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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영복교수와 고전의 인연

    신영복 교수가 고전과 맺은 인연은 좀 특이하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을 할 때만해도 고전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으로 구속돼 장기복역하면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다. 59학번인 그는 “60년대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환경에서 군사독재와 부정부패, 서구문화로 치장한 ‘근대기획’ 등으로 우리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되지 않는 불행한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때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스스로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전 읽기를 통해 과거를 재조명하고, 현재와 미래를 모색해보는 그의 고전강독법도 이같은 상황인식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노촌 이구영 선생을 만난 것도 크게 작용했다. 벽초 홍명희와 위당 정인보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노촌은 작고한 이가원 박사와 동학 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는 한학의 대가라고 한다. 그와 한 감방에서 4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고전을 익혔는데, 엄청난 양의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 두었고, 그것이 후일 전공도 하지 않는 고전을 강의하게 된 밑천이 됐다.
  • [인사동을 가다]고서적·미술품 가게

    [인사동을 가다]고서적·미술품 가게

    “This is not Korean!(이건 한국의 것이 아니잖아요)” 인사동에서 지난 30년 동안 고미술품 가게 ‘동예헌’을 지키고 있는 안성철씨는 “인사동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실망하며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말한다. 골동품가게와 고서점, 필방이 즐비하던 인사동이 국적을 알 수 없는 먹을거리와 볼거리로 뒤덮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10여년 전부터 ‘전통’을 표방한 음식점과 관광상품 가게가 인사동길을 따라 빼곡히 들어서는 바람에, 진짜 한국의 전통 물건들을 파는 가게는 하나 둘 자취를 감추거나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느끼러 인사동에 온다고 하지만,‘진품’ 가게를 찾는 일은 ‘숨은 그림 찾기’나 다름 없다. 수십년이 흐르도록 우리 고유의 손때 묻은 물건을 팔며 인사동길을 지키는 고서점과 고미술품 가게 4곳을 찾았다. 인사동은 한때 출판의 중심지였다. 한국전쟁 전후 서점 20여군데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정도로 성시를 이뤘는데, 그중 삼중당·동광당·일성당 등이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거나 자리를 옮겼고, 고서점 5군데만 남아 있다. 인사동 고서점의 자존심격인 ‘통문관’과 ‘승문각’은 2대에 걸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통문관, 희귀본도 부탁하면 구해줘 ‘통문관’은 생긴 지 60여년이 넘은 대표적인 고서점이다. 안국역 쪽에서 인사동길에 접어들어 스무걸음 정도만 걸으면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작은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방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수백년된 고서적부터 최근 출판됐지만 일반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까지 소장하고 있다. 아버지 이겸로씨의 뒤를 이어 이곳을 지키는 이종운씨가 수집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도 이씨에게 말해 두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도 있다. 이씨는 “소중한 책은 아끼는 마음과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만 판매한다.”며 “무조건 높은 가격을 제시한다고 해서 팔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승문각, 인터넷 통해 소장본 판매도 통문관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책들이 쌓여 있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승문각’이 나온다. 오전에는 원래 주인인 김지헌씨, 오후에는 김씨의 딸인 김혜정씨가 이곳을 지킨다. 홈페이지(www.seungmunkak.co.kr)를 통한 판매를 본격화하고 있다. 김혜정씨는 “아버지가 평생 모은 책이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아 정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오후 6시쯤이면 문을 닫고 주말에는 문을 닫는 경우가 많은 만큼, 바쁜 직장인들은 인터넷을 통해 주요 소장본들을 구경하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흔히 ‘골동품가게’라고 불리는 고미술품 판매점은 수도약국에서 탑골공원 쪽으로 나가는 길에서 곁가지로 뻗어 있는 골목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의 고미술품 판매점은 소장하고 있는 물건의 일부분만 전시해 놓기 때문에, 구입보다는 구경이 목적인 사람들은 ‘고도사’와 ‘동예헌 갤러리’처럼 전시가 잘 된 곳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예헌, 3개월에 2번 기획 전시회 수도약국에서 50m 정도를 올라오면 ‘동예헌 갤러리’가 나온다. 지하에는 고가구 및 생활소품들,1층에는 종합적으로 전시돼 있다.2층에는 도자기,3층에는 고서화가 진열돼 있다. 평소에는 1층과 2층을 개방되고 있다. 하지만, 관람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공개하며,3개월에 2번꼴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난 1일부터 12일까지는 ‘우리 민예와 고가구전’을 열렸다. ●고도사, 모든 전시품에 가격 표시 수도약국 건너편에서 좁은 샛길에 자리잡은 고미술품점 ‘고도사’.2·3층은 전시 때만 개방하고 1층은 항시 열어 놓는다. 주로 고가구와 생활소품이 많으며 대부분의 전시품에 가격을 표시해 고미술품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편하게 구입할 수 있는 점이 장점이다. 글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 시인 박인환의 고향 ‘인제’

    [문학이 머문 풍경] 시인 박인환의 고향 ‘인제’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중략)…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 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펑펑 눈이라도 내리는 겨울날, 찻집에 앉아 애잔한 음악과 함께 낭송되던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는 대학가 감상적 낭만의 대명사였다.20∼30년전까지만 해도 찻집마다 단골메뉴로 들려주던 ‘목마와 숙녀’는 그렇게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한국전쟁이 가져다 준 허무와 절망, 시대적 불안과 애상을 노래한 전후의 대표적 모더니즘 작품인 ‘목마와 숙녀’는 애절한 한국인의 한(恨)풀이이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를 보듬은 31세 요절 시인 박인환(朴寅煥)은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픔을 인간의 비극으로 승화시켜 상처받은 시대적 감성을 달래주었다. 젊은 나이로 요절한 시인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세월이 흐를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금도 애송되고 있다. 박인환 시인은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이후 서울로 유학해 서점을 경영하며 모더니즘 시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점을 통해 문단의 주요인사와 교분을 넓혔고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전쟁 이후 상실과 자조의 풍조가 지배적이었던 당대의 시풍을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등으로 담아내면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한때 외항선을 타기도 했던 박인환 시인은 당대 문인들 가운데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을만큼 지나칠 정도로 정장과 외투를 선호했다는 후일담이다. 시 쓰기에 몰두하던 박인환은 공교롭게도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 추모의 밤 행사때 술을 마시고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친구들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신에 그가 평소에 좋아했지만 돈이 없어 마음껏 먹지 못한 조니워커를 쏟아 부어주며 그의 시 ‘목마와 숙녀’처럼 살다간 시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략)/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후략)” 그는 해방후 혼란의 소용돌이와 6·25 전란의 황폐 가운데서 70여편의 시를 남겨 한국현대시의 맹아를 키워 냈으며,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현대시의 토착화에 기여하였고 문학사에 큰획을 그어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인환 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수십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박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88년 남북리 아미산공원에 시비를 건립했다가 이후 도로공사로 현재의 합강정 소공원에 이전·건립했다. 해마다 10월이면 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박인환 문학제’도 열린다. 문학제는 추모 백일장과 문학상 시상식, 시낭송대회, 문인초청 세미나, 동화구연대회 등 다채롭게 개최된다. 인제군 문화재 담당 윤형준씨는 “생가터 복원을 위한 자료조사를 마치고 산촌박물관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2006년까지 생가터에 15억원을 들여 상징물과 동상, 시비 이전사업을 펼쳐 문학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후략).” 시인이 남긴 시 가운데 ‘세월이 가면’도 지금까지 세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애송되고 있다. 인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7)시흥 소래염전과 소래포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7)시흥 소래염전과 소래포구

