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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웅 응칠교 편지] 어머니를 그리며

    [이기웅 응칠교 편지] 어머니를 그리며

    어머니의 기일(忌日)을 헤아리다가, 돌아가신 지가 두 해밖에 안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이젠 멀고 먼 역사 속으로 편입돼 버리신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내 일부이셨던 그분의 존재가 그리도 먼 곳에 가 계시다니! 그러나 나의 놀람은, 인생이란 오늘의 현재에 안주할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끔 안중근님과 그분의 어머니 조마리아님을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자주 조마리아님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을 이 세상에 남긴 채 조국을 향한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던진 안응칠이라고 하는 안중근의 순국(殉國) 장면을 평범한 인간의 감정으로 이해하기란 매우 힘듭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나누는 안 의사 모자의 대화와 교감은 참으로 비장합니다.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전합니다. “너는 큰일을 했다. 만인을 죽인 원수를 갚고 의(義)를 세웠는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비겁하게 항소 같은 것은 하지 말라. 깨끗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이 어미의 희망이다. 사형언도의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제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 감옥에서 도마 안중근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편지를 올려 어머니를 위로합니다.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자는 어머니께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드리지 못한 죄 용서하소서.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이 불초자를 가여이 여기지 마시옵고, 후일 영원(靈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며 또 기도하옵니다.” ‘영원의 천당’이란 심령이 은거하는 곳 또는 세속과 멀리 떨어진 은자의 집을 말합니다. 거친 현실을 떠나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보낼 이상향을 꿈꾸는, 자식된 애틋한 정이 읽힙니다. 2000년 전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 성모와 사별(死別)하는 장면 또한 애틋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모자의 정을 거론하는 일은, 종교의 틀에서 보면 온당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대속(代贖)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과 똑같은 조건으로 고난 받고 십자가 형틀 위에서 서서히 숨을 거두는 현장에서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조마리아의 심경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인간 구원이라는 주제를 어깨에 멘 채 어머니 앞에서 장엄하게 숨을 거두는 장면은, 대속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지난 6월6일 현충일이었습니다. 나는 예년처럼 동작동 현충원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나의 종형(從兄) 이기택(李起澤) 육군대위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분은 1950년 8월22일,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대구 근처 효령(孝令)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이 마음씨 좋은 형은 어린 나를 업어주고 손잡아 데리고 놀아준 정겨운 어른이었지요.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선을 향해 고향집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나는 열 살이었습니다. 6·25가 터진 지 두 달 만에 전사 통보가 선교장 그의 어머니 앞으로 날아왔답니다. 우리들은 가끔 그를 그리워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향한 애틋한 한을 안고 평생을 한숨으로 사셨습니다. 직계 자손이 없는 이 외로운 장교의 혼을 위해 분향하고 잔을 올렸습니다. 잔을 올리면서 그분과 그분의 어머님을 생각했습니다. 까마득한 기억 속의 형과 함께 내겐 인자한 할머니 같았던 백모님이 그리웠습니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예수와 안응칠과 이기택, 이 세 아들들은 공교롭게도 서른을 갓 넘긴 청년들이었습니다. 천안함에서 숨진 젊은이뿐 아니라, 젊은 자식을 보내고 남은 목숨을 사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결국엔 모두들 영원의 집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어머니란 모든 사물의 근원이 됩니다. 전부입니다. 어머니는 큰 보자기가 되어 세상의 온갖 불행과 비극을 감쌉니다. 나라의 온갖 어려움도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으로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 [16일 TV 하이라이트]

    ●환경스페셜(KBS1 오후 10시)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동요에 등장하는 겨울 철새 따오기. 논, 하천 등 물가에 서식하며 인간과 친밀한 새였다. 하지만 환경오염과 먹이 감소, 남획 등으로 그 수가 점점 줄어들어 1979년 비무장지대(DMZ) 인근에서 발견된 것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따오기들이 미래의 어느 겨울, 다시 한반도에 찾아올 수 있을까. ●추적60분(KBS2 오후 11시05분) 충남 보령의 한 마을.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주민들은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한 집 건너 한 집에서 주민들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30여 가구뿐인 이 작은 마을에서 암에 걸린 사람은 모두 19가구, 21명이나 된다. 과연 이 마을 주민들이 암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런닝, 구(MBC 오후 9시55분) 대구는 하프 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팀원들과 훈련을 시작한다. 고등학생 선수들과의 이어달리기 대결에서 대구는 두 사람 몫을 해내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대구는 가게를 내놓으려는 아버지를 말리며 다시 달리고 싶다고 말한다. 목욕탕에서 대구와 마주친 행주는 대구가 다시 달리는 것을 알게 된다. ●당돌한 여자(SBS 오전 8시40분) 규진은 자신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아기를 지우려한 순영에게 화를 내고, 순영 또한 서러움에 북받친다. 이때 홍여사가 들어와 무슨 소리냐며 자초지종을 묻는다. 순영은 규진이 아이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서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고 말하자 홍여사는 오해라며 오히려 순영을 다독거린다. ●유아독존(EBS 오후 8시) 고전 콩쥐팥쥐가 유아독존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콩쥐는 꼭 착해야 하고, 팥쥐는 꼭 심술궂어야 하나. 아이들이 직접 콩쥐와 팥쥐가 되어 마음대로 해 보는 이야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색다른 콩쥐팥쥐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들의 상상력으로 재탄생한 콩쥐팥쥐전, 원작보다 재밌는 이야기가 찾아온다. ●6·25 60주년 특집다큐(OBS 오후 10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해 세계의 예비군에 대해 알아본다. 국제 정세 속에서 여러 강대국들이 예비군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전쟁의 위험성이 없는 나라로 꼽히는 스웨덴마저 놀랍게도 예비군 제도를 적극 운영하고 있다. 또 예비군의 최강으로 꼽히는 이스라엘의 비밀병기 예비군도 살펴본다.
  • [日학자가 본 한국전쟁] “60년전 동북아 정세 지금과 판박이”

