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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삼성물산의 역사는 삼성그룹의 역사입니다.”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인 삼성물산의 지난해 매출은 9조 6963억원으로 주력인 삼성전자 57조 6324억원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0%를 비롯해 삼성석유화학, 삼성정밀화학, 삼성카드, 삼성SDS, 제일기획 등 숱한 관계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주식 1.38%를 보유하고 있고 등기임원(회장)으로 직접 챙기고 있는 데서도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회장이 등기임원으로 활동하는 삼성 계열사는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물산, 제일모직, 호텔신라, 삼성에버랜드뿐이다. 국내 종합상사 1호인 삼성물산은 84년 3위,1998∼2000년,2002년에 2위를 기록했던 것을 제외하면 종합상사의 매출기준이 달라진 2003년까지 줄곧 매출 1위 기업 자리를 지켜왔다. ●‘그룹의 역사’ 삼성물산과 인재들 고 이병철 회장이 28세였던 1938년 3월1일 대구시 서문시장 인근 수동(현 인교동)에서 250여평 규모로 출발한 삼성상회가 삼성물산의 전신이다. 이 회장은 이에앞서 경남 마산에서 정미소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부동산 투자’에서 다 날리고 자본금 3만원으로 상회를 시작했다. 삼성(三星)의 삼은 우리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로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첫 사업은 대구일대에서 생산되는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이었다.‘라면부터 미사일까지’ 취급한다는 종합상사의 70년전 버전인 셈이다. 삼성물산은 삼성의 대표기업답게 거쳐간 인물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초창기 삼성상회의 지배인으로 영입된 이순근씨는 이병철 회장의 와세다대 동문이다. 그는 정계에 투신했다 월북, 농림상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거의 모든 경영을 이순근씨에게 맡겼는데 오늘날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찌감치 시험한 것이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지 1년 만인 1948년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 2층건물에 삼성물산공사로 간판을 걸 당시에는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이 전무를, 김생기씨가 상무를 맡았다.1949년 11월 마른오징어 3만근을 배에 싣고 홍콩으로 떠난 조홍제씨가 교포무역상과 챤넬양행으로부터 오징어를 담보로 각각 면사 50근을 외상매입한 것이 국내 최초의 D/P(Document against Payment Base) 거래로 꼽힌다. 조홍제 회장은 62년 효성물산, 한국타이어를 갖고 삼성을 떠난다. 김생기씨도 삼성에서 독립, 영진물산·영진식품·혜성개발 등을 일궈냈다. 삼성물산 창립멤버로 60∼61년 사장을 역임한 고 허정구씨도 눈에 띈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사돈인 고 허만정씨의 장남인 허씨는 이후 삼양통상을 설립했다.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 허동수 GS칼텍스정유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아버지다. 70년에 대표이사를 지낸 정상희 사장은 3·5대 국회의원과 삼호무역 회장을 역임했고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남편인 정재은 명예회장의 아버지다. 이병철 회장과 고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을 이어준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86년 이병철 회장의 요청으로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됐다. 홍 회장의 공백을 메우며 이건희 회장 체제가 자리를 잡은 91년까지 물산 회장과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이필곤 전 부회장도 삼성물산 대표이사를 두차례(85∼93년,95∼97년)나 지낸 대표적인 ‘물산맨’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진두지휘하다 사업진출 차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국으로 물러난 뒤 삼성을 떠났다. 서울시 부시장을 거쳐 현재 알티전자 회장과 삼성 CEO 출신들의 모임인 ‘성대회’ 회장을 맡고 있다.93∼95년 사장을 역임한 신세길씨는 현재 서울반도체 회장이다. 현명관 부회장은 아직도 물산의 비상근 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은 2001∼2004년 배종렬 사장을 끝으로 공동대표체제가 굳혀졌다. 건설부문의 이상대(58) 사장은 충남 서천생으로 경복고와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73년 제일합섬으로 입사한 뒤 대부분 삼성건설에서 일했다. 건설이 삼성물산에 합병되면서 97년 삼성물산 전략기획실장으로 일했고 2000년부터 주택부문 대표를 맡았다. 이 사장의 경복고 2년 선배인 상사부문 정우택(60) 사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을 거쳐 77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휴스턴 지점장, 카자흐스탄 법인장 등 줄곧 상사부문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병철의 세번째 회사 제일모직 1954년 9월 설립된 제일모직은 삼성상회, 제일제당(53년)에 이은 삼성의 세번째 회사다. 긴 역사만큼이나 숱한 인재들을 배출했는데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구조본 차장,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총괄 사장,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 안복현 삼성BP화학 사장,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 등이 제일모직에서 잔뼈가 굵었다. 지난해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부임한 제진훈(58) 사장은 경남 산청생으로 진주고와 부산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일모직에 입사한 ‘모직맨’이다. 제일모직에는 올초 상무보로 승진한 이건희 회장의 차녀 서현씨와 남편 김재열 상무가 같이 일하고 있다. ●‘봄날’을 기다리는 화학·중공업 80년 유공 인수 실패,90년대 중반 자동차 사업의 좌절 등으로 자동차·중공업∼정유·석유화학·화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중화학그룹’을 도모했던 삼성의 꿈은 사실상 좌절됐다. 오늘날 삼성을 대표하는 업종은 전자와 금융이다. 하지만 화학·중공업 계열사들의 ‘절치부심’이 예사롭지 않다. 화학·중공업 계열사 CEO가운데 비교적 많이 알려진 CEO는 허태학(61) 삼성석유화학 사장이다. 경남 고성생으로 진주농림고와 경상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69년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에 입사했다. 허 사장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마저도 조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정도로 보수적인 농촌출신으로 한때 덴마크의 달라스나 그룬트비히 같은 농촌 계몽자를 꿈꾸었다고 한다. 호텔신라 총지배인, 삼성에버랜드 사장, 호텔신라 사장을 거쳐 2003년 삼성석화에 자리를 잡았다. 에버랜드 사장시절에는 ‘캐리비안베이’라는 테마파크를 조성, 리조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93∼2002년 삼성에버랜드는 이재용 상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한 ‘징검다리’로 부상하면서 구설수도 따랐다. 허 사장은 96년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를 이 상무에게 저가로 발행한 것과 관련, 최근 징역 5년을 구형 받았지만 지금도 공공연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건희 회장을 꼽을 정도로 삼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삼성 CEO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할 정도로 ‘자기 PR’에도 열심이다. 삼성과 고 이병철 회장에게 큰 상처를 줬던 삼성정밀화학(옛 한국비료)은 제일합섬, 에버랜드, 삼성전자, 삼성종합화학, 삼성중공업, 삼성카드, 삼성자동차 등 가장 많은 회사를 옮겨 다닌 것으로 유명한 이용순(59) 사장이 2003년부터 맡고 있다.64년 8월 27일 설립된 ‘한비’는 유명한 ‘사카린 밀수사건’을 계기로 67년 10월 삼성이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한 회사다. 한비는 이후 산업은행이 대주주로 공사형태로 운영됐지만 방만한 경영 등으로 위기를 맞자 94년 다시 삼성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홍식(58) 삼성토탈 사장은 삼성 사장단 가운데 몇 안되는 호남 출신으로 광주일고와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유난히 영남출신 CEO가 많은 삼성에서는 전주 출신의 배정충(60) 삼성생명 사장, 전남 구례생인 양인모(65) 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과 고 사장이 호남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이 기계공학과 1년 선배다. 72년 삼성에 입사한 고 사장은 줄곧 제일합섬에서 일하다 92년 비서실 경영팀장,93년 신경영실천위원회 팀장 등을 맡으며 그룹 전반의 일을 익히기 시작했다.95년 삼성종합화학 소속으로 화학소그룹 전략기획실장을 맡으며 화학계열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갔다.2001년부터 삼성종합화학 CEO를 맡으며 97년 당시 부채비율 800%로 ‘회생불능’이었던 삼성종합화학을 프랑스 토탈과의 합작과 고효율 경영으로 지난해 매출 2조 8000억원, 영업이익 5700억원(이익률 21%)이라는 ‘알짜기업’으로 변신시켰다. 순차입금 비율은 20%로 뚝 떨어졌다. 스스로 “화학이 곧 내 인생”이라는 고 사장은 2010년 이익 1조원 돌파를 목표로 삼성그룹 내에서 비교적 위상이 처지는 화학 사업의 ‘중흥’을 노리고 있다. 2006년 세계 1위 조선업체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중공업은 ‘현장경영’,‘극한원가’,‘질적인 1위’를 부르짖는 김징완(59) 사장의 지휘하에 부활을 꿈꾸고 있다. 경북 달성생인 김 사장은 현풍고와 고려대 사학과를 마치고 73년 제일모직에 입사했다. 중공업과는 88년부터 인연을 맺어 2001년 대표이사로 부임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생산성 높은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던 이병철 회장은 일본 IHI사와의 합작을 통해 경남 통영시 안정리에 150만평 규모의 조선소를 세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의 여파로 계획은 차질을 빚었고 썩 내키지 않던 거제의 우진조선을 인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또 하나의 ‘초일류’, 삼성 서비스 삼성에버랜드가 언론에 크게 부각될 때는 대부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관련돼 있다. 그도 그럴것이 에버랜드는 이건희 회장(3.72%)은 물론, 이재용 상무 25.10%,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 이윤형씨 등 세딸이 나란히 8.37%의 지분을 갖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4녀인 덕희씨의 남편인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0.48%),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남편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장도 0.08%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회사는 국내 최대, 세계 6위권의 테마파크와 골프장, 빌딩관리 등 자산관리, 단체급식 등 유통, 조경 등 환경사업을 영위하며 지난해 매출 1조원 1600억원, 순이익 800억원대를 거둘 정도로 탄탄한 경영을 자랑한다. 박노빈(59) 사장은 보성고와 서울대 수학과를 마치고 74년 제일제당으로 입사,91년 삼성중공업을 거쳐 93년부터 에버랜드에 발을 담갔다. 사업 구상이후 무려 7년이 지난 79년 개관한 호텔신라는 초기 경기하락과 오일쇼크까지 겹쳐 적자에 허덕였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홍진기 회장의 총 지휘하에 손영희 사장이 경영을 맡고 장녀 인희가 고문이 돼 음식조리 등 안살림을 챙기고나서부터야 경영이 호전됐다.”고 회고했다. 경복고와 서울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삼성물산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한 이만수(55) 사장이 2003년부터 경영을 맡고 있다.2001년 호텔신라로 들어와 지난해 상무보 승진에 이어 올초 상무로 승진한 이부진씨도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삼성의 서비스 사업 가운데 가장 독특한 영역인 보안업체 에스원은 2002년부터 이우희(58) 사장이 맡고 있다.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 출신으로 삼성내 거의 유일한 이건희 회장의 친척이다. 이 사장은 부산고와 부산대 법학과를 마치고 제일제당에 입사했다.94년부터 계속 비서실 인사팀장으로 일해왔다. 국내 최대 광고회사인 제일기획 배동만(61) 사장은 보성고와 고려대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73년 중앙일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제일제당, 호텔신라를 거쳐 비서실 홍보팀장, 에스원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2001년 제일기획 사장으로 부임했다. 지난해부터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 초창기 사업동지 이병철·조홍제 세간에는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효성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이 경남 진주의 지수보통학교를 다녔고 삼성을 공동 창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1910년생인 이 회장은 서당을 다니다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 회장의 고향은 의령군 중곡면 중교리지만 진주시 지수면과는 인접해있다. 지수에는 이 회장의 둘째누이 분시씨가 결혼해 살고 있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이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그해 9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했고 25∼29년에는 중동학교를 다녔다. 1906년생으로 이 회장의 형인 병각씨와 동갑인 조 회장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상경,1922년 중동학교 초등과 1,2,3학년 과정을 이수하고 이듬해 협성실업학교 초등과 4,5,6학년 과정을 마쳤다. 효성 관계자는 “언제부터인지 선대회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LG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이 지수보통학교 동문으로 소개됐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29년 도일,30년 와세다(早稻田)대 전문학부 정경과로 입학했고 조 회장은 27년 와세다대 공업전문학부에 입학했지만 29년 일본 호세이(法政)대 경제학부에 다시 입학한다. 둘의 동업관계에 대한 회고도 조금씩 다르다. 이 회장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은 48년 서울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세울 당시 전무가 조홍제 회장, 상무가 김생기 전 영진약품 회장이었으며 설립자본금의 75%는 이 회장이, 나머지 25%는 조 회장, 김 회장,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씨가 분담했다고 밝혔다. 반면 조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는 48년 말 평소 안면이 있던 이 회장이 명륜동 조 회장의 집을 찾아와 사업얘기를 하던 차에 조 회장이 사업자금 800만원을 빌려준 것으로 나온다.2개월 뒤쯤 조 회장은 200만원을 더 투자해 1000만원을 채웠다. 이 회장이 이미 투자한 돈은 700만원이었다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헤어졌던 둘은 51년 이 회장이 당시 가족이 피난가 있던 마산에 들렀다가 조 회장을 만나 부산에 새로 차린 삼성물산에 와서 일하기를 권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조 회장 역시 이와 비슷하게 기억했다. 호암자전은 또 조 회장과의 결별에 대한 별도 언급없이 63년 3월 2일 효성물산과 한국타이어, 한일나일론을 양도했다고만 명시했다. 나의 회고는 60년 3월초 일본 도쿄에서 골프를 치던 도중 이 회장이 결별 의사를 밝혔다고 소개한다. 이날 두 사람은 서로의 지분에 대해 언쟁을 가졌다. 둘의 재산분배는 62년 8월 이 회장의 자택에서 다시 논의된다. 조 회장은 “내 지분이 삼성 전체의 3분의 1쯤 되니 제일제당을 떼어달라.”고 제의하고 이 회장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갈등이 점점 커지다 64년에야 결론이 난다. 조 회장은 자신이 분배받은 재산(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삼성 지분 50%, 효성물산)은 3억원 정도로 자기 몫의 10분의 1도 안됐다고 밝혔다. 분가하면서의 불화는 한동안 재계 인사들에게 회자됐었다. 그러나 지난 8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조 회장의 빈소를 이 회장이 찾아와 한참동안 머물며 ‘앙금’이 없었음을 내외에 알렸다.3년뒤인 87년 이 회장도 영면했다. ukelvin@seoul.co.kr ■ 삼성물산 역대 대표이사 1938년 이병철 회장 1960년 허정구 사장(LG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사돈 허만정씨의 장남, 삼양통상 창업주) 1961년 박도언 사장 1963년 김선필 사장 1966년 안동선 사장 1967년 김진하 전무 1967년 박태암 사장 1967년 성상영 사장 1968년 정수창 사장(전 두산그룹 회장) 1970년 정상희 사장(이명희 신세계 회장 시아버지) 1971년 김정렬 사장 1974년 이은택 사장 1977년 손상모 사장(전 동부그룹 부회장) 1978년 송세창 사장(전 나산그룹 부회장) 1981년 경주현 사장(전 삼성종합화학 회장) 1984년 배상욱 사장 1985년 이필곤 사장 1993년 신세길 사장(현 서울반도체 회장) 1995년 이필곤 부회장(현 알티전자 회장) 1997년 현명관 부회장(현 전경련 부회장) 2000년 이상대 사장(현 건설부문) 2001년 배종렬 사장 2004년 정우택 사장(현 상사부문)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45~50년도 서울신문 한눈에 본다

