인 선친에 이어 족발집을 운영 중인 철원족발 업주 김광수(50)씨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서울로 피란와서 자신이 태어난 곳도 바로 지금의 가게란다.선친과 함께 상경한 외삼촌이 골목 10여m 앞에 낸 가게도 건재하다. 여행객들과 까다롭기만 한 윤락가 ‘밤꽃’들의 입맛을 사로잡자 천호동 족발의 유명세는 80년대 초 야식 열풍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김씨는 “횟집 못잖게 족발집도 칼질 솜씨가 맛을 내는 데 필수”라면서 “당시 전국 각지에서 천호동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라면 스카우트해가는 바람에 인력 충당에 애를 먹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시민 유영규(40·강동구 암사4동)씨는 “소문이 자자해 고교 때 경기도 광주시에서 버스 타고 와 족발을 사먹은 적도 많다.”고 말했다. ●전쟁통 피란민들이 일궈낸 반세기 전통 보기 드물게 2층짜리 업소가 10여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호동 족발골목은 3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때 강원도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닭무침,막국수,파전 등 강원도 전통음식과 함께 팔다가 주변 여건 변화에 따라 60년대 말∼70년대 초 전문화 시대를 열었다. 춘천,홍천,철원 등 강원도 지명을 딴 업소가 이를 말해준다.이들 3개 강원도지명 족발집은 창업자의 아들 내외가 대를 이어 영업하며 독특한 맛을 선보이고 있다.나머지도 처음엔 업주가 강원도 출신이었는데,새 주인을 만나면서 천호족발·장충족발·몽땅족발 등으로 가게 이름이 바뀌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교통의 요충지인 이 곳에 강원도 각 지방을 오가는 시외버스터미널이 바로 옆에 들어서 90년대 초 터미널이 한 건설회사에 매각될 때까지 여행자들의 입맛을 끌어당겼다 업주들은 “한창 잘 나갈 때는 하루 매출이 1000만∼1500만원을 기록하기도 했다.”며 화려했던 옛날을 회고했다. 9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주변 재개발 등으로 환경이 급변해 전성기에 비해 내리막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괜찮은 편이다.경기도 성남시 등 인근 지역은 물론 캐나다·일본 등 해외로부터 단골이 심심찮게 찾아오고,영양식으로 평가되면서 가족단위 고객도 늘었기 때문이다. 업소마다 하루에 평일 40∼50인분,휴일 70∼80인분을 판다.많게는 하루에 돼지 20마리 분량이다. 또한 이 일대가 서울시 뉴타운 건설 예정지에 포함돼 전통은 보존하되 새로운 음식문화에 맞는 리모델링으로 특화,곧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한다는 꿈에 한층 부풀어 있다. 송한수 기자 onekor@
  • [박기철의 플레이볼]타력은 시력의 힘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인 테드 윌리엄스는 한국전쟁과 2차대전 등 두 차례나 조종사로 참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그러나 그가 보통의 타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진,배트가 공에 맞는 순간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시력을 가졌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공군에 복무하면서 당시까지 미국 공군이 해 오던 모든 시력 검사 기록을 깨뜨렸다.또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있듯이 눈에도 주안이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오른손잡이면 오른쪽 눈이 좋고,왼손잡이면 왼쪽 눈이 좋다.그러나 타자는 오른손잡이면 왼쪽 눈이 더 좋아야 그만큼 공을 더 잘 볼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윌리엄스는 이런 면에서도 행운아였다.왼손잡이인 그는 오른쪽 눈의 시력이 더 좋았다. 보통 일반인들은 시력 전문가들이 정지시력이라고 부르는 것만 좋아도 일반 생활에는 거의 지장이 없다.정지 시력이란 우리가 흔히 신체검사에서 받는 것처럼 시력 검사표를 읽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다.또 운동선수라 해도 거의 모든 종목은 정지시력만좋으면 경기 기술을 발휘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그러나 움직이는 공을 몸을 움직이면서 때려야 하는 야구에서의 타격은 정지시력만 좋아서 해결되지 않는다.시력 전문가들이 동적시력이라고 부르는,움직이는 상태에서의 시력이 더 중요하다. 또 움직이는 물체에 초점을 유지하는 시표 추적 능력,두 물체간의 거리를 판단해 내는 거리 인지 능력,보이지 않는 물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주변시,흔히 우리에게는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알려진 심상화 능력 등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시력이 필요하다.