    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이 폐허의 소금밭을 뒤덮고 있다. 수인선 철길이 끊긴 지 오래 되어 잡초만 무성하다. 염부들이 떠난 폐염전이 고즈넉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무너져 내린 소금창고만이 얼마 전까지 소금을 만들었던 노동의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소금밭에는 갈대가 우거져 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라니 한 마리가 갈대 속으로 몸을 낮춘다. 염판에 깔던 옹기편만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화려했던 옛 시절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고….’라고 했듯 오랜만에 둘러본 소래 풍경도 수상하다. 옛 염전을 둘러싼 외곽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해 머잖아 마지막 남은 이 소금밭으로 침공을 개시할 태세다.2004년 겨울. 소래는 이렇듯 불안정한 풍경으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싸고 싱싱한 새우젓으로 소래포구 ‘북적북적’ 경인지역에서 자란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하리라. 수원∼인천을 오가는 협궤열차를 타고 가자면 끝없이 펼쳐지던 군자와 소래의 염전을. 조개나 새우젓 따위를 광주리에 얹은 아낙들이 오르면 기차는 순식간에 어물전으로 돌변했다. 화성의 야목 같은 정거장에서도 맛, 굴 등을 준비한 아낙들이 올라타 ‘어물전’풍경에 또 다른 색을 덧칠하곤 했다. 사람들은 김장철이 되면 으레 소래포구로 나가 새우젓 등속을 준비했다. 마포새우젓이 명성을 다해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이후 소래포구가 그 역할을 이어 경인지방의 새우젓 물량을 감당해 오고 있다. 소래까지 오고가는 차비가 더 들 수도 있지만 싸고 싱싱한 맛에 멀다 않고 소래포구를 찾곤 한다. 수인선 열차는 낭만의 표상처럼 인식돼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코스가 되기도 했다. 드넓은 염전지대를 거친 뒤, 왁자지껄한 포구를 지나서 갯냄새 물씬한 인천항에 당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열차의 낭만성을 보증하고 남았다. 그러나 이제 염전도 사라지고, 기차도 없고 남은 것은 추억뿐이다. 시흥시 군자동에 있던 군자염전 터는 아파트단지로 바뀌었고 군자역만 남아 옛날을 말하고 있다. 남동염전 터는 인천시 남동구 남동공단에 편입돼 공장지대로 변했다. 시흥의 소래염전만이 어정쩡한 ‘대기발령’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소래염전터에서는 포동, 일명 새우개라 부르는 마을을 주목해야 한다. 큰 당나무들이 동산 위에 서 있고 당집도 남아 있어 예부터 마을신을 크게 모셨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해마다 배치기 신명에 고기잡이 풍어를 만끽하던 포동 당제는 끊긴 지 오래이고, 신성 공간이었던 당집 주변엔 온갖 영세 공장과 너저분한 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당집 바로 옆 컨테이너박스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가롭게 라면을 끓이고 있다. 소래포구가 각광을 받기 전에는 모든 배들이 새우개포구로 몰려들었다.1930년대까지만 해도 잘나갔던 새우개포구는 염전이 생기면서 막을 내렸고, 그 임무를 소래포구에 넘겨주었다. 즉, 포리포구는 소래철교의 부설과 더불어 그 명맥이 끊기게 된 것. ●소래염전터 서해안 ‘마지막 남은 허파’ 노인정에서 만난 이 마을 토박이 황구인옹은 “포동 사람들도 지금은 소래포구로 나가 장사들을 하는데, 그때는 소래에 집이나 있었나. 포동이 훨씬 컸지. 소래에 배 닿기 시작하면서 저렇게 커졌는데, 그게 불과 30년도 안돼. 월곶은 10년도 안됐고…. 포동에 배 없어진 건 소래다리를 놔서 염전다리 놓는 바람에 배가 못들어와 그렇게 됐어.”라며 이곳의 역사를 소개했다. 유흥가로 변한 월곶이나, 번화한 저잣거리 같은 소래포구나 모두 근래 생겨난 곳임이 황옹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시흥시 향토자료실 김낙기 위원은 “경기 서해안은 워낙 민감하게 변화를 거듭해 세심하게 보지 않으면 그 역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침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단장 박현수)에서 이들 지역을 집중 조사하고 있어 조만간 지난 100년의 사라질 뻔한 역사가 복원돼 전모를 드러낼 전망이다. 소래염전은 경기 서해안의 ‘마지막 남은 허파’이다. 면적도 엄청나게 넓다. 생태환경공원을 꾸미자는 주장에서부터 토지분양으로 수익을 올리려는 소유주의 집요한 주장까지 가세, 이 땅의 용도가 쉬 정리되지 않고 있다. 시골포구였던 월곶도 번쩍이는 관광지로 변한 지 오래다. 소래염전마저 아파트용지로 내주고 만다면, 이곳 서해안은 얼마다 더 황량하고 복잡해질 것인가. 천만 다행인 것은 시흥시가 생태용도로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이다. 경기 서해안에 이만한 땅은 이곳뿐이므로 소래염전의 운명에 관해 모두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들 폐염전은 불과 70여년 전만 해도 갯벌이었다. 소래염전이 1930년대, 군자염전은 그보다 조금 이른 1920년대 초반에 생겼다. 군자·소래염전은 한반도 최대의 염전이었다. 우리나라의 천일염 역사는 1907년 일본인이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 주안에 1정보 규모의 시험용 염전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는 이곳 염전들이 가히 압도적이다. 조용하던 이곳의 지역적 정체성과 단일성이 흔들리는 최초의 사건이 염전에서 시작됐다. 그때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왔으며, 그 바람에 일본 대신 중국의 천일염 기술이 전파되었다.3·1운동이 났던 해, 중국 산둥성에서 중국노동자들이 몰려와 염전 공사를 도맡았고, 자본은 일본인이 댔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 남한보다 일찍 염전 기술을 익힌 평안도 사람들이 집단으로 남하해 이곳에 ‘평안도촌’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평안도촌은 군자역 주변 마을로,1922년 군자염전 축조사업 때 평안도 용강 등지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오면서 취락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피양촌’이라고 불렀다. 군자역 서북쪽 지역은 ‘웃피양촌’, 북쪽 지역은 ‘아래피양촌’으로 불렸다. 또 군자역 뒤는 군자염전 염부들이 이사와 사는 곳이라 하여 염전이민사나 염전사택으로 불리곤 했다. 오늘날 전철 4호선 군자역이 바로 이 지역으로, 평안아파트에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제는 소금을 실어나르기 위해 이곳에 협궤열차를 부설했다. 민간이 부설한 철도로, 순전히 경제적 목적의 철도였다. 처음에는 경동철도라 불리다가 후대에 수인선으로 바뀌었으며, 소래포구의 철교도 경동철교에서 나중에 소래철교로 바뀌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수인선은 기억하지만 수려선은 까마득히 잊고 있다. 당시에는 수원과 여주 사이에도 경제철도가 있어 이곳의 소금이 인천·수원뿐 아니라 멀리 여주까지 공급되었고, 여주에서 좀 더 내륙까지 전해지는 파급효과를 보여 주었다. ●협궤열차도 소금 실어나르기 위해 생겨 이 철교 명칭을 둘러싸고 아직까지 인천시와 시흥시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인천시 남동구는 소래철교를 인근 소래포구와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철도청에 철교매각 요청서를 제출했다. 인천시가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유산 지정신청을 내고 지정예고를 공고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불거졌다. 인천시는 ‘인천 소래철교’, 시흥시는 그대로 ‘소래철교’를 주장한 것이다. 지자체 간의 문화관광수입 증대를 노린 어처구니없는 싸움이다. 이 철교는 남동구 논현동 소래포구와 시흥시 월곶동을 잇는 총연장 126.5m, 폭 2.4m 규모로, 전체 길이의 49%는 남동구,51%는 시흥시에 속한다. 이러니 철교를 두토막으로 잘라내지 않을 바에야 양측이 타협하여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보듬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소래·군자 일대는 천혜의 갯벌이 펼쳐졌던 곳으로 최고의 염전 적지였다. 일제는 눈치 빠르게도 이곳을 주목했다. 소금은 생필품으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화약제조용 군수품으로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소래와 군자의 소금은 인천으로 옮겨져 국내는 물론 일본과 멀리 만주로도 실려 나갔다. 일본인들은 오늘날 시흥시 옥구공원이 있는 옛 옥구도에 취락을 형성, 집단적으로 모여 살면서 신사까지 지었다. 그 후, 포동에 신촌이 형성되면서 충청도의 노동력들이 염전을 찾아 대거 몰려들었다. 시흥의 한적할 것 같던 바닷가가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국내 외지인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근대의 시작’은 이처럼 바닷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는 다시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었다. 시흥의 평안도촌과 인연을 맺은 다수의 평안도 사람들이 인맥을 따라 오이도 인근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월남 이전부터 이곳 평안도촌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인연으로 전쟁통에 무리지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것이다. 여기에다가 1980년대에는 호남인들이 다수 유입되기도 했다. 경기 서해안의 복잡다단한 인구 구성은 이런 단계를 거쳐서 중층적으로 이뤄졌다. ●인천·시흥시, 소래철교 명칭싸고 갈등 군자염전 터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오이도가 있어 이곳 바다풍경의 끝자락을 펼쳐보이고 있다. 말이 오이도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신석기 패총이 무더기로 발굴된 곳이니, 선사시대 이래 인간이 터를 일구고 살아온 곳이다. 오이도 역시 새롭게 탄생했다. 예전의 오이도는 시화호 개발로 사라졌고, 갯벌을 매립한 곳에 계획도시가 들어섰다. 조개구이집 등 횟집이 즐비한 지금의 오이도에서 수인선의 정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시화호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방조제가 오이도에서 대부도 방아머리까지 연결되어 차량이 쉴새없이 오간다. 갯벌 가운에 말없이 졸고 있던 오이도는 간데없고 그 자리는 나들목 같은 분주함뿐이다. 수인선 협궤열차에 몸을 싣고 군자역쯤에서 하차하여 오이도로 걸어나가면서 굴을 따먹던 그때의 연인들은 모두 장년이 되어 버렸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사라졌어도 그렇듯 풍성한 추억거리를 남겨 이 겨울을 좀 더 따스하게 감싸는 것이리라.
  • [열린세상] 지배세력의 교체/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올해 초 과거사 진상규명법들로부터 시작된 개혁법안은 지금은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기본법 및 사립학교법 개정 등 4대 개혁법안으로 확대되어 있다. 이것을 왜 개혁법안이라 하는가. 군사독재체제에서 벗어난 지 불과 10여년에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하여 움직이는 새로운 사회체제의 구축을 향하고 있고, 개혁법안들이 그것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4대 개혁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현재의 답답한 상황은 압축적 민주화의 주름진 모습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역사학자로서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과거사 진상규명의 대상은 멀리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에서 시작하여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권위주의시대 인권침해 진상규명 등에 걸친다. 이 중 동학, 친일, 강제동원의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이 16대 국회에서 이미 제정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작업만이 무리없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친일에 대하여는 개정안이, 다른 안건들은 통합안으로서 여당의 경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 기본법’이, 한 야당에 의해서는 친북활동까지 포함하는 ‘현대사 연구·조사를 위한 기본법’이 제안되어 있다. 이웃 나라 국토를 유린하면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군이 초토화전술로 처절하게 진압한 동학농민군의 그 혁명적 활동은 동학당의 반란으로 폄하되고, 일제에 의한 수탈과 인권탄압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미화되는 가치의 전도를 겪고 있는 상황이다. 광복 후 냉전·분단상황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는 북한위협론이나 개발독재론에 의하여 불가피성이 호도되고 있다. 과거사 진상규명은 이러한 전도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 한국역사의 변화와 발전을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에 초점을 두어 파악한 역사서가 있다. 오랫동안 한국사 개설서의 지배적 지위를 점해 왔고,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이기백 선생의 ‘한국사신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에서는 지배세력의 변천을 지표로 삼아 역사의 시대적 발전을 설명한다.‘신흥사대부의 등장’,‘사림세력의 등장’,‘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개화세력의 성장’ 등의 소시대를,“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과정을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설정하였다. 이러한 시대구분법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시대의 설정에는 시사되는 바가 없지 않다. 낡은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시대의 새요소가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세워야 역사가 발전할 수 있다. 과거사 진상규명은 바로 그 낡은 시대를 청산하는 작업이며 그 귀결은 단지 정치지형의 변화나 집권세력의 유불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담당할 지배세력의 교체를 초래할 것이다. 수도이전을 둘러싼 논란 중에 ‘지배세력 교체론’이 제기되었다. 수도이전을 역사상의 천도에 빗대어 지배세력의 교체라고 했던 집권세력이 이에 반대하는 야당의 공세에 주워담기는 했으나, 집권세력이 정치권력의 유지 재창출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지배세력의 교체라고 했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교체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은 헌재에 의한 수도이전의 좌절에서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4년 동학농민의 저항운동에서부터 110년, 이제 식민지와 분단시대의 시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려는 시대역행적 퇴행적 세력의 목소리가 길거리에 난무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실력과 사회적 리더십을 갖춘 세력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때는 도래했는데 그것을 주도할 세력의 결집을 보기 어렵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비롯한 4대 개혁법안의 돈좌(頓挫)는 그것을 웅변한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 [日우익 ‘왜곡 총력전’] 왜곡없는 역사책 어떻게

