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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 대립 넘지못한 운명적 사랑

    좌우 대립 넘지못한 운명적 사랑

    ‘KBS 대하드라마, 부활할까?’ 지난해 숱한 화제를 뿌린 ‘불멸의 이순신’의 뒤를 이어 KBS 1TV의 새 대하드라마가 이번 주말 시청자들과 다시 만난다. 해방 전후 한국 현대사 공간을 배경으로 좌·우익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룬 60부작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연출 윤창범·유현기, 극본 이한호·정성희)가 7일부터 매주 토·일요일 밤 9시30분에 방송된다. 이 드라마는 ‘태조왕건’,‘불멸의 이순신’ 등 왕조시대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들과 달리 해방공간에서 활약한 실존 인물로부터 모티브를 빌려와 차별화를 꾀했다.1930년대부터 45년 광복,50년 한국전쟁 전후까지 젊은이들이 믿고 따른 좌우 이념과 이상을 함께 다루는 것도 현대사를 소재로 한 기존 드라마와도 다르다. 광산 노동자 출신으로 공산주의의 길을 걷는 최운혁(류수영)과, 하인 집안의 딸로 태어나 신교육을 받고 호텔에서 일하지만 운혁을 도우면서 공산주의에 합류하는 김해경(한은정)의 사랑은 미 군정기 실존인물인 김수임과 이강국의 관계에 기초한다. 이한호 작가는 “실제 인물들로부터 모티브를 얻었지만 다큐멘터리나 실록은 아니다.”라면서 “따라서 주인공들이 실존 인물의 이름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이들의 관계에 지주의 아들인 이동우(김호진)와 일제 귀족 출신 문석경(소유진)이 가세하면서 난마처럼 엉킨 시대상을 격동적으로 풀어나간다. 문석경은 일제 치하에서 김해경을 자신의 몸종으로 부리다가 해방 후 집안이 몰락하게 되자 이승만의 양딸이 돼 사교계로 진출한다. 이동우는 이승만을 대부로 모시며 여운형을 추앙하는 최운혁과 정치적으로 대립한다. 이처럼 치열한 이념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제작진은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정치드라마는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윤창범 PD는 “이념보다는 그 당시 보통사람의 삶을 통해 그 시대가 얼마나 생명력이 있고, 열린 가능성이 있는 시대였는지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한호 작가도 “젊은이들의 각기 다른 경험을 조망하겠지만 이념에 치우친 것은 아니며, 좌우에 편향적인 시각을 배제하고 봐달라.”면서 “시대상을 대표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그들의 역사가 무엇을 얻었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조명할 것”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한국전쟁과 집단학살/김기진 지음