    [日학자가 본 한국전쟁] “60년전 동북아 정세 지금과 판박이”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과 관련해 일본내 진보적인 학자로 꼽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15일 “한국전쟁은 북한이 명확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남한을 침입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와다 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와 같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당초 전공은 러시아 근대사였지만 1980년대부터 북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다. 다음은 와다 교수와의 일문일답. →한국에선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해 북침설과 남침유도설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러시아연방 대통령문서보관소에 있던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간 왕래 편지가 공개됐지만 한국전쟁은 북한이 명확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남한을 침입한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스탈린과 마우쩌둥이 지지했고 이제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도 의아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북한이 남한을 갑자기 침입한 전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48년 당시 남한도 북한도 분단된 상황에서 서로를 유일한 합법 단일 국가로 생각했다. 당시 북한은 국토완정(國土完整·국토완전통일)을, 남한은 북벌통일(北伐統一)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서로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세 번 정도 스탈린에게 남침을 요청했는데 결국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원래 ‘3대 남침 불가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거절해오다 입장을 바꿨는데. -미군과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38선 유지 등 동북아시아에 대한 협정을 맺었다. 소련은 당시 미국의 파워가 너무 세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의 대립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요한 요청이 있었고, 마우쩌둥의 중국 통일이 스탈린에게는 상당한 자극이 됐다. 이런 와중에 미국 국무장관인 딘 에치슨이 1950년 1월12일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에 한국을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밝히자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침을 해도 미군이 지원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허락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한반도 주변 정세는. -한국전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참가한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규정하는 전쟁이다. 남북한은 물론 일본, 중국 등도 이후에 많이 변했지만 정치적인 상황은 60년전과 비교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아직 휴전상태로 남아 있다. 일본은 전쟁과정에서 일·미 안보조약을 맺어서 자위대가 생기고 오키나와에서는 사실상의 미군점령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과 타이완의 역할은 뭐였나. -일본과 타이완은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아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사실상 전쟁에 참여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봤다. 미군은 전쟁기간 일본 군사기지를 활용했다. 한반도로 출격한 미군 전투기들은 일본 군사기지에서 출발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전차상륙탱크(LST)들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움직였다. 미군은 또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타이완을 방어하기 위해 제7함대를 파견했다. 타이완은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지로 일본과 국교를 맺고 지위를 확립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신냉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지금 동북아 정세를 보면 남북관계 파탄과 북·미관계 정체 등 두 가지가 겹쳐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북한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을 해야 했는지 의문이 많다. 북한이 했다면 국제적 비난을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군사적 긴장상태를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정부가 유엔을 통한 북한제재에 나서고 있지만 북한이 저렇게 막무가내인 상황에선 제재를 한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 정부가 제재를 하고자 하는 심정은 알겠지만 숨을 고르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지자체 선거 결과 예상외로 여당이 패했는데. -한국 국민이 현명하게 대처한 결과다. 한국 국민은 대단한 선택을 했다. 더이상의 냉전을 원치않는다는 신호인 셈이다. 한반도에 또 한번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한국전쟁은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치른 첫번째 전쟁이다. 새로운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국제관계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도 충분히 연구할 만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국제정치나 세계구조의 관점에서 중·소 동맹의 체결은 중국을 냉전의 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한국전쟁은 중국을 그 최전방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196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두 가지 측면의 영향을 끼쳤다.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냉전의 선봉에 섰다는 점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소련과 북한이 가장 위급했던 시기에 단독으로 병력을 파견해 참전했다. 당시의 결정은 사회주의 진영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 역시 감동했다. 소련은 중·소 동맹 협상 과정에서 중국에 최대한도로 양보했다. 모스크바는 태평양으로의 출구와 부동항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갑자기 동의하고, 전쟁초기 중국의 군사행동을 막은 것은 이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중국의 참전은 소련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해 맺을 수밖에 없었던 중·소동맹을 신뢰의 기초에서 새롭게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국은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대량 경제원조를 얻어낼 수 있었고, 아울러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결과는 마오쩌둥의 혁명 정서를 더욱 고무시켜 아시아 혁명을 이끌고, 더 나아가 세계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중국이 1950~60년대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봉에 서서 그 당시 가장 혁명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한국전쟁은 또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와 증오를 심화시켰고, 이데올로기적 투쟁 과정에서 이 같은 정서는 장장 20여년이나 지속됐다. 마오쩌둥이 친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말한다면 국제관계와 국제왕래의 경험과 이해가 부족했던 데다 미국에 대한 불신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전쟁 기간중 마오쩌둥은 미국 정부의 모습을 주시했다. 미국은 타이완(臺灣)이 신중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포한 뒤 타이완 해협을 보호한다며 해군을 출동시켰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결국 통일대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3년 동안의 막대한 희생을 핑계삼아 중·미 양국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주입했다. 상대방을 추악한 모습으로 선전했다. 20여년 동안 중국인들은 모두 미국이 중국의 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국민들의 정서를 기초삼아 중국은 오랫동안 냉전의 최일선에서 전투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모두 한국전쟁 기간에 태동됐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참전한 동기는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다. 동북 공업기지 보호와 반동세력의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밖의 전쟁이 필요했던 마오쩌둥의 고민이 있다. 또 하나는 혁명 전파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과 의지다. 마오쩌둥은 미 제국주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열정에 넘쳤고, 혁명의 동력을 지속시키면서 중국의 국제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막 혁명을 완수한 중국이 처한 복잡한 환경과 조건도 빼놓을 수 없다. 타이완 문제가 대미 항전 욕구를 자극했고, 국제 분업구조하의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중국의 책임과 의무를 요구했다. 중국의 참전은 이처럼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정됐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관적 동기와 객관적 목적은 사실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세운 전략적 목표와 방침은 현실조건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중국은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그만둘 수 있었던 역사적 기회를 놓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참전의 최초 목표를 억지로라도 달성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많은 불필요한 대가를 치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세계는 평화와 안녕을 얻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미·소 대결과 자본주의·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냉전상태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국전쟁은 강대국 간,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간의 전쟁은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첫번째 전쟁이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듯 중국과 한국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 ‘콜디스트 윈터’에서 묘사한 중국 참전결정의 전야(前夜)이다. 중국 주력부대의 압록강 도하 시간은 1950년 10월19일 오후 5시30분이었으니 18일 밤 상황인지도 모른다. 진위를 떠나 핼버스탬은 마오쩌둥의 번민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중국군 개입은 한반도 내전을 순식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조선인 해방군 3만여명 北에 넘겨 본격적인 참전준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부터 치밀하게 이뤄졌음이 중국 측 자료에 의해 새롭게 드러났다. 참전이 최종 결정된 10월19일까지 넉 달 가까이 피 말리는 내부투쟁이 중국 지도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7월7일 ‘미국의 조선 무장침략 후의 정세분석과 중국의 국방 증강대책’이라는 국방군사 회의가 열렸다. 13일에는 한국에 투입될 30만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창설이 결정됐다. 가상 적국은 미국이었다. 8월4일 당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교전할 작정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전투규모가 크든 작든 혹은 원자폭탄을 사용하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결사항전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동북변방군은 출동할 때 ‘의용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며, 인민군의 깃발을 내걸고, 주요 간부의 이름도 조선인 이름으로 바꿨다. 해방군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이 주축이 된 의용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참전 초기 연합군을 무서운 속도로 밀어내며 연전연승한 것은 연합군의 실책도,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매복, 위장 등 한반도 북부 산악지형에 맞는 전술을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기 때문이었다. 30만 의용군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북진 중이던 13만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건 냉전시대 교육의 산물이다. 9월 참전 구상이 세워졌지만 시기는 계속 연기됐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 총리와 린뱌오 등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중국의 문서보관소인 당안관(?案館)자료와 내부적으로 발간된 ‘건국 이후 마오쩌둥의 문고(文矯)’ 등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혼란을 겪었다. 린뱌오는 “중국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지도 모르고, 승리 가능성이 작다.”라는 이유로 출병을 반대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도요가쿠엔대학 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의 한국전쟁’에서 10월4일과 5일 정치국 회의 참가자 중 찬성과 반대의 세력분포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찬성자는 마오쩌둥 혼자뿐이었고, 불명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펑더화이 사령관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中 독자출병 소식에 스탈린 눈물 그러나 마오쩌둥은 10월5일 정치국 회의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출병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 펑더화이를 의용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세 번이나 번복된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 이후 냉전체제가 해체돼 한국전쟁의 주역인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사이에 오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 전까지 중공군 참전과정의 진실은 서고 속에 묻혀 있었다. 김일성에게 베이징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렘린은 계속 베이징 지도자에게 미루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소식은 나흘 뒤인 10월8일에야 평양에 전해졌다. 초대 평양 대리대사를 지낸 차이청원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것 잘됐다, 잘됐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에 나와 조선 당, 인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10월1일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은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보병은 중국, 공군은 소련이 맡는다는 것이 애초 양측의 합의사항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모스크바에 보내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준비 불충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이를 ‘스탈린의 배신’이며 추후 중·소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독자출병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년 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나를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로 의심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1950년 겨울부터 이 의심은 사라졌다.”라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 장남 마오안잉(28)을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잃었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남 회령군 ‘지원군 열사능원’에 있다. 36만명에 이르는 중국군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마오쩌둥은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인민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中, 3년간 500만명 병력 투입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3년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동원됐다는 서방 측 자료도 있다. 중공군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36만 6000명이지만 비전투 사상자를 더하면 사실상 60만~9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전사자 3만 3000명과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이 됐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북한 편들기를 비판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6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일본-타이완-한국전선에 대항하고 완충지대를 갖기 위해서는 설령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의 우상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소련 위주의 북한정책이 전쟁 후 중국위주로 전환됐다. 지안롱은 “정전협정 뒤 중국과 북한 수뇌는 언제라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특수한 관계가 계속됐다.”라고 설명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고, 북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함부로 못하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인도차이나반도 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1년 타이완을 내쫓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발판이 됐다. 비록 ‘비기는 전쟁’으로 끝났지만 마오쩌둥의 도전과 모험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자신이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과 공산진영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했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joo@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625㎞ 릴레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강원도 전역에서 도민과 군 장병 등 3만여명이 참여하는 통일염원 대규모 이어달리기가 4박5일간 펼쳐진다.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사령관 정승조 대장)는 14일 원주(현충탑)를 비롯해 화천(사창리 충혼탑)과 삼척(궁촌 레일바이크 정거장), 태백(충혼탑) 등 4개 지역에서 ‘6·25전쟁 제60주년 민·관·군 625㎞ 이어달리기’ 개막식을 하고 본격 레이스에 들어갔다. 강원도와 국방홍보원이 공동 주관한 이번 행사는 도 전역에서 주민들과 육·해·공군 장병, 기관단체장 등이 참여해 DMZ와 내륙, 해안지역 등 3개 코스별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총연장 625㎞의 구간을 4박5일간 릴레이 형식으로 달린다. 조국수호(172㎞) 코스는 군 장병 위주로 화천 사창리~평화의 댐~통일전망대 간 DMZ 접경지역을 달리며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민·관·군 한마음(282㎞) 코스는 원주~홍천~춘천~인제~고성 간성 간 내륙지역을 민·관·군이 함께 달리며 우의를 다진다. 또 평화와 희망(146㎞) 코스는 삼척 원덕~고성 간성 간 동해안 길을 해군과 해경, 도내 유명 인사들이 이어 달린다. 마지막날인 18일에는 이어달리기가 끝난 뒤 통일전망대에서 호국영령 추모행사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풍선 625개를 날리고 DMZ 박물관에서 참전용사 위로행사도 마련된다. 원주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포화속으로’, 이색 ‘악플러 시사회’…반응은?