그런데 아직도 많은 타격 지도자들은 이런 종류의 시력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다.또 이러한 능력이 훈련을 통해 향상될 수 있다는 사실에 둔감하다. 이런 시력에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은 공군이다.미국 공군사관학교 야구팀은 자신들의 전문 분야인 동적시력을 야구팀 훈련에 도입해 큰 도움을 받았다.93년 시즌을 앞두고 전 선수단에 비시즌 동안 동적시력 향상 훈련을 시킨 결과,타율이 .319에서 .360으로,홈런은 32개에서 76개로 급증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그리고역대 유명한 타자들의 타격 장면을 분석한 결과 그들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시력에 아주 뛰어난 능력이 있었고,나름대로 훈련 방법을 개발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최신 타격 이론에서는 스윙 훈련 이상으로 시력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우리 야구계도 오래된 이론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훈련 방법을 끊임없이 시도해야만 지난해 삿포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의 어이없는 패배를 설욕할 기회가 생긴다. ‘스포츠투아이’상무이사 sunnajjna@
  • 미군의 ‘노리개’ 기지촌 여성의 삶

    “쌀로 힘을 내는 작은 갈색 섹스기계” 필리핀 주둔 미군이 현지 기지촌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그야말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혼합된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미국은 세계 도처에 군사기지를 두고 수십만 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전쟁 수행중에도,평화시에도 미군은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조직을 움직인다.그 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들만의 세상-아시아의 미군과 매매춘’(산드라 스터드반트 등 지음,김윤아 옮김,잉걸 펴냄)은 미군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성적인 ‘휴식과 오락’이라는 시각에서 아시아 여성들의 인권유린 문제를 다룬다.미국이 아시아에서 한국전과 베트남전쟁을 치른 이래 필리핀,태국,타이완,오키나와,한국,베트남 등지의 수백만 여성들이 매매춘으로 내몰렸다.저자들은 아시아 각국 ‘양공주’들의 애환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겨냥하는 것은 군사주의와 남성주의,그리고 인종주의로 포장된 미제국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지구 표면적 절반의 방위를 담당하는 미 태평양사령부가 주둔하는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이 책은 미국이 해외파병 미군을 위한 ‘지원체계’의 일환으로 군의 매매춘을 정책적으로 입안,조장하고 있으며 이를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동맹관계’를 통해 관철시키고 있음을 밝힌다.한·미관계에서 성적 종속의 문제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국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자신의 경험을 곁들여 설명한다.“‘싸구려 나라’에 도전해본 적이 없는 그들은 인종차별적 사고에 젖어 한국인들과 함께 지내던 내게 한국의 전통음식인 김치가 소변으로 발효시킨 것이 맞느냐는 식의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식민정책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구조적 여건들을 조성하고 살찌우기 위한 것이었다.” 책은 필리핀의 올롱가포,오키나와의 킨,한국의 동두천 등 아시아 각국의 대표적인 기지촌 술집 시스템과 성노동 실태도 다룬다.역사학자이자 사진작가인 저자 산드라 스터드반트는 “야전군의 무기만큼이나 필수적인 게 군대의 매매춘”이라고 강조한다.1만 3500원. 김종면기자 jmkim@
  • 마오쩌둥 110돌에 증손자 태어나

    |베이징 연합|중국 공산당 창시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사후 27년 만에 증조부가 됐다.그의 탄생 110주년 기념일인 26일 첫번째 증손자가 태어났다고 관영 베이징 타임스(京華時報)가 27일 보도했다.마오쩌둥의 손자인 마오신위는 이날 베이징 병원에서 태어난 한 아기의 아버지가 됐다.가족들은 아직 아기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1893년 12월 26일 태어난 마오쩌둥은 1949년 혁명 이후 1976년 타계할 때까지 중국을 이끌었지만 공산당 정부는 그의 공산주의 정책을 이미 오래 전에 대부분 폐기했다. 30대 초반인 손자 마오신위는 마오쩌둥의 둘째 아들 마오안칭의 아들이며,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 국군포로 전용일씨 50년만에 귀환

