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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베트 고난의 57년사

    중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유엔과 영국 등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 중국과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중국은 티베트 수도 라싸에 민간 주재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하고 시캉성 창두 지구를 편입받았다. 그후 중국인들이 대거 티베트로 몰려들어옴에 따른 자원 부담과 양쯔강 상류의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에 대한 박해 때문에 1959년 3월10일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가 발생했다.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시위는 1만 5000여명의 희생자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시위를 주도한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인도 다람살라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존재하고 있다. 이 시위 이후 중국은 티베트에서는 독재를 실시했다. 사유재산을 빼앗고 사회구조도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한 집단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중국의 꼭두각시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을 폐쇄했다. 그 뒤부터 중국은 티베트인의 여행자유 제한, 농업생산의 독려, 강제 노동 등 탄압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왔다. 하지만 중국의 탄압정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티베트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도 이에 비례해 커졌다.1961년과 1962년의 가뭄을 계기로 게릴라전이 계속됨에 따라 중국은 유화정책을 일부 도입했다.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했다. 중국의 정치적인 탄압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군과 경찰을 동원해 무력으로 독립 요구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1984년과 1987년 독립시위에 이어 1989년 3월5일에도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를 벌였다. 비록 중국군의 계엄령 선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난 10일부터 티베트에서 승려가 주도된 독립시위가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에 티베트인들이 중국에 의한 고난과 핍박의 57년 역사에 과연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세계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티베트 고난의 57년

    티베트 고난의 57년

    중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유엔과 영국 등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 중국과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중국은 티베트 수도 라싸에 민간 주재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하고 시캉성 창두 지구를 편입받았다. 그후 중국인들이 대거 티베트로 몰려들어옴에 따른 자원 부담과 양쯔강 상류의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에 대한 박해 때문에 1959년 3월10일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가 발생했다.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시위는 1만 5000여명의 희생자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시위를 주도한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인도 다람살라에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존재하고 있다. 이 시위 이후 중국은 티베트에서는 독재를 실시했다. 사유재산을 빼앗고 사회구조도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한 집단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중국의 꼭두각시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을 폐쇄했다. 그 뒤부터 중국은 티베트인의 여행자유 제한, 농업생산의 독려, 강제 노동 등 탄압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왔다. 하지만 중국의 탄압정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티베트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도 이에 비례해 커졌다.1961년과 1962년의 가뭄을 계기로 게릴라전이 계속됨에 따라 중국은 유화정책을 일부 도입했다.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했다. 중국의 정치적인 탄압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군과 경찰을 동원해 무력으로 독립 요구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1984년과 1987년 독립시위에 이어 1989년 3월5일에도 라싸에서 대규모 독립시위를 벌였다. 비록 중국군의 계엄령 선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난 10일부터 티베트에서 승려가 주도된 독립시위가 들불처럼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에 티베트인들이 중국에 의한 고난과 핍박의 57년 역사에 과연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세계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작가는 왜 쓰는가/ 제임스 미치너 지음

    ”소설을 구성해 나가는데 있어 자극적인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에 대한’ 소설은 늘 실패로 끝난다.…성공한 소설은 인물로부터 시작하고 그들과 함께 지적·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첫소설 ‘남태평양 이야기’로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작가 제임스 미치너의 창작론의 한 대목이다. 이 타고난 이야기꾼이 평생 간직한 글쓰기 원칙 혹은 신념이란 어떤 것일까. ‘작가는 왜 쓰는가’(제임스 미치너 지음, 이종인 옮김, 예담 펴냄)는 작가가 50년 문학인생을 반추하며 쓴 일종의 ‘글쓰기 지침서’다. 특히 소설 창작에 대한 친절하고 명쾌한 원칙들이 잘 정리돼 있다.“소설의 처음 몇 장을 아주 어렵게 만들라. 그렇게 해 일부 독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라(내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과도한 상징과 부자연스러운 은유는 천재작가 혹은 문예 창작과 학생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다.” 책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해 마거릿 미첼, 트루먼 커포티 등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가들과의 일화도 실려 있다. 미치너는 헤밍웨이 소설이 최악의 혹평을 받을 당시 씌어진 ‘노인과 바다’의 서문을 자진해서 써줬다. 책은 미치너가 ‘노인과 바다’의 교정쇄를 처음 읽어본 곳이 바로 전쟁이 한창인 한국의 어느 산골 참호 안이었다는 사실을 소상히 전해 눈길을 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작가는 훗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소설 ‘도곡리 철교’를 쓰기도 했다. 마흔이 돼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음에도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선 미치너. 글쓰기에 대한 노(老)대가의 따뜻한 충언이 담긴 이 책은 흔히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와 비교된다. 두 작가는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것은 “모름지기 명쾌하고 진실성이 담긴 글을 쓰라.”는 것이다.1만 2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촌마을

    [지리산 산마을 이야기]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촌마을

    백두대간 종주 산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지나쳤을 지리산 고기리 고촌(高村)마을은 1000고지 이상을 힘차게 달려온 고산준령이 고리봉(1304.8m)에서 급격히 해발 고도를 낮추며 처음으로 숨을 고른 땅이다. 대간 종주자들에겐 한 구간의 마지막 지점이자 다음 구간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고, 서북릉 산행에 나선 이들 중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부러 하산하는 경우도 많은 터라 고리봉 아래 고촌마을은 백두대간 종주꾼이나 지리산 산꾼들에겐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구룡·선유·비폭포 인접… 찾는 발길 이어져 원래 남원군 상원천면에 속했던 고촌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랫마을 내기(안터)와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이름을 딴 ‘고기리’가 되었고 이후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전라북도의 산중마을이지만 1680년경 영남에서 이주해온 경주 이씨, 밀양 박씨, 달성 서씨 등에 의해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1950년대 이전만 해도 130호에 달하던 면내 최대 마을이었다가 한국전쟁 때 소각돼 한 가구도 남지 않았고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한두 사람씩 돌아오긴 했지만 다시 도시로 떠나는 가구가 많아 지금은 30여 집이 조금 못 된다. 빈집은 7가구쯤 되는데 거의 다 외지인에게 팔린 상태다. 주천면 마을 중 지대가 제일 높은 고촌의 주민들은 산나물, 상추, 감자, 오미자 등을 재배 혹은 채취하며, 인접한 구룡폭포 최상류 계곡과 선유폭포, 비폭포 등을 찾는 등산객은 물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민박과 식당도 겸하고 있다. 따라서 마을 풍경만 놓고 보면 해발 600여m의 높은 산지임을 쉽게 실감하기 어렵다. 고촌에서 태어나 결혼해 여태껏 살고 있는 정오분(75) 할머니 역시 마을이 불에 탔을 때 고향을 떠났다가 3년쯤 후에 돌아왔다. 그때는 돈 없는 사람만 들어와 살았던 척박한 산골이었다. 남의 논을 져먹으며 쌀 석 되로 시작한 반세기의 기억들은 말로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다. 눈이 ‘겁나게’ 많이 오는 곳이지만 성삼재, 운봉, 남원 등으로 삼거리가 뚫릴 만큼 도로 사정이 좋아 겨울에도 버스가 다니지 못하는 일은 없다. 다만 여느 집처럼 자가용이 있는 게 아니어서 벌써 몇 번이나 119 신세를 져야 했다고. ●주말이면 산행객 100여명 묵어가 남원 시내에 거주하다 11년 전 고촌으로 들어와 현재 이장을 맡고 있는 양해거(62)씨는 마을 속사정까지 훤하게 꿰뚫고 있다. 이번 주말에도 100여 명의 산행객들이 고촌에서 묵어간다. 간혹 양 이장에게 숙박 문의전화가 오면 집집마다 번갈아 공평하게 소개해 주기도 한다. 아예 ‘반달곰 산채마을’이란 브랜드로 특성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고랭지 상추는 인근 대도시 청과시장에서 가져가니까 가격만 정해지면 판로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괜히 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조용하고 공기 좋고, 부지런하면 약초며 산채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곳이니까요.” 몇 년 전만 해도 외지인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와 분뇨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요즘은 성숙해진 산악문화 덕에 속상한 일이 덜하다. 쓰레기봉투를 무료 배포하면 그 봉투에 차곡차곡 담아 길가에 내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끔씩 양 이장이 직접 쓰레기를 수거하러 다니기도 한다. 마을 위쪽엔 올해 완공 예정인 고기댐이 있다. 반대도 해봤지만 정부 사업을 농민이 이길 수는 없었다. 오히려 폭우 시 홍수를 조절하고 농수와 생활용수로 유용하게 쓰이길 바랄 뿐이다. 고기댐 앞엔 상처 입은 노거송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주민들을 묶어두고 무차별 총살이 자행된 나무란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 이들은 조금씩 잊히겠지만 아직도 탄환 자국에 시름하는 늙은 나무는 묵묵히 그때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www.emountain.co.kr) ▶가는 길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88올림픽고속도로에서 남원IC로 나온 다음 19번 국도와 60번 지방도를 타고 고기리까지 갈 수 있다. 지리산IC로 나왔다면 인월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운봉으로 온 후 역시 60번 지방도를 타고 고기리로 이동한다. 남해고속도로에서는 진주분기점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따라 함양분기점으로 들어서 88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남원과 고기리를 오가는 시내버스는 하루 8회 운행한다.
  • “한국전쟁도 굳건히 견디어 냈는데…”