    [日우익 ‘왜곡 총력전’] 왜곡없는 역사책 어떻게

    역사왜곡에 대한 궁극적인 해법은 무엇일까. 학계와 시민단체는 물론, 정치권도 ‘한·중·일 공동교과서 집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독일과 폴란드가 2차대전 종전 뒤 공동교과서를 만들면서 독일 교과서는 폴란드에 대한 진솔한 사과를 담았고, 폴란드 교과서는 독일인을 향한 일방적인 폄하를 없앴다. 그동안 역사왜곡을 시정하기 위한 한·일간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한·일 양국간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한·일공동역사연구위원회’다. 이 위원회는 2001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해 10월 양국 정상간 합의 아래 위원장을 포함한 양국 12명의 학자들로 구성됐다.2004년 5월까지 활동키로 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해 1년 활동시한을 연장했다. 반면 한·중·일 3개국 시민단체들은 공동교과서를 만드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한국),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중국),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21(일본)간 공동 부교재 제작사업이 그것이다. 개항부터 현대사까지만이라도 공통된 역사서술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모였다. 모두 90개의 테마에 맞춰 1장은 개항에서 1910년대까지,2장은 1920년대까지,3장은 1930년대까지,4장은 현대까지 다룬다. 지난 10월 중국 난징회의에서 최종합의를 마쳤고 세부적인 이견을 정리하고 있다. 내년 1월 최종회의를 마친 뒤 2005년 5월 공식발간할 예정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예를 들면 ▲개항과 관련, 중국은 조선을 도와줬다고 하는 반면 한국은 중국이 간섭한 것으로 보고 ▲한국전쟁을 중국은 북침으로, 한국은 남침으로 보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대동아전쟁 등에 대해 일왕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난징대학살, 강제동원 등이 어떤 규모였는지 등에 있어서도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충북대 김성보 교수는 “전반적인 사실관계에는 동의하지만 아무래도 범위와 폭, 그리고 해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日우익 ‘왜곡 총력전’] 우리역사서술은 문제없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계속 불거지면서 ‘그렇다면 우리 교과서에는 문제가 없느냐.’는 반문이 일고 있다. 우리 역사교과서 역시 지나친 민족주의 중심의 서술 때문에 사실을 간과하는 오류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위안부 문제를 일제시대에만 한정해서는 안된다.”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주장이 사례 중 하나다. 위안부가 별스럽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때도 비슷한 형태의 집창촌이 존재했고, 주한미군을 위한 기지촌의 존재도 엄연한 사실이란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민족주의만 강조하다 보면 ‘여성의 인권’이라는 보편적 시각이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진보적 소장학자들은 올해 ‘동북공정’으로 불거진 고구려사 문제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서울시립대 전우용 상임연구위원은 역사비평 겨울호에서 ‘역사인식과 과거사 문제’를 통해 고구려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 예로 전 위원은 간도 영유권 주장 근거로 제시되는 지도들이 독도를 일본땅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어떻게 같은 자료를 두고 독도 부분은 무효고, 간도 부분만 유효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고구려사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자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허영란 연구사도 비슷한 논리를 폈다. 최근 ‘뉴라이트 운동’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학사관’이라는 용어를 쓴다든지, 극우-보수주의 인사들이 일제시대 좌파 독립운동을 서술하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 등은 일본 우익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허 연구사는 “이런 상황에서 역사교과서는 우리에게는 ‘양날의 칼’”이라면서 “자기 성찰이 전제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교과서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면 외려 우리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민작사가 양인자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민작사가 양인자씨