    한국전쟁 초기, 한반도에는 ‘학살의 광기’가 몰아쳤다. 특히 적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을 이유로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 학살됐다.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그러나 학살 책임을 증명할 문서로 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2002년 ‘끝나지 않은 전쟁-국민보도연맹’이란 책을 통해 이 사건 최초의 보고서를 냈던 김기진씨가 이번엔 미국에서 각종 문서를 찾아내 이를 ‘한국전쟁과 집단학살’(푸른역사 펴냄)이란 단행본으로 정리했다. 저자의 앞선 책이 ‘증언과 현장’을 담고 있다면 이번 책은 기록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만 1년에 걸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육군역사연구소, 해군역사관,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본부에 수장돼 있던 문서다. 1950년 7월 한국 경찰이 철수하기에 앞서 대전형무소에서 1400명의 재소자 학살 등을 기록한 미국 제25사단 CIC 분견대의 50년 10월27일자 활동보고서 등 상당수 지역에서 자행된 학살을 입증하는 기록을 소개한다.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유령’ 작가의 진실/조연정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부넝숴(不能說)’ 중에서 ●편집자주:원고의 각주는 편의상 모두 본문 안에 삽입했습니다. 1. 형식에서 정서로, 혹은 인식에서 믿음으로 김연수는 똑똑하고 성실한 작가다. 이것은 물론 그의 작품이 증명해 주는 바다. 이미 첫 장편 ‘7번 국도’의 하이퍼텍스트적 글쓰기에서 그것이 예고되었고,‘굳빠이, 이상’에서는 그의 ‘좌뇌’가 승한 글쓰기가 과도하다 싶을 만치 절정을 이뤘으며, 최근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는 논픽션적 자료의 편집으로 픽션을 제작하는 방식의 글쓰기(이에 대해서는 김연수 심진경 류보선의 좌담 ‘작가-되기, 혹은 사라진 매개자 찾기’, 문학동네 2005년 가을호 참고)가 일가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새로운 소재와 생생한 묘사라는 ‘발로 쓰는’ 글쓰기가 유행하는 가운데, 김연수는 그 나름 ‘읽고 쓰는’ 글쓰기의 장을 적극적으로 열고 있다고나 할까? 예컨대,‘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의 보르헤스식 모티프에서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 나오는 경성제대 이어철 박사의 ‘냉수를 마셔라’라는 자료에 이르기까지, 또 휘트먼의 시에서 한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퍼런스는 실로 화려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비록 대중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읽을 만하다. 읽을 만하다는 것은 그 자료적 풍부함과 형식적 공들임이 해석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김영하나 백민석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라는 소재적 새로움을 문단에 던져줄 때, 김연수는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형식적 새로움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는 자칭 “현학적인 문학근본주의자”인 것이다. 더불어 김연수는 시대적 상처와 유관한 작가다. 첫 단편집 ‘스무 살’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 투신하는 학생 운동가라든지,‘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첫사랑’에서 수배자의 고백이라든지,‘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의 배경이 되는 광주항쟁과 지역감정의 문제라든지, 이처럼 80년대적 상황과 사회적 투쟁의 상처는 89학번 김연수에 의해 소설 안으로 계속해서 호출된다.“세대의식과 소설가적 자의식을 맞세우며 자신의 소설적 지평을 지속적으로 갱신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물론 김연수가 등단했던 1990년도는 집단의식보다는 ‘나’가 문단의 화두였다. 한편에서는 윤대녕, 신경숙이 ‘나’를 돌아보며 내면으로 침잠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하가 그 ‘나’를 파괴하겠다며 나르시스트의 ‘거울’을 부수고 있었고, 백민석의 주인공들이 엽기적인 행각을 서슴지 않았으며, 여러 문화적 코드들이 혼종된 작품들도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억눌렸(렀)던 개인의 욕망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고, 왜곡된 방식으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드러났으며, 그 와중에 대사회적인 투쟁이나 고민은 이미 유행지난 옷가지처럼 옷장 깊숙이 처박힌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김연수의 주인공들은, 학생운동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성승경’의 동생 ‘승진’이 죽은 누나의 원피스를 입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헤매듯, 그 유행지난 옷가지들을 자꾸 꺼내서 입어본다. 그는 자칭 “80년대에 가까운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옷은 역시 유행에 걸맞지 않는 터라, 더불어 이 부채의식이라 할 만한 것에 짓눌려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의 궤적이 너무나 크고 그의 지적 발랄함이 너무나 경쾌한지라 “김연수에게 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서영채,‘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문학동네 2002년봄,p328)라는 지적이 폭넓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 김연수 식 예의 그 경쾌한 글쓰기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는 재치있는 연애소설에서 그 빛을 발하고, 결국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편집자, 주석가, 번역가로서의 그의 재구성 능력이 우연과 필연, 진실과 거짓에 관한 통찰까지 얻음으로써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연수에게 80년대적 상황 혹은 세대 감각,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다소 우울한 정서의 문제는 작가가 초지일관하고 있는 형식적 구성력에의 관심, 또 그에 값하는 작가의 능력에 의해 묻혀 버리게 된다. 따라서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징후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들과 그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고독과 비애의 정서는 “이 소설만큼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라는 작가의 고백과 함께, 김연수의 작품 목록에서 특이한 것으로서만 간주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집의 독특함 혹은 이질성에 대한 평가는 뒤이어 나온 ‘유령작가’의 형식적 강렬함에서 더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장편 연재를 시작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2005년 겨울호)에서 김연수는 다시 80년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끌고 오면서 전후 한국 현대사를 거론하고, 그러면서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이쯤 되면, 김연수의 ‘변전’(김형중),‘기획력’(심진경), 혹은 ‘문턱 넘기’(김연수)는 여전히 한쪽에는 세대의식, 한쪽에는 작가의식을 놓고 그 양극 사이를 진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소설에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김연수는 애초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유지해 왔고 벌써 정점에 도달한 듯 보이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나 불가지론적인 사고에는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세계인식이 “그러므로 진실은 없다.”는 냉소나 허무주의가 되지 않고,“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 때문일 텐데, 그것은 어떤 ‘정서’의 집약을 통해 스며 나오기도 하고,‘의지’ 혹은 ‘믿음’으로 실천되기도 한다.“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194.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1:페이지수)라는 식의 위로와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작과 비평사,2005,p.28. 이하 본문에서 이 책을 인용할 경우 2:페이지수)라는 의지 같은 것들이 김연수를 해체적 허무주의자라는 평가로부터 지켜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한복판에 항상 ‘언어’에 대한 고민이 놓인다는 점이다. 소설집의 제목에 ‘작가’라는 말을 대놓고 쓸 만큼, 또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목록이 다수에 해당할 만큼 그에게 언어의 운용은 중요하다. 김연수 소설의 인물들이 흔히 무엇을 쓰거나 말하거나 읽고 있다는 사실도 그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언어 수행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김연수만의 진정성과 고민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으로 이 글은 쓰여진다. 그의 형식적 기발함과 재치와 성실성에 묻혀 버린 김연수의 진정성은 무엇이고, 그가 멈추지 않는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을 지금껏 어떻게, 어디까지 해결했나? 2. 기억으로 말할 수 없는 것, 말로 기억할 수 없는 것-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작가가 그렇듯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거나 쓴다. 김병익이 지적했듯,‘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작품들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서두를 뗀다.(김병익,‘(해설)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위의 책)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는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혼잣말을 계속하고, 그의 이혼한 아내는 꿈꾼 것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다.‘부넝숴’와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의 화자는 아예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일방적인 편지 형식이며,‘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 여자 친구의 자살 원인을 알기 위해 ‘소설’을 쓴다. 유서에 자신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남겨 놓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라는 처절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너’의 흔적을 그리고 ‘우리’의 흔적을 더듬는다.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혼잣말이며,“사랑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꿈 속까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편지에는 답장이 없다는 것이며, 소설 속의 인과관계 안에서는 어떤 진실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말은 할수록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처럼 단어 몇 개로밖에 소통할 수 없는 말하기가 더 단호하고 정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계속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허무한 일인가. 그래도, 여하튼, 침묵은 비겁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또 말하고 쓴다. 전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도 그랬다. 그렇지만 그들은 타인과 소통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왜일까? ‘첫사랑’의 ‘나’는 수배중이다. 자수할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첫사랑 ‘정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그 편지 내용이란 건 거창할 게 없다. 삶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역설적으로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떠올려지듯 ‘나’는 어린 시절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고해성사를 해나간다. 자신의 관심이 무시당하자 정인의 뺨을 때린 일, 혜지누나에게 화풀이하듯 “남의 잔에 술이나 따르는 더러운 년이 일식은 무슨 일식”(1:114)이냐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일 등을 얘기한다. 그런 고백의 사이사이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데프콘 발동”,“직선제 개헌”과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무심히 끼워 넣는다. 그런데 그 편지는 단지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망쳐버리는 동물은 사람뿐이야.”(1:114)라는 뒤늦은 뉘우침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만 한다는 초조한 마음”(1:98)에 사로잡혀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특별히 그 대상이 ‘정인’이어야 할 것도 없다는 점이다.‘정인’의 주소는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고, 정인에 대한 기억도 따라서 우연히 떠올려 졌을뿐이다. 결국 고백을 들어줘야 할 그 ‘누군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다.“너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을”(1:105) 연구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나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너를 놓치지도 않는 방법”이 바로 자기 안에 머물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까닭 없는 슬픔과 한없는 기쁨과 막연한 불안감이 하늘을 떠도는 먼지 알갱이처럼 내 안에서 서로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원으로 바뀌는 동안, 조금씩 둥근 원이 태양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지. 눈물 방울처럼 검은 유리판에 새겨진 그 아름다운 노란빛. 언젠가 보았던 너의, 또 혜지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처럼 한쪽 부분부터 흔들리는 그 둥근 빛. 그러나 결코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그 소중한 동그라미. 무한히 수축됐다가 다시 온 우주로 퍼져나가는 그 노란 물결.(1:118)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를 둥근 노란빛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일식을 보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버지를 따라 나간 시위에서 처음 본 ‘펄럭거리는 노란빛’,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그 노란빛,‘나’는 그게 꿈이었고,‘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이제 일식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그렇지만 검은 유리판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태양에 의해 완벽하게 가려진 그 노란빛은 꿈도 사랑도 아니다. 어쩌면 꿈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재(real)를 가리고 있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예쁘던 반딧불이 실은 끔찍한 벌레에 다름 아니었듯 말이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서 사랑하고 내 안에서 꿈꾸고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에서 ‘게이코’는 어떤가. 이 작품에서도 편지는 중요한 모티프다.‘태식’과 ‘김씨’가 크리스마스 날 케이크 판 돈을 갖고 사라진 게이코를 찾으러 가는 데는, 게이코가 받았던 펜팔 편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월남 가서 실종됐고, 엄마는 자살을 했고, 따라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엄마’라는 단어 대신 ‘모친’이라는 단어를 쓰는,“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하지 않고”,“말한다고 해도 더듬기 일쑤”(1:29)인 ‘게이코/경자’는 ‘서유진’이라는 이름으로 ‘수잔’에게 펜팔 편지를 쓴다. 답장도 받았고 게이코는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서로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그 답장은 ‘게이코/경자’에게 온 것이 아니며,‘게이코’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인 ‘유진’에게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편지에 털어놓는 이야기란,“펜팔 가이드”의 예문대로, 자신은 다니지 않는 학교 얘기, 자신은 가본 적 없는 캠핑 얘기일 뿐이다. 학교와 캠핑, 날씨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등이 ‘게이코’ 또래가 누려야 할 삶의 전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말더듬이 게이코는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수잔’에게 일지라도 자신이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빵집에서 일하는 말더듬이 고아라는 것을 이야기할 리 없다. 아니 어쩌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자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잔’을 대화 상대로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도 말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표명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왜 편지를 쓸까. 그 편지 역시 ‘첫사랑’의 편지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빵집에서 여전히 빵처럼 둥근 그 노란 빛 아래서 편지를 쓰면서, 그렇게 자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꾸며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면 그녀가 빵집 창문에 다 못 쓰고 간 ‘New Year‘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쓰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물러 있듯, 게이코의 행방의 단서가 되었던 편지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간 곳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에게 쓰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행위이며, 결국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다. 그들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을 차단한다. 단지 각자의 기억을 더듬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처럼 그들의 쓰기/말하기/읽기는 자기 충족적이다. ‘리기다소나무숲에 갔다가’의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것도 ‘나’의 궁금증에 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치유의 과정에 가깝다. 카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자살 소동으로 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삼촌은 내 “인간 연구”의 대상이다. 나는 왜 “인간 연구”에 골몰할까? 대학 1학년 때 분신 장면을 목격한 나는 “죽을 게 뻔한 길인 줄 알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심정”(1:151)이 무엇일까 라는 숭고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질문은 삼촌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삼촌에게 “물망초 여자 진짜로 사랑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애초에 삼촌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촌 역시 ‘나’에게 답하고 있다는 자의식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들 사이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다. 삼촌은 넋두리를 늘어놓듯 자신의 로맨스를 말하기 시작하고, 도라꾸 아저씨는 옆에서 “하이고, 조카 듣는데 창피하지도 않나? 뭔 사설이 그래 기나?” 라는 식의 추임새를 넣어 준다. 가히 ‘만담’ 수준이지만, 혼잣말에 가깝다. 이 ‘만담’ 속에서 나는 삼촌을 이해했고, 삼촌은 공감을 얻었을까? 이해는 앎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앎이 이해와 치유의 첫 걸음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삼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이고, 여전히 삼촌은 ‘리기다소나무 숲’ 안에서만, 혹은 자신 안에서만, 지난 날 부르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더 로드 낫 테이큰’을 읊조리는 수밖에 없는 것을. 삼촌과 도라꾸 아저씨가 ‘만담’을 하는 동안,‘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의 ‘봉우’는 그야말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국낙서문학회 지역지부에서 ‘나대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봉우에게 삶이란 ‘만반의 준비는? 5천. 평생동지는? 12월 22일’ 따위의 말장난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방위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간지의 독자페이지에 이런저런 낙서를 지어서 투고하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 봉우에게 삶은 더더욱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봉우가 만든 최고의 낙서는 바로 ‘인생이란? 픽션에 불과하다’였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192) 뱃 속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예정’은 “시답지 않은 주간지에 아무 짝에나 소용없는 낙서 따위나 투고하는”(1:197) 봉우에게 세상을 모르는 ‘멍청이’,‘어릿광대’라고 소리친다. 봉우는 그야말로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나대로’ 그 상처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며, 그 외면의 방식이 바로 ‘낙서질’이었던 것이다.“아기가 죽으면서 봉우의 마음속에서도 뭔가가 죽어나갔고” “그 자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지만”(1:198) 봉우는 낙서질을 통해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하는 일이 상책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하는 순간 자기를 보호하던 그 ‘노란 빛’은 꺼져버릴 수도 있고,‘리기다소나무 숲’에서 넋두리만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우 역시 “자기만은 어두운 산길에 혼자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길을 잃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봉우의 그 두려움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괘 감정으로서의 불안(불안과 증상에 대한 논의는,S. 프로이트,‘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정신병리학의 문제들´, 열린책들,2003)에 다름 아닐 텐데, 그 불안은 ‘나대로’의 낙서라는 증상을 극복하고 상처와 맞설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예정이 자기 안의 ‘노란빛’을 밖으로 드높이 내걸 듯, 혹은 게이코가 빵집을 나와 어디론가 첫걸음을 내딛듯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노란 꽃잎 가장자리가 흐려지면서 노란색과 초록색과 진회색이 서로 경계도 없이 뒤엉켜”(1:181) 버리듯,“꼭꼭 막아둔 마음의 가장자리도 그렇게 풀리게” 된다. 이제 자기 밖으로 나와 그렇게 풀린 ‘노란빛’은 ‘첫사랑’에서와 달리,‘사랑’도 될 수 있고,‘꿈’도 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은 있다. 이처럼 증상과의 타협에서, 증상에의 만족에서 나오는 첫걸음이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에 “병에 걸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일”(1:229)이며,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책”이다.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이 어떤 위험을 동반하든 그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이 비로소 윤리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상처, 그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도출된다. 상처는 분명 어떤 ‘좌절’에서 기인할 텐데, 일단 우리는 각각의 서사 속에 끼워져 있는 시대적 배경들을 통해 그 상처가 밖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며, 이 작품은 일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물론 여기에서도 쓰기와 말하기에 값하는 ‘읽기’를 통한 상처치유의 행위가 지속된다. 전라도 출신 아버지가 시대에 무기력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대 자체를 용서하는 방식은 바로 ‘신문 스크랩’이다. 그리고 ‘내’가 그 초라한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아버지의 그 신문 스크랩 ‘읽기’이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에 기대 나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천천히, 붙여 놓은 기사를 읽었다.(중략)다 읽은 뒤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내내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누구를 용서했던 것일까? 파도와 파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달빛과 달빛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1:65∼66) 주목할 점은 이 작품에서만큼은 읽기의 방식이 자족적이고 자위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소통을 위한 매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안에 머문 채로 그 상처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 ‘신문 스크랩’은 ‘나’로 하여금 초라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아무리 읽어도 그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을 수는 없지만 여하튼 나는 “고작 딸이 집을 나갔다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듯하고,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생기고,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적으로 회상에 의존한 작품은 ‘뉴욕제과점’이라는 자전소설 밖에 없다고 작가가 밝혔듯, 우리는 이 소설집을 단순히 회상 형식을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추억의 보고서’ 또는 ‘반성의 기록’(정선태,‘(해설)빵집 불빛에 기대 연필로 그린 기억의 풍경화’,‘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2003,p.295)으로 읽을 수 없다. 그 속에는 분명,‘언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통찰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언어’의 불가능성, 즉 언어 자체로는 어떤 진실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해묵은 해체적 사고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언어와 비극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즉 구조로 회수될 수 없는 다수성과 사건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된다. 비극적 인식이란 바로 그러한 언어 안에 놓인 인간 조건을 발견하는 일이며, 이처럼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언어에 의한 고통은 인간이 결코 ‘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비유로 확인된다.(가라타니 고진,‘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pp65∼86)그런데 고진은 ‘아이’가 단지 비유가 아니며, 아이는 이미 어른 이상으로 인생을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순수한 비애와 부조리감을 깨닫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에 기댄다면,‘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전편을 감도는 슬픔과 비애의 정서는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혹은 잃어버린 기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반복될 수 없는 ‘기억’, 반복될 수 없는 ‘언어’적 조건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기억이나 회상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며 “글쓰는 순간만의 진실”(김연수 외 좌담, 앞의 글,p.81)을 믿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기억’해 낼 것은 없고 ‘언어’로 표현해야 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진실일 뿐이라는 말인 듯싶다. 그 일회적인 언어에 의존하여 쓰고 말하고 읽음으로써 자신의 상처 안에 거주하는 방식으로는 상처가 완벽히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이는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2:6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3.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넘어서는 몇 가지 방식-‘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최근작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의 할아버지는 죽기 전 두 개의 글을 쓰고, 하나의 글만 남겨둔다. 남겨둔 글은 “世上萬事 一場春夢 돌아보매 無常ㅎ구나”로 시작되는 203행의 대서사시로서,“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4·19,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 한 남자의 생애는 또래의 다른 남자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서사시는 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역사를 다룬 시라고 봄이 정확하다. 할아버지는 그 역사를 증명하는 ‘한 남자’일 뿐인 것이다.“할아버지의 또 다른 글은 누구도 읽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그 다른 글 역시 태워버렸다. 그 글에는 서사시에서 볼 수 없는 다른 것이 들어 있을 테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일 테니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4조의 정형적인 형식처럼 그 서사시가 어떤 일관되고 형식적인 구조에 속하는 추상화된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불태워진 할아버지의 그 비망록은 여전히 ‘언어’로서도 ‘기억’으로서도 도달할 수 없는 개개인의 진실을 의미한다.“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잠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이고”,“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할아버지의 그 두 글 사이의 거리는 엄연한 것이고,‘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인과관계의 구조로 엮어진 ‘그’의 소설이 현실(reality)과도, 실재(the real)와도 멀어진 거리와 같다. 실재와 구성화된 그것 사이의 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지도에서 비워진 행로로 상징된다. 일년 전 이혼한 아내와 우연히 재회한 ‘나’는 아내를 따라 인사동 거리를 걷는다. 아니 함께 걸었다기보다는 아내를 따라 걸었던 것인데, 그 ‘길’은 한 개인의 진실로 들어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을 뜻한다. 꿈 얘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애초에 그런 소통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꿈따위는 잠에서 깬 다음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던 ‘나’는 그런 아내의 의지조차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 그는 이제 그 아내의 진실, 아니 그녀와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지적도를 사고 그날을 행로를 그려 본다. 하지만 기억의 행로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지형도가 아닌 ‘지적도’일지라도 그것은 실재의 ‘유사물(le semblant)’일 뿐이므로, 그 유사물 속에서는 모방된 진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Alain Badiou)에 따르면 진리는 언제나 특수한 상황의 진리(S. 지젝,‘진리의 정치, 혹은 성 바울의 독자로서의 알랭 바디우’,「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5,pp.208∼218)이다. 하나로 이어진 선 안에서는 그 다양한 상황의 진리들은 모두 지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에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2:19) 따라서 ‘나’의 생각이 미치는 지점은 모든 삶의 행로는 우연이고, 그 안에서 진리는 발견될 수 없고, 나의 불행도 그저 불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그리고는, 결국엔,“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2:28)는 정답을 얻어낸다.“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 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거대한 ‘농담’일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는 윤리적 행위의 첫 발을 내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에의 충실성’이라는 말로 윤리를 설명한다.(A 바디우,‘윤리학-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이종영 역, 동문선,2001)그가 정의하는 ‘사건’이란 인식 범위 밖에서 발생하며,‘공식적’ 상황이 ‘억압’했던 것을 가시적이게 만드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상황의 진리이다. 따라서 사건에의 충실성이란 사건의 견지에서 ‘인식’의 영역을 횡단하고, 그 속으로 개입하고, 사건의 기호를 찾는 지속적 노력을 가리킨다.(이하 한 단락의 내용은 S. 지젝의 앞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바디우의 논의는 “범역적 우연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보편적) 진리의 소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실재 사물과의 모든 열정적 조우가 환영일 뿐이라는 해체주의적 사고와 대립된다. 요컨대, 후근대적 해체주의자들이 비관주의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때, 바디우는 “기적은 실로 일어난다.”는 전적으로 정당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성과 불멸성에 대한 이와 같은 바디우의 추구는 물론 개별적인 상황, 다양성의 상황의 전제로 하는 열린 개념이다. 다소 길게 인용된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결국 내가 삶의 모든 길은 우연이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진리’를 위한 행위이고,‘사건에의 충실성’을 담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자기 안에 머무는 회피나, 삶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회의에 빠지지 않고 한 개인의 진실, 혹은 삶의 진실에 가 닿으려는 ‘행위(act)’를 시작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도는 분명, 자기 안의 둥근 노란빛에 의지하여 자폐적으로 말하고, 쓰고, 읽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속 인물들의 태도와는 차별되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이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패배주의자가 아니라, 고투하고 있는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그 고투의 방식을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해 보자. 첫 번째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와 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끝없이 질문하고 소통에의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이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에서 세영과 네즈미가 지도를 보고 찾아간 길이 잘못 된 길이었지만, 세영이 “돌아갈 수 없어, 네즈미. 우린 계속 가야 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 첫 번째 방식 안에서 설명된다. 잘못 들어선 길이 “공로가 아니라 사유지”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의 진리, 혹은 개개인의 사적인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두 번째는 ‘말’이 아닌 ‘몸’으로 다가가는 방식이다.‘부넝숴’를 한번 보자. 지평리 전투에 투입되었던 중공군 ‘나’는 들판을 가득 메운 매화꽃잎들처럼 지평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전사자들 틈에서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된다. 그들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전복되고 그 둘은 외딴 농가에 고립된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고, 죽음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한 일은 두 가지이다. 몸을 섞거나 시를 읊거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더군. 아프다는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계속하라고 채근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리는 쉬지 않고 몸을 섞었어. 죽음이 지척이었으니까.(2:71) 그들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몸을 섞는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고통 속의 향유(jouissance)’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만하고 그 향유의 끝장을 보는 ‘죽음충동’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저물었는지, 몇 번이나 달이 둥글어졌다가 다시 여위어졌는지”(2:75)도 모른 채, 수색대가 왔다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을 “죽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만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지”(2:75)도 모른 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결국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나’는 이제 점쟁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라캉이 ‘죽음 충동’과 관련하여 ‘두 죽음 사이의 영역’(위의 책,pp.251~265)이라고 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에 따르면 그곳은 상징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영역으로서 존재의 질서 너머에 있는 유령적 환영의 영역이다. 그곳은 ‘죽음 너머의 삶’이 갑작스레 출현한 장소이고, 상징화되지 않는 ‘불가분의 잔여’이기 때문에 기괴하고 공포스럽다. 예컨대, 그 형상은 운명을 이행한 이후의 오이디푸스, 즉 ‘과도하게 인간적’이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 어떤 인간적 법칙들이나 고려 사항에도 묶여지지 않는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그녀’의 피를 1000그램이나 수혈받고 죽음의 경계를 넘은 ‘나’는 이 ‘산죽은-파괴불가능한’ 유령적 대상과도 같다. 운명을 보아버린 ‘나’는 이제,“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얘기”(2:77)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산죽은’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방식, 온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성공적이라면 그 순간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는 어떠한 ‘언어’도 소용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 방식이 성공했는가. 그 둘이 함께 ‘몸’을 통해 ‘유사-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여하튼 현재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경계가 놓여 있지 않는가? 여기서 굳이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행위를 아예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설령 그게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소통에의 ‘의지’를 드디어 ‘실천’으로 관철하는 일이며, 반복될 수 없는 ‘언어’의 한계,‘기억’의 한계,‘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그것은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영이 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자신이 절대로 이해 못하는 다른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아니 극복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식이냐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언니의 동거남,‘네즈미’와 섹스를 하는 방식이다. 네즈미에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세영의 방식이 “무모한 열정”으로 보이지만, 세영의 그 무모한 열정은 끝장까지 간다. 자동차 사고로 남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2시간 동안 울기만 했던 세영, 그렇게 다른 삶이 있었던 남편의 죽음을 방조했던, 아니 어떤 행동(action)도 하지 않음으로써 적극적으로 행위(act)했던 세영은 결국 ‘자살’한다.(정신분석은 행동과 행위를 분리한다. 행위는 그것의 담지자(행위자)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다는 점에서 행동과 다르다. 행위 이후에 나는 ‘전과 동일하지 않다’.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무화되고 뒤어이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라캉은 ‘자살’을 모든 (‘성공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알렌카 주판치치,‘실재의 윤리’, 이성민 역, 도서출판b,2004,p.133∼134) 세영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무모하다면,‘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는 소통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시도와 그 결론이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다 경험”함으로써,“심지어 죽음까지”도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결론이다.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서도,‘소설’ 쓰기를 통해서도 애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첫째, 그녀와 자신의 삶에,“어떤 진실도, 상상도, 이해도 없는”(2:151) 가장 합당한 주석을 달며, 그저 “짐작을 하며”,“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2:143)이거나, 둘째,“지도에서 비워진” 그 곳으로 직접 가보는 일이다.‘그’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는 어두운 구멍”(2:43)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인물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고,‘의지’의 방식을 택한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의 ‘나’가 ‘결국 가야하는 길’이고,‘부넝숴’의 ‘나’가 ‘덜/더 가버린 길’이다. 당연히,‘그’가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은, 이처럼 ‘몸’으로도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그녀를 이해하는, 아니 자신의 진실을 이해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2:154) 그곳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현실과 꿈이 뒤섞인 공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 어떤 논리도 거부하는 공간,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 등등. 그러나 어떤 말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그곳은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 길을 가는 ‘그’에게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트를 사면 항상 옮겨 적던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2:111)라는 릴케의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용기를 갖는 일은 의무이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은 원정대장이 역설한 바대로 “분명히 의의가 아니라 임무”(2:117)인 것이다.“그 꿈이 제아무리 압도적이라고 해도 원정대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오로지 ‘의무’ 때문에 ‘행위’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윤리적 주체(‘의무’와 윤리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의 책,5장 참고)이다. 4. 진실은 어디에,“대뇌와 성기 사이”(김연수,‘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문학동네 2005년 겨울,p.158)그 어디쯤 ‘유령작가’라는 말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김연수는 그 의미가 ‘대필작가’ 쯤이 된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그 안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찾아냈다.‘유령’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보면 어떨까?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김연수의 최근 두 소설집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죽음을 넘어선 그 어떤 영역을 살펴보고 ‘유령’이 되어버린 작가가,‘아직’ 언어와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이’에 머물고 있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말이다.“아프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다 느끼라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죽기 싫어서다. 그래서 눈물은 조롱거리가 되고 아픔은 비난받고 두려움은 무시되며 믿음은 당연하다고 여긴다.”(2:117). 우울은 도덕적 쇠약함이며, 죄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가 위와 같은 말에 의지하여 낭가파르바트로 갔듯이 우리도 각자가 넘어야 할 산 하나쯤은 마음 속에 있을 것이고, 그 산을 넘기 위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것의 우리의 ‘의무’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윤리적 행위의 전형이라며, 그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의 진실, 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연수는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현실에서 이해는 필연적으로 오해가 되고, 살 부비는 부부 사이에서조차 서로의 마음 속 비망록을 들여다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해결은 한 가지다. 그 “대뇌와 성기 사이” 그 어디쯤에 있을 ‘마음’으로 진실을 그저 믿는 것이다. 김연수의 세계인식과 작가의식은 이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위의 책,p.121)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제 어떻게 들려줄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장편 연재가 기대된다. <끝> ■ 당선소감 “조금은 자신 갖고 내목소리 낼수 있을것” 글쓰기는 나에게 공포다. 학교에서 몇 개월째 학부생들의 리포트 상담을 하고 있지만 난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글쓰기에 관하여 조언을 해 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다. 여전히 나는 무엇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절부절 못하고, 하얀 모니터 앞에서 머릿속까지 하얗게 비워지곤 하는 걸…. 그렇지만 여하튼 읽는 일은 행복하고, 쓰는 일은 나에게 작은 희열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그 일들을 멈출 수가 없다. 혼자 품고 있던 그 공포와 행복 사이에 용기를 채워 준 이번 당선이 정말 기적 같다. 여전히 막막하고 두렵지만, 이제 조금은 자신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턱없이 부족한 글이라 몹시 부끄럽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만으로도 더없이 많은 것을 일깨워 주시는 신범순 지도교수님과 국문과의 모든 은사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꽃비 내리는 자하연을 몇 번이고 함께 맞이했던 1동의 동료, 선·후배들의 자극에도 빚진 바 크다.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그리고 나이 서른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철없고 무심한 자식을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어렸을 적부터, 성실히 읽고 쓰는 일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게끔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약력 ▲1977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글쓰는 순간이 진실’ 작가의 본질 파헤쳐” 응모작 총 20편은 작가론이 대부분이었고, 김현론을 비롯한 문학사적인 쟁점을 다룬 게 3편 있었다. 작가론 중에는 시인·소설론이 거의 반반씩이었다. 아마 최근 신춘문예 평론의 주류가 작가론으로 정착된 느낌이다. 특히 전후문학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4·19세대 작가론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늘의 작가론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시선을 끈 글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행복한 공간-김현론’(김윤정),‘몸의 형이상학, 모성적 관능과 타자없는 육체 사이-김선우론’(함돈균),‘속도에 저항하는 시의 모험-김기택론’(강영준)‘‘틈’을 바라보는 시선-배수아 소설을 중심으로’(김나영),‘고독의 의무, 소설의 의무-윤성희 소설집 ‘거기, 당신?’론’(이은주),‘‘유령’작가의 진실-김연수의 최근작을 중심으로’(조연정) 등이었다. 김현론은 정직한 글쓰기의 자세를 보여준 진솔한 비평적 자세가 돋보였으나 개인적인 체험에 너무 함몰된 점이 아쉬웠다. 김선우론은 인문학적인 거시적 시각으로 시인에 접근하면서 미세한 현대적 환상과 성담론을 분석한 점이 돋보였으나 일반론적인 해설위주에 그쳐서 아쉬웠다. 김기택론은 성실한 독법이긴 하나 해설론에 그친 한계가 있었다. 배수아론은 라캉의 틈 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려 했으나 결론이 너무 조급해 보였다. 최종적으로 윤성희론과 김연수론은 우위를 다툴 정도였다. 윤성희론은 반 루카치적인 소설론을 전개한 점이 시선을 끌었지만 문장력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김연수론은 탈구조주의적인 이론의 틀에 너무 얽매인 느낌이 있으나 기억이나 회상을 불신하고 글쓰기의 순간만이 진실이라는 이 작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헤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김윤식 임헌영
  • [부고] 뒤늦게 태극무공훈장 ‘전쟁 영웅’ 김영옥씨