    “한국전쟁도 굳건히 견디어 냈는데…”

    주한 미 해군사령관인 토머스 로덴 준장이 지난달 25일 송영무 해군 참모총장에게 숭례문 화재사건에 대한 위로를 표시하는 편지와 숭례문 사진 1장을 전달했다고 우리 해군이 6일 밝혔다. 로덴 준장이 보낸 사진엔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숭례문의 모습이 원형 그대로 담겨 있다. 사진 속 숭례문에는 미 항공모함인 박서(BOXER·2만 7000t)함의 1950년 4월 7∼9일 인천항 입항을 환영하는 의미의 ‘WELCOME US NAVY’란 현수막과 한·미 양국의 국기가 걸려 있고, 숭례문 앞으로는 우차(牛車)와 지게꾼 등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은 주한 미 해군 기록 보존 사진첩에 보관돼온 것이라고 한다. 로덴 준장은 서신에서 “대한민국 국보 1호의 손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전한다.”며 “수많은 침략과 일제탄압, 한국전쟁에도 굳건히 견디어낸 숭례문이 화재로 손실된 것은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사진을 통해 한·미 양국 해군 간의 강한 유대감과 한국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느낄 수 있었다.”며 “숭례문을 복원하는 데 자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아기 울음소리’ 2년째 늘어

    ‘아기 울음소리’ 2년째 늘어

    아기 울음 소리가 2년째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출생아 수와 합계 출산율이 2년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제3차 베이비붐 효과’ ‘쌍춘년’,‘황금돼지해’ 영향으로 한국전쟁 이후 세대의 자녀가 혼인·출산 연령에 도달하는 ‘제3차 베이비붐 효과’에 따른 현상이다. 통계청이 26일 발표한 ‘2007년 출생통계 잠정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49만 7000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1년 전보다 4만 5000명이 늘어난 수치다. 이같은 증가폭은 ‘밀레니엄 베이비’ 출산 붐이 일었던 2000년(2만명)의 2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출생아 수는 2000년 63만 7000명에서 2003년 49만 3000명,2005년 43만 8000명으로 감소세를 보이다 2006년 45만 1514명으로 반전했으며, 지난해 더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합계출산율도 1.26명으로 증가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합계출산율도 2005년 1.08명,2006년 1.13명에서 지난해 1.26명으로 2년 연속 증가했다. 인구 1000명당 출생아 수를 뜻하는 조출생률도 지난해 10.1명으로 2003년 10.2명 이후 4년 만에 10명을 넘어섰다. 통계청은 “출생아 수 증가는 제2차 베이비붐 세대인 1979∼1981년생들이 본격적으로 결혼 정년기에 접어들어 제3차 베이비붐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출생률에는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증가세 지속 여부는 미지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출산율은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일본(1.32명), 미국(2.10명), 프랑스(1.96명) 등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친다. ●산모 평균 출산연령은 30.6세 산모의 연령대를 기준으로 볼 때 30대 초반(30∼34세) 여성이 낳은 아기의 수가 20만 80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산모의 평균 출산연령은 30.6세로 1년 전보다 0.2세 높아졌다. 첫째 아이는 평균 29.4세, 둘째 아이는 31.5세에 낳아 출산연령이 1년 전보다 각각 0.2세 높아졌다. 여성의 초혼 연령도 같은 기간 0.1세 늘어난 27.8세로 나타났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1) 산청 성심원 유의배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1) 산청 성심원 유의배 신부