    ‘포화속으로’, 이색 ‘악플러 시사회’…반응은?

    영화 ‘포화속으로’가 개봉을 앞두고 악플러 시사회를 진행했다. ‘포화속으로’는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피카디리 극장에서 300여명의 악플러 시민들을 초청, 이색적인 악플러 시사회를 진행해 눈길을 끌었다. 이번 시사회는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대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행사로 “영화에 대한 진솔한 평가를 받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해당 시사회를 지켜본 관계자는 “당초 예상했던 연령층은 젊은 남성층이었지만 동반 1인까지 입장한 탓인지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영화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보신 분들이었지만 분위기는 편안하고 무난했다.”고 말했다. 한편 ‘포화속으로’는 6.25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실존했던 포항여중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전투에 뛰어들어야 했던 학도병 71명의 비운의 운명을 담았다. 차승원 김승우 권상우 최승현(빅뱅) 주연으로 오는 16일 개봉한다. 사진 = 태원 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이효정 기자 hyoju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13일 TV 하이라이트]

    [13일 TV 하이라이트]

    ●다큐멘터리 3일(KBS2 오후 10시25분) 서울 종로에서 혜화동을 잇는 거리 ‘대학로.’ 골목과 건물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극장이 130여개가 넘는 이곳에선 오늘도 수많은 연극과 뮤지컬이 오르내린다. 민주화의 거리로, 연극인들의 보금자리로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지어 보인 곳.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의 대학로를 발견할 수 있을까.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진품명품을 찾아 온 특별한 의뢰품. 60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편지 한 장.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부천 군수에게서 받은 위문편지라는데. 모두를 눈물 짓게 한 의뢰인의 가슴 뭉클한 사연은? 더불어 의뢰품을 통해 민간인으로 구성된 제2국민병과 전시 상황을 알아본다. ●김수로(MBC 오후 9시45분) 조방은 천군 이비가를 찾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제천금인의 목걸이를 보여주며 수로에 대한 진실을 말한다. 야철장을 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귀관과 석탈해. 석탈해의 그러한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아진의선은 하늘이 내린 대장장이로 불리던 일서라는 사람을 알려주고, 탈해는 그를 찾아 백제로 떠난다. ●연예매거진(OBS 오후 9시20분) 가수 비의 MTV 최고 액션스타상 수상, 타블로의 스탠퍼드 대학 졸업 관련 진실공방, 그리고 제4회 ‘뮤지컬 어워드’ 이하늬, 시아준수, 박건형, 오만석, 정성화 등 수상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2010년 최대 화제작 ‘포화속으로’의 출연진 권상우, 탑, 차승원, 김승우 등의 유쾌한 입담이 돋보인 시사회 현장도 찾아가본다. ●한국영화특선 <감자>(EBS 오후 10시50분) 18세 복녀는 80원에 천성적으로 게으른 20살 연상의 홀아비에게 팔려 궁핍한 집안살림을 돕는다. 염전에 나가 일을 하던 복녀는 염전감독에게 몸을 빼앗기는데 그 이후로 처세 방향을 바꾼다. 구멍가게 주인, 한약방 주인 최주부, 중국인 왕서방의 정부가 된 복녀는 어느덧 넉넉한 살림살이를 장만하게 되는데…. ●녹색충전 일요일(KBS2 오전 8시10분) 알로에 재배만 20년, 연간 수확량만 해도 700여톤. 알로에 및 가공품 매출 연간 4억원. 도전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을 가진 경남 거제의 젊은 농사꾼, 이웅일씨의 성공비법을 들어본다. 또 노화 방지는 물론, 전립선암 예방에도 좋은 효과를 주는 토마토의 새빨간 비밀을 파헤친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45분) 재앙의 현장에서 목격되는 괴생명체.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괴생명체는 대형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참사의 현장에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일본 에도시대 온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대화재가 단 한 장의 기모노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 [한국 학자가 본 한국전쟁]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명예교수

