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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클라리넷 소녀’ 찾았다

    한국전쟁 ‘클라리넷 소녀’ 찾았다

    제주국제관악제조직위원회는 1952년 7월 한국전쟁 당시 제주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던 ‘클라리넷 소녀’를 58년만에 찾았다고 28일 밝혔다. 조직위는 전쟁고아인 이 소녀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악기를 부는 모습(왼쪽)이 한국관악사 등에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지난 8월 클라리넷 소녀를 찾기 위해 전국에 수소문했다. 주인공은 서울 성북구에 살고 있는 유인자(오른쪽·69)씨. 당시 9세였던 유씨는 서울 주자동 집이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자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면서 혼자 인천으로 정신없이 내려갔다. 유씨는 ‘전쟁고아’라며 군용기로 제주도까지 옮겨졌고 한국전쟁 기간에 전쟁고아들을 수용한 한국보육원에 들어갔다. 관악대가 있던 이곳에서 유씨는 클라리넷을 처음 잡았다. 그해 여름 유씨는 제주도를 방문한 이 대통령 내외 앞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유씨는 “대통령이 미국 민요인 ‘매기의 추억’을 좋아하신다고 그 곡을 연주했다.”면서 “이 대통령은 나보고 ‘귀엽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다시 한번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보육원의 배려로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 유씨는 24살 때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제주국제관악제조직위 이상철 상임부위원장은 “내년 제주국제관악제에 유씨를 초대해 58년 전의 클라리넷 선율을 다시 듣고 싶다.”고 밝혔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中 “시진핑 한국전 발언은 정론”

    한국전쟁이 한국과 미국의 침략에서 시작된 듯한 뉘앙스를 담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의 발언 파장이 만만치 않다. 한국과 미국의 반박에 이번에는 중국 정부가 시 부주석을 옹호하고 나섰다. 논란이 식지 않을 전망이다. 중국 외교부 마자오쉬(馬朝旭) 대변인은 28일 정례브리핑에서 “시 부주석이 항미원조(抗美援朝·한국전쟁의 중국명)전쟁 참전 60주년 좌담회에서 중국 정부를 대표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면서 “중국은 당시 역사 문제에 대해 일찍이 정해진 정론(定論)이 있다.”고 말했다. 시 부주석의 발언이 중국의 정론이라는 얘기다. 시 부주석은 지난 25일 참전 노병들과의 좌담회에서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며 참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항미원조 전쟁에 대한 중국 측의 공식 입장은 ‘1950년 10월, 조국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맞서 지원군을 보내 조국과 사회주의 진영을 지켜낸 전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집중공세를 시작한 1950년 10월 이후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결국 시 부주석의 발언도 한국전 발발이 아닌 중국 군 참전의 배경을 설명하다 나온 것이라는 얘기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관영 신화통신도 지난 27일 ‘조선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논리를 담은 5년 전 글을 다시 게재했다. 이 글을 쓴 쉬옌(徐焰) 국방대학 교수 겸 인민해방군 소장은 중국군이 참전하기 이전 ‘조선전쟁’에 대해서는 ‘북침이냐 남침이냐’ 구분이 불필요하다며 내전으로 규정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 중국은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는 북한 주장대로 북침론을 따랐지만 옛 소련 기밀문서 해제 등으로 남침 증거들이 드러나자 슬그머니 ‘내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중국내에서도 남침설에 대한 공감대가 상당 부분 이뤄지고 있다. 신화통신 자매지인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는 지난 6월 “1950년 6월 25일 북한 군대가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해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고 남침설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5일 시 부주석 발언은 참전 노병들을 위로하고 항미원조전쟁 홀대에 반발하는 최근 군부와 좌파를 다독이기 위한 ‘국내용’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韓·美 “6·25는 北의 침략전쟁”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최근 6·25전쟁과 관련해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한국과 미국 정부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를 의식해 직접적인 발언을 자제해 왔던 한국 정부가 27일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신각수 제1차관이 직접 나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김성환 외교장관은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가진 내·외신정례브리핑에서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변함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6·25전쟁은 이미 국제적으로 논쟁이 끝난 문제이기 때문에 추가로 말씀 드릴 것은 없다고 본다.”고 분명히 말했다. 신각수 외교통상부 제1차관도 외교부 청사에서 개최한 6·25 60주년 기념세미나 환영사에서 “6·25전쟁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적화하려던 북한의 침략전쟁”이라고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했다. 한편 워싱턴을 방문중인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도 지난 26일(현지시간) 6·25 전쟁은 북한의 침략에 의해 발생한 전쟁이라는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샤프 사령관은 “한국전쟁은 북한의 침공에 의한 전쟁이었다.”면서 6·25전쟁은 전세계가 함께 북한의 침공을 막아낸 전쟁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서울 김상연기자 kmkim@seoul.co.kr
  • “난 수도원의 마당쇠… 기도가 삶”

    “난 수도원의 마당쇠… 기도가 삶”