    경남 산청의 나환자 마을 성심원(산청군 산청읍 내리 100). 한센병을 앓는 170여명이 함께 살며 요양도 하고 치료도 받는 환우촌이다.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소속된 3명의 신부와 7명의 수사(修士)를 중심으로 직원 60여명이 환우들을 돌보는 이곳엔 ‘환자’가 없다.‘가족’이 있을 뿐이다. 비록 병증이 심해 마비된 손발이 뒤틀리고 앞을 볼 수 없어도 모두가 한 식구들. 이 성심원의 중심에, 밤낮 없이 아픈 이들의 곁을 지키며 마음과 몸을 챙겨 주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다. 한국서 32년째 살며 병자성사에 몸바쳐 온 스페인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 출신의 유의배(62·본명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수도명 알로이시) 신부이다. 지난 정월 대보름날 저녁. 환자 곁을 지키다 수도복 차림으로 기자 앞에 불쑥 나타난 푸른 눈의 신부는 첫 대면임에도 보름달만큼이나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짧은 흰 머리와 길게 자란 하얀 턱수염, 그리고 검은색 수도복에 하얗게 번지는 웃음. 그 누구라도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편한 웃음이었다. 병자, 그것도 가장 대하기 힘들다는 한센병 환자들을 한결같이 내몸같이 살피는 유의배 신부는 일찍부터 병자성사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신학대 재학시절 간호사로 일할 만큼, 그의 길은 아픈 이들을 향해 정해졌던 것 같다. 사제서품을 받고 스페인 나환자병원서 처음 피정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나환자들과 살고 있는 유의배 신부. 그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 신학대 재학시절 간호사 경험 ‘큰 도움´ 스페인 바스크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과 학살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담은 피카소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비극의 땅, 게르니카에서 유 신부는 태어나 자랐다. “게르니카 폭격현장에 있었던 어머니로부터 전쟁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5∼6살 무렵이었지요.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전쟁이 신기할밖에요. 전쟁이란 어머니를 통해 듣는 과거사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집안에 프란치스꼬 수도회 소속 수사들이 많아 어릴적부터 수사가 될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그는 16살 때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입회, 종신서원을 했고 바스크 지방 아란사수 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어릴 적 관심 많았던 한국은 변함없이 가고 싶은 나라. 신학대학 시절에도 한국에 파견된 선배 사제들의 편지와 소식이 실린 잡지들을 꼬박꼬박 구해 보았다고 한다. “신학대 재학시절 간호사 경험을 살려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아픈 이들과 살아갈 요량으로 한국을 지원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한국의 군사독재 체제가 경험 없는 초년 사제에겐 위험하다는 이유였지요.” 첫 발령은 파라과이 가와수로 났지만 발령 대기 중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수도원 본당 사역이 더 급하다는 관구의 뜻을 따라 볼리비아에서 2년간을 사역해야 했다.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마드리드 북쪽의 트릴료병원서 나환자들과 보름간 피정을 함께했는데 그때 만난 나환자들에게서 평생 가야 할 신앙의 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볼리비아 사역을 마친 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전 단계로 아일랜드와 런던에서 1년여 동안 영어공부를 했다고 하니 한국을 향한 집념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런데 성심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산 것은 한국에 와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한국에 입국해 정동 프란치스꼬 수도원서 한국어를 배우던 무렵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성심원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바로 이곳이다.’라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 10여년 전부터 임종환자의 염도 직접 도맡아 정동 수도원에서 시작해 진주 칠암동 양로원 사역, 주문진 본당 보좌, 제주 공동체에서의 기도생활 등 5년여를 보낸 끝에 성심원에 온 것이 1980년 5월. 지금은 번듯한 요양원이며 수용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당시 처음 맞닥뜨린 나환자촌은 세상의 박대와 눈초리를 피해 숨어든 환자들이 허름한 집에서 가정을 이루거나 외롭게 살아가는 ‘버려진 땅’에 다름 아니었다. “막상 환자들과 생활하려니 그들을 도울 일이 변변치 않았어요.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일이란 그저 ‘더 이상 버림받지 않는다.’는 위안을 주는 정도였지요.” 처음엔 그냥 이유 없이 피하려고만 들던 환자들도 격의 없는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밤낮 아픈 환자들의 수발을 들며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 배웅하는 외국인 신부가 친구나 가족보다 더 살가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대부분 화장을 하지만 매장풍습이 계속됐던 나환자촌에서 장지까지 상여를 따라가며 함께 우는 사제가 단지 신앙에 매몰된 ‘하느님의 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혹시 잘못될지도 모르는’ 중환자의 곁은 어김없이 유 신부가 지킨다.10여년 전부터는 임종 환자의 염(殮)도 직접 한다. 임종 환자의 손발을 거두고 시신을 씻어 수의를 입혀 입관하는 일까지 도맡는다. “이곳에서 앓다가 사망한 환자들의 시신을 거두던 촌로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염을 할 사람이 없어졌어요.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어깨너머로 보아두었던 대로 죽은 이의 마지막을 수습하기 시작한 게 일상이 되었네요.” 따져보면 유 신부도 정상인의 몸은 아니다. 지난 1993년 상태가 악화된 환자를 인근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당한 교통사고로 왼쪽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심하게 다쳐 이식수술을 해야 했다. 1998년 성심원 영내에서 경운기에 치여 넘어지는 후유증으로 목 디스크를 심하게 앓고 있다. 요즘은 오른팔의 마비증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손가락 감각도 거의 없어져 뜨거운 것을 만져도 느낄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두 번의 사고가 오히려 환우들의 입장을 더 깊숙이 알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알았지만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던 기간 내내 환우들이 성당에 모여 저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제대로 한 것이 없는데….” 아픈 이들을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만남과 구원의 믿음을 거듭 확인한다는 유의배 신부. 그는 어쩔 수 없는 프란치스꼬 수도회 수사이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손발이 다 문드러진 나환자일지라도 자식들에겐 환자가 아닌 그냥 어머니요, 아버지”라는 말은 왜 그가 평생을 나환자들과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2002년엔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수여하는 사회봉사상을 받았고 지난 2006년엔 동년배의 환자가 주선해 조촐한 회갑연도 열었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노 신부가 느닷없이 “식구들을 소개하겠다.”며 기자의 손을 잡아 환우들 앞으로 이끈다. 불쑥 나타난 신부의 모습에 반가움의 표정이 번진다. “신부님 안녕하세요.”“아이구 오늘은 더 예뻐졌네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인사에 일일이 다가가 껴안으며 얼굴을 부빈다. 비틀린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힘겹게 만들어 보이는 할머니의 손을 맞잡던 유 신부가 말한다.“보는 눈에 따라 흉한 몰골의 환자가 될 수도 있고 허물없는 가족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산청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유의배 신부는 ●1946년 스페인 바스크지방 게르니카 출생 ●1962년 프란치스꼬 수도회 입회 ●1969년 종신서원 ●1970년 바스크지방 아란사수 신학대학 졸업, 사제서품 ●1973∼1974년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수도원 본당 사역 ●1976년 한국 입국 ●1980년 성심원서 수도생활 시작 ●2002년 아산사회복지재단 사회봉사상 수상 ●현재 성심원서 수도생활 및 병자성사
  • 라이스 美 국무장관 한국 이름은 ‘라이수’

    라이스 美 국무장관 한국 이름은 ‘라이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한국 이름은 ‘라이수(羅梨秀)’라고 한미 동맹친선회가 25일 밝혔다. 친선회는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라이스(Condoleeza Rice) 장관에게 ‘라이수’라는 한국 이름을 작명해 미 대사관에 전달했다. 친선회는 ‘Rice’의 ‘R’ 발음에 착안해 성씨를 ‘그물 라(羅)’씨로 정하고 본관은 라이스 장관의 주소지인 Washington DC를 따라 ‘워싱턴 라씨’로 했다. 이름은 ‘Rice’의 영어발음을 참작해 ‘배나무 이(梨)’에 ‘빼어날 수(秀)’인 ‘이수’로 짓고 ‘배꽃은 고고하고 정숙해 청렴 결백한 공직자로서 우방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뜻을 담았다. 한편 친선회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사수에 공을 세웠던 고(故) 해리스 워커 대장 동상을 오는 4월 용산 미 8군 기지 내에 설치하자는 제안서를 이날 한미연합사령부에 제출할 계획이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학생들이 교수님이라 불러 민망했죠”

    “학생들이 교수님이라 불러 민망했죠”