    연말연시, 모임과 회식이 잦아지면서 노래할 기회도 많아진다. 어떤 노래가 가장 많이 불려질까.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킬리만자로의 표범),‘바람속으로 걸어갔어요/이른 아침의 그 찻집/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외로움을 마셔요/아름다운 죄 사랑때문에/홀로 지샌 긴 밤이여‘(그 겨울의 찻집) 두 곡은 국민가수 조용필씨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애절한 목소리로 담아낸 두 노래는 듣는 이의 가슴을 친다. 얼마전 한 문학잡지에서 우리나라 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요를 조사한 결과, 두 노래는 각각 2위와 9위에 올랐다. 또 중국 등 해외 교포사회에서도 애창곡 5위 안에 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두 노래의 강한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 겨울의 찻집’등 300여곡 만들어 양인자(59)씨. 그는 ‘서울 서울 서울’‘립스틱 짙게 바르고’‘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타타타’‘우리도 접시를 깨트리자’ 등 주옥같은 300여곡의 노랫말을 만들어냈다. 노래방에서 양씨의 노래를 한번쯤 안불러본 사람이 없을 정도다.‘국민작사가’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지금까지 800여편의 TV드라마 각본을 썼다. 지난 1974년 MBC ‘부부만세’를 시작으로 ‘제3교실’,KBS ‘혼자사는 여자’‘하얀달’‘여고동창생’ 등 40대 이후의 팬을 거느리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15살 때 ‘돌아온 미소’라는 장편소설을 쓴데 이어 고1때 단행본으로 발간, 일찌감치 대중들과 친숙해졌다. 이때 그가 받은 찬사가 바로 ‘한국의 사강’. 사강이 15살때 불후의 명작 ‘슬픔이여 안녕’을 쓴데 비견된 것. 이후 74년 단편소설 ‘외항선’을 ‘한국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양씨는 요즘 매우 뜻깊은 연말을 맞고 있다. 우선 올해가 방송작가와 문단데뷔를 한 지 꼭 30년째. 또 내년에는 자신의 회갑이자, 남편인 작곡가 김희갑씨의 고희를 맞는다. 김씨 역시 지금껏 3000여곡을 만든 ‘국민작곡가’. 이래저래 기념행사를 안할 수 없어 내년 5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 ●신춘문예 낙방으로 ‘킬리만자로의 표범’ 작사 양씨는 경기도 분당의 한 빌라에서 남편과 단 둘이 살고 있다. 초인종을 누르자 양씨가 ‘몸빼바지’를 연상케하는 편한 차림으로 맞는다. 해방둥이지만 소녀처럼 밝은 미소와 깨끗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어 얼핏 40대후반으로 보였다.‘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걸맞지 않을 정도로. “대학시절 신춘문예에 낙방하자 한해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길거리를 걷다가 무작정 초라한 다방에 들어가 구석진 곳에 앉았지요. 내년에는 반드시 당선할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면서 소감을 미리 써내려갔지요. 제목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등장하는 표범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얼어붙은 산꼭대기에서 표범은 왜 죽어 있을까.’라는 구절이 문득 생각난 것. 양씨는 녹음 과정에서 노랫말이 너무 길어 어려움도 많았다고 토로했다.‘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당시 유행가는 대개 3분20초 안팎이었는데 무려 6분을 넘겼기 때문이다. 조용필씨도 이를 소화해내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결국 이 노래로 조용필씨가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 노래의 백미는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라는 대목. 젊은들의 가슴을 찡하게 후벼 판다. 양씨 자신도 좌절감을 느낄 때면 늘 이 노래를 연상한다고 고백했다. ‘그 겨울의 찻집’은 드라마 ‘사랑의 계절’ 주제가로 경복궁의 한 다원에 앉아 차를 마시며 30분동안 고민하며 적은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20대 젊은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가사 중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대목은 사람의 애간장을 그토록 녹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가장 아끼는 노랫말은 혜은이가 부른 ‘열정’이다.‘안개속에서 나는 울었어/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사랑하고 싶어서/사랑받고 싶어서∼’. 그는 잠시 회상에 빠지는 듯했다. 이어 중얼거린다. 만나고 차 마시는 사람이 아닌, 전화로 얘기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보고 싶을 때 못보면 눈 멀고마는, 그런 사랑…. ●세 살 때 월남, 한국전쟁 겪어 그는 45년 북한 나진에서 태어났다. 부산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던 부친이 일제때 나진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48년 세 살 때 월남해 한국전쟁을 체험했다. 부친은 일찍 병사(病死)했다. 나름대로 문학적 토양을 쌓은 것은 중학교 때.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무작정 글쓰는 버릇이 생겼다. “첫장편 ‘돌아온 미소’는 부산여중에 다닐 때 선생님이 숙제로 낸 소설입니다. 초등학생들의 우정과 질투에 대한 내용이지요.15살 터울의 오빠가 그 책을 만들어서 팔아 어머니와 오빠 등 우리 세 식구가 밥 먹고 살았지요. 어머니가 콩나물 장사를 할 정도로 가난한 편이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 그는 학비가 적게 드는 서울대 사범대에 원서를 냈다. 하지만 시험보는 날 길을 잘 몰라 지각하는 바람에 낙방했다. 곧 방향을 돌려 서라벌 예술대학에 원서를 냈다. 문예창작과 수석. 교통비가 없어 집이 있는 마포에서 길음동에 위치한 대학까지 걸어서 다녔다. 대학때 임영조 시인, 이동하 소설가, 권오운 시인, 그리고 현 제주시장인 김영훈씨 등과 열심히 문학활동을 했다. 다들 가난했지만 낭만과 자존심만큼은 강했다. ●드라마작가 김수현씨와 같이 기자생활 대학 졸업식날,‘여학생’ 잡지사 사장이 학교로 찾아왔다. 사장은 ‘돌아온 미소’를 잘 읽었다며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래서 ‘여학생’ 기자가 됐다. 이곳에서 이때 드라마 작가로 유명한 김수현씨와 같이 기자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던 김씨는 “돈은 방송쪽에 있다.”며 방송작가의 길로 돌아섰다.68년 라디오 공모에 ‘저 눈밭에 사슴이’가 당선됐던 것. 자극을 받은 양씨 역시 방향선회를 했다.74년 양씨는 소설과 방송으로 나란히 데뷔했다. 이후 85년 드라마 주제가 ‘우기의 여인’이란 노랫말을 처음 썼다.‘길떠나는 그대에게 무얼 전할까, 허허로운 마음이야 너나 없는데, 가는 그대 서러워라 나는 추워라, 남은 세상 울고 사는 것을 용서하시오.’2년 전 남편과의 사별의 아픔을 노래한 것. 이때 김희갑씨와 만난다. 처음에는 작사·작곡으로 편안하게 지냈으나 나중에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되면서 사랑으로 연결됐다. 결국 노래 ‘열정’이 나올 무렵인 87년 웨딩마치를 올렸다. ●내년 5월 ‘부부합작품’ 깜짝 공개 예정 “소재는 우리 생활주변에서 나옵니다. 가을단풍을 보다가도 문득 인생의 마지막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나면 그냥 몇자 적습니다. 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자, 우리도 이제부터 접시를 깨트리자.’고 중얼거리면 남편이 곡을 만들어요.” 양씨의 노랫말은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린다. 현란한 어휘와 비유법, 철학과 문학이 담긴 구절구절…. 그가 쓴 ‘타타타’(산스크리스트어로 ‘그래 맞아’라는 뜻)처럼.‘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한치 앞도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그런 거지 아 하하/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최근 양씨는 ‘내 아내가 되어주오’라는 노랫말을 써서 얼짱 아줌마 가수 이정순씨의 목소리로 새로 선보였다. 또 내년 5월에는 김희갑씨 고희기념때 새로운 곡을 ‘부부합작’으로 깜짝 공개할 예정이다. 양씨는 노래 부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대신 김희갑씨가 ‘갈대의 순정’으로 회식자리에서 ‘백기사’ 역할을 한다. 양씨는 1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딸은 얼마전 결혼했고, 아들은 프로골퍼로 활동 중이다. km@seoul.co.kr
  • [열린세상] 북한 유사시 중국의 선택/김영호 성신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고건 전 국무총리는 지난 4월 용천폭발사고가 발생했을 때 김정일정권이 무너지고 북한에 친중정권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퇴임 후 언론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지난 10월 통일부 국정감사 때 대량탈북난민 사태 발생시 비상계획인 ‘충무 3300’과 북한 체제 붕괴시 비상통치계획인 ‘충무 9000’을 정부가 이미 마련해두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런 비상대책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이었던 고건 전 총리마저 북한 유사시 우리 정부가 쓸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북한 위기상황을 거론하고 대책을 마련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눈치보기에 급급하지 않고 국민을 안심시키고 대외적 국가신인도를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체제 위기상황에 대한 대내외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책을 마련해 두는 것은 정부의 책무이다. 고건 전 총리가 우려하는 것처럼 북한 유사시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북한에 개입하게 될 경우 사태는 더욱 복잡하게 될 것이다. 우선 중국 개입 가능성에 대한 문제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은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한반도 사태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을 때 중국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하여 군정통치를 실시했다. 중국의 군사적 개입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중국은 패배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패권적 지위를 일본에 내어주고 말았고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또한 중국공산혁명 성공 직후 중국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사전에 표명하고 유엔군이 북진하자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 결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직접 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여파로 미·중 화해의 가능성은 완전히 물건너가고 말았다. 미국에 의해 주도된 중국 고립화 정책으로 인하여 중국은 덩샤오핑이 등장하기 전까지 구석기시대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은 한반도에 두 번 개입했을 때 모두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현재 중국 지도부가 북한 유사시 직접 군사력을 북한에 투입하여 자국의 위신을 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으로서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정책일 것이다. 또한 중국의 북한 개입은 최근 욘사마 열풍 이상으로 일본을 자극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북한의 붕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1500㎞에 달하는 만주국경선이 너무 길어서 안보상 역시 채택하기 어려운 대안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국은 북한 유사시 불개입과 군사적 개입의 양자의 중간적인 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북한이 유엔 회원국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북한 유사시 중국은 유엔의 주도적 역할에 의한 북한문제 처리를 주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혹은 중국은 현재 진행중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경우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6자회담을 항구적인 다자안보협력체로 발전시켜 이 틀 내에서 북한 유사 상황에 대비한 정책을 모색하려고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에서는 북한 유사 상황시 미국의 정책도 중국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핵 문제와 북한 인권문제가 국제 문제화되면서 북한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점차 매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이 시점에 최근 정부는 싱가포르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개성공단을 통한 남북거래를 민족 내부의 거래로 최초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협정은 국제적 지지기반 확보를 위한 통일외교의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이미 주변 4강은 북핵 이후 한반도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전략적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정부는 장기적 통일비전을 갖고 주변 4강 외교 및 유엔에 대한 전방위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이다. 김영호 성신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3)‘마산아구찜’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3)‘마산아구찜’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다. 겨울 기운이 느껴진다. 술꾼들은 퇴근길에 소주잔을 걸치면서 화끈한 안주거리를 찾기 마련이다. 여기에 아귀찜이 제격이다. 점심식사나 가족 회식에서도 인기다. 시뻘건 아귀찜에 밥을 비벼 먹거나 아삭아삭한 콩나물을 씹으면 없던 입맛도 돌아온다. 이 글의 방향을 짐작했겠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본디 아귀는 ‘비료’ 정도로나 썼던 바닷물고기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흰살 생선, 즉 조기나 명태, 민어 등을 선호했다.‘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듯’ 못생긴 해물은 기피했다.‘몬도카네’처럼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것 같지만 한국인들의 수산물관은 보수적이며, 선택과 집중을 선호하는 형식을 보여 왔다. ●못생긴 아귀 처음엔 안먹고 버려 뱀장어도 일본의 ‘우나기’에서 전이됐으며, 예전에는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먹장어(꼼장어) 식용도 근래의 일. 복어도 독이 있어 다루기 까다롭다 하여 그대로 버렸다. 동해안 해장국의 별미인 토속어 ‘삼순이’도 아예 잡으려 들지 않았다. 남해안 어판장에 자주 등장하는 못생긴 물메기도 7∼8년 전까지는 잘 먹지 않다가 미용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갑자기 수요가 폭증했다. 아귀도 못생겼으니 당연히 먹지 않는 어류 반열에 속했다.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먹을 때면 덤으로 내주던 복국이나 아귀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아귀를 먹지 않아 전량 한국으로 수출한다는 점.‘아직’이란 단서에 유의할 것이, 김치의 매운맛에 길들여진 일본 관광객들 사이에 서서히 아귀로 젓가락을 옮기는 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개불도 징그럽다고 먹지 않다가 건강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음을 보면, 먹지 못하는 모든 해산물에 ‘아직’이란 단서를 붙여야 할 성싶다. 워낙 ‘원조타령’이 심한 사회이므로 아귀찜의 원조 역시 분간하기 어려우나 역시 마산이 아닐까. 마산 아귀찜과 군산 아귀찜이 쌍벽을 이루는 인상이지만 역시 원조는 마산 쪽이 맞는 것 같다. 마산에서는 아귀가 ‘아구’로 불린다.198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매스컴을 타면서 수요가 급증했다. 제한적으로 잡히던 아귀 물량이 딸리자 2∼3미에 18만∼25만원을 호가했다. 그러다 중국 수입산이 쏟아지면서부터 가격이 안정을 찾게 됐다. 예전에는 서민, 정확히 말하면 하층민 음식이었다.1000∼2000원에 한 마리를 사서 무를 넣고 푹 끓여 온 식구가 배불리 먹었다. 겨울의 속풀이거나 빈속을 채워 주는 고기였다. 아귀찜이 마산에서 본격적으로 사회화되는 과정에는 한국전쟁이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아귀의 문화사적 배경이라고나 할까. 우선 마산이란 항구도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도시전문가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보한다. 뉴욕대 역사사회학 교수인 리처드 세넷이 ‘육체의 경험으로 풀어본 도시의 역사’란 부제가 달린 ‘살과 돌’(flesh and stone)에서 언급하였듯, 코를 자극한 냄새는 무엇이며, 어디서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차려 입는지, 언제 목욕을 했는지, 그러한 ‘도시의 육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항구도시들의 ‘육체’는 무엇일까. 역시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먹을거리다. 우리는 도시와 음식의 기질론 혹은 풍토론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어디 가면 어느 집의 무엇이 맛이 있다.’라는 식의 음식점 순례기가 우리의 지적 수준이다. ●‘매운 음식’·‘화끈한 기질’ 궁합 맞아 아귀찜도 항구도시의 기질 풍토를 교묘하게 반영하고 있으니, 마산의 살아 있는 육체라고나 할까. 맵고 강력한 아귀찜같이 기질이 강한 음식은 음식궁합으로 볼 때 ‘태양’에 속한다. 마산이란 도시의 육체에서 아귀찜은 궁합이 대단히 잘 맞는다. 마산 자체가 한마디로 ‘화끈’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대적 화끈함에 역사적 화끈함까지 가미돼 아귀찜 같은 먹을거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어느 항구치고 격동의 세월을 겪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마산항은 변화 정도가 극심했다. 대충 손꼽아 보아도 몽골족이 주축인 원나라의 군사적 요충지, 왜구들의 주요 침입로, 임진왜란의 전투지, 개항장, 일본인 집단거류지, 미군 군수물자 하역항,4·19와 부마항쟁의 진원지,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등 역사적 격변상만도 단숨에 세기 어려울 정도다. 규슈(九州)의 오랜 국제무역항 하카타(博多) 연안에는 장장 20㎞에 걸친 해안 성벽이 있다. 원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가마쿠라 시대에 쌓았다고 하여 일명 원구방루(元寇防壘)라고 부르니, 그 진원지가 바로 마산이다. 세기의 대격돌이 마산에서 시작된 것이니, 역사적·운명적으로 태생부터 국제적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 4만 여원(麗元) 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 오늘의 마산인 합포를 출진기지로 삼았다. 규슈 북부 해안의 하카타만에 이르러 폭풍으로 말미암아 2회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때부터 합포가 남해를 아우르는 전략 요충지임이 내외에 알려졌다. 마산항의 본류인 마산포는 조용한 어촌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마산창이 설치되면서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시장이 번성하면서 수산물 반입이 활발해져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3대 수산물 집산항으로 손꼽혔다. 만기요람 재용편에 경상도 정기시장으로 오로지 창원 마산장 하나만을 들고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남해안의 거제도와 통영·고성 등에서 잡힌 어류는 대개 마산항에 모였다. 구한말에 벌써 이곳에 30여호의 객상이 즐비했으니 그 번창함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3대 수산물 집산항 명성 1899년에 개항하면서 1905년부터 일본집단촌(속칭 지바촌)이 건설된다. 경찰서·재판소·형무소 등이 설치되고, 시가지는 혼마치(本町)·교마치(京町) 등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옛 사진을 보면 게다짝을 끌고 돌아다니는 일본인들이 많이 보인다. 일본식 집이 즐비하다. 미곡 적출항으로서 정미업, 조면업, 인쇄업, 조선, 철공, 제빙, 방적, 기타 제조업이 모두 성했다. 빼어난 자연적 기후조건과 양질의 쌀, 맑은 물이 주류와 장류에 적합해 일찍부터 양조산업이 시작됐으니, 마산의 명물 무학소주나 몽고간장 등이 여기에서 비롯됐다.1개 항구도시에 양조장이 20곳이나 되던 곳은 마산뿐이었다. 해방이 되자 이곳에 거주하던 6000여명의 일본인이 모두 돌아갔고 2만여명의 동포가 귀국했다. 이런 ‘인구교체’ 역시 마산의 독특한 변수가 됐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후방 병참기지였다. 소개령으로 시민들이 떠난 마산의 거리는 온통 카키색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시가지가 온통 미군 일색이었고 마산 제1부두는 전쟁물자의 집산지였다. 한꺼번에 밀려온 피란민들로 전에 없던 특미가 생겨났다. 재래의 마산 특미라면 단연 ‘대구깡다구찜’과 ‘미더덕찜’이었다. 그물에 잡히면 재수없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아귀들이 구마산 선창가에 그대로 버려졌다. 그 아귀를 인근 농부들이 가져다가 비료로 사용했다. 이 천대받던 아귀가 피란민의 공짜 반찬거리로 변하면서 아귀를 말려서 각종 양념을 넣어만든 아귀찜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 수입산이 아닌 자연산 아귀는 마산 근해에서 ‘고데구리’로 훑어온다. 해저 밑바닥을 기면서 사는 저서류라 불법 어획도구인 ‘고데구리’가 보편적으로 사용돼 왔고, 어찌 보면 맛있는 아귀를 다량으로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산 시내에는 아예 아귀찜 골목이 따로 있다. 아귀찜은 이곳에서 아귀찜집을 경영하는 김삼연(57)씨의 ‘초가할매집’에서 출발했다. 나이 스물에 시집와 38여년 동안 아귀찜만 만들었다.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기술을 이제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애초에는 두 집이었다. 과거에는 아귀를 무쳐 조림으로만 팔았다. 말린 아귀가 너무 딱딱해 여기에 콩나물을 푸짐하게 넣고 조선된장을 풀어 담백한 맛을 살려내고 여기에 맵싸한 고춧가루·콩나물이 궁합을 이뤄 오늘의 마산아귀찜이 탄생했다. 마산에서 다량 소비되면서 전국의 아귀가 마산항으로 모여들었다.‘아귀는 무조건 마산에 가야지만 팔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내장을 걷어내고 씻어서 태양볕에 20여일을 꼬득꼬득 말린다. 이때 1년치를 갈무리하는데, 겨울에 말려야지 여름에는 벌레가 생길 뿐더러 냄새가 나서 말리기가 적당하지 않다. 크기도 중간짜리라야 건조도 잘되고 살집이 말랑말랑해 먹기 좋다. 아귀는 탕, 수육, 해물볶음, 불고기전골, 불갈비, 해물찜 등으로 속속 조리법이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중심은 아귀찜. ●아귀 뱃속엔 온갖 생선이 가득 마산 어시장의 터줏대감 격인 권철주 보현수산 대표의 말을 빌리면 “아귀는 정말 ‘아귀’처럼 처먹는다.”뱃속을 따보면 온갖 생선이 수북하게 쏟아져 나온다. 이런 ‘속것’이 너무 많아 김삼연씨는 아예 ‘아귀속젓’을 개발하기도 했다. 갈치 전갱이 꽁치 오징어 장어 돔 도다리 등 아귀의 반을 차지하는 이 ‘속것’들을 버리기 아까워 그걸 모아 젓갈을 담근 것. 그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으니 이 젓갈이 바로 동의보감”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마산 아귀찜은 국물이 걸쭉한 서울 것과는 맛도, 모양도 다르다. 잘 말린 아귀 냄새, 비린내를 없애는 조선된장, 통통하지 않게 기른 콩나물에다 태양초를 빻아 쓰되 매운 것과 덜 매운 것을 섞어 쓰며, 여기에 마산명물인 ‘진동 미더덕’을 곁다리로 넣어 마산 아귀의 오미(五味)를 이뤄낸다. 겨우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눈을 맞혀야 제 맛이 든다는 말을 듣자니, 진부령 황태가 여느 북어와 맛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아귀찜 하나의 문화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도 많은 지면이 필요하니, 우리 해산물 모두를 설명하자면 ‘천일야화’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 [CEO 칼럼] 창신고효(創新高效) 사회/유상옥 코리아나 회장