    가을의 깊이란 것이 어떤 느낌일까. 지난 25일 오전 경기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에 위치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자의 모후 신학원’에 들어섰다. 건물 담장이 고색창연했다. 붉게 물든 넝쿨들이 그윽하고 심오한 느낌을 연출했다. 마당의 잔디는 시골 황구처럼 누런색으로 변해간다. 담장 넝쿨 사이로, 이팔종(70·토마스) 수사가 검은 수도복을 입고 천천히 걸어나온다. 웃는 모습이 해맑다. 세상과 멀고도 깊은 수도원에서 ‘정결’ ‘청빈’ ‘순명’이라는 세 가지 서원을 오롯하게 수행하며 살아온 내공의 표정이었다. 이 수사는 아마 늘 그렇게 지내왔으리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한국전쟁 직후 1953년 방유룡(1900~1986년·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국내 처음으로 설립된 남자수도회. 당시에는 경북 왜관의 성베네딕도수도회, 대전의 성프란치스코 수도회 등 외국계 수도회만 몇 곳 있었다. 때문에 한국에서 자생한 첫번째 남자수도회라는 점에서 오는 30일 큰 경사를 맞는다. 국내 설립 방인(傍人) 수도회 소속 수도자인 이팔종 수사가 서원 50년을 맞아 이날 오전 서울 성북동 복지사랑 피정의 집에서 ‘금경축’ 미사를 봉헌한다. “나는 이 수도회 신학원의 마당쇠일 뿐인데요(웃음).” 이 수사는 낯선 이방인을 그렇게 맞이했다. 수도회 앞마당에서 잠시 서서 마주했다. 뒤에는 김대건 신부의 석상이 서 있었다. 건물의 설계는 건축가 이일훈씨가 맡았고 1994년에 지었다. 생활의 편의성보다는 ‘수도자의 길’에 맞게 설계를 했다고 설명한다. 생활동 안 복도의 너비를 한 사람만 걸어다닐 수 있도록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누군가는 뒷걸음으로 걸어나와야 한다. 양보와 사랑의 수행을 익히게 하자는 것이다. 건축 얘기가 나오자 이 수사는 성당 짓는 목수 일을 떠올린다. 군대를 제대한 후 1964년 종신서원과 함께 받은 소임이 목공이다. 1965년 인천 고잔성당을 시작으로 덕적도성당(66년), 덕적도병원(67년), 금호동성당(68년), 이문동성당(69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청량리수녀원(70년)에 이어 서귀포 피정의 집(72~75년) 등 대패와 끌, 망치를 들고 다니면서 성당을 지었다. “어떻게 해서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까.” “제 고향이 경기도 일죽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그곳에서 어머니 따라 장로교회에 다녔지요. 그때만 해도 목사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가 동네에 이사온 천주교 신자 부인을 만나고 오시더니 ‘얘야, 천주교가 큰집이다’라고 하시더군요. 이후 어머니와 저는 천주교로 개종했습니다. 라틴어 미사에다 멋진 제의를 보고 감동 받아 신부가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왜 신부가 아닌 수사의 길을 택하셨는지요.” “6·25 때 우리 집안이 공산당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가족이 처형당하기도 하고 6촌형 둘은 월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이 자연스럽게 몰락했지요. 집안이 가난했고 또 사상적으로 몰리면서 중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 됐습니다. 게다가 옹기장사를 하던 큰형을 따라 일을 도우면서 신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큰형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아마 중학교 졸업장이 있었다면 신부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1957년 입회 당시 명동성당 내 사도회관(현 교구청) 옆 천막수도원에서 수도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서 양철을 덧댄 트렁크를 만들었고 주방 일을 맡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방유룡 신부가 “수도원은 성인이 되는 곳이다.”라고 격려해준 것이 큰 힘이 됐다. 그가 신학원에 들어온 지 2년. 늘 그래왔듯이 어디에서든지 세월이 지날수록 기도의 맛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수도자란 기도하는 사람이다.’는 가르침의 길을 걸으며 면형무아(麵形無我)로 나아간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저야 뭐 기도하는 일밖에 없죠. 혹시 여건이 된다면 말년에 수도원 내에서 늙은이끼리 기도 중심으로 관상부 생활을 하고 싶어요.” 수도자의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하느님만 찾아야 하고 ▲ 자기자신과 싸우는 사람이어야 하고 ▲수도자는 늘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세 가지를 강조한다. 그는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고 해서 ‘팔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절에 가끔 다닌다고 하자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훌륭하니 열심히 하세요.”라며 웃는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미군 떠나면 동두천시도 공동화 위기”