    “학기가 바뀔 때마다 강의실에서 어린 학생들이 교수님이라고 불러서 민망했죠.” 입학한 지 반세기만에 학사모를 쓰게 된 이화여대 졸업생 이향섭(77·1952년 국문과 입학)씨. 이씨는 이화여대가 2003년 금혼학칙을 폐지한 후 재입학한 ‘돌아온 이대생’이다.25일 열린 이화여대 학위수여식에서 만난 이씨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면서 “한국전쟁 직후 어려운 시절, 딸을 시집보내면서 학업을 마치도록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했던 친정어머니의 묘에 영광의 졸업장을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두 딸은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했으나, 이씨는 재학 중 결혼하면 퇴학 처분되는 금혼학칙 때문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금혼학칙이 폐지됐고, 이씨는 고심 끝에 재입학에 도전했다. 2년전 재입학한 이씨는 7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변호사인 아들 집에 거주하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이씨는 “두 아들이 등록금을 내줘 졸업하게 됐다.”며 뿌듯해했다. 이씨는 시험 때 스트레스로 두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재입학하기 전 문예지에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시인이기도 한 이씨는 그동안 미뤄왔던 세 번째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또 한번의 열정을 불태울 계획이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지리산 산마을이야기] (18) 전남 구례군 토지면 조동마을

    [지리산 산마을이야기] (18) 전남 구례군 토지면 조동마을

    경남 하동과 군계를 이루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외곡리 중기마을은 1780년쯤 연곡사로 승과를 치르러 들어간 승려들이 아녀자를 데리고 오다 숨겨둔 곳, 김해김씨가 절터를 만들었던 곳, 혹은 승려가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중터’ 또는 ‘승기’라 불리다가 1950년쯤 외곡과 피아골의 중간 지점이라 하여 ‘중기’라 개칭했다. 작은 중기마을 안에 교집합처럼 들어선 조동마을은 지리산 왕시루봉(1212m)에서 갈라진 봉애산(613m)과 목아재를 뒷동산 삼고, 피아골에서 출발한 연곡천 물줄기 너머 중기마을을 마주하고 있다. 중기 뒷산이 구례와 하동을 나누는 삼도봉∼불무장등∼황장산∼촛대봉 능선이니 결국 조동은 앞뒤로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 피아골의 풍만한 청류를 고루 품은 셈이다. 마을 어른들은 녹차, 밤, 매실 농사에 종사하고 요즘 같은 계절엔 고로쇠 작업도 병행한다. 대체로 기온이 따뜻해 겨울 내내 눈이 쌓이는 날은 사나흘뿐. 그래서 녹차 농사가 잘되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선 녹차를 상비약처럼 사용한다. 싱싱한 찻잎을 바로 덖는 것이 아니라 아랫목에 일주일씩 널어 건조시킨다. 발효차는 외딴 마을 주민들의 감기약과 소화제 역할을 대신해 왔다. 조동마을 최고령 부부 박봉수(86) 할아버지와 임남례(80) 할머니는 슬하에 무려 9남매를 두었다. 할머니는 섬진강 건너 문척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50년을 살았다. 전에는 하동장 구례장 모두 걸어 다녔는데 이제 그럴 여력은 없다. 도로가 가까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피아골과 연곡사를 오가는 버스가 1시간에 1대꼴로 있어 불편함은 덜하다. 용케 일제 때나 한국전쟁 때 마을이 소개(疏開) 당하는 아픔도 겪지 않았다. 마을 이름의 첫 글자(助)대로 그 몹쓸 난리 속에서 정말 하늘이 도운 건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지난 1999년 지리산 일대의 물난리는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진이라고 믿을 만큼 강한 충격이었단다. 마치 물이 서서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물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풍광 좋던 계곡은 그렇게 한바탕 몰아친 홍수 때문에 황폐화되었다. 다리가 떠내려간 게 벌써 두 번째. 다리 위로 물이 넘쳐 휩쓸려 간 사람도 많았다. 모 심으러 왔다가 얼떨결에 떠내려간 이도 있었으니까. 마을과 도로를 잇는 시멘트 다리는 2006년에 새로 놓았다. 마을 위쪽엔 올해로 조동마을 주민 4년차인 정명엽씨가 산다. 시국사건에 휘말리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80년대 초반 가족들을 데리고 독일로 훌쩍 떠났다고 한다. 그 후 10년을 조금 더 채우고서야 타국 생활을 접고 귀국해 대구의 한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처음엔 이 산중생활이 유배나 진배없었지만 지금은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고 너스레다.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TV가 없으니 세상사 보고 듣는 것도 없이 삶의 꼬인 것들이 하나씩 풀어져버리는 느낌이란다. 가끔씩 그리운 산악회 친구들이 다녀간다. 동남향인 조동은 계곡 건너편 중기마을에 비해 아침이 빠르다. 정씨는 ‘조동’마을을 ‘아침이 빠른’ 마을로 해석하길 좋아한다. 마을은 모두 깊은골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데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물 흐름도 좋고 물맛과 수질이 뛰어나다. 마당 한쪽으로 흐르는 ‘서출동유’의 석간수 소리에 맞춰 정씨가 연주하는 나지막한 트럼본 소리가 겹겹이 덧칠하듯 포개진다. 땅거미 지는 지붕들 위로 함박눈처럼 음표들이 나풀나풀 내려앉는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www.emountain.co.kr) #가는 길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부산 사상 서부터미널에 구례까지 가는 버스가 있고, 기차는 전라선 구례구역에서 하차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IC,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장수IC,88고속도로 지리산IC 등에서 남원으로 간 다음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로 진입한다. 남해고속도로는 하동IC를 경유해 구례로 갈 수 있다. 조동마을로 가려면 19번 국도 외곡삼거리에서 피아골 방향으로 들어서야 한다.
  • “웃을 수 없었던 55년… 오늘만은 행복”

    “웃을 수 없었던 55년… 오늘만은 행복”

    “생전에 한을 풀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북한인민군에서 국군포로로, 다시 해병대를 거쳐 북파공작원으로 굴곡의 인생을 걸어온 임덕준(81)씨는 국가유공자 지정 소식을 전해듣고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한국전쟁 때 지뢰 파편이 오른쪽 얼굴을 관통, 광대뼈가 부서진 탓에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던 55년의 세월이었지만 이날만은 행복하다며 미소 지었다. ●북한서 활동중 지뢰 파편에 부상 그는 전쟁 당시 ‘무명용사’로 ‘켈로(KLO)부대’ 대원이었다. 켈로부대는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첩보활동을 위해 설치한 ‘주한연락처’란 의미로 대북 첩보부대다. 켈로부대원들은 정식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이 아니어서 무명용사로 남아 있다.1995년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유공자로 인정받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관련 기록이 거의 없어 부대원 상당수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황해도 송화 출신인 임씨는 1950년 해병대 모병 7기로 입대했으나 북한 인민군 포로 출신이라는 이유으로 북파공작원에 징집됐다. 그후 북한으로 침투해 황해도의 북한군 주둔지 1개 사단과 인민군 기마대 3대대, 내무소(파출소)를 폭파시키는 임무를 해냈다. 하지만 53년 북한 주둔지에서 정보를 수집해 나오다 지뢰 파편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인근 해역에 정박중인 유엔군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하고 제대했지만 심각한 침투공작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악몽 떠올라 매일 약 46개 먹어야 임씨는 “매일 46개의 신경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인민군에게 쫓기는 악몽이 자꾸 떠올라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7년이 지난 1961년, 마침내 군번을 받은 그는 이후 ‘30년간 부대활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강제 서약을 지켜왔다. 그러다 1999년 국가보훈처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유공자 신청을 냈다. 하지만 보훈처에서 당시 군번과 병상일지 등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임씨로부터 민원을 받은 후 6개월 동안 임씨를 치료한 간호사와 후송 소대원을 잇달아 만나 증언을 확보하고, 보훈처에 ‘유공자 재심의’를 요청했다. 이에 보훈처는 최근 임씨가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게 됐다고 20일 밝혔다. “부상 후유증에다 아내가 파킨슨병에 걸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국가에 목숨을 바쳐 헌신한 공로를 뒤늦게나마 인정받게 돼 기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오바마 “한·미 FTA 개정해야”