    [CEO 칼럼] 창신고효(創新高效) 사회/유상옥 코리아나 회장

    창신고효(創新高效)란 새로운 것을 창조해 효율을 높인다는 말이다. 즉 새로운 것을 추구해 삶의 질이 높아지는 사회로 바뀌는 것이다. 기업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문화 속에서 항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높이고자 끊임없이 창신고효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되면서 대도시에서 단독주택은 줄고 아파트가 크게 늘었다. 도시뿐 아니라 지방의 농촌에서도 아파트 생활을 선호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방, 거실, 화장실이 달라지고 상하수도, 냉난방, 조명과 가구가 모두 현대화되었으니 가히 주거혁명이라 할 만하다. 아침밥을 거르고 출근하는 사람이 늘고 건강식·기능식을 선호하며 비만을 걱정해 야채나 생선의 수요가 늘고 있다. 쌀밥 먹기가 줄어 들고 패스트푸드나 간이식의 수요가 증가한다. 따라서 쌀 소비량은 감소하는데도 쌀 수입개방의 압력이 거세지고 있어 우리의 주식인 쌀밥 먹기 촉진대회가 열려야 하는 아이러니에 봉착되었다. 먹을 것이 변변찮아 굶주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입성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집집마다 헌옷 처리로 고심한다. 버리기가 아까워 걸어둔 철 지난 옷이 쌓인다. 옷이 헤져서 못 입는 것이 아니고 유행이 지나서 입지 않는다. 정장과 캐주얼, 청바지와 점퍼도 철 따라 바뀐다. 한국전쟁 후 내복과 양말을 기워서 입고 신던 가난을 벗어나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 기술 발달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서부터 사람들은 보다 편리하고 좀 더 건강해지고 더욱 세련되고자 하는 창신고효의 모습을 보여준다.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에는 취미가 대부분 독서와 영화 감상 정도가 전부였다. 이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취미와 문화생활을 하게 되었다. 각종 스포츠, 여행, 등산, 낚시, 컴퓨터 게임 등 오락과 취미를 생활의 여가로써 즐기게 되었다. 삶의 효율을 높여가는 변화 속에서 관혼상제와 가족관계와 같은 전통문화, 즉 한국적인 것들이 서구적인 것에 밀리거나 변질돼 고유의 미풍양속이 사라져가는 아쉬움이 많다. 남녀가 혼인한다는 것은 인륜지대사로 옛날에는 육례를 갖추어 혼례가 치러지고 부부해로가 사회통념이었다. 하지만 요즘 결혼은 사랑의 결실로써 가정을 꾸리지만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음은 사회적 불안정을 나타낸다. 지나친 혼수비용 역시 많은 폐단을 유발하기도 하며 최근의 소자화(少子化) 경향은 국가인구정책이나 국력신장,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심히 우려가 된다. 생활이 궁핍하던 시절에는 다산을 방지하는 국가정책이 필요했지만 이젠 풍부한 의식주 속에서 인구는 국력이란 관점과 가족의 번창이란 관점에서 출산을 장려하고 노령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으로 고령자가 늘어나는 것은 장수국가,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지만 반면에 장례문제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이노베이션은 생활을 변화시킨다. 과학의 발달로 새로운 상품, 편리한 상품이 양산되고 서비스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 반면에 기업경영은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다. 어제의 첨단기술이 내일은 낙후기술로 전락되고 오늘의 신상품이 순식간에 구제품화된다. 기업이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상품, 새로운 기술, 새로운 제도를 연구하고 강력한 경쟁력과 경영효율을 올리지 아니하면 경영부실이 커지고 신용도가 떨어지는 불운을 맞게 된다. 작은 것도 챙기고 크고 넓게, 그리고 멀리 보는 역량을 길러서 사회적 효율을 향상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상옥 코리아나 회장
  • 손잡이에 사다리꼴…구세군 냄비도 바뀐다

    손잡이에 사다리꼴…구세군 냄비도 바뀐다

    ‘구세군 자선냄비’가 1965년 이후 처음으로 바뀐다. 구세군 대한본영은 다음달 2일부터 24일까지 전국의 76개 지역에 설치할 자선냄비 211개를 모두 교체한다고 28일 밝혔다. 이번에 바뀌는 자선냄비는 독일 주방용품 전문업체인 휘슬러사로부터 받은 철제제품으로, 모금함의 모양이 직사각형에서 사다리꼴로 바뀌었다. 또 양 옆에는 손잡이와 잠금 장치가 달렸다. 전체적으로 구형보다 실제 냄비의 모양에 더 가깝게 매끈하고 세련되게 제작됐다. 지지대의 높이와 폭은 기존의 자선냄비와 똑같으며, 한 개당 20만원꼴로 모두 6000만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기존 자선냄비는 양철 제품으로 구세군에서 자체 제작·사용해왔다. 1891년 미국에서 처음 선보인 자선냄비는 우리나라에 1928년 나무막대를 지지대로 쓰고 가마솥을 매달아 모금하는 형태로 등장했다.1965년 자선냄비를 양철로 바꾼 이후 그대로 써왔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낡아 교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었다. 구세군 안건식 홍보부장은 “자선냄비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보릿고개 등을 지나면서 국민들과 고락을 함께 해왔다.”면서 “사상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이번 자선냄비 교체가 성금모금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세군은 다음달 2일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에서 이해찬 국무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76주년 시종식’을 갖는다. 올해 모금 목표액은 24억원이다. 지난해에는 23억 7000만원이 모였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역사의 교훈/어네스트 메이 지음

    과거를 흔히 현재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라고 한다.‘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라는 EH 카의 역사에 대한 정의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선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에 관심이 많고, 거기서 치세의 교훈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실체 하나하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있다는 가정하에 가능하다. 역사에 대한 오용은 오히려 오판을 부르는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 교수로, 미국외교사학회 중진인 어네스트 메이의 ‘역사의 교훈’(이희구 옮김, 한마음사 펴냄)은 금세기 들어 미국 대통령들이 범한 외교적 실패들을 그들의 역사 해독의 오류와 연결시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우선 미국 대통령들은 ‘역사적 교훈’을 어떻게 오용했는지,2차대전과 냉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에 초점을 맞추어 규명하고자 한다. 2차대전이 터지면서 루스벨트는 1차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외교적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독일과 일본을 재기불능할 정도로 제압하는데 치중했다. 한편으로는 소련과의 공생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룬다는 외교적 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소련은 결국 동유럽과 한반도의 절반에 대해 세력을 넓히며 미국의 최대 강적으로 부상했고, 냉전과 전쟁의 축으로 자리잡았다. 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소련의 팽창정책을 깨달은 트루먼과 측근들은 소련에 대해 적대 일변도의 관계로 몰고 간다. 거기서는 ‘전체주의’ 소련과 과거 ‘전체주의’ 추축국가, 즉 독일·일본·이탈리아가 동일시되고, 여기서 도출된 역사적 교훈은 30년대의 유화정책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절대적 명제로 집약되었다. 트루먼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한국에서의 전투는 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트루먼은 1930년대와의 유사성을 생각하며 곧바로 솔선하여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으로 치달았다. 즉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가 국제연맹 규약에 도전했을 때 즉시 연맹이 결속해 싸우지 않음으로써 2차대전을 가져왔다는 인식하에 즉각 한국전에 개입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베트남 전쟁의 분석을 보면 1961년부터 65년까지 대통령과 그 측근은 전쟁 개입을 둘러싸고 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모범답안을 찾는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프랑스의 패배,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필리핀, 말라야의 반군 진압 사례에 이어 중국 ‘상실’의 뼈아픈 상처가 되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수많은 역사적 추론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피상적 논쟁으로 그치게 되며, 다시금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다. 9·11 이후 한층 시계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여전히 브레이크없이 달리기만 하는 미국 외교에의 불안감과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지도층이 어떠한 역사적 사례를 교훈삼아 대 한반도 외교를 펼쳐나갈 지 지켜볼 일이다.304쪽,1만 2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 망향의 恨 타오르는 영산강