    해방공간의 서울신문 등 4개 신문의 영인본 발간 사업이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는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의 기념사업으로 추진된다. 재단이사회는 27일 제10차 이사회를 열어 광복 직후부터 한국전쟁 직전(1945∼1950)까지 발행된 본지를 비롯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4대 종합일간지의 영인본을 올 안으로 발간키로 하고, 언론인 해외연수와 해외언론인 한국전문기자 양성 프로그램인 ‘서울대·LG프레스 펠로십’사업 등 총 15억원 규모의 언론지원사업계획을 확정했다. 재단측은 올해가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로, 이번 영인본 발간 사업은 좌우 이념이 대립하던 해방공간의 한국 언론사를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특히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계승하여 광복 직후 혁신 속간된 서울신문은 해방공간에서 중립 노선을 견지하면서 민족 단결과 국가 건설을 주창했다. 서울신문은 4·19 당시 사옥 전소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으며, 지금까지 영인본이 발간되지 않았다. 현재 본사는 전국의 도서관에 산재해 있던 당시 서울신문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하고 있다. 채종규 DB팀장 jkc@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 ‘보령’

    [문학이 머문 풍경]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 ‘보령’

    “바깥 마실꾼을 안이서 워치기 알유.내외허는 댁인디.” 이문구(1941∼2003)의 대표적 소설 ‘관촌수필’ 가운데 ‘행운유수(行雲流水)’편에서 옹점이가 가택수색을 나온 순경에게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김원일이 경상도 말을,조정래가 전라도 말을 빛냈다면 이문구는 충청도 말을 가장 빛낸 작가다.‘관촌(冠村)’이란 곳은 충남 보령시 대관동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이문구의 고향이다. ●우울한 유년시절 그의 고향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한두사람 있었지만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생전에 작가와 자주 어울렸던 한국문인협회 보령시지부장 문상재(50)씨는 “이 선생이 살아계실 적에 ‘어린 시절이 우울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책이 유일한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작가의 부친은 남로당 간부였다.문씨와 가까워진 것도 동병상련의 내력이 있어서다.문씨는 “1989년쯤 선생과 우연히 만나 내 외삼촌 얘기를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않고 듣고만 있더라.”면서 “나중에 선생이 ‘내 아버지 얘기여서 가슴이 철렁했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작가의 부친은 한국전쟁 즈음 보령 일대를 책임진 남로당 지구당위원장,문씨의 외삼촌은 부위원장이었다고 했다. 위원장이 되기 전엔 사법서사를 했다고 한다.문씨는 “선생은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많이 따랐다.”고 작가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해줬다.이 얘기는 작가의 유년시절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관촌수필’에 잘 묘사돼 있다.8개 단편으로 된 이 연작소설은 ‘일락서산(日落西山)’이란 첫 단편에서 할아버지 얘기를 한다. 한국전쟁 때 작가는 아버지와 형 둘을 잃었다.중학교 때 고향을 떠난 이문구는 오래동안 고향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문씨와 만난 것은 간이 좋지 않아 3년간 고향에 내려와 쉬던 때였다.그때 보령시 청라면 청라저수지 부근에 허름한 기와집을 한채 샀다. 작가는 간간이 서울에서 내려와 1주일 이상 이 집에 머물며 ‘매월당 김시습’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을 썼다.문씨는 “서울에서 문인단체 활동을 왕성히 하다 보니 소설을 쓸 시간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며 “내려올 때는 타자기를 한대 갖고 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겉은 무뚝뚝…속은 따뜻 문씨에게 “살기 위해 김동리 문하생이 됐다.”고 했다는 작가 이문구.반공이데올로기시대에 이른바 문단의 대표적 우익인사로 김동리가 꼽힌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내성적이라고 할 만큼 무뚝뚝했지만 속은 무척 따뜻했다.”고 이문구를 평했다.보령에 있는 집필실에 혼자 머물면서 조그만 텃밭에 심은 배추와 열무 등을 속아서 데친 뒤 서울로 가져가 식구들과 함께 먹었다. 작가의 미망인 임경애씨는 “무척 자상했다.”고 말했다.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줬고,엄격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자식은 자유롭게 키웠다 한다.가족간의 문제도 처자식 의견을 모두 수렴해 풀어가는 스타일이었다 한다. 한해에 1∼2번 대천에 내려오던 이문구는 부인과 동행한 날에는 문씨 부부와 인근 성주산 냇가로 가 다슬기를 잡으며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대천에서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허름한 집필실과 옛 생가 앞에 있는 안내문뿐이다.생가 바로 앞까지 펼쳐졌던 갯벌은 30여년 제방이 쌓여져 대부분 논밭으로 변했다. 최근 문씨와 권영민 서울대 교수,소설가 김주영 등이 생가 터를 매입,‘이문구문학관’을 세우기 위한 추진위를 구성하려고 적극 활동하고 있다. ●만인이 다 친구다 “글 쓰는 이는 어디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평소 말했고,김시습을 쓸 때 ‘네가 뭘 안다고‘ 호통치는 것 같아 부여 무량사까지 가서도 그곳에 있는 김시습의 영정을 쳐다 보지 못했을 정도로 글쓰기를 진정 외경했던 작가였다. 우리말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만연체,구어체,토속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기도 했다.김동리는 ‘현대문학’에 그를 추천하면서 “한국문단은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문인협회 이사,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 보수와 진보 문인단체 모두에서 활동을 했고,모두와 어울리며 모든 구듭을 친 문단의 일꾼이었다. 위암으로 작고한 그의 장례도 이례적으로 전 문학계의 합동장으로 치러졌다.화장 후 그의 유골은 유언대로 어릴적 놀던 생가 뒷동산 소나무밭에 뿌려졌다.한국전쟁 때 숨진 아버지와 형들의 묘가 없는 것도 화장을 한 이유일 게라고 주변 사람들은 추측했다. 보령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한국 단편애니 ‘버스데이‘ 아카데미 후보에

    호주 동포 영화 감독인 박세종씨의 한국 소재 애니메이션 ‘버스데이 보이(Birthday Boy)’가 25일 밤(한국시간) 발표된 2005년 아카데미상 후보작에 선정됐다. 한국인의 작품이 아카데미 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올해 77회째를 맞은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 출품작으로 선정됐던 ‘태극기 휘날리며’는 외국어 영화 부문 후보작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발표한 후보작 목록에서 ‘버스데이 보이’는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고퍼 브로크(GOPHER BROKE)’,‘로렌조(LORENZO)’,‘라이언(RYAN)’ 등과 함께 후보작 다섯편 중 하나로 선정됐다. ‘버스데이 보이’는 한국전쟁 중 졸지에 고아가 된 한 어린이가 처한 슬픔을 사실적 기법으로 담아낸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전쟁 중 폐허가 된 마을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어린이를 통해 전쟁의 아픔을 겪는 당시 한국인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년 전 호주로 이민, 현지인 아내와 두살 난 아들을 두고 있는 박 감독은 지난해 11월 열린 제6회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인 부천시장상을 수상한 바 있다. 연합
  • 내일로 흐르는 강/김춘옥 지음

    이미지 시대를 살다 보니 언제부턴가 어린이 서가에도 내용보다는 볼거리에 치중한 동화책들이 많아졌다. 그 틈바구니에서 ‘내일로 흐르는 강’(김춘옥 지음, 김선미 그림, 청개구리 펴냄)은 오래 시선이 머무는 장편동화이다.“시류가 어떻게 흘러가든 이땅의 어린이라면 꼭 들어야 할 얘기가 있다.”고 팔소매를 걷어붙인 책 같다. 작가가 시선을 돌린 지점은 요즘 아이들에겐 낯설기만 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언저리. 딴나라 얘기 같은 뼈아픈 현대사의 한 자락을 들춰보이며 ‘교훈’과 ‘감동’의 두 마리 토끼를 선물로 안긴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네 현대사 적십자사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에 열두살 ‘나’와 가족들은 통째로 술렁인다. 북한에 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확인전화를 받은 할아버지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시고, 곧 상봉할 날을 손꼽으며 식구들은 증조할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준비한다. 이야기는 장편소설처럼 탄탄한 형식미를 갖추고 펼쳐진다. 증조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는 ‘나’에게 할아버지가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소설’ 방식을 빌렸다. 현재의 화자가 ‘나’라면 반세기 전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할아버지인 셈.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독자는,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가족애와 더불어 현대사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할아버지의 회상을 통해 불려나오는 먼 이야기 속에는 3명의 어린 주인공이 있다. 당시 열두살이었던 할아버지 준태, 그 단짝친구인 승우와 난이.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준태, 친일파 아버지를 둔 승우, 뱃사공의 딸인 난이의 가슴시린 사연들이 얼기설기 엮인다. 어린 주인공들의 에피소드가 잔잔한가 싶으면 어느새 그 틈새로 현대사의 격랑이 발톱을 드러내곤 한다. 친일행각으로 한때 이웃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승우의 아버지 이주사가 동네사람들에게 내몰렸을 때, 난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승우를 위로해준다. 서로 다른 이념과 가정환경에도 세 친구가 우정을 나누는 대목들에 자주 코끝 찡해진다. 시련은 끝이 없다. 아버지가 동굴에 숨어 죽자 승우는 준태와 난이에게 편지 한통만 덩그렇게 남긴 채 마을을 도망치듯 떠난다. 소양강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통에 난이의 어머니도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는다. 강 건너 외갓집을 다녀오는 길에 그만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돌아가시고 만 거다. ●남북문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기회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의 배경은 38선 근처 강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 지금은 수몰된 곳이어서 전설 같은 사연은 한결 더 애잔해진다. “이산가족이 뭐예요.”“왜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졌나요.” 아이의 질문이 쏟아질 책이다. 지은이 김춘옥은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박물관 가는 길’로 등단했다. 초등생용.8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삯바느질로 모은 4억 장학금으로 이순덕 할머니