    경기도가 주한미군기지 이전으로 지역 공동화 위기에 처한 동두천시에 대해 범정부 차원의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26일 도는 동두천 보산동 주민센터에서 김문수 지사 주재로 ‘찾아가는 현장 실·국장회의’를 열고, 동두천시 지원 특별법 제정과 공동화 방치 대책 등을 정부에 건의했다. 동두천시 지역안정과 경제활성화 대책을 위한 대정부 건의문은 ▲범정부적 차원의 대책 마련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태스크포스팀 구성 ▲‘동두천지역지원특별법’ 제정 ▲동두천지역 공동화 방지 대책 확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오세창 시장은 특별법 제정과 관련, “국방부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동두천 시민의 자존심을 너무 건드렸다.”며 “오죽하면 미군부대 이전 부지를 공원으로 만들겠느냐. 이대로 떠난다면 도시가 공황상태가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 시장은 “국방부가 갖고 있는 미군부대 부지 매각권을 시에 넘겨야 한다.”며 “시가 개발해 부가가치를 올린 뒤 국방부에 예상매각 대금 7000억원을 주고, 나머지는 시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제안했다. 김 지사는 “데모하면 도와주고, 가만히 있으면 도와주지 않는 등 데모 많이 하는 순서대로 도와준다.”며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는 것인지 들릴 때까지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도가 대정부 압박 수위를 높이는 것은 정부가 미군에 대한 반발이 심한 평택시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제정, 지원하면서 피해가 더 많은 동두천시에 대한 특별법 제정에는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는 용산미군기지는 용산공원조성특별법까지 제정해 가며 공원 조성을 위해 국비 1조 5000억원을 지원했던 전례와 비교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시는 1951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 보병 24사단이 주둔한 이래 시 전체 면적의 42.5%(40.63㎢)를 미군에게 공여, 각종 개발이 묶이는 바람에 지역개발이 뒤떨어졌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시진핑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시진핑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올 들어 부쩍 접촉면과 이해도가 넓어진 북한과 중국이 중국 군의 한국전쟁 참전 60주년 기념일인 25일 ‘피로 맺어진’ 혈맹관계를 대대적으로 과시했다. 북한에서 열린 행사에는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 열병식에 이어 15일 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계자인 김정은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함께 참석했다. ●후진타오, 참전 노병들과 일일이 악수 중국도 이날 최근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에 선임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쉬차이허우(徐才厚)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군 최고위급 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한국전쟁의 중국명) 출국 작전 60주년 좌담회’를 열어 참전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군 통수권자인 후진타오 주석은 좌담회 시작 전 참전 노병 대표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당과 정부는 당신들의 공훈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며 위로한 뒤 인민대회당을 떠났다. 국무원과 중앙군사위를 대표해 연설한 시 부주석은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며 “중·조(중·북) 양국 인민과 군대가 단결함으로써 항미원조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중국 인민은 양국 인민과 군대가 흘린 피로써 맺어진 위대한 우정을 잊어본 적이 없으며 조선 정부와 인민의 관심 또한 잊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시 부주석은 “6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은 제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다.”고 참전의 당위성을 강조한 뒤 “영웅적인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 인민, 군대와 더불어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장비 등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60년 전의 전략적 용기는 존경받을 만하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우리는 60년 전 항미원조 전쟁 때 희생당한 10만여명의 인민지원군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면서 “두려움 없이 그런(참전) 전략적 결정을 내린 정부에 대해서도 경의를 보낸다.”고 밝혔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마오쩌둥 전 주석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의 활약상을 묘사한 34부작 드라마 ‘마오안잉’을 지난 20일부터 방영 중인 중국중앙방송(CCTV)은 이날 오후 뉴스채널을 통해 참전 60주년 관련 프로그램을 대거 송출하기도 했다. ●北-中, 대형 가극공연 등 잇따라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군중대회에는 김 위원장 부자와 함께 궈보슝(郭伯雄)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중국 측 대표단이 나란히 참석했다. 보고자로 나선 북한의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은 “조·중(북·중) 친선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불패의 친선”이라면서 “두 나라 당과 정부, 인민들의 의지와 염원에 따라 전통적인 조·중 친선은 영구불변할 것이며 대를 이어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궈 부주석도 “우리 사이의 친선은 중·조 두 나라 인민과 군대가 피로써 맺은 것이고, 오늘의 평화는 중·조 두 나라 인민과 군대의 거대한 희생으로 얻은 것”이라며 “전통적인 중·조 친선은 반드시 대대로 전할 것이고, 부단히 깊어질 것”이라고 화답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북한과 중국은 경축연회, 대형 가극공연, 각종 전시회 등을 잇달아 열어 중국 군의 참전 60주년을 기념하면서 혈맹관계를 과시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한국전 전사자, 새 생명으로 태어나소서”

    “한국전 전사자, 새 생명으로 태어나소서”

    ㈔국제평화기념사업회(공동이사장 김정훈 국회의원·박맹언 부경대학교 총장)는 유엔의 날을 맞아 24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시민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평화봉사·생태 체험’ 행사를 열고 ‘도은트 수로’에 금붕어 200여 마리를 방류했다. 도은트 수로는 묘역과 녹지 사이에 있는 폭 0.7m, 길이 110m 물길. 묘역에 안장된 한국전쟁 전사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린 호주 병사 도은트(DAUNT)의 성을 따 붙여진 수로다. 도은트는 17살 때 한국전쟁에 참가했다가 1951년 11월6일 전사했다. 부경대 외국인 학생들과 시민 500여 명으로 구성된 유엔평화봉사단은 방류행사를 통해 도은트 병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이역만리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 숨진 전사자들의 영혼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도록 기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육군 2군단 ‘쌍용 축제’

    육군 2군단 ‘쌍용 축제’