    [문학이 머문 풍경] 망향의 恨 타오르는 영산강

    소설가 문순태(文淳太·63)는 고향이 없다? 전라도 전체가 그의 고향인지도 모른다. 그는 일제 말기인 1941년 영산강 상류인 전남 담양군 남면 구산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다. 무등산 자락과 광주호로 이어지는 산골 마을이다. 평화롭던 마을은 한국전쟁과 함께 폐허로 변해 버린다. 봄이면 지천에 진달래가 만발하고 실개천 너머로 아지랭이가 피어 올랐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1년 정부군은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이 마을 일대 모든 집들을 불태워 버렸다. 당시 어린 작가는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다. 정부는 아무런 보상도, 마땅한 설명도 없이 ‘공비토벌’이란 이유만 내세웠다. 그의 가족들은 고향을 뒤로하고 유랑에 나선다. 그 바람에 그는 화순, 광주, 신안 비금도 등 전남 곳곳을 떠돌며 어린시절을 보낸다. 어릴적 경험이나 환경이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다. 그러나 그런 정서와 기억이 그의 작품 곳곳에 짙게 묻어난다. 토속적인 향수와 한(恨)을 주된 정조(情調)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편협한 지역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 땅에서 뼈를 묻은 무지렁이 민초들의 삶과 투쟁이 곧 역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장편소설 ‘타오르는 강’의 머리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산 역사는 민중(民衆)이 그 주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성댐 수몰민의 삶을 통해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촌과 도시빈민 문제를 다룬 ‘징소리’나 ‘흑산도 갈매기’‘걸어서 하늘까지’등의 소설도 그런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타오르는 강’은 구한말 영산포 일대에 정착한 민중들의 삶을 그린 그의 대표작. 영산강은 노령산맥 골짜기인 담양군 용면에서 서남해 끝자락인 목포에 이르는 120여㎞의 물골을 만들며 흐른다. 상류의 황룡강, 극락강, 지석강 등 3대 강을 따라 장성, 담양, 광주, 나주가 위치하고 그 아래 쪽으로 함평, 영암, 무안, 목포가 이어진다. 하구언이 축조되기 이전인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고깃배가 영산포 선창까지 오갔다. 영산포는 동학혁명 직전의 무능한 탐관오리들이 세곡(稅穀)을 한양의 경창(京倉)으로 실어 나르는 물류 중심지였다. 일제 때는 기름진 호남평야에서 나는 곡식을 일본으로 빼가는 ‘수탈의 관문’으로 자리잡았다. 소설 ‘타오르는 강’은 1886년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면서 종문서를 받아들고 영산강을 건너는 웅보와 대불이 형제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주의 양 진사네에서 대대로 종살이를 해온 이들 형제는 구진나루를 건너 ‘새끼내’ 제방 너머에 터를 잡는다. 새끼내는 봉황∼왕곡∼영산포에 이르는 영산강의 작은 지천이다. 지금의 나주시 이창동 정량·진포·운곡리 일대가 ‘새끼내 마을’이다. 웅보와 대불이 형제는 노비에서 풀려난 사람들을 모아 새끼내 일대에 마을을 일궈 나간다. 그들은 이곳 주변에 물둑을 쌓고 황무지를 개간한다. 형 웅보는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동생 대불이는 상전이었던 양 진사를 도와 인근 영산포 선창에서 세곡 운반을 감독하는 목대잡이 노릇을 한다. 양 진사의 계략에 속은 줄 뒤늦게 깨달은 대불이는 장성 입암산으로 들어가 동학교도가 된다. 그는 동학군이 되어 귀향한 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소중한 땅을 빼앗아간 박 초시네 집을 습격하고 한을 푼다. 그러나 관군의 반격으로 동학군은 퇴각하고 새끼내 마을 사람들도 보복이 두려워 애써 일군 고향 마을을 불태우고 강변 따라 갓 개항한 목포항으로 떠난다. 다시 고향에 돌아올 꿈을 안은 채… 이는 특정시대, 특정 공간에서 일어난 일만은 아니다.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대부분 사람들의 선대가 겪었던 일이다. 새끼내 마을에서 만난 김판길(82) 할아버지는 “일제때 징용에 끌려갔다가 귀향했으나 살길이 막막해 선창가에 나가 짐꾼 등 막노동으로 살아 왔다.”며 “강 양안의 구릉이나 산지에 선대의 뼈가 묻혀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지역 신문기자로 일하던 70년대 초에 나주의 한 종가집을 취재하다가 노비들의 삶을 만난다. 그는 여기에 나주의 이른바 ‘궁삼면 사건’을 보태 소설의 소재로 삼았다. 이 사건은 1886년부터 3년에 걸친 대한(大旱) 때 지금의 다시·왕곡·세지 등 3개면 주민들이 폐농하고 유리걸식하며 각지를 떠돌면서 비롯된다. 이들이 귀향해보니 그동안 밀린 세금이라며 조정에서 농토를 빼앗아 가버리고, 이 사건은 농민운동의 발단이 된다. 죽음과 고통과 수탈의 현장이었던 영산강은 그대로 흐르고 있다. 자유인으로 변신한 노비들이 강 건너 황무지와 개산(새끼내 마을에 자리한 산으로 개가 엎드려 있는 형상)을 바라보며 ‘낙원’을 꿈꿨던 구진포 나루에는 지금도 고깃배가 떠있다. 홍어와 젓갈 등 수산물과 곡물을 실어나르던 영산포 선창의 흔적도 선명하다. 강은 상류 댐들과 하구언 축조로 수량이 줄면서 거친 모래자갈을 앙상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 당시와 다를 뿐이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盧, 역대 대통령 ‘품평’ 눈길

    |산티아고(칠레) 박정현특파원|칠레를 공식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들을 품평해 눈길을 끌었다. 노 대통령은 18일 오후(한국시간 19일 오전) 숙소 호텔에서 가진 동포간담회에서 “남미를 순방하면서 한국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왜 한국이 성공했을까.”라면서 “예전 지도자들이 실책이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한가지씩은 다 했고 국가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몇가지를 해놨다.”며 역대 대통령들의 업적을 순서대로 짚었다. 노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자유당 시대를 완전히 독재시대, 식민지에서 해방됐지만 암흑시대, 어두컴컴한 시대로 생각했는데 그때 토지개혁, 농지 분배를 했다.”며 “지나고 보면 정말 획기적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그것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국가 독립, 안전을 지켜냈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 체제를 지켜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 뒤 하나하나 다 얘기하지 않더라도 독재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산업화 과정을 이뤄왔고 여기까지 왔다.”며 평가했다. 노 대통령은 또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한몫씩 다 잘했다.”면서도 “(그러나) 다음 시대에 숙제를 한가지씩 꼬박꼬박 넘기긴 했다. 저도 풀어야할 숙제가 있는데 잘 풀어내겠다.”고 묘한 여운을 남겼다. 자신에 대해서는 “다음 대통령에게는 너무 어려운 숙제를 넘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 박수를 받기도 했다. jhpark@seoul.co.kr
  • “남민전등 10대의혹 진상 밝힌다”

    경찰이 국가기관 중에는 처음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 사건을 선정했다. 경찰청은 18일 과거 경찰이 저지른 인권침해와 불법행위의 진상을 스스로 규명하기 위해 민간위원 7명과 경찰 5명으로 구성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종수 한성대 교수)를 발족했다. 위원회는 이날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사 9층 회의실에서 발족식에 이어 1차 정기회의를 갖고 민청학련, 남민전, 민청련, 서울대 깃발, 강기훈 유서대필·자주대오·진보의련·나주부대·보도연맹원 학살 의혹, 대구폭동 양민사살 의혹 사건 등 10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준비위원회) 사건은 유신 당시 반체제로 낙인 찍혔던 시국사건이다.85년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서울대 깃발(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은 군사정권 시절 반체제 운동으로 탄압받았다가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복권됐다. 자주대오(활동가조직), 진보의련(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 사건은 90년대 대표적인 시국사건이며,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91년 강기훈씨가 전국민주운동연합 동료 김기설씨의 분신 자살 당시 유서를 대신 쓴 혐의로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나주부대 사건은 50년 전남 해남, 완도, 진도 일대에서 경찰관으로 구성된 ‘나주부대’가 북한 인민군의 공격에 밀려 후퇴하면서 인민군으로 위장,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의혹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 구성원들을 한국전쟁 발발 후 정부와 경찰이 무차별 처형했다는 의혹 사건이다. 대구폭동 양민사살은 1946년 대구폭동 당시 진압 경찰이 좌익이 아닌 양민을 사살했다는 의혹 사건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칙칙폭폭 하루여행 어때요