    삯바느질로 모은 4억 장학금으로 이순덕 할머니

    난치병에 걸린 70대 할머니가 40여년동안 홀로 담배가게와 삯바느질 등으로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건국대에 내놓아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건국대는 14일 서울 광진구 모진동에 사는 이순덕(78) 할머니로부터 4억 6000만원 상당의 2층 건물을 장학금으로 기증받았다. 이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서 내려온 뒤 1960년대부터 담배가게와 삯바느질 등 모진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건국대 후문 쪽으로 이사한 이후 홀로 살아온 이 할머니는 통일이 되면 북한에 남아 있는 두 여동생을 먹여살리겠다는 생각에 제대로 된 옷 한벌 입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 할머니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1990년대 초반 건물을 짓고 최근에야 융자금을 다 갚았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4년전 자신이 난치병인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할머니는 “몸이 마비가 올 정도로 불편해지자 마냥 통일이 오기만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면서 “학비가 없어 공부를 그만두는 학생들이 안타까워 재산을 기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건국대는 “할머니의 뜻을 기려 앞으로 병 치료 등 할머니의 앞날을 모두 책임지기로 했다.”면서 “건물은 할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난 뒤 처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나눔 세상] 팔순 김춘희할머니 아낌없는 사랑

    “모든 것을 털어 많이 내놓고 싶은데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팔순의 할머니가 전재산과 사후 시신까지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해 참다운 이웃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김춘희(80·서울 양천구 신정동) 할머니는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 1500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약정 기탁했다. 김 할머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장기기증운동본부에 장기와 시신도 기증키로 했다. 할머니의 평생은 오로지 나라와 남을 위한 봉사의 삶이었다. 해방직후인 1945년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내려온 뒤 줄곧 혼자 살아 왔다. 부친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김 할머니는 19세이던 1944년 간호사 면허증을 땄고 경성제대 의대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하지만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와 간호사 면허증도 한국전쟁 때 모두 잃어버렸다. 이 때문에 평생 생선과 떡을 파는 행상을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 왔다. 현재 정부가 보조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월 30여만원)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김 할머니는 한국전쟁 직후 10년 동안 오갈 데 없는 전쟁 고아들을 돌보며 장애인 단체의 봉사활동에도 참여했다. 최근까지 정부 지원금을 쪼개 생활비로 10만여원만 쓰고 나머지 20여만원은 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했다. 할머니는 “나라에서 생활비를 받고 있는데 남는 돈을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반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절약해 불우한 이웃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공동모금회는 김 할머니를 ‘행복지킴이 44호’로 선정했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탈북 국군포로 中서 억류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간 국군포로 한만택(72)씨가 한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을 탈출했다가 최근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됐다고 중국내 북한 소식통들이 10일 밝혔다. 한씨는 이달 초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延吉)에서 조카와 만나기 위해 한 호텔에 머물러 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북한 소식통들은 “한국의 가족들이 한씨의 북한 생존 사실을 알고 수개월의 노력 끝에 기획 탈북을 결행했다.”며 “그가 북한으로 압송될 경우 극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고령에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세 때문에 수용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외교경로를 통해 중국 당국에 한씨 억류 사실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한씨 억류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중국에 신병인도와 함께 인도주의적 처분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송환되지 않은 국군포로 500여명 가운데 지금까지 42명이 북한을 탈출해 귀환했다. oilman@seoul.co.kr
  • 방송3사 드라마 ‘을유 대전’

    방송3사 드라마 ‘을유 대전’

    올해는 어떤 드라마들이 안방극장을 찾을까. 지상파 방송 3사가 2005년 한해 동안 방송예정인 드라마들을 대작과 화제작 중심으로 살펴보자. ●선봉은 트렌디 드라마들이 우선 이달부터 10∼20대를 겨냥한 외주제작 트렌디 드라마들이 대거 시작하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다.KBS2 ‘쾌걸 춘향’,MBC ‘슬픈 연가’,SBS ‘봄날’,‘세잎클로버’,‘홍콩 익스프레스’ 등등. 먼저 지난 3일 방송을 시작한 KBS2 ‘쾌걸 춘향’은 고전 ‘춘향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패러디한 작품. 전기상 PD가 연출하고 탤런트 한채영, 재희 등이 출연했다. 지난 5일 시작한 MBC ‘슬픈 연가’는 ‘올인’의 유철용 PD가 연출한 멜로물이다. 탤런트 권상우, 김희선이 오랜만에 TV에 얼굴을 비춘다.SBS도 탤런트 고현정의 10년만의 복귀작과 가수 이효리의 연기 데뷔작으로 각각 화제를 모았던 ‘봄날’과 ‘세잎클로버’를 이달중 방송한다. 또 2월에는 탤런트 김효진, 송윤아, 조재현, 차인표 등이 출연하는 ‘홍콩 익스프레스’를 ‘유리화’ 후속으로 방송한다. ●묵직한 한국 근현대사 배경극들로 이어지고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도 한창 준비중이다. 일단 MBC가 오는 3월부터 본격 정치 드라마 ‘제5공화국’을 방송한다. 탤런트 이덕화가 분한 전두환 전 대통령 등 현존하는 인물들을 ‘영웅시대’처럼 실명 그대로 등장시킬 예정이라 기획단계에서부터 관심을 모았다.SBS는 1970년대 한국 패션 산업계를 그린 ‘패숀70’을 5월부터 방송한다.‘다모’의 이재규 PD가 탤런트 주진모, 이요원을 캐스팅해 제작했다.KBS도 올해 하반기 중에 광복부터 한국전쟁까지 이념갈등이 극심했던 시대를 무대로 한 드라마를 방송한다. ●마무리는 역시 대작들이 방송사들의 자존심을 건 대작 사극 경쟁도 관심거리다.MBC는 이르면 8월부터 고려말을 배경으로 한 100부작 대하사극 ‘신돈’을 방송한다. 월탄 박종화의 ‘다정불심’을 원작으로 ‘왕과 비’의 정하연 작가가 집필한다.SBS도 9월 방송을 목표로 백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50부작 ‘서동요’(가제)를 준비하고 있다.‘대장금’의 이병훈 PD, 김영현 작가 콤비가 백제 무왕의 관련 설화를 모티프로 삼아 만든다. KBS는 일단은 새 기획 없이, 올해 하반기까지 방송 예정인 ‘해신’과 ‘불멸의 이순신’에 최대한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이외에도 아직 방송사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외주제작사 ‘에이트픽스’가 80억원을 들여 제작한 한·중 합작 무협 드라마 ‘비천무’(극본 강은경, 연출 윤상호)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100% 사전제작으로 이미 촬영을 모두 마치고 현재 방송일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 현지의 중국인 액션 배우들을 대거 기용해 심혈을 기울여 촬영한 액션 장면들이 특히 볼 만하다. 만화가 김혜린의 동명원작을 바탕으로 탤런트 주진모, 가수 박지윤이 주연했다. 채수범기자 lokavid@seoul.co.kr
  • [2005 대전망] 2차 남북정상회담 열린다면…박재규총장·최상용교수 대담

    [2005 대전망] 2차 남북정상회담 열린다면…박재규총장·최상용교수 대담

    2005년 새해 들어 제4차 6자회담이라는 협상테이블을 통해 북한핵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한과 미국 등 관련국들의 줄다리기가 본격화된다. 이와 맞물려 남북간 화해협력 분위기 확산과 평화통일의 기반 조성을 위해 올 한해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기대도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서울신문은 신년 특별기획으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과 주일대사를 지낸 최상용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대담을 갖고 북핵문제 해결 전망과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기반 정착 가능성을 미리 짚어보았다. 대담은 ‘남북 정상회담에 바란다’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됐다. ●박재규 정상회담은 정례화돼야 한다. 지난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조속한 서울 답방과 제2차 정상회담 개최라는 우리의 제의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직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서 ‘정상간의 신뢰 구축과 정상회담의 정례화’가 꼭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적절한 시기’에 서울 답방이라는 공동선언이 도출됐다. 북한이 응할지, 않을지는 김 위원장의 몫이다. ●최상용 우선 북한이 6·15 합의정신을 지킨다면 언젠가는 성사될 것이다. 정상회담의 정례화는 우선 불신 해소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상회담 관례화에 따른 불신 해소만 가지고는 만족을 못할 것이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줘야 후유증이 크지 않다.2005년에도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서는 북핵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우선 순위가 돼야 할 것이다. ●박 북핵 문제는 남북한의 문제이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정부는 북핵문제를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 왔고, 그 결과 6자회담이라는 대화의 틀이 형성되고 세 차례의 회담도 가졌다.6자회담의 틀은 갖추어졌지만 실질적인 결실을 위해서는 북·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참가국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지난 2년동안 북한은 체제보존과 김정일 위원장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미국에 체제 보장과 경제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고 집권2기가 출범했는데도 북한의 기존 주장이 지속된다면 미국의 대북압박·제재와 북핵문제의 유엔안보리 상정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도 더 이상 환경과 여건을 탓하지 말고 회담에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최 북핵문제는 민족문제인 동시에 국제문제다. 우선 민족문제로서, 북한은 체제 존망의 문제이고 남한의 입장에서는 제2의 한국전쟁을 막고 선진 경제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 문제이다. 국제문제 관점에서 볼 때는 6자회담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자 협력체제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제1 상대는 미국이다. 미국의 경우 아직 부시 2기 정권의 북한에 대한 정책이 나와 있지 않다. 이라크 총선 결과가 나오고 부시 2기 집행부가 출범하더라도 실질적으로 6자회담의 틀 속에서 북·미 대화도 가능하다. 따라서 2005년 초에는 남북정상회담도 기대하기 어렵고 미국·중국·북한이 다같이 사태의 진전을 주시할 것이다. ●박 주변국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은 정상회담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뿐만 아니라 남북간 화해·협력의 활성화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최근 김정일 위원장과도 친분이 두터운 러시아 극동지역의 대통령 전권대표가 다녀갔는데 핵문제 해결 전이라도 남북한의 사정상 서울과 평양에서 정상회담 개최가 어렵다면 양 정상의 합의에 의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핵문제가 먼저 해결되고 정상회담이 개최되어야 좀더 성공적인 회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 ●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맞지만 현실적으로 간단치 않다. 몇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6자회담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투명성과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박 실패라는 심각한 문제를 머리에 담고 싶지 않다. 실패한다면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있고 다시 냉전체제로 돌아갈 수도 있다. 김 위원장도 해결이 안 되면 체제 유지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해결방법의 합의 도출에 너무 시간을 허비한다면 북한 경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6자회담이 재개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앞당기는데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최 비관적인 결과를 예상해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조심스러운 낙관’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어렵고 복잡하지만 끝내는 평화적으로 해결이 되리라고 본다. 좀더 확신을 가지고 당사자들이 실천하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합의한 주변의 책임 있는 정치가들이 평화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실패라고 한다면 두가지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이다. 북한이 이를 이용해 시간을 번다는 나쁜 전망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실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교섭카드로 끝까지 버티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정상회담의 가능성과 선택의 폭은 크게 줄어든다. ●박 1차 정상회담 추진은 지난 1999년 연말 현대아산이 주관한 통일농구대회가 열리면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긴장 완화를 위해 장소와 때에 관계없이 회담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의제를 모으면서, 외교채널을 통해서 우리의 준비상황을 미국에 충분히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회담 직후에도 김 전 대통령이 황원탁 당시 외교안보수석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해 정상회담의 내용 설명과 북·미 접촉을 권고했다.2000년 조명록과 올브라이트의 상호 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최 21세기 국력은 경제력 못지않게 외교력이 중요하다. 외교기술적으로 ‘사전 협의’와 ‘사후 설명’이 있을 수 있다. 협의해서 금방 긍정적 해답이 예상되는 사항은 사전 협의를 충분히 해야 한다. 그러나 외교사안에 따라서 성실한 사후 설명이 필요한 때도 있다. 세계적 수준의 냉전은 붕괴되었지만 한반도는 냉전이 남아 있다. 냉전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 6·15 정상회담이었다. 정상회담이 정례화됐다면 불신 해소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박 만남 자체의 의미도 크다. 그렇지만 2차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면 실질적인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해 평화공존문제가 논의돼야 한다. 군비경쟁을 완화하고, 군사적 무력충돌 가능성이 높은 북방한계선(NLL)문제를 논의하고,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문제도 논의해야 한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평화공존 방안이 나와야 한다. 다른 의제는 경제협력이다.2차 정상회담에선 우리의 경제상황을 고려해 장기적인 지원책을 찾아야 한다. ●최 지난 5년 동안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은 데는 북한은 경제문제를, 우리는 핵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하고 있다. 북한이 경제문제에서 기대했던 일본인 납치·유골문제로 어려움에 빠져 있다. 경제문제에 관한 한 북한의 당면 관심은 중국과 한국에 있을 것이다. 2005년은 광복 60년, 을사조약 10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문제를 잘 해결하면 올해는 세계의 시간과 민족의 시간이 일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무엇보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실질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민족 화해와 함께 국민통합이 더없이 중요하다. 정리 구혜영 김준석기자 koohy@seoul.co.kr
  • [서울 환경복원 원년] 종합생태지구로 거듭나는 ‘남산’