    육군 2군단(군단장 오정석)은 16~17일 강원도 춘천시 삼천동 야외 수변공원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쌍용 페스티벌’ 행사를 한다고 14일 밝혔다.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춘천시민과 함께하는 한마당 축제를 통한 민과 군이 화합을 도모하고자 마련됐다. 행사에는 군 의장대 시범과 고공강하 등이 펼쳐진다. 2군단 장병의 열병과 분열, 축하비행으로 본격 막이 오르는 쌍용 페스티벌은 춘천대첩 재현행사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된다. 한국전쟁 초기 국군이 거둔 첫 대승인 춘천대첩의 재현행사에는 540여명의 장병과 화포 6문, 전차 2대 등이 동원될 예정이다. 또 고(故) 심일 소령(당시 중위)과 육탄 5 용사가 적 전차를 맨주먹으로 막아내는 전투도 함께 재현한다. 전차와 자주포, 자주 발칸 등 군의 주요 장비를 동원해 시가행진도 벌인다. 전차와 헬기 등 전투 장비를 관람하고 탑승하는 기회도 제공하며, 전투식량 시식 및 서바이벌 사격 등 다양한 체험 행사도 마련한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내고장 인재 산실] 대전 대성고

    [내고장 인재 산실] 대전 대성고

    대성고는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피란 온 고 안기석 선생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1954년 대전 목동에 세웠다. 창립자는 안창호 선생과 가까운 친척으로 평북 대동군이 고향이다. 한자 교명은 안창호 선생이 북한 평양에 세운 학교와 같은 ‘大成’이었다. 안창호 선생의 교육이념을 계승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때 안창호 선생이 만든 흥사단 활동에 불만을 품은 당국의 압력으로 ‘大聖’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 이념에도 충실한 학교로 학생들에게 3박4일간 영성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오랜 역사와 올곧은 설립이념으로 출범했지만 줄곧 명문고로 자리를 지켜온 것은 아니다. 졸업생 중 유명 인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얻어 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다’라는 모토로 충북 음성 꽃동네를 설립한 오웅진 신부와 허태정 대전 유성구청장 등이 대성고 동문이다. ●지난 4월 자율형 사립고 지정 하지만 몇년 전부터 이 학교가 ‘뜨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자율형 사립고로 지정되기도 했다. 내년부터 더 우수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 학교 측의 줄기찬 노력과 학력신장이 바탕이 됐다. 안중권(58) 교장은 창립자의 아들이다. ‘아이스크림 교장 선생님’으로 불린다. 교장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넣어 두고 성적이 오른 학생들을 불러 나눠주기 때문이다.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휴지를 줍는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교장실은 항상 학생들에게 개방돼 있다. ●논술교사팀 운영 안 교장은 학력신장에도 발벗고 나섰다. 매일 아침 영어듣기 수업이 있고, 밤 11시까지 자율학습이 이뤄진다.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질문을 받고 가르쳐 주는 과정이 매일 반복된다. 언어, 수리, 외국어 영역은 외부 유명 강사를 초청하기도 한다. 논술이 특히 강하다. 논술교사팀까지 운영한다. 다른 학교 학생들은 보통 학원에 가지만 이 학교는 다르다. 송당헌 교감은 “논술수업은 매일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하는데 일부 재수생도 전문 학원으로 가지 않고 다시 모교로 돌아와 논술을 배울 정도”라고 자랑했다. 1학년 때 정규 수업으로 리더십도 가르친다. 색소폰과 유도를 가르칠 정도로 예체능 교육이 활발하다. 동아리가 40여개에 이른다. 지난해 서울대 8명, 연·고대 14명, 의학계열 8명 등 명문대 합격자를 꾸준히 배출하면서 각계에서 졸업생들이 실력을 뽐내고 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Seoul 요모조모-만원의 행복] 서울대 박물관·미술관·규장각

    [Seoul 요모조모-만원의 행복] 서울대 박물관·미술관·규장각

    미국 하버드대에는 설립자인 존 하버드의 동상 왼쪽 구두코를 학생이 만지면 하버드대에 입학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 자녀를 대동한 해외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사진도 찍고 꼭 만지는 관광 명소다. 관악구에 자리잡은 서울대에는 이런 유명한 동상은 없지만, 문화와 예술을 만끽할 만한 명소는 있다. ●대동여지도 등 28만점 소장 규장각과 서울대박물관, 서울대미술관이다. 자녀의 서울대 입학을 희망하는 학부모들이 방학 때 서울대를 방문하고도 이곳을 빼놓고 가기 십상이다. 모두 서울대 정문에서 5~15분 거리에 있다. 규장각은 조선시대 정조가 궐내에 설치한 왕립도서관에서 명칭을 가져온 것으로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의 서화·고명·유교·선보·보감 등을 관리하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대동여지도 등 28만 2000여점의 옛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를 늘 하고 있어 조선시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대한제국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규장각 옆으로 10분쯤 걸으면 서울대박물관이 나온다. 4개의 전시실과 200여석 규모의 강당을 갖췄다. 근대사진, 불교미술품 등 72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발해 유물과 서화류, 민속 유물은 국립박물관보다 뛰어난 게 있을 정도다.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예술 서울대 정문 왼쪽에 있는 서울대미술관(MoA)은 건물 감상만으로도 50%는 건진다.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설계했다. 가운데가 텅 빈 나선형 구조의 개방형 문화공간으로 서울대 미대 전·현직 교수들의 유화, 조각, 도자기 등 250여종의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11월28일까지 ‘한국전쟁의 초상’과 ‘지뷜레 베르게만 사진전’이 열린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82세 신영균 끝없는 영화사랑…명보극장·제주영화박물관 ‘사재 500억’ 기부