    칙칙폭폭 하루여행 어때요

    1970,80년대 대학생들의 꿈과 낭만을 가득 실어날랐던 경춘, 경의선 완행열차. 지금은 도심 외곽까지 아파트들이 들어차면서 그때 만큼의 정취를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도 여유로운 차내 분위기, 차창 밖에서 정겹게 손짓하는 듯한 강변 풍광 등 열차여행의 묘미는 여전히 살아있다. 잠시나마 수능 준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히 맡기기엔 역시 열차여행이 제격이다. 수도권 주변 하루 코스로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열차여행 명소들을 소개한다. #경춘선 서울∼춘천 구간에 있던 18개 역에 모두 섰던 비둘기호 열차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통일호도 지난봄 운행을 멈췄다. 지금은 세련된 외모의 무궁화호가 쾌적하게 손님들을 나른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춘천행 첫차는 새벽 5시25분, 춘천발 막차는 밤 10시20분에 있다. 경춘선을 따라 기차역 주변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한다. ●대성리역(031-584-0616) 경춘선이 북한강과 만나기 시작하는 곳. 여기부터 강을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끼고 달리는 경춘선 열차여행의 묘미가 시작된다. 대성리역 일대는 대학생들의 대표적인 MT명소다. 수려한 강변 풍광과 함께 운치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아 한나절 정도의 시간을 내 머리를 식히기엔 그만이다. 대성리역에서 걸어서 5분쯤 가면 대성리 국민관광지가 있다.8만여평의 넓은 터에 산책로, 족구장 등을 갖춰놓고 있다. 입장료 1000원.031-584-0088. ●청평역(031-584-0012) 대성리역에서 청평역에 이르는 구간은 경춘선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청평호를 중심으로 수려한 북한강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여기에 강 건너 화야산의 경치까지 더해 차창에 고정된 눈길을 어지럽힌다. 청평역에서 버스로 20분 이내에 축령산, 화야산 등이 있어 등산을 즐겨도 좋다. 또 영화 ‘편지’가 촬영된 ‘아침고요수목원’(031-584-6703)도 가까이 있다. ●가평역(031-582-7788) 이곳에 내리는 이의 절반은 남이섬(031-582-2181)에 가는 사람이다. 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이면 선착장에 도착한다. 남이섬은 지금 낙엽천지다. 섬 입구의 잣나무숲을 제외하면 대부분 낙엽수인데, 섬 어딜 가나 낙엽이 수북이 쌓인 오솔길을 걸으며 늦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널찍하게 펼쳐진 잔디밭에선 다양한 게임과 운동을 해도 좋고, 자전거(1시간 5000원)를 빌려 숲길을 내달려도 좋다.‘옛날 벤또 도시락’(4000원)’,‘양푼비빔밥’(2인분 8000원) 등 70,80년대의 재미있는 먹을거리도 맛볼 수 있다. 인근 명지산은 고목들과 기암괴석이 빚어내는 풍광이 제법 수려하다. 단풍이 져 좀 아쉽기는 해도 늦가을 산행에 부족함이 없다. 용이 승천하면서 아홉굽이 그림을 빚어냈다는 용추구곡과 청정계곡인 적목용소 등도 볼 만하다. ●강촌역(033-261-7788) 강촌은 예나 지금이나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MT명소. 언제 가도 젊음이 넘실댄다. 강의 북쪽으로는 삼악산, 남으로 봉화산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있어 주변 풍광도 수려하다. 강촌역에서 4㎞쯤 가면 구곡폭포로 유명한 봉화산 자락에 들어서게 된다. 아홉굽이 물줄기가 아홉가지 소리를 낸다는 구곡폭포를 거쳐 분지마을인 문배마을과 연계하는 한나절 등반코스로 훌륭하다. 잣나무숲 사이로 등반로가 잘 다져져 있다. 문배마을엔 10여가구의 농가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집에서 직접 만든 손두부가 별미다. ●춘천역(033-255-6551) 춘천에선 소양호를 찾아 호반의 늦가을 정취를 느껴보고 유명한 춘천 닭갈비를 맛보는 것으로 스케줄을 짜면 된다. 소양호는 역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한다. 소양호에선 호반 건너편 청평사로 유람선이 다닌다. 간 김에 배를 타고 건너 청평사에 다녀오면 뱃길여행에 가벼운 등산까지 겸해 일정을 더욱 알차게 할 수 있다. 입장료와 도선료 포함 5000원. 닭갈비를 먹고 싶으면 시청앞 명동골목을 찾는 게 좋다. 이 골목엔 모두 20여개의 닭갈비집이 빼곡하게 들어서 영업중.1인분에 6000∼7000원. #경의선 일산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경의선은 경춘선 못지않게 낭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지금은 일산은 물론 금촌, 문산까지 선로 주변으로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예전의 정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문산을 지나 임진각역까지 가다 보면 열차여행의 재미를 쏠쏠히 맛볼 수 있다. 임진각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득한 안보관광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임진각 안보통일관에는 북한의 생활상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화보들이 전시돼 있다. 야외에는 6ㆍ25때 사용된 군장비들이 전시되어 있다.‘철마는 달리고 싶다’(철도 종단점)라는 팻말을 단 증기 기관차가 비장한 여운을 남긴다. 하루 3번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까지 기차를 타고 도라전망대와 제3땅굴을 둘러보는 연계관광코스를 이용해도 좋다. 어른 기준 1만 1200원. 문의 도라산평화공원관리사업소(031-940-8342), 임진각관광안내소(031-953-4744), 임진강 역(031-954-1074). 경기도가 슬로푸드(SLOW FOOD) 마을로 지정한 파주 장단콩마을에도 가보자.700여개의 장독대를 볼 수 있고, 그 자리에서 된장 등을 손가락으로 찍어먹는 맛이 기막히다. 3월부터 임진각 관광지와 연계한 체험거리 ‘임진강 황포돛배’는 적성면 두지리 선착장을 출발해 고랑포 여울목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두지리에서 자장리까지의 붉은 수직적벽이 볼 만하다. 조선시대의 주요 운송 수단을 체험하는 이 코스는 약 6km로 40분 쯤 걸린다. 승선료는 8000원. 임진각에서 버스로 출발해 화석정, 장파리, 김신조침투로, 경순왕릉, 고랑포구 등을 거쳐 두지리 선착장까지의 육로관광까지 포함한 패키지는 1만 7000원.㈜DMZ관광(031-958-2558). ■칙칙폭폭 이벤트 즐겨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관광전용열차를 이용하면 열차여행의 묘미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 철도청과 롯데관광이 합작해 설립한 KTX관광레저㈜(02-393-3100)에서 관광전용열차를 운용중이다. 관광전용열차는 우선 3곳에서 운행된다.‘라이브 카페와 함께하는 환상의 서울야경 순환열차’는 서울역을 출발해 교외선을 타고 일영을 거쳐 의정부와 청량리, 서빙고 등 경원선을 돌아 다시 서울역에 도착하는 2시간30분코스. 차창 바깥으로 펼쳐진 야경 감상과 함께 라이브연주와 댄스, 마술 등 다양한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요금은 대인 2만 9000원, 소인 2만 6000원. ‘정선 관광전용열차’는 매주 일요일 아침 8시10분 청량리역을 출발한다. 역시 차내에서 라이브콘서트와 레크리에이션,DJ쇼 등이 진행된다. 아라리촌, 약초시장, 화암동굴, 화암8경 등을 돌아보는 1코스 요금은 5만 9000원, 정선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유람열차를 타고 아우라지 등을 돌아보는 2코스는 5만 8000원이다. ‘정동진 해돋이 열차’는 무박2일 일정으로 운행된다. 매주 금요일밤 10시22분 청량리역을 출발, 새벽 5시10분 정동진역에 도착한다. 해돋이를 본후 남설악 주전골, 오색약수, 주문진 어시장 등을 돌아보고 밤 10시13분 청량리역으로 돌아온다. 차내에선 클래식공연, 개그매직콘서트 등이 진행된다. 요금 7만 8000원. 철도청이 마련한 ‘대부도 황금 해넘이 라이브공연열차’도 이용할 만하다.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의정부역을 출발, 청량리역(11시30분), 영등포역(12시)에서 예약자를 태워 전철 4호선 안산역 다음에 나오는 신길온천역에 내려 연계버스를 타고 대부도까지 간다. 대부도에선 해넘이 감상과 함께 굴따기 체험, 망둥이 낚시, 시화방조제 인라인스케이트 타기 등을 즐길 수 있다. 대하 및 굴 구이, 바지락칼국수, 대부도 포도주 등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관광을 마친 후 열차는 영등포(오후 8시43분), 청량리(9시15분)를 거쳐 의정부에 9시50분 도착한다. 요금은 어른 1만 7000원, 어린이 1만 5000원. 식사는 개별 부담이다. ■놀이공원·극장가 할인이벤트 ●놀이공원에서 롯데월드는 2004년도 수능 수험표를 지참한 수험생에게는 11월 한달동안 롯데월드 주·야 자유이용권을 30% 특별 할인한다. 또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인기가수와 함께하는 ‘수능 특집 공개방송’을 비롯해, 젊음의 열기를 맘껏 펼칠 수 있는 ‘도원경 록 콘서트’와 인기만화가 김수정씨와 제자들이 펼치는 ‘만화작품전’, 고객참여로 진행하는 ‘황금종을 잡아라’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www.lotteworld.com,(02)411-2000. 서울랜드는 수험생들이 눈사람 마을 여행과 놀이기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할인행사를 한다. 12월31일까지 수험표나 고3학생증을 지참한 학생은 서울랜드 자유이용권을 50% 할인가격,1만 1000원에 이용할 수 있고 가장 인기있는 놀이기구 서울랜드 스카이엑스도 5000원 할인해 스트레스를 날려준다.(02)504-0011,www.seoulland.co.kr 에버랜드는 오는 30일까지 SKT 멤버십카드와 2004년 수능 수험표를 제출하는 학생들에게 자유이용권을 1만원에 주는 파격할인행사를 실시한다.www.everland.com,(031)320-5000. 63빌딩은 오는 30일까지 수능시험을 끝낸 수험생들을 위한 ‘63수능잔치’를 연다. 특별할인과 수족관 체험행사, 수험생 특별메뉴 제공 등 다양한 이벤트로 구성되었다. 수험표를 지참한 학생들에게 63층 전망대, 수족관, 아이맥스영화관 등 63빌딩 내 관람시설을 이용하는 수험생들에게 최고 30% 할인혜택을 준다. 특히 수험번호 중 숫자 63이 있으면 50%까지 할인해 준다. 수험생 및 학생들에게 최근 유망직업으로 떠오른 아쿠아리스트에 대해 간접 경험해볼 수 있는 ‘일일아쿠아체험’프로그램도 진행한다.(02)789-5663, www.63.co.kr 오는 26일 일산 호수공원에 오픈하는 테마파크 산타킹덤은 12월10일까지 수능 수험생에게 30% 할인한다. 단 본인 확인 가능한 신분증과 수능 수험표를 지참해야한다.1588-3955. ●외식업체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저렴하게 먹어보자.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는 21일까지 SK텔레콤의 수험생 모바일쿠폰과 수험표를 갖고 온 고객에게 에피타이저 메뉴를 무료 제공한다. 30일 수험표를 갖고 베니건스를 방문하면 컨트리 치킨 샐러드, 몬테 크리스토, 치킨 퀘사딜라 등을 무료로 먹을 수 있다.TGI프라이데이스 역시 수능 접수증·수험표를 제시한 당사자에게는 식사를 절반값에 주고 100% 당첨 즉석복권을 제공하는 행사를 30일까지 진행한다. 빕스는 21일까지 수험표를 보여주면 멤버십카드를 발급하고 10% 할인해 주며,스카이락은 탄산음료를 무료로 제공한다. ●극장가에서 보고싶었던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다.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는 수험표를 제시하면 영화관람료 1000원을 깎아준다.CGV는 23일까지, 롯데시네마·메가박스는 30일까지. CGV는 12월15일까지 영화 3편을 보고 홈페이지에 수험번호를 입력하면 5명을 선정, 뉴질랜드 여행을 보내주는 ‘시네마원정대’이벤트도 함께 준비했다. 롯데시네마는 20∼21일 플라스틱 기왓장을 격파한 수험생에게 깨진 기왓장 개수에 따라 티켓, 팝콘 등 경품을 제공한다. 메가박스도 행사기간동안 수험생을 대상으로 카메라,DVD플레이어를 경품으로 주는 이벤트를 연다. 또 티켓링크는 21일까지 ‘여선생 VS 여제자’,‘모터싸이클 다이어리’,‘나비효과’ 등을 예매한 수험생에게 추첨을 통해 DVD플레이어,MP3플레이어, 영화티켓 등을 준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유서대필’ 강기훈씨 노모 대학생됐다

    지난 1991년 유서대필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강기훈씨의 어머니 권태평(70)씨가 늦깎이 대학생이 된다. 권씨는 11일 성공회대 2학기 수시모집에 합격했다. 성공회대는 “권씨가 고령인데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인권운동사랑방 등에서 적극 활동한 경력을 인정받아 ‘NGO활동우수자’ 전형으로 사회과학부에 합격했다.”면서 “국가가 하지 못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상을 학교에서 먼저 시작하자는 의미”라고 밝혔다. 권씨는 이번 수시모집 합격자는 물론 재학생을 통틀어 최고령이다. 권씨는 중학교에 다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는 “대학 때 데모만 하고 다니던 아들 속을 알고 싶어 아들의 책이나 유인물을 읽어봤는데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어 공부를 하고 싶었다.”면서 “배웠으면 사회에 돌려줘야 할 텐데 시간이 너무 짧다.”고 말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권씨는 아들이 투옥되자 누명을 벗기겠다는 심정으로 아들이 일하던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자원봉사를 시작,NGO와 인연을 맺었다. 권씨는 2년전 마포구 염리동의 일성여고에 입학한 뒤 공부에 열중, 대학까지 응시하게 됐다. 손녀뻘 되는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했지만,“하루도 공부를 쉬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공부했다.”고 권씨는 밝혔다. 아들이 공부했던 내용을 배우고 싶어 사회과학부를 선택한 권씨는 여성이나 노인 대상 상담가가 되는 게 꿈이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신촌역사·남지철교 등록문화재로

    신촌역사·남지철교 등록문화재로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신촌역사와 남지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등 그동안 개발 바람에 휘말려 철거위기에 놓였던 근대문화유산 3건을 포함한 총 43건의 근대건축물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10일자로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여기에는 근대기 서구문명의 유입과 함께 성장해온 순천, 목포 등 전남지역의 교회와 강원지역의 성당 등 종교건축물 13건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식민수탈에 따라 곡창지역 해안 나루터를 중심으로 번성한 근대 주택과 여관 건축물 6건, 철도시설·금융건축·댐ㆍ터널·다리 등 산업시설물들이 포함돼 있다. 이중에는 1926년 건립된 국내 유일의 자연암반터널(640m)인 ‘마래 제2터널’과 1954년 전쟁고아 수용을 위해 건립된 사회복지시설인 ‘자광어린이집’, 미국남장로교회 순천선교부 창립 당시 건축된 ‘순천기독진료소’, 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으로 등장하는 벌교읍의 ‘구 보성여관’, 일제강점기 한국인 자본에 의해 건립된 ‘구 경성방직 사무동’, 한국전쟁을 전후해 남과 북이 함께 건설해 완성한 ‘고성합축교’ 등 보존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들이 적지 않다. 또한 전통적인 묵화기법을 새롭게 창조해낸 화가 이상범의 가옥과 화실, 유행이나 세속적 관심보다는 한국적인 전통을 표현하고자 한 조각가 권진규의 동선동 아틀리에 등 근대기 대표적인 문화예술인들의 작업실도 근대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 건축물들은 30일간의 등록예고 기간을 거쳐 문화재위원회 최종심의를 거쳐 등록문화재로 정식 등재된다. 한편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건조물이나 시설물에 한정됐던 근대유산 등록제도 적용대상을 법개정이 완료되는 2005년 말부터는 각종 공산품과 공연물에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6)꼼장어같은 생명력, 자갈치 아지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6)꼼장어같은 생명력, 자갈치 아지매