    [서울 환경복원 원년] 종합생태지구로 거듭나는 ‘남산’

    서울 용산에 사는 40대 회사원 이모씨는 남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연초에 새로 만들어진 수복천약수터 근처 소나무 탐방로에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는다. 소나무숲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함께 산책하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 됐다. 즐거움의 백미는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개골 개골’ 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릴적 시골 고향같은 착각에 빠진다. 올해는 남산이 ‘서울의 허파’로 자리매김한다. 소나무 탐방로가 한 곳 더 늘어나고, 생태 보호구역인 소규모생물서식공간이 새로 들어선다. 또 알에서 부화한 개구리들이 ‘여름 합창’을 선보인다. 청계천과 남산 두 ‘푸른 남매’가 2005년 서울의 환경 원년을 알리는 셈이다. ●남산의 얼굴 소나무 탐방로 2곳 개방 남산의 ‘얼굴’은 뭐니뭐니 해도 소나무다. 소나무는 바위 틈을 뚫고 나올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그들 중에서도 남산 소나무는 크기와 푸른색 모두 최상급에 속한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한양을 감싸안은 남산이 푸르러야 왕조가 태평하다는 믿음에 전국에서 질 좋은 소나무를 옮겨와 심었다. 남산 소나무숲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난개발이 이뤄졌던 1950,60년대를 지나면서 많이 황폐해졌다. 하지만 1991년부터 서울시가 펼친 ‘남산 제모습찾기’ 운동의 결실로 현재는 5만여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1차 남산 소나무탐방로가 개방된 것은 2003년 10월. 국립극장 뒤편 200m 5000여평 규모로 지난 68년 철책으로 보호된 지 36년 만에 시민들에게 선을 보였다. 2차 탐방로도 개방된다. 서울시 공원녹지관리사업소는 이르면 오는 6월 남산 남측순환로 수복천약수터 주변 소나무숲을 5000만원 예산을 들여 탐방로로 꾸미기로 했다.1차 탐방로와 비슷한 규모다.“왜 한남동 부근 소나무숲만 개방하느냐.”는 용산 주민들의 ‘원성’이 배경이 됐다. ●개구리 울음소리 들으며 산책 올여름에는 정겨운 개구리 울음 소리를 소나무숲 사이를 걸으며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난해 3월 사업소가 봄철맞이 청소를 하던 도중 서울타워 남서쪽 계곡과 야생식물원 연못에서 발견된 개구리알은 언론에 보도되면서 ‘스타’가 됐다. 개구리알을 퍼가는 시민들을 막기 위해 따로 공익근무요원까지 배치했을 정도다. 개구리알은 지난해 봄을 거치며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여름에는 개구리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상당수의 올챙이들이 먹이사슬의 ‘숙명’에서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업소 송명호 기획홍보팀장은 “지난해 개구리를 먹고 사는 황조롱이와 뱀의 출현 빈도수가 예년보다 눈에 띄게 증가했다.”면서 “올해는 남산 기슭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규모 생물서식공간도 운영 올해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 생태 공간인 소규모생물서식공간도 남산에서 처음으로 운영된다. 인위적으로 보호되는 도심속 환경보전지구다. 소규모생물서식공간은 지난해 한남동에서 국립극장방향 오른쪽 야산 2300여평에 조성됐다. 고욤나무, 개쉬땅나무 등 23종 1만 3000여그루의 나무들이 심어졌다. 생태연못과 수로 등 자연 생태계의 자생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도 설치됐다. 대신 들고양이 등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부종은 밖으로 내몰린다. 남산을 포함해 보라매공원 등 서울시내 4개 공원의 1만 7000여평이 지난해 소규모생물서식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올해는 수복천약수터 근방에도 추가로 만들어지는 등 2006년까지 매년 한개씩 남산에 들어설 계획이다. 사업소 홍보담당 온수진씨는 “남산에 사람이 아닌 동식물만 살 수 있는 생태 공간이 들어선 첫 성과”라면서 “비록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지만 ‘자연의 보고’ 남산의 생태적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이젠 사람입국이다] 이젠 사람이 생산 중심…평생학습 필수

    [이젠 사람입국이다] 이젠 사람이 생산 중심…평생학습 필수

    |클레어몬트(미 캘리포니아주) 전경하특파원| “평생학습은 당신을 젊게 만들고 삶을 윤택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평생학습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사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경영학자로 꼽히는 피터 드러커 교수가 ‘사람입국 신경쟁력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에 보낸 축하 메시지다. 문국현 특위 위원장은 지난해 말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 있는 그의 집에서 한국에서 드러커혁신상을 제정하는 취지를 설명하고 향후 방향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이번 만남은 그동안 드러커의 저서 10여권을 번역한 이재규 대구대 총장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지난 50년간 한국이 이룬 경제성장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앞으로 30∼40년간 한국은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한국은 10년안에 전쟁의 상흔을 극복했고 지금은 경제강국이다. 한국의 지난 50년간의 성공은 20세기의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산업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나라다. 성공요인은 뭐라고 보는가. -교육이다. 한국에 두 번 갔는데 엄청난 교육열을 보고 놀랐다.50년대 미국 정부에 한국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장학금 제도를 만들도록 해 이에 조금이나마 기여한 게 나에겐 큰 보람이다. 한국민은 학습의욕과 성취욕이 높다. 기업가 정신도 뛰어나다. 지난 50년은 당신이 언급한 지식사회로의 진입단계였는데. -아직 초입이다.50년간의 발전은 혁신이라기보다 진보에 의해 이뤄져왔다. 그러나 앞으로 20년 안에 제조업(manufacturing)과 육체노동자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미국에서도 1953년 노동자의 3분의1이 생산직에 종사했지만 지금은 11%에 불과하다. 컴퓨터가 가져온 진정한 변화다. 지식사회로의 진입은 필연적인가. -기술변화라기보다는 인구학적 변화 때문에 필연적이다. 저출산으로 인구도 줄어들지만 경제성장으로 인해 수입이 괜찮은 제조업 종사자의 아이들도 이제는 공장이 아닌 대학에 간다. 생산의 중심이 기계에서 지금까지의 생산자본 중 가장 비싼 인적자본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결국 사무실과 공장에서 자동화가 필연적이다. 한국은 이민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다. 반면 노령화사회로의 진입은 매우 빠르다. 인구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럼 생산성 문제 해결은. -지식노동자의 인사배치와 지속적인 학습, 두 가지가 중요하다. 지식은 매우 세분화되어 있고 전문적이다. 육체노동자는 똑같은 일을 하고, 그래서 서로 대체가 가능하다. 지식노동자는 아니다. 각자의 영역이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사, 특히 상위 직급의 인사배치가 중요하다. 인사에 관한 규칙도 세워야 한다. 지식이 전문화되었기 때문에 인사이동이 더 어렵고 그래서 더 중요하다. 또 지식은 없어질 수 있고 3∼4년만 연습하지 않으면 굳어진다. 계속 훈련받아야 한다. 그럼 교육이 더 중요해지나. -미국에선 교육자가 가장 빨리 성장한 직업군이다.2차 세계대전 전에는 7만 5000명의 교수진이 있었지만 지금은 250만명에 달한다. 늘어난 수만큼 앞으로 교육방법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지식사회에 있어 어느 수준에 와 있나. -유럽과 일본에 비해서는 경이적이다. 유럽은 정보기술에서 많이 뒤처져 있다.‘과거(yesterday)형’이라 할 수 있는 육체노동자조합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산업사회에서 노동자의 결속’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쇠퇴하고 있다. 한국도 탈노조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또 한국은 산업사회에 과도하게 적응했기 때문에 지식사회에 힘이 달려 적응이 늦을 수도 있다. 급속한 성장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경제의 발전은 어디에 달려 있다고 보나. -10년 정도는 중국과의 경쟁, 중국 시장에서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동안 한국은 중국에 자리를 잘 잡았다. 다음은 인도다. 인도와 중국은 매우 다르지만 어렵고 가능성 있는 시장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인도는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쓰는 나라다.1억 5000만명의 주요 언어가 영어이고 7500만명이 제2외국어로 영어를 쓴다. 이런 요인으로 인도는 지식경제에서 중요한 경쟁자이다. 인도에 자리를 잡은 외국은 아직 없다. 지식사회 발전을 위해 한국이 힘써야 할 점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국 고등학교 졸업생의 25%가 제조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을 위해 지적인 일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이 분야에서 성공하면 일본을 훨씬 앞서갈 수도 있다. 각국 정부가 취해야 하는 중요한 정책은.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육체노동을 분석하고 이를 독립적이고 경쟁적이며 숙련된 일련의 움직임으로 조직화하는 과학적 경영으로 세계 지도자가 됐다. 이것이 지난 50년간 경제적 성공의 기초가 되었다. 지금은 정보기술분야에 있어서 도입부다. 정부 뿐만 아니라 기업이 리더십을 가져야 지식근로자를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다. 제조공정에서 세부적인 기술들이 프로그램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는 아직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기업의 시민의식을 강조한 까닭은. -우리 사회는 조직사회다. 최근까지 정치·사회과학과 경영학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이전에는 미국 기업이 사회 자체를 구성했고 교회는 봉사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봉사의 중심에 서야한다. 기업은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비영리단체에서 활동하도록 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왜 기업이 직원들의 사회활동 참여를 독려해야 하나. -큰 조직의 문제는 사람들이 은퇴한 뒤다.20대에 영리했던 기술자는 20년 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기술자이며 일반 관리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공동체 조직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럼 두 번째 경력을 만드는 건가. -한때 두 번째 경력을 믿었다. 오류였다. 훌륭한 두 번째 경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그 예다. 나는 1929년 이후 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 내 일을 좀 더 잘하길 바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두번째 경력이 아니라 두번째 관심사다. 두번째 관심사는 왜 필요한가. -첫번째 승진에서 사람은 50명인데 일은 20개가 있다. 다음 승진에서는 사람수에 비해 자리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직업 이후의 관심사가 필요하다. 두 번째 관심사가 있으면 계속 배울 것이다. 또 평생학습은 당신을 젊게 할 것이다. 평생학습을 하게 되면 뇌세포가 늙지 않는다. 뇌세포가 건강하면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은 호기심이 없어지면서부터 늙는다. 배우면 젊어지고 삶을 즐길 수도 있게 된다. 지금은 무엇을 공부하나. -몇년전에는 페루 미술을 공부했었다. 지금은 프랑스 혁명 전후의 프랑스 정치와 영국의 보수주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lark3@seoul.co.kr ■ 피터 드러커는 누구 피터 드러커 교수는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만 96세를 맞았지만 지금도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지식근로자’ 개념의 전형인 셈이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20대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갔다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 통계학, 철학, 경영학 등 강의를 했다.39년 나치의 종말을 예언한 저서 ‘경제인의 종말’,42년 ‘산업인의 미래’로 미국 정치·경제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50년부터 뉴욕대 정교수로 20년간 일하고 71년부터 지금까지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시 드러커 경영대학원에서 강의하며 현대 경영학의 주춧돌을 놓았다. 또 제너럴모터스(GM), 제너럴일렉트로닉스(GE) 등 대기업에 컨설팅을 하면서 이론의 현실화에도 힘을 쏟았다. 국내에서 ‘경영의 실제(54년)’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93년) ‘21세기 지식경영’(99년) ‘다음 사회’(2002년) 등 저서가 번역돼 있다. ■ 드러커혁신상이란 드러커 교수의 이름을 딴 드러커혁신상 제정은 미국 캐나다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번째다. 오는 3월 드러커상 제정에 대한 세부사항이 발표되며 연말에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다. 드러커상은 미국에서 1991년 처음 제정됐다. 매년 11월 일반인들, 특히 소외계층의 삶을 개선시킨 비영리단체에 주어진다.1위 1곳,2위 2곳 등 총 3개 단체가 상을 받는다. 상금은 각각 2만달러와 2500달러다. 캐나다에서는 1993년 제정됐고 수상방식은 같다. 클레어몬트대학 드러커 경영대학원이 2년전부터 선정·시상 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드러커 관련 사업을 드러커 경영대학원 테두리안에 두자는 드러커 교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드러커 재단이 총괄한다. 2004년 미국측 수상자로는 극빈층을 위한 차량제공 프로그램을 4년 동안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 ‘Wheel Get There’가 뽑혔다. 캐나다에서는 수상자 선정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동안의 수상자와 그들의 활동은 드러커상 홈페이지(www.drucker.org/award)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드러커상 운영은 국내 여건이 적극 고려됐다. 비영리단체가 아닌 공공부문이나 기업이 상을 받을 수 있으며 자금 조성에도 정부가 일정부분 참여할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상금을 기업과 독지가들의 후원으로만 마련한다. 드러커상을 총괄하는 클레어몬트 경영대학원의 코넬리스 클류버 교수는 “한국은 미국·캐나다와는 다를 수 있다.”면서 “한국적 상황에서 합당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사를 표시했다.
  • ‘뉴 프런티어십’으로 재도약…다함께 가자