    원로배우 신영균(82)이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500억원 상당의 사재를 기부한다. 신영균은 4일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 초동 소재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국내 최대 영화박물관인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 공유재산으로 기증한다고 밝혔다. 두 부동산의 가치는 5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올해 초 아이티 난민을 돕기 위해 10만달러를 쾌척하는 등 평소 기부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신영균은 영화 및 문화예술계 발전과 인재 육성을 위한 사회 환원을 고민해 오다 최근 가족 회의를 통해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영균은 5일 오후 5시 명보극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산 기부 배경과 기부 재산 운영방안 등을 밝힐 계획이다. 회견에는 이덕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정인엽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 박종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배우 안성기 등이 동석할 예정이다. 정인엽 감독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영화 근대사를 이끌어 온 곳이 충무로이고, 그 충무로를 만든 대선배들 가운데 한 명이 신영균 회장”이라면서 “영화계 대선배로서 대단한 일을 결심했다. 한국 영화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치과의사 출신인 신영균은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빨간 마후라’(1964), 이만희 감독의 ‘물레방아’(1966) 등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세 차례나 받았고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대종상 공로상,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 등을 받았다.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SBS프로덕션 대표이사, 제주방송 명예회장 등을 맡았으며 15·16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한국전 해외참전용사 후원 STX그룹 장학금 5억원 기부

    한국전 해외참전용사 후원 STX그룹 장학금 5억원 기부

    STX그룹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해외참전용사 후손을 대상으로 한 장학사업을 후원한다. STX는 29일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이종철 STX그룹 부회장, 백선엽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쟁 해외참전용사 후손 후원 STX희망기금 전달식’을 갖고 한국전쟁기념재단에 지원금 5억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기부금은 재단이 해외참전용사 후손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진행하는 데 사용된다. 재단은 유엔군 자격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21개국 참전국 군인 후손들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은 참전용사 후손들 중에 우수하면서도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지원 대상을 점차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백 이사장은 “대한민국이 교육지원을 통해 은혜를 갚아나갈 것”이라면서 “이번 기금 전달은 평화와 공동체 건설을 후원하는 것”이라고 STX그룹에 감사를 표했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씨줄날줄]서울수복 60주년/노주석 논설위원

    한국전쟁(1950년 6월25일~1953년 7월27일) 기간 중 서울의 주인이 네 번 바뀌었다. 북진 통일을 한다고 큰소리쳤던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이 남침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고 피란길에 올랐다. 성공확률 5000분의1의 도박이었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해 9월28일 수복할 때까지 서울은 인민공화국 치하였다. 백두산까지 치고 올라갔던 연합군의 등등한 기세가 중공군에 의해 맥없이 꺾이면서 1951년 1월4일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치욕의 1·4 후퇴이다. 1951년 3월15일 재탈환 때까지 서울은 ‘붉은 완장’에 의해 재장악됐다. 석 달마다 주인이 바뀌는 세상에서 서울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한 손에는 태극기를, 또 한 손에는 인공기를 흔들며 낮과 밤이 다른 생활을 했을 것이다. 인민군이 들어오면 인민군 편이 돼야 했고, 국군이 점령하면 국군 편이 돼야 했다. 전쟁발발 전 150만명이 살던, 동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서울인구는 1·4 후퇴 후 20만명으로 줄었다. 서울사람들은 마치 폐허 속 유령의 도시에 사는 야누스 같았다. 전쟁통 서울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글이 있다. ‘역사 앞에서’는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수가 서울에서 몸소 겪은 생생한 전쟁관찰일기다. 일생 30여권의 한국전쟁 관련 소설을 쓴 김원일은 체험기 ‘서울에서 겪은 인공치하 석 달’을 통해 몸서리쳐지는 전쟁의 상흔을 절절히 토해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전쟁과 사회’는 한국전쟁을 사회학적 시각으로 보았다. 한국전쟁이 한국사람들에게 남긴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조명했다. 우익의 부역자 처단과 좌익의 인민재판이 번갈아 벌어진 배경을 분석했다. 학살에 대한 분류는 독창적이다. 제주 4·3사건처럼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과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한 처형적 성격의 우익포로 학살로 나눴다. 개인에 의해 자행된 보복성 학살이 가장 불행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수복 60주년 행사가 어제 도심에서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즐겨 부른다. 한국전쟁은 미국인뿐 아니라 당사자인 한국인에게도 잊혀 가고 있다. 서울 사람, 나아가 한국민에게 서울수복 60년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동춘 교수의 설명처럼 권력에 대한 기회주의적, 순응주의적 태도의 기원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란 왜곡된 사회통념 말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6·25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