    오바마 “한·미 FTA 개정해야”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한·미 정부가 합의한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자동차와 쌀, 쇠고기 등 미국의 핵심산업 및 농업분야 보호와 환경·노동 등 신통상정책의 기준들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오바마 의원은 지난 11일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한 발언록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이와 함께 “북한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면서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를 지켜내기 위해 단호해야 할 뿐 아니라 양보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14일 공개됐다. 그는 “최근 수년 동안 한·미 양국관계가 표류해왔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양국관계 표류의 핵심에 무엇보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한·미 양국 간의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의원은 또 “이명박 당선인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다.”면서 “대단히 중대한 한·미관계에 다시 불을 지피고 복원하기 위해 앞으로 이 당선인과 함께 일할 기회를 가지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양국관계의 중대성을 감안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 당선인 취임 직후 가급적 빠른 시일내 백악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할 것을 적극 권유한다.”고 말했다. 또 “한·미 동맹관계는 강력하고 성공적 관계를 이룩해 왔다.”며 “반세기전 한국전쟁 당시 피로 맺어진 혈맹관계는 냉전시대의 혹독한 시련기를 거쳐 그대로 견지돼 왔으며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 미 안보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바마 의원의 이같은 발언은 ‘이명박 당선인 취임’이라는 제목으로 외교위에 제출한 발언록에 포함돼 있다. 발언록은 직접 회의에 출석해 발언한 내용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dawn@seoul.co.kr
  • ‘3색 테마’ 평창의 재발견

    ‘3색 테마’ 평창의 재발견

    ‘하늘아래 첫 눈꽃동네´로 불리는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일대는 겨울이면 어김없이 몇차례 대설주의보가 내려진다. 덕분에 횡계리 등 대관령 주변 지역은 한번 눈이 쌓이면, 겨우내 아름다운 설경을 펼쳐보인다. 소나 양을 기르는 목초지 등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구릉지가 유난히 많아 곱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겨울 풍경이다. 거기에 눈밭 사이사이 삐죽 솟아오른 낙엽송이 이국적인 정취를 더한다. 흰 눈을 이고 선 황태덕장은 또다른 볼거리. 들판을 메우다시피한 덕장에서 누릇누릇 익어가는 황태들이 자못 장관이다. # ‘바람의 마을´ 의야지 싱싱한 겨울풍경이 한창인 그 곳에 ‘바람 마을´ 의야지 농촌 체험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의야지(義野地)는 ‘의로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땅´이란 뜻. 해발 750∼800m 고지에 위치해 바람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사철 다양한 농촌 체험활동이 이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때는 역시 겨울철. 특히 마을 청년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대관령 스노파크는 요즘 인기 상종가다. 스노래프팅, 튜브썰매, 봅슬레이 썰매 등 눈 위에서 할 수 있는 놀이는 거의 모두 즐길 수 있다.200m 높이의 산자락에서 내려오는 스노 봅슬레이 썰매는 그중 최고 인기 종목. 트럭 뒤에 매달린 바나나 보트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 튜브를 타고 내려오는 스릴만점의 놀이다. 치즈 만들기, 딸기잼 만들기 등 간단한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치즈 만들기의 경우 우리나라 가정에서 해오던 전통방식으로 진행된다. 양떼 먹이주기 체험은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한다. 스노파크 입장료 어른 8000원, 어린이 6000원. 스노 튜브 봅슬레이 등 프로그램에 참가할 때마다 별도의 요금(2000∼4000원)을 내야한다. 치즈만들기 등 체험은 1팀(4∼8인) 4만원.windvil.com,033)336-9812∼3. # 발왕산으로의 게으른 겨울산행 사람마다 취향이야 다르겠지만, 대부분 화사한 눈꽃의 자태를 탐미할 수 있는 겨울 등산을 산행의 으뜸으로 꼽는다. 겨울산행지로 많이 알려진 발왕산(1458m)은 평창군 진부면과 도암면, 강릉시 왕산면 등의 경계를 이루는 평창의 진산. 산세가 완만해 겨울철 설원의 정취를 즐기려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정규코스로 오르면 3시간은 족히 걸리지만, 곤돌라를 타면 20분 안쪽에 정상 바로 아래에 닿는다. 용평리조트에서 관광곤돌라를 타고 발왕산 정상으로 향했다. 힘찬 강원의 산들이 동서남북으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수월하게 오른 탓에 정복의 쾌감이야 덜하지만, 일망무제의 장쾌함만은 여전하다. 발왕산에서는 아기자기한 눈꽃보다 산들의 파노라마에 주목해야 한다. 내로라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들이 주름접힌 채 다가서는 장면은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광이 아니다. 멀리 북서쪽으로 선자령과 대관령 풍력발전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대관령 능선 오른쪽으로 펼쳐진 강릉 앞바다는 맑은 날씨가 선사해 준 보너스. 발왕산 정상은 곤돌라에서 내려 산책로를 따라 10여분쯤 더 올라가야 한다. 정상 남동쪽 산자락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이 군락을 이루며 주르륵 늘어서 있다. 의연하게 산정을 지키는 모습에서 발왕산의 자랑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주목 군락 뒤로는 ‘산너머 산´을 이룬 백두대간이 이어졌다. 시계가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정선땅에 솟아 오른 산봉우리의 스키 슬로프가 보일 지경이다. 용평리조트 관광곤돌라 어른(왕복) 1만 2000원, 어린이 8000원.330-7421. # 누렇게 익어가는 황태 눈 이불을 뒤집어 쓴 황태덕장과 어우러진 산골 마을의 정취는 한 폭의 풍경화다. 용평스키장 입구 횡계마을 일대와 읍내에서 대관령 옛길로 향하는 길목의 덕장마다 명태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북풍한설 속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황태 특유의 누런 빛깔로 익어가는 중이다. 대관령 지역은 남한에서 최초로 황태덕장이 형성된 곳이다. 고도가 높고 기온 차가 심한 데다 바람도 많아 황태 건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후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기후여건이 비슷한 대관령에 덕장을 세워 황태를 생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요즘 대관령이나 인제 용대리 등의 황태덕장에 거는 명태는 대부분 오호츠크해 등에서 잡아온 원양태들이다. 우리 근해에서 명태 어획량이 급감하면서 연안태는 ‘금태(金太)´라 불릴 만큼 보기 어려운 생선이 됐기 때문이다. 진부령 넘어 고성군 거진항 일대에서 21∼24일 제10회 고성 명태축제가 열린다.‘금태´와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www.myeongtae.com,682-8008. 글 사진 평창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횡계나들목→우회전→횡계 읍내 로터리→좌회전→의야지마을(서울에서 약 3시간 소요). ▶주변 볼거리 풍력발전기 돌아가는 삼양 대관령목장의 이국적인 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 바다 풍경도 일품. 오대산 월정사 입구의 눈쌓인 전나무 숲길도 겨울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맛집 남경식당은 꿩만두와 메밀막국수 등으로 소문난 집. 깍두기와 김치 등 밑반찬도 맛깔스럽다. 꿩만두와 메밀막국수 모두 5000원을 받는다.335-5891. 오징어와 삼겹살이 조화를 이룬 오삼불고기도 대관령의 별미. 횡계로터리 주변 납작식당(335-5477)이 잘한다.1인분 8000원.
  • “60년만에 고교 졸업… 이제 한 풀었어요”