    한국계 전쟁 영웅인 김영옥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지난 29일(현지시간) 숙환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86세. 고(故) 김 대령은 방광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받는 등 힘겨운 암투병 생활을 해왔다. 김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유색인 미국 장교로 맹활약,1945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195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십자무공훈장을 받았다. 지난해 2월에는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무공훈장도 받은 전설적인 전쟁영웅이다. 2차대전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세탁소를 운영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입대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전선을 약 60㎞ 북상시키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그는 작년 10월 한국전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뒤늦게 우리 정부로부터 무공훈장 중 최고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여자로 결정됐다. 장례식은 9일 샌타모니카 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며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측은 외교 행낭편으로 태극무공훈장을 전달받아 영결식장에서 추서할 예정이다.로스앤젤레스 연합뉴스
  • ‘平軍’ 분열위기

    제대군인 복지와 군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야심차게 출범한 평화재향군인회(가칭·이하 평군)가 출범 3개월도 못돼 내홍을 앓고 있다. 평군은 지난 9월27일 육군 정훈감 출신인 표명렬 예비역 준장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민주화운동을 해온 김상찬씨를 상임공동대표로 내세운 제2의 재향군인단체다. 그러나 평군은 출범 직후 표 대표와 김모 사무처장 등 내부 인사들간의 갈등으로 내분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 사무처장은 출범 직후 표 대표의 사퇴를 촉구했고, 표 대표가 이를 거부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감정싸움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평군 홈페이지엔 양측의 비난 글이 쇄도하고 있다. 표 대표측은 최근 새로운 사이트(pcorea.net)를 개설하고, 단체명도 ‘평화제대군인회’로 바꿔 사무실을 서울 마포에서 용산으로 이전했다. 양측의 극한 대립을 지켜본 일부 회원들은 최근 ‘평군평회원혁명위원회’ 명의로 표 대표를 비롯한 집행부의 자격과 권리를 박탈, 자체적으로 조직을 재구성하려는 움직을 보이고 있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천리그룹-이만득·유상덕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천리그룹-이만득·유상덕 회장家