    [한국 학자가 본 한국전쟁]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명예교수

    전 세계적으로 한국전쟁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6·25가 발생한 지도 어느덧 60년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6·25와 직접 연관이 있는 옛 소련의 비밀문서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천안함 침몰사건의 원인을 조사하면서 우방국 전문가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 전문가도 초청했다. 공정하게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려는 태도때문에 국제적인 공신력을 높이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안함 사건 조사처럼 6·25도 이제 스탈린과 김일성에 관한 자료가 완전 공개돼야 한다. 그래야 천안함 사고원인 조사에서 보인 국제공조와 권위 있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이제까지 6·25에 관한 연구는 국내자료나 서방측의 자료에 의존해 왔다. 공정성이 결여돼 있다. 6·25는 공산진영의 종주국 소련과 스탈린이 직접 관련돼 무기를 지원하고, 공군과 군사고문관을 파견하여 작전을 총괄했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해방군까지 끌어들였던 것이다. 러시아연방 외무성 문서 보관소 자료와 크렘린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이들 문서가 빠짐없이 공개돼야 지금까지 한국이 주장해 왔던 북한의 남침설이 확정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와 다른 주장을 펴왔다. 그 주장이 무엇이든 한국은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리려 하지도 않고 무조건 거부해 왔다. 6·25는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지원약속이 없었다면 발발이 불가능했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러시아 측 자료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도 1994년 러시아 초대 대통령 옐친이 한국정부에 전달한 6·25 스탈린 관련문서가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많은 진실이 일반인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지 못한 채 의문으로 남아있다. 천안함 조사의 핵심이 공정성에 있다면 6·25는 역사적 진실에 있다. 진실이 올바로 밝혀지지 않거나 왜곡될 때 혼란이 야기되고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번에 6·25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을 통해 러시아 측 자료가 일반독자에게 공개되는 것은 큰 의미 있는 일이다. 광복 이후 일부 역사학자들은 민족주의 사관을 내세우면서 과거 식민지 사관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작 자신들은 일본 측이나 미국 측 사료에 의존하는 한계를 보였다. 스스로의 연구역량을 저하시켜 민족사관을 정립하지 못한 모순을 반복했다. 그러므로 이제 6·25는 물론 해방 이후 미소 냉전시기 및 남북관계와 기타 국제관계를 밝히는데도 러시아 사료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6·25 발생에 대한 책임이 북한 측에만 있다는 주장이 옳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6·25가 단순히 김일성의 요구로 스탈린이 승인을 하고 모택동의 후원약속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아닌 것이다. 멀리는 일제가 1910년 한국을 합병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하던 초기에 마침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러시아 극동지방을 무대로 한 항일애국단체와 중국 상해 및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항일애국단체들이 서로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진영으로 분열돼 투쟁하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남북을 미소가 분할해 군정을 실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진영은 서울로, 공산주의 진영은 평양으로 집결했다. 미소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울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문제를 놓고 충돌하기 시작한 뿌리가 있다. 결국 광복이 되면서 남북으로 귀국한 양대 세력이 각각 미소 군정의 비호 하에 정부를 구성하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공산주의 확장정책에 힘을 얻고 마오쩌둥이 중국 본토장악에 고무돼 미군이 한국에서 철군을 시작하자 통일의 기회로 보고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러시아 측의 자료없이는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는 물론 6·25에 대한 진실을 가려내기 어려운 까닭이다.
  • 소지섭, ‘로드 넘버 원’ 촬영 中 화상...’불꽃투혼’

    소지섭, ‘로드 넘버 원’ 촬영 中 화상...’불꽃투혼’