    노장년층과 소외된 청소년들의 대안학교인 서울 화곡동 성지중고등학교 학생 770명이 12일 서울 강서구민회관에서 졸업식을 갖는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제때 배우지 못한 ‘한’을 품고 입학한 학생들이다.10대 때 결혼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70대 할머니, 문제아로 찍혀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 온 탈북자 등 모두가 눈물겨운 사연의 주인공들이다. 중·고교 4년 과정을 마치고 한국방송통신대에 진학하는 전규화(78) 할머니는 4시간의 등하교 시간에도 결석과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경북 영주 산골마을 출신으로 17살 되던 해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고, 이듬해 시집가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했던 전 할머니는 60여년 만에 한을 풀었다. 명지전문대 부동산학과와 정화미용예술학교에 진학하는 고영식(59), 오말남(59·여)씨는 부부다.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으로 부친을 여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는 고씨는 배우지 못한 것이 뼈에 사무쳐 4년 전 아내와 함께 50여년 만에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중고교 시절 무단결석과 가출, 폭력으로 비행청소년으로 낙인찍혀 공부를 그만둔 뒤 사이버 범죄로 구속되기도 했던 송모(19)군은 올해 모 대학 컴퓨터학과에 합격했다. 국내 컴퓨터 게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게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학업을 포기하려 했던 김모(18)군,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김모(19)군도 자랑스러운 졸업생이다.2002년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정착한 새터민 김영진(24)씨는 중고교 과정을 밟는 동안 한식·양식 요리자격증을 따고 경기대 호텔조리학과에 진학한다.2005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한 조문희(22·여)씨도 단국대 간호학과에 입학해 간호사를 꿈꾸고 있다. 함익주 교사는 “온갖 어려움을 뚫고 목표를 이룬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 만한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李당선인은 통영 명예시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새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된 유우익(58) 서울대 교수가 경남 통영시 명예시민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1일 통영시에 따르면 이 당선인은 2006년 8월 명예시민이 됐으며, 유 실장은 2005년 10월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이 당선인은 2005년 11월 초 서울 한강에 있던 거북선을 통영시에 기증한 것이 인연이 됐다. 당시 진의장 통영시장이 서울 한강시민공원에 방치돼 있던 거북선을 목격하고 “한산대첩과 이순신 장군의 고장인 통영에 거북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유 교수를 통해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에게 전했다. 이 당선인은 흔쾌히 승낙하고, 수리비 3억원까지 얹어 거북선을 선물했던 것. 거북선은 한국전쟁으로 55년 동안 닫혔던 한강∼서해구간을 열고 2005년 11월16일 통영항에 입항했다. 입항식에는 이 당선인이 참석,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다음해 8월 제45회 한산대첩제에 초청된 이 당선인은 고유제(告由祭)때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명예시민이 됐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유 실장은 수필집 ‘유우익의 국토기행’에서 한려수도 곳곳을 답사, 직접 찍은 사진과 유려한 글솜씨로 통영의 자연과 문화·역사를 소개했다. 특히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며 통영시 장기종합개발계획(2006∼2025년)을 직접 입안,250여개의 섬과 바다로 구성된 통영의 정체성과 발전 가능성을 바다에서 찾는 ‘바다의 땅’(The Land of Sea) 개념을 소개해 통영의 미래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통영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글로벌 시대] 세계 속의 문화세력이 되려면/마크 러셀 문화비평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산업 중에서 영화산업만큼 세계화와 깊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90년대 한국 영화산업이 창의성을 활발히 꽃피우는 데 있어 외부세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술측면과 투자측면 모두에서 한국 영화의 중요한 발전을 가져 온 사람들은 외국에서 최소한 몇년간의 교육을 받은 인재들인 경우가 많다.CJ 엔터테인먼트와 이미경 부회장,‘친구’의 곽경택 감독,‘헨젤과 그레텔’,‘괴물’의 류성희 미술감독 등이 그러한 예이다. 사실 세계 영화시장은 한국 영화산업의 발생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1920년대와 30년대 한국은 할리우드에 있어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유망한 영화시장으로 주목을 끌었다.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유나이티드 아티스츠,MGM,RKO 등 주요 영화 제작사들이 당시 한국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한국전쟁 후에도 해외 영화는 한국에서 한동안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1980년대 중반 국내 영화사들에 치명적일 것으로 여겨졌던 외국 직배사들에 대한 영화시장 개방도 많은 면에서 한국 영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에서 세계화의 교훈들은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 수출이 급격히 증가하고 박스오피스에서 한국 영화가 외국 영화보다 훨씬 더 성공적임에도 불구하고 외국 영화들은 국내산업에 대한 위협으로 비쳐지고 있고, 스크린쿼터제는 여전히 가장 민감한 이슈로 남아 있다. 심지어 한국 영화배우들은 그들의 매니저들이 영어에 친숙하지 않거나 외국에서 일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주요한 해외 영화에서 배역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곤 한다. 문제는 세계화가 언제나 쌍방향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해 버리면,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 창의성으로부터 차단당하게 된다. 한국 음악산업은 서태지 붐 이래로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10대 팝 우상들만이 끝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한국 TV드라마는 한때 아시아에서 훨씬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대안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신선함을 잃고 서서히 시청자들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어 온 영화산업은 상업적이고 진부한 내용과 단지 몇몇 혁신적인 감독들만이 남게 될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뒤지지 않는 투자 규모와 첨단기술을 겸비하고 있으나, 창의성 측면에서 의미있는 영화들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2007년 한국 영화산업이 1997년에 비해서 훨씬 더 적은 수의 재미있고, 도전적이며, 색다른 영화들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한류’가 눈부신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세계적 수준의 생산, 배급 및 관련 기술을 도입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혁명을 가져왔으며 한국을 아시아의 대표적 문화 콘텐츠국가로 만들었다. 이제는 창의성에 초점을 둔 또 다른 흐름이 분명히 요구되고 있다. 만약 한국이 미래에도 중요한 문화 세력으로 자리잡고자 한다면 몇몇의 스타 감독들로는 충분치 않다. 한국 영화 산업은 구조적으로 창의성을 영화개발 과정에 투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화제작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산업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대형 제작사들은 실험적이고 유망한, 재능이 양성되고 촉진될 수 있는 틈새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자동차, 전자 등 세계로 진출한 많은 한국 기업들은 이러한 교훈을 수년 전부터 익혀왔다. 저가의 복제품을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진정한 가치는 혁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말이다.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고자 한다면 그 제품은 세계수준의 혁신성을 보여줘야 한다. 마크 러셀 문화비평가
  • 美언론 ‘잃어버린 영화10’에 ‘아리랑’ 선정