    사업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동업’ 얘기를 꺼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사업 과정에서 동업자와 합의로 꾸려가기란 득보다 실이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업가들은 형제나 친척과도 동업을 꺼리는 편이다. 하지만 동업은 제대로 하면 혼자 때보다 훨씬 많은 경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중견 그룹인 삼천리는 동업 관계로 사세를 확장시킨 대표적 기업이다. 창업 선대(先代)부터 반세기 이상 ‘동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혈육보다 진한 동업정신 삼천리의 그룹 역사는 1955년 10월1일 고 유성연ㆍ이장균 명예회장이 공동으로 ‘삼천리연탄기업사’를 설립하면서 시작했다. 지금은 도시가스 및 해외자원 개발에 전념하면서 국내 도시가스 1위 업체로 부상한 것은 물론 세계 7위 규모의 유연탄광을 경영하는 세계 굴지의 자원개발회사를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형제보다 가까웠던 두 선대 회장의 관계를 유상덕(46) ㈜삼탄 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이장균 회장님 댁과 우리 집안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웃에서 살았고 서로 큰 집, 작은 집이라 부르며 지내 와 서로 남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우리 집안은 유(劉)가인데 왜 작은아버님의 성은 이(李)가인지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세 번에 걸친 운명적인 만남 두 창업주는 창업을 하기 전까지 모두 세번의 의미있는 만남을 가졌다. 첫번째는 해방 직후 함흥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식료품 장사를 하다가 8인계 멤버로 만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 피란 시절에는 각자 경남 거제와 경북 포항에서 생활하다가 조우했다. 세 번째는 1955년 삼천리 창업을 통한 만남이었다. 창업 당시엔 두 가정이 단칸방에서 이불 칸막이만 쳐놓고 동고동락하며 사업을 일궜다. 연탄가루를 가져와 기계틀에 넣고 찍어 말린 뒤 배달도 직접했다. 네 사람이 연탄 수레를 ‘끌고 밀면서’ 삼천리의 그룹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유성연 명예회장은 1917년 함남 삼평면 부흥리에서 아버지 유봉주씨와 어머니 김씨의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유 명예회장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11세가 되던 해에 4년제 삼평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남보다 늦은 학업이었지만 유 명예회장은 보통학교 4년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함흥 시내에 있던 함흥제일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평양사범학교에 관비(官費)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평양사범 입학시험에는 함경도에서 200여명이 응시해 9명만 합격했을 만큼 어려운 관문이었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유 명예회장은 함흥 부근에 있는 삼호보통학교에서 첫 교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간의 교사생활을 거친 뒤 함흥시내의 영정보통학교로 전근했다. 영정보통학교에서의 교직생활이 3년 지났을 무렵인 1943년 유 명예회장은 일본 유학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태평양전쟁이 2년째로 접어들면서 생활이 힘들어져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함남 피복조합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이후에도 징용 위협이 다가오자 징용 대상에서 제외됐던 교사직을 다시 선택했다. 1944년 함흥 외곽에 있는 주북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 이후 유 명예회장은 경제활동에 투신해 나라 경제를 위해 큰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사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함흥 선덕비행장에 주둔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미군 군수물자, 초콜릿, 통조림, 담배, 술 등 식료품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유 명예회장은 한국전쟁 발발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우여곡절끝에 남한으로 가는 LST함정에 겨우 올라 타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거제도 난민수용소에 잠시 수용됐지만 수용소를 빠져 나와 미군을 상대로 토산 기념품을 팔기 시작했다. 이만득(49) 삼천리그룹 회장의 부친인 이장균 명예회장은 1922년 6월27일 함남 함주군 상기천면에서 아버지 이황주씨와 어머니 윤윤옥씨 슬하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전답을 모두 차압당했다. 이후 몇해동안 움집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이 명예회장은 7∼8세 무렵부터 ‘소년 지게꾼’이 돼 공사장에서 자갈을 짊어져 날라야 했다. 힘든 와중에도 그는 낮에는 지게꾼으로, 밤이 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학에 나가 공부를 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거둬 주북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4년간의 학창생활은 이 명예회장이 경험한 유일한 정규 학업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 명예회장은 유담보통학교에서 촉탁 직원으로 잠시 일하다 21세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사원을 거쳐 토목건설 현장의 서기로 옮겼다. 이후 함남토목회사의 하청업자로 변신해 사업가로서 첫 길을 걷게 된다. 어느 정도의 사업 성공도 이룬다. 소련군이 함흥에 진군하자 시내에서 ‘민흥상회’라는 가게를 열어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소련군이 좋아하는 통조림 제품을 구하려 수소문하던 중에 유 명예회장과의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됐다. 곧바로 의형제 이상의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8인계를 조직해 더욱 가까워졌다. 유 명예회장보다 보름 앞서 흥남에서 국군이 철수하는 배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온 이 명예회장은 이곳에서 원산 출신인 김성숙(73)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 회장 부부는 포항 죽도시장 중심부에 ‘흥성상점’을 열어 시멘트, 밀가루, 설탕, 비료, 무연탄을 취급해 큰 돈을 벌었다. 특히 이 명예회장은 서민들의 연료인 신탄(숯)을 제조해 팔면서 장차 무연탄이 가정연료로 중요하게 쓰일 것이라고 판단해 1953년부터 연탄사업에 손을 댔다. ●연탄사업으로 시작된 동업 이 명예회장은 1955년 서울에 있는 단성사로부터 원탄을 대량 매입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직접 강원도에 가서 560t의 원탄을 구매, 서울로 수송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운반 과정에서 원탄 가격이 하락하면서 단성사가 매입을 거부하자 탄을 저탄장에 쌓아 놓아야만 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때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유 명예회장을 만나 같이 연탄사업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이 날은 삼천리그룹의 창립일인 1955년 10월1일로 유 명예회장이 박옥순(78)여사와 결혼한 날이기도 하다. 이후 아예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 두 사람은 중구 신당동에 터를 잡아 호적에 본적지로 등록했다. 유 회장이 신당동 248-1, 이 회장은 건너편의 신당동 304-211에 안착했다. 이때 5세 위인 유 명예회장은 연탄 제조와 판매를 담당하는 사장을 맡고, 이 명예회장은 원탄 구매와 자금을 담당하는 부사장 형태로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 구분일 뿐 두 사람은 이후 어떤 일을 하든지 상의하고 양보하면서 삼천리의 역사를 일구기 시작했다. ●2세에게 동업 각서 물려줘 이들은 각각 회장실 금고에 동업각서를 보관해 오다 두 집안의 2세도 간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두 창업회장은 5개 조항의 동업서약서를 쓴 뒤 가족보다 끈끈한 관계를 50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동업서약서에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다른 사람이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투자 비율이 다르더라도 수익은 절반씩 나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는 등 5개 조항이 담겨 있다. 재계 주위에서는 두 집안의 경영 스타일이 다른 점도 동업에 큰 도움이 됐다. 유 선대 회장 부자는 과묵하고 꼼꼼하고 심사숙고하는 성향인데 비해 이 선대 회장 부자는 직설적이고 외향적이며 공격적이어서 서로 보완이 됐다는 것이다.25년 전 코크스(용광로 연료) 사업에 진출할 때 이 명예회장과 유 명예회장은 공개 석상에서 한 시간 넘게 싸우는 등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이 명예회장이 유 명예회장을 17번 찾아 설득한 끝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룹의 명운을 가름할 중요한 고비마다 두 창업자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일단 합의를 이루면 상대방의 뜻에 따랐다. ●선대와 버금가는 2세들의 동업경영 두 집안은 이렇듯 탄탄한 동업경영을 기반으로 두 창업주의 아들인 이만득, 유상덕 공동회장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 동업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2세 회장은 선대 회장들과 같이 서울 방배동 한 동네에 살면서 3세 자녀들이 2세 회장에게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 1993년 이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만득 회장은 유 명예회장의 외아들 유상덕 회장과 함께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 회장이 그룹회장으로 취임하며 경영권을 물려받았지만 한번도 경영권 분쟁이 없었다. 유 회장은 삼천리 모든 계열사의 지분을 이만득 회장과 동일하게 갖고 있지만 삼천리 경영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7개 계열사 지분까지 50대50의 똑같은 비율로 2대에 걸쳐 공동경영을 하며 연간 2조 5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회장이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삼천리(도시가스회사)와 삼천리ES(천연가스 냉난방기 판매), 삼천리ENG(도시가스 배관설비)를 맡고 있다. 유 회장은 해외에너지 자원 개발을 하는 ㈜삼탄(유연탄)과 삼천리제약을 책임지고 있다. ●월남민 출신 창업주들, 소박한 혼맥 가꿔 창업주들은 대부분의 친인척을 북한에 두고 내려와 화려한 집안을 꾸리지는 못했다. 이 명예회장은 2남2녀를 두었지만 자식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집안이나 배경보다는 며느리와 사위들의 개인 능력을 최우선으로 봤다. 며느리는 단출한 집안을 꾸릴 수 있는 ‘성품’을 위주로 봤고, 사위들은 ‘능력’을 중심으로 간택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기업들에 비해 요란한 혼맥을 이루지 않았다. 이 명예회장의 큰아들인 이천득씨는 삼천리 부사장으로 있던 1987년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평범한 집안의 유계정(55)씨와 사이에 은백(32)·은아(30)·은미(29)씨 등 2남1녀를 두었다. 이만득 회장은 이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1년 가발 수출을 하는 삼천리의 계열사인 미성상사에 입사, 경영에 참여했다. 형이 작고하자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 회장은 1977년 전혜연(50)씨를 배필로 맞아 은희(27)·은남(26)·은선(23) 등 3녀를 낳았다. 전씨의 부친은 예비역 대령 출신으로 같은 이북 출신 실향민이다. 이 회장과 부인 전씨의 결혼 스토리는 부친 이 명예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이 회장은 친구의 소개로 부인을 만나다가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 명예회장은 아들이 군 복무중에도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두 사람을 불렀다. 이때는 5월5일 부인 전씨의 생일이어서 휴가나온 이 회장이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을 집으로 급히 호출한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집으로 달려간 두 사람은 이 명예회장이 전씨를 꼼꼼히 뜯어 보더니 “됐다. 결혼해라. 결혼식은 10일 후인 5월15일 오후 5시로 잡자.”고 말해 너무 놀랐다. 두 사람은 귀를 의심했지만 “며느리가 착실하고 몸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뭘 바라겠느냐. 혼수는 일절 없이 식을 올리자.”며 두 사람을 독려했다. 혈혈단신 월남한 이 명예회장은 아들을 빨리 결혼시키고 싶은 생각에 혼례를 서둘렀다고 이 회장은 회고한다. 이 회장의 큰 딸 은희씨는 성균관대를 졸업한 뒤 현재 플로리스트(화훼장식가)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딸 은남씨는 미국 UC어바인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셋째딸 은선씨는 UC버클리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장녀 이란(51)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이후 서울대 자연과학대 통계학과 교수인 조신섭(53)씨와 결혼했다. 조 교수는 서울대 응용 분석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86년부터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2녀인 이단(47)씨는 진주화(52)씨와 혼인했다. 진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페퍼딘대에서 MBA를 취득했고,2002년 ㈜삼천리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그리니치 투자자문㈜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유 명예회장은 박옥순 여사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유 명예회장도 사위들을 고르는 기준으로 이 명예회장과 같이 집안 배경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했다. 외아들인 유상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1989년 삼척탄좌개발㈜ 상무이사로 재직하다 1993년에 ㈜삼탄회장에 올랐다. 고등학생인 용훈(18)·용욱(17)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장녀인 명옥(55)씨는 이태성(59)씨와 결혼했다. 이씨는 미국의 스티븐스대 기계과를 졸업한 뒤 2001년부터 삼천리USA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명옥씨는 이 사장과 사이에 준영(30)·찬영(28) 등 두 아들이 있다. 차녀인 혜숙(49)씨는 이민엽(53)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혜숙씨는 미성상사를 맡고 있는 남편 이씨와의 슬하에 규빈(25)·규환(21)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jrlee@seoul.co.kr■ 이만득 회장의 ‘골프경영론’ 이만득 삼천리그룹 회장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매일 오후 헬스클럽에서 1시간동안 땀을 흘리고 주말이면 골프를 치며 경영 전략을 가다듬는다. 핸디캡 5 수준으로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컵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 회장은 골프에서 기업 경영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며 ‘골프경영론’을 설파하고 있다. 이 회장은 “골프를 치면서 기업 경영에 필요한 많은 영감을 받는다.”면서 “골프와 경영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또 골프의 고수는 14개의 클럽을 고루 잘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처럼 기업가들도 다양한 경영 요소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골프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 그는 “경영자는 인사, 자금, 기획, 홍보 등 다양한 요소를 잘 활용해야 기본적 조건에 맞는 조화로운 경영을 할 수 있고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 골프의 코스 전략과 경영의 코디네이션이 ‘닮은 꼴’이라는 점도 지적한다.“골프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코스와, 그렇지 못한 코스의 전략이 다르듯이 경영에서도 각각의 사업 분야마다 특징을 고려해 사업부문을 코디네이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골프 경영론의 핵심이다. 골프 고수들은 아무리 쉬운 코스라도 티샷을 하기전에 머릿속에 자신만의 전략을 수립하고, 특히 어려운 코스는 더 복잡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이번 코스에서는 파(PAR·기준 타수)가 힘들겠다고 판단되면 보기(기준 타수보다 1타 더 치는 것)를 위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면서 “그리고 다음 코스에서는 버디를 잡아야겠다는 전체적인 전략을 짜게 된다.”고 말했다. 경영도 사업분야마다 이익이 많이 날 때와 적게 날 때가 있지만 모든 부분을 고려해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작은 곳에 집착하지 않고 사업 전체를 크게 바라보고 전략 수립과 투자를 감행해야 성공적인 경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끝으로 “골프공은 같은 자리에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 매번 새로운 위치에서 플레이를 해야 한다.”면서 “기업도 마찬가지로 매년 같은 환경에서 경영을 할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한다.”고 말했다. 경영 환영은 수시로 변하는 만큼 새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jrlee@seoul.co.kr ■ 전권 받은 전문경영인 ‘삼천리호’ 지휘 고 유성연·이장균 명예회장이 회사 이름을 ‘삼천리´라고 정한 것은 우리나라 제품으로 삼천리반도 전체를 석권하겠다는 야심찬 포부에서 비롯됐다. 함경남도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식료품 장사를 해야 했던 창업주들의 ‘한(恨)´이 서려 있는 셈이다. 50년 만에 연탄 회사에서 종합에너지 기업으로 발돋움한 ‘삼천리호´에는 베테랑 CEO들이 승선해 있다. 이만득·유상덕 회장은 일선 CEO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스타일이다. 이영복(61) ㈜삼천리 사장은 엔지니어링 출신의 CEO로 국내 최대 도시가스기업을 이끌고 있다. 도시가스 업계의 산증인으로 안전을 중요시하는 업계 특성상 꼼꼼하게 일을 살피는 경영스타일을 갖고 있다. 최근 들어 비효율적 경영 개선을 위해 윤리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윤리경영 선포식을 이끄는 등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부산고와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천리 도시가스사업본부 영업이사를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김경이(59) 삼천리ENG 사장은 재무관리 전문가로 관리형 CEO다. 재무 전문가답게 업무 프로세스를 중히 여기며 원리와 원칙에 따른 업무를 진행한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이후 줄곧 ㈜삼천리에서 경리부문에서 재직하며 경리담당 이사대우, 부사장을 거쳐 2003년에 사장에 취임했다. 강태환(57) ㈜삼탄 사장은 글로벌 에너지기업을 이끄는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해외자원개발 전문기업으로서 연구·개발(R&D) 투자는 물론 인력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삼천리 기술투자 상무이사를 거쳐 2001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찬의(51) KIDECO 사장은 인도네시아 파시르 광산을 세계 7대 유연탄광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2002년부터 사장을 맡아 업무별 소사장제를 도입하는 등 철저한 공정 관리와 치밀한 원가관리를 진두지휘해 왔다. 연세대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고,㈜삼천리 기획실 이사를 역임하는 등 ‘기획통´으로 정평이 나있다. 김용수(53) 삼천리열처리 사장은 무결함 경영을 지론으로 삼고 법적 기준에 따른 프로세스를 강조하고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천리 기계 상무이사, 기술연구소 상무이사를 거쳐 1997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김태성(60) 삼천리제약 사장은 삼성그룹에 입사해 홍콩 샹그릴라호텔 한국 대표를 역임하는 등 ‘외부영입´ 케이스로 삼천리호에 승선했다. 의사 결정과정에서 다양한 정보채널을 활용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민엽(53) 미성상사 사장은 직원들에게 업무를 믿고 맡기는 ‘보스형´ CEO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에서 MBA를 취득한 뒤 삼척탄좌 상무이사를 거쳐 1993년부터 대표이사에 재직 중이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시론] DJ, 북핵문제 결자해지해야/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시론] DJ, 북핵문제 결자해지해야/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설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북한과 우리 정부로부터 방북요청을 받고 있음을 밝히고 그에 따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방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현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김 전 대통령이 방북의사를 밝힌 것은 그 현안에 일조할 자신감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 기대가 자못 크다. 김 전 대통령은 6자회담 상설화, 미국에 대한 대응, 일본 문제 해결, 국제사회 비판에 대한 대응, 한민족의 평화적 협력과 통일방안 등 다섯 가지 의제를 밝혔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핵 문제다. 김 전 대통령 임기말미에 새로 불거진 북핵문제는 그간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의 발목을 잡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의 목줄을 옥죄어왔다. 지난 9월 6자회담 4차 회의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이행을 위한 추진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북핵문제는 그 속성상 표류를 계속할 경우 또다시 위험하게 전개될 수도 있다. 9월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시설은 동결되지 않았다.6자회담의 재개가 지연되고 있는 동안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그 덩치를 더욱 키울 것이다. 큰 덩치를 폐기하려면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다. 나아가 핵 프로그램 자체의 흐름에 따라 자칫 북한이 핵실험이라도 강행하면 이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북핵문제 해법의 기본논리는 간단하다. 북한이 핵보유를 추진할 경우와 핵포기를 택할 경우의 이해득실을 따져 후자가 전자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납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주변국들, 즉 6자회담 당사국들은 북한이 핵보유시 입게 될 불이익과 핵포기시 얻을 이익을 신뢰성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이 핵보유를 강행할 경우 가해질 국제적 제재를 중국이나 한국이 막아주고, 핵포기시 얻게 될 대북지원을 미국이 줄 리가 없다고 믿으면 이 전제가 무너진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지닌 자체의 흐름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협박과 회유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계산보다 더 복합적이고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전에 상하이를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이 “천지개벽”을 느꼈다고 한다. 고도로 상호의존적인 국제사회 속에서 정상적인 국가의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는 북한이다. 그런 북한이, 북한의 지도자들이 그와 같은 천지개벽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제대로 된 인프라가 없고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북한이 천지개벽을 이루려면 세계적인 분업구조에 편입돼야만 한다. 그리고 비확산에 관한 국제 레짐(regime)을 역행하고는 세계적인 분업구조 자체에 편입될 수가 없다. 북한이 핵을 안고 있는 한 천지개벽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중국에 훨씬 앞서 천지개벽을 이룬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1인당 소득이 100달러가 채 안 되던 상태에서 30여년 만에 1만달러를 넘긴 기적을 이룬 나라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극심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면서 나라의 대외적 신인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는 어떻게 천지개벽을 이룰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는 뜻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 뛰어난 논리와 달변으로, 그리고 그동안 북한으로부터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나아가 북한의 지도부를 설득하기를 기대한다. 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 [문화마당] 선진국 진입과 문화의 힘/최준식 이화여대 교수