    배우 소지섭이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투혼을 펼쳤다. 소지섭은 오는 23일 첫 방송 될 MBC 새 수목드라마 ‘로드 넘버원’(연출 이장수, 김진민/극본 한지훈/제작 로고스필름㈜)에서 주인공 이장우 역을 맡아 열연 중 이다. 특히 소지섭은 극중 이장우가 남다른 재능을 가진 군인이라는 점에서 다른 배우들보다 훨씬 강도 높은 액션 연기를 소화해냈다. 소지섭은 몸소 진흙탕과 흙더미에서 구르는 것은 물론 영하의 날씨에서 쏟아지는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아야하는 힘겨운 촬영도 이겨냈다. 특히 파편이 튀는 전투 장면을 촬영하던 도중 넘어지고 찢어지는 등 부상을 입었는가 하면,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는 촬영을 하다 얼굴에 미세한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고충 속에서도 소지섭은 배우로서 특유의 근성을 드러내며 완벽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솔선수범해서 진흙탕에 몸을 던지는가 하면, 폭염 속에 뛰어드는 등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현장 스태프들의 찬사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소지섭 소속사 51K 측은 “‘로드 넘버원‘이 6.25 전쟁의 처절한 상황을 배경으로,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릴 예정인 만큼 소지섭 역시 전쟁을 직접 겪는 것처럼 혹독한 촬영을 경험하고 있다”며 “소지섭이 워낙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배우이다 보니, 작품을 위해서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는 것도 아랑곳없이 몸을 던지는 연기를 불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지섭이 맡은 이장우는 빈농 태생의 하사관 출신 장교로 순수하지만 고집 있고 강한 남자. 전쟁영웅으로 거듭난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로맨티스트다. 한편 130억의 제작비가 투입된 ‘로드 넘버원‘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뜨거운 우정을 그린 휴먼멜로 드라마. 소지섭을 비롯해 김하늘, 윤계상, 최민수, 손창민 등이 호흡을 맞춘다. 사진 = MBC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학설이 ‘남침설’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옛 소련이 자국의 팽창주의에 따라 북한을 부추겨 남한의 무력통일을 획책했다는 주장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학설이 ‘북침설’이다. 미국이 한국을 조종해 북으로 쳐들어갔다는 주장이다. 중간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 ‘남침유도설’이다. 대체로 북한의 북침설을 옹호하는 수정주의적 사관이다. 냉전해체 이후 공개된 러시아문서는 분분한 학설을 일거에 정리하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의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주고받은 대화록과 편지가 담긴 극비문서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제 서방세계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와 일반인들에게도 북한의 남침설은 다시 뒤집히기 어려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는 누구일까. 전쟁의 주체는 남침설과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 어느 학설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침설은 스탈린의 김일성 사주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모설, 마오쩌둥 주도설 등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은 대체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전쟁발발의 공동주체로 본다. 김일성은 괴뢰로 취급해 평가절하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국내적 요인보다,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요인에서 찾은 결론이다. ●스탈린·마오쩌둥 한국전 공동주체 북침설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전쟁의 주동자로 본다. ‘김일성 저작집’ 제6권을 보면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 노동당 정치위원회와 내각 합동 비상회의를 소집해 “리승만 도당의 괴뢰군들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미 38선 이북지역으로 1~2km 침공하였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지금은 북한주민들만 그렇게 믿는다. 중국군이 펴낸 책자에는 ‘1950년 6월25일 새벽, 38도 선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소규모 무장충돌과 마찰이 마침내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내전으로 전면적으로 폭발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초기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으며, 미군 등 유엔군 참전과 중국의 개입 이후를 ‘국제전쟁’이라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한때 수정주의 이론이 득세했다. 스톤의 ‘한국전쟁 비사’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1945년 해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이데올로기로 나뉜 불완전한 해방의 연장 선상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탈린의 옆에서 전쟁결정 과정을 지켜봤던 후루시초프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라고 밝혔지만, CIA 공작설을 거론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수정주의 이론은 러시아문서가 비밀에서 해제돼 세상에 공개되자 설득력을 잃었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커밍스는 자신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각본을 썼고, 스탈린이 연출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저돌적인 전쟁공세에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밑질 것이 없다고 여겼다. 전쟁을 승인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군사고문단을 보내 전쟁준비부터 휴전까지 직접 챙겼다. 1953년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휴전협정 조인은 더 미뤄졌을 것이고 꽃다운 생명의 희생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김일성은 꼭두각시”… 평가절하 러시아 극비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에서 마오쩌둥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절하된 감이 있다. 갑자기 압록강 국경을 넘어 나타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해 연합군이 압록강에서 38선 이남까지 밀려난 정도로밖에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김일성이 전쟁발발을 선창했다면, 스탈린은 총연출을 맡았다. 주역은 사실상 마오쩌둥과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측면에서 조종했고, 참전을 선택했고, 치렀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 압록강 국경까지 진군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을 주도한 것은 중공군이었고, 휴전협정의 관장자도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의 당당한 주연배우로 등장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이 38선 분할통치에 합의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군이 동원되면 미군을 끌어들이는 구실이 된다고 봤다. 하지만 중국해방군은 예외라고 판단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참전을 이끌어낸 김일성의 역할도 무시할 순 없다. 주지안룽 동양학원대학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김일성은 온 힘을 기울여 소국의 지혜로 대국의 지도자를 움직이게 하는 일류의 연기를 펼쳤다.”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말과 중국말에 능했던 김일성은 양국 수뇌와 외교관 사이를 오가면서 스탈린에게는 ‘마오쩌둥 카드’를 내밀고, 마오쩌둥에게는 ‘스탈린 카드’로 말을 바꾸는 절묘한 ‘양다리 외교’를 펼쳤다. “마오쩌둥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며, 통일은 군사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전쟁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분명히 김일성이었다. 다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1950년 10월 19일 이전까지 전쟁을 총지휘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북한의 군비 요청 사항 중 90% 이상을 지원했다. 1950년 6월15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6월25일 새벽에 진격한다. 조선인민군이 옹진반도를 공격하고 서쪽 연안으로 총공격을 가한다. 적 주력부대는 서울 근방에서 괴멸되고 서울과 춘천, 강릉이 동시 점령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남한은 해방될 것이다.’라고 크렘린에 보고했다.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개시일과 전황이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실제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됐고, 8월20일쯤에는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남한영토의 90% 이상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인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서울의 총사령부에 상주토록 조치했다. ●기고만장해진 北, 中 홀대 스탈린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8월25일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해방투쟁에 찬사를 바친다. 미군개입으로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지원할 맹우들이 곁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종사를 지원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 김일성은 용기백배해 다음날 노동당 정치위원회를 소집했다. 북한지도부는 ‘친애하는 동지 스탈린의 아버지와 같은 심려와 지원이 조선인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공식 회답문을 채택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9월21일 ‘소련군 제147사단 84전투기연대 소속 전투기 야크-9형 40기의 파견을 모스크바에 요청했고 승인받았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소련 조종사가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군에게 숨길 수는 없다. 공중전에서 행해지는 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뤄지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에 불과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으로 보였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인 성공은 전쟁의 흐름을 180도 바꿔 놓았다. 인민군과 소련군사고문단은 이 작전의 의미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중국은 서방 측 보도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상륙작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잘못을 문책해 스티코프 대사를 경질했다. 인민군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과 박헌영은 9월29일 ‘적이 38선을 넘을 때 대비해 소련 측의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부탁한다.’라며 보병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스탈린은 응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은 중국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스탈린은 10월13일 ‘중국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고 부대 및 병기를 대피할 필요가 있다.’라는 절망의 통첩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 지도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라는 사실이 러시아 비밀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미국이 한국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울 태세를 갖춘다는 게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이 정말 염려했던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분쟁에 개입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미군의 전투력이 일본군 이하이므로 우리가 이긴다.”라는 발언을 했다. 일본에 대한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美·中·소련 관심대상은 日 스탈린은 패색이 짙어진 10월8일자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에서 일본을 막으려면 중국의 참전이 필요한 논리를 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를 보면 군국주의 세력이 부활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을 원조할 수 없다. 중국이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의 동맹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되살아나는 미래보다 지금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이승만 치하의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대륙에 대한 전진기지가 될 수년 후보다 지금이 유리하다.’라고 썼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까지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점령국 일본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판단오류 중 하나였던 ‘중국 불개입론’은 그의 신념이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위대한 장군’ 맥아더는 불명예스럽게도 전쟁 기간에 파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중공군의 개입시기를 앞당겼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한국戰 참전용사 희생에 예술로 보답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유엔 참전국과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유엔 참전 16개국 순회공연이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케네디센터에서 대장정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케네디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공연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가족, 주요국 외교사절, 미 의회 주요 인사 등을 초청해 2시간 동안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부채춤과 북춤, 장구춤, 가야금병창, 농악, 궁중무 등 한국의 전통춤과 노래를 선사했다. 한국전 참전용사로 공연 시작에 앞서 축사를 한 새뮤얼 존슨(텍사스·공화) 연방 하원의원은 “리틀엔젤스의 공연을 과거에도 인상 깊게 봤지만 이번 공연은 남다른 기대를 갖게 한다.”면서 “리틀엔젤스의 감사 공연은 참전용사들에게 대단한 영예와 자부심을 갖게 하는 행사”라고 말했다. 메릴랜드주 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인 빈센트 크렙스는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가 싸운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행사를 마련한 한국 측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공연을 기획한 ‘유엔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의 박보희 추진위원장은 공연이 끝난 뒤 참전용사 8명에게 감사 메달을 증정했다. 리틀엔젤스는 12일까지 참전용사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4차례 공연을 가진 뒤 뉴욕과 애틀랜타 공연에 이어 캐나다와 콜롬비아 등을 순회한다. 이어 8월부터는 태국·필리핀·호주·뉴질랜드, 12월부터는 유럽 7개국 및 아프리카 등을 돌며 한국전에 참전했던 16개국에서 감사 공연을 이어간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빅뱅-2NE1, 탑 응원차 극장 ‘동반 나들이’

    빅뱅-2NE1, 탑 응원차 극장 ‘동반 나들이’