    ‘뉴 프런티어십’으로 재도약…다함께 가자

    새로운 ‘프런티어십’으로 재도약하자.’광복 60주년을 맞은 올해에 뉴 프런티어십으로 재도약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가야 한다고 국민들은 갈망하고 있다. 도전·개척·창조 정신을 뜻하는 프런티어십은 사고와 행동의 울타리를 벗어나 강한 의지와 독특한 독창성으로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개념이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국민들의 에너지를 결집시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가는 프런티어 리더십이 가장 절실한 덕목으로 꼽혔다. 서울신문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여론조사기관인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와 공동으로 실시한 국민여론조사 결과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지도자에게 프런티어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정치 지도자들의 미래비전 제시능력은 2.24점(10점 만점)으로 낮게 나타났다.0∼1점은 아주 낮음,2∼4점은 낮음,5점은 보통,6∼8점은 높음,9∼10점은 매우 높은 수준을 뜻한다. 이남영 KSDC 소장(숙명여대 교수)은 31일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선진화 시대에 접어들기 위해서는 프런티어 정신과 프런티어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면서 프런티어 리더십의 구체적인 덕목으로 화합과 관용, 공익 우선 등 세가지를 들었다. 그는 이어 “한국형 프런티어 정신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자들의 환골탈태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조사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관용과 상생의 정신’은 1.99점,‘공익 우선의 일관성’은 1.88점으로 상당히 낮게 나와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거의 한계상황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남영 소장은 “정치 지도자들 스스로가 자질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국민 에너지를 결집해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면서 “이것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국민들이 정치권에 요구하는 강력한 주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사에서는 또 광복 후 60년 동안 역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중요한 사건은 5·16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한국전쟁, 경제개발 5개년계획,5·18 민주화운동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극복하지 못한 과제로는 부정부패(33.8%), 빈부격차(28.9%), 이념갈등(12.2%) 등을 꼽았다. 응답자의 3분의 2는 민주적이고, 남한에 의한 흡수 통일의 통일 방식으로 남북 통일이 진행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광복 60년의 역사를 돌이켜 봤을때 긍정적이었다는 의견이 71.3%였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표시한 사람은 46.3%였다. 나빠질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32.3%였다. 자신의 이념을 보수와 진보라고 밝힌 응답자는 각각 39.0%와 31.8%로 보수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중도적 성향은 29.3%로 참여정부 출범 이후 보혁갈등 속에 크게 축소되면서 사회 갈등의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2년 가까운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잘하고 있다는 평가가 30.3%, 잘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43.0%였다. 특히 20대와 30대의 평가(지지도)는 각각 4.926점과 4.778점으로 40대(3.896점)와 50대(4.364점)보다 훨씬 높아 세대 및 이념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KSDC는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급락했다가 지난해 10월 이후 상승하는 추세에 있으며, 최근 청와대 조사에서 나타난 지지도 38%와 격차는 조사기법상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광복60주년 여론조사] (1)한국형 뉴프런티어십

    [광복60주년 여론조사] (1)한국형 뉴프런티어십

    일제의 암흑기를 벗어나 빛을 되찾은 광복(光復)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형제가 총부리를 겨누는 동란을 겪어 잿더미 위에서 절망했던 우리 국민들은 지난 60년 동안 산업화로, 근대화로, 민주화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만 내달려왔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2005년은 한반도의 역사가 새 분수령을 맞는다는 점에서 의미깊은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시대는 참신한 역사정신을, 획기적인 리더십을 갈망한다.21세기를 살아가는 국민과는 동떨어져 자꾸 과거로 회귀하는 정치권은 서울신문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철퇴를 맞았다. 그리고 정치권을 향한 국민의 쓴소리는 고스란히 역동적인 개척정신을 새 리더십으로 찾는 키워드로 연결되고 있다. 묵묵하게 척박한 땅을 일궈나가듯 뚜벅뚜벅 역사의 새 장을 개척할 수 있는 강인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민을 우울하게 만드는 정치를 그만두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한국형 ‘개척정신’은 바로 이 점에서 필수적이라 하겠다.F학점조차 주기 아까운 현재의 정치 풍토는 국민들의 열망과는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번 설문조사의 핵심이다. 국민들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형편없는 신뢰도를 근거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개척정신에 대한 목마름을 표현했다. 여야 관계없이 정치 지도자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1000명 중 385명이 0점을 매긴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의 정치를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뢰도 1점 31명(3.1%),2점 119명(11.9%),3점 136명(13.6%),4점 66명(6.6%),5점 178명(17.8%) 등 F학점을 준 응답자가 전체의 91.6%였다. 반면 정치 지도자를 ‘매우 신뢰한다.’는 의미로 10점 만점을 준 응답자는 12명(1.2%)에 불과했다. 이를 바탕으로 책정한 정치 지도자 신뢰도 평균 점수는 10점 만점에 2.4점. 대학 성적표라면 졸업이 영영 불가능한 낙제점이다. 연령별로는 30대가 정치를 가장 불신하고 있었다.‘매우 불신’을 가리키는 0∼1점을 준 응답자는 20대에서는 33.9%를 차지했지만,30대는 46.4%나 됐다. 지역색이 강한 광주와 전남·북, 그리고 부산·울산·경남에서 ‘매우 불신’은 각각 39.4%와 34.5%에 그쳐 전국 평균 41.6%보다 낮았다. 그렇다면 국민은 왜 정치 지도자를 믿지 못하는가. 바닥으로 추락한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덕목이 필요한가. 가장 손쉬운 답은 자고 일어나면 말이 바뀌고 행동이 180도 변하는 정치인의 ‘철새 근성’을 고치는 게 요체로 분석됐다. 이를 반영하듯 정치 지도자들이 공익을 우선시하고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가를 물었더니 최종 성적은 10점 만점에서 평균 1.88점에 그쳤다. 일관도가 매우 낮다고 답한 응답자가 1000명 가운데 540명으로 54%를 차지한 것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한다더니 날마다 몸싸움을 벌이느라 국민과의 약속은 공허한 폐휴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의 숱한 거짓말과 일관되지 못한 언행이 정치 불신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관용·상생의 정신이 부족한 것도 한국 정치판이 발전하는 데 큰 걸림돌로 지적됐다. 정치 지도자가 관용과 상생의 정신을 갖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평균 1.99점의 형편없는 성적이 나왔다. 정치인들이 말로만 ‘상생’을 외치고, 실제로는 ‘상쟁’에 바쁘다는 것이다. 상생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답변이 전체의 2.4%에 불과했다는 점을 우리 정치 지도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60년을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십은 어떤 덕목을 필수적으로 요청할 것인가. 다가올 앞날을 비춰줄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설문의 취지다. 전체 응답자의 77.5%가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할 능력이 ‘아주 부족’하거나 ‘대체적으로 부족’하다고 답했기 때문이다.10점 만점으로 평가하면 평균 2.24점에 불과한 초라한 성적표로는 쉬지 않고 바쁘게 변해가는 현대를, 그리고 국민의 행복을 이끌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정리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중요 역사사건 조사 광복 60년동안 아찔한 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뤄내면서도 폭력과 억압으로 물든 시대를 견뎌온 국민들은 공과(功過)에 관계없이 지난 세월을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60년 역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27.8%만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반면 응답자의 39.4%가 ‘매우 잘 가고 있다.’거나 ‘대체로 잘 가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렇다면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의 역사 흐름을 바꾼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일까. 응답자 1000명 가운데 16.6%가 선택한 1962년의 5·16이 단연 1위로 꼽혔다.2위를 차지한 1950년의 6·25 한국전쟁은 이보다 8.7%포인트 낮은 7.9%에 그쳤다. 5·16이 중요한 사건 1위로 선정된 사실은 함축하는 바가 크다. 당시 육군 소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무력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워낙 크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60년동안 무엇보다 세상을 한꺼번에 바꿔버린 6·25 한국전쟁보다 5·16이 1위에 올랐다는 점은 의미가 남다른 것으로 분석됐다. 사건 자체의 긍정, 부정적 의미를 평가하기 전에 5·16의 주역인 박 전 대통령의 딸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04년 정치권의 돌풍으로 등장했던 것도 이번 조사 결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됐다.5·16이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됐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자체가 곧 ‘박정희 향수’ 내지는 ‘한나라당 옹호’,‘박근혜 대망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풀이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지역별 분포도다. 단적인 예로 광주·전라 지역에서는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6·25(15.3%)가 1위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12.6%를 기록했다. 이 지역에서 5·16사건은 11.7%로 3위에 그쳤다. 반면 대구·경북 지역은 5·16사건이 14.6%로 1위를 차지했고,2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향수에 힘입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9.7%에 올랐다. 또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는 5·16 사건이 1위를 기록한 가운데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2위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또 주목할 점은 역사적인 사건 TOP-10 가운데 1990년대 이후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일은 ▲IMF구제금융(6위,1997년) ▲대통령 탄핵사건(8위,2004년) 등 2건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정리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아직 극복하지 못한 과제 격변의 세월을 겪으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극복하지 못한 과제로는 부정부패가 33.8%로 1위를 차지했다.2위는 28.9%가 응답한 빈부 격차가 차지했고, 이어 이념 갈등(12.2%), 지역 분열(10.3%), 학벌·지역 차별(9.6%)등의 순이었다. 그러나 미극복 과제에 대해서는 연령별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20대의 경우는 빈부 격차(34.7%)를 부정부패(27.9%)보다 많이 지적했다. 또 이념 갈등(9.8%)이나 지역 분열(9.6%)보다는 학벌·지역 차별(14.9%)을 먼저 꼽았다. 그러나 30대는 20대와 달리 부정부패(39.7%)를 빈부격차(25.7%)보다 더 많은 비중으로 응답했다. 이런 추세는 40대(32.4% 및 28.%)와 50대 이상(34.3% 및 27.4%)에서도 비슷했다. 세번째 미극복 과제로 꼽힌 이념 갈등을 놓고 20대(9.8%)와 50대 이상(9.9%)은 비교적 낮은 비중을 차지한 반면 30대(12.9%)와 40대(17.0%)는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 또 이를 가정 소득별로 보면 150만원 미만 7.5%,150만∼300만원 13.9%,300만원 이상 18.0% 등으로 소득이 높을수록 이념 갈등에 관심을 더 보이고, 낮을수록 관심을 덜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부패를 가장 큰 미극복과제로 꼽는 데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33.8%로 일치했으나 2위 요인인 빈부격차에서는 여성(32.9%)이 남성(24.7%)보다 응답이 많아 경제문제에 훨씬 더 민감함을 반영했다. 학벌 차별에 대해서는 예상과 달리 고졸 이하보다는 대재 이상의 고학력층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재이상 고학력층에서 학벌·지역 차별을 지적한 응답자의 ‘명문학교’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 여론조사 방법·필진 서울신문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와 공동으로 한반도의 현재를 진단하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숨가쁘게 달리기만 했던 지난 60년 세월을 돌아보면서 다시 역사의 새 장(章)을 여는 원동력을 찾아보자는 것이 이번 조사의 취지다. 언젠가부터 사회를 가르기 시작한 보·혁 갈등의 틀을 봉합해 새 시대로 함께 나갈 수 있는 공감의 리더십을 구해보자는 것도 이번 조사의 또 다른 숨은 취지였다. 이를 위해 지난 12월22일부터 이틀간 전국의 만 20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95% 신뢰 수준에 최대 허용 오차는 ±3.1% 포인트다. 이번 조사의 설계와 분석, 집필에는 ▲이남영(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KSDC 소장 ▲김형준(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KSDC 부소장 ▲김욱 배재대 정외과 교수 ▲김영태 목포대 정외과 교수가 참여했다. ■ 이남영 KSDC소장 총평 많은 국민들은 광복 이후 지난 60년동안 역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중요한 사건이 5·16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지난 역사에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고 긍적적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절대 다수의 국민은 한국 경제가 최소 5년 이내에 회복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우리 국민은 우리 역사와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긍정적인 국민의 에너지를 어떻게 결집하여 국가 발전으로 연결시켜 나가느냐의 문제가 한국 지도자들이 풀어야 할 최대 과제다. 그러나 한국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 불신은 한계에 이르고 있다.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자질은 매우 낮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작은 이익보다는 공익을 우선시하는 일관성 있는 자세의 결핍, 미래비전 제시능력 부족, 그리고 관용과 통합을 중시하는 상생정신 결여의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21세기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선진국 진입이다.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형 프런티어십이 필요하다. 특히 정치지도자들 스스로가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서 국민 에너지를 결집해 국가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 이것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국민이 정치권에 요구하는 강력한 주문이다. 설문조사 내용 ■ 우선 통일에 관한 사항입니다. 통일은 상당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수반하는 민족적 과업입니다. 통일에 대한 의견을 0∼10점 사이의 점수로 말씀해 주십시오. 적극 동의하실 때에는 10점을, 전혀 동의하지 않으실 때에는 0점을 주시면 됩니다. 1)통일은 반드시 민주적이고 남한에 의한 흡수 통일이어야 한다. 2)남북한이 합의하면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에 의한 통일도 무방하다. ■ 다음은 북한 핵문제 및 대북 지원에 관한 사항입니다. 현재 남북한 관계는 개성공단 추진, 금강산 관광 등 협력 분위기가 있는 반면, 북한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고, 서해 교전 등 위험 요소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3)북한의 위협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위협을 매우 크게 느끼면 10점,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 0점으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4)북한이 비록 김정일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더라도 북한 동포를 위해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지원은 가능한 한 많이 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적극 동의하실 때에는 10점을, 전혀 동의하지 않으실 때에는 0점을 주시면 됩니다. ■ 다음은 외교 및 국방에 관한 사항입니다. 5)노무현 정부는 주한 미군 철수와 주한 미군 재배치 등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협력적 자주 국방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국과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매우 잘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10점을,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0점을 주시면 됩니다. ■ 다음은 경제에 관한 사항입니다. 6)현재의 수입이 일한 것에 비해 얼마나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점수로 말씀해 주십시오. 매우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면 10점을, 전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0점을 주시면 됩니다. 7)현재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면 지금은 어렵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나중에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매우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10점을,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0점을 주시면 됩니다. ■ 다음은 이념성향에 관한 질문입니다. 한 개인의 이념 성향을 논의할 때, 사회의 잘못된 것을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바꾸고 변화를 지향하는 것은 진보라고 하고, 사회 변화보다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것을 보수라고 합니다. 8)응답자는 진보와 보수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아주 진보면 0점, 아주 보수면 10점으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 다음은 성장과 분배(효율의 문제)에 관한 사항입니다. 9)사회 일각에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이 분배보다는 성장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경제가 어려운 만큼 성장보다는 분배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장과 분배는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견해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전적으로 동의하실 때에는 10점을, 전혀 동의하지 않으실 때에는 0점을 주시면 됩니다. 10)우리사회에서 요즈음 자주 언급되고 있는 ‘평등’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 다음은 정치 지도자 및 정당 평가입니다. 11)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매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10점을, 매우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0점을 주시면 됩니다. 12)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야당 대표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매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10점을, 매우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0점을 주시면 됩니다. 13)여야를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하십니까?매우 신뢰하시면 10점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시면 0점을 주시면 됩니다. 14)현재 어느 정당을 지지하고 계십니까? (1) 열린우리당 (2) 한나라당 (3) 민주노동당 (4) 민주당 (5) 자민련 (6) 기타정당 (9) 모름/무응답 15)우리 같은 사회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정치문제에 대해 가타부타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전적으로 동의하실 때에는 10점을, 전혀 동의하지 않으실 때에는 0점을 주시면 됩니다. ■ 광복 60주년 평가 16)광복 이후 60년 기간 동안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꾼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7)광복 60년 기간 동안의 우리 사회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십시오. 아주 잘 가고 있다 100점, 아주 잘못 가고 있다 0점 , 그런 대로 잘 가고 있다 50점으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18)지난 60년을 회고해 볼 때,○○님께서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십니까?아니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매우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시면 10점을, 매우 나빠질 것으로 생각하시면 0점을 주시면 됩니다. 19)우리나라 경제가 앞으로 언제쯤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1)1∼2년 이내에 회복될 것이다. (2)5년 이내에 회복될 것이다. (3)10년 이내에 회복될 것이다. (4)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9) 모름/무응답 20)광복 이후 60년 동안 한국사회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과정 속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다음 중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한가지만) (1)진보·보수간 이념갈등 (2)지역분열구도 (3)빈부격차 (4)부정부패 (5)학벌·지역 차별 (9)모름/무응답 ■ 21세기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선진국 진입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 발전을 오히려 저해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다음의 지적사항에 얼마나 공감하십니까?전적으로 동의하실 때에는 10점을, 전혀 동의하지 않으실 때에는 0점을 주시면 됩니다. 21)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이 공감하고 함께 노력할 수 있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22)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관용과, 대립보다는 통합을 중시하는 상생의 정신이 부족하다. 23)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작은 이익보다는 공익을 우선시하는 일관성 있는 자세가 부족하다.
  • [문학이 머문 풍경]정지용시인의 고향 ‘옥천’