    지금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진위 공방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기 짝이 없다. 결과가 어떻든 이미 국가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일 때문에 우리 국민들도 많이 의기소침해 있다. 주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한국은 우울증에 빠졌다는 외신보도도 들려온다.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 같았던 영웅 같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구 흔들리는 것을 보니 우리 국민들이 받은 타격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차에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미국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세계 경제보고서를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주장이 있었다. 세계 170개국의 장기 성장 시나리오를 분석한 결과 2050년에는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1인당 소득이 8만 달러가 되어 일본이나 독일 등을 모두 제치고 세계 2위의 국가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의 평가는 이른바 ‘성장환경지수’를 토대로 만든 것인데 물가상승률과 국내총생산 대비 정부의 재정적자 비율, 대외부채, 투자율, 경제의 개방도, 전화와 PC 인터넷 보급률, 고등교육, 예상 수명, 정치적 안정도, 부패수준 등을 고려해 작성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나라가 힘든데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미래가 이렇게 밝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혹 여당에서 운영하는 연구소에서 만든 보고서라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테지만 이건 세계적으로 꽤 명망 있는 은행에서 만든 보고서이니 소가 닭 보듯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나는 곧 ‘문명의 충돌’을 써서 인구에 회자되었던 헌팅턴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그 다음 책으로 ‘문화가 중요하다’라는 책을 편저하면서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한다.1960년대 초에 한국과 가나는 국민소득이 같았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이 되면 한국이 가나를 15배 앞질러 버린다. 그는 이 사실을 목도하고 깜짝 놀란 끝에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한국의 문화는 가나와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저 다르다고만 했지만 속으로는 한국의 문화 수준이 가나보다 훨씬 높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우리는 세상에서 보기 힘든 훌륭한 문자를 갖고 있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초의 인쇄본(다라니 경문)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게다가 가장 앞선 기술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도자기(청자나 백자)를 만든 나라이다. 청자를 만드는 기술은 지금으로 치면 최첨단 ‘하이테크’라 말할 수 있다. 이런 문화가 있었기에 그 손기술 가지고 반도체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너무 많아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런 높은 문화 덕분에 한국은 한국전쟁 직후 최빈국 처지에서 여기까지 내달려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온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밖에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우리 조상들이 남겨주신 훌륭한 문화 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이 저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세계 문명 4대 발상지다운 훌륭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 앞으로도 결코 후퇴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는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선생이 진즉 예언한 한국의 미래는 경청할 만하다. 그는 ‘Korea’란 이름이 세계지도 상에 없는 일제 때 한국은 진급기의 나라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은 어변성룡, 즉 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은 세계 선진국이 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신을 인도할 도덕문명국이 된다고 했다. 당시 그 암울한 시기에 이런 예언을 했을 때 누가 이를 믿었겠는가? 그런데 한국의 경제 성장을 보면 그의 예언은 벌써 반은 적중한 셈이다. 그러던 차에 골드만삭스 은행의 보고서가 나왔다. 여기저기서 자꾸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2050년까지는 살지 못할 터이니 우리나라의 멋있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
  • [아듀 2005 희망을 쏜 사람들] (1) 다니엘 헤니

    [아듀 2005 희망을 쏜 사람들] (1) 다니엘 헤니

    아니근디 이게웬일 왕건이가 하나있네/조각같은 얼굴에다 바디라인 장난아냐/소년같은 미소한방 외쳤다네 심봤따아/국제결혼 장려하세 표어라도 부르고파/이런월척 누구던가 마클종알 뒤져보니/동서양의 완벽조합 그이름은 단열헤니/어머님은 태교할때 그무엇을 드셨관대/깎아놓은 밤톨같은 저런아들 낳으셨나/조각같은 얼굴이면 몸이라도 부실턴가/얼굴바디 예술이면 목소리나 확깨던가/알흠다운 그입술로 조근조근 영어하니/웬수같던 잉글리쉬 바로바로 접수되네 2005년 중반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던 ‘찬가’(讚歌)의 일부분이다. 찬가의 대상은 다니엘 헤니. 그는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전쟁 직후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 사회의 순혈주의를 깨뜨린 혼혈 연예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남성 화장품 광고로 국내에 첫발을 디뎠고, 전지현과의 CF가 인기를 끌며 서서히 얼굴을 알렸다. 올해 들어서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 국내 신세대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헤니에 앞서 오래전부터 혼혈 연예인이 있었다. 유주용, 샌디 김, 윤수일, 박일준, 인순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까지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대부분 외모에 대한 편견 때문에 활동 영역은 가수 쪽으로 한정됐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혼혈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활동하던 연기자도 있었다. 이와는 달리 헤니가 큰 거부감 없이 한국 사회에 연착륙한 것은 미의 기준이 차츰 서구화되고, 외국 문화에 익숙해진 신세대 사이에서 순혈주의가 사그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헤니는 “어머니 나라에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줘서 감사드린다.”고 누차 강조하기도 했다. 헤니에 이어 또 다른 혼혈 연예인 데니스 오도 최근 들어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백인 혼혈이 아니었더라면 이같은 기류가 만들어졌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헤니가 우리 사회의 통념을 눈에 띄게 바꿔 놓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헤니가 혼혈 어린이에게 쏟고 있는 관심도 각별하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지만,“혼혈은 단점이 아닌 축복이다.”며 펄벅재단과 꾸준히 인연을 맺고 혼혈 어린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박기철의 플레이볼] ‘강요된 애국’은 팀전력에 도움안돼

    [박기철의 플레이볼] ‘강요된 애국’은 팀전력에 도움안돼

    “여러분의 조국이 무슨 일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 1961년 1월20일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가 취임사에서 한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 한국인들 대다수는 같은 느낌으로 이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할 때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 국민의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케네디의 연설문을 처음 읽었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필자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같은 정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처음 접했을 때처럼 그리 진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감동을 느낀 게 어릴 때부터 국가 최우선주의의 교육을 받은 결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 당연히 국민에게 요구할 수 있고, 국민인 이상 그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기본 의무는 지켜야 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개인이 거부한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는 없다. 즉 국방이나 납세의 의무는 당연히 지켜야 하겠지만 자선 사업이나 공공 봉사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면서 국가나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칭찬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내년 프로야구 최초로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몇몇 선수가 몸을 사린다고 해서 비난하는 팬들이 많다. 이미 병역 혜택을 받은 선수가 머뭇거리는 데 대해서는 더 심하다. 하지만 앞서와 같은 이유로 이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병역 혜택을 받았음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명예를 위해 참여하는 선수들은 칭찬을 받아야겠지만 운동선수들의 국제 대회 참가는 개인이 선택할 사안이지 강요할 일은 아니다. 무려 5시즌이나 결장하는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테드 윌리엄스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렇다고 안전한 미국 내의 비전투 부서에서 몸을 사리며 형식적인 군복무를 했다고 조 디마지오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부정으로 병역을 기피한 선수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국민의 기본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의무가 아닌 일에 개인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강요된 애국은 진정한 애국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단체 스포츠인 야구에서 승리의 의지가 없는 선수는 전력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뿐이다. ‘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tycobb@sports2i.com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대림산업은 지난 1976년 상장 이후 주주들에게 기업 이익을 돌려주고 있다. 건설업체 가운데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배당을 한 기업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30여년 동안 배당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대림이 오랜 전통을 지켜온 명실상부한 전문 건설업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업종으로 출발했던 현대건설이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늘린 것과 사뭇 다르다. 특히 단순 제조업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림산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수적인 기업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림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는 아니다. 단지 정통 건설 기업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용하게 기업을 일구겠다는 것이 대림산업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1세대, 정미소에서 건설 명가로 성장 고 이재준(수암) 대림산업 창업주는 경기도 시흥(현재 산본 신도시 일대)에서 부친 이규응 옹과 모친 양남옥 여사의 5남4녀 가운데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고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이 창업주의 바로 손위 형이며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이 막내 동생이다. 부친은 장남에게는 공부를 시켰지만, 사업 기질이 보였던 차남에게는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졸업시킨 뒤 자기 밑에 두었다. 수암은 이 때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서울 서대문 한일정미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림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대림의 태동은 1939년 부평에서 목재와 건자재상으로 문을 연 부림(富林)상회에서 출발했다. 초기 부림상회를 이끈 주인공은 3명. 이재준 창업주와 그의 고종 사촌형인 이석구 전 대림산업 사장, 이석구의 매제 원장희로 알려졌다. 사촌지간은 각각 1만 5000원씩 출자했고, 원장희씨는 1만원을 출자했다는 것이다. 이석구는 풍림산업 이필웅 회장의 부친. 결국 대림과 풍림의 뿌리는 부림상회로 같다. 부림상회는 원목을 개발, 사세를 키웠고 광복 이후 군정청으로부터 원목을 값싸게 인수해 교실을 짓는데 들어가는 목재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평경찰서 신축 공사 수주는 건설업체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계기였다. 주한미군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이즈음부터 우리나라 건설업이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당시 국내 건설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대림산업·현대건설·삼환기업 등이었다. 49년부터는 건설업이 목재업을 앞질러 주력업종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란민 수용소를 짓는 등 군 시설 공사를 맡았고, 한국경제 재건기를 거치면서 굵직한 공사를 따냈다.58년 시작된 청계천 복구공사와 청계고가도로 건설,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건설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시설 현장마다 대림의 깃발이 나부꼈다. 60년에는 풍림산업을 인수, 자회사 형태로 두었다. 서울 영동·잠실·반포지구 개발과 광진교, 영동대교, 양화교 등 한강 다리 공사에도 대림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지하철 시대를 여는데도 대림은 처음부터 참여했다. 동시에 해외공사 수주를 늘리는 등 사세를 키웠다. 54년에 설립한 서울증권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99년 구조조정차원에서 소로스에 매각했다. 지금은 지분을 전혀 소유하지 않고 있다. 대림통상은 아예 동생 재우씨에게 떼어줘 형제간 사업 분리를 마무리지었다. 대림요업 역시 98년 매각하면서 지분을 대림통상에 넘겼다. 창업주가 생전 계열 분리를 통해 경영권 분쟁의 씨앗을 남기지 않았다. ●난형난제(難兄難弟)…운경 이재형 대림산업을 말할 때 흔히 고 운경 이재형 전 국회의장을 끌어들인다. 수암 이재준 창업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정계와 재계에서 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주목받으며 거목으로 우뚝 섰던 인물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면모,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말을 아끼는 점에서 같았다. 운경은 자유당·공화당 시절 내내 골수 야당을 했다. 그래서 동생이 운영하는 대림은 자주 곤욕을 치렀다. 대림에서 정치자금을 대주지 않나 하는 의심과 함께 야당 정치인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대림은 수시로 세무사찰을 받아야 했다. 민정당 시절에도 운경과 수암, 그리고 이준용(67) 회장은 형과 동생, 백부와 조카라는 혈연 빼고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운경이 정치한다고 자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대림 역시 운경에게 베풀거나 받지도 않았다. 서로 철저하게 독립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2세대, 건설업에 유화부문 키워 양대축 형성 수암 이재준은 열아홉 되던 해 수원지역 대지주의 딸인 이경숙과 결혼했다. 이 여사는 그러나 장남 준용(현 대림산업 회장)을 낳은지 4년만에 세상을 떴다. 창업주는 박영복 여사와 재혼, 차남 부용(전 대림산업 부회장·61)을 얻었다. 단출하게 두 아들만 두어 경영권 이양 등에서 큰 불협화음이 없었다. 이 회장은 부친과 달리 정규 교육 혜택을 입고 착실히 경영 수업을 받았다.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미국 덴버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는 등 학자풍의 엘리트였다. 그러면서 한경진 여사와 결혼하고 66년부터 대림산업 사무실에 출근했다. 경영 참여와 관련, 이 회장은 “본격적으로 해외 건설시장을 개척할 시기였는데 해외감각과 국제업무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고, 명예 회장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국내외 공사를 막론하고 창업주를 도왔다. 유창한 영어는 해외공사 수주는 물론 각종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국내에서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78년 당시 부사장이었던 그는 건설업계 최초로 업무 전산화 작업을 추진하는 등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앞장섰다. 업계는 이 회장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79년에는 사장에 오르면서 색깔을 내기 시작한다. 동생 부용씨는 상무로 승진했다. 건설과 양대 축을 이루는 유화부문의 틀도 이때 마련됐다. 창업주가 목재상을 건설업으로 키웠다면, 이 회장은 여기에 유화부문을 더해 건설과 석유화학의 양대 사업을 구축해 안정과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대림산업은 66년 베트남 진출로 국내 최초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한 이래 중동건설붐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해외건설 맥을 유지하고 있다.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 포항제철 3,4호기 건설공사 등도 대림의 손을 거친 건축물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대림은 국내외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미지가 실추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86년 개관 11일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화재가 발생,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87년 8월까지 당초보다 더 완벽한 복구공사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88년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란 캉간가스정제공장 현장에서 이라크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13명이 죽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대림이었다. 그런데도 대림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속죄양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림 역사상 최대 위기였다. 대림은 그 뒤 국내 아파트 공사, 관공서 건물, 평화의 댐공사 등 굵직한 일감을 따내면서 덩치를 키웠으나, 사업 다각화 등으로 몸집을 불린 다른 업체와 달리 한 우물만 고집, 업계 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렸다. ●3세대, 건설·유화 오가면서 경영 보폭 확대중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37) 대림산업 부사장은 건설과 유화부문을 오가면서 경영 수업을 쌓고 지난 7월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미국 덴버대 경제학과를 나와 부친과 동문을 이룬다.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95년 대림엔지니어링에 입사했다.2000년 건설부문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2004년부터 전무를 맡았다. 지난 5월에는 대림산업 지분의 21%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지주회사인 대림코퍼레이션의 공동 대표이사에도 취임했다. 대림산업은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27위 규모의 대림그룹 모기업이다. 이 부사장은 현재 대림산업 0.47%, 삼호 1.85%, 비상장 종합물류 회사 대림H&L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분 움직임이 없어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라기보다 다양한 경험 축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혼맥 1세대는 평범,2·3세대는 화려 이재준 창업자는 조선 선조대왕 7번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9대손이다. 가문이 번창했기 때문에 수암의 집안은 늘 북적댔다. 생가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서 오고 가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500여섬지기 자작농 겸 지주였고 서울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경영의 덕목을 키워나갔다. 창업주 세대는 대부분 평범한 가정과 연을 맺었다. 큰 누이는 평범한 가정으로 출가했고, 둘째 누이도 작은 사업가에 시집을 갔다. 형님 이재형 전 국회의장 역시 평범한 집안의 류갑경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수암도 예외는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배필을 맞았다. 아래 동생들도 일반적인 가문과 결혼을 올렸다. 하지만 막내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의 결혼에서는 국내 굴지의 재계와 혼인을 맺는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차녀 구자혜(68)여사와 결혼하면서 대림과 LG는 사돈의 연을 맺는다. 이를 계기로 이 회장은 줄곧 LG그룹 경영에만 참여하고 있다. 자녀들도 명문가문과 연을 맺었다.LG카드 부회장을 지냈으며 LG그룹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회장은 장인이 강세원 전 희성금속 사장과, 박동복 전 금호전기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이들과는 한다리 건너 사돈지간이다. 이준용 회장의 형제로 이어진 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정·관계, 재계 혼맥이 형성된다. 이 회장은 1965년 연애끝에 이화여대 출신의 한경진 여사와 혼인했다. 장인인 한순성씨는 천안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가에서 두 사람의 연애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남 이부용 전 대림산업부회장도 경희대 출신의 이선희 여사와 결혼, 재계 인맥을 쌓는다.1970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만났으며 장인이 서울주철회장과 헌정회 이사를 지낸 이종수씨다. 이 회장의 백부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은행간부 출신인 배상준씨 집안에서 큰 며느리를 맞았다. 이어 큰 딸은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작은 사업가와 결혼했던 둘째 고모 고 이임출의 딸은 윤용구 일동제약 회장 아들과 혼인을 맺었다. 숙부 이재연 아시안스타회장은 오세중 세방회장과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장관 집안에서 며느리를 얻었다. 3세에 들어서 재계 혼맥은 더욱 두터워진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사장은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외손녀인 김선혜(34) 여사와 결혼했다. 장모가 구자경 회장의 큰 딸 구훤미 여사, 장인은 희성금속 회장을 지낸 고김화중씨다. 이들은 친지의 소개로 만나 연애결혼했다. 이로써 대림산업은 LG가와 두번째 혼맥을 만들었다. 차남 이해승씨의 부인 김경애 여사는 전 미국 미주리대 김현영 박사의 딸이다. 3남 이해창(34)씨의 부인 최영윤(30) 여사는 같은 건설업종인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큰딸이다. 초창기 우리나라 토목 건설산업을 일군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 연애결혼했다. 결혼 당시 양가 부모들은 청첩장에 결혼 일자만 표시하고 장소, 시간은 넣지 않았다. 친지들에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만 알리고 식장 참석과 축의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막내딸 윤영(33)씨 남편은 외국계 금융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이다. 가족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이 회장 집에서 모인다. 이 회장은 손자들이 보고 싶을 땐 아침 일찍 자식들 집을 찾곤 한다. ●전문 경영인, 업계 최장수 베테랑 대림산업㈜ 이용구(59) 사장은 6년 가까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1년 대림에 입사, 해외·주택 영업 담당 임원, 기획조정실장, 행정본부장, 사우디 사업본부장, 공사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친 정통 건설맨. 몇 안되는 해외건설 전문가로, 국제감각이 탁월한 국제신사로 알려져 있다.35년간 이 회장과 함께 하면서 임직원들의 맏형 역할을 하는 등 이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대림산업의 한 축인 유화사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CEO는 한주희(53) 대표이사 부사장.80년 입사해 관리, 기술기획 및 영업 핵심 업무를 맡았다. 대림 코퍼레이션 기획 담당 임원, 대림 H&L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중국 전문가로 바이어 협상에 있어 귀재로 평가받는다. 고려개발㈜ 오풍영(63) 사장은 95년 관리인 사장으로 임명돼 10년 넘게 장수하는 최고경영자.ROTC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다. 대림산업에 근무하다가 87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로 옮겨 기획·재무부문을 담당했다. 관리인 취임과 동시에 경영혁신에 드라이브를 거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 당초 2007년까지 계획됐던 법정관리를 9년 앞당겼다. ㈜삼호 신일철(56) 사장은 현장중심 경영자.2001년부터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81년 입사하기 전 금융기관과 제조업체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기획, 예산, 재경 등을 담당하다가 임원 승진 이후 인사, 자재, 안전 등 전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업계 최상위 수준의 안전경영을 하고 있다.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 H&L을 동시에 맡고있는 박준형(53) 사장은 76년 대림 석유화학에 입사한 여천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역군. 유화 부문 공장장, 구조조정 담당 임원, 석유화학사업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대림코퍼레이션은 석유화학 주력 무역회사, 대림H&L은 유화 부문 물류 회사. 석유화학 산업 위기를 구조조정을 통해 슬기롭게 극복했다. 대림콩크리트공업㈜ 서봉삼(61) 사장도 장수 CEO.2000년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0년 대림산업 입사 이후 주요 건설 현장을 누볐다. 상·하 구분없이 조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는 CEO로 평가받는다.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협력을 강조한다. 오라관광㈜ 김부경(57) 사장은 국내 최대 관광지인 제주에서 512실 규모의 특급호텔과 국제적 수준인 36홀 규모의 골프장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83년 오라관광에 입사, 국내·외 판촉, 객실 운영 등 회사의 주요 업무를 두루 거쳤다. 제주도 관광업계의 산증인. 제주관광협회 부회장, 제주지역골프협회장으로 활동중이다. 대림 I&S 김영복(46) 사장은 38세에 임원,40세 대표이사 등 대림그룹내 최연소 기록을 두루 갖고 있다. 늘 새로운 발상으로 주위를 놀라게 해 ‘아이디어 뱅크’로 소문났다.81년 대림산업에 입사,4년 6개월간 쿠웨이트 현장에서 전산업무를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대림그룹의 디지털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대림자동차공업㈜ 박노균(57) 사장도 2000년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73년 대림산업에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과 대림엔지니어링 재무담당 이사 및 행정본부장을 역임했다. 현장경영을 중시해 수시로 지방 사업장을 둘러본다. 외환위기 이후 이륜차 산업의 극심한 침체로 인한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냈다. 웹텍 창업투자 이대영(50) 사장은 금융 전문가.79년부터 94년까지 은행, 레이니어은행, 한미은행,JP모건, 한국신용정보에서 근무하고 화동창업투자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95년 대림엔지니어링 국제금융 이사로 인연을 맺어 대림산업 구조조정 담당 상무로 있다가 99년부터 웹텍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chani@seoul.co.kr ■ ’닮은꼴’ 창업주 父子 대림산업 창업주 이재준 명예회장과 이준용 회장은 여러 면에서 닮은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곁눈질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는 고집쟁이라는 점에서 같다.66년 된 회사지만 건설에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건설이 제자리를 잡을 즈음해서 확장한 분야라고 해봤자 유화 부문 정도다. 덩치를 키우는 것을 자제한 것도 닮았다.‘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대림은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회사다. 하지만 옳다싶으면 금방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정도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장점도 지녔다. 청탁을 하지도 않고 받을 줄도 몰랐다. 창업주는 인사 청탁에 있어서는 매우 완곡해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청탁해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빽’이나 동창생을 찾아다니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고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청와대에서 들어온 인사 청탁을 거절한 일화도 있다. 그는 대통령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본인이 경영일선에서 물러서 있을 때면 몰라도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예회장과 현 회장 모두 쉽게 권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사업가로서 자기 일에만 매달렸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이어져 형제간 독립된 사업을 일구거나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친인척이 배제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움직인다. 그래서 친인척들로부터는 ‘남남만도 못한 회사’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이 회장은 “대림은 대주주라고 무조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그에 합당한 능력이 뒤따라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친인척 경영에 있어서 창업주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 회장의 동생 부용씨는 대림산업 부회장을 지냈지만 지금은 대림산업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이 전 부회장은 대림통상 지분을 놓고 숙부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chani@seoul.co.kr ■ 李회장 부부 ‘남다른 문화사랑’ 서울 종로구 통의동 경복궁 옆에 위치한 대림미술관.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유난히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 대림산업 임직원들은 물론 점심 때는 주변 사무실 직장인과 공무원들이 단골 관람객이다. 대림 관련 업체들은 단체로 다녀간다.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에게 문화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림이 문화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이준용 회장 부부가 문화예술에 갖는 관심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 회장은 94년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탄생할 때부터 부회장으로서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대외 직함을 좀처럼 갖지 않으려는 이 회장이지만 10년넘게 이 단체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문화예술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한경진 여사의 역할도 크다. 한 여사는 대림미술관을 맡아 대림의 문화공헌 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대림이 120억여원을 출연해 문을 연 사진매체 전문 미술관.93년부터 대전에서 운영해 온 한림미술관이 모태인데 2003년 서울로 옮겨 한 단계 발전시켰다. 이 미술관은 프랑스의 미술관 전문 건축가인 뱅상 코르뉘와 루브르 미술학교의 장 폴 미당 교수가 설계했다. 대지 253평에 지상4층, 연면적 366평 규모다. 대부분의 기업은 미술관 설립 때 한번 출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림은 운영에도 적극적이다. 문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 현실에서 미술관이 자립운영을 해나가기에는 아직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대림은 전시가 바뀔 때마다 직원들에게 전시를 관람토록 장려하고 경영전략회의나 송년회 등 사내 각종 모임을 미술관에서 열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친숙도는 직원들의 창의적 사고를 키워주고 제품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대림이 개발한 아파트 외벽 디자인은 미술저작권 등록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건축조형물들이 건축분야의 저작권에 등록되는데 비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술분야의 저작권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외벽디자인이 적용된 역삼 e-편한세상의 경우 외관의 차별화로 주변 다른 아파트들에 비해 가격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직원들은 문화적 소양과 미적 안목이 결국 다른 업체와 다른 품질 경쟁력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열린세상] 중국학생들의 한국 공부/황병선 청주대 초빙교수·언론인