    국내 무대 컴백을 준비하고 있는 빅뱅과 걸그룹 2NE1(투애니원)이 영화 ‘포화속으로’ 시사회를 통해 반가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0일 같은 소속사 식구인 빅뱅과 2NE1은 빅뱅의 멤버 탑(T.O.P)의 첫 스크린 데뷔작인 영화 ‘포화속으로’ 시사회에 나란히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상영관에 먼저 들어선 빅뱅의 절친멤버 태양과 G드래곤은 시사회 현장에서 이뤄진 ETN ‘연예스테이션’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는 대박이다.”라며 동료 최승현을 응원했다. 또 지난 2009년 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로 먼저 스크린에 데뷔한 바 있는 승리도 뒤이어 등장했다. 나머지 멤버들과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영화를 감상한 그는 오랜만의 외출에 주위의 시선이 의식되는 듯 셔츠의 깃을 폈다가 접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런가하면 최근 자신의 미투데이를 통해 ‘상추다이어트’에 성공한 모습을 깜짝공개한 2NE1의 박봄은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웨이브 머리에 톤다운 된 브라운계열의 투피스로 멋을 내 시선을 끌었다. 시사회를 통해 이들의 모습이 공개된 이후 온라인 공간은 두 그룹의 컴백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과 기대로 들끓었다. 네티즌들은 온라인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인형 같은 박봄, 무대에서 빨리 보고 싶다.”, “지용이는 뭘 입어도 패셔니스타.”, “쿨한 태양, 포스가 여전하다.”, “모두 그립다.” 등의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한편 영화 ‘포화속으로’는 한국전쟁 당시 교복을 입고 북한군과 맞선 학도병 71명의 전투실화를 그린 작품으로 오는 16일 개봉될 예정이다. 사진 = 네이트판, ETN ‘연예스테이션’방송캡처 서울신문NTN 김수연 인턴기자 newsyouth@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국전쟁 明著] 백선엽 ‘군과 나’

    유월이 오면 얼굴에 생기가 도는 아흔 살의 노병이 있다. 전국 방방곡곡 군부대, 학교, 단체 등을 누비며 열변을 토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4성 장군이자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예비역 장군이다. 백 장군이 펴낸 한국전쟁 회고록 ‘군과 나’(시대정신)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군과 나’는 매년 유월이면 팔려나가는 책이다. 10년 주기로 언론에 회자되는 책이다. 이 책의 출발점은 한국전쟁 발발 40주년을 앞둔 1989년이었다. 한 일간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묶어 단행본으로 펴냈다. 10년이 흐른 1999년 재출간했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책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개정판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한 해 앞둔 지난해 만들어졌다. 한국전쟁에 대해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학생들에게 알릴 만한 책을 찾던 행정가의 권유에 의해서다. 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국전쟁의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백 장군은 1950년 6월 25일 그날부터 휴전까지 ‘3년 1개월 2일 17시간’을 꼬박 전선에서 보냈다. 그래서 그의 서술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누구의 기록보다 살아 숨 쉰다. 장군은 “나라가 북한의 침공으로 부산 앞바다까지 밀려 떨어질지도 모르는 존망의 위기와 압록강까지 국군이 진격하여 통일의 꿈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순간까지 전투의 최전선을 온몸으로 체험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가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36.9%가 한국전쟁 발발연도를 모른다고 답했다. 이 중 20대가 56.6%로 가장 많았다. 30대 28.7%, 40대도 23%에 달했다. 2008년 시민단체가 서울시내 초·중·고교 학생 1955명에게 물어보니 초등학생 778명 중 35%가 ‘한국전쟁을 일으킨 건 남한’이라고 답했다. 답답한 일이다. 역사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방증한다. 발발 6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백 장군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의미는 각별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가는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과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장군이 노구를 이끌고 젊은이들에게 강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장군은 “아직도 많은 국민이 한국전쟁과 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고 끝날 때까지 비교적 한국전쟁 전체를 조감할 수 있었던 나의 경험이 당시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과 에너지를 총동원했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토록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술회했다. 젊은 군인과 청소년들에게 ‘군과 나’는 한국전쟁 교과서가 될 만 하다. 전쟁에 참가한 126만 9000여명의 국군 중 현재 살아 있는 노병은 24만여 명에 불과하다. 대부분 80살이 넘은 고령이다. “나의 회고는 승리의 기록이라기보다 전쟁의 기록”이라는 백 장군의 지적에 동의하는 까닭이다. ‘군과 나’는 한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인정받는다.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과 연구. 책은 숱하다. 그러나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이해관계를 가진 다른 나라에서 더 활발하게 이뤄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군과 나’는 한국전쟁의 의미에 대해 우리 스스로 기록한 가치 있는 기록서라 할 수 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은 “미국의 참전에 관한 기록은 많지만, 대한민국의 처지에서 이 전쟁을 쓴 기록은 별로 없었다. 백선엽 장군의 책은 그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준다.”라고 말했다. 백 장군은 전후 세대에게 육성으로 말한다. “나라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어린 학생들이나 젊은 세대들이 한반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생생한 기록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봄으로써 잘못 알고 있던 6·25전쟁을 바로 알게 되고 동시에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라고. ‘군과 나’는 생생한 기록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한국전쟁을 후세에 전달하고 있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괴산 산막이 길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괴산 산막이 길