    [문학이 머문 풍경]정지용시인의 고향 ‘옥천’

    “남한에 있는 아버님을 만나고 싶어요.” 2001년 이산가족 상봉신청때 북한에 있던 정지용(鄭芝溶·1902∼50) 시인의 셋째아들은 상봉대상자에 아버지를 포함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한국전쟁 당시 시인이 납북된 뒤 아버지를 찾으러 간 셋째아들은 아버지의 행방을 알지도 못한 채 북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한다. 시인의 가족사 자체에 분단의 비극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셈이다. 정 시인의 사망도 평양감옥에 함께 있다 탈출한 사람이 “감옥에 폭격을 할 때 희생이 됐을 거다.”라고 말해 그럴 것으로 추측케 할 뿐 정확하게 언제, 어떤 과정으로 숨졌는지는 미스터리다. ●박제화된 흔적들 시인의 고향 충북 옥천에는 초가로 지어진 생가가 있다.1988년 정지용이 해금된 뒤 시인을 기리는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다른 이가 살고 있던 옥천읍 하계리 옛 생가 부지를 매입, 지난 97년 4월 문을 열었다. 지난 4월 시인의 큰아들 구관씨가 작고하기 전 그의 고증을 거쳐 건립됐다. 단장된 집옆에는 시인의 동상이 서 있고 물레방아도 만들어 놓았다. 대표시 ‘향수’에 나오듯 생가 앞에는 개천이 있다. 마을 주민이나 어린이들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하는 이 시구처럼 개천을 모두 ‘실개천’이라 불렀다. 부근에는 시인이 다니던 죽향초등학교가 있다. 운동장 한쪽에 일본식 옛 교사 한동이 서 있다. 지난해 6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57호로 지정한 교사앞 표지석에는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 등을 배출했다.’고 썼다.4학년 박주영(10)양은 “정지용 시인이 우리학교를 나왔다는 게 자랑스럽고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1926년 건립돼 정 시인이 공부했던 교실은 아니지만 자기 시를 판금조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 같은 학교출신이라는 게 좀 아이러니하다. ●몰락한 충청도 양반 구관씨는 작고하기 전 옥천 삼양초 노한나(31) 교사와의 대화에서 “구한말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운좋게 근대교육을 받았지만 유교윤리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구관씨는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자식에게는 무척 엄격했다.”고 전했다. 시인의 이화여대 제자인 유수인씨도 “두루마기에 회색 명주목도리만 하고 다닐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지만 전혀 비굴하지 않았고 깨끗했다.”면서 “돈 한푼 없어도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매달리는 여제자들을 데리고 가 외상 밥을 사주는 허풍기도 좀 있었다.”고 말했다. 시인이 고향에 산 것은 휘문고에 들어가기 전인 17세까지. 휘문고 교사도 했고 이화여대 교수로도 일했다. 구관씨는 “성당과 학교, 시 쓰는 것밖에 모르던 양반으로 항상 머리에 시가 들어서 밥을 먹는지 반찬을 먹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성질이 굉장히 급해 별명이 ‘신경통’으로 불렸다고 한다. 성격이 활달했고 해학이 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김영랑, 유치환 등 시인과 친했고 청록파 시인을 추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박목월에 대해서는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고 격찬했다. 또 ‘보리피리’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이름과 이희승의 ‘일석’이란 호를 지어줄 정도로 이름짓는 일에도 재능을 보였다고 했다. 정 시인이 졸업한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동상과 시비가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인석 옥천문화원장은 “최근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조동일 계명대 교수 등과 함께 이 대학을 방문, 내년 가을까지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에 정지용 동상과 시비 등을 세우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향 충북 옥천에서는 88년부터 정지용 문학축제’를 열어오고 있다. 문학상도 이듬해부터 열리고 있고, 신인문학상과 청소년문학상도 올해 10회와 6회째를 각각 맞았다. 매년 8∼9월 중국 옌볜에서 지용제 및 음악제가 열리고 있는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부인과 큰아들·딸은 남한에, 둘째·셋째아들은 북한에 갈갈이 찢어져 살았지만 정지용 시인의 향기는 옥천군체육공원 옹벽을 시가 새겨진 돌로 장식할 정도로 고향에 진하게 남아 있다. 옥천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그 영화 어때?] 웰컴투동막골 촬영현장