    美언론 ‘잃어버린 영화10’에 ‘아리랑’ 선정

    일제시대 저항의 메시지를 담았던 춘사 나운규 감독의 1926년 작품 ‘아리랑’이 미국에서 ‘잃어버린 영화 TOP 10’에 선정됐다. 미국 인터넷영화잡지 ‘필름스레트닷컴’(FilmThreat.com)은 8일 ‘잃어버린 영화 중 가장 흥미로운 10편’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이트는 신년 특집으로 기획된 이 선정에서 한국영화 아리랑을 10편의 영화 중 가장 먼저 소개했다. 나운규 감독이 직접 대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아리랑은 한국영화의 기초를 닦은 흑백 무성영화로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돼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직접 본 사람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아 ‘전설의 명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필름스레트닷컴은 아리랑을 “한국 1세대 영화 중 하나”라며 “일본의 식민지 시절 권력에 저항하는 용기가 담겨있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이어 “아리랑은 한국전쟁 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의 수집가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며 “당시 많은 한국 영화들이 그렇게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이 선정에는 아리랑을 비롯해 ‘고어영화의 원조’라고 불리는 헛셀 고든루이스 감독의 ‘Black Love’(1972)와 마지막 부분이 검열에 의해 삭제되어 원본은 찾아볼 수 없게 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 등이 포함됐다. 한편 아리랑은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하고 돌아온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북측이 아리랑의 필름을 가지고 있다는 설도 있다.”고 밝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정부수립 60년] 복지·교육 대거 충원…공무원 100만명 시대 ‘눈앞’

    [정부수립 60년] 복지·교육 대거 충원…공무원 100만명 시대 ‘눈앞’

    2008년 무자(戊子)년 새해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만 60년인 해이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은 셈이다. 36년 동안 일제에 빼앗겼던 주권을 되찾고,‘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경제발전의 대장정을 거쳤다. 하지만 분단국가라는 태생적 한계 등은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며, 시각에 따라 지난 정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도 한다. 정부 수립 60주년에 대한 공정하고 냉정한 평가에 앞서, 정부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 인원 정부 수립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정부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공무원 수는 ‘100만명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행정·입법·사법부를 총망라한 전체 공무원 수는 현재 97만 3859명. 이는 1960년 23만 7476명에 비해 4.1배 늘어난 것이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총인구는 2498만 9000명에서 4845만 6000명으로 1.9배 증가했다. 다만, 정부 수립 당시를 비롯해 1960년 이전 공무원 수 통계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비교·분석이 어렵다. 우선 60∼70년대에는 경제개발을 포함한 모든 부문의 정책이 국가 주도로 이뤄지면서 정부조직과 인력이 급팽창했다. 특히 제5공화국 출범 전후인 1980·1981년 2년간 무려 12만 4343명이 신규 충원되면서 공무원 수는 1979년 54만 1552명에서 1981년 66만 5895명으로 23.0% 급증했다. 하지만 1982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정부조직 감축과 8600여명에 대한 강제퇴출이 이뤄지면서 전년에 비해 1만 8044명 감소했다. 이후 1987년 70만명,1990년 80만명,1994년 90만명을 각각 넘어서며 증가세를 유지하던 공무원 수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또 한번의 부침을 겪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1997년 93만 6009명이던 공무원 수는 2001년 86만 8120명으로 4년 동안 7.3%인 6만 7889명이 감소했다. 그러나 2002년부터 다시 증가세로 전환, 올해까지 6년간 10만 5739명이 다시 늘어났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사회복지·교육·치안 서비스가 대폭 강화돼 관련 인력이 대거 충원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무원 수는 참여정부 출범 직전인 2003년 2월 말 88만 5164명에 견줘 무려 10%인 8만 8695명 늘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조직개편은 정부 수립 60주년의 역사는 정부조직 개편과정에서도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1948년 11부·4처·3위원회로 출발한 ‘미니 정부’는 시대변화와 사회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60여차례의 조직개편을 통해 진화했다. 최초 조직개편은 1949년 보건부를 신설하면서 이뤄졌다.1954년 개헌으로 국무총리제가 폐지됐고,1955년 국토재건을 위해 부흥부를 신설하는 등 12부·3청·1위원회로 개편했다.2공화국 출범으로 행정권이 국무원으로 넘어가면서 1원·12부·1처·4청·2위원회로 분화됐다. 1961년 ‘5·16’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은 부흥부의 산업정책기능과 산업개발위원회를 묶어 경제기획원을 만들었다.1963년 출범한 3공화국은 대통령 권한 강화와 함께 경제부처를 보강해 2원·13부·4처·12청으로 정비했다.1972년 유신체제의 4공화국은 경제성장과 행정권 집중을 위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공업진흥청·동력자원부 등을 신설해 정부조직은 2원·14부·4처·14청으로 정리됐다. 5공화국은 노동청을 노동부로 승격시키고, 체육부를 신설하는 등 2원·16부·4처·13청 체제를 갖췄다.6공화국은 내무부 치안본부를 경찰청으로 개편하고, 문화공보부를 문화부와 공보처로 나눠 2원·16부·6처·15청으로 재정비했다. 문민정부는 경제기획원·재무부를 재정경제원으로, 교통부·건설부를 건설교통부로 통합했다. 대신 해양수산부·중소기업청이 생겨 2원·14부·5처·14청으로 탈바꿈했다.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 차원에서 재정경제원을 재정경제부·기획위원회·예산청으로 쪼갰다. 대신, 총무처·내무부를 행정자치부로 통합하는 등의 개편을 단행했다. 이어 여성부·국정홍보처·기획예산처·문화재청 등이 신설돼 18부·4처·16청으로 정립됐다. 2003년 출범한 참여정부는 18부·4처·17청으로, 국민정부와 비교할 때 큰 폭의 변화는 없었다. 다만 새로운 정부조직을 신설하는 대신 법제처·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 등으로 높이고 각종 위원회를 대거 양산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예산 규모는 나라살림 규모는 지난 60년 동안 6000배 가까이 팽창했다. 정부 수립 당시인 1948년 일반회계 기준 정부 예산은 모두 300억 3900만원에 불과했다. 당시 공무원이 해외출장을 가려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결재할 정도로 빠듯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일반회계 예산안은 176조 1107억 9700만원으로,60년 동안 무려 5863배 성장했다. 특히 1953년 2월 100원을 1환으로,1962년 6월 10환을 1원으로 각각 절하하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장 규모는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62년 정부 예산 740억원은 1961년 5270억환에 비해 7분의1 수준으로 떨어진 것과 같은 ‘착시 효과’를 낳고 있다. 게다가 정부가 2005년부터 적용하고 있는 일반회계·특별회계·기금을 모두 합한 ‘총지출’ 방식을 적용할 경우 예산 증가율은 더욱 높아진다. 예산에서 특별회계·기금의 비중은 정부 수립 초창기만 해도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내년도 총지출 예산 257조 3000억원에서는 31.6%를 차지하고 있다. 앞서 정부는 1950년 전시 조달을 위해 국채를 처음으로 발행했다.1953년부터는 전후복구와 경제재건을 위해 산업부흥국채를 발행했으며, 외국원조도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마땅한 세원이 없는 상황이라, 일반재정 세입에서 외국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3년 11.9%에서 1957년 52.9%까지 증가했다. 60∼70년대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더불어 정부 예산도 급팽창하기 시작했다. 정부 예산은 1975년 1조 4197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1조원 시대’를 열었다. 이어 1983년 10조 4167억원,2002년 109조 6297억원 등으로 몸집을 키워 나갔다. 올해 일반회계 예산은 152조 3038억원으로,150조원을 처음으로 돌파하기도 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정부수립 60년] 해방·분단·산업화·민주화…도전과 극복의 60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들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양대 축과 맞물려 국가를 운영해왔다. 민중혁명과 군부 쿠데타 등 진통속에서도 민주화의 여정을 꾸준히 밟았으며, 결국 문민정부가 확고히 자리잡게 됐다. 또 끊임 없는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지난 60년간 역대 정권들이 역점을 두었던 핵심정책들과,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주요 이슈들을 살펴본다. ■ 역대정부 핵심정책 이승만 정부(1948년 7월∼1960년 5월)는 한국전쟁 수행과 복구로 인해 정체를 빚다가 토지개혁을 통해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미국 원조에 의존하면서 소비재산업의 육성을 꾀했다. 박정희 정부(1963년 12월∼1979년 10월)는 3권을 총괄하는 제왕적 위치에서 강력한 행정을 폈다. 공업화·산업화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재건·단합, 농·공병진, 수출입국,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의식을 일깨우는 정책을 추진했다. 전두환 정부(1980년 10월∼1988년 2월)는 70년대 후반 심각한 노사분규, 산업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게 당면과제였다. 이에 따라 정부재정을 축소하는 등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수차례 좌절됐던 ‘독점금지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노태우 정부(1988년 2월∼1993년 2월)는 광범위한 민주화정책을 추진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16년만에 부활하고 청문회제도를 도입했다.5·16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를 되살렸으며, 개헌을 통해 표현의 권리와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전국민 의료보험, 국민연금, 최저임금제 도입 등 굵직한 사회복지정책이 이때 시작됐다. 김영삼 정부(1993년 2월∼1998년 2월)는 30여년만에 들어선 문민정부로서 사회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금융실명제를 도입, 부패 고리 차단과 과세 형평 확보에 나섰다.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부동산실명제를 단행했다. 그러나 금융개방에 대한 대응체제 미비로 IMF 구제금융이라는 미증유의 환란을 초래했다. 김대중 정부(1998년 2월∼2003년 2월)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외환위기 극복에 정책의 기조를 뒀다.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이후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동해선 연결, 금강산 관광 등 남북 화해·협력체계를 구축했다. 노무현 정부(2003년 2월∼현재)는 성장보다는 분배에 초점을 뒀다.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행정복합중심도시 및 혁신도시 건설에 나섰고, 지방분권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또 한·미 FTA를 타결해 글로벌경제체제에 본격 진입시키는 한편,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정권별 이슈 (1) 제1·2공화국 1948년 국제연합(유엔)의 감시하에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 같은해 7월20일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돼 8월15일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이 대통령은 1953년 초대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3선 당선에 성공했으나, 장기독재에 반대하는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밀려났다.1960년 윤보선 대통령이 제2공화국을 물려받았지만 이듬해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로 1년만에 정권을 내줬다.1950년 한국전쟁으로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기까지 수십만명이 숨지고 남북이 60년 넘게 분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2) 제3·4공화국 5·16쿠데타로 정권을 접수한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에 취임,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한 데 이어 74년 긴급조치를 선포했다.79년 10월26일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1970년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개통, 물류의 대동맥을 이었다.19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다.1970년 청계천 봉제공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71년에는 국가보안법이 국회를 통과했다.1965년에는 베트남전쟁 파병이 결정됐고 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했다. (3) 제5·6공화국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12·12사태로 1980년 8월 전두환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에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전두환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규정,5월18일부터 열흘동안 광주시민 6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1980년에는 언론기관 통폐합이 이뤄졌다.1980년 처음으로 컬러 텔레비전이 시판됐고 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87년 대학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6월항쟁으로 이어졌고, 대통령직선제를 선언한 노태우가 제6공화국을 물려받았다. 정부는 87년 11월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 배후에 북한공작원 김현희가 있다고 발표했다.88년 아시아에서 2번째로 열린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다.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했고 92년 중국과 수교했다. (4) 문민정부 3당 합당을 이룬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1992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30여년만에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96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임 대통령이 비리를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94년 금융실명제 실시를 통해 금융거래의 투명화를 이뤘다.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으나 이듬해인 97년 연쇄부도 사태와 외환보유고 부족 등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94년 성수대교 붕괴,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등으로 수백명이 참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5)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은 그동안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에서 탈피,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린 온화정책으로 바꿨다.2000년 남북분단 이래 첫 정상회담이 성사됐고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됐다. 그해 김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정책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5년간 846억달러에 달하는 무역흑자를 달성 IMF 구제금융기간을 7년에서 4년으로 앞당겨 성공적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했다.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됐고 한국이 4강에 올라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6) 참여정부 2004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으로 대한민국 초유의 대통령탄핵사태를 맞았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은 기각됐고, 열린우리당은 4월 총선에서 압승했다.11월 임기를 4개월여 앞두고 정부부처의 기사송고실을 3개로 통폐합하는 이른바 ‘취재지원선진화 방안’을 추진, 임기말까지 언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노진환 서울신문사 사장·박범훈 중앙대 총장 등 10명 56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자로