    “6·25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

    지난 1981년 ‘한국 전쟁의 기원’을 출간, 당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미국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다시 6·25전쟁 저서를 냈다.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라는 제목을 단 288쪽의 책은 30년 남짓만에 6·25전쟁을 다시 다룬 저작으로, ‘한국전쟁의 기원’의 증보판 격이다. 이달 중순 출판됐다. 커밍스는 책 서두에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헌정한다’ 라고 써 김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누가 방아쇠를 먼저 당겼느냐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6·25전쟁을 1945년 이후 해방공간에서 형성된 한국 내부의 모순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했다. 때문에 논쟁의 중심이 됐고 1980년대 금서 목록에 올랐다. 커밍스의 시각은 주로 1980년까지 공개된 미국 측 자료에 의존했고, 1990년대 옛 소련의 6·25전쟁 당시 외교문서가 빛을 보면서 김일성의 전쟁 책임론을 입증하는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 자료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받았다. ‘한국전쟁’은 지금껏 제기된 비판들에 대한 커밍스의 답변이자 현재의 북한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정리한 책인 셈이다. 커밍스는 여전히 6·25전쟁을 ‘내전’으로 해석했다. 커밍스는 “지금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에 시작돼 1953년 7월에 끝났고, 미국인들이 주역이었다는, 불과 몇 마디로 요약된 이야기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저술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결코 미국의 적(북한)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면서 대다수 미국인들이 모르고, 또 아마 알기를 원치 않는 진실, 때때로 미국인의 자부심에 상처를 줄 만큼 충격적인 진실들을 밝히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책은 6·25전쟁의 전개과정과 미국인들의 의식, 냉전시대 미국의 세계 정책에 미친 영향 등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까지 분석했다. 커밍스는 결론에서 6·25전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순수하게 한국인끼리의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민족분단·외세개입으로 잉태된 긴장을 해소할 수도 있었을 것인 만큼 진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다.”라면서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전전(戰前) 상태가 그대로 복원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의 해외군사기지 구축을 구조화시키고, 미국을 세계의 경찰로 탈바꿈시킨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바로 한국전쟁”이라며 6·25가 미국의 향후 대외전략에 미친 영향도 지적했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22개국 사진작품 한자리에

    국내 최대 사진축제인 ‘2010 대구사진비엔날레’가 30일부터 새달 24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등 대구시내 일원에서 열린다. 27일 대구사진비엔날레조직위에 따르면 ‘우리를 부르는 풍경’을 주제로 한 이번 행사에는 22개국 245명의 사진작가들이 참여한다.전시는 ‘인간이 만든 풍경’ ‘사진과 비디오의 경계 및 시각적 확장’ ‘헬싱키 스쿨’ 등 3가지로 구성돼 인간과 자연 간 다양하고 복잡 미묘한 관계, 인류가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 등을 선보인다. 특히 올해는 아시아 작가 중심이었던 그간 행사와는 달리 유럽의 사진 대가를 비롯해 핀란드의 대표적인 현대 사진가 그룹인 헬싱키 스쿨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특별전으로 마련된 ‘아시아 스펙트럼’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8개국 23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현대 아시아 사진 예술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다른 특별전으로는 전쟁의 비극과 휴머니즘을 보여준 로버트 카파의 전시, 한국전쟁 당시의 모습과 동시대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조망하는 ‘평화를 말하다’도 마련된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사설] 탈북 국군포로 6개월 방치 말이 되나

    6개월 전 고향 땅에 묻히려고 병든 몸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여든네 살의 국군포로가 있다. 중국의 한국영사관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국귀환의 날을 손꼽아 기도하고 있다. 2008년에 이은 두 번째 탈북이었다. 국군포로 김모 이병은 24살의 꽃다운 나이로 강원도 인제 가리봉 전투에 투입됐다. 총상을 입고 전사처리됐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 60년 동안 한시도 귀환의 꿈을 접지 않았다. 북한 땅에 사는 가족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탈북하기 전 사망신고까지 했다. 비운의 국군포로가 참다 못해 최근 대한민국 국회와 국방장관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지난 세월의 역경과 귀환에 대한 간절한 기원이 담겨 있는 21장짜리 사연을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 편에 전하면서 국회에서 편지 전문을 낭독해 달라고 부탁했다. 국군포로 김씨가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적극적으로 공개키로 결정한 데에는 까닭이 있을 법하다. 6개월을 질질 끄는 한국 정부의 외교력 부재에 희망을 잃었고, 중국 측의 비협조와 북한 측의 집요한 강제북송 요청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난해 두만강을 필사적으로 헤엄쳐 탈출했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힌 지 6개월 만에 북한으로 북송된 여든한 살 국군포로 정모씨의 일이 생각났을 듯하다. 앞서 2007년 1월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한 국군포로 일가족 9명이 우리 영사관의 업무처리 미숙으로 북송된 사례가 새삼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정부의 소극적이고 안이한 외교력과 대중국 저자세 외교가 몇 명 남지 않은 국군포로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1994년 제1호 국군포로 조창호 예비역 중위를 시작으로 79명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이후 생존 추정 국군포로는 모두 560명이다. 모두 여든 살이 넘은 고령자이다. 중국은 일본과의 영토분쟁이 벌어지자 전방위 압박을 가한 끝에 자국 선장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클린턴·카터 전 대통령을 차례로 북한에 특사로 보내 북한법을 어긴 자국민을 귀환시켰다. 미군은 한국전쟁 때 숨진 미군의 유해를 찾으려고 지금도 한반도 전역을 수색 중이다. 제 발로 탈출한 국군포로 한 명 데려오지 못하는 우리 외교부는 뭐 하는 조직인지, 왜 필요한지 묻고 싶다.
  • 조인성, ‘수복 60주년 전야 군악제’ MC 발탁