    햇살이 채 스며들지 못한 산자락 응달엔 언제 내렸는지 알 수 없는 하얀 눈이 군데군데 웅크리고 있다. 차 한대 겨우 들어가는 울퉁불퉁한 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기와를 얼기설기 이어 지붕을 만든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 ‘동막골’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피비린내났던 상처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이는 그 곳. 강원도 평창군에 자리잡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제작 필름있수다)의 세트장인 이 마을에서, 국군·인민군·연합군이 이념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름다운 팬터지를 그리고 있었다. #덩실덩실 마을 축제에 귀청 찢는 총소리가… 모닥불이 모락모락 연기를 날리는 마을의 정자나무 근처엔 한참 흥겨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전쟁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는 마을사람들과 그들에게 동화돼 함께 어울리는 군인들. 이들은 전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오게 된 연합군 조종사 스미스(스티브 태슐러), 길 잃은 인민군 수화(정재영), 국군 탈영병 현철(신하균)의 일행들이다. 음악이 흐르고 슛 사인이 들어가자 30여명의 마을 사람들과 10여명의 어린아이들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하지만 이내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판을 깬다. 동막골에 추락한 미군기가 피격됐다고 오인한 한·미연합군이 쳐들어온 것. 총구를 들이댄 채 “이 X새끼들아.”“Shut up”“빨갱이 어딨어?”등의 목소리가 뒤섞이고 마을사람들도 우왕좌왕한다. 참다 못한 현철은 국군을 공격하고, 수화도 연합군 두 명을 처리한다.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수십명이 뒤엉켜 긴장감 넘치는 액션신. “컷. 누구 다친사람 없나 확인해 주세요.”이내 무술감독이 동작들을 점검하러 나선다. 연합군 역의 외국배우들을 앞에 두고 급한 맘에 손짓발짓을 다 동원한다.“턱 탁(치는 동작), 드르륵(총소리) 알겠어요?” 그 짧은 틈을 타 까까머리를 한 아역배우들은 모닥불 앞에서 작은 나뭇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불장난을 하느라 신났다. #“연극과 다른 팬터지와 비주얼 돋보일 영화” 평창군의 세트장은 10억원을 들여 넉 달에 걸쳐 폐광촌으로 버려진 야산을 다듬어 길을 내고 개울을 만들고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 완성시켰다. 이은하 PD는 “관광단지로 조성할 계획으로 평창군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세트장을 둘러보다 영화의 원작자이자 2년전 같은 제목으로 연극무대에 올렸던 장진 감독을 만났다. 연극과 많이 달라느지냐고 묻자 “연극만 하겠어요?”라며 웃더니 이내 영화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박광현 감독에게 잘 맡긴 것 같아요. 한국전쟁을 정말 감각적으로 찍었습니다. 영화는 한국 최고를 향해 가고 있어요. 나도 각본상 받을 수 있을 것 같고…(웃음)” 박광현 감독은 CF 감독 출신으로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편을 연출한 바 있다. 박 감독은 “연극과 이야기의 큰 구조는 바뀌지 않지만 동막골이란 공간의 팬터지를 더 많이 살렸다.”면서 “공중전을 포함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비주얼과 영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영화는 1월중 크랭크업해 내년 5월쯤 개봉할 예정이다. 평창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한지붕 세븐스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엔 유독 주연배우가 많다. 영화가 공식적으로 이름을 내세우는 주연배우만 7명. 화려한 스타는 없지만 모두 연기력이 검증된 실력파 배우들이다. 국군은 신하균 서재경, 인민군은 정재영 임하룡 류덕환, 연합군은 스티브 태슐러가 맡았고 마을 여성 역에 ‘올드보이’의 강혜정이 유일한 홍일점으로 가세했다. 특히 정재영 신하균 임하룡은 연극에 이어 같은 역할로 다시 스크린에 얼굴을 내미는 것. 정재영은 “머리에 흉터가 깊이 나서 딱 보면 ‘사람 여럿 죽였구나.’싶은 외모지만 알고 보면 따뜻하고 바보스러운 역”이라고 소개했고, 신하균은 “연극보다 디테일이 살아난 캐릭터로 큰 이야기를 전달하는 연기의 앙상블에 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여러 영화에서 ‘반짝’ 출연에만 그쳤던 임하룡은 “겁많은 군인역으로, 내년엔 신인상에 도전해 보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스티브 태슐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공개 오디션을 통해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배우.“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한국 스태프의 성실함에 놀랐다.”는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친절한 현장분위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순박한 동막골을 상징하는 여일 역의 강혜정은 “첫 촬영 때 모니터를 보고 ‘우리 영화가 이런 색깔을 가졌구나.’라는 생각에 설다.”면서 “한마디로 ‘때깔’이 아주 좋은 영화”라고 말했다. 3개월간 동막골의 세트장 근처에서 함께 숙식을 해결하면서 저절로 ‘팀워크’가 생겼다는 이들.“이렇게 현장 분위기가 좋은 영화가 잘 되는 것 같다.”는 정재영의 말대로 한바탕 흥겹고도 감동적인 연기의 앙상블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2004 결산] 사라진 별들-꽃은 졌으나 그 향기는 영원하리라

    세월은 정직하다. 그 어김없는 흐름에 올해에도 각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은 가도 자취는 남는 법. 그들이 남긴 지혜와 역정은 오롯이 남아 후세의 귀감이 된다. 현실이 실타래처럼 꼬일 때마다 그들의 부재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각부 종합 ■ 국내 ●정·관계 지난 9일 한국 외교계와 야당사에 큰 획을 그은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과 이민우 신민당 전 총재가 나란히 타계해 세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 전 장관은 10여년 동안 한국 외교사의 주요 현장을 지킨 ‘외교사의 산 증인’으로 65년 한·일협정을 비롯, 베트남 파병 등 외교사의 길목에서 기틀을 다졌다.1958년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는 6선을 거쳐 87년 신민당 총재로 정계 은퇴하기까지 정치 인생 40여년을 외곬으로 야당을 지켰다. 유도 10단으로 대한유도회장, 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남다른 체력을 자랑하던 5선 의원 출신의 신도환 전 신민당 최고위원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다. 관계 인사로는 장예준 초대 동력자원부 장관을 비롯, 7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이한빈 전 부총리,98년 한은법 개정 뒤 첫 한은 총재에 부임해 외환위기 타개를 이끌었던 전철환 전 한은 총재, 내무부와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친 뒤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씨 등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밖에 5·16 직후 군정에 반대하다 군복을 벗은 원충연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캐나다에서 생을 마감했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수사받던 안상영 전 부산시장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시절 인사·납품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태영 전 전남지사는 ‘자살’로 삶을 마감해 충격을 던졌다. ●재계 카지노의 대부로 불렸던 전낙원(77)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지난 11월 지병으로 타개했다. 그는 73년 국내 최초의 서울 워커힐호텔 외국인전용 카지노를 관광공사로부터 인수, 이를 기반으로 호텔과 면세점, 건설 등 관광·레저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파라다이스그룹을 일궈냈다. 대한산업그룹 창업주의 아들로 40여년간 대한전선을 중견그룹으로 키워낸 설원량(62) 대한전선 회장도 지난 3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박남규(83) 전 조양상선그룹 회장도 해체된 조양상선그룹의 재기를 보지 못하고 지난 2월26일 세상을 떴다. 또 장기하(72) 전 진로그룹회장은 9월에, 이은범(76) 전 범양사 사장은 5월에, 양회문(53) 대신증권 회장은 9월에 타개했다. ●사회·체육계 사회분야에서는 종군위안부로 고통을 겪은 김순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 김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머물며 종군위안부의 피해실태를 증언하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다. 원일한 전 연세대 재단이사와 설대위 전주예수병원 원장 등 두 사람의 미국인도 눈에 띈다. 원씨는 연세대와 YMCA를 설립한 언더우드가(家)의 3세이다. 미국 이름이 데이비드 존 실인 설씨는 전쟁 고아와 버림받은 노약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체육분야에서는 1970년대 씨름왕 김성률씨와 국가대표 농구선수 출신 이원우씨, 송만덕 한양대 배구감독 등이 많지 않은 나이에 부음을 알려 안타까움을 더했다.1935년 프로자격을 얻은 한국인 프로골퍼 1호로 국제대회 첫 출전과 국내대회 첫 우승 기록을 보유한 연덕춘씨도 타계했다. ●문화예술계 문화예술계에서는 우리 문학의 든든한 뿌리 역할을 해온 큰 인물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져 안타까움을 남겼다. 연작시 ‘초토의 시’에서 한국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줬던 한국 시단의 원로 구상(85) 시인은 7개월여의 폐질환 투병 끝에 지난 5월11일 별세했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 ‘다보탑’으로 친숙한 시조 시인 김상옥(84)은 부인 김정자 여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장례식 이틀만인 지난 10월31일 세상을 하직해 세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의 애송시 ‘꽃’의 시인 김춘수(82)는 기도폐색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4개월간 투병을 벌이다 지난달 29일 끝내 타계했다.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과꽃’‘꽃밭에서’등 350여편의 주옥 같은 동시를 지은 아동문학가 어효선(79)도 지난 5월15일 소천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농부 작가 전우익(79)은 지난 1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등의 저서를 통해 그가 전해준 소박한 삶의 소중함은 더욱 가치있게 다가온다. 1953년 출판사 ‘일조각’을 설립, 반세기 동안 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계 원로 한만년 대표도 ‘한국사신론’(이기백 저),‘고가연구’(양주동 저) 등 기념비적인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예술계에서는 6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누빈 악역 스타이자 영화배우 독고영재의 부친인 원로배우 독고성(75)이 지난 4월10일 별세했다.‘빨간 마후라’를 작곡한 작곡가 겸 평론가 황문평(85)도 800여곡의 영화·드라마 음악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재즈계, 타악 연주계의 거목인 김대환(71),‘오뚜기 인생’의 가수 겸 음반제작자 김상범((66),‘곡예사의 첫사랑’을 부른 가수 박경애(50)도 올해 우리가 떠나보낸 스타들이다. ●학계 올해 학계도 훌륭한 스승을 잃었다. 사학계에서는 동양사학계의 거목 고병익(80) 박사와 연세대 황원구(74) 교수가 5∼6월 잇따라 별세했다. 실증주의사관의 확립자로 불리는 국사학계의 태두 서강대 이기백(80) 교수도 6월 타계했다. 한글학회에서도 ‘한글지킴이’ 허웅(86) 한글학회 회장이 1월26일 눈을 감았고 지난달 21일에는 KBS 라디오프로그램 ‘바른 말 고운 말’로 유명한 한글재단 한갑수(91) 이사장마저 세상을 떠났다. 진보사회과학계의 큰별 서울대 김진균(67) 교수도 2월14일 별세했다. 민족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한 김 교수는 늘상 정권의 핍박에 시달렸지만 그가 만든 산업사회연구회는 진보학술운동의 모태였다.‘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도 김 교수의 작품이다. 과학기술분야에서도 육각수이론을 창안해 ‘물박사’로 통했던 전무식(72) 박사와 한국 핵의학분야를 개척한 전 서울중앙병원장 이문호(82) 박사가 8월13일, 지난 5일 각각 별세했다. 또 전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84) 박사도 5월29일 타계했다. 화학야금학을 공부한 최 박사는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대소장, 과기처 장관을 지내면서 과학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을 받았다. ●종교계 올해 종교계는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세수 77)의 입적이 무엇보다 큰 뉴스였다. 지난달 30일 원적에 든 숭산 스님은 달라이 라마, 틱 낫한 등과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으며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진력해왔다.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40년 가까이 세계를 돌며 32개국에 120여개의 선원을 세웠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꽃)라는 가르침 속에 한국 불교 세계화에 일생을 바친 숭산 스님은 5만여 눈푸른 납자와 제자들을 뒀다. 기독교 쪽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지낸 조용술 목사가 지난달 15일 84세로 별세했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신대를 나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재단이사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복음 전파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 국외 한 시대를 풍미한 지구촌의 별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숱한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한줌의 흙이 됐으나 그들이 남긴 자취는 또렷하다. 올해 사라진 인물들을 되돌아본다. 야세르 아라파트(75) 35년간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을 이끈 중동의 풍운아. 이집트 태생으로 지난달 파리의 군병원에서 사망했다.59년 무장단체 ‘파타운동’을 설립했다.67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96년 자치정부 수반이 됐다. 테러와 평화협상을 병행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94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부패와 개인축재 등의 의혹에 시달렸다. 그의 사망으로 중동의 평화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로널드 레이건(93) 구두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B급 영화배우에서 미 40대 대통령(81∼89년)에 올랐다. 뛰어난 정치감각과 유머로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됐다. 공급경제학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했고 우주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스타워스’를 구상,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다 지난 6월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타계했다. 자크 데리다(74) 이성 중심의 전통적 서양철학에 반기를 든 ‘해체론’의 창시자.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두로 10월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숨졌다. 언어의 명료성과 통일성이 아니라 다극적 의미를 강조,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은 ‘반(反)철학’의 후계자로 평가된다. 레이 찰스(74) 노래로 미국 내 흑백통합을 이룬 흑인 솔 음악의 거장.7살 때 시력을 잃고 15살 때 고아가 됐으나 천부적인 자질로 13차례나 그래미상을 받았다.‘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8월 사망했다. 말론 브랜도(80) ‘대부’의 돈 콜리오네 역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배우.‘워터프런트(50년)’와 ‘대부(73년)’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나 두번째 상은 북미 인디언에 대한 미국의 차별정책에 항의해 거부했다.‘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51년)’,‘지옥의 묵시록(79)’ 등에서 열연했다.7월 타계. 크리스토퍼 리브(52) 가슴에 ‘S’자를 달고 붉은 망토를 걸친 불멸의 ‘슈퍼맨’.78년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슈퍼맨에 발탁된 뒤 83년까지 3차례 시리즈에 출연했다.95년 승마대회에서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재활치료 끝에 휠체어를 타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나 10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장애인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했다. 에스티 로더(97) 지난 4월 타계한 미 화장품업계의 여왕. 그가 창안한 ‘공짜샘플’과 ‘고급매장’ 전략은 20세기 모든 마케팅의 표본이 됐다. 부엌에서 만든 미용크림으로 46년 에스티 로더를 창업했다. 뉴욕에 본사를 두고 현재 세계 130여개국에서 50억달러어치의 화장품을 판다. 프랜시스 크릭(88) 1953년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처음 발견한 영국의 생물학자. 지난 8월 결장암으로 미 샌디에이고에서 숨졌다. 인간의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로 복제되는 과정을 밝힌 공로로 62년 노벨상을 탔다. 생명공학 산업의 기초를 일궈 다윈과 멘델에 견줄 만한 과학자로 평가된다. 이밖에 할리우드의 여배우로 ‘킹콩’의 페이 레이(96)와 앨프리드 히치콕의 스릴러 ‘사이코’에서 열연한 재닛 리(77)가 8월과 10월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내전을 카메라에 담은 전설적 사진작가 앙리 브레송(96)은 8월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슬픔이여 안녕’의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69)은 9월에 타계했다. 자신을 마담으로 부르도록 한 네덜란드의 여왕 줄리아나(94)는 1월에, 장징궈(蔣經國) 전 타이완 총통의 부인인 장팡량(蔣方良·88)은 지난 15일 사망했다. 1968년 북한에 피랍된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의 함장 로이드 부커(76)는 1월에 죽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창시자 셰이크 아메드 야신(66)은 이스라엘의 헬기 공격으로 숨졌다. 의약업계의 황제 잭 에커드(91)와 이탈리아 자동차 왕국 피아트의 움베르토 아그넬리(69)는 5월에 운명을 달리했다.
  • 역사갈등 한·중·일 ‘연합’ 가능할까