    이번 학기 강의를 맡은 ‘뉴미디어’과목에 6명의 중국 학생들이 등록을 했다. 기자로 체험했던 한·중 관계,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개인적 선입견 등이 얽혀 이들의 수강신청은 적잖은 심리적 부담이 되었다. 중국 수교가 이미 13년전 일이고 1992년 수교 당시 50억달러에 불과하던 양국간 교역이 1100억달러나 된 마당에 한국에 유학 온 중국 학생들이 물론 특이한 존재는 아니다. 3∼4학년인 이들은 한국말과 글에 그리 익숙지 못하다. 강의에 영어와 한자를 많이 섞어 쓰는 배려를 했지만 큰 도움은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공들여 쓴 한글이지만 기말시험 답안지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소박해 보인달까? 외모로는 한국학생들과 구별이 어려운 이들에게서 나는 20여년전 미국 워싱턴에서 만났던 이들의 선배들 모습을 떠올린다.80년대 초 워싱턴특파원으로 취재활동을 하던 중 마침 79년 미·중국 수교에 따라 처음 워싱턴의 대학에 유학 온 중국 대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우리에겐 ‘적국 중공’의 유학생들인 셈인데 중국 대사관 숙소에서 외교관, 신화통신 특파원들과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잡비로 한달에 불과 200달러가 지급됐다. 인민복처럼 허름한 작업복 대신 일본, 한국학생들처럼 청바지를 입어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졌던 10여명의 학생들은 그래도 전혀 기죽지 않고 대국 중국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으로 의연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그것이 내게는 딱하게 비쳐졌지만 말이다. 중국 학생, 신화통신 특파원들과 교류하며 이들을 통해 당시 한국 언론에는 큰 특종이 될 중국방문을 시도했었다. 취재 계획서에 대해 훗날 적절한 때 방문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사실상 거부의 베이징 당국자의 편지를 받았을 뿐이지만 그나마 국가보안법 저촉 여부로 정부 파견관의 추궁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은 우습게 다가온다. 이때 그 풍요로운 미국에서 고향에서 보다 경제적으로 더 구차한 생활을 해가며 자칭 ‘자본주의 경제공부’를 해 간 그때 그 학생들이 바로 오늘날 중국 경제발전의 브레인들이다. 어려서 중국의 방대한 규모와 우수한 문화, 조선조의 사대주의, 그리고 한국전쟁때 ‘중공군의 인해전술’등을 듣고 배우며 주눅이 들었던 탓인지 내겐 현재 진행되는 중국의 개발행진은 그 속도나 규모가 다시 한번 가위 눌리게 한다. 1979년 미·중국 수교 당시 외무부 출입기자였던 나는 비참하고 염려스러운 우리 외교의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었다. 어떤 면에서나 가장 중요한 두 나라가 핑퐁외교 끝에 공식수교를 발표하는 그 당일까지 우리 외무부는, 정부는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던 미국은 한국측에 귀띔조차 해주지 않아 미·중국 수교 공식발표가 나오자 사전 대비가 전무했던 정부는 대중국 정책을 재검토하느라 까무러칠듯 허둥댔다.2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약소국을 밥으로 삼으려는 강대국의 속성은 당연히 불변이다.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후 그 노하우와 장비를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 전수했다며, 앞선 기술력으로 값싼 임금을 찾아 중국으로 진출한다며 의기양양하던 게 엊그제 일이다. 눈 밝은 기업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중국에 긴장하고 있다. 값싼 하이얼 냉장고의 국내 진출이나 경차 마티즈의 짝퉁 생산이 문제가 아니다. 그 이상의 13억 대국의 도전이 코앞에 다가선 것이다. 없을 듯하지만, 또 늦은 듯하지만 지금이라도 근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말을 더듬거리며 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구박도 받고 월급도 떼이고 하는 중국학생들, 이들이 10년뒤에 오늘 배운 ‘한국’을 어디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 것인가를 상상하면 한편으로 두려워진다. 황병선 청주대 초빙교수·언론인
  • 아버지·형 부대서 복무 가능

    현역 입영 대상자들은 내년부터 아버지나 형들이 복무했던 부대에서 군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병무청과 육군은 8일 직계가족이 복무했던 부대에서 군 복무를 원하는 입영 대상자들에 대해 이같은 내용의 ‘직계가족 복무부대 지원입대병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지원대상부대는 1·3·6사단 등 한국전쟁 참전 22개 부대와 백마·맹호·비둘기부대 등 월남전 참전부대, 일반전초(GOP) 및 전방부대에 한해 지원할 수 있다. 후방지역 부대는 부정방지를 위해 제외했다. 병무청은 인터넷 홈페이지(www.mma.go.kr)를 통해 신청을 받은 뒤 선착순으로 지원자를 선발,3개월 뒤 입영을 통보한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나눔 세상] “동티모르의 산타 돼주세요”

    인도네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2002년 독립한 21세기 최초의 신생독립국 동티모르. 내전을 겪은 나라답게 이 나라에서는 16세 이하 어린이가 인구 92만여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인만 보면 ‘코레아’라며 웃음 짓는 ‘어린이 공화국’의 아이들을 위해 4년째 동티모르에 재직 중인 유진규 대사가 기자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기자는 지난 8월 전후 복구현장을 취재하러 간 현지에서 유 대사를 만났다. “한 집에 아이들이 5∼8명씩입니다. 그만큼 이 나라 여성들은 산고와 해산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90%는 병원에 가지 못하고 조산모와 이웃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습니다. 신생아를 위한 옷가지며 기저귀, 비누까지…. 이 곳에서는 모든 게 부족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어려웠던 우리나라 사정과 다를 바 없지요.” 유 대사는 그동안 동티모르를 방문했던 사람들 가운데 연락처를 남겼던 70여명에게 해산용품 마련을 위한 모금을 부탁하며 이메일을 썼다. 그는 배냇저고리와 포대기와 기저귀, 유아용 비누를 세트로 만들어 동티모르 영부인이 운영하는 알로라재단으로 보낼 생각이다. 동티모르 근무를 하다 보면 모두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고 유 대사는 말한다. 어린 시절 외국 선교사들이 찾아와 영화를 상영하던 기억을 떠올려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산골 마을을 돌며 어린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도 유 대사다.“국민들 대부분이 하루 75센트의 생활비로 살아갑니다. 가난해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예전 우리나라와 똑같아 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그랬듯 산모와 아이들의 위생 상태가 안 좋아 건강을 해치는 모습이 걱정스럽다. 유 대사는 아이를 낳은 뒤 곧바로 일을 해야 하는 티모르 엄마들이 갓난아이에게 물에 설탕이나 당분 같은 것을 타 먹이기 일쑤라고 전했다. 그것이 해롭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동티모르에서는 ‘어린이에게 엄마젖 먹이기 운동’이 한창이다. 호주인인 영부인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직접 젖을 먹일 정도다. 해산용품 한 세트를 마련하는 데는 2만원 정도가 든다. 금융이 발전하지 못한 동티모르에 성금을 보내려면 수수료가 너무 많이 들어 대사관은 한국에 계좌를 만들었다. 송금계좌는 신한은행 34202476637(예금주 박진기).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격동의 현대사 60년 ‘앵글의 기록’