    위조여권으로 한국행을 시도하다 중국 공안에 체포됐던 탈북 국군포로 전용일(72)씨가 억류 41일 만인 24일 오후 중국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전씨는 공항에서 “50년 전 한국을 위해 복무하다가 잡혔었다.무산 광산에서 일했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지만 한시도 고향산천을 잊은 바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체포돼 전사·실종 처리된 뒤 50년4개월 만에 다시 고국의 품에 안기게 된 전씨 사례는 무뎌져 가고 있던 우리 정부와 사회의 국군포로에 대한 처우 및 의식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다.북한을 탈출,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34명.북한에 있는 생존 국군포로는 500여명으로 추산된다.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귀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됐다.”고 밝혔다. ●성의 보인 중국 전씨가 위조여권 소지 및 밀출입국 혐의로 중국 항저우 공항에서 체포된 것은 지난 11월13일.국방부 등 정부의 실책으로 전씨가 체포돼 북송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우리 정부는 뒤늦게 총력외교에 매달렸다.처음,북한과의 관계를 고려,“범법자일 뿐이다.”는 식으로 냉담하게 반응했던 중국은 시간이 가면서 상당히 성의를 보였다는 후문이다. 정부도 전방위 외교노력을 펼쳤다.노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국가는 마땅히 보호·지원할 책임 의무가 있다.”며 전 부처를 독려했다.중국도 전씨의 국내 실정법 위반 사실에도 불구,‘약식’사법처리했다.지난달 25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에서 “전씨의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며 한국행을 시사했다.지난 16일에는 최종 송환방침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다만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조용하게 일을 처리하자고 요구했고,전씨가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공개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정부는 탈북자를 도운 혐의로 중국에 수감중인 프리랜서 사진작가 석재현씨의 가석방을 요청하고 있다.정부 관계자는 “가석방 요건(형기의 반 이상 수감)이 되는 내년 1월 중순 이후 석씨도 한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했다. ●전씨 송환 전말 전씨는 다른 탈북자 최응희(67)씨와 함께 한국에 왔다.전씨는 지난53년 7월 강원도 제암산 고지에서 국군 6사단 19연대 3대대 2중대 사병으로 근무 중 포로가 돼 실종·전사 처리됐다.북한탈출 직후엔 탈북 브로커에 의존,6월 우리 정부와 접촉했지만 국방부가 무시했다.함께 탈북한 아들이 북송된 뒤인 9월15일 주중 한국대사관과 접촉했지만 그것도 정부의 직무유기와 주먹구구식 처리로 무산됐다.기다리다 못한 전씨는 탈북자 최씨와 위조여권을 갖고 독자 입국하려다 검거됐고,이 사실이 우리 시민단체를 통해 전해지면서 외교당국이 나서게 됐다. 김수정기자 crystal@ ■동생 전수일씨 기쁨의 눈물 “가슴이 마구 떨려 말을 못하겠어요.꿈에 그리던 형님을 50년 만에 만난다니….” 24일 오후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전용일(72)씨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접한 동생 수일(사진·64·경북 영천시 화산면 유성리)씨는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수일씨는 “방금 전 오전 10씨쯤 당국으로부터 형님이 돌아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느냐.”며 “대구에 사는 누님(영록·77),동생(분희·58)과 함께 단숨에 서울로 달려가 형님을 뵙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그는 “당국이 26일쯤 형님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했으나 한시라도 빨리 상봉했으면 좋겠다.”며 “그동안 형님의 귀국을 위해 애써 준 정부와 민간단체,언론 등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전씨는 “서울에서 형님을 상봉한 뒤 곧바로 신령면 선산의 부모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겠다.”며 “당분간 우리 집에서 형님을 편히 모신 뒤 여생에 대한 계획을 세우도록 돕겠다.”고 덧붙였다. 글·사진 영천 김상화기자 shkim@ ■전용일씨 어떤보상 받나 24일 귀국한 국군포로 전용일(72)씨는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게 될까. 