    ‘동아시아’가 화두다. 세계적인 블록화의 바람에 유럽연합을 부러워하면서도 막상 ‘동아시아연합’을 들추면 대부분 “가능할까?”라고 반문한다. 과거를 두고 한·중·일 3국이 치열한 기억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에는 미·중간 갈등과 북핵문제가 미묘하게 겹쳐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단합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과거 기억을 더듬고 있다. 먼저 20명의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주최로 지난 20일 열린 ‘근대전환기의 동아시아 삼국과 한국’ 학술회의는 일제시대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고 있다. 개화기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이 쓴 조선여행기나 조선총독부 치안관계자의 육성녹음, 개화기에 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잡지 등을 분석해 한·중·일 3국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추적했다. 이에 앞서 지난 16∼17일 15명의 연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세대 국학연구원 주최로 열린 ‘동아시아 지역구도:역사의 연속과 단절’ 학술회의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좀 더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 관계를 조명했다. 우선 ‘명·청(중)-조선(한)-막부(일)’시대 조공·책봉체제의 재해석이다. 이전의 ‘정치적인 상하관계’에서 ‘경제적인 유인’으로 해석의 초점이 이동했다.18세기까지 세계최고의 부를 자랑했던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체제가 형성됐었다는 다소 파격적인 근거와 함께다. 또 조공·책봉체제는 정권안정을 위한 왕조끼리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 끼치는 영향력은 중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동아시아지역의 이익을 요구하고 나선 일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의 패전 뒤였던 20세기 후반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사실상 부활한다. 이는 전세계적인 냉전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전쟁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세계경찰 미국은 일본에 역할분담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의 재정부담 증가와 급성장한 일본이 1차적 원인이었고 길게는 일본이 시장논리에 따라 중국에 근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영·일동맹과 미·일간 태프트-가츠라조약의 부활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본학의 권위자 하버드대 앨버트 크레이그 교수가 최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청 강연에서 일본을 ▲선진국 가운데 GNP대비 가장 최저의 군사예산을 가진 평화로운 나라 ▲일본이 다시 호전적 국가가 될 가능성은 0이라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강대국에 빌붙는 사대,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균세, 스스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자강. 세가지 갈림길은 결국 개별 국가를 중심으로 본다는 점에서 19세기적인 사고라는 비판이다. 결국 동아시아의 상호작용, 협력의 제도화 노력, 민간연대나 운동 등을 통한 발전 등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비극의 역사’ 영화로 만든다

    ‘실미도’와 ‘역도산’. 올해 한국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대작들이다. 근현대사와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들이 유독 많았던 올 영화계 트렌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다.‘실미도’를 제외하고 대다수 영화들이 비평과 흥행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류는 꺾일 줄 모른다. 당장 내년에만 근현대사의 비극과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열대여섯편에 이를 전망. 노근리 사건,10·26,5·18, 삼청교육대, 언론통폐합 등 다뤄지는 과거사도 다양하다. 영화계가 가장 관심을 보이는 현대사는 5·18민주화운동. 현재 3편의 영화가 동시에 기획 중이다.‘이재수의 난’ ‘전태일’ 등을 제작했던 기획시대는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자 지도부 홍보부장이었던 고 윤상원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준비 중이고, 호엔터테인먼트는 광주항쟁 당시 시민 자치의 유토피아를 다룬 ‘광주’를 제작하고 있다.5·18기념재단에서도 제작비 100억원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추진 중이다. 80년대 삼청교육대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도 나온다. 엔이오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는 ‘삼청교육대’는 순화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됐던 인권유린의 현장을 고발하는 영화.‘테러리스트’ ‘김의 전쟁’을 연출한 김영빈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강철웅 대표는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7월 개봉 예정이다. 이밖에도 80년 언론통폐합을 다룬 ‘TBC가족여러분, 안녕하세요’(제작사 마술피리),88년 탈옥수 지강헌의 인질극을 소재로 한 김의석 감독의 ‘홀리데이’(현진시네마),75년 최초의 연쇄살인범 김대두를 극화한 ‘살인마 김대두’(필마픽쳐스),70년대 중반 무등산 빈민들의 영웅으로 알려진 박흥숙을 다룬 ‘무등산 타잔, 박흥숙’(백상시네마), 일본의 진주만 공습계획을 미리 알아낸 한국인 최초의 이중 첩보원 한길수의 이야기 ‘파일명 Haan’(트라이엄프픽쳐스) 등이 촬영 중이거나 기획 단계에 있다. 최근 10·26사건을 블랙코미디식으로 그린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촬영을 마친 강제규&명필름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폭로하는 ‘노근리 다리’와 일제시대 공산주의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인 ‘아리랑’까지 일련의 근현대사 영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심재명 대표는 “우리 현대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격렬하고, 드라마틱하다는 점에서 늘 영화 창작자들의 관심권안에 있었다.”면서 “검열에서 자유로워졌고, 관객들의 기대치도 높아지면서 한국 영화가 과거 금기시됐던 소재들을 다루는 데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실미도’와 ‘태극기휘날리며’의 흥행 여파를 무시할 수 없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과거의 잊혀진 근현대사가 관객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미도’가 입증한 셈”이라면서 “새로운 유형의 영화들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 아무래도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경향이 큰 만큼 당분간 한국 영화계에서 근현대사물과 실존 인물 영화붐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조정래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

    [문학이 머문 풍경]조정래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작가 조정래가 발표한 소설 ‘태백산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현실 투쟁에 패배한 하대치 일행이 ‘야산대장’ 염상진의 묘에 성묘한 뒷 상황을 이같이 설명하며 소설은 끝난다. 토벌대에 쫓긴 이들 패잔병은 끝없이 펼쳐진 적막과 어둠속으로 빨려든다. 그 어둠 건너편엔 초롱초롱한 별들이 가을밤 산골짜기를 비추고 있다. 별들은 야산투쟁에서 숨진 대원들의 넋이다. 이 별들은 희망이고 언젠가 완수해야 할 ‘혁명’의 불길이다. “마지막 남은 이들 대원이 사라져가는 곳은 어딘가.”라는 물음을 남긴 채 전체 1만 7000장 분량의 원고지가 대단원을 장식하는 대목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당시만 해도 금기시됐던 ‘빨치산’과 ‘남로당’의 실체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좌우 대립과 전쟁과정에서 탄생한 ‘야산 대원들’을 역사의 한 축으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일제 말기∼해방∼여순사건∼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을 대서사시처럼 엮어낸다. 역사의 베틀은 남해안의 한 포구인 벌교에서부터 조계산, 지리산, 태백산, 거제포로수용소 등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한올 한올 짜여진다. 그 중심인 지리산의 골짜기와 능선들은 단순히 지형지물만이 아니다. 그 자체가 역사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이데올로기란 ‘괴물’과 버무려져 있는 공간이다. 작가는 그들에게 염상진·김범우·염상구·하대치·최익승·심재모·소화·외서댁·들몰댁… 등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이들은 한많은 시대를 살아간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죽임과 죽음, 보복의 악순환으로 내몬 원인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는 ‘땅’에서 비롯된 점을 부각시켰다. 종문서는 불살라졌으나 당장 부쳐먹을 자갈논 한뙈기 없는 민초들은 일제와 손잡은 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이들에겐 ‘내땅’을 가져 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나눠 준다는데 누가 싫어할 사람 있겠느냐.”는 한 소작인의 말처럼 ‘땅=생명’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지명 이름이 현실과 똑같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이 소설에 묘사된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작가는 “역사의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 현장답사를 되풀이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밝힌다. 소설 현장인 벌교읍은 실제로 여순반란사건때 좌우익 대립이 심각했고 억울한 죽임과 보복성 살해가 난무했었다. 주민 나모(72)씨는 “어렸을 때 읍내 북국교 등지에서 빨치산과 토벌대가 번갈아 인민재판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가 중도방죽 제방에 널려 있었다.”고 말했다. 지리적으로도 제석산과 진광산 등이 포구를 감싸안으며 북쪽으론 조계산과 맞닿아 있다. 섬진강을 사이로 조계산과 지리산이 태백산맥을 따라 금강산까지 이어진다. 광주에서 주암호를 따라 낙안읍성 쪽으로 가다 보면 순천시 외서면과 벌교읍을 가르는 석거리재가 나타난다. 이 고개에서 우측으론 염상진 부대가 한때 해방구로 삼았던 보성군 율어면이다. 선수머리∼벌교읍 사이엔 제법 넓은 농토(중도방죽)가 펼쳐진다. 중도방죽은 실제로 일본인 중도(中島·나카시마)가 땅에 주린 소작농을 꼬드겨 둑을 쌓아 만든 간척지이다. 중도 들판은 소설 속에서 그릇된 토지 소유관계의 역사를 집약한 중심 소재이다. 중도방죽 이외에도 읍내 곳곳에는 소설의 무대들이 작품속에서 묘사된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봉화가 타오른 제석산, 순천 쪽으로 이어진 관문인 진트재(국도 2호선), 하대치 일행이 군용열차를 털었던 경전선 터널, 새끼 무당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이 깃든 무당집, 현부잣집 재각, 양철지붕의 청년단 건물, 염상진의 목이 내걸렸던 벌교역 광장, 보복으로 점철된 죽임의 현장인 홍교, 양심적 지주 김사용의 퇴락한 기와집, 땅벌과 염상구가 주도권을 다퉜던 철교, 토벌대 사령부로 사용됐던 남도여관, 금융조합 건물 등등…. 요즘 이곳엔 일주일이면 200∼300명의 답사객이 몰린다. 그러나 작품에서 묘사된 지명을 알리는 간판 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아직도 ‘빨갱이’와 ‘토벌대 후손’ 주민들 사이에 앙금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나 보다. 일부 원로 주민들은 소설속의 장소들을 ‘기념화’하는 사업에 떨떠름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백산맥 문학관을 짓는데도 의견이 분분했다고 전한다. 보성군은 그러나 내년쯤 제석산 자락인 현부자집 아래에 문학관을 착공키로 했다. 지난해부터는 문화해설사를 배치해 답사객들을 돕고 있다. 또 내년 봄 중도방죽 2.4㎞구간에서 가족 걷기대회를 열고 이때 작가 조정래씨를 초청해 ‘문학강좌’도 마련한다. 선수머리 입구엔 갯벌 체험장을 조성, 녹차밭 등과 연계한 관광상품 개발에 나선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좌익도 우익도, 지주도 소작농도 없다. 소설속의 전투와 살벌함을 느낄 만한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농어가가 산재한 조용한 포구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 어둠이 내린다. 들물때가 됐는지 홍교 밑 갈대 숲에 바닷물이 흘러든다. 보성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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