    격동의 현대사 60년 ‘앵글의 기록’

    ‘사진으로 격동의 현대사와 교감한다.’ ‘매그넘’(Magnum)이라는 국제적인 보도사진작가 그룹이 있다.1947년 로버트 카파의 주도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조지 로저,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이 힘을 합해 결성했다. 사진작가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가 이들의 원칙. 단순히 기록에 치중하는 것만은 아니다. 피사체의 감정과 감춰진 이야기가 평면의 사진 속에서 부활한다. 이들의 작업은 철저한 기자 정신과 풍요로운 예술가 정신이 조화를 이룬 결정체로 평가받고 있다. 보도·다큐멘터리를 지향하면서도 각각 작가주의적 앵글을 가지고 현대사 현장 곳곳을 누비는 것이다. 특히 세계 분쟁지역과 험난한 오지, 화려한 현대 사회의 뒷모습에 포커스를 맞춘다. 작고한 회원을 포함,60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매그넘’이 현재까지 찍었던 작품은 3000만장이 넘는다고 한다. 현대사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 성황리에 작품전이 열렸던 브라질 출신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도 ‘매그넘’의 회원이다. 사진은 백 마디 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다는 말이 있다.‘매그넘’의 작품을 디딤돌로 세계 현대사 격동의 순간, 순간을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EBS가 연말을 맞아 특집 다큐멘터리 ‘사진, 현대사 60년을 담다’를 준비한 것. 오는 11일과 18일 오후 9시 두 차례로 나뉘어 ‘매그넘 안방 사진전’이 열린다.1편은 1945년에서 베트남전까지,2편은 베트남전에서 이라크전까지를 담았다. 지난 여름 일본 NHK에서 제작했다. 어찌보면 정적인 사진과 동적인 TV라는 매체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300∼400장의 사진 하나하나가 배경음악과 함께 역사라는 의미있는 조합으로 훌륭하게 묶여지고 있다.2차대전 종전과 동서 냉전의 시작, 그리고 한국전쟁. 중동전쟁과 중국의 문화혁명에 이어 베트남전쟁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또 가장 최근인 걸프전과 이라크전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현대사가 100분 동안 사진으로 총망라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2차대전 현장을 생생하게 잡아낸 로버트 카파와, 한국전쟁을 기록한 스위스의 베르너 비숍, 냉전기에 소련에서 활동한 엘리엇 어윗, 베트남전 당시 북베트남 잠입 촬영으로 유명해진 마크 리보 등 ‘매그넘’ 작가 24명의 살아 숨쉬는 작품들을 주로 만날 수 있다. 주요 작가들의 인터뷰와 함께, 미국 뉴욕에 위치한 ‘매그넘’ 본사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이 사통팔달, 한국 제일의 목에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이곳에 와서 책을 서서 보려면 서서 보고, 기대서 보려면 기대서 보고, 앉아서 보려면 앉아서 보고, 베껴 가려면 베껴 가고, 반나절 보고 가려면 반나절 보고, 하루종일 보고 싶으면 하루종일 보고,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고 사지 않아도 되고, 사고 싶으면 사 들고 가도 좋습니다.”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대산(大山) 신용호’라는 평전에서 당시 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싸라기 땅인 종로 1가 1번지 교보빌딩 지하에 교보문고를 세운 일에 대해 이같은 논리로 동의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한국의 미래를 모토로 만든 교육보험에도 청소년들의 지적 수준과 나라의 성장은 비례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창업 이념도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다. ●독립운동 집안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신 창립자는 1917년 8월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 마을에서 부친 신예범 선생과 모친 유매순 여사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잦은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가장 노릇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곱살 때는 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다. 열살 즈음 병이 나았지만 학교를 가진 못했다. 형편이 어려운 데다 형들이 각종 애국 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어린 마음에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는 대신 ‘책속에 길이 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밤에는 책을 읽었다. 동생의 책은 물론 주변에 보이는 책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보았다. 겨울엔 잠과 싸우기 위해 방에 불도 때지 않고 책을 읽다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당시 ‘천일독서’를 목표로 각종 위인전, 철학서, 고전, 사서를 섭렵했다. 비록 학교 문턱에는 가지 못했지만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독서철학으로 스스로 내실을 다졌다. 함께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 신용희(83) 전 회장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애국운동에 몸담았다. 큰형인 고 신용국옹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 큰아들인 신동재씨가 2000년까지 교보의 부동산관리 전문 자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냈다. 둘째 형 고 신용율씨도 항일운동에 몸담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 신평재(67)씨가 현재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일은행 상무로 재직하다 1991년 제의를 받고 교보생명 사장 등을 역임했다. 셋째 형 신용원옹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다 납북했다. 넷째 형 고 신용복옹은 일제 당시 조선생명지사장을 지냈다. 막내 동생 신용희 전 회장은 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하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신 창립자를 도와 함께 일했다.1967년 교보생명 창립 이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신인재(39)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8%)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 사장은 고 신 창립자로부터 경영권을 승계받은 큰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신 사장은 최근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됐다. ●교육열을 사업으로 연결한 기지…교육보험의 탄생 문학가를 꿈꿨지만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에 뜻을 세웠다. 약관이 되던 해에 서울로 갔고 이어 1936년 중국에서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간 닦은 기반을 버리고 빈손으로 귀국했다.1946년. 귀국후 첫 사업으로 전북 군산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냈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간판을 내렸다. 그렇게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문득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논 한 뙈기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생·로·병·사’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했다.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형편 없었다. 일제시대 보험은 수탈 방식이자 보신(保身) 방편이었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이 대부분 휴면상태에 있을 만큼 보험업은 쑥대밭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험난해서인지 국민의 80%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가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들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다. 창업 당시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1958년 종로1가 60번지 2층짜리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교육보험이란 업종상 생명보험으로 분류돼 상호에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을 수 없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당시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열악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1958년 1월 창업한 뒤 관계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 같은 해 7월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출범시켰다. ●슬하 2남2녀의 혼맥 1943년. 중국에서 한창 양곡수송 사업을 크게 벌이던 신 창립자는 당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일 모레가 네 장가가는 날이다.”는 아버지의 한마디. 결혼을 시키려고 거짓 소식을 보낸 것이다. 당시 남자 26세는 혼기를 놓친 나이였지만 그는 벌인 사업 때문에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도망칠 마음까지 먹었다고 고백하며 배려를 바랐으나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 바람에 결혼식을 치렀다. 부인 유순이(81)씨는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전수학교까지 마친 명문가 출신 규수. 사업에 전력을 쏟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을 탓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묵묵히 2남2녀를 길러냈다. 자녀들의 혼사도 그와 비슷하다.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중매 결혼이다. 명문 대가와의 정략 결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큰딸 신영애(56)씨는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마취과학교실 교수 함병문(58)씨와의 사이에 현진(32), 지훈(31), 세훈(25) 등 2남 1녀를 두었다. 신영애씨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지분 평가로 지난 2004년부터 단번에 350억원대 자산을 보유, 연말마다 언론에서 선정하는 여성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둘째 딸 신경애(54)씨는 법조인에게 시집가 1남1녀를 낳았다. 남편 박용상(61)씨는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까지 마친 뒤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 활약한 뒤 방송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박용상법률사무소를 운영중이다. 박용상씨의 큰형 용설씨는 내외빌딩관리㈜ 대표, 동생 용삼씨는 내외엔지니어링 대표다. 고 신 창립자의 자리를 이어받은 큰 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은 부인 정혜원(48) 봄빛여성재단 이사장과의 사이에 중하(24)·중현(22)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신 회장은 불혹이던 지난 1993년 교보에 발을 들여놓은 뒤 현재 직계 중 유일하게 교보에서 일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막내 신문재(44)씨는 이정숙(44)씨와의 사이에 딸 혜진(18)을 두고 있다. 형제들 중 유일한 연애 결혼이다. 미국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1년부터 2005년 8월까지 광화문 교보문고내 문구 액세서리 음반 팬시용품 등을 판매하는 400여평 매장의 문보장을 비롯해 전국 6개 교보문보장을 운영해 왔다. 교보문고가 직접 문보장을 운영하기 위해 신씨로부터 지난 8월 문보장 사업권을 회수했다. 현재 새 사업을 구상중이다. ●지독한 완벽주의와 파격 인사 고 신용호 창립자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완벽하고 집요하다는 평을 받는다. 땅을 고를 때도 좋은 날, 궂은 날, 비온 다음날 등 두루 살피는 완벽주의자다.77년 명예회장,85년 창립자 등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0년대 후반까지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도 실적이 저조해 본사 부장, 실장, 중역까지 나서 손을 들라고 권하자 그들을 나가게 한 뒤 ‘급료는 후불로 주겠다.’는 광고를 통해 간부 사원을 다시 구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창업 10년 만인 1967년 회장으로 물러난 뒤 2000년 아들 신창재씨가 교보생명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33년간 무려 사장이 19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수명이 1.7년이었다. 경영 안정을 위해 최고경영진을 쉽게 바꾸지 않는 업계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다. 교보의 임원 인사는 상식을 뛰어넘어 기발하고 파격적이란 평이 나오는 이유다. 신창재 회장의 인사 스타일도 재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2년 5월 취임한 장형덕 대표이사 사장의 경우 사장직을 폐지하는 형식으로 취임 10개월 만에 퇴임시켰다. 단일 지도체제가 더 효과적이라며 사장을 없애고 대신 부사장 3명을 임명해 집단경영체제로 개편했던 것. 그때부터 ‘대표이사 회장’ 밑에 ‘대표이사 사장’ 없이 ‘대표이사 부사장’ 체제로 가고 있다. 이어 지난 2004년 2월 박성규 부사장을 선임,‘집단경영체제’는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어라’ 고 신용호 창립자는 ‘죽고 나면 손해’란 보험에 대한 당시 인식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춰 교육보험 1호인 ‘진학보험’을 세계 처음 내놓았다. 죽어야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돈을 적립해 자녀가 초·중·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마다 학자금을 주는 상품이다. 먼저 단체들을 공략했다. 군인 단체 저축성 보험인 일명 ‘화랑계약’을 고안했다. 잦은 군의 이동에 탈락계약이 늘어 성과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군 이동에도 추적·관리되는 시스템을 도입,1967년 육군과 170억원의 단체 계약을 맺었다. 파죽지세로 해군·한전 등 대형 단체들과 꾸준히 계약하는 개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판매 창구도 강화했다. 종로기독청년회관(YMCA)에서 대학생을 모아 보험강좌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대학지부를 설치, 대학생도 판매 채널로 끌어들였다. 지방유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기관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상품에도 그의 기지가 엿보인다. 암 상품은 그가 처음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성인병도 하나씩 보험상품으로 만들었다. 보험업계 전산화 발상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도 바로 그였다.1974년 학자금 선지급 업무를 처음 전산화했고 “컴퓨터를 모르면 간부가 될 수 없다.”며 전 사원을 상대로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인증제’도 실시했다. 그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전반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과정’이고 후반은 ‘생나무 뚫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인 과정’이라 비유했다. 인생은 장애의 연속이지만 강한 정신력만 있다면 아무리 높고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철학이다. 이같은 열성과 집념으로 1958년 당시 6대 생보사 중 막둥이로 태어난 교보생명은 창립 5년 만에 보유계약 56억원으로 업계 3위,1964년엔 보유계약 100억원 돌파로 업계 2위에 오른 뒤 1967년 설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섰다.‘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다른 한 축…교보문고 교육 보험은 대세가 아니었다.80년 들어 경제성장과 함께 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절이 오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 변하는 고객 욕구에 따라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커졌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자 1995년 ‘교보생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삼성생명의 약진으로 교보는 1974년부터 업계 1위에서 2위로 밀려났다. 자산이 늘어나면서 관련 계열사도 속속 설립했으나 모두 보험으로 맡긴 고객의 돈을 운용하기 위한 금융 계열사였다. 부동산관리 전문회사인 교보리얼코(1979), 교보증권(1994) 등 총 9개 자회사를 세우면서 교보를 오늘날 35조원 규모의 금융 자본으로 성장시켰다. 그 중 금융과 동떨어진 업종이 하나 있다. 바로 교보문고(1980)다. 교육을 통한 민족부흥을 창업 이념으로 삼고 있는 만큼 따지고 보면 업종의 본질은 같다는 설명이다. 1980년 종로 1가 1번지에 사옥 교보빌딩이 세워지자 그는 지하에 서점 설립을 제안했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며 지하아케이드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간부들은 채산성이 약하다며 서점이 들어서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냈고,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 회사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 자리에는 당연히 으리으리한 고급상가를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값진 땅에 책방을 크게 열어 청소년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토록 한다면 그 효과가 어느 정도나 될지 상상해 보시오.” 손해가 나더라도 청소년의 정신역량을 키우는 일인 만큼 자신이 떠맡겠다고 설득했다.1985년에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학자들을 위해 80만종의 세계 논문도 공급했다. 지방사옥이 세워질 때마다 학생과 시민들이 교보문고 지점 설치를 요구했을 정도다. 대전, 성남, 대구, 부산, 부천, 강남 등에 속속 지점을 열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찾는 고객 수는 일평균 4만 5000여명, 연간 1500만명에 달한다. 삶의 두 축이 교보생명과 교보문고라고 지적했을 정도로 애착도 컸다. 그러나 말년을 맞아 또다시 병마가 찾아 왔다.77세가 되던 1993년.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석연치 않은 증후가 발견됐다. 담도암이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기운 있을 때 여행을 다녀오라는 처방을 내렸다. 사형 선고였던 셈이다. 그는 암과 싸우며 여생을 보내느니 살든 죽든 결판을 내겠다고 마음먹고 불가능하다는 담도암 수술을 감행했다.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재활물리치료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경영에 관여했다. 그러나 8년 뒤 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몸이 약해졌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오후 6시1분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jhj@seoul.co.kr ■ 신창재회장과 정혜원 여사 “내조만 하며 살아온 탓에 사회공헌 사업은 꿈도 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제의로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하게 됐지요. 내조와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벅차지만 소명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의 부인 정혜원(48)씨는 요즘 사회활동에 바쁘다.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해온 전업 주부였다. 남편 신 회장으로부터 사회공헌 사업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2004년 4월 성매매 피해여성 보호단체를 지원하는 봄빛여성재단을 창립,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순전히 남편 신 회장의 사재로 시작한 사회공헌 사업이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면서도 아이들이 완전히 홀로서기할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걱정이 많다. 그는 한사코 취재를 거부했다. 사회 활동은 하고 있지만 언론 대응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인 그는 소탈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으로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중매를 통해 남편을 만났다고 밝혔다. 평범한 집안에서 데려온 며느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 신용호 창립자의 수수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남편 신 회장이 양복도 맞추러 갈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고 했다. 실제로 신 회장은 아버지의 유업인 교보문고와 교보생명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아버지만큼 골프를 좋아하지만 교보로 옮긴 이후 거의 필드에 나가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교보생명은 지난 2000년 5월 신 회장 취임과 함께 ‘질´경쟁을 선언하면서 업계 2위에서 3위로 밀려난 뒤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교보문고는 교보생명이 증자해 전자책 등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지식문화 전문회사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포부다. 출판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다 보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교보문고는 현재 부채비율이 416%로 은행으로부터 신규 여신이 어려운 처지다. 교보생명은 기존 주주가 여력이 없어 제3자 배정 방식으로 5000억원을 증자할 계획이다. 다른 생보사보다 상대적으로 지급여력비율(160%)이 낮다. 자기자본 확대가 이유다. 그러나 2대 주주인 자산관리공사가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 문제다. 자산관리공사 소유·관리지분(41.26%)의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상태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협조해야 증자에 동의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업계는 신 회장이 과연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교보생명의 한 임원은 신 회장에 대해 “아버지를 닮은 완벽주의자”라고 말했다.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살아오다 불혹이던 지난 1993년 아버지 고 신용호 창립자의 뜻에 따라 그간 배운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교보생명에 발을 들여놓았다.1996년 11월 교보생명 부회장,2000년 5월 교보생명 회장으로 취임한 뒤 변화와 혁신을 기치로 삼고 전력 질주 중이다. 박성규 교보생명 부사장은 “과연 의사 출신이 기업을 어떻게 경영할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를 보면 답이 나온다.”고 전했다. 의사 출신답게 깊은 통찰력과 분석력을 갖춘 데다 책을 많이 읽는 덕분에 멀리, 넓게 보는 안목이 있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황석영의 ‘손님’ 무대 오른다