당국의 조사가 끝나야 보상금이 확정되겠지만 지원 근거인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추산하면 정착지원금을 포함,최소 4억 2000만원은 받을 수 있다. 이 법률에 따르면 병사의 경우 연금지급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군 입대일로부터 3년이 지날 경우 하사로 특례임용,하사 4호봉의 보수와 군인연금을 받게 된다. 물론특별한 공적이 있을 경우 특별 진급도 가능해 중사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지난 53년 7월 강원도 김화지구 전투에서 일병 신분으로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그는 최소한 하사로 특진,하사 4호봉 기준의 봉급지원분 2억 2000여만원을 받게 된다. 퇴직연금 명목으로 일시금 9000여만원 또는 매월 60만원도 수령한다.또 20평형 규모의 아파트를 구매가격으로 환산한 주택지원금 1억 100만원을 지원받게 되는데 이는 향후 정착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밖에도 전씨가 제공하는 특별정보나 지참장비가 있을 경우 그 가치에 따라 특별지원금조로 최대 2억 5000만원을 추가로 받을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전씨가 군 복무를 끝낸다는 의미의 면역(免役)행사와 서훈추서도 이뤄질 전망이다. 다만 공개 행사가 전씨의 재북 가족에 대한 신변위협 요인이 될 수 있어 전씨의 소속부대였던 6사단에서 간소하게 치를 계획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정착 지원금과 면역식 등은 국가를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된 군인에 대해 여생을 편안하게 마칠 수 있도록 국가가책임을 진다는 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오타니 컬렉션’ 은/日 정토진종 승려 오타니 ‘수집’ 1916년 총독부박물관에 기증

    ‘서역미술’전에서 공개되고 있는 오타니 컬렉션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54년부터 몇몇 유물을 전시했고,옛 조선총독부 청사로 옮긴 1986년부터는 200여평의 중앙아시아실에서 본격적으로 공개했다.1996년 현재의 임시 건물로 옮기면서 전시면적이 좁아지자 수장고에서 보관해 왔다.이번 전시회는 2005년 개관하는 용산 새 박물관의 ‘중앙아시아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오타니 코즈이(大谷光瑞·1876∼1948)는 일본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본산 니시홍간지(西本願寺)의 제22대 문주(門主)였다.영국에 유학하고 있던 오타니는 불교전래의 경로였던 서역으로 독자적인 탐험조사에 나섰다.탐험은 1902년,1906년,1910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탐험의 범위는 중앙박물관 유물의 고향인 현재의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일대 뿐 아니라,티베트·네팔·인도 등 거의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쳤다. 오타니는 제3차 탐험이 진행되고 있던 1914년 니시홍간지의 운영에 문제가 생겨 재정책임자가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자,주지직을 사임하고 중국의 뤼순으로 간다.이후 수집된 유물은 당시 경성의 조선총독부박물관과 뤼순의 관동청박물관 등으로 분산되어 아직도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1916년 총독부박물관에 기증된 오타니 컬렉션은 이해 9월부터 경복궁 수정전에서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일반에 공개됐다.이후에도 유물은 한동안 수정전에서 전시하다가 미전을 위하여 1947년 모두 진열본관의 창고에 넣었다. 한국전쟁 동안 컬렉션은 두차례 공산군에 넘어갔지만 대부분 무사했다.다만 대형폭탄이 투하되는 바람에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했던 금발머리의 여자 미라는 훼손되어 일부분만 남았다. 서동철기자
  • “종교도 상식 통해 삶에 접근해야”도법스님, 종교 문제점 진단

    “종교는 역사적으로 말썽이 많았고 아편 노릇도 했다.지금도 그렇다.종교가 제대로 갔다면 한국 사회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는 과학적이고 건강한 상식을 통해서만 삶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도법(사진·지리산 실상사 주지)스님이 종교의 실상을 이렇게 짚었다. 제주에서 태어나 1965년 금산사 송월주 스님에게 출가한 스님은 실천적 학승으로 이름 높다.현재 각계를 망라한 ‘지리산 생명연대’대표를 맡고 있다.스님이 지리산에서 한국전쟁 등으로 죽은 원혼을 달래는 ‘1000일 기도’를 막 끝내고 16일 오후 광주 원각사에서 2시간여에 걸쳐 ‘평화’를 주제로 설법했다. 스님은 “부처짓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질하면 도둑놈 되지요.”라고 좌중을 향해 수 차례 되물었다.