    충북 괴산과 충주를 적시는 달천은 오누이의 애틋한 전설에 따라 달래강, 물맛이 달다고 해 감천, 수달이 많이 산다고 수달내 등으로 불린다. 괴산 칠성면 달천 중류에는 수려한 군자산(948m)이 병풍처럼 두른 산막이 마을이 있다. 그곳 오지마을로 들어가는 아슬아슬한 벼랑길이 최근에 ‘산막이길’로 말끔하게 단장됐다. ●괴산댐에 잠긴 연하구곡 산막이 마을이 있는 칠성면 사은리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유배지였을 만큼 멀고 외진 곳이었다. 깎아지른 바위벼랑에 이는 물안개와 노을이 아름다워 조선 후기 노성도 선비는 이곳에 구곡을 정하고 연하구곡가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연하구곡은 1957년 완공된 괴산댐에 대부분 잠기고 만다. 1곡인 탑바위와 9곡인 병풍바위 등 일부만 물 위로 나왔는데, 그나마 배를 타야 찾을 수 있어 그야말로 전설 속의 절경이 되었다. 그래서 산막이길은 사라진 연하구곡을 상상하는 길이기도 하다. 산막이길 들머리는 외사리 괴산댐(칠성댐).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착공, 1957년 완공된 괴산댐은 우리 기술로 세워진 첫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괴산댐에서 이정표를 따라 15분쯤 걸어 오르면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산막이길이 시작된다. 작은 언덕에 올라서면 비학동 마을에서 운영하는 주막이 나온다. 주막 앞의 수려한 군자산과 풍성한 녹음을 담은 괴산호가 예사롭지 않다. 코를 찌르는 부침개와 막걸리 냄새를 짐짓 모른 체하고, 서둘러 길을 나서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고인돌 쉼터가 나온다. 큰 바위 생김새가 고인돌을 닮았지만 진짜는 아니다. 이곳은 강변 조망이 좋아 예전 사오랑 서당에서 더울 때에 야외수업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쉼터 앞에는 참나무 연리지가 있다. 나란히 앉아 강변을 바라보던 두 나무가 어느새 한몸이 된 것이다. 같은 곳을 오래 바라보면 몸과 마음이 통하는 모양이다. ●출렁다리와 앉은뱅이 약수 이어진 울창한 솔숲에는 출렁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약 100m쯤 이어진 출렁다리에 오르면 말 그대로 몸이 출렁출렁. ‘흔들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지만,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일부러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지른다. 잠시 동심의 세계를 즐기다 내려와 호젓한 강변길을 따르면 연화담. 연화담 앞의 전망대로 내려서면 괴산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물속에 연하구곡과 옛 산막이 마을이 잠겨 있지만, 호수는 짙은 녹음만 뿜어내며 아무 말이 없다. 연화담을 지나면 앉은뱅이가 물을 마시고 벌떡 일어났다는 앉은뱅이약수다. 참나무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졸졸 약수가 나온다. 물맛은 나무 수액이 섞여 그런지 아주 달콤하다. 하지만 수액을 내보내야 할 나무 입장에서는 통탄할 노릇일 게다. 좀 과하다 싶다. 앉은뱅이 약수 위에 산막이길의 명물인 스릴 데크가 자리 잡고 있다. 스릴 데크는 강 쪽으로 길게 돌출한 지점으로 바닥에 유리를 깔아 짜릿한 고도감이 느껴진다. 나무 계단이 40개라 해서 ‘마흔 계단’과 ‘돌 굴러가유’ 간판을 지나면 진달래 동산. 여기가 복원된 길의 종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서 발길을 돌리지만, 좀 더 들어가면 산막이 선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배를 타면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선착장을 지나면 세 가구가 사는 산막이 마을이다. “그때가 좋았지. 예전엔 물이 얕아 징검다리 건너 마을 드나들었어. 서른다섯 가구쯤 살았던 제법 큰 마을이었지. 댐이 생기며 일부는 잠기고 또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등졌어. 지금은 세 가구에 다섯 명이 전부야.” ●소재 노수신과 후손 노성도 산막이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앞 평상에서 만난 변강식 할아버지는 이야기 내내 호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괴산댐이 생기면서 마을로 드나드는 길이 없어지자 벼랑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생겼는데, 그것이 지금의 산막이길이다. 마을을 지나면 소재 노수신(1515~1590)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 나온다. 노수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을사사화에 휘말려 오랜 세월 유배당했고, 훗날에는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연하구곡을 노수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이곳을 관리하러 온 10대손 노성도(1819~1893)였다는 점이다. 그는 조상의 유배지를 관리하러 왔다가 수려한 풍광에 홀딱 빠져 “이곳 연하동은 가히 신선의 별장”이라고 노래했다. 산막이길은 노수신 적소를 끝으로 돌아서야 한다. 산막이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걸어왔던 산막이길을 바라보며 돌아가는 길. 군자산이 호수까지 내려와 떠나는 길손을 배웅한다. 글·사진 진우석 여행전문작가 mtswamp@naver.com ●산길 가이드 괴산군에서 만든 산막이길은 잘 꾸며졌지만, 그 안에 담긴 서정과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해 아쉽다. 보통 사람들은 진달래 동산까지 다녀오지만, 산막이 마을을 지나 노수신 적소까지 둘러보는 것이 좋다. 주차장에서 노수신 적소까지 약 3㎞ 1시간20분, 왕복으로 3시간이면 넉넉하다. 산막이 선착장에서 주차장 근처의 비학동마을 선착장까지 다니는 배는 사람이 많을 때만 운영한다. 어른 5000원, 아이 3000원. 변태식 선장 010-3485-8751. ●가는 길과 맛집 괴산이 기점이다. 괴산 시내버스터미널에서 괴산댐(수력발전소) 외사동행 버스가 06:30 07:50 11:10 12:30 14:00 15:10 17:10 17:50에 다닌다. 수력발전소 앞에서 내려 20분쯤 걸어 올라야 산막이길 주차장이 나온다. 괴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주차장까지 택시요금은 1만원선. 주차장 위 언덕에 자리 잡은 주막에서 잔치국수, 부침개, 도토리묵과 더불어 막걸리 한 잔 곁들이며 산책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다. (043)832-5279.
  • 新내조의 여왕 손태영, 이기적인 각선미 뽐내

    新내조의 여왕 손태영, 이기적인 각선미 뽐내

    지난 8일 저녁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영화 ‘포화속으로’VIP시사회가 진행됐다. 이날 시사회에는 배우 김남주, 정우성, 정준호, 유인나, 조진웅, 김선아, 손태영, 오만석, 수애, 이지아, 가수 김태우 등이 참석했는데 그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스타는 역시 내조의 여왕 손태영.결혼 3년 차에 접어든 손태영은 평소 여성스러운 페미닌룩을 자주 선보였지만 이날은 화이트와 그레이컬러의 레이어드 된 티셔츠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했으며 아찔한 화이트 숏팬츠로 ‘아이엄마’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모델 같은 몸매를 뽐내며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그녀의 이기적인 각선미를 유난히 돋보이게 했던 아이템은 이번 시즌의 잇 아이템인 블랙 스트랩 슈즈와 숏부츠 스타일의 슈즈 액세서리 카프리스(Caprice).부드럽게 발목을 감싸주는 레더 숏부츠 스타일의 슈즈 액세서리 카프리스는 슈즈 액세서리 브랜드 데코리의 제품으로, 전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셔링 디테일이 눈길을 끄는 아이템이다.매우 부드러운 가죽을 사용해 마치 패브릭 소재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자연스러운 드레이프를 표현해 내었으며, 이는 기존 가죽 소재에서 보기 힘든 유연한 여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특히 이번 시즌 트렌드인 숏 팬츠와 스타일링해 스타일리시한 캐주얼 룩을 연출 할 수 있는 카프리스는 스트랩 힐과 함께 매치해 올 S/S 베스트 아이템으로 꼽히고 있다. 컬러는 블랙과 퍼플, 바닐라 3가지로 제안되며 갤러리아 백화점 WEST 2층 “스티븐 알란” 편집숍에서 만나 볼 수 있다.한편 손태영의 남편인 권상우 주연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기획된 전쟁 실화 ‘포화속으로’는 오는 17일 개봉될 예정이다. 사진 = DEC서울신문NTN 채현주 기자 chj@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켜 한민족의 분단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민족의 통일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출판물과 영화로 신세대에 전해지고 있다. 전쟁이 발생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폭발 가능성이 큰 곳이다. 불안정한 휴전하에서 남북한은 준전시 상태로 유지됐다. 금방이라도 군사적 충돌이 재현될 것 같았지만 위기를 극복했다. 그동안 남한에서는 경제발전이 우선, 군사문제는 이차적인 순위로 밀려났고, 북한은 선군 정치로 일관해 왔다. 지난 세기 러시아도 소비에트시대의 군사적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러시아사람들 사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잊혀져 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파견됐던 옛 소련 공군 출신과 한반도의 현황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려고 하는 학자들만이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서방세계의 정보를 자유롭게 얻는 러시아 신세대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돌발적인 남침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그 전쟁에서 승리해 공산주의 체제를 한반도의 남쪽까지 확산시키고 미국을 중국과의 군사대결에 끌어넣는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스탈린이 직접 주도해 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부분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국전쟁은 외부적인 영향보다도 내부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필자는 더 나아가서 제1차 대전의 마지막 단계에 일어난 제정 러시아 붕괴의 결말이었던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에 벌어진 내전과 제3차 전쟁의 서곡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남북한 간 동족상잔의 유혈전쟁, 그 두 전쟁 사이에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은 러시아에서 적색테러와 백색테러, 한국의 공산테러와 반공테러 등은 우리 양국에서 시민적 자유와 민주사회의 형성과정을 수십 년 거꾸로 돌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유사성이 또 하나 있다.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가 남긴 폐허 위에서 일어나 20년 만에 세계 역사상 가장 유혈적인 제2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세기에 걸쳐 미국과의 군사 정치적 세력균형을 유지해온 강대국으로 변했다. 전후 한국에서도 같은 능력을 볼 수 있다. 3년 동안의 한국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전 국토가 폐허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민간인의 피해는 여러 통계에 의하면 150만명 내지 400만명에 달해 제일 컸다. 제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인구손실과 대비할 수 있다. 남북한은 경제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았다. 남한의 경제적 피해 규모는 30억달러로 평가되었으며 북한은 4200억원이었다. 북한의 피해는 남한보다 훨씬 더 컸다. 왜냐하면 2년 동안 미 공군의 공습으로 북한의 경제기반이 깡그리 파괴됐기 때문이다. 남한은 전쟁의 피해에도 단 한 세대 만에 아시아 국가 중에 일본에 버금가는 산업대국이라는 지위와 세계 12대 경제 강대국 대열에 드는 국가로 성장했다. 북한의 발전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보존과 생존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핵클럽에 사실상 가입을 선언한 상태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과 동시에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러시아와 수교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한반도에는 1950년 전쟁 직전의 긴장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은 무력으로 할 수 없다는 교훈을 한국사람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동안 힘의 배분이 변화되어 북한과 남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예전과 비교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60년 전에 무력통일을 실패한 대가로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치러야 했다면 오늘날은 휴전선 쌍방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포함한 군비의 축적규모를 살필 때 어떤 전쟁 시나리오도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면 아예 한민족의 존재 여부 자체가 의심스럽게 될 확률이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극동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정체성 고민하는 한인에 희망 주었으면…”