    ●바다서 나는 것은 없는 것이 없다 꼼장어가 꿈틀거린다. 파껍질을 벗겨내듯 훌러덩 가죽을 벗겨내자 시뻘건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꼼장어는 여전히 살아있다. 징그러운 생명력이다. 꼼장어만큼이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시장판이 있다. 바로 부산의 자갈치다. 부산을 찾은 외지인이 자갈치를 건너뛰어 갔다면 부산에서 ‘헛것’만 보고간 셈이다. 광복과 전쟁, 격동의 도가니는 항도 부산에 자갈치라는 들끓는 용광로 하나를 탄생시켰다. 자갈이 많아 자갈치로 불린 이곳의 일제시대 지명은 남빈정. 옛 사진을 보니 해변에서 해수욕들을 즐기고 있다. 자갈치시장이 예전 파도에 닳아 예쁜 자갈이 넓게 깔린 청정해역이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광복이 되자 일본 귀환 동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이 자갈밭에 몰려들어 좌판을 놓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전쟁 때 팔도의 피란민들이 가세했다. 본디 자갈치는 남포동 영도다리 밑에 길게 늘어진 갯가의 부산 어패류처리장을 이르던 말이다. 이곳 가건물들을 철거,1974년에 재개장했으나 지난 85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돼 이듬해 재개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장이 확대되면서 신동아어시장, 건어물시장, 노점 등을 모두 아우르게 됐다. 이곳은 다른 어시장과 다르다. 수산물에 관한 한 종합백과사전에 준하는 집합처이며, 역사적 뿌리와 양적 규모로 볼 때도 일본 도쿄의 쓰키지(築地)어시장과 더불어 가히 세계적 수준이다. 해마다 열리는 자갈치축제의 슬로건인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처럼 연신 손님을 불러대는 활기찬 목소리, 퍼덕이는 물고기로 엄청난 활력을 자랑하는 이만한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 자갈치를 제대로 알자면 두말할 것 없이 ‘자갈치아지매’들부터 만나야 한다. ‘자갈치아지매봉사단’을 이끌고 있는 주순자(58)씨를 만났다. 아지매는 1970년 10월의 시린 새벽을 3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정확히 기억한다.‘반찬값이라도 벌려고’ 새벽에 자갈치시장에 나섰다. 좌판을 벌여놓고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반년간 장사를 했다. 그러다 장사에 재미가 붙자 ‘안면몰수’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젊은 새댁은 그렇게 서서히 자갈치아지매로 변신해 갔다.17년 전에 암으로 남편과 사별하고도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듬직하게 키워냈다. 무려 34년간 외길로 꼼장어 한 종류만 취급해 와 자갈치시장에서도 알아주는 ‘꼼장어박사’가 됐다. ●자갈치아지매 3000명 ‘부산의 힘’ “어패류조합이 있는 원래의 자갈치시장에만 우리 봉사단 회원이 300여명 있지요. 바깥까지 전부 치면 3000여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아지매’만 3000명이면 엄청난 숫자 아닌가. 부산의 힘은 ‘자갈치아지매’들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낭설이 아니다. 이 아지매들은 전부 단일 품목만 장사한다. 전복, 갈치 등 세분화되어 전문화된 도매시장을 꾸리고 있어 자기 분야에 관한 한 모두가 ‘박사’들이다. 자정 무렵에 출근하거나 새벽4시에 출근하는 등 일과는 각자 일에 따라 다르게 돌아간다. 주씨는 20여년간 새벽 3∼4시에 출근, 밤 12시를 넘겨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고작 3∼4시간 자고 집에서 나와야 하는 고달픈 일인지라 새벽잠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십여년전부터 ‘단호하게’ 출근 시간을 아침으로 정해 삶의 패턴을 바꾸었단다. 자갈치시장의 ‘백수’로 노닐다가 하루 아침에 대형 유통회사의 후계자가 된 ‘필승’의 인생역전을 그린 KBS드라마 ‘오 필승 봉순영’같은 이야기는 ‘자갈치아지매’들과는 사실 별 관계가 없다. 조반석죽(朝飯夕粥)으로 끼니를 때우며 엄동설한에도 길거리에 좌판을 벌여놓고 밤낮없이 일하는 아지매들에게 무슨 일확천금이 있겠는가. ‘올빼미’ 도시민들이 한창 잠에 취해 있을 꼭두새벽에 어판장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불법으로 잡는 ‘고데구리’배들도 슬며시 뱃머리를 들이밀고는 ‘서민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어획물들을 잔뜩 쏟아낸다. 공식 위판은 오전 6시. 동중국해 같은 먼 바다에서 들어오는 고등어선망(旋網) 어판이 가장 규모가 크다. 바다에서 나는 것은 모두 자갈치에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지금은 산지직송하지만 예전에는 일단 모든 어패류가 자갈치에 집결했다가 소비지로 나갔다. ●“연줄·돈줄 좋아야” 신용 떨어지면 ‘헛방’ 시장판을 거닐다 보면 스물쯤 되어보이는 젊은 층부터 팔순까지 아지매들의 층도 넓다. 그래도 주축은 30∼40대. 부모에게 장사터와 수완을 물려받은 이들이 절반을 넘는데, 타인들은 고된 장사 일을 배겨내질 못해 물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단다. 수산물 거래란 ‘물고 들어오는 것’이라 판로, 물건공급 등에서 ‘연줄이 좋고 돈줄이 좋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신용 떨어지면 ‘헛방’이다. 주문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구해 줘야 한다. 가게 임대료도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IMF 이후에는 자갈치 경기도 ‘영 아니다’고 한다. ‘꼼장어아지매’에게 청해 ‘꼼장어 특강’을 받았다. 전문 수산학자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자갈치의 명물인 꼼장어는 제주도 남쪽이나 일본 해역에 많다. 대마도 가까운 수심 80∼130m의 바다는 물론 멀리 도쿄만의 수심이 300여m나 되는 곳에도 있다.100여t급 어선이 출어하여 통발로 잡아 활어로 들여온다. 꼼장어는 먹장어, 입이 뾰족한 하모는 갯장어, 아나고는 붕장어, 뱀장어는 민물장어를 말한다. 꼼장어는 상어 가오리 홍어 등과 함께 하등동물인 연골어류로 분류한다. 반면에 붕장어, 갯장어, 뱀장어는 뼈가 있는 경골어류. 번식률이 낮고 자원관리도 잘 안된다. 펄에 살다가 다른 동물의 몸에 상처를 내서 살을 녹여 뜯어먹는 흡착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양식 뱀장어와 달리 양식 꼼장어는 없기 때문에 서서히 가격차가 좁혀져서 뱀장어 가격을 능가할 판이다. 꼼장어는 양념구이나 소금구이, 찜, 회로 먹는다. 꼼장어도 처음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랬던 꼼장어가 부두노동자들이 피워놓은 화톳불에 집어던져 놨다가 꺼내 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지금같은 먹을거리가 됐다. 일상적으로 먹기 시작한지는 10여년 전에 불과하다. 기장에는 유명한 ‘짚불꼼장어집’도 있어 지푸라기 태운 재로 꼼장어를 구워내고 있다. 일본인들은 ‘아나고’나 ‘하모’, 특히 ‘우나기’는 좋아하지만 꼼장어는 거의 먹지 않는다. 우리가 아귀찜 등으로 즐겨먹는 아귀도 아예 먹지 않는다. 그래서 아귀와 꼼장어는 전량 한국 수출품이다. ●美시애틀 꼼장어 우리것과 맛 비슷 꼼장어는 자연산이라 늘 물건이 달린다. 외국에서도 꽤 많은 양이 들어오는데 주씨의 노련한 입맛으로는 캐나다에 가까운 미국 시애틀 근방의 꼼장어가 우리와 맛이 비슷하단다. 꼼장어의 본디 집산지는 부산과 충무. 최근에는 베트남 것도 들어오는데 맛이 없고, 일본산은 큰 것만 골라서 들여오므로 맛은 좋은 대신 값이 비싸다. 본디 기장에서도 동해로 8∼9시간 가량을 배타고 나가 3일씩 조업하는 식으로 많은 꼼장어를 잡아 들였으나 이렇게 7∼8년을 남획하다 보니 아예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러 이제는 거의 잡히지도 않는다. 어류전문가 고정락(국립수산과학원) 박사의 안내로 시장 나들이에 나섰다. 전복 소라 고둥 개조개 가리비 키조개 재첩 대합 꼬막 피조개 굴 등의 패류, 김 미역 다시마 파래 돌가사리 고장초 갈래곰보 꼬시래기 톳 쇠미역 등의 해조류, 고등어 방어 문어 연어 돔 물메기 아귀 갈치 장어 개불 새우 해삼 멍게 미더덕 우럭 광어 멸치 복어 주꾸미 한치 게 가오리 바닷가재 등이 좌판과 수족관마다 빼곡하다. 이곳을 유심히 지켜보면 우리 수산물의 흥망성쇠가 보인다. 예컨대 자갈치시장에서는 맛조개를 볼 수가 없다. 본래는 부산 근역에도 맛조개가 많았으나 매립 등으로 모래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바다생물 공부를 하려면 도감을 찾을 필요도 없이 자갈치시장을 돌아다니면 된다. ●지글지글 장어구이에 소주한잔, 세상시름 싹~ 명성에 걸맞게 먹을거리가 풍성하여 곳곳에 난전이다. 횟감, 구이, 찜 등이 지천이다. 그야말로 ‘그 옛날 50년대식’으로 연탄불에 석쇠 올리고 장어를 구워파는 좌판에 앉아 소주 한잔을 곁들이니 싼 가격에 푸짐한 인정이 절로 느껴진다. 고 박사가 재미있는 곳으로 잡아끈다.“예전에는 잡히지 않던 남방산 참다랑어가 잡히고 있어요. 수온 1도 차이가 물고기에게는 엄청난 변화지요. 한반도를 둘러싼 해역의 아열대화가 흔치 않던 물고기들을 자갈치시장에 부려놓고 있어요.”정말 좌판 나무상자에 참다랑어가 그득하다. 참다랑어는 북방 참다랑어와 남방 참다랑어가 있는데, 주로 고등어선망에 잡힌다.1∼2m짜리 1마리 위판가격이 무려 1200만원을 호가한다.1척당 5마리까지 잡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한번 출어에 5000만∼6000만원은 거뜬하다. 참다랑어를 잡으러 대마도로 출어한다. 참다랑어는 맛이 다르다. 살 속에 기름이 점점이 박힌 게 마치 꽃등심을 보는 듯하다. 전량 일본으로 나간다. 사실 우리는 캔으로 먹는 가다랑어, 황다랑어를 참치의 모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참다랑어는 이런 것과는 맛과 격조에서 비할 바가 아니다. 10여년 전에 사라진 ‘쥐치’도 보인다. 고 박사는 “남획으로 사라졌던 쥐치들이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산이 수입되는 동안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수입 수산물의 양적 확대가 자연보호에 일조하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는 설명이다. 펄펄 뛰는 생선만큼이나 활력있는 자갈치아지매들의 은근과 끈기야말로 한국인의 저력 그 자체가 아닐까. 그 생활 근거지가 번성하려면 물고기가 번성해야만 한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자율어업을 강조하고 있다. 어민들 스스로 자제하는 자율어업만이 자갈치시장의 종다양성을 보장하는 길이다.‘없는 것이 없다.’는 자갈치시장의 좌판에 놓인 어물들을 10년,100년 뒤에도 보려면 종다양성을 지켜내겠다는 우리의 인식이 보다 단단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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