    조인성, ‘수복 60주년 전야 군악제’ MC 발탁

    군 복무중인 공군 조인성이 제 47회 ‘대종상영화제’의 ‘수복 60주년 전야 군악제’ MC로 발탁됐다. 이에 모처럼 군복무 중인 조인성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군악제는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6.25 참전국 군악대를 초청, 한국전쟁을 통해 연대와 결속의 의미를 되새기는 화합과 교류의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대한민국 육해공군, 해병대 군악대는 물론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 8개국 해외 군악팀이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수복 60주년 전야 군악제’는 27일 오후 7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다. 사진 = 서울신문NTN DB 서울신문NTN 이효정 기자 hyojung@seoulntn.com ▶ 이진, 면접서 ‘연예인 남친’ 집중 추궁에 ‘급당황’▶ 최희진, 상반신 누드 논란 "연예인 데뷔 준비?"▶ 아이유, 우월한 댄스+노래…전교1등까지 ‘엄친딸 인증’▶ 김정근-이지애, 단아함 물씬 풍기는 웨딩사진 공개▶ 박칼린 눈물 속 남격합창단 종영…시청자도 눈물
  • [책꽂이]

    ●iWAR(손영동 지음, 황금부엉이 펴냄) 지난해 겪은 디도스 대란은 사이버 테러의 심각성과 철저한 보안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새삼 확인시켜 줬다. 책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사이버전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며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물론 기업과 개인이 준비해야 할 미래 사업의 방법, 인재 육성 방법 등을 제시한다. 가상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 광범위한 사이버 보안 이슈들을 풀어냈다. 1만 8000원. ●김구 전태일 박종철이 들려주는 현대사 이야기(함규진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역돌이’가 백범 할아버지, 태일이형, 종철이형과 가상 채팅과 이메일을 나누며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해방 전후, 분단과 전쟁 등 현대사까지 짚어 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내온 오욕의 세월, 아빠와 엄마가 지내온 격동의 과정들을 한국전쟁, 4·19, 5·18, 6월항쟁 등 주요 쟁점 중심으로 쉽고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다. 1만원. ●중국사유(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 1934년에 씌어진 책이다. 인간과 우주의 연계를 도모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사회와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 ‘중국사유’는 이성적 추론에 입각한 서구의 인식론적 비평체계와 다르다고 얘기한다. 서구에서 중국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그라네가 내놓았던 저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문화에 드러난 문자와 언어, 숫자, 사상의 주개념들을 포괄적이며 유기적으로 정리했다. 3만 2000원. ●청소년을 위한 사랑과 성의 역사(루츠 판 다이크 지음, 전은경 옮김, 비룡소 펴냄) 사랑과 성. 쉬쉬하던 옛 시절과 달라져 온갖 정보와 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세상이 됐건만 여전히 대를 이어 가는 호기심, 시인·소설가의 깊이 있는 성찰과 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폭력과 범죄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 또한 물론이다. 저자는 사랑과 성의 역사는 인간성의 역사라고 얘기하며 동서고금에 드러나 있는 사랑과 성의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책의 결론은? 솔직한 드러냄 이상은 없다. 1만 6000원.
  • [시론] 사할린 동포의 눈에서 눈물 멈추게 하라/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명예교수·역사학 박사

    [시론] 사할린 동포의 눈에서 눈물 멈추게 하라/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명예교수·역사학 박사