    “정체성 고민하는 한인에 희망 주었으면…”

    재미 사업가가 재외동포의 정체성 연구를 위해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에 설립되는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에 25만달러(약 3억 1000만원)를 기부했다. ●LA서 액세서리 업체 운영 로스앤젤레스(LA)에서 액세서리업체 ‘코스타’를 운영하는 김주연(54)씨는 7일(현지시간) LA 한인타운 내 한식당에서 이 학교 이비 톨 문리대 부학장과 홍명기 김영옥연구소 이사장에게 기부금을 전달했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김영옥 대령이 남겨주신 정신적 유산을 확대하고 계승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저의 정성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뭔가 뜻 깊은 일을 하고 싶은 차에 김영옥연구소 설립 취지를 듣고 지난해 연구소 이사로 참여하게 됐다.”면서 “이 연구소가 이민생활 중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많은 한인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2차대전 영웅 故 김영옥대령 LA 태생인 고(故) 김영옥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이탈리아 상륙작전과 프랑스 전투 일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 대령은 제대한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아버지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면서 다시 입대해 미군 사상 최초의 유색인 야전대대장으로 맹활약했다. 글 사진 로스앤젤레스 연합뉴스
  • ‘포화속으로’ VIP시사회에 ★가 떴다

    ‘포화속으로’ VIP시사회에 ★가 떴다

    영화 ‘포화속으로’의 VIP 시사회가 많은 스타급 연예인들의 참석으로 성황을 이뤘다.지난 8일 오후 롯데시네마 서울 건대점에서 열린 ‘포화속으로’ VIP 시사회에는 장동건, 정우성, 수애 등 동료 배우들은 물론 가수 윤도현과 보아, 방송인 김제동도 얼굴을 비췄다.특히 이날 시사회에는 배우 김남주와 손태영이 각자의 남편 김승우, 권상우 응원 차 자리를 빛냈으며 최승현(T.O.P)의 팀 동료인 그룹 빅뱅과 소속사 식구 투애니원(2NE1)도 함께 착석해 눈길을 끌었다.이 밖에 이준익, 강제규, 김용화, 윤제균 등 영화감독들도 대거 응원 메시지를 전해 ‘포화속으로’의 흥행에 힘을 실었다.한편 ‘포화속으로’는 한국전쟁 당시 교복을 입고 북한군과 맞선 학도병 71명의 슬프고도 위대한 전투실화를 담아낸 작품으로 전국 시사회를 거쳐 오는 16일 개봉될 예정이다.사진 = (주)롯데엔터테인먼트, (주)태원엔터테인먼트서울신문NTN 장기영 기자 reporterja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1994년 6월2일. 당시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검은 서류상자 하나를 건넸다. 흔히 ‘옐친 문서’라고 불리는 이 서류는 1949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옛 소련과 중국, 북한 간에 오고 간 극비자료였다. 모두 230여건, A4용지 800쪽 분량의 자료 속에는 김일성의 선제타격작전계획과 스탈린의 3단계 작전지침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쟁개입 과정 등이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이 자료가 공개되면서 김일성과 좌익진영에서 주장해 오던 ‘북침설’은 소설이 됐다.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옐친 문서 공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까지는 미국, 일본 등 서방 측 자료에 일방적으로 의지한 탓에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전쟁발발자인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주고받은 극비문서에 대한 분석 없이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연구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조선이 첫 수교를 맺은 1884년부터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강탈당한 1905년까지 두 나라는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우리 근세사에서 10년 넘게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같은 역할을 누렸다. 제국주의 열강 앞에 촛불처럼 흔들렸던 한반도의 정세와 이권약탈사가 러시아 비밀문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이전까지, 휴전 이후 1980년까지 남북한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모든 공개, 비공개 외교문서가 포함돼 있다. 러시아라는 거울을 통해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남북 분단 시기의 내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에는 20여개의 국립 문서보관소가 있다. 러시아 외무성 산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와 혁명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문서를 보존하고 있는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문서보관소가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와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에는 부지기수의 한반도관련 문서가 소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 크렘린 러시아연방 대통령 문서보관소는 한국전쟁관련 문서의 보물창고이다. 전쟁준비 단계에서 휴전협정이 이뤄진 1949년부터 1953년까지의 극비문서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가에 꽂혀 있다. 일반적으로 문서보관소의 출입증을 받으려면 소속 학교나 연구소에서 작성한 출입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연구할 제목을 비롯해 인적사항을 적은 신청서를 내고 나서 출입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연락이 오면 가서 문서목록 속에서 필요한 문서를 찾은 뒤 신청하게 된다. 외무성 연방문서보관소는 허가절차가 까다롭다. 3개월 만에 허가가 나오기도 해서 연구자들로부터 원성이 높다. 특히 한국전쟁 사료가 있는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는 일반 연구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특별허가를 받은 문서보관소 관계자의 협조를 얻어야 자료접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서보관소의 여러 부서에서 문서를 각각 접수하고 있고, 또 문서의 성격에 따라 담당자와 정리자가 달라 문서의 날짜가 다르거나 잘못된 사례도 허다하다. 옛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문서 보관소는 여전히 금역이다.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 센터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러시아연방 외무성 대한정책 자료1,2’(도서출판 선인)도 이 같은 발품의 산물이다. 러시아 내 한국사료 발굴의 권위자인 박 교수는 지난 16년 동안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니면서 관계 문서를 찾아 번역하고 자료집으로 정리했다. 박 교수는 “한·러 관계사의 1차 사료인 러시아 대한정책 자료가 한국전쟁 등 한·러 관계사 연구에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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