    노진환 서울신문사 사장·박범훈 중앙대 총장 등 10명 56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자로

    서울시는 25일 노진환(61) 서울신문사 대표이사 사장, 박범훈(59) 중앙대 총장 등 문화예술계 인사 10명을 올해 서울시 문화상 수상자로 선정해 발표했다. 언론 분야 수상자가 된 서울신문사 노 사장은 한국일보에서 33년간 기자로 활동하면서 정치부장과 주필 등을 지냈고 정치·통일·외교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지방자치 지면을 강화해 서울시정을 전국의 독자들에게 알리는 정보의 가교 역할을 했다. 중앙대 박 총장은 서양음악과 국악을 넘나들며 수백편의 음악을 작곡하고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 등에서 국악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도동환(69) (사)민족문화영상협회 회장은 40년간 40여편의 영화를 기획·제작하고, 한국영화전서를 출판하는 등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여 대중예술 분야의 수상자가 됐다. 연극 분야 수상자인 송승환(50) PMC프로덕션 대표는 1997년 한국 최초의 비언어극 ‘난타’를 제작해 24개국,206개 도시에 알리고,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해 완성도 높은 작품 제작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공연예술 산업화에 이바지했다. 이혜숙(59) 이화여대 자연대학장은 여성과학기술인력 양성, 여성과학기술 네트워크 구축 등 과학 교육과 문화 확산에 기여해 자연과학 분야 상을 받는다. 또 조각 분야의 원로작가인 김봉구(68)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명예교수는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며 한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한 점에서, 이상만(72)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은 서양음악 분야, 임화영(71) 파나관광교통㈜ 대표는 관광 분야, 강태선(58) 서울시산악연맹 회장은 체육분야, 서울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25명으로 구성된 서울무형문화재기능보존회는 문화재 분야 수상자로 각각 선정됐다. 서울시 문화상은 지난 1948년부터 한국전쟁 기간 3년을 제외하고 매년 14개 분야에서 수상자를 선정해 지난해까지 모두 55회 553명에게 시상했다. 올해는 330여개 문화예술 관련 기관, 단체, 대학, 학회 등의 추천으로 후보자를 접수하고,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공적심사를 거쳐 수상자를 뽑았다. 시상식은 26일 오전 11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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