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은 우리가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즉 우리가 생각하고 가꾸는 대로 이뤄지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부처가 된 뒤 부처로 살아간다는 것은 잘못됐다고 잘라 말했다.수행이나 기도,삶이 일치되지 않으면 도둑놈이 도둑질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질타했다. 스님은 ‘불교는 안팎이 없다.’며 평소의 연기적(緣起的) 존재론을 강조했다.“불교는 관계성 논리에 어긋나면 안된다.내면적·정신적 수행과 사고방식은 안맞다.육체와 정신의 분리가 불가능한데 정신이 육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진단했다.또 석가모니 말씀을 빌어 ‘애경제불’을 들었다.“제불은 석가모니나 미륵불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다.본래 부처는 내가 만난 모든 상대들”이라고 역설했다. 스님은 이어 “지금 우리는 진실에 대해 무지하고 왜곡된 진실을 보는 안목이 문제다.불교는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불교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무엇보다 불교는 현재가 중요하다.내세가 중요한 게 아니고 현재가 초점”이라고 힘줘 말했다. 광주 원각사 남기창기자 kcnam@
  • [씨줄날줄] 老母 봉양

    한국은 가족윤리의 모범을 보인 도덕국가였다.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는 효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해 왔다.효라는 인본주의 덕목은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많은 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효 문화’에 경의를 나타냈다.그러나 산업화·도시화·핵가족화 등의 사회변화 속에 아름다운 전통도 퇴색하고 있다.정성을 다해 늙고 병든 부모를 봉양하던 효도는 이제 전설이 되는 듯하다. 노부모 봉양을 둘러싼 갈등이 점점 사회문제화하고 있다.법원이 나서 갈등을 조정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춘천지법 영월지원 가사합의부는 16일 관절염 등을 앓고 있는 76세의 어머니를 위해 삼형제가 나누어 부양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큰아들은 100만원 둘째와 셋째 아들은 각각 50만원씩 매월 어머니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지난 11월에는 상속만 받고 부모를 봉양하지 않은 자식에게 상속 재산을 부모에게 돌려주라는 판결도 있었다. 지금의 노인들은 한국전쟁 등 사회의 격랑을 힘겹게 헤쳐 나오면서도 부모를 잘 모셨다.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고 굶주리면서도 교육시켰다.그들은 자식 교육과 부모 봉양이라는 힘겨운 이중 일을 해온 세대다.그들에게는 모진 세월이었다.그 세월 속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다.그들의 황혼이 저녁 노을처럼 아름답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러나 그들의 황혼 인생은 불행하다. 그들의 불행은 두겹이다.불행한 시대를 살았고,지금은 자식들에게 부담스러운 천덕꾸러기 신세라는 또 다른 불행을 겪고 있다.법원의 갈등 조정 판결을 받은 노모의 생활도 불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노모를 잘 모시지 않은 삼형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그렇지만 그들에게 자신있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부모 모시는 문제로 갈등을 빚는 가정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도 20여년후에는 노인인구가 14%를 넘는 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노인문제를 효라는 미명아래 개인에게만 부담지울 수는 없다.그렇다고 국가에서 모두 책임질 수도 없다.개인과 국가가 공동으로 책임질 문제다.누가 책임을 맡든 그 밑바탕에는 효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그런데 그 효의 정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어 안타깝다.사람은 누구나 다 늙는데…. 이창순 논설위원
  • 4대 진상규명법 특위 통과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는 16일 전체회의를 열어 동학농민혁명,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일제하 강제동원,한국전쟁 민간인희생 등 4대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각각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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