    연합군이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제1회 ‘승리의 날’ 행사가 지난 2일 러시아 사할린 주 남사할린 시에서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도 개최했다. 중국, 몽골, 그리고 한국의 학자와 러시아, 북한의 외교관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필자는 사할린센터 대회의장에서 ‘2차 대전 이후 사할린 주와 사할린 한인문제’를 발표했다. 사할린에는 한인계 2만 5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구분포다. 대부분 일제 말기에 일본의 총동원령으로 강제로 끌려가 탄광과 비행장 및 도로 개설에 동원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강제동원 당시 일본 국적자였다. 송환의무는 물론 법률적, 도덕적 책임이 일본 측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소련과의 귀환협정에서 자국민 39만 명만 철수시켰다. 사할린 한인은 도쿄 연합군사령부와 일본정부에 귀환을 진정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 호소에 따라 연합군사령부는 일본인과 같은 방법으로 한인도 철수시킬 계획을 세우고 남한의 미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에게 사할린 한인의 수용 여부를 문의하였다. 하지는 남한에 중국 등지로부터 귀환자가 넘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난색을 보였다. 그 후 1948년에 한국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소련정부에서 출국을 금지했고, 한국전쟁과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발이 묶였다. 1972년부터 공산권에 대한 방송이 시작되자 사할린 한인은 10여년간 홍콩 KBS 사서함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공산권에서 온 1만 6000통의 편지 대부분이 사할린 한인들의 편지였다고 한다. 이들은 모진 고생 끝에 생활기반은 닦았으나 정치적 입지가 좁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실정이다. 사회단체는 분열돼 있었고, 한인 출신 시의원 한 명 없었다. 그래도 한글신문을 주 1회 발행하고 한인 TV도 주 2회 방영하면서, 지난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에는 2000여명의 한인계가 일본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본은 한인을 귀환시켜야 했던 도의적·법률적 책임을 회피하고 교활하게 인도적인 지원이란 말로 2000년을 전후해 한·일 적십자사 합의로 일본이 자금을 지원하고 한국이 대지와 아파트를 제공하면서, 1945년 8월15일 이전 출생한 사할린 1세대와 함께 강제 징용 당한 분들을 한국으로 귀환시켰다. 3000여명이 귀국했다. 그러나 이들의 귀국으로 사할린 한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사할린에 자녀와 함께 남아 있는 강제 징용 당한 분들과 사할린 1세대에 대해 일본정부는 한국에 귀국한 분과 같은 동등한 보상을 해야 한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일본 군경이 남부 사할린의 소련국경과 인접한 두 마을에서 한인 어린 아이와 여인을 포함에 45명의 무고한 한인들을 무참히 몰살시킨 사건은 규탄을 받아 마땅하다. 일본은 억울하게 학살 당한 분들은 물론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분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 특히 강제로 시행한 우편예금을 비롯한 광산 노동자의 체불노임도 바로 지급해야 할 것이다. 그 돈은 지금 일본 우정성과 노동을 시킨 해당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로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에서 재판 중이다. 이달 말에 판결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일본 변호사 말로는 비관적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G20회의가 열린다. 정부는 동족의 눈에서 더는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시대에 노예처럼 끌려갔다가 버려진 것도 한스러운데 65년간 받지 못하는 예금과 탄광 노동자들의 체불노임이 지급되도록 정부차원에서 일본과 협의해야 한다. 얼마 전 미국은 한 명의 국민을 구출하려고 카터 전 대통령을 북한에 보냈다. 사할린 한인이 외롭게 일본법정에 서서 투쟁하는 일을 조국이 방관해선 안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할린 한인은 러시아인이므로 러시아와의 외교적인 협력을 통해 공동으로 일본정부를 압박해야 할 것이다.
  •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 이병주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 이병주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대하소설 ‘지리산’으로 잘 알려진 선 굵은 소설가 이병주(1921~1992)가 평소 즐겨 내뱉곤 했던 말이다. 그의 호방한 문체 속에 감춰진 대표적 아포리즘이다. 고향인 경남 하동 섬진강가에 세워진 문학비에 새겨졌음은 물론이다. ‘알렉산드리아’,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 등 우리 민족의 굴곡진 역사와 그 골짜기 어느 자락에서 신음해온 사람들의 모습을 다뤘던 대가의 통찰과 혜안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학병으로 징집됐고, 한국전쟁의 혼돈을 겪은 뒤 1956년부터 부산의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4·19혁명 뒤에는 경남교원노조활동을 했고, 5·16 쿠데타에 대한 비판을 담은 필화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병주는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러한 극적인 체험은 마흔 넷의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한 뒤 써내는 작품마다 핍진한 서사를 풀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병주는 실제 문단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산(多産), 다작(多作)이었다. 등단 이후 27년 동안 한 달 평균 원고지 1000장 분량을 집필, 8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니 초인적이라는 평가가 늘 뒤따른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에세이, 산문 등은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것들이 허다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김종회가 그의 18주기를 맞아 최근 엮어낸 에세이집 ‘문학을 위한 변명’(바이북스 펴냄)에 시선이 가는 이유다. ‘문학’ 은 이병주가 품고 있던 문학 정신의 근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부는 자전적 에세이다. 문학과 역사, 철학에 대한 이병주의 고뇌와 즐거움을 함께 보여준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은 그의 독서 편력이 대단히 광범위하면서도 균형잡힌 체계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한다. 2부 ‘이병주 문학론’에 담긴 ‘문학의 고갈’을 보면 일본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던진 ‘문학의 종언’이라는 화두를 붙든 채 여전히 논란 중에 있는 요즘 한국 문단의 상황을 일찌감치 갈파 예언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는 ‘이 각박한 정신의 풍토는 문학의 고갈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서 ‘정치적 지식과 경제적 지식, 법률적 지식의 인간화를 위해 괴테, 도스토옙스키, 김동리, 안수길의 문학이 좀 더 깊고 넓게 침투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학에 인구를 흡수하지 못한 것은 문학자의 정열과 기능이 부족한 탓’이라고 일갈하며 ‘문학자가 정신 지도의 주류에 서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문단 내부의 반성을 촉구했다. 에세이집과 함께 그의 소설집 ‘변명’(바이북스 펴냄)도 나왔다. 이병주의 문학적 뿌리와 삶의 곡진한 체험 내역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중·단편 소설 3편을 모아놓았다. 세 편 모두 한결같이 분단이 낳은 비극, 또는 일제에 학병으로 끌려간 내용 등을 담고 있다. ●16~18일 하동서 ‘이병주 국제문학제’ 열려 때마침 고인의 고향인 경남 하동에서는 지난 16일부터 사흘간 ‘2010 이병주 하동 국제문학제’가 열렸다. 이병주 추모식과 함께 소설가 조정래의 ‘세계 문학 속의 민족 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한 국제문학 심포지엄 등이 진행됐다. 3회째를 맞은 이병주 국제문학상은 일본 작가 가라 주로(60)가 차지했다. 메이지대학 출신인 가라는 일본 문단에서도 아쿠타가와상, 기시다 희곡상 등을 받았다. 이병주가 떠난 지도 벌써 18년이 됐다. 1960~1970년대 한국 문단의 활화산과 같았던 이병주는 지금 역사가 됐을까, 아니면 신화가 됐을까. ‘문단 최후의 거인’, ‘한국의 발자크’ 등으로 평가 받는 이병주를 내리쬐고 있는 것은 태양과 달빛 모두다. 굳이 표현하자면 ‘신화가 된 역사’쯤 될까.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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