    소설가 황석영의 역작 ‘손님’이 연극으로 공연된다.1980년대 ‘장산곶매’‘한씨연대기’ 등 그의 전작들을 즐겨 무대에 올렸던 극단 연우무대가 뼈아픈 분단의 상처를 기록한 문자들을 3차원 공간으로 불러냈다. 2001년에 나온 ‘손님’은 황해도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요한·요섭 형제의 비극적 삶을 통해 한국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작품. 뉴욕의 류요섭 목사는 고향방문단 일행으로 북한 방문을 가기 전 고향에 있는 형 요한 장로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요섭은 형의 유품에서 박명선이란 여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한국전쟁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린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윤광진 용인대 교수는 “전쟁에서 무참히 희생된 원혼들을 무대에 불러내 관객과 함께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 첫날(2일)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등 관계자들이 단체 관람한다. 전성환 한명구 예수정 등 출연.2∼1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02)762-0010.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한국전 ‘명예훈장’ 마이어스 사망

    한국전에서 활약한 공로로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받은 레지널드 마이어스 전 해병대 대령이 지난달 23일 플로리다 팜비치의 한 요양원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고 워싱턴포스트가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향년 85세. 아이다호주 보이시 출신인 마이어스는 1950년 7월 한국전쟁에 투입돼 그해 11월29일 영하 23℃의 혹한이 몰아치던 압록강 장진호 전투에서 불과 250명을 이끌고 4000명의 중공군이 포진한 동부 능선 고지를 탈환했다. 그는 1951년 4월 전투 중 부상해 본국으로 후송된 지 6개월 후 백악관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은 것을 비롯,2개의 동성 훈장도 받았다.1967년 은퇴한 뒤 워싱턴 근교의 한인 밀집 지역인 애넌데일에서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다가 1993년부터 플로리다에서 여생을 보냈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재개발 열풍 서러운 달동네

    재개발 열풍 서러운 달동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서구 중세시대의 격언입니다. 당시 농노계급이 신분의 자유를 얻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은 도시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는 왕이나 영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덕분이지요. 한국전쟁 직후 다들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서울은 서구의 중세 도시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생존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일푼 ‘촌놈’들이 제 한몸 뉘일 곳은 달동네뿐이었지요.1994년 드라마 ‘서울의 달’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극중 홍식과 춘섭의 달동네 생활이 팍팍한 우리네 일상과 다를 바 없던 까닭일 것입니다. 그런 달동네가 이젠 서울에서 사라져만 갑니다. 더 나은 주거 환경으로 변모하는 것은 분명 반길 일입니다. 하지만 대신 들어서는 ‘아파트숲’에 달동네 사람들이 등 비빌 데는 좁기만 합니다. 갈 곳 없이 남은 이들에게는 이번 겨울도 가혹하기만 합니다. 성북동 고급 빌라와 중계동 학원촌의 그늘에서 연탄 한 장과 김치 한 포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옛 것 없는 새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우리의 모습인 이들을 어떻게 포용하느냐는 어떤 미래를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함께 하지 않는 내일은 우리가 아닌 ‘그들만의 미래’입니다. 새벽 하늘에 진눈깨비가 날린 지난 21일. 하늘과 맞닿은 달동네는 이미 한겨울 바람이 휘감고 있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주인 없는 집들. 코흘리개 아이들과 강아지들은 그 사이를 뛰어다닌다. 구멍가게 난로 주위는 노인들 차지다. 서울에서 얼마 안 남은 달동네 풍경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달동네로 향하는 길만큼이나 가파른 일상의 풍경들이 펼쳐진 곳. 그러나 달동네는 아파트촌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곧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할 서울 달동네 사람들의 겨울나기를 살펴봤다. 서울의 달동네는 이제 손을 꼽을 정도다. 노원구 상계4동 희망촌과 양지마을, 성북구 성북2동 북정골 등 4∼5곳만 남아있다. 그것도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중 이거나 추진되고 있다. 노원구 상계4동 ‘희망촌’은 서울시내에서 달동네의 명맥을 이어가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에서 종점인 당고개역으로 가다 보면 창 밖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희망촌에는 300여가구 1000여명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당고개역에서 내려 수락산 자락을 따라 오르는 가파른 계단과 좁은 차도가 세상과 이곳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상계 4동은 거의 전체가 3차 뉴타운지구로 지정돼 있다. 희망촌을 찾은 손님을 가장 먼저 맞는 이들도 부동산 업소들이다. 쓰러져가는 집마다 업자들의 명함과 전단이 도배돼 있다. 달동네 사람들에게 겨울은 여전히 가혹한 계절이다. 이중창은 고사하고 비닐과 목재문으로 겨우 바람만 막았다. 도시가스는커녕 유지비가 만만찮은 기름보일러도 이 곳에서는 사치다. 최근에는 연탄을 다시 때는 집도 늘었다. 그러나 연탄값도 버겁다. 주민 정상준(55)씨는 “하루 연탄 세 장이면 방 뜨끈하게 데울 수 있지만 돈이 없어서 마음대로 못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산동네까지 배달되는 연탄은 장당 380원 정도다. 한겨울을 나려면 500장은 필요하다.20만원도 이들에게는 큰 돈이다. ●집세 오를까봐 집 수리도 못해 희망촌 건너편 ‘양지마을’에는 5800여가구 1만 6000여명이 살아간다.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 서울시민 대부분이 저렴하게 이용하는 도시가스가 이곳에도 들어오지 않아 연탄·기름·전열기 등에 의지하고 있다. 결국 중산층보다 연료비 부담이 더 큰 셈이다. 이날은 마침 한 기업에서 보내온 김치를 주민들에게 배달하는 날. 상계4동 사회복지사 강수아(32·여)씨와 함께 김치를 들고 나섰다. 이곳에는 유독 독거노인들이 많다. 이들에게는 지역사회복지관에서 전달하는 도시락과 안부전화가 거의 유일한 ‘생명줄’이다. 김치를 받은 김옥분(가명·70) 할머니는 연신 복지사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훔쳤다. 김 할머니는 연탄 땔 힘도 돈도 없어 작은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 살고 있다. 그나마 전기값도 걱정이다. 김 할머니는 청각장애까지 겪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약값 등으로 15만원이나 나가서 보청기도 새로 사지 못했다. “그래도 너희들 때문에 겨우 살아. 따뜻하게 다녀.” 김 할머니는 추운 날씨에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복지사를 되레 친딸처럼 걱정한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세입자들이다. 보증금 500만원에 20만원 안쪽의 월세를 낸다. 그러나 눈·비로 천장이 내려앉거나 담장이 무너져도 집주인들과는 연락이 안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집주인에게 연락을 못 하기는 세입자들도 마찬가지다. 강씨는 “수리가 되면 집세 오를 걱정에 연락 안 하고 위험하게 사는 게 여기 사람들의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나무도 여전히 훌륭한 땔감 중계본동 산 104번지에는 1670여가구 4000여명이 부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도 개발 열풍이 한창이다. 주택공사와 SH공사가 이곳을 수용한 뒤 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여기 주민들은 대개 들어온 지 10년 정도 된 이들이다. 다른 달동네와 달리 젊은 사람들도 눈에 종종 띄는 이유다. 젊은 부부와 중년 부인은 물론 짙은 화장에 세련되게 빼 입은 아가씨들까지 다닌다. 하지만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로 넘친다. 특히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이들도 많다. 도끼로 나무를 패고 있던 박상춘(50)씨는 “공사장 폐목이나 버려진 가구 등을 잘개 쪼개 난로 땔감으로 쓴다.”면서 “나무도 남아도는 데다 연탄값도 아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천막에 쌓아둔 나무에 불이라도 나면 동네 전체로 퍼질 것 같아 위험천만해 보였다. ●텃밭서 김장거리 수확 성북구 성북 2동 북정골은 가장 도심에 가까운 달동네다. 북악산 자락 서울성곽 바로 아래에 있다. 이곳은 비교적 다른 곳보다 생활 형편이 낫다. 기초생활수급자 숫자도 일반 동네보다 많지 않다. 그러나 꼬불꼬불한 길과 쓰러져가는 집들, 그리고 생활고를 겪는 이웃들이 많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북정골에서 눈에 띄는 풍경은 텃밭이다. 가파른 경사나 집 뒤편 작은 공터에 마련한 밭에 배추나 파 등을 심었다.‘산사태의 원인인 농사를 짓다가 처벌될 수 있다.’는 구청의 경고문도 생활고 앞에서는 효력을 잃었다. 마침 서너평 남짓한 밭고랑의 배춧잎을 줍던 박순자(가명·57·여)씨는 “여기서만 열 포기 넘는 배추를 수확했다.”면서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이렇게라도 아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성북2동 사회복지사 이주안씨는 “자연환경과 함께 사는 북정골 주민들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다행히 정이 많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달동네의 ‘대명사’ 하월곡동 산2번지. 한때 2000가구 이상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100가구도 채 안 남았다. 지난 9월 재개발 사업시행 인가가 확정되면서 주민들은 밀물 빠지듯 흩어졌다. 이 곳 장위중학교 맞은편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이진배(69)씨는 하월곡동 달동네 토박이다. 고향인 전남 곡성에서 40여년 전 상경한 뒤 여기서 쭉 지냈다. 하지만 이씨에게 이제 남은 건 걱정뿐이다. 가게와 조그만 집의 권리금은 8000여만원에 불과하다. 연립 하나 장만할 돈도 안 된다. 이곳을 떠나는 것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씨는 “청춘을 보낸 하월곡동을 떠나는 게 시원섭섭하다.”면서 “마지막으로 설을 쇤 뒤 지방 쪽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두걸 고금석기자 douzirl@seoul.co.kr ■ 달동네의 유래는 ‘달동네’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됐는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60∼70년대 신문에서 각종 개발 사업의 여파로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나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달이 잘 보이는 산자락에 천막을 짓고 산다는 의미로 ‘달나라 천막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이 말이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가 방영된 이후부터 불량·불법 가옥이 몰려있는 산동네를 의미하는 대명사격으로 사용됐다. 당시 이 드라마는 어려운 처지 속에서도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려 큰 인기를 누렸다. 사실 60∼70년대 ‘강제이주’된 철거민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비바람을 겨우 피할 만한 천막 하나였다. 수도며 하수도, 부엌까지 공동으로 사용하며 어깨 너머로 옆집의 살림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주거환경은 열악했다. 달동네는 ‘주거환경개선’이나 ‘재개발’의 대상이었지만 도시 성장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공급해주는 의미는 부인할 수 없었다. 청계천 주변, 청량리, 사당동, 봉천동, 행당동, 삼양동, 하월곡동, 상계동, 상도동 등 서울 곳곳에 자리잡았던 달동네는 80∼90년대 이후 대부분 높은 ‘아파트 숲’으로 변하게 됐다. 얼마 전까지 달동네의 대표격이었던 난곡도 이제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곧 경전철이 도입되는 ‘신도시’가 된다. 상계4동, 중계본동 등 일부 남은 지역들도 뉴타운이나 공공개발 등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상태다. 문제는 달동네가 없어지면 원주민들은 어디로 옮겨가느냐는 것이다. 재개발 뒤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30% 남짓이다. 다른 대체 주택을 찾아야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달동네가 사라지는 상황이라 이주할 곳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최근 개발이 끝난 난곡의 경우 인근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방이 이전 달동네 주민 대부분을 흡수했다. 글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도움 인천 수도국산 박물관
  • “해방후 혼란기 연구 밑거름”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무렵까지 격동의 해방공간을 기록한 서울신문 등 4개 신문 영인본 출간을 기념하는 행사가 24일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렸다. LG상남언론재단이 재단 창립 1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해방공간 4대신문 영인본’ 발간사업의 결과물인 이번 영인본은 1945년 8월15일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말까지 약 5년동안 발행된 서울신문(매일신보 포함)과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을 담고 있다. 타블로이드판 1만 3200여쪽 17권 분량으로, 서울신문이 5권, 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은 각각 4권이다. 출판기념회에는 안병훈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 정진석 한국 외국어대 명예교수,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이경형 서울신문 논설고문, 김진수 매일경제 전무, 이택휘 전 서울교대 총장,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 이인수 이승만 전 대통령 아들, 남중구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안응모 전 내무부 장관, 김호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등 학계·언론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안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해방공간 4대신문 영인본은 해방, 좌우익 대립, 지도자 암살 등 해방 이후 혼란기 실상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작성되었던 기사를 통해 정확하게 조명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의 기록보존”이라고 강조하고,“올해 광복60주년을 맞아 이 영인본이 현대사는 물론 정치사, 언론사, 문화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활동에도 널리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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